예수를 믿고 변한 것이 무엇인가?




변하여 새사람 되라(사무엘상 10:6-8)


얼마전 새벽에 기도하던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고 변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기 전과 후에 변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뀌지 않는 삶이 과연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야채(식물)인간

아들이 사로고 뇌를 다쳐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문병 온 어떤 사람이 얼굴 하나 가득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쩌다 아드님이 야채 인간이 되었어요?”라고 어렵게 물어보더랍니다.
너무 어려우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하던 말도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날은 더워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눈꽃빙수처럼 시원한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사보다 높은 자리 봉사

대학에 가서 4년동안 열심히 공부하면 학사가 되고, 대학원에가서 2-3년 공부하면 석사가 되고 그 위에 연구를 더 하면 박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끝이 아니랍니다.
박사 위에 더 공부를 해야 밥사가 된답니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람이 박사보다 높은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밥사보다 높은게 감사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께 받은 복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박사, 밥사보다 높은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감사보다 높은 것은 봉사랍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내 놓고 헌신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랍니다.
밥도 사고, 감사도 하고, 봉사도하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구한 기브아의 사울

기브아땅에서 농사하던 사울이란 사람이 일을 마치고 소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암몬사람 나하스가 이웃 마을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 눈을 죄다 빼가겠다는 것입니다(11:2).
항복하고 섬기겠다는데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을 모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끌고가던 소 한 겨리를 때려 잡았습니다.
갈기갈기 찢어 각을 떴습니다.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사람들 손에 들려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같이 하리라” (11:7)

이 소리를 듣고 온 이스라엘에서 330,000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사울은 이들과 함께 일어나 암몬 진영으로 들어가 모두 쳐부수니 모두 도망가고 흩어져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다(11:11)”고 했습니다. 젊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암몬으로부터 지켜냈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야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왕국시대를 열면서 그는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고 했습니다.

왕이 된 사울

사울은 키가 크고 준수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기르던 나귀가 없어졌습니다.
그 나귀를 찾으러 친구와 함께 나섰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를 못해 시간만 보냈습니다.
급기야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을 걱정할 아버지 생각에 그냥 돌아가려 하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전하던 사무엘은 사울을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나귀를 찾는 시골 젊은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지도자가 되라는 축복기로를 해 주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10:6)”는 것입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와 축복이 나귀 찾던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1)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 12족속 가운데 가장 작은 베냐민 족속입니다. 베냐민 족속 가운데서도 작은 집안 기스의 아들(9:21)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그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왕으로 여겨 청한 자 중 가장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9:22).

하나님은 나귀 찾아 산을 헤메던 사울을 불러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꾼으로, 쓰셔야 할 청지기로 부르셨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고기 잡던 베드로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세우신 온 세계의 셀 수 없는 교회마다 사람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듭나 변하여 새사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가는 길에 38년 동안 앉아있어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하였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식물인간이 채소인간 되는 것은 변하는 것 아닙니다. 식물인간이든, 채소인간이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그 기쁨과 즐거움을 소리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2) 종교개혁 500주년

 

1,500년 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주님께로 돌아가자,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개신교회는 이제 500년이 되었습니다. 개혁 된지 500년 된 지금 교회의 모습은 과연 온전한가?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소리 없는 종교개혁, 교회개혁, 신앙생활개혁을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고 했습니다. 나라를 바꾸는 것은 흙을 퍼 나르는 것 아닙니다. 이땅 저땅을 바꾸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남쪽을 북쪽 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도 내가 주님 앞에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앞으로 3달동안 바꿔봅시다. 거듭납시다. 새로워집시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놓고 모두 다 바꿔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됩시다.

 

♥ 교회 명칭을 바꿉시다.

이름은 석자지만 그 석자 이름 안에 그 사람의 모습과 인격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거듭나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교회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기도하면서 좋은 이름을 지어보시기 바랍니다.

 

♥ 교회 조직을 바꿉시다.

500년 되어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일 수 없이 녹슨 조직, 단단하게 굳어져 굽힐수도 늘릴 수도 없는 조직을 바꿉시다. 각 기관도 정비하고, 구역도 정비하고, 각 부서도 정비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는 교회, 주님위해 마음껏 일하는 교회로 변하여 새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자신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조직을 모두 떨쳐버리고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교회 예배를 바꿉시다.

주님께서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형제가 마음 편하게 하나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면 예배를 중단하고라도 가서 화해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예배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하여 손을 펴고, 멀리 사마리아를 향하여 주의 사랑을 전하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시간 맞춰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여 받은 은혜 나누는 것조차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것이 주일 성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예배를 회복하는 변하여 새사람 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짧게는 1달, 길게보면 4달 혹은 5년, 더 길게보면 우리 교회의 역사가 모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기회, 기왕에 넘어진 것 거저 일어나지 말고 뭔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게 합시다. 암몬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에 위기가 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암몬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통일 왕국시대를 열어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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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사무엘상 10:6∼19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을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도록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신 즉 성령님이 임하는 일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지도자에게 때와 필요를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을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새사람이란 새옷을 입었거나 몸이 건강해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삼상 10:9에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새사람이 웃사람입니다.
 저는 5·16 군사 쿠테타 후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서 훈련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광주 어느 부락에 늙으신 부모님께 불효하는 불량청년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돕지도 않고, 술먹을 돈만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골치아픈 사람이라고 외면합니다.
 이 청년이 어찌어찌하여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게 됩니다. 농군학교 가서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말씀에 첫시간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감화력이 대단했습니다.
 15년동안 훈련 중 술담배는 물론 끊고 변화되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다음날 새벽부터 새벽예배에 갑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가 새벽종을 치고 호야를 닦아 예배당에 불을 환하게 켜놓습니다. 품앗이를 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와 온 부락에서 모두 기뻐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말씀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네가 가나안 농군학교 다녀온 후 새사람이 되어 내가 너무 기쁘다. 그래서 너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니 무엇을 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계시는데, 제가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만두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재차 묻자 아들은 “정 그러시면 제가 다녀온 농군학교에 다녀 오시죠”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만 아들의 요청에 어찌어찌하여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역시 김용기 장로님의 말씀에 첫시간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졸업하는 날 아들이 찾아갔습니다. 졸업식장에 앉아계신 아버지와 목례인사를 했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에서와 야곱처럼 달려가 아버지와 아들은 목을 껴안고 한참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젊은 사람들과 함께 훈련받으시느라 고생많으셨죠.”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아버지라고 했느냐?” “예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네가 내 아버지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농군학교에 와서 배우고 보니 낳았다고 아버지가 아니라 먼저 변한 사람이 아버지더라.”
 먼저 변한 사람이 아버지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어른이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스승이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 10:31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이, 지위, 계급, 재물 등으로 웃사람이 되지만, 성경적으로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웃사람입니다.
 여우는 흰머리가 나도 착해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도 흰머리가 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라 부르면서 순종하는데, 가정에서는 교역자로 인정받기 힘들었습니다. 신학공부를 10여년 하고, 기도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성자까지는 생각할 수도 없으나,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면 하고 그때부터 목회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전을 건축하려던 계획을 미루고 첫째 내 자신의 목회, 둘째 가정목회, 세번째 교회목회로 바꾸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던중에 성경에 제시된 사랑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랑의 은사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이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결정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그때 목회방향을 바꾼 것이라 생각됩니다.
 웃사람은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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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다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한 것처럼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이 사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도 이뤄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많은 것이 변화될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변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한 번 듣고 변화됐습니다.
여기뿐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 에티오피아 내시 간다게, 이 사람 어떻습니까? 빌립집사의 말을 듣고 한 번에 변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인 수가성 사람, 한 번 듣고 변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만나도 아주 명확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해야 합니다.
“변하여 새사람 되는 기쁨”
이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 만나고 변할 수 있습니까?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핑계 대지 말아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너무 가난해, 너무 가난해서 돈 벌고 난 다음에 예수 믿어도 늦지 않아.
나는 지금 바빠, 이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 믿어도 늦지 않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회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잡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왔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바디매오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거지입니다.
거지가 수지맞는 날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날입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구걸이 목적이었다면 이때가 가장 최상의 기회입니다.

