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할 도서




플라톤 '국가'에 나타난 사상

"국가"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 저작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담고 있으며, 초기에서 중기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사상과 방법론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문체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제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기 이후에 속한다. 미하엘 보르트는 중기 대화편으로 본다. 그러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제1권은 초기 후기, 제2편~제10편은 중기 후기의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이데아(idea), 관여(methexis), 결합(koinonia), 변증법(dialektike) 등의 개념이 제1권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 제1권

제1권을 ‘트라시마코스 편’이라고도 한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가 정의(正義)는 ‘강한 자가 얻는 이익’이라는 주장에 대해 대화 참여자 소크라테스가 이를 논박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정의)이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의술이나 조타술을 예로 들어서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techne)은 기술의 시혜를 입을 약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기술이나 힘을 강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트라시마코스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2) 제2권

글라우콘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연결해서 ‘올바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트라시마코스의 편에 서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말하도록 한다. 제2권에서는 ‘올바름(정의)’을 논의하기 위해서 그 자체로서 ‘좋은 것’과 좋은 것들 사이의 차이를 검토한다. ‘올바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상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로 가는 것을 예시하면서, 분업과 전쟁, 수호자 교육 등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수호자를 선발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교육 내용으로서 시가(詩歌)교육에 대해 논한다. 그는 아동 교육에서 신화나 설화, 신들의 다툼 등을 다루는 부분을 비교육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제외할 것을 주장한다.

3) 제3권

여기에 플라톤은 시가교육에서 영웅, 죽음과 저승 등의 묘사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부분들을 언급한다. 또 그는 모방(mimesis)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는 어린이들은 모방을 하게 되므로 거짓된 것, 비극적인 것, 질병, 만취, 좌절, 느슨하고 나쁜 리듬(음악) 등을 배우지 않도록 하고 용기, 절제, 경건, 자유인다움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는 일종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통하여 아이들이 배운다는 점, 태도는 말보다 행위를 통해서 배운다는 점, 음악교육에서 어린이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 시사점을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철학(philosophy)’ 개념도 나온다.

4) 제4권

여기에서는 올바른 나라에 대한 논의를 확대해 나간다. 올바른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이며, 시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나라이고, 지혜로운 나라이다. 여기에서 올바름과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들어 있다(kalepa ta kala. 아름다움은 어렵다). 정의로운 나라는 세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구성원에게는 각각의 덕성이 필요하다. 통치자는 지혜를, 군인은 용기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절제는 화음(harmonia)과 같아서 지혜와 용기의 덕성과 달리 전 나라에 고루 필요한 덕성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한 교육(paideia)의 개념이 나타난다.

5) 제5권

여기에서는 수호자의 교육에 필요한 6세 교육이 논의된다. 제4권에서 나온 처자 공유의 문제가 교육의 문제로 이어진다. 어릴 적부터 공동체 교육을 위해서 공동 출산과 공동 양육, 여자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중요한 논술개념인 토론(dialektos)과 쟁론(eris)의 차이에 대한 구분이 나온다. 토론은 사고의 ‘분할(diairesis)’로서 요즘 말하는 마인드맵과 같은 사고훈련과 같다. 쟁론은 ‘낱말(onoma)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서 요즘 말하는 말꼬투리 잡기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소피스트적 논박'에서 쟁론적 논의를 '말싸움'이라고 하였고 스피노자는 그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규정했다. 토론의 목적은 참된 앎을 추구하는 과정이지 승리법은 아니다.

6) 제6권

이 권에서 특히 중요한 유비가 나오는데,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가 그것이다. 태양의 비유를 통해서 보이는 것들과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근원(dynamis.힘)을 논하며, 눈의 힘은 태양에서 분배 받는 것(methexis)라는 것. 혼에 유비시켜도 마찬가지인데, 진리와 실재에 대해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을 대비시킨다. 선분의 비유에서는 억측(doxa)이나 확신(pistis)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이고, 추론적 사고와 참된 앎(epistēmē)은 오직 지성(noesis)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으로 대비시킨다.

참고로 유비는 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와 같다. 비유는 A와 C가 같거나, 유사하거나 포함관계가 있어야 한다(유비와 비유의 차이).

7) 제7권

여기에서는 지식과 교육의 중요한 개념들이 가장 많이 나온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무지한 상태를 벗어나 참된 앎의 세계로 나아가기까지 교육의 힘이 강조된다. 파이데이아(paideia)는 원래 귀족 자제의 교육을 돕는 노복(奴僕)을 뜻한다.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알리려는 교사의 태도, 자유인의 교육, 놀이교육, 변증술의 교육까지 중요한 개념들이 나온다. 특히 혼이 위를 바라보도록 하는 교육은 오늘날 교육에서 목적 있는 교육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8) 제8권

여기에서는 잘못된 정치 체제 4가지(명예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제)와 최선의 정치(철학자가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비교한다.

9) 제9권

참주와 최선자(철인왕)의 극명한 대비를 한다. 특히 제1권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한 정의로운 나라가 강자가 이익이 되는 법정체계라는 주장이 논박된다.

10) 제10권

시에 대하여, 침상 제작자 유비를 통하여 이데아를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해 논한다. 레테(lethe) 강의 비유를 통해서 이데아로의 회귀를 이야기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윤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도표는 플라톤의 "국가(Politeia)" 전권을 주제와 방법으로 간략하게 분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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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이라는 이름의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해부

1. 들어가며

『죽음에 이르는 병』은 흔히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철학적·신학적 사유가 극도로 응축된 실존 철학의 결정체에 가깝다. 
덴마크의 사상가 쇠렌 키르케고르가 1849년에 발표한 이 저작은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병, 즉 절망을 다룬다. 
여기서 말하는 절망은 감정적 우울이나 일시적인 좌절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병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적 서사나 극적인 사건 대신, 인간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유의 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소설적 독해가 가능한 텍스트다. 
인간이라는 ‘등장인물’이 절망이라는 상태 속에서 어떻게 분열되고, 어떻게 스스로를 잃어버리는지를 하나의 내적 드라마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2. 작품의 개요와 기본 구조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안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가명을 통해 서로 다른 실존 단계의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이 가명은 그중에서도 가장 철저히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한 시점을 상징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절망이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정의하고 유형화한다.
2부에서는 절망이 곧 죄라는 신학적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 구조는 단순한 이론 전개가 아니라, 독자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점점 더 깊은 층위에서 직면하도록 이끈다. 

3. 줄거리 : 서사가 없는 서사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내적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한 흐름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자, 그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와 정신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인식하는 존재다. 
문제는 이 관계가 어긋날 때 발생한다.

절망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제시된다.

첫째,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절망
둘째,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
셋째,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려는 절망

이러한 절망의 단계는 점점 더 의식적이고,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간다. 
가장 위험한 절망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절망이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며, 동시에 가장 깊은 자기 상실에 빠진다. 

4. 주제의식 : 절망이라는 실존의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의 핵심 주제는 단연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다. 
오히려 죽을 수 없음, 끝낼 수 없음이 이 병의 본질이다.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이 병은 육체를 죽이지 않지만, 영혼을 끊임없이 소멸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며, 그 상태가 지속되는 한 절망은 계속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절망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조차도 절망 속에 있을 수 있다. 
절망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5. 인물 분석 : 등장인물 없는 인간 유형들

이 작품에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인간 유형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형은 무의식적 절망자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고,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의 기준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만 자신을 규정한다.

다음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 약함,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책임, 자유, 선택이 이들에게는 고통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간형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려는 인간이다. 
이 유형은 가장 고차원적인 절망의 형태다. 
이들은 강한 자아의식과 주체성을 지녔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둔다. 

6. 역사적 사상적 배경

『죽음에 이르는 병』은 19세기 유럽, 특히 헤겔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쓰였다. 
당시 철학은 이성과 체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는 인간 존재를 체계로 환원할 수 없으며, 실존은 언제나 불안과 선택, 책임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또한 덴마크 국교회가 형식적 신앙에 머물러 있던 상황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이다. 
키르케고르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7. 감상 : 읽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게 되는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은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변명 없이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문장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충격은, 우리가 흔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절망이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삶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 책은 절망을 통해 희망을 말한다. 
절망을 끝내는 길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올바른 근원에 다시 연결하는 행위다. 

