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주님의 기도, 사도신조


십계명(十誡命)


첫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 신은 누구이며 다른 신들은 무엇인가?
신(神)은 말씀이다. 즉 신은 언어이다.
 성경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비유언어 그대로 믿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들이 된다.

그러나 비유언어 속에 감추어진 속 뜻으로 풀어낸 말씀은 하나님의 신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의 비유문자 그대로 믿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들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비유문자 속에 감추어진

본질적 속 뜻의 말씀을 찾아 섬기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높으신 만군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떼 중에 수컷이 있으니 그 수컷을 거룩한 십일조로

바치라고 했다. 이 수컷이 무엇인가? 하늘에는 창조주 하나님 및 천사들로

구성된 신들의 공동체가 있으며 천사들 중에는 범죄한 천사들도 있다.  

이러한 하늘의 신들의 공동체가 수컷들의 떼가 되는데 그 중에서, 즉 수컷들의

떼 중에서 오로지 창조주하나님의 말씀만 거룩한 십일조로 바치라는 뜻이다.

 

만일 범죄한 천사, 즉 루시퍼(뱀.사탄.바울)가 준 선악과 신을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이 되는 것이다. 다른 신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추신 본질적 성경의 참 뜻을 몰라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게 하는 청맹과니 우상신이 된다.

 

기성교단이 다른 신이 준 선악과를 먹고 비진리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

또한 뱀의 후손 용이라고 하는 자칭재림주 교단은 어떤가?

자칭 재림주 노릇을 하기 위해 성경의 비유를 풀었다고 큰소리 치지만

그들 역시 사탄이 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성경을 일괄적 한 논리로

풀지 못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발췌하여

자의적 엉터리 해석으로 선무당 사람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성교단이든 자칭재림주 교단이든 지금까지 모든 교단들은

뱀과 뱀의 후손 용이라고 하는 다른 신들(흑암하나님)이 주는 비진리를

믿어왔다. 즉 성경 한 줄 풀어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비논리 가운데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믿고 싶은 부분만 문자적으로 믿게 하는

허접한 종교상품을 팔아서 치부해왔다.

 

그러나 이제 다른 신들(흑암하나님)의 전성기는 끝났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흑암하나님)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재림주를 예표하는데 그 야곱이 다른 신, 흑암하나님을 이기고 찾아낸

진리의 새말씀이 여기서 말하는 라고 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새말씀은 성경문자 속에 6천년 동안 깊이 감추어

있었던 로고스(이성,논리,형이상학,창조원리)이다.

우리는 로고스 하나님만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했다.

위로 하늘에 있는 우상은 범죄한 천사가 주는 선악과 신이며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우상은 이미 선악과 신을

받은 기독계열 교단의 비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그 죄가 삼 사대까지 이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천대까지 이르리라 했다.

삼 사대까지의 죄는 영원한 멸망을 뜻하고 천대까지의 은혜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여기서 삼 사대니 천대니 하는 인간의 세대수는 그 본뜻이 인간의

세대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제단의 세대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먼저 멸망의 삼 사대란?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칭재림주교단과 그 다음 오늘의

재림주교단 까지가 삼대가 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정부까지는

사대가 된다.

이렇게 초림주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정부까지는 모두 실상시대로서

실상시대는 3대 혹은 4대까지 되는데 이러한 실상시대 동안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은혜의 천대란? 

다시 말하지만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오늘의 재림주제단까지는 3대가

되는데, 재림주 제단에서는 진리의 새말씀이 풀어져서 택함받은 자들이

영생에 들어간다. 누가 택함받은 자들이 되는가?

 

즉 누가 재림주의 음성을 듣고 영생을 받게 되는가 이다.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말씀에 목말라서 찾고 찾는 자들이

오늘의 재림주의 음성을 알아듣고 영생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다고 했던 것이다.

(천대는 무한대를 뜻하고 영원함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셋째 계명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혐오스럽게 함부로, 즉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인데 문자 그대로 여호와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 본질의 명성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첫째 계명에서 상술했듯이 하나님은 말씀이요, 그 말씀은 성경이라는

비유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형이상학이다. 즉 성경은 세상 물질계의

육적 형이하학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기록문자 속의 참 뜻을 파고들면

그 본질은 신령한 영적 형이상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해 오신 물질계의 창조공정과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에 대한 창조공정들을 낱낱이 논리정연하게

밝혀 주셨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지존자요,

아주 높으나 높으신 논리와 이성이 로고스(理性) 하나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문자 그대로

마술봉 하나 손에 붙잡고 소리나는 말씀으로 빛 나오라 하면 빛이 나오게 하고,

물고기 나오라 하면 물고기 나오게 하고, 문자 그대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 나오라 하면 여자가 나오게 하는 그런 천박한 마술사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높으나 높으신 로고스 하나님을 천박한 마술사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넷째 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6일동안 우리피조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고, 우리피조물은

6일동안 창조 받는 일을 해왔다. 창조하시는 일이나 창조를 받는 일이나

모두 고단한 일임에 틀림없으며 고단한 일을 마치면 쉬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7일째 되는 날은 영원한 안식일로 정하여

그 날을 평안히 쉬면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일을 지킨답시고 안식일이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아옹다옹 쌈박질 하면서 문자 그대로 교회에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진풍경을 벌여야 하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경의 참 뜻도 모르는 다른 신들이 요구하는 사탄의

예배 방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안식일의 참 뜻은 무엇인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것, 이것이 첫번째 안식이다.

그리고 진리를 알아서 진리로 자유한 자유인이 되면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다.

진리를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  이것이 궁극적 안식이다.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도 창조6일 동안은 주야로 죽도록 일을 했다.

낮에는 창조받은 일을 하고, 밤에는 어제의 창조를 깨부수고 다시

새날의 새창조를 받는 일을 해야만 했다.

 

6일6야 동안 그렇게 창조를 받고 다시 새창조를 위하여 깨부수기를

거듭하면서 여섯째날 끝날까지 미래지향적/진화론적 창조를 해오셨고

창조를 받아왔던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새창조를 위해 깨부수는 진화론적 창조를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던 것이며 우리도 각자 그러한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의 내가 죽어야 내일의 나로 거듭나며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새창조를 위해 깨부수는 진화론적 창조를 하신다는 뜻에서

하나님을 일컬어 토기장이 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고 토기장이가 되어 깨부수는 작업은 모두

진리로 자유케 되는 안식을 위해서이며, 영생을 받아 안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진화론적 창조 작업이었던 것이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게 곧 안식이다.

영원한 영생을 받는 일이 곧 안식이다.  

 

진리로 자유케 되기 위해서는 성경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입어야 한다. 영원한 영생을 받기 위해서도

성경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하나님의 엄명은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어서 깨달아서 영생의 안식을 누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까지는 창조6일이 소요된다.

즉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은 맨 마지막 창조 여섯째 날에 마침내 주어진다.

따라서 다음날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했던 것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안식일이니 무슨 날이니 해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율법적 행위일 뿐이고, 날과 절기에 내재되어 있는 참 뜻을 깨닫는 그 앎이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됨을 알자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성경은 비유라고 하는데 왜 비유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기록된 신령한 영으로서 형이상학인데

그 형이상학을 우리 일상생활의 형이하학으로 감추어서 기록했기 때문에

비유라고 하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우리의 부모도 공경해야만 한다.

우리 부모를 공경함이 인간이 지켜야할 마땅한 본분이요, 윤리와 도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궁극적 본질은 인간의 윤리도덕을 말함에

있지 않다. 다만 땅의 일을 빙자해서 하늘의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부모의 본질은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즉 우리의 영적 부모 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진정한 뜻이 된다.

