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절기(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추수감사절,


대림절(Advent)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에는 '오심' 혹은 '도착' 외에도 '모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이 땅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 상승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고, 반면에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은 한 인간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마침내 신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정점, 즉 신의 자리에 올라 그는 거기서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영광을 거슬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의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의 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요, 성탄의 복음입니다.

진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1)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약하고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병들고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시지 않고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대로,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입니다(이사야 9:6).

대림절(Advent)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성탄(聖誕)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린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기다림을 뜻하는 보라색이다.
대림절은 주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 4세기 이후부터 정식으로 지켜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의 그레고리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지키는 의미의 절기로 확대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림절 첫째 주일날 켜는 촛불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과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그분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보아야 한다.

대림절 둘째 주일날 켜는 촛불 : 회개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방해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는 의미로 회개의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낸다.

대림절 셋째 주일날 켜는 촛불 : 사랑과 나눔의 촛불 

주변에 상처 입은 이웃들, 배고픈 이웃들, 외로움에 쓸쓸한 이웃들에게 성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섬김,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 자 위로, 사랑의 선물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 보도록 하자.

대림절 넷째 주일날 켜는 촛불 : 만남과 화해의 촛불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웃을 초청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본다. 

대림절의 네 가지 의미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세상에 전한다는 의미.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한다는 의미.
셋째,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몸을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고 기다린다는 의미.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
우리 죄를 회개, 자백,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순종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예수 탄생의 예언과 성취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회적 거리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가정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대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가정은 대면 생활을 통하여 서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로 잘 알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옷이 없었다.


옷이 많다는 것은 뭔가 감출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두 벌 옷과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부의 상징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도시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이 없었다.


주방이 없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옷과 집과 음식이 필요 없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예수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 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5-8)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의 삶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은 가정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고 그 가정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먼저 가정에서 확인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에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터에 나가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정에서 회복되고 무장한 후 다시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가정의 에덴동산

에덴동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옷이 없었습니다.

주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옷이 늘어났고 주방도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눈만 뜨면 배가 고플 때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냉장고도 필요없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아혀 대면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일터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증거

 1. 여자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실 것을 예언(창 3:15, 사 7:14, 미 5;3, 마 1:23, 눅 1:34~3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2. 아담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가죽 옷 : 십자가에 몸이 상하여 죽어 주심을 예표(창 3:22)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스겔의 증거


1. 세상의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예언(겔 37:1~28)


2. 평화의 왕으로 예언(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 화평의 언약(베리트 솰롬)

①. 하나님만이 계약의 주체가 되어 계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②.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핵심이 된다.

③. 물질적인 것이나 상호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언약 성취는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BC 538년에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예레미야 23:5, 33:14∼16, 26)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예레미야 33:26,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3. 선지자로 예언(겔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4. 공평하실 것을 예언(겔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성탄을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대신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세속 문화에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성탄의 의미는 축제의 한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산타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탄절의 주인이 2000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왜 이땅에 말구유에 오셔야만 했는가?


예수탄생의 복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예수탄생의 복음을 가진 자인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탄생의 복음 증거자로 만세전에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일컬어서 택정함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로마세계에 있어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일개 기구와 같았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가 로마를 연구하는 중에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가구, 말할 줄 모르는 가구


호미, 낫, 삽,

둘째 가구, 말을 못하지만 움직이는 가구

말, 소, 나귀 등

셋째 가구, 말을 하는 가구


노예를 가구로 봤기 때문에, 말을 하는 노예를 가구와 같이 취급한 사회가 로마사회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친히“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함은 타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는 것이요, 예수탄생의 복음을 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종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선지자들로 말미암아서 그의 아들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요,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라는 단어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찬송 122장 4절에“육신을 입고”이렇게 찬송을 하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되요.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입다’라는 것은 옷을 입듯이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이 들게 하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일컬어서 이단이 주장하는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인성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어요. 왜?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참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어디서 나오셨냐?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요, 신비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죄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될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성을 가지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디에서 들어나냐 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분이시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들과 같이 그냥 흥청망청 성탄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성탄절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깨어서 근신하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다른 날들도 1년 365일 우리의 몸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 성탄의 계절에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는 부르지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인 이 몸을 가지고, 육적인 일에만 육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쓴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 라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입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하면‘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7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셔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말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나심을 축하면서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예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은혜로 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났고, 복음증거하다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어도 거기서 찬송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기뻐하고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지지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와 여러분 중에 아직도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눌려 지내면서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된 심령들이 잇습니까?

