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1월 10일(월) 누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별세(別世)하실 것(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榮光(영광) 中(중)에 나타나서 將次(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別世(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후서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별세(別世) 1841. 엑소도스(ĕxŏdŏs) ἔξοδος, ου, ἡ    Storng number 1841


1. 퇴장.  2. 탈출.  3. 떠남  
Pronunciation  [ ĕxŏdŏs ]  
Etymology  /  1537과 3598에서 유래
  •  1. 퇴장, 달아남.
    •  a.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히11:22.
    •  b. [완곡한 표현으로] 떠남, 이탈, 죽음, 눅9:31, 벧후1:15.
    •  c. 운명.
  • 관련 성경  /  별세하실 것(눅 9:31), 떠날 것, 떠남(히 11:22, 벧후 1:15).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몸으로 드러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눅 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나타나실 것(3708)은 보게 될 것을 말합니다.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Pronunciation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별세(別世. 엑소돈)하실 것이란 헬라 단어는 엑소도스라고(1841) 합니다.

구약에서의 출애굽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인생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후에는 두 가지 삶의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생(永生)
둘째는 영벌(永罰)

마태복음 25:46
저희는 永罰(영벌)에 義人(의인)들은 永生(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복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복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死) 죽을 사
부수 [歺]
(죽을사변, 4획)
모양자
歹(살 바른 뼈 알) + 匕(비수 비)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질고(2483) חֳלִי Storng number 2483

1. 병.  2. 내상. 3.  외상  
Pronunciation    [ chôlîy ] 
Etymology  / 2470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4회 사용
  •  1. 명사, 남성 병, 질병.
    •  a. 명사, 남성 내상, 신7:15, 28:61.
    •  b. 명사, 남성 외상, 사1:5
  •  2. 명사, 남성 고통, 괴로움, 근심, 슬픔, 비통, 전5:16(17).
  •  3. 명사, 남성 악, 재난, 불행, 전6:2. 
  • 관련 성경 / 질병(신7:15, 28:61, 렘6:7), 증세(왕상17:17), 병(왕하13:14, 전5:17, 호5:13), 질고(사53:3,4), 고난(렘10:19). [동] 병들다(사1:5).

육신의 몸은 죄가 없을지라도 때로는 불의한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세상의 사건과 사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몽테뉴 /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쇼펜하우에르 / 죽음은 모든 고통의 헤방이다.

셋째는 수고에서 탈출(시편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전도서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살아 있을 동안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수고를 멈추고 쉼을 얻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종류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다양한 차원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 죽음을 단지 ‘육체의 생명 종료’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영적·관계적·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여러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며, 각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결과, 그리고 궁극적인 회복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을 보다 확장하여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죽음의 상징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실제적, 육체적 죽음 (Physical Death)

정의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죽음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본문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특징

  • 전 인류 보편성: 누구도 피할 수 없음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 죄의 결과: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시간 속 존재로 전락.
  • 심판의 예고: 육신의 죽음은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선언입니다.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정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순간에 이미 시작된 죽음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특징

  •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 죄에 대한 감각의 마비: 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됨.
  • 자기중심성의 확산: 생명 대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따름.

회복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관계적 죽음 (Relation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과 왜곡을 겪는 죽음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사랑의 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독소입니다.

본문

  • 아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창세기 3:12) → 책임 회피.
  • 가인과 아벨: 형제를 살해함으로 형제 관계의 파괴 (창세기 4:8).

특징

  • 책임 회피와 비난: 관계의 단절은 신뢰와 책임의 붕괴로 이어짐.
  • 폭력과 시기, 분노: 인간관계가 생명의 통로가 아닌, 고통과 갈등의 현장으로 변함.
  • 사랑의 기능 상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능이 왜곡됨.

회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가 관계적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한일서 4:12)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에베소서 2:14) 

존재론적 죽음 (Existenti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왜곡, 공허, 허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 전도서의 흐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 아담이 숨은 장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특징

  • 존재 불안과 공허: 인간은 목적을 잃고, 인생의 의미를 상실함.
  • 자기 정체성의 붕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분을 잃고, 자기 욕망에 끌림.
  • 삶의 허무감: 모든 수고와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짐.

회복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존재 의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

정의

회개 없이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지속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본문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 “지옥에서는 그 벌이 끝이 없으며…” (마태복음 25:46)

특징

  •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끝남.
  • 의식 있는 고통: 존재는 유지되나,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는 단절됨.
  • 영원한 분리와 슬픔: 생명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음.

회복

이 죽음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약: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단절'이다

죽음의 차원  특징 회복의 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삶의 끝, 죄의 물리적 결과 부활 신앙, 영생의 소망 (고전 15장)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 죄 가운데 죽은 상태 성령 안에서 거듭남 (요 3:3, 엡 2:5)
관계적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된 신뢰, 사랑의 왜곡 화해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엡 2)
존재론적 죽음 자기 정체성과 의미 상실, 공허와 불안 창조주 안에서의 정체성 회복 (고후 5:17)
영원한 죽음 회개 없는 자에게 임하는 영원한 단절과 심판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 (요 3:16) 

결론 :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은 다양한 차원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영적·관계적·존재적 죽음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내며,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죽음을 분리로 묘사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a.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온 세상이 죽음을 겪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창세기 2:17에서, 주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죽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그는 즉각적인 영적 죽음을 경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8). 이후에,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5: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또한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0). 차이점은 아담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9). 그 후, 예수님은 사흘째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죄를 뛰어넘는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 요한계시록 1:18). 그리스도 덕분에, 사망은 패배한 적이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호세아 13:14).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의 막을 내리게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구원을 받은 자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도 진실되어 크리스천의 육체적인 죽음은 “잠” (고린도전서 15:51, 데살로니가전서 5:10)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다시는 사망이 없[을]” (요한계시록 21:4) 때를 기대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서론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첫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 동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주제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결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인류역사상 변천해 온 내용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그에 대한 태도가 변천해왔습니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

윤리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죽음의 여러 가지 의미와 인류 역사 속에서의 태도 변천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죽음의 의미

1) 생물학적 의미

죽음은 생물체의 생리적 기능이 멈추는 상태로, 생명 주기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2) 철학적 의미

철학적으로 죽음은 존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는 주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죽음이 오히려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3) 종교적 의미

죽음은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구원의 과정으로 보고, 사후 세계를 믿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윤회와

카르마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음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2. 역사적 변천

1) 고대 사회

고대 사회에서 죽음은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 왕과 귀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죽음은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되었으며, 장례 의식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2) 중세 시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이 구원의 관점에서 중시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와 구속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장례식은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3) 근대와 현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강조하며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죽음은 점차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며,

장례 문화와 의식도 변화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현대적 관점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명 연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삶의 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4. 죽음과 삶의 질

현대인들은 죽음을 단순한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질과 깊이 연결된 주제로

인식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합니다.


5. 결론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와 태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생물학적,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개인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로 바라보며, 삶의 질과

직결된 주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죽음에 대한 명언(名言) 20篇

1. "죽음은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바라지 말라."

- 존 테러 -

2. "죽음은 생명의 일부로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 -

3.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대우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살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 루이스 스타인 -

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알버트 카뮈 -

5. "죽음은 빈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6.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7. "죽음은 마치 커튼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뒤에서 삶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8. "죽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이다."

- 제임스 콜맨 -

9. "죽음은 생명의 빛깔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10.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목표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 로버트 핀크 -

11.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유이다."

- 헨리 반 다이크 -

12.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 데일 카네기 -

13. "죽음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14. "죽음은 우리가 가진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 윈스턴 처칠 -

15. "죽음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의 연결고리이다."

- 매튜 아놀드 -

16.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7.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

18.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희망에 대한 계기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19. "죽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해주며, 더 나은 버전의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도와준다."

- 마하트마 간디 -

20.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현재 순간을 귀중히 여기도록 유도한다."

- 스티브 잡스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라는 말을 통해, 죽음을 삶과 분리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과 본질적인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명언은 하루키 작품 세계의 근간이자, 그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루키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반대편으로 두지 않고,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필연적 순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지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45.

이러한 하루키의 시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죽음이라는 마지막 이정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키가 전하는 철학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

삶과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근대 철학, 현대 실존철학, 동양철학, 그리고 현대 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소크라테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이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아래 있으며, 철학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 영혼의 불멸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은 영혼이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철학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귀향이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

기독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 즉 신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삶은 일시적이며, 죽음은 참된 삶을 여는 문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데카르트: 인식 주체로서의 존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보다 사고하는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사유의 대상이며,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사고하는 한 존재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인식 가능한 '사건'이며, 주체성은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현대 실존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하이데거: 죽음은 삶의 완성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을 외면하면 삶도 피상적이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 죽음은 무의미, 의미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카뮈: 부조리와 죽음

알베르 카뮈는 인간 존재를 '부조리'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야 한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노자: 삶과 죽음은 하나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운 변화다. 

불교: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불교는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연기) 존재한다고 봅니다.
죽음 역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인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삶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 삶과 죽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 수용 과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 수용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 부정(Denial)
  2. 분노(Anger)
  3. 타협(Bargaining)
  4. 우울(Depression)
  5. 수용(Acceptance)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심리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심리학적 통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 성장의 일부이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의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는 노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적 통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음조차 삶을 빛나게 한다. 

삶과 죽음: 종합적 사유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2.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는 열쇠다.
  3.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5. 죽음의 자각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결론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합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 죽음을 성찰할 것.
  •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삶을 사랑할 것.

오늘 하루,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는 그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임종의 순간, 그는 웃었다…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문이기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의 수도자 묘지. 허성석 신부 제공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도가

①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 (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과정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② 장자: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변화하여 ( 기 )(氣)가 생기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변화하여 ( 죽음 )이 된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연결된 ( 순환 )과정으로 보며 죽음에 ( 초연 )할 것을 강조함.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기빼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이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장자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며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는 것[徒]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게 된다. -장자 (학평 제시문)

③ 장자: “사람이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 준 때를 마음 편히 여기고 운명에 ( 순응 )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 삶을 달관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도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 -장자

문상(問喪)하러 가서 대성통곡하는 것은 자연[天]의 도(道)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받아들여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장자 (학평 제시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픈 일인가? 생명이란 본래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 마치 티끌과 같고, 삶과 죽음의 이치는 밤낮의 변화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자연스런 변화를 바라보노니, 그것이 내게 왔다고 해서 어찌 싫어하겠는가. -장자 (모평 제시문)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대자연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장자 (모평 제시문)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Loyalty is like a mountain, and death is like a red hair)9

단비 2025. 7. 17. 6:06

이 속담(俗談)의 의미는 "의리는 산(山)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Righteousness is as heavy as a mountain, and death is as light as a goose's feather)는 뜻으로, 의리(義理)를 위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뤼순 감옥"(旅顺监狱)에 투옥돼 있을 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뜻은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Think about what's right when you see a profit, and if you see a country at stake, give it your life)는 글대로 국가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본명. 조성녀 趙姓女)는 아들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My son, die with honor for your country!)고 말하였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배신은 내부(內部)에서 시작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부( 外部)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다. 이것을 "내파(內破 implosion)와 외파(外破External break)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신 "최후의 성만찬"(Last Supper) 앞에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背信)을 당하셨다.

그 이름 '가롯 유다'(Garrot Judas)이다.

그는 은(銀 silver)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가롯 유다'(Garrot Judas) 가장 불명예를 남긴 역사의 죄인이요, 가장 불행한 이름, 가장 슬픈 이름을 남겼다.

첫째, , 이력(履歷)이 불명예롭다.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背信者)이다.

둘째, 유산(遺産)이 불명예롭다. 은 30냥으로 ''피의 땅 아겔다마"를 샀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이 불명예롭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自殺)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Martyr)는 못 될지언정 역적(逆賊 Rebel)을 스스로 자처했으니 그는 천추만대 부끄러운 존재로, 예수님은 그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의 불행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His bad luck is all of his own doing)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 것이다(He has sown the seeds he has sown)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Death is not a period. by 김소엽 시인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우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사 재 미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지겨운 세상, 모든 고통을 순간적으로 끝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 다. 그리고 인생사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죽지 않고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으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늘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는 것과 죽음은 정말 어감이 다릅니다. 자는 것은, 마치 쉬는 것과 같습 니다. 자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 을 때, 저들은 홀연히 죽음이 쉼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기분좋은 쉼표입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지난 날의 피로가 다 풀려, 새롭게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 럼,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쉼표’로 만들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샬롬. 2021.04.04.



죽음이 인생에게 말하는 것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 연구소
4–5 minutes

인간의 실존, 유한하고 때론 무력한 존재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실존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와 무력한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으로 인해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보다는 살아가야 함에 대한 깊은 무게와 걱정이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만인에게 공평한 조건이기도 하다.

  Gustav Klimt 18621918 Tod und Leben Death and Life 191015   1805   2005 mm    삶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이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못다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죽음과 삶', 1910/15, 캔버스에 오일, 180.5 × 200.5 cm,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

죽음 앞에서 삶을 조우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보통은 어떠한 경험보다도 강력한 삶의 역경이다. 죽음이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죽어감의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교차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역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후회는 개념적으로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불만족과 불쾌감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반추하는 경험도 한다Tomer & Eliason, 2008. 그리고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통합의 반대 개념인 절망despair으로 다가오기도 한다Erikson, 1963.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어떤 후회를 할까? 과거에 대한 후회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와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과거에 한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후회를 한다Tomer & Eliason, 1996. 예를 들어, 자신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게 되는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의 것을 더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인관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깨어진 가족관계, 용서하지 못한 타인, 단절되고 고립되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무리할 것인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큰 연관이 있다장민희, 정태연, 2018.

흥미롭게도 이러한 후회는 젊은이들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토머와 엘리아슨은 백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과거 후회할만한 일을 제시하고 어느 정도 후회하는지 평가하도록 했다Tomer & Eliason, 2005. 그 결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한 것, 친구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공통된 후회에는 돈의 축적과 같은 것이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죽음은 존재와 삶에 대한 반추를 하게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추의 힘이 과거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한 동안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어린 나이에 무턱대고 시작한 연구 주제였는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조각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큰 의미이다. 그리고 때로 내 인생의 무게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기도 한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일, 나의 여러 삶의 조건에 불만족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특히나 내 옆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머지않아 큰 후회가 될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일, 내 옆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에 반드시 깨달아야할 삶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인생에게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야할 이유와 희망을 제시하는 삶의 역설이지 않을까.mind


<참고문헌>

  • Erikson, E. H. (1963). Childhood and society (2nd ed.). New York: W. W. Norton.
  • Tomer, A. & Eliason, G. T. (1996). Toward a comprehensive model of death anxiety. Death Studies, 20, 343-365.
  • Tomer, A. & Eliason, G. T. (2005). Life regrets and death attitudes in college students. Omega, 51, 173-195.
  • Tomer, A. & Eliason, G. T. (2008). Regret and death attitudes. In A. tomer, G. T. Elisson, & P. T. P. Wong (Eds.), Existential and spiritual issues in death attitudes, (pp. 159-172). New York: Lawrence Erlbaum Associates.
  • 장민희, 정태연 (2018). 호스피스 봉사 경험이 삶과 죽음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연구, 26(2), 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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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대학원 겸임교수 사회및문화심리 Ph.D.

전 생애에 걸친 자기(Self)와 정체성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와 문화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연구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한 명칭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 해소목적. 그러나...

“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배격, 묵인, 수용해야할까?

“크리슬람“(Chrislam)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한 명칭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해소 시키고, 대화와 친교, 교류, 평화를 이루려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연합하여 예배도 드리는 운동으로 미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운동이다.


크리슬람(Chrislam)의 발단

“크리슬람“의 발단은 1980년대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에서 이다. 
나이지리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반반인 지역으로 갈등과 투쟁이 극심한 지역이다. 
“크리슬람“은 신흥종파 지도자인 틀라 텔라(Tela Tella)와 삼손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 의해 서로 다른 두 방면으로 시작된 운동이며, 성경과 쿠란을 모두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예배 시간에 성경과 쿠란을 같이 읽으며, ”하나님“과 ”알라“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짖는다.

틀라 텔라는 산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를 위한 사명을 받았고, 이 사명을 감당할 “이펠루와”(Ifeoluwa) 명칭도 지어 주셨다고 주장한다.(*“Ifeoluwa”란 “The Will of God Mission“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크리슬람(Chrislam)운동은 1999년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의해 설립되었다. 무슬림 가정에서 출생한 자칭 예언자라는 삼수딘 사카는 “알라”를 믿고 메카를 4번 순례한 “하지”(Haji)였다. 사카가 두 번째 메카 순례할 때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라”는 영감을 받고,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크리슬람”(Chrislam)을 설립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동일한 하나님이니 함께 예배드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사카는 이때부터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간의 융합과 평화 위해 일하였고,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삶의 고난과 시련에서 크리슬람이 기적과 구원으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영적인 길로 믿었고, ”크리슬람“이 아프리카, 중동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카의 집회처는 쿠란 암송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독교 찬송과 무슬림 찬양을 요란하게 부르며 성령강림 펜테고스탈 예배(Pentecostal service)를 드린다. 삼수딘 사카는 설립 때부터 “크리슬람”이라 하였고, 종교갈등을 치유하는 “허발리스트”(herbalist)라 불렸다. 틀라텔라는 자신의 아이디어인 “이펠루아”(Ifeoluwa)를 삼수딘 사카가 “크리슬람”(Chrislam)으로 도용하였다고 주장한다.

“크리슬람“ 운동, 미주로 확산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지가 2006년 1월 26일 자에 “크리슬람 운동”을 소개하며, 사카를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을 치유하는 “약초허브”(herbalist)라 소개 하였다. 사카는 미주 방송에 큐란과 성경을 사용하는 사제로 그의 설교가 전파되었고, “크리슬람 운동”이 미주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테네시 주, 코르도바의 “하트송 침례교회“(Heartsong Baptist Church), 버지니아 주의 ”올더스케이트 연합감리교회“(Aldersgate United Methodist Church) 등에서 무슬림들에게 예배장소로 교회를 개방하였고, 추수감사절 등 절기에는 이웃 무슬림들을 초청하는 축제를 열었다. ”컴버랜드 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는 교회입구 간판에 ”크리슬람“ 집회를 알리고, 아랍어와 함께 표기하여 광고하고 있다. 즉 무슬림들을 위해 ”금요예배로 모이며, 첫 크리슬람 집회처“(Friday Prayers Our Specially, Salat Al Jummah; First Chrislamic Congregation Baptisms)라고 교회 간판에 표기하고 있다.

“크리슬람”은 교회가 “크리스챤과 무슬림들을 위한 교회”로 여기고 있으며, 주일에는 목회자 가운입고 예배 인도하며, 금요일에는 교회를 개방하여 검은 스카프를 쓴 무슬림들과 예배드리고 있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모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거슬리는 용어와 표시는 사용치 않고 서로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크리슬람”, 정치권에도 등장해

릭워렌 목사는 2009년 1월 버락 오마바 대통령의 취임식 때 ”예수아, 이사(Isa), 헤수스, 그리고 지져스 이름으로 아멘“하고 기도하여 복음주의 교회들에 충격을 주고, 세계 기독교계의 주목 받고, 논란을 일으킨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 논란은 ”이사“(Isa)에서 일어났다. ”이사“(Isa)는 아랍어로 ”예수“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 축복기도에 이슬람 쿠란의 ”이사(Isa)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다. 이미 릭워렌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고 “크리슬람“(Christlam)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마바는 ”크리슬람“(Christlam)”을 이슬람과 평화 정책으로 삼아 교회와 정치사회로 퍼져 나갔다.

“크리슬람 운동”은 새들백교회의 릭워렌(Rick Warren) 목사와 크리스탈 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 방송인 잭 벤 임프(Jack Van Impe)가 선도를 이루었다. 릭워렌 목사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의 저자로, 슐러목사는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한국인들도 익히 알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라디오, TV 전파매체와 전산, 언론매체로도 파급되고 있다. 휴스톤, 아틀란타, 시애틀, 디트로이트 등 미주와 카나다로 퍼지고 있다. “크리슬람”은 종교평화운동인가? 종교혼합으로 새로운 종파인가? 정치종교운동인가? “크리슬람 운동”은 이슬람과의 평화를 이루려는 죠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 정책에도 들어있고, 오바마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기독교계와 무슬림단체, 정치사회에 이 운동을 일으키도록 참여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미국으로써는 자국에 있는 무슬림들과 평화, 친선, 교류하는 것이 정치 정책적 이슈로 등장 할 수 있으나, 과연 “크리슬람 운동”으로 이슬람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기독교계에서도 논란과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적그리스도의 영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크리슬람”운동은 오늘날 교회를 혼란시키며, 교회와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떠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부인“하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도 부인”하고 있다.

