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 대강절. 사순절(四旬節)과 부활절(復活節) 고난(苦難)



대강절(待降節)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 사순절(Lent), 오순절(Pentecost), 대강절(Advent) 등이 있거니와, 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강절(또는 ‘대림절’, ‘강림절’로도 불림)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 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 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 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째의 의미 즉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나신, 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000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 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 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 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 의 합성어로서, 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 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 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 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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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四旬節) Lent

사순 시기(四旬時期) 

헬라어 Σαρακοστή(사라코페) 
라틴어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
영어 Lent(렌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티'(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다.

사순절 주간별 주제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렀다(라틴어 명칭).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뜻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주 -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합니다.

인보카비트(Invokavit)인데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 91:15)라는 라틴어의 처음 말이다.
즉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이다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둘째 주 -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합니다.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인데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셋째 주 -  회개로의 요청을 생각합니다.

오쿨리(Okuli)인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 25:15)라는 뜻이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는 뜻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라에타레(Laetere)인데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사 6:10)라는 뜻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절제하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절기이다.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다섯째 주 -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 불리기도 하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 치유와 회심을 생각합니다.

유디카(Judika)인데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 43:1)에서 온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m sunday. 팔맘 선데이), 또는 고난 주일(Dominica Passionis. 도미니카 파시오니스)이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여섯째 주일 -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arum) 혹은 고난주일로서 이 주간은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절정이다. 우리는 사순절기간 동안 절제를 통한 경건의 훈련과 자신을 다 주신 주님의 베풂을 본받은 나눔의 실천으로 사순절을 뜻있게 보내야겠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 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40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 모세가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한 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던 성찬식과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행하던 금식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을 행하였습니다.
 
사순절의 행사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왔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이 규정은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습관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 collation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행위는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의 호화 생활은 자제 되었습니다. 대신에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어졌습니다. 이후 1517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는 폐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순절과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 폐지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여전히 받아들여져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엄격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금식은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된 자로서의 삶을 돌이키게 하는 행위로써 초대교회 때부터 행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이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 절식節食기도의 형태로 변모되어졌습니다.
 
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따라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의 여정으로, 자기 부인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순절을 통해 자기 부인과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 성경말씀을 매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 하루 1끼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이 항목은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서약이 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항목에 ∨표 해봅시다.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1장 이상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주 1회 이상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주현절은 마감한다. 그러기에 주현절의 길이는 최대 9주일부터 최소 4주일까지로 사순절의 출발점에 따라 일정치 않다. 주현절은 고정절기로 1월 6일부터 그 시작이 늘 일정하지만, 사순절은 해마다 달라지는 이동절기인 부활주일 날짜 확정에 따라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로, 그 기간 중 6회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이다. 주일을 빼는 까닭은 예배의 전통에 따라 주일은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계산법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동·서교회가 다른 날로 지키는 성탄절과 달리 부활주일은 세계교회가 일치하여 지키고 있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성경강림주일 전날까지이다. 성령강림주일을 흔히 오순절이라고 하는 까닭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날 수로 50일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간을 뜻한다. 40일은 대략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날 수로 6세기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1년의 십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쳤다. 사순절 기간은 처음에는 무덤에 머물던 40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마4:2)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시험받으셨다. 우상의 권력과 맞서 싸우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도 40일(왕상19:8)동안 이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향해 선포한 40일(욘3:4)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집행유예시간이었다. 또 노아가 겪은 40일(창7:17)간의 홍수는 인류에게는 심판의 깊은 밤이었으나 그에게는 구원의 새벽이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역시 꼭 40년(신2:7)간이었다. 이 기간은 내내 고통스러웠으나 새 세상을 향한 해방의 행진기간이었다.

사순절을 수요일에 시작하는 까닭은 수요일은 예로부터 금요일과 함께 기독교의 금식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교회에서는 참회와 경건의 뜻하는 보라색으로 강단색을 장식한다. 재의 수요일에는 전 해의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재로 만들었다가 머리에 뿌렸다고 전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개를 의미하는 표시로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날을 선포하였다. 재는 다양한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재는 회개를 뜻한다.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시90:3).” 또한 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 90:3)”. 한편 재는 겸비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정할 때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나라도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대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40일 간은 믿음의 순례기간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부터 부활절까지 욕망을 절제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는 신앙의 수련기간을 갖는다. 기독교 경건주의 전통은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칼빈파인 위그노처럼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강요하였다. 보기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일, 댄스, 발레, 연극, 고리대금, 어음거래, 환금업, 연회와 술 취하는 일, 주사위 놀음, 호화롭게 옷 입는 일 따위를 금지하였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금지규칙으로 정하는 것을 ‘아디아포리즘’ 또는 ‘프레찌시스무스’라고 한다.

