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8-17
8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그가 신하들과 은밀하게 의논하며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자고 말하였다.
9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시리아 사람들이 거기에 진을 칠 곳이 이러이러한 지역이니, 그 곳으로 지나가는 것은 삼가라고 말하였다.
10 이러한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한 그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 곳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와 같이 경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1 이 일 때문에 시리아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모아 추궁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12 신하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서,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
13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가서 찾아보아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붙잡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예언자가 도단에 있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14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17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문제와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들과 위기를 만나지만 그 문제들과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문제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영적인 눈이 열려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위기, 어려움을 보면 더 이상 두려움과 근심 걱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으로 감당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모습,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계략을 미리 알아 방어하게 하는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람(시리아)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기마와 병거로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 엘리사가 사는 성읍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14절입니다.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그 상황을 본 엘리사의 시종은 15절에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그 상황을 전합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본 엘리사는 16절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라고 시종을 안정시킵니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보인 이유는 엘리사의 사환은 육의 눈으로 앞에 보이는 위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람(시리아) 나라의 병거들과 창검들과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영의 눈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의 군대를 본 것입니다.
17절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풍랑 속에서 담대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언제 이런
영적인 눈은 기도할 때 열립니다.
17절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기도할 때 눈이 열렸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자 시종은
시리아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엘리사가 본 불 말과 불 병거를 거느린 하나님의 군대를 시종도 보았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시리아
군대를 보고 기겁하여 이제 죽었다고, 큰일이 났다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시종이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본 후에 시리아
군대가 눈앞에 있고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까?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하나님, 나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상황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능력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전능하심, 사랑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상속, 하늘의 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이 열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이 보이고 끔찍한 죄의 심판이 있는 지옥이 보일 때 복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때 인내함, 담대함, 순종함, 기뻐함, 희생함을 감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 근심, 분노와 짜증, 답답함이 내 안에 있습니까?
영적인 눈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고 문제만 보일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처럼 신앙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시편 119:17-24)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다른 책을 그만큼 읽었으면 내용의 거의 암기할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광대한 진리요, 깊은 진리요, 놀라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크고 깊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할 수 있고 무식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요 6:60).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1, 63).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구원의 지식이요 신령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의 눈과 이성의 빛만으로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혀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읽기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없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신학자이며,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말씀을 열어 읽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통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단순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척척 알아지고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말씀에 감추인 모든 기이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마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얼마든지 읽기만 하고 깨닫지는 못한 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게 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시편 119편 설교 중에서). 약간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더욱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실 때에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에 걸맞은 영적 시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라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에 불과합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이 이토록 고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 이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정말 그 뜻을 하나하나 바로 알고 늘 우리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길을 늘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할 때에,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들으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여, 제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을 좀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저를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가능하면 한 절이나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기도했다. 말씀은 참으로 내 영혼에 고기요 음료였다. 매일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빛과 능력을 공급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이 복된 말씀이 우리에게도 복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와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스럽고 놀랍고 기이한 것을 좀 더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기이한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우리 죗값을 치르신 것과, 그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연합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눈이 열려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에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종인 저에게 주의 은혜를 거두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종이오니, 제 생명을 붙들어주셔서, 제가 사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 아래 거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고 잘 깨달아 알아서, 사는 동안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나는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아니, 저렇게 빛나는 태양을 어떻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있습니까?"
이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의 만드신 저 태양도 쳐다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가?"
랍비는 젊은이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면 하나님께 바쳐서 목회자로 세우라고 부모님들의 서원에 의해서 일찍부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때 문득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한 번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삼각산 승리기도원에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지막 삼일이 되던 날에 갑자기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이런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밤에 많이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일고 하겠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일생동안 아니 몇 대째 예수를 믿어도 그것은 종교생활에 익숙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영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의 눈을 열 수 있을까요?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일상생활에서 늘 부딪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딪침 때문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물질이 육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9~2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을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물질만 사랑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영안이 밝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나 교만, 증오심을 버려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선입견은
마치 색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다른 사상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철학 사상이 틀어 박혀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보고 영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교만과 증오심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결정된 후에는 우선순위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또다시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항상 회개하고 거듭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죄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일류 학교를 나왔어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게 될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바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데 올라가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시내를 멀리까지 다 볼 수 있는 것 같이, 심령이 맑고 죄악의 구름과 안개가 다 벗겨져 나가야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멀리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른 자리가 어디 일까요?
