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박사 별세(6-4-2023)
최초의 아시안 교수 기록
31년 강의, '명예전당' 헌정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로 활동했던 이상현(사진) 박사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박사는 세계적 석학이자 한인 1세대 신학자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박사는 지난 1980년부터 31년간 이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계 미국인프로그램(AAP)도
개설했다.
미국 신학계에서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이민 신학’ 등의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에 뉴저지로 유학을 왔다.
이후 우스터대학교를 졸업,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호프칼리지에서 교수를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존 보울린 학장은 “이상현 박사는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던 세계적인 학자였다”며 “그의 유산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그가 양성한 목회자와 학자 등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린스턴 신학교 또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812년 세워진 미국 장로교 신학교이다.
뉴저지주 중부의 프린스턴에 위치한다.
프린스턴 신학교(PTS)는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에 위치한 신학기관으로서 미국장로교(PCUSA) 산하 교육기관이다.
두 학교의 시작에서 볼 수 있듯이 프린스턴 신학교는 프린스턴 대학교
(구 뉴저지대학)와 별개의 독립된 교육 기관이며 행적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프린스턴 이라는 이름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프린스턴 대학교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오해를 사고 있는데 다른 교육 기관이며 역사적으로 프린스턴 신학교는 프린스턴 대학교
소속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교는 럿거스 대학교와 라이더 대학교와의 교류에서 볼 수 있듯이 뉴저지 지역의 교육
기관들과 시설을 공유하는데 프린스턴 신학교와도 도서관 등의 시설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장로교(PCUSA)와 관련된 10 개의
신학교 중 가장 큰 신학교이며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신학교로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목사와 뉴저지대학 (College of New Jersey 후에 19세기말 프린스턴 대학으로 개명)의 후원아래 1812년 장로교 총회에 설립되었다.
1929년 신학적 성향의 차이로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프린스턴 신학교로부터 분리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학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도 매우 잘 구비되어 있다.
First Things 비영리 교육기관 진보주의신학교
랭킹에 의하면 프린스턴 신학교는 항상 10위 안을 유지를 하고 있다.[1][2]
한국에서 한경직 목사, 장상 박사, 곽선희 목사, 윤철호 박사, 이정숙 박사, 이규민 박사, 김선영 박사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와 학자들이 동문으로 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종교적 체험은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그것이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진리를 증명하는지와는 무관하다."
"종교의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1. 거룩한 제사
2. 분명한 신앙고백
3. 응답받는 기도
들어가는 말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1901년과 1902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에서 진행된 강연을 바탕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종교를 단지 집단적 제도나 교리의 문제로 한정 짓지 않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정의한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변화의 결과로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분석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 과정에서 경험의 진정성과 다양성을 깊이 인정하며 종교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내적 가치와 실질적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종교적 체험을 주관적이고 내적인 경험으로 바라보며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적 깊이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했다. 제임스의 접근 방식은 종교가 신앙과 교리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초를 마련한다. 이 책은 단순히 종교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종교적 체험이 인간 존재와 삶에 끼치는 심리적, 철학적, 실용적 영향을 탐색하는 중요한 연구로 자리 잡았다.
1. 저자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제임스는 1842년 뉴욕시에서 헨리 제임스와 메리 제임스 사이의 다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여러 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하버드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는 퍼스와 홈스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869년에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으나 그 후 3년간 우울증에 시달렸다. 1872년에 하버드에서 교수직을 얻었고 거기서 그는 생리학, 심리학, 그리고 결국에는 철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심리학의 원리“라는 책으로 심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실용주의 철학의 보급에 힘을 썼다. 그는 1889년에 심장의 약화로 고통받기 시작했고 1910년에 사망했다.
그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심리학자,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그가 쓴 많은 용어들과 그가 주장한 실천적 신념들이 19세기 후반 '미국의 생각'을 나타낸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적 경험의 본질과 다양성을 탐구한 철학적, 심리학적, 신학적 고전이다. 이 책은 1902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현대에도 종교적, 심리적, 철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심리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든 학자로 평가받는다.
2. 저작 동기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집필한 동기는 그의 학문적 관심과 시대적 배경, 개인적 신념이 결합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개인적 체험으로 간주했다. 그는 종교가 교리, 조직, 전통과 같은 집단적 체계보다는 개인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제임스는 특정 종교의 교리적 진리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 속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체험의 보편성과 독특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개인의 삶에서 일으키는 내적 변화(예 : 고통 속에서 평안을 찾거나,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제임스는 개인이 경험한 종교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체험이 종교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려 했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보며 그 발생 과정, 표현 방식, 그리고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종종 신경증적이거나 병리학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상태가 체험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제임스는 실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종교적 체험을 분석하려고 했다. 그는 종교적 믿음의 진리를 철학적 추론이 아니라 체험 자체의 실질적 효과에서 찾으려 했다.
제임스는 종교가 인간의 삶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했다.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적 체험이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 자체로 진리라고 간주했다. 그는 "종교는 삶의 고통을 덜어주고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며 개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라고 보았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인간에게 평화, 용기, 희망, 도덕적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분석했다.
그는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실재와 연결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개인은 내적 통합을 경험하고 더 깊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의 저작 동기는 단순히 종교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내면세계와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종교와 심리학, 철학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의 접근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으며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선구적 작업이었다.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현대까지도 종교와 심리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3. 시대적 배경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탄생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사회, 과학, 철학의 여러 측면에서 큰 변화와 도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1)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이 시기는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던 시대였다. 다윈의 진화론(1859, ‘종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을 신학적 관점이 아닌 생물학적 과정으로 설명하며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에 도전했다. 물리학과 화학 등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와 생명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적 믿음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신화적이고 구시대적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재평가하려고 했다.
2) 종교와 과학의 충돌
과학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종교는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기보다는 개인의 신앙 체험이나 도덕적 지침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진화론은 창조론과 충돌하며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합리성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했다. 제임스는 과학과 종교의 갈등 속에서 종교를 객관적 과학이 아닌 개인적 체험과 실질적 결과의 관점에서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안했다.
3) 심리학의 태동
19세기 말은 심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에 의해 실험 심리학이 탄생하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심리적 현상이 종교적 열정이나 체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심리학의 선구자로서 종교적 체험을 단순히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그것이 인간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분석했다.
4) 실용주의 철학의 부상
실용주의는 사상이나 신념의 진리 여부를 그 실질적 결과나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철학적 관점이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윌리엄 제임스, 찰스 퍼스(Charles Peirce), 존 듀이(John Dewey)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를 연구하며 종교적 믿음의 진리 여부를 그것이 개인에게 주는 내적 평화, 도덕적 향상, 삶의 의미 등 실질적 효과로 평가하려 했다.
5) 문화적 변화와 개인주의의 부상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개인주의가 부상하며 개인의 경험, 권리, 선택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는 종교적 체험에서도 집단적 전통이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종교와 철학적 관점이 소개되면서 단일한 종교적 진리가 아닌 다양한 신념 체계와 체험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종교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는 과학과 종교, 개인과 사회, 신앙과 이성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서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이를 심리학과 실용주의 철학의 틀에서 분석했다. 이는 그가 종교를 단지 신학적 문제로 다루기보다 인간의 삶과 경험의 보편적 요소로 연구하게 된 이유였다.
‘종교적 체험(religious experience)’
신앙 그 자체는 아니다.
일부분일 뿐이다. 종교 체험은 또 어떤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기적이나 황홀경, 무아지경 같은 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 체험이 예컨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가 맞다거나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은 적어도 종교 생활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뭔가 좋은 것, 재미·보람·뿌듯함·성취감 같은 것을 체험해야 교회·성당·절에 계속 다닐 수 있다. 체험이 없으면 믿음을 얻기도 힘들다. 공부에 흥미가 없으면서 책보 싸 들고 학교에 억지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비슷하게 된다. 체험 없이 억지로 ‘연명’하는 신앙이 오래갈 수 있을까? 체험 없는 신앙은 지속가능(sustainable)하지 않다.
21세기 신앙의 위기는 종교 체험의 위기다. 특히 청소년·젊은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종교 단체들은 재미있는 예식이나 행사·엔터테인먼트를 고안해내지만, 요즘 청소년·젊은이들은 종교 밖의 세속에서도 종교가 선사하는 재미를 능가하는 재미를 얼마든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종교는 재미가 있건 없건 세속에는 없는 체험이 있는 무대라야 한다.안 보이는 현실도 과학의 대상
‘종교적
체험’이라는 말이 학계에서 전문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미국의 심리학자·철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1902)이 출간된
이후다.
