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구원
조슈아 W. 지프
‘환대와 구원’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동성애 이슈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동성애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오늘날, 한 레즈비언 교수가 자신의 파격적인 회심과
세계관의 변화를 진솔한 필체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회심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밝힐 뿐 아니라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갖고
되고 켄 목사 부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소상하게 얘기한다.
이후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와 교인들이 자기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례를 받고 정식교인이 된 후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위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세계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과정을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다.
훗날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목사
아내로서,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하여 홈스쿨링하는 엄마로서, 그리고 손님대접을 주된 사역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번에 출간된 확대개정판에는 저자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켄 목사와 남편 켄트의 이야기, 저자의 공개편지 두 편, 그리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질문과 응답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교회가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 책이다.
본서의 주장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곧 그리스도인은
‘환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 없이 전적으로 환대해주신
결과로 주어진 것인 것처럼, 우리 또한 타자를 차별 없이 환대함으로써 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행위의 진정성은 타자에 대한 ‘환대’로 증명된다.”
기독교 영성 나아가 선교적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환대’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가야 할 환대의 길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를 보게했고, 특히 저에게는 자신있게 환대에 대해 외칠 수 있는 용기와
설교해야 할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조슈아 지프(Joshua W Jipp)가 저술했다.
원제목은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자는 소위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환대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것이 사람의 환대를 이끌어내는지를 복음적으로 매우 탄탄하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프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환대하셨다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핵심 중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칭의론도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가 하나님의 넉넉한
품으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근본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저 이 사실 앞에 감격하는 것에서 멈추고 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환대를 베푸셨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 들어오도록 환대받은 자들로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분깃으로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광야의 나그네로서 하나님께 환대받은
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도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도출된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명기 26: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첫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환대 은혜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산을 연약한 타자들과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환대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 환대를 베푸는 자들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신약의 예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환대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터부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비난도 예수님의 환대를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감히 예수님의 그 넉넉함 품에 안겨 있다.
물론 환대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 불편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우리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슬쩍 뒤로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이고 연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대하는 삶으로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을 믿어야 한다.
환대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환대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이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듯한 신앙생활에서 이제부터는 구조선을 타고 생명을 구원하는 구조대원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은 비난의 화살을 날리던 교회를 향하여 칭찬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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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회심(The Secret Thoughts of an Unlikely Convert)
로자리아 버터필드 지음
오늘날 반동성애 운동이후에 그들을 돌보는 사역이 미흡한 가운데, 동성애자들을 교회와 개인이 어떻게 돌보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동성애는 복음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알게 합니다.
1. 교회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3.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4. 교회는 어떤 부분에서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고 갈등하게 하는가?
5. 복음을 통한 회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저자는 대학 부교수이자 종신교수 자격을 부여받은 엘리트 여성이고, 학과장을 맡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나열한 수식어 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본인의 의견으로도 그가 얼마나 복음과 먼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확고하게 좋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기독교인들이 엉성한 사고의 소유자들처럼 보였다. 빈곤과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비현실적인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박하다'라고 조롱하는 방식, 즉 토론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둘러 종결시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성경책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성경말씀에 의하면"이라는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라는 주문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면 영락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파국을 맞았으니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나 상용어구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답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뿌리 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답은 질문이 주어진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내놓아야지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포괄적인 말을 답이라고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을 어기는 짓거리, 또는 값싼 감상으로 뒤범벅된 너절한 감사카드를 보는 느낌이 든다.
..(중략)..
그들이 반지성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 외에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중략)..
레즈비언들의 공동체는 내게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즈비언 공동체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팔 벌려 포용하고 환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으로 보였고(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려 들거나 냉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섞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본문 p25-26)
이 부분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굴이 벌개져왔습니다. 아니라고 반문하고 픈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준 사람 기준이 아니라 받은 사람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하듯,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교회를 향한 시선은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글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분께선 내가 최근에 반갑게 맞이하고 시간을 따로 내서 새로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만 돌아봐도 답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고, 세상 종교가 말하는 어디에나 신이 있다는 범신론도, 선행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가 배타적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가져선 안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복음은 친절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이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뿌려질 수 있을까요?
