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永生)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단순히 끝없는 세월의 연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쓰이는 일반적인 신약 단어는 아이오노스이며, 이는 질과 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영생은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제로 “햇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현재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영생이 신자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이 생명이 “있고”(현재시제)라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동사는 헬라어에서도 현재형입니다). 
요한복음 5:24과 요한복음 6:47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재형 구조가 발견됩니다. 
영생의 초점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7:3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성자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합니다.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6; 14:9).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3).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0-11).

새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것을 봅니다.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에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해 생명 나무에게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24).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생명 나무에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29).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주신 구세주를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로마서 10:9-10).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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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은 단지 죽음 후에 얻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3. 현재와 미래의 영생

영생은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5:24). 
동시에,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21:3-4).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말하며, 이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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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무엇일까? 영생의 의미와, 그것을 얻는 방법 [요한복음]

영생(永生)이란 길 영(永), 살다 생(生)으로 생명의 영원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요한복음 10:10). 
성경 곳곳에는 영생 얻길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하고 애타하신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3:15, 4:14, 6:27, 47, 51, 54, 58).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인생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려고 하셨을까?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은 눈물, 슬픔, 아픔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사람은 10년을 살든지 100년을 살든지 결국에는 사망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 
모든 인류가 사망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로마서 5:12, 6:23). 
죄가 없는 천국에 죄가 있는 존재가 들어갈 수는 없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와 사망을 없애는 진리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이 생명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알려주셨다. 그것은 무엇일까?

영생하시는 예수님과 영생 주는 양식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요한복음 3:36, 5:24, 17:3). 다시 말해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자들이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가 하신 말씀도 믿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요한복음 6:26~27)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근본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요한복음 1:1~3, 14). 영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인생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빌립보서 2:5~7).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인류가 먹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 양식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 양식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한복음 6:32, 35, 47~48, 51)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는가?” 하며 수군거리고 다투었다(요한복음 6:41, 5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한복음 6:36).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53~5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장애물로 여긴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요한복음 6:61, 66). 당시 한 공간에는 열두 제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들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는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요한복음 6:67~68).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믿었다.

인류가 먹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어떻게 제자들에게 먹이셨을까?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내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 떼어 ··· 이것은 ··· 내 몸이라 ··· 이 잔(포도주)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15, 19~20)

예수님은 실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치신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었다. 즉 새 언약으로 세워주신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라는 말씀이었다(마태복음 26:19, 26~28, 마가복음 14:16, 22~24).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신 이후 약 5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고린도전서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즉 세상 끝날까지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다(고린도전서 11:23~26).

영생의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

한국선교연구원 2021년 1월호에 따르면, 전 세계 약 78억 인구 중 32.3%인 25억 4,557만여 명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 난립한 교회들 가운데 영생의 진리인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전하는 교회는 어디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새 언약의 유월절은 베드로, 요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초대교회에서 지켜졌으나, 교회가 세속화하면서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폐지됐다. 오늘날 새 언약 유월절을 회복해 성경 원형대로 지키는 곳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월간조선, 2023. 4. 5.)

하나님의 교회는 한국을 포함해 175개국 7500여 교회 330만 신자 규모의 글로벌 교회다. ··· 예수 그리스도는 ···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고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담아 ‘인류를 위한 새 언약’을 세웠다. ··· 현재 성경대로 새 언약 유월절을 준행하는 곳은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동아일보, 2022. 3. 18.)

성경에 등장하는 절기인 새 언약 유월절을 오늘날 대다수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사에 의하면,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주재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유월절이 폐지되었다(간추린 교회사, 세종문화사 참조). 이후 종교암흑시대를 거쳐 1,600년 넘는 세월 동안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없었다. 현재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하나님의 교회 설립자 안상홍님께서 영생이 약속된 유월절을 다시 찾아 주셨기 때문이다(주간종교신문, 1981. 3. 18. 참조).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그리스도는 우리가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원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치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야만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28).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죄가 있다(요한1서 1:8~10).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진리인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여 천국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한 자들이 가게 될 천국은 어떤 곳일까? 성경은 천국을 가리켜 날마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잠언 8:29~30), 다시는 사망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곳(요한계시록 21:4), 영원히 왕처럼 사는 곳(요한계시록 22:5), 영원한 영화를 누리는 곳이라고 하였다(다니엘 7:18).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황홀하고 아름다운 미래, 천국은 이 땅에서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요한1서 2:25). 영생을 약속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열려있다. 영생의 진리인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찾으면 된다. 그 교회는 당신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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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대한 성경구절

영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영생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영생은 단순히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생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영생

영생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말씀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믿음은 영생을 받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귀한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

영생은 단순히 끝없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곳이며, 영생을 얻은 자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가기

영생을 얻은 자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더라도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믿음 안에서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후서 4:17-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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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밝히는 영생의 의미와 얻는 방법


성경에 기초하여 영생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며, 그 본질과 얻는 방법에 대해 증거합니다. 오직 성경 구절만을 근거로 설명하며, 외부 정보나 해석은 일절 배제합니다.

1.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 목록

* 요한복음 3:16

* 요한복음 5:24

* 요한복음 6:40

* 요한복음 6:47

* 요한복음 17:3

* 로마서 6:23

* 요한일서 5:11-13

2. 성경 구절에 근거한 단계별 설명

위의 성경 구절들을 통해 영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영생의 본질 (요한복음 17:3):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무엇인지 직접 정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넘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 영생의 기원 (로마서 6:23, 요한일서 5:11):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영생이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사망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일서 5장 11절은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라고 말씀하여, 영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 영생을 얻는 방법 (요한복음 3:16, 5:24, 6:40, 6:47, 요한일서 5:12-13):

*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영생을 얻는 방법이 하나님의 독생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 요한복음 5장 24절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 요한복음 6장 40절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 요한복음 6장 47절은 더욱 간결하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말씀하며, '믿는 자'가 이미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합니다.

* 요한일서 5장 12절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는 것'과 영생을 가지는 것을 연결합니다. 13절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을 통해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이끌어 줍니다.

3. 성경적 맥락에 근거한 요약

성경은 영생을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복음 17:3)으로 정의합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선물(로마서 6:23, 요한일서 5:11)입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며(요한복음 3:16, 6:4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요한복음 5:24)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는 것이 곧 영생을 가지는 것이며(요한일서 5:12), 아들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영생을 가졌음을 알게 됩니다(요한일서 5:13).

이 모든 설명은 인용된 성경 구절의 문자적 내용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성경은 영생이 누구에게서 오고,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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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는 방법(How to Gain Eternal Life)

무엇을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까?(What Must You Believe to Get Eternal Life?)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도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존재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전3:11)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도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는 길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마19:16)”라는 질문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선을 행하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잘못된 구원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어떠한 선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어떤 사상가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아침마다 산상수훈 팔복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서 간디를 가리켜 가장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간디의 정신과 생활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생활을 본받아 아침마다 산상수훈 팔복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칭송을 받는 그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이런 것들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다.(Believe in Jesus to Get Eternal Life)


영생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사람의 공로나 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 죄가 씻음받았다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삼아 영원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은 내가 의롭게 살아서 어떤 공을 쌓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 적인 사랑과 은혜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라(Find Jesus)

구원을 위한 첫 단계는 예수님의 발견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발견하려면 꼭 믿음이 필요합니다(엡2:8).

종교개혁자 루터가 예수님의 복음을 바로 알기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505년 7월 2일 루터가 법과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뒤 집에 다니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의 바로 옆에 떨어졌지만 무사히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성(聖) 안나에게 배우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맹세합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고 그는 구원의 확신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온갖 고행과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엄하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강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에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의 대가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Deny Yourself)

구원을 위한 두 번째 단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입니다. 구원은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연합은 자신을 부정하고 온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알기 원했지만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생에 이르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마19:22-24).

부자 청년에 비하면 베드로가 가진 것은 정말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마19:27)”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귀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행위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삶과 자신이 가진 재산을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어진 삶에 신실하면서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힘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날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영생(永生)

헬라어에는 생명을 말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조에’입니다. 
조에는 내연적인(intensive) 생명을 의미하고, 비오스는 외연적인(extensive) 생명을 의미합니다. 
비오스는 개역성경에서 ‘생활(living)’이란 말로 번역되면서 생명의 본질을 지칭하기 보다는 생명의 지속과 생명유지의 방편 및 수단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즉, ‘조에’는 생명의 핵심과 본질을 말하는 반면, ‘비오스’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및 생명의 껍데기를 의미하는 곳에 쓰입니다.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이란 말은 ‘조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3:15,16, 요한일서 1:1,2). ‘살아 있는’ 생명의 껍데기로서 ‘비오스’는 성경에서 생명의 본질로서 ‘조에’에 연결되지 않을 경우, 살아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살아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겉도는 생명체의 유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즉, ‘비오스’는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에너지로서 음식과 물질을 필요로 하는 육신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생식하는 힘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질과 생식에 집착하는 ‘비오스’적인 생명은 결국 사람을 거짓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본연의 가치인 ‘조에’가 없는 이생의 것들에 집착하는 생명을 껍데기 생명에 해당합니다(누가복음 8:14, 21:34).

그래서 비오스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카르디아)인 정서가 염려하게 되고 염려는 불안과 우울, 그리고 회의에 빠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어리석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요한일서 2:16절은 비오스를 자랑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비오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에 빠지고, 많다고 자랑(사치, 과시)하는 자들은 어리석음(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부자)에 빠짐으로 모두 부질없는 껍데기에 생명 유지에 해당합니다.

영생(eternal life)에 해당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요한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매개된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오니오스’는 ‘영원한’, ‘우주적인’, ‘종말적인’, ‘신(Divine) 적인’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인 ‘아이온’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서의 ‘영원’(고린도전서 2:7),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누가복음 1:70, 사도행전 3:21), ‘코스모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마가복음 4:19, 히브리서 1:2). ‘아이온’은 시간적 연장선상에서 영원과 만나는 지점으로서 종말론적 위상을 가지기도 합니다(히브리서 6:2,5, 데살로니가후서 1:9, 베드로후서 1:11).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전우주적인 삶을 의미하고, 또한 질적으로는 신적인 삶으로서 종말론적으로 영원하고 무궁한 삶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생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시간의 폭을 넓혀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시간의 범주에서 사는 삶이 있는가 하면, 영원의 시간까지 시야를 넓혀 사는 폭넓은 삶을 사는 삶도 있습니다. 찰나적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먼 미래를 보며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현재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의 일생전체의 폭을 고려하는 삶, 더 나아가 다음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며, 장소적 차원에서는 자기자신만을 위한 자기중심적인(egocentric) 좁은 삶에서 인류중심적인(anthropocentric) 삶을 넘어 우주적인(cosmic)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좇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성공과 잘됨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와 만물의 잘됨을 염려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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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요한복음 7:3, 20:30-31)

지금은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200만 명이 된 시대입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의 ‘2017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1000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23.3%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크리스천이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못 나가거나, 고민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종교를 물을 때 그들은 바르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크리스천 동아리 선배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자신의 영적상태와 신앙의 고민 때문이고,

셋째는 이제는 정말 부모를 떠나 진지하게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교회마다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마치 다윗에게 몰려갔던, 건국용사가 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원통한 자, 환난 당한 자, 슬픈 자, 도망한 자….

그러나 그들은 다윗을 만나면서 일당백을 감당하는 위대한 건국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대다수가 용사들이었고 다시 싸우고 싶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나무라거나 멸시하기보다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믿음의 용사들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성도들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그들의 자리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상실한 믿음을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 나라의 자원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신뢰와 열정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까요?

왜, 그들은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 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육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양반과 평민, 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도로 인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교회에 나오다 보니 하나씩 해결되어졌습니다.

인간적인 대접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우리 나라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이 경제적인 물질 풍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신앙인들도 종교의 힘을 빌어 더욱 더 열심히 일한 결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도도 줄어들게 되고, 하나씩 하나씩 편안하게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출석을 하지 않으면 양심적인 가책이 생기다보니 큰 교회에 주일날 한 번 예배 드리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모양만 예배에 참석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송구한 마음을 조금 달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원인이 육체적 욕구 충족에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대체적으로 사랑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세 가지 요소가 균형 맞춰진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왜 교회에 다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는 것(고후 4:17)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내세의 삶, 영생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영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생에 대한 우리 성도들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1. 영생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1. 진시황의 불노초 / 왕릉 ;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위해 신비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큰 노력을 하였습니다.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 오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

2. 왜 영생이 필요한가?

영생의 반대말 ; 영벌 / 사망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0,31)

영생이 곧 구원이며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

3. 성경에서는 영생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다(요한복음 17: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4. 영생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영생이란?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눅 10:25; 요 3:16), 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요일 1:2).

a.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의 새롭고 영속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요 17:3; 롬 5:21).

b. 새로운 생명을 덧입는 것(요 5:24; 롬 6:11).

영생이란 경험적인 지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은 영생의 조건이나 전제가 아니라 영생 그 자체이다.

영생의 특징

a. 단순히 죽음에서 탈피한 불멸의 생(生) 곧 그저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가리키지 않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구원과 자유와 생명을 일컫는다.

b. 더욱이 장차 임할 천국에서의 삶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 이 세상에서도 소유하게 된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c.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경험이요(딛 3:4-7), 세상 마지막 날 완성되는 것이다(요 6:40).

요한복음 17:2 주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다(요한복음 17:2)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해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성자 예수님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 ;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

a. 구원의 대상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구원의 대상 ;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구원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전제된다면 그 대상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구원받게 된다. ​

b. 구원의 내용 ; 영생

‘영생(조엔 아이오니온)’ = 생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시간적 측면 +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복(至福)의 삶이란 질적 측면

‘영원’이란 의미를 지니는 ‘아이오니온’ ; 시간적 개념

‘활기 있는 삶’을 의미하는 ‘조엔’ ; 질적 개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보장받는 영생 ;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행복한 삶을 사는 것

c. 구원을 이루는 주체 ;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아들

요한복음 17:3 주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곧 ... 아는’으로 번역된 ‘기노스코신’은

/ 현재 시제 가정법으로 ‘계속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란 뜻이며,

/ 이 동사가 나타내는 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영적인 친밀한 교제를 포함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특징

a.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우해 드리며,

b. 그분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힘쓰게 되며,

c.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로, 그리고 왕으로 알아 영혼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필요를 절감하며

d.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온전히 드리게 된다.

소결론 ;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앎이 바로 이와 같은 앎이기에 이 앎이 바로 영생이다.

신학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또 성경에 관해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예수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에게는 영생이 없다.

영생은 아들이신 예수 안에 있으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으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요일 5:11, 12).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20:31).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17:3).

종합해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생을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성도가 해야 할 사명 ; 복음 전파자의 사명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 신앙 목적

인터넷에서 퍼 온 '사흘만 기다리세요'라는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한 중국 여류 작가가

뉴욕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 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여류 작가는 꽃을 고르며 할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여류 작가는 다시 물었습니다.

"번뇌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러자 할머니는 여류 작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하루였죠.

그런데 사흘 후 부활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흘을 기다린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모든게 정상으로

변해 있는거에요."

할머니의 답변은 여류 작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사흘을 기다린다?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철학적인

삶의 태도입니까?"

지금의 번뇌와 고통을 미래에 찾아 올

즐거움에 대한 믿음으로 녹일 줄 아는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는

여유가 있다면 그 사이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사이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잊게 되진 않을까요?

베드로가 신앙고백한 내용과의 대조

예수는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고 물으셨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이나 교훈들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표적들 자체에 놀라 예수가 진실로 누구신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예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물으셨다.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각자 자기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모두의 신앙고백이 독특하고 달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에 웅답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과 웅답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제대로 깨닫고 고백할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대답했다. 이 고백은 다시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아 구약에 계시된 은혜와 사랑을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십니다.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라는고백이다(S. G. De Graaf). 즉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서 그 분이 곧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자이며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민 24:17). 또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분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17절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복의 선언을 하신다. 그러나 이 복의 근거는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예수의 말씀은 11:25,27에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그래서 칠톤(B. D. Chilton)은 “예수의 선포는 구구 절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해 준다. 그 나라의 효과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실체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프랑스(R. T. France)도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능동사의 주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가 역동적인 주체자이지, 어떤 사람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이시며 통솔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베드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바로 알게 하셨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게 하시고,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구세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자는 그를 그리스도로 바라볼 수도 없고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존재들인가!

이어지는 18,19절에서 예수는 처음으로 자기의 공동체와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더 광범위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에 있어서 동일한 점은 양자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A. Robertson).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구성된다. 여기의 백성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연장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이 교회를 함께 지지하는 결속이 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하신 일, 그의 수난과 부활 등 모든 일에 대해 중인이 된 사도들을 통해 교회는 죽음을 극복하신 주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들이 아직까지 진리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20절)고 경계하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순종과 섬김과 대속의 메시야’로 자신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렇게 경계하신 것이다(A. Robertson).


https://nykcn.org/yeongsaeng-yohanbogeum-17-3-juil-seolgyo-weongo-2020-05-24-slash-iseunghyeogmogsa



영생에 관한 예화 모음

▣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기쁨 속의 죽음

유명한 제인웨이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 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별세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나는 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9:57-62)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피지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하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嗚咽)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 를 위해 오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고전15:51, 52, 살전4: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생의 출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예로운 죽음도 있고 비천한 죽음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영생의 출발이므로.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산다.

M.E.몽테뉴는 말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해 두는 것은 자유를 예상하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자.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곧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19-29 * 찬송405장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15세 된 여자아이가 뜻밖의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위문하러 와서 병자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엾다. 네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자 병상의 소녀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나의 참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단다. 나는 가까운 날 영광의 주를 볼 것이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에 영광을 더할 거야."
* 참조: 마18:8,9, 막9:43, 45, 살후1:10, 벧전1:8

▣ 영생에 이르는 길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아침 그 지역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죽어가는 펠릭스 리치라는 환자가 목사님 한 분과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하고 급히 차를 몰아 그의 병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리치는 “목사님! 제 삼촌도 목사님이었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듣지 않았답니다. 제 아내가 늘 저를 교회에 데려가려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창조주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 일생은 죄로 가득합니다. 아! 어떻게 하죠?”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리치는 회개하고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목사님은 문병을 갔는데 놀랍게도 리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주일에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8년 동안 매주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영생의 복(시편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읍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행복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합심기도 할 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일찌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하고, 12절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젓가락 열 개를 한데 묶어서 꺾으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개씩만 꺾으면 쉽게 꺾어집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단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였습니다. 연합하는 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거구의 몸을 지닌 동물이라도 또는 어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에게는 '영생'을 주신 일이 없으나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 정말 영생을 얻었습니까?(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한 신학자의 비유적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자기 교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 큰 상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천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게 됐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교회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았던 교인인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상급을 받은 성도의 반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왔다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도 없고 겉으로 그의 신앙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생하고 영생을 얻은 확실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의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적인 믿음으로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마 1절,사 53:4∼6)과 십자가의 죽으심,부활하시고 승천 재림까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옵니다. 믿어지는 신앙과 동의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슴처럼 성령이 내주하여야만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영접할 때(요 1:12) 나의 이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참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러한 온전한 영생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정적인 믿음과 그분을 전적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시는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솔로몬 왕은 인간 영화와 우생의 극치를 누린 사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웃 왕족들이 정치 결혼을 원해서 공주격 처첩이 천 명이고 황금 궁전에 학문적 예술적 위락적 모든 조건을 갖추었었다. 눈이 원하고 입이 원하고 육체가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나 다 해 보았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5)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없는 삶의 전방위 추구의 경험적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허무였다(전1:2).
영원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유한한 임시적인 대용품으로 아무리 채워도 갈증은 더하기만 하고 만족도 행복도 안식도 없다(전3:11; 12:13). 우리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란다. 인간은 우주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삼천 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들으면 바다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의 귀에 영원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지말라.
-예수칼럼 : 김준곤-

▣ 영원한 쉼터

우리 부부는 미국 LA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1년 예산이 50억원이나 되는 큰 교회 목사님이신데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반찬은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막 집회를 마쳤습니다. 지친 사모님이 김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3일만 휴가를 주세요. 강목사님 사모와 둘이 팜 스프링에 가서 쉬고 오고 싶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얼른 받았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남자들끼리 일할 테니 가서 쉬고 오세요” 이때 김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데 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낭비하려고 그래요”
지금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김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

토마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 참조: 요일1:2, 요일2:25, 단12:2,7, 요10:28, 12:25

▣ 영생의 낙(永生之樂)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독교인은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영국의 로지 경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제 무덤에 오지 마세요. 저는 거기 없을 거예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처음에 죽으면 자기 남편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 무덤 곁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몸을 아무 데든 묻어라. 장지 문제로 신경쓰지 말아라.”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묻히게 되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는 먼 곳이 없단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은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다.

▣ 나는 영원히 살테야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신문에 보니까 영국 수상 처칠은 100세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120세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니까 오래 사실 것 같은데, 얼마나 사실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들은 사는 법을 몰라. 나는 영원히 살테야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려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살려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은 살아난다.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심령은 육신이 무너진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명심하자!


▣ 죽지 않는 법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의 산들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 생명의 근원

성경: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의회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쓰는 모든 것,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그것은 우리들의 가련한 제멋대로의 경주에 있어서 중심으로 되는 희망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주 믿는 자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만이 영생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영생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다.“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다.“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 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내세의 확신은 없으며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고,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민경설 목사 (광진교회 담임목사)

* 묵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굿나잇 키스…굿바이 키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4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다. 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는데 막내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다.그러자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같은 말은 결국 앤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김의환 목사

▣ 하늘에 살아 있는 아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아들 윌리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를 위로하고자 프란시스 빈튼 박사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아드님은 하늘에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교리로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동안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월리가 살아 있다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참조: 사25:8, 35:10, 시133:3, 유1:21

▣ 밀라노 대성당의 세 문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 참조: 벧전1:24, 25, 딤전1:16, 6:12

▣ 영생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신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요3:14)
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0 영생은 곧 유일한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0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일5:20)

▣ 영생에 관한 금언

0 농아 학생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은 전능자의 일생이다라는 아름답고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영생은 절대적인 이름으로 옷 입혀진 소극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용시킨 것에 대한 현재의 존재요, 시작의 부정이거나 그 존재의 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윌리엄 펠리)
0 나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미지의 바닷가로 가는 것은 꿈꾸게 하라.(펠리시아 히맨스)
0 소원은 자주 무너지고 내 심장은 뜨거운데 이 세상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일이 저 세상에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천국에서 열매 맺을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구나.(wid 파울 리히터)
0 영원한 세계는 참으로 광대하구나! 그것은 태고부터 모든 인류를 삼키고 지금도 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많은 인류를 삼킬 뿐만 아니라 신비로 가득찬 우주를 모아들일 것이며, 장면과 전망이 넓게 펼쳐져 많은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족하고 다양하며 한없이 많은 지성적인 존재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흡수할 것이다.(나다니엘 에몬스)
0 모든 자연은 그의 자연적 만족을 갈망한다. 우리가 목말라할 것에 대비하시어 하나님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애정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시어 그 애정을 만족시켜 주실 사랑이 있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예비하신 것이다.(프래드릭 윌리엄 로버트슨)
0 영생은 축복으로든 고통으로든 그 자체가 완전히 신비롭고, 경의로운 모든 상태로 나타난다. 한 시대의 흥미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데 비해 영생을 계속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중압감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로버트 홀)
0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게 미래의 실재성에 관한 확실한 육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육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대개 위대한 천재들이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
0 절망한 자는 자신의 소망을 확실한 신앙에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향으로 돌리고, 성공한 자는 그가 열렬히 추구한 목적이 불멸의 영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느끼며, 악인은 행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수 있지 않을 까 하여 그의 행악에서 돌이킨다.(로버트 사우티)
0 영원한 세계는 언제나 엄하고 거대한 형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채 엄숙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되뇌일 것이다.(로버트 브리우닝)
0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의 현관이다.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자는 그 현관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그 입장권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그 문을 통과할 때 사용되는 암호는 "예수"이다.(김경선)
0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에 관한 방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현자나 천재, 그리고 철학자에게, 때로는 목사에게 질문해 보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응답해 줄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물어야 할 것이다.(죤 포스터)
0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는 아직도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죤 칼빈)
0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더 아름답고 고상한 곳에 가기위해 가정을 떠나 죽음이라 부르는 일련의 끝없는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광스러운 영혼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환경과 행동 무대, 소망을 옮겨 놓게 된다.(에드워드 죠지 벌위 리튼)
0 어느 누구도 영생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이다.(프래드릭 윌리엄 파라)
0 이 세상은 원인과 경향의 씨앗이나, 저 세상은 수확과 결과, 완벽하고 영원한 결과의 세상이다.
0 영생! 당신은 어마어마한 생각에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장면과 변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우리 앞에는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겠구나! 그러나 아직은 그 앞에 그림자와 구름, 어두움이 가려있네.(죠셉 애디슨)
0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짧고 일시적인 인생을 마친 후 자신이 들어가게 될 나라이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어떤 근거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확신 위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제임스 클라크)
0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을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토마스 챨머스)
0 만약 시간이 좀더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흐른다면 영원한 세계는 좀더 당당하고 친절하게 보일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모든 위대한 자연들은 안정을 기뻐하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기능의 약속으로 확인된 영생을 발견한다.(랄프 왈도 애머슨)
0 두 세상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적합한 것들을 정당하고도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우리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언제나 약속의 땅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어거스트 헤아)
0 영원한 세계가 단순히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들의 형태대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의 빛과 힘은 어느 곳에나 잠재해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은 베일을 명료하게 벗기려고 하였다. 또 형용할 수 없는 광채로 인간의 평범한 삶을 온통 덮고 있다.(죤 캐어드)
0 영생에 대한 생각은 짧은 인생에 위안을 준다(샤레시앙 길라원 마레쉬에르브)
























교회 일치 운동




교회 일치 운동

교회 일치 운동(教會一致運動) 또는 에큐메니즘(Ecumenism)은 개신교회의 일치에서 시작하여, 개신교회정교회의 협력으로 이어진 기독교 교회 일치 운동이다. 
기독교
의 다양한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의 보편적 일치 결속을 도모하는 신학적 운동이다.

여러 교파로 분열된 보편교회, 즉 기독교 내 모든 정통 교회들이 복음서에 명시된 예수의 뜻대로 하나됨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와는 달리 이슬람교, 유대교 등 타 종교 및,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등의 이단들은 참여할 수 없으며, 니케아 신경사도신경 등에 명시된 보편적인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연합 운동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오이쿠메네(Οικουμένη)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근거는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부터 기독교 교회의 목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말씀 안에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도 담겨져 있다.[1]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주님의 기도와 명령대로 하나되도록 성령안에서 힘써야' 했고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제1회 세계선교회의를 통해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교회 일치운동을 발족하게 됐다.

기독교 교회 일치운동은 2차대전 이후에 구체화되어,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회로써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결성되어 개신교회들(루터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오순절교회 등)과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구 가톨릭교회 등이 참여하여 전개되었고, 교회일치운동의 결과들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참회와 일치의 노력에 대한 결의에 따라 1970년대부터 로마 천주교회가 '참관인'(Observer)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는 이외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등 일부가 '참관인' 자격으로서 관여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로교 계열 일부,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계열 일부, 루터교, 성공회 등과 정교회가 WCC를 지지하고 협력하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회원[2]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보수교단인 장로교 계열 예장합동예장고신 등, 침례교, 재림교, 오순절 계열 일부 교단들은 신학적 차이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교회 일치 운동은 개신교에서 17∼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과 19세기아시아 등에서의 선교 운동 및 기독교 청년 운동의 과정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현대교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정통성 다툼을 벌임으로써 선교활동에 지장을 주는 문제를 교회 일치운동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일치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믿는 기독교의 공통적인 믿음에서의 일치이다. 예수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종교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회일치 운동을 전개하던 개신교회루터교, 감리교. 개혁교, 장로교, 성공회 등 교단들과 국가별 동방 정교회 교단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결성 하면서 두 교파간의 일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결성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1961년에 비로소 회원교단으로 가입했으며, 한국 정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한 후에 참관인(observer) 자격으로 참관한 바 있다.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개신교회정교회천주교회와 협력하는 것이었다.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정교회와 이단 시비와 정교회 지역 약탈의 역사적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않았고, 천주교회 우세 지역에서 개신교회 교인 살해와 핍박에 대한 용서를 구한 적이 없는 상태여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교회가 천주교회의 약탈을 용서하고, 루터교회가 개혁찬성파와 개혁가들이었던 개신교 교인에게 과거 천주교회가 자행한 살해와 박해를 용서하였다. 이런 개신교회와 정교회의 용서 선언으로서 천주교회가 세계 교회 일치 운동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 1970년대부터 천주교회도 참관인 자격으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방정교회가 천주교회의 정교회 지역 약탈과 방화를 용서하고, 함께 일치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협력의 장을 열었다. 천주교회에서는 교황 비오 9세1869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전까지는 방어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어 큰 진전을 보기 힘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천주교회는 종전의 방어적인 자세에서 동방 정교회개신교 교파들을 '형제'라고 관용하는 자세로 변화하였다.