이 책은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1901~1902년에 행한 20회에 걸친 기퍼드 강좌(Gifford
Lectures)를 묶고 후기를 덧붙인 것이다. 종교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특히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
강연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안 보이는 현실’이 있다. 종교가 운위(云謂)하는 ‘안 보이는 현실’도 과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제임스가 역설한 것이다.
제임스에게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에게 종교적인 행복은 그냥 행복이다. 행복 앞에 ‘종교적(religious)’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이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종교적인 기쁨은 기쁨이다. 종교 체험은 체험이다. 그는 종교 체험에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지 않는다. 종교 체험은 그에게 ‘신(神)이 주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무의식이 작용하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발간되자마자 심리학·철학·종교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를 넘어 고전이 됐다. 이 책을 읽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증언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1917년에 창설된 모던라이브러리(Modern Library) 출판사는 1998년 이 책을 20세기에 영어로 출간된 논픽션 톱100권 중에서 2위로 선정했다. 1위는 <헨리 애덤스의 교육>(1905)이었다.
이 책의 시대적인 배경에는 ‘종교는 미신이기 때문에 조만간 사라지게 돼 있다’는 전망이 깔려 있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다윈주의자들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로 정밀 분석한 신학자·학자들은 성경에 전적인 신뢰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성경은 그저 역사책이거나 이야기책, 문학이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이런 기류에 반격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종교를 옹호하는 책이다. 많은 현대인은 100퍼센트 증거나 확신이 없으면 종교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보는 제임스는 믿는 게 안 믿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체험의 가장 좋은 열매는 역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또 폭력과 같은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에는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인 중에는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책에는 ‘특정 종교의 특정 기류(氣流)’를 거스르는 내용도 많이 담겼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이길래 그럴까.전후(前後)가 다른, 인생을 바꾸는 체험
제임스에 따르면 종교 체험은 ‘객관적’이다. 사실(事實, fact)이다. 종교 체험에 주관성도 있겠지만 과학적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객관적이다. ‘나쁜 종교 체험’도 있을 수 있겠지만 종교 체험은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긍정적인 체험이다.
제임스가 다루는 종교 체험들은 좀 극단적인 경우다. 전과 후(before and after)가 확연히 다른, 인생을 바꾸는 체험이다.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멸적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체험이다. ‘종교적인 모임에서 찬불가·찬송가·성가를 불렀더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와 같은 체험은 이 책의 주된 대상이 아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집중 탐구하는 것은 집단적이거나 제도적인 차원의 종교 체험이 아니라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다. 따라서 이 책은 교회나 승가(僧伽,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 같은 종교 모임을 다루지 않는다. 성직 제도나 신학, 교리, 의식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교회·성당·절 등 종교적 장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라고 자부할 수 있도록 그 근거를 제시하는 책이다.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어떤 때는 숨이 콱콱 막히는 논쟁도 제임스에게 무의미하다. 제임스에게 종교란 “삶에 대한 인간의 총체적인 반응”이다. 신을 믿지 않는 종교도 종교다. 업보(業報)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의 존재를 믿는 것도 종교다. 제임스의 분류에서는 무신론마저도 종교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이 아니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다 풍성한 삶이다.
그는 개인 체험 중에서도 회심(回心, conversion)을 중시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회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마음을 돌이켜 먹음. ② <기독교>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 ③ <불교> 나쁜 데 빠져 있다가 착하고 바른길로 돌아온 마음. ≒돌이마음.”
회심의 결과로 사람은 성자(聖者)가 된다. 제임스는 개인 중에서도 보통사람보다는 성자, 즉 일종의 ‘종교 천재’를 다룬 것이다. 우리 사전을 찾아보면, 성자란 “모든 번뇌를 끊고 바른 이치를 깨달은 사람”(불교)이요 “거룩한 신도나 순교자를 이르는 말”(그리스도교)이다. 제임스의 성자들은 회심 이후에 성격이나 습관마저도 바뀐다. 완전한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된다.
제임스는 종교를 초월해, 그리고 모든 종교 속에 “보편적인 성자다움(universal saintliness)”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가 생각하는 성자다움에는 금욕, 영적인 강인함, 순수성, 이타심, 자선 같은 게 포함된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자들은 그들이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자이건 그리스도교인이건 불교인이건 사실상 구분이 안 된다.” 이처럼 제임스는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회심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씩’ 찾아오는 것일까. 제임스에 따르면 각 개인의 심리적인 특성에 따라 다르다. 불교에 적용한다면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나 점오(漸悟, 점점 깊이 깨달음)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제임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들의 ‘기행(奇行)’은 일반인·비신앙인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예컨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년 또는 1182년~1226년)는 애욕을 끊어내기 위해 장미밭에서 몸을 굴렀다고 한다. 비신앙인은 ‘그냥 결혼하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라고 반응할 수도 있겠다.
제임스는 성자들을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소개한다. 그가 그리는 성자는 회심하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제임스는 그들이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들은 자신의 ‘아픈 영혼(sick soul) 때문에 고뇌한다. 그들은 ‘두 번째 탄생(second birth)’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제임스는 종교에 그런 힐링의 힘이 있다고 본다.“신들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존재”
제임스는 종교가 신경증(神經症)과 관련이 깊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노이로제라고 부르던 신경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심리적 원인에 의하여 정신 증상이나 신체 증상이 나타나는 병. 주로 두통·가슴 두근거림·불면 따위의 증상이 나타나며, 불안 신경증·히스테리·강박신경증·공포증·망상 반응 따위가 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러한 증세가 있는 종교인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인이 속한 종교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남’이 필요한 사람들과는 달리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들도 있다는 게 제임스의 관점이다. ‘한 번 탄생(once-born)’으로 족한 사람들은 낙천적이다.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 병적인 수준의 정신적인 고통도 없다. 결국 세상은 여러 면에서 공평한 것일까? 제임스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에는 두 번 태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궁극적으로 더 깊고 더 진실하다.
제임스는 실용주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효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실용주의>(1907)에서 어떤 이가 어떤 관념을 믿고 그 관념으로부터 효용을 얻는다면 그 관념은 제한적으로나마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의 실용주의는 종교 영역으로 확장된다. ‘종교적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샤머니즘이건 이슬람이건 일본계 종교건 긍정적인 체험이 있는 종교는 다 좋다는 것이다.
‘신들(gods)’에 대해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따르는 신들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신들이다. 신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들과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 요구하는 바를 강화(reinforcement)한 것들이다.” 인간은 신들을 영원히 알 수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최소한 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임스는 주장한다.
신비 체험도 이 책의 주요 대상이다. 제임스가 정리한 신비 체험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특성은 모순적이다. 첫째, 형언할 수 없다. 직접 체험할 수 있을 뿐이지 체험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 둘째, 신비 체험은 동시에 지적인 상태다. 신비 체험은 지식의 세계와 무관한 게 아니다.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물론 책에 불교 사례도 포함되지만 주로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중심적이라는 점이다.(다수 가톨릭 성인, 특히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 사례도 등장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체험은 ‘진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 전통의 체험은 ‘가짜’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나 ‘진리의 상대성’을 싫어하는 신앙인은 제임스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잘못 이해한 진리는 최악의 거짓말 돼”
그렇다면 ‘사이비’ 종교도 체험만 있으면 되는 걸까? 제임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체험은 ‘부적합한(unfit)’, 건전하지 못한 종교를 소멸시킨다.