8. 맺으며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 존재에 대한 잔혹할 정도로 정직한 진단서다. 
그러나 그 진단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숨기지 말고 끝까지 인식하라고 말한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될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삶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신앙과 자아에 대한 질문이 깊어질 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텍스트다. 
그리고 그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른 목소리로, 그러나 언제나 동일하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쇠렌 키르케고르
실존의 불안을 끝까지 사유한 고독한 사상가

쇠렌 아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19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그리고 문학적 사상가이다. 
그는 흔히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철학 체계를 세우기보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평생을 바친 사상가였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언제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개인의 고통과 선택, 불안과 책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생애와 개인적 배경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신앙인이었으며, 깊은 죄의식과 종말론적 신앙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가정환경은 키르케고르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훗날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죄, 불안, 절망의 정조로 이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보였으며,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기보다는 글을 통해 시대와 개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길을 선택했다. 특히 약혼자였던 레기네 올센과의 파혼은 그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개인적 사랑과 신 앞에서의 결단이라는 주제를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었다. 

2. 가명 저술과 문학적 전략

키르케고르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가명 저술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직접 설교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관점과 실존 단계에 서 있는 인물들을 가명으로 등장시켜, 독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사유하도록 유도했다.

대표적인 가명들로는

  • 미적 삶의 관점을 보여주는 인물

  •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인물

  • 신 앞에서의 단독자를 대변하는 인물

등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키르케고르가 진리를 교리로 전달하기보다, 개인의 내적 결단으로 체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3. 사상의 핵심: 실존, 선택, 단독자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개인이 있다. 그는 인간을 집단이나 체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헤겔 철학이 당대 유럽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키르케고르는 보편적 이성보다 개인의 실존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이며, 그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과 불안이 따른다. 선택을 회피하는 삶은 편안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비실존적 삶이라 보았다.

또한 그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 이해했다. 신앙은 제도나 관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걸고 감행하는 결단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4. 기독교 이해와 시대 비판

키르케고르는 열렬한 기독교 사상가였지만, 동시에 당시의 교회 제도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교회가 신앙을 사회적 관습과 도덕 규범으로 축소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기독교는 편안한 위안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인정받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긴장 관계에 놓이는 길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드러난다. 

5. 문학적 영향과 현대적 의의

키르케고르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글은 논문처럼 건조하지 않고, 에세이·일기·설교·문학적 독백의 형식을 넘나든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철학, 신학, 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른다.

그의 사상은 이후 사르트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현대 문학과 신학, 심리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으로 남아 있다. 

6. 맺으며

쇠렌 키르케고르는 정답을 제시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상가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일에 가깝다.

그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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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3대 비판서 도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고전  
칸트의 3대 비판서폭넓은 문제의식으로 객관성과 보편성 추구
 … 오늘날에도 유효한 철학적 의문 제시

흔히 고전이라 하면 해묵은 이야기책이나 옛날 사람들이 쓴 작품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전은 오랜 시간을 거쳐 널리 애독되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이에 우리신문에서는 각 학문 분야별로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칸트의 3대 비판서로 불리는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이 세상에 나온 이후의 독일은 그 이전과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18세기경 독일은 유럽에서 정치·경제·문화·학문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 철학의 영향으로 성립된 독일관념론, 이와 연관관계에서 형성된 낭만주의 운동 및 질풍노도 운동 등과 더불어 독일의 학문 및 문화는 유럽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의 철학은 이미 그의 생애뿐 아니라, 그의 사후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 자신이 철학 이론을 정립함에 있어 폭넓은 문제의식과 깊이 있는 탐구자세로써 임함에서 기인하며, 또한 철저한 객관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그의 정신에서 결과한다. 칸트 철학의 체계는 크게 자연의 객관적 법칙, 인간 행위의 실천적 법칙, 그리고 아름다움의 법칙 및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루고 있는 3대 비판서로 분류된다.
자연의 객관적 법칙의 정당성을 논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철학의 방향을 전통적 이론의 전승이라는 역할로부터 완전히 끊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통적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자연과학에서도 자연을 탐구할 때, 자연 법칙은 자연의 ‘사물 자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결코 사물 자체의 본질을 인식할 수는 없고 단지 사물의 ‘현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언명한다. 우리의 인식 능력을 사물 자체에까지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독단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논함으로써 전통적 이성론(합리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칸트는 자신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도 현대 윤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칸트의 윤리학 이론을 체계화한 책이 바로 ‘실천이성비판’이다. 현대 윤리학을 형성하고 있는 두 개의 근본적 이론을 말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윤리학과 칸트의 윤리학이다. 공리주의가 인간의 경험적 감정 및 계산적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시인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것을 각자 스스로에게 의무로 명령하는 윤리학이다. 이것이 바로 정언명법(定言命法)이다.
흔히 인간의 고차원적인 마음 및 문화를 우리들은 진선미(眞善美)로 구분한다. ‘순수이성비판’이 진의 영역을 논한다면, ‘실천이성비판’은 선의 영역을, 그리고 ‘판단력비판’은 미의 영역을 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우리가 아름다움 및 숭고함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논하며, 나아가 아름다움 및 숭고함을 느끼는 마음은 전체로서의 자연의 궁극적 목적과 관계되어 있다. 칸트의 예술철학 및 미학 이론은 근대 미학을 형성·발전시키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독파한다는 것 자체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이 책들에 쉽게 접근하는 길들을 참조하면서 파악을 시도한다면, 그 책들에서 논하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들이 세계를 생각할 때 천착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나아가 현재에도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소재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최 인 숙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칸트가 3대 비판서를 집필한 이유는 무엇인가?


칸트가 살던 18세기 후반은 노동 및 사회 분화, 학문 및 가치 분화가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철학도 이 시기에 과학 일반과 분리되어 자신의 고유한 위상을 찾아야만 했다. 칸트는 철학의 근대적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다.


과학의 본업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지식을 확장해가는 데 있다면, 철학의 본업은 어디에 있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과학과 경쟁하여 미지의 것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비판하는 데 있다.

이때 비판한다는 것은 근거나 전제를, 다시 말해서 가능 조건을 밝히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비판이란 우리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을 드러내고, 그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인 경험의 보편성 주장이 정당한지 판정하는 일이다. 가령 과학자가 부의 확장을 꾀하는 상인에 비유될 수 있다면, 철학자는 상업적 활동의 법률적 조건을 따지는 변호사에 해당한다.

또한 18세기 후반은 이론, 실천, 예술이 각각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가는 시대였다.이론은 진의 가치를, 실천은 선의 가치를, 예술은 미의 가치를 추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각각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능 조건 위에 서 있는지 밝히고, 따라서 각각의 타당성 영역이 어떻게 다른지 입증했다.

가령 우리는 이론적 지식을 추구할 때는 윤리적 규범의 관점을 배제해야 한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판정할 때는 이론적 객관성의 기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윤리적 행동의 가치를 판정할 때는 과학성이나 예술성을 문제 삼을 때와는 다른 원리에 의거해야 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Wikimedia: Foto H.-P.Haack) / 《실천이성비판》

칸트는 3대 비판서를 통해 이론적 지식의 객관성을 따질 때의 기준, 실천적 행동의 도덕성을 문제 삼을 때의 근거, 예술적 창작의 심미적 가치를 판정할 때의 원리를 차례대로 해명하고자 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도덕적 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심미적 판단이 과학적 지식만큼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차례로 답하고자 했던 것이다.