정교회의 용서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본격화된 교회 일치를 위한 천주교회의 노력은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4년교황 바오로 6세동방 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방문함으로써 교회 일치 운동에 진보를 이룩했으며 이듬해 12월에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는 천주교회동방 정교회 사이의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신학적 대화에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성공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두 차례의 위원회를 구성, 최종 보고서와 2개의 합의선언을 내놓은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65년부터 대한성공회천주교간의 기도회를 개최하여 왔다.

개신교가 천주교회의 종교개혁 박해를 용서

루터교회천주교회의 개혁찬성자들과 개혁가들, 개신교도 살해와 교회 방화, 박해를 용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교회일치를 촉구하였다. 이후 다른 개신교회의 참여 요청과 박해 용서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개신교측과 천주교회 측은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었으며, 1972년 말타 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희년을 앞두고 1999년, 루터교 세계연맹세계 감리교 협의회천주교회과 함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 지난 450여년간 기독교 교회들 사이에 이어져온 교리논쟁에 큰 진전을 이루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장을 연 커다란 성과였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와는 1970년부터 꾸준히 대화하고 있다. 이미 로마 교황청세계 개혁교회 연맹(WARC) 간의 제1기 대화 보고서는 1977년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이어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된 제2기 대화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동 이해를 향하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감리교, 오순절 교회, 침례교회도 천주교회와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들을 발표해왔다.

개신교회와 정교회의 용서 이후 천주교회의 관심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회의를 통해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용서를 바탕으로 교회일치 운동에 의결권이 없는 참관인으로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시아 차원에서 1994년에 아시아 기독교 교회 협의회(CCA)에서 만들어진 “아시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AMCU)”을 중심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시아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평신도 대표들이 참가해 서로의 차이점을 딛고 함께 협력해 일하도록 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논의하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일치 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 공동 번역 사업이다.

한국의 개신교의 초기 선교 현장에는 서양의 교단별 선교정책에 따라 경쟁적인 선교가 이루어지며 네비우스 원칙에 따라 지역별 구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초기 배타성과 일제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현장의 선교사들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 장로교 선교회들 사이에는 1889년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와 1893년 <장로교선교공의회>가 차례로 결성되었고, 이는 1901년 조선인 장로들과 선교사들의 연합체인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결성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1905년 <대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가 결성되었고, 1918년에는 조선인 교인들이 참여하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의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창립되었다.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회연합공의회>와 조선인 교인들이 참여하는 <장감연합협의회>가 연합하고 6개의 선교부, 대영성서공회, YMCA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가 창설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초대회장으로 차재명 목사가 당선되었고, 창립 총회에서는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그리고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을 목적으로 채택하였다. 미국에서 분열된 감리교단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나뉘어 있던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는 1930년에 통합되어 하나의 감리교단이 구성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조선의 기독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다수의 개신교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한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1년에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개칭하며 친일단체로 변모하였고, 광복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1945년 7월 19일에는 효과적으로 조선의 개신교를 통제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스스로 합병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국가와 개신교 교회의 재건이 논의됨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해체되었고,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세계교회들의 초교파운동에 참여하였다.

한국교회에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단체로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여하는 교단들의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으며, 회원 교단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 정교회 등 총 9개 교단(교회)이 가입되어있다.

반면 개신교회천주교회, 동방 정교회 간의 명확한 분리를 주장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각 교파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상당수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교회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모든 교단을 위한 하나의 성경 번역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축은 개신교 성서협의회인 대한성서공회가 되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대표 번역가를 선출하여 위원회를 구성해 번역을 시작하였다. 지역명, 인물의 명칭 통일과 한국어 표현 활용 등의 기준을 제정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준비하여 1971년에 신약전서를, 1977년 신구약 전서를 출간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가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개신교회는 일부만이 예배 성경이나 교육용 성경으로 사용하고 대부분 거부하여 기존 개신교 성경을 유지하였다. 천주교회는 한때 공식 성경으로 활용하였고, 정교회도 사용하였다. 현재 공동번역성서는 현재 대한성공회한국 정교회에서 채택하여 쓰이며, 개신교 전체는 개역개정판이나 새번역 성서를[4], 현재 천주교는 천주교주교회의에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한다.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에 대해 보수적 개혁주의와 세대주의, 신복음주의, 근본주의 영향의 교단들은 반대한다. 보수적 개혁주의인 한국 장로교의 예장합동과 고신 등과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영향의 침례교와 순복음교회의 보수적 교단들은 크게 반대한다. 이들은 교회일치 운동에 이단으로 규정하는 천주교회가 회원은 아니라도 참관인으로도 참여하는 것 자체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교회일치운동을 반대한다.

개신교 보수주의인 계통에서, 반대자들의 신학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한 분이시다(삼위일체).
  3.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4. 중생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5.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
  6.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
  7. 최후에는 영생과 영벌뿐이다.
  8.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영체다.

이상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일치운동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교회 일치를 주장한 에큐메니컬은 반대로 한국 장로교회를 양분하였다. 즉 에큐메니컬에 찬성하는 예장통합과 반대하는 예장합동으로 장로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9년 WCC 가입 문제 때문에 찬반이 갈려 반대 측은 예장합동, 찬성 측은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1950년대에 예장의 WCC 가입시기에 이르러, 당시 WCC 총재가 네덜란드 개혁교회목사 호프트였는데도, 정작 회원교단이 아닌 천주교회와의 일치운동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장로교 보수파인 예장합동과 WCC 가입에 찬성하는 장로교 온건파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이후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현재까지 반목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개신교 보수파인 예장합동은 WCC와 교회일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들의 반대 이유는 WCC 운동이 천주교회와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개신교 보수파의 의견으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개혁주의 신앙과 대치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수 교단을 중심으로 회원이 아니라 참관자격인 천주교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세계 교회 일치 전략을 우려하는 이유도 있다. 이에 예장합동 총회는 2013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며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목회자들을 징계했다.[5]

  1. (요한복음서 17:21)
  2. 천주교회는 참관인일 뿐 회원교단이 아니므로 협의회에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
  3. 《이야기 교회사》/이성덕 지음/살림
  4. 다만 교회 일치운동에 참여하는 한국의 개신교 일부 개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예배용 성서로 사용한다.
  5. 곽원철 《합동과 통합의 분열과 2013 WCC총회에 대한 견해 차이》(총신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교회 일치 운동

18세기 스페너, 프랑케 등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존 웨슬리영국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속 스콜라주의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세계 선교에 눈길을 돌리게 하였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한 세기 동안의 선교활동은 대항해시대 이후의 몇 백년에 버금가는 눈부신 선교 역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선교활동은 교파적 색채를 띤 개신교-그리스도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파들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선교 단체들간의 연합과 협동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선교 및 교회 연합의 방향을 전했던 것이다.

1846년 8월에 복음주의 연맹이라는 단체가 탄생하였다. 이 단체 최초의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이 영국 런던에서 있었다. 당시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52개 교파로부터 800명의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복음주의 연맹은 19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기원한 유일한 에큐메니칼 조직체가 되었다.이 연맹은 오늘날 6억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기독교 교단 연합운동 단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라는 칭호를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851년에 런던에서, 1853년에는 뉴욕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알렉산더 더프가 사회를 맡았던 영국복음주의연맹 연차모임에서 1854년 최초의 국세선교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교파 차원의 화합 운동으로서의 교회일치운동은 189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것은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공식 대표들을 통해서 상호 다른 점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린델발트 대회와 Review of the Churches라는 정기간행물에 의해서였다. 특히 Review of the Churches의 편집인 헨리 런은 이 지면을 통해 이질적인 각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재통합 문제를 위해 함께 대면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며,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스위스 계곡 그린델발트에서 영국 국내 그리스도교 일치 논의 대회가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이후 처음 열린 대회로 성공회, 침례회, 회중교회, 장로회, 감리회, 퀘이커 신자들이 참석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이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모든 개신교 교파로 확산되어갔다. 이후 1920년대에 스위스 뮈렌에서 런이 개최한 2번째 대회는 유럽 대륙의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회일치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같은 도시인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창립 개최된 세계기독학생연맹이다. 이 학생 운동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YMCA와 YWCA에 의해 발전된 운동이다. 이 학생 운동의 지도자가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모트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이후 교회일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1886년 무디 부흥운동을 계기로 외국 선교를 위한 학생 지원 운동(SVM)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888년 YMCA의 총무가 되어 교회일치운동 경력을 쌓게 되었다. 모트는 이후에도 2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각종 학생 연합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학생 운동을 통한 일치의 경험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의 약 10년간 전 유럽미국, 아시아아프리카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 교회일치운동에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세계주일연합 운동 등이 여러 교파들의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평신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각종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는 1910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제08차 세계선교대회(WMC)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적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긴 선교단체와 특히 자의적 그리스도교 운동 단체들(YMCA, YWCA, SCM, WSCF, SVM 등) 출신이었다. 이때 의장이 된 지도자가 앞서 언급했던 미국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이 외에도 조셉 올드함, 윌리엄 템플 등이 이 회의를 통해 당시 교회일치운동의 흐름을 이끌어나갔다.참고

이후 1921년 10월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WMC의 꿈을 보다 발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IMC는 개신교인들 사이의 범세계적 친교를 육성시키며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연합 계획과 행동을 촉진했고, 1928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1938년에는 탐바람에서, 1947년에는 온타리오의 휘트비에서 모였다. 이후 국가별 혹은 초교파적인 기구들의 공식 대표가 선교협의와 포괄적인 계획을 위해 모이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게 되었다. WCC 헌장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못박고 여기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회원 가입권을 허락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간의 교환예배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회 이어져 오고 있는데,[1][2]한국 교회 일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CBS, CTS, CGN, CMTV 등 방송사 명칭이 'C'로 시작하는 개신교 계열 방송국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출연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독실한 신앙인인 가수 자두와 배우 최강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두의 교단은 감리회이고, 최강희의 교단은 침례회이다. 그들은 간증 프로그램에 몇 차례 나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과정을 얘기했다.

CCC, IVF(교회일치운동에 가장 긍정적이다.), SFC, JOY 등의 개신교 동아리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교단이 다르고 종파(가톨릭, 정교회 등)가 달라도,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회원으로 받아주고 있다.

현재 전세계 교회들이 참여중인 교회일치운동은 크게 세개의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중도~진보 교회들이 모이는 WCC, 중도~보수, 일부 온건 진보 교단들이 모이는 세계복음주의연맹(약간 보수적이지만 다른 견해에도 열린 단체), 선명한 보수 교회들이 모이는 국제개혁주의교회협의회(ICRC),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로 나누어져 있다. ICRC는 기독교 타종파를 아예 배제하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세계복음주의연맹ICRC와는 반대로 가톨릭, 정교회 등 기독교 타종파에 열려있지만 교회일치보다 선교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기독교 인구가 많은 미국은 미국교회협의회의 다수와 미국복음주의협회의 일부가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가톨릭정교회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재일치를 시도했다. 미하일 8세 동로마 황제에 의해 요안니스 벡코스를 대주교로 서임했는데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황제 요안니스 5세가 개인적으로 재일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동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치와 교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는 양자 간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공의회를 소집하기를 거절해왔다. 그러다가 1438-38년에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만났다.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서방의 신학자들과 신학 대화를 했고 실제로 동의가 이루어졌고 일치 선언도 이루어졌으나, 후에 동방 측의 여론 등으로 인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일치 시도가 있은 후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두 교회는 오랜 세월 평행선을 그리며 지내왔다. 그로부터 약 524년이 흐른 뒤 두 교회 간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정교회는 가톨릭이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적인 참관단을 보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교회의 사제직과 성사들을 인정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통해 정교회를 "자매 교회"로 지칭하고 "참된 그리스도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이어받은" 교회로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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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동서 대분열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아티나고라스(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를 만났고, 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1054년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온 서로에 대한 파문을 취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Demetrios)를 만났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의 대표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0년 일치의 회복을 목표로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합국제위원회가 그리스 섬 파트모스와 로도스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82년과 1988년 사이에 교회, 전례와 성사, 사도전승 문제를 포함한 3가지 중요한 합의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이러한 긍정적인 대응은 1988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 기념식에 바티칸 사절단이 참가하는 것을 포함하는 가톨릭과 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회합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교류가 급속히 발전했다. 2003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비롯한 4명의 평의회 소속 공식 사절단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이스탄불을 방문해 축하했다.

2006년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의 대주교 및 사제들과 신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정교회 측 인사들과 가톨릭의 인사 27명이 만나 1980년부터 시작된 일치 회복을 위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이 회의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양자 간 일치위원회의 후속조치로서 그 해 독일의 프라이징에서 그 내용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양측은 서로의 미사/성찬예배에 참례했다. 다만 이것은 성사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호 간의 전례 참관이었다.

양측의 활발한 교류는 200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초청으로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공식 방문하는 결실을 맺는 큰 밑바탕이 되었다.

2007년 10월 8~14일은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열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는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 27명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에서 온 정교회의 대주교들 및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의 교의학적, 성서적 측면에서의 전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해와 교류를 모색했다. 이 회의 역시 이미 1990년에 모스크바의 양자 간 일치위원회에서 제기되고, 2006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마지막 회기가 열린 10월 13일 토요일에 라벤나 대성당에서 열린 가톨릭 미사에 정교회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14일 산 비탈레 성당에서 열린 정교회의 성찬예배에는 가톨릭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2006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것과 같이 2008년 6월 7일부터 29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여 양자 간 더욱 친밀한 교제를 약속했다.

정교회는 콥트 정교회를 비롯한 비칼케돈파 동방 교회(오리엔트 정교회)들을 역사적 경험, 교리와 영성 등에서 서방 교회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비 칼케돈파 교회들과의 교류는 1964년 덴마크의 아루스와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열린 비공식적 회합들에서 양측의 주요 신학자들이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제네바에서 그리고 1971년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보다 진전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우리는 우리가 서로 하나의 정통 신앙 안에 있는 교회임을 깨달았다. ... 그리스도론적 교리의 핵심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했으며, 브리스톨 회합에서는 "우리 가운데 일부는 두 본성, 의지, 힘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 중 일부는 동일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일치한 신인적 본성, 신인적 의지와 신인적 힘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측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나눔 없이, 분리 없이 결합되었음을 고백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칼케돈 신앙 중심으로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회합이 있은 후 두 교회를 대표하는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1985년에는 제네바에서, 1989년에는 이집트의 암바 비쇼이 수도원에서, 1990년에는 제네바에서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양자의 교리적 불일치 부분을 일정 정도 해소했고 상대에게 행했던 과거의 저주들과 비난들을 철회하도록 권고되었다.

1989년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상대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 "동방 교회들의 두 가족이 서로 오랫동안 교제를 갈망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고 분열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사도적 신앙에 기초한 성사 교류를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양측의 교류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더 긴밀해졌다. 여기서 두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분리된다든지 혹은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명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정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동이나 변화, 구분, 분리 없이 결합하고 있다고 기술하여 해묵은 그리스도론 논쟁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최종적으로 1993년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위한 제안서가 결의되면서 두 교회의 갈등도 최종적으로 정리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두 교회가 완전한 상통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단성론'과 '황제파'라는 낙인을 찍어온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진일보라고 여길 만 하였다.

1973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이집트 콥트 교회 총대주교 셰누다 3세가 만나 그리스도 신앙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들의 전승에 입각해서, 그리고 처음 세 개의 보편공의회에 준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육화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요 성부의 영광의 광채시며 성부 본질의 모상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참된 육신과 이성과 영혼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죄 없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나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시며 하느님, 구세주, 우리 모두의 왕으로서 신성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으로 치자면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실제로 완전한 방법으로 섞임 없이, 혼합 없이, 혼동 없이, 바뀜 없이, 갈림 없이, 나뉨 없이 결합한다. 그분의 신성은 인성으로부터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영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육신을 갖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 그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전유물과 인성의 모든 전유물이 하나의 참되고 완전하고 불가분한 결합 안에서 온전히 보존된다.

우리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인간의 구세주이시고, 육화한 말씀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그분은 자신의 인성을 신성 안에서 섞임 없이, 혼동 없이 하나로 만든다. 그분의 신성은 자신의 인성과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한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셰누다Shenouda 3세가 공동 서명한 "공동 교서"(dichiarazione comune).[3]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했다. 교황은 카이로의 이집트 성모 대성당에서 이집트 콥트 정교회의 세누다 3세를 비롯한 타 교파 지도자들과 일치 모임을 갖고 새 천년기를 맞아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협력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2017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4월 28~29일 이틀간 진행한 이집트 사목방문 중에 콥트 정교회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성 베드로 성당 순교자의 벽에서 함께 기도했다.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가 피로 얼룩진 벽을 보여주자, 교황은 핏자국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유리벽으로 다가가 축복한 후, 직접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이 장면은 고통 받는 교회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이해됐다. 교황은 콥트교회 신자들이 혼자가 아니며, 로마 주교라는 충실한 친구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프란치스코는 타와드로스 2세와 만나 교회일치 측면에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결과를 이뤄냈다. 두 교회의 수장은 가톨릭 교회와 콥트교회는 서로 간 세례의 합법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 양측의 신자가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의 소속이 되고자 하는 경우,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 없이 이전에 받은 세례의 효력이 유지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개신교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 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에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Ιερεμίας Β΄ Τρανός) 간에 있었던 서신 교환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바울로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며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가라"는 답신을 했다.

한편 칼뱅파와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키릴로스 루카리스(Κύριλλος Λούκαρις, 1572–1638)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키릴로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뱅의 주장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그 결과 그가 쓴 조직신학과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뱅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 온 칼뱅주의적 이단'이라고 단죄하였다.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쓴 신앙고백문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 가지 신학 논쟁과 스캔들에 관한 기록들도 같이 있다. 키릴로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쓴 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초에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최초의 대화는 성과 없이 일단락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연합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 변화에 발맞추어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일치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열린 정교회와 개신교 간 신학 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19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센에서,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그리스도론과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성화와 구원의 활동, 전례, 하느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혼인과 타종교인의 개종 등과 관련된 사목적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동시에 양자 간에 공통점이 많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양측은 1979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만남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간에 일치점이 더욱 많아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에 개신교계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신교의 개혁교회 연맹측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 1990년, 1994년에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 간의 주된 대화와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의 승인하에 마련되었다. 대화는 양측의 공동 기반인 니케아 신경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을 언급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개신교뿐 아니라 정교회도 교회일치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 데 할애하였고, 3번째, 4번째 회기는 강생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참석 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 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교회일치적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다만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조지아 정교회는 1997년, 불가리아 정교회는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탈퇴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1541년 4월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당시 마르틴 루터의 칭의론을 옹호한 콘타리니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내부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치와 공의회를 통한 교회 개혁을 놓고 가진 마지막 대화였다. 당시 가톨릭은 콘타리니 추기경과 요한 에크 등이,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마르틴 부처와 그를 보조한 장 칼뱅, 마르틴 루터를 대신하여 필리프 멜란히톤 등이 대표로 참여했다. 구원론은 이중칭의론[4]으로 합의가 되었으나, 성찬에서의 실체 변화 여부로 결렬되었다.[5] 얼마 지나지 않아 콘타리니 추기경은 사망했고, 이로 인해 가톨릭에서 이탈리아까지 종교재판소가 설치되는 등 반동적 조치가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던 버미글리 등 '복음주의자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 가톨릭을 떠나 종교개혁에 몸담았고, 저지대와 프랑스에서 또 다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인 얀센주의를 따르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단으로 제거되는 결말로 끝났다. 버미글리 등 이들은 마르틴 부처와 함께 영국까지 건너가 성공회 개혁의 기초를 놓는다. 회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지켜보던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불링거, 참여자로서 환멸을 느낀 칼뱅은 그대로 개혁 조치를 이어갔다.

가톨릭은 기존의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 이후 부정적 입장에서 벗어나[6] 1928년에 , 개신교에서 시작된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Mortalium Animos>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사회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며 은총의 샘인 성사를 거행하는 직무자들이 있는 가시적 교회(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교회와 관련 없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계시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는 교의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이 의도하는 교회는 그들 각자의 의견과 판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성되는 연합(Federation)일 뿐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 일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으로 내세운 교의들은 가톨릭 교의와 동등한 입장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사도로부터 합법적으로 계승된 이들의 유권적 해석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잘못된 교의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일치는 기대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Sempiternus Rex Christus)에서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2가지 당위성을 제시한다. 곧 요한 복음서 17장 21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일치는 그리스도의 뜻이었다는 것과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그리스도교 ‘공동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그 당시 2차례 세계 대전을 통한 고통의 체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갖게 되었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관으로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상태로는 반그리스도적 세력을 대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회칙은 일치의 당위성을 간절하게 표현하는데, 곧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를 위해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베드로좌(Ad Petri Cathedram)」에서 교의와 제도와 신심의 차원에서 일치를 위한 3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교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성전과 성서의 전통에서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믿을 교리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일치를 위한 참된 교의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찾아진다. 제도적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합법적인 직무 계승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가톨릭 교회 안에 보존되어 왔음을 밝힌다. 신심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성사를 통해서 초월적인 양식을 취한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일치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신앙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성체성사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계승된 사제직을 수여받은 사람만이 거행할 수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승인함으로써 이전의 교황들보다 보다 개신교에 개방적이며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일치교령에 따르면, 과거의 분열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상호간의 신뢰와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일치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불목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일치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일 유일한 교회로되, 많은 그리스도 교단들이 각각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계승자로 사람들에게 제시하며, 스스로 주님의 제자라고 선언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걷는 길이 서로 다르므로, 마치 그리스도 친히 분열되신 것 같이 보인다. …… 이 분열은 모든 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 수행에 지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인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0항).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열교(Haeresis)' 혹은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다. ... 성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티토 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를 뜻한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이와 같이 이단 열교도라고 표현하던 가톨릭 교회가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을 바꾼 것은 놀라운 변천이 아닐 수 없다.

바오로 6세는 또한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에서 이전 교황들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이 일치에 큰 장애임을 인식한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교황권을 결코 철회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황이 없다면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의 실질적이고 권위 있는 최고의 사목직이 없다면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참된 일치 대신에 다른 일치의 원칙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올바로 지적하였듯이, “교회에는 사제만큼이나 많은 이교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110항 중

가톨릭 교회는 교황 수위권이 정교회, 또 개신교와 대화하는 데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임을 인식하지만, 계시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뜻을 포기하면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일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황은 개신교인들이 수위권의 당위성과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황 수위권의 본질적인 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신교인들의 요구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는 1968년부터 ‘교회일치 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1970년 명동성당에서는 1,0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하나[一體]가 되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현대 한국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천주교개신교의 일치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함께 번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전통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 성서를, 1977년 부활절에 구약성서를 각각 번역해 냄으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의미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있고, 현재는 대한성공회와 한국 정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일부 교회에서 강단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의 일치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을 통하여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다름[異體]을 뛰어넘어 하나[一體]가 되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노동·인권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 부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좌파성향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과 개신교의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 협의회, 예수살기 등 진보적 사회 참여를 지향하는 양 교회 간의 협력은 아주 돈독하다. 여담으로는 강경우파 성향의 가톨릭 사제와 신자 모임인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 모임과 역시 우파 성향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간의 사이도 아주 끈끈한 편이라는 사실.

국내 학술운동 부문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다소 진행 중.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천주교 쪽의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와 개신교 쪽의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노력으로 『하나인 믿음』을 발간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이 개신교 신학 잡지인 「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99년 10월 31일 가톨릭, 루터회, 감리회 세 교파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이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동의를 선언하였다. 비록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었고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동 선언문이었으나, 적어도 가톨릭과 개신교 교단들의 합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매년 1월에 ‘그리스도교 일치기도 주간’을 정해 가톨릭·정교회·개신교가 번갈아가면서 합동 기도회를 열고(한국의 경우 에큐메니컬 기도회는 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7]), 2000년부터 매년 그리스도교 일치 포럼을 개최하고, 교단 대표들과 함께 성지순례와 피정, 체육대회를 통한 교류를 갖고 있다.

2014년, 한국천주교주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했다. 한국 가톨릭과 NCCK 회원교단인 한국정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성수동측, 기독교한국루터회가 함께하는 기구이다. 일치기도주간 시행, 공동기도문 개발, 교재개발, 직제 연구, 공동 성서번역, 신학생 교류, ‘일치학교’ 운영, 일치피정 등의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회음악 교류도 활발한데, 대표적으로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내리교회가 성가대 연합 성가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인천 지역을 대표하고 상징성과 역사성 있는 세 교파의 중심적 교회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하였다는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청 지침 - 공동 기도회, 예배에 관한 지침들도 있다.

현재 가톨릭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WCC보다는 가톨릭에 더 신중한 입장), 미국교회협의회(NCC), 미국복음주의협회(NAE)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주재 교황대사였으며 프랑스 튈의 대교구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성 비오 10세회(이하 SSPX)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전례 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예전 트리엔트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모국어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또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의 많은 요소가 삭제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었고 전례력도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또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성령쇄신운동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급진적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1970년 대주교의 친구이기도 한 스위스 프리부르 교구주교 샤리에르 주교와 접촉하여 스위스의 에콘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을 신청하여 인준받았다. 보통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 성향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추진에 열심인 프랑스 성직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를 지지하는 사제·신학생들의 활동에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트리엔트 미사와 옛 해석에 집착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스위스 에콘의 성 비오 10세 신학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2명의 벨기에인 추기경이 시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선언을 했다. 1974년 11월 21일 선언으로 불리워지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교황청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샤리에르 주교의 후임 프리부르 교구장 피에르 마미 주교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하겠다는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제·평신도들과 항의하는 차원에서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에 따른 결정 사항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특정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당장 교황청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단호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 이들은 트리엔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을 사제로 서품했다. 이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합법적으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으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서임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정교회와 여러 개신교 교파와 함께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 지도자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 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까지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가 있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종교다원주의라면서 크게 격앙되었고, 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성 비오 10세회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이에 따른 결정 사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고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그 변화에 부정적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 존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교황의 교회 일치 운동과 신학의 진보적 변화를 수용 거부했다. 또한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기존 전통을 크게 훼손되었다면서 전례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가 가진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추기경 시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성 비오 10세회와의 협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모든 가톨릭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집전을 자유롭게 전면 허용한다는 조치[8]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4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실제로 이 조치 후 많은 접촉이 잇따랐다. 그러나 현재 대화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현재 SSPX는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교황청의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의장이었던 귀도 포조 대주교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가톨릭 교회의 일부이지만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일치를 위한 정신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공동번역 성서를 따랐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0-14절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9]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인간의 간교한 유혹이나 속임수로써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4장 1-15절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중략)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9장 38-41절

현대 성서학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교회일치적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개신교. 정교회, 가톨릭의 간행물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교, 그리고 신학대학에서 성경 교과의 참고 문헌으로 높이 평가된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와 '신약성경학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처럼 교파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학회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미국가톨릭성서협회(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라고 고백하는 기관에서도 회원 자격을 공유하고 있다. 개신교와 정교회 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 함께 협회에서 공식적인 직위를 맡고, 편집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공식 기관지인 〈계간 가톨릭 성경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에 기사를 기고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다교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글을 쓰는 유다인 학자들뿐 아니라, 신약성경 해석 자체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유다인 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톨릭 성서학의 한 산물로서 이러한 주해 자료를 제공하는 데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전 두 판에서 우려했던 바는,[11] 이 선택이 혹여 개신교나 유다교의 성서학에 대한 거부나 의심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가톨릭 안팎의 동료들에게 성경 해석에 대한 가톨릭의 접근법을 특징짓는 고유한 관점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성 중 상당 부분이 특히 주류 개신교나 정교회와 공유된다 해도, 가톨릭의 성경 해석은 궁극적으로 가톨릭 신앙 공동체에 책임이 있으며, 가톨릭 전례, 영성, 그리고 교회론의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


성서학은 교파끼리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비그리스도인도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분야이므로 일치 운동의 실질적 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은 각 교파끼리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대 성서학의 본질, 곧 "성경 텍스트가 저자 당시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의도한 1차적인 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에서는 교파간의 차이가 없다.

