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례식 준비와 절차 그리고 비용
1. 돌아가시면 어디로 연락을 할까요?
요양원 (Hospice) 포함 병원에서 돌아가시면 의사/간호사의 사망 선고후 미리 연락해둔 혹은 연락이 안되어 있다고 해도
근처 아무 장례를 준비해주는 funeral service에 연락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시간이든지 와서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다만 새벽에 돌아가시면 고인을 모시고 갈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으므로 미리 연락처를 교환해두는것이 좋습니다.
집에서 돌아가시면 911에 연락을 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사안을 간단하게 작성합니다.
그리고 funeral
service에 연락을 하면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다만 경찰에 의해 고인 사망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시신 검사하는
곳에 연락을 하여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그후 연락을 받으면 funeral service에 연락하여 고인을 모시고 옵니다.
2. Funeral Service 장례 서비스는 무엇을 제공합니까?
기본적으로 고인을 모시고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례의 모든 부분을 처리해준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사망 신고까지
해줍니다.
그러기에 개개인이 느끼기에는 비싸다 혹은 괜찮다라고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가격이 다르지만 같은
지역내에서 여러군데 전화를 하여 액수를 물어보면 담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 funeral service를
이용하시기로 마음 먹었다면 가격보다는 장례에 대해서 부드럽고 문제없이 해줄 곳을 찾는게 낫습니다.
특히 진행하시는 분께서 한국어
영어에 능통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식구중 연세가 드신 분이나 아픈 분이 계시다면 하루 정도 시간내서 직접 찾아보고 장례식을 할 장소와 주차등을 미리 보시고 절차를 확인하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3. 장례식의 절차는 어떤식으로 진행되는지요?
3.1 Viewing (고인을 단장하여 장례 서비스하는 곳에서 마지막 얼굴을 보며 장례를 진행하는 것) 을 포함한 장례식을 돌아가신 후 2-5일 후에 진행이 보편적.
3.2 그리고 원하는 분들은 교회/성당에서 그 다음날 예배/미사를 진행. 이때에도 고인의 Viewing을 같이 할 수 있음. 혹은 3.1의 장례식을 하지 않고 곧바로 예배/미사로 진행 가능. (사찰/절은 경험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3.3 매장 (Burial) 을 하는 경우에는 묘지로 옮기고 거기서 예배/미사 한번한 뒤 매장. 혹은 3.1과 3.2 모두 스킵하고 Burial을 진행 할 수 있음. 즉 하관식과 장례식을 동시에 진행 가능.
**한국분들은 3.1, 3.2 혹은 3.3 후에 조문객에게 식사 제공을 하고는 합니다.
작년 팬데믹 이후에는 주로 떡이나 답례품 증정하더군요.
3.4 화장 (Cremation) 을 하는 경우 고인을 모시고 가서 화장을 한 뒤 며칠 후 연락이 오면 유골을 모심.
마찬가지로 3.1과 3.2 스킵 가능.
3.5 화장을 하고 유골을 받아오면 묘지에 매장하거나 납골당에 모실 수 있음. 혹은 집에 보관도 가능. 묘지 공원 근처나 바다에 뿌릴 수 있는 옵션도 있으나 허가 없이 뿌리는 것은 불법. 필히 가능한 곳에 미리 연락해야함
4. 이 모든 절차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요?
(아래 가격은 미국 뉴저지 기준입니다. 환율 익숙치 않은 분들은 1불 1000원에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1000불은 100만원)
4.1 묘지 비용 : 미국에 계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묘지의 비용도 상당히 비쌉니다.
그러므로 매장을
하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미리 늦지않게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가격은 지역마다 달라 딱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최소
5천불이상입니다.
장례 비용중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묘지 비용 : 최소 5000불 이상, 지역마다 가격이 크게 다르므로 2-3만불이 넘는 곳도 많습니다.
그리고 가격은 계속 올라갑니다.
필요하다면 꼭 미리 준비하세요.
저희는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4.2 묘지 매장 비용 : 묘지를 구매하면 그 다음으로 준비할 것은 장례식 후 매장 서비스입니다.
땅을 파는 것부터 시작하여
묘비를 세울 곳을 정돈해주는 것까지 해줍니다.
이때 땅에 물이 차지 않게 해주는 서비스는 별도인 곳도 존재합니다.
매장 비용
역시 지역마다 다 다르지만 이 역시 적어도 최소 3000불이상입니다. 당연히 묘비는 별도 입니다.
매장 서비스 비용 : 최소 3000불 이상
묘비 가격 : 천차만별 500불 이상 조금 괜찮아보인다 싶으면 2000불 이상
4.3 장례 서비스 Funeral service 비용 : 위에 언급한 3.1부터 3.5까지 모두 관리해주는 서비스의 댓가입니다.
포함된 부분중 생각나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4.3.1
장례 기본 서비스 비용과 고인 운송 비용 (모든 장례 용품 운송 비용)
4.3.2
3.1과 3.2에 Viewing에 필요한 고인 단장 비용과 냉장/방부처리 보관 비용. 다만 viewing에 필요한 옷은 따로 준비해야 함.