 

 

 

여섯째 계명 / 살인하지 말찌니라

 

당연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땅의 육적 살인도 있을 수 없는 극히 사악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성경은 형이상학의 영적 기록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살인도 그 본질은 영적 살인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살인이 되는가?

목회자들이 교단에서 신도들에게 비진리를 먹이는 것이 영적 살인이 된다.

 

저 이천년 전에 초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 말씀이

비유였다. 비유이기 때문에 흑암의 말씀이 된다.

흑암의 말씀으로는 사람이 영생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비유를 우리가 풀 수만 있었다면 빛의 말씀이 되기 때문에

빛의 말씀으로는 영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빛과 흑암으로 오신 분이다.

 

이렇게 빛과 흑암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은 빛을 택했는가?

아니면 흑암을 택했는가? 사람들은 흑암을 택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신 비유문자(흑암)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이날까지 영생을 받지 못하고 아무리 잘 믿는 신자일지라도 불신자와 동일하게

지금까지 죽어왔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강도상을 치며 영생의 말씀이라고 설교를 하지만 그 설교는

성경문자 그대로 전하는 흑암이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살인을 해온 것이 된다.

 

 

 

일곱째 계명 / 간음하지 말찌니라

 

간음이란 정당한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의 성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간음은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고 자기영혼을 혼탁케 하는 일이므로

마땅히 금기시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본질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하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육적 간음이 아니라 영적 간음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간음인가?

 

하늘의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하고 땅의 백성을 아내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 남편되는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과 짝해서

연애행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곧 간음인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른 신과 짝하여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덟째 계명 /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이 땅의 세상에서도 육적으로 도적질해서는 마땅히 안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도적질 또한 영적 도적질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도적질이 되는가? 
하나님은 떼 가운데 수컷이 있으니 그 수컷으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다. 
떼 가운데 수컷은 우리의 본 남편되시는 하나님을 뜻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일컬어 십일조라고 했던 것이다.

즉 로고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십일조이므로 십일조는 물질 십일조가 아니고 사람십일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명하신 수컷으로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즉 사람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육적인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영적 말씀을 받은 영적 사람십일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람십일조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물질의 십일조, 혹은 돈의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사람십일조는 택한자 144000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떼어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아홉째 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세상에서 거짓말 하는 것 물론 아주 나쁜 일인데, 이 역시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영적 거짓말을 뜻하고 있다. 영적 거짓말을 뜻하기 때문에 사망의 비진리를 영생받을 진리라고 거짓말로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 된다.

열째 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 역시 하늘의 이야기이므로 영적 이웃의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네 이웃의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아닌, 다른 신의 백성의 것이 된다.
다른 신의 백성의 것은, 즉 다른 신의 백성의 소유는 비진리가 된다.
비진리는 논리가 아니고, 앞뒤 말이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신비체험 같은 속살거리는 소리이다. 
무당 굿풀이 같은 혐오스런 몸짓과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뜻모를 통곡소리로 인하여, 그런 교단의 인근 부동산 값마저 추락시키고 있다. 
논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 높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찌 그렇게도 천박한 다른 신을 믿는 백성의 것을 탐내리요!!




주기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5-8)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체를 입고 오감(감각)을 갖고 땅에서 사는 아주 (극히) 제한적인(연약한)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들리지도 않습니다. 손을 휘저어 봐도,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차라리 눈에 잘 보이는, 해나 달이나 별이나, 큰 나무나, 바위나, 높은 산이나 바다나, 불상과 같은 우상에 대고 손이 닳도록 비비며, 삼천배씩 절을 하고, 갖은 고행(수행)을 하는 등,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발생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기도는 멋 떨어지게, 청산유수로, 잘 하기는 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기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금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이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지적
하시고,“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기도입니까?

  1. 첫째로,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 (the hypocrites)와 같이 (기도)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to be seen by men)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 (댓가)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하는 자”의 헬라 원어를 보면“가면을 쓰고 연기(연극)하다! 가식적(위선적)으로 행동하다’(pretender)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척,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경건한척, 성경도 많이 모르면서 많이 아는 척,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많이 하는 척, 믿음이 하나도 없으면서 대단히 잘 믿는 척 합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외식적인(위선적인)기도가 어떤 면에서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기도를 하느냐?”라고 물으실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자랑하기) 위해서, 하루에 3번씩 (오전 9시, 정오 12시, 그리고 오후 3시) 만 되면 습관적으로 기도합니다. 특히 오후기도 시간에는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자랑)하려고 큰소리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 5절 (하반절에)“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이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칭찬, 부러움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상(축복)이 전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곧 이런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를 잠언 28장 9절에 보면“사람이 귀를 돌려 하나님 말씀(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위선)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입술로는 무척이나 기도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척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은 교만하고, 기도한 내용 대로는 전혀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바리새인들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간혹 어떤 목사나 장로(권사, 집사)들과 대화하다보면“저는요, 금식기도를 대단히 많이 했고요, 40일 기도를 여러 번이나 했습니다!” 물론, 간증을 하는 도중에“나는 이렇게 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이런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내가 40일 기도를 몇 번해서 이렇게 유명한(신령한) 목사(장로, 권사)가 되었으니 나를 좀 알아주고, 인정 해 주길 바랍니다!”이런 의도로 자랑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며 주님이 싫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외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진실 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둘째로, 골방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closet, inner room)이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은 아주 어둡고 작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골방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조용한(한적한) 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그러므로 골방은 자동차 안이 될 수 있고, 화장실도 될 수 있고, 아무도 보지 않는 뒷마당의 벤치(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을 좋아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실까요? 여기에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사람이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데만 찾아다닙니다. 단둘이 앉아서 아무도 방해 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며,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더 가까워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사이라도 특별히 사이가 좋은 잉꼬 부부 같은 경우는 단둘이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부부 가운데서도 별로 애정이 없는 부부는 남편이 어쩌다 “여보, 나하고 조용한 데 가서 둘이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하면 부인은 화를 내면서 “아니, 이 나이에 무슨 청승맞게 그렇게 으슥한 데 가서 이야기 하자고 그러느냐?”핀잔을 줄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애정(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아가서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기록 되어 있는데 (아가서 2:3에)“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신부)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또한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예수님 또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과 따로 떨어 져, 한적한 곳, 즉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교제(기도) 할 때에는, 세상(세속)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체면(위선, 외식)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분주함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속된 잡념들을 닫아야 합니다. 욕심들을 닫아야 합니다.

  3. 셋째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야합니다

  본문 7절“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중언부언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반복 하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다! 즉 무의미한 말로 시간만 때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타 종교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를 합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기네들의 신이 들을 줄로 생각해서 같은 말을 계속해서 주술을 외우듯이 반복합니다. <남묘호랑게교>에서는 ‘남묘호랑게교! 남묘호랑게교! 남묘호랑게교!”만, 계속 수백, 수 천번씩 반복해서 중얼거립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의 기도가 대표적인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선지자)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과 아세라 우상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기도가 얼마나 달랐습니까? 바알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정오 때까지 열심히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라고 계속 반복적으로 외쳤습니다. 뛰어다니면서도 춤을 추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아무 응답이 없자,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목이 터져라, 우상에게 외쳤지만 죽은 우상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는“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의 기도는 ①살아계신 하나님께 향한 기도요, ②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요, ③기도의 이유와 목적과 대상이 분명한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서, 기도에 대해서 훈련이 잘 안되어서, 기도할 내용이 잘 생각도 안 나고, 기도를 서툴게 해서, 어린아이처럼 또박 또박, 천천히, 띄엄띄엄 하는 기도는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7번까지 다시 가서 기도했음을 볼 수 있으며, 바울사도도 자기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태복음 26:44) “또 제자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성경에는 3번 밖에 반복이 안 나왔지만 우리가 볼 때에 그렇게 긴 시간 3번만 반복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수십번 수백번, 똑같이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믿음 주소서! 나의 이런 질병을 고쳐 주소서! 나의 이런 나쁜 습관을 고쳐 주소서! 아무개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은 잘못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아들이 공부도 안하는 데) “서울대, 하바드대 붙게 하여 주옵소서!” “(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해서 장사가 잘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도 잘 안나오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거면서)”장사 잘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나님은 주시길 원치 않는데, 정욕으로 쓰려고 계속 달라고 보체는 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또 제목을 놓고 작정 기도를 할 때, 마음에 평강과 기쁨과 확신(믿음)이 올때까지 기도를 해야 하며, 마귀와 싸울 때에는 마귀가 나갈 때까지 기도를 해야 합니다

