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거저거저 감사합니다.
우리 성진이가 성민이를 만났답니다.
어느 미국교회에 있다고 하네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계속 뉴욕에 머물고 있는것 같습니다.
제가 자세히 모르겠어요…
기도드릴뿐입니다.
목사님도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기도드려주세요.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답신)
좋으신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주님의 보혈로 덮어
새 생명의 길
새로운 삶을 회복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My 성경필사 & 간증문》
제 "유산"으론 남길 2가지,
첫번 째는 "성경필사"
둘번 째는 "간증문"입니다
지금 "성경필사"의 <이사야 50장>부분을 기록하며,구역을 완성하면 필사된 노트들을 먼저 제본하고,신약부분이 마치면 전부 합하여 제본할 계획~
또 며칠 전에 "간증문"을 완성하기 전에, 한 부분을 남겨두고, 우리가정의 "큰아들(사위)"인 자리를 채워지면 "간증문"이 완성되어 몇권들을 인쇄할 계획입니다
큰딸에게도 말없이, 이 두 가지"원하고 소원하는 것", 이 모드는 제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목사님께 고백합니다
또,"간증문"은 자세히 기록하여,자녀들(다음세대)에게 남길,제 인생(1954년~2023년),70년의 역사를 저의 역사만이 아닌,세계&우리나라까지 역사를 같이 살아온 과정을 기억대로 기록하고 엮은 "간증문"입니다.
<답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앙의 흔적을 새기며
후손들을 위한 믿음의 그루터기를
만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주님은 아시지요
주님을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의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요한이 잉태될 때부터 그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항상 “내 뒤에 오실 이가 나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막 1장).
그리고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막 1:4).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이 맡은 사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회개”이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생각과 마음을 깨끗하게 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회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세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례에서 이전의 죄(원죄 포함)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님을 육으로 맞이할 때(세례요한의 때)나 영으로 맞이할 때(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날)나,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만 믿고 고백하면 되었으나,
오늘날의 세례를 통해서는, 여기에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 더해진다.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만을 믿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이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복음)를 믿고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
즉, 요한의 물세례(회개)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령세례(복음)가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세례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증거 한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늘 연관이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의 신성에 관하여 우선 살펴볼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영원하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히9:14)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님을 받아들임으로만이 가능하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내가 주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 가며, 주의 임재에서 벗어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는 거기 계시며, 내가 지옥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하여도, 보소서, 주께서는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다윗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곳에도 주의 영이 계셔서 진노와 심판으로 권능을 나타내심을 믿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누가복음 1:35에서 성령님은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1:2). 『그는 그의 영(하나님의 영)으로 하늘들을 단장하셨고...』(욥26:13). 우주, 성단, 은하, 이 모든 것은 성령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누군가의 작품이다. 결코 흔히 말하는 조물주나 잡신이나 마귀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을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과 이 하늘들 아래로부터 망하리라...』(렘10:11).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는 성령께서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0-11). 영원하신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그러하시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요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영원하시고 모든 것을 아실뿐 아니라 거룩하시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서 ‘거룩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다. 신약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거룩한 영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과는 구별된다. 불결한 사람들의 영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주께서는 또 주의 선하신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고...』(느 9:20).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갖고 계신다. 이러한 성품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셨으며, 무소부재하지 않으셨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ㅇ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셨을 때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실 때,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셨고, 피를 흘리셨으며, 굶주리셨고, 갈증을 느끼셨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으셨던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창조에 참여하셨고 구원을 이루시며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예언하게 하시고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번째 인격이신 분이 하시는 일이다. 창조에 관하여는 욥기 33:4에서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라고 말씀하신다. 또 시편 104:30에서 다윗은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이 창조되었으니...』라고 말한다. 구원에 관한 성령님의 일은 고린도전서 6:11에서 『...너희가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게 되었느니라.』고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인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엡4:30).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분 안에서 또한 믿었으니 너희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엡1:13).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요 6:63). 성령님은 물론 새로운 출생을 관장하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육신으로 태어난 후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결코 거듭날 수 없다.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님은 영감을 주시고 예언을 하게 할 때 적극적으로 일하셨다. 성령님은 오늘날 사람들을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요한복음 16:8-11을 읽어보면 오늘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찔림을 주어, 의로운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그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도 찔림을 주신다. (마귀는 이미 심판 받았고, 이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의 아비이며 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시는 일