산에 올라가야 합니까?
높은 건물에 올라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넷째, 성령님의 도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안나타났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이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에베소서
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마음의 신령한 눈을 떠서 더 근본적이고 신비한 것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면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나를 왜 자녀 삼아 주셨나? 그리고 지금 내게 바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능력 안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근심과 염려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있는 큰 능력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영안이 열리어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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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眼)
1. 육안(肉眼)
불교(佛敎)에서 이르는 오안(五眼)의 하나.
육신(肉身)에 갖춰진 안구(眼球)
안경(眼鏡)을 쓰지 않은 천생(天生)의 시력(視力). 맨눈
2. 심안(心眼)
마음속으로 사물(事物)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그 작용(作用).
3. 영안(靈眼)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하다(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암직하고”(창세기 3:6)
“보암직하고”란 ‘눈이 추구하는’ 뜻이다.
즉, 욕망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眼目의 情慾”에서 “정욕(epithumia)”은 사물에 대한 탐욕을 뜻한다.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탐욕의 포로가 된다.
하와의 눈이 밝아 진 것은 금지된 것을 탐욕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 해도 시각과 청각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심령이 왜곡되게 마련이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내용에 따라 인품은 꼴 지어진다.
그래서 관상학에서 몸은 1천 냥, 눈은 900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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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열왕기하 6:14-19)
첫째, 육신의 눈
둘째, 지식의 눈
셋째, 영적인 눈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나라는 강대국이 자주 이스라엘 지경을 침범해 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람의 침략은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편에서 벌써 침략할 루트를 알고 사전에 차단하고 있거나 군사를 매복하고 있음으로 번번이 패전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당장에 그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영적 레이더에 다 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결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줄 알고 왕은 우선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체포하리라고 결심을 하고 막강한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으로 보내서 한 밤 중에 감쪽같이 몇 겹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침이 훤히 밝았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품을 하며 무심코 성 아래를 보다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종은 허겁지겁 주인 엘리사에게 쫓아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종의 눈에는 자기 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는 몇 백명의 중대 병력이나 있을까, 가장 막강한 아람 군대의 수만의 군대와는 감히 비교도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엘리사가 이제는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 때, 엘리사가 종의 이러한 의심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의 눈에서 의심의 비늘이 벗기어지더니 영안이 열리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그러자 아람 군대들의 눈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엘리사는 군인들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곳은 길도 아니요. 성도 아니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오라’고 하자, 군대가 저를 따라 이스라엘의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혼줄이 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고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니 그 사랑 앞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너무나 멋지고 놀라워 감동이 큽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 중에 영안이 닫히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시려 하시거나 경고를 하시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매를 들고 때리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매를 자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리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롯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났습니다.
죽음의 유형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영안이 열리면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미래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었으나 많은 죄수들은 자기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만 보다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 중에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영안이 열린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눈, 영안이 열릴 수가 있을까?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속인 말씀을 통해서 보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눈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우리는 영안이 확 열리어서 천사의 모습이나 마귀의 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졌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약속대로 이루어 주는 책입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눈을 열어라
즉, 성경은 약속의 보물창고라면 그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쓰지 못하고 굶거나 물건을 못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히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기도에 게을리 하면 이상하지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약해지고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영적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으로 바꾸는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저해요소인 죄책감이나 근심, 염려,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응답되어진 사실을 상상하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여 점점 우울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감으로 점점 짜증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를 ‘이제부터 기도해 보세요. 기도를 하되 이렇게 해보세요. 밤에 그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앞으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너그러운 아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믿고 기도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오기를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어요.
나는 한평생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명랑해졌고 자신감이 생기었고 내게도 대단히 다정하게 대합니다.’라고 기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기를 그 아이는 행복감에 젖어 있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더랍니다.
