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의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요한이 잉태될 때부터 그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항상 “내 뒤에 오실 이가 나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막 1장).
그리고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막 1:4).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이 맡은 사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회개”이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생각과 마음을 깨끗하게 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회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세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례에서 이전의 죄(원죄 포함)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님을 육으로 맞이할 때(세례요한의 때)나 영으로 맞이할 때(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날)나,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만 믿고 고백하면 되었으나,
오늘날의 세례를 통해서는, 여기에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 더해진다.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만을 믿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이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복음)를 믿고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
즉, 요한의 물세례(회개)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령세례(복음)가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세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성령님의 신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셨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증거 한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늘 연관이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의 신성에 관하여 우선 살펴볼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영원하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히9:14)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님을 받아들임으로만이 가능하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내가 주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 가며, 주의 임재에서 벗어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는 거기 계시며, 내가 지옥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하여도, 보소서, 주께서는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다윗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곳에도 주의 영이 계셔서 진노와 심판으로 권능을 나타내심을 믿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누가복음 1:35에서 성령님은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1:2). 『그는 그의 영(하나님의 영)으로 하늘들을 단장하셨고...』(욥26:13). 우주, 성단, 은하, 이 모든 것은 성령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누군가의 작품이다. 결코 흔히 말하는 조물주나 잡신이나 마귀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을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과 이 하늘들 아래로부터 망하리라...』(렘10:11).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는 성령께서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0-11). 영원하신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그러하시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요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영원하시고 모든 것을 아실뿐 아니라 거룩하시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서 ‘거룩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다. 신약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거룩한 영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과는 구별된다. 불결한 사람들의 영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주께서는 또 주의 선하신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고...』(느 9:20).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갖고 계신다. 이러한 성품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셨으며, 무소부재하지 않으셨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ㅇ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셨을 때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실 때,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셨고, 피를 흘리셨으며, 굶주리셨고, 갈증을 느끼셨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으셨던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창조에 참여하셨고 구원을 이루시며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예언하게 하시고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번째 인격이신 분이 하시는 일이다. 창조에 관하여는 욥기 33:4에서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라고 말씀하신다. 또 시편 104:30에서 다윗은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이 창조되었으니...』라고 말한다. 구원에 관한 성령님의 일은 고린도전서 6:11에서 『...너희가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게 되었느니라.』고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인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엡4:30).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분 안에서 또한 믿었으니 너희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엡1:13).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요 6:63). 성령님은 물론 새로운 출생을 관장하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육신으로 태어난 후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결코 거듭날 수 없다.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님은 영감을 주시고 예언을 하게 할 때 적극적으로 일하셨다. 성령님은 오늘날 사람들을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요한복음 16:8-11을 읽어보면 오늘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찔림을 주어, 의로운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그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도 찔림을 주신다. (마귀는 이미 심판 받았고, 이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의 아비이며 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시는 일