오늘날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세 가지 일을 하신다. 첫째로 완전한 사람을 거절한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이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다른 종교나 그 종교지도자에 대하여 들먹거린다. 이에 관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종교지도자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성경적인 설교를 들을 때 편협하고 좁은 소견으로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죽은 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불경스럽고, 추하고, 부패하고, 저주스러운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만이 의로우시고 모든 사람들은 불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부처나 모하메드 같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일이다(요16:8-11). 끝으로 성령님은 죄인들이 심판받을 것과 그들을 위해 준비된 지옥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비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8:4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며(고후 4:4)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마 4:1-8). 그 신을 경배하고 믿는 자들은 마귀 숭배자들이며 이들은 마귀를 하나님 아버지로 간주한다. 이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23:33)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설교자가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설교할 때, 그리고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마호메트나 부처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분개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대적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대적하신다. 이것은 어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명확한 성경말씀이다(요3:36).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이사야 6:8에 보면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즉 말씀하시기를 ...』라고 기록되었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사도행전 28:25에서 『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상에게 잘 말씀하셨도다...』라고 인용하여 ‘주’와 성령님을 동일시하였다. 또 사도행전에서 아가보가 예언할 때 그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사용된 표현인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였다(행21: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다. 사도행전 5:3-5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이라고 불려진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피라에게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라고 말하고 즉시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이 사실은 은사주의자들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든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님을,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시는 기분, 느낌, 선물 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령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은 다른 신으로부터 오는 거짓 영이라는 것이다. 그 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며 성경은 이 사실을 계속하여, 계속하여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9의 삼위일체에 대해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침례를 주며』라고 기록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예수”가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진리의 영, 주의 영, 성령, 위로자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주, 주 하나님, 여호와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성경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사람들은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안다. 어떤 혼란도 이보다 더 엉망일 수는 없다. 아버지의 이름은 “주”이다. 아들의 이름도 “주”이며 성령님의 이름도 “주”이다(행28:25 -27). 『이제 그 영은 주시니...』(고후3:17)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믿음에 뿌리내린 성경대로 믿는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은사주의자와의 차이는 이처럼 큰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고유한 성품이 있고 고유의 위치와 이름이 있어 그 하시는 고유 역할이 있다. 아들 하나님은 다른 인격이시며 특별한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성령님도 또 다른 인격이시며 고유의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이 세 인격체는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고후13:14).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아들 하나님) 아버지께(아버지 하나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성령 하나님) 너희에게 주시리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어떤 영을 받은 것이며 그 후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령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주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성령님을 결코 영접할 수 없다. 만일 주를 영접한 후에 또 한 번 ‘성령’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불결한 영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6에서 말한 “다른 영”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분이시다.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의 정신 혹은 아들 하나님의 정신 정도로 생각하고 두 분으로부터 독립된 특별한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누가복음 3:21-22을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명백히 세 인격이 함께 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고, 이때 “아들 하나님”은 침례인 요한에 의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비둘기 같은 형태로 내려오셨다. 이 세 분은 각각 독립된 인격들이시며 시간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시다.