그 단서를 저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그런 편지들 가운데 섞여 내게 왔다. 그의 편지는 매우 친절한 어투로 나 자신도 간절히 대답하고픈 그런 질문들을 묻고 있었다. 당신은 투고에 실린 결론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켄 목사는 내 글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중략)..
전화상으로 얼마간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에, 그때서야 생각이 났는지, 초면인 사람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과 아내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주 사려 깊은 사람, 아니 거의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중략)..
저녁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볶음요리를 준비했다는 플로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중략)..
꽤 더운 칠월 날씨였지만 두 사람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경문제 전반에, 특히 오존층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내 도덕적인 잣대들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내 정체성, 동성애 문화, 가치관들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삶의 경험뿐만 아니라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지닌 문화, 가치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내가 켄과 플로이를 보고 바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나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빈 칠판 같은 상태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하면서도 충분히 나를 존중해 주었다.
..(중략)..
켄과 플로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방인인 내게 다가오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식사 중 그들은 내게 복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 후에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으레 나오리라 예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은 덕분일까 식사 후 켄이 나랑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문 p36-37)
그런 부담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이 교회 안 사람을 만날 때..
직접 경험해 본 경험에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간접 경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무례함에 대한 혹은 쉽게 정죄함에 대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언가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관점이 교회 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살아 나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 하게 됩니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툭 던지는 멘트들이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켄 목사님과 플로이 사모님의 모습은 정말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신앙인이 어떤 겸손함과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부부와의 첫 만남에서 첫번째 식사를 위해 본인을 교회로 초청했다면 그 즉시 뺑소니를 놓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깊은 인내와 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안정적이면서 상호 신뢰가 쌓인 관계가 구축된 이후 켄 목사님의 주도적인 복음 전파로 인해 저자가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관계,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계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저자는 스스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전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나름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과 자신을 비교해 나가며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을 느끼고 감수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복음과 믿음은 그 든든함이 분명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것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복음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겪는 변화들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치열한 싸움과 변화를 스스로 싸워냅니다. 그리고 힘들거나 무너질 때에는 섣부른 조언이 아닌 항상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묻지도 않은 조언을, 특히 자신의 신앙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진리라 믿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런 모습은 중보 대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칫 내 생각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드디어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복음을 통해 회심을 하면서 느끼는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그리고 내가 실제로 경험한 혹독한 회심의 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복음주의 문화가 정형화시킨, 믿음은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들이 가져올 수도 있을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복음주의의 놀이공원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이웃들 중 몇 집은 지역의 대형교회들에 출석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한 커피 체인점들과 바람을 채운 거대한 고무 놀이기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중략)..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믿음을 거는 행위는 사람들을 그릇된 희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릭 워렌 목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방식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한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그 기돌르 드렸다면 이제 축하를 받을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내 기도가 신실한지 여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구원의 은혜는 구속할 자를 선택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며 순종하신 구세주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큰 은총이 어떻게 내 신실함에 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본문 p 81-82)
교회는 편의와 새신자들에게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 본질을 위협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친절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도 아님을 말이죠.
복음은 듣는 이를 죄인이라 합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진다? 전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라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자에게 든 고민은 "왜 동생애가 죄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걸 왜 죄인줄 모르지? 하며 분개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그 반문을 했더니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동성애를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6장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들의 1) 교만함과 2) 풍족한 가운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고 3)가증한 일을 하였기 때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아우 소돔이라 표현함으로 실상 이 구절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그들의 숨겨진 죄악을 지적하시는 도구로 이 예를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선 후 구조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만, 부요, 도락에의 집중, 자비와 겸손의 부재. 이런 죄악들 자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논리나 심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적인 죄가 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성애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성적인 활동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욕구들, 필요와 갈급함 등을 포함한다. 성애는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표현으로서,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본문 p74)
우리는 현상에 집중하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서애는 분명한 죄이지만, 동성애에 집중하기 앞서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즉 감각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인 것이다. 이를 두고 칸트는, '인간은 감각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세계의 모든 대상은 인간이 가진 자발적인 인식 능력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구성해 낸 결과물들'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만을 인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다니엘 키시'를 통해 본 뇌 가소성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요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사전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았으며 근처에 어떤 건물이 있고, 요트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 키시가 말하길, 그가 앞을 보는 방법은 자신이 혀로 내는 소리에 있다고 했다.