  7절 (후반절에)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마치 오늘날 모슬램들이 아무리 바빠도, 행실이 엉망이어도 시간만 되면 일하다가도 도중에 기도처에 가서 어제 했던 기도 똑같이 반복 하듯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전도서 5장 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말을 적게 하라!” 는 것을, “기도를 길게 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치 하나님을 설득시키려는 마음으로“자세히 시시꼴꼴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오래 (몇 시간씩) 기도를 하려면 정말 수많은 훈련(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시간보다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보면“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바리새인처럼 화려하고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세리의 기도는 마음을 쏟아 놓는 대단히 내용이 휼륭한 기도였습니다. 시간보다, 많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편 51: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요엘2: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찌어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8절 “그러므로 저희(바리새인들)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자녀들의 필요를 다른 사람보다는 더 잘 듯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소원을, 나의 심정을, 나의 고민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모든 내용(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로마서 9: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기 위하여...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1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 하나이다!”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것 아니라, 그 입으로 구(기도)하게 하고, (마음으로) 시인(믿게)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루 24시간, 일주일, 365일 내내,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사람만 상대하고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숨이 막혀, 답답해서 못 살 겁니다. 마음에 상처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보다도 억만배나 더 위대한,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시편 5편 1절 이하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내가 아침에 주께 기도 하나이다! (히 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했던 에녹처럼,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며 주님과 아름다운 기도로 동행하시며 우리의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복음 6:9-13)

Hallowed be Thy name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각 그 이름이 다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보면,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
무슨 꽃인지, 무슨 풀인지, 무슨 동물인지, 무슨 벌레인지 그 본질(속성, identity)들을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은 모두 다 자기 이름을 갖고 있어도 그 이름대로 살지를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크게 성공하라고 ‘대성(大成)’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른길을 걸으라고 ‘정도(正道)’라고 이름을 짓지만 그 이름과 인격이 일치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그 모든(각각의) 이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으며
때에 따라서 그 이름대로 100%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다양한 이름들을 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관한 이름은 수십 개가 있으며, 어떤 학자는 수백 개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들은 제각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계시하는 방법(상징적)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부(prosperity)가 너무나 크셔서, 우리 인간의 말이나 생각이나 지식으로,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들을 통해서 그분의 성품이나 생각 또는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에서 무려 2,570번이나 사용된 엘로힘(Elohim)이란 이름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한하신 권능과 힘’ 을 계시(상징)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에게 익숙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성경에 무려 6,823번이나 등장하는데 여호와(Jehovah)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혹은 스스로 존재케 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존재와 본질, 속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의 눈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양치는 목동으로 지낸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모세야! 너를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야겠다!”라고 말씀하시자,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출애굽기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 하면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묻기를 “그(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 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모세)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이렇게 말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영어로는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나는 있으니까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한다!”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이처럼 신비로운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규명(설명, 증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스스로를 규명할 수 있다는 뜻이며,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수도, 만들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히브리어 명칭은 4 개의 자음 יהוה 만으로 “야훼, 영어로는 Yahweh!”입니다. (출애굽기 20:7)“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유대인(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호칭을 너무 두렵고 황송해서 그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이 단어를 발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베껴 쓰던 학자(서기관)들은 이 단어(Yahweh)를 읽을 때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Adonai)’라고 대신해서 읽었습니다. 이“주님”(Master, Lord)이란 뜻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을 소유하신 분,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인 되시는 분,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며,
내 삶(인생)의 주인이시며, 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나의 주인임을 나타내는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우리 인간을)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스올(지옥)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건지시기도 하시는도다!”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레위기 24장 16절 말씀을 따라 무의식중이라도 그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2,000년이나 흐르면서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버렸지요.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고,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서기관들이 성경을 손으로 필사(복사)할 때에 그들은 깨끗이 목욕한 뒤 새 옷을 입고 기도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필사를 했는데 하나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 몸을 씻고, 새 옷, 새 잉크, 새 붓으로 바꾸고 기도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시여!”이렇게 마음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가깝게, 다정하게, 친근하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몇 가지 단어와 합쳐서 하나님의 속성과 활동을 나타냅니다.

  ▣ 여호와 이래 (Jehovah Jireh): 공급자 하나님! 모든 것을 준비(제공,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The Lord is my provider)(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 치료자 하나님!(The Lord our Healer)“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애굽기 15:26)
▣ 여호와 닛시 (Jehovah Nissi) : 우리의 깃발이시며 승리의 깃발이신 하나님(The Lord, my Banner) “이에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였으니...”(출애굽기 17:15).
▣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 상황과 현실 속에서 계시는 하나님 현존하시는 주님(The Lord who is present) (에스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여호와 샬롬 (Jehovah Shalom): 평강의 하나님 “주님은 평화이시다(The Lord is Peace)란 의미의 여호와 살롬(Shalom)이 있습니다 (사사기 6: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 여호와 로히(Rohi; Raah): 주님은 나의 목자(The Lord my Shepherd) (시편 23:1)
▣ 여호와 티드케누(Tsidkenu) : 주님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 (렘 23:6)

  이런 이름 위에 또 하나의 위대한 이름, 지극히 뛰어난 이름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예수그리스도는 이름대로 ‘구원자’ 그래서 정말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2.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 할 때 ‘거룩하다’는 것은 세속(더러운, 부정한 것과) 구별되다(set apart from secular) 깨끗하다! 순결하다! 성결하다! 정결하다!”

  우리 인간의 조상(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죄로 오염되고, 심지어 모든 만물까지 공해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염된 피조물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거룩하신 존재,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인 거룩한 속성은 이 세상의 죄악들과,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온갖 부정과 오염들,
이런 불결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신 100%! perfect God! perfect good! purest! He is holiest!”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6:3)“거룩하시다(holy)! 거룩하시다(holy)! 거룩하시다(holy)!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름 (성품)을 거룩으로 설명하면서 3번씩이나 “거룩하시다!”를 반복합니다. 성경에서 같은 말이 3번 반복해서 나오면 최상급입 (최고)입니다.

  (로마서 3:16)“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우리 인간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해도 우리는
죄 때문에 결코 거룩(깨끗)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닮아갈 뿐이지, 결코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16에)“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베드로후서 1:4)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거룩해야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4에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 (마태복음 5: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것이요!”

  (이사야 59장 1절이하에)“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거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의 경험담입니다. 그 성도님의 어린 꼬마 아이가 뛰어 놀다가 어느 날 그만 더러운 오물통(하수구)에 빠졌습니다. 죽음의 위험에서 간신히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오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대로는 너무도 냄새가 고약해서, 도저히 그 아이를 품에 안을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물로 여러 번 씻은 후에야 자기 아기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간증 했습니다. 바로 이처럼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죄로 인해 너무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우리가 늘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갈 수 하는 이유입니다.