예수님 다음번에 만나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돈을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로 생각했다면 여전히 그는 맹인이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이 날 부르시는 타이밍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날 때는 내 인생의 중요한 일과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이 잘되거나, 예수님 만나러 갈 때 괜찮은 형제나, 자매를 만납니다.
꼭 그때마다 뭔가 잘됩니다.
보통 때는 이런 일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오빠 커피 한 잔 안 사줄래?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음성은 사탄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할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지금입니다.
주님이 날 부르시는 타이밍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살 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귀중한 일이 있을 때 나는 핑계 대지 않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평생 예배는 삶의 우선순위를 두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영적 유익을 누립니다.
그런데 예배도 많고, 새벽부터 예배하고, 이 교회는 목사가 말씀도 많이 전하네, 그래서 여러 가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꼭 보면 안 나왔을 때 교회가 부흥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예배를 사모하고 핑계 대지 않고 나아갈 때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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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0:1~13

하나님의 메시지

 

 

오늘은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서 1장부터 9장까지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세 가지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 한나의 흉년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2) 언약궤의 빼앗김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3) 사울의 잃어버림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들이었습니까?

한나의 흉년을 통해서는 ‘사무엘’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언약궤를 통해서는 ‘심판’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사울의 이야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흉년의 때, 빼앗긴 고통, 잃어버린 절망처럼 고난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흉년도 고통도 절망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것일까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메시지는 우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이끌어 주tl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건과 때를 일으키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우리가 가야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떤 메시지를 받으셨습니까?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 가려고 하시는지를 만나보셨습니까?

신앙의 초보일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을 가집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할수록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10장 전체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첫째가 기름부음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암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셨고, 사무엘에게로 이끄셔서 결국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비뽑기입니다. 모든 백성들 앞에서 지파 중에서, 가문 중에서, 남자 중에서 제비를 뽑게 하셨고 결국 사울이 뽑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기름부음’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제비뽑기’는 ‘확실한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사울은 세우시면서 사울에게 ‘섭리’와 ‘증거’의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너무나도 분명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세운 왕이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사울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세워진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항상 기억해야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사울은 하나님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울은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암나귀를 찾으리라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2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가장 먼저 주시는 말씀은 잃어버린 암나귀에 대한 것입니다. 암나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잃어버린 암나귀에 대해서 다시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요? 암나귀는 그냥 암나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통해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이끌었던 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일으키셨던 어떤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그 일 속에서 일으키셨던 싸인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주셨던 싸인을 기억합니다. 제가 34살이 되어 교회 개척을 하면서 저희 부부는 사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개척하자고 제안을 받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확실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커질 때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무지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무지개를 본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아내는 안 입는 청바지로 가방을 만들고 그 가방에 무지개를 수놓아서 그때부터 들고 다녔습니다. 개척을 하고서 시간이 지나서 교인들이 아내가 초라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서 물었습니다. ‘사모님, 가방하나 사드려요? 왜 맨날 그 가방만 들고 다니세요?’ 사람들이 보기에 초라한 것이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싸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서야 하나님께서 무지개 싸인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개척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린 나이에 교회 개척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들의 개척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엑 무지개 싸인을 주셨던 것입니다.  >

 

저는 사무엘의 이야기 속에 있는 ‘암나귀’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에게는 암나귀 사건이 그냥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 꼭 기억해야 하고 붙들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에 분명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사울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암나귀 사건을 통해서 각인된 것입니다. 절대로 그 암나귀는 그냥 잊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사울에게 주시기 위해 다시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암나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붙들고 가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절 말씀에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라’는 말씀을 통해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라헬의 묘실은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념비적 장소입니다. 창 35장을 보면 야곱이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산고로 죽습니다. 그곳이 바로 라헬의 묘실이고 베냐민 지파가 태어나고 나중에 차지하게 된 땅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요한 곳에서 사울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을 만나고 암나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암나귀를 찾으리라’는 말씀은 사울에게 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을 수 없는 2020년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모든 것이 멈추어진 시간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도한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떡 두 덩이를 그 손에서 받으리라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 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3~4절)

 

  오늘 두 번째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 하나가 해결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왜 다윗만 사랑하시고 사울은 그렇게 미워하셨나요?’라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까지 죽인 다윗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편애하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오해가 다 풀렸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울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볼 상수리 나무는 베냐민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나무라고 합니다. 벧엘로 가는 길에 있는 유명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이들이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을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물은 왕께 드리는 예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마치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님께 드린 예물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런 예물을 가진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이 떡 두덩이를 사울에게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 중에서 사울에게 떼어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울의 느낌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이 받았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좋기만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가 받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제가 받을 것이 아닌 데 큰 사랑을 받으면서 저도 사울처럼 느낍니다. 그 때마다 묵직한 감동이 찾아옵니다. 성도들이 준 것이지만 성도들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

 

 사울이 떡 두 덩이를 받는다는 말씀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아닐까요? 사울만 떡 두 덩이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부족한 자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사울의 손에 떡 두 덩이를 주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네가 부족하지만 내가 네 손을 붙들고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은혜에만 능력이 있습니다. 은헤는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사울이 받은 떡 두 덩이의 은혜가 그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사울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떡 두 덩이를 손에 들고서, 하나님께 받은 그 귀한 것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3.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6절)

 

  암나귀를 찾고 떡 두덩이를 받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신을 입고 예언을 하며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는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귀어야 합니까?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귀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사울은 암나귀 염려도 내려놓게 되었고, 떠 두 덩이로 영적 자존감도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도 받고 체험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변한 새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변한 새 사람입니까?

 

 ‘여호와의 신을 입고 예언을 하며 변한 새 사람’입니다. 결국 ‘변한 새 사람’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은혜보다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유지시키고, 체험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 누가복음 24장 48~49절을 묵상하면서 받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의 삶을 당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신 후에 증인의 삶을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제자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있어도, 체험이 있어도, 성령의 동행하심이 없으면 제자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새 사람은 변화된 사람, 즉 ‘이쉬 아헤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 부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중요한 특징이 있는 데 그것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과의 동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짜로 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쉬 아헤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주위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사귄 사람들, 만난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잘못되었습니다. 사울 주위의 사람들을 묘사한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사울 주위에는 귀족들 장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울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사울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함께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함께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나누어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과 나누어 보십시오. 더 큰 확신과 깊이가 더욱 크게 일어납니다.

 

  < 불 잘 붙은 장작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를 꺼내놓아 보십시오. 금방 식어버립니다. 연기만 피우다가 꺼져버립니다. 그런데 불이 다 꺼져가는 숯불에 장작 하나를 놓아보십시오. 금방 새로운 불길이 치솟습니다. >

 

 하나님께서 왜 사울에게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를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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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삼상 10: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삼상 10:14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사막 지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사는 곳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설거지를 할 때마다 설거지한 물을 뒤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리셨다고 합니다. 늘 같은 장소에 물을 주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아와 떨어져서 어느 날 갑자기 자라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입니다.