가령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외의 친자식이 있었는가"라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 차이를 보자. 여기서 교파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텍스트가 너무 단편적이라서 어느 쪽으로든 순수 성서학으로는 결론내릴 수 없다'는 데는 교파간의 차이가 없다. 교황 수위권에 대해서도 교파간의 성경 해석 차이가 존재하지만, 순수 성서학은 교황수위권을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데 역시 교파를 초월한 합의가 이미 존재한다. 순수 성서학은 저자가 동시대 독자에게 의도한 문필적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뿐, 성경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해답을 성경 본문에서 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리로 성경의 공동번역 역시도 교파간의 차이는 오늘날 매우 미미하며, 어차피 원문에 쓰는 비평본은 히브리 성경은 BHS, 신약은 Nestle-Aland로 대동소이하다. 남은 건 동일 원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건데, 성서학의 일치 때문에 결과적으로 번역 역시도 단지 몇몇 번역어 차이만 있을 뿐이다.[13]

영미권의 경우 RSV(개정표준역 성경) 성경이 가톨릭, 정교회에 의해 수용되면서 영미권 최초의 공동번역 성경이 되었고, NRSV 성경, REB 성경은 편찬과정부터 아예 공동번역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합작한 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그러나 각 종파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공동번역을 거부하는 흐름은 여전하여, 그 쓰임새에 있어서 공동번역이 반쪽짜리가 되는 등의 한계 역시 존재한다.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는 가장 어려울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의 대화는 현자들과 학자들만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구호로 바꾸어 싸움판으로 돌진한다. 그들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으면서도 진짜 싸울 준비는 제대로 안 돼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 서로 과거에 대해 논쟁하면서 같은 말로 정반대의 뜻을 나타내려 하기도 한다. 여하튼 간에, 상대방이 하고 있는 말에 서로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스콧 한Scott Hahn, 『나는 왜 믿는가』Reason to Believe (2007), 이창훈 옮김, 살림, 2009, pp.102-103.

일치 대화를 위해서든 논쟁을 위해서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차이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상대방의 교리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채 캐리커처로 파악하여 섀도복싱만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든 그냥 재미로 논파하기 위해서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이다.

구체적인 예시로 '믿음과 공로의 관계'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보자.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그리고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개신교, 행동으로 구원받는 가톨릭'이라는 흔한 캐리커처가 결코 아니다.(참고: 의인(구원론)) 개신교적 관점에서 볼 때도,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 공동번역)이며,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도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 6)이기에 결국 '오직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 받는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를 "실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폄하하거나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을 "행위구원론"이라 폄하하는 건 매우 잘못된 단순화이며, 사실을 왜곡하여 교회를 찢어버리는 거짓말이다.

또한 이런 캐리커처화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 설령 양자에게서 강조점이 정반대인 문장으로 표현되었더라도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라는 걸 명심하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 정반대의 강조점으로 표현된 건, 위에서 언급한 바울로 서간과 야고보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성경에서도 존재한다.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로와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둘 다 신약의 정경이며, 강조점이 서로 정반대일 뿐 사실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로에게서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 야고보서에서는 '행동'으로 표현되며, 따라서 오직 믿음을 강조한 바울로와 행동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일치 운동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가톨릭을 같은 그리스도교가 아닌 아예 다른 종교로 인식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적그리스도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일치 운동에 적극적인 NCCK 계열의 개신교 교단들까지 배교자, 적그리스도 2중대이며 "성경적으로 완전히 개혁된 교회가 아니면 그리스도교 형제로 볼 수 없다"라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특히 보수 교단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가톨릭 뿐 아니라 가톨릭과 교류하고 일치 운동을 하는 NCCK 소속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과도 교류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군소 보수 교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기총은 아래에 나열된 개혁 신앙 교리를 고백하는 교단들끼리만 일치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성경은 신구약 합쳐서 66권이다. - 제2경전(외경) 거부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 - 화체설(실체변화) 거부[20][21]


  • 최후에는 영생과 영벌 뿐이다. - 연옥 또는 델로니아 교리 거부

  •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영체다.


WCC 가입을 두고 대한민국 최대 개신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1959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교단(합동, 합신, 고신, 고려 등) 측은 WCC 활동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는데, 2013년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를 앞두고 한국의 개신교계 상황은 그야말로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현재는 군소협의체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WCC가 열리는 박람회장 근처에서 반대 시위를 개최하는 등 국내 개신교계는 양분이 된 상황 속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교회 일치 운동은 교파 간의 상호존중으로 선교 경쟁을 지양[23]하기에 극우 성향의 가톨릭 단체인 성 비오 10세회와 또 역시 극우 성향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에큐메니컬 진영이 빌미를 제공한 점도 없진 않다.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 1991년 WCC 호주 총회에서의 초혼 퍼포먼스 사건 등으로 인해 평범한 개신교인들에게까지 상당한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은 결국에는 개신교를 교황청(가톨릭 교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지 않냐며 경계심을 가지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일부 강성 극우 성향 개신교인들은 다른 계통의 종교(불교, 이슬람교 등)와도 화해 분위기를 갖는 것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이는 세계 단일종교 통합을 하려는 악마 숭배 세력의 음모라는 설을 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연관 짓는 건 덤. 이런 모습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원조인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전통 가톨릭교도들은 물론, 현대 가톨릭교도들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부 반(反)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에서는 개신교를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파가 아니라, '중세 가톨릭의 재야에 있던 정통 그리스도교'라고 보기도 한다.[24] 물론 이것은 장로교회침례교회의 일부에서나 찾을 수 있으며[25], 영국 내 가톨릭 조직의 일부가 국교회로 분리된 역사가 있는 성공회[26]와 가톨릭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회에서는 이런 시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27] 그러나 애초 종교개혁 자체가 초대 교회, 엄밀한 의미로는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들이 활동한 시기의 교회의 복원을 목표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던 만큼, ('주류 가톨릭이 아닌 재야 영역을 거친 정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통에 대한 회복 운동이라는 것은 개신교 교단들 자체의 정체성이다.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진영 내 일부 보수파[28]에서는 교회 일치라는 궁극적인 사명 달성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묻지마식의 교회 일치 운동은 오히려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에큐메니컬에 적극적인 성공회나 루터교회 내에서도 교회일치운동(특히 가톨릭과의 교류ㆍ대화) 그 자체에 회의감을 드러내거나 반대하는 성향의 일부(특히 자신이 속한 교파의 정체성을 강경하게 대변하는 부류)[29] 신자들이 소수 있기도 하다.

에큐메니컬 진영 내 개신교 교단들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 경우가 상당수이고,[30] 자연스럽게 여성 목사 안수나 성소수자 포용 등의 문제에도 매우 전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슈들은 자유주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으며, 개신교 보수파/중도파·정교회·가톨릭 모두에게서 상당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사제 허용은 사도전승을 매우 중시하는 가톨릭·정교회 측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나,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내부에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주교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도전승을 주장하는 성공회[31]와 일부 루터교회도 마찬가지다.[32]

에큐메니컬 진영 내에서 제일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은 성소수자 포용 문제이다.[33]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의 영성체 참여를 금하고 있으나[34],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에서는 개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 대한성공회 길찾는 교회 등. 심지어 더 나아가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35]를 하고 있는 교단도 있는데,[36]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각각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과 논란이 일어났으며, 몆몆 구성원들은 기존의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기도 했다.[37]

또한 가톨릭·정교회 측의 교회일치운동에 긍정적인 부류로부터도 교회 일치를 더욱 힘들게 하는 행태라는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장 리버럴한 개신교 교파 내부에서도 엄청난 비판과 논란이 있었으니,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톨릭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 신자에게 가톨릭 교회에서의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 일치 운동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교류'라는 건덕지라도 보일만한 것은 가톨릭 사제가 성공회로, 성공회 사제가 가톨릭으로 옮길 때 타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옮기는 경우와 달리 사제서품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특례(가톨릭 신자들은 이것을 '특례'라 안 하고, 교황의 사목적 '배려'라 표현함)가 적용되는 것 정도 뿐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비판도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2006년에 은퇴한 가톨릭 평신도 신약성경학자인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는[38] 공동 영성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오늘날 교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며 최소한 일치를 이루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이며 과감하기까지 하지만, 사실상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한 침대에 들고 싶소.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데 성관계가 가장 친밀한 사항이듯이, 성찬식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데 가장 친밀한 행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로 일치하는 성찬식을 시작할 수는 없다. 서로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양쪽의 제도와 권위를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각자 이룩한 공동체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즉 함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은 일치운동 끝 단계에 이르러 할 일이지, 처음부터 할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일이다.

분열을 극복하는 일은 하느님 표상에서 직접 유래하는 과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 근본적으로 일치를 바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나는 함께하는 만찬에 가장 먼저 참석할 것이다. 성찬식은 양쪽이 모두 바라는 구원의 탁월한 표현이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 전헌호 옮김 (서울: 성바오로, 2013), 304-305쪽

베르거는 여기서 재미있는 비유를 하고 있는데, 성교가 남녀간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이듯이, 영성체는 일치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1] 그동안의 예배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2] 2020년에는 코로나 문제로 인해 강단 교류만 이루어졌다[3] 번역 출처: 안젤로 아마토,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522-523쪽[4] '칭의 과정|의화'에서의 믿음, 성화 과정에서의 사랑(즉, 선행이라는 표지)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이론[5]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 칼뱅》,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9[6] 영원히 저주받을 이단이라며 선언하고 다시 여러 번에 걸쳐 거론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공의회 시기 바오로 4세의 경우 프로테스탄트에게 관용을 베풀지 말 것이며, 칼뱅파는 더더욱 용서치 말라고 주문했다. 이 여파로 17세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개신교 신조에서 반가톨릭적 색채가 확연히 드러난다.[7] 물론 한국 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나 정동감리교회 등에서 개최되기도 한다.[8] 이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취소되었다.[9] 물로써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준 세례는 집전자가 타 교파여도 원칙적으로 그 유효성이 초교파적으로 인정되는 중요한 이유다.[10]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와 정교회가 자신한테 되돌아오는 식으로 재일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기도 한다.[11] (발췌자 주석) 본 주해서의 이전판인 1968년판과 1990년판을 말함.[12]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창세기》, 주원준 번역, 성서와함께, 2023, pp.14-15에서 발췌[13] 가령 영어권 개신교에서 (개신교 관점에서) 매우 보수적으로 번역한 ESV만 하더라도, 아주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가톨릭에서 사용 가능할 정도다.(ESV-CE)[14]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를 포함한 신자들의 공동체 내지는 교회 조직(교단)이라는 뜻이다.[15] 다만 연합이라는 개념은 소수가 추구하는 추세이긴 하다.[16] 한편 에큐메니컬 개신교 진영은 가톨릭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며, 일부는 가톨릭과의 교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17] 교회법상 합법이든 불법이든 에큐메니즘 운동에 부정적인 것은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특징이다.[18] 천주교 제도권 보수파.[19] CPBC 가톨릭 뉴스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 관련 기사가 나오면 댓글 상황이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로 살벌하다. 물론 일치기도회를 반대하는 신자들과 찬성하는 신자들 간의 언쟁이다.[20] 개혁주의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성 대속을 중시하는데,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이러한 개신교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일종의 희생제사이므로) 싫어한다.참고글 또한 이쪽에서는 화체설을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내지는 신비주의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보편교회가 미사/성찬예배를 통해 희생제사를 재현한다고 해서 대속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1]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 중 기념설을 따르는 교파는 성만찬은 주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예식일 뿐, 그 자체에는 어떠한 능력이나 효력도 없다고 본다.[22] 아예 십자가조차 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예장합동 교단의 경우 교회법으로 십자가 사용도 금지했을 정도.[23] 현지 교회와 선교 교회 간 경쟁과 교파 간 개종을 지양[24] 발도파, 후스파 등. 심지어 보고밀파카타리파 등도 원래는 종교개혁 이후의 재세례파와 같은 집단들인데 가톨릭이 마녀 재판 과정에서 영지주의로 몰아세웠다는 주장도 있다.[25] 나머지는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가톨릭에서 뛰어나와 개혁교회를 차렸다고 본다.[26] 캔터베리 대주교 직책 자체도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소속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의 캔터베리에 주교를 파송한 것이 캔터베리 대교구(그리고 영국 가톨릭)의 시작이기 때문.[27] 따라서 극단적 반가톨릭주의(가톨릭을 아예 비그리스도교로 취급하는 수준)는 해당 교파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28] 자신이 속한 교단의 노선에 개의치 않고 교회 일치 운동 자체에 반대(WCC 반대 등)하는 극보수파는 여기서 논외한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예장 통합과 기감에서 이런 이들이 일부나마 존재한다.[29] 이것은 고교회, 저교회, 광교회 여부 및 리버럴, 보수주의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30]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모토 중 하나가 신학의 자유이다. 미국성공회, 대한성공회도 정말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 외에는 신자들의 다양한 신앙 자세에 대해 관용하는 경향이 있다.[31] 미국 성공회와 영국 성공회는 여성 주교가 존재한다. 특히 미국성공회의 의장주교를 여성 관구장 주교가 역임한 바 있으니, 이제 현대 성공회에서는 여성이어서 오르지못할 직분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32] 심지어 스웨덴 같은 곳의 주교제 루터교회는 여성 사제는 물론, 여성 대주교까지 있다.[33] 성직자의 결혼 인정 여부, 여성 성직자의 인정 여부 등은 이에 비하면 난이도가 낮은 문제들이다.[34] 가톨릭의 경우 성소수자의 입교 자체는 막진 않는다(가톨릭 교리서 참조할 것). 다만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성사를 받지 못하는 실질적인 조당이 걸릴 뿐이다. 정교회의 경우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입교를 막진 않고, 동성애 행위를 자제하고 고백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인 회개를 해야만 영성체가 가능하다고 본다.[35] 심지어 현재 성 생활을 하고 있는 성 소수자들에게도[36] 미국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미국 북장로회 등등[37] 실제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 결정 이후 미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로 부터 3년 간 관구로서의 권한을 제한당했으며, 미국성공회에 반대하는 북미성공회가 독립하여 교단을 만들었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도 교단이 분열되었다.[38] 엄밀히 말하면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친다고 에큐메니컬 운동 내부로 단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베르거를 반대 진영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워서 여기에 적었음.










워치만 니 & 케네스 헤긴


케네스 헤긴, 그는 누구인가?

‘케네스 해긴’과 ‘말씀믿음 운동’의 이단성 

인물소개

레마 바이블 신학교와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Kenneth Hagin Ministries)의 설립자이다. 그는 17세 때 심장병과 불치의 혈액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후, 약 70년간 현장에서 건강한 가운데 왕성하게 사역을 했다. 그는 “내 백성에게 믿음을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클라호마 털사에약 11만 평에 이르는 레마 바이블 신학교(RBTC)를 세웠고, 52개국에서 활동하는 8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의 사역 범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KHM의 라디오 프로인 「방송으로 듣는 믿음 세미나」(Faith Seminar of the Air)는 미국내 300개 이상의 방송국에서,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전 세계에 걸쳐 방송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사역들로는 월간 잡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 전국 순회 전도단,레마 성경신학교,레마 통신학교,레마 동문회,국제 레마 목회자협회,교도소 선교 등이 있다. 그는 2003년에 하늘나라로 떠났지만,그가 세운 신학교와 사역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Kenneth E. Hagin (1917-2003)

 

그는 현대 Word of Faith Movement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선지자로 여겨진다. 그는 1917년 Texas주 McKinney에서 미숙아로 출생했다. 심장이 약해서 16세에는 그 증상이 심각했는데. 환상과 기적을 경험하고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 한다. 1934년 17세의 나이로 침례교인으로 사역을 시작, 37년 the Assemblies of God로 부터 자격을 얻어 목회활동을 시작한다. 1940년에서 50년까지 오순절 치유부흥 운동에서 일했다. 1963년에 지금의 단체를 구성. 1966년 오클라호마 털사로 이주했다. 2003년 9월 19일 사망한 뒤, 아들 (Kenneth Hagin, Jr.)과 손자 (Craig Hagi)가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세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3년 4월 22일 저녁 7시 40분. 그는 사망했고, 지옥으로 갔다. “나의 속사람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갔고 나의 죽은 몸은 누워있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심장은 멎었고, 맥박도 멈추었다.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하나의 빛을 보았다. 나는 그 바닥에 닿을때에 어떤 영적인 존재로 의식이 있었다. 마침내, 지구위, 천국위로 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나의 입을 통해 나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번째는, 나는 나의 피가 돌지 않았고, 나의 발가락이, 다리가, 발목이, 무릎이, 엉덩이가, 위장이, 그리고 심장이 차례로 멈추었다. 나는 몸을 빠져나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번쨰로 내 심장이 멈추었다.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꼐로 가오니 용서하소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때가 하나님의 자비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가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사역이 은사를 발휘하던 복음적 사역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환상에 대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육체가) 이미 죽었고, 지옥으로 내려갔는데, 즉 영이 육체의 바깥에 있는 동안에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영이 몸을 떠난 뒤에도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지옥으로 내려가다가 말이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이 간증은 사실상 Word of Faith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몬교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지옥에서 다시 거듭났다고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도다”는 육체적인 업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즉, 죄에 대한 벌을 지불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자, 그의 영은 적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사단을 이겨서, 거듭난 첫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없는 예수님께서도 거듭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구원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과 연결이 된다. 재미있는 간증은, ‘내가 거듭날때에, 나와 어머니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으로부터 2블럭정도나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상 그 앞세대인 William Kenyon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결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McConnell은 Hagin의 문장과 Kenyon의 문장이 일치하는 예를 들어 (실제로 각각 반페이지 분량의 8가지 부분을 들며 거의 정확하게 일치함을 증거하고 있다.) Hagin이 그대로 복사하여 쓰고 있음을 입증한바 있다. (아니면, 예수께서 직접 Kenyon의 가르침을 Hagin에게 그대로 들려주었거나.)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오직 예수님의 직접 계시임을 주장하는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정을 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의 순수한 동기와 사역의 열정은 사라지게 되고, 아집과 거짓만이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주 집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쫒고나서, “지금 나는 예수님이 이곳에 서 계신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의 그 누구도 예수를 본 사람이 없더군요. 듣지도 못했더군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설교시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그 말씀을 다 들려주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천국과 지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도 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기록을 몇가지 보자.

 

- 1952년 겨울에 부엌에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단과 마귀들에 대해 가르쳐주겠노라 하셨다. (제자들처럼,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께로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고 명시되어 있다.)

- 1958년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 여기에 천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원하는 물질을 가져오기 위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 1959년 2월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있을때에도 예수님께서 그가 빨리 회복되어 사역에 임하게 하기 위해 직접 방문해주셨다고 주장한다.

- 또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사역을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하게 한명의 예언자 (자신)에게 계시록이후의 신적 계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Hagin에게 말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그들의 주장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 “성령께서 오셔서 나는 엎드렸다. 말을 탄 사람이 와서 나에게 두루마리를 주셨다. ‘미국은 마지막 부름을 받고 있다. 몇나라는 이미 마지막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종말이 내 손에 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들이 믾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권능과 징조와 경이가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적이 행해지며, 성령의 움직임을 받지않는 자들은 나를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을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구절만은 옳다.)

 

그가 묘사하는대로라면 예수님은 가끔은 맨발이셨고, 가끔은 로마샌달을 신고 계셨다. 키는 5-11 (177.5 cm ?). 몸무게는 180 (80 kg ?) 정도이시다. 예수님이 그 앞에 출현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난 예수는 성경과는 다른 말을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맘을 바꾸셨거나, 아니면 그가 환상속에 만난 그 존재는 예수가 아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말하는 이 1,2,3,4 단계를 잘 따르기만하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소책자, ‘하나님과 함께 당신의 티켓을 쓰는 방법’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티켓을 직접 사용해야한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성경의 예수님이신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Word of Faith의 주요 교리가 된 그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육체적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은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지옥에 가서 영적인 죽음을 한 후에야 가능했다. 예수님은 그때 거듭나셨다. 예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다.

- 크리스찬은 나사렛 예수만큼이나 성육신한 존재다.

-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떤 열등한 존재로서의 의식없이도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대한 그와 동등하게 만드셨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다.

- 우리도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기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다.

 

성경 어디에고 예수님의 영적 죽음에 대한 말은 한곳도 없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울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위치에 닿고자함이 죄의 본질이며, 사탄의 본성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신교 방송채널로 알려진 TBN의 설립자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우리는 작은 신(a god)이며, 그리스도이다.” (다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채널의 방송은 보지 않을수록 더 좋을 것 같다.)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Word-Faith란 의미는, 무엇이든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the Positive Confession Movement의 주된 관점이다. 이는 크리스찬 사이언스의 은사주의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간 조엘 오스틴의 말과 유사한 아들 Hagin Jr.의 말을 보자.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입술을 가지고 잇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의심하면서 말을 한다면 당신은 잘못 발을 내디딘 것이고, 당신이 그렇게 잘못 움직일 때에, 하나님꼐서는 아예 움직일 수 없으시다. 당신이 바로 움직여야한다."

 

Charismatic Laughter 또는 Drunk in the Spirit이라고도 하는 시도를 그는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0분의 메시지를 전한 다음, 성령의 모습중 하나인 "취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5분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웃고, 입김을 불고, 팔을 휘젓고, 마치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중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아서 뒹구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 Hagin Jr.가 아버지의 노트를 읽으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다시 Hagin이 말을 시작하면서 이는 에스겔 3:16-27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 했다. (어거지 해설이다)" 그의 집회를 참관했던 한 목사님의 증거다. 그리고 그는 자주 예배중에 하나님께서 박수를 칠 떄와 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기에, 그가 박수를 치라고 할 떄에만 박수를 쳐야한다고 자주 당부했다 한다.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정리한다. (자료제공연대에 따라 지금과 다를 수 있음)

Faith Seminar of the Air (1966년에 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Rhema Radio Church ("너 나이 육십에 꼭 필요한 사업이 라디오와 문서사업"이라는 직접 음성을 듣고 시작했다함)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974년 설립, 작은 대학 규모의 학교같은 곳)

1979 가을. The Healing School 시작

1995년 비디오 테잎 배포 시작

1996년 Rhema Praise라는 TV 프로그램 54개국 전파

1999년 40개국이 더 늘어남

책: 두 부자는 약 125권(성경공부교재 포함)을 서술. 5천 3백만부 발간

월간지: 540,000여부 배포

테이프 - 58,000여개의 테잎 배포

Rhema Correspondence Bible School: 6만 이상의 등록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6500이상의 졸업생 배출

Rhema Bible Church: 아들 Hagin Jr.가 목회

 

그에 대한 비평서로는 D.R. McConneld의 "A Different Gospel과 Hank Hanegraff의 "Christianinity in Crisis"라는 책을 권하고 있고, Jeremy Reynalds의 "The Walking Wounded"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남은 우리가 병약하지도 아프지도 않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긍정적인 말로 그리 할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60년동안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는 혈관에 관련된 지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이 병으로 사망했다.

 

-자료출처- http://blog.Godpeople.com/kimjpact/?B002-1044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 Sr., 1917∼2006?)은 오순절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케년(E. W. Kenyon, 1867∼1948)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맥코넬(D. R. McConnell)은 [다른 복음]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았다. "해긴은 참으로 케년의 저술에서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그것이 케년의 저술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케년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순절 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설교 등을 통해 자기의 메시지를 잘 따르면 병과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역의 초기에 케년은 감리교의 완전 성화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에머슨 대학에 등록했는데 이 곳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 사상과 행태 등으로 얼룩진 기관이었다. 그 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유일교 목사로서 결국 에디 부인이 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에머슨 대학 출신 중 여러 명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넘어가 거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케년은 이들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의 원인이 되며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고 또한 신유나 기타 다른 기적들이 반드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해긴은 케년으로부터 ‘긍정적 고백 이론’을 물려받아 현 시대 오순절·은사주의 안에 파급시켜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은사주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케년의 책들은 해긴, 코플랜드, 고셋, 캡스 등 ‘긍정적 고백 이론’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가 되었다."
해긴은 그리스도의 육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영적죽음과 지옥에서의 투쟁이 죄를 제거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해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사탄과 및 그의 마귀들과 투쟁을 벌이고 승리한 결과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단 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행 20:28; 히 9:14; 10:10). 다시 말해 속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에서 자신의 영을 내놓으시며 돌아가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또한 예수님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분은 결코 길을 잃은 죄인이 아니셨다. 비록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나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결코 지옥에서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경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거나 혹은 지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곧 그는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1000년 동안 무저갱 즉 바닥 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될 것이고(계 20:1∼3), 궁극적으로는 불호수에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20:10). 또한 성경은 지금 이 시간에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해긴은 크리스천도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매우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스스로 큰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오순절 부흥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해긴은 또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덟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 자기를 지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의 일곱 번째 환상은 1962년 1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모든 교단과 교회를 움직이사 그들이 다 구원받고 성령 침례를 받게 될 것을 자기에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은 이미 위글스워스가 두 플레시스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현재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연합 운동을 통해 이런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이 예언이 실제로 이 세대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을 통해 이제는 오순절 성령 운동 연합 대회에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들이 대거 참석하여 천주교 미사를 거행하는 일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순절·은사주의 종교 통합 운동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관하는 운동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해긴은 또한 건강·번영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유·건강도 이미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유와 축사를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긴의 주장은 그의 행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여러 차례 심장병으로 고생했고 어떤 때는 한달 반이나 심장병으로 누워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다. 한편 그는 건강·번영·축복 복음을 매우 강조해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영적·재정적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다시는 예전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하거나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에게 딸린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명령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이제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천사들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헛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믿음·신유·번영 부흥사들은 한결같이 말의 능력 혹은 입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로 긍정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같은 말·믿음 이단교리는 현재 모든 오순절 교회 안에서 아주 확고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오순절 부흥사들의 집회와 마찬가지로, 해긴의 집회 역시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한번은 소녀 하나가 영 안에서 죽음을 당해 무려 아홉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는데 해긴의 부인과 또 다른 두 사람이 과연 이 일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자 해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주사 자기 손가락을 그 세 명의 이마에 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세 명은 곧바로 마룻바닥에 넘어져 마비가 되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해긴의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그들의 이마에 댔고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났다고 한다. 해긴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한 여인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공중부양은 심령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천국과 지옥을 다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해긴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웃음 부흥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웃음 운동' 부흥사 하워드-브라운을 초청해서 집회를 열곤 했다. 1997년 10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웃음 부흥 집회는 비디오로 녹화되었는데, 그 비디오 테이프(맨 아래 표시 사이트 참조)를 보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회에서 벌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해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케네스 코플랜드 등이 참가했다. 이 집회에서 해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숨을 내쉬고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막 치면서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 쓰러지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여자들은 치마가 다 벗겨진 채 뒤로 넘어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뛰어 나와서 덮을 것을 가져다가 넘어진 여자들의 하체를 가렸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해긴의 아들 역시 술 먹은 사람처럼 마룻바닥에서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해긴을 부축할 의무를 지닌 해긴의 수행원 가운데 한 명도 술 취한 것처럼 하며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무릎 사이로 넘어졌다. 한 마디로 그 곳은 혼동과 혼돈의 장소였다. 술 취한 것 같은 해긴을 강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네 명의 남자 수행원이 필요했다.
 