칸트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원리들이 모두 우리 마음에 내재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결국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실천적, 예술적 보편성이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칸트(Kant) 3대 비판철학 완전 정복 -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ㅣ칸트 300주년ㅣ칸트 생애ㅣ선험적 인식론(feat.a priori)ㅣ독일관념철학






인생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생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류우현

한 때 서양에서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존 롤즈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매킨타이어 덕윤리학과 같은 가치와 사상에 관한 탐구 열풍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학자들의 사상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태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것들이다. 이 사상가들에게 귀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온 2천여 년 전의 책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바로 그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원래 유명한 고전이란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것과 달리 의외로 가장 읽히지 않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 고전은 우리 삶과 가치 판단에 어떻게든 작용하고 있기에 소중한 것들이다. 다소 난해한 책이지만 나는 과감하게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철학서 한 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나온 사상을 요약한 것이 아니므로 원본 독파를 권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 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왕궁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실의 의사였는데, 니코마코스의 손자,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이름도 니코마코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사후에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Academeia’라는 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부터 플라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플라톤의 이 학당에서는 철학을 비롯해 수학, 천문학, 음악 등의 학문을 중요하게 여겼다. 20년 간 아카데메이아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그가 학당을 떠났는데 플라톤이 섭섭하게 여겼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차버리고 말았다. 마치 망아지가 낳은 어미를 그렇게 하듯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학문의 전당을 일컫는 아카데미.Academy는 플라톤 학당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른 설(說)도 있다. 헤르미포스에 의하면 필립 왕의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학당의 수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자리를 찾지 못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회랑.Peripatos을 오가며 사람들과 철학을 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렀다. 또 기원 전 347년 플라톤이 죽고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새로운 학원장이 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에 아카데메이아 분교를 열고 스승과 다른 독자적인 철학을 펼쳤다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3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Philipos의 요청으로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스승이 되어 그를 가르쳤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정복을 꿈꾸자 그는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테네에 뤼케이온.Lycheion이란 학당을 개설했다. 프랑스 중등학교를 일컫는 리세.Lycée는 바로 이 뤼케이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류사에 미친 업적은 플라톤 못지않다. 플라톤이 제시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visible world이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invisible world, idea이다. 플라톤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는 가짜이고, 참된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였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존재의 본질인 우시아.ousia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앎과 행함의 관계를 주지주의(主知主義) 관점에서 보고, 참으로 알면 행하게 된다고 본 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으로 안다고 해도 의지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수사술(修辭術)을 논리성과 윤리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격렬히 비판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술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수사학(修辭學)으로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분야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는 내용의 학문에서는 물리학과 정치학이 있고, 방법의 학문에서는 변증법(논리학)이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는 지식의 분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이론지.apodeiksis, 실천지.phronesis, 제작지.thechnē 세 가지로 분류하고 저술하였다. 이론지에는 형이상학, 철학, 수학, 자연학 등을 포함한다. 실천지에는 정치학, 니코마케아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들어 있다. 제작지에는 수사학과 시학이 있다. 이외에 특별히 오르가논.organon(분석론)이 있는데 이는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학문으로서 요즘 말로 논리학.logics과 논술에 관한 책이다. 오르가논은 정의와 명제, 삼단논법, 논증, 논박, 오류론 등이 대단히 중요한 학문의 기초로 여겨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근대 이후 임마누엘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칸트는『도덕형이상학 기초놓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자연학(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은 주제의 본성에 완벽하게 맞으며, 더 개선할 점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외에도 그의 저작들은 분량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하다. 어쩌면 그의 동료와 제자들의 노력이 보태어진 것일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 등록된 저술 목록만 살펴보아도 무려 390권이 넘으며 행으로 따지면 44만 5,720줄에 이른다. 하지만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발견되지 않은 저작을 포함하여 실제로 무려 660권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전 세계에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아랍계 스콜라 철학자인 아베로에스.Averroes(이븐 루시드)의 공로가 컸다. 그는 무슬림 지배 하의 알 안달루스에서 의학, 신학, 철학, 어학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난 주해자(註解者)였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전파한 사람이었다. 아베로에스는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 등장하며, 이슬람 사상가로는 라파엘로의 천장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이단성 논쟁으로 매우 시끄러웠고, 이 다툼의 환경을 소재로 수도원의 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 유명한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이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사회ㆍ역사적 맥락과 업적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최고선(最高善)’이다. 최고선이란 바로 ‘행복.eudaimonia’이란 개념으로 표현된다. 고대 그리스 어에서 접두사 eu-는 ‘좋음(good)’을 뜻한다. 다이모니아는 다이몬 신을 뜻한다. 다이몬이란 말에서 ‘신적인 것은 최상, 최선, 곧 최고선을 뜻하는 것’임을 함의하고 있다. 최고선은 모든 도덕과 윤리가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행복이 최고선이 될 수 있는 근거는 궁극적 목적인가에 있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공부는 왜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학진학을 위해서 한다고 대답한다. 그럼 대학엘 왜 가려는 거지? 라고 물으면 그는 나중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 취직은 왜 하려는 거지? 라고 물으면 돈 벌어서 집도 마련하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그것은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부의 여러 목적들인 진학, 취직, 축재, 주택 구입, 결혼, 자녀 양육이 열거된다. 이것들은 목적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행복’은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최고선은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지 않는 것 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최고선이라고 하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최종 관심은 ‘어떻게 하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가?’이며, 이 질문의 바탕에는 ‘인간에게 최고선은 무엇인가?’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기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한 논의와 탐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므로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던 많은 것들, 곧 즐거움과 유익한 것들은 자체로서 행복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그리스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생각해 왔던 돈, 권력, 명예, 힘, 건강, 쾌락, 덕 등이 행복이라는 생각과, 그러한 것들을 쟁취하고 유지하려고 했던 많은 노력들이 오류를 안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좋은 품성이나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품성 상태)마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 관한 좋은 질문이 있다. “인간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의식하고 있지 않은(이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을 자각하지 않은 비활동적인) 상태라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아레테.arete를 강조한다. 아레테는 덕, 또는 탁월성으로 번역되지만 고대 그리스 인들이 생각하는 아레테는 도덕적 덕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가 훨씬 더 넓다. 아레테 ‘잘 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arete는 ‘art’ 곧, 기술, 예술을 말하는 것으로 영혼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탁월함, 뛰어남을 뜻한다. 덕(품성) 자체는 행복이 아니지만 그것을 발휘하는 활동성은 행복에 도달하는 중요한 길이다. 덕, 또는 품성은 지적이고 실천적이며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탁월함을 발휘하는 것은 중용의 덕을 습관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용은 ‘최적인 상태’를 뜻한다. 그는 중용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고도 세밀하게 논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상태, 곧 적절한 때에 적절한 분량으로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용기는 모자람(비겁)과 넘침(만용) 사이의 적절함이다. 그는, 중용의 덕이나 행복은 ‘제비 한 마리가 날아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소개하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전체적인 내용들을 좁은 지면에 모두 소화하여 담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덕성의 개념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는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개념들을 일일이 검토하면 좋겠으나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윤리학의 큰 두 개의 강물인 의무론과 목적론 중에서 목적론의 기원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2천여 년 전에 쓰인 책이 가진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의미가 현대적 삶에 비중 있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독자도 읽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오늘날 쾌락주의나 웰빙(well-being, 잘 삶)으로 일컬어지는 행복의 관점을 덕윤리학(德倫理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또는 그 반대편에 서서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덕의 길을 걸어 행복에 이른다.’라고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2,300여 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하게 하는 프랑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기출문제를 소개한다. 이걸 풀어내야 하는 학생들이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 수험생(고등학생)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1998년 Baccalauréat 문제 중에서

<참고한 책들>

아리스토텔레스(이창우 외 2인 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이제이북스 (주 텍스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전양범 역), 『그리스 철학자 열전』, 동서문화사

플라톤(박종현 역), 『국가』, 서광사

플라톤(김인곤 역), 『고르기아스』, 정암학당

아리스토텔레스(이종오,김용석 역), 『수사학』, 리젬

아리스토텔레스(김재홍 역), 『소피스트적 논박』, 한길사

임마누엘 칸트(이원봉 역), 『도덕형이상학 기초놓기』, 책세상

움베르토 에코(이윤기 역),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최병권・이정옥,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종합편)』, Humanist

장 마리 장브(김임구),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한길사

단테 알리기에리(김운찬), 『신곡(지옥편)』, 열린책들

박병기 외, 『고등학교 고전과 윤리』, 전라북도교육청

박성창, 『수사학』, 문학과지성사

이양수, 『롤스와 매킨타이어, 정의로운 삶의 조건』, 김영사

김필영,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에세이』, 스마트북스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聖)


09-11-2022(주일 주보)

바울의 비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a Diaspora Jew)입니다.
고향인 유대 땅을 떠나 당시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가운데 한 명입니다.
곧 바울은 이민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로마 헬라 문화권(the Greco-Roman world)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문화와 로마헬라문화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이 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간인의 삶으로 인해 바울은 창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비전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아로 보았던 예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몇몇 부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소개되는 이방인들의 할례나 식사 규례(Kosher)에 관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의 상황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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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2022(주일 주보)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새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처럼 유대의 관습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처럼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되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은 그가 가진 중간인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유대인이지만, 로마헬라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바울은 유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포함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입니다.
바울의 종말론은 로마서에 나타나듯이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 신음하는 피조물까지도 고대하는 구원(롬 8장)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계 21:5)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교회관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불러 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상의 구원을 향해 힘써 가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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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면서 ‘이민교회와 그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는 분명 한국교회와 다른데, 그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씨름과 영성은 미국에서 한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미국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께서 그가 시무하던 교회의 부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고전하고 있을 때 “아니, 이민교회 하나 목회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큰 교회에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과 많은 성도들을 관리하던 부목사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고전하는 것을 이해하기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모교회와 지교회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교회는 신앙의 뿌리와 같고 이민교회는 이 뿌리에서 나와 미국에 자리 잡은 가지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교회는 중간자(中間子)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 하였다.