  둘째로, 거룩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3장 5절에“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거룩)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기적과 이적)를 행하시리라!”하나님은 거룩한(회개한) 사람에게,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고, 모셔드린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요사이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다고 말입니다. 썩어질 돈과 명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을 (교회를) 배반합니다

  (신명기 5:11 십계명 5번째 계명) “너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이사야 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레위기 21:6) 너희는 내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지니 오직 나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거룩하게 될 것이니라. 주님은 그 누구라도 거룩한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 자신의 백성들이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욕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에스겔 36:20)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성호)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더럽혀지곤 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심하게 조롱 받고 있는지, (인터넷에 악풀 malicious comments을 보면, 기독교를 개독교라 그러고, 목사를 먹사라 그러고, 성도를 예수쟁이라 그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얼마나 심하게 훼손되고 있는지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글이 넘쳐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잘못이,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힙니다. 가장 거룩하게 대접받아야 할,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고, 비난과 조롱거리가 될 때 하나님은 “너희가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잘못하면“저놈! 누구자식이여?”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교회가 잘못하고, 목사 장로(권사, 집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하나님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하나님!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게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더럽혀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살겠나이다!”이렇게 기도 할수록, 나의 영적 삶 역시 거룩해지고 경건해지고 의로워 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이름(명예)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그 이름이 땅에 기록되는 것이 전부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거룩히 구별하면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마태복음 5:16)“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라가 임 하옵시며 (마태복음 6:9-13)

Thy Kingdom Come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공부했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①“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옵소서!”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경배, 찬양) 드리는 기도(Hollowed be Your Name!) 를 하라!”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두 번째의 기도 제목을 공부하겠습니다. 두번째 청원(기도제목)은? “②(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임하시옵소서” (Your Kingdom Come!)”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진짜행복(하나님의 나라)이고,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같은) 행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심령 속에 임하여서, 심령천국 (행복한 인생), 우리 가정 안에 임하면 가정 천국, (행복한 가정), 우리 교회 안에 교회천국 (행복한 교회), 이 나라 미국에 임하면 나라 천국 (행복한 나라)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천국과 같은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토록 우리가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지배)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통치 (보호권)에서 벗어나 죄에 노출되는 순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 빠져 불행 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첫 번째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하나님 나라)이 가까웠느니라!”
(마4:17)입니다. “회개하면 심령에 하나님나라(기쁨, 소망, 평강, 감사)가 임하여 행복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 역시 천국에 관한 메시지 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도)“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시니라!”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하나님 나라) 와 그의 의(하나님을 믿는 믿음)를 구하라(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내 심령 속에 임하게(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주기도문의 2번째 기도제목 역시 “하나님 나라(기쁨, 평강, 감사, 소망)가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알고 믿고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의 개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하나님나라)에 가지요) 그러나 오늘의 주기도문의 구절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국민과 백성과 통치자(왕, 대통령, 다스리는 자)이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서도
① 하나님의 통치권과 ② 하나님의 백성과 ③ 하나님 나라의 영토(장소, 위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다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통치(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 아래만 있으면 그 어디든지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어로 나라를 ‘kingdom!’ 이라고 합니다. ‘kingdom’ 왕국입니다. 왜 그 나라를 ‘kingdom’ 이라고 부릅니까? 그 나라에 왕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kingdom에는 누가
그 나라의 왕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왕권아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스림(sovereignty)을 받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우리가 예수를 나의 왕으로 모셔드리고, 믿고 인정하고, 세례를 받고 나면 비록 내 육신은 이 땅에서 살지만, 나는 천국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영적인 삶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세상의 삶은 얼마나 불편합니까? 집 떠나 여행을 하면 얼마나 고생입니까? 그래서 “잠시 이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 그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은 영원한 내집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고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기 때문에, 육신은 고달퍼도 마음속이 천국 인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대사는 몸은 한국에 있지만 신분은 미국시민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그의 백성(우리그리스도인의) 심령(가정과 교회) 가운데 들어와 (내 삶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도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임하시고) 또는 통치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지간에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선 법을 어기면 감옥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말씀)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나중에 죽어서 감옥갑니다. 그러면 그럼 좀 더 자세히 하나님나라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무슨 뜻일까요?
1. 하나님의 다스리심 (주권)이 내 삶에 드러나소서!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내 심령과 내 삶)속에 임하도록 기도합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me!)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두 ‘이중국적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속한 나라(미국)의 국적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순간 천국시민권을 발급받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국적(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의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국 (한국)땅을 떠나 살고 있는 여러분이나 저는 누구보다도 더욱 이런 두 나라의 국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늘 모국(한국)의 동향과 정세(뉴스)에 늘 관심을 갖고 민감하여 기뻐하고 때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도“나라가 임하옵시며!”이 말의 직설적인 의미는 “나는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한 내 조국(내 나라) 천국을 사모하며 삽니다! 장차 내가 돌아갈 영원한 내 고향 천국을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 시민의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게 하소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천국’하면 ‘꼭 죽어야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우리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가십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죽어서만 가는 곳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 세계로만 인정하면,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하나님 빨리 죽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서 천국가고 싶습니다!”라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과연(정말) 주님의 기도가 그런 의미(뜻)입니까?

  이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삶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뜻)대로 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비록 몸은 이 땅에 살지만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는데, 내가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안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그 나라,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질병과 아픔이나 죄악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정말로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지금 이 땅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를 든다면 이 땅은 천국의 예비학교(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군대를 가면 본부대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1-3개월의 훈련소 과정을 거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시 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말씀은 비록 우리의 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의 지배를 받고 살라! 미국의 대사는 한국에 가서 살아도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삽니다.

  그럼 그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세상의 다스림에 속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 속으로 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즉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눈에 보이게 임하거나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복하는 사람들 속에서 벌써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눅11:20)“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각종 귀신들을 쫒아내실 때 하나님의 왕권은 이미 세상에 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3 &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주권이 이나 통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지간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49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도 다르고, 이 세상의 나라와도 분명히 다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한다고 말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도하지만 여전히 땅의 삶에 묶여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고 여기서 영원히 살고파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에게 힘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줄 것들을 많이 쌓아두고 묻어놓으며 든든히 채워넣기만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불러 가시면 홀연히 인생을 마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는 있는데 희미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영의 눈을 뜨고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 사는날 동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예수님이) 내안에 임하시는(거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에는 왜 평화가 임하지 않습니까? 왜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 근심과 상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러데 어떤 사람은 왜 자꾸 짜증이 나고, 기쁨이 없고, 삶은 무기력하기만 합니까? 그 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욕망을 이루는 일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0에서 이같이 증언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래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내가 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야 임해야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내 삶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천국처럼 살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삶인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2. 하나님의 나라가 내 가정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가정에 천국이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언제 천국을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실 때 그들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부부가 서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던 그때 그들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가정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가정천국을 우리 온 성도들의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다랄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한 가족입니다. 가정에는 서로 믿고 도와주고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운 가족을 책임지고 돌봐주고 격려하는 사랑이, 포근함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마음의 천국이나 가정의 천국이나 교회천국은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커가고 성장하는 것이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자녀에게 임하게 하시고, 우리의 우리 목사님에게 임하게 하시고, 우리 집사님에게 임하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면 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마는 하나님 나라를 다 경험하고 살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 갈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3)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세 번째 간구 (청원, 제목, petition)은 하나님의 뜻을 구(asking)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뜻을 이 땅(세상)에 세우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살다가 죽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뜻을 알아야 공부를 잘할 수 있고, 자녀는 부모의 뜻을 알아야 효자가 될 수 있고, 직장인은 사장(경영주)의 뜻을 알아야 칭찬(인정)을 받고 승진을 할 수 있듯이, 성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이기적인 존재 (죄인)이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기도 역시 자신의 뜻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래서 자신의 뜻(생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는 결국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고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을 ‘영적인 조율’(spiritual tuning)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주회에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각종 악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악장의 악기(standard)에다가 각자 자신들 악기의 소리(음)를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조율(tuning)’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 할지라도,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는 결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주전에 반드시 조율을 하는 것입니다. 연주자들이 연주를 할 때마다 정확한(정직한) 음을 낼 수 있도록 악기를 조율하듯, 우리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찬양, 말씀, 기도)에 내 뜻, 우리의 뜻을 맞추는 영적인 조율을 해야만 합니다.(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래야 우리의 영적인 삶은 물론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내 육체의 소원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 이하에“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요한일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이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생 할(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주님, 내 뜻을 꺾어 주십시오! 내 뜻을 죽여주십시오! 내 자존심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내 교만을 없애 주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님,
도와주십시오!”이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가장 정확한 기도의 모범(example)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원(want)’은 ‘뜻(will)’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accept)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십자가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일 5:14) “그(하나님)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용기있는) 것(행동)이 이것이니 그(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심이라!”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요 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오늘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말씀)을 알려주시고 하늘(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하면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며, 그 (하나님의) 뜻(말씀)을 성취(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12장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사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하나님 아버지의 뜻(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원하심은 무엇일까요?