요한복음 14:16에서 아들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할 성령님을 보내신다. 성령님은 성도들과 거하기 위해 오신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 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골2:9) 하나님 한 분 안에는 세 분 인격이 계시고 세 분 인격 안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그 가운데 계신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사도행전 2:33에서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좌에 계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지 성령님이 아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님이 성령님을 받아 교회에게 주신 것이지 아들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세 분의 독립된 인격들이시고 각각 고유의 성품들이 있고 서로 관계를 맺으시고 각자를 인식하시며 독특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나누시지만 하시는 일은 다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님의 신성이다. 성령님께서는 인격이시고, 삼위의 한 분이시며, 독립된 인격으로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구절은 약 100구절이 넘는다. 성령님은 고유의 일을 하시고 고유의 성품을 지니시며 고유의 위치가 있으시다. 과연 그럴까라고 의문이 생긴다면 성경을 펴서 읽어보라.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2:14). 어떻게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동시에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다 될 것 같은 신학에도 구구한 ...주의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 마디로 성경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거기에 분명히 오류가 있음에도,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으면 정당화가 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게 되면 이단 교리라도 우세한 것같이 보인다. 경제란 인간의 삶을 운영하는 제도인데 여기에도 불의가 진리를 압도하고 있다. 수단이나 방법에 관계없이 매출고가 늘면(돈만 많이 벌면) 상장기업이 되고 고용을 증대하게 되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이윤을 적게 남긴 기업이 결국 무시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反사필귀정을 내놓아 법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편짜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무조건, 죽어도 칼빈주의를 외치는 그들에게, 막상 ‘칼빈주의가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면 잘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만일 칼빈주의를 알고 있다면 칼빈주의만 채택하지 극단적 칼빈주의까지 교리로 채택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천주교, 감리교, 오순절파,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은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 하는데 이들이 잘못 해석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4:13과 히브리서 6:4-6 등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이 구절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기에 어떤 구절이든지 무조건 믿고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책의 제목을 보라. 왜 히브리서인가? 구원받은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환란 때의 히브리인들은 교회시대처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휴거되어 지상에 없기에 그들이 속할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견디어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표를 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환란은 “야곱의 고난”이며, 이스라엘의 환란을 말한다. 이는 성경이 대환란을 설명할 때 이방인(그리스도인을 포함)을 대상으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기도의 사람이요, 유능한 설교자요, 구령자였으나 이 부분을 알지 못했기에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였지만 아기들에게 물뿌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해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않다고 해서 자기 동료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개혁가이다. 위대한 사람들도 맹점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안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얼마만큼 굽어 있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 외에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구원받고 난 후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봉사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스럽고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런 열성 있는 성도들이 없다면 지역교회가 활성화될 수가 없을 것이며, 성도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 때 받을 상급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들은 모두가 교단(편짜기)에 가입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지역교회는 독립적이요, 자치적인 교회이다. 교단(denomination)이란 성경에 없는 조직이다. 같은 교리를 실행하는 교회들이 모여 있는 교단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 신성한 목표와 이상이라면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에는 교단 신학교가 있고, 거기서 가르친 교육은 성경이 우선이 아니라 교단 교리가 우선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신학과 교단 교리는 다른 것이다.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번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굳이 편짜기에 들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앞에 설 때는 칼빈주의자이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은 완전히 타락해서 무력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죄를 회개할 기력마저도 없이 하나님의 처분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을 화해시키려고 함이 아니었는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둘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예지 예정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 대속의 속죄양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3:16).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들이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미리 정해졌다면, 이들이 왜 선교하고 전도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효력 있다면 하나님은 죄인들의 하나님은 되실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저주를 이미 내려놓으시고 말로만 자기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이 제한적이라면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성경, 그런 신학, 그런 교리도 있는가?