4.3.3
3.1 viewing service에 필요한 장소 제공 및 관리 혹은 3.2에 필요한 서비스와 물품 제공 비용
4.3.4 이외에 장례 전반적인 부분의 물품과 서비스 제공/따로 구매 가능
4.4 관 비용 : 관의 가격은 정말 천차만별입니다. 대략적인 가격 1000불부터 시작하여 3-4만불이 넘는 관도
존재합니다. 위에 언급한 viewing을 하고 싶다면 관의 뚜겅이 반 정도만 열리는 것으로 준비하면 괜찮고 이 관의 시작 가격은
대략 2000불 이상입니다. 그리고 관에 물이 안차도록 해주는 것 역시 별도 입니다.
Funeral service 대략적인 비용 : viewing 장례식, 교회/성당 장례식 그리고 하관식까지 다 하면 최소 7천불 이상
**지역내 정확한 장례 비용은 구글 검색에서 General price list 지역으로 하면 이를 공개한 funeral homes의 가격을 볼 수 있습니다.관 비용 : 천차만별 1000불 이상 viewing을 할 경우 2000불 이상
5. 화장을 할 경우의 비용 : 대략 500불 정도입니다. 화장을 한다면 최소한의 나무 관 (대략 500불 이상) 이 필요하고, 당장 묘지나 매장이 필요치 않습니다. 납골당에 모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혹은 때에 따라서 집에 모셔도 됩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funeral service가 없어도 문제 없습니다. 다만 화장할 곳과 그곳으로 고인을 모시고 갈 운송 서비스를 따로 알아보셔야 합니다.
화장만을 원하시는 경우에는 Direct Cremation으로 알아보시면 됩니다.
화장 후에도 장례식이나 예배 혹은 미사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못할까 걱정 크게 안하셔도 됩니다. 남의 시선때문에 큰 빚을 남겨가면서 장례를 진행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6. 하관식과 장례식을 같이 진행하는 경우 : 위에 언급한 많은 서비스가 없어도 됩니다. 특히 funeral service 제공 비용에서 많은 절약을 할 수 있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작년에는 코로나때문에 빌딩안에서 많은 인원의 집합이 금지되어 장례식을 야외 하관식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야외는 집합 금지 예외인 곳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관식과 장례식을 같이 하시길 원하는 경우에는 Immediate Burial Service 로 알아보시면 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독교인의 죽음을 소천(召天)이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죽음이요, 그래서 죽음을 나타내는 데는 어느 나라 말에서나 완곡어법(婉曲語法)을 쓴다.
그 완곡어법은 또한 고인의 신분이나 종교 등에 따라 달리 쓰이기도 한다.
‘죽었다’는
말이나 ‘죽을 사(死)’자를 피하는 것은 물론 ‘별세’ ‘타계’ ‘운명’ 등 일반적인 말 외에 귀족들의 죽음을 나타내는 ‘훙거’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승하’ 외에 불교인의 ‘입적’ 가톨릭교인의 ‘선종’,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쓰는 ‘소천’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소천’이라는 말이 언어학적인 면에서 가능하냐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이 언제 누구에게서부터 쓰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미 보편화된 이 말에 언어학적인 해석을 붙여 바른 뜻을 알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쓰는 ‘피정’(避靜; 소란한 세상을 피하여 고요한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의 경우와도 같지 않다.
즉 “하늘에로 부르다”로 풀이하여 쓴다면 “소천하다”가 아니라 “소천되시다” 또는 “소천을 맞으셨다”로 할 수 있고, 다른 한 가지 대안으로는 “서천(逝천)하시다”(하늘로 가시다)를 쓸 수 있다.
* 갈 서(逝) / 가다, 죽다.
(예) 서거(逝去) / 갈 서, 갈 거 - 죽음의 높임말
(예) 서자(逝者) / 갈 서, 놈 자 - 죽은 사람
(예) 서세(逝世) / 갈 서, 인간 세 - 별세(別世)의 높임말
(예) 서천(逝天) / 하늘로 가시다
이 경우는 ‘상경’(上京)이나 ‘입성’(入城)과 유사한 경우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발달 심리학에서 죽음의 다섯 가지 요소
1. 불변성 :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2. 필연성 : 죽음은 피할 수 없다.
3. 중단성 : 죽으면 모든 것이 중단 된다.
4. 적용성 : 죽음은 살아있는 것에 적용된다.
5. 원인성 : 죽음은 원인이 있다(신체 기능의 정지)
죽음의 다섯 단계
개요 / Five stages of grief
영어로는 각 단계들을 줄여서 DABDA(다브다)라고도 한다.
다섯 가지 단계 / 부정(denial), 분노(anger), 협상(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부정(Denial)
"아니야, 그럴 리 없어!"와 비슷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검사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수많은 병원을 돌아다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물어보면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상태가 심해지면 다른 환자와 결과가 바뀐 것 아닌가 의심하며, 자신은 나을 수 있다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사자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다만 성급하게 당사자의 상태를 말했다가는 당사자가 더 부인할 수 있으니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진 후에 말해줘야 한다.