    1.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에 ‘하늘’과 ‘땅’이 대조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성취, 완성)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뜻(계획)이 완전히 이루어 진 곳이기 때문에 완전한 (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지(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욕심, 세상의 유혹, 사탄의 음모가 뒤엉켜 나타난 불완전한(죄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다! 펼치신다! 행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하늘나라)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다니 그는(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행복과 충만과 풍요는 이 땅이 아니라 위로(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바람도 이 땅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것입니다. 생명도, 구원도, 진리도, 은혜도 결코 이 땅에서부터 올 수 없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말씀)대로 행해야(살아야, 순종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공부 했던“(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오늘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맥락에서 본다면 결국 같은 뜻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라와 백성과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지만 먼저 우리와 우리 가정과 자녀와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나라가 임(Your kingdom come!)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도록(Your will be done)’중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늘이 먼저이고‘땅’은 그다음입니다. 하늘은 영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진리, 정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장소는 무엇보다도 이 땅입니다. 하나님은 땅(세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어떻게 보면 주일 하루보다 평일 6일이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공간도 중요하지만 세상이라는 더 넓은 공간도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이라는 넓은 땅을 포기하고 교회라는 좁은 공간에만 안주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에게로 가라!”(마28:19,20)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과 만물의 머리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땅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뜻을 소명(사명) 곧 부르심(calling) 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고 겪어야 될 운명이 있습니다. 자기를 향하신 이 하늘의 뜻을 발견한 (실천하는, 순종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작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심령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져 간다면 그보다 값지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주 예수 모신 그 곳, 바로 나의 심령이 천국이 되고, 나의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하나님의 plan(게획, 섭리)대로 하나하나 그 계획들이 이 역사 위에 이루어져 마침내는 하나님의 최종 plan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이루는) 것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살고 십자가라는 고난의 길을 가셨지만 그것이 자기가 짊어져야 될 하늘의 뜻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기계를 만들 때는 그 기계를 만드는 목적이 있습니다. 기계는 그 목적에 맞게 살 때 가장 적합하고 제대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 뜻을 맞추어 살 때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고, 힘이 있고, 원함이 있고, 능력이 열심이 있다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를 만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자들, 즉 하늘이 된 자들만이 땅에 속한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늘의 뜻을 따라 살면 즐겁고 행복하고, 하늘의 뜻을 따라 살면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전에도 “순천자는(하늘에 순종하는) 흥하고 역천자(반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주님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절 이하에)“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 그러면 주님을 보내신 이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인줄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는 아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점차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성결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성도가 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쉬몰크(B. Schmolck)목사님은 심방을 다녀오는데 사택에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화재가 난 것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와서 어린 두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검은 잿더미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는 몇날 며칠 동안 침식을 폐하고 괴로워하면서 주님께 회개 기도하며, 원망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보이고, 주님의 기도가 내 기도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이렇게 계속 기도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바로 그때(1704년)에 작사한 찬송이 431장입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받들어 기도하고 섬기는 철든 성숙한 신자가 되십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사랑하고, 이렇게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9-13)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오늘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입니다. 세 번째 간구까지는 ①하나님의 영광(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과 ② 하나님 나라(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와 ③ 하나님의 뜻(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나이다)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을 위한 첫 번째 간구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④“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
라는 이 기도를 드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가진 게 많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이 되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가 언제부터 음식타령을 했습니까? 한국에서 전쟁이후 우리는 얼마나 못 먹고 못 입고 살았습니까? 얼마나 못 먹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식사하셨습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습니까?” 가 인사말이 되었습니까? 검정고무신에 셔츠 한 벌로 몇 달씩 입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유일한 간식거리는 옥수수(강냉이)와 고구마 몇 개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굉장한 부자임에 분명합니다. 최소한 우리는 오늘 당장 먹을 양식 때문에는 걱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문제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너무 잘(많이) 먹어서 비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거의 대부분 성인병의 원인은 영양부족이 아니라, 영양과다이고, 먹는 것에 비해 운동량이 적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식사와 다이어트 약을 겸하여 먹는 웃지 못 할 non sense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이 기도는 우리에겐 전혀 맞지 않는, 소위 한물 건너간 옛날 기도 아닙니까? 당연히 이 대목을 기도할 때, 별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간절한(절실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 시대에 무슨 맥 빠진 기도입니까?

