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목사 /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 :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할 자
-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
잘 : 1. 부사
옳고 바르게.
2. 부사
좋고 훌륭하게.
3. 부사
익숙하고 능란하게.
- 예수를 옳고 바르게 믿는 것
믿는다 :
-
1.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믿음을 저버리다.
믿다
(
믿는다
)
1. 동사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2. 동사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3.동사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따위를 받들고 따르다.
- 유의어 / 간주하다. 생각핟. 신뢰하다
외줄타기 곡예사에 업혀 나이아가라 건넌 이 남자의 정체
182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 1829∼1897)
그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장대 하나에만 의지한 채 밧줄 위에 서서 온갖 위험한 동작들을 해냄으로써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1859년 6월 30일.
그는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로프를 설치하고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높이는 무려 48m.
특별 열차를 타고 블론딘의 곡예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40파운드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한 발 한 발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인다.
드디어 맞은 편에 블론딘이 도착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뒤로 걸어서 건너기,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폭포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한다.
모든 곡예가 끝날 때쯤 되자 블론딘은 모여 있는 관중들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블론딘은 “그럼 내 등에 업혀서 나와 같이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관중들은 이내 침묵 속에 잠겼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등에 업힐 사람을 찾던 블론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서있는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남자는 조금도 주저 없이 “난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긴다.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가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 자기를 신뢰했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알려주듯이 그의 얼굴에서는 강 건너편에 반드시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명했다.
마침내 블론딘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데 성공했고 이를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이 몰랐던 것은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넌 사람은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였고 그는 블론딘의 매니저였다는 사실이다.
블론딘의 스토리에는 ‘신뢰의 본질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 숨겨져 있다.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봤고 그가 얼마나 줄타기를 잘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려 하지는 않았다.
신뢰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상대방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상대방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말로만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던 군중들과 48m 높이의 밧줄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블론딘에게 맡겼던 콜코드 사이에는 근본적인 믿음에 차이가 있었다.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의 사전적인 의미는 ‘굳게 믿고 의지함’이다.
여기서 심리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리더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 태도, 역량, 경험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구를 신뢰한다는 행위는 이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나 스스로를 취약한(vulnerable) 상황으로 몰아 넣는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이나 의사결정에 대해 내가 100%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의 이해관계(혹은 내가 속한 단체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결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부하가 리더를 신뢰한다는 것은 리더에게 모든 걸 맡기고 스스로를 취약한 상태로 만들어도 그 리더가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신뢰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라고 많은 리더십 학자들이 단언한다.
결국 신뢰란 효과적인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결과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조직은 리더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부하의 자발적 추종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인 신뢰는 리더십에서 지난 수십 년간 가장 활발히 연구됐던 대상이기도 하다.
수년 전에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리더가 아무리 멋진 비전을 이야기해도 리더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면 부하들은 리더의 비전에 몰입하지 않게 된다는 결과가 있다.
그리고 부하들이 리더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조직의 성공을 위해 남을 돕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결과도 있다.
수백 명의 리더와 수천 명의 부하들을 인터뷰한 리더십의 석학인 쿠제스(James Kouzes)와 포스너(Barry Posner)는 <리더십 챌린지(Leadership Challenge)>란 책에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법칙
1. 모델을 제시하라
2. 공통의 비전을 고취시켜라
3. 틀에 박힌 과정에 도전하라
4. 사람들이 행동하게 하라
5. 사기를 높여주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부하들의 리더에 대한 신뢰(credibility)를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리더가 아무리 미래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하고 공통의 비전을 고취시키려 해도 부하들의 믿음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하기 좋은 기업(Great Place to Work)>을 <포천>과 함께 선정해온 미국의 GPTW Institute도 일하기 좋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의 리더들에 대한 신뢰다’라고 결론 내린다.
독일 뤼벡 교회의 낡은 벽에 새겨진 시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 판에는 작자 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 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고 부르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첫째,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
신앙고백의 내용에 따라
1.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2.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 다시 살아나셔서
4.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5.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둘째, 세상에서 이기는 것
크리스천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돼야 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교인들을 이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돼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지옥 형벌을 피하고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긴다’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크리스천이 죄를 이기고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요한일서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평생 거룩을 강조했던 위대한 설교자 찰스 피니는 ‘성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성결하기 위해서는 믿음밖에 없다는
대답 이외의 모든 대답은 율법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수고하고 애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아주 잘못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주일마다 믿으라고 설교하지만 정작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
그럼 진짜로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마지막 날 다시 오실 것이란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성경이 요구하는 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믿음이 여기에서 멈추면 야고보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경고한 바로 그 믿음이 된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것일까.