  오늘날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세 가지 일을 하신다. 첫째로 완전한 사람을 거절한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이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다른 종교나 그 종교지도자에 대하여 들먹거린다. 이에 관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종교지도자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성경적인 설교를 들을 때 편협하고 좁은 소견으로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죽은 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불경스럽고, 추하고, 부패하고, 저주스러운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만이 의로우시고 모든 사람들은 불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부처나 모하메드 같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일이다(요16:8-11). 끝으로 성령님은 죄인들이 심판받을 것과 그들을 위해 준비된 지옥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비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8:4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며(고후 4:4)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마 4:1-8). 그 신을 경배하고 믿는 자들은 마귀 숭배자들이며 이들은 마귀를 하나님 아버지로 간주한다. 이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23:33)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설교자가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설교할 때, 그리고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마호메트나 부처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분개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대적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대적하신다. 이것은 어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명확한 성경말씀이다(요3:36).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이사야 6:8에 보면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즉 말씀하시기를 ...』라고 기록되었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사도행전 28:25에서 『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상에게 잘 말씀하셨도다...』라고 인용하여 ‘주’와 성령님을 동일시하였다. 또 사도행전에서 아가보가 예언할 때 그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사용된 표현인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였다(행21: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다. 사도행전 5:3-5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이라고 불려진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피라에게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라고 말하고 즉시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이 사실은 은사주의자들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든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님을,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시는 기분, 느낌, 선물 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령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은 다른 신으로부터 오는 거짓 영이라는 것이다. 그 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며 성경은 이 사실을 계속하여, 계속하여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9의 삼위일체에 대해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침례를 주며』라고 기록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예수”가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진리의 영, 주의 영, 성령, 위로자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주, 주 하나님, 여호와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성경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사람들은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안다. 어떤 혼란도 이보다 더 엉망일 수는 없다. 아버지의 이름은 “주”이다. 아들의 이름도 “주”이며 성령님의 이름도 “주”이다(행28:25 -27). 『이제 그 영은 주시니...』(고후3:17)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믿음에 뿌리내린 성경대로 믿는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은사주의자와의 차이는 이처럼 큰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고유한 성품이 있고 고유의 위치와 이름이 있어 그 하시는 고유 역할이 있다. 아들 하나님은 다른 인격이시며 특별한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성령님도 또 다른 인격이시며 고유의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이 세 인격체는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고후13:14).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아들 하나님) 아버지께(아버지 하나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성령 하나님) 너희에게 주시리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어떤 영을 받은 것이며 그 후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령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주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성령님을 결코 영접할 수 없다. 만일 주를 영접한 후에 또 한 번 ‘성령’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불결한 영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6에서 말한 “다른 영”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분이시다.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의 정신 혹은 아들 하나님의 정신 정도로 생각하고 두 분으로부터 독립된 특별한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누가복음 3:21-22을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명백히 세 인격이 함께 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고, 이때 “아들 하나님”은 침례인 요한에 의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비둘기 같은 형태로 내려오셨다. 이 세 분은 각각 독립된 인격들이시며 시간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시다.

  요한복음 14:16에서 아들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할 성령님을 보내신다. 성령님은 성도들과 거하기 위해 오신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 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골2:9) 하나님 한 분 안에는 세 분 인격이 계시고 세 분 인격 안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그 가운데 계신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사도행전 2:33에서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좌에 계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지 성령님이 아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님이 성령님을 받아 교회에게 주신 것이지 아들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세 분의 독립된 인격들이시고 각각 고유의 성품들이 있고 서로 관계를 맺으시고 각자를 인식하시며 독특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나누시지만 하시는 일은 다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님의 신성이다. 성령님께서는 인격이시고, 삼위의 한 분이시며, 독립된 인격으로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구절은 약 100구절이 넘는다. 성령님은 고유의 일을 하시고 고유의 성품을 지니시며 고유의 위치가 있으시다. 과연 그럴까라고 의문이 생긴다면 성경을 펴서 읽어보라.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2:14). 어떻게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동시에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진지하게 신학을 공부하여 하나님 말씀을 통해 향상된 진리를 발견하려 해도, 절대적인 성경적 진리,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고, 한 분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 가지 모습, 즉 인간으로서의 아들 하나님, 영으로서의 성령 하나님, 혼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는 진리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 어떤 하나님의 향상된 진리의 계시를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몸과 혼과 영이 있다. 사람이 구원받을 때 “영”은 거듭나게 되고 “몸”에 밀착되었던 “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몸”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구원받은 그 사람을 구속의 날까지 인치신다.