첫째는 시간적인 중간자
인간은 괴가와 미래라는 중간 즉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형태적인 중간자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중간자로 존재하고 있다.

셋째는 공간적 중간자
인간은 하늘 위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민교회의 구성원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중간자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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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의 비전

이민교회의 비전은 바울처럼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이민교회가 비교적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민교회는 문화와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두 문화 사이를 살아가는 한인이민교회들은 두 문화를 모두 끌어 안는 훈련을 통해 세상 전체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간인이 가진 ‘비판적 창조성’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민교회가 가진 비판적 창조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의 폐해로 인해 대형화, 물질화, 세속화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민교회는 그 작은 규모와 한계로 인해 적어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이민교회들은 자신들의 영세함과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극복해 대형교회로 성장하려는 맹목적인 목표를 세워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민교회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진정한 교회상을 세우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보여준 ‘약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 weak)로 대변되는 영성의 모습은 대형화된 한국교회보다 연약함을 자랑하는 이민교회에서 보다 수월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보여 줄 세상을 위한 교회, 연약함의 영성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모두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중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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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04 / 2022(대강절 제2주)

말씀을 묵상(默想)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혹은 성령)이 불러 주신 내용을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성령의 감동이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임재하면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혼돈과 흑암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닥쳐온 혼돈과 흑암이 무엇인가?
심한 독감으로 인한 육체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구나!
주여, 지금 이곳에 주의 영이 임재하여 창조의 은혜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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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1 / 2022(대강절 제3주)

성경을 기도로 열어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7. 15~1669. 10. 4)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그의 첫 제자인 헤릿 도우(Gerrit Dou. 1613-1675)는 "빛의 화가"라고 하며 그의 작품 “예언자 안나”라는 성화에서 성경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84세의 과부였던 예언자 안나를 모델로 안나의 성경 읽기를 그린 것입니다.
'예언자 안나'라는 그림에서 '도우'가 강조하는 것은 손입니다.
성경을 받쳐 든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경를 읽고 있는 안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빛의 화가 '도우'에게 성경의 뜻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도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묵상과 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지식이 풍부한 사람 가운데 성경의 내용이 지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그 영적인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바로 기도 가운데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도 가운데 가져갈 때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으로 기도할 때에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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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8 / 2022(대강절 제4주)

성경을 실천하라

렘브란트에게도 성경의 안나를 그려낸 “예언자 안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항상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빛이 등 뒤에서 와서 성서를 밝힙니다.
이 빛이 비치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성서와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안나의 손을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안나의 손에서 주름과 혈관마저 보일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렘브란트는 성서를 ‘손으로 읽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나의 눈은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읽듯이 안나는 손으로 성서를 매만지며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몸으로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삶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의 뜻은 지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이해되거나, 기도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몸으로 읽을 때에 그 뜻이 드러나게 되는 거룩한 책입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을 온몸으로 삶에서 실천할 때에 성서의 의미는 비로소 완전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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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탄주일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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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토론하라

렘브란트가 이야기하는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을 베드로와 바울을 그린 그림에서 살펴봅시다. 원래는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지만,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얼굴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바울이고, 등을 보이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빛이 쏟아지고 있는 중심에 성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 바울과 베드로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에서 둘은 성서의 내용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손가락으로 성서를 가리키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그저 바울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반론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보십시오. 성경 곳곳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놓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성서란 공동체로 서로 토론할 책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서는 개인적으로만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향해 질문하고, 우리의 삶과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묻고, 그 내용을 서로 토론하고 나눌 때에 성경은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어떻게 읽습니까? 새해에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공동체로 나누고 토의할 때에 성경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학철,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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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지교회를 해외에 창설하고, 이민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한국에서 유행하는 목회전략을 무분별적으로 모방하려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민교회는 한국교회라는 모교회의 지교회에 불과합니까?
이민교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듯이, 미국의 이민교회는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미국에서 이민자들과 1.5세, 2세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 문화적인 상황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교회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교회의 목회를 수출하려는 한국의 교회나, 혹은 성장이라는 단순한 목표를 위해 한국의 목회전략과 목회자를 직수입하려고 하는 미국의 이민교회는 결국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는 그 상황과 문화에 맞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중간인

그렇다면 이민교회가 발견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민자들이 가진 삶의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중간인의 삶”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중간’(혹은 ‘사이 between’)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면, ‘아, 이제 내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미국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적 신학을 설파했던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이민자의 특수성을 ‘중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는 두 문화의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문화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중간인은 사실 설움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을 떠나면서 삶의 뿌리를 옮겨 오는 경험을 거친 후, 이제는 한국의 문화와도 거리가 생겨 생소한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1세대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어도 수월하지 않고, 힘든 일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그 고달픔은 배가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겪게 되는 인종차별은 이 사회에서 이민자의 위치가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중간인의 삶에 설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중간인이 받은 축복은 ‘비판적 창조성’입니다.
중간인은 양쪽 문화 모두에 속해 있으면서 양쪽 모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문화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창조적인 생각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약하게 살아온 중간인들 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문화가 어떤 특정한 가치와 생각을 편애하며 나아갈 때, 이에 대한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양쪽 모두를 알면서도 비판적 창조성을 가진 이민자들입니다.
이러한 이민자들이 가진 실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비판적 창조성’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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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은 한국교회에서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기독교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최근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 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뉴스앤조이’라는 매체는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가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 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신비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신비를 평생토록 묵상한 후에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 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 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 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이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설명해 주는 문화적 개념과 훈련 방법의 창조적 수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의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보다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였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헬라문화 속에서 이방인을 위해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복음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저마다 새해의 소망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각자 새해에 기대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기쁨이 가득한 한 해’를 꿈꾸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소망이라 생각합니다. 2012년에는 정말 좋은 일만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를 소망하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기쁨과 웃음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마틴(James Martin)의 책, 『천국과 웃음 사이 (Between Heaven and Mirth)』는 기쁨과 웃음이 왜 신앙생활에 중요한지를 유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면서 2012년을 웃음과 기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체험하는 새해로 만드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

요즘 미국의 가톨릭계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이 제임스 마틴입니다. 마틴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던 중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으로 고민하던 중,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톨릭 예수회 사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책은 영성가들의 지혜를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함께 풀어내는데, 그 방식이 항상 유머러스한 것이 매력적입니다.

평소에 마틴의 책을 즐겨 읽던 저는 어느 날, 제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한 대학(Boston College)에서 마틴의 공개강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큰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시작을 몇 가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풀어나갔습니다. 얼마나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지 내가 예수회가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 가톨릭 사제에게 강연을 듣고 있다는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온 청중을 들었다 놨다 웃긴 후에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첫번째 포인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농담만 늘어놓고 강연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농담들이 자신의 강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너무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사람의 신앙은 좋아 보이고, 밝고 발랄해 보이는 사람은 왠지 경박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앙에는 웃음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틴의 그 날 강연은 결국 오늘 소개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마틴은 기쁨과 유머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유머보다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유머가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마틴은 말합니다. 기쁨과 행복은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 누구도 우울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의 곁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지만, 밝고 행복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 곁에는 다가가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유머와 웃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면 비록 아무도 전도하지 않을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끌려오게 됩니다.