윌리엄 제임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근대 심리학을 창시한 철학자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말도 그가 만들었다. 제임스로 말미암아 유럽 철학계가 미국 철학계를 비로소 존중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에서 1872년부터 1907년까지 교수 생활을 하며 생리학·철학·심리학을 가르쳤다. 68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엄격한 장로회 신자였던 제임스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1789년 미국으로 이민 와 비즈니스로 거부가 됐다. 그래서 제임스의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평생 일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 심취했는데 그에겐 ‘미국에서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생 헨리 제임스 2세는 유명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다.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두통, 자살 충동, 공포증, 환각을 체험했다. 결정 장애(햄릿증후군)도 있었다. 제임스는 불평불만을 시시콜콜 어머니에게 털어놨기에 어머니는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그가 앨리스 기번스라는 여성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1878년 결혼했다. 결혼 이후 신경쇠약증세가 사라졌다.(하지만 제임스는 상당한 바람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부는 4남1녀를 낳았다. 제임스는 역사적 철학자 중에서는 좀 예외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민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가끔씩 ‘장기 가출’을 했다. 가출 기간에 아내와 주고받은 서신에는 끈끈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제임스는 한때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은 아닌가’, ‘인생에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고통받았다. ‘의미의 위기(crisis of meaning)’를 겪은 것이다. 제임스는 대체적으로 불가지론자(agnostic)로 분류된다. ‘뉴에이지’나 ‘포스트모던 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준 책들 중에는 그리스도교 성경도 포함됐다.
제임스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는 다음 구절이 포함된다. “어떤 진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잘못 이해하면 그 진리는 최악의 거짓말이 된다.” 생각거리를 던지는 말이다.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 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종교적 체험은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그것이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진리를 증명하는지와는 무관하다."
"종교의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들어가는 말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1901년과 1902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에서 진행된 기포드 강연을 바탕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종교를 단지 집단적 제도나 교리의 문제로 한정 짓지 않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정의한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변화의 결과로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분석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 과정에서 경험의 진정성과 다양성을 깊이 인정하며 종교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내적 가치와 실질적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종교적 체험을 주관적이고 내적인 경험으로 바라보며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적 깊이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했다. 제임스의 접근 방식은 종교가 신앙과 교리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초를 마련한다. 이 책은 단순히 종교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종교적 체험이 인간 존재와 삶에 끼치는 심리적, 철학적, 실용적 영향을 탐색하는 중요한 연구로 자리 잡았다.
1. 저자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제임스는 1842년 뉴욕시에서 헨리 제임스와 메리 제임스 사이의 다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여러 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하버드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는 퍼스와 홈스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869년에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으나 그 후 3년간 우울증에 시달렸다. 1872년에 하버드에서 교수직을 얻었고 거기서 그는 생리학, 심리학, 그리고 결국에는 철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심리학의 원리“라는 책으로 심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실용주의 철학의 보급에 힘을 썼다. 그는 1889년에 심장의 약화로 고통받기 시작했고 1910년에 사망했다.
그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심리학자,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그가 쓴 많은 용어들과 그가 주장한 실천적 신념들이 19세기 후반 '미국의 생각'을 나타낸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적 경험의 본질과 다양성을 탐구한 철학적, 심리학적, 신학적 고전이다. 이 책은 1902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현대에도 종교적, 심리적, 철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심리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든 학자로 평가받는다.
2. 저작 동기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집필한 동기는 그의 학문적 관심과 시대적 배경, 개인적 신념이 결합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개인적 체험으로 간주했다. 그는 종교가 교리, 조직, 전통과 같은 집단적 체계보다는 개인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제임스는 특정 종교의 교리적 진리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 속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체험의 보편성과 독특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개인의 삶에서 일으키는 내적 변화(예 : 고통 속에서 평안을 찾거나,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제임스는 개인이 경험한 종교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체험이 종교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려 했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보며 그 발생 과정, 표현 방식, 그리고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종종 신경증적이거나 병리학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상태가 체험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제임스는 실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종교적 체험을 분석하려고 했다. 그는 종교적 믿음의 진리를 철학적 추론이 아니라 체험 자체의 실질적 효과에서 찾으려 했다.
제임스는 종교가 인간의 삶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했다.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적 체험이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 자체로 진리라고 간주했다. 그는 "종교는 삶의 고통을 덜어주고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며 개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라고 보았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인간에게 평화, 용기, 희망, 도덕적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분석했다.
그는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실재와 연결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개인은 내적 통합을 경험하고 더 깊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의 저작 동기는 단순히 종교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내면세계와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종교와 심리학, 철학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의 접근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으며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선구적 작업이었다.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현대까지도 종교와 심리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3. 시대적 배경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탄생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사회, 과학, 철학의 여러 측면에서 큰 변화와 도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1)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이 시기는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던 시대였다. 다윈의 진화론(1859, ‘종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을 신학적 관점이 아닌 생물학적 과정으로 설명하며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에 도전했다. 물리학과 화학 등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와 생명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적 믿음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신화적이고 구시대적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의 본질과 가치를 재평가하려고 했다.
2) 종교와 과학의 충돌
과학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종교는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기보다는 개인의 신앙 체험이나 도덕적 지침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진화론은 창조론과 충돌하며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합리성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했다. 제임스는 과학과 종교의 갈등 속에서 종교를 객관적 과학이 아닌 개인적 체험과 실질적 결과의 관점에서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안했다.
3) 심리학의 태동
19세기 말은 심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에 의해 실험 심리학이 탄생하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심리적 현상이 종교적 열정이나 체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심리학의 선구자로서 종교적 체험을 단순히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그것이 인간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분석했다.
4) 실용주의 철학의 부상
실용주의는 사상이나 신념의 진리 여부를 그 실질적 결과나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철학적 관점이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윌리엄 제임스, 찰스 퍼스(Charles Peirce), 존 듀이(John Dewey)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를 연구하며 종교적 믿음의 진리 여부를 그것이 개인에게 주는 내적 평화, 도덕적 향상, 삶의 의미 등 실질적 효과로 평가하려 했다.
5) 문화적 변화와 개인주의의 부상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개인주의가 부상하며 개인의 경험, 권리, 선택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는 종교적 체험에서도 집단적 전통이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종교와 철학적 관점이 소개되면서 단일한 종교적 진리가 아닌 다양한 신념 체계와 체험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종교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는 과학과 종교, 개인과 사회, 신앙과 이성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서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이를 심리학과 실용주의 철학의 틀에서 분석했다. 이는 그가 종교를 단지 신학적 문제로 다루기보다 인간의 삶과 경험의 보편적 요소로 연구하게 된 이유였다.
4. 주요 테마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다루어진 주요 테마는 종교적 체험의 본질과 의미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1) 개인적 종교 체험(Individual Religious Experience)
제임스는 종교를 집단적 제도나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내적 체험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종교는 조직화된 제도나 신학적 논증과 무관하게 개인이 경험하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에서 발생한다.
그는 회심(conversion), 신비적 순간, 내면의 평화 등은 종교적 체험의 개인적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보았다.
그는 종교의 본질은 개인의 고유한 체험에 있으며 이를 통해 삶의 깊이와 초월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2) 신앙과 심리학(Faith and Psychology)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며 신앙의 기원과 효과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종교적 체험은 종종 고통, 불안, 또는 병리적 상태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진정한 경험으로 간주된다. 제임스는 신경증적 상태가 종교적 체험을 유발할 수 있지만 이는 체험의 가치나 진정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을 인간 심리의 일부이며, 심리학은 종교적 체험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보았다.
3) 종교적 다양성(Religious Diversity)
제임스는 전 세계의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분석하며 종교의 보편적 특징과 독특한 차이를 모두 강조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내적 갈등과 초월적 실재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지만 각각의 표현은 문화와 전통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는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다양한 체험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종교적 다양성은 인간 경험의 풍부함을 반영하며 모든 체험은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4) 실용주의적 관점(Pragmatic Perspective)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적 체험의 진리성을 평가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개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도덕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진리로 간주될 수 있다고 했다. 제임스는 종교적 믿음의 진위를 논리적 증명이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체험의 실질적 효과에서 찾았다. 종교의 진리 여부는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얼마나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5) 신비주의와 초월성(Mysticism and Transcendence)
제임스는 신비적 체험과 초월적 경험을 종교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았다. 신비적 체험은 설명 불가능하고 일시적이며, 초월적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험은 종종 개인에게 깊은 평화와 통합감을 주며 기존의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제임스는 이러한 체험이 주관적이지만 그 진정성과 실질적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은 종교적 체험의 핵심이며 이는 인간의 깊은 내면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를 개인적 체험, 심리학적 분석, 실용주의적 평가, 그리고 초월적 요소의 조화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인간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고 보았다.
5. 주요 캐릭터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는 책은 아니지만 그는 종교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과 현대 사례를 풍부하게 활용한다.