여러분! 한 순간에 인생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 할지라도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水滴穿石(수적천석)’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5분만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 후, 10년 후, 15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여 하나님의 허락으로 왕을 세우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중요한 과정이 세 가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것(1절), 둘째는 사울이 제비뽑기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왕으로 뽑힌 것(21절), 셋째는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지지하고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11:15).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은 이 세 과정 중에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택하신 증거로 보여 주신 세 가지 징조, 그리고 사울과 숙부(삼촌)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름 부음과 세 가지 징표를 받은 사울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입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실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실행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웠다는 세 가지 징조를 예고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징조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울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들이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다시 찾았으며 사울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걱정한다고 말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울은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세 명의 순례자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은 각각 염소 새끼 셋, 떡 세 덩이,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고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이 큰 의미가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일은 사무엘과 사울 두 사람 사이에 은밀히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의 왕위 등극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동행한 사환을 앞서 보내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으며(9:27), 사울 역시 사무엘에게 들은 이야기와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숙부에게 비밀로 했습니다(16절).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 왕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이스라엘 왕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징조가 이루어진 장소가 어디입니까?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첫 번째 징조가 이루어진 장소는 라헬의 묘실 곁입니다.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입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베들레헴 길에서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난산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후에 야곱이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을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합니까? “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았다. 아버지께서 집 나간 아들을 더 걱정하고 계신다.” 자기가 집을 나온 목적이 해결되었다는 소식과 아버지가 아들을 더 걱정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한 가지 징조만 가지고는 확신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확실한 징조 또 한 가지를 준비하셨습니다.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두 번째 징조도 구체적입니다. 장소가 어디입니까? 다볼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또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마지막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보여 주신 징조들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두리뭉실하게 징조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말한 두 가지 징조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세 가지 징조를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져 갑니다. 사울을 왕으로 택하신 이도, 왕으로 세워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을 이뤄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뜻을 이뤄가고자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저하며 미심쩍어 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확신을 주고 격려하십니다. 바로 오늘도 하나님은 그런 그분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다양한 방법으로 믿음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성취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방법으로 확신을 주시며 격려해 주십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며 격려해 주실 줄 믿습니다.

새 사람이 된 사울

오늘 본문을 보면 세 가지 징조 가운데 특별히 세 번째 징조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에게 생긴 변화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자 사울은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하였습니다. 사울의 변화가 너무나도 극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사람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사울의 모습은 전에 알던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내면을 변화시켜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사울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기에서 ‘변하여’라는 말은 ‘하파크’라고 하는데 ‘돌다’(turn), ‘뒤집어엎다’, ‘바꾸다’는 뜻입니다. 하파크를 ‘변하여’라고 번역한 것은 “변화” 또는 “바뀜”을 의미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울이 예언을 하며 선지자 무리와 함께 한 것은, 그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면서 그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사무엘이나 선지자 무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사울의 공식적인 첫 모습은 ‘열국과 같은 왕’이 아니라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 같은 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의 변화에 대한 의혹과 놀라움을 표현한 이 말은 사울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열국의 경우와 같이 기름 부음이라는 외적 의식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일꾼을 피택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꾼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왕은 새 마음과 새 영으로 충만한 선지자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세워지는 일꾼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요건은 ‘변화된 새 사람’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위로부터 덧입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묵상하고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순종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영,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왕 되심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새로움’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영으로 임하시고 신적인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신다면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니,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지혜롭게 침묵하는 사울

사울의 숙부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물었고, 사울은 자기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사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볼 때 그의 침묵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초대받은 이들과 사울의 사환에게 사울의 기름 부음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이 일을 친척에게도 비밀로 해야 했기에 사울은 지혜롭고 겸손하게 침묵을 유지한 것입니다.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루어지기까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더디 이뤄진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조급함이 계속되면 그 조급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이뤄집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권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이 왕권을 선포해 주시기까지 참고 잠잠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앞서 가면 일을 엉망으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겠다는 겸손의 표현이며, 모든 일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하나님보다 한 발 뒤에서 하나님을 따라 가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살다 보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을 진행해 조속히 해결하고 싶은 조급함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조급함은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완성하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인내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겸손과 순종을 확인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변화된 새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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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했으면 변하여 새사람이 되라! 다듬어져라!

회개 백날 하면 뭐 할 것인가?
밥먹듯 회개하고 금식하고 변하지 않는데 뭐하겠는가?
변해야 된다. 
변하지 않는 자는 세상 사람이다. 
말씀을 믿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 
지옥을 믿으면 죄를 끊게 되어 있다.

세례를 받고서도 세상구습을 끊지 못하고 사는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교회다닌다고 새사람되는게 아니라 성령의 영감받고 순종해야 새사람이 된다.
예수믿었으면 새사람이 되어야 되고 많은 사람에게 칭찬들어야 된다.

주님은 죄를 싫어하신다. 
죄를 막 지을 때 성령께서 마음을 아프게 하신다. 
그때 회개하고 죄를 끊어야만 거듭나는 것이다.

세상 것을 탐하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자다. 
그런 자는 주님의 속을 썩이는 자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속을 썩이는 자를 붙이셔서 연단시키는 것이다.

주님은 다듬어지지 않는 자는 쓰지 않는다(바닷가의 조약돌)

마태복음 3:8-9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마가복음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사무엘하 4:7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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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 성경적 사고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비뀌면 운명이 바뀐다.
- 철학자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년 9월 7일 ~ 1784년 12월 3일)
영국의 시인· 평론가이다.
후에 문학상 업적으로 박사 학위가 추증되어 ‘존슨 박사’라 불렀으며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10권의 《영국시인전》은 만년의 대사업으로 특히 유명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 또는 작품 선정에서 그를 최고의 저자로 선정했다.
존슨은 학자· 문학자·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Talker Johnson’이라고도 불릴 만큼 담화의 명인이기도 하다.

사무엘 존슨의 열 가지 명언

1. 자신감은 큰일을 해내기 위한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2. 여행에서 지식을 얻어 돌아오고 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 한다.

3. 지식이 없는 성실은 허약하고 쓸모없다. 성실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4. 사람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들이 일거리처럼 읽은 책은 대부분이 몸에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5. 노력 없이 쓰인 글은 대게 감흥 없이 읽힌다.

6.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

7. 작은 일에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은 피하라.

8.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게 소비하라.

9.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은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넓은 범위를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미래의 이익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면 현재 모처럼 손아귀에 있는 기회는 고사하고 손에 들어오는 이익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인생은 그렇지 않아도 짧은데 시간은 낭비한다면 더욱더 짧아진다.

10.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착하게 살면 그리스도인다워진다.”
“독서를 많이 하고 이것저것 배우면 똑똑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면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믿고 있는 대표적인 신념들이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변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답이 없고 변화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지 답답해하지만, 사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자신의 생각에 있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삶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전도와 선교, 헌신 등에 대해서는 수없이 강조해 왔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 아무 생각 없는 ‘무개념’, ‘무분별’ 교인을 양산해낸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우리는 ‘개독교’라는 비판과 함께 ‘안티기독교 현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적 사고방식이란 과연 무엇인지 파헤친다.

‘노답청춘’을 위한 성경적 사고방식 입문서다.
성경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변화를 위한 결단과 훈련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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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말씀을 읽고 보아도 왜 우리 삶에는 변화가 없을까?
성경대로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오는 행동과 문제 해결방식은 그 사람의 평상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일본의 어느 경건하다고 소문났던 여인의 이야기
입을 열면 언제나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가까왔을 무렵 자기 집에서 불이 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이구 맙소사 왜 하필이면 내 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바꿔라”
<성경대로 생각하라>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의 방식이 완전히 바뀔 때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거룩한 생각으로 전환될 때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랄프 카이퍼는 한쪽 눈에만 약간의 시력이 남은 선천성 시각장애인으로, 그 자신이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경험한 성경적 사고방식의 증인이다.

시각 장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삶에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이 이끄실 거라 믿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관점대로 삶을 바라본 그의 생활방식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베드로의 넘치는 자신감의 비밀은 무엇이었나?

바울, 예레미야, 욥, 가나안 여인, 모세, 베드로, 솔로몬 등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떠한 사고방식으로 각각의 상황을 해석하고 결정했는지 표본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현실을 뛰어넘는 진짜 긍정의 힘’의 주인공으로 대표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의 넘치는 자신감 속엔 ‘이유 있는 긍정’이 숨어 있다.

“바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헛된 희망이나 어리석은 교만, 소망 없는 자의 두려움 따위가 없다.
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있다.
그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실재를 붙잡음으로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기술했다.

