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절기(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추수감사절, 종교개혁기념주일


대림절(Advent)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에는 '오심' 혹은 '도착' 외에도 '모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이 땅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 상승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고, 반면에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은 한 인간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마침내 신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정점, 즉 신의 자리에 올라 그는 거기서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영광을 거슬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의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의 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요, 성탄의 복음입니다.

진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1)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약하고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병들고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시지 않고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대로,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입니다(이사야 9:6).

대림절(Advent)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성탄(聖誕)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린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기다림을 뜻하는 보라색이다.
대림절은 주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 4세기 이후부터 정식으로 지켜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의 그레고리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지키는 의미의 절기로 확대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림절 첫째 주일날 켜는 촛불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과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그분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보아야 한다.

대림절 둘째 주일날 켜는 촛불 : 회개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방해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는 의미로 회개의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낸다.

대림절 셋째 주일날 켜는 촛불 : 사랑과 나눔의 촛불 

주변에 상처 입은 이웃들, 배고픈 이웃들, 외로움에 쓸쓸한 이웃들에게 성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섬김,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 자 위로, 사랑의 선물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 보도록 하자.

대림절 넷째 주일날 켜는 촛불 : 만남과 화해의 촛불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웃을 초청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본다. 

대림절의 네 가지 의미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세상에 전한다는 의미.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한다는 의미.
셋째,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몸을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고 기다린다는 의미.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
우리 죄를 회개, 자백,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순종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예수 탄생의 예언과 성취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회적 거리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가정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대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가정은 대면 생활을 통하여 서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로 잘 알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옷이 없었다.


옷이 많다는 것은 뭔가 감출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두 벌 옷과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부의 상징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도시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이 없었다.


주방이 없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옷과 집과 음식이 필요 없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예수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 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5-8)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의 삶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은 가정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고 그 가정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먼저 가정에서 확인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에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터에 나가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정에서 회복되고 무장한 후 다시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가정의 에덴동산

에덴동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옷이 없었습니다.

주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옷이 늘어났고 주방도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눈만 뜨면 배가 고플 때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냉장고도 필요없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아혀 대면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일터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증거

 1. 여자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실 것을 예언(창 3:15, 사 7:14, 미 5;3, 마 1:23, 눅 1:34~3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2. 아담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가죽 옷 : 십자가에 몸이 상하여 죽어 주심을 예표(창 3:22)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스겔의 증거


1. 세상의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예언(겔 37:1~28)


2. 평화의 왕으로 예언(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 화평의 언약(베리트 솰롬)

①. 하나님만이 계약의 주체가 되어 계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②.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핵심이 된다.

③. 물질적인 것이나 상호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언약 성취는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BC 538년에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예레미야 23:5, 33:14∼16, 26)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예레미야 33:26,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3. 선지자로 예언(겔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4. 공평하실 것을 예언(겔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성탄을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대신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세속 문화에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성탄의 의미는 축제의 한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산타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탄절의 주인이 2000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왜 이땅에 말구유에 오셔야만 했는가?


예수탄생의 복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예수탄생의 복음을 가진 자인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탄생의 복음 증거자로 만세전에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일컬어서 택정함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로마세계에 있어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일개 기구와 같았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가 로마를 연구하는 중에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가구, 말할 줄 모르는 가구


호미, 낫, 삽,

둘째 가구, 말을 못하지만 움직이는 가구

말, 소, 나귀 등

셋째 가구, 말을 하는 가구


노예를 가구로 봤기 때문에, 말을 하는 노예를 가구와 같이 취급한 사회가 로마사회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친히“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함은 타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는 것이요, 예수탄생의 복음을 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종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선지자들로 말미암아서 그의 아들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요,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라는 단어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찬송 122장 4절에“육신을 입고”이렇게 찬송을 하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되요.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입다’라는 것은 옷을 입듯이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이 들게 하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일컬어서 이단이 주장하는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인성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어요. 왜?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참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어디서 나오셨냐?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요, 신비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죄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될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성을 가지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디에서 들어나냐 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분이시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들과 같이 그냥 흥청망청 성탄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성탄절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깨어서 근신하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다른 날들도 1년 365일 우리의 몸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 성탄의 계절에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는 부르지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인 이 몸을 가지고, 육적인 일에만 육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쓴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 라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입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하면‘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7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셔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말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나심을 축하면서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예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은혜로 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났고, 복음증거하다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어도 거기서 찬송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기뻐하고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지지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와 여러분 중에 아직도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눌려 지내면서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된 심령들이 잇습니까?

 

저와 여러분 내 맘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심령이 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들이 얻는 호의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주요하고 기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그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에 평강이 없고, 은혜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써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잖아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못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계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질병하나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감옥에 있을 때에도 감사했고, 무슨 일이 주어지던 지간에 노동을 하면서도 감사했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감사했다”고, 감사한 생활이 감옥 생활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정말 내 삶속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데, 내 맘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없고, 평강이 없으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살롬?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어요. 삭막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들어가면 푸르른 숲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복음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순절(Lent)
사순절(Lent : 四旬節)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5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http://www.dmch.kr/bbs/view.php?id=column_new&no=78


독일교회력에 의한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의 이름 

1. 사순절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입니다.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사순절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입니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4. 사순절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ere)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 사순절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rum)입니다.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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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 원

 

사순절을 뜻하는 Lent는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의 ‘봄‘을 의미하는 Lang에서 유래했으며 독일어 Lenz와 같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참회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AD 325년 니케아 총회(council of Nicea) 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한 참회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제기(劑期) 즉 부활절 전 6주간으로 거룩한 금요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는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런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

 

2. 시 기

 

올해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13일 수요일부터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즉 ‘속죄일‘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재(Ash)를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한다. 전년도 종려 주일에 사용한 종려 가지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두었다가 이 재(Ash)를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감람나무의 재나 숯덩이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날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까지 참회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금식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며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40년 간의 광야 교회의 생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광야의 40일간의 금식, 시내산의 모세의 40일 금식과 십계명, 무덤 속에서 40시간을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 주님의 사역기간,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으로 준비했다.

 

3. 유 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40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하루 한 끼, 또는 저녁 식사만 허락하되 육식은 물론 생선 정도의 육식까지도 금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달걀이나 우유 등의 음식까지도 규제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금식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와서는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으나 의식적인 금식보다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한 내적인 자기 정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접근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며 주님을 본받는데 부적합한 집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외형적인 형식만을 닮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적인 의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한 성도들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이 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이들을 추천한 보증인들과 함께 두 주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금식과 기도로 죄의 회개와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4. 관 습

 

1. 금식 기도

요즘 와서는 우리 개신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마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7주 동안 금식하게 하였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금식하게 하여 의식화되어 내면의 깊은 뜻이 퇴색한 것은 인정하나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 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작금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들이 신앙의 대 선배들이신 모세(출 24:18; 신 9:9; 10:10) 엘리야(왕상 19:8), 그리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마 4:2; 눅 4:1-2)의 40일 금식에 대한 믿음의 자세로 이 기간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살피며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가며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절제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죄악을 발견하여 자백하고 사함 받는 기회로 삼아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구제와 자선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는데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확산되어 수개월 동안 행해지는 유럽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다.

 

4. 사순절 행사

그러면 교회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첫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결하게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죄 자백에 주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금식함으로서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 오락을 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모아진 금액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원래 사순절이 부활절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원자를 준비시키는 기간인 것을 감안하여 이 기간 동안 성경공부에 빠지지 말고 세례와 학습자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전도를 함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친구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는 일도 바람직하다.