데이빗 돌린스(David Dollins)는 논설에서 명쾌하게 “크리슬람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크리스챤 포스트 2011.7.20.일자) 돌린스는 사도 요한서를 중심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밝히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며, 교회의 순결을 거짓 교훈에서 지키자고 간곡히 권하면서, “왜 우리는 초대교회 교부들과 같이 교회를 옹호하지 못하는가?” 묻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기독교 역사에서 이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제일 먼저 지적하고 배격한 분은 이슬람이 발생할 당시의 초대 교부인 다메섹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이였다. 또한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는 이단과 사이비,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 세속화 되지 않았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깨어서 굳게 성경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앙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이라 가르쳤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리라”(마24:25)

혹자는 미주에 일어나는 자연 재해와 기근, 폭풍과 폭설, 폭우, 경제 난 등이 하나님의 심판이요 재앙이라 하였다. 재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영이 뒤 흔들어 혼란과 분열, 비난, 조롱 속에 처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지키며, 옹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증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복음의 증거와 사명을 지키며, 더욱 힘써 세계선교를 향해 굽힘없이 굳게 서서 나가야 한다.(rch,盧宗海)

“크리슬람“- 적 그리스도의 영

David Dollins / 盧 宗 海 역

최근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 배격해야 되는지를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교회에서 “Islam"을 받아들이는 일이 ”성행“하며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World Net Daily(2011년 6월 24일자) 논설에서 “덴버의 파크힐 회중교회(Park Hill Congregational in Denver)에서부터 이다호 보이스의 힐뷰 연합감리교회(Hillview United Methodist in Boise, Idaho) 까지와 샌프란시스코의 제일 연합 루터란교회(First United Lutheran in San Francisco)에서 호놀루루의 성 엘리자벳 교회(St. Elizabeth's Episcopal Church in Honolulu) 까지, 수많은 교회들이 가정과 아랍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이슬람’을 존경하여 주일예배 시간에 큐란(Quran)을 읽는다고 무슬림계에 전하고 있다.”고 했다. 교회들은 공통점을 찾고 있으며, 더 나아가 성경 자체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혼합인 “크리슬람”(Chrislam)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최근 교회의 “크리슬람”(Chrislam)이다. 혹자는 “잘못이다“고 말하며, 혹자는 ”위험하다“고 한다.

적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Antichrist)은 사도 요한의 시대에 이미 출현하였다.

“아들이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또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영(SPIRIT OF ANTICHRIST)이 일어났으며, 지금 벌써 세상에 있다(EVEN NOW ALREADY IS IT IN THE WORLD)고 경고하였다.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그리스도에 반대“(against Christ)하며, ”그리스도에 반항“(opposes Christ)을 뜻한다. 어느 때나 십자가 구원의 완성을 타도하고 말살시키려고 교회로 스며드는 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십자가로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대해 무지하고, 멀어지고, 떨어지게 만드는 세력이 적그리스도의 영(a Spirit of Antichrist)이다.

사도바울이 전한 말씀을 기억하라.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딤전 4:1)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교회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인도하는 일은 미혹하는 영(seducing spirits)에 이끌리며 악마의 교리를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 요한이 가르친 적그리스도의 영을 경각심을 갖고 심각하게 살펴보자.

1. 적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Antichrist)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한다.

요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그리스도”('Christ)란 말은 히랍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Anointed One)란 뜻이며, 이는 예수를 메시아(Messiah)로써 선포하는 말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유일하고 진실한 메시아임을 거절한다. 그들은 예언자로 메시아의 유형일 수는 있으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렇다면 요한이 지적한 거짓말하는 자가 아닌가.

2. 적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Antichrist)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한다.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지적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님(Jesus)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며 거부하고 있다. 무슬림은 마흐디(Mahdi)가 장래 오실 분으로 믿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며 재림하실 분은 마흐디(Mahdi)로 에수(Jesus)는 따라올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도 요한이 지적하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닌가.

3. 적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Antichrist)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한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And every spirit that confesses not that Jesus Christ is come in the flesh is not of God: and this is that Spirit of Antichrist..."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not of God)“라 분명히 말씀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않은 영은 바울 사도에 의하면 악마의 교훈(a doctrine of devils)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부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크리스챤의 하나님(the Christian God)이지 무슬림의 하나님, 알라(the Muslim god, Allah)는 아니다. 그러면 알라는 거짓 하나님, 신이 아닌가.

4.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말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주님을 부인하며 세상 죄를 지시고 2천년 전 갈보리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여 큐란(Quran)을 읽고 있으며 이슬람으로 인도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용납하는 것은 극히 나쁜 일이다. 성경은 멸망이 이를 것을 경고하고 있다. 아 슬프다 지옥에 떨어질 영들이여.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진실한 하나님으로 다른 이는 없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담대히 무오하며 영감으로 주신 하나님 말씀인 성경(the Holy Scriptures)을 전파해야 한다. 쿠란(the Quran)이 아니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그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십자가로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믿고 증거해야 한다. 교회를 거짓 교훈에서 지키고, 교회의 순결함을 지켜야 한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단에서 진리를 옹호한 것 같이(예를들면, 폴리캅, 이레니우스 등)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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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은 무엇인가요?

크리슬람은 기독교를 이슬람교로 융화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1980년대에 나이지리아에서 시작되었고, 크리슬람 발상은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크리슬람의 핵심적인 개념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양립될 수 있는 것이고, 한 사람이 크리스천인 동시에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슬람은 그 자체가 실제적으로는 종교가 아니고, 정확히 말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차이점과 구분을 흐릿하게 하는 것입니다.

크리슬람의 지지자들은 코란에서 예수님이 25회 언급되었다는 사실, 혹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도덕과 윤리에 관하여 비슷한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 혹은 이 두 가장 큰 일신교들이 무신론과 대체 영성의 확대에 맞서 싸우기 위해 통합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지적합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크리슬람이 대부분 크리스천인 서양 그리고 대부분 이슬람교인 중동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을 위한 해결책으로 여겨집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기 때문에 크리슬람은 궁극적으로 실패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의 신격 없이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신격은 협상 불가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2).

이슬람교는 단호히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합니다. 코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신성모독이라고 선포합니다 (5:17). 그리스도의 신격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교도에게 있어서 회피하는 “오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부인합니다 (4:157-158). 크리스천 신앙의 가장 필수적인 신조가 이슬람교에서는 거부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종교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크리슬람은 크리스천 그리고 이슬람교도 모두가 거부해야 하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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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의 실상

12–16 minutes

      기독교에 퍼지는 크리슬람(Chrislam)의 실상                               2013. 11. 10

최근 세계 종교통계에 의하면 기독교가 32%이고(개신교, 카톨릭, 오순절, 신비운동, 동방교, 안식교 등 포함) 이슬람이 22%이다. 전 세계종교인(무신론포함) 중에서 과반수가 넘는 54%가 기독교와 이슬람 이다.   그러므로 거대한 두 그룹,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손잡는 것은 세계 종교통합을 앞당기는 획기적 계기가 된다.   로마 카톨릭이 그동안 WCC와 함께 "교회일치"라는 슬로건으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지만 그것은 소위 기독교 안에서의 일치운동일 뿐이다.   로마 카톨릭이 역사적으로 심한 적대관계에 있는 이슬람과의 화목이 없으면 세계적 종교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은 종교간 대화(Interfaith Dialogue)라는 명분을 내 걸고 이슬람과 접촉을 시도해 오다가 교황 바오로 2세 때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85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한 모슬렘 학교에서 행한 연설을 보면 현재 크리슬람 운동에서 주장한 핵심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과(Jehovah) 이슬람이 믿는 하나님이(Allah) 동일하므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갈등을 해소하고 희망적 미래로 나가자는 아래와 같은 취지 내용이었다.


교황 바오로 2세 -- "기독교인들과 모슬렘들에서 우리는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면서 다양한 고통의 흔적도 있지만 한편 많은 희망적 조짐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기독교인과 모슬렘들)에게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델이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모델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한 모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완전케 하시며 살아계시는 한 하나님, 우리는(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그 동일한 하나님을 믿습니다(We believe in the same God)."(Zafa Siddiqui, Pope Francis Opens a New Chapter in Catholic-Muslim Relations, StarTribune, May 23, 2013, 밑줄과 토는 편집자 삽입)


1. 교황과 기독교에 보낸 이슬람 지도자 138명의 공개서신

이슬람과 기독교의 상호 접근에 획기적 계기가 찾아왔다.   교황 베네딕트 16가 2006년 9월 12일 독일의 리젠버그(Regensburg) 대학에서 "신앙과 이성(Faith and Reason)"란 제목으로 강의하던 중 14세기의 비잔틴 황제, 마누엘 2세가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Muhammad)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했던 사안을 예로 들면서 이슬람은 "신앙을 폭력으로 전파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이슬람 세계에서 대 반발이 일어났고, 당황한 교황은 본인이 이슬람을 비난할 목적이 아니고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하였다.(en.wikipedia.org/Regensburg_lecture)   일년 후 2007년 10월 13일 이슬람 종교지도자 138명은 교황과 전 세계 기독교계 앞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평화와 정의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 평화는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이슬람의 경전과 기독교의 성경에서 견해가 일치하는 신앙, 즉 하나님 사랑(love of the One God)이웃 사랑(love of the neighbour)"이 평화와 조화의 기반이 될 수 있다면서 "우리와 당신들 사이의 공통 표어(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 라는 제목으로 로마 교황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공개서신"을 보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1985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한 모슬렘 학교에서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과 이슬람이 믿는 하나님은 동일하다고 주장한 연설이 22년 만에 이처럼 이슬람으로부터 확실한 반응이 나왔다.   교황의 말대로 이슬람의 알라신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일한 신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결국 세계 각 종교가 교리를 무시하고 서로 화합하는 세계 단일종교(One World Religion) 계획이 크리슬람(Islam + Christianity)운동을 통하여 현실화 되어가는듯 하다.

이슬람이 제시한 "공통 표어(A Common Word)"란 말의 출처

이슬람이 보낸

공개서신코란경(Quran)에서 인용한 것인데, 알라(Allah)신이 모슬렘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에게(유대교 포함) 요청하라고 명령한 구절에서 빼온 것이며, 그 문장은 아래와 같다. (Schreiner & Caneday, The Race Set Before Us)

"Say: O People of the Scripture! Come to 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 that we shall worship one but God, and that we shall ascribe no partner unto Him, and that none of us shall take others of lords beside God . . . ." (Quran 3:64)
"이르기를:   오, 성경의 백성들이여!(크리스챤과 유대인을 의미) 우리는 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고 그에게 어느 협력자도 부여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외에 다른 주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 . . 우리와 당신들 사이의 공통 표어로 옮아가자 . . . . ." (코란 3:64)



공개서신에서 이슬람 지도자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견해가 일치하는 점(common ground)을 제시하며 화평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인정하며, 아브라함이 섬겼던 동일한 유일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원칙에서 견해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Love of the One God, and Love of the neighbour)"은 바로 이슬람과 기독교가 취할 수 있는 "공통 표어(A Common Word)"가 되며 이 표제로서 양쪽이 화목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기독교의 하나님(Jehovah)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여기고 기독교인이 이슬람 사원에가서 알라에게 경배하고, 동시에 이슬람 교도들이 교회에 와서 기독교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 또는 모슬렘이 알라(Allah)와 하나님(Jehovah)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문화교류의 친목 문제가 아니라 영생과 관련된 신앙문제 이다.

2. 이슬람의 공개 서신에 대한 기독교의 공개 답장


138명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보낸 공개서신에 대해서 예일대학 신학부(Yale Divinity School) 신학자 4명이 "우리와 당신들 사이의 공통표어에 대한 크리스챤의 반응(A Christian Response to "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 라는 제목의 공개서신을 이슬람 지도자들에게 답장으로 보냈다.   내용은 이슬람측 제의를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두 종교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써 동일한 유일신 하나님에 근원을 두며, 가장 큰 계명인 1) 하나님 사랑과 2) 이웃 사랑을 양쪽이 코란경이나 복음서에서 모두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통 표어로서 서로 접근하며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평화와 조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서신은 역사적이며 용기있게 이슬람이 제안한 공통표어(A Common Word)가 공동기반(common ground)이 되어 앞으로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좀더 개방된 대화와 솔직한 협력의 길로 가게될 것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예일대학 신학부 신학자들이 이슬람에 보내는 이 공개서신에 로마 카톨릭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관들, 300명 이상이 찬성한다며 서명하였다.   그 명단에는 우리 눈에 익은 소위 개신교 보수라고 하는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참고: 오른쪽 source). http://faith.yale.edu/common-word/common-word-christian-response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처럼 크리슬람 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유행처럼 온 세계에 번지고 있는데, 참 신앙이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히12:4)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슬람과 연합의 길로 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영적 음행인가를 잊었는가?   알라는 분명히 여호와가 아니며, 기독교의 예수는 이슬람의 예수가 아니고,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는 것을 부정한다.   영이 다른데 어떻게 영적으로 이교도와 화목할 수 있는가?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요일 2:22)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일4:3)

3. 기독교인들이 크리슬람(Chrislam)에 가담할 수 없는 이유

기독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슬람의 신관

1. 이슬람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An-Nisa 4:171 (Muhsin Khan)
". . . The Messiah 'Iesa (Jesus), son of Maryam (Mary), was (no more than) a Messenger of Allah and His Word . . . Say not: "Three (trinity)!" Cease! (it is) better for you. For Allah is (the only) One Ilah (God), Glory be to Him (Far Exalted is He) above having a son. To Him belongs all that is in the heavens and all that is in the earth. And Allah is All-Sufficient as a Disposer of affairs.
안-니사(코란) 4:171
"마리아의 아들 메시야 예수는 단지 알라신의 메신저에 불과하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 . . . "삼위"를 말하지 말라! (Three: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 . . . . 알라(Allah)는 유일한 단일 신이시다.(삼위일체가 아님) . . .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은 알라에게 속하며 그는 만사를 지배하는 전능자시다."

Al-Maidah 5:73 (Yusuf Ali)
"They do blaspheme who say: Allah is one of three in a Trinity: for there is no god except One Allah. If they desist not from their word (of blasphemy), verily a grievous penalty will befall the blasphemers among them"
알-마이다(코란) 5:73
"알라가 삼위일체 중 한 분이라고 하는 자는 신성 모독자니라. 이유는 한 분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기 때문이라.(성자, 성령은 하나님이 아님) 그런 말을 중단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라"



참 신앙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속성을 바르게 알고 믿는 신앙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신관이 중요하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세 분이 인격체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과 권능과 영광을 동등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증거한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체가 존재한다(three-in-oneness)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해명할 수 없는 삼위일체를 증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슬람의 코란경은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자에게 신성모독죄로 정죄하고 극형에 처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하나님(Jehovah)과 이슬람의 알라(Allah)는 동일한 하나님이 아님을 명백하게 입증해 주는 것이다.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과 함께 종교적 명분으로 손을 잡을 수 있겠는가?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고전 10:19-21)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딤전 4:1)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 4:1)

2.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 죽으심을 부인한다


Al-Maidah 5:17 (Yusuf Ali)
"In blasphemy indeed are those that say that God is Christ the son of Mary. Say: "Who then hath the least power against God . . . ."
알-마이다(코란) 5:17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참으로 신성모독하는 것이다. . . ." (모슬렘도 유대인들처럼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한다)

An-Nisa 4:157-158 (Muhsin Khan)
"And because of their saying (in boast), "We killed Messiah 'Iesa (Jesus), son of Maryam (Mary), the Messenger of Allah," - but they killed him not, nor crucified him, but the resemblance of 'Iesa (Jesus) was put over another man (and they killed that man), and those who differ therein are full of doubts. They have no (certain) knowledge, they follow nothing but conjecture. For surely; they killed him not [i.e. 'Iesa (Jesus), son of Maryam (Mary) ]: But Allah raised him ['Iesa (Jesus)] up (with his body and soul) unto Himself (and he is in the heavens). And Allah is Ever All-Powerful, All-Wise"
안-니사(코란) 4:157-158
"'우리가 마리아의 아들이며 알라의 메신저인 메시야 예수를 죽였노라'고 그들이 떠벌리지만 (눅24:20의 내용인듯) 사실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예수 비슷하게 잡혀 죽은 것이며. . . . 그들은 확실히 알지못하고 억측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단연코 그들이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알라(Allah)는 예수를 부활시켜 천상으로 올리셨다. 알라는 언제나 전능하고 전지하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영생의 소망을 위하여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속주가 되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죄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처럼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가는 약속을 받는다.   이슬람교와 그들의 코란경은 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코란경에서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요, 중보자도 아니요, 다만 모세, 이사야, 마호메드 같은 선지자에 불과하다.   이슬람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equal with God)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심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
     이니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3. 이슬람은 기독교와 화합할 수 없는 철저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은 일신론(Monotheism)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다신론(Polytheism)종교라고 주장한다


Al-Baqarah 2:135 (Muhsin Khan)
". . . Nay, (We follow) only the religion of Ibrahim (Abraham), Hanifa [Islamic Monotheism, i.e. to worship none but Allah (Alone)], and he was not of Al-Mushrikun (those who worshipped others along with Allah)." "
알-바카라(코란) 2:135
"우리는 오직 알라만 경배하는 아브라함의 종교, 즉 이슬람 일신교만을 따른다" (이슬람은 기독교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다신교 취급) Ali Imran 3:95 (Muhsin Khan)
"Say (O Muhammad SAW): "Allah has spoken the truth; follow the religion of Ibrahim (Abraham) Hanifa (Islamic Monotheism, i.e. he used to worship Allah Alone), and he was not of Al-Mushrikun."
알리 임란(코란) 3:95
"알라는 일신론 종교를 따르라는 진실을 말씀하셨고 그는 다신론 종교의 신이 아니다." (알라는 삼위일체를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님을 선포함)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투쟁의 대상이며, 지옥 형벌의 대상이다


At-Taubah 9:29 (Muhsin Khan)
"Fight against those who (1) believe not in Allah, (2) nor in the Last Day, (3) nor forbid that which has been forbidden by Allah and His Messenger (4) and those who acknowledge not the religion of truth (i.e. Islam) among the people of the Scripture (Jews and Christians), until they pay the Jizyah with willing submission, and feel themselves subdued"
애트-타우바(코란) 9:29
"알라신을 믿지 않는 자들, 알라의 금지사항에 방해하는 자들, 그리고 크리스챤 가운데서 이슬람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 굴복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     (종교문제에 있어서 이슬람은 절대로 기독교에 양보하지 않는다) Al-Baiyyinah 98:6 (Muhsin Khan)
"Verily, those who disbelieve (in the religion of Islam, the Quran and Prophet Muhammad (Peace be upon him)) from among the people of the Scripture (Jews and Christians) and Al-Mushrikun will abide in the Fire of Hell. They are the worst of creatures"
알 바이나(코란) 98:6
"진실로, 유대인이나 크리스챤 중에서 그리고 이슬람의 일신교를 믿지 않는 자들(Al-Mushrikun)은 지옥불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들은 피조물 중 가장 악하다." (그래서 모슬렘은 크리스챤에게 잔인하다) Al-Baqarah 2:193 (Yusuf Ali)
"And fight them on until there is no more Tumult or oppression, and (until) there prevail justice and faith in Allah . . . ."
유섭 알리(코란) 3:12
"소란과 압박이 사라질 때까지, 알라의 정의와 신앙이 승리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 . . . " (이슬람은 기독교에 추호도 양보하지 않는다) Yusuf Ali 3:12 (Muhsin Khan)
"Say to those who reject Faith: "Soon will ye be vanquished and gathered together to Hell,-an evil bed indeed (to lie on)!"
유섭 알리(코란) 3:12
"(이슬람)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모두 곧 지옥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라고 일러주어라 . . . "



4. 이슬람은 교리상으로 크리슬람(이슬람+기독교)을 준비하고 있었다



Ali Imran 3:55 (Yusuf Ali)
"Behold! Allah said: "O Jesus! I will take thee (WAFAT:  I shall cause you to die) and raise thee to Myself and clear thee (of the falsehoods) of those who blaspheme; I will make those who follow thee superior to those who reject faith, to the Day of Resurrection . . . ."
알리 임란(코란) 3:55
"보라!   알라가 이르기를, 오 예수여, 내가 너를 죽게 하겠고 내 앞으로 다시 살리리라 . . .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던 알라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 Al-Maidah 5:72 (Yusuf Ali)
"They do blaspheme who say: 'Allah is Christ the son of Mary.' But said Christ: 'O Children of Israel! worship Allah,
my Lord and your Lord
' . . . ."
알 마이다(코란) 5:72
"그리스도가 말하기를 '오 이스라엘 자녀들아 나의 주요 너희 주가 되시는 알라를 섬기라' 하였으니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라' 라고 하는 자는 신성 모독자니라. " (그리스도인이 크리슬람에 동참하면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대로 알라신께 경배해야 한다는 뜻) An-Nisa 4:172 (Yusuf Ali)
"Christ disdaineth nor to serve and worship Allah, nor do the angels, those nearest (to Allah): those who disdain His worship and are arrogant,-He will gather them all together unto Himself to (answer)"
안 니사(코란) 4:172
"그리스도는 알라(Allah)를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멸시하지 않는다 . . . ." (그리스도인 명칭 그대로 가지고 알라신을 섬기는 것도 괜찮다. 그래서 크리슬람 O.K.)



이상과 같은 이슬람의 코란경을 살펴 볼 때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서로 종교적으로 화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기독교측에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이슬람은 절대로 자신들의 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은 명백하다.   기독교인들이 그들과 교류하며 협력체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동화될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엘리야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라고 외쳤다(왕상18:21).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양다리(Christianity + Islam = Chrislam) 걸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크리슬람(Chrislam)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분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만일 크리슬람 문화에 참여하면 하나님이 더럽게 보시고 분노하신다(사19:13).   하나님의 경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 .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동시에) 말감(암몬의 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 . . . 멸절하리라" (습1:5-6).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개신교 지도자들이 로마 카톨릭과 함께 이슬람교와 손잡고 화합하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   그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영적 분별을 하지 못하고 미혹되어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로 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배도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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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 릭 워렌이 구상한 WEA 서울 총회

2025. 10. 31. 8:59

>> [특별기고] 2025년 WEA 서울 총회 배교의 집회다

1. 서울총회 배교집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WEA(세계복음주의연맹) 서울총회는 릭 워렌(Richard Duane Warren, 1954-)의 FTT와 함께 하며, 릭 워렌은 크리슬람(Chrislam) 운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FTT란 릭 워렌 목사가 대표를 맡고 있는 “남은과업 성취운동”(Finishing the Task Coalition)의 약자다. 릭 워렌의 2033 FTT는 2033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자는 목표를 가진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FTT) 운동이다. 2025년 WEA 서울 총회가 릭 워렌의 FTT와 크리슬람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배교집회다.