'딱딱' 소리를 내며 주변 사물에 부딪쳐 반사되는 음파로 대상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마치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을 구별하는 돌고래와 박쥐처럼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파는 사물이 멀리 있을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물이 딱딱할수록 강도가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음파를 통해 사물을 구별한다는 것이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로어델러 박사가 다니엘 키시와 함께 실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실험 결과 비시각장애인이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조거피질이 다니엘 키시의 경우 소리를 통해 활성화되었다.
책 <감각의 제국>은 EBS 다큐프라임 <감각의 제국>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니엘 키시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같은 소리를 들려주더라도 다른 쪽 뇌의 활성이 더 강하거나 영역이 확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공간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은 시각피질입니다. 꼭 시각이라는 감각이 아니어도 시각피질은 공간 표상을 굉장히 정확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각에 해당하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이용해 공간 파악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5-106쪽
"인간은 매우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약 40퍼센트 정도의 뇌가 시각 정보체계에 관여하고 있고요, 넓게는 60퍼센트 가까이 되는데,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시각 정보 처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체감각이나 청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조차도, 심지어 기억과제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시각피질이 매우 활성화된다는 보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8쪽
일반적으로 시각 정보가 입력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도 시각피질이 활성화되고 공간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결핍된 감각을 채우기 위해 다른 감각 정보의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이를 '뇌 가소성'으로 설명한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생각과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기능과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멀쩡한 성인의 눈을 가린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면, 뇌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어떤 감각 하나가 차단되면 그 감각을 담당하던 뇌 영역이 다른 감각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뇌가 영역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단된 감각을 다시 열어 주면 뇌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무엇을 감각하고 무엇을 감각하지 않느냐에 따라 수시로 뇌 지도가 달라진다.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끊임없이 뇌를 바꾼다. - 본문 102쪽
우리 몸이 바뀐 외부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뇌 가소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감각하느냐에 따라 뇌 지도가 수시로 달라지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지능은 우리의 능력을 표상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다양한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의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뇌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감각의 언어
이 책은 우리의 감각이 공감이라는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은 흔히 본능적인 것이라고 한다.
책에서도 감정을 '감각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감정에 따라 신체감정지도가 달라진다는 것인데,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몸 전체의 감각이 증가했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에는 발 부분이 차가워' 진 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따라 몸의 감각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감각의 언어'이고 타고난 본능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는 물론이고 태아 역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책은 '수정 후 10주가 지날 무렵부터 태아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감각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태아는 외부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각각의 자극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와이즈베리의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엄마가 즐거워하면 태아는 힘차게 발을 차며 움직이고, 엄마가 슬퍼하면 태아의 발차기 횟수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아 역시 엄마의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물론 이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배 속에서부터 감각할 수 있고, 엄마의 다양한 감정 변화를 느끼며 엄마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태아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감정에 이처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렇다면 공감도 감각처럼 본능적인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공감능력을 지닌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걸까?
인간의 천성, 공감 능력
우선 공감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부터 살펴보자.