사순절의 경건생활은 일상의 쾌락과 관련하여 그 경건의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습관을 ‘포기’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유럽과 남미의 세계적 축제인 카니발은 사순절의 전통과 관련 있다. 카니발은 해마다 11월 11일 11분에 시작한다. 한겨울 내내 축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던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이틀 앞두고 최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젠 윌요일에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카니발은 이날을 고비로 막을 내리면서 이튿날 화요일에는 사순절의 밤을 맞이한다. 가장 소란하고, 흥청대는 카니발과 가장 조용하고 경건한 재의 수요일은 이렇게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사순절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실감시켜준다. 카니발은 이름 그대로 집에 저장해둔 고기를 먹어 치우는 전통 절기이다. 우리말로 사육제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순절 기간의 경건생활 캠페인을 독일 개신교에서는 ‘일곱 주간의 포기’라고 부른다. ‘일용품-생명을 위한 수단’이란 주제로 벌이는 사순절 경건생활운동은 술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 소비 축소,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시청 절제 그리고 과도한 취미생활과 고질적인 습관 중단 및 고치기에 힘쓰는 일이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있다.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5)라는 뜻이며,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로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이고,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라고 하는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이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로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시편 66:10)는 뜻이며,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이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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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四旬節. Lent)의 뜻 

‘사순절’ 기간은 부활주일 전 일부터 소급하여 40일 간의 기간으로 산정한 것인데, 속죄일로 명명된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첫째날로 시작된다.

사순절(四旬節. Lent)의 개념은 교회사적으로 오랜 기간의 변천 과정을 거쳐 확정된 것인데, 예수님의 40일 간의 광야의 금식과 시험을 받던 수난을 기억하고 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고, 모세의 시내산 40일 간 금식과 엘리야의 40일 간의 금식,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간의 광야생활 등이 간접적인 배경이 되어 부활절 전에 행해지는 40일 간의 금식과 기도하는 기간으로 일명 제기(齊期)라고도 하는 기간을 말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사순절은 3세기까지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한 금식기간은 대체로 2~3일을 초과하지 않았으나 40일 간을 가리키는 용어 ‘테사라코스테’라는 말의 최초 언급이 니케아 교회법(A.D 325. 교회법 5조)에 언급된 것에서 그 기간을 주목할 수 있는데, 본래는 실제 금식기간을 6주로 하여 주일을 제외하고 36일이었으나 여기에 4일을 추가하여 40일(四旬)이 되었고 ‘그레고리우스’ 교황 때부터 재(灰)의 수요일을 사순절의 시작 일로 잡아 엄격히 지켜왔다.

‘사순절’은 기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한 교회사적 절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절기를 물리적인 답습(踏襲)으로 고행주의나 또는 금욕주의적인 발상에서 형식적인 재현을 위한 관점에서라면 하나님의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언약의 통전성(通典性)에서 볼 때 옳지 않다.

사순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겨 동참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면 물리적 상황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의 참 정신을 실천적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에서 그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인들의 전 삶이 사순절의 참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을 것인 바 특별히 절기화하여 그 정신을 재확인하고 영성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진다는 의미는 큰 것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날수의 채움이나 고난을 형상화하여 프로그램화에 중점을 두고 절기의 내재적 정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해한 자를 원망 없이 용서하고, 인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고통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참 정신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은 십자가 정신에 참예하고 실천하는 영성을 일깨우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절 후 40일  / 예수님의 승천일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승천일" 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의 승천일이 되는 이유는 아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서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부활절 후 40일을 계수하여 그 날을 "예수 승천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의 말씀을 보면,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올라가실 때 곧 승천하실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승천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재림)'라는 약속 또한 우리에게 해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늘로 올리우신(=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담대히 믿음으로 자신과 형제들을 굳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할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소망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지금의 삶이 오래갈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를 풀의 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벧전1:24-2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강림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3절 "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전서 1장 7-9절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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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순절 7주간 기도학교

제1주 / 왜 기도하는가?

1)왜 기도하는가?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 생활에 승리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과 나아가서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마음 문을 열고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
보고 먼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아 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2.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성도에게 영적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4. 성도의 영혼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5.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2주 / 무엇을 기도하는가?


약 4:2a-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어떤 것을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인가, 즉 무엇을 기도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자녀의 바람직한 기도 제목에 기뻐 응답하십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죄의 용서를 기도합니다.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일이 있으면 그 회복을 기도합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일용할 양식을 기도합니다.
이기적이거나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입니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성령 충만하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합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제3주 / 어떻게 기도하는가?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당신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절차를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절차를 기억하면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지하면 자칫 형식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없이 말로만 하는 기도보다 말은 없어도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도의 순서 - ACTS
Adoration (찬양, 경배) -+
Confession (고백, 회개) +- 나 하나님
Thanksgiving (감사) -+
Supplication (간구) - 하나님 나
2. 하나님을 경배 (Adoration)
대상 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3. 하나님께 죄를 고백 (Confession)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4. 하나님께 감사 (Thanksgiving)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5. 간구 (Supplication)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외식하지 말라(마6:5) 열심히 간구하라(약5:16)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요일5:14-15) 쉬지말고(살전5:17)


제4주 /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당연한 질문 같지만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실하고도 생생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엡 5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제5주 / 언제 기도하는가?

언제 기도하는가?
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므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경건의 시간으로 마련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일정하게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아침인가? 낮인가? 혹은 저녁인가?