바울은 이러한 긍정의 힘으로 개인적 제약을 이길 힘,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은혜,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분노한 예레미야를 바꾼 건 바로 ‘말씀’

또 한 명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상처를 평안으로 바꾸는 관점의 변화’를 이룬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며 깊은 상처를 받았다. 화가 나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변한 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없이 예레미야를 분노케 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원수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비통한 심정이었다.

예레미야의 마음을 ‘비통’에서 ‘기쁨’으로 바꾼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라고 말한다.

그가 ‘먹은’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 말씀이 그의 생각과 관점을 통째로 바꾼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먹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단순히 눈으로 글씨만 읽는가? 아니면 말씀을 충분히 알고 이해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말씀을 ‘먹는다’는 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먹었을 때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연구하라”

저자가 말하는 성경적 사고의 시작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을 끝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성경을 읽어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리 주님은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 행하여 보라. 주님 품이 집처럼 편안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성경적인 생각을 실천하라’는 제목으로
△장애물 앞에서 내 생각 항복시키기
△예수님의 세심한 사고방식 배우기
△일곱 가지 그리스도의 마음 품기
△성경적인 생각을 삶에 적용하기 등이 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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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 성경적 성품, 성경적 인격”

칼빈은 정말 능력있는 신학자입니다. 그의 모든 사고와 생각은 언제나 성경과 함께 갑니다. 칼빈의 중요하다 싶은 모든 말들은 전부 성경 구절들로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인용되거나, 성경 구절들이 괄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학은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 못하는 신학자들의 말은 그 자신의 사색입니다. 신학 이론은 언제나 성경의 강물에 젖어서 나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신학자의 이론이 그 자신과 독자들의 신앙과 영혼에 해악을 미칩니다.

정독하다가 잠시 멈추어둔 서철원 박사님의 저술 「교의신학전집」의 특징도 중요한 모든 부분마다 관련 성구들이 풍성하게 괄호안에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서 박사님의 모든 신학 사고가 성경의 물줄기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물줄기 근처에 단 일초도 가보지 못하고 탄생한 이론이다 싶은 것 하나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받아야 할 형벌)를 해결하시었고, 명확한 성경적 근거도 없는 아담이 못 지킨 율법을 예수께서 준수하시어 하나님 백성의 생존 권리(의)를 얻어 우리에게 주었다는 이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

거창하게 많은 신학자들의 논문과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서 얻는 힘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을 모르고, 이전의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와 사상을 따라 신앙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는 아주 그럴싸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 교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정감록'을 모르는 얼뜨기라는 식으로 떠들어 댑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에 관한 내용은 신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주가 자기를 배반하여 저주받아 죽은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하고 살려서 자신의 본래의 창조경륜을 이루어 내는 종교입니다.
창조주가 죄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돌리는 방법은 오직 흠 없으신 피의 속죄였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버린 타락한 자기 백성 가운데서 피 흘림의 속죄로 죄를 배상할 자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날 때부터 죄인이고, 모두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여 버려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자기 백성의 죄를 배상하는 제물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속죄의 피를 흘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특별하신 역사하심으로 아담의 죄를 전가 받지 않은 한 완전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그 죄 없는 사람을 자신과 연합(위격적 통일)시키심으로 완전한 사람-완전한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위해 오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피로 하나님께 죄를 배상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신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피 흘려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고, 자기 백성의 의가 되시어 구원을 주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계시 해설자 사도 바울도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음이 우리의 의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 안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와 연합됨이 우리에게 의를 얻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피 흘리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아담이 못한 율법준수를 성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권리(의)를 얻어 줄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신.구약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변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미쳤습니다. 계속 미친 듯이 그것만 주장하나, 모든 내용들이 전혀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항상 누구도 이 같은 주장을 했다! 라는 인간의 사설들뿐입니다.



성경이 묻어나지 않는 신학 이론은 사람의 사변입니다. 「기독교강요」를 보니, 칼빈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성경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이 우리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피 흘리신 그 분과 믿음으로 연합되어 전가되는 예수의 의로 우리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의 모든 말들은 언제나 성경으로 뒷받침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3)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기독교강요, 3.11.3)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독교강요, 3.11.22)

칼빈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나 어떤 행위가 우리에게 의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만 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사색하고 이론으로 만드는 일은 칼빈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가르쳤습니다.


서철원 박사도 칼빈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음다는 믿음 고백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강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신학을 세우는 분들은 다릅니다. 이전 사람들이 만든 교리로 신학하는 것과 성경으로만 신학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무효화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믿음을 고백하는 죄인들의 의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사역으로 이룬 죄용서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죄인에게 전가하여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롬 5:8-10).”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부름 받은 자들을 그냥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고백하게 하셔서 의롭다고 하신다. 단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롬 3:21,22)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로 보신다.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이므로, 그가 당한 모든 고난과 행한 것을 부름 받음 자들이 당한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죄용서를 죄인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13)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 하는 선언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따라서 법정적이지 도덕적일 수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오직 성경으로만 신학해야 합니다. 명확하게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성경의 단 한 줄을 찾지 못하는 이론은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는 거짓 사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뒷받침하는 명확한 성구 하나를 찾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서는 ...

성경! 성경! 성경!

언제나 최고의 권위와 기준은 성경입니다. 청교도 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 1차 대각성 운동, 2차 대각성 운동, 그 무엇이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절대로 어닙니다. 에드워즈, 존 오웬, 리차드 박스터, 로이드 존스, 그 누구라도 성경의 말씀과 다른 이론이나 주장으로 큰일을 이루었으면, 예외 없이 광명의 천사이고 거짓 선생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고와 이해를 성경 속에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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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심, 그리고 훗날 천사 장의 나팔 소리와 호령으로 이 땅에 임하실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Advent)은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손님은 당연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온 마음을 다하여 손님을 기다립니다. 이유는 기다리는 손님을 놓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세상은 추수감사절로 시작하여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보내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연말은 일 년 중 거룩함과 세속적 사고가 가장 강하게 충돌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정되었고, 성탄절이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절기인데, 세속적 개념이 기독교적 두 절기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거룩함보다 세속적 사고가 더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과 대림절, 성탄절은 모두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도 성경을 토대로 연말을 맞이하고, 하나님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맞아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더 강해짐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성경적 사고를 더 강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자녀들조차 연말을 세속적으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간이 갈수록, 세속적 사고가 더 굳어져 감에 있습니다.

작고 연약하지만, 우리라도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살아가며, 성경적 사고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주님의 말씀과 은혜에 깊이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오심이 바로 나를 위해 오셨음을 확신하며 연말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적 사고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올해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보내야 세속적 사고를 이길 수 있고, 마침내 우리는 물론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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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신실히 믿는 이들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의 네 가지 속성들을 주목해왔는데, 그 네 가지는 필요성, 권위, 명료성, 충분성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성경 밖에서 설정한 속성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지닌 속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자율성까지도 계시 의존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계시나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 이성은 인간의 견해를 만들 뿐 사람들이 찾는 확실성은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합리성의 기초를 세워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를 만드시고 또한 붙드시고 다스리십니다. 신자가 할 일은 진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고 그 진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가정(假定)하기 때문에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필요성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유일한 권위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명료하다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뜻이지 모든 부분이 다 분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분명한 구절로부터 불분명하고 어려운 구절이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은 스스로를 해석하여 신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순종하여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신자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의 충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대한 완성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 66권이 완성된 정경이기 때문에 거기에 추가할 다른 계시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이비 종파에서는 성경 이외에 성경적 권위를 갖는 어떤 예언이나 이상이나 계시나 가르침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많은 실수도 하였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믿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릇된 것을 깨우치고 인간 사회를 증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명의 흥망성쇠의 과정에서 성경은 신자들의 마음과 지성에 그 자리를 유지해 오면서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궁극적 권위자로 높이려는 모든 형태의 지식에 반대합니다.