2. 릭워렌의 2033 FTT는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릭 워렌의 2033 FTT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과 하나가 되는 것은 배교다. 많은 사람이 ‘WEA 서울 총회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단순히 ‘선교대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2025년 WEA 서울 총회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사랑의 교회에서 열리는 WEA 14차 서울 총회는 이전의 그 어떤 WEA 총회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2025년 WEA 서울총회는 단순한 선교대회가 아니다. WEA는 릭 워렌과 함께 2033 대위임령을 진행하고 있다. 2033 대위임령은 릭 워렌이 주도하는 Finishing the Task, “남은과업완수”라는 FTT다. 2025년 WEA 서울 총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도상에 있다.

3. WEA(세계복음주의연맹)과 릭 워렌의 2033 FTT

WEA(세계복음주의연맹) 홈페이지에 가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Celebrate 2033

2,000 years of celebrating Jesus coming: For 2,000 years, the Gospel witness of Jesus has transformed human lives, altered societies and stood the test of time. In today’s chaotic age, it surprises many that the Gospel witness is attracting younger generations, churches are planted and ministries—ranging from public witness to justice concerns, to societal transformation—are springing up.

“2033년을 축하합니다. 예수님 오심을 기념하며 2,000년을 보내며: 2,000년 동안 예수님의 복음 증거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시간의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혼돈스러운 시대에도 복음 증거가 젊은 세대를 사로잡고, 교회가 개척되고, 공적 증거부터 정의 구현, 사회 변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역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Celebrate 2033 https://worldea.org/celebrate-2033/)

WEA(세계복음주의연맹)의 이런 분명한 의사 표시는 릭워렌의 2033 FTT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한다. 2025년 WEA 서울총회는 단순한 선교대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되는 배교의 수단이라는 것을 증거 한다. WEA 서울총회 홈페이지에도 “2025 WEA 서울총회 모든 이에게 복음을 2033을 향하여”라고 표어 자체가 2033을 향하고 있다.

4. 로마 가톨릭과 릭 워렌의 2033 FTT

로마 가톨릭도 릭 워렌과 함께 FTT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 방송(EWTN VATICAN)은 릭 워렌은 로마 가톨릭 방송(ETWN)과 교회일치와 관련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을 지금도 게재하고 있다.

EWTN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글로벌 2033은 가톨릭 교회 내 여러 단체와 운동, 교구, 그리고 여러 단체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연합한 단체입니다. 바로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고, 대명령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EWTN 바티칸 지국장 안드레아스 톤하우저는 릭 워렌이 말하는 2033을 말하면서 로마 가톨릭도 릭워렌이 말하는 FTT 2033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5. 사랑의 교회와 릭 워렌의 2033 FTT

놀랍게도 사랑의 교회는 FTT를 지원하고 함께 동역해 왔다. 릭 워렌은 “사랑의 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연합체인 Finishing the Task와 동역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사랑의 교회는 2024 글로벌 리더 특별 사경회(29일 주일 2부 예배)에서 릭 워렌이 “사명성취란 무엇인가?”(What is Finishing the Task?)를 말했다.

사랑의 교회는 2025년 “제4회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WEA 서울 총회와 함께 연합행사로 진행했다. 주요한 4명의 강사 가운데 한 사람이 릭 워렌이었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오정현 목사의 2033은 릭 워렌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의교회는 릭 워렌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가?

6. 릭 워렌과 크리슬람(Chrislam)

릭 워렌 2033 FTT는 2033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2,000주년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놀랍고 심각한 것은, 릭 워렌이 크리슬람 운동가라는 사실이다. 릭 워렌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한다.

7. 결론

WEA(세계복음주의연맹)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25년 WEA 14차 총회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되는 2033 FTT로 가고 있고 더 나아가 크리슬람으로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2025년 WEA 서울총회는 배교집회다. WEA는 거룩한 방파제가 아니라 WEA는 배교의 축제다. 이런 배교집회에 참석하는 목사들은 배교의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시라는 것을 믿는 목사라면 WEA 배교집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분별의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 마녀들의 축제인 할로윈 데이를 끼고 각기 전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기 위해 주요 회의가 경주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경주 APEC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권역별로 통합하여 새로운 세계의 정치 질서(New World Political Order)를 세우기 위한 모임이라면, 지난 27일부터 오늘(31)까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WEA(세계 복음주의 연맹) 총회는 WCC 총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의 종교 질서(New World Religion Order), 다시 말해 종교통합을 이루기 위한 모임인 것이다.

“복음주의 연맹”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WEA 회장인 굿윌 샤나는 자칭 사도로 신사도 운동의 대표 Empowered21 협의회에 소속되어 있고 WCC의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여 하나의 절대적 종교 진리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고, 최근엔 WEA 모임 자체가 (WCC와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과 연대하는 종교 통합의 길을 가고 있다.

관련글>> WEA 총회 오정현 목사와 이영훈 목사는 배도의 길을 가려는가

WEA의 주요 어젠더가 종교통합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위에 소개한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서울 총회에 Chrislam 운동을 벌이며, 2033년까지 개신교와 카톨릭을 통합하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FTT, Finishing the Task) 애쓰고 있는 릭워렌을 강사로 내세운 것인데, 예전부터 릭 워렌과의 친분을 과시하던 오정현 목사는 이번 WEA 서울 총회를 '2033년까지 개신교와 카톨릭을 통합한다는 사명' 다시 말해 '2033 FTT(Finishing the Task)'를 완수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기획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릭 워런 목사, '2025 WEA 서울 총회'에서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렇듯 종교통합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이 배도의 모임을 한국 교회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이영훈, 오정현, 김장환 목사가 공동위원장이 되어 개최하고 있는 것인데, 이들 가운데 이영훈, 김장환 목사는 채해병 사건(임성근 구명 로비 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인물들인지라, 이번 WEA 총회를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또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관련기사>> "와 멋있다"…'91세' 김장환 목사, 1분 40초로 충분했다 '존재감 甲' (2025 WEA 서울총회)

"와 멋있다"…'91세' 김장환 목사, 1분 40초로 충분했다 '존재감 甲' (2025 WEA 서울총회), 낯 뜨거운 기사 제목과 함께 최근 자신이 세운 학교에 자신의 흉상을 세우고, 임성근 구명 로비로 조사를 받고 있는 김장환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여하튼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교회들이 연합하여 종교통합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개최하고 있는 WEA 서울총회는 이미 배도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큰 배도의 물결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죽음의 바다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말씀으로 깨어 시대를 분별하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시편 101편 3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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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Chrislam) 공식 단일 세계 종교가 되다..............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2–3 minutes

이번 주 프란치스코 교황과 모하메드 빈 자예드(Mohamed bin Zayed)가 작성한 제7차

세계종교대회(World Religions Congress of the Human Fraternity) 문서가 채택되면서 크리스람(Chrislam)은 이제 공식 단일 세계 종교가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Chrislam은 제7차 세계 및 전통 종교 지도자 대회의 승인을 받아 성문화되고 비준되었습니다.

이 문서 는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작성 하고 UAE의 모하메드 빈 자예드( Mohamed bin Zayed )가 자금을 지원하고 촉진했습니다 .

질문 – 축제에 초대하는 것을 잊은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보세요. 

답 –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언급된 적도 없습니다 . 

그렇다면 '귀한 손님'은 누구일지 궁금하다. 흠.

“그들이 말하기를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그들에게 이르리니 , 마치 잉태된 여자의 해산과 같으니라. 그들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3 (KJB)

일부 사람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이 은퇴 하는지 , 아니면 그가 성경적 적그리스도가 될 것인지 여부는 현시점에서 다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Chrislam 의 One World Religion이 작동할 정치적, 종교적, 재정적 기능적 틀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그가 창조한 것은 야곱의 고난의 때까지 계속될 것 입니다. 

물론 이 모든 예언적 성취는 그의 매우 관대한 후원자이자 후원자인 모하메드 빈 자예드 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는 “언약의 군왕”입니까? 시간이 말해줄 것이지만, man oh man, 이것은 거인 이다 ( 말장난 의도 )) 앞으로 단계. 

우리는 지난 13년 동안 Chrislam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제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비행 준비가 되셨 습니까 ?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인간형제회 문서를 채택하다

에미레이트 뉴스에서: 세계 종교 지도자들은 오늘 알 아즈하르의 대이맘이자 이슬람 장로회의 의장인 아흐메드 엘-타이예브 박사와 가톨릭 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명한 인간 형제애 문서를 채택했습니다.

이것은 2019년 아부다비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목요일에 폐막한 제7차 세계 및 전통 종교 지도자 대회에서 나왔습니다.

제7차 세계 종교 대회의 주요 내용:

108명이 넘는 종교 지도자와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대회 의 폐회식 에서는 인간형제회 문서가 사람들 사이의 평화, 대화 및 상호 존중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면서 인간형제회 문서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9월 14일과 15일 카자흐스탄 수도 누르술탄에서 “팬데믹 이후 인간 문명의 정신적, 사회적 발전에 있어서 세계 및 전통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이 행사는 Kassym-Jomart Tokayev 카자흐스탄 대통령, Ahmed el-Tayyeb 박사 및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석했습니다. 더 읽어보기

이것은 하나의 세계 종교의 Chrislam입니다.

병아리 관이 생겼을 때의 모습 을 보려면 클릭하십시오 . 

당신이 로마 카톨릭 신자라면 24:00 분을 클릭하여 당신의 교황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연설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 카톨릭을 가짜 기독교라고 말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https://www.nowtheendbegins.com/7th-congress-of-leaders-of-world-religions-adopt-human-fraternity-chrislam-document-pope-francis-mohamed-bin-zayed/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51&wr_id=251 

https://vigilantcitizen.com/sinistersites/sinister-sites-astana-khazakhstan/

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배격, 묵인, 수용해야할까?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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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오상훈선교사의 뷰)

맘사라
5–7 minutes

당당뉴스. 기사승인 2011.07.23  22:33:06

-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한 명칭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 해소목적. 그러나...

 

 

“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배격, 묵인, 수용해야할까?

“크리슬람“(Chrislam)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한 명칭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해소 시키고, 대화와 친교, 교류, 평화를 이루려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연합하여 예배도 드리는 운동으로 미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운동이다.

   


크리슬람(Chrislam)의 발단

“크리슬람“의 발단은 1980년대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에서 이다. 나이지리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반반인 지역으로 갈등과 투쟁이 극심한 지역이다. “크리슬람“은 신흥종파 지도자인 틀라 텔라(Tela Tella)와 삼손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 의해 서로 다른 두 방면으로 시작된 운동이며, 성경과 쿠란을 모두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예배 시간에 성경과 쿠란을 같이 읽으며, ”하나님“과 ”알라“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짖는다. 

틀라 텔라는 산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를 위한 사명을 받았고, 이 사명을 감당할 “이펠루와”(Ifeoluwa) 명칭도 지어 주셨다고 주장한다.(*“Ifeoluwa”란 “The Will of God Mission“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크리슬람(Chrislam)운동은 1999년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의해 설립되었다. 무슬림 가정에서 출생한 자칭 예언자라는 삼수딘 사카는 “알라”를 믿고 메카를 4번 순례한 “하지”(Haji)였다. 사카가 두 번째 메카 순례할 때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라”는 영감을 받고,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크리슬람”(Chrislam)을 설립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동일한 하나님이니 함께 예배드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사카는 이때부터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간의 융합과 평화 위해 일하였고,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삶의 고난과 시련에서 크리슬람이 기적과 구원으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영적인 길로 믿었고, ”크리슬람“이 아프리카, 중동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카의 집회처는 쿠란 암송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독교 찬송과 무슬림 찬양을 요란하게 부르며 성령강림 펜테고스탈 예배(Pentecostal service)를 드린다. 삼수딘 사카는 설립 때부터 “크리슬람”이라 하였고, 종교갈등을 치유하는 “허발리스트”(herbalist)라 불렸다. 틀라텔라는 자신의 아이디어인 “이펠루아”(Ifeoluwa)를 삼수딘 사카가 “크리슬람”(Chrislam)으로 도용하였다고 주장한다.

   

“크리슬람“ 운동, 미주로 확산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지가 2006년 1월 26일 자에 “크리슬람 운동”을 소개하며, 사카를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을 치유하는 “약초허브”(herbalist)라 소개 하였다. 사카는 미주 방송에 큐란과 성경을 사용하는 사제로 그의 설교가 전파되었고, “크리슬람 운동”이 미주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테네시 주, 코르도바의 “하트송 침례교회“(Heartsong Baptist Church), 버지니아 주의 ”올더스케이트 연합감리교회“(Aldersgate United Methodist Church) 등에서 무슬림들에게 예배장소로 교회를 개방하였고, 추수감사절 등 절기에는 이웃 무슬림들을 초청하는 축제를 열었다. ”컴버랜드 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는 교회입구 간판에 ”크리슬람“ 집회를 알리고, 아랍어와 함께 표기하여 광고하고 있다. 즉 무슬림들을 위해 ”금요예배로 모이며, 첫 크리슬람 집회처“(Friday Prayers Our Specially, Salat Al Jummah; First Chrislamic Congregation Baptisms)라고 교회 간판에 표기하고 있다. 

“크리슬람”은 교회가 “크리스챤과 무슬림들을 위한 교회”로 여기고 있으며, 주일에는 목회자 가운입고 예배 인도하며, 금요일에는 교회를 개방하여 검은 스카프를 쓴 무슬림들과 예배드리고 있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모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거슬리는 용어와 표시는 사용치 않고 서로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크리슬람”, 정치권에도 등장해 

릭워렌 목사는 2009년 1월 버락 오마바 대통령의 취임식 때 ”예수아, 이사(Isa), 헤수스, 그리고 지져스 이름으로 아멘“하고 기도하여 복음주의 교회들에 충격을 주고, 세계 기독교계의 주목 받고, 논란을 일으킨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 논란은 ”이사“(Isa)에서 일어났다. ”이사“(Isa)는 아랍어로 ”예수“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 축복기도에 이슬람 쿠란의 ”이사(Isa)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다. 이미 릭워렌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고 “크리슬람“(Christlam)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마바는 ”크리슬람“(Christlam)”을 이슬람과 평화 정책으로 삼아 교회와 정치사회로 퍼져 나갔다. 

“크리슬람 운동”은 새들백교회의 릭워렌(Rick Warren) 목사와 크리스탈 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 방송인 잭 벤 임프(Jack Van Impe)가 선도를 이루었다. 릭워렌 목사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의 저자로, 슐러목사는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한국인들도 익히 알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라디오, TV 전파매체와 전산, 언론매체로도 파급되고 있다. 휴스톤, 아틀란타, 시애틀, 디트로이트 등 미주와 카나다로 퍼지고 있다. “크리슬람”은 종교평화운동인가? 종교혼합으로 새로운 종파인가? 정치종교운동인가? “크리슬람 운동”은 이슬람과의 평화를 이루려는 죠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 정책에도 들어있고, 오바마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기독교계와 무슬림단체, 정치사회에 이 운동을 일으키도록 참여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미국으로써는 자국에 있는 무슬림들과 평화, 친선, 교류하는 것이 정치 정책적 이슈로 등장 할 수 있으나, 과연 “크리슬람 운동”으로 이슬람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기독교계에서도 논란과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적그리스도의 영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크리슬람”운동은 오늘날 교회를 혼란시키며, 교회와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떠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부인“하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도 부인”하고 있다. 

데이빗 돌린스(David Dollins)는 논설에서 명쾌하게 “크리슬람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크리스챤 포스트 2011.7.20.일자) 돌린스는 사도 요한서를 중심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밝히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며, 교회의 순결을 거짓 교훈에서 지키자고 간곡히 권하면서, “왜 우리는 초대교회 교부들과 같이 교회를 옹호하지 못하는가?” 묻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기독교 역사에서 이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제일 먼저 지적하고 배격한 분은 이슬람이 발생할 당시의 초대 교부인 다메섹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이였다. 또한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는 이단과 사이비,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 세속화 되지 않았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깨어서 굳게 성경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앙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이라 가르쳤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리라”(마24:25) 

혹자는 미주에 일어나는 자연 재해와 기근, 폭풍과 폭설, 폭우, 경제 난 등이 하나님의 심판이요 재앙이라 하였다. 재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영이 뒤 흔들어 혼란과 분열, 비난, 조롱 속에 처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지키며, 옹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증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복음의 증거와 사명을 지키며, 더욱 힘써 세계선교를 향해 굽힘없이 굳게 서서 나가야 한다.












영생(永生)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단순히 끝없는 세월의 연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쓰이는 일반적인 신약 단어는 아이오노스이며, 이는 질과 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영생은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제로 “햇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현재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영생이 신자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이 생명이 “있고”(현재시제)라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동사는 헬라어에서도 현재형입니다). 
요한복음 5:24과 요한복음 6:47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재형 구조가 발견됩니다. 
영생의 초점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7:3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성자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합니다.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6; 14:9).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3).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0-11).

새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것을 봅니다.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에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해 생명 나무에게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24).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생명 나무에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29).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주신 구세주를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로마서 10:9-10).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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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은 단지 죽음 후에 얻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3. 현재와 미래의 영생

영생은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5:24). 
동시에,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21:3-4).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말하며, 이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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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무엇일까? 영생의 의미와, 그것을 얻는 방법 [요한복음]

영생(永生)이란 길 영(永), 살다 생(生)으로 생명의 영원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요한복음 10:10). 
성경 곳곳에는 영생 얻길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하고 애타하신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3:15, 4:14, 6:27, 47, 51, 54, 58).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인생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려고 하셨을까?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은 눈물, 슬픔, 아픔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사람은 10년을 살든지 100년을 살든지 결국에는 사망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 
모든 인류가 사망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로마서 5:12, 6:23). 
죄가 없는 천국에 죄가 있는 존재가 들어갈 수는 없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와 사망을 없애는 진리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이 생명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알려주셨다. 그것은 무엇일까?

영생하시는 예수님과 영생 주는 양식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요한복음 3:36, 5:24, 17:3). 다시 말해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자들이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가 하신 말씀도 믿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요한복음 6:26~27)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근본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요한복음 1:1~3, 14). 영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인생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빌립보서 2:5~7).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인류가 먹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 양식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 양식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한복음 6:32, 35, 47~48, 51)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는가?” 하며 수군거리고 다투었다(요한복음 6:41, 5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한복음 6:36).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53~5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장애물로 여긴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요한복음 6:61, 66). 당시 한 공간에는 열두 제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들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는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요한복음 6:67~68).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믿었다.

인류가 먹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어떻게 제자들에게 먹이셨을까?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내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 떼어 ··· 이것은 ··· 내 몸이라 ··· 이 잔(포도주)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15, 19~20)

예수님은 실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치신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었다. 즉 새 언약으로 세워주신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라는 말씀이었다(마태복음 26:19, 26~28, 마가복음 14:16, 22~24).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신 이후 약 5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고린도전서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즉 세상 끝날까지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다(고린도전서 11:23~26).

영생의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

한국선교연구원 2021년 1월호에 따르면, 전 세계 약 78억 인구 중 32.3%인 25억 4,557만여 명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 난립한 교회들 가운데 영생의 진리인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전하는 교회는 어디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새 언약의 유월절은 베드로, 요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초대교회에서 지켜졌으나, 교회가 세속화하면서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폐지됐다. 오늘날 새 언약 유월절을 회복해 성경 원형대로 지키는 곳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월간조선, 2023. 4. 5.)

하나님의 교회는 한국을 포함해 175개국 7500여 교회 330만 신자 규모의 글로벌 교회다. ··· 예수 그리스도는 ···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고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담아 ‘인류를 위한 새 언약’을 세웠다. ··· 현재 성경대로 새 언약 유월절을 준행하는 곳은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동아일보, 2022. 3. 18.)

성경에 등장하는 절기인 새 언약 유월절을 오늘날 대다수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사에 의하면,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주재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유월절이 폐지되었다(간추린 교회사, 세종문화사 참조). 이후 종교암흑시대를 거쳐 1,600년 넘는 세월 동안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없었다. 현재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하다. 하나님의 교회 설립자 안상홍님께서 영생이 약속된 유월절을 다시 찾아 주셨기 때문이다(주간종교신문, 1981. 3. 18. 참조).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그리스도는 우리가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원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치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야만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28).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죄가 있다(요한1서 1:8~10).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진리인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여 천국에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한 자들이 가게 될 천국은 어떤 곳일까? 성경은 천국을 가리켜 날마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잠언 8:29~30), 다시는 사망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곳(요한계시록 21:4), 영원히 왕처럼 사는 곳(요한계시록 22:5), 영원한 영화를 누리는 곳이라고 하였다(다니엘 7:18).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황홀하고 아름다운 미래, 천국은 이 땅에서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요한1서 2:25). 영생을 약속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열려있다. 영생의 진리인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찾으면 된다. 그 교회는 당신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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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대한 성경구절

영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영생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영생은 단순히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생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영생

영생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말씀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믿음은 영생을 받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귀한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

영생은 단순히 끝없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곳이며, 영생을 얻은 자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가기

영생을 얻은 자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더라도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믿음 안에서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후서 4:17-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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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밝히는 영생의 의미와 얻는 방법


성경에 기초하여 영생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며, 그 본질과 얻는 방법에 대해 증거합니다. 오직 성경 구절만을 근거로 설명하며, 외부 정보나 해석은 일절 배제합니다.