마틴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지역 예수회의 감독이 마틴이 속한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마틴과 동료 수사들은 그 감독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감독님, 요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어떻게 하면 그 수를 늘릴 수 있을까요?” 마틴의 질문을 들은 감독은 예상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하면서 지혜로운 대답은 “당신의 사제 직분을 즐겁게 살아가십시오.”였습니다. 기쁨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결국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가장 최고의 전도방법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유머 중많은 것들은 자기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합니다. 경직되고 자신의 것을 움켜쥔 사람들은 유머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만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따뜻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유머는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유머 중에 저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뉴욕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한 병원에 그 지역의 감독이 방문했습니다. 이 감독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은퇴한 예수회 사제들을 모아 놓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감독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뉴욕 지구에 은퇴하고 나이 많은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을 관리할 시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제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빨리 죽으려고 합니다.”

그저 웃음을 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유머에선 은퇴한 사제가 가진 삶의 여유와 겸손이 묻어납니다. 삶을 움켜쥐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한 이러한 유머를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유머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낼 줄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머는 겸손을 배우게 하는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유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마틴이 말하는 ‘기쁨의 영성’(Spirituality of Joy)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머와 기쁨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엄격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엄격하고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우리가 농담을 하거나 따뜻한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마틴은 이에 덧붙여 장난기 많으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유머 감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테레사가 어느날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서 떨어져 진흙구덩이에 처박히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불평하듯이 말합니다. “하나님, 참 더할 나위 없이 안 좋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네요. 왜 이런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테레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자 테레사가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그렇군요. 하나님께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군요.”

영성가 테레사의 유명한 이 이야기는 테레사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유머와 기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 담긴 테레사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보십시오. 경직되거나 긴장된 것이 아닌 마치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대하는 듯한 다정함과 장난기가 어려 있습니다. 이러한 테레사를 대하는 하나님 또한 사랑과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되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친근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고 깊은 단계로 이끌게 됩니다.

기쁨의 새해를 만드십시오

16세기의 영성가 필립 네리(St. Philip Neri)는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시고,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다른 사람을 매료시켜 결국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함이 이 기쁨을 경험하게 하며, 이러한 기쁨은 결국 그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가득한 새해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살전 5:16). 2012년 새해는 이러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해, 웃음꽃이 가득한 한 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 참고문헌

James Martin, Between Heaven and Mirth: Why Joy, Humor, and Laughter Are at the Heart of the Spiritual Life (New York: HarperOne, 2011)


새해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다짐하는 것들 중에 공통적인 것은 “성경 읽기”라고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그 안에서 신앙의 성숙을 다지고자 하는 결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러한 새해의 결심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신약성서 학자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들을 묵상하면서 렘브란트가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여 성서 속의 장면을 그의 그림 속에 그려냈는가를 연구한 책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법”이라는 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성서읽기가 어떠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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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영성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삽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나를 이용하고 저버린 조직에 대한 분노,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나약하며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싫은 모습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때로 우리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분노를 이해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느냐고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분노는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영성”에 대해 이 시간 함께 생각해봅시다..

분노의 긍정적인 역할

캐슬린 그라이더(Kathleen Greider)라는 목회상담학자는 분노를 다룰 때에 이것이 가진 긍정적인 역할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분노를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분노에는 우리를 위한 긍정적인 모습이 많다고 그라이더는 말합니다. 분노는 먼저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분노의 모습 중의 하나가 공격성(aggression)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없다면 삶은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가라앉은 모습으로 일관될 수 있습니다. 삶에 활력이 넘칠 때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도전하고 성취해 갈 때입니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성향 중의 하나인 공격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노의 또 다른 긍정적인 모습은 상처에 대한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 분노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조직, 환경에 대해서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우리 안에 있는 독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불평한 사람만이 용서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에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는 세상의 정의와 공평함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분노가 가진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노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의 정신건강과 영성을 해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최근 자신을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까? 이 분노 속에서 치를 떠는 동안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스캇 펙(Scott Peck)은 “분노란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분노로 피해를 받는 사람은 내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분노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인데, 분노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지속되는 분노가 우리를 상하게 할 때, 우리는 이 분노의 문제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분노의 치유

분노를 치유하는 첫번째 단계는 나를 분노하게 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분노가 감정적으로만 치우칠 때, 우리는 분노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은 나의 분노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비판하는 동안 왜 내가 분노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였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러한 정당한 비판은 나의 상처와 대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나 사건을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말도 꺼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상처받게 한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치거나 상처받았던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분노는 여지 없이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분노는 피하거나 미룬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노하게 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나의 분노와 상처를 미루지 않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은 우리에게 정당하게 분노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그 사람이 잘못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정당하게 분노한 후에야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이 아픔의 감정을 내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분노 속에 숨은 상처를 대면하고, 정당한 비판을 통해 이 감정을 내보낸 사람은 치유를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의 딸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용서는 용서받게 된 대상보다 용서하는 사람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먹는 숨막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의 분노가 치유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춤추기

분노의 문제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한 분노는 결국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곧바로 영적인 침체와 시험으로 이어집니다. 헨리 나우웬은 원망을 ‘차가운 분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헨리 나우웬은 한 조각상을 묵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춤추는 여인>(1809-1812년경)이라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조각가가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커다란 돌덩이가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점차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돌덩이를 깎아서 ‘원망의 돌조각을 파내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삶이란 이렇게 깎아낸 빈 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춤의 신비는 그 안에 모든 발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이 모든 발자국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춤이 됩니다. 삶에도 이렇게 다양한 발자국이 있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행복해합니다. 이 모든 삶의 발자국이 모여 삶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모든 발자국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삶이라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신뢰하며, 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추는 춤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원망을 넘어서 감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이 우리의 분노를 감사로 변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우리의 모든 분노를 치유합니다.

* 참고문헌

Kathleen Greider, Reckoning With Aggression (Louisville: WJK, 1997)

스캇 펙, 끝나지 않은 여행 (서울: 열음사, 2007)

윌리엄 폴 영, 오두막 (파주: 세계사, 2009)

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서울: 두란노, 2011)

화평의 영성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영성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헌신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혹은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결혼을 결정할 때가 되면 고민을 하는 커플을 보곤 합니다. 이들이 고민하는 것 또한 헌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이 남자, 혹은 이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결단과 헌신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지 결혼식 전날 도망가는 신랑 신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남녀간의 헌신도 이렇게 두려울진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오늘 이 헌신에 담겨 있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삭개오의 이야기(누가복음 19:1-10)에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삭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곳으로 들어가신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에 흥분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아주 짧게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소개지만, 이 소개를 듣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한 마디로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들이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침략자인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보통 걷어들여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걷어서 남은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채웠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세금을 낼 때마다 “아니, 무슨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어가나” 하면서 툴툴거리는데,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게다가 웃돈을 얹어 걷어들이는 세리들을 얼마나 사람들이 욕을 해댔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그런 세리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을 먹을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삭개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조롱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삶은 항상 외로웠습니다. 주위에 친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기의 돈을 노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부자였던 삭개오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그 많은 재산이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욕을 먹는 직업이었어도 안정된 직업에, 넘치는 재산에,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지만, 삶에서 느끼는 이 공허함은 삭개오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공허함 속에 예수님을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삶의 문제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삭개오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간절한 소망 가운데 예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까지 기어 올라갈 만큼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밑에 이르러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삭개오의 모습에서 그 마음의 공허함과 갈급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초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삭개오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들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철저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삶의 완전한 변화,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사람입니다.

오직 사랑에 매여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삭개오에게 이런 철저한 헌신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비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나오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기뻐하면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어서 내려오너라”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큰 기쁨을 누린 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기쁨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삭개오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모두가 욕을 하는 삭개오였지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10절)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삭개오를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공허함을 연민의 눈으로 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죄인인 삭개오와 어울린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짧은 순간이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직접적으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감격이 기쁨이 되고, 이 기쁨은 삭개오의 변화의 모든 이유가 됩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서 시험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이 어려움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것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다가 지쳐서 힘이 들 때에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이 기쁨에 거하는 사람만이 삭개오처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의 헌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면 그 기쁨과 감격이 헌신의 삶을 부담감이 아니라 넉넉히 할 만한 것, 기쁘게 할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사랑에 매인 그 감격이 우리의 사명을 넉넉히 짊어지게 합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늘 기쁨과 찬양이 넘칩니다.