1. 일정한 시간을 정합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일정한"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2. 새벽 시간에 기도합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 46: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잠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3. 바쁜 시간을 피합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6주 / 어디서 기도하는가?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공부할 때 어디서 하면 효과가 좋습니까? 혼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럿이 함께 모여 하는 것이 좋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요. 거기서 하나님을 나 홀로 만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만날 수도 있습니다.
단, 다른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1. 홀로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2.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 결론은


제7주 /  기도 응답의 확신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이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
마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3.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원인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난주간 일정
고난주간 묵상자료

(십자가의 길)

고난 주간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에 중점을 두고 맞이한 절기이기에 그 어느 해 보다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먼저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자료는 교우들이 고난의 한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행하신 한주간의 사역을 묵상하면서 의미 있게 보내고자 정성껏 준비된 자료입니다. 요일별로 자료를 읽고 묵상하시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1 일 (고난(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1-11, 막11:1-11, 눅 19:28-40, 요12:12-19)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전도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유월절 행사에 참여키 위해, 그리고 구약 시대의 예언자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9:9)대로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과는 다른 의미의 호산나(지금 곳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면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보여진 가증스러움은 다음날 채찍을 드심으로 동안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1.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믿음과 용기를 보면서 나의 믿음을 돌아 봅시다.
2. 오늘 주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제 2 일 (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이는 무화과로 상징되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 제물에 필요한 짐승,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고, 지역 화폐를 성전 화폐로 교환하여 주는 환전 행위도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시장화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 자신과 주의 몸된 교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이 세상을 성결케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 이셨습니다.



1. 나의 신앙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전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 3 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1-44, 눅21:1-4)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한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두 렙돈(가장 작은 히브리 화폐단위)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 하였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많이 있는 가운데서 일부를 하였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서 신앙의 핵심은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2. 다음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여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제 4 일 (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6-13, 막14:3-9, 요11:45-53)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과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향유 한 병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노동자 한사람이 1년 동안 노동하여야 얻을 수 있는 금액)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일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일도 증거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울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 적은 없으시나요?
3. 마리아가 만일 향유값(1년 품삯)을 생각하고 망설였다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영광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주님께 대한 봉사의 기회를 잃 어버린 적은 없나요?


제 5 일 (세족 목요일)
최후의 만찬

(막14:22-24)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17-30, 막14:22-25, 눅22:7-20, 요13:26-30)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로부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심과 더불어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온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실물 교육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슬픔과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몇 번이고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깨어 있어 당신을 본받고 증언할 것을 원하십니다.



1.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겠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제자들처럼 잠만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오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봉사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제 6 일 (성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마27:45-56, 막15:16-41, 눅23:44-49, 요19:28-30)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가지를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극하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침밷고 창으로 찌른 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던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2.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요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4.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입니다.
5.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였다는 하나님 어린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오신 예수님의 삶의 결론입니다.


1. 용서함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을 아시나요?


제 7 일 (성 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마27:57-61,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자 산헤드린의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지금껏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언이 성취된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즉 요셉은 모든 눈총을 무릅쓰고 자신을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인도 받아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에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처럼 죽었고 그리고 무덤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악을 물리치시기 위해 무덤에 묻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 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 나는 남들이 주님을 외면할 때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용기 있게 주님을 찾고 따를 수 있나요?
2.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무덤속에 장사 지내야 할 내 죄의 목록을 생각해 보세요.


제 8 일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

(마28:5-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8:1-7, 막16:1-13, 눅 24:25-35)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입니다. 금요일에 장사지낸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니다.
우리 교우들은 금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의 절기로 지나쳐 보내지 마시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은;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였습니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검을 향하여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시체를 향하여 올라갔으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하고 빈 무덤과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였습니다.
4.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관심사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향하여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The Crucified Is My Love: Morning and Evening Devotions for the Holy Season of Lent,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무료 영문 전자책을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7-8) 선지자 이사야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희생제물로 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 양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6-9>)

세례 요한은 지금 비옥한 요단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그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그의 가르침은 번개가 치듯 날카롭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뒤섞인 무리들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은 갑자기 입을 다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예수가 군중들의 시야 앞으로 걸어옵니다. 요한은 그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고, 요한은 순전한 그 방랑자가 수천 년 동안 사모하며 기다리던 약속된 여호와의 종이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임을 알아챘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압도된 요한은 다가오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중대한 말을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선포를 통해 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오한 말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과 그분의 가장 깊은 본성, 또 그분의 뜻과 사역을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천국이 활짝 열린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인류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저주가 이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은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짐을 인류에게서 걷어 가셔서 몸소 지시고, 잃어버린 세상에 자유를 주시고 변화된 새 세상을 찾게 해 줄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이 순전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어떤 죄명으로도 고발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7). 그는 또한 죽기까지 인내하는 어린양이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신 순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범사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 거룩한 희생양이시니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온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대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신실하게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순절을 겪었고 또 얼마나 쉽고 가볍게 그것을 지나쳤습니까!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이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사순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어린양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옛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저항을 제압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이 사순절을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재의 수요일 저녁