넷째,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어떤 형태로든지 성취한 것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상표를 붙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의적 의지를 말살시키려는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집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일이다. 누구나 교회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의적 욕구도 없이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 나간 그 사람의 경배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열납 되는 경배가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 이룩한 산업적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죽자마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은혜로 감싸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게 된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한눈을 팔고 가다가 맨홀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으면 그 사람이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가 부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는가? 그런 신앙도 있는가? 인간의 실수로 야기된 사고도 있고 단순한 사고도 있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도 있다. 인간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들의 손으로 이룩한 일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달라하시겠는가? 범사에 감사는 있을 수 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도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가장 잔악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칼빈도 들어있고, 루터도 들어있고, 쯔빙글리도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정한 인물을 빼내어 편짜기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굳이 어떤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며, 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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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 심규진박사(73년생 한동훈)
심규진, 沈揆珍, Kyu Jin Shim출생 / 2. 28., 물고기자리, 말띠
소속 / IE대학교(Assistant Professor)
학력사항 / 2010~2013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Mass communication 박사
2008~2010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Telecommunication 석사
1997~2001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 학사
경력사항
스페인 IE대학교 Business School Assistant Professor
2021.6~2021.12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2018.7~2021.6
오스트레일리아 University of Melbourne 전임교수
2014.7~2018.6
Singapore Management University 조교수
2003.5~2007.11
미디어다음 뉴스파트장
2001.1~2003.4
CJB 청주방송 기자
“강남 신사 한동훈, 정치 카르텔에 맞서다”…그들이 열광하는 이유
◆“보수가 한동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1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심규진 교수는 최근 저서인 ‘73년생 한동훈’을 통해 보수가 한동훈 장관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분석했다. 심 교수는 이 책에서 한 장관의 능력주의는 ‘세련됨’이라고 표현한답니다
그는 “한동훈이 쓰는 능력주의의 서사는 쿨하고 세련됐다는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기존의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촌스러운 짠내, 동정과 눈물을 요구하는 신파가 없다는 것”이라며 “강남 신사 스타일의 한동훈 장관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능력으로 586 정치 카르텔의 부당한 탄압에 맞선다. 정적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위엄을 지켜내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이것은 정치적 계파나 특정 팬덤이 지켜준 것이 아니다며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 즉 탁월한 전문성과 시대를 읽어내는 남다른 직관과 혜안으로 돌파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 장관의 관계를 과거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의 정치적 관계에 빗댄다. 왕자의 난 등 손에 피를 묻혀가며 왕위에 오른 태종과 그런 태종과는 반대로 묵묵히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은 성군이었던 세종의 관계가 마치 두 사람과 같다는 것이랍니다
심 교수는 “한동훈은 최고 권력인 대통령과의 두터운 브로맨스 서사, 1970년대생의 젊음, 이준석이 보여줬던 어떤 말싸움에도 지지 않는 민첩한 언변, 오세훈처럼 신사 같은 매너와 태도, 그리고 홍준표와 같은 확고한 이념적 선명성과 대야투쟁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며 “586의 종교 전쟁은 이 정권에서 종식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한동훈의 시대에는 좌도 우도 적어도 대한민국 체제 안에서 합의하고 설득되는 생산적인 정치가 열렸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주역은 정말로 산업화 민주화 그 어느 쪽의 정치세력에게 빚도 한도 없는 한동훈이 유망하다고 보여진다”고 설명하고 있답니다
심 교수는 정치무대에 데뷔하기 전부터 비정치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한 장관의 팬덤에 대해 한국 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계파정치와 팬덤정치를 거쳐온 한국 정치 지형은 이제 ‘능력주의’와 ‘실용주의’의 트렌드로 전환되는 시기라고 봐야 한다”며 “능력주의의 끝판왕 격인 한동훈이 귀족적 매력으로 단단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팬덤 자체에 매몰되지 않을 만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엘리트 관료의 정체성은 한동훈의 정치적 내구성을 가늠하게 하는 진정한 한 요소”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은 한 장관에 대한 분석 뿐만 아니라 현재 야당과 586 기득권 정치세력에 대한 냉정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답니다
심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혐오를 민주당 등 야권이 정치적 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고 비판한다.
이 책에서 심 교수는 “소위 말해 페미니즘 팔이를 하는 좌파 여성 단체들이라면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여성이 성적으로 농락 당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그 억압의 근원과 역사적 기제를 모를 리 없거늘 그 어느 한 사람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라며 “어느 누구의 말대로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일갈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라고 말한답니다
또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그다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억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과 권리를 스스로 피력하는 관료 정치인들의 모습을 매력 있게 보는 국민들은 많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해 둬야 한다”며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캐릭터와 새로운 이미지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눈치보고 계산하는’ 샌님형 보수에서 ‘당당하고 전투력 있는’ 화끈한 보수로서의 레토릭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고 내다봤답니다.
과거 여의도연구원 출신인 심 교수는 보수 여성 정치인에 대해 냉정한 판단도 내놓았다. 심 교수는 “보수 여성 정치인들이 서로 견제하고 각자도생하는 모습 말고, 댄스 여가수의 신구세대가 뭉친 ‘댄스 유랑단’처럼 서로의 목표를 격려하고 멘토와 멘티가 되어 고단함을 녹여주는, 여성 정치인만이 공감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면 어떨까”라며 “많은 여성들이 걸크러시에 열광한 이유를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여성 정치인들이 징징거리지 않고 자신만의 능력으로 인정받기 원하는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보수가 영역을 확장하는 솔루션이 정말로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답니다.