공감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엠퍼티(empathy)의 어원은 아인픨룽(Einfhlung)이란 단어는 아인('Ein, 안으로), 퓔룽(fuhlung, 느끼다)'라는 독일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타인의 마음, 타인의 감정, 타인의 현재 상태에서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지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고, 그들의 감정(정서적 측면)과 관점(인지적 측면)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활용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적 공감 능력으로, 후자를 인지적 공감 능력으로 설명한다. 정서적 공감 능력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붕년 교수는 "유년기에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뇌 발달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정서적 공감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인지적 공감 능력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뇌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짧은꼬리원숭이 실험을 소개한다. 실험의 내용은 '전운동 피질(행동을 계획하고 움직임을 실행하는 기능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의 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전기 작용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실험실 연구원이 기록 장치를 끄지 않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갔고, 후식으로 한 연구원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본 원숭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데도 '(원숭이의) 전운동 영역의 뇌가 활성화'되었다.
움직임이 있어야 활성화된 영역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눈으로 관찰하고 심리적으로 모방한 것만으로도 활성화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도, 감정을 머릿속에서 추측하고 모방하여 인간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 즉, 거울신경(mirror neurons) 때문이다.
거울 신경은 우리가 직접 행동을 행할 때에도 발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할 때도 발화하는 세포들이다. 이렇게 발화한 세포들은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동기와 정서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를 자극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까지 함께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거울신경은 타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 그러나 거울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폐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타인과 나에 대한 감정적인 교류 자체가 어려워져 사회적⋅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 본문 202쪽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이란 거울 신경의 발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공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거울 신경 회로'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측은지심 회로',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의 세 가지 공감 회로가 필요한 셈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는 차치하고라도 뇌의 신경세포인 '거울 신경회로'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측은지심 회로'는 타고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감은 인간이 가진 천성인 것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말해주는 것
하지만 자폐증 환자나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자폐증은 병적인 문제로 인지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반면, 사이코패스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경우로 '뇌의 감정 스위치라고도 불리는 편도체의 발달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샐리&앤 테스트'라는 공감능력 테스트를 통해 아동의 인지적, 정서적 공감능력을 평가하고 9~10년 뒤 학교 폭력의 가해나 피해 여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4~5세에 인지적 공감능력의 결함이 있던 아이가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이 되고,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아이는 10년 후 가해학생이 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우 반복적인 사회성 훈련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나갈 수 있지만, 정서적 공감능력은 어릴 적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되기에 결여된 경우 촉진시키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다만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 결과 상대방이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명확히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의 결여는 개인의 사회성과 적응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정서적 공감 능력은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 즉 부모와의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성장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듯이 공감 능력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자극을 받고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양육 태도와 양육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공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앞서 앞을 보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를 통해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것조차 감각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잘 말해준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 인간이 가진 최상위의 감각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공동체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듯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쪽에선 신음하고 아파하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귀를 막고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책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기에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천성인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감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 2006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오바마 연설 中
소련이 핵무기 7200기를 갖고 있을 때 망하고 말았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고 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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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광은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5가지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 나오는 5가지의 법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정보존의 법칙이다.
내가 쏟아부은 열정은 열정의 양만큼 결국에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둘째, 힘의 법칙이다.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힘이 있는 자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힘이 있을때 상대를 배려해 줄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넷째, 습관의 법칙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은 인생이다.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면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이 있다면 더욱더 활성화 시키자.
다섯째, 위대함의 법칙이다.
인간의 내면속에 감추어진 그 크기를 알수 없는 능력있다.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사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할때가 아니라 진정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할 때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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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교회
톰 라이너&에릭 게이거 「단순한 교회」 생명의말씀사 P. 88~89
“단순한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모임이다.”
이 정의 다소 무게가 느껴진다.
이 정의를 하나씩 살펴보자.
단순한 교회는 설계된다. 그 교회는 부주의하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우연히 계획된 것도 아니다. 목회는 “단순한 우연” 이상을 행하는 것이다. 목회는 용의주도하게 고려된 것이다. 조직화되어 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단순한 교회는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단순한
교회의 설계는 무언가를 중점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과 목회는 무언가를 중심 주제로 삼는다. 그들은 교회의 연중 행사표와
소책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교회에서의 제자 사역을 위한 설계는 그 과정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단순한 교회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과정은 간단하다.