어떻게 믿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참 믿음일까.
에스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요한복음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의 주제로 삼으시는 것은 반드시 성도들의 기도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주장처럼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새 언약”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더 큰 믿음이다. 로이드 존즈는 ‘회심이란 여러분이 전심으로, 그리고 믿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믿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일”이라며 “만약 우리에게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말을 믿으라고 했다면 믿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또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을 믿으라고 했어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신다”고 덧붙였다.
삼중사역(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1.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3.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세 가지 사역을 말한다.
‘종교와 믿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
“종교란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이다(국어사전).”
이런 정의들은 기독교의 ‘예수 신앙’과 공유되는 점이 별로 없다.
만일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면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다.
◈ 파산자에게만 유효한 예수 신앙
‘예수 신앙’은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위에서 ‘뭔가의 상승’을 도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파산시킨 후 구원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먼저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세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regeneration, 重生)’이라 하며, ‘현재에 기반한 개량(improvement, 改良)’을 지향하는 일반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갈 3:24)’의 기능도 바로 그것이다.
죄인의 선(善), 가능성을 무(無)로 만들 뿐더러 그의 존재기반을 싹쓸이 부정한다.
‘예수 신앙’은 사실 ‘죽음의 직면’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해부해 보자.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고 한
율법에 의해 인간은 한 번 죽음을 선고받고, 그 후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또 한 번 ‘사망(저주)’를
선고받는다(롬 3:19).
그리고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인 ‘예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로 보건대, ‘예수 신앙’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귀결되는’ 죽음 일색(一色)이다.
‘소망’과 ‘생명’을 시사하는 그것의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 신앙’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이다.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왕의 자기 삶을 긍정하는 기반 하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갈 4:21)’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그에게는 ‘예수 죽음’이 불필요하고 나아가
구원도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차력사(借力士)가 타력(他力)을 빌어 괴력을 행사하듯, 죄인이 ‘예수의
전능’을 빌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정의(定義)는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과 연합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소망’이라는 말도 오해가 없어야겠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어정쩡한 절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로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는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자 곧,
파산자(bankrupt)의 눈에만 들어온다(갈 4:23).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신앙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신앙’으로 구원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구원’으로 감겼던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 아는 것’, ‘심판’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신앙’은 단지 예수 신앙으로 그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자(聖子) 예수는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요 1:14)’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골 1:15)’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로 가면 그에게로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체(一體)이신 성부(聖父)에게로도 간 것이다. 그리고 일체이신 ‘성자’와 ‘성부’께로 가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聖靈)’께로도 가게 되니 결과적으로 삼위일체(trinitas)께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현현(顯現)’의 시작과 중심엔 언제나 ‘성자’가 계신다. 이는 ‘삼위일체’께선 ‘성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도 계시고, ‘성자’가 없는 곳엔 ‘삼위일체’도 없다. 성자를 부인하는 유대교도들(Judeas)이나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에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자’가 계신 곳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ssion, 發出)하신 ‘성령’도 계시고, 그가(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연합시키시고 ‘신자(信者)’에게 두 위(位)를 일체적으로 계시하신다.
이렇게 ‘성부·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가 부정될 때 그것(성령)의 발출 기반이 없어지니 당연히 성령도 부정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 theology)이 일컫는 ‘성령’은 단지 ‘기괴한 악령(惡靈)’일 뿐
‘삼위일체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을 부르는 그들의 의식이 초혼제(招魂祭)나 강신술(降神術)과 방불한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그들처럼 특별한 제의(祭儀)나 의식(儀式)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곳에 현현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성자) 신앙’역시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우리가 ‘성자 신앙’, ‘성부 신앙’, ‘성령 신앙’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성자 신앙’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신앙’은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신앙’은 ‘성령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믿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자(예수) 신앙’과 ‘하나님 신앙’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닌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으라’는 뜻이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는 자는 예수신앙을 가질 수 없고, 예수신앙을 못 가지면 삼위일체 신앙도 못 갖는다’이다.
이는 높고 위대한 삼위일체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 현현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유 역시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