 

1. 새벽기도회

2. 금식 기도회

3. 주일 시리즈 예배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다.

첫째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둘째 주일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셋째 주일은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넷째 주일은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 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다섯째 주일은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여섯째 주일, 즉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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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四旬時期, 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 라틴어: Quadragesima, 영어: Lent)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의 이름은 성서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40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테사라코스테'(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절 전 40일(사순,四旬) 기간 동안 지킨다. 기독교에서 동방전통과 서방전통의 사순절의 차이가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매주간 5일만을 기간으로 여기고, 토요일과 주일을 40일 날짜에 포함하지 않는다. 부활절 이전 8주간이 사순절이 된다. 서방 기독교인 천주교에서는 주일을 포함하여 사순 시기가 성주간 목요일까지이다. 40일 날수는 전례대혁 후에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킨다. 부활절 이전 6주와 4일이 사순절이 된다. 즉,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시키고 날수를 세면 40일이 된다.[1]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부활절 이전에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도 한다.

한국 교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이며, 개신교인 대한성공회루터교감리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그리고, 한국 정교회 등에서 지키고 있다. 또한 개신교 계통의 장로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경우 사순 시기 대신 주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의 의식 색깔은 자색이며,다만 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붉은색을 사용한다。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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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목회서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감사의 계절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파트리스 공동체의 일군들을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모든 공동체 가족들이 주님의 품안에서 강건하여 오늘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한아름 상품권($20)을 보냅니다.
비록 작은 나눔이지만 서로 나누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가 회복하여 더 아름다운 나눔과 만남을 함께 기도하며 파트리스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주후 2020년 11월 16일(월)
파트리스교회 담임목사 이승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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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2020년 11월 22일(주일)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은 이제껏 지켜오던 추수감사주일과 전혀 다른 주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예배가 금지되고 아직도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주로 사람의 계획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염병균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결단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결단해 봅시다.

감사해!
사랑해!
미안해!

아마 이 세 가지 마음만 회복할 수 있어도 굉장한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는 얘기 다 알고 계시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라워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매스터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남미로 가려고 했던 가장 큰 동기는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이지요.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를 아십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찾아 북미로 찾아온 그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물질적인 동기 때문에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 그 후예들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이중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만 선택함으로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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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창세기 18:16-21) 

‘친구’라는 말은 참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 가깝게 지냄, 허물이 없음, 비밀이 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옛말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가리킵니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는데 조금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성어인데요.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친구입니다.

 포숙은 마음이 넓고 포용적인 친구입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 .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 .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으리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하자고 제의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보가 더좋은 친구없네(두번)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다할 때까지(두번)

 여러분 여러분의 참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되기 쉽고 오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정욕으로 가정 파국을 맞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때문에 출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시장에서 공동묘지에서 서당가로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좋은 교육의 환경에서 교육시킬려고. . .

 그 당시부터 좋은 학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시고 계십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한 권력, 유명한 사람과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될 경우 세상적으로 가깝게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약2:21-23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의 관계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자신은 노령의 나이 75가 되어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녀가 있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옳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고’ 그때 하나님은 너무기뻐하시면서 ‘우리 친구하자’하시고 친구 제의의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해 주시면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친구 제의 요청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셔야 합니다.

 1. 참 친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습니다.

 매일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들어간 지 2,3분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무슨 일로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십니까?”

 “그야 기도하고 나오는 길이지요.”

 “기도라니요 ?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조금 수상쩍다는 듯이)

 “저는 길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

 약 한 달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온 이후로 병실에서는 늘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께서는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모두 다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 사람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방문객이라뇨 ? 도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지. 정오만 되면 늘 내 침대 곁에 와 있는걸.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신다우. ‘여보게 짐 ! 잘 있었나 ? 나 예수야!’”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기쁨을 한 아름 내게 안겨 주고 가시지. . .”이 할아버지는 늘 하나님을 친구로 삼고 사는 할아버지였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참 친구셨습니다.

 창13:14절에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물좋고 기름진 소돔 땅을 택해서. . .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롯이 떠나고 난 외로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두렵기도 하고. . .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올케 여기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와같이 오십니다. 외로운 자리에 오십니다.

 허전하고 텅빈 것 같은 그 자리에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는 것입니다. 옳다고. . . 신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삶 속에 늘 찾아오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 친구는 비밀이 없습니다. (16-21)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못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과 풀이 좋은 소돔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것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로 마음이 허전, 섭섭했습니다. 하나님은 허전하게 서 있는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3-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주리니 영원이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말씀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넘치는 대접을 받은 하나님과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할 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고 후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 친구는 급할 때 도움이 됩니다(22-33)

 22절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중보하며 간청합니다.

 보이는 대로 소돔을 선택한 롯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북쪽(북미)으로 이민간 사람과 남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쪽(남미)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청교도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동기의 차이는 큽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돈을 벌려는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간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뿐이 없었습니다.

 남미로 돈벌러 간 사람들은 신앙도 못 찾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성취할뿐 아니라 세계 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 같으면 지난번에 아버지 같은 삼촌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은 조카에 대해서 모른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도 소돔성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도시였으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는 이 성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고 아마 에덴동산같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으로 소돔성을 사랑합니다. 특히 롯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롯을 생각할 때 견딜 수가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50명에서 10명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세기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죽어가는 이 민족과 나의 형제들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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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pilgrimhouse/13111234




종교개혁기념주일
종교개혁기념일(宗敎改革紀念日, Reformationstag, Reformation Day)


 

종교개혁기념일은 무엇인가?


스티븐 니콜스
스티븐 니콜스(Stephen J. Nichols) 박사는 리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총장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최고 학술 책임자이자 강사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A Time for Confidence 등 수많은 책의 저자이다.


단 하루, 단 한 번의 사건이 세상을 바꾸었다.
이 사건은 1517년 10월 31일에 일어났다.
수도사이자 학자였던 마틴 형제는 자기 교회인 로마 교회와 수년간 투쟁했다.
그는 전례 없는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되기 위한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출연진들을 만나보자.

첫째, 젊은 주교 마인츠의 알버트(Albert of Mainz)가 있다.

교회법에 따르면 그는 너무 젊었다.
그는 두 지역을 감독하는 주교였는데 마인츠를 관할하는 추가 관할 지역을 원했다.
이것 역시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로마 교황 레오 10세(Leo X)에게 (추가 관할 지역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메디치 가문(De Medici family) 출신이었던 레오 10세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어서 그가 가진 재정을 초과해가면서  취미생활을 즐겼다.
예술가이자 조각가인 라파엘로미켈란젤로를 만나보라.  

마인츠의 알버트(Albert of Mainz)가 교황에게 특별 허가를 요청했을 때, 레오 10세(Leo X)는 거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교황의 승인을 받은 알버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면죄부를 팔곤 했다.
수도사 마틴 루터는 이 모든 사실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루터는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했다.

그런데 왜 10월 31이었을까?
11월 1일은 교회 달력 상 “모든 성자의 날(All Saint’s Day)”로 특별한 날이었다.
1517년 11월 1일, 루터의 고향 도시인 비텐베르크에는 새로 수집한 성유물들(성인이나 순교자들의)이 대규모로 전시될 예정이었다.
도처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은 유물 앞에 무릎을 꿇고, 수천 년은 아니더라도 연옥에서 보낼 수백 년의 시간을 얻어가곤 했다.
루터의 영혼은 더욱 괴로워했다.
어떤 것도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교개혁기념일은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기념한다.