분노(Anger)
"왜 그 수억명의 사람들 중에 나지?" 라는 식의 말을 하며 돌봐주는 가족, 친구, 의사나 간호사, 혹은 신에게까지 분노를 표출한다.
이 시기 환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무슨 행동을 해 주든 그게 분노로 연결되어 굉장히 다루기 어렵다.
넓게 보자면 이 단계는 자신이 갖지 못한 '여생'을 가진 일반 사람들에 대한 질투로도 볼 수 있다.
협상(Bargaining)
이것이 협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익숙한 예로는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게요!" 이런 식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경우 생명의 연장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에게 맹세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무신론자가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다.
간혹 이 단계에서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들의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소망은 무시할 수도 있고, 무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무시하든, 무시하지 않든 이 단계에서 환자가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단계는 짧게 지나간다.
우울(Depression)
결국 협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라는 생각이 드는 등, 극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 이 단계에선 증상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 환자도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하루 종일 멍한
표정으로 있기도 한다.
이 단계의 우울함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자기가 죽으면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발생하는
반작용적인 우울증과 친구, 가족, 애인이나 소중한 물건들을 잃는다는 생각에 발생하는 예비적 우울증으로 나뉜다.
우울함을 예민하게 받지 말고, 최대한 부드럽게 받거나 혼자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수용(Acceptance)
이 단계에선 우울하지도 않고 활기차지도 않으며,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좋은 기분인 것은 아니고, 이때까지 겪었던 모든 감정들 때문에 지친 것이다.
환자는 눈에 띄게 약해지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려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고 말수가 줄어들며, 침묵이 소통을 대신하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그 전 단계들을 거쳐왔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이 끝까지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위로를 받기도 하며, 역으로 자신이 죽은 후 남겨질 사람들의 슬픔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이 듦과 죽음의 준비’
죽음에 대하여
“의학적으로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는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두 가지 질문을 만나는 것이었다”며 “죽음에 대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한 번
죽음은 정해진 것(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돌아가는 것(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You turn men back to dust, saying, "Return to dust, O sons of men."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는 사랑(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Then I heard a voice from heaven
say,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Yes," says the Spirit, "they will rest from their labor, for their
deeds will follow them."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 죽음은 마지막으로 전도하는 기회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웰다잉
사람들은 되도록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삶의 과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통로이자,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반갑고도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
하늘나라에 가는데 순서가 없듯,
웰다잉에 대한 묵상은 노년의 삶에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젊은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누구나 매일의 삶을 믿음으로 잘 살아내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믿음 안에서 이 땅에서 주어진 마지막 시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웰다잉과 웰빙의 삶을 보여주는 모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죽음
임종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 경우,
예측 가능한 경과를 걸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사망하는 경우,
특정 질병으로 주기적인 위기를 마주하다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 경우가
30%”라며 “20년 넘는 시간 동안 말기 환자를 돌보며 임종과정에 독특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래 돌아가시는
분이나 시간을 두고 돌아가시는 분이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치 필름, 파노라마가 돌아가듯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마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며 히브리서 9장 27절을 언급했다.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죽음이란 완성의 과정이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죽음, 부활· 하느님 나라의 삶 위한 전초적 단계 수난 죽음 부활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은 출산에서부터 죽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출발하여 이승의 종결점인 죽음을 향해 매일 한 발짝씩 다가가는 과정에 있고, 이것이 끝나는 순간이 죽음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397~401).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다(히브리서 9:27).교회는 죽음이 인간의 원죄로부터 왔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교만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원죄를 통해서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했으며 인간의 죄의 결과가 바로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위한 하나의 전초적 단계이며 동시에 신앙으로 이끄는 요소다.
그래서 세례로 시작된 새 생명이 완성되며, 영원한 생명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재천명한다. 공의회는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사목 18항)며 “믿음이 부족하면 죽음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21항)이라고 했다. 죽음에 관한 가장 최근 교회의 입장은 1979년 신앙교리성의 ‘종말론의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한 서한’(1979)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 “죽음은 인격적이며 영성적 위격인 인간에 관한 사건이며 인간 전체에 관한 사건으로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인간 행위의 문제”라고 했다. 교회의 이같은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참 생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로 인한 부활의 희망 뿐인 것이다.