1. 관련된 주요 성경 구절 목록

* 요한복음 3:16

* 요한복음 5:24

* 요한복음 6:40

* 요한복음 6:47

* 요한복음 17:3

* 로마서 6:23

* 요한일서 5:11-13

2. 성경 구절에 근거한 단계별 설명

위의 성경 구절들을 통해 영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영생의 본질 (요한복음 17:3):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무엇인지 직접 정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넘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 영생의 기원 (로마서 6:23, 요한일서 5:11):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영생이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사망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일서 5장 11절은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라고 말씀하여, 영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 영생을 얻는 방법 (요한복음 3:16, 5:24, 6:40, 6:47, 요한일서 5:12-13):

*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영생을 얻는 방법이 하나님의 독생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 요한복음 5장 24절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 요한복음 6장 40절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 요한복음 6장 47절은 더욱 간결하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말씀하며, '믿는 자'가 이미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합니다.

* 요한일서 5장 12절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는 것'과 영생을 가지는 것을 연결합니다. 13절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을 통해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이끌어 줍니다.

3. 성경적 맥락에 근거한 요약

성경은 영생을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복음 17:3)으로 정의합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선물(로마서 6:23, 요한일서 5:11)입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며(요한복음 3:16, 6:4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요한복음 5:24)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는 것이 곧 영생을 가지는 것이며(요한일서 5:12), 아들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영생을 가졌음을 알게 됩니다(요한일서 5:13).

이 모든 설명은 인용된 성경 구절의 문자적 내용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성경은 영생이 누구에게서 오고,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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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는 방법(How to Gain Eternal Life)

무엇을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까?(What Must You Believe to Get Eternal Life?)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도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존재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전3:11)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도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는 길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마19:16)”라는 질문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선을 행하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잘못된 구원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어떠한 선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어떤 사상가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아침마다 산상수훈 팔복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서 간디를 가리켜 가장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간디의 정신과 생활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생활을 본받아 아침마다 산상수훈 팔복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칭송을 받는 그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이런 것들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다.(Believe in Jesus to Get Eternal Life)


영생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사람의 공로나 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 죄가 씻음받았다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삼아 영원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은 내가 의롭게 살아서 어떤 공을 쌓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 적인 사랑과 은혜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라(Find Jesus)

구원을 위한 첫 단계는 예수님의 발견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발견하려면 꼭 믿음이 필요합니다(엡2:8).

종교개혁자 루터가 예수님의 복음을 바로 알기 전에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505년 7월 2일 루터가 법과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뒤 집에 다니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의 바로 옆에 떨어졌지만 무사히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성(聖) 안나에게 배우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맹세합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함이었고 그는 구원의 확신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온갖 고행과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엄하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성경을 강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에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의 대가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Deny Yourself)

구원을 위한 두 번째 단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입니다. 구원은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연합은 자신을 부정하고 온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알기 원했지만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생에 이르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마19:22-24).

부자 청년에 비하면 베드로가 가진 것은 정말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마19:27)”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귀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행위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삶과 자신이 가진 재산을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어진 삶에 신실하면서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힘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답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날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영생(永生)

헬라어에는 생명을 말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조에’입니다. 
조에는 내연적인(intensive) 생명을 의미하고, 비오스는 외연적인(extensive) 생명을 의미합니다. 
비오스는 개역성경에서 ‘생활(living)’이란 말로 번역되면서 생명의 본질을 지칭하기 보다는 생명의 지속과 생명유지의 방편 및 수단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즉, ‘조에’는 생명의 핵심과 본질을 말하는 반면, ‘비오스’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및 생명의 껍데기를 의미하는 곳에 쓰입니다.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이란 말은 ‘조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3:15,16, 요한일서 1:1,2). ‘살아 있는’ 생명의 껍데기로서 ‘비오스’는 성경에서 생명의 본질로서 ‘조에’에 연결되지 않을 경우, 살아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살아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겉도는 생명체의 유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즉, ‘비오스’는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에너지로서 음식과 물질을 필요로 하는 육신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생식하는 힘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질과 생식에 집착하는 ‘비오스’적인 생명은 결국 사람을 거짓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본연의 가치인 ‘조에’가 없는 이생의 것들에 집착하는 생명을 껍데기 생명에 해당합니다(누가복음 8:14, 21:34).

그래서 비오스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카르디아)인 정서가 염려하게 되고 염려는 불안과 우울, 그리고 회의에 빠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어리석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요한일서 2:16절은 비오스를 자랑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비오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에 빠지고, 많다고 자랑(사치, 과시)하는 자들은 어리석음(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부자)에 빠짐으로 모두 부질없는 껍데기에 생명 유지에 해당합니다.

영생(eternal life)에 해당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요한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매개된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오니오스’는 ‘영원한’, ‘우주적인’, ‘종말적인’, ‘신(Divine) 적인’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인 ‘아이온’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서의 ‘영원’(고린도전서 2:7),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누가복음 1:70, 사도행전 3:21), ‘코스모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마가복음 4:19, 히브리서 1:2). ‘아이온’은 시간적 연장선상에서 영원과 만나는 지점으로서 종말론적 위상을 가지기도 합니다(히브리서 6:2,5, 데살로니가후서 1:9, 베드로후서 1:11).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전우주적인 삶을 의미하고, 또한 질적으로는 신적인 삶으로서 종말론적으로 영원하고 무궁한 삶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생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시간의 폭을 넓혀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시간의 범주에서 사는 삶이 있는가 하면, 영원의 시간까지 시야를 넓혀 사는 폭넓은 삶을 사는 삶도 있습니다. 찰나적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먼 미래를 보며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현재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의 일생전체의 폭을 고려하는 삶, 더 나아가 다음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며, 장소적 차원에서는 자기자신만을 위한 자기중심적인(egocentric) 좁은 삶에서 인류중심적인(anthropocentric) 삶을 넘어 우주적인(cosmic)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좇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성공과 잘됨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와 만물의 잘됨을 염려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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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요한복음 7:3, 20:30-31)

지금은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200만 명이 된 시대입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의 ‘2017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1000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23.3%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크리스천이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못 나가거나, 고민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종교를 물을 때 그들은 바르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크리스천 동아리 선배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자신의 영적상태와 신앙의 고민 때문이고,

셋째는 이제는 정말 부모를 떠나 진지하게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교회마다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마치 다윗에게 몰려갔던, 건국용사가 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원통한 자, 환난 당한 자, 슬픈 자, 도망한 자….

그러나 그들은 다윗을 만나면서 일당백을 감당하는 위대한 건국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대다수가 용사들이었고 다시 싸우고 싶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나무라거나 멸시하기보다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믿음의 용사들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성도들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그들의 자리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상실한 믿음을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 나라의 자원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신뢰와 열정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까요?

왜, 그들은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 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육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양반과 평민, 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도로 인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교회에 나오다 보니 하나씩 해결되어졌습니다.

인간적인 대접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우리 나라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이 경제적인 물질 풍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신앙인들도 종교의 힘을 빌어 더욱 더 열심히 일한 결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도도 줄어들게 되고, 하나씩 하나씩 편안하게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출석을 하지 않으면 양심적인 가책이 생기다보니 큰 교회에 주일날 한 번 예배 드리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모양만 예배에 참석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송구한 마음을 조금 달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게 된 원인이 육체적 욕구 충족에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대체적으로 사랑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세 가지 요소가 균형 맞춰진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왜 교회에 다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는 것(고후 4:17)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내세의 삶, 영생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영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생에 대한 우리 성도들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1. 영생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1. 진시황의 불노초 / 왕릉 ;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위해 신비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큰 노력을 하였습니다.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2. 오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

2. 왜 영생이 필요한가?

영생의 반대말 ; 영벌 / 사망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0,31)

영생이 곧 구원이며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

3. 성경에서는 영생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다(요한복음 17: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4. 영생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영생이란?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눅 10:25; 요 3:16), 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요일 1:2).

a.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의 새롭고 영속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요 17:3; 롬 5:21).

b. 새로운 생명을 덧입는 것(요 5:24; 롬 6:11).

영생이란 경험적인 지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은 영생의 조건이나 전제가 아니라 영생 그 자체이다.

영생의 특징

a. 단순히 죽음에서 탈피한 불멸의 생(生) 곧 그저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가리키지 않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구원과 자유와 생명을 일컫는다.

b. 더욱이 장차 임할 천국에서의 삶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 이 세상에서도 소유하게 된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c.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경험이요(딛 3:4-7), 세상 마지막 날 완성되는 것이다(요 6:40).

요한복음 17:2 주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다(요한복음 17:2)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해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성자 예수님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 ;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

a. 구원의 대상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구원의 대상 ;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구원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전제된다면 그 대상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구원받게 된다. ​

b. 구원의 내용 ; 영생

‘영생(조엔 아이오니온)’ = 생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시간적 측면 +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복(至福)의 삶이란 질적 측면

‘영원’이란 의미를 지니는 ‘아이오니온’ ; 시간적 개념

‘활기 있는 삶’을 의미하는 ‘조엔’ ; 질적 개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보장받는 영생 ;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행복한 삶을 사는 것

c. 구원을 이루는 주체 ;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아들

요한복음 17:3 주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곧 ... 아는’으로 번역된 ‘기노스코신’은

/ 현재 시제 가정법으로 ‘계속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란 뜻이며,

/ 이 동사가 나타내는 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영적인 친밀한 교제를 포함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특징

a.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우해 드리며,

b. 그분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힘쓰게 되며,

c.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로, 그리고 왕으로 알아 영혼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필요를 절감하며

d.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온전히 드리게 된다.

소결론 ;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앎이 바로 이와 같은 앎이기에 이 앎이 바로 영생이다.

신학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또 성경에 관해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예수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에게는 영생이 없다.

영생은 아들이신 예수 안에 있으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으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요일 5:11, 12).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20:31).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17:3).

종합해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생을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성도가 해야 할 사명 ; 복음 전파자의 사명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 신앙 목적

인터넷에서 퍼 온 '사흘만 기다리세요'라는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한 중국 여류 작가가

뉴욕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 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여류 작가는 꽃을 고르며 할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여류 작가는 다시 물었습니다.

"번뇌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러자 할머니는 여류 작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하루였죠.

그런데 사흘 후 부활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흘을 기다린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모든게 정상으로

변해 있는거에요."

할머니의 답변은 여류 작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사흘을 기다린다?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철학적인

삶의 태도입니까?"

지금의 번뇌와 고통을 미래에 찾아 올

즐거움에 대한 믿음으로 녹일 줄 아는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는

여유가 있다면 그 사이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사이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잊게 되진 않을까요?

베드로가 신앙고백한 내용과의 대조

예수는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고 물으셨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이나 교훈들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표적들 자체에 놀라 예수가 진실로 누구신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예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물으셨다.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각자 자기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모두의 신앙고백이 독특하고 달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에 웅답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과 웅답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제대로 깨닫고 고백할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대답했다. 이 고백은 다시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아 구약에 계시된 은혜와 사랑을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십니다.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라는고백이다(S. G. De Graaf). 즉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서 그 분이 곧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자이며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민 24:17). 또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분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17절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복의 선언을 하신다. 그러나 이 복의 근거는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예수의 말씀은 11:25,27에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그래서 칠톤(B. D. Chilton)은 “예수의 선포는 구구 절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해 준다. 그 나라의 효과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실체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프랑스(R. T. France)도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능동사의 주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가 역동적인 주체자이지, 어떤 사람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이시며 통솔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베드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바로 알게 하셨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게 하시고,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구세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자는 그를 그리스도로 바라볼 수도 없고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존재들인가!

이어지는 18,19절에서 예수는 처음으로 자기의 공동체와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더 광범위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에 있어서 동일한 점은 양자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A. Robertson).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구성된다. 여기의 백성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연장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이 교회를 함께 지지하는 결속이 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하신 일, 그의 수난과 부활 등 모든 일에 대해 중인이 된 사도들을 통해 교회는 죽음을 극복하신 주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들이 아직까지 진리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20절)고 경계하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순종과 섬김과 대속의 메시야’로 자신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렇게 경계하신 것이다(A. Robertson).


https://nykcn.org/yeongsaeng-yohanbogeum-17-3-juil-seolgyo-weongo-2020-05-24-slash-iseunghyeogmogsa



영생에 관한 예화 모음

▣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기쁨 속의 죽음

유명한 제인웨이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 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별세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나는 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9:57-62)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피지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하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嗚咽)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 를 위해 오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고전15:51, 52, 살전4: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생의 출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예로운 죽음도 있고 비천한 죽음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영생의 출발이므로.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산다.

M.E.몽테뉴는 말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해 두는 것은 자유를 예상하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자.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곧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19-29 * 찬송405장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15세 된 여자아이가 뜻밖의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위문하러 와서 병자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엾다. 네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자 병상의 소녀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나의 참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단다. 나는 가까운 날 영광의 주를 볼 것이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에 영광을 더할 거야."
* 참조: 마18:8,9, 막9:43, 45, 살후1:10, 벧전1:8

▣ 영생에 이르는 길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아침 그 지역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죽어가는 펠릭스 리치라는 환자가 목사님 한 분과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하고 급히 차를 몰아 그의 병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리치는 “목사님! 제 삼촌도 목사님이었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듣지 않았답니다. 제 아내가 늘 저를 교회에 데려가려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창조주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 일생은 죄로 가득합니다. 아! 어떻게 하죠?”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리치는 회개하고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목사님은 문병을 갔는데 놀랍게도 리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주일에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8년 동안 매주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영생의 복(시편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읍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행복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합심기도 할 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일찌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하고, 12절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젓가락 열 개를 한데 묶어서 꺾으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개씩만 꺾으면 쉽게 꺾어집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단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였습니다. 연합하는 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거구의 몸을 지닌 동물이라도 또는 어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에게는 '영생'을 주신 일이 없으나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 정말 영생을 얻었습니까?(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한 신학자의 비유적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자기 교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 큰 상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천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게 됐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교회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았던 교인인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상급을 받은 성도의 반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왔다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도 없고 겉으로 그의 신앙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생하고 영생을 얻은 확실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의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적인 믿음으로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마 1절,사 53:4∼6)과 십자가의 죽으심,부활하시고 승천 재림까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옵니다. 믿어지는 신앙과 동의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슴처럼 성령이 내주하여야만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영접할 때(요 1:12) 나의 이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참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러한 온전한 영생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정적인 믿음과 그분을 전적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시는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솔로몬 왕은 인간 영화와 우생의 극치를 누린 사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웃 왕족들이 정치 결혼을 원해서 공주격 처첩이 천 명이고 황금 궁전에 학문적 예술적 위락적 모든 조건을 갖추었었다. 눈이 원하고 입이 원하고 육체가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나 다 해 보았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5)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없는 삶의 전방위 추구의 경험적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허무였다(전1:2).
영원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유한한 임시적인 대용품으로 아무리 채워도 갈증은 더하기만 하고 만족도 행복도 안식도 없다(전3:11; 12:13). 우리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란다. 인간은 우주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삼천 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들으면 바다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의 귀에 영원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지말라.
-예수칼럼 : 김준곤-

▣ 영원한 쉼터

우리 부부는 미국 LA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1년 예산이 50억원이나 되는 큰 교회 목사님이신데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반찬은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막 집회를 마쳤습니다. 지친 사모님이 김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3일만 휴가를 주세요. 강목사님 사모와 둘이 팜 스프링에 가서 쉬고 오고 싶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얼른 받았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남자들끼리 일할 테니 가서 쉬고 오세요” 이때 김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데 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낭비하려고 그래요”
지금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김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

토마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 참조: 요일1:2, 요일2:25, 단12:2,7, 요10:28, 12:25

▣ 영생의 낙(永生之樂)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독교인은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영국의 로지 경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제 무덤에 오지 마세요. 저는 거기 없을 거예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처음에 죽으면 자기 남편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 무덤 곁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몸을 아무 데든 묻어라. 장지 문제로 신경쓰지 말아라.”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묻히게 되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는 먼 곳이 없단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은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다.

▣ 나는 영원히 살테야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신문에 보니까 영국 수상 처칠은 100세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120세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니까 오래 사실 것 같은데, 얼마나 사실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들은 사는 법을 몰라. 나는 영원히 살테야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려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살려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은 살아난다.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심령은 육신이 무너진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명심하자!


▣ 죽지 않는 법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의 산들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 생명의 근원

성경: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의회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쓰는 모든 것,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그것은 우리들의 가련한 제멋대로의 경주에 있어서 중심으로 되는 희망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주 믿는 자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만이 영생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영생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다.“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다.“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 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내세의 확신은 없으며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고,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민경설 목사 (광진교회 담임목사)

* 묵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굿나잇 키스…굿바이 키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4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다. 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는데 막내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다.그러자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같은 말은 결국 앤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김의환 목사

▣ 하늘에 살아 있는 아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아들 윌리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를 위로하고자 프란시스 빈튼 박사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아드님은 하늘에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교리로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동안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월리가 살아 있다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참조: 사25:8, 35:10, 시133:3, 유1:21

▣ 밀라노 대성당의 세 문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 참조: 벧전1:24, 25, 딤전1:16, 6:12

▣ 영생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신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요3:14)
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0 영생은 곧 유일한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0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일5:20)

▣ 영생에 관한 금언

0 농아 학생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은 전능자의 일생이다라는 아름답고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영생은 절대적인 이름으로 옷 입혀진 소극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용시킨 것에 대한 현재의 존재요, 시작의 부정이거나 그 존재의 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윌리엄 펠리)
0 나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미지의 바닷가로 가는 것은 꿈꾸게 하라.(펠리시아 히맨스)
0 소원은 자주 무너지고 내 심장은 뜨거운데 이 세상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일이 저 세상에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천국에서 열매 맺을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구나.(wid 파울 리히터)
0 영원한 세계는 참으로 광대하구나! 그것은 태고부터 모든 인류를 삼키고 지금도 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많은 인류를 삼킬 뿐만 아니라 신비로 가득찬 우주를 모아들일 것이며, 장면과 전망이 넓게 펼쳐져 많은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족하고 다양하며 한없이 많은 지성적인 존재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흡수할 것이다.(나다니엘 에몬스)
0 모든 자연은 그의 자연적 만족을 갈망한다. 우리가 목말라할 것에 대비하시어 하나님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애정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시어 그 애정을 만족시켜 주실 사랑이 있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예비하신 것이다.(프래드릭 윌리엄 로버트슨)
0 영생은 축복으로든 고통으로든 그 자체가 완전히 신비롭고, 경의로운 모든 상태로 나타난다. 한 시대의 흥미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데 비해 영생을 계속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중압감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로버트 홀)
0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게 미래의 실재성에 관한 확실한 육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육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대개 위대한 천재들이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
0 절망한 자는 자신의 소망을 확실한 신앙에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향으로 돌리고, 성공한 자는 그가 열렬히 추구한 목적이 불멸의 영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느끼며, 악인은 행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수 있지 않을 까 하여 그의 행악에서 돌이킨다.(로버트 사우티)
0 영원한 세계는 언제나 엄하고 거대한 형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채 엄숙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되뇌일 것이다.(로버트 브리우닝)
0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의 현관이다.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자는 그 현관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그 입장권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그 문을 통과할 때 사용되는 암호는 "예수"이다.(김경선)
0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에 관한 방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현자나 천재, 그리고 철학자에게, 때로는 목사에게 질문해 보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응답해 줄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물어야 할 것이다.(죤 포스터)
0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는 아직도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죤 칼빈)
0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더 아름답고 고상한 곳에 가기위해 가정을 떠나 죽음이라 부르는 일련의 끝없는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광스러운 영혼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환경과 행동 무대, 소망을 옮겨 놓게 된다.(에드워드 죠지 벌위 리튼)
0 어느 누구도 영생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이다.(프래드릭 윌리엄 파라)
0 이 세상은 원인과 경향의 씨앗이나, 저 세상은 수확과 결과, 완벽하고 영원한 결과의 세상이다.
0 영생! 당신은 어마어마한 생각에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장면과 변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우리 앞에는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겠구나! 그러나 아직은 그 앞에 그림자와 구름, 어두움이 가려있네.(죠셉 애디슨)
0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짧고 일시적인 인생을 마친 후 자신이 들어가게 될 나라이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어떤 근거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확신 위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제임스 클라크)
0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을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토마스 챨머스)
0 만약 시간이 좀더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흐른다면 영원한 세계는 좀더 당당하고 친절하게 보일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모든 위대한 자연들은 안정을 기뻐하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기능의 약속으로 확인된 영생을 발견한다.(랄프 왈도 애머슨)
0 두 세상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적합한 것들을 정당하고도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우리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언제나 약속의 땅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어거스트 헤아)
0 영원한 세계가 단순히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들의 형태대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의 빛과 힘은 어느 곳에나 잠재해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은 베일을 명료하게 벗기려고 하였다. 또 형용할 수 없는 광채로 인간의 평범한 삶을 온통 덮고 있다.(죤 캐어드)
0 영생에 대한 생각은 짧은 인생에 위안을 준다(샤레시앙 길라원 마레쉬에르브)
























교회 일치 운동




교회 일치 운동

교회 일치 운동(教會一致運動) 또는 에큐메니즘(Ecumenism)은 개신교회의 일치에서 시작하여, 개신교회정교회의 협력으로 이어진 기독교 교회 일치 운동이다. 
기독교
의 다양한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의 보편적 일치 결속을 도모하는 신학적 운동이다.