참으로 해긴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가 운영하는 '레마 성경 훈련 센터'를 수료한 뒤 해긴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온 세상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만 180여 개의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고 단파를 통해 전세계의 80여개 국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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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Word Faith) 운동
(이하 내용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중에서 발췌함)
‘믿음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말씀 신앙 운동’ - 말씀, 믿음 공식, 믿음의 말씀, 긍정적 고백, 말하고 주장하기 또는 건강과 부요와 형통의 가르침 등 - 은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로버트 틸턴, 프레드 프라이스, 찰스 캡스 등을 위시한 말씀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번영과 완벽한 건강을 약속한다. 그들은 그 정도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말씀 신앙 운동의 신학은 기독교를 가장 저급한 인간 중심적 종교-기독교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윽박지르고 꾀어 내고 조종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부두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체계로 바꾸어 놓았다.
해긴 등 말씀 신앙 지도자들은 신약적인 기독교의 핵심을 더렵혀 신자들의 초점을 건전한 교리,예배,봉사,희생,사역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대신 약속된 경제적, 물질적 ‘축복’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런 축복들은 말씀 신앙의 공식을 알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실 것으로 기대되는 화물이다.
 
말씀 신앙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진리는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주술(呪術), 즉 영적 테크놀로지이다.
말씀 신앙 운동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의 교리는 신자 개인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을 신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산타 클로스나 시종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말씀 신앙 신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자기 자신이다. 이 운도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작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부추긴다. 말씀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케네스 해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자신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곧 그리스도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화육(化肉)입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행동했고 아담이 말한 것은 이루어졌다. 아담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사탄을 자기 위에 받들어 모셨을 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하나님이 사탄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지만 반역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보다 아래 등급으로 떨어졌다.
코플랜드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권리를 얻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동급이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축복(치유,구원, 경제적 축복, 육체적 축복, 가정적 축복...등)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해긴과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신자를 즉위시켰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그들의 거의 모든 다른 오류가 뒤따라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최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창 3:4-5).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귀 자신을 타락하게 한 바로 그 거짓말이었다(사 14:14)
 
말씀 신앙 운동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심지어 사탄의 본성까지 취하셨다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33년동안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 동안 신성을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신학으로 알려진) 개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전개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신 것(빌 2:7)은 신적인 속성만을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뜻이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는 예수님의 불변성 때문에 불가능하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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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진 해긴과 말씀 신앙 전도자들을 전혀 분별없이 추앙하고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조국 교회들과 성도들이여,
정신차리고 이런 멸망케하는 허탄한 미혹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갑시다!
 
(마 24:4-5, 24-2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show)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십자가복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믿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복음)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2972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워치만 니(중국어 간체자: 倪柝声, 정체자: 倪柝聲, 병음: Ní Tuòshēng 니퉈성[*], 광둥어: ngai4 tok3 sing1 응아이 톡 싱, 1903년 11월 4일~1972년 5월 30일)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사역했던 교회 지도자이자 그리스도인 교사였다.

그는 1922년에 푸저우(福州, Fuzhou)에서 지방 교회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집회들을 세웠다. 자신의 30여년의 사역기간 동안 니는 성경을 해석한 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중국 전역에 교회들을 세웠고,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많은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어진 중국 공산 혁명기간에 니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투옥되어 20년 동안의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2009년 7월 30일 뉴저지주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인 크리스토퍼 H. 스미스(Hon. Christopher H. Smith) 의원에 의해 존경을 받았다.

가족과 유년 시절

워치만 니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세관(the Imperial Customs Service)의 존경받는 관원인 니원슈(倪文修)와 미국인들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감리교 미션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던 린허핑(林和平) 사이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린허핑은 상해에 있는 중국인 서구 여학교(the Chinese Western Girls’ School)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동안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로서 봉사하기 위해 의료분야에서의 잠재적인 경력을 포기한 젊은 여성인 위츠두(余慈度)를 만났다.[1] 워치만 니의 부모님 모두 감리교인이었기에, 그는 감리교 감독에 의해 유아 세례를 받았다.[2][3][4]

초기 학창 시절

워치만 니는 13살 때인 1916년에 푸저우(Fuzhou)에 있는 '교회 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운영하는 중학교에 들어감으로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푸저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부속 중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뛰어난 총명과 포부를 드러내었고 자신의 학급에서 꾸준히 일등을 유지했다.[1][5][6]

구원과 훈련

워치만 니가 17세인 1920년 봄에 도라 유는 푸저우에 있는 '천안당 교회'(天安堂, the Church of Heavenly Peace)[7] 예배당에서 열리는 열흘 간의 부흥 집회[8]에 연사로 초청되었다. 워치만 니 어머니가 이 부흥 집회에 참석한 후에, 그녀는 감동을 받아서 예전에 불공정하게 벌을 주었던 한 사건에 대하여 자기 아들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이런 행위가 니를 아주 많이 감동시켰고, 니는 거기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다음 날 복음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 집회에서 돌아온 후에 니 본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28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한면으로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기도한 후에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 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한 학생으로서 자신의 구원의 체험에 대해 동급생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돌아온 후 곧 주님께서 내 몸에서 일하시는데 지장이 있는 것들을 해결했다. 또한 70명의 동급생들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어떤 날에는 매일 한 시간씩 심지어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기도하기를 계속했고, 몇 개월 후에 70명 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았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회심 후에 기독교 봉사자로서 훈련받기를 갈망했다. 그는 처음에 고등학생임에도 상해에 있는 도라 유가 세운 성경 연구소에 다녔다. 그러나 늦잠을 자는 것과 같은 나쁘고 게으른 습관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 니는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 영국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和受恩; Margaret E. Barber) 자매와 가깝게 되었고, 그녀는 니의 교사와 조언자가 되었다.[9][10] 니는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매주 바버 자매를 방문했다. 바버는 니를 젊은 학습자로 취급하여 종종 엄격하게 훈육했다. 바버가 1930년에 죽었을 때, 자신의 모든 소지품들을 니에게 남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복건(Fukien)에 있는 나성탑(羅星塔) 백아담(白牙潭(Lo-Hsing Pagoda)에 살던 바버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은 분이었으며, 그녀의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에 대한 그러한 충성은 이 세상에서 발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위트니스 리,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니는 바버 여사를 통해 디 엠 팬톤(D.M. Panton),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펨버(G.H. Pember),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다.[9] 이에 더하여 그는 존 넬슨 다아비(John Nelson Darby),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맥킨토시(C.H. Mackintos) 같은 플리머스 형제회 교사들의 책들도 소장했다. 마침내 그의 개인 서재는 교회 역사, 영적인 성장, 성경 주석 등에 관한 약 3천 권이 넘는 책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니는 사역의 초기 시절에 수입의 삼분의 일은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삼분의 일은 남을 돕기 위해, 나머지 삼분의 일은 영적인 책들을 사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자료를 택하고, 이해하며, 분별하고, 기억하는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한권의 책의 요점을 쉽게 붙잡았다.[11]

결혼

니는 10대 때에 장핀훼이(Charity Chang)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 두 가정 사이에는 삼대에 걸쳐 친교가 있었다. 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장핀훼이는 그의 면전에서 예수를 조롱했다. 이것은 그를 괴롭혔다. 니는 많은 고심 끝에 그들의 관계를 끝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십 년 후, 장핀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1934년부터 상해 교회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6] 니가 항저우에서 4차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핀훼이는 자주 아픈 니를 돌보았고, 그가 투옥된 후에는 유일하게 그녀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6]

사역

워치만 니는 1936년에 한 무리의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의 윤곽을 말했다.

그 때로부터 나는 하나님에 의해 고침받을 때까지 병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의 종류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1. 문서사역: 내가 병이 나은 후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성경 주해서 저술이 아니요, 일반적인 복음 전도도 아니요, 예언 해석도 아니요, 다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독자들이 새 창조물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의 저술들을 나의 독자들과 나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영이 나를 인도하여 그분의 모든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

2. 이기는 자 집회: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밝혀주사 각지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 일어나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매년 한 차례씩 이기는 자들의 집회를 열어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신 말씀을 충심으로 전했다.

3. 지방 교회들을 세움: 주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을 섬기게 하신 것은 부흥 집회를 열어 사람들이 성경의 교리를 더 많이 듣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내가 한 지방 한 지방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여 그를 나타냄으로써 지방 교회들의 합일(合一)의 간증을 나타내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분량대로 지체의 봉사를 하여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의 승리 생활이나 영성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서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하나님 자신께 드리는 것이다.

4. 젊은이들을 훈련시킴: 만일 주님의 오심이 지체된다면, 반드시 청년들을 일으켜 다음 세대에도 계속 그의 간증을 잇게 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하나의 신학교나 성경 학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한 면으로는 영적 생활을 훈련하고, 서로 상합하며 성경 읽기와 기도를 훈련하며 좋은 인성을 기르고, 또 한면으로는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체와 천연적인 생명과 그런 것들을 처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그들은 각 지방 교회로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내 마음에 눌림이 있었던 일은 대체로 이 네 가지가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매우 이른 나이부터 저술과 출판을 시작했다. 그는 1923년에 '현재의 간증'(The Present Testimony)이라는 잡지를 펴내기 시작했고, 1925년에는 기독도보(The Christian)라는 또 다른 잡지를 시작했다. 니가 자신의 이름을 '니슈토'(Ni Shu-tsu)에서 '니토셍'(Ni To-sheng, 영어 번역은 Watchman Nee)으로 바꾼 시기도 1925년도였다. 니가 스물 한 살 때 중국에서 말레이시아 시티아원(Sitiawan, Malaysia)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다. 니는 1926년에 상해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고, 그곳은 중국에서 그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2년에는 지방 교회들로 모이는 니의 실행이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투옥될 때까지 유지했다.[1][6][12]

니는 1928년에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이라는 세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13] 니는 같은 해 2월에 상해에서 그의 첫번째 "이기는 자 집회"를 열었다. 1934년에 니는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신 그리스도"와 "이기는 자들"을 주제로 한 특별 집회를 열었다. 니에 따르면,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와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중심성이요 우주성이신 그리스도라는 한 살아있는 인격으로 큰 전환을 가졌다."[1][6][14]

1934년에 니는 성경에 있는 교회는 결코 지역들로 나뉠 수 없고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교단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지방 교회들의 실행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련의 담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담화들은 마침내 <모이는 생활>(The Assembly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오월에 니는 위트니스 리를 격려하여 옌타이에서 상해로 이주하게 하여 자신과 이연여(Ruth Lee) 자매가 맡고 있던 니의 출판물을 편집하는 일에 합류시켰다.[1][6]

1938년에 니는 유럽 여행 중에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후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4] 그가 돌아온 후에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집회를 가졌다. 니에 의하면 이것이 그의 사역에서 두번째 전환이었다. 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번째 전환은 그리스도를 안 것이고, 두번째 전환은 그분의 몸을 안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 것은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의 절반일 뿐이다. 믿는 이들은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분은 또한 몸이시다."[1]

1939년에 니는 그의 둘째 남동생이 하던 기울어져 가는 제약회사 공장 운영에 관련되었다. 가족들의 압력을 마지못해 따른 것이지만, 니는 또한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극심한 가난과 고난으로 고통 당하던 자신의 많은 동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니는 전반적인 공장 관리를 넘겨 받은 후, 그것을 재편성했고, 상해에 있는 다수의 지방 교회 구성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상해 교회의 장로들 중 몇 명은 니가 사업에 연관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니가 1942년에 그의 사역을 잠시 중단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상해 교회는 집회를 중단했다.[1][6]

1945년 3월 6일에 니는 중경(Chongqing)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는 공장을 감독했다. 거기서 그는 아가서에 관한 메시지들과 <교회의 정통>(The Orthodoxy of the Church)으로 출판된 계시록 2장과 3장에 관한 일련의 메시지들을 전했다. 1945년 9월 9일에 일본군은 중국을 포기하고, 제2차 중일전쟁은 끝났다.[6] 1946년에 왕포진(Peace Wang) 자매와 위트니스 리 형제는 거기서의 니의 문서 사역은 물론 상해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니는 크리스천 일을 하는 자신의 동역자들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고령산(Kuling)에 12채의 목조 단층집을 구입했다. 1948년 4월에 상해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고 니는 거기서 자신의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니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듯이 사역을 위해 자신의 제약 공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사역을 위해 다 내놓게 했다. 짧은 기간에 상해 교회는 1천명으로 증가했다.[1][6]

박해와 투옥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출현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15] 또한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거짓 정죄를 받고 체포되었다. 강화된 선전 캠페인과 구금 위협을 통하여, 믿는 이들은 서로 밀고하도록 영향 받았다.[16][17][18]

1952년 4월 10일에 워치만 니는 만주(Manchuria) 공안 당국자들에 의해 상해에서 체포되어, 뇌물공여, 국가재산 절취, 조세 회피, 정부계약 사취, 정부의 경제 정보에 대한 불법 취득으로 기소되었다. 니는 또한 "재 교육" 되었다. 1956년 1월 11일에 지방 교회들 내의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겨냥한 전국적인 소탕이 있었다. 일부는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은 무기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1956년 1월 18일에 종교 사무국(the Religious Affairs Bureau)은 상해에 있는 난양 가(街)(Nanyang Road)에 위치한 교회 집회 장소에서 12일 간의 규탄 집회를 열었다. 그 규탄 집회에서 니를 반대하는 많은 참소들이 소개되었다.[19] 1956년 6월 21일에 니는 상해 고등 법정에 출두해서, 상해 교회 장로들에 의해 출교되는 선언이 있었고, 모든 혐의들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는 노동 교화가 포함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해에 있는 틸랑퀴오 감옥(Tilanqiao Prison)에 수감되었고 후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오직 그의 아내인 핀훼이 만이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56년 1월 29일에 공안 당국이 난양로 건물을 접수했고, 많은 니의 동역자들이 체포되어 격리되었고, 워치만 니를 거부하도록 강요받았다. 왕포진(Peace Wang), 이연여(Ruth Lee), 유성화(Yu Chenghua) 등은 묵비권을 유지하며 감옥형을 언도받은 반면, 일부 동역자들은 워치만 니를 참소하는데 가담했다. 이런 일에 이어서 "반혁명분자 워치만 니"를 정죄하는 대규모 규탄대회가 전국에 걸쳐 개최되었다.[20][21]

투옥 후반기와 죽음

니가 1972년에 죽기 1년 전에 그의 아내인 핀훼이가 의자에서 넘어지는 사고와 고혈압으로 죽었다. 니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 핀훼이의 큰 언니가 감옥에 있는 니를 돌보는 책임을 졌다.[22] 니는 1967년에 석방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1972년 5월 30일 죽기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23]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통지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감옥에 도착하기 전인 1972년 6월 1일에 소각되었다.[6]

니의 한 조카 손녀가 니의 유골을 가지러 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72년 6월에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큰 이모 할머니와 함께 농장으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할아버지를 이미 화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유골 밖에 볼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분은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겨 놓았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일생 동안 그분이 죽기까지 붙잡았던 진리를 증거하길 원하셨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큰 진리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셍." 농장 간부가 이 종이를 우리에게 보여 줄 때, 나는 이 글을 신속히 마음에 기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죽기까지 충성하시고 피로 물든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가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이 살아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랐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분들이 주님 앞에서 재회하는 더 나은 것을 예비해주셨다.

―워치만 니의 조카 손녀, "워치만 니: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의 사후에 니의 동료 수감자였던 우요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니의 옥중 생활과 순교를 증언해 주었다. 우요치에 따르면 워치만 니는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중국 당국의 거듭된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신앙

니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 즉 아버지, 아들, 영이시며, 셋은 구분되시지만, 완전히 하나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존재하시고, 서로 안에 상호내재하심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고, 인간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 모두를 가지신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음을 믿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었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몸을 입고 일어나셨음을 믿었으며, 하늘로 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영광으로 관 쓰셨으며, 만유의 주가 되셨음을 믿었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영접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각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용서될 것이고, 그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씻겨지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성령에 의해 거듭나며,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었다. 그러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믿었다. 그는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운명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믿었다.[6]

출판물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주 말한 것에 더하여, 워치만 니는 여러 권의 저서들, 논문들, 서신들, 찬송들의 저자이었다. 그의 책의 대부분은 그가 메시지 전한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받아 적은 노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부 책들은 이전에 정기 간행물로 출판된 메시지들로부터 편집된 것이다.

워치만 니가 쓴 영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다. 이 책은 1938년부터 1939년의 유럽 여행 중에 그가 영어로 전한 담화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신약의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워치만 니가 쓴 책 중에 널리 알려진 것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영에 속한 사람 (1928)
  • 우리의 위임에 관하여 (1939)
  • 아가서 강해 (1945)
  •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1950)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1957)
  • 좌행참 (1957)
  • 주여 이 사람은 (1961)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968)

워치만 니는 자신의 책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적인 출판물들도 자신의 영감 아래 영어에서 번역하여 출판했다. 그것들은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마담 귀용(Madame Guyon), 메리 맥도너우(Mary E. McDonough),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와 일부 다른 이들의 저술을 포함한다.[24]

추가로 읽기

  • Chen, James. Meet Brother Nee(니 형제님과의 만남). Hong Kong: The Christian Publishers (1976).
  • Kinnear, Angus. Against the Tide(시류를 거슬러서). Eastbourne: Kingsway Publications (2005).
  • Laurent, Bob. Watchman Nee: Man of Suffering(워치만 니: 고난의 사람). Uhrichsville: Barbour Publishing (1998).
  • Lee, Witness. Watchman Nee: A Seer of the Divine Revelation in the Present Age(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워치만 니).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 Lyall, Leslie. Three of China's Mighty Men(중국이 낳은 위대한 세 사람). London: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1973).
  • Nee, Watchman. Watchman Nee’s Testimony(워치만 니의 간증). Hong Kong: Hong Kong Church Book Room (1974).
  • Sze, Newman. The Martyrdom of Watchman Nee(워치만 니의 순교). Culver City: Testimony Publications (1997).
  • Wu, Dongsheng John. 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워치만 니의 이해-영성, 지식, 형성). Eugene: Wipf & Stock Publishers (2012).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지방교회 이단에 관한 학술 자료(3)

  • 유동근 목사


워치만 니 사역의 가장 큰 문제점

⑴ 표절의혹 (allegation of plagiarism)

⑵ 삼분설의 위험성 (Danger of Trichotomy)
 

1948년에 Nee와 그의 동역자들이 더 이상 <영에 속한 사람>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의 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Nee는 계속해서 ‘spirit’(본능, 직감)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soul’(합리성과 생각)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온전한 진리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합리성과 마음을 사용하도록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마음을 인간의 기능으로 창조하셨지만, 오늘날에도 지방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경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ibid p. 233
 

반지성주의

‘영’(성령이 아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가 회심한 지 불과 몇 년 후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전체 사역을 통해 그 주제를 가지고 갔고 <The Spiritual Man>은 그 주제에 대한 그의 고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Nee가 ‘영/혼 분리’, ‘영 우월/혼 열등’의 원칙을 그의 핵심 신학적 개념으로 확고하고 극단적으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영향을 받았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 귀결되었습니다.
 

영은 가장 높고 몸은 가장 낮다 (Spirit is the Highest and Body the lowest)

워치만 니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영은 하나님과 결합 되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몸은 물질계와 접하고 있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가장 고귀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합니다. 몸은 가장 낮고 밖에 남아 있습니다. 혼은 영과 육 사이에 거하며 둘 사이의 매개체입니다. 우리의 전체 존재 중 오직 한 부분, 즉 거듭난 영만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대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별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활동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만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이 영을 가져야 합니다.
 

Nee의 개념은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뒤따른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에서 처음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펜루이스(Penn-Lewis) 부인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극단으로 치우침으로써 성경적 진리에서 위험한 이단으로 표류할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Nee는 헌신에서 이런 종류의 영적 의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지침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선구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갔고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역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그의 도구가 된 것은 Nee의 빗나감이었습니다.
 

'머리 지식' (Head Knowledge)

지방교회에서 ‘머리 지식’은 ‘영’에서가 아니라‘혼’에서 나온 ‘지식’을 의미하므로 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 뇌의 사고 과정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마음과 생각, 앎과 행동, 추론과 지각은 항상 분리할 수 없고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우열은 없고 다만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마음과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식과 생각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경은 지식과 추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또한 추론(이해의 영역- 역자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추론도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니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깨끗하고 흠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빌 1:9-10.) 그러므로 지식과 통찰과 비전은 분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Nee 사역 동안 상해교회(SCA) 내에서 전혀 불충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베드로후서 1:5-6.)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굳건히 서서 진리의 허리띠를 허리에 두르라...” (엡 6:14.)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허리를 묶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일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워치만 니 부부

반합리주의가 파멸의 원인이었다 (Anti-rationality Was a Cause of Ruin)

Nee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통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머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형제자매들을 앞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권위를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복종하려면 먼저 머리가 잘려야 합니다.
 

지방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깊은 헌신과 의지는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 7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던 거의 대부분의 지방교회들이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Nee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경건한 신자들의 ‘머리’가 자신의 생각이 없이 잘려 나갔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교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지성주의는 맹목적이 되게 한다 (Anti-intellectualism leads to Blindness)

1951년에 발행된 Nee의 잘못된 연설인 ‘나는 어떻게 돌아섰는가?(How did I Turn Around?)’는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인민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실상 무신론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이었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합니까? 아니면 인민의 입장 (‘People’s Standpoint’)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까요? Nee가 체포된 후로 그 몇 년 동안 Nee의 심각한 실수를 지적하기 위해 일어선 인도자들이 있었다면, 상해교회(SCA) 신자들은 1956년 전시회(CEC) 동안 믿음을 뒤흔드는 폭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 받았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 영적 인도자들도 세뇌당했고, 그들은 자신도 폭풍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과 생각이 합력하여 불합리한 이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ibid. pp. 256-257 Chapter Eighteen: Issues Within SCA
 

⑶ 몸(지방교회)을 너무 높였다 (Too much Emphasize of the Body)
 

다가오는 보편 교회의 모델

지상의 모든 교회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른 교회와 적절한 위치와 관계에 자신을 배치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회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SCA(상해 지방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기에 가장 좋은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적인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을 SCA(상해교회)에 가입하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The Union of the Church(교회의 연합)’ 또는 ‘The Church United(교회의 하나됨)’라고 미화했습니다.
 

1948년에 워치만 니는 전국 동역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는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다비(Darby)는 또한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각 시대마다 주님은 그분이 이루고자 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회복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시대에 그분이 행하신 특별한 회복과 일이 그 ‘시대의 사역’입니다.
 

역사(work)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각처의 동역자들은 먼저 자신을 내어 드리고 머리 아래 두며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하실 수 있고 그래야만 일이 진행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주요 결정과 지시는 몸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장차 몸의 나타남은 오늘날 지방교회들의 간증의 본질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은 장차 올 우주 교회의 모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지방교회 안에서 그리고 지방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ibid. pp. 246-247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 해설 및 줄거리

해설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라비안 야화", "아라비안 설화", "천일야화"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운다. 
세계문학사상 둘도 없는 기서로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엮어진 대설화집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는데 이처럼 종교와 인종 연령이나 시대
국가를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꿈으로 아름답게 가꿔 주고 이처럼
다양한 세계를 여러 가지 수법으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원본이 아라비아 인에 인하여 아라비아 어로 씌어진 것은 틀림없으나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책은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페르시아의 사사니아 왕조 시대에 이 책의
일부분으로 추측되는 것이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페르시아가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된 후 문학도 아라비아 인의 서고로 넘어가게 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바그다드의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의 손에서
확고히 보존되고 그들의 소유물로서 한 편의 책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대는 고대 이집트를 중심으로 대서양과
소아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까지 걸쳐 있으나 내용은 아라비아 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비유담 우화 교훈 등이 대부분이며 정통파 회교도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회교도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와 마호메트에 있지만 또한 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서 공기에서 나온 천사 대지가 낳은 인간 외에 불에서 나온 징이라는
일종의 마성을 지닌 존재를 믿고 있었다.


  징은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때로는 인간과 결혼하는 일도 있으며
이 마성의 활약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징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교조 마호메트 외에는 옛날의
현자 솔로몬 왕이 있을 뿐이며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호메트의 유물이나 솔로몬
왕이 남겨 놓은 반지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지배할 수가 없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 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수정되었으나
17세기경까지는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최초의 소개자는 프랑스의 동방학의
권위자 앙트와느 가랑이었다. 그가 대사 노완델 후작을 따라서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후 소아시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마호메트교도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1704년부터
번역에 착수하여 17년 동안 12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처음 이 이국적 정서가 짙은 동방 이야기를 들은 프랑스 인들은 완전히
매혹되었다. 이렇게 현란한 설화가 세계의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선녀 같은 미녀 램프 속에서 나오는 거인
불가사의한 마술사 거대한 루크 새의 알 보석의 계곡 선박에 박힌 못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섬 금과 은으로 만든 이슬람 궁정 동양풍의 호화로운 향연 등
모두가 경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당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랑이 쓰는 책의
출판을 기다리다 못해 애독자들이 심야에 그의 집 창문 앞에 모여서 신기한
아야기를 듣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각개 국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자 단시일 내에 널리 애독되었으나
아라비아의 풍속과 습관 등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이 와전되어 있었으므로 그
뒤로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복원에 힘쓰게 되어 유사한 책들이 속출하였다.
유럽은 한때 "아라비안 나이트"의 시대가 된 듯하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문자화한 최초의 무명의 저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우연히 수집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발단에서 출발한 일맥 상통한 이야기로 만들기에 힘썼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인자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페르시아 왕 사리아르는 어느 날
사냥을 하러 나가고 없는 틈에 왕비가 흑인 노예와 음탕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격분하여 역시 부정한 아내를 가진 아우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징이 그의 아내를 두 겹의 철궤 속에 집어 넣고 일곱 개의 자물쇠로 잠가 놓아도
여자는 그것을 깨뜨리고까지 정부와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눈앞에서
보여 주었다. 왕은 모든 여자를 저주하게 되었다. 왕비와 노예를 죽인 뒤 세상의
부정한 여자를 근절시키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내렸다. 전국의 미인을 저녁마다
한 사람씩 수청을 들게 한 다음 날이 밝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피를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잔악한 생활이 3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바그다드는 물론 국내의 구석구석까지 딸을 가진 부모는 극도의
공포에 떨게 되었으며 이 잔인한 국왕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 처형을 피하려고
국외로 도망하는 처녀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국내의 미녀가 전부 사라지게 되자
재상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미녀 세라자드는 자기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왕의
폭행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자진하여 수청을 들 것을 결심하였다.


  세라자드는 자기의 동생 테니아사아르를 후궁으로 궁전에 동반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튿날 사형 집행 한 시간 전에 국왕에게 청을 해서 이 세상과의
고별을 위해 데리고 온 자기 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게 되었다. 세라자드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있는 것이었는데 제일 재미있는 곳에서
중지하였으므로 왕은 그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때마다 사형 집행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가 천일 밤을 계속하자 왕은 세라자드의 지혜를 믿게 되어 관대하고
자혜로운 마음으로 변하여 세라자드를 왕비로 삼고 더욱 어진 정치를 베풀어
페르시아 왕국은 오래도록 번영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세라자드가 국왕과 동생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천일야화"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초의
번역서인 가랑의 번역서가 수정되고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발견된 이집트
고초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 자료가 발견되어 첨가되었으며 아라비자의
원본이라는 신역도 나오는 사이에 유명한 동양학자이며 반생을 이집트에서 보낸
원레인과 바튼의 역서가 영국에서 간행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레인은 문자화하기에 거북할 만큼 심각한 성 묘사의
장면을 생략하거나 애매하게 처리했으나 바튼의 한정판 16권 본은 이 점을
보완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정본으로 통용되고 있다.

*왕비를 살린 천 하루 동안의 이야기*

《아라비안나이트》의 원래 제목은 아라비아 말로 '알프 라이라 와 라이라' 이다. 이것은 1001의 밤' 이라는 뜻으로 180여 편의 이야기가 1001일 밤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붙은 제목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천일야화' 라고도 한다.