가끔 교회에서 봉사하는 제직들이나, 성가대원, 교사들을 보면 봉사하는 데 지쳐서 시험에 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봉사하시는 분들이 일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힌 영적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늘 새롭게 감격하면, 모든 봉사와 관계에 의미와 활력이 돋아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봉사는 마치 잔에서 물이 흘러 넘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잔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 넘쳐서, 그 넘치는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흘러 넘치기는 커녕, 그 잔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바닥을 박박 긁어 보아도 퍼줄 것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내 잔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하는 가운데 지치고 회의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신앙의 점검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부서에서 충돌이 생기고 봉사에 회의가 들면, 자꾸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자꾸 회의만 하면 더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잔을 하나님 사랑의 기쁨으로, 은혜의 감격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낀다면, 우리의 봉사에도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소망해 봅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저자의 『하나님 만나기』(대한기독교서회, 2010) 3부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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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아버지의 영성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둘째 아들을 나의 삶과 비교하며 읽어 보면, 이 둘째 아들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

본문이 시작되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 내가 나중에 상속받을 재산을 지금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게 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는 자칫하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사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 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잡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이 아버지가 가진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사랑한 방식은 아들을 존중하고,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떠날 자유를 허락한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줄 수 있습니다. 떠날 자유를 주지 않는 아버지는 훗날 아들이 돌아온다 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떠날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의 곁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에 의지해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가기로 작정한 곳을 본문 13절에서는 ‘먼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가장 ‘먼 나라', 곧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재산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행복과 자유를 즐기며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보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람 노릇과 하나님 노릇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 노릇이 더 힘들지. 인간인 그대야 가족과 직장 등의 일밖에 신경 쓸 것이 없지만, 나야 온 우주와 은하계와 별들을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 계속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하나님께는 무한한 시간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이야 한정된 능력과 짧은 인생살이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하지요.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노릇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신다면, 딱 1초 동안만 서로 역할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워낙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일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쫓아내고 그때부터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우리들의 본성 속에 있는 숨은 욕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품에선 자유가 없으니까 그 품을 떠나서 나의 힘과 자유, 세상의 성공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기쁨이 있으리라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나, 가진 재산에 의지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서의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실패와 절망과 무의미뿐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가지고 간 재물을 금방 다 써버리고 맙니다. 이제 둘째 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입니다. 둘째 아들의 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레 11:7).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돼지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이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러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둘째 아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곤고함과 공허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돌아섬

이제 새로운 돌아섬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무의미와 절망을 넘어서는 둘째 아들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의 절망 속에서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합니다. “When he came to his senses.” 한 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둘째 아들에게는 돼지우리가 자신의 삶의 한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준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아픔을 경험할 때,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고 제정신이 들게 해줍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풍요로움을 생각합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품에 있었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았는지 그 따뜻함을 기억해 냅니다. 이 기억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기억이 있습니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언정,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의 사귐을 기뻐하시던 하나님, 그 안에서 누리던 완전한 의미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우리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안정되어 있어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이 숨겨져 있는 기억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제정신이 들어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는 이 기억 때문입니다. 이 본능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품에 대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 42:1)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만듭니다.

이제 둘째아들은 자신의 돌아섬을 행동에 옮깁니다. 여기에 둘째 아들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삶의 자리에서, 세상적인 욕심을 향해 달려가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마침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의 절정적인 장면을 읽어 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20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기다리는 아버지” 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둘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사랑의 하나님은 이 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내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 거리가 먼 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니 마을에 들어오기도 전에 먼 거리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같이 그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아들이었지만,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언제 올까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려고 연습하고 준비한 말들을 채 다 듣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우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한결같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에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건 상관하지 않고 맞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삶의 의미와 만족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7655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취하다(3182)  

μεθύσκω Storng number3182

1. 술취하게 하다.  2. 술취하다. 3. 눅 12:45 
Pronunciation [ mĕthüskō ]


  • 1.  술취하게 하다, 술취하다, 눅 12:45, 엡 5:18, 살전 5:7.
Grammar Explanation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εθύσθην, 3184의 연장형[수동태로 쓰임]

  • 문법설명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εθύσθην, 3184의 연장형[수동태로 쓰임]

  • 관련 성경 /  취하게 되다(눅 12:45), 취하다(엡 5:18, 살전 5:7).


충만을 받으라(4137)


πληρόω Storng number4137
1.

가득하게 하다

2.

시간을 채우다

3.

마치다

Pronunciation [ plērŏō ]
Etymology
미완료3인칭단수 ἐπλήρου, 미래 πλη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ήρωσα, 완료 πεπ λήρωκα, 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ηρώκει, 수동태, 미완료 ἐπλη- ρούμην, 수동태완료 πεπλήρωμαι, 수동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ήρωτο, 제1부정과거수동 ἐπληρώθην, 미래수동 πληρωθήσομαι, 4134에서 유래
  • 1.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게 하다.
  • 2.
    시간을 채우다, 완성하다, [수동] 차다, 막1:15, 행7:30, 24:27.
  • 3.
    마치다, 완성하다, 롬15:19, 빌2:2, 골1:25.
  • 4.
    이루다, 성취하다, 마1:22, 3:15, 막14: 49, 요12:38.
  • 5.
    끝내다, 마감하다, 눅7:1, 행12:25.
  • 6.
    수를 채우다, 계6:11.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이루어지다(마2:23, 26:54), 이루다(마3:15, 27:9, 행3:18), 완전하게 하다(마5:17), 가득하다(마13:48, 고후7:4, 빌1:11), 채우다(마23:32, 골1:9), 차다(막1:15, 행7:30, 롬15:14), 메워지다(눅3:5), 응하다(눅4:21), 마치다(눅7:1, 행12:25, 13:25), 별세하다(눅9: 31), 충만하다(눅2:40, 요3:29, 행13:52, 엡1:23, 5:18, 골2:10), 응하게 하다(요15:25, 19:36), 지나다(행24:27), 편만하다(롬15:19), 풍족하다(빌4:18), 온전하다(계3:2).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바울은 본절에서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로 잠 23:29-35을 인용하여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당시 술 취하는 일은 불신자 세계에 있어서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딤전 3:3; 딛 1:7;2:3, Wood, Foulkes, Hendriksen). 술 취함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활이 무절제하게 되고 방탕하기 쉽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소티아'(*)는 술 취함의 현상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방종' 혹은 '돈과 육욕의 무절제한 낭비'를 의미했다(Wood). 이것은 신약성경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 방탕한 생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눅 15:1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로서 생활하려면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 곧 어리석음의 일을 금해야 한다.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와는 다르다(1:13;4:30; 요 3:5;14:16; 롬 8:9; 고전 3:16).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는 단회적 사건인 반면에 '성령 충만'은 구원의 때뿐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행 4:8, 31;6:3, 5;9:17;13:9, 52)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행 10:38;11:24; 살전 1:5; 벧전 4:11, Lincoln). 즉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신 성령께서(롬 8:9; 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온전히 지배하며 인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충만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루스데'(*)는 현재수동태 명령형이다.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1) '현재 시제'는 성령 충만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함을 시사한다(Lincoln). (2)'수동태'는 성령 충만이 인위적(人爲的) 체험이 아니라(갈 3:2, 5) 성령에 의해서 체험됨을 시사한다(Wood). (3) '명령형'은 성령 충만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Wood).












예수 어록(語錄)





무엇을 구하느냐?(요한복음 1:38)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5절 이하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거와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고기를 잡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마 4:18절 이하, 막 1:16절 이하, 눅 5:1절 이하 참조).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자기 형을 예수 공동체로 끌어 들였다. 어떤 경우가 실체적 진실인지 우리는 모른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세례가 기독교의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이 한 예다.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는 특별하다. 예수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죄를 씻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일 것이다. 막 1:9절은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마 3:13절 참조)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요 1:33절 표현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원래 예수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성령이 임하는 자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요 1:29, 36). 이 말을 듣고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고 한다. 예수는 그들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이들이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마 7:7절에 나오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에 나오는 의미와 다르다. 오히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오.’에 나오는 ‘찾으라.’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에(눅 15:8절 이하) 나오는 것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찾으면서 살고 있을까?