죄의 특징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명과 지식과 사상까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시대와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생활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서도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그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다가 그 길이 잘 못된 길임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심정적인 뉘우침이나 후회하는 마음이나 자기의 잘못을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들과 아울러 잘못된 모든 생활 방식에서 돌아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걸어가는 행위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온전한 회개란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셔야 비로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죄를 고백하며 통회하고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로 간다고 해도 그것이 바른 회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아 바네스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정탐꾼을 보내고 그 후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고 한 사건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출애굽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신 1:41) 하지만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정탐을 한 결과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하고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악평하는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그들이 걱정하던 그들의 자녀들은 들어가게 한다고 하시며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시자 태도를 바꾸어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경솔히 올라갔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하나님을 인간의 뜻대로 조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회개나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그 어떤 선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고집대로 회개하였고, 회개하였으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고집하며 경솔히 행동하였습니다. 회개나 예배나 기도나 물질을 드리는 것이나 모든 선한 일을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과 법을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계명과 법 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계명과 법 앞에 인간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도록 정하신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계명과 법과 질서와 규례와 명령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생각할 때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데, 율법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율법 배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이란 언약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과 동시에 언약 백성의 의무 규정입니다.

언약을 전제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이야기하면 율법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적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는 그 언약의 배후에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에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 언약의 책무에 관계된 모든 계명과 규례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말씀과 언약과 구원행위와 하나님 자신까지를 포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안에 구원의 역사가 있고 새 언약이 있으며 율법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계시의 큰 그림을 통해서 구체적인 말씀과 사건을 보아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예배와 은사와 십일조와 선교와 믿음에 관한 그 어떤 것이라도 이 관점에서 보는 안목과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교조주의 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성경 계시의 이런 큰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때 마치 머리카락을 쪼개듯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율법에 많은 것을 첨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말씀을 살필 때 그 구체적인 말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 언약 배후의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그 구원의 행위 배후에 계신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피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4:6,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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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라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야단을 맞았고 다른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하였기 때문에 번번히 칭찬을 받았다.
둘 다 업무 수행 능력은 비슷했지만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일을 하느냐의 차이로 인해 유능한 사원과 무능한 사원으로 구분된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라는 구분만 분명히 하여도 우리는 많은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이런 죄, 저런 죄 한 두 가지를 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전혀 성경과는 상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이것은 사고가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는 증거이다.
결혼, 자녀 교육, 재정 등 등. 이런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나 가치관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진 신자들이 많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이런 훈련, 저런 훈련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인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훈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적 가치관은 소유, 군림, 눈에 보이는 것, 물량, 업적, 과시를 중시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관은 소유 보다는 관계, 군림 보다는 섬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 물량이나 업적 보다는 마음의 동기, 과시 보다는 은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회도 세속화 되다 보니 세상적인 성공을 영적 부요로 착각하여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자기 뜻'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하나님이 기도 응답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끊임 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그것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한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이 내용은 ‘묵상 기도’에 있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자신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보다 깊고 높다.
개인의 직접적인 필요 위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말씀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항상 개방적인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높은 뜻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도와 안내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쉽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은 추리와 경험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면 과거의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기 쉽다.
“아, 과거에 이런 예가 있었죠.
그때 이렇게 처리했으니 지금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죠”
“그렇지, 지난 번에 이런 일이 있었지.
난 그때 이렇게 처리했지.
이번에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군”
이처럼 사람은 전례에 따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이 생기고 소위 말하는 교단의 “법”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과 전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믿음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을 그냥 많이 읽더라도 믿음이 자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듯 중요한 구절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먹을 때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건강하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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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God`s Eye View Worshiping Your Way To A Higher Perspective (Hardcover)

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올려다 볼 것인가? 내려다 볼 것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는가?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 본 적이 있는가?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무엇이든 작게 보이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당신의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도더 이상 당신을 제압하지 못하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당신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미 테니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선포한다.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예배하라.
당신이 예배하는 순간 그분이 당신을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이다.
관점의 변화가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라.

■ 책 속으로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신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하나님은 사람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신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당신을 구할 것입니다."(사 26:9를 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가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0-13)

만약 우리가 버릇없이 하나님의 부엌에 난입해서 "아빠 내 몫을 주세요. 지금 당장 약속하신 유산을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요구에는 지상에 있는 부모들에게나 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나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109~110p)

하나님의 관점, 사람의 관점(The Perspective of God, The Perspective of Man)
야고보서 4:14

하나님의 관점은 "무한자(The Unlimited)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영(Spirit)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여야 함을 선포하는 것이 본문 야고보서 4:14절의 "관점(Perspective)"의 메시지입니다.
관점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할 수 있습니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올려다 볼 것인가?
아니면 유한자이며 안개에 불과한 인간의 관점에서 내려다 볼 것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을 감히 상상으로 추측해본다면,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창공위로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에 비유를 했습니다.
오래전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종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낙타 떼를 소유하며 모든 것이 탄탄대로(坦坦大路)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라 할지라도 오늘 혹은 내일, 혹은 그 어느 날에 갑자기 강도의 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원하지 않는 허리케인이나 질병 혹은 불의의 사고, 그 외에도 무수한 돌발적 상황들이 엄습해올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관점(觀點)에 따라 무엇이든 작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 쉽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은 인생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불리한 조건으로서 더 이상 제압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그 당사자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

1. 시험(Test)
2. 위탁(Commitment)
3. 잠시(Transitory)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였던 요셉은 그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고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13년이란 인생시험을 견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성군 다윗도 마침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기까지는 14년의 인생시험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요셉처럼, 다윗처럼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어 예배하는 순간, 전능의 왕 하나님은 당신을 반드시 높이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Turning Point of Perspective)이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십시오.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십니다.
'세속적인 관점(Secular Perspective)'에서, '사람의 관점(Perspective of Humans)'에서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시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고백을 할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학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명쾌한 기도응답의 최고의 롤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주님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사 26:9)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가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면 마치 거대한 언덕처럼 오래 견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의 큰 탑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영혼에게 많은 재물을 약속하신 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리라."(눅12:20) 오늘 밤에 내 영혼을 찾으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재조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시험을 만나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위임받은 청지기(Steward)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여도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임을 직시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을 맞이하므로 "놀라운 결과(Amazing Prospect)"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과 사건과 세상 바라보는 법

관점을 디자인하라(개념확장판).  박용후 | 쌤앤파커스 | 296쪽 | 16,000원

의식하든 않든, 자신만의 관점 있어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우리 삶 달라
사람이 자신의 관점 바꿀 수 있을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람은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사람이 바라보는 것은 똑같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똑같이 바라보았지만, 서로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똑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자기만의 관점만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관점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투자해야 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곧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이런 측면에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람이 가진 관점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고 자신이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피와이에이치 박용후 대표다.

박용후 대표는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책을 5년 전 이미 출간했다.
그런데, 출간 이후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사이에 있는 것들을 새롭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간 바뀐 생각을 기반으로, 들어내고 걸러내고 바로잡아 오늘의 관점으로 다시 책을 손보고 <관점을 디자인하라> 개념확장판을 내놓았다.

보통은 ‘개정판’이라고 명명하는데, 관점 디자이너라 ‘개념확장판’이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첫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돈 아닌 꿈 이루고 싶은 이들 함께해
1년에 20번 월급받는 사람으로 관심

저자는 대한민국 1호 ‘관점 디자이너’이다. 그를 수식하는 별명이 수없이 많지만 그는 다른 무엇보다 국내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로 불리기를 원한다.

‘관점 디자이너’로서 그는 유독 ‘착한 기업’의 성장을 도와 함께 성공하는 일을 보람으로 삼는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조직에 깊숙이 몸담지 않는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매 순간 새로 디자인되어야 할 관점이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한 목표에 도달한 순간까지만 함께한다는 원칙으로 계약직 신분을 유지하는 대신,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그 결과 그는 ‘한 달에 13번 월급받는 사람’로 알려지면서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그 숫자는 현재 20번으로 불어났다.