죽음과 정면 대적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그리스도를 이겼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죽음은 없다고 선포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이제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긴 방법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결국 그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 예를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불행이며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수많은 순교자들이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고통과 죽음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영원을 향하기보다는 현세의 풍요로운 삶을 꿈꾸는 인간들에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 자신을 죽이고 생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얻을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의 희망임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죽음은 없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교회는 전례를 통해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탁월하게 재해석해내고 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 ■ 임종자의 수호성인들 어린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수호천사가 항상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천사들 중에서도 으뜸인 세 대천사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이라고 부른다. 가브리엘이 전령이고, 라파엘이 의료, 순례자와 관련한 천사라면 미카엘은 임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미카엘 대천사는 외경에 더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천상군대의 장수, 그리스도인의 보호자, 특히 임종자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요셉 성인도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다. 노동자, 가정, 동정녀 등의 수호자로도 꼽히는 요셉 성인이 특별히 임종자들과 연결되는 것은 요셉 성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성경에 요셉은 예수 탄생시기와 성장기에만 잠깐 나타난다. 예수 공생활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 따라서 요셉은 성모와 예수님의 간호를 받으며 마지막 죽음을 맞았을 것이고, 초기 교회부터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다른 어떤 성인에게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은혜로 여겨졌다. 이밖에 동정 순교자인 성녀 바르바라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이들의 수호자다. 무엇보다도 임종을 생각할 때, 성모 마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죽음 앞둔 이들을 한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분, 바로 성모 마리아다. ■ 죽음 묵상에 도움을 주는 성구(聖句)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당신께서 제 목숨을 죽음에서 건지시어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하심입니다(시편 56, 14). ▲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주 하느님께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네(시편 68, 21). ▲ 주님께서 나를 그토록 벌하셨어도 죽음에 내버리지는 않으셨네(시편 118, 18). ▲ 주님을 경외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잠언 14, 27). ▲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 4).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 10). ▲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 10). ▲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 14). ▲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 51).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죽음을 준비하기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어느 집에 종이 한 사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너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보이거든 지팡이를 그에게 주라’고 분부했다고 합니다.
종은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몇 달 후에 주인이 심한 병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주인님, 세상을 떠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라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은 ‘아니, 그거야 아직 준비하지 못했지’ 라고 답했답니다.
그러자 종은 ‘아니, 사람들이 하루 여행길에도 완벽하게 준비하고 떠나는 법인데 영원을 위해 준비한 것이 없어요?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 보았네.
자 여기 지팡이가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주인님이니, 여기 이 지팡이를 가지세요’ 라며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남보다 자신이 먼저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가 두 개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단어는 죽음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의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한사람도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가지고도 죽음의 때가 올 때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착함도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다윗은 『죽음과 나 사이는 한 발자욱 거리밖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But David took an oath and said, "Your father knows very well that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and he has said to himself, 'Jonathan
must not know this or he will be grieved.' Yet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live, there is only a step between me and death."
둘째 단어는 심판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 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를 숨기고 피하여 다닐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목사님의 호소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을 대면해 일생의 죄를 다 내놓고 계산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1.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뤼지옹'(Illusion)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있을 죽음의 순간을 잊고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요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진실을 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업적만을 좇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려고 선거유세차 달라스 시에 갔을 때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다가 괴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누가 그 머리로 총탄이 꿰뚫고 나갈 줄 알았겠는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달라스 행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도 미국 전역에 선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예비선거에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나아가다가 켈리포니아의 어느 호텔에서 자기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통령이 될 꿈에만 부풀어 있었을 뿐 그의 출마가 저승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이상한 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종은 아침마다 첫 인사를 하면서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꼭 기억해야 될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는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지난 번 미국 9.11 테러사건 때, 참사를 당한 6,000여 명의 사람들도 그 날 아침 자기들이 죽으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갑자기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음은 흔히 찾아옵니다. 자동차 사고, 비행기 추락, 치명적인 싸움, 전쟁, 홍수, 등등....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내가 용서해 주었는가. 또한 내가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했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생애의 한 부분인 사람들과 내가 화평하다고 느낄 때, 비록 나의 죽음이 큰 슬픔을 불러올 수는 있으나 죄나 분노는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리더쉽과 동기 연구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빈 S. 샤르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의 이름이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합니다. "내가 죽을 때 누가 울어줄까?" 라고 하는 책입니다. 아주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그는 백 한 가지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 책에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너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기뻐했단다. 그런데 네가 죽을 때는 많은 사람이 울겠지만 그때 네 자신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한다.’ 대단히 중요 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지 아니하면 베풀고저 할 때에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신학교교수가 학생들에게 “내일 죽는다”라는 가정을 하고 유서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재산 분배에 대해 써 놓는 그런 유서가 아니라,“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중요하고 유일한 말이 무엇이냐”라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마음대로 살았던 많은 날들이 덧없이 느껴집니다. 후회하고 회개해도 나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삶을 최대한 활용해서 알차게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려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러 주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첫째,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둘째, 육신의 움직임이 가능할 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셋째,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필요 없는 것, 어쩌다 필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겠습니다. 넷째, 세상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섯째, 죽을 때 웃으며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하겠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순교나 위대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만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아마 내가 남길 유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요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천년만년 살 줄 알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조만 간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대통령한테도 찾아오고 재벌한테도 찾아오고 튼튼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요사이 사극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도 죽었고, 고려 태조 왕건도 죽었고,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했던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생하는 존재이며 또 영생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하는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화대학의 최화숙 교수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란 책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의사의 사형선고 진단을 받고야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인데 죽은 다음에 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이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하며 부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악하게 굴더니 드디어 죽고 말았구나 하고 속시원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디 정직하게 살고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도 베풀고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함이니라’ (잠27:1)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큰 풍년이 드니까 곡식을 다 쌓을 곳이 없어서 곡간을 크게 짓고 곡식을 많이 쌓아두고 말하기를 ‘영혼아 여러 해 쓸 양식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했는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고 그 영혼을 그 날 밤에 데려갔습니다.(눅12: 16- 21) 집도 땅도 저금 통장도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에 보면 사람이 죽을 때는, 장갑을 끼었다가 벗을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에 현세와 내세를 동시에 보며 신비의 세계를 말해준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던 17세 난 소년은 죽기 직전에 ‘아!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냐’ 고 엄마에게 묻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니까, ‘큰일났다.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 고 걱정을 하다가 ‘엄마, 나는 먼저 천국에 갈테니 엄마는 나중에 오세요’ 하며 천사 같은 얼굴로 세상을 떠나더랍니다.