1)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
초기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로 ”고백록“(Confessions)을 통해 자신의 삶과 회심 과정을 기록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종교적 각성과 회심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그의 체험은 죄책감, 내적 갈등, 그리고 구원의 체험이라는 종교적 회심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다. 제임스는 어거스틴의 사례를 통해 회심이 단순히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종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임을 강조한다.
2) 조지 폭스(George Fox)
퀘이커 교도의 창시자로 17세기 영국에서 활동하며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앙을 강조한 기독교 운동을 이끌었다. 폭스는 반복적으로 강렬한 신비적 체험을 경험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이 직접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그는 교회 제도나 성직자의 권위를 거부하며 개인의 내적 빛(Inward Light)을 통한 신과의 직접적 연결을 주장했다. 폭스의 체험은 신비주의의 본질적 특징(직접적, 초월적, 일시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된다. 그는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종교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 존 번연(John Bunyan)
17세기 영국 작가이자 설교가로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의 저자다. 번연은 극심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으며 자신의 죄책감과 구원의 가능성 사이에서 내적 투쟁을 기록했다. 이러한 체험은 그의 신앙적 전환과 깊은 헌신으로 이어졌다. 번연의 이야기는 종교적 갈등과 구원의 심리적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사례는 종교적 회심이 개인의 내적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활용된다.
4) 현대인의 일화와 사례
제임스는 자신의 시대에 살았던 일반인의 종교적 체험도 다양하게 분석한다.
그는 다양한 문화와 신념 체계에서 나타난 사례를 통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즉 신비적 황홀경을 경험한 사람, 강렬한 회심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 또는 깊은 절망 속에서 신앙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그는 이러한 사례를 분석하여 종교적 경험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보편적 측면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많은 사례에서 고통과 갈등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종교적 경험의 핵심적 패턴으로 제시한다. 특정 인물이나 사례에서 나타나는 신비적 체험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서 반복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이 단순히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역사적 인물과 현대적 사례를 통해 종교적 경험의 심리적, 정서적, 그리고 초월적 측면을 분석했다. 이들은 단순히 개인적 신념의 사례로 끝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낸다. 제임스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종교적 경험이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6. 전체 줄거리 요약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인간 경험의 중요한 측면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종교를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며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설명한다.
제임스는 종교를 개인적이고 내적인 체험으로 정의한다. 그는 종교가 특정 종교 기관이나 교리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의 접근 방식은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종교적 경험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인간 존재의 깊은 측면을 반영하며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제임스는 종교를 단순히 신앙이나 믿음의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복잡한 부분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이 때로는 병리적인 요소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일부 종교적 체험은 신경증적이거나 심리적 장애와 연관될 수 있지만 제임스는 이것이 종교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적 체험을 병적인 상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적 경험이 병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러한 체험이 종교적 진리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본다. 병적 상태와 종교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이 고통과 갈등을 치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제시한다.
회심은 종교적 경험에서 중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제임스는 회심(conversion)을 개인의 심리적 전환으로 보고 이는 그 사람의 삶과 신앙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회심은 종교적 믿음으로의 급격한 변화이며 이는 종종 내적 갈등이나 고통을 동반한 뒤 일어나는 심리적 체험이다.
또한 신비주의(mysticism)는 종교적 체험의 정점으로 다뤄진다. 신비주의적 체험은 초월적 존재와의 직접적 교감을 의미하며 이는 매우 개인적이고 때로는 감각적으로 초월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제임스는 신비적 경험을 예외적인 인간 경험의 핵심으로 보고 신비적 체험이 개인에게 내적인 평화와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신비적 경험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종교적 경험은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순간으로 개인에게 평화, 희열, 구속을 제공할 수 있다.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이 개인에게 실용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단지 추상적인 믿음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종교적 경험을 통해 개인은 정신적 안정, 삶의 의미, 도덕적 향상 등을 경험할 수 있다. 제임스는 종교의 진리성을 그 체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효과로 평가하며 그 경험의 효과를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이 다양하고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에 따라 종교적 체험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임스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분석하며 각기 다른 종교적 전통 속에서도 공통된 심리적 패턴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는 종교적 체험의 보편성과 독특성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이러한 경험들이 인간 존재의 깊은 부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한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종교적 체험이 문화적, 개인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지만 인간 본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적 체험의 심리학적, 실용적, 그리고 초월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작품이다. 제임스는 종교를 개인적 경험으로 정의하며 이를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 종교가 인간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의 연구는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고 회심과 신비주의적 체험이 종교의 핵심적 요소임을 보여준다. 제임스는 종교의 진정성과 효과를 개인의 내적 변화와 실용적 효과에서 찾아내며 종교적 체험이 인간 삶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가는 말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적 경험의 진정성을 단순한 신앙적 믿음의 교리나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체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내적 가치와 실질적인 효과에 의해 판단된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제임스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심리적, 정서적, 실용적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인간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종교적 체험이 반드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 것과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며 종교가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삶의 실질적 영향을 통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이해하며 이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성장, 평화, 삶의 의미와 같은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이 단순히 신앙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리적, 철학적, 실질적 측면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 경험임을 주장한다. 오늘날 이 책은 종교와 정신 건강 및 인간성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적 경험을 단순한 교리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삶의 중요한 심리적·정서적·실용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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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1761년 8월 17일~1834년 6월 9일)
인도에서 활동한 영국 침례교 선교사이며 번역가, 사회개혁가,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이다.
개신교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생애
- 1761년 영국 노샘프턴 파울러스퓨리(paulerspury) 태생
- 1779년 2월 10일, 그의 나이19세에 한 기도모임 중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
- 1783년 10월 5일, 존 라일랜드 목사에게 침례 받음
- 1793년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회인 침례교 선교회(BMS) 설립
- 1793년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파송되었으나, 선교사의 입국을 꺼리는 동인도회사와의 갈등으로 덴마크령인 세람푸르에서 활동해야 하였다.
- 1810년 세람푸르 대학교(The Serampore College) 설립
- 1834년 세람푸르에서 별세
저작
- "이교도 선교 방법론: 이교도 개종 방법을 모색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연구, 1791년"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힌디어 성서
- 산스크리트어 고전의 영역본
- 인도 내 6개 방언 사전과 문법서
윌리엄 캐리, 현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인도에서 활동한 영국 침례교 선교사이다. 사회변혁가, 문화인류학자, 인도에서 최초로 학위를 수여하는 기독교 대학인 세람포르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유럽의 아시아 식민주의 시대에 인도 서뱅골 지역에서 일생 헌신한 ‘현대선교의 아버지’이다.
캐리는 1793년에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으나 동인도회가가 추방시키자 덴마크 식민지역인 서뱅골로 옮겨갔고 거기서 약 4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다. 캐리의 좌우명은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이다.
캐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턴셔의 폴러스푸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직공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스스로 학습했다. 정식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채 십대의 나이에 구두수선공이 되었다.
캐리의 어린 시절 여러 환경에서 우리는 그가 장래에 얻게 될 세계적인 명성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무색하게 한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께서 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믿음과 근면, 성실, 충성된 삶의 태도를 사용하셔서 엄청난 고난과 반대를 극복하고 어떻게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하시는기를 보여 주는 훌륭한 모범이다.
캐리는 17살 무렵, 어느 주일에서 설교를 들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때부터 캐리의 가슴에는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으로 벅차올랐다. 그는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면서도 신약성경과 헬라어를 공부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언제나 그를 자극했다.
캐리는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탐험보고서를 읽었다. 그것에 실린 다른 나라의 지도를 보았다. 읽고 보면서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어두운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전해주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다.
캐리는 20세에 도로시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다. 여전히 가난했다. 종종 굶주리며 빚을 지기도 했다. 캐리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구두수선공 일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무엇을 가르쳤을까? 세계 지리를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세계지리를 가르치면서 세계에 대한 캐리의 비전은 더욱 확장되기 시작했다.지리 시간에 비기독교 국가들의 통계들을 제시하면서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캐리는 24살 때 드디어 고향에서 가까운 몰튼 지방의 작은 침례교회에서 전임 목회를 시작했다.가족 6명과 함께 작은 오두막에 살았디.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다. 목회 사례비로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작은 골방에 앉아서 구두를 수선하기 위해 가죽을 자르고 꿰매야 했다.
당시 영국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휘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캐리는 침례교 성직자 회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과 그것을 현대에 적용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어느 원로 목사는 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젊은이, 그만 열 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이 권면은 선교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곳에 모인 목회자들은 그의 주장을 현실성 없는 환상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캐리 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다. 그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었다.