고정적으로 출근할 곳은 없지만, 세상 어느 곳이라도 스마트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다양한 사람과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어디든 남다르고 창의적인 그의 행복한 일터가 된다.

그는 ‘기업체에서 가장 초청하고 싶은 강사’로 손꼽히는 사람이 되어 다양한 청중들과 부지런히 만나며, 그들로부터 매일 새로운 관점을 얻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같은 영화와 같은 책을 봐도,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다.

관점 바꾸면,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해
고정관념, 신체 능력까지 틀에 가둬
당연함 부정하고, 질문 던져야 바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능력의 차이는 바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느냐?’에서 기인한다.

관점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수와 김치를 사 먹는 것이 언제부터 당연해졌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아마도 선뜻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나브로’,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나브로 바뀌는 세상을 읽어내는 힘도 바로 통찰을 이끌어내는 ‘관점’에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이제 그 도구의 해답은 ‘관점’이다.”

사람이 관점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관점을 바꾸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의식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인 능력까지 관념의 틀 속에 가둔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는데도, ‘나는 안 돼’라는 고정 관념에 갇히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뒤흔들라고 말한다. 자신을 수시로 재조립해 변화의 바람에도 제 가치를 해내는,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는 명품이 되라고 말한다.

둘째, 당연함이다.

‘당연’이란 무엇인가? 보편화된 관점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사는가,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당연함’이라는 우물에 갇히면, 우물 밖 세상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한 것을 부정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당연하지 않지만 미래에 당연해질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의 당연함 속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에 당연해 질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특별한 생각이 미래를 바꾼다.”

저자는 누구든지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고정관념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관점을 바꾼다면 당연함과 관성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을 부정하고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습관이나 관성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라도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당신의 관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 같은 상황, 같은 사물일지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진다.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까지 달라진다.

그러니 남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일을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 다른 사람과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그러면 놀라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자녀들, 하나님의 관점 가져야
하나님과 사람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
남다른 관점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
하나님 관점 보면 하나님나라 주인공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남다른 관점도 가져야 하지만, 더 중요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의 관점인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폭이 좁을 때가 많다. 한 면만 보고 한 방향을 볼 때가 많다. 또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폭넓고 깊게 볼 수 있다.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는 땅에서 바라보는 것과 하늘에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땅에서 바라보면, 내 눈앞에 들어오는 것만 볼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커 보인다.

하지만 하늘에서 이 땅의 것을 바라보면 어떤가? 전체가 보인다. 땅에서 볼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것이, 하늘에서 보면 작아 보인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늘에서는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건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남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영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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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주요 당선 공약




미국의 오지에도 무궁화 꽃이..

제 12회 :  미 합중국 제 47대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 “ 당선

선거 당일 밤 로스앤젤리스 시각  11시30분 “트럼프” 당선자는 승리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했다. 

대통령을 지내고 한 텀을 쉬고(?) 다시 승리로 돌아왔다.
트럼프의 승리는 상대당 (민주당)과의 싸움이 아니었고 정치적 부패와의 어려운 싸움이었다.

 수많은 기소와 재판 그리고 목숨까지 건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결국 승리했다.

그는 하늘이 그의 생명을 연장해 준 이유가 미국을 다시 재건하라는 뜻으로 안다고 말했다.


트럼프 주요 당선 공약

1.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 진행
2. 국경 장벽 설치
3. 출생 시민권 종료
4. 난민 정착정책 일시 중단
5.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외국 테러 조직으로 지정
6. 중국산 상품에 60% 추가 관세 부과
7. 미국기업의 중국 투자금지(vice versa)
8. 소득세율 감세
9. 법인세율 감세
10. 중국인의 미국 내 토지 매입 금지 조치
11. 기업구제금융 금지
12. 우크라이나 전쟁 종료
13. 세계 보건기구 탈퇴?
1.4 베테랑 노숙자 완전 종식
15. 교육부 폐지?
    - 홈스쿨링 자녀 보유 시 1인당 1만 달러 면세 제공?
16. 공립학교 내 기도 및 기타 종교활동 활성화
17. 조 바이든과 그의 가족을 쫒을 특별 검사 임명
18. 마약 판매 시 사형
19. 아동 성범죄자 사형 구형
20. 청소년 범죄자 처벌 강화
21. 경찰관 권한 강화
22. "남성"과 "여성"만을 미국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성별로 설정
23. 트랜스젠더 여성 여성스포츠 참여 금지
24. 군대 내 트젠 금지
25. 부모 동의 없이 미성년자에게 성전환수술 시 모든 의료전문가는 중범죄에 해당하도록 법 변경
26. 공립학교 내 "전통적인 핵가족" 성역활 장려
27. 공립학교 내 lgbtq 교육 프로그램 종료
28. 대통령이 불량 공무원을 해고 시킬 수 있는 권한 부여
29. 연방직원에게 공무원 시험 합격 요구
30. 매년 연방 정부 예산 삭감?
31. 파리 기후 협정 탈퇴
32. 전기자동차 의무 제거
33. 해상 풍력 에너지 개발 중단
34. 전략 석유 비축량 "즉시" 채우기
35. 새로운 전력망 시스템 현대화 및 구축




미국은 아직 건재하고 자유우방을 위해 책임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자유 우방을 위해 그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제는 치유의 시간이다.
정치적 부패에 의해 분열된 국민의 양극화를 치유하고 무너진 신뢰를 찾는일이 필요하다.

용서는 있지만 죄는 물어야 할 것이며 불법적 행위들은 제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경제를 살리고 에너지 산유국으로 미국의 과거로 되 살리는 일이 급선무이다.

수 많은 불법 입국자들의 운명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길가로 몰린 저소득 국민들의 어려움을 돌봐야 한다.

자유우방은 오늘의 승리를 같이 기뻐 할 것 이다.
이제 미국을 재 건설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하늘이 도와 오늘의 승리를 가져오듯 미국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트럼프 가족과 미국위에 하느님의 은혜가 가득하길 빈다.
God Bless America!
(11. 06. 2024)




교회 절기(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추수감사절, 종교개혁기념주일


대림절(Advent)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에는 '오심' 혹은 '도착' 외에도 '모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이 땅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 상승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고, 반면에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은 한 인간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마침내 신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정점, 즉 신의 자리에 올라 그는 거기서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영광을 거슬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의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의 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요, 성탄의 복음입니다.

진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1)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약하고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병들고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시지 않고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대로,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입니다(이사야 9:6).

대림절(Advent)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성탄(聖誕)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린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기다림을 뜻하는 보라색이다.
대림절은 주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 4세기 이후부터 정식으로 지켜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의 그레고리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지키는 의미의 절기로 확대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림절 첫째 주일날 켜는 촛불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과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그분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보아야 한다.

대림절 둘째 주일날 켜는 촛불 : 회개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방해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는 의미로 회개의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낸다.

대림절 셋째 주일날 켜는 촛불 : 사랑과 나눔의 촛불 

주변에 상처 입은 이웃들, 배고픈 이웃들, 외로움에 쓸쓸한 이웃들에게 성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섬김,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 자 위로, 사랑의 선물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 보도록 하자.

대림절 넷째 주일날 켜는 촛불 : 만남과 화해의 촛불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웃을 초청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본다. 

대림절의 네 가지 의미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세상에 전한다는 의미.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한다는 의미.
셋째,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몸을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고 기다린다는 의미.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
우리 죄를 회개, 자백,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순종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예수 탄생의 예언과 성취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회적 거리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가정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대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가정은 대면 생활을 통하여 서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로 잘 알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옷이 없었다.


옷이 많다는 것은 뭔가 감출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두 벌 옷과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부의 상징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도시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이 없었다.


주방이 없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옷과 집과 음식이 필요 없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예수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 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5-8)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의 삶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은 가정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고 그 가정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먼저 가정에서 확인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에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터에 나가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정에서 회복되고 무장한 후 다시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가정의 에덴동산

에덴동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옷이 없었습니다.