그리고 응답되어진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함의 눈이란 말씀대로 믿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 위에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간악한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왕은 그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전혀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특별안수를 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전혀 내다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서 명령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처방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화를 몹시 냈으나 나중에는 모든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무조건 물 속에 일곱번 들어갈 때에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맡은 일에 충성 등, 몇 년 동안 여전히 빚덤이 위에서 아무 증거, 아무 환상, 아무 음성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는 데 놀라운 정도였고 나중에는 70평의 공장이 240평이 되고, 다시 700평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말씀의 눈, 기도의 눈, 행함의 눈에 의해 영안이 열리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 그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됨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심봉사의 본명은 ‘심학규’로 양반 집에 태어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나 곧 눈이 멀어 관직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비참한 양반 심학규를 본명 대신 심봉사라 부릅니다.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봉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천하의 효녀에요.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아비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청나라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인당수 바닷물에 풍덩 빠집니다.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복을 받아 왕비가 되고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게 됩니다.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눈은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개인적으로 눈을 통해 누린 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릴 적 2.0이나 되는 엄청난 시력으로 남들이 보기에 기이한 경험도 했습니다. 운동장 끝에 있는 글씨를 읽었을 정도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안경을 사용해야 앞에 있는 글씨도 정확하게 봅니다. 그래서 눈이 가져다 준 선물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고, 잘 관리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그리고 눈은 눈대로 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 역시 각자의 자리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발이 있기에 어느 곳이나 다닐 수 있습니다. 손이 있기에 식생활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위기를 분별하여 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눈은 창조의 영광을 가까이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볼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늘 넘쳐야 하고 보지 못하는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음이 중요한 것은 단지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볼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본다면 그것은 눈을 주신 이의 뜻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욱 부패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그 화려함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더구나 명품 코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더 아름답고 더 멋지게 그리고 더욱 폼 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게 하는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기에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합니다. 눈이 그 곳에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우리의 삶을 모두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눈을 잘 제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눈 때문에 패가망신에 이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신의 눈에 해당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한 엘리사와 게하시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육적인 눈과 영적인 눈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비서인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를 죽이려는 아람 왕의 군사 앞에 게하시는 두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았던 불레셋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절망적인 삶이 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영의 눈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믿음은 눈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주는 특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믿음의 눈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이 사라지고 이성의 눈만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심청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대에 이렇게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간절한 딸의 소망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심봉사처럼 눈 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꼭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양미 300석을 교회에 바치라든지 인당수에 뛰어들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떠야 할 눈은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신의 눈을 뜨기 원하신다면 안과를 찾아가 개안수술(요즘 수술 참 쉽습니다)을 받든지, 공양미 300석을 바치든지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 즉 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아서 몸도 비틀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시를 써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육신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도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그가 진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적인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할 것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오늘부터 2013년 다섯 번째 시리즈 설교로 <열어주소서!>라는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안을 밝히 뜰 수 있는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안이 밝히 떠져 영적인 신비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제일 먼저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야 한다고 말씀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영안이 떠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되어서 성경에서 가장 절수가 긴 시편인데 이 176절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라서 사람들이 ‘말씀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시편인 119편 17~18절에서 시인은 무엇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습니까?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마도 시인은 지금 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모양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든지 가정이나 물질에 문제가 생겼든지 뭔가 어려움이 겪고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저를 후대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냥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세요. 그래서 주의 율법,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발음은 본토발음이 아니더라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영어성경인 NIV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제가 굳이 영어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어로 볼 때 좀 더 느낌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제 눈을 열어주세요! 