여러 교파로 분열된 보편교회, 즉 기독교 내 모든 정통 교회들이 복음서에 명시된 예수의 뜻대로 하나됨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와는 달리 이슬람교, 유대교 등 타 종교 및,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등의 이단들은 참여할 수 없으며, 니케아 신경사도신경 등에 명시된 보편적인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연합 운동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오이쿠메네(Οικουμένη)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근거는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부터 기독교 교회의 목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말씀 안에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도 담겨져 있다.[1]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주님의 기도와 명령대로 하나되도록 성령안에서 힘써야' 했고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제1회 세계선교회의를 통해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교회 일치운동을 발족하게 됐다.

기독교 교회 일치운동은 2차대전 이후에 구체화되어,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회로써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결성되어 개신교회들(루터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오순절교회 등)과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구 가톨릭교회 등이 참여하여 전개되었고, 교회일치운동의 결과들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참회와 일치의 노력에 대한 결의에 따라 1970년대부터 로마 천주교회가 '참관인'(Observer)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는 이외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등 일부가 '참관인' 자격으로서 관여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로교 계열 일부,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계열 일부, 루터교, 성공회 등과 정교회가 WCC를 지지하고 협력하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회원[2]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보수교단인 장로교 계열 예장합동예장고신 등, 침례교, 재림교, 오순절 계열 일부 교단들은 신학적 차이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교회 일치 운동은 개신교에서 17∼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과 19세기아시아 등에서의 선교 운동 및 기독교 청년 운동의 과정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현대교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정통성 다툼을 벌임으로써 선교활동에 지장을 주는 문제를 교회 일치운동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일치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믿는 기독교의 공통적인 믿음에서의 일치이다. 예수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종교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회일치 운동을 전개하던 개신교회루터교, 감리교. 개혁교, 장로교, 성공회 등 교단들과 국가별 동방 정교회 교단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결성 하면서 두 교파간의 일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결성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1961년에 비로소 회원교단으로 가입했으며, 한국 정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한 후에 참관인(observer) 자격으로 참관한 바 있다.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개신교회정교회천주교회와 협력하는 것이었다.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정교회와 이단 시비와 정교회 지역 약탈의 역사적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않았고, 천주교회 우세 지역에서 개신교회 교인 살해와 핍박에 대한 용서를 구한 적이 없는 상태여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교회가 천주교회의 약탈을 용서하고, 루터교회가 개혁찬성파와 개혁가들이었던 개신교 교인에게 과거 천주교회가 자행한 살해와 박해를 용서하였다. 이런 개신교회와 정교회의 용서 선언으로서 천주교회가 세계 교회 일치 운동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 1970년대부터 천주교회도 참관인 자격으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방정교회가 천주교회의 정교회 지역 약탈과 방화를 용서하고, 함께 일치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협력의 장을 열었다. 천주교회에서는 교황 비오 9세1869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전까지는 방어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어 큰 진전을 보기 힘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천주교회는 종전의 방어적인 자세에서 동방 정교회개신교 교파들을 '형제'라고 관용하는 자세로 변화하였다.

정교회의 용서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본격화된 교회 일치를 위한 천주교회의 노력은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4년교황 바오로 6세동방 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방문함으로써 교회 일치 운동에 진보를 이룩했으며 이듬해 12월에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는 천주교회동방 정교회 사이의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신학적 대화에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성공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두 차례의 위원회를 구성, 최종 보고서와 2개의 합의선언을 내놓은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65년부터 대한성공회천주교간의 기도회를 개최하여 왔다.

개신교가 천주교회의 종교개혁 박해를 용서

루터교회천주교회의 개혁찬성자들과 개혁가들, 개신교도 살해와 교회 방화, 박해를 용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교회일치를 촉구하였다. 이후 다른 개신교회의 참여 요청과 박해 용서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개신교측과 천주교회 측은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었으며, 1972년 말타 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희년을 앞두고 1999년, 루터교 세계연맹세계 감리교 협의회천주교회과 함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 지난 450여년간 기독교 교회들 사이에 이어져온 교리논쟁에 큰 진전을 이루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장을 연 커다란 성과였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와는 1970년부터 꾸준히 대화하고 있다. 이미 로마 교황청세계 개혁교회 연맹(WARC) 간의 제1기 대화 보고서는 1977년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이어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된 제2기 대화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동 이해를 향하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감리교, 오순절 교회, 침례교회도 천주교회와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들을 발표해왔다.

개신교회와 정교회의 용서 이후 천주교회의 관심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회의를 통해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용서를 바탕으로 교회일치 운동에 의결권이 없는 참관인으로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시아 차원에서 1994년에 아시아 기독교 교회 협의회(CCA)에서 만들어진 “아시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AMCU)”을 중심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시아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평신도 대표들이 참가해 서로의 차이점을 딛고 함께 협력해 일하도록 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논의하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일치 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 공동 번역 사업이다.

한국의 개신교의 초기 선교 현장에는 서양의 교단별 선교정책에 따라 경쟁적인 선교가 이루어지며 네비우스 원칙에 따라 지역별 구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초기 배타성과 일제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현장의 선교사들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 장로교 선교회들 사이에는 1889년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와 1893년 <장로교선교공의회>가 차례로 결성되었고, 이는 1901년 조선인 장로들과 선교사들의 연합체인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결성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1905년 <대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가 결성되었고, 1918년에는 조선인 교인들이 참여하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의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창립되었다.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회연합공의회>와 조선인 교인들이 참여하는 <장감연합협의회>가 연합하고 6개의 선교부, 대영성서공회, YMCA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가 창설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초대회장으로 차재명 목사가 당선되었고, 창립 총회에서는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그리고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을 목적으로 채택하였다. 미국에서 분열된 감리교단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나뉘어 있던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는 1930년에 통합되어 하나의 감리교단이 구성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조선의 기독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다수의 개신교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한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1년에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개칭하며 친일단체로 변모하였고, 광복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1945년 7월 19일에는 효과적으로 조선의 개신교를 통제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스스로 합병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국가와 개신교 교회의 재건이 논의됨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해체되었고, 1946년 가을 교파연합운동 기구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세계교회들의 초교파운동에 참여하였다.

한국교회에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단체로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여하는 교단들의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으며, 회원 교단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 정교회 등 총 9개 교단(교회)이 가입되어있다.

반면 개신교회천주교회, 동방 정교회 간의 명확한 분리를 주장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각 교파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상당수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교회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모든 교단을 위한 하나의 성경 번역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축은 개신교 성서협의회인 대한성서공회가 되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대표 번역가를 선출하여 위원회를 구성해 번역을 시작하였다. 지역명, 인물의 명칭 통일과 한국어 표현 활용 등의 기준을 제정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준비하여 1971년에 신약전서를, 1977년 신구약 전서를 출간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가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개신교회는 일부만이 예배 성경이나 교육용 성경으로 사용하고 대부분 거부하여 기존 개신교 성경을 유지하였다. 천주교회는 한때 공식 성경으로 활용하였고, 정교회도 사용하였다. 현재 공동번역성서는 현재 대한성공회한국 정교회에서 채택하여 쓰이며, 개신교 전체는 개역개정판이나 새번역 성서를[4], 현재 천주교는 천주교주교회의에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한다.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에 대해 보수적 개혁주의와 세대주의, 신복음주의, 근본주의 영향의 교단들은 반대한다. 보수적 개혁주의인 한국 장로교의 예장합동과 고신 등과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영향의 침례교와 순복음교회의 보수적 교단들은 크게 반대한다. 이들은 교회일치 운동에 이단으로 규정하는 천주교회가 회원은 아니라도 참관인으로도 참여하는 것 자체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교회일치운동을 반대한다.

개신교 보수주의인 계통에서, 반대자들의 신학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한 분이시다(삼위일체).
  3.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4. 중생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5.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
  6.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
  7. 최후에는 영생과 영벌뿐이다.
  8.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영체다.

이상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일치운동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교회 일치를 주장한 에큐메니컬은 반대로 한국 장로교회를 양분하였다. 즉 에큐메니컬에 찬성하는 예장통합과 반대하는 예장합동으로 장로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9년 WCC 가입 문제 때문에 찬반이 갈려 반대 측은 예장합동, 찬성 측은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1950년대에 예장의 WCC 가입시기에 이르러, 당시 WCC 총재가 네덜란드 개혁교회목사 호프트였는데도, 정작 회원교단이 아닌 천주교회와의 일치운동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장로교 보수파인 예장합동과 WCC 가입에 찬성하는 장로교 온건파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이후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현재까지 반목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개신교 보수파인 예장합동은 WCC와 교회일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들의 반대 이유는 WCC 운동이 천주교회와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개신교 보수파의 의견으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개혁주의 신앙과 대치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수 교단을 중심으로 회원이 아니라 참관자격인 천주교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세계 교회 일치 전략을 우려하는 이유도 있다. 이에 예장합동 총회는 2013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며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목회자들을 징계했다.[5]

  1. (요한복음서 17:21)
  2. 천주교회는 참관인일 뿐 회원교단이 아니므로 협의회에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
  3. 《이야기 교회사》/이성덕 지음/살림
  4. 다만 교회 일치운동에 참여하는 한국의 개신교 일부 개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예배용 성서로 사용한다.
  5. 곽원철 《합동과 통합의 분열과 2013 WCC총회에 대한 견해 차이》(총신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교회 일치 운동

18세기 스페너, 프랑케 등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존 웨슬리영국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속 스콜라주의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세계 선교에 눈길을 돌리게 하였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한 세기 동안의 선교활동은 대항해시대 이후의 몇 백년에 버금가는 눈부신 선교 역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선교활동은 교파적 색채를 띤 개신교-그리스도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파들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선교 단체들간의 연합과 협동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선교 및 교회 연합의 방향을 전했던 것이다.

1846년 8월에 복음주의 연맹이라는 단체가 탄생하였다. 이 단체 최초의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이 영국 런던에서 있었다. 당시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52개 교파로부터 800명의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복음주의 연맹은 19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기원한 유일한 에큐메니칼 조직체가 되었다.이 연맹은 오늘날 6억명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기독교 교단 연합운동 단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라는 칭호를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851년에 런던에서, 1853년에는 뉴욕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알렉산더 더프가 사회를 맡았던 영국복음주의연맹 연차모임에서 1854년 최초의 국세선교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교파 차원의 화합 운동으로서의 교회일치운동은 189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것은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공식 대표들을 통해서 상호 다른 점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린델발트 대회와 Review of the Churches라는 정기간행물에 의해서였다. 특히 Review of the Churches의 편집인 헨리 런은 이 지면을 통해 이질적인 각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재통합 문제를 위해 함께 대면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며,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스위스 계곡 그린델발트에서 영국 국내 그리스도교 일치 논의 대회가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이후 처음 열린 대회로 성공회, 침례회, 회중교회, 장로회, 감리회, 퀘이커 신자들이 참석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이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모든 개신교 교파로 확산되어갔다. 이후 1920년대에 스위스 뮈렌에서 런이 개최한 2번째 대회는 유럽 대륙의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회일치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같은 도시인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창립 개최된 세계기독학생연맹이다. 이 학생 운동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YMCA와 YWCA에 의해 발전된 운동이다. 이 학생 운동의 지도자가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모트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이후 교회일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1886년 무디 부흥운동을 계기로 외국 선교를 위한 학생 지원 운동(SVM)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888년 YMCA의 총무가 되어 교회일치운동 경력을 쌓게 되었다. 모트는 이후에도 2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각종 학생 연합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학생 운동을 통한 일치의 경험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의 약 10년간 전 유럽미국, 아시아아프리카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 교회일치운동에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세계주일연합 운동 등이 여러 교파들의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평신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각종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는 1910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제08차 세계선교대회(WMC)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적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긴 선교단체와 특히 자의적 그리스도교 운동 단체들(YMCA, YWCA, SCM, WSCF, SVM 등) 출신이었다. 이때 의장이 된 지도자가 앞서 언급했던 미국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이 외에도 조셉 올드함, 윌리엄 템플 등이 이 회의를 통해 당시 교회일치운동의 흐름을 이끌어나갔다.참고

이후 1921년 10월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WMC의 꿈을 보다 발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IMC는 개신교인들 사이의 범세계적 친교를 육성시키며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연합 계획과 행동을 촉진했고, 1928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1938년에는 탐바람에서, 1947년에는 온타리오의 휘트비에서 모였다. 이후 국가별 혹은 초교파적인 기구들의 공식 대표가 선교협의와 포괄적인 계획을 위해 모이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게 되었다. WCC 헌장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못박고 여기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회원 가입권을 허락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간의 교환예배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회 이어져 오고 있는데,[1][2]한국 교회 일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CBS, CTS, CGN, CMTV 등 방송사 명칭이 'C'로 시작하는 개신교 계열 방송국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출연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독실한 신앙인인 가수 자두와 배우 최강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두의 교단은 감리회이고, 최강희의 교단은 침례회이다. 그들은 간증 프로그램에 몇 차례 나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과정을 얘기했다.

CCC, IVF(교회일치운동에 가장 긍정적이다.), SFC, JOY 등의 개신교 동아리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교단이 다르고 종파(가톨릭, 정교회 등)가 달라도,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회원으로 받아주고 있다.

현재 전세계 교회들이 참여중인 교회일치운동은 크게 세개의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중도~진보 교회들이 모이는 WCC, 중도~보수, 일부 온건 진보 교단들이 모이는 세계복음주의연맹(약간 보수적이지만 다른 견해에도 열린 단체), 선명한 보수 교회들이 모이는 국제개혁주의교회협의회(ICRC),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로 나누어져 있다. ICRC는 기독교 타종파를 아예 배제하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세계복음주의연맹ICRC와는 반대로 가톨릭, 정교회 등 기독교 타종파에 열려있지만 교회일치보다 선교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기독교 인구가 많은 미국은 미국교회협의회의 다수와 미국복음주의협회의 일부가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가톨릭정교회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재일치를 시도했다. 미하일 8세 동로마 황제에 의해 요안니스 벡코스를 대주교로 서임했는데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황제 요안니스 5세가 개인적으로 재일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동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치와 교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는 양자 간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공의회를 소집하기를 거절해왔다. 그러다가 1438-38년에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만났다.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서방의 신학자들과 신학 대화를 했고 실제로 동의가 이루어졌고 일치 선언도 이루어졌으나, 후에 동방 측의 여론 등으로 인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일치 시도가 있은 후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두 교회는 오랜 세월 평행선을 그리며 지내왔다. 그로부터 약 524년이 흐른 뒤 두 교회 간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정교회는 가톨릭이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적인 참관단을 보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교회의 사제직과 성사들을 인정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통해 정교회를 "자매 교회"로 지칭하고 "참된 그리스도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이어받은" 교회로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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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동서 대분열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아티나고라스(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를 만났고, 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1054년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온 서로에 대한 파문을 취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Demetrios)를 만났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의 대표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0년 일치의 회복을 목표로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합국제위원회가 그리스 섬 파트모스와 로도스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82년과 1988년 사이에 교회, 전례와 성사, 사도전승 문제를 포함한 3가지 중요한 합의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이러한 긍정적인 대응은 1988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 기념식에 바티칸 사절단이 참가하는 것을 포함하는 가톨릭과 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회합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교류가 급속히 발전했다. 2003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비롯한 4명의 평의회 소속 공식 사절단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이스탄불을 방문해 축하했다.

2006년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의 대주교 및 사제들과 신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정교회 측 인사들과 가톨릭의 인사 27명이 만나 1980년부터 시작된 일치 회복을 위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이 회의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양자 간 일치위원회의 후속조치로서 그 해 독일의 프라이징에서 그 내용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양측은 서로의 미사/성찬예배에 참례했다. 다만 이것은 성사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호 간의 전례 참관이었다.

양측의 활발한 교류는 200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초청으로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공식 방문하는 결실을 맺는 큰 밑바탕이 되었다.

2007년 10월 8~14일은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열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는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 27명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에서 온 정교회의 대주교들 및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의 교의학적, 성서적 측면에서의 전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해와 교류를 모색했다. 이 회의 역시 이미 1990년에 모스크바의 양자 간 일치위원회에서 제기되고, 2006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마지막 회기가 열린 10월 13일 토요일에 라벤나 대성당에서 열린 가톨릭 미사에 정교회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14일 산 비탈레 성당에서 열린 정교회의 성찬예배에는 가톨릭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2006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것과 같이 2008년 6월 7일부터 29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여 양자 간 더욱 친밀한 교제를 약속했다.

정교회는 콥트 정교회를 비롯한 비칼케돈파 동방 교회(오리엔트 정교회)들을 역사적 경험, 교리와 영성 등에서 서방 교회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비 칼케돈파 교회들과의 교류는 1964년 덴마크의 아루스와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열린 비공식적 회합들에서 양측의 주요 신학자들이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제네바에서 그리고 1971년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보다 진전된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우리는 우리가 서로 하나의 정통 신앙 안에 있는 교회임을 깨달았다. ... 그리스도론적 교리의 핵심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했으며, 브리스톨 회합에서는 "우리 가운데 일부는 두 본성, 의지, 힘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 중 일부는 동일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일치한 신인적 본성, 신인적 의지와 신인적 힘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측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나눔 없이, 분리 없이 결합되었음을 고백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칼케돈 신앙 중심으로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회합이 있은 후 두 교회를 대표하는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1985년에는 제네바에서, 1989년에는 이집트의 암바 비쇼이 수도원에서, 1990년에는 제네바에서 공식적 연합위원회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양자의 교리적 불일치 부분을 일정 정도 해소했고 상대에게 행했던 과거의 저주들과 비난들을 철회하도록 권고되었다.

1989년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상대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 가운데, "동방 교회들의 두 가족이 서로 오랫동안 교제를 갈망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고 분열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사도적 신앙에 기초한 성사 교류를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양측의 교류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더 긴밀해졌다. 여기서 두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을 배격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분리된다든지 혹은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명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정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동이나 변화, 구분, 분리 없이 결합하고 있다고 기술하여 해묵은 그리스도론 논쟁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최종적으로 1993년 상호 파문을 철회하기 위한 제안서가 결의되면서 두 교회의 갈등도 최종적으로 정리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두 교회가 완전한 상통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단성론'과 '황제파'라는 낙인을 찍어온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진일보라고 여길 만 하였다.

1973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이집트 콥트 교회 총대주교 셰누다 3세가 만나 그리스도 신앙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들의 전승에 입각해서, 그리고 처음 세 개의 보편공의회에 준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육화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요 성부의 영광의 광채시며 성부 본질의 모상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참된 육신과 이성과 영혼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죄 없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나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시며 하느님, 구세주, 우리 모두의 왕으로서 신성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으로 치자면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실제로 완전한 방법으로 섞임 없이, 혼합 없이, 혼동 없이, 바뀜 없이, 갈림 없이, 나뉨 없이 결합한다. 그분의 신성은 인성으로부터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영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육신을 갖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 그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전유물과 인성의 모든 전유물이 하나의 참되고 완전하고 불가분한 결합 안에서 온전히 보존된다.

우리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인간의 구세주이시고, 육화한 말씀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인성에 대해서도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그분은 자신의 인성을 신성 안에서 섞임 없이, 혼동 없이 하나로 만든다. 그분의 신성은 자신의 인성과 단 1초도, 찰나의 순간에도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한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셰누다Shenouda 3세가 공동 서명한 "공동 교서"(dichiarazione comune).[3]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했다. 교황은 카이로의 이집트 성모 대성당에서 이집트 콥트 정교회의 세누다 3세를 비롯한 타 교파 지도자들과 일치 모임을 갖고 새 천년기를 맞아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협력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2017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4월 28~29일 이틀간 진행한 이집트 사목방문 중에 콥트 정교회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성 베드로 성당 순교자의 벽에서 함께 기도했다. 타와드로스 2세 총대주교가 피로 얼룩진 벽을 보여주자, 교황은 핏자국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유리벽으로 다가가 축복한 후, 직접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이 장면은 고통 받는 교회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이해됐다. 교황은 콥트교회 신자들이 혼자가 아니며, 로마 주교라는 충실한 친구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프란치스코는 타와드로스 2세와 만나 교회일치 측면에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결과를 이뤄냈다. 두 교회의 수장은 가톨릭 교회와 콥트교회는 서로 간 세례의 합법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 양측의 신자가 가톨릭 교회나 콥트 정교회의 소속이 되고자 하는 경우,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 없이 이전에 받은 세례의 효력이 유지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개신교정교회 간에 신학적인 만남의 역사는 1573년부터 1581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루터 신학부 교수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이에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Ιερεμίας Β΄ Τρανός) 간에 있었던 서신 교환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바울로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며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가라"는 답신을 했다.