1517년 10월 31일 학자 마틴 루터는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 95개의 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95개의 반박문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에 있는 그의 동료 형제들 가운데 자아 성찰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95개 반박문은 논쟁 이상의 것을 촉발시켰으며  교회가 회복을 넘어선 상태임을 드러냈다.
교회는 개혁이 필요했다.
교회와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루터의 95개 반박문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참된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라고 선포한다.
이것만으로도 종교 개혁의 날의 의미가 충분하다.
교회는 복음을 망각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겹의 전통으로 도배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전통은 종종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얻게 하는 행위의 체계를 만든다.
바리새인들도 그랬고, 중세 로마 가톨릭도 그랬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종교개혁기념일은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기념한다.

종교개혁기념일은 무엇인가?
이날은 어둠 속에서 복음의 빛이 터져 나온 날이다.
이날은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날은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녹스 등 많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가, 신앙과 삶을 위한 유일하고 최고 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돕고, 교회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 교리로 인도하는 날이었다.
이날은 선교적 노력에 불을 붙였다.
또한 찬송가 저작과 회중 찬양으로 이어졌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설교와 설교의 중심이 되게 했다.
이날은 신학적, 교회적, 문화적 변화를 축하하는 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개혁기념일을 기념한다.
이날은 우리의 과거와, 종교 개혁자로 변신한 수도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더욱이 이날은 복음의 빛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두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상기시켜준다.



다섯가지 솔라(Five solae)

Five solae

1 Sola scriptura (by Scripture alone)

2 Sola fide (by faith alone)

3 Sola gratia (by grace alone)

4 Solus Christus or Solo Christo (Christ alone or through Christ alone)

5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다섯 가지의 솔라를 표방한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근본주의적 색체가 더 강해진 다섯 가지 솔라는 종교개혁 당시에는 혁명적 용어였다. '오직'의 뜻을 담은 Sola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갈망이 아니다. 사제와 교황에 의해 왜곡되고 빼앗긴 성경을 모든 교인들에게 되돌리려는 혁명 문구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

솔라 스크립투라는 사제들의 중보가 아닌  성경 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표방한다.
사제에 의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지 않고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권위가 최고이다. 성경 위에 그 어떤 권위도 올릴 수 없고, 올려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기준, 삶의 방식이 전통이나 인습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결정된다. 성경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자칫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솔라 피데는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사역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른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전통적으로 여겨왔던 행위 구원에 도전한다. 그가 주창한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표방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롭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구원(의롭게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솔라 그라티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한다. 오직 은혜라는말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사상도 들어갈 수 없다. 오직을 절대적 의미이며,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믿음이 인간에게 주도적 느낌이 있다면,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or Solo Christo)

오직 그리스도는 구원 사역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사역을 통해 완성된다. 그 무엇도 더해지거나 추가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행하신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의 모든 길이 완성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구원 사역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마친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기도 성경 구절


한글 개역 성경 기도 구절

창세기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창세기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에 대하여(부친 한승원 / 아재 아재 바라아재)


한국인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조하는 영광이라면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파와 좌파라는 양극화 현상으로 갈라진 축하라면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역사관은 누구나 동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치우친 역사관은 먼저 올바른 역사의식을 회복해야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물결치는 작품에 대해서 표면적인 노벨 문학상이기에 아무런 의식 없이 읽어가는 중에 나도 모르게 작가와 같은 편협한 의식을 갖게 될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이 흐려질까 두렵기도 합니다.


2:03 / 7:06

노벨 수상 전화받은 한강…"아들과 차 마시며 조용히 축하할래요" / SBS / 모아보는 뉴스



여류 소설가 김규나 작가의 비평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등 명작으로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를 향한 전국민적 찬사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김규나 소설가가 한강 노벨상 수상을 폄하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한강 작가가 광주 5.18, 제주 4.3 등 보수 정치 세력이 명백히 잘못한 역사적 진실을 작품에 담아낸 만큼 극우 성향인 김규나 소설가가 비난을 한 것인데요.

그러면서 그의 심각한 과거 발언들도 공개됐습니다.

한강 소설가는 지난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에 이은 두번째 수상이었고, 문학상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놀라운 업적을 쌓아올린 셈입니다.

그는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2014),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소설로 평단의 극찬을 받아왔고, 2007년 발간했던 채식주의자를 통해 2016 맨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명확한 역사 인식과 더불어 소설을 풀어내는 작가적인 능력까지 더 해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했는데요.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강 노벨상 수상 배아팠던 김규나 소설가 페이스북에 폄하글 게재해 논란

그러나 같은 소설가인 김규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폄하하는 글을 남겨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김규나 작가는 지난 11일 페이스북에 한강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광주 5.18과 제주 4.3까지 모욕하는 글을 작성해 시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규나는 페이스북에 "노벨문학상 수상 의미 - 노벨 가치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그리고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고 적으며 "(노벨상이) 동양권에게 주어야 했다면 중국의 옌렌커가 받았어야 했다"며 "올해 수상자와 옌렌커의 문학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게와 질감에서, 그리고 품격과 감동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해 "죄다 역사 왜곡"이라며 "'소년이 온다'는 오X팔(5.18 비하 극우 용어)이 꽃 같은 중학생 소년과 순수한 광주 시민을 우리나라 군대가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 순수한 시민을 우리나라 경찰이 학살했다는 썰을 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앞서 노벨문학상을 발표한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에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극찬했지만 노벨상 근처도 가보지 못한 김규나 작가가 오히려 이를 폄하한 것입니다.

김규나 소설가 정치성향 극우..과거 발언들 재조명

​한강을 디스한 김규나의 발언에 많은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정치성향이 극우이며 과거부터 정치적 활동과 발언을 해왔던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소설가지만 김규나는 문학 작품보다 조선일보 기고 칼럼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2019년 4월부터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이라는 조선일보 칼럼을 연재할 뿐만 아니라 여러 보수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정치성향을 숨기지 않았는데요.

​특히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절이라며 이승만을 찬양하는 남들과 다른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찬양,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말까지 남겨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정확히 그는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적으로 바로 평가하는 날이 올 때 그때 대한민국은 다시 설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김규나 나이는 1968년생으로 56세입니다.
학력은 수원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를 마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결혼 및 남편 여부와 자녀 유무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는 2006년 단편소설 '내 남자의 꿈'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등장했습니다.
다음 해인 2007년에도 단편소설 '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두 번째 수상을 기록했으며, 2005년과 2006년 각각 수필과 소설 부문에서 문예진흥기금을 수여받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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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역사왜곡‥中 작가 줬어야" 근거도 없이 막말 '경악'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운데 현역 작가가 수상 성과를 폄훼하는 발언을 쏟아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규나 씨가 한강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자신의 SNS에 올린 글입니다.

이 글에서 김 씨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평을 언급하며 "이런 소설들은 죄다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 대해 5.18의 멸칭으로 추정되는 표현을 쓰며 "꽃 같은 중학생 소년과 순수한 광주 시민을 우리나라 군대가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또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제주 4.3 사건이 순수한 시민을 우리나라 경찰이 학살했다는 썰을 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이 역사 왜곡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한림원의 저런 심사평은 한국의 역사를 뭣도 모른다는 것이고, 출판사 로비에 놀아났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며 "그렇게 수많은 '깨시민' 독자들이 열광할 거고, 거짓 역사는 진짜로 박제돼 버릴 것"이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또 "올해 수상자와 중국 소설가 옌롄커의 문학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현격한 차이가 난다"며 "둘을 비교하고도 그녀를 선택한 거라면 한림원 심사위원들 모두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혹은 명단 늘어놓고 선풍기를 돌렸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아님 여자라서?"라는 질문을 던지며, 한강의 성별이 수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도 덧붙였습니다.