주의(-ism)를 주장하는 것은 편짜기를 말한다. 편짜기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화론, 불가지론, 무신론, 실존주의, 허무주의, 현대주의, 신정통주의, 자유주의, 시한부 종말론 등... 이런 ‘주의’나 ‘론’에 싫증난 사람들은 ‘파’로 나뉜다. 오순절파, 구원파... 여기서 다시 무슨무슨 ‘운동’이 등장한다. 방언운동, 신유운동, 21세기 운동, 성시화 운동, 성령화 운동 등등... 정당이 정치적 이념을 같이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듯이 무슨 론자, 주의자, 운동가 등도 파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다 될 것 같은 신학에도 구구한 ...주의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 마디로 성경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거기에 분명히 오류가 있음에도,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으면 정당화가 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게 되면 이단 교리라도 우세한 것같이 보인다. 경제란 인간의 삶을 운영하는 제도인데 여기에도 불의가 진리를 압도하고 있다. 수단이나 방법에 관계없이 매출고가 늘면(돈만 많이 벌면) 상장기업이 되고 고용을 증대하게 되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이윤을 적게 남긴 기업이 결국 무시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反사필귀정을 내놓아 법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편짜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무조건, 죽어도 칼빈주의를 외치는 그들에게, 막상 ‘칼빈주의가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면 잘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만일 칼빈주의를 알고 있다면 칼빈주의만 채택하지 극단적 칼빈주의까지 교리로 채택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천주교, 감리교, 오순절파,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은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 하는데 이들이 잘못 해석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4:13과 히브리서 6:4-6 등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이 구절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기에 어떤 구절이든지 무조건 믿고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책의 제목을 보라. 왜 히브리서인가? 구원받은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환란 때의 히브리인들은 교회시대처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휴거되어 지상에 없기에 그들이 속할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견디어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표를 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환란은 “야곱의 고난”이며, 이스라엘의 환란을 말한다. 이는 성경이 대환란을 설명할 때 이방인(그리스도인을 포함)을 대상으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기도의 사람이요, 유능한 설교자요, 구령자였으나 이 부분을 알지 못했기에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였지만 아기들에게 물뿌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해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않다고 해서 자기 동료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개혁가이다. 위대한 사람들도 맹점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안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얼마만큼 굽어 있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 외에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구원받고 난 후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봉사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스럽고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런 열성 있는 성도들이 없다면 지역교회가 활성화될 수가 없을 것이며, 성도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 때 받을 상급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들은 모두가 교단(편짜기)에 가입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지역교회는 독립적이요, 자치적인 교회이다. 교단(denomination)이란 성경에 없는 조직이다. 같은 교리를 실행하는 교회들이 모여 있는 교단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 신성한 목표와 이상이라면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에는 교단 신학교가 있고, 거기서 가르친 교육은 성경이 우선이 아니라 교단 교리가 우선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신학과 교단 교리는 다른 것이다.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번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굳이 편짜기에 들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앞에 설 때는 칼빈주의자이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은 완전히 타락해서 무력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죄를 회개할 기력마저도 없이 하나님의 처분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을 화해시키려고 함이 아니었는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둘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예지 예정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 대속의 속죄양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3:16).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들이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미리 정해졌다면, 이들이 왜 선교하고 전도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효력 있다면 하나님은 죄인들의 하나님은 되실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저주를 이미 내려놓으시고 말로만 자기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이 제한적이라면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성경, 그런 신학, 그런 교리도 있는가?

  넷째,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어떤 형태로든지 성취한 것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상표를 붙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의적 의지를 말살시키려는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집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일이다. 누구나 교회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의적 욕구도 없이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 나간 그 사람의 경배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열납 되는 경배가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 이룩한 산업적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죽자마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은혜로 감싸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게 된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한눈을 팔고 가다가 맨홀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으면 그 사람이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가 부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는가? 그런 신앙도 있는가? 인간의 실수로 야기된 사고도 있고 단순한 사고도 있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도 있다. 인간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들의 손으로 이룩한 일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달라하시겠는가? 범사에 감사는 있을 수 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도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가장 잔악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칼빈도 들어있고, 루터도 들어있고, 쯔빙글리도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정한 인물을 빼내어 편짜기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굳이 어떤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며, 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