김연준 씨란 분은 세 회사를 경영하는 분인데 간암 말기에 접어들면서 온 몸이 굳어져 말을 못했고 누워서 무릎을 세운 채 와들와들 떠는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했더니, ‘지옥에 갈까봐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온 몸이 풀리면서 화평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빛이 보인다’고 하면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2.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된 아들 넷을 둔 한 어머니가 병상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상에 둘러 서 있는 아들들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둘째, 셋째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고 했으나 막내아들에게만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 하시고 저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시나요?” “얘야, 너의 형들은 머지않아 저 좋은 천국에서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단다. 그러나 너는 이게 마지막이란다” “왜요?” “엄마는 너를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너는 끝내 네 멋대로 살고 있다. 헌데 어떻게 너와 내가 만날 수가 있니? 그래서 네 형들과는 굿나잇이고 너와는 굿바이란다” 막내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입니다.
“어머니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도 굿나잇 키스를 할래요. 엄마, 굿나잇”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은 죽음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곡식 알갱이가 땅에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 십 배, 수 백 배로 다시 살아나는 것같이 사람이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부활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되고 심판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평생 지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고 그 지은 죄만큼 고통을 끼며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선한 일’이란 사람 보기에 착한 일,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며, 하나님이 가장 악하게 보시는 일은 마음이 녹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악한 일은 없습니다.
D. L. 무디(Moody)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젊은이들은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유독 한 청년만은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디 선생님, 나는 서부로 가야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몇 일 후에 이 젊은이가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병원에 찾아가서 기도해 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더니, ‘무디 선생님, 나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서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몇 일 후에 건강을 회복해 가지고 찾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무디 선생은 다시 어깨에 손을 얹고 간곡히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무디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무디 선생님, 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돌아와서 결심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젊은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무디의 마음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 날 밤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깨어 일어나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더니, 그 청년의 부인이 울면서 ‘무디 선생님, 빨리 좀 저희 집에 가 주세요’, ‘내 남편이 몹시 아픕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무디는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 마지막 거절의 말을 했습니다.
이미 위험선을 넘어 섰습니다.
내가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울면서 간청하기 때문에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그 집 계단에 올라가는데, 그 청년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번쩍 뜬 채 의식을 잃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Too late! Too late!)’ 하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꼭 쥐어주며,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를 따라 하라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하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정신을 못 차린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바로, 오늘, 지금이 구원받을 기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회의 문도 닫히는 때가 옵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없어지는 때가 옵니다.
계속 거절하면 성령의 역사도 끝나는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에 보면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생명의 책들이 있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책이 있는데, 생명책과 행위의 책들입니다.
생명책은 단수로 되어 있고, 한 권입니다.
이 책은 천국의 호적과 같은 책으로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고, ‘행위의 책들’이란 예수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들인데 각 사람에 하나씩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상급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천년 왕국 시대가 지난 후 둘째 부활을 얻게 되는데 영원히 죽지도 않고 고통을 받기에 합당한 몸으로 부활하며, 평생 지은 죄를 다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아 형벌이 결정된 후 둘째 사망 즉 불 못에 던지워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확실히 영접하면 이 순간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아무 때 죽어도 낙원에 갔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한 몸과 낙원에 있던 영혼이 결합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이 후에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 생활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지 아니하면, 반드시 둘째 부활을 얻어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에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 준비할까요?
그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많은 나라에 가 본 경험을 갖고 있던 영국군장교가 어느 날 친구들이 모여서 경험담을 말해달라고 해서 여러 나라에서 본 것들을 얘기 해주고 나서 그의 말에 홀린 청중에게 말하기를,『나는 이것들보다 더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주님 앞에 선후 5분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들의 심판
이 심판은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심판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지상에 사는 동안 행한 일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에 대해서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위한 심판
이 심판을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사람들은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상에서 행한 모든 행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형벌을 받느냐를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어느 날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될까요?
세상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라. 네 돈을 남에게 주라. 빚을 갚으라. 그러면 천국에 간다』고 세상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해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좀 더 바르게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전 3:2-3)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이 2013년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변호사 사무실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인종 차별 정책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는데, 그 일로 27년간이나 감옥에서 옥수수 죽으로 연명하며 매일 채석장에서 노역하고, 간수들이 뿌려 대는 똥오줌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출옥 후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임기를 마친 1999년에는 "내가 연락하기 전엔 내게 연락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 협상 중재, 빈민 구제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에게 존경받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 "난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노인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부족함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120세를 사는 동안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은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외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우리 모두는 한 번은 죽는 존재입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것을 하겠습니까?