예수 어록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과 육은 일단 구분된다. 
‘육은 무익하다’라는 표현은 오해를 사기 쉽다. 
이런 표현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는 영육 이원론이라는 특징이 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본다. 
이런 표현 자체가 무조건 잘못은 아니다. 
육은 본능적이다. 
사람이 배고프면 도둑질도 한다. 
성적인 욕망은 강렬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강렬하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종이 유지될 수 없다. 
육은 죽음과 동시에 분해된다. 
이에 반해서 영은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영적으로 훈련이 잘된 사람은 인간 본능을 제어하면 산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죽음까지도 극복한다. 
이런 걸 놓고 본다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의 전체 과점에서 볼 때 영육 이원론적인 인간론은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인간은 영과 육의 통합체다. 
육이 아무리 본능적인 성격이 강하더라도 신구약 성경은 그 육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이런 신구약 성경의 전통만이 아니라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복음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위 구절처럼 부분적으로 그런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영지주의에 전적으로 지배받지는 않는다. 영
지주의를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옳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영지주의적인 표현은 그것 자체로만 해석하지 말고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위 구절에서 영과 육의 구분은 실제의 영과 육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는 태도와 단지 먹고 배부른 조건만 찾는 태도의 구분이라고 봐야 한다. 
예수의 말을 듣는 유대 군중들은 조상들의 만나 사건에 대한 종교적 향수가 강했다. 
실제로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했다. 
생존의 가장 엄중하기에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삶이 그랬다. 
그런 삶의 종교적 형식이 기복신앙이다. 그런 신앙은 육에 속한 것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삶에 아무 유익이 없다. 
먹는 문제가 사소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과 삶으로 드러내신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도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죽음



11월 10일(월) 누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별세(別世)하실 것(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榮光(영광) 中(중)에 나타나서 將次(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別世(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후서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별세(別世) 1841. 엑소도스(ĕxŏdŏs) ἔξοδος, ου, ἡ    Storng number 1841


1. 퇴장.  2. 탈출.  3. 떠남  
Pronunciation  [ ĕxŏdŏs ]  
Etymology  /  1537과 3598에서 유래
  •  1. 퇴장, 달아남.
    •  a.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히11:22.
    •  b. [완곡한 표현으로] 떠남, 이탈, 죽음, 눅9:31, 벧후1:15.
    •  c. 운명.
  • 관련 성경  /  별세하실 것(눅 9:31), 떠날 것, 떠남(히 11:22, 벧후 1:15).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몸으로 드러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눅 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나타나실 것(3708)은 보게 될 것을 말합니다.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Pronunciation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별세(別世. 엑소돈)하실 것이란 헬라 단어는 엑소도스라고(1841) 합니다.

구약에서의 출애굽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인생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후에는 두 가지 삶의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생(永生)
둘째는 영벌(永罰)

마태복음 25:46
저희는 永罰(영벌)에 義人(의인)들은 永生(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복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복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死) 죽을 사
부수 [歺]
(죽을사변, 4획)
모양자
歹(살 바른 뼈 알) + 匕(비수 비)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질고(2483) חֳלִי Storng number 2483

1. 병.  2. 내상. 3.  외상  
Pronunciation    [ chôlîy ] 
Etymology  / 2470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4회 사용
  •  1. 명사, 남성 병, 질병.
    •  a. 명사, 남성 내상, 신7:15, 28:61.
    •  b. 명사, 남성 외상, 사1:5
  •  2. 명사, 남성 고통, 괴로움, 근심, 슬픔, 비통, 전5:16(17).
  •  3. 명사, 남성 악, 재난, 불행, 전6:2. 
  • 관련 성경 / 질병(신7:15, 28:61, 렘6:7), 증세(왕상17:17), 병(왕하13:14, 전5:17, 호5:13), 질고(사53:3,4), 고난(렘10:19). [동] 병들다(사1:5).

육신의 몸은 죄가 없을지라도 때로는 불의한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세상의 사건과 사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몽테뉴 /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쇼펜하우에르 / 죽음은 모든 고통의 헤방이다.

셋째는 수고에서 탈출(시편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전도서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살아 있을 동안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수고를 멈추고 쉼을 얻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종류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다양한 차원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 죽음을 단지 ‘육체의 생명 종료’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영적·관계적·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여러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며, 각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결과, 그리고 궁극적인 회복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을 보다 확장하여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죽음의 상징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실제적, 육체적 죽음 (Physical Death)

정의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죽음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본문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특징

  • 전 인류 보편성: 누구도 피할 수 없음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 죄의 결과: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시간 속 존재로 전락.
  • 심판의 예고: 육신의 죽음은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선언입니다.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정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순간에 이미 시작된 죽음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특징

  •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 죄에 대한 감각의 마비: 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됨.
  • 자기중심성의 확산: 생명 대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따름.

회복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관계적 죽음 (Relation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과 왜곡을 겪는 죽음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사랑의 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독소입니다.

본문

  • 아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창세기 3:12) → 책임 회피.
  • 가인과 아벨: 형제를 살해함으로 형제 관계의 파괴 (창세기 4:8).

특징

  • 책임 회피와 비난: 관계의 단절은 신뢰와 책임의 붕괴로 이어짐.
  • 폭력과 시기, 분노: 인간관계가 생명의 통로가 아닌, 고통과 갈등의 현장으로 변함.
  • 사랑의 기능 상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능이 왜곡됨.

회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가 관계적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한일서 4:12)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에베소서 2:14) 

존재론적 죽음 (Existenti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왜곡, 공허, 허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 전도서의 흐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 아담이 숨은 장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특징

  • 존재 불안과 공허: 인간은 목적을 잃고, 인생의 의미를 상실함.
  • 자기 정체성의 붕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분을 잃고, 자기 욕망에 끌림.
  • 삶의 허무감: 모든 수고와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짐.

회복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존재 의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

정의

회개 없이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지속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본문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 “지옥에서는 그 벌이 끝이 없으며…” (마태복음 25:46)

특징

  •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끝남.
  • 의식 있는 고통: 존재는 유지되나,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는 단절됨.
  • 영원한 분리와 슬픔: 생명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음.

회복

이 죽음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약: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단절'이다

죽음의 차원  특징 회복의 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삶의 끝, 죄의 물리적 결과 부활 신앙, 영생의 소망 (고전 15장)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 죄 가운데 죽은 상태 성령 안에서 거듭남 (요 3:3, 엡 2:5)
관계적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된 신뢰, 사랑의 왜곡 화해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엡 2)
존재론적 죽음 자기 정체성과 의미 상실, 공허와 불안 창조주 안에서의 정체성 회복 (고후 5:17)
영원한 죽음 회개 없는 자에게 임하는 영원한 단절과 심판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 (요 3:16) 

결론 :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은 다양한 차원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영적·관계적·존재적 죽음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내며,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죽음을 분리로 묘사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a.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온 세상이 죽음을 겪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창세기 2:17에서, 주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죽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그는 즉각적인 영적 죽음을 경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8). 이후에,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5: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또한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0). 차이점은 아담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9). 그 후, 예수님은 사흘째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죄를 뛰어넘는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 요한계시록 1:18). 그리스도 덕분에, 사망은 패배한 적이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호세아 13:14).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의 막을 내리게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구원을 받은 자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도 진실되어 크리스천의 육체적인 죽음은 “잠” (고린도전서 15:51, 데살로니가전서 5:10)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다시는 사망이 없[을]” (요한계시록 21:4) 때를 기대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서론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첫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 동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주제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결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인류역사상 변천해 온 내용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그에 대한 태도가 변천해왔습니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

윤리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죽음의 여러 가지 의미와 인류 역사 속에서의 태도 변천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죽음의 의미

1) 생물학적 의미

죽음은 생물체의 생리적 기능이 멈추는 상태로, 생명 주기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2) 철학적 의미

철학적으로 죽음은 존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는 주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죽음이 오히려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3) 종교적 의미

죽음은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구원의 과정으로 보고, 사후 세계를 믿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윤회와

카르마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음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2. 역사적 변천

1) 고대 사회

고대 사회에서 죽음은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 왕과 귀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죽음은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되었으며, 장례 의식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2) 중세 시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이 구원의 관점에서 중시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와 구속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장례식은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3) 근대와 현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강조하며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죽음은 점차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며,

장례 문화와 의식도 변화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현대적 관점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명 연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삶의 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4. 죽음과 삶의 질

현대인들은 죽음을 단순한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질과 깊이 연결된 주제로

인식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합니다.


5. 결론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와 태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생물학적,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개인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로 바라보며, 삶의 질과

직결된 주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죽음에 대한 명언(名言) 20篇

1. "죽음은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바라지 말라."

- 존 테러 -

2. "죽음은 생명의 일부로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 -

3.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대우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살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 루이스 스타인 -

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알버트 카뮈 -

5. "죽음은 빈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6.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7. "죽음은 마치 커튼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뒤에서 삶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8. "죽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이다."