  그동안 우리는“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기도문을 “너무 먹을 것에 욕심 부리고 살면 안 된다!”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받아들였습니다. ‘양식’은 문자 그대로의 먹을 것(food)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북한 또는 난민등등 전 세계의 70% 이상이 물과 식량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 때에, 배가 고파서 죽어 간, 수백만의 우리 동포들이 있고, 워싱톤 수도권에도 수만명의 homeless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정말 절실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디선가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 기도가 절실한 곳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1. 먼저,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오늘날’ 이라는 뜻은 잘못하면 ‘요즈음(these days)’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한 날 (today)’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해석은 “오늘 하루 동안에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our daily bread or material(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은 “우리에게 일용할 오늘의 양식을 주시옵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꼭 필요한 하루분의 양식을 말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오늘 하루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분의 식량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냉장고에 (냉동실에) 몇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너무 많은 식량(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로 가난한 몇나라 식량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답니다. 이 기도가 마치 “일용할(하루에 필요할, 하루 동안 사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는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과욕을 부리지 말고, 과식을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분의 양식으로) 만족하게 (근검절약하며) 낭비하비 말고(과소비하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하는 절제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매일 매일 먹을 필요할 양식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사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하면 식구들의 먹고 살아야 할 양식을 얻기(사기) 위해 노동을 하야만 하는 가장(bread winner)의 건강도 필요하며,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주님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우리 남편 직장에서 lay off 당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을 지켜 주옵소서!”이런 소원이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의식주 문제, 사업 문제, 건강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등 모든 것이 다 일용할 양식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을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본문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사막)에서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광야(사막)에는 그 많은(장년 70만 총 200만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기적을(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아침마다 이슬처럼 내리는 작고 둥근 떡가루 같은 것으로 희고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딱 하루 분량치만 내려 주십니다. (출16:17-18)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었더니 썩어(상해)냄새가 나고 벌레가 나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만나를 주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매일의 만나를 주심으로 하나님은 세 가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는 음식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매일 하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간절한(갈급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2.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일의 만나로 먹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신명기 8: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13장 6절에 보면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하나님을) 잊었느니라!”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요한복음 4장 32-34절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고 묵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구하라는 ‘일용할 양식’이 단지 ‘먹는 문제’에만 국한 되지 않음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의(본심, 뜻)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은 떡(물질)에 매여 살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물질의 논리에 굴복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입니다. 먹는 문제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분명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문제는 물질을 얻는(취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면서 하나님 보다는 우상에게 절해야 풍요로울 수 있으며, 비록 노예처럼 살지만 애굽에 살면, 육신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당시 유대인 들이 살던 지역은 소돔과 고모라 땅처럼, 애굽에서 가장 기후와 토양이 좋은 고센지방 (나일강 삼각주지역)이였기 때문이지요. 오늘날도 자본주의 논리를 좇아 서로 속이고, 남과 악착같이 경쟁해서 이기고 딛고 올라가야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방식을 좇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가 풍요로울 수 있음을 만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물질(우상)을 좇아 살면 더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욕심)을 쫏을 수록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결국은 물질의 노예가 그래서 더 많은 물질을 끊임없이 탐하거나, 없으며 불안해하고, 있으면 교만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은 점점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아모스 8:11이하)“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영적인) 기근을 이 땅에 보내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굶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아, 이 일용한 양식이 단지 육체적인 (물질적인) 음식만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3. 일용할 양식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너무 많이 쌓아두는 데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필요한데 자꾸 쌓아둡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프리카에는 수천만명이 굶어 죽는데 미국은 음식물 쓰레기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쌓아두기 때문에 한쪽은 굶고 다른 한쪽은 다이어트(살을 빼느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문제는 (호13:6)“그들이 배가 부르니 마음이 교만하여 나를(하나님을) 잊었느니라!”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는 점입니다. 곡간에 곡식이 가득하면 안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물질 의존적 (황금만능주의; 돈이면 뭣이든 다 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 형제들간에, 친구지간에 원수가 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재물을 의지하려 함으로, 마음이 요동하며 근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물질에 있는 함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첫째, 욕심이 지나쳐서 물질을 쌓아 놓기만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 진정한 안식(평안)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변전하는 자연계 안에 살고 있고, 내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죽음의 문제 앞에서 모두가 다 불안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누가복음 12:16-21)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평생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쌓아 놓고, 그 것을 의지하며 안심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더 든든한줄 알고 되도록 이면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을 넘치도록 쌓아 놓아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life style에 있는 함정은 불안이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있읍니다. 평안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재물로서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보다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만족이(행복이) 없습니다. 부자는 항상 돈 계산하기에 바쁩니다. 남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몇 곱절이나 많습니다
(마태복음 6:31이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입을가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의 삶의 스타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면서 모든 만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안식합니다. 믿음으로 온전한 안식이 이루어지면, 삶의 짐으로 부터 해방되어, 거기서 부터 새로운 힘이 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상황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입을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의 필요를 다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을 때 염려 근심으로 부터 우리는 해방됩니다. 에수님은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 것을 강하게 명하십니다.

  셋째로, 사람은 연약하여 하나님 보다 자꾸만 물질을 의지하려 하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함정(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상적인 필요에서 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5:18 이하)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기쁨, 행복)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축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그런 즐거움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잠언 30장 7절 이하에 보면 아굴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하나님이여!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빌립보서 4장 11절이하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자기가 소유한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필요를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이런 비결을 배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루하루를 감사하십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12)

예수님이 가르쳐주신‘주기도문’ 가운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죄 용서를 위한 기도’인데 9절부터 13절까지 주기도문이 끝나고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서만 추가로(따로) 언급한 것을 볼 때, 오늘 기도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주기도문을 하기를 무척 꺼려했습니다. 
바로“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정말 미워(싫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자꾸만 이 구절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상당히 순수한(솔직한)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을 품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배를 드리고 주기도문을 반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이웃을(형제를) 향한 나의용서

우리의 죄를 사(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에서, 왜‘죄(sin)’이라 그러지 않고 ‘빚’(deb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마치 빚처럼, 상대방에게 손해를 주고 큰 부담을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가 상대방,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한 ‘사람의 관계’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처럼,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때로 고통(멍애)를 주니까, 
“그냥 용서를 해버리면 그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 되버린다!”
바로 빚(debt)진자를 용서(forgive)하듯이, 우리의 죄(sin)도 그렇게 하여 주옵소서!” 는 뜻이지요

마태복음 18:23-35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하나님)에게 10,000 달란트를 빚진 부하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가 금 34Kg 200만불(20억)정도입니다. 
2,000,000,000 x 10,000 =?
어떻게 하다 이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일만 달란트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우리의 죄 값이 사망이라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죄 값이 비쌉니까?) 
그런데 왕이 네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이것을 갚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임금 앞에 얼마나 간절히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만 참아달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 보겠다고 애원을 합니다. 그런데 왕(하나님) 이 사람(우리)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탕감해 줍니다. 이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어요. 하늘을 나는 것 같지 않겠어요. 그 임금에게 얼마나 감사 하겠어요... 그런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면서 마침 자신에게 빚진 어떤 사람을 길에서 만납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100 데나리온 (100일의 일당) 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 6,000 정도의 액수입니다.

  이 사람은 방금 전에, 왕(하나님)으로부터 10,000 달란트의 엄청난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100 데나리온 때문에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당장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아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일이 왕에게 들려졌습니다. 이윽고 왕이 이 사람을 불러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형제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2-33)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리고 왕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감옥에 다시 가두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 13절에서 끝나고 계속해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이처럼(왕의 신하처럼) 너희가 사람(형제)의 과실(잘못, 허물, 죄)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하나님)
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시리라!”사람의 과실(실수)을 용서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해 봤자, 우리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수없이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실로 부담이 되는(양심을 찌르는)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남을 용서도 하지 않은 체로, 그냥 기도하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면제),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의 빚이 나에겐 크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책망 받은 종이 탕감에 인색했던 것은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 사랑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살아나온데 대한 감사와 감격)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3:13) 그러므로 이제 우리 서로의 죄(빚)를 사(용서)하여 주는 것 즉 서로의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절에“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18:21-)“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5장 44절 이하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 인간들은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항상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럴까? 왜 나를 괴롭힐까?”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접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의 상처,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가 보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늘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용서(사랑)는 우리 신앙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소 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나의 선택이나 권면이 아닙니다. 바로 용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또한 남에 대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쩌다가 남을 한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하는 기도를 듣고 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변화시킨 것처럼, 내가 먼저 용서하면 그 사람도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와 축복의 열매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손만대에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풀꽃 향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남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대신 지고 가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용서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위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용서의 실천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점점 완전해 질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거듭나는) 순간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녀가 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할 때마다“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요구하는 죄 사함의 기도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은 근본적인 원죄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 짓는 죄들 (자범죄, 자기스스로 범한 후천적인 죄들, 때로는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서,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 수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죄 사죄함을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목욕과 발을 씻는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0(전반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유대(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동사막(물이 귀한) 지방이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목욕을 자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에 너무 먼지가 많아서 발만은 자주 씻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구원, 영접)를 체험한 사람은, 즉 그리스도인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졌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더러워진 자신의, 손과 발을 씻는 것과도 같음입니다.