죽음을 망각한 삶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아는 삶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했던 교만을 꺾으시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오늘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종말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죽음의 철학 : 삶과 죽음
죽음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어서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끝으로써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넘어선 단계다.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헤겔(2005)은 “신체의 죽음이야 말로 개인(개체)이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노동”이라고 했다.
모든 개체가 도달하는 보편성이 죽음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것을 알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라”고
했지만 누구든지 가끔은 좋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죽음을 초월하려는 것이 인간의
현세적 목표다.
기쁨, 초월적 힘,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실존이다.
살아있는 사람 모두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어도 영혼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죽음의
철학(philosophy of death)은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 다는 데서 출발한다.(Kamath, 1993), 다뤄지는
주제 역시 다양하다.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들, 즉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기면서 느끼는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죽음에 대한 형태와 범위는 무엇인가?
아니면 죽음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이 망라된다.
사실상 죽음보다 더한 보편적인 주제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지만 죽기를 두려워한다. 실제 우리 생활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사회규범과 윤리에서 다뤄지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전문가로써 살기는 어렵겠지만 죽음과 죽어감(dying)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빼놓을수 없는 대상이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삶의 현실적 문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인생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 말이다. 죽어감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최대의 관심 대상이니 그렇다. 철학자 혹은 철학자가 아니든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 그동안 죽음에 대한 논의가 은유적이거나 금기시되는 주제였기에 가장 취약한 문제이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모르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배울 수 없다. 인간으로써 최대 관심은 건강과 생존 및 죽음 이후의 내세와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 죽음이 왜 철학의 주제인가
죽음은 철학의 주제다. 죽음의 철학은 자연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다.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진실 되게 살아가도록 돕는 학문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철학적 문제는 논쟁의 세계다.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특별한 실존으로써 ‘나’를 인식하는 장대한 존재이다.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인류, 이성인)다. 인간의 동물이 아닌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인식 능력에 있다. 자기 인식 없이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생명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는 것, 다만 종(種)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Singer, 1994) 인간은 정신적 존재(mental being)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짐승들도 자신들의 고유 방식으로 의사소통하지만 이성적 정신적 존재는 아닌 것이다.
독일 정치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인간의 실체는 동물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체라고. 그는 인간사고가 세계정신 자체의 사고로 전제하고 현실이 곧 이성임을 강조한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성의 눈으로 철학하기를 강조한다. 이성은 곧 정신으로써 이는 또한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비앙키, 2014) 또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필립 아리에스(Aries, 2004) 역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삶의 완성이라면서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죽음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이해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주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시작되는 삶의 동반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해왔다. 그런 점에서내 우리의 몸과 의식이 깊은 침잠에 깨어나야 한다. 죽음을 잘 관리하고 맞이하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꾸준히 찾아내 대처하는 일이다. 삶이 펼쳐지는 시공간 속에서 몸과 마음, 그리고 지각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이 건강한 삶이다. 영혼의 질병을 잘 치유하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 노년기의 지혜다.
이와 관련해 죽음의 철학에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가 찾아보자.
첫째,
죽음의 의미(meaning)를 아는가?
죽음은 각자 독특한 형태를 갖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부여했던 조건들이 상실
돼가는 과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 건강이 약해지면서 기침이 잦아지고 가래가 끊는다.
앉고 일어날 때도
힘들다.
결국 생명의 끝을 맞는다.
죽음의 끝은 개인 자신의 종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속에서 ‘지금-순간’에 물질적인
존재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혼의 문제까지 깨닫는 일이다.
둘째,
몸의 소멸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가?
몸과 죽음의 관계로서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그것은 다른 이의 타자화 된
죽음과 주체적인 ‘나’의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죽음에는 또 죽임을 당함(타살됨)과 스스로 자연 순리에 내 맡기는
죽음(순명)이 있다.
죽음의 형태는 자연사 뇌사 병사 안락사 자살 타살 변사 의문사 고독사 사형 등 다양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 그리고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동물들, 모두가 죽음과 동시에 해체된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일이다.
셋째,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 허무함(무로 돌아감)과 같은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죽음에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을 어떻게 멀리할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하고 심한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물론 죽는 그 순간 육체와 뇌는 죽게 됨으로 죽음 자체는 인식 또는 학습 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느낄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근접한 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더 잘 살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넷째,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
후회(regret)는 우리 생활과정에서 실패한 것, 낭비한 것, 해보지 못한 것 등 다양할
것이다.
죽음 앞에서 후회는 눈물로 변한다.
인간이기에 후회하는 것이다.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2015)는 ‘죽을
때 후회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 △지금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것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말인즉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이 잘 살아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의 질이 무엇인가?
삶의 질과 죽음의 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잘 보이기 마련이다.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면 잘살지도 못한다.(Critchley, 2008)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 없이 가족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좋은
죽음이고 세상과 화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오는 방식은 매우 비극적이다.
치매 등을 앓다가 죽으면 가족들에 대한
영원한 수치가 된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마지막 임종단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을 완화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다.
여섯째,
생명/죽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무엇인가?