심 교수는 2014년 싱가포르 경영대학교와 호주 멜버른 대학교를 거쳐, 2022년부터 스페인 IE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및 디지털 미디어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 학사와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 석사, 시라큐스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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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난해구절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성경에는
소위 "난해구절(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부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그러나 구약(39권)과 신약(27권)은 기록한 연대와 저자들이 다 다를지라도 모두 다 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서(사 34:16)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설사 우리가 몇몇 난해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난해구절들을 해석하려고 하는데, 그 노력은 우리에게 이로움 보다 해로움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분쟁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창세기 4:12-15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난해구절로 분류되는 것은, 당시에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들들은 오직 가인과 아벨뿐이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 말한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누구냐라는 것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족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보에 속한 사람만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가인이 그같이 말한 것은
나중에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났을 때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 하다보면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람마다 쉽게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언제든 분쟁할 수 있는(나뉘어 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서로 분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도리어 우리가 분쟁한다면(나뉘어 진다면) 분명 그것은 잘못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디모데후서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10-13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서로 분쟁이 없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만일 우리가 분쟁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아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7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오직하나님뿐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도 중요하지 않고, 아볼로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것으로 분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에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나를 증거하는 책"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알고자 하는 목적은 "오직 예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로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굳이 난해구절들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많은 말씀들을 통해서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 목적을 잊고 알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풀려고 한다면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15-18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같이 성경은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지경"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항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지경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입니다(약4:10).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므로 정하신 지경을 넘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갈6:13-14)"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2:2-3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진실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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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母胎信仰)
디모데후서 1:2-5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낸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디모데가 (굳이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모태신앙인(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의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인 유니게 속에 있는 믿음이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인데,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모태신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세요.
정말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셨던 그 분이 메시아라고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세례 요한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우리들은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 "태교"와 "조기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꼭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어른이 되면 뒤늦게 무엇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어릴 때보다 힘든지
몸으로 실감하게 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소리를 어른들이 자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도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에(전3:1-8) 그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도 말씀하셨는데(전12:1-2),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전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어른이 되어서 성경을 아는 것보다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모태신앙이 유익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의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태신앙인들 중에는 나중에 커서 믿음을 잃어 버리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태신앙인이
아님에도, 곧 나중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어도 오히려 모태신앙인들보다도 더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모태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 모태신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특권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것을 자부하고 자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7-40, 43-45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같이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자랑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현재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하셨고, 도리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모태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이 과거에 모태신앙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현재에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가가 현재의 나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겔33:10-16).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복음에서는 구약의 율법과 달리, 이제는 표면적(혈통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23-29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자신이 모태신앙이라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만일 자신이 모태신앙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그러면 그는 예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자 하는 모태신앙이 아닌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태신앙이든 아니든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고(자랑할 것이 못되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낮은 자가 없이 다같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마 23:8, 12)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한 몸되신 예수님만을 위하는 각각의 지체들인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고전 12:12-27).
에베소서 2:11-13, 19-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다
사무엘상 28장 11-15절 "11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12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1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2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1분요(紛擾)=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움, 2군급(窘急)하다=일이 되어가는 형세가 꽉 막혀서 몹시 급하다.]
사무엘 선지자는 죽었고(삼상28:3), 블레셋 사람의 군대가 쳐들어 오는 다급한 상황(삼상28:4-5) 속에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려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우선 신접한 여인이 불러온 사무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진위(眞僞)를 가려내기에 앞서서,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은 것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명기 18장 9-14절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1나 길흉을 말하는 자2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3이나 11진언자4나 신접자5나 박수6나 초혼자7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14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1복술자=점을 치는 자, 2길흉을 말하는 자=운이 좋고 나쁨을 말하는 자, 3무당=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자; 주로 여자 무당을 말함, 4진언자=주술하는 자; 주술이란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 5신접자=영매술자; 영매술이란 죽은 자와 산 자가 의사를 통하는 술법, 6박수=남자 무당, 7초혼자=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자]
레위기 19장 31절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같은 자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믿지 말라고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9-12절 "9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진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이 되는 이름은 오직 예수의 이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2-13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이 말씀이 진리(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3:17)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만 구원을 삼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서 대답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는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28:15).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렘6:19). 앞서 언급한 대로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기에, 사울왕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했습니다(잠28:13, 대하7:13-16). 그러나 사울왕은 자신이 왕이 된 후부터 번번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온 것처럼,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죽은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7-19절 "17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사울과 그 아들들은 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 죽게 됩니다(삼상31:1-6). 어찌된 일일까요?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은 정말 참 사무엘이 맞았던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사울왕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0장 13-14절 "13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다시 말해서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의 말(예언)대로 사울이 죽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죽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한 일 자체가 도리어 그를 죽게 한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신접한 자에게 묻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깐 만일 나타난 사무엘이 진짜였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온 사울을 크게 책망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사울의 죄를 통하여, 어떠한 일에도 (그 때가 아무리 다급한 순간이라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 받아야 하며,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의 이름에만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역대하 7장 13-16절 "13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14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15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신약성경에서 한 번도 여호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
누가복음 20장 41-43절 "41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편 118편 26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요한복음 12장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엘 2장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위의 구절들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신약에서 인용(引用)한 구절들로서 서로 비교하기 좋게 모아놓은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은 굵은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사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1. 하나님의 이름 "예수"에서 설명을 하였고, 저희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들 중에도 자주 언급된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에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서 또다시 밝히려고 합니다.