김 씨는 오늘 새벽 추가로 올린 글에서도 "문단에서 내쳐지고 미움받기 싫지만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면 그건 아닌 것 같다"며 "한국이 탔으니까 좌우 불문하고 축하해야 한다고 하시는 분들은 문학의 힘을 모르셔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씨는 지난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조선일보 등에 원고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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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송 성구 자료(2024-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예수를 잘 믿으시오! / 교회



예수를 잘 믿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But whatever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 for the sake of Christ.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는 "야다"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오는 "기노스코"
안다는 것은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여자를 안다, 남자를 안다는 말은 여자와 남자와 경험이 있단는 것을 말합니다.
아는 것도 범위가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중에서 영적인 것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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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3가지 방향

크리스천투데이
4~5분

정성욱 교수의 Engagement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1. 유기적 교회론 강화
2. 선교적 교회론 무장
3. 종말론 교회론 지향

2019년 말부터 거의 2년 반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고 있다.
물론 아직도 코로나 확진자들이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크게 보아서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5년 간의 친사회주의적· 전체주의적 방향을 바로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 공고히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더 나아가 이민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유기적 교회론(organic ecclesiology)을 강화해야 한다.

조직신학 교회론의 두 기둥은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과 유기적 교회론이다.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건물, 직분, 회의, 부서 등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반면 유기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공동체성, 생명의 흐름,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를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140여 년 간 한국교회 역사는 조직적/제도적 측면이 유기적 측면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은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특별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은 대면 예배와 대면 사역이 이뤄질 수 없는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타개할 방법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사역이 주류를 이루면서 우리는 유기적 교회론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교회들이 팬데믹 시대 동안 생존과 성장을 구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론은 단순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으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몇 배로 강화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을 접붙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적 교회론이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이 봉사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직분이나, 부서나 회의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이들의 공동체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 성도간의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이다.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교회의 유기적 성격은 소프트웨어이고,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은 하드웨어이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잘 갖춰졌다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컴퓨터는 작동되지 않는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건물, 잘 정비된 직분, 탁월한 회의 준비와 분위기, 체계적인 부서들을 가졌다 해도,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약해지면 교회의 목적은 실현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과 목적이 교회의 유기적 성격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교회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식에 기초해서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으로 무장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존재론이 선교지향적이란 확신에 기초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선교는 교회가 실천하는 여러 기능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깊은 연구를 통해 선교는 교회의 여러 사역들 중 하나이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진리가 회복됐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진 공동체(the sent community)라는 의식이 강한 교회일수록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내부지향적인 근시안적 교회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만족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유람선적인 교회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외부지향적인 영성을 가지고,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구원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거룩한 영적 싸움에 임하는 전투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날 선교적 교회라는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나를 만족시키라”는 소비자 중심주의(consumerism)의 공격에 마구 흔들리는 연약한 교회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당신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실 때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라”고 명령하신다. “나를 만족시켜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그 존재 목적과 사명을 성취할 수 없는 역기능적 교회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셋째는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교회(eschatological church)를 지향해야 한다.

종말론적인 교회란 조만간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정절과 순결로 자신을 단장하는 교회를 말한다.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으로 무장한 교회를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예수님 재림이 가까왔다는 분명한 징조였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최근 원숭이두창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 직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고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징조들과 세계 선교의 현상황을 고려할 때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이 왔다. 필자는 현재 우리가 “배교”의 시대(살후 2:3)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조만간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환난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대환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통과해야 할 준비를 해야한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신랑되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의식으로 무장된 주님의 참된 신부로 성숙해 가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유기적 교회, 선교적 교회, 종말론적 교회라는 방향이다. 부디 성령께서 우리 조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 방향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드러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성욱 교수.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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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가 본 한국교회 10년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윤화미
3~4분

역사상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가파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침체의 길로 빠져드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미래학자가 진단하는 한국교회 위기와 30년 뒤 마주할 교회는 어떤 모습일지 들어봤다.
 

“한국교회, 잃어버린 10년이 다가온다”

성장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의 유럽화’ 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지금, 한국교회를 향해 ‘10년 뒤 변화를 준비하라’는 미래학자의 예견은 제목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가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를 진단한 책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펴냈다.

미래학자이면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의 지도 아래 부목사로 사역한 경험도 있는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를 향한 염려와 다가올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분명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주신다는 점을 또한 강조한다.

16일 열린 신간 기자간담회에서 최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변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 시기, ‘불확실성만이 유일한 확실함’이라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7년의 풍년과 흉년을 준비했던 요셉의 지혜가 절실하다”며 “책을 통해 한국교회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7년의 흉년’ 시작된 한국교회 위기의 모습은…

최윤식 박사가 예측하는 2020년 한국교회의 미래는 창세기 41장의 일명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 시나리오다. 풍년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기를 거쳤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대 흉년기를 맞으며 극심한 침체기로 접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먼저 최 박사는 외형적인 면에서 2050년한국교회 성도 수가 300만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고,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주일학교 숫자는 대략 30~40만 명으로 추락, 교인 중 60~70% 이상이 은퇴자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과 교인 수의 감소로 개척교회가 교회 문을 닫는 상황이 속출하고, 교회 시장 법칙이 자리를 잡아 초대형 교회들만 살아남는 기형적인 목회 환경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내부적으로는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한 교인들의 신앙 모습이 교회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위기가 된다.
세계화 물결이 자본, 노동, 문화, 종교를 국경 없이 넘나들어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변화된 교인들이 등장한다.

노마드교인, 코쿠닝 성도, 브랜드 교회, 다운시프트 신앙, 트랜스챤 등 이전에 보지 못한 성도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최 박사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부는 심각한 영양 실조에 걸린 상황이다.
복음의 열정은 시들고, 주일마다 외쳐지는 설교는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며 “교회가 근원적인 에너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의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현재 위기가 지속되고, 뼈를 깎는 갱신이 없다면 두려운 미래가 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이 위기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해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시대적 소명 감당하는 교회, 제2부흥기 이끈다”

벼랑 끝에 선 한국교회, 지금부터라도 위기를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최 박사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10년은 또 다른 제2의 부흥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다양한 대책을 세워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그 전환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교회가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전 건축 등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가 아닌, 사람과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새로운 활로 모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최 박사는 “성장 한계의 늪에 빠진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의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영성의 수준을 높이고, 목회자의 자질을 높여 복음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새로운 시대에 위기를 감당하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제2의 부흥기에 다시 일으키시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소멸시킨다”며 “전환기에 많은 교회들의 영향력과 교세가 자연적으로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박사는 그의 책을 통해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공론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교단 차원에서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서 교회가 미래에 갖춰야 할 시대적 소명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목회자들에게 전수했으면 좋겠다”며 “기존의 리더십과 시스템 구조의 혁신부터 시작해 모든 신앙생활 방식이 새롭게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자 소개 - 최윤식 박사

미국의 권위 있는 미래학 정규과정인 휴스턴대학교 미래학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학위를 받은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아시아미래협회 회장, 전경련 최고위 과정(미래창조혁신) 및 전략포럼 주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또한 ‘소망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국교회의 미래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2030년 부의 미래지도>, <2020 부의 전쟁 in Asia>, <그들과의 전쟁> 등이 있으며 <2030년 부의 미래지도>는 출간 이후 일본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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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무너져야 할 것은 목사중심 신앙생활

구권효 기자는 12년째 뉴스앤조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 기자다. 