《아라비안나이트》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많은 이야기들을 더 하고 빼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의 배경도 인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 다양하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정작 아랍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반 서민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할머니가 아이들을 잠재우기 전에 읽어 주는 옛날이야기 정도로 여긴 것이다. 특히 아랍의 지식인과 높은 계급 사람들은 이 책 속에 이슬람 종교에서 금지하는 말이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아랍 지역을 벗어나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 덕택이다. 그는 1704년부터 1717년까지 《아라비안나이트를 12권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이 번역서는 《아라비안나이트》 전체 이야기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담고 있지만 그 뒤 많은 번역본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 책의 바탕은 〈천일 하고도 하루 밤 이야기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옛날 사산 왕국의 샤리야르 왕은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는 동생 샤자만이 보고 싶어 곁에 오라 부르게 된다. 샤자만이 형에게 가는 도중 형에게 줄 선물을 잊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마침 왕비가 왕궁 요리사와 함께 침실에서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다시 형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샤자만은 형수인 샤리야르 왕의 부인도 남편을 배신하고 신하와 놀아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부정한 두 남녀를 죽인다. 동생 샤자만이 돌 아간 뒤 샤리야르는 여자들을 믿지 못하게 되어 매일 밤 처녀를 한 명씩 왕궁으로 불러 들여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 다음 날 아침이면 죽이는 일을 3년 동안 계속한다. 도성 안에 처녀가 씨가 마르게 될 즈음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가 스스로 왕비가 되겠다고 청하여 왕과 결혼한다. 결혼 첫날밤부터 세헤라자데는 여동생과 힘을 합쳐 재미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처럼 《아라비안나이트》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꾀 많은 왕비 세헤라자데가 남편인 사산 왕국의 왕 샤리야르에게 밤마다 들려준 이야기 모음이다. 

* 지혜와 교훈이 담긴 이야기들*

이야기 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는 정확히 몇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는지 헤아리기가 무척 어렵다. 이 책에 실린 것은 그 일부인데, 대체로 모험, 사랑, 기이함, 교훈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는 새> 이야기는 기이하다. 왕비의 언니들인 이모들의 질투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왕자와 공주가 말하는 새의 도움으로 다시 친부모인 왕과 왕비를 만나게 되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불행했던 운명을 안고 살아야 했던 세 남매가 부모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용기와 우애 때문이었다. 오빠 바만과 파페즈가 말하는 새를 찾아 모험을 했을 때 돌이 되었던 것은 공포와 비웃음과 놀림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자드는 뒤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돌아보지 않아 말하는 새를 손에 넣고 돌로 변한 두 오빠까지 구하게 된다. 페리자드의 용기가 두 오빠를 구한 것이다. 이들 남매의 우애는 대단했다. 서로를 의지하며 무슨 일이든 함께 의논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늘 현명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결국 친부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알리 바바와 40명의 도둑〉 이야기도 신기할 따름이다. 40명의 도둑이 동굴에 숨겨 놓은 보물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고 '닫혀라 참깨!' 하면 닫히는 동굴이 있었을까?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욕심 많은 형 카심과 착한 아우의 모습은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하녀 마르자나와 같은 꾀 많고 부지런한 사람 덕분에 위험을 물리치고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알라딘과 램프의 거인> 이야기도 환상과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가난한 알라딘은 못된 마법사의 부탁으로 동굴에 들어갔다가 마법의 램프를 얻게 된다.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램프의 거인 덕분에 알라딘은 부자가 되고 공주와 결혼한다. 하지만 마법사 때문에 큰 시련을 겪는다. 시련을 무사히 헤쳐 나간 알라딘은 행복과 불행을 모두 가져오는 마법의 램프를 바다에 버린다.

〈마법의 말> 이야기는 환상, 모험과 함께 사랑을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의 피로즈 샤 왕자가 인도인 마법사와 카슈미르 왕국 의 왕의 손아귀에서 사랑하는 벵골 왕국의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다른 이야기들은 주인공이 왜 모험을 하게 되 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해진 운명대로 주인공이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모험을 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는 공주를 찾아 피로즈 샤 왕자는 죽음을 무릅쓴다.

이처럼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 속에 아슬아슬한 모험의 세계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거기에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이의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은 반드시 착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승리로 끝난다.

1.알라딘과 요술램프: 가난한 고아 알라딘은 자신을 속여 동굴에서 마법의 램프를 가져오도록 하는 마법사를 만난다. 우연히 내면의 지니를 소환한 후 알라딘의 삶은 극적으로 변한다. 지니의 도움으로 그는 부자가 되어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마법사는 스스로 등불을 찾으러 돌아옵니다. 재치와 용기로 알라딘은 마법사를 물리치고, 램프를 구하고,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2.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평범한 나무꾼 알리바바는 40명의 도둑이 훔친 보물이 가득한 동굴을 발견합니다. 알리바바는 그의 영리한 하인 모르지아나의 도움으로 도둑들을 물리치고 보물을 지킵니다. 그러나 도둑들은 복수를 꾀하며 스릴 넘치는 대결로 이어진다. 용기와 교활함으로 알리바바와 그의 동료들은 도둑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부와 안전을 확보합니다.

 

3.선원 신드바드 : 
신밧드는 위험한 모험으로 가득한 일곱 번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거대한 새와 괴물 같은 바다 생물을 만나는 것부터 위험한 섬에서 살아남는 것까지, 신밧드의 회복력과 지략은 계속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매 순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신밧드는 각 여정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련을 통해 얻은 부와 지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4.어부와 지니: 겸손한 어부가 우연히 병에서 강력한 지니를 풀어주었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능가해야 합니다. 영리한 조작과 빠른 사고를 통해 어부는 지니를 속여 병에 다시 넣어 자신의 생명을 구합니다.

 

5.꼽추 이야기 : 
꼽추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가장 유명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Shahryar 왕에 대한 Shahrazad의 이야기의 더 큰 프레임 내러티브 내의 등장 인물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카마르 알 자만(Qamar Al-Zaman)이라는 꼽추는 하룻밤을 보낼 피난처를 찾기 위해 바그다드에 있는 재단사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재단사는 포목상, 약사, 이발사, 금세공인을 포함한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그들은 대화에 참여하고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꼽추가 농담을 하며 웃다가 자리에서 떨어져 우연히 살해당하면서 밤은 극적으로 변한다. 
꼽추의 죽음으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고 당황한 친구들은 시체 처리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꼽추의 시체를 부유한 유대인 의사의 집 밖에 두고 현장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의사는 시체를 발견하고 즉시 당국에 의해 살인 혐의로 기소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일행 각자가 증언을 위해 법정에 서게 되면서 코믹한 오해와 황당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한다. 
결국 꼽추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고 무고한 의사는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 꼽추 이야기"는 우정, 충성심,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를 주제로 탐구하는 풍자적이고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재치 있는 대화, 기발한 줄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6.샤흐리아르 왕과 샤흐라자드의 이야기: 영리한 이야기꾼인 샤흐라자드는 샤흐리아르 왕과 결혼하고 매일 밤 그녀의 이야기로 그를 사로잡아 처형에서 자신을 구합니다. 1,001일이 넘는 밤 동안 샤흐라자드는 복잡한 이야기를 엮어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궁극적으로 그의 길을 바꾸어 두 사람 모두 행복한 해결을 이끌어냅니다.

 

7.바그다드 상인 알리 콰자의 이야기: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콰자는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척하며 자신을 강탈하려는 도둑보다 한 수 앞섭니다. 교활함과 속임수를 통해 알리 콰자는 범죄자의 상황을 뒤집어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의 부를 보존합니다.

 

8.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 : 
겸손한 짐꾼은 바그다드에서 세 명의 영향력 있는 여성을 만나 그들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과 인간 본성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더 큰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압둘라라는 이름의 겸손한 짐꾼은 무거운 짐을 지고 바그다드의 거리를 배회합니다. 
지치고 목마른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웅장한 저택의 문을 두드립니다. 
놀랍게도 문은 그를 안으로 초대하고 그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우아한 여성에 의해 열렸습니다. 그런 다음 압둘라는 세 명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 즉 샤흐라자드(Shahrazad), 둔야자드(Dunyazad) 및 그들의 어머니에게 소개됩니다. 문지기의 존재에 흥미를 느낀 이 여성들은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격려합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세 명의 여성은 차례로 압둘라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샤흐라자드는 금지된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두냐자드는 회복력과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어머니는 속임수와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포터는 이 놀라운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그는 사랑, 충성심, 인간 본성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에 대해 배웁니다. 저녁이 끝날 무렵 압둘라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세 여성이 그에게 보여준 친절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인간성을 공유하고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은 연민과 이해, 그리고 스토리텔링의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 여성은 압둘라와의 만남을 통해 이야기로 압둘라를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압둘라의 삶을 엿볼 기회도 제공합니다.

 

9.아부 하산, 피다위, 그리고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이야기

아부 하산의 잘못된 모험은 그를 부유한 상인으로 가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그를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일련의 희극적인 오해와 불행을 통해, 아부 하산은 그의 곤경의 도전들을 탐색하고, 궁극적으로 해결과 구원을 찾습니다.

 

10.마법에 걸린 말

왕자는 날 수 있는 마법의 말을 받고 공주를 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등 일련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11.검은 섬의 젊은 왕 이야기

어린 왕자는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검은 조각상으로 변신하고 결국 용감한 공주에 의해 풀려납니다.

 

12.흑단 말

마법의 흑단 말은 라이더를 특별한 여행으로 데려가 로맨스, 모험, 예상치 못한 운명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13.아흐메드 왕자와 요정 페리바누의 이야기 

아흐메드 왕자는 요정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결혼을 위해 어려운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14.어부의 아들 이야기

어부의 아들은 마법의 물고기의 도움으로 바닷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재산이 늘어납니다.

 

15.흑단 섬의 젊은 왕 이야기

젊은 왕은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개로 변신하고 저주를 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야 합니다.

 

16.왕의 아들과 여자 구울 이야기

왕의 아들은 사막에서 여자 구울을 만나고 자신의 지능을 활용하여 그녀를 속이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7.황동 도시 이야기

한 무리의 여행자가 황동으로 만들어진 신비한 도시를 발견하고 그 주민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밖에도 아라비안나이트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8.형벌을 받은 재상 이야기 19.와지르와 현자 두반의 이야기 20.남편과 앵무새의 이야기 21.마술사와 어부의 이야기 22.첫 번째 노인과 암사슴의 이야기 23.둘째 노인과 두 마리의 검은 개 이야기 24.어린 왕자와 사악한 마술사의 이야기 25.세 개의 사과 이야기 26.술탄과 그의 세 아들의 이야기 27.상인과 도둑의 이야기 28.세 번째 노인과 노새 이야기 29.칼리프 오마르 빈 알 카타브(Omar Bin Al-Khattab)의 이야기 30.세 달력 이야기 31.첫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2.두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3.시기하는 자와 시기받은 자의 이야기 34.세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5.조베이데 이야기 36.아메네의 이야기 37.땅사람 신바드 이야기 남편과 앵무새의 이야기 38.형벌을 받은 재상 이야기 39.검은 섬의 젊은 왕 이야기 40.세 개의 사과 이야기 41.누르 알 딘 알리(Nur al-Din Ali)와 그의 아들의 이야기 42.꼽추 처형 이야기 43.기독교 왕의 딸 이야기 44.미친 사람의 이야기 45.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왕자의 이야기 46.아버지를 사랑한 공주 이야기 47.죄수의 이야기 48.페르시아 의사의 이야기 49.시리아의 연인들의 이야기 50.부인과 문지기와 세 형제의 이야기





  줄거리


  알라딘의 램프
  아득한 옛날 중국 어느 도시의 한 재봉사의 집에는 알라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린애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도무지 일을 할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걱정한 나머지
병에 걸려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라고 하는 낯선 사나이가 찾아와 알라딘에게 좋은 장사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사실은 삼촌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마술사로서
보물이 중국의 어느 위험한 지대에 있다는 것을 마법으로 알아 내고 이것을 얻기
위하여 알라딘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훌륭한
사업을 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으며 알라딘도 그 말에 속아
마술사의 목적지인 어는 높은 산봉우리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그 사나이가 근처에 흩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잎에 불을 지르고 향을 던져
넣고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연기가 사라지며 땅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 반지
한 개가 들어 있는 네모난 돌이 나타났는데 그 돌을 들어 보니 그 밑에 큰
구멍이 나타났다.


  알라딘은 마술사가 시키는 대로 그 구멍 안으로 내려가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램프의 불을 끈 다음 기름을 쏟아 버리고 가지고 나오려고 하였으나 마술사는
그가 구멍에서 나오기 전에 그 램프만을 올려 달라고 하였다. 알라딘이 그
사나이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나가서 주겠다고 고집하였더니 그는 화를 내며
구멍을 무거운 돌로 막아 버렸다.


  알라딘은 하는 수 없이 구멍 속 깊이 내려가 보았다. 그 밑바닥에는 뜰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보석의 열매가 달린 과실나무로 가득했다. 그는 많은 보석
열매를 호주머니에 따 넣었다.


  그러나 다시는 밝은 세상에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슬픔에 빠졌다.
모든 화를 면하게 해 준다고 마술사가 구멍 밑으로 내려올 때 끼어 준 반지를
우연히 문지르게 되었다. 그 순간 이 신비스러운 반지의 종이 나타나 알라딘을
구출하여 주었으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돌아온 램프를 헝겊으로 닦다가 램프 속에서 거인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 거인을 불러 내어 무엇이든지 명령만 하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알라딘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알라딘은 국왕의 딸 아루바슬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와는 너무도 큰 신분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도저히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떤 대신의 아들도 역시 왕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딘이 용기를 내어 청혼했더니 왕은 흑인 노예 40명과 백인 노예 40명을
시켜서 보석을 담은 그릇 마흔 개를 선물로 보내면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알라딘은 램프의 거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왕의 요구 이상으로
아름다운 선물과 찬란한 의복을 선물했고 알라딘이 성으로부터 나올 때 멋진
행렬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전부 램프의 덕택이었다. 결국 알라딘의 소원이
이루어져 왕녀와 결혼하였고 램프의 거인이 만들어 준 훌륭한 궁궐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의 마술사가 점을 쳐 보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알라딘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더구나 램프를 사용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화가 나서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불행하게도 알라딘이 사냥을 간 틈에 마술사에게 램프를 빼앗기게 되어 램프의
거인은 이제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왕녀와 궁궐을 고스란히 아프리카로 옮겨
가버렸다.


  알라딘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궁궐과 왕녀가 없어졌으므로 반지의 종의 힘을
빌려 그것이 그를 속인 원수 같은 마술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알라딘은 아프리카로 달려가 비밀리에 왕녀와 힘을 합하여 마술사를 독살해
버렸으며 램프도 다시 찾게 되었다.


  마술사의 아우도 또한 마술사였는데 알라딘에게 해를 입히려다가 램프의
거인에게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알라딘과 왕녀는 궁전도 예전과 같은 자리에 옮기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옛날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형은 카심이었고 아우는 알리바바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얼마되지 않은 유산을 두 형제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형은 재산을 독차지한 뒤 부잣집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으나 알리바바는 자기와 처지가 같은 가난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가난하게 살면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그것을 말라빠진 세 마리의 노새의 등에 싣고 매일 도시에 나가 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알리바바는 늘 하던 대로 산 밑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탄 도둑들이 벌판을 건너 왔다. 
그는 무서워서 높은 바위 옆에 있는 나무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그들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40명이나 되었는데 그 곳에 도착하자 두목이 선두에 서고 각자 무슨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는 듯한 자루를 한 개씩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목이 큰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자 큰 돌문이 활짝 열리고 도둑들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은 다시 닫혀 버렸다.
  
도둑들이 다 가버린 후 알리바바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돌문 앞에 서서도둑들이 그 문을 열 때 쓰던 말을 시험하려 보려고 "열려라 참깨!" 하고 외쳐 보았다.
과연 문은 활짝 열렸다. 
그가 어두컴컴한 동굴일 줄로만 알았던 그 안에는 밝고 넓은 방이 있었다. 
천정 구멍에서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갖가지 음식과 값진 옷감과 금은 보석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돈이 든 자루도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었다.

알리바바는 어떤 왕도 가지지 못한 많은 보물을 보고 이 동굴이 도둑들이 훔친 것을 오랫동안 쌓아 놓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리바바는 이 도둑들이 훔친 보화를 자기가 좋은 목적에만 쓴다면 약간 가져가도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노새가 운반할 수 있는 만큼의 자루를 싣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올려 놓아 흔적이 나지 않게 감추었다. 
그리고는 "닫혀라 참깨!" 하고 소리치니 문은 그전과 같이 닫혀 버렸다. 
그는 집에 와서 놀라는 아내에게 신기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준 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금화를 모두 세어 보겠다고 했지만 알리바바는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구덩이를 파는 사이에 보석이 몇 되나 되는지 보려고 근처에 사는 카심의 집으로 되를 빌리러 갔다.


  그러나 카심의 처는 알리바바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되로 달 만한 것이 있는지 호기심이 나서 되의 밑바닥에 쇠기름을 조금 발라
두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돌려받은 되의 밑바닥에 금화가 한 개 붙어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알리바바의 형수는 '그들에게 되로 달 만한 금화가 있단
말인가?' 하고 질투가 일어났다. 그는 자기의 남편 카심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이제까지는 자기들이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리바바는 돈을
계산하는데 되를 사용할 정도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카심은 깜짝 놀라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설명해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말하고 그 증거로 한 개의
금화를 보여 주었다. 카심은 부자 과부로 결혼한 후로는 알리바바를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멀리하며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한 달에 은화
한 푼도 가지기 어려운 동생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불같은
질투심이 일어나 그 날 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카심은 그 이튿날 먼동이 트기도 전에 알리바바의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서
들은 금화의 이야기를 하며 금화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고소하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알리바바는 비밀로 감추고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형에게
전날의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 형제가 일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금화가
있으니 그것을 나누어 갖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욕심 많은 카심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열 마리의 노새 등에
큰 상자를 올려 놓고 알리바바가 가르쳐 준 길을 떠나서 그 동굴 앞에 닿았다.
그리고 "열려라 참깨!" 하고 주문을 외치니 역시 문이 열렸다. 그는 재빨리 그
안에 들어가서 욕심껏 많은 양의 금화 자루를 꺼내어 싣고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깜박 그 암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깨라고 하지 않고 "열려라 보리!"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거운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을 느끼고 초조해져서
생각나는 곡식의 이름을 아는 대로 불러 보았으나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모든 보물을 내던지고 그 동굴 속에서 안절부절 하였다.
  낮이 되어 도둑들이 이 동굴로 돌아와 그는 꼼짝없이 살해당하고 말았다.
도둑들은 그의 보물 창고가 외부에 발견된 사실에 화가 나고 분해서 공범자에게
겁을 주기 위해 카심의 시체를 넷으로 찢어서 동굴 안의 좌우에 나누어 걸어
놓았다.


  알리바바는 날이 지나도 형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세
마리의 노새를 몰고 산에 가서 돌문을 열고 보니 과연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는
곧 넷으로 찢겨진 형의 시체를 노새 위에 싣고 보이지 않게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다른 노새의 등에는 금화 자루를 가득히 싣고 어둠을 이용하여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카심의 집에 하녀로 있는 모르자나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는 주인이 병으로 누워 있는 것같이 꾸미느라고 약방으로 약을 사러 다니며
이웃 사람들을 속였다. 그리고 가죽을 깁는 노인을 금화를 주어 매수한 후 눈을
가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주인의 시체를 꿰매게 하였다. 그녀는 주인이 병으로
죽었다고 큰 소리로 통곡하여 감쪽같이 주인의 변사를 감추고 장사를 지냈다.
  알리바바는 얼마 후 형수의 집으로 살림을 옮기고 밤을 이용하여 금화도 전부
옮겼으며 형의 가게는 자기의 장남에게 관리하게 했다.


  한편 도둑들은 동굴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시체를 훔쳐간
사람을 찾을 목적으로 자기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을 나그네로 가장시켜
시내로 들여보냈다. 약 중대한 그 범인을 찾지 못할 때에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무서운 조건도 붙였다. 변장한 도둑은 마을에 들어와서 우연히도 신
깁는 노인의 가게까지 오게 되었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큰 바늘을 들고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도둑이 무심코


  "당신은 참 부지런하군요. 더구나 그런 나이에 눈이 참 밝으십니다" 하고
감탄하며 말을 건네자


  "나리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만 내가 이런 나이에 여기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죽은 시체를 꿰맸다는 것을 아신다면 더욱 놀라시겠지요" 하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이것을 들은 도둑이 깜짝 놀라며 그에게 말을 추궁하였다. 노인은
그제서야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도둑이 주는
금화에 매수되어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눈을 가리운
채 찢어진 시체가 있는 집으로 갔던 까닭에 카심의 집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둑이 시키는 대로 처음에 하녀에게서 눈을 가리운 곳까지 가서 눈을
가린 채 도둑의 부축으로 하녀와 같이 걸었던 대로 걸었다.


  그래서 카심의 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둑은 눈 가리개를 벗기기
전에 카심의 집 문에 분필로 표시를 해 두고는 기뻐하며 소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모르자나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에 그려진 이상한 표시를
보았다.


  '대체 이것은 무슨 표시일까?' 하고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자기 주인을
해칠려고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근처의 모든 집에 꼭 같은 표시를
해두었다.


  그날 밤 산에서 내려온 도둑들은 알리바바의 집을 발견한지 못한 채 그만
돌아가 버렸고 임무를 다하지 못한 도둑은 두목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도둑들은 자신들의 안전 때문에 동굴의 침입자를 찾아내야 했으므로
도둑 한 명을 다시 시내로 들여 보냈다. 이번 도둑도 동료가 하던 방법으로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서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빨간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모르자나 때문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두목은 용감한
부하를 두 사람이나 죽게 하고도 침입자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그 약탈자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도 역시 우연하게 그
신 깁는 노인을 이용하여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내고는 표식을 하는 대신 그
주위의 지리를 상세히 관찰하여 두었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19필의 노새와 큰 가죽으로 만든 38개의 독을 모아서 그
중 한 개에는 기름을 가득히 담게 하였다. 그는 알리바바의 집을 무난히 찾은 후
자기는 기름 장수인데 내일 시장에서 팔 기름을 노새에 싣고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갈 숙소를 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람 좋은 알리바바는 도둑의 두목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의 처지를 생각하고 쾌히 승락하였다. 그리고
알리바바는 손님을 위하여 성대한 만찬까지 베풀어 주었다.


  밤이 깊어져서 불이 꺼졌으므로 모르자나는 기름 장사의 기름을 얻으려고 뜰로
나왔는데 기름독 안에서


  "두목님 시간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모르자나는 그 순간 음모를 알아차리고 알리바바의 일가와 자기 몸의 위험을
생각하여 떠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마음먹고


  "아니 아직 때가 아니다. 좀더 기다려라" 하고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독마다
돌아다니며 똑같은 말을 해 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기름이 든 독에서 기름을
따라서 주전자에 가득히 담아 끓인 후 도둑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하나씩 차례로 그 기름을 부었다. 독 속에 들어있던 도둑들은 소리도 못 지르고
전부 죽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는 두목은 밤이 깊어 집안이 조용해졌을 때 몰래
뜰로 나와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부하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나오너라. 때가 되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놀라서 독 뚜껑을 모두 열어 보니 어느 놈이고 다같이 무서운 죽음을
당해 있었다. 두목은 자기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한시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37명의 생명을 빼앗은 무서운 손이 언제 자기의 생명을
빼앗을지 몰라서 겁이 난 그는 곧 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두목은 부하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알리바바는 모르자나로부터 전날 밤에 일어났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사를 표하였으며 그 보답으로 모르자나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알리바바의 집은 뒷마당이 넓었으므로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도둑들의 시체와
독과 무기를 묻었다. 그리고 많은 노새는 모르자나를 시켜 몇 차례에 나누어
시장에 나가 팔았다. 그 후 몇 해 동안 알리바바의 집은 아무 근심없이
평화스럽게 지냈다.


  그간 도둑의 두목은 음침한 동굴 속에서 혼자 있으면서 부하들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시내로 들어와 동굴에서 가져온 옷감으로
포목점을 시작하였다. 그 상점은 알리바바의 아들이 보고 있는 상점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둑의 두목이 가게를 시작한 며칠 후에 알리바바와 자기 아들의 상점에 찾아
갔는데 그 때 두목이 그를 보고 말았다. 그 날부터 두목은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특별한 친절을 보이며 때때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같이하게
하였다. 알리바바의 아들은 두목의 호의에 답례하려고 자기의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를 초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목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괴상한 주문을
하였다.


  모르자나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로부터 복수하려는 사람은
소금을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고 수상하게 생각하며 그 소금기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손님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 음식 접시를 나르는
체하고 객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손님은 교묘하게 변장한
도둑의 두목이었이며 주의해서 살펴보니 옷 속에 단도를 품고 있었다.
  모르자나는 주인에게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고향의 의복으로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페르시아로 잡혀와서 이 곳에서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객실로 들어가
주인에게 이 댁의 경사를 위하여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운 춤으로 귀한 손님을
환대하고 싶다고 청하였더니 모두들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춤을 아름답게 추고 나서 단검을 빼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북을
들고 구경꾼들에게 희사를 바라는 시늉을 하였다. 알리바바가 금화 한 개를 그
북위에 놓아 주니 그의 아들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도둑이 품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려 하였다. 순간 모르자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와 힘을
다하여 손님의 가슴에 단검을 푹 찔렀다. 이 광경을 본 알리바바는 부자는
놀라며 큰 소리로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는 이제 파멸이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아닙니다. 주인님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을 잘 보십시오" 하고
죽은 손님의 옷을 헤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단도를 보이고 모든 음모를
밝혔다.


  알리바바는 뛰어난 기지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 준 모르자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녀를 얼싸안으며
  "나는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우리집 며느리로
삼겠다"고 말하며 아들에게도 그녀와 부부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아들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전부터 그는 모르자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둑의 두목을 뒷뜰에 그의 부하들과 똑같이 묻고 며칠 뒤에는
알리바바의 아들과 모르자나의 결혼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그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모르자나의
아름다운 성품을 귀하게 여기는 주인의 도량과 인품을 칭찬하며 이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알리바바는 1년 동안은 도둑의 동굴을 찾지 못했었다. 
아직도 어디엔가 도둑이 살아 남아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바바는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몹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말을 달려 그 동굴로 가 보았더니 두목이 상점으로 옷감을 운반한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온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이 보물 창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단지 자기 한 사람뿐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많은 재보를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기뻐하며 말로 운반할 수 있는 양의 금화 자루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년 후 그는 자기 아들로 동굴로 데리고 가서 모든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아들은 그것을 자손에게 전해 주었다. 
자손들도 이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알리바바의 자손들은 몇백 년 후대까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신드바드의 모험
  바그다드의 하룬 알 라시트 왕 시대에 히드바드라는 가난한 짐꾼이 살고
있었다. 몹시 더운 어느 날 무거운 짐을 지고 시내로 들어 가다가 어느 훌륭한
저택 옆에서 쉬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정원에 우거진 화초의 향기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들려왔다. 거기에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섞여와 성대한
주연이 벌어져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 문 앞에 훌륭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물어 보았다. 문지기는 그에게 바그다드에 살면서도
세계의 어느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없는 유명한 항해자 신드바드의 집을
모르느냐고 도리어 반문하였다. 그러자 히드바드는 하늘을 쳐다보며 누구에게나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전능하신 천지 만물의 조물주시여 신드바드와 나와는 어찌 이다지도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매일매일 허덕이며 괴롭게 일을 해도 처자식에게
보리빵도 충분히 먹이지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그에게는 저렇게도 막대한 재물을
써 가면서도 항상 즐거운 날을 보내게 하시는지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십니까?" 하고 신세 타령을 하며 비관에 잠겨 있는데 하녀가 나오더니
주인이 부른다며 따라 오라고 하였다. 히드바드가 들어간 곳에는 산해 진미를
차려 놓은 식탁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앉아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불안에 몸을 떨면서 겨우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인 훌륭한 노신사인 신드바드는 그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술을 부어 주며 환대하였다. 그가 식사를 다 끝마치자 이름과 직업을 묻고 방금
밖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히드바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했다며 무분별했음을
사과했다.

  신드바드는 자기는 그렇게 사리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며 그러한 불평이
불쾌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오해가 있으니 그것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진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의 노고를 몇 년 동안이나 견디어
왔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히드바드의 생각이 바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물을 얻게 된 일곱 번의 항해 중에 겪은 여러 가지의
모험담을 들려 주겠다고 하였다.