 

저와 여러분 내 맘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심령이 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들이 얻는 호의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주요하고 기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그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에 평강이 없고, 은혜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써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잖아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못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계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질병하나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감옥에 있을 때에도 감사했고, 무슨 일이 주어지던 지간에 노동을 하면서도 감사했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감사했다”고, 감사한 생활이 감옥 생활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정말 내 삶속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데, 내 맘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없고, 평강이 없으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살롬?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어요. 삭막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들어가면 푸르른 숲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복음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순절(Lent)
사순절(Lent : 四旬節)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5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http://www.dmch.kr/bbs/view.php?id=column_new&no=78


독일교회력에 의한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의 이름 

1. 사순절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입니다.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사순절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입니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4. 사순절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ere)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 사순절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rum)입니다.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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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 원

 

사순절을 뜻하는 Lent는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의 ‘봄‘을 의미하는 Lang에서 유래했으며 독일어 Lenz와 같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참회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AD 325년 니케아 총회(council of Nicea) 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한 참회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제기(劑期) 즉 부활절 전 6주간으로 거룩한 금요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는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런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

 

2. 시 기

 

올해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13일 수요일부터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즉 ‘속죄일‘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재(Ash)를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한다. 전년도 종려 주일에 사용한 종려 가지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두었다가 이 재(Ash)를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감람나무의 재나 숯덩이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날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까지 참회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금식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며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40년 간의 광야 교회의 생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광야의 40일간의 금식, 시내산의 모세의 40일 금식과 십계명, 무덤 속에서 40시간을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 주님의 사역기간,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으로 준비했다.

 

3. 유 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40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하루 한 끼, 또는 저녁 식사만 허락하되 육식은 물론 생선 정도의 육식까지도 금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달걀이나 우유 등의 음식까지도 규제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금식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와서는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으나 의식적인 금식보다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한 내적인 자기 정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접근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며 주님을 본받는데 부적합한 집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외형적인 형식만을 닮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적인 의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한 성도들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이 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이들을 추천한 보증인들과 함께 두 주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금식과 기도로 죄의 회개와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4. 관 습

 

1. 금식 기도

요즘 와서는 우리 개신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마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7주 동안 금식하게 하였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금식하게 하여 의식화되어 내면의 깊은 뜻이 퇴색한 것은 인정하나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 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작금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들이 신앙의 대 선배들이신 모세(출 24:18; 신 9:9; 10:10) 엘리야(왕상 19:8), 그리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마 4:2; 눅 4:1-2)의 40일 금식에 대한 믿음의 자세로 이 기간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살피며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가며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절제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죄악을 발견하여 자백하고 사함 받는 기회로 삼아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구제와 자선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는데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확산되어 수개월 동안 행해지는 유럽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다.

 

4. 사순절 행사

그러면 교회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첫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결하게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죄 자백에 주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금식함으로서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 오락을 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모아진 금액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원래 사순절이 부활절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원자를 준비시키는 기간인 것을 감안하여 이 기간 동안 성경공부에 빠지지 말고 세례와 학습자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전도를 함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친구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는 일도 바람직하다.

 

1. 새벽기도회

2. 금식 기도회

3. 주일 시리즈 예배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다.

첫째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둘째 주일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셋째 주일은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넷째 주일은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 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다섯째 주일은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여섯째 주일, 즉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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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四旬時期, 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 라틴어: Quadragesima, 영어: Lent)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의 이름은 성서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40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테사라코스테'(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절 전 40일(사순,四旬) 기간 동안 지킨다. 기독교에서 동방전통과 서방전통의 사순절의 차이가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매주간 5일만을 기간으로 여기고, 토요일과 주일을 40일 날짜에 포함하지 않는다. 부활절 이전 8주간이 사순절이 된다. 서방 기독교인 천주교에서는 주일을 포함하여 사순 시기가 성주간 목요일까지이다. 40일 날수는 전례대혁 후에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킨다. 부활절 이전 6주와 4일이 사순절이 된다. 즉,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시키고 날수를 세면 40일이 된다.[1]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부활절 이전에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도 한다.

