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박광수(경남매일 주필) /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독립문 건립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 살펴보기

독립문은 조선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입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의 독립을 공식화했지만,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내부의 자주적인 의식과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립문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자주와 독립을 향한 국민적 의지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독립문 설계와 건축 과정

독립문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뜬 구조로 설계되어,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건축물은 1897년 독립협회의 주도로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독립협회와 국민들의 기부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석조 아치 형태의 독립문은 당시의 기술력과 민족적 열망이 담긴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건립 과정에서 조선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독립문이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게 했습니다.

독립문과 독립협회의 역할

독립문 건립은 독립협회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독립문 건립은 그들의 주요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알리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독립문은 이러한 독립협회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래 표는 독립문 건립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항목 내용 비고
건립 배경 조선의 자주독립 의식 고취 청나라 종속 관계 탈피
건축 과정 독립협회 주도, 국민 참여 기부금으로 자금 조달
의미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 상징 민족적 자부심 표현

독립문의 상징성과 의미

독립문은 조선이 외세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국민적 열망과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로서, 근대 사회로의 전환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문은 현재에도 자주와 독립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독립문의 현대적 가치

독립문은 오늘날에도 그 상징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시작점과 국민적 열망의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기념물로, 현대 한국의 역사적 뿌리를 상징합니다. 또한, 독립문 주변은 문화적,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되어 국민들에게 역사를 알리고,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

독립문은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상징적 건축물로, 조선 후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적 열망과 참여로 건립된 독립문은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독립문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독립문(獨立門. Dongnimmun Arch)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 영어: Dongnimmun Arch, Seoul)은 조선대한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영은문 주초 부근에 서재필독립협회의 주도로 세워진 뒤, 1963년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현재의 위치는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영은문 주초와 함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근린공원 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2]

개화파의 지식인 서재필청일전쟁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 국민들조차도 널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행할 단체로서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2]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은 당시 내외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 정부 및 뒤이은 대한제국 정부는 독립문의 건축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다.[3]

독립문에 관한 서재필의 논설

서재필은 그가 발행한 독립신문1896년 6월 20일자 국문본 논설에서 독립문 창건의 취지를 처음 본격적으로 제안하였는데,[2] 그 내용은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연관지어 설명되고 있으므로,[4] 독립문의 취지는 일본제국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5]

조선 인민이 독립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조선을 업신 여겨도 분한 줄을 모르고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타 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한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 년을 원수 갚을 생각은 아니 하고 속국인 체 하고 있었으니 그 약한 마음을 생각 하면 어찌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리요 백성이 높아지려면 나라가 높아져야 하는 법이요 나라와 백성이 높으려면 그 나라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과 동등이 되서야 하는데 조선 신민들은 말로 임금께 충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되 실상은 임금과 나라 사랑 하는 마음이 자기의 몸 사랑하는 것만 못한 까닭에 몇 백 년을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 보다 나진 위에 계셨으되 그 밑에서 벼슬하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한 번도 그것을 분히 여기는 생각이 없어 조선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 보고 삼년 전 까지 끄어러 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제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 이 일을 비교 하여 볼진대 남의 종이 되었다가 종 문서를 물은 셈이니 이것을 생각하거드면 개국 한지 오백여 년에 제일 되는 경사라 … 근일에 들으니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라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사기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라면 다만 그문만 헐어 버릴 뿐이 아니라 그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우리가 듣기에 이렇게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이 있을 때에야 하물며 조선 신민들이야 오직 즐거우리요 남의 나라에서들은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에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 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 나라 인민의 애국 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라 …
— 독립신문 국문본 1896년 6월 20일자 1면 1단 논설 번역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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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에게 어떤 나라인가?

 조선시대 부터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1. 지배기간 비율이 
중국 503년 : 일본 36년이다.

우리에게 일본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중국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 503년 : 일본 36년으로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2. 중국은 한국에겐 천년 원수다.

3. 일본은 한국에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부스러기가 아니라 근대산업화 기반과 기술, 재산을 남겼다)
      
암튼 일본은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침탈만 해갔다!! 

■ 일본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환향녀 뿐인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당시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걸핏하면 우리의 처녀들을 중국놈들이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때까지 503년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이성계가 나라이름도 명나라에 조선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쿠데타는 잘못된 것이고 망국적 치적이므로, 
최영 장군의 명나라 정벌계획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 때 

■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 

■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이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나라였다. 

치욕적이게도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조선에 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 한다는 것이다.

■ 1894년 발발한 일본과 청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 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 조선은 중국의 503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기에 일본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될 것이다.

■ 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이라 하면 일본으로 부터 독립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과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온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주사파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혀졌다. 

1950년 6·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적극지원하여 우리국민 수십만명을 살상한 

■ 마오쩌둥을 존경한다는 정신나간 전직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독립문에 대한 무식과 오해가 희극이 돼버린 사례가

■ 문재인의 2018년 3·1절 기념식이다.

대통령이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없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리 국민들의 비극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독립문이 일본 독립문으로 알고있으니 개가 웃을 일이다.

■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겐 8.15 광복절뿐 아니라 

1895년 4월 17일도 광복절임으로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이다. 