  제1항해
  신드바드는 원래 막대한 유산을 받았으나 방탕한 생활로 전부 탕진해 버리고
워낙 모험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장사나 해 볼 생각으로 항해를
결심하였다. 그들 일행은 페르시아 만을 지나 동인도를 향하여 항해를 시작했다.
하루는 배가 작은 섬의 기슭에 닿게 되었다. 그것은 섬이라고는 하나 해면에서
겨우 노출되어 있을 뿐인 푸른 풀밭과 같은 곳이었다. 선장이 그 섬에 내리고
싶은 사람은 상륙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므로 신드바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륙하여 여행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 섬이 기우뚱하고
흔들리더니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


  그들이 섬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실은 커다란 고래의 등이었다. 그는 미쳐
타고 온 작은 배에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그 섬에서 불을 때기 위해 가지고 내린
나뭇가지에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간신히 어떤 섬나라의 어진 왕에게 구조되었다.
  그는 섬나라를 떠날 때 왕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으며 귀국하는 도중에 그가
타고 온 배와도 만나게 되어 항해의 상품도 손에 들어오게 되어 막대한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돈이 많이 든 주머니를 히드바드에게 주면서
내일도 자기의 모험담을 들으러 꼭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다음 날 히드바드는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관대한 이 여행가를
찾아갔다. 신드바드는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님들이 다 도착하자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의 제2항해의 모험담을 시작했다.

  제2항해
  항해 중 그는 과실나무가 무성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여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낮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배가 떠나고 말았다.


  그는 절망 끝에 순간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섬의 형태를 살펴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득한 푸른 바다뿐인데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먼 곳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타원형의 흰 물체였다. 그가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높이가
상당하고 둥근 지붕처럼 생겼으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문 같은 것은 없고
미끄러워서 위로 올라 갈 수도 없는데 그 주위를 걸어보니 약 50 걸음이나
되었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에 덮인 듯이 캄캄해졌다. 이상해서 하늘을
쳐다보니 그것은 이 섬을 향하여 날아오는 무섭게도 큰 한 마리의 날짐승 때문인
것을 알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뱃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루크라는 큰 새가 틀림없으며 정체를 알 수 없던 원으로 생긴 물체도 그
새의 알이었던 것이다.


  이 루크의 몸의 길이는 약 80 미터나 되는데 날개를 펴면 그 넓이가 100
미터나 되고 코끼리나 소를 마음대로 채가는 무서운 것이었다. 이 새는 내리더니
그 알 위에 앉았다.


  신드바드는 새가 앉기 전에 몸을 그 알 옆에 숨겼으므로 바로 그의 눈 앞에
새의 한쪽 발이 놓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큰 나무통만 하였다. 그는 새의 발에
자기의 몸을 끈으로 매고 루크 새가 자기를 이 무인도에서 옮겨 줄 것이라
기대하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 이튿날 예측했던 대로 큰 새가 날아 갔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새가 땅으로 내려가는 것 같아 재빨리 묵었던 끈을 풀자마자 루크
새는 무섭게 긴 뱀을 입으로 채 가지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새가 그를 내려 놓고 간 곳을 사방이 병풍과 같이 깍아지른 듯한 높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험해 도저히 그 골짜기에서
빠져 나갈 길이 없을 듯하였다. 골짜기를 걸어보니 다이아몬드가 흩어져 있는데
놀랄 만큼 큰 것도 있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바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무섭게 긴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
코끼리를 한숨에 삼킬 만큼 큰 것이었다.


  이것을 본 그는 그 섬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였다.
  이 뱀들은 낮에는 구덩이 속에 들어가 루크 새의 눈을 피하고 밤에만 활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뱀을 피하기 위하여 밤이면 작은 동굴 속에 들어가 그
입구를 큰 돌로 가리고 지냈다. 그러나 뱀은 밤이 되면 그 주위를
'쉬-쉬-' 하고 소리를 내며 기어다녔기 때문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너무나 피곤해서 밖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돌연 큰 날고기 덩어리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졌다. 보석 상인들이 독수리가 새끼를 가질 때쯤 되면 이
골짜기 근처에 와서 다이아몬드를 채집할 때 쓰는 방법으로 큰 고기 덩어리를 이
다이아몬드 골짜기 속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다이아몬드가 고기
덩어리에 박히게 되면 크고 강한 이 곳의 독수리가 이 고기 덩어리를 채어서
그들의 둥우리로 돌아와 새끼 독수리에게 먹이려고 날아오게 된다. 그러면
상인들은 이것을 감시하고 있다가 곧 달려와서 그 어미 독수리를 쫓고 그 고기
덩어리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떼어 가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방법을 이용하면 이곳에서 구출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근처에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골라서 그중
가장 큰 고기 덩어리에 자기 몸을 단단히 묶은 후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후 한 마리의 큰 독수리가 그의 몸이 묶인 고기 덩어리를 물고 산봉우리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다. 그러자 마침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보석 상인들에게 그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신드바드는 놀라는 상인들에게 가지고 온 다이아몬드를 나누어 주고 자기의
모험담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상인들과 같이 무사히 귀국한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항해에서 얻은
막대한 재물의 일부를 나누어 주고 자기도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이 제2항해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인은 히드바드에게 또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도 와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초청하였다.

  제3항해
  신드바드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항로에서 벗어나 어느 섬 근처를 표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장은 그 섬에 상륙할 것을 꺼려하였다. 선장은 이 섬과 부근의
섬에는 전신에 털이 돋은 보기 흉한 야만인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습격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난쟁이이지만 대항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메뚜기보다도 수가 많기 때문이며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인다면 일행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릴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선장의 말이 끝나자 키가 2피트 가량 되는 빨간 털이 난 무서운 난장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헤엄쳐 와 배 주위를 둘러싸고 놀랄 만큼 민첩한 행동으로
그 배를 빼앗아 다른 섬으로 가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이 섬에 내렸다. 일행은 이 곳에서 거대한
건물을 발견하고 가까이 갔다. 훌륭한 건축 양식으로 된 궁전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넓은 실내에 인기척은 없고 눈에 띄는 것은
산더미같이 쌓인 해골과 수없이 놓여 있는 쇠꼬챙이였다.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있을 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키가
종려나무만큼 큰 검둥이 거인이 나타났다. 그는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하나
있었으며 앞니는 길고 날카롭게 뾰죽이 나와 있었다. 윗입술은 가슴까지 쳐져
있었으며 귀는 코끼리 귀와 흡사한데 양 어깨를 길게 덮고 있었다. 손톱은
사나운 짐승과 같이 길고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었다.


  이 무서운 괴물을 본 일행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에 괴물은 현관에 앉아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괴물은 그 중에서 가장 통통한 선장을 참새를 잡듯이 한 손에 쥐고
꼬챙이에 꿰었다. 괴물은 선장을 불에 구워 먹고 난 후 우뢰와 같이 코를 골면서
잠들어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처참한 공포 속에서 그 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거인은 그들을 궁전 안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이 괴물을 죽이기로 협의하였다. 그 날 저녁 거인은 살이 많은
뱃사람을 잡아먹고 잠이 들어 버렸다. 괴물이 골아 떨어졌을 때 일행 중 용감한
10명의 뱃사람이 쇠꼬챙이를 불에 달궈 일제히 그 거인의 눈속 깊이 틀어박아
장님을 만들어 버렸다. 거인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무서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양손을 벌려 그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모두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뱃사람들은 곧 해안에 나와 흩어져 있는 배의 파편을 모아 세 사람씩 탈 수 있는
뗏목을 몇 개 만들었다.


  거인은 동이 트기도 전에 그와 똑같은 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으며 그
뒤에도 여럿이 계속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일행은 그 거인이 죽어 버리면 이
섬에 머무를 희망을 가졌으나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자 뗏목에 올라 바다로 저어 나갔다. 이것을 본 거인들은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허리까지 닿는 바다까지 쫓아와 바위덩어리를 뗏목을 향해
던졌다. 뗏목은 산산이 부서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신드바드의 뗏목만 모면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행은 표류하다 겨우 섬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좋은 열매를 따
먹고 원기를 회복하였다. 그 날 저녁은 해변가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놀랄 만큼 커다란 뱀의 습격으로 잠을 깨었다.


  뱀은 한 사람을 통채로 삼켜 버리더니 그를 다시 토해내어 땅 위에 두드려
부셔서 먹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불쌍한 사나이의 뼈가 바스라지는 무서운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 없이 도망쳤다.


  그 이튿날도 무서운 뱀을 보았다. 섬 가운데를 헤매다가 높은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 날 저녁은 나무 위에서 뱀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들의
뒤를 쫓아와 신드바드보다 아래 앉아 있던 한 사람을 발견하여 통채로 삼켜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드바드는 자기도 동료들과 같은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자 두려움에 떨며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으나 끝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신에게 그의 몸을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나뭇가지나 덩굴을 이용하여 몸을 은신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고 그를 위협하는 잔인한 운명을 모면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 노력하고 그 날 밤 덩굴 속에 숨어 있었다. 뱀은 전날과 똑같은 시각에
나타나 그 나무의 주위를 돌아다녔으나 신드바드를 발견하지 못했다. 뱀은 밤이
새도록 숨은 쥐를 망보고 있는 모양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날이 밝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드바드는 그 날도 절망하여 몸을 바다 속으로 던지려고 했다. 순간 멀리서
한 척의 배를 발견하였다.


  그 배는 이전에 그를 떨쳐 놓고 간 바로 그 배였다. 그는 그의 성품과 그
이익을 되찾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다.

  이 날도 신드바드는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고 다음 이야기를 들으러
오라고 하였다.

  제4항해
  이번 항해도 태풍을 만나 파선하여 몇 사람만이 겨우 어느 섬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섬에는 사람 사는 곳이 있었다. 일행은 마을 가까이 갔다가 많은
흑인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흑인은 일행을 붙들어 각자 분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신드바드는 일행 다섯 사람과 함께 어느 집으로 붙들려 갔었는데 흑인은
그들에게 이상한 풀을 먹으라고 손짓하였다. 일행은 몹시 시장한 터여서 그것을
받아 먹었으나 신드바드는 무슨 흉계가 있을 것만 같아서 먹는 시늉만 하고
삼키지는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일행은 정신을 잃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다음 흑인들은
야자씨 기름으로 조리된 쌀밥을 주었다. 흑인들이 그 풀을 먹인 것은
뱃사람들에게 이성을 잃게 하여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함이었고 쌀밥을 준 것은 그들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흑인들은 식인종이었으므로 뱃사람들의 살이 오르면 잡아먹으려는 의도였다.
  여러 주일이 지났다. 흑인들은 가장 살찐 사람부터 잡아먹기 시작하였으나
신드바드만은 정신이 온전하여 죽음의 공포로 나날이 여위어 갈 뿐이었다.
  이렇게 신드바드가 쇠약해지는 병에 걸렸으므로 흑인은 그를 잡아먹는 것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나중에는 거의 감시조차 받지 않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기회를 보아 그 곳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8일 간의 여행 끝에 겨우 백인들이 산호초를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백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섬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왕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섬나라는 인구도 대단히 많고 상업도 번창한 곳이었다.
이 곳은 고생만 연속하던 그에게 참으로 좋은 위안처였다. 도량이 넓은 왕은
그를 후대하였다. 왕은 그가 고향 생각을 잊고 오랫동안 자기의 영토에 머물도록
아름답고 부유한 궁녀와 결혼시켜 주었으므로 신드바드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드바드는 고향이 그리워 기회만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 나라에는 야만적인 습관이 있었는데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나라의
법에 의하여 남편도 같이 매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그 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시체와
함께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례식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이 화려했다. 고운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몸을 꾸민 시체를 뚜껑이 없는 관대 위에 실은 후 그 뒤에 남편을 선두로 많은
친척과 친구가 따랐다. 매장할 장소에 이르자 깊은 구덩이를 덮은 거대한 돌을
일으키고 시체를 눕힌 관대를 그대로 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다.
  그의 남편은 친척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고 또 하나의 관대에 한 병의 물과
일곱 개의 작은 빵을 차려 놓은 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누웠다. 그리고
이것도 시체와 같이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고 그 위를 무거운 돌로 덮자
의식은 끝났다.


  그런데 신드바드의 아내가 병으로 죽었다. 불행하게도 2주일 후에 그도 아내와
함께 매장되야 할 운명에 놓여졌다. 국왕은 모든 신하들과 국내의 명사들을
참가시켜 그 장의를 빛나게 하여 신드바드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대한 식이 끝나자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는 도중 위로부터 비치는
광선으로 그 구덩이 속의 윤곽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 끝이 없는 동굴의 깊이는
약 50 길이나 되어 보였다. 신드바드는 가지고 온 빵과 물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무슨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소리를 따라가니 짐승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신드바드가 그 뒤를 쫓아가노라니 멀리 마치 별과 같은 빛이 보였다. 이 빛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더욱 앞으로 가보니 좁은 바위 틈에서 비쳐 오는 빛이었다.
신드바드가 그 틈을 겨우 뚫고 나오니 바로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신드바드는 이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로 되돌아 가서 관대 위에 놓인
다이아몬드와 루비 금팔찌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모아 가지고 해변 가까이
나왔다. 다행히도 신의 가호를 받아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신드바드는 묘지에서 가지고 온 보물로 더욱 부자가 되었다. 그는 사원의
유지와 빈민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기부하였다.

  제5항해
  신드바드는 다시 배를 한 척 준비하여 각 국의 상인들과 상품을 가득 싣고
출항하였다.


  긴 항해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무인도에 상륙하였는데 두 번째 항해에서 본
것과 같은 큰 루크 새의 알을 발견하였다. 그 알은 어미새가 부리로 깨기
시작하여 새가 곧 나올 것 같았다.


  신드바드는 상인들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일러 두었으나 그들은 호기심에 차서
망치로 알을 깨뜨리고 새를 꺼내어 태워 버렸다.


  식사를 마치기 전 하늘 높이 두 뭉치의 큰 구름 덩어리가 나타났다. 선장은
경험에서 그 구름이 루크 새의 수컷과 암컷인 것을 알고 일행을 배에 오르도록
재촉하였다. 두 마리의 루크 새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오다가 알이 깨져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더욱 억세게 날개를 쳤다. 루크 새는 그들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사라졌으나 뱃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 올 것 같은 재난을 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배를 저었다.


  얼마 안 되어 루크 새는 발톱 사이에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와서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배 위에 던졌다. 배는 이 돌에 맞아 산산이 박살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배의 조각에 매달려 겨우 어느 섬까지 다달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이 섬은 맛있는 열매가 많이 있고 나무도 무성하여 흡사 낙원 같았다.
신드바드가 좀더 걸어 들어가니 깨끗한 개울이 있었다. 시냇가에는 몹시 야위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드바드는 가까이 가 인사를 하고 왜 그렇게 앉아만 있느냐고 물어 보자 그는
겨우 머리만 흔들고 자기를 업어서 건너편으로 옮겨 달라고 손짓을 하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믿고 그를 업고 시내를
건넜다. 보기에는 아주 힘없이 보이던 늙은이는 날쌔게 신드바드의 어깨 위에
올라타더니 발로 목을 감고 힘껏 졸랐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이 고약한 노인은 그가 기절해도 목 위에 올라
타고 있었으며 그가 겨우 숨을 내쉬자 노인은 한 쪽 발로 그의 옆 배를 누르고
한 쪽 발로는 그를 걷어 차 억지로 일어나도록 했다. 그가 일어나자 노인은 나무
밑으로 가자며 열매를 따서 먹기 위하여 때때로 멈춰 있으라고 하였다. 노인은
종일 신드바드의 목을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으며 잘 때에는 마찬가지였다.
신드바드는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진 표주박을 발견하여 그 곳에 포도를 짜서
술을 만들었다. 그 술은 아주 훌륭해서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었다.
신드바드는 기분이 좋아서 노인을 업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았다.
노인은 그가 이전보다 가볍게 자기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자기에게도 좀 달라고 손짓하였다.

 노인은 그 술을 상당히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드바드의
어깨 위의 다리 힘이 풀렸다. 신드바드는 노인을 땅 위에 내던져 버렸다. 노인은
그대로 잠이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신드바드는 얼른 큰 돌을 들어 노인을 때려
죽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에게서 해방된 기쁨을 안고 해변가로 걸어나왔다. 마침 물을
얻으려고 멈췄던 배에 구조되었다.


  이 배의 선원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괴물이 교살하려는 것에서 모면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모두 놀라했다.


  이 노인은 한 번 붙잡아 자기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하며 이 섬은 그 괴물의 손아귀에 죽은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뱃사람들은 대단히 그를 후대하여 주었으며 배에 탄 상인들과도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항해하다 배는 항구에 닿았다. 그와 친밀한 상인이 큰 자루
하나를 소개하여 주었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을 취하고 만일 그들로부터 떨어지는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드바드는 항구 사람들을 따라 야자수 밀림까지 왔는데 그 나무들은 대단히
높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올라가 열매를 따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 많은 원숭이 떼가 그들 일행을 보자 재빨리 나무의 맨꼭대기로
올라갔다. 같이 갔던 사람들의 나무 위에 있는 원숭이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신드바드도 사람들을 따라 돌을 던졌다. 원숭이들은 대단히 성이 나 야자 열매를
일행을 향하여 던졌다.

  그들은 원숭이가 던진 구하기 어려운 야자 열매를 얻을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귀국 후 장사를 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이익의 1할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고 피로한 심신을 쉬었다.

  제6항해
  신드바드는 다섯 번이나 조난을 당해 위험을 거듭하였으므로 친척과 친지들이
만류를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이번 항해는 선장과 도선사가 침로를 잘못 잡았다. 선장은 미친 사람처럼
탄식하며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드바드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이 대양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에 왔는데 빠른 조류가 배를 이끌고 있어 15분 후에는 그들이 바다 속으로
빠져 죽을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단념하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고 하였다.
  배는 조류로 인해 평시에는 도저히 가까이 댈 수도 없는 산의 절벽까지 올라가
그 곳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행은 생명과 식량 가장 중요한 물품은 구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는
난파선의 파편과 해골과 믿을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보물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곳에서는 많은 물이 바다로부터 컴컴한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 동굴의 입구는 대단히 높고 넓었다. 또한 이 산의 돌은 수정과 루비와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곳에는 역청이 샘물과 같이 바다로
흐르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먹으면 용연향이 되어 곧 토해 내었다. 물결이 이
용연향을 해변가로 밀어 붙여 수목이 그 곳에 자라나게 되어 있었고 자라는
나무는 대개가 가라목이었다.


  이 곳은 배가 일정한 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여 산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바다로 피할 수도 없어 이 지역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신드바드의 일행은 이 산중턱의 해변가에서 나날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하였을 때에 그들은 있는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하였기 때문에 각자 식량의
취급 여하에 따라 길게도 혹은 짧게도 살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식량을 조절하여 가장 오래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료를 매장한 후 자기 손으로 자기의 무덤을
파 두었다.


  신드바드는 동굴로 흘러 들어가는 강가로 가보았다. 그는 이 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을 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 강은 땅 밑으로 흐르지만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흘러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익사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죽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는 곧 큰 배 조각과 닻줄로 튼튼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루비 에메랄드
용연향 수정 등이 가득한 상자와 값이 나갈 물품을 담은 자루를 싣고 신에게
그의 운명을 맡겼다.


  동굴 안은 컴컴하였으며 천정은 머리가 닿을 만큼 낮은 곳도 있었다. 가지고
온 식량도 도중에 전부 떨어져 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신드바드가 정신을 회복하였을 때 그는 넓은 들판 위에서 많은 흑인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다. 그들 중에 아라비아 어를 해독하는 흑인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그로부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주민인데 가까운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논에 담고
있을 때 신드바드의 뗏목을 발견하고 그 뗏목을 끌고 와 그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드바드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왕에게 안내하여 주었다. 이
나라의 인도였다. 왕은 그에게서 진기한 모험담을 만족하게 듣고 그를
후대하였다.


  신드바드는 인도 왕으로부터 회교도의 지배자인 아라비아 왕에게 보내는
친선의 서한과 많은 보물을 전달할 것을 부탁하고서 귀국하였다.


  대교주인 국왕은 이 선물을 받고 그 나라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은 후
신드바드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사람을 시켜 그의 집까지 보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드바드는 전날과 같이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 그의 최후의 항해를 꼭 들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제7항해

그는 귀국하자 다시는 항해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이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이제까지 겪어 온 위험한 일에 다시는 몸을 내던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생을 편하게 보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대교주로부터 사절이 왔다. 
인도 왕에게 답례로써 답서와 예물을 가지고 사절로 가 달라는 명이었다.

그는 대주교인 국왕에게 자기는 이후 일체 항해를 단념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국왕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인도에서 되도록 속히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하였다. 
인도 왕은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으므로 곧 귀로에 올랐으나 불행히도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선원 중에는 저항을 하여 생명을 잃는 자도 있었고 남을 사람들은 먼
섬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 갔다.


  신드바드를 산 주인은 부자였으며 그를 후대하여 노예로서는 분에 넘치는
몸차림을 하여 주었다. 주인은 그에게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신드바드가
상인이라고 하였더니 활을 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활 쏘는 것은 젊었을
때의 운동이었다고 말하였더니 주인은 만족한 듯 커다란 코끼리에 그를 태우고
활과 많은 화살을 싣고 밀림 속 깊이 그를 데리고 갔다. 큰 나무 밑에 가자
주인은 그에게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주인은 코끼리의 무리가 이 앞을
지나갈 때는 활로 쏘아 넘어지는 놈이 있으면 자기에게 곧 알려 달라 하고
음식물을 남겨둔 후 시내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튿날 새벽녘에 수많은 코끼리 떼가 몰려 왔다. 신드바드는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넘어트렸는데 다른 놈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하니 대단히 기뻐하며 그를 칭찬하여 주었다. 그들은 코끼리를
땅에 묻었는데 이것이 썩어버릴 때에 코끼리의 큰 상아를 뽑아 팔 계획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일을 약 2개월 간 계속하였는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신드바드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망을 보고 있을 때 코끼리들은 그 나무 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고 멈춰 서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신드바드가 은신하고 있는
나무 주위를 둘러쌌다. 코끼리의 수는 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코끼리 무리는 긴
코를 공중으로 쳐들어 일제히 신드바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정신이 아찔했다.


  제일 커다란 코끼리가 나서서 코로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 땅 위에
넘어트렸다. 신드바드가 땅 위에 떨어지자 코끼리가 그의 몸을 코로 감아 자기의
등에 앉혔다. 신드바드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 코끼리가 선두에 서서
걸어가자 많은 수의 코끼리가 질서 있게 열을 지어 뒤를 따랐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코끼리는 신드바드를 땅 위에 내려 놓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는 얼마 동안 누워 있다 이상히 생각하여 주위를 살펴 보니 그 곳은 길고
넓은 언덕 위였는데 코끼리의 뼈와 상아로 덮여 있었다. 코끼리의 무덤이었다.
코끼리는 자기들을 죽이지 말라는 뜻을 알리기 위하여 신드바드를 이 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제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도 상아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신드바드는 하루를 꼬박 걸어 주인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은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그는 주인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코끼리를 타고 그 언덕까지 가서 많은
상아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은 그에게 코끼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지금까지 그
밀림 속의 코끼리들은 많은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매년 수없이
죽여 왔다. 그러나 신은 신드바드만은 사랑했음인지 코끼리들의 분노에 거슬리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했다. 이것은 아마도 신이 그를 이 세상에서 더욱
유익하게 일을 시키려는 증거일 것이라고 하며 그 날부터 신드바드를 자유의
몸으로 하고 재산도 나누어 주며 친형제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위험한 바닷길을 피하고 낙타 대상에 합류하여 육로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사절의 임무를 완수하여 국왕이 많은 보물을 주었으며 그 후로
바그다드를 떠나는 일이 없이 가족들과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다.
  신드바드는 그의 항해담을 다 마치고 히드바드를 향하여
  "저의 친구여! 당신은 내가 겪은 만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의 소문을
들었는지요. 내가 이러한 고생을 다하였으니 평화롭게 유쾌한 생활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하고 말하였다.


  히드바드는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
  "저의 고생은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당신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재산도 이렇게 훌륭하게 사용하니 그 자격도 충분하고 남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신드바드는 다시 그에게 많은 돈을 주며 짐을 운반하는 일은 그만두고
앞으로는 자기의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히드바드가 뱃사공이던 신드바드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 것을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기쁘고 당연한 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1] Alf layla wa-layla/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2] 동서문화사 판본 기준. '위대한 왕'을 뜻하는 샤흐리야르로 표기된 버전도 있으며, 일본에서는 샤흐리야르 쪽을 정사로 친다.[3] 역시 동서문화사 판본 기준. 샤헤자만이나 샤흐즈만으로 되어 있는 책도 있다.[4] 혹은 당분간 보지 못할 아내가 그리워져서 다시 한 번 보려 했다고 한다.[5] 여담으로 후대의 이야기가 마구 뒤섞인 이상 실제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하겠지만, 사산조의 왕 중 '샤 자만' 이라든지 '샤 리아르' 비슷한 이름의 사람은 없다. 어거지로라도 때려 맞추라면 자마습(Djamasp, 재위: 496~498)과 샤흐르바라즈(Shahrbaraz, 재위: 629)가 있기는 한데 행적이나 연대 차이를 보면 도저히 형제일 수 없다. 게다가 자마습의 경우는 애초에 전대 샤한샤이자 형인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과 갈등을 빚다가 반란이 터져서 축출당하고 자신이 샤한샤가 되었다가 형이 탈출해서 군대를 끌고 와서 자기를 폐위하고 실명형에 처했으니 말이 안 되고 샤흐르바라즈의 경우, 본인도 사산 왕조 공위시대에 군대를 끌고 왕위를 차지한 찬탈자였던 데다 당시 사산 왕조는 대혼란기였기에 사방팔방에서 샤한샤를 자칭하는 호족들이 기어나오며 제국이 실시간으로 산산조각나는 상황이었으며, 본인도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하며 1년도 안 되는 재위기간을 마쳤으니 더 불가능하다. 또 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왕이 된 사람도 몇 있지만 그때 '형'들은 암살당했다. 끽해야 실명이나 감금이었고 그때 이름이 영 달라서 끼워 맞추기 곤란하며 그냥 실제 사람의 이름만 붙인 가상의 사람으로 보는 게 편하다.[6]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여자의 정절을 원하면 여자를 억누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 작품이 선정성이 심한데다가 마누라를 폭행, 살해하는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옴을 생각하면 상당히 묘하다.[7] 1년은 52주. 1000일은 2년 9개월 28-29일 정도로, 대략 146-147주. 정상적인 임신 기간은 성교 시점으로 38주이고 3번의 임신 기간이면 도합 114주이므로, 1000일인 146-147주에서 임신기간을 빼면 32-33주가 남는다. 1일차에 임신하고 1000일차에 출산한다는 조건이면 38주 후 출산, 16주 후 임신, 38주 후 둘째 출산, 16주 후 임신, 그리고 출산이면 1000일이 채워진다. 16주이면 3달 2주 정도의 기간이며, 어차피 왕의 배우자라 수유는 유모가 전담하기에 모유수유를 할 필요도 없으니 1달 안에 임신해서 같은 연도에 두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1000일 사이 임신과 출산 사이를 1-2달 사이로 줄여도 3명의 아이를 낳아 하나는 걷고 하나는 기고 하나는 갓난아이일 수 있다. 아이는 빠른 아이는 8개월차에 느린 아이여도 15개월이면 걷고 12개월 이전까지 보통은 기어다니므로, 1000일 사이에 걷는 아이, 기어다니는 아이, 갓난아이 셋이 생긴 건 있는 건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다.[8] 물론 독실하거나 꼴통인 경우가 아니라면 위성TV를 통해 튀르키예 드라마, 영화나 레바논 뮤직비디오, 인도 드라마 등을 통해 이러한 장면들을 잘만 본다.[9] 기독교권 백인 국가들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렇지 아랍 등 중동 국가들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들을 겨냥한 노예무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과거 아랍 세력들에 의해 노예 무역과 전쟁, 침략, 이슬람 강제개종 등의 피해를 입었던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지역의 흑인 국가 사람들에게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예멘, 레바논 등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국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욕을 퍼붓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며, 일부 사람들은 아랍권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옹호하기도 한다. 다만 아랍 이슬람 세력들의 침입을 받지 않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나미비아, 짐바브웨, 레소토 등 남아프리카 지역 흑인국가들의 경우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과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이거나 반감이 동아프리카나 서아프리카 지역에 비해 약한 편이다. 여담으로 노예무역을 통해서 대량의 흑백혼혈이 양성된 아메리카, 유럽 등지와는 달리 중동은 흑백혼혈이 적은데 이는 남성 흑인 노예들은 거세하고 여성 흑인 노예들이 낳은 혼혈아는 바로 죽여버렸기 때문이다.[10] 갈랑 역본에서는 난교에 참여한 남성 노예들이 전원 흑인이었다고 하나, 원본에 가까운 버턴 역본에서는 샤 리아르의 아내를 노린 노예 10명의 경우 백인이었다고 한다. 왕비에게 총애를 받던 종마 역할만큼은 어느 역본을 막론하고 흑인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이 왕비 전용 노예는 갈랑 역본에서는 마수드, 버턴 역본에서는 사이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샤 자만의 아내를 빼앗은 주방 노예 또한 흑인으로만 등장한다.[11] 이야기 중에 주인공 왕자의 편에 식인귀(구울)가 있는 이야기도 있는 점도 특이하다.[12] 단, 솔로몬 왕은 예언자이자 대마법사 명군으로 괜찮게 나온다. 애초에 솔로몬을 가장 중요한 25명의 예언자 중 하나로 묘사하는 이슬람교의 관점에 따라 솔로몬은 당연히 옹호해야지 격하할 수 없다.[13] 현재 이슬람 세계의 반지성주의, 금욕주의, 정체성 정치, 내세지향성은 19세기부터 영국, 미국석유 획득을 위해 와하비즘을 내세우는 사우디아라비아, 걸프 왕정 국가들을 후원하고 이 때문에 생긴 반발로 이집트, 이란, 인도, 북아프리카에서 살라피즘이 발생한 이후의 현상이다. 와하비즘은 주요 이슬람 문명권에서 소외받던 네지드 아랍인들과 베두인의 전투적 금욕주의의 영향이 짙게 깔려있다. 게다가 반서양, 반기독교를 내세우는 살라피즘은 역설적으로 독일, 러시아옥시덴탈리즘영국, 미국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받았다.[14] 게다가 마지드 나와즈가 지적한 것처럼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LGBT혐오 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15] 애초에 이슬람을 세운 아랍인은 그냥 아라비아의 유목민 수준에 불과했고 바로 옆동네이자 일찍이 정복한 사산 제국(페르시아)는 이때에도 이미 수천년의 역사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선진국이었다. 오죽하면 이슬람교에서 그토록 떠받드는 샤리아도 사실은 동로마법과 페르시아 법을 참고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16] 주인공은 분명 사산조의 왕인데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에는 아랍이 중심이며 바그다드, 바스라, 다마스커스 같은 아랍 정복 이후의 도시나 하룬 알 라시드 같은 실제 역사의 사람들까지 등장한다.[17] 이스탄불 프랑스주재 대사로 15년간 근무하면서 오스만어와 아랍어를 익히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아랍 지역 각지를 여행했다.[18] 그래서 아라비안나이트의 공간적 묘사는 10세기의 바그다드와 14세기 카이로보다 18세기 파리와 유사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19] 리처드 버틴. 고산고정일 번역. (2010).: 아라비안 나이트 1. 동서문화사. p. 18[20] 아라비안 나이트와 반대로 여자에게 헌신하는 남자의 이야기들이 주 내용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배경이다보니 분위기 자체도 다른 편이며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나는 주인공 굴리기와는 달리 전체에 걸쳐 순애물의 분위기다.[21]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상당히 외설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다. 대표로 멀쩡한 남자가 벙어리인 척 연기하고 수녀원에 들어가 막내 수녀부터 수녀원장까지 동침하는 이야기가 있다.