누가 세상의 죄를 없애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요한의 이 증언은 복음 전체의 핵심이자 정점입니다. 복음의 심장이요 별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임에 의해 요한의 입은 폐쇄당했지만, 사도들은 더 더욱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사도들 또한 죽었으나 복음은 모든 세기에 걸쳐 울려 퍼지며 사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성만찬으로 모일 때,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내리소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일과 근심, 고통때문에 짓눌릴 때가 있는데 만약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를 우리 스스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영원한 암흑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찢기고 피나는 어깨로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가신 십자가 나무는 심히 무거웠으나 저주받은 그 나무에 얹힌 보이지 않는 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게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위에 놓여진 것은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곧 온 세상의 죄와 그 책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권면하며, 요한의 “보라”는 간곡한 외침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한때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사나운 뱀에게 물렸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놋뱀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짐을 지고 대속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충만하고 깊고 감사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자면 새롭고 순수한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가장 깊숙한 곳에서 구세주의 고통을 깨달아 이해하길 원한다면 이 새롭고 순수한 눈을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눈과 영혼으로 고난당하시는 구세주를 바라보십시오. 어두운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핏방울을 쏟으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잔혹한 사형 집행인의 채찍질과 침 뱉음과 가시관을 침묵으로 견디며 재판장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 서십시오. 그리고 죽어가는 그분이 하시는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들으십시오. 상처받아 피로 얼룩진 머리, 극심한 고통으로 떨리는 팔다리, 눈물로 가득 찬 그분의 눈을 마주 하십시오.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순종,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 그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숨을 거두시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고통과 사랑으로 깨지고, 감사의 눈물이 넘칠 때까지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이렇게 영혼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마음에 품는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게 되며 그 교회는 장차 영광의 날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어린양을 영광스럽고 영원한 교회의 왕으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교회는 새 언약의 예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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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의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과 교회력 복원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의 “예배복고운동”에서 시작된 예배갱신운동은 초대교회의 예배회복이라는 과제를 통해 개신교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문화적 흐름에 맞추려는 이 예배갱신운동을 계기로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행사나 축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절기나 행사에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색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전통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에 참여하는 교단의 실천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력과 축일을 폐지한 것을 마치 어린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어다 버린 것인 양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중세의 예전과 교회력과 예배의식을 버린 것이 예배의 통전성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예배복고 운동가’들의 주도하에 중세의 전통을 다시 도입하여 예배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서도 예배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혼란을 불러왔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목회적 지침과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사순절에 대한 관심은 교회력과 절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보다 큰 움직임의 일환이다. 예배를 비롯해 기독교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적응하려는 경향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단을 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예배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 글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는 사순절에 대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개혁주의 신앙고백, 그리고 청교도 신학과 더불어 다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기사들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1. 고대 교회의 교육중심의 사순절


고대 교회의 사순절은 세례식과 연관되어 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배운 후에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3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고서 교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였으며, 세례 받을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맞이할 교우들이 함께 금식하기도 하였다. 어떤 교회는 세례를 받기 전에 40시간 동안 금식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사순절(quadragesima, ‘40번째’라는 뜻으로 ‘40시간’ 혹은 ‘40일’을 가리킴)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두 주간 동안 부분적인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세례를 위한 교육을 받는데 있어 기간이나 방식이 달랐다는 것은 그에 대한 사도적인 전통이 부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교육들이 있었지만, 부활절 때에 시행될 성례를 위하여 수제자들을 교육하고 금식과 기도로 준비함으로 그들은 사순절을 실행하였다.

 

이런 사순절이 고대 교회에서 정착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의 일이다. 4세기의 교회들은 부활절 전의 일곱 주간 동안 매일 3시간의 세례를 위한 교육을 시켰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이런 시행은 제국의 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사순절을 40일로 정하고 부활절에 있을 성례를 준비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교회가 40일을 지킨 것은 아니고, 40일을 정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했다. 어느 교회에서는 수난일 6주일 전부터 계산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회는 8주일 전부터 금식을 하되, 토요일과 주일은 제외하고 일주일에 5일씩 금식이나 절식을 하였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7주일 전부터 금식의 날로 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여섯 주일을 제외하여 40일을 맞추어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니케야 종교 이후로 정해진 사순절이 형식을 갖추고 모든 지역에서 실행된 것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로마 교회가 교회와 세속의 모든 권리를 장악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정치적인 기초를 놓았던 레오 대교황(Pope Leo I, 재위기간: 440-461)은 로마의 전통을 따라 주일을 제외한 6주일을 금식의 날로 정하여 36일을 지켰고, 7세기에 다른 교황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the first day of Lent))부터 토요일의 4일을 더하여서 40일로 확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일곱째 주일 월요일부터 부활절 9일 전 금요일까지를 사순절로 지켰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보다 2일 먼저 시작하고 8일 먼저 끝났다. 동방 교회는 주일을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40일의 금욕 기간을 지킴으로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순절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카니발 축제로서의 사순절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게르만 족의 축제와 결합하면서 더 변질되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지는 시기에 그들은 3일 동안 사육제(謝肉祭, Carnival, ‘고기를 금한다’의 뜻)의 축제를 하고서 40일 동안 금욕하였다. 금욕의 방법도 지역마다 달랐다. 육류와 달걀은 금하고 빵만 먹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생선까지 허용하는 곳도 있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우유를 포함한 낙농제품의 모든 음식까지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엄격한 금식을 행하기도 했지만, 낮에 한 끼만 먹고 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관습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것이 춘궁기(春窮期)를 이기는 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사육제에서 큰 잔치를 하고 봄 농사를 준비하는데 처음 수확할 때까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식을 하였고, 여기에다 종교적인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사순절은 고대 교회의 사순절에 비하여 매우 변질된 내용을 가졌다. 중세에서는 성례가 약해지면서 사회적 성격을 지닌 정교한 예식으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이런 축제의 후에 있을 로마 가톨릭의 금식의 전통인 사순절 이후에는 사회적 범죄가 훨씬 더 기승을 부렸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축제가 끝날 무렵 마지막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에 이르러 성체성사(미사 중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축성 기도와 성찬 재정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되는 거룩한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죄책을 지울 절호의 기회를 갖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사람들은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당 앞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자기의 죄를 써서 거기에 못 박기도 하였다. 수난의 금요일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고 거기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은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공로를 가미한 미신적인 전통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을 준비하고 참여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주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려고 금식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행하는 금식 자체가 강조되고, 수난극 자체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사람의 선행을 강조하려는 로마 교회의 신학과 직결되어 행위 구원까지 연관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순절 비판