■ 중국과의 관계는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한다면, 

■ 일본도 이젠 잊고, 극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좌파 정권의 자칭 지도자라 했던 자들의 경우, 
무식하면 용감은 하겠지만,
 
국민과 국가를 이끌 지도자 될 자격이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 이제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우리 역사 이래 침략하고, 빼앗아 가기만 했다!

무식하고, 사악하고,
멍청하고, 찌질한, 바보들!

그래서
공산 사회주의 선전선동에
현혹되어 동조하고 부화뇌동하는 
일부 좌경세력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일본이 시켜주었고,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은 미국이 시켜주었음을 알고

우리 나라 현재의 안전과 후손들의 안녕을 위하여 이런 점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박 광 수 (경남매일 주필)

♡ 글이 너무 좋아 1200 여명의 톡친들에게 뿌리오니 무한 퍼날라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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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 英雄]

우리나라 무역흑자가 일본을 훌쩍 넘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일본은 감히 넘보지 못할 무역흑자 대국이었다.

금융위기 후의 특수한 사정 탓이겠지만, 식민지였던 우리가 이 흑자대국을 한 번이라도 앞서는 일은 우리 생애에 보지 못할 줄 알았다.

런던에서 팔리는 전자제품의 30%가 삼성전자 제품이고, 지금 미국에서 가장 성장하는 자동차 회사는 현대자동차다.

모두 일본 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다.

대영제국의 저 콧대 높은 수도와 세계자동차 산업의 메카에서 우리가 일본을 위협하게 된 이 일들을 기적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이 된 정도의 기적은 이제 기적 축에 끼기도 어려울 정도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궁금한 것은 우리의 무엇이 이런 기적을 일으켰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간 퇴락을 거듭했었다.

무려 300년간 지리멸렬하다가 망했다면, 집안이든, 사회든, 나라든, 회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만 유일하게 정말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듯이 일어났다.

우리 어딘가에서 소중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답 외의
다른 답 하나가 있다면, 

🐝이 땅에서 1910년 바로 그해 2월 12일에 '이병철'이 태어난 것이다

이 아이가 장차 세계적인 전자 왕국을 만들어 어마어마한 국부(國富)를 창출하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라가 망한 해에 앞으로 나라를 먹여 살릴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15년 11월 25일 '정주영'이 태어났다.

머슴 같은 아이가 장차 조선(造船) 대국, 자동차대국의 꿈을 이루고,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얘기할 성공 신화를 만들 줄 안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장성하기까지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몰랐으나 꿈과 의지만은 똑같았다.

📚 필자는 '이병철', '정주영' 두 사람의 업적은'광개토대왕'에 필적한다고 믿는다.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장군들은 거의 전부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다.

밖을 공격해 영토를 넓힌 사람은 '광개토대왕'같은 몇 사람뿐이다.

지금의 세계에서 영토는 시장(市場)이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지구 땅 끝까지 찾아가 상륙했다.

피를 흘리며 교두보를 확보하고 거기서 적을 치면서 전진해, 우리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렇게 얻은 영토가 5대양과 6대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대영제국에 해가 지지 않았던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지금 대한민국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회장은 유명하지만,

✔️그는 " '이병철'과 '정주영'의 발톱 새 때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다.

⚘️"광개토대왕"과 같은 영웅은 수백 년에 한 명씩 태어나는 법이다.

✔️"정주영"과 "이병철"은 5년 사이에 태어났다.

이것만도 기적과 같은 역사의 행운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주영"이 태어난 지 다시 2년 만인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가 태어났다.

작고 못생겼던 이 아이가 패배의식에 찌든 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몰아갈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정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
중화학공업 육성전략, 외자도입 전략은 결국 모두 성공하고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이병철'과 ⚘️'정주영'이 있었고,

⚘️"이병철"과 ⚘️"정주영"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위대할 수 있었다.

몇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영웅들이 한꺼번에 태어나, 절망적 무(無)에서
찬란한 유(有)를 창조했다.

한반도 천지개벽의 이 순간을 살면서,
우리 민족에게 세 사람을 한꺼번에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식민지 시절,
'박정희'가 일본군에 들어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가 쌓은 토대 위에서 우리나라는 지금 곳곳에서 일본을 제치고 있다.

이 이상의
극일(克日)이 있는가?

일본과 가장 잘 싸운 사람이 누군가?

⚘️"이병철"과 ⚘️"정주영"의 과오에 대해서도 말들이 있지만, 그들의 업적에 비하면 지엽 말단도 되지 않을 일들이다

📚 이제!
이 세 거인과 함께했던 우리의 위대한 역사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가 일어났으면 한다.

⚘️"박정희"는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이병철'과 '정주영'은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은 국민들 마음속의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


24년 1/4분기 국민소득 이 일본을 추월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더니 국민들을 잘살게 하기는커녕 맨날 반대 데모만 하던 무리들이 국개의원이 되어서는 당파싸움이나 하고ᆢ
국민들은 썩어 빠진 정치인들만 싹 없어지면 더욱 부강한 모습이 보일 텐데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