주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옷이 늘어났고 주방도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눈만 뜨면 배가 고플 때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냉장고도 필요없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아혀 대면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일터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증거

 1. 여자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실 것을 예언(창 3:15, 사 7:14, 미 5;3, 마 1:23, 눅 1:34~3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2. 아담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가죽 옷 : 십자가에 몸이 상하여 죽어 주심을 예표(창 3:22)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스겔의 증거


1. 세상의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예언(겔 37:1~28)


2. 평화의 왕으로 예언(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 화평의 언약(베리트 솰롬)

①. 하나님만이 계약의 주체가 되어 계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②.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핵심이 된다.

③. 물질적인 것이나 상호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언약 성취는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BC 538년에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예레미야 23:5, 33:14∼16, 26)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예레미야 33:26,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3. 선지자로 예언(겔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4. 공평하실 것을 예언(겔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성탄을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대신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세속 문화에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성탄의 의미는 축제의 한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산타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탄절의 주인이 2000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왜 이땅에 말구유에 오셔야만 했는가?


예수탄생의 복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예수탄생의 복음을 가진 자인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탄생의 복음 증거자로 만세전에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일컬어서 택정함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로마세계에 있어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일개 기구와 같았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가 로마를 연구하는 중에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가구, 말할 줄 모르는 가구


호미, 낫, 삽,

둘째 가구, 말을 못하지만 움직이는 가구

말, 소, 나귀 등

셋째 가구, 말을 하는 가구


노예를 가구로 봤기 때문에, 말을 하는 노예를 가구와 같이 취급한 사회가 로마사회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친히“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함은 타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는 것이요, 예수탄생의 복음을 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종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선지자들로 말미암아서 그의 아들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요,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라는 단어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찬송 122장 4절에“육신을 입고”이렇게 찬송을 하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되요.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입다’라는 것은 옷을 입듯이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이 들게 하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일컬어서 이단이 주장하는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인성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어요. 왜?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참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어디서 나오셨냐?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요, 신비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죄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될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성을 가지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디에서 들어나냐 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분이시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들과 같이 그냥 흥청망청 성탄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성탄절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깨어서 근신하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다른 날들도 1년 365일 우리의 몸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 성탄의 계절에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는 부르지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인 이 몸을 가지고, 육적인 일에만 육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쓴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 라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입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하면‘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7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셔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말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나심을 축하면서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예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은혜로 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났고, 복음증거하다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어도 거기서 찬송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기뻐하고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지지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와 여러분 중에 아직도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눌려 지내면서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된 심령들이 잇습니까?

 

저와 여러분 내 맘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심령이 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들이 얻는 호의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주요하고 기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그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에 평강이 없고, 은혜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써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잖아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못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계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질병하나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감옥에 있을 때에도 감사했고, 무슨 일이 주어지던 지간에 노동을 하면서도 감사했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감사했다”고, 감사한 생활이 감옥 생활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정말 내 삶속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데, 내 맘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없고, 평강이 없으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살롬?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어요. 삭막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들어가면 푸르른 숲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복음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순절(Lent)
사순절(Lent : 四旬節)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5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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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교회력에 의한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의 이름 

1. 사순절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입니다.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사순절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입니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4. 사순절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ere)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 사순절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rum)입니다.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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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 원

 

사순절을 뜻하는 Lent는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의 ‘봄‘을 의미하는 Lang에서 유래했으며 독일어 Lenz와 같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참회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AD 325년 니케아 총회(council of Nicea) 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한 참회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제기(劑期) 즉 부활절 전 6주간으로 거룩한 금요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는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런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

 

2. 시 기

 

올해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13일 수요일부터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즉 ‘속죄일‘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재(Ash)를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한다. 전년도 종려 주일에 사용한 종려 가지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두었다가 이 재(Ash)를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감람나무의 재나 숯덩이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날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까지 참회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금식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며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40년 간의 광야 교회의 생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광야의 40일간의 금식, 시내산의 모세의 40일 금식과 십계명, 무덤 속에서 40시간을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 주님의 사역기간,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으로 준비했다.

 

3. 유 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40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하루 한 끼, 또는 저녁 식사만 허락하되 육식은 물론 생선 정도의 육식까지도 금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달걀이나 우유 등의 음식까지도 규제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금식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와서는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으나 의식적인 금식보다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한 내적인 자기 정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접근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며 주님을 본받는데 부적합한 집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외형적인 형식만을 닮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적인 의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한 성도들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이 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이들을 추천한 보증인들과 함께 두 주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금식과 기도로 죄의 회개와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4. 관 습

 

1. 금식 기도

요즘 와서는 우리 개신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마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7주 동안 금식하게 하였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금식하게 하여 의식화되어 내면의 깊은 뜻이 퇴색한 것은 인정하나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 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작금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들이 신앙의 대 선배들이신 모세(출 24:18; 신 9:9; 10:10) 엘리야(왕상 19:8), 그리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마 4:2; 눅 4:1-2)의 40일 금식에 대한 믿음의 자세로 이 기간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살피며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가며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절제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죄악을 발견하여 자백하고 사함 받는 기회로 삼아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구제와 자선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는데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확산되어 수개월 동안 행해지는 유럽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다.

 

4. 사순절 행사

그러면 교회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첫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결하게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죄 자백에 주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금식함으로서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 오락을 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모아진 금액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원래 사순절이 부활절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원자를 준비시키는 기간인 것을 감안하여 이 기간 동안 성경공부에 빠지지 말고 세례와 학습자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전도를 함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친구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는 일도 바람직하다.

 

1. 새벽기도회

2. 금식 기도회

3. 주일 시리즈 예배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다.

첫째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둘째 주일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셋째 주일은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넷째 주일은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 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다섯째 주일은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여섯째 주일, 즉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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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四旬時期, 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 라틴어: Quadragesima, 영어: Lent)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의 이름은 성서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40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테사라코스테'(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절 전 40일(사순,四旬) 기간 동안 지킨다. 기독교에서 동방전통과 서방전통의 사순절의 차이가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매주간 5일만을 기간으로 여기고, 토요일과 주일을 40일 날짜에 포함하지 않는다. 부활절 이전 8주간이 사순절이 된다. 서방 기독교인 천주교에서는 주일을 포함하여 사순 시기가 성주간 목요일까지이다. 40일 날수는 전례대혁 후에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킨다. 부활절 이전 6주와 4일이 사순절이 된다. 즉,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시키고 날수를 세면 40일이 된다.[1]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부활절 이전에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도 한다.

한국 교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이며, 개신교인 대한성공회루터교감리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그리고, 한국 정교회 등에서 지키고 있다. 또한 개신교 계통의 장로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경우 사순 시기 대신 주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의 의식 색깔은 자색이며,다만 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붉은색을 사용한다。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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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목회서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감사의 계절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파트리스 공동체의 일군들을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모든 공동체 가족들이 주님의 품안에서 강건하여 오늘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한아름 상품권($20)을 보냅니다.
비록 작은 나눔이지만 서로 나누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가 회복하여 더 아름다운 나눔과 만남을 함께 기도하며 파트리스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주후 2020년 11월 16일(월)
파트리스교회 담임목사 이승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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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2020년 11월 22일(주일)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은 이제껏 지켜오던 추수감사주일과 전혀 다른 주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예배가 금지되고 아직도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주로 사람의 계획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염병균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결단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결단해 봅시다.

감사해!
사랑해!
미안해!

아마 이 세 가지 마음만 회복할 수 있어도 굉장한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는 얘기 다 알고 계시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라워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매스터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남미로 가려고 했던 가장 큰 동기는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이지요.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를 아십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찾아 북미로 찾아온 그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물질적인 동기 때문에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 그 후예들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이중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만 선택함으로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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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창세기 18:16-21) 

‘친구’라는 말은 참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 가깝게 지냄, 허물이 없음, 비밀이 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옛말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가리킵니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는데 조금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성어인데요.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친구입니다.