한편 칼뱅파와 정교회 간의 만남과 대화는 1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키릴로스 루카리스(Κύριλλος Λούκαρις, 1572–1638)가 만든 신앙고백서가 정교회 내에 일으킨 커다란 소용돌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키릴로스는 실제로 제네바에 가서 칼뱅의 주장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그 결과 그가 쓴 조직신학과 신앙고백문이 다분히 칼뱅주의적이었는데, 정교회는 그의 신학사상과 신앙고백문을 '숨어들어 온 칼뱅주의적 이단'이라고 단죄하였다.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쓴 신앙고백문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Eastern Confession of the Christian Faith) 원본은 제네바 도서관에 보관 중이며, 그 신앙고백문으로 야기된 여러 가지 신학 논쟁과 스캔들에 관한 기록들도 같이 있다. 키릴로스는 이 신앙고백문을 쓴 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초에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일치를 위한 최초의 대화는 성과 없이 일단락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연합이 창설되는 국제적 상황 변화에 발맞추어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일치운동의 맥락 속에서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만남도 다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양자간의 최초 만남은 1920년대 초에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열린 정교회와 개신교 간 신학 토론을 위한 만남이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독일에서, 1968~1975년에는 북미에서, 1970년대에는 헝가리 데브레센에서,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그리스도론과 성찬론, 신앙고백과 고백문의 역할, 성령을 통한 성화와 구원의 활동, 전례, 하느님의 계시와 역사, 역사적 상대주의와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어서 권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창조와 자연보호, 혼인과 타종교인의 개종 등과 관련된 사목적 이슈들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각 교파는 자기의 전통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동시에 양자 간에 공통점이 많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양측은 1979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개신교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만남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양자간에 일치점이 더욱 많아졌으며, 공식적인 만남의 비전이 아주 밝아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자치권을 가진 모든 정교회에 개신교계와의 만남을 위한 대표자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그 대답이 모두 긍정적이었다. 개신교의 개혁교회 연맹측에서도 15명의 신학자 대표단을 임명하였다. 1988년, 1990년, 1994년에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양자 간의 주된 대화와 주제를 설정한 것은 1986년 예비적 만남에서 이루어졌고, 양자의 승인하에 마련되었다. 대화는 양측의 공동 기반인 니케아 신경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을 언급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개신교뿐 아니라 정교회도 교회일치운동에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처음 두 회기는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 데 할애하였고, 3번째, 4번째 회기는 강생론을 토론하는데 집중되었다. 참석 위원들은 그 성명서를 여러 가지 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였다. 처음 두 회기 동안 다루어진 삼위일체론에 대한 문서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교회일치적 신학 대화의 중요한 열매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치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양자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신앙하고 고백하는 바의 일치됨을 공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재확인하여 형제애를 공고히 함과 아울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풀이된다.

다만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조지아 정교회는 1997년, 불가리아 정교회는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탈퇴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1541년 4월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당시 마르틴 루터의 칭의론을 옹호한 콘타리니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내부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치와 공의회를 통한 교회 개혁을 놓고 가진 마지막 대화였다. 당시 가톨릭은 콘타리니 추기경과 요한 에크 등이,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는 마르틴 부처와 그를 보조한 장 칼뱅, 마르틴 루터를 대신하여 필리프 멜란히톤 등이 대표로 참여했다. 구원론은 이중칭의론[4]으로 합의가 되었으나, 성찬에서의 실체 변화 여부로 결렬되었다.[5] 얼마 지나지 않아 콘타리니 추기경은 사망했고, 이로 인해 가톨릭에서 이탈리아까지 종교재판소가 설치되는 등 반동적 조치가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던 버미글리 등 '복음주의자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 가톨릭을 떠나 종교개혁에 몸담았고, 저지대와 프랑스에서 또 다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인 얀센주의를 따르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단으로 제거되는 결말로 끝났다. 버미글리 등 이들은 마르틴 부처와 함께 영국까지 건너가 성공회 개혁의 기초를 놓는다. 회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지켜보던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불링거, 참여자로서 환멸을 느낀 칼뱅은 그대로 개혁 조치를 이어갔다.

가톨릭은 기존의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 이후 부정적 입장에서 벗어나[6] 1928년에 , 개신교에서 시작된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Mortalium Animos>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사회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며 은총의 샘인 성사를 거행하는 직무자들이 있는 가시적 교회(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교회와 관련 없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계시 진리의 내용과 상관없는 교의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이 의도하는 교회는 그들 각자의 의견과 판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구성되는 연합(Federation)일 뿐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 일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공동으로 내세운 교의들은 가톨릭 교의와 동등한 입장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사도로부터 합법적으로 계승된 이들의 유권적 해석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잘못된 교의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일치는 기대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Sempiternus Rex Christus)에서 교회가 일치해야 하는 2가지 당위성을 제시한다. 곧 요한 복음서 17장 21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일치는 그리스도의 뜻이었다는 것과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그리스도교 ‘공동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그 당시 2차례 세계 대전을 통한 고통의 체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갖게 되었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관으로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상태로는 반그리스도적 세력을 대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회칙은 일치의 당위성을 간절하게 표현하는데, 곧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를 위해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베드로좌(Ad Petri Cathedram)」에서 교의와 제도와 신심의 차원에서 일치를 위한 3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교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성전과 성서의 전통에서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믿을 교리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일치를 위한 참된 교의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찾아진다. 제도적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합법적인 직무 계승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가톨릭 교회 안에 보존되어 왔음을 밝힌다. 신심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성사를 통해서 초월적인 양식을 취한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일치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신앙의 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성체성사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계승된 사제직을 수여받은 사람만이 거행할 수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승인함으로써 이전의 교황들보다 보다 개신교에 개방적이며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일치교령에 따르면, 과거의 분열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상호간의 신뢰와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일치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불목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일치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일 유일한 교회로되, 많은 그리스도 교단들이 각각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계승자로 사람들에게 제시하며, 스스로 주님의 제자라고 선언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고 걷는 길이 서로 다르므로, 마치 그리스도 친히 분열되신 것 같이 보인다. …… 이 분열은 모든 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 수행에 지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인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0항).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를 '열교(Haeresis)' 혹은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다. ... 성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티토 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를 뜻한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이와 같이 이단 열교도라고 표현하던 가톨릭 교회가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을 바꾼 것은 놀라운 변천이 아닐 수 없다.

바오로 6세는 또한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에서 이전 교황들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이 일치에 큰 장애임을 인식한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교황권을 결코 철회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황이 없다면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의 실질적이고 권위 있는 최고의 사목직이 없다면 그리스도교회의 일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참된 일치 대신에 다른 일치의 원칙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올바로 지적하였듯이, “교회에는 사제만큼이나 많은 이교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110항 중

가톨릭 교회는 교황 수위권이 정교회, 또 개신교와 대화하는 데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임을 인식하지만, 계시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뜻을 포기하면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일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교황은 개신교인들이 수위권의 당위성과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황 수위권의 본질적인 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신교인들의 요구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는 1968년부터 ‘교회일치 기도주간’을 제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일치기도운동을 벌였다. 1970년 명동성당에서는 1,0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이 하나[一體]가 되어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현대 한국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천주교개신교의 일치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함께 번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전통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 성서를, 1977년 부활절에 구약성서를 각각 번역해 냄으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성서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의미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있고, 현재는 대한성공회와 한국 정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일부 교회에서 강단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한국의 개신교의 일치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을 통하여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다름[異體]을 뛰어넘어 하나[一體]가 되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노동·인권운동과 환경운동 등 사회운동 부문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좌파성향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과 개신교의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 협의회, 예수살기 등 진보적 사회 참여를 지향하는 양 교회 간의 협력은 아주 돈독하다. 여담으로는 강경우파 성향의 가톨릭 사제와 신자 모임인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 모임과 역시 우파 성향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간의 사이도 아주 끈끈한 편이라는 사실.

국내 학술운동 부문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다소 진행 중.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천주교 쪽의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와 개신교 쪽의 한국신학연구소의 공동노력으로 『하나인 믿음』을 발간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이 개신교 신학 잡지인 「신학사상」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99년 10월 31일 가톨릭, 루터회, 감리회 세 교파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이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 동의를 선언하였다. 비록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었고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내놓은 공동 선언문이었으나, 적어도 가톨릭과 개신교 교단들의 합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매년 1월에 ‘그리스도교 일치기도 주간’을 정해 가톨릭·정교회·개신교가 번갈아가면서 합동 기도회를 열고(한국의 경우 에큐메니컬 기도회는 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7]), 2000년부터 매년 그리스도교 일치 포럼을 개최하고, 교단 대표들과 함께 성지순례와 피정, 체육대회를 통한 교류를 갖고 있다.

2014년, 한국천주교주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했다. 한국 가톨릭과 NCCK 회원교단인 한국정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성수동측, 기독교한국루터회가 함께하는 기구이다. 일치기도주간 시행, 공동기도문 개발, 교재개발, 직제 연구, 공동 성서번역, 신학생 교류, ‘일치학교’ 운영, 일치피정 등의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회음악 교류도 활발한데, 대표적으로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내리교회가 성가대 연합 성가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인천 지역을 대표하고 상징성과 역사성 있는 세 교파의 중심적 교회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하였다는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청 지침 - 공동 기도회, 예배에 관한 지침들도 있다.

현재 가톨릭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복음주의연맹(WCC보다는 가톨릭에 더 신중한 입장), 미국교회협의회(NCC), 미국복음주의협회(NAE) 같은 개신교 단체들과 모두 친밀한 관계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주재 교황대사였으며 프랑스 튈의 대교구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발족된 성 비오 10세회(이하 SSPX)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이 1970년에 회를 설립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때문이었다. 새로운 미사 경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전례 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예전 트리엔트 미사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이제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모국어로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벽에 붙은 제대를 바라보며 진행되던 미사는 이제 사제와 평신도들이 식탁과 같은 제대를 마주보고 둘러 서서 드리는 미사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또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의 많은 요소가 삭제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었고 전례력도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또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성령쇄신운동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급진적 변화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로 하여금 전통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1970년 대주교의 친구이기도 한 스위스 프리부르 교구주교 샤리에르 주교와 접촉하여 스위스의 에콘에 신학교 설립 승인을 요청했고, 이와 더불어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을 신청하여 인준받았다. 보통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 단체는 몇 단계의 심사와 활동 기간을 거친 뒤에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게 되었으므로 처음 몇 년간은 교회의 감독 하에서 보수 성향 신앙 단체로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추진에 열심인 프랑스 성직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를 지지하는 사제·신학생들의 활동에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트리엔트 미사와 옛 해석에 집착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 모든 상황은 1974년 스위스 에콘의 성 비오 10세 신학교를 교황청에서 파견한 2명의 벨기에인 추기경이 시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들의 신학이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가져다 준 해악의 산물이라는 논지의 선언을 했다. 1974년 11월 21일 선언으로 불리워지는 이 선언으로 인해 교황청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샤리에르 주교의 후임 프리부르 교구장 피에르 마미 주교는 SSPX의 인준을 철회하겠다는 의향을 교황청에 전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3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결국 SSPX의 인준은 1975년에 철회되었고, 르페브르는 신학생들과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제·평신도들과 항의하는 차원에서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교황청 사법기관은 르페브르의 항소를 기각했고 공의회에 따른 결정 사항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공개적으로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난했는데, 교황이 특정 가톨릭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SSPX로 하여금 당장 교황청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단호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 이들은 트리엔트 미사와 공의회 이전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1976년 12명을 사제로 서품했다. 이로 인해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합법적으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문제는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가 죽으면 SSPX는 주교 없이 활동하는 빈약한 단체로 전락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교 서임을 위한 좋은 구실이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사도 헌장을 발표하여 기존의 교회 법전을 수정하였다. 또한 정교회와 여러 개신교 교파와 함께 다양한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 지도자 뿐 아니라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아프리카와 북미의 정령 신앙, 신토, 조로아스터교, 바하이교 지도자까지 함께 모여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금식 기도회가 있었다. SSPX는 교황의 이같은 조치에 종교다원주의라면서 크게 격앙되었고, 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전격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도좌로부터의 자동 파문 조치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성 비오 10세회 활동은 로마 교황청의 골칫거리였다. 로마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이에 따른 결정 사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다고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그 변화에 부정적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요컨대 SSPX 존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던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공연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공박했으며 교황의 교회 일치 운동과 신학의 진보적 변화를 수용 거부했다. 또한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기존 전통을 크게 훼손되었다면서 전례 의미가 혁파되고 사제의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가 가진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화해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에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추기경 시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성 비오 10세회와의 협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자의 교서를 내려 모든 가톨릭 사제의 트리엔트 미사 집전을 자유롭게 전면 허용한다는 조치[8]를 취해 화해의 길을 터놓았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서품된 4명의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을 철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실제로 이 조치 후 많은 접촉이 잇따랐다. 그러나 현재 대화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현재 SSPX는 인준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교황청의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의장이었던 귀도 포조 대주교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가톨릭 교회의 일부이지만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일치를 위한 정신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공동번역 성서를 따랐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0-14절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9]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인간의 간교한 유혹이나 속임수로써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4장 1-15절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중략)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9장 38-41절

현대 성서학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교회일치적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개신교. 정교회, 가톨릭의 간행물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교, 그리고 신학대학에서 성경 교과의 참고 문헌으로 높이 평가된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와 '신약성경학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처럼 교파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학회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미국가톨릭성서협회(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라고 고백하는 기관에서도 회원 자격을 공유하고 있다. 개신교와 정교회 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 함께 협회에서 공식적인 직위를 맡고, 편집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공식 기관지인 〈계간 가톨릭 성경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에 기사를 기고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다교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글을 쓰는 유다인 학자들뿐 아니라, 신약성경 해석 자체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유다인 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톨릭 성서학의 한 산물로서 이러한 주해 자료를 제공하는 데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전 두 판에서 우려했던 바는,[11] 이 선택이 혹여 개신교나 유다교의 성서학에 대한 거부나 의심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가톨릭 안팎의 동료들에게 성경 해석에 대한 가톨릭의 접근법을 특징짓는 고유한 관점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성 중 상당 부분이 특히 주류 개신교나 정교회와 공유된다 해도, 가톨릭의 성경 해석은 궁극적으로 가톨릭 신앙 공동체에 책임이 있으며, 가톨릭 전례, 영성, 그리고 교회론의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


성서학은 교파끼리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비그리스도인도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분야이므로 일치 운동의 실질적 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은 각 교파끼리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대 성서학의 본질, 곧 "성경 텍스트가 저자 당시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의도한 1차적인 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에서는 교파간의 차이가 없다.

가령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외의 친자식이 있었는가"라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 차이를 보자. 여기서 교파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텍스트가 너무 단편적이라서 어느 쪽으로든 순수 성서학으로는 결론내릴 수 없다'는 데는 교파간의 차이가 없다. 교황 수위권에 대해서도 교파간의 성경 해석 차이가 존재하지만, 순수 성서학은 교황수위권을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데 역시 교파를 초월한 합의가 이미 존재한다. 순수 성서학은 저자가 동시대 독자에게 의도한 문필적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뿐, 성경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해답을 성경 본문에서 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리로 성경의 공동번역 역시도 교파간의 차이는 오늘날 매우 미미하며, 어차피 원문에 쓰는 비평본은 히브리 성경은 BHS, 신약은 Nestle-Aland로 대동소이하다. 남은 건 동일 원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건데, 성서학의 일치 때문에 결과적으로 번역 역시도 단지 몇몇 번역어 차이만 있을 뿐이다.[13]

영미권의 경우 RSV(개정표준역 성경) 성경이 가톨릭, 정교회에 의해 수용되면서 영미권 최초의 공동번역 성경이 되었고, NRSV 성경, REB 성경은 편찬과정부터 아예 공동번역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합작한 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그러나 각 종파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공동번역을 거부하는 흐름은 여전하여, 그 쓰임새에 있어서 공동번역이 반쪽짜리가 되는 등의 한계 역시 존재한다.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는 가장 어려울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의 대화는 현자들과 학자들만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구호로 바꾸어 싸움판으로 돌진한다. 그들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으면서도 진짜 싸울 준비는 제대로 안 돼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 서로 과거에 대해 논쟁하면서 같은 말로 정반대의 뜻을 나타내려 하기도 한다. 여하튼 간에, 상대방이 하고 있는 말에 서로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스콧 한Scott Hahn, 『나는 왜 믿는가』Reason to Believe (2007), 이창훈 옮김, 살림, 2009, pp.102-103.

일치 대화를 위해서든 논쟁을 위해서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차이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상대방의 교리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채 캐리커처로 파악하여 섀도복싱만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든 그냥 재미로 논파하기 위해서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이다.

구체적인 예시로 '믿음과 공로의 관계'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보자.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그리고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개신교, 행동으로 구원받는 가톨릭'이라는 흔한 캐리커처가 결코 아니다.(참고: 의인(구원론)) 개신교적 관점에서 볼 때도,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 공동번역)이며,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도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 6)이기에 결국 '오직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 받는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를 "실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폄하하거나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을 "행위구원론"이라 폄하하는 건 매우 잘못된 단순화이며, 사실을 왜곡하여 교회를 찢어버리는 거짓말이다.

또한 이런 캐리커처화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 설령 양자에게서 강조점이 정반대인 문장으로 표현되었더라도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라는 걸 명심하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똑같거나 유사한 가르침이 정반대의 강조점으로 표현된 건, 위에서 언급한 바울로 서간과 야고보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성경에서도 존재한다.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로와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둘 다 신약의 정경이며, 강조점이 서로 정반대일 뿐 사실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로에게서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 야고보서에서는 '행동'으로 표현되며, 따라서 오직 믿음을 강조한 바울로와 행동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일치 운동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가톨릭을 같은 그리스도교가 아닌 아예 다른 종교로 인식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적그리스도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일치 운동에 적극적인 NCCK 계열의 개신교 교단들까지 배교자, 적그리스도 2중대이며 "성경적으로 완전히 개혁된 교회가 아니면 그리스도교 형제로 볼 수 없다"라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특히 보수 교단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가톨릭 뿐 아니라 가톨릭과 교류하고 일치 운동을 하는 NCCK 소속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과도 교류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군소 보수 교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기총은 아래에 나열된 개혁 신앙 교리를 고백하는 교단들끼리만 일치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성경은 신구약 합쳐서 66권이다. - 제2경전(외경) 거부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다. - 화체설(실체변화) 거부[20][21]


  • 최후에는 영생과 영벌 뿐이다. - 연옥 또는 델로니아 교리 거부

  •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성되는 영체다.


WCC 가입을 두고 대한민국 최대 개신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 1959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교단(합동, 합신, 고신, 고려 등) 측은 WCC 활동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는데, 2013년 부산에서 열린 10차 총회를 앞두고 한국의 개신교계 상황은 그야말로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현재는 군소협의체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WCC가 열리는 박람회장 근처에서 반대 시위를 개최하는 등 국내 개신교계는 양분이 된 상황 속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교회 일치 운동은 교파 간의 상호존중으로 선교 경쟁을 지양[23]하기에 극우 성향의 가톨릭 단체인 성 비오 10세회와 또 역시 극우 성향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에큐메니컬 진영이 빌미를 제공한 점도 없진 않다.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 1991년 WCC 호주 총회에서의 초혼 퍼포먼스 사건 등으로 인해 평범한 개신교인들에게까지 상당한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은 결국에는 개신교를 교황청(가톨릭 교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지 않냐며 경계심을 가지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일부 강성 극우 성향 개신교인들은 다른 계통의 종교(불교, 이슬람교 등)와도 화해 분위기를 갖는 것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이는 세계 단일종교 통합을 하려는 악마 숭배 세력의 음모라는 설을 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연관 짓는 건 덤. 이런 모습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원조인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전통 가톨릭교도들은 물론, 현대 가톨릭교도들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부 반(反)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에서는 개신교를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파가 아니라, '중세 가톨릭의 재야에 있던 정통 그리스도교'라고 보기도 한다.[24] 물론 이것은 장로교회침례교회의 일부에서나 찾을 수 있으며[25], 영국 내 가톨릭 조직의 일부가 국교회로 분리된 역사가 있는 성공회[26]와 가톨릭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회에서는 이런 시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27] 그러나 애초 종교개혁 자체가 초대 교회, 엄밀한 의미로는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들이 활동한 시기의 교회의 복원을 목표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던 만큼, ('주류 가톨릭이 아닌 재야 영역을 거친 정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통에 대한 회복 운동이라는 것은 개신교 교단들 자체의 정체성이다.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진영 내 일부 보수파[28]에서는 교회 일치라는 궁극적인 사명 달성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묻지마식의 교회 일치 운동은 오히려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에큐메니컬에 적극적인 성공회나 루터교회 내에서도 교회일치운동(특히 가톨릭과의 교류ㆍ대화) 그 자체에 회의감을 드러내거나 반대하는 성향의 일부(특히 자신이 속한 교파의 정체성을 강경하게 대변하는 부류)[29] 신자들이 소수 있기도 하다.

에큐메니컬 진영 내 개신교 교단들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 경우가 상당수이고,[30] 자연스럽게 여성 목사 안수나 성소수자 포용 등의 문제에도 매우 전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슈들은 자유주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으며, 개신교 보수파/중도파·정교회·가톨릭 모두에게서 상당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사제 허용은 사도전승을 매우 중시하는 가톨릭·정교회 측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나,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 내부에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주교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도전승을 주장하는 성공회[31]와 일부 루터교회도 마찬가지다.[32]

에큐메니컬 진영 내에서 제일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은 성소수자 포용 문제이다.[33]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의 영성체 참여를 금하고 있으나[34], 에큐메니컬 계열 개신교에서는 개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 대한성공회 길찾는 교회 등. 심지어 더 나아가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35]를 하고 있는 교단도 있는데,[36]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각각의 교단 내부에서도 엄청난 반발과 논란이 일어났으며, 몆몆 구성원들은 기존의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기도 했다.[37]

또한 가톨릭·정교회 측의 교회일치운동에 긍정적인 부류로부터도 교회 일치를 더욱 힘들게 하는 행태라는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장 리버럴한 개신교 교파 내부에서도 엄청난 비판과 논란이 있었으니,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톨릭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 신자에게 가톨릭 교회에서의 영성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 일치 운동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교류'라는 건덕지라도 보일만한 것은 가톨릭 사제가 성공회로, 성공회 사제가 가톨릭으로 옮길 때 타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이나 성공회로 옮기는 경우와 달리 사제서품을 다시 받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특례(가톨릭 신자들은 이것을 '특례'라 안 하고, 교황의 사목적 '배려'라 표현함)가 적용되는 것 정도 뿐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비판도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2006년에 은퇴한 가톨릭 평신도 신약성경학자인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는[38] 공동 영성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오늘날 교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며 최소한 일치를 이루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이며 과감하기까지 하지만, 사실상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한 침대에 들고 싶소.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데 성관계가 가장 친밀한 사항이듯이, 성찬식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데 가장 친밀한 행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로 일치하는 성찬식을 시작할 수는 없다. 서로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양쪽의 제도와 권위를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각자 이룩한 공동체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즉 함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은 일치운동 끝 단계에 이르러 할 일이지, 처음부터 할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일이다.