기독교 독립언론사 뉴스앤조이가 지난 4월 30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교회에서 분쟁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에서 기존 교회와 목사로부터 상처 입은 마음을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기록한 책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다”를 출판됐다.

저자인 구권효 기자는 언론이 분쟁 교회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피해자의 마음에 집중하고자 회복적 정의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한다.

Q. 기획취재를 통해 바랐던 목적이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교인들이 교회 분쟁을 겪을 때 언론 기사 중에 교인들의 마음에 집중한 기사는 별로 없다.
사건 초반에는 언론들이 교인들의 억울함이나 배신감을 성토하는 내용을 한두 문장 담긴 하지만 그 이후로는 대부분 소송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결국 누가 졌고, 누가 이겼다는 소송의 결과만 보도되고, 소송이 끝나면 보도가 더 이상 안 나온다. 하지만 교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시간이 가거나 소송의 결과가 좋게 나온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교회 분쟁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집중하고 싶었다.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이야기 있는데, 어떤 회복의 과정이 있었을지, 그렇게까지 상처받고 새로운 공동체를 또 세우게 된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과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둘째는 교회 분쟁 원인은 담임목사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목사들이 그 무게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한 다섯 교회뿐만 아니라 사실 분쟁이 생긴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 담임목사가 진심으로 엎드려서 사과하고, 거취를 교인들에게 맡기고, 자기 잘못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사실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교회들이다. 책을 통해서 목사들이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셋째는 분쟁도 한국교회의 역사다.
누군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것일지 몰라도 분쟁 교회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Q. 기사로 이미 나온 내용들을 굳이 책으로 엮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책으로 낼 생각이긴 했다. 취재를 해보니까 시간이 가면서 교인들이 새롭게 세운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이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인터넷 기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통해 그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분쟁 교회 교인들한테도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낸 것 같다.

Q. 서론에서 책의 취지를 “‘회복적 정의’의 렌즈로 교회 분쟁을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언론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중에 잘못한 가해자에게만 너무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근데 정말 중요한 것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가해자의 처벌도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회복에 있어서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보도할 때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는 일도 기본적으로 하되 교인들의 마음과 상처와 피해의 회복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시도를 좀 남모르게 계속해 왔다. 2021년 12월에 발행한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이라는 시리즈가 역시 그런 취지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통상적으로 가해자가 교단으로부터 징계나 형사처벌을 받으면 사건이 끝났다고 여겨진다. 가해자 처벌은 사건의 끝이 아닌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의 시작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언론이 너무 무관심하다. 그래서 피해자의 회복에 집중한 내용을 담고 싶었고, 나름대로 남모르게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책의 출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구 기자는 서문에서 "분쟁 교회의 역사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라며 분쟁 교회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을 통해분쟁 교회의 역사는 '욕(辱)의 역사'에서 '영(榮)의 역사'로 반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평화나무)

Q.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인터뷰이(interviewee)들께서 말씀을 잘해주셔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서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간혹 과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기자 입장에서 그런 반응들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책과 기사를 통해서 이미 밝혔지만 그걸 통해서도 교회 분쟁이라는 게 10년이 흐르고,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을 직면하기 힘들 정도의 상흔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상 깊었던 점은 어느 교회의 분쟁과 회복에 관한 기사를 써서 교인들에게 보여드렸는데 기사를 보신 분들이 교회를 나오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치유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본인들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진짜 옳은 길인가? 이게 맞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때 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Q. 본인 스스로 교회를 떠나게 된 경험도 있고, 교회의 분쟁을 취재하면서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독립언론사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좀 쉽게 대답하자면 계속 ‘적’이 나온다. 해치웠나 싶으면 곧바로 ‘적’이 나와버리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긴다.(웃음)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하면서 연차가 계속 쌓여가는 상황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Q. 교회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고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다고 해석된다.

아니다. 잘못된 해석이다.(웃음) 애정보다는 당위성에 가까운 것 같다. “교회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애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인 것 같다.

Q. 서론에서 “분쟁의 역사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다. 무너져야 할 것들은 무너질 테지만 그런 중에도 새롭게 일어나는,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무엇이 무너져야 하고, 무엇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다소 납작한 표현인 것 같기는 하지만 한 가지만 뽑으라면 목사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무너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목사를 과도하게 의지하고,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관행들이 실제로 권위적인 목회자를 만든다. 교인들도 권위의식이 없는 목사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신앙생활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가나안 교인이긴 하지만 나는 평등한 교회를 꿈꾼다. 목사 스스로 권위를 많이 내려놓는 것이 멋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너무 창피해하지 말고, 성도와 목회자는 똑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기능이 다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구권효 기자는 교회에서 분쟁을 겪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목사중심의 신앙생활'이 무너지고, 목사와 교우 사이에 위계가 없는 '평등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꿈꾸고 있다. (사진= 평화나무)

Q. 한국의 여러 교회가 상처 입고 회복 중에 있는 교회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쓰면서 하나 배운 것은 회복의 모습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상처를 교인들 사이에서 꺼내보기 어렵고 힘든 정서가 있다. 반면에 어떤 교회는 1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너무 활기차고 그런 교회가 있다. 그러니까 고정 관념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 분쟁을 회복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정서를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건 살짝 위험하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는다면 교인들 스스로 회복하는 모습들을 살피는 게 중요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쟁 교회를 경험해 보신 많은 분들이 평소에는 교회 정관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담임목사가 사고 친 그제야 정관 찾아보고 민주적인 교회운동 공부하면서 이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교회 분쟁에 관해 물어볼 데도 없고 잘 모르기도 해서, 컨설팅해 준답시고 돈 요구하고, 정답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사짜’들이 많기 때문에 제대로 컨설팅해 줄 수 있는 기관과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을 정도만 체크해 주는 컨설팅은 필요하다.

Q.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독자들로부터 기대하는 변화나 개선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얼마 전 뉴스앤조이의 요청으로 삼일교회에 다니셨던 권대원 집사님이 서평을 써주셨다. 그분은 전병욱 사건 때 앞장섰던 분이다. 그분의 서평을 보는데 내가 다 위로를 받고 ‘꿈보다 해몽’이었다. 권대원 집사님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서 너무 잘 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교회 분쟁을 겪어본 사람들은 좀 남다르실 것 같다. 지금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보시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쟁이 일어나고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찾고 혹은 만들고 있는 분들에게 그러한 시도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런 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하나님 앞에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려는 그런 노력들은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설령 그게 잘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잘 모를 수 있지만 말이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책을 몇 권 냈는데, “이게 발행할 만한 내용의 글인가? 그럴만한 책인가?”하는 생각에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있고,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회사에서 함께 출판을 준비하면서 고생한 직원들도 있어서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많이 사주십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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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해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5가지’

김두현 21C목회연구소 소장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두 트랙의 조화이다. 하나는 목회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이다. 목회의 기능은 예배 전도 훈련 섬김 돌봄 기도 교육 교제 등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는 개인은 물론 모든 회중에게 유익을 주어 궁극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세우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목회는 목양(牧羊) 활동이다. 목회자는 매년 목회 계획을 세워 교회의 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동기 부여를 한다.

그러나 목회를 개발하고 활성화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는 않는다. 제도가 잘못됐거나 오늘날 교회 현실과 맞지 않으면 교회 성장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는 21C목회연구소를 통해 지난 21년 동안 교회를 세우는 목회 연구에 전념해 왔다. 목회자들에게 매주 강의를 하고 멘토가 돼 코칭을 하면서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화된 목회 자료 개발에 힘써왔다.