제가 당신의 율법에서 원더풀 한 것, 놀라운 것,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느낌 알지요? 확 와 닿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꼭 떠야 하는 이유는 그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주변 사람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못 믿는 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눈은 멀쩡한데 아직 영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지식으로도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거든요. “하나님! 어리석은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저 영안이 가려진 제 남편, 자식, 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영안이 뜨여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야말로 원더풀한 것, 놀랍고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문제는 아직도 영안이 밝히 열리지 않아서 말씀을 보아도 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이 맹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십니다. 더럽게 웬 침이냐? 약이라고 발라주신 것이냐? 아마도 무슨 상징적인 행위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안수하신 후 그 맹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23절) 그랬더니 맹인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또렷하진 않고 희미하게 윤곽만 보여서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떠지지 않아서 그렇지요.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고 사람이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어서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영안이 환하게 열리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이기는 보여요.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는데 또렷하게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이거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확신도 적고 전도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씀을 보고 들으면 좀 알 것은 같은데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원더풀하다? 시편 19:10에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맛이 뭔지, 그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뭔지 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금 그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니 맹인이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히 열려서 말씀이 또렷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이, 그 놀라운 말이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곧 임직을 받을 피택자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요즘 제가 참 즐겁습니다. 피택자 교육을 ‘세게’ 받아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 정말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막 느낌이 오기 시작하네요.”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니 전에도 많이 읽고 들은 말씀이지만 그야말로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고, 느낌이 확 와 닿고, 정말 원더풀,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이 아직 원더풀 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다, 짜릿한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속히 우리의 영안이 떠지기 바랍니다. 크게 밝게 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내 속에서 막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고 말씀 때문에 놀랍고 짜릿하고 뜨겁고 이런 경험을 다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사명을 보게 하소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합시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참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또 한 가지의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율법에 미쳐서 예수장이들을 미워하고 다 박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아 기꺼이 증인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머나먼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는 예수장이들을 다 잡아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시는데 그 순간 사울은 눈이 멀게 됩니다.
사흘 동안 다메섹의 한 집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그 즉시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박해자 사울이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울이 다시 뜬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는 비늘이 껴있었습니다.
율법과 유대교라는 비늘이 껴있으니 영안이 닫혀서 예수님을 못 보다가 이제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영안이 뜨이니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 사명인 줄 알았는데 영안이 열리니 내 진짜 사명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혹시 어떤 비늘이 껴있는지요? 먹고 사는 것 걱정, 내 삶, 내 가정, 내 가족만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늘이 되어 우리 눈에 끼어서 영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명은 안 보이고 나만 보이고, 내 생각과 내 고집만 보이게 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뭐’에 해당되는 말이 뭔지 아시지요? 동물 이름입니다. 이 말이 강단에서 쓰기 힘든 속된 말이라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래도 꼭 맞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히면 꼭 그 수준밖에는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가 건축을 잘 하고 나서 본당에 뭘 들여놓을 것인지 의논하다가 싸움이 났답니다. 싸우는 이유는 이겁니다. 본당에 오르간을 들여놔야 하느냐, 피아노를 들여놔야 하느냐? 우리 교회처럼 오르간 피아노도 다 들여놓으면 안 싸웠을 텐데 아마 좀 작은 교회였나 봐요. 그 교회에 음악을 좀 아는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회는 오르간이다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좋은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 고집하니 싸움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들으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음악수준이 높네 낮네 싸우다가 교회 전체가 오르간 파와 피아노 파로 나누어 지금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눈 때문입니다. 시야입니다. 시야가 좁아져요. 육신적인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못 뜬 게지요. 이 경우는 내 음악지식이 육신의 눈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누가 보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부터 보이고 예수님부터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주님은 뭘 원하실까? 이것부터 봐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오르간이냐 피아노냐 그것이 뭐 그리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데 오르간으로 찬양 드리든, 피아노라 드리든 하나님이 그걸 따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안 열리니 알량한 작은 음악지식 가지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교회는 작게 보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축원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중학생 때 영어시간에 읽은 글 하나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게 된 3중장애를 가졌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도운 설리반 선생님도 유명하지요.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도 못 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얼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신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눈은 그 누구보다 환히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헬렌 켈러와 달리 너무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만 봅니까? 나만 보입니까? 지금까지 받은 은혜 못 보고 없는 것, 부족한 것, 원망 불평거리만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고, 말씀이 놀랍게 보이고, 내게 주신 사명이 확실하게 보이십니까? 불평 원망보다 감사의 제목이 보이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그 환한 눈으로 주님을 확실히 보고 주의 일을 확실히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