분열을 극복하는 일은 하느님 표상에서 직접 유래하는 과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 근본적으로 일치를 바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나는 함께하는 만찬에 가장 먼저 참석할 것이다. 성찬식은 양쪽이 모두 바라는 구원의 탁월한 표현이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 전헌호 옮김 (서울: 성바오로, 2013), 304-305쪽

베르거는 여기서 재미있는 비유를 하고 있는데, 성교가 남녀간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이듯이, 영성체는 일치의 시작이 아니라 최종 단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1] 그동안의 예배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2] 2020년에는 코로나 문제로 인해 강단 교류만 이루어졌다[3] 번역 출처: 안젤로 아마토,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522-523쪽[4] '칭의 과정|의화'에서의 믿음, 성화 과정에서의 사랑(즉, 선행이라는 표지)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이론[5]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 칼뱅》,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9[6] 영원히 저주받을 이단이라며 선언하고 다시 여러 번에 걸쳐 거론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공의회 시기 바오로 4세의 경우 프로테스탄트에게 관용을 베풀지 말 것이며, 칼뱅파는 더더욱 용서치 말라고 주문했다. 이 여파로 17세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개신교 신조에서 반가톨릭적 색채가 확연히 드러난다.[7] 물론 한국 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나 정동감리교회 등에서 개최되기도 한다.[8] 이 조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취소되었다.[9] 물로써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준 세례는 집전자가 타 교파여도 원칙적으로 그 유효성이 초교파적으로 인정되는 중요한 이유다.[10]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와 정교회가 자신한테 되돌아오는 식으로 재일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기도 한다.[11] (발췌자 주석) 본 주해서의 이전판인 1968년판과 1990년판을 말함.[12] 《21세기 제롬 성경 주해: 창세기》, 주원준 번역, 성서와함께, 2023, pp.14-15에서 발췌[13] 가령 영어권 개신교에서 (개신교 관점에서) 매우 보수적으로 번역한 ESV만 하더라도, 아주 약간의 수정만으로도 가톨릭에서 사용 가능할 정도다.(ESV-CE)[14]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를 포함한 신자들의 공동체 내지는 교회 조직(교단)이라는 뜻이다.[15] 다만 연합이라는 개념은 소수가 추구하는 추세이긴 하다.[16] 한편 에큐메니컬 개신교 진영은 가톨릭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며, 일부는 가톨릭과의 교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17] 교회법상 합법이든 불법이든 에큐메니즘 운동에 부정적인 것은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특징이다.[18] 천주교 제도권 보수파.[19] CPBC 가톨릭 뉴스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 관련 기사가 나오면 댓글 상황이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로 살벌하다. 물론 일치기도회를 반대하는 신자들과 찬성하는 신자들 간의 언쟁이다.[20] 개혁주의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성 대속을 중시하는데,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이러한 개신교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일종의 희생제사이므로) 싫어한다.참고글 또한 이쪽에서는 화체설을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내지는 신비주의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보편교회가 미사/성찬예배를 통해 희생제사를 재현한다고 해서 대속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1]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 중 기념설을 따르는 교파는 성만찬은 주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예식일 뿐, 그 자체에는 어떠한 능력이나 효력도 없다고 본다.[22] 아예 십자가조차 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예장합동 교단의 경우 교회법으로 십자가 사용도 금지했을 정도.[23] 현지 교회와 선교 교회 간 경쟁과 교파 간 개종을 지양[24] 발도파, 후스파 등. 심지어 보고밀파카타리파 등도 원래는 종교개혁 이후의 재세례파와 같은 집단들인데 가톨릭이 마녀 재판 과정에서 영지주의로 몰아세웠다는 주장도 있다.[25] 나머지는 가톨릭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가톨릭에서 뛰어나와 개혁교회를 차렸다고 본다.[26] 캔터베리 대주교 직책 자체도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소속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의 캔터베리에 주교를 파송한 것이 캔터베리 대교구(그리고 영국 가톨릭)의 시작이기 때문.[27] 따라서 극단적 반가톨릭주의(가톨릭을 아예 비그리스도교로 취급하는 수준)는 해당 교파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28] 자신이 속한 교단의 노선에 개의치 않고 교회 일치 운동 자체에 반대(WCC 반대 등)하는 극보수파는 여기서 논외한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예장 통합과 기감에서 이런 이들이 일부나마 존재한다.[29] 이것은 고교회, 저교회, 광교회 여부 및 리버럴, 보수주의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30]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강하게 내세우는 모토 중 하나가 신학의 자유이다. 미국성공회, 대한성공회도 정말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 외에는 신자들의 다양한 신앙 자세에 대해 관용하는 경향이 있다.[31] 미국 성공회와 영국 성공회는 여성 주교가 존재한다. 특히 미국성공회의 의장주교를 여성 관구장 주교가 역임한 바 있으니, 이제 현대 성공회에서는 여성이어서 오르지못할 직분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32] 심지어 스웨덴 같은 곳의 주교제 루터교회는 여성 사제는 물론, 여성 대주교까지 있다.[33] 성직자의 결혼 인정 여부, 여성 성직자의 인정 여부 등은 이에 비하면 난이도가 낮은 문제들이다.[34] 가톨릭의 경우 성소수자의 입교 자체는 막진 않는다(가톨릭 교리서 참조할 것). 다만 성생활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성사를 받지 못하는 실질적인 조당이 걸릴 뿐이다. 정교회의 경우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입교를 막진 않고, 동성애 행위를 자제하고 고백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인 회개를 해야만 영성체가 가능하다고 본다.[35] 심지어 현재 성 생활을 하고 있는 성 소수자들에게도[36] 미국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미국 북장로회 등등[37] 실제로 성소수자 목회자 안수 결정 이후 미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로 부터 3년 간 관구로서의 권한을 제한당했으며, 미국성공회에 반대하는 북미성공회가 독립하여 교단을 만들었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도 교단이 분열되었다.[38] 엄밀히 말하면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친다고 에큐메니컬 운동 내부로 단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베르거를 반대 진영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워서 여기에 적었음.










워치만 니 & 케네스 헤긴


케네스 헤긴, 그는 누구인가?

‘케네스 해긴’과 ‘말씀믿음 운동’의 이단성 

인물소개

레마 바이블 신학교와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Kenneth Hagin Ministries)의 설립자이다. 그는 17세 때 심장병과 불치의 혈액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후, 약 70년간 현장에서 건강한 가운데 왕성하게 사역을 했다. 그는 “내 백성에게 믿음을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클라호마 털사에약 11만 평에 이르는 레마 바이블 신학교(RBTC)를 세웠고, 52개국에서 활동하는 8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의 사역 범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KHM의 라디오 프로인 「방송으로 듣는 믿음 세미나」(Faith Seminar of the Air)는 미국내 300개 이상의 방송국에서,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전 세계에 걸쳐 방송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사역들로는 월간 잡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 전국 순회 전도단,레마 성경신학교,레마 통신학교,레마 동문회,국제 레마 목회자협회,교도소 선교 등이 있다. 그는 2003년에 하늘나라로 떠났지만,그가 세운 신학교와 사역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Kenneth E. Hagin (1917-2003)

 

그는 현대 Word of Faith Movement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선지자로 여겨진다. 그는 1917년 Texas주 McKinney에서 미숙아로 출생했다. 심장이 약해서 16세에는 그 증상이 심각했는데. 환상과 기적을 경험하고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 한다. 1934년 17세의 나이로 침례교인으로 사역을 시작, 37년 the Assemblies of God로 부터 자격을 얻어 목회활동을 시작한다. 1940년에서 50년까지 오순절 치유부흥 운동에서 일했다. 1963년에 지금의 단체를 구성. 1966년 오클라호마 털사로 이주했다. 2003년 9월 19일 사망한 뒤, 아들 (Kenneth Hagin, Jr.)과 손자 (Craig Hagi)가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세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3년 4월 22일 저녁 7시 40분. 그는 사망했고, 지옥으로 갔다. “나의 속사람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갔고 나의 죽은 몸은 누워있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심장은 멎었고, 맥박도 멈추었다.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하나의 빛을 보았다. 나는 그 바닥에 닿을때에 어떤 영적인 존재로 의식이 있었다. 마침내, 지구위, 천국위로 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나의 입을 통해 나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번째는, 나는 나의 피가 돌지 않았고, 나의 발가락이, 다리가, 발목이, 무릎이, 엉덩이가, 위장이, 그리고 심장이 차례로 멈추었다. 나는 몸을 빠져나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번쨰로 내 심장이 멈추었다.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꼐로 가오니 용서하소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때가 하나님의 자비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가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사역이 은사를 발휘하던 복음적 사역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환상에 대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육체가) 이미 죽었고, 지옥으로 내려갔는데, 즉 영이 육체의 바깥에 있는 동안에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영이 몸을 떠난 뒤에도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지옥으로 내려가다가 말이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이 간증은 사실상 Word of Faith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몬교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지옥에서 다시 거듭났다고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도다”는 육체적인 업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즉, 죄에 대한 벌을 지불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자, 그의 영은 적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사단을 이겨서, 거듭난 첫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없는 예수님께서도 거듭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구원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과 연결이 된다. 재미있는 간증은, ‘내가 거듭날때에, 나와 어머니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으로부터 2블럭정도나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상 그 앞세대인 William Kenyon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결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McConnell은 Hagin의 문장과 Kenyon의 문장이 일치하는 예를 들어 (실제로 각각 반페이지 분량의 8가지 부분을 들며 거의 정확하게 일치함을 증거하고 있다.) Hagin이 그대로 복사하여 쓰고 있음을 입증한바 있다. (아니면, 예수께서 직접 Kenyon의 가르침을 Hagin에게 그대로 들려주었거나.)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오직 예수님의 직접 계시임을 주장하는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정을 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의 순수한 동기와 사역의 열정은 사라지게 되고, 아집과 거짓만이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주 집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쫒고나서, “지금 나는 예수님이 이곳에 서 계신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의 그 누구도 예수를 본 사람이 없더군요. 듣지도 못했더군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설교시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그 말씀을 다 들려주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천국과 지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도 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기록을 몇가지 보자.

 

- 1952년 겨울에 부엌에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단과 마귀들에 대해 가르쳐주겠노라 하셨다. (제자들처럼,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께로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고 명시되어 있다.)

- 1958년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 여기에 천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원하는 물질을 가져오기 위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 1959년 2월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있을때에도 예수님께서 그가 빨리 회복되어 사역에 임하게 하기 위해 직접 방문해주셨다고 주장한다.

- 또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사역을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하게 한명의 예언자 (자신)에게 계시록이후의 신적 계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Hagin에게 말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그들의 주장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 “성령께서 오셔서 나는 엎드렸다. 말을 탄 사람이 와서 나에게 두루마리를 주셨다. ‘미국은 마지막 부름을 받고 있다. 몇나라는 이미 마지막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종말이 내 손에 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들이 믾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권능과 징조와 경이가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적이 행해지며, 성령의 움직임을 받지않는 자들은 나를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을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구절만은 옳다.)

 

그가 묘사하는대로라면 예수님은 가끔은 맨발이셨고, 가끔은 로마샌달을 신고 계셨다. 키는 5-11 (177.5 cm ?). 몸무게는 180 (80 kg ?) 정도이시다. 예수님이 그 앞에 출현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난 예수는 성경과는 다른 말을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맘을 바꾸셨거나, 아니면 그가 환상속에 만난 그 존재는 예수가 아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말하는 이 1,2,3,4 단계를 잘 따르기만하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소책자, ‘하나님과 함께 당신의 티켓을 쓰는 방법’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티켓을 직접 사용해야한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성경의 예수님이신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Word of Faith의 주요 교리가 된 그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육체적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은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지옥에 가서 영적인 죽음을 한 후에야 가능했다. 예수님은 그때 거듭나셨다. 예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다.

- 크리스찬은 나사렛 예수만큼이나 성육신한 존재다.

-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떤 열등한 존재로서의 의식없이도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대한 그와 동등하게 만드셨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다.

- 우리도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기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다.

 

성경 어디에고 예수님의 영적 죽음에 대한 말은 한곳도 없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울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위치에 닿고자함이 죄의 본질이며, 사탄의 본성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신교 방송채널로 알려진 TBN의 설립자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우리는 작은 신(a god)이며, 그리스도이다.” (다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채널의 방송은 보지 않을수록 더 좋을 것 같다.)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Word-Faith란 의미는, 무엇이든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the Positive Confession Movement의 주된 관점이다. 이는 크리스찬 사이언스의 은사주의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간 조엘 오스틴의 말과 유사한 아들 Hagin Jr.의 말을 보자.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입술을 가지고 잇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의심하면서 말을 한다면 당신은 잘못 발을 내디딘 것이고, 당신이 그렇게 잘못 움직일 때에, 하나님꼐서는 아예 움직일 수 없으시다. 당신이 바로 움직여야한다."

 

Charismatic Laughter 또는 Drunk in the Spirit이라고도 하는 시도를 그는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0분의 메시지를 전한 다음, 성령의 모습중 하나인 "취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5분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웃고, 입김을 불고, 팔을 휘젓고, 마치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중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아서 뒹구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 Hagin Jr.가 아버지의 노트를 읽으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다시 Hagin이 말을 시작하면서 이는 에스겔 3:16-27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 했다. (어거지 해설이다)" 그의 집회를 참관했던 한 목사님의 증거다. 그리고 그는 자주 예배중에 하나님께서 박수를 칠 떄와 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기에, 그가 박수를 치라고 할 떄에만 박수를 쳐야한다고 자주 당부했다 한다.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정리한다. (자료제공연대에 따라 지금과 다를 수 있음)

Faith Seminar of the Air (1966년에 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Rhema Radio Church ("너 나이 육십에 꼭 필요한 사업이 라디오와 문서사업"이라는 직접 음성을 듣고 시작했다함)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974년 설립, 작은 대학 규모의 학교같은 곳)

1979 가을. The Healing School 시작

1995년 비디오 테잎 배포 시작

1996년 Rhema Praise라는 TV 프로그램 54개국 전파

1999년 40개국이 더 늘어남

책: 두 부자는 약 125권(성경공부교재 포함)을 서술. 5천 3백만부 발간

월간지: 540,000여부 배포

테이프 - 58,000여개의 테잎 배포

Rhema Correspondence Bible School: 6만 이상의 등록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6500이상의 졸업생 배출

Rhema Bible Church: 아들 Hagin Jr.가 목회

 

그에 대한 비평서로는 D.R. McConneld의 "A Different Gospel과 Hank Hanegraff의 "Christianinity in Crisis"라는 책을 권하고 있고, Jeremy Reynalds의 "The Walking Wounded"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남은 우리가 병약하지도 아프지도 않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긍정적인 말로 그리 할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60년동안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는 혈관에 관련된 지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이 병으로 사망했다.

 

-자료출처- http://blog.Godpeople.com/kimjpact/?B002-1044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 Sr., 1917∼2006?)은 오순절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케년(E. W. Kenyon, 1867∼1948)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맥코넬(D. R. McConnell)은 [다른 복음]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았다. "해긴은 참으로 케년의 저술에서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그것이 케년의 저술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케년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순절 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설교 등을 통해 자기의 메시지를 잘 따르면 병과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역의 초기에 케년은 감리교의 완전 성화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에머슨 대학에 등록했는데 이 곳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 사상과 행태 등으로 얼룩진 기관이었다. 그 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유일교 목사로서 결국 에디 부인이 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에머슨 대학 출신 중 여러 명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넘어가 거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케년은 이들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의 원인이 되며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고 또한 신유나 기타 다른 기적들이 반드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해긴은 케년으로부터 ‘긍정적 고백 이론’을 물려받아 현 시대 오순절·은사주의 안에 파급시켜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은사주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케년의 책들은 해긴, 코플랜드, 고셋, 캡스 등 ‘긍정적 고백 이론’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가 되었다."
해긴은 그리스도의 육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영적죽음과 지옥에서의 투쟁이 죄를 제거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해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사탄과 및 그의 마귀들과 투쟁을 벌이고 승리한 결과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단 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행 20:28; 히 9:14; 10:10). 다시 말해 속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에서 자신의 영을 내놓으시며 돌아가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또한 예수님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분은 결코 길을 잃은 죄인이 아니셨다. 비록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나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결코 지옥에서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경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거나 혹은 지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곧 그는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1000년 동안 무저갱 즉 바닥 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될 것이고(계 20:1∼3), 궁극적으로는 불호수에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20:10). 또한 성경은 지금 이 시간에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해긴은 크리스천도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매우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스스로 큰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오순절 부흥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해긴은 또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덟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 자기를 지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의 일곱 번째 환상은 1962년 1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모든 교단과 교회를 움직이사 그들이 다 구원받고 성령 침례를 받게 될 것을 자기에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은 이미 위글스워스가 두 플레시스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현재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연합 운동을 통해 이런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이 예언이 실제로 이 세대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을 통해 이제는 오순절 성령 운동 연합 대회에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들이 대거 참석하여 천주교 미사를 거행하는 일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순절·은사주의 종교 통합 운동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관하는 운동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해긴은 또한 건강·번영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유·건강도 이미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유와 축사를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긴의 주장은 그의 행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여러 차례 심장병으로 고생했고 어떤 때는 한달 반이나 심장병으로 누워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다. 한편 그는 건강·번영·축복 복음을 매우 강조해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영적·재정적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다시는 예전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하거나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에게 딸린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명령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이제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천사들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헛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믿음·신유·번영 부흥사들은 한결같이 말의 능력 혹은 입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로 긍정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같은 말·믿음 이단교리는 현재 모든 오순절 교회 안에서 아주 확고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오순절 부흥사들의 집회와 마찬가지로, 해긴의 집회 역시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한번은 소녀 하나가 영 안에서 죽음을 당해 무려 아홉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는데 해긴의 부인과 또 다른 두 사람이 과연 이 일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자 해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주사 자기 손가락을 그 세 명의 이마에 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세 명은 곧바로 마룻바닥에 넘어져 마비가 되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해긴의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그들의 이마에 댔고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났다고 한다. 해긴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한 여인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공중부양은 심령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천국과 지옥을 다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해긴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웃음 부흥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웃음 운동' 부흥사 하워드-브라운을 초청해서 집회를 열곤 했다. 1997년 10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웃음 부흥 집회는 비디오로 녹화되었는데, 그 비디오 테이프(맨 아래 표시 사이트 참조)를 보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회에서 벌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해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케네스 코플랜드 등이 참가했다. 이 집회에서 해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숨을 내쉬고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막 치면서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 쓰러지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여자들은 치마가 다 벗겨진 채 뒤로 넘어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뛰어 나와서 덮을 것을 가져다가 넘어진 여자들의 하체를 가렸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해긴의 아들 역시 술 먹은 사람처럼 마룻바닥에서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해긴을 부축할 의무를 지닌 해긴의 수행원 가운데 한 명도 술 취한 것처럼 하며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무릎 사이로 넘어졌다. 한 마디로 그 곳은 혼동과 혼돈의 장소였다. 술 취한 것 같은 해긴을 강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네 명의 남자 수행원이 필요했다.
 
참으로 해긴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가 운영하는 '레마 성경 훈련 센터'를 수료한 뒤 해긴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온 세상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만 180여 개의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고 단파를 통해 전세계의 80여개 국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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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Word Faith) 운동
(이하 내용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중에서 발췌함)
‘믿음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말씀 신앙 운동’ - 말씀, 믿음 공식, 믿음의 말씀, 긍정적 고백, 말하고 주장하기 또는 건강과 부요와 형통의 가르침 등 - 은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로버트 틸턴, 프레드 프라이스, 찰스 캡스 등을 위시한 말씀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번영과 완벽한 건강을 약속한다. 그들은 그 정도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말씀 신앙 운동의 신학은 기독교를 가장 저급한 인간 중심적 종교-기독교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윽박지르고 꾀어 내고 조종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부두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체계로 바꾸어 놓았다.
해긴 등 말씀 신앙 지도자들은 신약적인 기독교의 핵심을 더렵혀 신자들의 초점을 건전한 교리,예배,봉사,희생,사역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대신 약속된 경제적, 물질적 ‘축복’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런 축복들은 말씀 신앙의 공식을 알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실 것으로 기대되는 화물이다.
 