전반적인 목회 프로세스를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도 힘을 다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러 제도가 목회의 발목을 잡거나 걸림돌이 됐다.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가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5대 제도 개혁이 이뤄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첫째, 원로 제도

모든 교단이 시행하고 있는 교회 내 원로목사, 원로장로 제도는 변화돼야 할 우선순위에 해당한다. 한국교회 80% 이상의 작은 교회들은 원로 목사나 장로 제도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20% 정도의 교회들은 원로 제도로 인해 교회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미래 한국교회를 위해 기득권 당사자들은 이제 과감한 결단을 보여야 한다. 은퇴하면 모든 직함을 내려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를 따라 우리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청빙 제도

목회 패러다임이 개척에서 청빙으로 변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목사 청빙과 관련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청빙 이후 교회 내홍과 충돌, 성장 저하와 분열이 발생하는 교회들이 절반을 넘는다. 목사 청빙 제도에 혁신적이고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청빙 당사자 목사는 물론 청빙하는 교회 인사권자들 모두가 획기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현 관행인 신문 광고, 이력서 제출, 설교 테스트, 연고주의는 탈피해야 한다. 대신 인재 양육 시스템 개발과 네트워크를 통해 개 교회에 맞는, 존경받는 목사를 공정 신뢰 섬김으로 모시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당회 제도

당회는 순기능일 때만 필요하다. 만일 당회의 신분 자리 권위가 사역보다 우위를 점하면 그 당회는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한국교회 대부분 당회는 회의 정책 의결 중심이다. 당회원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목회의 팀워크 증진과 사역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요즘엔 전도하거나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명자들이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있다.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당회 제도를 운용하는 교회들은 뼈를 깎는 희생이 필요하다. 더 나은 21세기 목회 환경을 위해 당회원 모두 새로운 각오로 사명을 다해야 한다.

넷째, 세습 제도

세습 혹은 대물림은 한국교회 중 0.1% 교회에만 해당하는 소수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전체가 세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은 초대형 교회들의 책임의식 결여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70~80%는 자립의 위기에 놓여 있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모든 일에 신중하고 롤 모델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따라서 중대형 교회들과 목사는 희생하는 각오로 후임 목회자 제도에 본이 돼야 한다. 절대로 비판받거나 악영향을 주는 교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총회 제도

모든 한국 기독교 교단 총회는 정치를 위한 총회에서 교회를 세우는 총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총회장과 임원을 뽑는 선거 중심이 아니라 실제적인 처치 플랜팅을 통해 교회 개척과 작은 교회 네트워크, 젊은 세대 목회자 지원, 비전과 정책 연구 발표, 교단 간 연합을 통한 혁신적 교회 세움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총회가 해야 할 최우선 사업은 교회 개척과 지원, 차세대 목회자 양성과 공공선의 영향력 확장이다.

장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지배권을 갖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교회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이끄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리고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결혼 관계를 해치는 셈이다.”

어떤 제도든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해쳐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나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5대 제도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이 명령하시고 사도들이 이행한 사도행전 교회의 처치 플랜팅을 본받자. 그리하여 한국교회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목숨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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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보통 회개를 무언가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 정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metanoeō)는 잘못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라면 누가 그 길을 계속하려 하겠습니까? 내가 가는 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목이라면 누가 그 길을 고집하겠습니까? 인간의 눈은 보이는 욕망만 보고서 좇아가지요. 바로 그 길을 성경에서는 넓은 길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지요. 그런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게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 700여 년 전의 선지자인 이사야는 그런 예언을 선포했지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거기에서 너희란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지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닦도록 한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도록 촉구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700여 년 뒤에 세례요한이 똑같이 선포하지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 1:23)." 세례요한은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 그를 위해 광야 빈 들에서 외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그가 외친 회개가 무엇입니까? 옷이 두 벌 있는 자, 옷이 많은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게 회개라고 했지요. 또 먹을 게 있는 자,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사는 자도 먹을 게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것, 그것이 회개라고 했지요. 세리들에게는 또 뭐라고 합니까? 부과된 세금 이외에는 더 거두지 않는 게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하지요. 군인들은 또 무슨 회개를 요청합니까? 사람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아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알지요. 그것이 인간의 천성으로 되는 게 아님을 말이지요. 오직 그의 심령 속에 죄와 거짓을 몰아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어야 그 삶이 가능함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외치는 소리를 넘어 삶을 회개시키는 주체임을 밝히고 있지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이지요. 나는 비록 회개의 촉매제 역할만 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회개의 주체임을 밝힌 것이지요.

사실이 그렇지요. 그 어떤 유능한 목사나 선교사가 와서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 삶을 회개하며 사는 게 그분의 설교나 권면으로 되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 가능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곁에서 간구하고 계시고(롬 8:26)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요 16:13)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분께 인생의 항로를 내어 맡기는 자들은 참생명의 길을 걷게 되지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테네 입구에 들어선 바울의 심령이 격분했지요. 그곳 시가지에 온통 우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여러 석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섬기고 있었지요.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전의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였지요. 그도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조각하던 석공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돌을 깎아 여러 형상의 우상을 만들던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 석상을 사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지 않을까요? 왜 저들은 내가 만든 이 돌 형상을 신으로 떠받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게 무슨 냄새를 맡기나 하는 것인지, 이게 무슨 귀가 있어서 듣기나 하는 것인지(시 115:6) 하고 말이지요.

그건 우리가 생각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면 기가 막힌 형상으로 된 조각상들이 있지요. 나무로 혹은 돌로 된 조각상들 말이지요. 또 무당집에 가면 대부분 무엇을 꽂아 놓고 있나요? 대나무로 된 깃대지요. 그것들이 무슨 신이냐며, 그것들이 무슨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냐며, 그것들이 사람의 심령을 감찰할 수 있는 것이냐며 그냥 무시해 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교 연구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갖가지 나무와 돌로 된 조각상 앞에 사람들이 빌고 빌면 그 마음에 귀신의 영이 자리 잡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건 부적만 해도 마찬가지지요. 중국에서 들여오는 300원짜리 부적이 우리나라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1억도 가고, 10억도 가지 않습니까? 그 종이쪽지 하나가 무슨 영험한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그걸 부적이라 믿고 빌고 비는 사람들의 심령에 귀신의 영이 자리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 돌이나 나무 조각상이 아니라, 부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나무 깃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이요,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과 거짓의 영이 문제지요.