혼란스럽지 않고, 이해하기가 쉽다.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과정은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유지된다.
늘어나지 않는다. 매달 바꾸지 않는다.
단순한 교회는 단순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과정에 덧붙여지지 않는다.
그 교회는 다수의 새로운 프로그램들과 그것에 제시된 모델들을 거부한다.
과정이 방법(how)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전략적이라 할 수 있다.
과정은 교회의 목적이나 비전에 매여 있다.
그 둘은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과정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실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과정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활동하게 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은 활동을 추진한다.
과정은 논리적으로 흐른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끌리고, 애착이 가는 쪽으로 움직인다.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된다.
그리고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통한 활동은 의도적이고, 의도된 최종 결과를 가진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변화된 삶은 핵심이며, 의도된 최종 결과다. 사람들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단순한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여정에서 각기 다른 단계에 있다는 사실과, 영적 성장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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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자비(mercy)와 은혜(grace)
자비’와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두 주제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낱말을 동의어인 양 혼용할 때가 많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서는 ‘자비’란 말을 사용하고, 신약에서는 ‘은혜’란 말을 쓴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비’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을 주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자비는 이삭의 심장에 꽂힐 칼을 막아준다.
은혜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공급해 준다.
자비는 달려가 탕자를 용서한다.
은혜는 모든 좋은 것으로 잔치를 베푼다.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은혜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자비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외침을 들어준다.
은혜는 그날에 낙원을 약속한다.
자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가를 치른다.
은혜는 우리의 악함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준다.
자비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킨다.
은혜는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외친다.
자비는 반역과 죄의 삶에서 존 뉴턴을 구한다.
은혜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고 시대를 초월한 찬송가의 저자가 되게 한다.
자비는 지옥에 이르는 문을 닫는다.
은혜는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연다.
자비는 우리의 수고를 거부한다.
은혜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축복을 더해준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굶주린 가족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년 동안 복역하고 나온 그는 사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한과 분노를 품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 동서부에 사는 일흔네 살의 미리엘 신부 역시 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은 사람이다.
유산 가운데 남아 있는 고가품이라곤
칼과 포크 여섯 벌, 국자 하나, 그리고 촛대 두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궁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겸손한 종으로서
그들을 섬겼다.
나흘 간의 자유를 누린 후 장발장은 이제 피로와 굶주림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문 앞에 서 있다.
염치고 자시고 그 집을 여관으로 오인한 그는 뻔뻔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사이, 장발장은 19년 만에 처음 누워본 매트리스와 하얀 시트를 뒤로 한 채 몰래 귀한 은식기들을 배낭에 훔쳐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그 식기들은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발장을 보며, 신부는 헌병들에게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
헌병들에게 장발장을 놓아달라고 하며,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만나 반갑소. 그런데 내가 은촛대까지 함께 주지 않았소? 아마 200프랑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거요. 포크, 스푼과 함께 그것도 가져가시오.”
믿기 어렵다는 듯 장발장이 신부에게 묻는다.
“정말 나를 놓아 주시는 겁니까?”
신부는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덧붙인다.
“형제여, 떠나기 전에 여기 당신 촛대도 가져가시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말이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더 이상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시오. 내가 당신에게서 산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나는 그것을 가증스런 생각과 죽음의 영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드린다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당혹감을 느낀 장발장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 그리고 가슴속의 한을 관통하는 사랑의 강렬한 빛, 이 둘이 서로 대조되는 것을 본다.
“은혜의 빛이 그의 삶, 그의 영혼에 닿았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천국의 빛으로 사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그 신부는 “이 비참한 인간의 전 영혼을 장엄한 광채로 채웠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그는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 자애로운 신부의 집 문 앞, 어둠이 깔린 길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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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일, 복… 한국교회 성도들의 세 가지 오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혼동이 있다.
성경을 이렇게 오해하면 성도의 신앙 성숙이 대단히 어렵다.