죽음과 관련해서 신체에 대한 병리의학적으로 치료하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다.(Morhaim, 2012)
그러나 장수사회에서 죽음과 관련된 윤리논쟁(자살, 장기기증,
안락사 등)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 상태(뇌사상태)에 있는 삶에 대해 죽음을 재촉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막아 웰다잉을 유도한다는 법안들도 마련되고 있다.
무리한 생명 연장 때문에 존엄성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곱째,
죽음 관련기술의 발전이 무엇이고 어느 수준인가?
노화문제와 관련된 줄기세포 복제 유전자치료 인간 게놈 염기 서열 조작을 통한
생명 연장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수명연장술, 냉동보존술, 바이오 산업 등 생물 의학적
영역에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나는 언제까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갖게 한다.
흔히 인생의 유한성과 불멸성의 논쟁은 끝이 없다.
유한성은 물질에 기초한 것이고 불멸성은 정신(spirit)의 개념이다.
육신은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된다는 개념이다.
인간 속에 생명의 본질인 불멸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다.(Fischer, 2013)
이러한 불멸의 희망은 종교가 그러하듯이 영혼의 존재를 반영한다.
사이몬 크리츨리(Critchley, 2008)는 내세에 대한 믿음, 불멸에 대한 갈망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의 열망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신체는 사유하는 존재지만 우리 삶은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른다. 다만 타인들의 죽음을 통해서
막연히 이해 될 뿐이다. 그런데 매우 제한적이지만 우리가 죽으면 소멸(無의 상태), 영혼 정신의 계속성(부활), 불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환생, 윤회설 등을 알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 불교 경전의 능가경(楞伽經)과 금강경(金剛經) 등 모든 경전들이
죽음이후의 다른 세상을 얘기한다. 종교적 믿음, 영성, 수행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천당 혹은 지옥에 갈수 있다는
교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는, 지속적인 정화가 필요한 존재들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정말
큰 질문들이다.
죽음, 죽어감에 대한 철학적 이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우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의 궁극적 개념들조차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죽음의 철학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잘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소멸의 공포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죽음 철학의 과제다.(Critchley, 2008)
현자들은 죽음을 영적으로 해방되는 재탄생(환생), 부활을 통해
영생의 길로 나갈 수 있는 여정으로 설명한다.
말인즉 죽음을 완전히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수행을 요구한다.
죽음과 영혼의 상실은 생명의 에너지가 단절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한 평생 통찰과 깨달음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에 신경 좀 쓰라”고 권면하지 않았던가.
죽음이라는 예정된 시간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삶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 죽음의 설교자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죽은 다음의 생이 없다는 철학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초월(형이상학)보다 일상을 하늘 저편 대신 땅위의 삶을 더 강조한다.
내가 없는데 천당도 지옥도 없다면서 내가
절대유일의 존재가 아닌가 묻는다.
어떤 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듯 죽음 앞에서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다는 반응이다.
공자 역시
“삶에 대해서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가“라며 죽음의 문제를 적극 다루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는 다양하다.
죽음의 의미, 영혼불멸에 대한 철학적 주제는 끝이 없는 논쟁의 세계인 것이다.
까다롭지만
죽음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적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논리실증적으로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한다.
죽음의 본질, 내세로의 영원가능성, 죽음의 대한 수용태도 등 '죽음학'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피노자의 작품들에 이어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잘 나타난다.
O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죽음
죽음의
설교자 중에서 우선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가 있다.
그는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실존적 의미에서 인간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해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현존재란 다름아닌 죽음을 향한 존재다.
죽음이란 자신의 실존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상태다.
이는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을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로써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국가 부모 성별 출생일을 택할 수 없이 태어났기에 자기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것, 어느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분석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음 또는 죽어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죽음의 현상에 대해서도 인간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being-towards-death)입장에서 접근한다. 이때에 현존재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며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찾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의 관심은 현존재인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yet-to-come' death)의 상태, 즉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기 고유한 본래적인 전체적인 삶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관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때 죽음은 실존으로서 다가오게 된다는 논리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속에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죽음에서는 타락(fallenness), 내던져짐(thrownness), 죄(guilty) 등의 문제로 설명하면서 단순한 존재가 아닌 인간의 현존재(Dasein)을 설정한다.(하이데거, 1998) 그는 현상학적으로 죽음에 대한 종교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존재와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인간실존을 내세운다. 인간의 존재를 종교적으로 신 또는 불멸에 관계없이 순수 형상으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죽음이 저 멀리(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늘 생의 바로 옆에 거리 없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실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음은 목격 될 뿐 자신은 결코 경험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죽음은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존재한다는 것, ▷죽음에 대한 경험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늘 인간에게 있어서 현존재일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즉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후 지금까지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 속에 살아갈 뿐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죽음에 대한 근본적 성격 때문에 인간은 ▷원치 않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때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점, ▷인간은 불안을 부정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외면하려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써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까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으면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 자체를 전할 수 없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 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죽음이 멀리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직은 아니다”라며 살아갈 뿐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개념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주체적 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비주체적, 비존재 상태로 도피하려는 태도다. 전자는 최종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후자는 죽음은 ‘세계-내 존재’로부터 분리되는 소멸성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자기존재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불안, 허무함, 무화(nothing)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존재들이다. 즉 ‘죽음에 임하는 존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나약함을 지적 하고 있다.