말씀 신앙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진리는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주술(呪術), 즉 영적 테크놀로지이다.
말씀 신앙 운동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의 교리는 신자 개인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을 신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산타 클로스나 시종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말씀 신앙 신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자기 자신이다. 이 운도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작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부추긴다. 말씀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케네스 해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자신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곧 그리스도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화육(化肉)입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행동했고 아담이 말한 것은 이루어졌다. 아담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사탄을 자기 위에 받들어 모셨을 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하나님이 사탄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지만 반역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보다 아래 등급으로 떨어졌다.
코플랜드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권리를 얻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동급이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축복(치유,구원, 경제적 축복, 육체적 축복, 가정적 축복...등)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해긴과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신자를 즉위시켰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그들의 거의 모든 다른 오류가 뒤따라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최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창 3:4-5).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귀 자신을 타락하게 한 바로 그 거짓말이었다(사 14:14)
 
말씀 신앙 운동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심지어 사탄의 본성까지 취하셨다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33년동안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 동안 신성을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신학으로 알려진) 개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전개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신 것(빌 2:7)은 신적인 속성만을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뜻이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는 예수님의 불변성 때문에 불가능하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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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진 해긴과 말씀 신앙 전도자들을 전혀 분별없이 추앙하고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조국 교회들과 성도들이여,
정신차리고 이런 멸망케하는 허탄한 미혹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갑시다!
 
(마 24:4-5, 24-2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show)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십자가복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믿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복음)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2972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워치만 니(중국어 간체자: 倪柝声, 정체자: 倪柝聲, 병음: Ní Tuòshēng 니퉈성[*], 광둥어: ngai4 tok3 sing1 응아이 톡 싱, 1903년 11월 4일~1972년 5월 30일)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사역했던 교회 지도자이자 그리스도인 교사였다.

그는 1922년에 푸저우(福州, Fuzhou)에서 지방 교회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집회들을 세웠다. 자신의 30여년의 사역기간 동안 니는 성경을 해석한 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중국 전역에 교회들을 세웠고,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많은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어진 중국 공산 혁명기간에 니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투옥되어 20년 동안의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2009년 7월 30일 뉴저지주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인 크리스토퍼 H. 스미스(Hon. Christopher H. Smith) 의원에 의해 존경을 받았다.

가족과 유년 시절

워치만 니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세관(the Imperial Customs Service)의 존경받는 관원인 니원슈(倪文修)와 미국인들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감리교 미션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던 린허핑(林和平) 사이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린허핑은 상해에 있는 중국인 서구 여학교(the Chinese Western Girls’ School)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동안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로서 봉사하기 위해 의료분야에서의 잠재적인 경력을 포기한 젊은 여성인 위츠두(余慈度)를 만났다.[1] 워치만 니의 부모님 모두 감리교인이었기에, 그는 감리교 감독에 의해 유아 세례를 받았다.[2][3][4]

초기 학창 시절

워치만 니는 13살 때인 1916년에 푸저우(Fuzhou)에 있는 '교회 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운영하는 중학교에 들어감으로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푸저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부속 중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뛰어난 총명과 포부를 드러내었고 자신의 학급에서 꾸준히 일등을 유지했다.[1][5][6]

구원과 훈련

워치만 니가 17세인 1920년 봄에 도라 유는 푸저우에 있는 '천안당 교회'(天安堂, the Church of Heavenly Peace)[7] 예배당에서 열리는 열흘 간의 부흥 집회[8]에 연사로 초청되었다. 워치만 니 어머니가 이 부흥 집회에 참석한 후에, 그녀는 감동을 받아서 예전에 불공정하게 벌을 주었던 한 사건에 대하여 자기 아들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이런 행위가 니를 아주 많이 감동시켰고, 니는 거기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다음 날 복음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 집회에서 돌아온 후에 니 본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28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한면으로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기도한 후에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 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한 학생으로서 자신의 구원의 체험에 대해 동급생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돌아온 후 곧 주님께서 내 몸에서 일하시는데 지장이 있는 것들을 해결했다. 또한 70명의 동급생들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어떤 날에는 매일 한 시간씩 심지어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기도하기를 계속했고, 몇 개월 후에 70명 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았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회심 후에 기독교 봉사자로서 훈련받기를 갈망했다. 그는 처음에 고등학생임에도 상해에 있는 도라 유가 세운 성경 연구소에 다녔다. 그러나 늦잠을 자는 것과 같은 나쁘고 게으른 습관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 니는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 영국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和受恩; Margaret E. Barber) 자매와 가깝게 되었고, 그녀는 니의 교사와 조언자가 되었다.[9][10] 니는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매주 바버 자매를 방문했다. 바버는 니를 젊은 학습자로 취급하여 종종 엄격하게 훈육했다. 바버가 1930년에 죽었을 때, 자신의 모든 소지품들을 니에게 남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복건(Fukien)에 있는 나성탑(羅星塔) 백아담(白牙潭(Lo-Hsing Pagoda)에 살던 바버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은 분이었으며, 그녀의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에 대한 그러한 충성은 이 세상에서 발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위트니스 리,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니는 바버 여사를 통해 디 엠 팬톤(D.M. Panton),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펨버(G.H. Pember),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다.[9] 이에 더하여 그는 존 넬슨 다아비(John Nelson Darby),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맥킨토시(C.H. Mackintos) 같은 플리머스 형제회 교사들의 책들도 소장했다. 마침내 그의 개인 서재는 교회 역사, 영적인 성장, 성경 주석 등에 관한 약 3천 권이 넘는 책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니는 사역의 초기 시절에 수입의 삼분의 일은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삼분의 일은 남을 돕기 위해, 나머지 삼분의 일은 영적인 책들을 사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자료를 택하고, 이해하며, 분별하고, 기억하는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한권의 책의 요점을 쉽게 붙잡았다.[11]

결혼

니는 10대 때에 장핀훼이(Charity Chang)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 두 가정 사이에는 삼대에 걸쳐 친교가 있었다. 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장핀훼이는 그의 면전에서 예수를 조롱했다. 이것은 그를 괴롭혔다. 니는 많은 고심 끝에 그들의 관계를 끝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십 년 후, 장핀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1934년부터 상해 교회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6] 니가 항저우에서 4차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핀훼이는 자주 아픈 니를 돌보았고, 그가 투옥된 후에는 유일하게 그녀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6]

사역

워치만 니는 1936년에 한 무리의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의 윤곽을 말했다.

그 때로부터 나는 하나님에 의해 고침받을 때까지 병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의 종류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1. 문서사역: 내가 병이 나은 후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성경 주해서 저술이 아니요, 일반적인 복음 전도도 아니요, 예언 해석도 아니요, 다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독자들이 새 창조물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의 저술들을 나의 독자들과 나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영이 나를 인도하여 그분의 모든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

2. 이기는 자 집회: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밝혀주사 각지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 일어나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매년 한 차례씩 이기는 자들의 집회를 열어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신 말씀을 충심으로 전했다.

3. 지방 교회들을 세움: 주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을 섬기게 하신 것은 부흥 집회를 열어 사람들이 성경의 교리를 더 많이 듣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내가 한 지방 한 지방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여 그를 나타냄으로써 지방 교회들의 합일(合一)의 간증을 나타내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분량대로 지체의 봉사를 하여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의 승리 생활이나 영성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서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하나님 자신께 드리는 것이다.

4. 젊은이들을 훈련시킴: 만일 주님의 오심이 지체된다면, 반드시 청년들을 일으켜 다음 세대에도 계속 그의 간증을 잇게 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하나의 신학교나 성경 학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한 면으로는 영적 생활을 훈련하고, 서로 상합하며 성경 읽기와 기도를 훈련하며 좋은 인성을 기르고, 또 한면으로는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체와 천연적인 생명과 그런 것들을 처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그들은 각 지방 교회로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내 마음에 눌림이 있었던 일은 대체로 이 네 가지가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매우 이른 나이부터 저술과 출판을 시작했다. 그는 1923년에 '현재의 간증'(The Present Testimony)이라는 잡지를 펴내기 시작했고, 1925년에는 기독도보(The Christian)라는 또 다른 잡지를 시작했다. 니가 자신의 이름을 '니슈토'(Ni Shu-tsu)에서 '니토셍'(Ni To-sheng, 영어 번역은 Watchman Nee)으로 바꾼 시기도 1925년도였다. 니가 스물 한 살 때 중국에서 말레이시아 시티아원(Sitiawan, Malaysia)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다. 니는 1926년에 상해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고, 그곳은 중국에서 그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2년에는 지방 교회들로 모이는 니의 실행이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투옥될 때까지 유지했다.[1][6][12]

니는 1928년에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이라는 세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13] 니는 같은 해 2월에 상해에서 그의 첫번째 "이기는 자 집회"를 열었다. 1934년에 니는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신 그리스도"와 "이기는 자들"을 주제로 한 특별 집회를 열었다. 니에 따르면,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와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중심성이요 우주성이신 그리스도라는 한 살아있는 인격으로 큰 전환을 가졌다."[1][6][14]

1934년에 니는 성경에 있는 교회는 결코 지역들로 나뉠 수 없고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교단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지방 교회들의 실행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련의 담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담화들은 마침내 <모이는 생활>(The Assembly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오월에 니는 위트니스 리를 격려하여 옌타이에서 상해로 이주하게 하여 자신과 이연여(Ruth Lee) 자매가 맡고 있던 니의 출판물을 편집하는 일에 합류시켰다.[1][6]

1938년에 니는 유럽 여행 중에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후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4] 그가 돌아온 후에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집회를 가졌다. 니에 의하면 이것이 그의 사역에서 두번째 전환이었다. 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번째 전환은 그리스도를 안 것이고, 두번째 전환은 그분의 몸을 안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 것은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의 절반일 뿐이다. 믿는 이들은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분은 또한 몸이시다."[1]

1939년에 니는 그의 둘째 남동생이 하던 기울어져 가는 제약회사 공장 운영에 관련되었다. 가족들의 압력을 마지못해 따른 것이지만, 니는 또한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극심한 가난과 고난으로 고통 당하던 자신의 많은 동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니는 전반적인 공장 관리를 넘겨 받은 후, 그것을 재편성했고, 상해에 있는 다수의 지방 교회 구성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상해 교회의 장로들 중 몇 명은 니가 사업에 연관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니가 1942년에 그의 사역을 잠시 중단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상해 교회는 집회를 중단했다.[1][6]

1945년 3월 6일에 니는 중경(Chongqing)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는 공장을 감독했다. 거기서 그는 아가서에 관한 메시지들과 <교회의 정통>(The Orthodoxy of the Church)으로 출판된 계시록 2장과 3장에 관한 일련의 메시지들을 전했다. 1945년 9월 9일에 일본군은 중국을 포기하고, 제2차 중일전쟁은 끝났다.[6] 1946년에 왕포진(Peace Wang) 자매와 위트니스 리 형제는 거기서의 니의 문서 사역은 물론 상해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니는 크리스천 일을 하는 자신의 동역자들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고령산(Kuling)에 12채의 목조 단층집을 구입했다. 1948년 4월에 상해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고 니는 거기서 자신의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니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듯이 사역을 위해 자신의 제약 공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사역을 위해 다 내놓게 했다. 짧은 기간에 상해 교회는 1천명으로 증가했다.[1][6]

박해와 투옥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출현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15] 또한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거짓 정죄를 받고 체포되었다. 강화된 선전 캠페인과 구금 위협을 통하여, 믿는 이들은 서로 밀고하도록 영향 받았다.[16][17][18]

1952년 4월 10일에 워치만 니는 만주(Manchuria) 공안 당국자들에 의해 상해에서 체포되어, 뇌물공여, 국가재산 절취, 조세 회피, 정부계약 사취, 정부의 경제 정보에 대한 불법 취득으로 기소되었다. 니는 또한 "재 교육" 되었다. 1956년 1월 11일에 지방 교회들 내의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겨냥한 전국적인 소탕이 있었다. 일부는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은 무기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1956년 1월 18일에 종교 사무국(the Religious Affairs Bureau)은 상해에 있는 난양 가(街)(Nanyang Road)에 위치한 교회 집회 장소에서 12일 간의 규탄 집회를 열었다. 그 규탄 집회에서 니를 반대하는 많은 참소들이 소개되었다.[19] 1956년 6월 21일에 니는 상해 고등 법정에 출두해서, 상해 교회 장로들에 의해 출교되는 선언이 있었고, 모든 혐의들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는 노동 교화가 포함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해에 있는 틸랑퀴오 감옥(Tilanqiao Prison)에 수감되었고 후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오직 그의 아내인 핀훼이 만이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56년 1월 29일에 공안 당국이 난양로 건물을 접수했고, 많은 니의 동역자들이 체포되어 격리되었고, 워치만 니를 거부하도록 강요받았다. 왕포진(Peace Wang), 이연여(Ruth Lee), 유성화(Yu Chenghua) 등은 묵비권을 유지하며 감옥형을 언도받은 반면, 일부 동역자들은 워치만 니를 참소하는데 가담했다. 이런 일에 이어서 "반혁명분자 워치만 니"를 정죄하는 대규모 규탄대회가 전국에 걸쳐 개최되었다.[20][21]

투옥 후반기와 죽음

니가 1972년에 죽기 1년 전에 그의 아내인 핀훼이가 의자에서 넘어지는 사고와 고혈압으로 죽었다. 니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 핀훼이의 큰 언니가 감옥에 있는 니를 돌보는 책임을 졌다.[22] 니는 1967년에 석방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1972년 5월 30일 죽기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23]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통지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감옥에 도착하기 전인 1972년 6월 1일에 소각되었다.[6]

니의 한 조카 손녀가 니의 유골을 가지러 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72년 6월에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큰 이모 할머니와 함께 농장으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할아버지를 이미 화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유골 밖에 볼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분은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겨 놓았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일생 동안 그분이 죽기까지 붙잡았던 진리를 증거하길 원하셨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큰 진리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셍." 농장 간부가 이 종이를 우리에게 보여 줄 때, 나는 이 글을 신속히 마음에 기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죽기까지 충성하시고 피로 물든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가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이 살아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랐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분들이 주님 앞에서 재회하는 더 나은 것을 예비해주셨다.

―워치만 니의 조카 손녀, "워치만 니: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의 사후에 니의 동료 수감자였던 우요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니의 옥중 생활과 순교를 증언해 주었다. 우요치에 따르면 워치만 니는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중국 당국의 거듭된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신앙

니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 즉 아버지, 아들, 영이시며, 셋은 구분되시지만, 완전히 하나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존재하시고, 서로 안에 상호내재하심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고, 인간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 모두를 가지신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음을 믿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었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몸을 입고 일어나셨음을 믿었으며, 하늘로 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영광으로 관 쓰셨으며, 만유의 주가 되셨음을 믿었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영접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각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용서될 것이고, 그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씻겨지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성령에 의해 거듭나며,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었다. 그러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믿었다. 그는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운명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믿었다.[6]

출판물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주 말한 것에 더하여, 워치만 니는 여러 권의 저서들, 논문들, 서신들, 찬송들의 저자이었다. 그의 책의 대부분은 그가 메시지 전한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받아 적은 노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부 책들은 이전에 정기 간행물로 출판된 메시지들로부터 편집된 것이다.

워치만 니가 쓴 영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다. 이 책은 1938년부터 1939년의 유럽 여행 중에 그가 영어로 전한 담화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신약의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워치만 니가 쓴 책 중에 널리 알려진 것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영에 속한 사람 (1928)
  • 우리의 위임에 관하여 (1939)
  • 아가서 강해 (1945)
  •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1950)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1957)
  • 좌행참 (1957)
  • 주여 이 사람은 (1961)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968)

워치만 니는 자신의 책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적인 출판물들도 자신의 영감 아래 영어에서 번역하여 출판했다. 그것들은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마담 귀용(Madame Guyon), 메리 맥도너우(Mary E. McDonough),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와 일부 다른 이들의 저술을 포함한다.[24]

추가로 읽기

  • Chen, James. Meet Brother Nee(니 형제님과의 만남). Hong Kong: The Christian Publishers (1976).
  • Kinnear, Angus. Against the Tide(시류를 거슬러서). Eastbourne: Kingsway Publications (2005).
  • Laurent, Bob. Watchman Nee: Man of Suffering(워치만 니: 고난의 사람). Uhrichsville: Barbour Publishing (1998).
  • Lee, Witness. Watchman Nee: A Seer of the Divine Revelation in the Present Age(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워치만 니).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 Lyall, Leslie. Three of China's Mighty Men(중국이 낳은 위대한 세 사람). London: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1973).
  • Nee, Watchman. Watchman Nee’s Testimony(워치만 니의 간증). Hong Kong: Hong Kong Church Book Room (1974).
  • Sze, Newman. The Martyrdom of Watchman Nee(워치만 니의 순교). Culver City: Testimony Publications (1997).
  • Wu, Dongsheng John. 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워치만 니의 이해-영성, 지식, 형성). Eugene: Wipf & Stock Publishers (2012).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지방교회 이단에 관한 학술 자료(3)

  • 유동근 목사


워치만 니 사역의 가장 큰 문제점

⑴ 표절의혹 (allegation of plagiarism)

⑵ 삼분설의 위험성 (Danger of Trichotomy)
 

1948년에 Nee와 그의 동역자들이 더 이상 <영에 속한 사람>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의 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Nee는 계속해서 ‘spirit’(본능, 직감)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soul’(합리성과 생각)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온전한 진리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합리성과 마음을 사용하도록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마음을 인간의 기능으로 창조하셨지만, 오늘날에도 지방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경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ibid p. 233
 

반지성주의

‘영’(성령이 아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가 회심한 지 불과 몇 년 후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전체 사역을 통해 그 주제를 가지고 갔고 <The Spiritual Man>은 그 주제에 대한 그의 고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Nee가 ‘영/혼 분리’, ‘영 우월/혼 열등’의 원칙을 그의 핵심 신학적 개념으로 확고하고 극단적으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영향을 받았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 귀결되었습니다.
 

영은 가장 높고 몸은 가장 낮다 (Spirit is the Highest and Body the lowest)

워치만 니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영은 하나님과 결합 되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몸은 물질계와 접하고 있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가장 고귀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합니다. 몸은 가장 낮고 밖에 남아 있습니다. 혼은 영과 육 사이에 거하며 둘 사이의 매개체입니다. 우리의 전체 존재 중 오직 한 부분, 즉 거듭난 영만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대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별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활동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만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이 영을 가져야 합니다.
 

Nee의 개념은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뒤따른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에서 처음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펜루이스(Penn-Lewis) 부인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극단으로 치우침으로써 성경적 진리에서 위험한 이단으로 표류할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Nee는 헌신에서 이런 종류의 영적 의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지침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선구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갔고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역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그의 도구가 된 것은 Nee의 빗나감이었습니다.
 

'머리 지식' (Head Knowledge)

지방교회에서 ‘머리 지식’은 ‘영’에서가 아니라‘혼’에서 나온 ‘지식’을 의미하므로 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 뇌의 사고 과정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마음과 생각, 앎과 행동, 추론과 지각은 항상 분리할 수 없고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우열은 없고 다만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마음과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식과 생각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경은 지식과 추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또한 추론(이해의 영역- 역자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추론도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니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깨끗하고 흠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빌 1:9-10.) 그러므로 지식과 통찰과 비전은 분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Nee 사역 동안 상해교회(SCA) 내에서 전혀 불충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베드로후서 1:5-6.)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굳건히 서서 진리의 허리띠를 허리에 두르라...” (엡 6:14.)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허리를 묶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일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워치만 니 부부

반합리주의가 파멸의 원인이었다 (Anti-rationality Was a Cause of Ruin)

Nee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통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머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형제자매들을 앞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권위를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복종하려면 먼저 머리가 잘려야 합니다.
 

지방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깊은 헌신과 의지는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 7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던 거의 대부분의 지방교회들이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Nee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경건한 신자들의 ‘머리’가 자신의 생각이 없이 잘려 나갔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교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지성주의는 맹목적이 되게 한다 (Anti-intellectualism leads to Blindness)

1951년에 발행된 Nee의 잘못된 연설인 ‘나는 어떻게 돌아섰는가?(How did I Turn Around?)’는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인민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실상 무신론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이었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합니까? 아니면 인민의 입장 (‘People’s Standpoint’)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까요? Nee가 체포된 후로 그 몇 년 동안 Nee의 심각한 실수를 지적하기 위해 일어선 인도자들이 있었다면, 상해교회(SCA) 신자들은 1956년 전시회(CEC) 동안 믿음을 뒤흔드는 폭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 받았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 영적 인도자들도 세뇌당했고, 그들은 자신도 폭풍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과 생각이 합력하여 불합리한 이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ibid. pp. 256-257 Chapter Eighteen: Issues Within SCA
 

⑶ 몸(지방교회)을 너무 높였다 (Too much Emphasize of the Body)
 

다가오는 보편 교회의 모델

지상의 모든 교회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른 교회와 적절한 위치와 관계에 자신을 배치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회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SCA(상해 지방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기에 가장 좋은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적인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을 SCA(상해교회)에 가입하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The Union of the Church(교회의 연합)’ 또는 ‘The Church United(교회의 하나됨)’라고 미화했습니다.
 

1948년에 워치만 니는 전국 동역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는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다비(Darby)는 또한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각 시대마다 주님은 그분이 이루고자 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회복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시대에 그분이 행하신 특별한 회복과 일이 그 ‘시대의 사역’입니다.
 

역사(work)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각처의 동역자들은 먼저 자신을 내어 드리고 머리 아래 두며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하실 수 있고 그래야만 일이 진행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주요 결정과 지시는 몸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장차 몸의 나타남은 오늘날 지방교회들의 간증의 본질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은 장차 올 우주 교회의 모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지방교회 안에서 그리고 지방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ibid. pp. 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