캐리는 몇 달 후 87쪽 분량의 해외선교를 위한 글을 썼다.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해야 할 의무의 탐구"라는 긴 제목을 달았다.세계선교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역설했다. 이 책은 훗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계선교 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 캐리의 죄우명, 세람포르대학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네 장막 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2,3)는 성경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 목사들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심었다. 그때부터 윌리엄 캐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에게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캐리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하여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것을 기대하고 시도하라면서 도전했다.
캐리가 목사로 장립을 받고서 이것을 7년 동안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척했다.
그러나 성실한 인내와 믿음으로 나아가는 윌리엄 캐리 앞에 드디어 위대한 기독교 선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했고 협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 영혼들을 향한 부상당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다. '미친놈!' 이라고 했다.
둘째는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고 평범한 삶을 살기 원했다. 당시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목회자의 충실한 아내였던 그녀는 결국 남편을 따라 인도로 향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다.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로 지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캐리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윌리엄 캐리는 마치 사도 바울처럼 벅찬 마음으로 인도를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격렬한 폭풍을 뚫고 5개월 만에 인도 땅에 도착했을 때, 캐리 눈에 비친 인도는 가난에 찌들었다. 카스트 제로를 말미암아 자멸해 가는 절망과 죽음의 나라였다.
인도인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이 함께 불에 타야했다.
갠지스 강가에선 ‘갠지스 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Gunga mai kai jai)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다.
캐리는 인도인들에 대한 동정을 느끼면서 선교사역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전도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재정은 바닥나고, 가족들이 모두 이질과 영양실조에 걸렸다.
캐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 동역자 토마스와 그의 가족들은 도시에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캐리의 가족들은 캘커타 외곽의 말라리아가 만연하는 습지에서 살았다.
캐리 가족이 인도에 도착한지 1년 만에 5살 나이의 아들이 이질로 죽었다.
캐리의 아내는 마음의 상처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불안정했던 그녀의 정신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어느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완전히 정신착란상태에 빠져 극심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인도에 도착한 후 캐리는 그렇게 7년 동안 죽음과 싸우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7년 동안 단 한명의 개종자도 얻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충성되고 신실했던 윌리엄 캐리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 때가 1800년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캐리에게 추방령을 명했다.
그래서 캐리는 선교지를 덴마크 영역인 세람포르로 옮겼다. 이곳에서 캐리가 7년 동안 인도에서 흘린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다. 개종자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 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1803년까지 25명의 세례 받은 개종자가 생겨났다.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수천 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캐리는 선교를 위하여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인도인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의 주요 언어로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을 완역하였다.
한번은 캐리가 성경을 다 번역한 후 이를 출판하려고 영국에서 인쇄기를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불러 조판을 완성했다. 그런데 출판 직전 캐리가 지방 순회전도를 나간 사이 불이 나서 인쇄기와 원고가 몽땅 불타버리고 말았다. 또 두 권의 문법책과 다국어 사전 등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캐리는 낙망하지 않고 잿더미 위에서 무릎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를 구했다.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 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다.
캐리는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미얀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실패와 성공은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믿는 자의 위대함은 실패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데 있다. 윌리엄 캐리는 수없이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번역사업과 함께 캐리는 원주민이 운영하는 토착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이같은 그의 사역은 선교대상국가 국민들과 그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신념은 현대 선교사역의 기본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캐리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남녀공학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의료 진료소를 경영했다.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놀랍게 향상됐다. 캐리는 세람포르 대학을 세웠다. 이 학교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대학이다. 세람포르 대학은 오늘도 건재하다.
세람포르 대학에서 캐리의 지도하에 수십만 권의 성경과 복음서가 여러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었다. 그 과정애소 그는 수많은 문법서, 사전, 그리고 언어 학습서를 출판했다. 또한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함께 화형시키는 수티제도와 어린아이를 강물에 던지는 관습 등을 폐지시키는 데에 공헌했다.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세우고 진료소를 운영하며, 사회문제에 성심껏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농업 진흥에 선봉장으로 나선 캐리의 선교전략은 이후 세계선교 전략의 중심 가치가 되었다.
캐리의 부인 도로시는 12년 동안 정신병을 앓다가 마침내 18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캐리는 덴마크 여인 샤롯데 루모어와 재혼했다. 그녀는 건강하진 않았지만 캐리를 인정해 주는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샤롯데는 세람포르에서 13년간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냈다.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1821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캐리의 자녀들을 캐리의 동역자로 세워주셨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역에 큰 협력자들이었다.
윌리엄 캐리가 처음 인도에 왔을 때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열정과 성실 외에는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는 시골뜨기 목회자였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노력 끝에 선교사가 되었다.
캐리는 40년 후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나라 인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됐다. 교사, 언어학자, 사회개혁자, 선교사로 일하면서 인도의 소외당한 영혼들과 상한 심령을 치유했다. 인도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영적인 갈급함으로 지쳐있는 인도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고자 했던 그의 꿈은 죽음의 대륙에 소망을 주었다.
캐리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 등이 창설되어 오늘날 세계 선교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캐리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지핀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다. 세계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는 유럽의 폭력적인 식민지주의 시대의 한 복판에서 현대선교의 문을 활짝 연 선교의 아버지였다.
오늘날, 인도에는 약 900명의 국적을 포기한 기독교 사역자들이 있다. 인도인의 2.5퍼센트에서 4퍼센트 정도, 즉 약 2천만 명에서 3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1986년 자료에 따르면, 인도 교회는 그 해에만 약 4,200명의 인도인들을 인도 전국에 전도자와 교회개척자로 파견했다. 그 이후로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인도는 민족과 문화가 상당히 복잡한 나라이다. 세계의 그 어느 지역도 이보다 더 다양하고 미전도 종족이 집중된 곳은 없다. 인도인은 세계 인구의 약 16퍼센트이다. 드디어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인도에는 4,635개의 다른 종족들이 있다. 인도인의 약 80 퍼센트가 힌두교도이고 12퍼센트는 무슬림, 약 2퍼센트는 시크교도이다.
윌리암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인도 세람포르에 묻혔다.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수선공으로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로 떠나 이후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 죽음을 맞이했다.
인도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성자라는 뜻의 "마하투마라"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여주었다.
캐리는 평생 일기를 썼다. 어느 날 일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루 종일 뛰고 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올 때면 좀 더 나은 내일이 있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지금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마음 속에 되새겨질 때마다 내 영혼과 몸은 다시 힘을 얻고 우린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유업을 받을 자들이다. 자! 우리 함께 그날까지 인내함으로 견뎌보자.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정말 누구입니까?
기독교포비아(기독교혐오증)가 전세계에서 발흥하고 있다.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핍박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인류 역사 이래 최대치에 이른다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기독교계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경쟁적으로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일 수는 없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증거들이 있는가. 물론 있다. 주님이 이 땅에 복음과 함께 어떤 축복을 허락하셨는지를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다. 주님의 지상 대명인 선교완성, 그 하나님의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을 성경은 ‘축복의 통로’라 부른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복의 통로’들이 열방을 어떻게 부요하게 했을까. 다양한 시대, 다양한 현장에서 믿음으로 순종한 증인들의 삶과 사역을 연속 소개한다.
남편따라 산 채로 화장하는 ‘사티’ 철폐
“윌리엄 캐리는 식물학자였습니다. 인도에서만 발견되는 유칼립스 나무의 변종인 ‘카레야 헤르바세아’는 캐리의 이름에서 유래될 정도로 그는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세계임을 입증한 인도 최초의 학자입니다.”
“그는 인도에 증기기관을 소개한 최초의 영국인이며, 최초로 국산 종이를 생산한 기술자입니다.”
“캐리는 인도에 만연하던 고리대금업에 대항해서 저축은행 아이디어를 인도에 소개한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인도 최초로 나병 환자들에게 인간적 처우를 하도록 캠페인을 벌인 인권운동가입니다.”