사실 대단히 깊숙히 퍼져 있는 신앙적 혼란이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교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신앙의 오해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복, 이 세 가지다.
성도들이 이 문제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래서 성경적 신앙의 성숙이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정론, 이원론, 그리고 무속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이원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무속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결정론의 오해
성경이 아닌 결정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면, 나의 인생 미래에 어떤 하나의 길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고, 그것을 보물찾기하듯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을 찾으려고
애쓴다.
둘째, 하나님의 일과 이원론의 혼란
이원론은 고대 헬라의 영육 이원론에서 로마가톨릭의 성속 이원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성도가 이원론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면, 교회 안의 일과 교회 밖의 일을 거룩한 일과 속된 일로 구분한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고 가치 있으며, 세상에서
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복을 무속신앙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한국교회에 아주 흔한 현상이다.
신자들이 나 혼자 복 받으려고 열심히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성도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믿음과 삶의 변화가 따로 가기에 삶의 변화인 성숙이 없다.
그는 나 혼자 복받는
것이 목표이므로 복의 통로가 되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이런 세 가지 오해와 혼동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길을 잃은 상황이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 성경적 신앙으로 가려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
브루스 월키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레너드 맥컬리, 제람 바즈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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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資本論)
애덤 스미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은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집필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편집한 방대한 정치경제학 논문으로 1867년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자본주의와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내용은 1859년 발간된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부제로 붙어 있다.
1권은 1867년에 나왔으며 2, 3권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 각각 1885년과 1894년 발간되었다.
국부론(國富論) / 칼 막스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776년까지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며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는데,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이는 케인스가 막 경제학에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했던 말인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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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10. 27 ~ )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헤겔 정치철학을 신봉하는 일본계 미국 학자이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인간의 역사 과정은 두 가지 큰 힘의 상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번째 힘은, 부를 축적해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합리적인 욕망이라는 힘이다.
두번째 힘은, 역사 진보 과정의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헤겔이 ‘승인 받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이같은 결론은 이제 전세계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통일되어 가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 개념이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지칭하는 것인 만큼, 이제 대립된 이데올로기를 통일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논지이다.
<트러스트>는 그 후속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이 책의 첫장 제목이 ‘역사의 종언을 맞이한 인간의 상황’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신뢰에 바탕 두어야 사회 발전
후쿠야마는 고 제임스 콜맨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단체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해하여 중시한다. 즉 개인 간의 관계가 신뢰에 바탕을 둔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구가한다는 주장이다.
후쿠야마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물질적 동인만으로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큰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가 여부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는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고, 그 공유된 가치로부터 신뢰가 탄생하며 신뢰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신뢰가 낮은 저신뢰 사회이고, 일본과 독일은 고신뢰 사회이다. 한국이나 중국같이 가족 중심적인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족 이외의 사람과 사회적 협동이 이루어지기 상당히 어렵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뇌물과 부패가 성행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 제도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무원과 정치가를 신뢰하는 사회라면 뇌물을 흔히 주고받는 현상은 절대로 나타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사회 발전의 동인을 신뢰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합리적 선택론에 기초한 이기심이 80%를 설명해 주는 고전경제학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합리적 선택론이 사회를 설명해 주는 충분 조건은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발전해온 동인으로는 시장경제 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구승회 박사의 번역은 대단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독자들은 이 책이 번역한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우리 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단지 utility를 ‘효용’이 아니라 ‘유용성’으로, rational choice를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이성적 선택’으로 번역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후쿠야마의 책은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잘 설명했다는 점에서 지성인의 필독서다.
1. 더 잘려는 욕구
- 경제적 욕구
2. 인정 받으려는 욕구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장점이 많으나 시들어간다.
인민 대중을 인정하지 않고 간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 자유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으나 발전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발전할 수밖에 없다.
미국 스텐퍼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철학자, 정치경제학자이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하다.