  원죄가(예수를 믿지 않았던 죄) 예수를 영접함으로 예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어도, 마치 우리가 숨을 쉬면 먼지가 우리의 코 속으로 들어오듯이, 타락한 이 세상의 죄가 손을 씻어도 더러운 것을 만지면 다시 손이 더러워지듯이, 이 세상이 온통 죄로 오염이 되어 있어서 날마다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기 전이나 화장실에서 일을
본 다음에 손을 씻듯이 기도 할 때마다 그날 지었던 죄를 씻고 다시 죄를 돌아보면서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우리의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받고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무장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서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 기도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기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 안에서 용서받은 자녀가 날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냥, 노아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정죄해서, 우리 인류를 심판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마 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용서의 축복

  1) 용서는 기쁨을 회복시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기쁨 말살합니다. 죄를 짓고 나면 기쁨이 사라지고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다는 증거는 아직 증오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할 때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교제(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 용서는 사탄의 궤계를 파합니다! 사탄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용서를 하는 것은 이런 사탄의 계략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용서를 할 때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탕감해 줌으로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For thine is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

주기도문의 7가지의 기도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②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③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 ④ 아버지의 뜻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 ⑥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⑦ 우리를 시험에 들에 하지 마옵시고 다만(모든)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마치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마지막 마무리로 주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adoration & praise)이 터져 (우러)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배울 이 송영(마지막 노래)은 간구(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의 고백을 드리는 것이 송영(대영광송)입니다.

  그런데 한글 주기도문에 보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는데,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없는 단어 ‘대개’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낭송하면서도 ‘대개’라는 뜻이 뭔지도 모르고 반복할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란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는 ‘호티’인데 그 뜻은 “왜냐하면?”이라는 논리적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입니다. 영어에서는 f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대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 이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첫째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소유권을 인정하는 고백이며, 둘째로, “주님은 마땅히 우리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나이다!” 권위(왕권, kingship)를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1. 이 송영 부분에서 제일 먼저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Kingdom of God)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소유)임을 인정하는 찬양입니다. “나라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다시 한 번 “내가 어디에 속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왕도, 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는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고 찬양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잘못 붙잡고 있었던 나라들을 포기하겠나이다! 나를 다스리고 있는 잘못된 것들(우상)들을 포기하고, 내가 그동안 주인 삼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제 이후로는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 붙들겠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모든 어둠과 악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100% 거룩과 사랑과 정의(공의, 공평)와 평화와 축복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과 고통과 한숨과 절망과 탄식과 이별과 가난과 질병과 아픔과 시기 질투도 없고 오직 사랑하며 참된 평화(행복)를 누리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인생의 만족을 누린다고 해도 누구나 인생의 쓴맛, 아픔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론 그것이 너무도 힘이 들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서로 더 많은 물질(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나라끼리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야, 이 지긋지긋한 세상 빨리 죽고 싶구나!”라고 탄식 할 정도로 불행과 고난과 아픔(슬픔)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의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나그네의 인생길이 130년이나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강건하여 조금 더 건강히 사는 자나, 조금 약하게 사는 자나, 좀 잘 먹고 잘사는 자나, 좀 덜 먹고 못사는 자나, 지나고 나면, 다 그저 그렇고, 역시 인생은 험한 나그네 인생길일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안식과 사랑과 자비와 인자와 긍휼을 누리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시편 145편 13절에“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제와 미래 속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의 예배가운데, 우리의 심령 속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은 이 세상에서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전전긍긍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소유하는 믿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사소한) 일에 시기질투하고 분노(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크고 강한 믿음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두세 사람은 아주 작은 수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로운 찬양과 능력 있는 말씀과 성령이 임재 하는 뜨거운 기도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곳이 광야이든 산꼭대기이든 도심한복판이든, 찬송가 438장 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님에 대한 찬양과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고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만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믿음으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모셔드릴 때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임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렀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모여 있던 예루살렘으로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해 수많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후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1절 이하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심령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루어,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두 번째 송영은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즉 능력은 almighty 전지전능입니다. 권세는 두나미스(Dunamis)‘파워(power)’
입니다. 영어의 “다이나마이트”(dynamite) 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힘 power, 의지적인 능력, ability, authority, 성령님의 권능, 강력 strength, 놀라운 일, 폭발적인 기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와 지진처럼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권능)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천둥, 번개, 지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는 사람을 억누르고 짖밟고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는 마귀를 멸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 (능력, 힘)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권세, 성령의 권능은 아무리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한 자라도 그 권세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한 예수님의 권세를 보십시오. (빌립보서 2장 9절이하)“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는 3가지 종류의 인생들이 삽니다. 첫째는, 사단의 힘을 빌어 인생을 사는 사람(무당, 점쟁이, 우상숭배자, 이단 숭배자,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힘을 빌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무신론자, 불신자)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힙 입어, 주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우리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8)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요한복음 15:5)“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이하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도행전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19절에“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능력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터져 나오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정 &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때에 비로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납니다. 지난주에 ⑦ 우리를 시험에 들에 하지 마옵시고 다만(모든)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시험에서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시험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문제 속에서, 도무지 앞을 볼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유혹과 시험 속에서 우리가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붙잡아 주고, 회복시키고, 치유해 줍니다. 이것이 회복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권세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내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서, 그 안에 있는 기쁨과 회복을 경험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송영의 세번째 주제는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영광이 가득하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우리 하나님은 그 이름이 영원히 높임을 받고 영원히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며, 그리스도의 이적과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결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이사야 42:8)“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위대한 찬양인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사야서 43장 21절“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전서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한 목적입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송영은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삽니다. (1) 죽지 못해 살거나, (2)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요즘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 돈, 권력, 그리고 인기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과 돈과 명예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에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고, 이 땅에 살게 하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고집과 마음대로만 살아가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대항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길렀는데, 자식이 부모의 사정이나 생각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만 살아간다면 불효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모든 이 세상 영광은 마치 들의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무화는 십일홍”이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 할지라도 열흘 정도면 모두 시들어버리고 떨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며, 이 세상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적인 삶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의 결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모든 직업이, 모든 일들이, 다 목사의 성직처럼 동일한 가치가 있고 거룩하고 소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8에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 내면의 성령의 열매이고, 이후에 다른 사람을 향한 구원과 전도의 열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서 설계를 했다고 합시다. “도 자리는 여기, 레 자리는 여기, 미 자리는 여기!” 라고 다 맞추어서 공장에 맡겼는데, 다 만들어지고 나서 건반을 두들겨 보니
음이 전혀 맞지 않고 제멋대로라고 한다면 그 피아노는 처음 설계한 사람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피아노는 설계한 사람의 뜻에 맞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송영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광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이 당연한 기도를 우리는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광은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목적과 가치와 존귀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만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고 하나님만 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And le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내 영혼이 .. | 블로그
9~11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내 자신을 위한 기도 가운데에,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오늘 본문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첫째로, 우리 영혼의 양식(말씀)과 육신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구하라고 하셨고, 둘째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용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들이 악한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때까지 악에 물들지(빠지지) 않도록 영혼의 순결(거룩)을 위해 두 가지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①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와 ②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크고 강한 믿음을 지키는 (보호, 유지)하는 기도입니다.