- 제임스 콜맨 -

9. "죽음은 생명의 빛깔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10.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목표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 로버트 핀크 -

11.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유이다."

- 헨리 반 다이크 -

12.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 데일 카네기 -

13. "죽음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14. "죽음은 우리가 가진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 윈스턴 처칠 -

15. "죽음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의 연결고리이다."

- 매튜 아놀드 -

16.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7.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

18.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희망에 대한 계기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19. "죽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해주며, 더 나은 버전의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도와준다."

- 마하트마 간디 -

20.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현재 순간을 귀중히 여기도록 유도한다."

- 스티브 잡스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라는 말을 통해, 죽음을 삶과 분리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과 본질적인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명언은 하루키 작품 세계의 근간이자, 그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루키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반대편으로 두지 않고,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필연적 순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지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45.

이러한 하루키의 시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죽음이라는 마지막 이정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키가 전하는 철학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

삶과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근대 철학, 현대 실존철학, 동양철학, 그리고 현대 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소크라테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이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아래 있으며, 철학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 영혼의 불멸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은 영혼이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철학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귀향이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

기독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 즉 신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삶은 일시적이며, 죽음은 참된 삶을 여는 문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데카르트: 인식 주체로서의 존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보다 사고하는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사유의 대상이며,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사고하는 한 존재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인식 가능한 '사건'이며, 주체성은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현대 실존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하이데거: 죽음은 삶의 완성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을 외면하면 삶도 피상적이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 죽음은 무의미, 의미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카뮈: 부조리와 죽음

알베르 카뮈는 인간 존재를 '부조리'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야 한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노자: 삶과 죽음은 하나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운 변화다. 

불교: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불교는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연기) 존재한다고 봅니다.
죽음 역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인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삶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 삶과 죽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 수용 과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 수용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 부정(Denial)
  2. 분노(Anger)
  3. 타협(Bargaining)
  4. 우울(Depression)
  5. 수용(Acceptance)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심리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심리학적 통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 성장의 일부이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의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는 노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적 통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음조차 삶을 빛나게 한다. 

삶과 죽음: 종합적 사유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2.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는 열쇠다.
  3.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5. 죽음의 자각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결론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합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 죽음을 성찰할 것.
  •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삶을 사랑할 것.

오늘 하루,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는 그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임종의 순간, 그는 웃었다…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문이기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의 수도자 묘지. 허성석 신부 제공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도가

①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 (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과정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② 장자: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변화하여 ( 기 )(氣)가 생기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변화하여 ( 죽음 )이 된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연결된 ( 순환 )과정으로 보며 죽음에 ( 초연 )할 것을 강조함.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기빼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이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장자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며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는 것[徒]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게 된다. -장자 (학평 제시문)

③ 장자: “사람이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 준 때를 마음 편히 여기고 운명에 ( 순응 )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 삶을 달관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도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 -장자

문상(問喪)하러 가서 대성통곡하는 것은 자연[天]의 도(道)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받아들여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장자 (학평 제시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픈 일인가? 생명이란 본래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 마치 티끌과 같고, 삶과 죽음의 이치는 밤낮의 변화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자연스런 변화를 바라보노니, 그것이 내게 왔다고 해서 어찌 싫어하겠는가. -장자 (모평 제시문)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대자연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장자 (모평 제시문)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Loyalty is like a mountain, and death is like a red hair)9

단비 2025. 7. 17. 6:06

이 속담(俗談)의 의미는 "의리는 산(山)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Righteousness is as heavy as a mountain, and death is as light as a goose's feather)는 뜻으로, 의리(義理)를 위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뤼순 감옥"(旅顺监狱)에 투옥돼 있을 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뜻은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Think about what's right when you see a profit, and if you see a country at stake, give it your life)는 글대로 국가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본명. 조성녀 趙姓女)는 아들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My son, die with honor for your country!)고 말하였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배신은 내부(內部)에서 시작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부( 外部)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다. 이것을 "내파(內破 implosion)와 외파(外破External break)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신 "최후의 성만찬"(Last Supper) 앞에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背信)을 당하셨다.

그 이름 '가롯 유다'(Garrot Judas)이다.

그는 은(銀 silver)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가롯 유다'(Garrot Judas) 가장 불명예를 남긴 역사의 죄인이요, 가장 불행한 이름, 가장 슬픈 이름을 남겼다.

첫째, , 이력(履歷)이 불명예롭다.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背信者)이다.

둘째, 유산(遺産)이 불명예롭다. 은 30냥으로 ''피의 땅 아겔다마"를 샀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이 불명예롭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自殺)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Martyr)는 못 될지언정 역적(逆賊 Rebel)을 스스로 자처했으니 그는 천추만대 부끄러운 존재로, 예수님은 그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의 불행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His bad luck is all of his own doing)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 것이다(He has sown the seeds he has sown)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Death is not a period. by 김소엽 시인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우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사 재 미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지겨운 세상, 모든 고통을 순간적으로 끝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 다. 그리고 인생사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죽지 않고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으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늘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는 것과 죽음은 정말 어감이 다릅니다. 자는 것은, 마치 쉬는 것과 같습 니다. 자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 을 때, 저들은 홀연히 죽음이 쉼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기분좋은 쉼표입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지난 날의 피로가 다 풀려, 새롭게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 럼,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쉼표’로 만들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샬롬. 2021.04.04.



죽음이 인생에게 말하는 것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 연구소
4–5 minutes

인간의 실존, 유한하고 때론 무력한 존재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실존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와 무력한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으로 인해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보다는 살아가야 함에 대한 깊은 무게와 걱정이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만인에게 공평한 조건이기도 하다.

  Gustav Klimt 18621918 Tod und Leben Death and Life 191015   1805   2005 mm    삶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이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못다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죽음과 삶', 1910/15, 캔버스에 오일, 180.5 × 200.5 cm,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

죽음 앞에서 삶을 조우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보통은 어떠한 경험보다도 강력한 삶의 역경이다. 죽음이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죽어감의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교차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역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후회는 개념적으로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불만족과 불쾌감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반추하는 경험도 한다Tomer & Eliason, 2008. 그리고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통합의 반대 개념인 절망despair으로 다가오기도 한다Erikson, 1963.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어떤 후회를 할까? 과거에 대한 후회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와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과거에 한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후회를 한다Tomer & Eliason, 1996. 예를 들어, 자신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게 되는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의 것을 더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인관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깨어진 가족관계, 용서하지 못한 타인, 단절되고 고립되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무리할 것인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큰 연관이 있다장민희, 정태연, 2018.

흥미롭게도 이러한 후회는 젊은이들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토머와 엘리아슨은 백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과거 후회할만한 일을 제시하고 어느 정도 후회하는지 평가하도록 했다Tomer & Eliason, 2005. 그 결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한 것, 친구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공통된 후회에는 돈의 축적과 같은 것이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죽음은 존재와 삶에 대한 반추를 하게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추의 힘이 과거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한 동안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어린 나이에 무턱대고 시작한 연구 주제였는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조각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큰 의미이다. 그리고 때로 내 인생의 무게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기도 한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일, 나의 여러 삶의 조건에 불만족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특히나 내 옆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머지않아 큰 후회가 될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일, 내 옆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에 반드시 깨달아야할 삶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인생에게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야할 이유와 희망을 제시하는 삶의 역설이지 않을까.mind


<참고문헌>

  • Erikson, E. H. (1963). Childhood and society (2nd ed.). New York: W. W. Norton.
  • Tomer, A. & Eliason, G. T. (1996). Toward a comprehensive model of death anxiety. Death Studies, 20, 343-365.
  • Tomer, A. & Eliason, G. T. (2005). Life regrets and death attitudes in college students. Omega, 51, 173-195.
  • Tomer, A. & Eliason, G. T. (2008). Regret and death attitudes. In A. tomer, G. T. Elisson, & P. T. P. Wong (Eds.), Existential and spiritual issues in death attitudes, (pp. 159-172). New York: Lawrence Erlbaum Associates.
  • 장민희, 정태연 (2018). 호스피스 봉사 경험이 삶과 죽음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연구, 26(2), 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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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대학원 겸임교수 사회및문화심리 Ph.D.

전 생애에 걸친 자기(Self)와 정체성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와 문화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연구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