한국 교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이며, 개신교인 대한성공회루터교감리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그리고, 한국 정교회 등에서 지키고 있다. 또한 개신교 계통의 장로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경우 사순 시기 대신 주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의 의식 색깔은 자색이며,다만 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붉은색을 사용한다。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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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목회서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감사의 계절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파트리스 공동체의 일군들을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모든 공동체 가족들이 주님의 품안에서 강건하여 오늘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한아름 상품권($20)을 보냅니다.
비록 작은 나눔이지만 서로 나누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가 회복하여 더 아름다운 나눔과 만남을 함께 기도하며 파트리스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주후 2020년 11월 16일(월)
파트리스교회 담임목사 이승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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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2020년 11월 22일(주일)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은 이제껏 지켜오던 추수감사주일과 전혀 다른 주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예배가 금지되고 아직도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주로 사람의 계획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염병균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결단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결단해 봅시다.

감사해!
사랑해!
미안해!

아마 이 세 가지 마음만 회복할 수 있어도 굉장한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는 얘기 다 알고 계시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라워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매스터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남미로 가려고 했던 가장 큰 동기는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이지요.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를 아십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찾아 북미로 찾아온 그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물질적인 동기 때문에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 그 후예들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이중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만 선택함으로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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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창세기 18:16-21) 

‘친구’라는 말은 참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 가깝게 지냄, 허물이 없음, 비밀이 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옛말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가리킵니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는데 조금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성어인데요.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친구입니다.

 포숙은 마음이 넓고 포용적인 친구입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 .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 .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으리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하자고 제의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보가 더좋은 친구없네(두번)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다할 때까지(두번)

 여러분 여러분의 참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되기 쉽고 오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정욕으로 가정 파국을 맞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때문에 출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시장에서 공동묘지에서 서당가로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좋은 교육의 환경에서 교육시킬려고. . .

 그 당시부터 좋은 학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시고 계십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한 권력, 유명한 사람과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될 경우 세상적으로 가깝게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약2:21-23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의 관계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자신은 노령의 나이 75가 되어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녀가 있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옳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고’ 그때 하나님은 너무기뻐하시면서 ‘우리 친구하자’하시고 친구 제의의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해 주시면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친구 제의 요청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셔야 합니다.

 1. 참 친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습니다.

 매일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들어간 지 2,3분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무슨 일로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십니까?”

 “그야 기도하고 나오는 길이지요.”

 “기도라니요 ?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조금 수상쩍다는 듯이)

 “저는 길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

 약 한 달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온 이후로 병실에서는 늘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께서는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모두 다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 사람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방문객이라뇨 ? 도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지. 정오만 되면 늘 내 침대 곁에 와 있는걸.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신다우. ‘여보게 짐 ! 잘 있었나 ? 나 예수야!’”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기쁨을 한 아름 내게 안겨 주고 가시지. . .”이 할아버지는 늘 하나님을 친구로 삼고 사는 할아버지였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참 친구셨습니다.

 창13:14절에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물좋고 기름진 소돔 땅을 택해서. . .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롯이 떠나고 난 외로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두렵기도 하고. . .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올케 여기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와같이 오십니다. 외로운 자리에 오십니다.

 허전하고 텅빈 것 같은 그 자리에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는 것입니다. 옳다고. . . 신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삶 속에 늘 찾아오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 친구는 비밀이 없습니다. (16-21)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못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과 풀이 좋은 소돔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것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로 마음이 허전, 섭섭했습니다. 하나님은 허전하게 서 있는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3-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주리니 영원이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말씀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넘치는 대접을 받은 하나님과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할 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고 후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 친구는 급할 때 도움이 됩니다(22-33)

 22절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중보하며 간청합니다.

 보이는 대로 소돔을 선택한 롯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북쪽(북미)으로 이민간 사람과 남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쪽(남미)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청교도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동기의 차이는 큽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돈을 벌려는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간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뿐이 없었습니다.

 남미로 돈벌러 간 사람들은 신앙도 못 찾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성취할뿐 아니라 세계 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 같으면 지난번에 아버지 같은 삼촌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은 조카에 대해서 모른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도 소돔성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도시였으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는 이 성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고 아마 에덴동산같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으로 소돔성을 사랑합니다. 특히 롯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롯을 생각할 때 견딜 수가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50명에서 10명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세기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죽어가는 이 민족과 나의 형제들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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