  1. 그러면 첫 번째 내용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lead us not into temptation)”
는 무슨 뜻일까요?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음을 구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나와 있는데 ①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 & trails)과 또 하나는 ② 마귀 (사단)이 주는 시험(temptation)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ests & trails)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믿음의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 & trails)을 뜻합니다. 즉 우리에 인내심을 키워 믿음을 더 크게 만들어 주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반면, 마귀(devil, demon) 사단(Satan)이 주는 시험(temptation)도 있습니다. 마귀 사단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시험에 빠지게 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전자는 선한 목적에서 주신 하나님의 시험(test & trails)이므로 이런 시험을 만나면 비록 힘들지라도 이겨내기만 하면 우리 믿음이 커지므로 오히려 기뻐(감사)하라고 가르쳤는데 반면 후자인 마귀 사단의 시험(temptation)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죽이려는 악한 목적에서 주는 시험(유혹)이므로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항상 영적으로 무장하고 깨어있어서 넘어지지(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갖 시험의(유혹, Temptation) 지뢰밭(mine field)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유혹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안이 활짝 열려서 그(죄악, 더러움)것을 다 볼 수 있다면 정말 우리는 놀라 몸서리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test)도 주시고 시련(trails)을 주시고 고난(suffering)과 역경(difficulties)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데 우리가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한다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 기도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관계가 되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3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est & trails)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믿음을 위한 시련’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시험(trails, 연단, 훈련)없이 자란 신앙은 마치 훈련 받지 않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위태(연약)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trial)이란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믿음을 키우기 위한 연단(disciple, practise, exercise, drill)이요 시련(trails)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이(고난의 훈련)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실에서 자란 꽃이 아니라 모든 풍상(비바람)을 겪고 자라난 소나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련들은 그것이 환경적으로 오는 것이든, 어떤 사람은 병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사업의 부도를 통해서, 또는 상상할 수 없는 환경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통해서 시련(spiritual depression)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셨는데, 마귀에게 “그의 생명만 건드리지 말고 모든 시련을 그에게 주어 보아라! 그래도 내 종 욥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제한적인 시련을 욥에게 허락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trails)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trails)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련 없이 자란 신앙은 연약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했건 잘못했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시련(trails)과 고통(sufferings, difficulties)을 통과하게 됩니다.

셋째, 학생은(성도, 제자) 반드시 시험(test)을 쳐서 합격 해야만합니다. FDA마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마크가 있으면 안심하고 삽니다. 그것은 국가가 인정한 기관에서 그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FDA마크를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시험(test)을 거쳐야 하고 그 후에 합격이 되면 비로소 FDA마크를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리야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test) 치게 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험을 받게 한 후 보증(인정, 인증)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험(test)을 만날 때 기뻐하라고 했고 시련(trails) 속에 있을 때 감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켜 주고 그것을 통해 더욱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시험에 들지(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소서”(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라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upgrade)시켜 주는 시련(trials)이나 시험(test)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유혹(temptation)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크고 강하게 연단(훈련, upgrade)시키기 위하여 시험(test)을 하시고 시련(trial)을 주시지만,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하여 죄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의 덫을 놓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죄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장 14절 이하에“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유)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탐욕, 욕심 때문에 모든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신 그 참뜻(그 이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지게 될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유혹의 근원인 욕심에서 해방되게 (떨쳐버리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지나친 욕심(과욕)에서 벗어나, 자기 분수껏 지혜롭게 산다면 얼마나 정직하고 깨끗하고 자유롭게 감사함으로 자족(만족하며)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욕심(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남편을 자기 욕심(욕망, 욕구)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보거나, 아내를 자신의 기분이나 맞춰주는 도구(종)로 보기 때문입니다. 왜 자녀들과의 관계가 복잡할까요? 그것은 자녀를 한 인격체로 대하는 사랑(존경,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에서 말이 많을까요? 그것은 봉사나 헌신이 없어서가 아니고 자신이 인정받고, 박수 받고, 존경 받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사심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만 바라보고, 예수이름으로 믿음으로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잘되어도 문제가 없고 못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도 없는데, 사심과 욕심으로만 가득 차게 되면 잘되어도 (교만) 문제가 되고 못 되어도 (불만)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뜻은 “나의 욕심을 갖지 않게 해주시고, 나의 사심을 제거해 주시고, 나의 의견이나 생각만을 내세우지 않게 해주시고”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에서 하나 더 생각해 보면 그 기도는 “주여! 내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람들이 잘 받는 유혹(temptation)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①육신의 정욕, ②안목의 정욕 ③이생의 자랑입니다 (요일 2: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For all that is in the world, the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첫째는 the lust of the flesh (육신의 정욕입니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신의 문제로 오는 유혹입니다. 사라들이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 또한 육신의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확신(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세상 물질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the lust of the eyes (안목의 정욕입니다)이것은 정신적으로 오는 유혹인데 우리의 눈을 만족시켜 주는 모든 것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별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기 눈을 높여, 무엇으로도 그 수준을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and the pride of life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교만과 명예욕 그리고 자기 자랑입니다. 즉 자기만이 최고이고 자기 판단만이 옳다고 하는 생각(교만)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2. 두 번째 간구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but deliver us from the evil)입니다.

  여기서 ‘다만(but)’이란 말이 참 생소합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알라’ 즉 ‘그러나, 도리어, 뿐만아니라(not only but also), 오히려(rather than)’라는 뜻입니다. 즉 앞의 내용과 연결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오히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이것은 우리를 악에서, 즉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주시고, 혹시 빠졌더라도 deliver 건져달라는 간구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가 소극적인 기도라고 한다면 이 기도는 본질적으로 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여기서 악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악한 사단(영적 싸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악한 사단의 영향력과 지배를 받고 있는 악한 거짓말하고 속이는 무리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지상에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일지라도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영원한 패배를 하였으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저주와 심판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귀의 궤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과 악한 자(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을 갖도록 유혹하며, 주일날 교회에 못가도록 골프나 다른 모임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또한 가정에 들어와 부부지간 부자지간에 부정(불신)으로 가정을 파괴 하고 신앙(교회, 목사)을 비판적(부정적)으로 말함으로써 성도들 끼리, 목사와 성도를 갈라놓고 교회를 떠나게 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말만 함으로써 신앙에서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너무도 교묘하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사단에게서 벗어나는 것, 또 악한 친구들, 악한 세력, 악한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깡패 조직에서 살다가 빠져 나온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손을, 또는 발을 잘리기도 하고, 눈을 하나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는 것은 자유로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닭 키워 보셨습니까? 닭에게 왜 모이를 줍니까? 그것은 알을 먹거나 잡아먹기 위함입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세력 역시 우리에게 돈도 주고, 성공도 주고, 명예도 주지만 그 목적은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우리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려고 늪으로 늪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악에서 헤어나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악한 사단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사단과 악한 자들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얼마나 강력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호소하는지 모릅니다.

(시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 3:7)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 35:7-8)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영적으로 깊은 믿음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심각한 기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용할 양식으로 늘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형제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도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살기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정말로 악한 친구가 있거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 그 친구를 적극적으로 전도하든지, 잠깐 떨어져 있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악에게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게 이기는 방법을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어떤 어린아이를 위해 제자들이 열심히 귀신을 쫓는데 안 나갑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 주셨는데 그때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안되냐고 묻습니다. (마가복음 9: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말씀과 능력은 기도가 뒷받침이 되어야 효력이 나타납니다. 사단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성도일지라도 그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기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깨끗한(성결, 거룩, 회개) 삶입니다. 죄가 없다면 결코 두려움이나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아무리 해도 그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면 사단은 공격해 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몰라도 사단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죄짓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문제로는 특별히 시험에 빠질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유혹받을 장소에 가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또 유혹받을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인간은 별 수 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자신이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악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분명한 목표(소망)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험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푯대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선한 척 해도 의인은 없나니...죄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밖에는 믿을 분이 없습니다. 인간은 은혜 받았다가도 나가면 또 딴 짓을 합니다. 일주일 후에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우리의 남은 인생 부디 영적싸움에서 승리하셔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고 부디 승리하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