신구약 중간기


신구약 중간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구약의 마지막 책들과 그리스도의 출현 사이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기” (또는 “신구약 사이의 기간") 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400년의 침묵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때 발생한 일들의 대부분은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다니엘 2장, 7장, 8장, 11장을 참조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기원전 532-325년경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는 일도 허용했습니다(역대하 36:22-23; 에스라 1:1-4). 
이 기간은 구약 성경 시대의 마지막 100년과 중간기의 처음 100년을 포함합니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고요한 것처럼, 이 기간은 상당히 평화롭고 안락한 시기였습니다.

중간기가 시작되기 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Darius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헬라제국의 통치를 확립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이었고 헬라 철학과 정치학을 잘 배웠습니다. 
그는 그가 정복한 모든 땅에 헬라 문화를 장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로 인해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은 70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헬라적 생활 방식을 강력하게 장려했습니다. 
헬라 문화는 매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경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일련의 후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에 이르게 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기원전 167년경 그는 합법적인 제사장직을 무너뜨렸으며, 불결한 동물들과 이교도 제단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했습니다(마가복음 13:14를 보면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행동은 종교적인 강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카비 형제들과 하스모니안 가문이 주도한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으로 합법적인 제사장들이 회복되었고 성전이 복구되었습니다. 마카비 항쟁의 시기는 전쟁과 폭력과 내란의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약 63년 경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유대 전체를 시저의 통치 하에 두었습니다. 
로마 황제와 상원 의원에 의해 결국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에 세금을 부과하고 유대인들을 통제하며, 종국에는 메시아를 로마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제 유대 지방에는 로마, 헬라, 히브리 문화가 혼합 되었습니다.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전통을 모세 율법에 추가하였고, 마침내 자신들의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마가복음 7:1-23 참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종종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공허한 율법주의와 긍휼의 마음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들과 부자들을 대표했습니다. 
산헤드린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속한 모세의 책들 외에는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기를 거부했고, 헬라 사람들을 크게 동경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헬라 문화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간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유대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 모두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다신론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인과 헬라인은 이제 그들의 신화에서 벗어나 헬라어와 라틴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히브리어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낙담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정복 당하고, 억압 받고, 더럽혀졌습니다. 소망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믿음도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과 그들의 신앙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시아의 등장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를 깔았고 (복음의 전파를 돕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공통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여행하기에 (복음을 더 편만하게 전파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이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분을 찾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예언을 성취할 것을 인식하고 대망하였습니다. 로마 백부장, 지혜자들,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몇 가지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간기의 "침묵의 400년"은 지금까지 전해졌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개요

시작하는 말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period)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 말라기 선지자에서 신약 세례 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읽고 마태복음을 펼친 독자는 순식간에 약 4세기를 뛰어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사자’1)를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 전까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침묵하셨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혹은 ‘중간기’(中間期)라고 한다.

(1)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王朝)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독자를 거대한 로마제국으로 안내한다. 독자들은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게 되고 수전절(修殿節, Hanukkah)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 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 이해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는 신구약 중간사의 의의와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중간사 기간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 강대한 왕도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크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했다.2) 

또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공회를 만나고,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읽으며, 서기관들의 활동을 대하게 된다. (중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타인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셋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상의 이런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신구약의 중간역사 때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와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3)

그러나 ‘중간사’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다. 자료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 H. 야거스마는 “이 기간의(편집자 주, BC 330년-AD 135년)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주 상당히 많은 불확실한 것들과 가정들로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기간 에 이스라엘 역사의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점이 그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4)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동시에 그는 ‘중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외경(外經, Apocrypha), 위경(僞經, Pseudographia), 필로의 저작, 요세푸스의 저작, 헬라와 라틴저작, 사해사본,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랍비 문헌, 고고학의 증거 등을 말한다.

(2)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성경은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인가?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14 AD)부터 소위 ‘오현제(五賢帝)’5)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叛亂)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은 이 기간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工兵)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步兵)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이 준비해 놓은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언어의 통일과 구약 70인 역 탄생

B.C. 336년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Macedonia) 도시국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필립 2세(Philip II, BC 382-336)가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 전쟁 전문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필립 2세는 암살당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였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사람이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세계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6)고 했다.

또 통일된 헬라어로 구약성경 ‘70인 역’(七十人譯, LXX, Septuagint)이 탄생했다. ‘70인 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래서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

이 ‘70인 역’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들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경우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이 ‘70인 역’ 구약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Κοινὴ Ἑλληνική)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하셨으나 여전히 이같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를 조성해가셨다.

1) 말라기의 뜻, 말라기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9.
3) 같은 책, 11.
4) H.야거스마,『신약배경사』(솔로몬, 2004), 19-20.
5) 오현제는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 13대 트라야누스, 14대 하드리아누스, 15대 안토니우스, 16대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6) 김병국,『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남북분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면서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신(新) 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9)과 신(新) 바빌로니아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 이 연이어 부상(浮上)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Neo-Assyrian Empire)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Neo-Babylonian Empire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으나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넘어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BC?-727,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다.”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라고 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는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바뀌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人頭稅)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한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親) 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5)라며 “(친 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라고 했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했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동맹군의 칼이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에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 사람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한 유대 군사가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앗수르 인들을 다메섹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도록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침공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Sargon II, BC 765-705)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Megiddo)는 완전히 무너졌고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세워졌다. 하솔(Hazor)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Shechem)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10)고 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2)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으나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Sennacherib, BC 740-681), 에살핫돈(Esarhaddon, BC ?-66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27) 때에 본격화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Shamash-shum-ukin, BC ?-648)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통치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사르 이스쿤(Sinsharishkun, BC ?-626)과 이 와중에 반란자 아슈르 에텔 일라니(Ashur-etil-ilani, BC ?-627) 사이에 일어난 수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新) 바벨론의 창건자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58-605)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神)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3)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Necho II, BC ?-595)는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했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애굽의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애굽의 느고는 2세는 다시 한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BC 634-562)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 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Nebuzaradan)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한다.13)

(4) 유대 땅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쳤던 무리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한 이스마엘이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했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 역시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 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3. 바벨론 멸망과 유대인 포로의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 제국은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Amel-Marduk, BC 562-560,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였다.1)  바벨론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2)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로 결국에 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Belshazzar, BC ?-539, 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왕위를 넘겼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Akitu)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했다.

(3)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Media, BC 727-549, 성경에는 메대)였다.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Persia, 성경에는 바사)에 고레스(Cyrus II of Persia, BC 601-530)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Kingdom of Lydia,  about BC 1200-546)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곧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3)

국력을 견고히 한 후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는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한 뒤 고국 바벨론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 of Media, BC 584-559?)가 많은 양의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태몽을 꾼다. 마고스(magus, 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그 후 딸 만다네를 보낸 첫해 아스티아게스는 또다시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Harpagus)에게 자신의 딸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4)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사리아나와는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을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정복민이 자신들의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굴복당한 이방 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자신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회유(懷柔)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 

고레스는 이같이 각 나라의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레스의 피정복민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5) 유대 포로의 귀환

하나님은 고레스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말씀대로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국으로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편집자,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Persian Empire, BC 539-323)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 초대 왕 키루스 2세(성경에는 고레스) 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고 새로운 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 BC 550-486)가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Xerxes I, BC 519-465, 성경에는 ‘아하수에로’)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1)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리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Greece)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먼저 1차 침공은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Mount Athos)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때렸으며 수많은 함선이 아토스에 내동댕이쳐졌다. 3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었다.”1)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Athens)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치고 전진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 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으나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 전사했다.3)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였다. 그야말로 대군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은 이렇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2)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고레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스(Cambyses II, BC ?-522)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of Persia, BC ?-424)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1)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5. 알렉산더와 그리스제국

그리스(Greece)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Athens)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Sparta)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들 중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衰落)했다.

 (2)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로 테베에서 마게도니아(Macedonia)로 넘어갔다. 마게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전쟁의 천재라고 하는 필립포스 2세(Philippos Ⅱ or Philip Ⅱ, Philip of Macedon, BC 382-336)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暗殺)당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통치자로 등극한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들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으로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Darius III, BC 380-330, 페르시아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Tyres)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 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때 두로 사람 8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1)고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대제국의 대왕(大王)이 되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니아 사람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 전파자로 기록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2)고 밝혔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1.
2) 김병국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6. 애굽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or Alexander The Great, 356-323)이 이룩한 그리스제국(Greek Empire, BC 332-323)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1) 분열된 그리스 대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Roxana, BC 340-310)에게서 유복자(遺腹子)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성년이 되기 전 록산나와 아들(Alexander IV of Macedon, BC 323-309)을 살해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Ptolemy Ⅰ Soter, BC 367-282),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5-297), 리시마코스(Lysimachus, BC 360-281), 셀류쿠스(Seleucus I Nicator, BC 358-281)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 대왕을 뒤이어 그리스제국의 왕이 된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 382- 301, 알렉산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통에 모든 도시는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했다.

(2) 애굽 프톨레미 왕조 지배하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애굽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는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처럼 가장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프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던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주변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프톨레미 왕조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했으나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해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 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문화권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했다.

비록 애굽의 지배는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가 프톨레미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기까지 약 120년간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구약 ‘70인 역’의 탄생

구약 ‘70인 역’(譯)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다. ‘70인 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 308/9-246)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 역’ 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문화권에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때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LXX Bible: Joshua, Egypt, late 2nd C. 몰랐다. 그러므로 만약 ‘70인 역’ 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해도 못 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 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 프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 65-63)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미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Carthage)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1)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뜨린다는 한니발의 평생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賠償金)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전쟁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전(神殿)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Seleucus IV Philopator, BC 218-175)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극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Epiphanes)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 한 레위 지파도 아닌 야손(Jason, 주전 174-172 제37대 대제사장, 셀류쿠스 지배 시 극악한 대제사장 중 하나)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Menelaus)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과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이때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무차별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 된 이교도들과 유대교를 배교 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안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했다.3)

안티오쿠스 4세는 또 안식일 금지, 할례 금지, 율법서 소지 금지 등 유대인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勅令)을 내렸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과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사람들이었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Zeus, 그리스 최고의 신)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카베우스’(Maccabaeus)라는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 급기야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8. 마카비의 반란(Maccabean Revolt, BC 167-160)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지적한다.1)

(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경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모딘(Modein)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 이방신(異邦神, 그리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Modein) 지역 하스몬 가문(Hasmonean)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던 마타디아(Mattathias, BC ?-166)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러 제단으로 나왔다. 이를 본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험준한 산으로 숨었다.

이후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하고 회당을 재건했다.”3)라고 말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BC 166년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 유다(Judas Maccabeus, BC ?-160)가 뒤를 이었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Maccabee, 망치질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2) 마카비의 승리와 성전정화

마카비(Maccabees)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과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 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아스(Lysias)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Lysias)는 그의 부하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 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고 오히려 노예 상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3)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 드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요 10:22)이라 부른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Eleazar Avaran, BC ?-162)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본국으로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 군대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의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Alcimus, High Priest of Israel for BC 162-159)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지원군과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유다 마카베오스는 결국 이 전투에서 BC 160년 장렬히 전사했다.(*) 글쓴 이 / 조믿음 기자

출처, http://www.bami.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53&item=&no=417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 편집자 주 > 이 글은 웹진 ‘바른 믿음’에 연재된 것을 본지에 맞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과 관련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새길: 경기도 과천시 별양상가2로 14, 3층 314호 제호: 바른미디어 TEL: 050-6558-0253, FAX: 050-4092-0935, E-mail: bareunmedia@naver.com

<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 BC 140-37 > 각 이름 아래 연도는 재위 기간





신구약 중간시대란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관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에 직면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구약 시대의 끝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전 43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 히브리어 성경은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주제는 바빌론 유배를 시작으로 외국 제국의 통치 기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성서 중간기에 전개될 복잡한 역학의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헬레니즘 영향의 부상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는 급속도로 퍼졌다. 이 헬레니즘 영향은 유대를 포함하여 알려진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어, 철학, 관습의 도입은 유대 민족에게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부는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반면, 다른 일부는 저항하며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카비 반란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 인구는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167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카비 반란(기원전 160-XNUMX년)이 일어났고, 유다 마카베우스가 이끄는 유대인 전사들이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재헌납했습니다. 이 행사는 하누카 기간에 기념되며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유대인 독립을 향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스몬 왕조의 성립

마카베오 왕조의 성공으로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배 가문은 유대를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갈등과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신약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민족 사이에 다양한 종파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유대 종파의 발전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집단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의 초점은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종파와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신약성서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두개인들은 특히 사제 계급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고, 이는 종종 그들을 바리새인들과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집단들 간의 신학적 차이점을 이해하면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대립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센느

에세네파는 좀 더 금욕적인 그룹이었으며 종종 사해 두루마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물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공동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순결에 대한 강조와 다가오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당시의 종교 풍경에 독특한 관점을 더해주었습니다.

로마 상황

로마 정복과 통치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은 유대를 정복하여 유대인의 경험에 새로운 복잡성을 더했습니다. 로마 통치는 유대인들 사이에 새로운 세금, 정치적 혼란, 억압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로마의 권력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의 영향

로마가 확장되면서 로마 고유의 관습과 관행이 도입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의 철학, 문학, 관습을 포함하는 그리스-로마 문화가 유대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혼합은 초기 기독교 운동으로 퍼져 복음이 공유되고 이해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 문헌 및 문학

외경의 발전

신구약 중간기에 현재 외경이나 신명기로 분류되는 여러 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유대 민족의 생각과 신앙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종종 예언, 지혜,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칠십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유대 성경을 이방인 세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칠십인역은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것처럼 신약성경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 시대로의 전환

기대의 시간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 민족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로마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기독교 전파를 위한 비옥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은 신구약 중간기에 배양된 기대와 믿음 위에 직접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 회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혁명적인 관점은 유대 공동체와 신앙을 탐구하는 이방인 모두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결론: 시대 간 연결

신구약 중간기는 신약성경의 배경을 형성하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사건, 갈등, 종파는 초대 교회가 어려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대를 이해하면 역사를 통해 짜여진 신앙의 태피스트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Q. 신구약 중간기는 어떤 시대였나요?
A.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간 지속되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Q. 신약을 이해하는 데 왜 신구약 중간기가 중요한가?
A. 이는 신약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믿음과 관습에 영향을 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구약중기에는 어떤 주요 사건이 일어났는가?
A. 주요 사건으로는 마카베오 반란, 하스몬 왕조의 등장, 바리새파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다양한 유대 종파의 설립 등이 있습니다.

Q. 바리새인들은 누구였나요?
A.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유명한 유대인 종파로서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Q. 헬레니즘은 유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헬레니즘은 그리스어를 도입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 이러한 관습이 전파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수용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질문. 사해 두루마리는 무엇이었나요?
A. 사해 두루마리는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인 문서로, 에세네파가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Q. 어떻게 로마의 통치가 유대에 영향을 미치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이었나요?
A. 로마 정복은 정치적 억압, 무거운 세금, 문화적 영향력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Q. 칠십인역이란 무엇입니까?
A.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질문. 신구약 중간기 동안 유대의 주요 종파는 무엇이었습니까?
A. 주요 종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포함되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신앙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신약성경을 어떻게 형성했습니까?
A.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초대교회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었는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400년 요약(1)

페이지정보

작성자 yangmocsa 날짜22-04-26

본문

신·구약 400년 중간사 요약
• 제1장 페르시아의 유대 통치와 알렉산더 대왕의 등극(BC 539-332년)
• 제2장 초기 헬레니즘과 마카비 혁명(BC 332-160년)
• 제3장 하스몬 왕가 1(BC 160-67년)
• 제4장 하스몬 왕가 2(BC 67- 37년)
• 제5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1(BC 37-20년)
• 제6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2(BC 20-7년)
• 제7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3(BC 7-AD 6년)
• 제8장 헤롯 왕국의 분할과 제1차 로마 총독 시대(AD 6-41년)
• 제9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시대(AD 41-44년)
• 제10장 제2차 로마 총독 시대(AD 44-70년)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북왕조에 속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 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했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종교 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B.C. 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 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후에 느헤미야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와 단 일 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세스, 다리오 2세였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 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를 알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그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 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 냈다. 그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키고 방향을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로 돌렸고, 시돈과 비블리스, 아라두스를 정복하였고, 7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두로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던 중 당시 제사장이었던 야두아가 그를 맞아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어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믿게 되어, 이후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332년 그는 애굽을 침략하였고,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설립했고 그곳에 동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하는,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는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이전 페르샤의 모든 지역을 평정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는데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년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미 그의 제국 안에는 그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많은 친가와 처가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에서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 그리고 리시마쿠스는 제 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결국,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카터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 애굽을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 없이 정복당하였고, B.C. 315년에는 프톨레미의 적수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 전투 이후에는 프톨레미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다.

당시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고, 301년의 입수스 전투에서는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고,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아,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智)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319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좋은 기간이었지만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의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하였다.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316년에 프리기아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301년 입수스 전투 후에 다시 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부터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 이후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게 된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지만 이후 안티오쿠스가 로마군과의 서머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 받게 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세류쿠스 4세의 통치 시기에도 동일했고, 셀류쿠스 4세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의 집정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만술과 가장함과 숙달된 통치를 행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제사장직을 뇌물을 통하여 사들이는 이들이 발생했고,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에 적극적인 자들의 충성으로 인해 곳곳에 체육관과 경기장, 대중목욕탕 등이 생겨났다.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강한 반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뇌물에 의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상실한 야손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고, 이 보고를 접하게 된 안티오쿠스 4세는 격노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약탈을 했고,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하였다. 무거운 세금을 유대인들에게 부과하였고,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 추수 열매의 절반,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들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서기관들에 의해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그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매우 엄격하였고, 이 집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고,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지방 수령을 죽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이 독립 운동은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우스라는 별명을 가짐)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는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을 갖춘 압도적인 수리아 병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이 맞게 되었다.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예루살렘만을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하나씩 수리아군으로부터 탈환해 나갔고, 급기야 수리아로부터의 화친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수리아 내의 분쟁이 요인이 되어 수리아 장군 트리포의 계략에 말려 무참하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시몬은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로마와의 평화 협정체결을 위해 사자를 파견하고,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반역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므로 마카비가의 다섯 형제의 영웅적인 헌신과 투쟁은 시몬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시몬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수리아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은 틈을 타서 독립을 되찾고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시딤들과 마찰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바라새, 사두개, 에세네 등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통치하면서 보다 더 친 헬라적인 정책을 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구금시켰던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한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에 의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이었고, 그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 등 왕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반란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원성을 샀고, 결국 그는 죽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했다.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친 바리새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생전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였지만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두매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구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알렉산드라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에서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스몬-왕조-가계도 (1)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유대의 역사에 있어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로마의 통치 기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할 수 있다.

7.1. 이두매 왕조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했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총독이 되자,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유대군의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씨저의 사후 그들은 다시금 가이사(Cassius)에 협력하여 그의 호의를 얻게 되어 헤롯은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 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24년에 단독으로 유대의 왕이 된다.

7.2. 헤롯 대왕
왕이 된 헤롯은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 로마에 충성하였고,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였고, 결국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반대자들을 치밀하게 제거하였고,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그에 의해 제거 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고, 많은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해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1년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마지막 10년간은 다시 정권 쟁취를 위한 가족 내의 암투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세아들, 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에 의해 각각 분할되어 유대, 갈릴리와 베뢰아,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된다.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지 못해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헤롯이 남긴 복잡한 문제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혐오감을 샀고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관련되어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으로 인한 세례 요한의 지적으로 그를 투옥하고 참수한 인물이며 빌라도에 의해 보내진 예수님을 심문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욕에 의해 로마에 갔다가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헤롯 빌립은 갈릴리 동부와 남동부 지방의 분봉왕이었고, 헤롯의 세 아들 가운데 최상의 통치자였다.

7.4. 로마의 총독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고,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와 그곳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그리고 중요한 사건의 재판 등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가 아니라 씨저에 속한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 초과된 금액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고, 외세에 협력하는 자들이라 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투옥 되었다가 친분을 쌓았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고, 결국 A.D. 44년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7.6.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는 아버지의 영토가 아닌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나 네로에 의해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지역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게 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7.7.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총독들은 모두 7명으로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고 이 기간 동안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에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보다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려 했다. 이 시기의 유대는 로마에 대한 반란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전투를 치렀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고도 피어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총독 플로루스의 통치시기에 터져 나오게 된다.
총독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약탈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였고, 헤롯 아그립바 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했지만 도중 네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로마로 회군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4개 군단을 맡겨 예루살렘으로 출정시켰고, 결국 4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 상실을 가져왔고, 성전 제사는 중단 되었으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었던 제사장직은 소멸되게 되었다. 또한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산헤드린 역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독립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게 되고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때까지 종식되게 되었다.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바리새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리새파의 유래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 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고, 자신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와 이방인들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의 교제를 거부했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는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이 이마와 손목에 매어졌고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고, 유대인의 거의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고,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구전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나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전승까지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그들의 모습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길게 기도하며,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며, 그들의 경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식상의 결례를 많이 행하고 자만하며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 받고,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 두 번째의 중요한 종파였다. 이들은 구전 율법을 주장하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종 이들에 대한 명칭은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보통의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A.D.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들은 지배계급에 머물러 있었고, 성전을 본거지로 사용했다.

3. 에세네파
이들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보다 더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마카비가의 요나단의 때에 활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들은 주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들의 숫자는 예수님 당시 약 4천명 정도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 파에 가입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세 개의 상징,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아 1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치고 다시 2년간의 견습을 통과한 후에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았고, 대부분 독신생활을 했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에 의해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생활하였다. 노예가 없었고 기름 붓는 일이 금지 되었으며 매 식사 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해야 했고, 죽은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옷도 식물성 섬유로 된 옷을 입었다.

4. 열심당
이들은 공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조공에 반대했다. 파이퍼(Robert Pfeiffer)에 의하면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이듯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다”라고 한다.

이들은 마카비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본받았기에 열심당이라고 불려 졌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민 25:11)의 본을 좇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A.D. 66-73에 있었던 전쟁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나 A.D. 73년 5월,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면서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A.D. 1세기 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 2개 구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 번역본이 필요했으며,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역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헬라어역의 구약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70인경은 구약의 본문 비평에 있어 중요한데 이것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해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대한 환한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들인데, 사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의 두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 바르 코흐바에 의하여 일어났던 제 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1962년에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국동양연구학회가 근처의 동굴들을 탐사하여 발견한 아람어 파피루스의 연대는 B.C. 375~33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제1, 제4, 제11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또한 다른 쿰란의 동굴들은 성경적 자료들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특히 제11 동굴은 현재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들과 약간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두루마리와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 등이 발견 되었다.

3. 외경과 위경
구약의 외경은 길이와 주제, 표현방법이 각기 다양한 14권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영어역 성경들이 수록한 외경의 순서는 흠정역(King James)의 번역자들이 익숙한 구약의 라틴어역을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약 정경, 곧 팔레스틴 사본(맛소라 사본을 따르는)과 알렉산드리아 사본(70인역을 따르는)을 가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지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외경이 구약 정경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외경에 정경적 지위를 주었다.

70인경에서 외경에 속한 책들(에스드라 2서 제외)은 항상 정경적인 책들과 나란히 동일 계급으로 취급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외경 가운데 어느 한 책도 정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외경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는데 트렌트 종교회의는 다양한 외경들의 정경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루터는 외경 가운데 그 어떤 책의 정경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여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위치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성경에서의 외경의 제거는 한 제네바 성경에서 외경을 생략시켰던 청교도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1629년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외경이 없이 출판이 되었고, 1827년 이후 점차 외경은 무시되고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외경이 영감된 정경의 일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역사적 면에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외경들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세기들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의 영적이며 철학적, 지적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제1장 신·구약 중간 시기

1. 중간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거쳐 세 왕이 통치하다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다.

- 사사시대 → 통일왕국시대 → 분열 왕국시대

○ 북왕국은 B.C. 722년 당시 세력이 크던 앗수르에 멸망하여 그 백성들은 흩어졌고, 그 후 남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

- 유다 시대 → 포로시대

○ 그 뒤 B.C. 536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인을 이끌고 유다로 귀환하였다.

- 포로 귀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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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말라기로부터 마태 사이에는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중간 시기”.

-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아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유다의 바벨론 포로와 메시아 탄생 사이의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해 주셨다.