인도 선교사로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에 대한 평가는 이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미디어 개척자, 농업전문가, 번역자와 교육자, 천문학자, 도서관 창시자, 산림보호 운동가, 여성권리옹호자, 공무원, 문화변혁자 등이 그에게 따라다니는 별칭이다. 영국에서 구두수선공이었던 윌리엄 캐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됐다. 그리고 그를 인도땅으로 보내신 주님은 인도 근대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제외하면 정리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영역을 개척하게 하셨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도가 글을 읽을 수 없어도 종교생활에 마음껏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그것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더욱 다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언어를 문자화시켰다. 또 근대인쇄 기술을 도입해 성경과 전도지, 교재를 찍어냈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지구상 대부분의 문자를 만들어냈으며, 종종 그 나라에서 최초로 인쇄기를 도입한 주역이 됐다. 이와 함께 문맹 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여성과 비엘리트 계층과 노예들을 교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근대 인도역사에서 영국 선교사들은 초창기에 40개 언어 21만20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고 한다.
캐리는 동양 언어로 인쇄된 최초의 신문을 출간한 선교사였다. 그가 펴낸 ‘인도의 친구’라는 영문 잡지는 19세기 전반부에 인도 사회개혁을 일으킨 원동력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귀신과 여자들만 사용한다고 여겨지던 벵갈어를 인도의 가장 뛰어난 문학 언어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캐리는 다신론 사회인 인도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각인시켰다. 인간의 죄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신성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인도 사회에 캐리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덕 개혁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이 무지가 아니라 죄라는 것과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참된 영성은 죄를 회개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그의 가르침은 19세기 인도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같은 그의 활동으로 당시 위대한 힌두교 학자중 한 사람인 라자 람 모훈 로이는 인도의 영성에 심각한 의문을 갖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도덕 원리의 이해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40여개의 인도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한 캐리는
인도의 어두움에 진리의 빛을 비추려고 가능한 모든 매체를 사용한 전도자였다. 또 남편이 죽으면 함께 아내를 산 채로 화장시키는
끔찍한 제도 ‘사티’를 철폐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근대 인도사회에서 주님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축복의 통로’로 윌리엄 캐리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다.
* 자료출처 / 복음기도신문
윌리엄케리 - 근대 선교운동의 아버지 | ||||
영국 침례교 선교협회(1792) 창설자, 인도 선교사, 교육자. | ||||
1761. 8. 17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폴러스퍼리~1834. 6. 9 인도 프레데리크스나가르(지금의 슈리람푸르).
영국 침례교 선교협회(1792) 창설자, 인도 선교사, 교육자. 가난하기 짝이 없는 구두 수선공. 그러나 이후에 '현대선교(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운 사람, 윌리엄 케리. 현대역사에서 세계복음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개인이며,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을 이기고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선교에 공헌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살아있는 모델이다. 그는 보통 사람이지만 가진 잠재력을 통해 고난의 40년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나는 꾸준히 걸어 나갔을 뿐입니다. 나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품은 선교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근면하고도, 인내하는 성품이 바탕이었다. 그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튼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하고 수수한 가정생활을 했다. 산업혁명기의 공장에서 알레르기성 체질을 가졌기에 정원사가 되려 했지만, 이런 수수한 꿈조차 좌절되었다. 그는 16세에 구둣방 도제로 28세까지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에 회심하여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여가시간은 성경공부와 평신도 목회에 주력했다. 1781년 그가 20세가 되기 직전 주인집 처제와 결혼한다. 아내 도로시는 5살 연상으로 문맹이었다. 처음부터 삐끗했던 결혼생활은 케리의 학식만큼 그 간격이 벌어졌으며, 신혼은 빈곤과 비참으로 이어졌다. 아내와 늘어나는 자식, 전 주인의 미망인과 아이들까기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케리는 공부와 평신도 목회를 감당했고, 1785년 작은 침례교회의 목사직을 맡았고, Leicester의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봉사했다. 그러나 Leicester에서조차 가족부양을 위해 직업을 가졌다. 목회하는 동안 세계선교비전이 구체화 되었고, '쿡선장의 항해기'(Captain Cook's Voyages)가 그의 선교열을 뜨겁게 자극했다. 선교적 시각으로 성경을 보니 해외선교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만해도 지상명령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므로,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일은 식민지 사업과 관계없는 한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는 해외선교에 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을 설명하자 한 사람이 "젊은이,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개종시키려고 하신다면 자네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걸세." 그러나 그 무지의 말은 케리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1892년 87페이지의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할 수단을 찾아봄」(An Enquire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을 발간했다. 이 책은 개신교사에 있어 루터의 95개 조항과 같은 영향력을 미쳤으며, 선교사에 있어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없음을 논리적으로 공박하고 해외선교를 고무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펴낸 후 노팅검(Nottingham)의 침례교연합회에서 이사야54:2-3을 설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Excep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다음날 그의 설교에 감동받은 목사들이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결성했다. 결성이 끝은 아니었다. 캐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목사들은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이었는데, 막대한 재정이 요구되는 해외선교를 하려면 자신과 자신들의 가난한 교인들의 호주머니로부터 재정이 조달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캐리의 계획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앨드류 풀러(Andrew Fuller)가 선교회 초대총무가 되고, 초대 선교사로 평신도 John Thomas가 추천되었다. 토마스는 의사로 제국함대에 근무해 인도에 간적이 있고, 선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와 복음전도자로 선교사역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이런 그를 캐리가 동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천거하자 이를 열렬하게 수락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캐리가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해외선교사로 자신이 나가겠다고 한 것은 너무 성급한 짓이었다. 그의 교회가 갑자가 목회자를 읽고 상심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미친놈'이라 했으며, 그의 아내조차도 반대했다.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까지 하자, 3명의 어린아이와 또 한명의 자식을 데리고 5개월의 항해를 도로시는 방대했다. 그리고 일생을 뜨거운 적도에서 보내야 함에 도로시는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케리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캐리는 아내의 반대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긴 했으나, 혼자서라도 이 일을 감당하고자 했으며, 계획을 추진해 8세의 아들 펠릭스의 표까지 예약했다. 1893년 수개월 간의 우여곡절 끝에 캐리와 토마스는 선교회의 파송을 받았으며, 한달 후 캐리는 펠리스와 토마스는 아내와 딸과 더불에 탬즈발 인도행 선박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영국 Portsmouth에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토마스가 돈관리를 잘못해 재정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여행허가증을 얻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예화인도의 선교사인 윌리엄케리에게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선생님 나는 언제쯤이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나라에는 종교를 위해 도 닦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처럼 저는 몇 년 동안이나 도를 닦아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목사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초와 성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에게 말합니다.“성냥을 켜서 초에 불을 붙여 보십시오”그래서 이 사람은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에게 또 묻습니다.“그러면 이 초에 불이 붙은 것은 언제 부터입니까?”그는“언제부터라니요 성냥 불을 그은 그 순간부터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예수를 믿은 즉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즉시 우리의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따라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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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연 윌리엄 케리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를 가리켜 흔히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그가 근대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을까? 비록 그가 근대 선교운동의 물꼬를 튼 인물로 간주되지만 그 이전에도 선교를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였다. 그는 1719년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Jesus shall reign where'er the Sun, 한국 통일찬송가 52장)라는 선교적 찬송을 썼는데, 이 노래는 그 후 선교의 찬송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로버트 밀러(Robert Millar of Paisley)였다. 그는 1723년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이교도 정복사>(A History of the Propagation of Christianity and the Overthrow of Paganism)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교도를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중보기도라고 주장하고 중보기도를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로 약 20년 후 영국에서는 많은 기도모임이 일어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윌리엄 케리 이전에도 선교를 강조한 이들이 있었으나, 케리 이후 비로소 영어권 세계의 선교사업은 본격화되었다. 즉 이방선교를 주창하는 윌리엄 케리의 1792년의 책의 발간과 그 결과로 케터링(Kettering)에서 1792년 10월 창립된 침례교선교회(BMS)는 영국과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 선교적 각성을 준 신기원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윌리엄 케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톤(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직조공으로 일하는 노동자였다. 겨우 기본교육을 마친 그는 16세가 되던 1777년 구두방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되기까지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18세 때 회심의 경험을 하고, 비국교도 침례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학문에의 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와 후일에는 인도어 벵갈어 등 동양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또 여러 가지 책을 통해 학식을 넓혀 갔다. 1785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작은 침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후일 레이세스터(Leicester)라는 비교적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쿡(David Cook, 1728-1779) 선장의 항해 기록인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Captain Cook's Last Voyages), 가스리(Guthrie)의 「지리학 입문」(Georgraphical Grammer), 요나단 에드워드가 편집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등을 읽고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또 성경연구를 통해 교회의 선교의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해외선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1792년에는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우리들이 사용해야 할 도구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라는 87페이지에 달하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당시 교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첫째는 선교명령, 곧, 지상명령을 오직 사도들에게 만 명하신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한 점이었고, 둘째는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사람은 결국에는 구원을 얻게 됨으로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선교는 우리 개인과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위의 소책자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이 선교에 끼친 영향은 흔히 루터의 95개조의 항의문이 교회개혁에 끼친 영향과 비교되곤 한다. 이 책에서 케리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먼 곳으로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당시 주장의 오류를 설득력 있는 필치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물론 선교에의 호소는 윌리엄 케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료였던 토마스 코크(Dr Thomas Coke)는 윌리엄 케리보다 9년 앞선 1783년<이방인을 위한 선교단체조직 계획>(Plan for the Society for the Establishment of Missions Among the Heathens)이라는 문서를 발표한 일이 있고, 이로부터 3년 후인 1786년에는 메도디스트 선교기구조직을 호소한바 있다. 그리고 1786년 성탄절과 1787년 2월 사이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들을 서부인도에 파송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윌리엄 케리의 겨우 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케리의 책은 미국의 대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알려진 기도모임을 통해 미국에서의 최초의 수단(means), 곧 선교단체를 조직하게 했다.