O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시간차원에서 경험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말한다. 실존적 분석이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많은 과오 속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칼 야스퍼스(Jaspers)는 하이데거와 다르게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말하지 않는다. 존재(dasein)의 죽음에서 죽어가는 존재를 넘는 초월성, 궁극적인 내세,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하는 존재(existenz)로서의 실존적 개념으로써 비인격적인 신을 상정한다.(Filiz, 2008)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는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야스퍼스는 인간이 신의 품에 안기게 된다고 함으로써 유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을 취한다.
아울러 인간은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 우연, 투쟁(다툼), 고뇌, 죄책(부채)이다. 죽음은 존재로서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philosophy of Existence)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겪는 한계상황은 고통과 죽음의 문제다. 한계상황은 어떤 벽(사회제도 규범)에 맞서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이런 한계상황(critical situation, Grenzsituation)은 인간의 ‘세계 내 존재’(being-in-the-world)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안정감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죽음은 삶의 적이다. 생명은 본질에서 있어서 창조이고 자발성이지만 사실 생사문제는 어떤 예정이나 예상도 허락 하지 않는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를테면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육체의 죽음은 절대 끝난다, ▷죽음을 회피하고 무관심 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이 불가능한 한계상황에서 좌절하며 생존해 가는 존재들임을 말한다. 즉 야스퍼스는 인간이 늘 필연적 한계상황에 늘 놓여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한계상황인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숙명적인 한계상황을 극복 못하고 오히려 이런 한계상황을 감내하며 세상에서 버텨내는 것이 실존의 본질이다.(Filiz, 2008)
특히 야스퍼스는 죽음을 인간존재의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보고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우선 객관적 사실로 특정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이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피 할 수 없는 상황 즉 실존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죽음은 고유한 것, 남과 바꿀 수없는 것,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한계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고 초월적 능력을 갖는, 즉 죽음을 모르는 불멸(deathlessness)의 실존임을 강조한다. 죽음을 허망한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 자기의 한계상황을 인식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은 죽음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영원성이다.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한 비물질적 자유 그자체이다. 죽음을 초월해서 영적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 실존을 초월하여 신에게 다가가는 것, 신에 의한 초월,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를 때 사람은 비로써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서의 실존’ 이 주어진다.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며 이는 종교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죽음은 인류역사 이래 중대한 의미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인간의 죽음의 필연성과 비존재 개념을 이해 할 것을 요구한다. 야스퍼스는 실증주의적 과학과 지식에 대한 과신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초한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문제를 실존철학이라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 야스퍼스는 ‘자기 실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특히 ‘자기실존’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과 관련돼 있다. 결국 ‘나’는 실존적 불안, 소외와 고독, 죽음의 문제들을 극복해 가는 존재로써 여기에는 자기인식, 정체감, 타인과의 관계 찾기 등을 모색하고 재정립 해 가는 ‘나’를 강조한다.
덧붙이면 야스퍼스의 실존이라는 의미는 객관적 존재, 자아존재, 그리고 존재자체를 말한다. 여기서 ‘객관적 존재’란 사람 짐승 건물 등 모든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자아존재’란 나 자신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옳고 그름의 이치를 깨닫는 자아를, 그리고 ‘존재자체’란 현존재에 관계하는 초월적 시원적 본질로써의 존재를 말한다. 이들 세 가지 형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 묶여져 결속되는 실존을 구성한다. 말인즉 모든 존재는 자체만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사랑받아야할 존귀한 존재들이다.
결국 야스퍼스는 죽음에 대한 포괄적이고 실존적 개념에 매달리지 않고 죽음에 직면해서 겪는 다양한 심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떤 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진다는 입장이다. 한계상황에서 자기가 유한하다고 인식 할 때 초월자(또는 포괄자, Periechontolgie)와의 실존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죽음의 사실을 자각할 때 현실의 삶을 더 돌아보게 하고 본래의 자기를 주체적으로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써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끝)
<참고자료>
비앙키, 올리비아(Olivia Bianchi, 2014), 『헤겔의 눈물』, 김동훈(역),
서울: 열린책들.
아리에스, 필립(Aries, 2004),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역), 서울: 새물결
오츠 슈이치(2015),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황소연(역),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하이데거, 마르틴(1998), 『존재와 시간』, 이기상(역), 서울: 까치.
헤겔, 게오르크 빌헤름 프리드리히(2005), 『정신현상학』(2), 임석진(역),
서울: 한길사.
Critchley, Simon(2008), The Book of Dead Philosopher, New York: Random House.
Filiz, Peach(2008), Death, Deathlessness and Existenz in Karl Jaspers' Philosoph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Fischer, John Martin(2013), "Immortality", in Bradley, Ben, Fred, Feldman(2013),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Deat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336-353.
Kamath, M.V(1993), Philosophy of Life and Death, Mumbai:
Jaico Publishing House.
Morhaim, Dan(2012), The Better End: Surviving(and Dying) On Your Owen Terms in Today's Modern Medical World, Maryland: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Singer, Peter(1994), Rethinking Life & Death: The Collapse of Our Traditional Ethics(2nd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