2. 중간시대의 중요한 변화

구분 시기 중간시대 이전 중간시대 이후
정치적 변화 바사(페르시아) 통치 로마 통치
사고적 변화 동양적 사고 서양적 사고
언어적 변화 히브리어 ⇨ 헬라어 ⇨ 아람어

3. 정치적 변화

(1) 바벨론 통치 : B.C. 612~536년

○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 남왕국 유다를 정복

○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불태워 파괴, 남왕국 완전 멸망

○ 그 후 유대인들은 70년간 포로생활(B.C. 606년 최초의 정복으로부터 70년, B.C. 586년으로부터는 50년간)

- 예루살렘 성전 대신에 회당을 만들어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

회당은 나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장소가 되고(눅 4:15),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됨(행 6:9 스데반, 행 9:20 바울).

-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동안 율법을 재해석하는 서기관 그룹이 생겨남.

○ B.C. 536년 어느 날 다니엘은 바벨론 벨사살 왕의 잔치에 부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신비스러운 손에 의해 벽에 쓰인 글을 해독하였는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되었고, 바벨론 도성은 바사 군에게 함락.

(2) 바사(Persia) 통치 : B.C. 536~332년

○ 바사 왕 고레스는 B.C. 536년 유대인들에게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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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차 복귀 : B.C. 536년 스룹바벨 인도하에 42,360명 복귀

➡ B.C. 515년 예루살렘 성전 재건

② 2차 복귀 : B.C. 458년 에스라 인도하에 5,400명 복귀

➡ 율법 개혁운동

③ 3차 복귀 : B.C. 445년 느헤미야 인도 ➡ 이스라엘 성곽 재건

○ 바사 통치 중 B.C. 400년경 구약의 예언 종식, 400간의 중간기

○ 유대교의 발생

- 연혁 : 에스라의 율법 개혁운동 이후 유대교 발생

- 교리 : 모세오경을 신앙과 생활의 원리로 삼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규칙 제정

- 유대주의(Judaism)의 세 기둥

① 정경(Cannon) : 교육의 내용

② 회당(Synagogue) : 교육의 환경

③ 랍비(Rabbis) : 교육의 주체

(3) 헬라 통치 : B.C. 332~167년

○ 알렉산더 대왕은 B.C. 333년 바사의 다리오Ⅱ세를 격퇴한 후 B.C. 332년 다시 바사 군 격퇴, 바사 붕괴

○ 헬라 통치 시의 업적

- 고대 세계에 70여 개의 상업도시들을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주시켜 희랍 문화를 전파.

∙ 유대인들도 분산시켜 버림(흩어진 유대인, Diaspora)

∙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도 회당을 만들어 모여(행 13:5) 후에 바울 전도여행 시 복음전도의 거점.

- 헬라어가 고대사회에 넓게 확산되어 세계 공용어로 사용(코이네)

∙ 예수님 이후 복음의 확산 시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됨.

∙ 언어의 통일에 따라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고(70인 역),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됨으로써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

○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헬라 제국은 분열하게 되었고, 결국은 프톨레미(Ptolemy), 셀루커스(Seleucus) 두 장군에 의해 양분.

- 팔레스틴은 처음에는 애굽을 근거지로 한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리아의 다메섹을 수도로 정한 셀루커스 왕조에게 복속.

-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평화를 누렸으나, 셀루커스 왕조(수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받기 시작.

-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호와 예배를 폐하고 이방신 예배 강요

- 더욱이 제사장 ‘야손’이 황제에게 유대의 희랍화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과 돈을 들여 대제사장이 됨으로써 유대의 본격적인 희랍화 시작.

∙ 예루살렘 성전에 Zeus신상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성전 예배를 중지시켰으며 희랍 신에게 경배토록 강제

∙ 완전한 미의 조화는 육체미라고 하면서 할례 금지

∙ 안식일 금지, 성경 소지 금지

※ 성직자의 타락을 참으로 참담한 것.

- 이러한 타락에 대해서는 진리에 근거해서, 그러나 가능한 한 평온한 방법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 그러나 분명하게 시정해 나가야 한다.

- 여기에는 기도와 먼저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유다의 독립 : B.C. 167~63년

○ 이에 따라 유대에서는 헬라화 운동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핫시딤운동(Hasidim, 경건한 무리들)으로서 나중에 “바리새파”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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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모딘 지역 마카비家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와 그의 5명의 아들, 유대인 청년들은 헬라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도(이 시기를 “마카비 시대”라고도 함).

-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아 Zeus신상 없애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성전 성결 후 하나님께 봉헌

∙ 이때 성전에 촛불이 켜진 것을 기념해서 “빛의 축제라고 해서 「하누카 명절」을 지키게 됨.

∙ 이것이 신약시대의 수전절(修殿節, 요 10:22), 봉헌식의 기원

- 요나단 마카비 때 수리아와 평화조약 체결한 결과 유대의 종교적 자유 허락, 수리아는 요나단 마카비를 대제사장 및 유대 통치자로 인정

- 시므온 마카비 시절인 B.C. 142년경 정치적 독립 쟁취

○ 마카비 독립운동 뒤 3대 종파가 생겨나기 시작.

① 바리새파

-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 개혁자들을 조상으로 하여,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주력. 보수주의자.

- 희랍화에 대항하던 핫시딤의 후예로서, Pharises의 어원 자체가 “갈라진 사람들(Hellenism으로부터 갈라져 Hebraism 고수)

- 전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율법과 옛 유대의 전통, 많은 율례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

- 마카비의 독립운동에는 무관심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헌신

- 사회적 중간계층, 회당 중심

② 사두개파

- 솔로몬의 대제사장 사독(삼하 8:17)의 이름을 대제사장의 후예로 자처

- 종교적·정치적 자유주의 노선 ⇨ 헬라의 철학, 문화에 충성하고 헬레니즘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내 유대인들의 미움 자초

-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기관들의 율법해석을 불신. 바리새인들과 유대 전통에 반대

-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는 경향을 나타내, 영혼불멸과 부활 및 천사와 마귀의 존재 부인

- 대제사장 등 상류 부유층, 성전 중심(성전 의식 강조)

③ 에세네파

-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태도로 사해 서북 방면에 공동체 형성

- 주된 관심은 율법서(토라)와 종교서적의 연구, 해석

- 종말론적 사고가 팽배하여 광야생활

- 신조는 “선한 사회, 금욕, 명상, 노동, 독신생활”등

○ 시므온 마카비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죽자 정권투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수리아에 와 있던 로마 대제 폼페이우스에게 도움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유대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마에 예속

- 마카비家의 힐카누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지목하였고, 이때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에 오름.

(5) 로마 통치 : B.C. 63 ~ 신약시대

○ 로마에 의해 갈릴리 분봉왕에 오른 헤롯은 로마의 비위를 맞춰 힐카누스에 이어 결국 유대왕이 됨(B.C 37~4년).

- 예루살렘 성전 재건(헤롯 성전), 유대인의 경전과 의식 인정

- 그러나, 사마리아에 아구스도 황제 숭배 신전을 건축했고, 유다에 헬라 문화를 도입

- 이에 반발하여 열심당원 출현(현실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바리새파와 견해차를 보여 분리)

- 예수님의 탄생 당시 왕위에 있으면서 2세 이하 영아 학살 명령.

○ 로마 총독의 통치

-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왕국은 헤롯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 복음서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헤롯 안디바스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한 헤롯 대왕의 아들(세례 요한 처형,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이송 받음)

∙ 유대 ⇨ 아켈라오, 갈릴리 ⇨ 헤롯 안디바스, 북동부 ⇨ 빌립

(마 2:22) (마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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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의 아켈라오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유대 관원의 이중적 수탈정책을 벗어나기 위해 로마에 대해 직접통치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로마는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총독(눅 3:1~2)

- 많은 군사도로 건설

∙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고속도로화

○ 예수님은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시, 헤롯 대왕 지배 시 탄생

○ 그 후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66년 반란이 일어나 로마의 침공을 받고 70년에는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 성 파괴(마 24:2).

4. 복음서의 배경

(1) 유대민족의 사회적 계층

① 「왕」과 「대제사장」

○ 제사장 마카비가 유대를 회복한 이후 제사장이 왕직을 겸직하였으나, 헤롯 이후 분리

-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헤롯은 대제사장 격하 정책을 폈다.

○ 대제사장은 민중의 정신적 대표자요, 산헤드린의 의장.

- “산헤드린”은 B.C. 196년 생김. 70인의 유대 장로(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 기구. 예수님을 심문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공회.

② 부 제사장(제1급의 제사장, 왕하 25:18))

○ 정치적, 경제적 富를 누림

※ 제사장의 세 종류

1) 대제사장

2) 부 제사장

3) 일반 제사장

③ 일반 제사장

○ 특권과 혜택은 없이 의무만 담당 (7,000명 정도)

○ 24 반열에 따라 반차가 정해져 있어서, 평소에는 각자 직업에 종사하다가 절기 때마다 자기 반차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1년에 2주간씩 성전 봉사(눅 1:8, 9)

④ 서기관

○ 유대가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형성. 율법적 지식으로 대제사장과 장로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회세력으로 등장

○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 존칭은 랍비(Rabby)

○ 율법 지식이 유대인의 일상생활에 본질적 요소였기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율법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쟁으로 허비.

(2) 유대의 종파들

① 바리새파

② 사두개파

③ 에세네파

④ 서기관

⑤ 열심당 : 모세 때처럼 신정정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

헬라어 “셀롯”의 번역(눅 6:15, 12제자 중 하나인 시몬도 열심당원 출신)

로마인들에 대해 폭력까지도 사용했던 헤롯의 정적.

일명 시카리이(자객들) - 단검 소지, 불시 공격 후 도망

⑥ 헤롯당 : 유대 분봉 왕과 정부 당국을 지지하면서 헤롯가가 집권하기를 희망.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대세력으로 보아 배척(말 3:6)

(3) 사회적 배경들

○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큰 불황기

- 제국 신민의 2/3는 노예(6천만 명)

- 서민생활도 크게 빈곤

○ 관리들은 크게 부패

- 세리들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 부과, 차액을 착복

-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로부터 불공정하게 돈을 벌어들였다. 상인들을 성전에 들여 장사하게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

○ 지역적 갈등

- 팔레스타인은 세 지역으로 구분(이방, 사마리아, 유대)

-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가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 정복 후 이주정책, 혼혈 정책을 펼 때 이방인과 통혼, 혼혈인이 되어 유대인의 멸시를 받음.

하나님은 신·구약 중간기의 침묵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완전하게 준비된 세계에 임하셨다(갈 4:4, 5). 메시아를 갈망하는 정치적 상황, 예수님의 가르침의 거점이 된 회당 제도의 정착, 복음 전파를 위해 잘 닦인 도로, 전도의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린 언어의 통일, 복음을 받고자 했던 흩어진 Diaspora들. 적절한 준비는 보다 적은 시간 안에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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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기원전 1050년 사울이 이 왕이 된다. 40년 동안 통치한다. 그 뒤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제2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역시 40년 동안 통치한다. 다윗과 우리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죽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40년 동안 통치한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신구약 중간기를 제성전기로 부르는 이유는 중간기라는 명칭이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말라기로 끝이 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말라기는 재건기 중간 어디쯤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연대기적으로 분다면 구약의 끝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보다는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진 이후를 중간기의 개념으로 받는 것이 훨씬 그 시대를 정의하기에 양호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중간기보다는 ‘제2성전기’로 호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1. 헬라시대(The Greek Era)

  • B.C. 331-B.C. 143년까지의 약 190년의 시기

1) 알렉산더 시대 (B.C. 336-3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세계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곧 마케도니아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중심을 근동에서 지중해로 옮겼다.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와 인도 경계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인 BC 323년, 33세에 요절했고, 결국 그의 제국은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쿠스 왕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 원래 본거지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은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가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2) 톨레미(프톨레미) 왕조 시대(B.C. 301-200)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왕조는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위로를 셀류쿠스 왕조가 통치했고, 아래로 이집트 지역은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다. 두 왕조는 지역적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두 왕조의 야망에 의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두 왕조 사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나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기 일쑤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약 100년 동안 톨레미 왕조가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 이 시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BC 312년 톨레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시킨다. 유대인 회당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유대인 밖에 성전이 지어진다. 후에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 히브리어로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경(LXX)이 만들어진다. 70인의 학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하여 70인 역, 또는 70 인경으로 불린다. 70 인경 번역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은 가톨릭 성경 구약 외경인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있다. 식민 시민으로서 조공을 바쳤으나 제사장에 의해 유대인 고유의 통치권이 상당히 부여되었으며, 중대한 사건이 아닌 이상 유대인 자치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 시대(B.C. 198-167)

이러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서로의 땅을 넓히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5번 정도의 큰 전쟁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설류쿠스 왕조에 편입시킨다. 이것으로 팔레스타인은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초기는 톨레미 왕조에 우호적 있지만 말기에는 셀류쿠스 왕조를 돕게 된다. 그 덕분인지 셀류쿠스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인을 대했고, 적지 않은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 벌린 서머나(Smyrna)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서머나 전쟁은 로마와 한니발 장군과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이 패함으로 안티오쿠스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 여파로 타우러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금 5,000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여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 안티오쿠스는 열악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에 부치는 세금을 부과한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하던 많은 보물들까지 탈취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은 다음 통치자에게 일어난다.

안티오쿠스 3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장남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Ⅲ)를 파문시킨다. 오니아스 3세의 파문 뒤에는 시리아파(셀류커스왕조)와 이집트파(톨리미 왕조)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시리아파는 득세하게 되고 이집트 파는 위축되었다. 시리아파는 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 3세를 처리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니아스 3세를 처리해 달라고 청을 한다. 문제는 오니아스 3세는 사독 계열의 합법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오니아스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는 달랐다.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3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충동질해 오니아스 3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킨 것이다.

시리아파 지도자였던 시몬은 자신의 동생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야손은 안티오쿠스 3세와 결탁하여 예루살렘을 헬라적으로 재정비한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손은 시몬은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헬라풍의 옷을 입게 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정통 유대인들과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아론이 자손, 특히 사독의 제사장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 체계를 전복시킨 그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헬라인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기는 했지만 야손은 정통파였기에 불만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메넬라우스라는 유대인이 토비야 가문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메넬라우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헬라의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고, 정통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야손파와 메델라우스파의 그리고 정통 유대인파들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하게 된다. 소문을 전해 들은 야손과 추종들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를 거의 정복할 뻔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돕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 원정의 실패와 로마의 패창을 지켜보던 안티오쿠스 4세는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세운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했던 유대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보고 그들에게 철저히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다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직에 복귀시킨다. 자신의 군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내 가져가 버린다.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유대교 전통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

먼저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다. 심지어 토라를 찢어 불사른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게 하며, 곳곳에 우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항했고, 반항한 자들은 지체 없이 죽였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경인 마키 1서와 2서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2. 저항과 독립(B.C 162-64)

*마카비(Maccabee)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 시대 안에 있지만 독립했던 하스몬 왕조와 함께 묶는 것이 선명해 보인다.

1) 마카비(Maccabee) 혁명

순교를 당하거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 시작된 것은 예루살렘이 북서쪽에 자리한 모데인이란 마을이었다.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곳에 찾아와 이교 제사를 강요했다. 이 대 다섯 아들을 둔 마타티아스(Mattathias, 한글성경은 ‘맛다디아’로 번역, 이곳에서 마카비라는 이름이 생긴다)라는 제사장이 명령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헬라 관리와 배교자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정통을 지키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카비 혁명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세 아들인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하여 이어간다. 기원전 165년 12월 25일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정확히 성전이 더럽혀진 3년 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또는 빛의 절기로 알려진 수전절이 생겨난다.(요 10:22) 도중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망하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극한다. 나이가 어렸던 탓에 리시아스가 섭정하면서 기원전 162년 유대인들에게 절기를 자유롭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리시아스는 그것뿐 아니라 유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메넬라우스를 죽인다. 핫시딤은 정치적이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는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다메트리우스 1세가 지배하면서 아론 계열의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 상태가 된다.

유다가 죽자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셀류쿠스 제국은 이때 한참 세력다툼 중이었다. 더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가 충돌한 상태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했다. 결국 승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돌아갔고, 덕분에 요나단은 발라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2년 요나단을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만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했던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힌 그가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을 참다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키비 가문에 분노를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등지게 된다. 이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이나 시골에 내려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을 자칭하던 자기 일어나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자신을 더메트리우스 2세로 명명한다. 그는 다시 안티오쿠스 6세와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는 시시각각 세력을 확장하며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을 죽여 버린다.(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뒤를 이어 시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더메트리우스 2세에게 세금 면제와 유대인들의 독립을 요구한다. 오니아스 3세 이후 유대는 정통적인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몬은 주전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한다. 시몬을 대신해 그의 아들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된다.

2) 하스몬 왕조(B.C134-63)

‘하스몬’이란 용어는 하스몬(Hasmon)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비는 마타디아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한다. 하스몬 왕조로 불린 이유는 70여 년 동안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요한 힐카누스 1세 시절 잠시 속국이 되었지만 주전 129년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아 독립국이 된다. 힐카누스 1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선다. 팔레스타인 남부에 자리한 이두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 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것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이두메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가 큰 저항 없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점령한다. 그곳에 있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사독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 정통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친권력자들은 사두개파가 되고 율법을 경건하게 추구했던 이들은 바리새파가 되어 완전히 구분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과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경건한 핫시딤들이었으며 전통적인 신앙관과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경건한 평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바리새파는 두 가지에 반대했다. 하나는 힐카누스가 대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과 다윗이 후손이 아님에도 왕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3)가 돼서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문화를 사랑했고, 친헬라적(나중에는 로마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을 지원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가 어머니와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과 사건들은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과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격한 분노에 휩싸였고, 잠잠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는 비정통적이지만 분명히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거리끼지 않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주화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자신이 왕임을 새겨 놓았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직을 혐오하는 것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장막절에 제단에 부어야 할 전제를 땅에 의도적으로 쏟아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던 시트론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며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군대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한다.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6년이나 지속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8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아내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충고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특정한 집단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공유된 교리적 관점과 경건 습관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Salome Alexandra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는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여리고 근처에서 격퇴시킨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원전 66부터 6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이 된다. 하스몬 왕조는 갑자기 몰락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총독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의 충동질로 전쟁을 일으킨다. 힐카누스는 아라비아 통치자인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불루스는 공격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폼페이는 스카우루스(Scaurus) 장군을 보내 처리하도록 한다. 그러나 뒤로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뇌물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아리스토불루스의 음모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폼페이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해 버린다.

로마 황제 가시사의 지지와 권위를 받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미드리다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63년 미드리다테스를 다시 반격을 시도하지만 결국 패하고 자결함으로 본도(Pontus) 지방은 폼페이우스 장군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십 대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격적이고 잔인한 장군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락을 진압하는 것을 비롯해 마리우스파의 잔당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를 자청하기까지 한다. 그때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기원전 72년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67년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얻게 된다.

폼페이우스(Pompeius) 

그는 뛰어난 전술과 지휘로 3개월 만에 로마 근처의 대부분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다. 이러한 인기와 신임을 통해 폼페이우스는 최고의 절대 사령관이 되고 연장되는 해운까지 얻는다. 결국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했던 것이다. 시리아를 거쳐 곧바로 유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유다는 시리아 소속의 로마 속국이 된 것이다. 후에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자신의 군사들에게 배반당해 죽고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다. 제2성전기 문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 유대 분봉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왕’도 사라지게 되고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제 로마의 치하에서 헤롯의 가문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로마 시대(BC 63-AD135)와 헤롯 왕조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하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 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헤롯 안티파터 1세(Antipater, B.C. -45)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본디오 빌라도(A.D. 26-36)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빌립1세( -34)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1)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특이하게도 하스몬 왕조의 역사에 말기에 갑자기 이두메 사람인 헤롯 안티파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힐카누스 1세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외에 등장하지 않다 갑자기 등장하여 하스몬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두메 지역은 거의 소외되거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롯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Ⅱ세 때문에 피난중이었던 힐카누스 2세를 충동질한다. 무능하고 유약했던 헬라누스는 안티파터에게 속아 자신의 동생을 로마의 힘을 빌어 몰아낸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하스몬 왕조는 몰락하고 대신 헤롯 안티파터가 대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만다. 안티파터는 교활하고 잔인했다. 안티파터는 초기에 폼페이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즉각 카이사르(Caesar)에 충성을 바친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교활했던 그는 카이사르에게 가서 자신의 왕관을 바치고 죽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다시 그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일으켜 준다.

안티파터로 인해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입지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활용하기로 하고, 즉각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두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고 또한 과도하게 로마를 등에 업고 활개 쳤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그는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자신의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로 임명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우스(Cassius)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유대에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결국 안티파터는 43년 독살되고 만다.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2)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43- B.C. 4)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후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리암이 청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헤롯이 강제로 청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헤롯은 도리스라는 부인과 3살 된 아들 안티파스(자신의 아버지와 동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사려했다. 기원전 42년 드디어 로마의 정치 내전이 막을 내린다. 권력을 잡은 안토니(Antony)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을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분봉왕, tetrachs)로 임명한다. 이들의 중요한 임무는 로마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실패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자금 조달이었다.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한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도 자신의 왕좌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포위하였고, 붙잡혔지만 곧 자살한다. 그러나 헤롯은 가족들을 마사다 요새에 숨기고 로마로 피신한다. 로마에 달려간 헤롯은 곧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접견한다. 그들은 헤롯을 원로원에 소개했고, 원로원은 헤롯에게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B.C 40) 헤롯은 안토니가 지원한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37년에서 3년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안티고누스를 죽인다. 드디어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헤롯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손을 잡고 자신을 적지 않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겨우 붙잡은 권력도 모두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함으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만 것이다.

헤롯은 두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위기에 모면했지만 나바테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전쟁에 안토니우스를 돕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헤롯은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있던 도로스 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 헤롯 안티파터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려놓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안티파터가 아니라 헤롯 대제가 원형인 듯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안토니우스를 도운 것을 사죄하고 같이 동맹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헤롯은 교활했지만 많이 유용한 존재였다. 겉으로는 기꺼이 받아 들였고 헤롯의 충성도 진심인 것처럼 인정했다.

헤롯의 통치는 이전의 헬라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적이었다. 그러나 우월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완전한 헬라나 로마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헤롯 가문이 양가적 성향은 헤롯 안티파스 2세에서 극에 이른다. 그는 이전세대보다 더 심한 헬라화 정책을 편다. 그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다. 또한 기원전 20년 스룹바벨 성전은 보수하고 증축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헤롯 성전’으로 불렀다. 제자들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왕은 될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은 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몇 가지를 고안해 낸다. 먼저 대제사장직의 세습을 철폐하고 자신이 임명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평생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만을 할 수 있도록 기한제로 바꾸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이나 뇌물을 주는 세속적인 대제사장이 선출되게 된다. 헤롯 대제는 유난힌 건축사업에 몰두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갈릴리 해변을 정비하고 카이사랴라 명명한다. 사막의 요새인 마사다를 재정비하고, 사바스테에 있는 고대 사마리아 도시들을 등을 건축한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를 축소시키고 헬라주의자들을 중심한 왕실 고문단을 세운다. 또한 세습된 귀족신분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로 대체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어 모든 행정과 권력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극장을 세우고, 들에는 원형극장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5년을 주기로 행사를 치르게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인은 로마 황제임을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신의 자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이고 싶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헤롯의 말년은 치욕의 시간이었다. 첫 번째 아내인 미리암을 기원전 30년 경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의 장모까지 죽인다. 그의 숙부였던 요셉도 함께 처형한다.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자신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몇 명의 아들을 처형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 분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로마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대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아들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년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세 명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켈라오는 자신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뵈레아를, 빌립1세에게는 갈릴리 북쪽과 동쪽인 골란과 베타니아, 트라크노파스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단지 유언일 뿐이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누스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아들 누구도 아버지가 받았단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헤롯 대왕이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나 유아학살 사건의 장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난 것이라면 헤롯 대제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곧바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음을 암시한다. 즉 그의 죽은 사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당대의 어느 기록물에도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헤롯 대제를 원수처럼 여기는 요세푸스까지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아학살사건은 후대에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팔레스타인 통치는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에게 넘어간다.

3) 헤롯 아켈라오(B.C.23/4 – A.D. 18/6)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여러 아들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의 연줄을 찾고 대려고 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던 유대인의 대표단들도 로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두매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유대인 대표단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통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종 등장한다.(눅 19장)

아켈라오는 신약 성경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아켈라오가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로 간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소문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는 무자비하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통치지역 전반에서 그에 대한 거센 항의가 일어나고 로마에 항의서를 보낸다. 결국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 로마는 그를 직위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하여 헤롯의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왕으로 3년(기원후 41-44) 정도 통치한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남게 된다. 아켈라오는 폐위되어 갈릴리오 유폐되어 18년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신약 성경에 등장한 그 유명한 빌라도(A.D. 26-36)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된다.

4) 헤롯 안티파스(B.C. 4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요단강 서남부지역은 로마 직할이 되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들이 통치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사건은 빌라도 관할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간교한 헤롯 역시 예수를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 즉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버린다.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특히 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군기를 내려놓고 가야했다. 산헤드린 공의회도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형집행은 로마 총독에게 위임해야 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가결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을 언도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빌라도는 잔인하고 간교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항거를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으며,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릴 때 혁명자들로 의심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다.(막 15:7, 27)

안티파스는 무려 43년을 갈릴리를 통치한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여 티베리아(Tiberiras, 성경은 디베랴)로 부른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였으나 안티파스는 무척 마음에 들어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싫어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이곳에 거주하기를 싫어했고, 가까이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안티파스는 이복동생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성경은 헤로디아가 그의 친동생인 빌립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비평적으로 다루어져야할 부분이다. 다른 동생 헤로데가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의 손녀이기 때문이며, 헤롯에게 처형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친정인 다마스쿠스 왕국으로 추방된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였던 안티파스를 공격하여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 사이에 딸 살로메가 태어난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간교하면서도 권력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례요한 비판을 넘기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죽인 것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계했다. 비록 헤로디아의 간청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세례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세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활동이 알려지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막 6:14-16)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보고 싶어 했고, 결국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심심해진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눅 13:32)라 불렀다.

안티파스의 추락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소영주로 있지 말고 진정한 ‘왕’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한 두 번 간청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결국 안티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칼리쿨라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칼리쿨라의 의심을 받아 갈리아로 추방 당하고 만다.(39년)

5) 헤롯 빌립2세(Herod Phillip)

헤롯의 아들인 빌립 1세는 분봉왕이 아니다. 성경은 그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고,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으로 나온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의 다른 이름은 헤로데였고, 헬로디아가 그의 아내였을 것이다. 살로메 역시 헤롯 안티파스의 딸이기보다 빌립의 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취했으며, 빌립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형에게 주었을까? 단지 추즉에 불과하지만 안티파스와 빌립 사이에 모종의 밀의(密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립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빌립2세 역시 그다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그는 로마 황제의 초상을 화폐에 새긴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갈릴리 북쪽은 유대인들이 드물어 영향력이 많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34년에 후손도 없이 세상을 뜬다.

6)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헤롯이다.(행 12장)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머물며 칼리쿨리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칼리쿨라는 37년 그에게 필립이 다스렸던 갈릴리 북동쪽을 선물한다. 그리하여 그 지역은 다시 헤롯 가문의 수중에 들어온다. 2년 후인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근방까지 아그립바에게 주어진다.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까지 주어짐으로 다시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때의 모든 영토를 아그립바가 관활하게 된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아그립바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죽음까지 불사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41년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아그립다는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경건한 유대인처럼 대부분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만 그렇게 했을뿐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한다. 누가는 그가 연설을 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蟲)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한다.(행 12장)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지 못하고 시리아 식민지로 떨어진다.

7)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로마가 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50년 칼키스(Chalcis)지역의 왕이었지만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된다. 누이였던 베니게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바울이 가이샤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서 바울을 대면한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관할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유대인들의 미움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멸망 후 로마에 돌아가 행정관으로 살다 100년 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기 또는 제2성전기로 알려진 시기를 살펴봤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개론적인 부분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유용합니다.

중간기 이전의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 개요는 아래의 링크글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