1. 미신적 풍습에 대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비판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말씀만을 높였던 개혁자들은 사순절이 미신적이며 이방 풍속이 가미된 비신앙적인 실행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의 선행이 강조되었음을 칼빈은 지적하였다. 물론 고대 교회에서도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어 왔다. 그들이 이렇게 해 왔던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여. 지도자들이 이것을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경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내려온 것임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마 4:2, 기독교강요, 4권 12장 20절). 당시에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을 모방하려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실행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믿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의지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칼빈은 다수의 고대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사순절에 대한 고대교회의 약점과 특별히 로마 교회의 그릇된 사순절 시행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사순절의 관행이 복음을 가리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어조로 사순절 시행을 비판한 것이다.

2. 미사와 비슷한 실행에 대한 비판

중세 교회는 사순절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극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미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전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미사와 동일한 우상숭배이며 미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성찬의 떡과 잔이 사제가 축성(祝聖, consecratio)하는 순간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인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둔다.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에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31절). 로마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고 기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교회의 사순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천주교에서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사순절을 지키라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미신적인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규정한 것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양심의 자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3. 사순절 금식에 대한 비판으로 개혁의 기치를 든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1522년 3월 9일 츠빙글리는 당시의 취리히 시의 출판업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사순절 금식 전례를 깨고 소시지를 먹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했기에, 그 벅찬 일을 감당하느라 스위스 소시지를 충분히 먹었다. 취리히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그들의 행동을 묵과해 주었다. 사순절이나 금식 같은 인위적 절기 전통은 성경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경이 신앙과 행습 문제에 있어 최종 권위이기에, 성경적인 바탕이 없는 사순절과 그 준수는 간과해 넘길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 후 츠빙글리는 [선택의 자유와 음식 고르기의 자유]에 관하여 설교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의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더 악해져 가고 더 부패해져가는 시대의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평민들은 사순절에만 참회를 하고 금식을 준수하고, 성찬을 하기만 하면, 일 년 내내 범사가 괜찮다고들 생각할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식철인 사순절 때에만 신경을 쓰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역행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순절의 금식에 대하여 츠빙글리 중심의 취리히와 콘스탄츠의 가톨릭 주교단(Prince-Bishopric of Constance, 585년부터 1821년까지 존재함) 사이에 논쟁의 내용이 있다. 1522년 4월 7-9일 사흘간, (스위스-독일 국경도시인) 콘스탄츠의 주교가 보낸 대표단이 취리히에 도착하여 취리히의 사순절 금식 불이행 건을 놓고 시의 성직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522년 사순절 기간 중 츠빙글리는 사순절 육식금지 전통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는 설교를 했고, 이에 따라 그와 함께 했던 몇몇 형제들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했다. 이것이 당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콘스탄츠 주교는 강력한 대표단을 보내어 전통적인 금식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츠빙글리 일동과 주교대표단은 취리히에서 만나 해당 이슈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4월 9일, 행정관은 사순절 금식 준수 위반에 대한 금지 선언을 했고, 위반자는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4월 16일 자유로운 육식에 관한 논고로서 자기 방어를 했다. '선택과 음식의 자유'라는 이 논고는 그의 첫 저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런 중립적 사안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있고, 교회당국은 이 자유를 금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사도바울의 입장을 취했다(고전 8:8; 10:25; 골 2:16; 딤전 4:1; 롬 14:1-3; 15:1-2),

이에 대하여 콘스탄츠 주교는 신성한 교회 규정을 방어해 달라고 권면하는 내용의 칙령을 5월 24일자로 취리히 시정부에 발부했으며, 이단적인 교리들의 확산을 막으라고 경고했다. 츠빙글리는 위기에 빠졌고, 거듭 암살협박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대한 논쟁이 츠빙글리의 취리히 개혁의 발단이 된 셈이다. 그는 성경을 붙들었고 콘스탄츠 주교는 전통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개혁교회의 절기에 대해 언급한 고백서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갖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으며,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 예배는 없었다.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지만, 다른 절기들은 없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 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다.
네덜란드에서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미신 :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식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선지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그의 단편집 3,Ⅰ].

2. 츠빙글리 67개 신조(The 67 Articles, 1522)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 24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a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조 :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Westminster, the Form of Church Government), "공적 예배의 날과 장소에 대하여"

복음 시대에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어느 날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각종 절기들이라고 말하면서 지키는 행해지는 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장이 없으므로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당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경우에 그럴 이유와 기회가 백성들에게 주어질 때에 하루나 여러 날을 금식이나 감사 날로 구별하는 것은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절기에 관한 대회와 총회

1556년 에딘버러(Edinburgh) 대회와 1577년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부활절, 크리스마스 날과 그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절기 때에 성찬을 집례 하는 목회자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을 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것을 시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1638년 글라스고우(Glasgow) 총회(11월 찰스 1세에 반발하여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진 스코틀랜드의 총회)에서는, 교회의 다양한 절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증되지 않음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좋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목회자들은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좋다고 명문화 하였다.