바울이 아테네 입구에서 격분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바울이 그것들을 부수고 깨트리고 목을 쳤던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것들을 부순다고 한들 귀신의 영이 그 속에 깃든 것도 아니고, 그 속에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보다는 그것들을 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는, 악한 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를 바르게 회개시키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대인의 회당과 토론장 아고라에서 쾌락과 금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했지요. 그 주된 내용은 바로 예수와 부활, 곧 죄와 사망과 어둠의 영을 깨트리시고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마음 문을 연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호기심이 있었던 까닭에, 바울을 데리고 논쟁의 종결지를 뜻하는 아레오바고로 갔지요. 그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함이었지요. 그곳에서 바울은 우선 세 가지를 전했다고 했지요. 첫째,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으로 손으로 지은 형상이나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나 건물 안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둘째,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손으로 섬김 받기를 원하거나 적선받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 셋째,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갈비뼈를 통해 하와를 만드사, 그 후손으로 모든 혈통을 잇게 하셨지만 그들이 죄를 범하자, 그들을 모두 흩으셨고 그들의 수명도 120세로 정하셨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유한함을 아는 인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다른 신들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마 1:23)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회개를 촉구

오늘은 그 다음 부분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연이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가장 큰 골자는 그것이지요. 하나님은 너희들이 섬기는 그런 신과는 다른 분이요,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이 새긴 조각이나 형상에 비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넘어가셨을지(hyperoraō) 모르지만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소개받고 알게 되었으니, 다 명하여 회개하도록 하셨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그 증거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확고히 하고 계시고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니, 그것이 곧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이자 곧 신실이다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차를 사도 보험을 드는 것은 사고에 대한 예방 차원이 제일의 목적이지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도 그 부분이지요. 머잖아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죄와 사망을 깨트리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뿐이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보증도 없고 그것보다 더 신실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테네 사람들이 해야 할 게 있다면 그분 앞에 나아와 회개하는 것뿐이라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이 아테네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를 참된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내버려 두실지 몰라도, 이제는 아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지요. 제 아이들이 지금도 어린데, 더 어렸을 적에 무심코 어린이집에서 남의 물건을 가지고 올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잘못인지 모르고 가져왔었죠. 그때는 저와 제 아내가 용서해 주었지요.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이니 다음부터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고 다음에 한 번 더 가져왔을 때는 단단히 혼을 내 준 적이 있었지요.

그게 가벼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것이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한 것 아닙니까?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모를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지만, 내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그때부터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깊이 이야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자기 감정에 치우쳐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에게 권면했겠지요. 그렇게 했기에 그들 중에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디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다고 밝혀 주고 있지요. 단지 바울 자신의 말로 했다면 결코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자신의 유한함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면 되겠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매개체로, 촉매제로 쓰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사야처럼, 세례요한처럼, 주님을 위한 길을 닦는 통로로 쓰이길 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부분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를 통해 찬양과 영광을 받기 위함이시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길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분의 길을 닦는 통로가 되는 데 있지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내게 주어진 일을 박차고 모두가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지요. 지금 주어진 일을 통해 복음 전도자, 복음 증거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어떻게요?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면 됩니다. 그것 하나면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 찬송하는 삶이 되고, 복음을 위한 손과 발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뭘까요? 그것은 징계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요 2:15) 호된 야단을 친 적이 있으시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한 거래 수단쯤으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목적쯤으로, 그밖에 내가 죽어 어디에도 갈 데 없다면 그래도 천국이라는 보증수표를 얻고자 하는 이유 등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상을 엎으셨지요. 오늘 우리들은 마음의 일그러진 형상들을 갈아엎는 회개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 징계를 촉구하시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실 한국교회에 징계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지요.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일반 교우들이 잘못을 해도 징계를 하지 못하지요? 이유가 뭘까요. 징계를 하면 그 즉시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리기 때문이고, 교인들은 '이 교회만 있는 줄 아냐, 얼마든지 나를 받아 줄 교회가 널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징계를 못하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자신의 심장을 때리는 채찍과 같은 말씀보다는 축복, 성공, 건강 강좌 같은 설교만 좋아하는 쪽으로 변질돼 있지요. 설교 말씀을 통해 심장을 때리는 것은 귀를 가려서 듣지요. 어떻게 그런 교회에 주님께서 살아 계실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라면 초대교회의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가(계 2:1) 이미 떠난 지 오래겠지요. 겉으로는 교회인 듯하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났고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난 교회 말이지요.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주보 뒷면에도 기록한 바 있지만,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온 교우 한 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분의 지난 삶은 죄와 폭력으로 얼룩진 삶이었지요. 젊어서는 스스로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길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지요? 이 세상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니, 이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오직 저 영원한 하늘 생명을 바라보도록(골 3:1) 촉구하는 그분의 음성이지요? 이 세상에서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교인이 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다면(마 23:15)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그런 음성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만 교회에 소속돼 있는 선데이 크리스천 집사요 장로요 권사로 살지 말고, 오직 속사람을 새롭게 하여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살라는, 주님의 음성이지 않을까요?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지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지셨나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으셨나요? 우리에게 저 영원한 생명, 천국을 허락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 생명은 교회에 속해 있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는 직함으로 얻는 게 아니지요. 그 생명은 예수의 심장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죄송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려도 그분의 심장이 없는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비록 초라해도, 그분의 심장을 지니고 사는 자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입성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라면,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여러분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우리 생명은 아침에 내렸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약 4:14)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코끝의 호흡(눅 12:20)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찢으셨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닫아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계 3:7)이 바로 그분이지요. 그렇기에 이 시간 욕망의 영에 붙잡혀 살아왔던 것, 거짓과 불의의 영, 미혹의 영에 이끌려 왔던 것,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신 6:18)보다는 나 보기에 좋은 길만 택하여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오늘 당장 하나님께서 내 코끝의 호흡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비록 아테네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인이신 줄 모르고 살 때는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을 때는 결코 넘어가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 같지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 물질, 재산, 자녀들, 재능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주인인 줄 알고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보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며 더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습니다. 오! 주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을 떠난 우상들이오니, 이 시간 내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지울 수 있게 도우시옵소서. 이제부터는 나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사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길을 택하여 사는 당신의 종들이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도 건물도 초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지 않는, 마지막 때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지니며, 손과 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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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고치고 개혁해야 할 것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첫째, 주일예배 시간에 드럼과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오르간과 피아노 위주의 경건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둘째, 주일 오후 예배를 주일 저녁 예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이다.
 
셋째, 현세적인 성공과 축복 중심의 메시지를 십자가 중심의 복음적 메시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넷째, 현세적이고 정치·경제·문화적인 관심으로부터 종말적이고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우선적인 관심이었다.
 
다섯째,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소금과 빛’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섯째, ‘묵상 기도’라는 말을 ‘묵도’ 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 2:4)고 했다.
 
일곱째,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 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 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6:44). 이것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여덟째, 나의 옳음을 강조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그름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위선과 교만과 분열의 자세를 이단이 아닌 다양한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을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연합의 자세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아홉째, 너무 부해지고 강해지고 커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려는 소원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째, 과시적인 행사 위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위주의 삶과 사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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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Wellbeing)의 삶에서 조심해야!

하나님은 신명기(申命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복된 삶을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 언약 백성은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 말씀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신 6:1-3). 실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신명기 6장 10-11절에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 6:10-11)

“크고 아름다운 성읍”은 오늘날 빌딩 숲으로 뒤덮인 현대 도시를 생각나게 한다.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은 오늘날 ‘LED Ultra Super HD 초슬림형 TV’와 ‘최신 스마트 폰’과 ‘고급 냉장고’와 ‘편리한 식기 세척기’, ‘예쁘고 고급스런 식기 세트’로 가득한 부요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은 많은 수입을 창출하는 IT사업이나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장을 비유한다.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소유해 “배불리” 먹는 삶은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부유한 삶을 암시한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복지국가의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다가 40년 동안 척박한 광야의 삶을 뒤로하고 가안 땅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 젖과 꿀이 흐리는 땅의 복을 누렸다. 이 복은 그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조심하라”(신 6:12)는 경고였다. 복지국가와 웰빙의 삶을 살 때 조심해야 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 때에는 특별히 조심할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던 시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였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번성할수록......범죄......”(호 4:7) 했다. 

조심하다(솨마르. 8104)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이 조심하며 지켜야 할 것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12절)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13절)
셋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13절)
넷째,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14절)

웰빙의 삶에서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복지국가의 부요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 매우 시의적절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부요가 오히려 영적인 빈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하는 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점에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을까? 