왜 신약(새 언약)에서는 구약(옛 언약)과 달리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걸까요?
위의 말씀들과 같이 구약성경에 명확히 "여호와"라고 기록된 구절들조차도 그 구절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될 때에는 "주"라고 바뀌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의 말씀과 같이 문맥상으로는 분명 "여호와"인데 "주"라고 기록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이 말씀에서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였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주"는 "예수"가 아닌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번역의 문제'등과 같은 "언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하기 보다는, 구약(율법)에서 신약(복음)으로 넘어오면서 개혁되는 하나님의 큰 뜻을 올바르게 분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오순절에 이 땅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신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가 "주"인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더더군다나 하나님으로는 전혀 인정을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각 나라의 방언으로 "예수"가 "주"이신 것을 세계 각 지역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2장).
사도행전 2장 34-36절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우리는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진리의 성령께서 선포하신 위의 말씀으로 인해, 나사렛 예수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고 시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위의 말씀에서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편 110편 1절의 말씀도 풀어주셨는데,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유대인들에게 "난해구절"이 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주는 여호와 한 분뿐이시기에 마치 다윗이 두 주가 있는 것처럼 기록한 것을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다윗이 말한 "내 주"가 여호와 외에 다른 주라면 그럼 그 "주"가 누구일까가 유대인들에게는 궁금한 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는 다윗이 말한 "내 주"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고, 또한 시편 110편 1절의 말씀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사도행전 2장 34절에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전하게 하시므로 서로 동급인 "같은 주"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 "주 여호와"가 아닌 "주 예수"가 시인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 2장 32절에 기록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이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뀌면서 여기에서 주의 이름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진리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시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상 대대로 알고 있었던 "주 여호와"를 "주 예수"로 바꾸는(개혁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유대인(한자로는 猶太人유태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사55:7-9).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방인들도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여러 많은 주(고전8:5)들을 없애고 오직 "예수"만 "주"이신 것을 믿음으로 시인해야만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로마서 10장 9-13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2:32)."
이 말씀과 같이 사람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면서, 또한 "두 주"가 아니라 "한 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라는 이 말씀은, "주 여호와"를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고 하신대로, 오직 "주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결국 신약의 예수와 구약의 여호와는 "같은 한 주, 곧 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고전8:4-6). 그러므로 "주 여호와"를 "주 예수"로 바꾸는(개혁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참람된 일(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요10:30-33)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진실로 이제는 "주의 이름은 예수"이며, 이 부분이 바로 왜 신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알려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제 한 주, 한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의 이름만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는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8-12절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진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래의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도 또한 "여호와"를 증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7-9절 "7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9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되신 예수님(요8:12)께서 오시는 날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사(계17:14, 계19:13-16),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가 되시며(요10:30), 예수의 이름이 홀로 한 이름(행4:12)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 주여"라고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심지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을 한 대로 원래는 우리가 "예수"가 "주"이신 것을 믿고 시인한다면, 다시 말해서 "주 여호와"가 "주 예수"이신 것을 믿고 시인한다면, 기록된 말씀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이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20장 30-31절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