후쿠야마는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이념적으로 헤겔이 말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성이 보장될 때 충족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라고 보았고 이를 궁극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최종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냉전이라는 기간 동안 민주주의 체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많은 투쟁을 거치면서 승리를 거머쥔 만큼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 체계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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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이야기 / 쉐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나눔의 폭발적인 전염성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랑의 급진주의자 이야기
"저항할 수 없는 믿음 혁명이 당신 안에서 시작되고 당신의 작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이다.
다시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시작하자. 예수님이 용기를 주신다."
"쉐인 클레어본의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신자들이 깨어나고 있으며, 다시 새롭게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시대 최고의 증거다." (짐 월리스)
▲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쉐인 클레어본 지음 /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0쪽 / 1만 6000원
자본, 폭력, 권력, 전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찾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는 천국의 희망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더불어 세상의 가치관을 복음 속에 버무려 넣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북스럽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틀 안에 있는 교인들은 나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복을 준다는 편안한 말씀을 듣기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무뎌져 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 온 저자 쉐인 클레어본은 안전하고 편안한 복음이 아닌, 위험하고 불편한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했다면, 호불호에 따라 말씀을 선별해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삶 속에 그대로 말씀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단순한 원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만 하는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외침과 더불어 삶 속에서 말씀이 진실로 실현되는 것을 증언하며 살고 있다. 쉐인은 대학 시절 필라델피아 뒷골목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으로,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나환자 돌봄 사역에 합류했으며, 9‧11테러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바그다드의 환자들을 치료하며 위로하기 위해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월스트리트 거리에서 희년 의식을 거행함으로 성경적 경제관을 외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를 설립해서 노숙자들과 도심의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며 보육과 의료 혜택을 베풀며 그들의 신앙과 재활을 돕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해 내며,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반쪽 복음을 넘어서서 믿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믿음 이야기다. 말씀을 듣고도 편안함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고 부끄럽고 두렵게 하는 책이다. 말씀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실천하게 도와주는 지침서다.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할 수 없는 혁명(Irresistible Revolution)', 믿음 혁명으로 초대하는 통렬한 외침이다.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은 사랑의 근본적인 의미와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평범한 급진주의자'라 칭하며, 죄로 인해 엉클어진 세상의 탄식에 귀 기울이고 그 탄식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어느 교수에게서 "세상이 네 영혼을 도적질하지 못하게 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선택한다는 것이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어떤 것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전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인도 캘커타로 가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10주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을 보았고, 그들의 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하며 폭격이 있었던 지역과 병원을 방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고 예배했다.
또한 2004년에는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팀을 결성하여 태국 현장에서 사역했으며 저개발 국가의 수질 개선을 위한 '우물 파 주기 운동'과 인터넷 모금 운동인 '관계의 십일조 운동'을 통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11년 5월 케이티와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심플웨이 리더이자 주목받는 설교자로서 평화, 사회 정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활발히 전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다.
대표 저서로 <행동하는 기도>(IVP 역간)가 있다.