윌리엄 케리는 1792년 5월 30일 노팅햄에서 모인 침례교 교역자 회의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을 본문으로 “당신의 장막터를 넓히소서”라는 제목으로 대단한 열정으로 설교하면서 선교를 강조하였으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 때 케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는 말로 설교를 끝냈다.
이것은 그의 선교활동의 확신이었다. 이로부터 4개월 뒤 케리의 확신에 찬 저술과 설교, 그리고 활동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1792년 10월에는 키터링(Kettering)에서 침례교선교회(BMS, 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케리의 후원자이자 이 선교회 설립 회원이었던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가 선교회의 초대 총무가 되었고, 의사인 존 토마스(John Thomas)가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케리 자신도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의 교회도 반대했고, 그의 아버지는 ‘미친놈’이라고 책망하였다. 그의 아내는 선교사로 가는 일을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케리는 1793년 6월 13일 아내와 4 자녀 그리고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인도를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선교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793년 11월 11일 인도 후글리(Hooghly)에 도착한 케리는 이때부터 약 40년간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케리에게는 아내의 질병, 아들의 죽음 등 가정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으나 말다(Malda), 벵갈 등지를 거쳐 칼컷타에서 16마일 떨어진 포루투갈령(식민지) 세람포(Serampore)로 가서 정착하였는데, 이곳에서 34년간 사역하였다.
따라서 이곳이 인도에서 영국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케리는 포트 위리엄 대학(Port William College)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고 교수활동은 그의 선교비를 충당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도의 방언을 익힌 그는 성경번역 사업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였고, (동역자들과 함께) 23 개국어로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0 개국어로 성경 일부분을 번역하였다. 전도활동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 결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점차 복음사역의 열매를 얻기 시작하여 사역을 시작한지 25년이 지난 1818년경에는 약 600명의 수세자와 수천 명의 입교인을 얻었다.
그가 1819년 인도학생 37명으로 세람포대학을 개교했는데 현재까지 1827년에는 덴마크 왕에 의해 문학사와 신학사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케리는 이곳에서 사역하다가 1834년 6월 9일 선교지에서 사망하였다.
해외선교에 대한 케리의 호소와 40년간의 선교활동, 그의 편지와 보고서 등은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케리의 활동은 세계선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선교단체조직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세기는 라토렛의 말처럼 '선교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s)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1954년 5월 8일,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 한국명 소안론[蘇安論], 1865-1954)
1954년 5월 8일,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 한국명 소안론[蘇安論], 1865-1954) 별세
5월 8일 “스왈른과 사과나무”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 한국명 소안론[蘇安論], 1865-1954)
1954년 5월 8일,
북장로교선교사 스왈른은 89년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스왈른은 1892년에 부인과 함께 우리나라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서울·원산·평양 등지에서 전도했고, 1901년 9월에 선교사와 한국인 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의 회장으로 섬겼습니다.
마포삼열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힘쓴 스왈른은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 김익두, 이기풍 등의 회심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하루는……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갑자기 아버지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평양에서 돌로 때려눕힌 양코배기의 화신인가 했다……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왈른 선교사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해지더니 초면인 아버지의 손을 꼭 쥐고 먼저 머리 숙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한참 쳐다보더니 띄엄띄엄 서투른 조선말로 “분명히 당신을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다 사하여 주셨소. 기뻐하시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분 얼굴을 보자 모습이 비슷한
마포 선교사 생각이 나서 아이들처럼 땅에 주저앉아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스왈른 목사에게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과거에
지은 죄를 고했다.
또 마포 선교사 집에 돌팔매질하던 일과 장터에서 만나 돌로 턱을 때려 피 흘려 쓰러지게 한 무서운 죄를
빠짐없이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맹세하였다. [이사례, 『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 (서울:
기독교문사, 2007), 33-34.]
스왈른은 우리나라에 사과를 보급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 사과나무 묘목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대구와 황주의 선교본부에 전달된 사과나무는 재배와 개량에 성공하여 좋은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복음전도사업과 함께 농촌경제 발전에 공헌한 스왈른의 모범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을 잊지 맙시다.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땀 흘렸던 그들은 영적인 일에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주고,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했으며, 교육
사업에 앞장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도는 어떠한지 돌아봅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8).
1894년 봄, 소안론은……기일 부부와 함께 함경도 원산지역에 임명을 받았다.
그곳에서
소안론은 한국인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르면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다.
너무 과로한 나머지 고열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의
아내 샐리의 애정 어린 간호로 병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1899년 봄에 선교지가 원산에서 평양으로 변경되었다.
평양에서
소안론은 도시 외곽에 살면서 농사와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그 방법을 한국인들에게 전해주는 효과적인 전도를 하였다.[조경현,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그리심, 2011), 114.]
나폴레옹
이탈리아어 이름은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10]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 파이유 오 네(La paille au nez. 코에 박힌 지푸라기)'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은 멋지지만, 성씨 부오나파르테(보나파르트)는 게르만족 롬바르드족의 성씨 보니파르트가 어원으로서 영어로 하면 Good Part(좋은 부분)라는 뜻이다.
프랑스 황제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나폴레옹 ~세' 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대대로 쓰고 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오네 왕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여러 이탈리아계 국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나폴레오네였기 때문에, '나폴레오네 2세' 라는 이름의 군주가 배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에서의 칭호가 '나폴레오네 1세' 가 되는 일은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부활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11]
유럽에서 군주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이 원칙이고 성까지 부르면 그 사람을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에, 그가 황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성을 빼고 나폴레옹, 혹은 나폴레옹 1세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영어,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표제어는 나폴레옹 또는 나폴레옹 1세로 되어 있다. 반면 나폴레옹을 적대하던 유럽 각국에서는 황제 즉위 뒤에도 그를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으며, 황제 즉위 이전의 활동이나 생전 퇴위 등의 영향 때문인지 현대 시점에서도 성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이라고 표기한다.[12] 한국에는 나폴레옹의 음차가 '나팔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13], 일반적으로 '破'는 한국어로 '파'라고 읽지 '팔'이라고 읽지는 않는다.
어록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17]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18]
신은 가장 강한 포병대가 있는 군의 편이다.
Dieu est du côté de la meilleure artillerie./ God is on the side that has the best artillery.
Never interfere with your enemy while he is making a mistake. [19]
적이 실수를 하는 동안에는 적을 제지하지 말라. [20]
인간 최고의 도덕은 애국심이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가 뿌려지길 원한다.[21]
사상의 선두에서 나아가면, 사상이 당신을 따르고 지지할 것이다. 사상을 뒤따라가면, 사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사상을 거슬러 가면, 사상이 당신을 전복시킬 것이다.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22]
La mort n'est rien, mais vivre vaincu et sans gloire, c'est mourir tous les jours.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뛰어난 두 명의 지휘를 받는 군대보다 어리석은 한 명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낫다.[23]
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persévérant.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통치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는 능력을 가진 생명체이다.