 포숙은 마음이 넓고 포용적인 친구입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 .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 .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으리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하자고 제의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보가 더좋은 친구없네(두번)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다할 때까지(두번)

 여러분 여러분의 참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되기 쉽고 오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정욕으로 가정 파국을 맞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때문에 출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시장에서 공동묘지에서 서당가로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좋은 교육의 환경에서 교육시킬려고. . .

 그 당시부터 좋은 학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시고 계십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한 권력, 유명한 사람과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될 경우 세상적으로 가깝게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약2:21-23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의 관계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자신은 노령의 나이 75가 되어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녀가 있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옳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고’ 그때 하나님은 너무기뻐하시면서 ‘우리 친구하자’하시고 친구 제의의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해 주시면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친구 제의 요청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셔야 합니다.

 1. 참 친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습니다.

 매일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들어간 지 2,3분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무슨 일로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십니까?”

 “그야 기도하고 나오는 길이지요.”

 “기도라니요 ?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조금 수상쩍다는 듯이)

 “저는 길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

 약 한 달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온 이후로 병실에서는 늘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께서는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모두 다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 사람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방문객이라뇨 ? 도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지. 정오만 되면 늘 내 침대 곁에 와 있는걸.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신다우. ‘여보게 짐 ! 잘 있었나 ? 나 예수야!’”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기쁨을 한 아름 내게 안겨 주고 가시지. . .”이 할아버지는 늘 하나님을 친구로 삼고 사는 할아버지였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참 친구셨습니다.

 창13:14절에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물좋고 기름진 소돔 땅을 택해서. . .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롯이 떠나고 난 외로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두렵기도 하고. . .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올케 여기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와같이 오십니다. 외로운 자리에 오십니다.

 허전하고 텅빈 것 같은 그 자리에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는 것입니다. 옳다고. . . 신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삶 속에 늘 찾아오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 친구는 비밀이 없습니다. (16-21)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못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과 풀이 좋은 소돔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것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로 마음이 허전, 섭섭했습니다. 하나님은 허전하게 서 있는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3-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주리니 영원이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말씀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넘치는 대접을 받은 하나님과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할 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고 후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 친구는 급할 때 도움이 됩니다(22-33)

 22절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중보하며 간청합니다.

 보이는 대로 소돔을 선택한 롯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북쪽(북미)으로 이민간 사람과 남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쪽(남미)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청교도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동기의 차이는 큽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돈을 벌려는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간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뿐이 없었습니다.

 남미로 돈벌러 간 사람들은 신앙도 못 찾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성취할뿐 아니라 세계 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 같으면 지난번에 아버지 같은 삼촌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은 조카에 대해서 모른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도 소돔성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도시였으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는 이 성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고 아마 에덴동산같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으로 소돔성을 사랑합니다. 특히 롯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롯을 생각할 때 견딜 수가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50명에서 10명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세기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죽어가는 이 민족과 나의 형제들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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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pilgrimhouse/13111234




종교개혁기념주일
종교개혁기념일(宗敎改革紀念日, Reformationstag, Reformation Day)


 

종교개혁기념일은 무엇인가?


스티븐 니콜스
스티븐 니콜스(Stephen J. Nichols) 박사는 리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총장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최고 학술 책임자이자 강사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A Time for Confidence 등 수많은 책의 저자이다.


단 하루, 단 한 번의 사건이 세상을 바꾸었다.
이 사건은 1517년 10월 31일에 일어났다.
수도사이자 학자였던 마틴 형제는 자기 교회인 로마 교회와 수년간 투쟁했다.
그는 전례 없는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되기 위한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출연진들을 만나보자.

첫째, 젊은 주교 마인츠의 알버트(Albert of Mainz)가 있다.

교회법에 따르면 그는 너무 젊었다.
그는 두 지역을 감독하는 주교였는데 마인츠를 관할하는 추가 관할 지역을 원했다.
이것 역시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로마 교황 레오 10세(Leo X)에게 (추가 관할 지역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메디치 가문(De Medici family) 출신이었던 레오 10세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어서 그가 가진 재정을 초과해가면서  취미생활을 즐겼다.
예술가이자 조각가인 라파엘로미켈란젤로를 만나보라.  

마인츠의 알버트(Albert of Mainz)가 교황에게 특별 허가를 요청했을 때, 레오 10세(Leo X)는 거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교황의 승인을 받은 알버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면죄부를 팔곤 했다.
수도사 마틴 루터는 이 모든 사실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루터는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했다.

그런데 왜 10월 31이었을까?
11월 1일은 교회 달력 상 “모든 성자의 날(All Saint’s Day)”로 특별한 날이었다.
1517년 11월 1일, 루터의 고향 도시인 비텐베르크에는 새로 수집한 성유물들(성인이나 순교자들의)이 대규모로 전시될 예정이었다.
도처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은 유물 앞에 무릎을 꿇고, 수천 년은 아니더라도 연옥에서 보낼 수백 년의 시간을 얻어가곤 했다.
루터의 영혼은 더욱 괴로워했다.
어떤 것도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교개혁기념일은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기념한다.

1517년 10월 31일 학자 마틴 루터는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 95개의 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95개의 반박문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에 있는 그의 동료 형제들 가운데 자아 성찰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95개 반박문은 논쟁 이상의 것을 촉발시켰으며  교회가 회복을 넘어선 상태임을 드러냈다.
교회는 개혁이 필요했다.
교회와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루터의 95개 반박문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참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라고 선포한다.
이것만으로도 종교 개혁의 날의 의미가 충분하다.
교회는 복음을 망각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겹의 전통으로 도배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전통은 종종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얻게 하는 행위의 체계를 만든다.
바리새인들도 그랬고, 중세 로마 가톨릭도 그랬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종교개혁기념일은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기념한다.

종교개혁기념일은 무엇인가?
이날은 어둠 속에서 복음의 빛이 터져 나온 날이다.
이날은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날은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녹스 등 많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가, 신앙과 삶을 위한 유일하고 최고 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돕고, 교회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 교리로 인도하는 날이었다.
이날은 선교적 노력에 불을 붙였다.
또한 찬송가 저작과 회중 찬양으로 이어졌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설교와 설교의 중심이 되게 했다.
이날은 신학적, 교회적, 문화적 변화를 축하하는 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개혁기념일을 기념한다.
이날은 우리의 과거와, 종교 개혁자로 변신한 수도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더욱이 이날은 복음의 빛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두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상기시켜준다.



다섯가지 솔라(Five solae)

Five solae

1 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

2 Sola fide (by faith alone)

3 Sola gratia (by grace alone)

4 Solus Christus or Solo Christo (Christ alone or through Christ alone)

5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다섯 가지의 솔라를 표방한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근본주의적 색체가 더 강해진 다섯 가지 솔라는 종교개혁 당시에는 혁명적 용어였다. '오직'의 뜻을 담은 Sola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갈망이 아니다. 사제와 교황에 의해 왜곡되고 빼앗긴 성경을 모든 교인들에게 되돌리려는 혁명 문구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

솔라 스크립투라는 사제들의 중보가 아닌  성경 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표방한다.
사제에 의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지 않고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권위가 최고이다. 성경 위에 그 어떤 권위도 올릴 수 없고, 올려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기준, 삶의 방식이 전통이나 인습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결정된다. 성경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자칫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솔라 피데는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사역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른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전통적으로 여겨왔던 행위 구원에 도전한다. 그가 주창한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표방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롭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구원(의롭게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솔라 그라티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한다. 오직 은혜라는말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사상도 들어갈 수 없다. 오직을 절대적 의미이며,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믿음이 인간에게 주도적 느낌이 있다면,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or Solo Christo)

오직 그리스도는 구원 사역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사역을 통해 완성된다. 그 무엇도 더해지거나 추가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행하신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의 모든 길이 완성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구원 사역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마친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기도 성경 구절


한글 개역 성경 기도 구절

창세기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창세기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