심플웨이 홈페이지 www.thesimpleway.org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각성제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하는 책이다. 감히 성경 곁에 함께 두고 읽어야 할 또 한 권의 책으로 추천한다. 부디 스마트폰을 팔아서라도 사서 읽기를!" -김성수, 예드림교회 목사. 작은도서관 '호모북커스' 대표
"작금의 한국교회 상황을 마음속 부담으로 가진 자들이라면, 어떻게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으라. 바다 건너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 목사. <교회 안의 거짓말> 저자
"한국교회의 거듭된 삽질에 기독교인임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 물 타지 않은 복음 그대로를 '래디컬'하게 전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허다한 무리'에 속하길 거부하고 예수가 간 좁은 길을 우월감 없이 가려는 사람이라면 닥치고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우리 시대가 보길 원하는 겸손한 대안'들'이 되라.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교회다." -박총, 작가.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그리스도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려는 저자의 열정을 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 깨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저자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처럼 당신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불편함이 필요하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저자
"당신이 쉐인을 안다면, 이 책의 페이지마다 소리치는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외침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이 쉐인을 모른다면,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레너드 스위트,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
오늘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저자는 주기도문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실천해야 할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도의 모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주기도문의 각 구절, 심지어 한 단어 한 단어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원리들을 찾아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신 관계의 풍성함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주기도문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들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의 제자들 또한 더 풍성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R. C. 스프로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델 주기도문이 자주 간과되고 오해되기 십상인 영적 훈련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보고임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기도의 예들을 보여준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주기도문을 파헤친다. 특유의 명료함으로 각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타 주제들,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용서, 유혹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답,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 간의 복잡한 신학적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R. C. 스프로울의 <어떻게 기도할까?>는 그리스도인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기도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추천글
R. C. 스프로울은 난해한 진리들을 명쾌하고 인상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 그는 주기도문을 가르치기에 이상적인 교사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자체가 ‘기도’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가르쳐 주신 하나의 심오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유익과 도움을 줄 것이다. - 존 맥아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 『담대한 복음전도』 저자)
나는 R. C. 스프로울의 강의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놀랍도록 생생하게 진리를 꿰뚫는 바로 그것이다. 그의 뛰어난 인용솜씨와 목회감각에서 나온 지혜는 그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책이 짧아서 금상첨화다!) 스프로울은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성경말씀을 명료하게 해석해준다. 그는 중요한 것들, 즉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역사에 대한 진리들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충분히 제대로 알고 있다. 말미에는 도움을 주는 질의응답까지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은 이제 명실공히 기도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 마크 데버 (캐피털힐침례교회 담임목사)
R. C. 스프로울은 내가 처음으로 신학을 배운 선생님이다. 갓 믿은 신자로서 나는 그가 진행하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Renewing Your Mind)’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신학과 철학, 교회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통해 자신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재능과 자원들을 기도라는 중대한 주제에 쏟아 붓고 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주제인 만큼 잘 숙련된 선생의 손에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우는 데 그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나면 당신 앞에 기도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펼쳐질 것이다. - 타비티 안야빌리 (케이맨 제도 그랜드 케이맨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
저자소개
R. C. 스프로울 -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던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주일 예배뿐 아니라 나머지 6일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낙스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담임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Renewing Your Mind)’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에 선정되었다.
기도하는 인간(homo orans)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가 종교가 있든 없든 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인간을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왜 기도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목적에 대해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꿈과 기도의 관계
요즘 교회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교파를 초월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는 주요 설교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도 과거 청년부를 지도할 때 꿈과 비전에 대해 많은 설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청년들에게 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금수저, 흙수저, 3포 세대, 4포 세대를 넘어 9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터라 말장난처럼 보일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청년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미래에 대해 비전과 꿈을 가지기 보다는 불안감들이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때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믿음을 강조하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제시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월은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초월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도 또한 개인의 필요와 욕구들을 채워 달라는 기도, 혹은 고통이나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관심과 기도가 여기에 무게를 두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미래가 그렇게 밝지 못하다.
기도는 무엇인가?
종교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이 기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기도의 정의들은 기도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작하기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의 주제는 ‘시작하기’이다. 그렇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고 시작한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더 깊게 들어가기
2부는 ‘더 깊게 들어가기’이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아가기
3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과 답을 소개한다.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기도하는 인간’,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미루거나 생략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본서는 기도의 큰 그림과 핵심을 어렵지 않게 안내해 주고 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출판사의 책소개
기도에 관한 입문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알짬이라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핀다. 어떻게 기도라는 여정을 심화시켜 나갈 것인지, 이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무엇인지 찬찬히 설명한다. 부록으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도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으며 함께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한 역자의 해설을 수록했다.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해 궁금한 이들, 기도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얇지만 단단한 입문서다.
목차
들어가며
1. 시작하기
2. 더 깊게 들어가기
3. 계속해서 나아가기
해설 : 기도의 단계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기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