혼합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조심하다’(shamar)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쳐 지키다’라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가나안 땅의 세속 이방 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in the world)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not of the world) 살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세워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확신 있는 삶을 살며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도록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롬 12:2).
그렇게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명기 6장 4-6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4-6)

그 유명한 ‘쉐마’ 구절이다. 성인 유대인이면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이 구절을 암송해야 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도 유대인들이 암송했다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적당히 이방 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기본이며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6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연애하는 남녀를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연애편지를 받으면 그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 읽고 또 읽어 머리에 암송할 정도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말은 본래 “마음 위에 두다”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이다. ‘새기다’고 번역한 성경은 중국어 외에는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쁜 번역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읽고 묵상하는 것과 암송을 생각하게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곧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삶, 그것이 바로 조심하는 삶이다.

  만약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질 것이다. 다른 종교도 포용하는 관용(tolerance)의 자세를 취하게 될 수 있다.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세속적인 가치와 매력을 따라가면서 점점 영적인 가난에 빠져들어 갈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올곧게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한국교회의 쇠퇴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까?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면 다음세대는 희망이 없다. 물질적으로 번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에 처할 수 있다. 성경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사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 상상할 수 없다. 출애굽 다음세대가 어떻게 이렇게 한 세대 만에 영적으로 몰락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세대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자녀세대에 이런 처참한 상황이 도래했단 말인가? 부모세대는 웰빙의 시대에 조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신들을 쫓아가며 혼합주의에 빠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삶과 자녀들의 학벌과 직장은 대단했고 소위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빈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다음세대에 나타났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지금 현재 유럽 교회와 미국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도 그런 조짐이 벌써 시작되었다. 부모세대의 세속적 삶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쳐 점점 다음세대가 힘을 잃고 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의 부재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을 겸하여 섬기는 부모세대는 신명기 6장 7-9절을 말씀도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언약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복을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자녀에게 열심히 가르쳐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손목에 매고 눈 사이에 붙여 표로 삼았다. 이것을 ‘테필린(Teffilien)이라고 부른다. 손목에 성경 구절이 쓰인 밴드를 감았는데 이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마에 붙인 성경구절을 담은 자그마한 상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씀의 선포라고 볼 수 있다. 집 문설주의 성경구절이 가족 식구들을 위한 것이라면 바깥문의 성경구절은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선포였다. 이렇게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웰빙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았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가나안의 다른 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리가 없다. 결국 부모의 신앙이 나태해 지고 나약해 지자,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도 소홀히 하게 되어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 엘리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하지 않았다. 엘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긴 결과였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보다 자녀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던 방식 그대로 엘리도 걸어갔던 것이다. 혼합주의에 빠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명령을 잊어버리고 실천하지 않음으로 그는 아들도 잃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하나님의 성직자가 이 정도였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언약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다. 웰빙의 삶을 살아가는 부모세대인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모는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을 배우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예배로 찬양해야 한다. 그런 부모세대는 자녀에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부지런히 교육한다. 신앙적으로 조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녀의 신앙교육은 꼭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어떤가?
우리교회 다음세대가 가야할 길은 이상이 없나?
더 구체적으로 우리 아이가 가야 할 길에는 이상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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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와 무교 


무교를 단지 원시적인 종교로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무가(巫歌)는 오랜 역사 속에서 타종교와 통속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축적된 무당의 노래이며 결코 그 원래의 것을 보존하고자 했던 노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교가 주술신앙(呪術信仰)일 뿐 교리도 윤리도 없기 때문이다.
무교는 단지 타종교와 혼합하여 신령한 요소들을 그대로  흡수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 뿐 발전된 교리나 윤리를 갖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교는 타종교와 대중문학을 흡수해서 발전되었으며, 또 그 반대로 타종교와 전통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현대적 감각을 가진 역사적으로 축적된 종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교의 발전은 불교와 기독교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전통사상과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종교는 무교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 때문에 무교의 발전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전통 한국문학의 장르에 대한 훌륭한 지식이 필요하며, 무가의 역사와 전통문학과의 관계를 추적해야 한다.

무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 시대 특히 제정일치 시대에는 대중 종교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에 무당 비슷한 인물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에서 거듭 등장하고 있고, 유동식은 1450여년전 신라시대의 화랑도에서 이미 무교의 큰 영향을 발견하고 있다. 원래는 무교가 이들 삼국의 주요한 세계관 이였다. 그러나 무교는 불교, 유교, 도교와 같은 중국문화의 소개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교는 점차 하류계층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계층에 관계없이 여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는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단군신화나 팔관회(고려 때 해마다 대궐 안에서 동짓달이면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큰 규모의 의식)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무교가 민중생활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후 이조선의 유교정책의 영향으로 무교는 하류층의 민간신앙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이 무교는 민간신앙이 되어 한국의 종교적 바탕 또는 정신적 바탕이 되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근저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대 종교들도 이 무교신앙의 바탕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유동식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쉽게 수용되는 이유와 기독교신앙이 기복신앙으로 흐르는 이유 그리고 교역자들이 무당적인 중재역할을 하게 된 이유를 여기서 찾고 있다.
* 자료 출처 /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p. 15-39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왈러벤(B. C. A. Walraven)은 한국 무교를 원시 종교로 보지 아니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 혼합 발전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는 무교의 역사적 발전을 무가의 변천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고 믿는다.
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큰 변화를 겪어왔고, 그 시대 시대의 영향들을 흡수하여 왔다는 점이 자료들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무가가 역사 속에서 수정되지 않은 채 수세기에 걸쳐서 변함없이 전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금세기에 수집된 무가는 역사적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입증할 뿐이라고 말한다.

왈러벤은 현금의 무가의 문학 형식이 이조선 후기에 등장한 대중문학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18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통속문학의 영향은 무가의 형태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무가의 제문(祭文), 제문구조, 주제들이 이들 문학의 구조와 유사할 뿐 아니라, 무가의 형식이 새로운 통속문학의 등장과 그 영향 아래서 크게 변화를 겪어왔음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가에서 일부 설화 주제들과 또 이들 주제들의 일부 연관성은 상당히 오랜 고대의 것일지 모르나, 무가와 설화문학의 다양한 양식사이의 관계는 무가의 형태가 시대와 함께 변천되어 왔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현대 무가조차도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며, 본래 양식을 보존하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무가는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무가가 무당의 직접적인 신앙의 표현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왈러벤은 무가의 역사가 무당의 역사와 한국 사회와의 관련성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무당이 18세기와 그 이후의 통속문화의 요소들을 상당히 흡수하였다는 사실이 단순하고 무식한 농부들과 어부들이 아닌 사회의 중간계층인 하급 공무원들과 관리들의 문화가 무당에까지 침투될 수 있는 채널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대개는 광대가 여기서 중간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광대는 사회의 상류계층에 무교적 요소들을 상향전달함으로서 판소리 창작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그 요소들을 하향전달하였다. 광대로부터 상류계급의 문화적 요소들을 빌린 무당은 차례로 일반 대중사이에 이 문화를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무교는 종교 혼합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한국인 심성에 흐르는 또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무교신앙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타 종교나 통속 문학에서 신령에 관한 부분을 받아 들여 무가를 발전시켰거나 그 시대적 상황을 표출하였다 하더라도 교리도 윤리도 없는 무교는 여전히 주술신앙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무교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무교가 타 종교나 문학에서 받은 영향보다는 타 종교에 끼친 영향 특히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B.C.A. Walraven, Muga: The Songs of Korean Shama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