청교도들의 사순절 철폐

킬빈의 입장을 따라 청교도들은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 남아 있던 인간들의 규례를 철폐해 나가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고 청교도들을 존중하는 이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이 기간 어떤 특정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히 사순절 금식이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 전체가 헛된 거짓 금식에 불과함을 알았다.
교회들이 ‘재의 수요일’에 사순절 참회기간의 시작을 알리고, 금식과 (육식 등의) 절식을 알리며 14살 이상의 사람들은 육식이나 고기로 된 어떤 음식도 삼가게 하고, 18~60세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그들은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개혁신앙의 근본적인 원칙은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만 교회의 여러 행위를 한다는 원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명백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기독교의 절기들을 거절하였다.
사순절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십자가와 고난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는 루터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순절 기간을 지켜가는 루터파, 성공회와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에 의지해 예배와 교회의 모든 일을 하려던 청교도적 개혁교회가 이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순절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의 입장

현재에도 다수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파와 교단들이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제84회 총회 결의를 통해 사순절 지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8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83회 총회 보고서에는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인가?' 라며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라고 했다.(제 83회 총회 보고서 p.369-420).

이듬해인 1999년 9월에 있었던 예장합동 제84회 총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만들어낸 사순절을 개신 교회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기로 결의했다. 제84회 총회보고서에 실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순절 문제에 대한 예장합동 제84회 총회 보고서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행사이다.

이 40일간에 로마교회는 금식을 하고 금식을 권장하고 또 음식을 제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 고기 양을 점차 줄여가다가 고난 주간과 특히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금지하였다.

2. 종교개혁은 사순절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 기독교강요 IV. 12).

3.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였다.

금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거짓되고 유독한 의견으로 부패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제시하였다(강요 IV, 12, 19).
하나님도 마음의 변화 없이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대로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은 가장 큰 혐오라고 제시하였다. 또 금식을 의무인 것처럼 엄격하게 지킴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강요 IV, 12, 20).

​4. 칼빈은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킴이 널리 퍼졌다고 개탄하였다.

 사순절을 지킴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착각하였고, 예수의 모본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 연례적으로 행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주님은 모범을 위해 금식하지 않고 복음 선포의 장비로만 금식하였다고 칼빈은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반복적으로 금식하지 않았고, 구약에서 모세가 금식하였지만 선지자들이 그 모본을 따라서 금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강요IV, 12, 20).

​5. 사순절 기간에 로마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 예배가 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여겨 고기는 금지시키고 다른 단 것들을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먹었다.

오히려 더 성대히 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금식하였다고 칼빈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금식이 폐지되었다고는 칼빈이 결코 말하지 않고 재난의 때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할 것으로 말하였다(강요 IV, 12, 17).

6. 우리 교회가 이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채택하여 지키기로 하면,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해야 하고 또 고기를 그 기간에 먹지 않게 되며, 그러면 고기 먹는 것을 위해 사육제를 열 것이다. 그래서 많이 먹고 점점 줄이다가 완전히 금하는 일을 할 것이다.

7. 40일간에 걸쳐서 사순절 금식과 고기 금지 등을 하고 철야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이런 경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양심이 심히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 참가하면 정상적인 사업과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형식이 되고 외식적이 되어 로마교회처럼 절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8.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면, 로마교회가 지키는 많은 다른 교회 경절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강절, 주의 현현절, 삼위일체 주간 등등 참으로 많은 절기들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9. 사순절과 다른 절기들을 로마교회의 습관대로 지키게 되면,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 이럴 바에는 이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母)교회인 로마교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제103회 총회에서는 제84회 총회결의를 재확인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하고 찬송가 교독문의 사순절 교독문은 사순절을 제하고 사용하도록 결의 하였다.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난주간을 오래도록 지킴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은혜롭게 시행해 왔다.

오늘의 교회와 사순절 절기

사순절을 절기로 지키는 예전을 중요시하는 교단도 있고, 특정 기독교 미디어도 공공연히 이 절기를 지킨다.
재의 수요일에 죄 목록을 작성하고 태운 후, 그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이것은 제 2계명에도 이탈된다.
사순절은 결국 로마 가톨릭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기간에 선한 뜻에서 자신을 절제의 시간에 머물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회들도 많다.
또 그런 분들과 여전히 우정을 같이 하지만,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면 사순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근래에 많은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본받아 고난 주간과 더불어 사순절을 지키고 있다.
기독교 서점가에서 봄철 베스트셀러는 ‘사순절에 대한 묵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하되 사순절 기간에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다.
수난 주간에 상영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는 중세의 수난극 전통을 할리우드식으로 각색한 영화이다.
감독인 멜 깁슨(Mel Gibson)은 보수적인 로마 교회 신자로 마리아의 시각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마지막 12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그는 그 영화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어떤 교회는 교회에서 단체로 그 영화 전체를 관람하는 것으로 수난 주간 집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행하여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신 그 주간과 금요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지나쳐 수난의 40일을 지키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나 이에 유추하여 믿음으로 시행해왔던 교회사적인 근거도 없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의 교훈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사순절을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복음의 근본을 허무는 매우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가톨릭의 영향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사순절을 비롯하여 교회의 절기를 규정한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 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뒤섞이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계속 싹터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 뿐 아니라 교회력 자체를 철폐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이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을 지속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며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적용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순절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행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으로 내려온 사순절을 지정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를 좇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의 발상이며, 이는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일에 불과하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과연 성도들이 성경의 의도를 따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있을까?
성도들이 하루를 금식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보다, 금식 후에 또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고 즐기는 것에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사순절에 따라 그때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여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도자들은 그 비성경적인 그릇됨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어디에도 교회가 절기 속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금하여 왔었다.
왜냐하면 개혁신앙 선배들은 이 사순절 시행이 ‘그리스도에 반(反)’하는 것으로 얼마나 불신앙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재현하며 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이 고난은 누가 함께 받아보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고난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아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배척하였고,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가게 하였다. 우리는 사순절 행사로 우리의 경건의 의를 세우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들도 함께 미움을 받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여 드러낼 자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겪는 복음 전파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게 되는 고난이 따름을 말씀했다.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과 같은 인위적인 행사를 만들고 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등에 져보고 나무에 묶여 보기도 하고, 못에 박혀 보기도 한다고 해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이란 이런 특정한 기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껴보고 체험해 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말하여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오직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도록 권면 받고 있다(히브리서 12:5).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삶은 사순절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19
“그러므로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정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사순절은 ‘절기’로 ‘꾸며낸 겸손’과 ‘과장’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기도 기간을 만들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새벽기도를 체질화 하기,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이나 TV 시청하는 시간을 없애기, 회개 운동, 소외된 이웃 돌보기 등에 더욱 역점을 두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더욱 보람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되,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좌우되지 말고, 십자가 사랑의 신앙 회복, 경건과 기도의 생활화, 나눔 운동의 확산, 사랑을 기반으로 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시간을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삶이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특별한 절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 곧 개혁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배들이 강조하며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매일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순절 뿐 아니라, 신앙생활 방식 중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상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고, 믿음의 유추에 따라 집약되는 것들과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와 성경적인 교리에 합당한 도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생활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부활절(復活節)