독일은 몇 번을 패배하던 패배한 다음 날에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쓰러진들 혁명가들에게 프랑스를 넘겨주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내가 프랑스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대혁명은 끝났다. 내가 대혁명이다.
"내 가족은 매춘부 가족이란 말인가!"[24]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25]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 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
정복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잔인해야 한다. 내가 좀 더 잔인했더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27]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28]
"내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왕권을 뺏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왕관을 주워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왕관을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머리에 썼어. 나는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한 거야."[29]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There's nothing we can do."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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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 한만영목사
1938년 8월 15일~2007년 9월 21일.
현대 국악인‧ 종교인. 세례명은 바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본적은 서울 중구(中區)이고, 출생지는 서울특별시이다.
부인은 김영희(金英姬)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과를 졸업한 뒤 인천여자중학교와 서울숭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국악계의 원로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 선생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국악과로 학사편입을 하였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악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로서 한국음악사‧동양음악사‧민족음악학을 강의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장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의 교학과장과
예술연구실장으로 자리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소장과 제6대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 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불교음악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여 이전의 백과사전식으로만 정리되어 있던 불교음악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고, 세계 각국의 음악인을 국내로 초청하여 국악을 홍보하였으며, 국악인들의 국외진출을 도모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1976년에 후두암을 선고받고 자진하여 교수직에서 물러난 다음 총회신학교‧ 아세아 신학대학원을 졸업,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종교인의 길로 들어섰다.
1984년에 서울 부활의 교회를 설립하여 담임목사로 자리하였고, 이후
서울대치순복음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국악개론(國樂槪論)』(1975)‧『한국불교음악연구』(1981)‧『덤으로 산다』(1987)‧『율법과 은혜』(1987)‧『한국전통음악연구』(1990)‧『나는 부족하여도』(1996)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태백산맥이동지방의 민요선법연구」 외 18편이 있다.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한별은 서울 대치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이고, 차남 한진(韓眞)은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 국악과 교수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이수자이다.
한만영 목사는 장충단 성결교회와 신당동 중앙교회, 부산 남교회, 성도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와 안수 집사로 일했고, 베뢰아 아카데미 제
1기생으로 졸업하여 김기동 목사의 서울성락교회와 서울부활의교회의 장로로 있다가 총회신학교, 아세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노회에서 1989년 6월 목사안수를 받아 서울부활의교회 담임목사를 맡았고, 예장 총회(총회장: 정남열 목사)
한성노회 노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부활의교회는 2005년 한성노회를 탈퇴하고 기하성(총회장 서상식 목사)에 가입했고
서울순복음교회(현 서울대치순복음교회)로 교회명을 바꿨다.
한만영 목사는 지난 2007년 3월 21일 사망해, 큰아들 한별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주요교리와 활동상황
1) 주요교리와 주장
한만영 목사는 신앙을 통한 질병 치유를 ‘그리스도 신유의 4단계’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①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이다. 귀신이 구축해 놓은 아성(= 환부)은 의사의 도움으로 파괴시켜 버리면 된다.
② 성경에 마귀를 가리켜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임금, 공중 권세 잡은 자, 온 천하를 꾀하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이 곧 음부(陰府)이다. 음부는 불신자가 죽어서 가는 곳이고, 세상이 음부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불신자의 죽은 영이 들 끊고
있다’고 한다.
③ 귀신은 불신자(不信者)의 사후 영(靈)이라 한다.
2) 활동상황
부활의 교회 한만영 목사는 문화·예술단체로 그레이스 예술 선교단과 성경연구교육기관으로 그레이스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운영방식은 매주 목요일 신유집회인 그레이스 집회를 열며 평신도 대학(10주 코스), 그레이스아카데미(2년), 서울 총신(3년)의
교육기간을 설정하여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전도의 방법으로 정기간행물인 주간 <부활의 소식>과 그레이스
예술선교단 공연을 통하여 홍보를 하며 기독교 TV(채널 42)에 매월 2, 4주 월요일 저녁 8시 30분∼9시까지, 기독교 라디오
방송설교를 매주 토요일 낮 2시 55분에 실시하여 기성교인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기타사항 및 현황
한만영 목사는 자신에게서 배운 그레이스 아카데미 출신들을 이끌고 1989년 기성교단인 예장(합동보수, 정남열 총회장 소속)으로
편입하여 자신은 물론 모든 제자들을 목사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들이 장로교 간판을 걸고 이단으로 규정된 베뢰아아카데미의 귀신론을
펼칠 것을 많은 기성교회의 목회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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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지식과 혁명을 이끈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세기와 17세기 초기 영국의 철학자, 과학자, 정치인으로, 그의 생애와 작업은 현대 과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과 명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생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생애는 16세기와 17세기 초기의 영국에서 벌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철학적 업적과 더불어 영국 역사의 일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제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요한 생애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출생과 가정 환경 (1561년) :
프랜시스 베이컨은 1561년 1월 22일에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교회의 목사였으며, 가정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2. 교육 (1573년 - 1575년) :
어린 시절에 그는 어느 정도의 학문적 지식을 쌓았고, 1573년에 그레이's 인 (Grey's Inn)이라는 법률 관련 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3. 교육과 연구 (1580년대) :
1580년대, 베이컨은 파리로 이주하여 명문 대학들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유럽 대륙에서 혁신적인 학문적 경험을 쌓았고, 유럽 대륙의 학문적 흐름에 녹아들었습니다.
4. 정치 경력 (1600년대 초) :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 정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600년대 초, 그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시대에서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으며, 1618년에는 베룰람 남작 (Viscount St. Albans)으로 작위를 받았습니다.
5. 철학과 과학 (1600년대) :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주의와 귀납법을 강조하는 철학적 이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과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신기관 (Novum Organum)"은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6. 사망 (1626년) :
프랜시스 베이컨은 1626년 4월 9일에 사망하였으며,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매장되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현대 과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명언과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생애 동안 영국과 유럽의 학문적, 정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론과 철학은 지식과 과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베이컨의 주요 이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16세기와 1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주의와 귀납법과 같은 주요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여 현대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신기관 (Novum Organum)"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다음은 그의 주요 이론에 대한 개요입니다:
1. 경험주의 (Empiricism) :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주의를 강조하며, 지식과 진리의 기초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 지식이 감각을 통해 얻어지며 경험을 통해 쌓인 사실들을 토대로 진리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방법론과 관련이 깊어, 관찰과 실험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2. 귀납법 (Inductive Reasoning) :
베이컨은 귀납법을 과학적 추론의 핵심으로 간주했습니다.
귀납법은 특정 사례나 경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일반적인 법칙이나 원칙을 도출하는 추론 방법입니다.
베이컨은 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러한 데이터에서 일반적인 원칙을 도출함으로써 과학적 지식을 확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3. 신기관 (Novum Organum) :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와 귀납법에 대한 주요 이론은 그의 저서인 "신기관 (Novum Organum)"에 상세히 제시되었습니다.
이 책은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경험을 통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러한 이론들은 현대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지고 지식의 확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과학적 탐구와 인간 지식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학문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명언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생애 동안 다양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Knowledge is power) :
이 명언은 지식과 정보의 힘을 강조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돈은 최고의 종이자, 최악의 주인이다." (Money is a great servant but a bad master) :
이 명언은 돈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돈을 올바르게 다루어야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향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생각과 이론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요 영향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 :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주의와 귀납법을 강조하며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고, 과학 연구의 방법과 철학적 접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 지식과 교육 :
베이컨은 지식을 교육과 인간 지성의 발전에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교육 체계와 교육 방법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 체계의 개선을 촉진했습니다.
사회적 영향 :
베이컨은 인간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지식과 과학의 힘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 사회의 정책과 사회 개선 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학 혁명의 선구자 :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 혁명의 선구자로 여겨집니다.
그의 접근 방식과 이론은 갈릴레오, 뉴턴 및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과학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철학과 문학 :
베이컨의 생각은 철학과 문학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경험주의와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은 다양한 철학자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작품은 문학과 예술에서의 영향력을 끌어냈습니다.
현대적 시각 :
베이컨의 이론과 철학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과 경험주의는 여전히 과학 연구와 인간 지식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지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 철학, 교육, 사회 발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시대와 이후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지식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현대 문명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에 기여했습니다.
마무리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과학과 철학에 큰 기여를 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의 생애와 이론은 오늘날의 지식과 지혜를 쌓는 데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명언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야기는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키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