부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자 서구권 국가들의 연중 최대 명절이다.



고난(苦難)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2022년 고난주일을 맞이하며(4월 10일) 고난주간을 시작합니다(4월 11일-16일).
고난이란 의미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고난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그럼에도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은 아주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그 구멍의 지금은 2mm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어른 나방으로 되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을 낳는다.
생물학자 한 사람은 이 사실을 매우 눈여겨보았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이 딱하기도 하고 또한 신기하기도 해서 나방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학자는 특별히 제작한 가위로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6mm 정도 되도록 넓혀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학자의 예상대로 더 큰 구멍을 통해 나온 나방들의 크기가 더 컸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자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속도가 더디었으며, 날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알도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덩치만 큰 쓸모 없는 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자는 보고서를 통해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그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통해 건강해 지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결론 내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국 크고 쓸모 없는 나방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역경을 피해 편한 길로 가려 하거나 변화를 피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역경과 변화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에고치의 사례처럼 역경과 고통 없이는 훌륭한 나방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삶에 있어 역경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역경과 고통은 우리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또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역경이 두려운가?
변화를 거부하는가?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과 변화를 훌륭한 성장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 당신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결코 없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 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 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 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은 어떠한 험한 세상에서도,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잘 이겨나가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같이 어려움이 없이, 크게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각종 고통과 좌절, 역경과 온갖 슬픔들이 오히려 연단이 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반석이 됨을 잊지말고 시련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잘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자기 십자가(Self Cross)

마태복음 16:13-24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고 고백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날 것이라”(21절)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재빨리 대답했다.
주님은 그를 ‘사탄’이라 부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 하시고(2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24절).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다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부인 (Self Denial)

자기부인은 ‘자기 생각과 뜻’의 부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
우리가 주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선택의 기준은 내가 아닌 주님이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바다에서 그 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을 한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장)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자기 부인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육의 사람을 부인하고 영의 사람이 되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육의 사람은 삶의 목적과 동기가 세상이 되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사는 사람이다.
영의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자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예화) 워치만니를 찾아와서 계단식 논의 맨 위쪽 주인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에 대한 답변

둘째, 겉사람을 부인하고 속사람을 다듬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이란 죽어 흙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을 말하고, 속사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한 영의 사람을 말한다. 보이는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예화) 육체의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어느 여인의 고백

셋째, 옛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이 되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바울은 우리의 거듭난 상태를 의복과 비유를 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냄새 나는 옛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새 옷을 입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예화) 어느 설교자의 고민

자기 십자가
(Self Cross)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인으로 인한 십자가이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의 고난을 간과할 때가 많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인데, 다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지 않고 살려니까 그것이 문제이다.
또한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바로 자기 십자가 이다.

베드로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루터포드 (Samuel Rutherford)는 “새에게서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간다.” 했다.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키는 것고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자기 십자가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난 (Pa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십자가와 연관 짓는다.
자식이 사고를 치면 ‘자기 십자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십자가’, 사업이 망해도 ‘자기 십자가’, 시험이 떨어져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지로 인한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믿음과 연관된 고난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 십자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이고, 믿음을 지키려다 받는 고난이며, 믿음을 전파하다 받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예화) 주일 성수를 위하여 주일 날 가게 문을 닫아야 헀던 상인의 고백

(예화) 이비인후과 의사의 고민

둘째, 사랑 (Love)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의 십자가’로 승화시켰다.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개, 하라는 것 248개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 (Commission)이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 (Omission)이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의 요약은 마태복음 22:36-40절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람’이다.
‘사랑’이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에 있다.

사랑에는 4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친구의 사랑인 펠레오,
부모의 사랑인 스톨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화) 배우자를 찾는 젊은이 '믿음만 좋으면...'

셋째, 사명 (Mi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이를 ‘지상최대의 위임’(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보통 ‘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뜻은 ‘위임이고 위탁’이다. Com+mission은 ‘함께'(Com)와 ‘사명’ (Mission)의 합성어이다.

‘Mission’에는 ‘사명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곧 선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것이 ‘Commission’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 아니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 부인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빌 1:21)라고 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사순절 (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을 배우는 절기이다. ‘사순’ (四旬)이란 40일을 뜻하는 말로 근신과 금식으로 자기 절제를 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이다.
재의 수요일 전날을 불어로 ‘마디그라’ (Mardi Gras)라 부르며, 이는 ‘뚱뚱한 화요일’ (Fat Tuesday)이란 뜻으로 ‘영양보충’하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호주에서는 ‘마디그라’가 ‘퀴어 (Queer) 축제’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혼의 닻과 돛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 신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저자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언급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유대인인 신자들에게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히브리서 내용은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의 모형들을 열거하면서 새 언약의 주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성경에 종종 ‘반차 (班次)’란 용어가 등장한다. 아론의 반차, 멜기세덱의 반차가 그것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반차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에만 5번 등장한다. (히 5:6,10, 6:20, 7:11,17) 사전을 찾아보면 반차 (班次)의 동의어는 계열 (系列)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히브리 기자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고’ (히 7:3),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 (히 5:6, 7:17)’이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멜기세섹의 반차’의 의미는 육신의 혈통이 아닌 영적 혈통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의 제단 위에,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읽고 감동을 받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원래는 지옥의 문 윗부분에서 지옥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작은 형상이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만들어,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하게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켰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란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시편 107편에는 인생을 항해로 비유하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바다는 순풍에 돛단 것 같이 순조롭지가 않다. 높은 파도, 강한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등으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적지가 없는 배는 표류하지만, 목적지가 있는 배는 항해한다. 우리의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은 그곳을 ‘소원의 항구’ (시 107:30)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소원의 항구’를 향하여 낮에는 돛을 높이 올려 전진하고, 밤에는 닻을 깊이 내려 휴식한다. 닻과 돛은 항해의 필수품이다.

나는 1979년 4월 17일에 입대했다. 군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쯤 큰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자신의 군 생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출항하기 위해 닻을 올리던 중 줄이 풀리면서 닻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부대원 중 한명이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 들어 줄을 연결한 후, 닻을 올리고 출항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 닻의 기능은 배를 정박하게 한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출렁일 때, 닻을 깊이 내린 배는 흔들릴 수는 있지만 파도에 쓸려가지 않는다. 쉼 없는 거센 물결과 바람 앞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균형과 절제와 안정의 추이다. 항구에 돛을 내린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정박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 배는 돛을 올리고 출항해야 한다. 순풍에 돛을 올리면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역풍에도 삼각돛은 전후의 압력 차이로 전진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닻을 내려 정박해야 하고, 낮이 되면 돛을 올려 항해해야 한다. 세상의 바다에서 소망이 ‘영혼의 닻’이 되고, 소망이 ‘영혼의 돛’이 되어,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오늘도 믿음으로 항해하자.

종교개혁과 3명의 사람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 루터가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츠빙글리’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문과 비슷한 67개 개혁안을 내놓고, 취리히 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는 루터보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연합을 위해 두 사람이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견은 일치하였으나, 성찬에 관한 이견(異見)으로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가톨릭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애 반대는 했지만 루터는 ‘공재설’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기념설’ (Memorialism)를 주장했다. 연합을 상징하는 성찬식이 개신교 최초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개혁의 2세대인 칼빈은 두 사람의 의견을 절충하여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을 내놓았다.

첫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505년 5월부터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약 2달 뒤, 고향인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옆으로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루터는 번개가 떨어지자 큰 두려움에 떨며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했다.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16살 아래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가 개혁이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을 때이다. 카타리나가 소복을 입고 루터에게 갔다.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냐”고 화를 내자, “당신이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하나님은 죽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후 루터는 ‘살아계신 하나님’ (living God)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둘째,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루터와 더불어서 종교 개혁의 양대산맥이다. 츠빙글리의 신학의 핵심은 성경이다.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고 했다. 1506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글라루스의 성직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 희랍과 고대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에 대해 배웠다. 이 기간에 인문학자이자 성직자인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던 츠빙글리는 어거스틴과 바울 신학을 독학했고,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1522년, 츠빙글리는 그의 사상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67개 신조’를 작성했고, 다음해인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공개토론을 개최하여 ‘67개 신조’를 중심으로 로마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다. 그는 두 차례나 군종 사제로 이탈리아에 갔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체험을 바탕으로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츠빙글리는 성서주의 영향 때문에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은 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루터가 개인의 신앙 양심에 근거했다면, 츠빙글리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별히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였다. 스위스 용병은 용감하기로 정평이 났었다. 아직도 바티칸 근위병은 스위스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성서학자이며, 프로테스탄트요, 진보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다. 츠빙글리는 인생의 황금기인 47세에 전사하고 개혁의 바통을 다음세대에게 넘겼다.

셋째, 존 칼빈 (Jean Calvin, 1509~1564)

칼빈은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태어났다.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혹은 ‘장 칼뱅’ 등으로 부른다. 영어로 ‘존 칼빈’이고 불어로 ‘장 칼뱅’이다. 루터나 츠빙글리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다.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아들에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그는 파리에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쳤다. 1532년에는 부르주에서 법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는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개신교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됐고, 칼빈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됐다.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요약하고 교리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그의 저작 동기 속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부탁했다. 칼빈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된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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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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