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선교사 두 사람이 제물포 항으로 입국한 이후 급성장한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세계적인 놀라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급성장한 교회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생활 보다는 전통적인 기복사상에 편승하여 예수 믿음을 물질화 하였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다
최근 한국교회 내 여러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세습부터 여성 문제, 재정비리와 학력위조와 같은 세속화 문제까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꼭 검토해야 할 주제를 제안하며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청어람 ARMC’의 양희송 대표와 여성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여성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있는 실천여성회 ‘판’의 최은영 공동대표에게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들어봤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양희송 대표(이하 양 대표): 2005년부터 12년간 기독교 대중들을 대상으로 인문사회, 예술들에 대한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청어람 ARMC’의 대표로 있다. 한동대에서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었다.
Q 현재 바라보는 한국 교회 내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양 대표:
문제는 많다. 한국 개신교는 교단도 여러 가지고 하나로 딱 묶여서 통제가 되는 조직이아니기 때문에 사건사고는 여러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단시간에 사고를 줄이고 대응하는 것도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이 세 가지 큰 틀에서
한국교회 내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입장이다.
Q 교회의 세습이 이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 대표:
구조적인 배경이 있을 수 있다. 세습은 중, 대형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1980년대 이후 대형교회에서 전반적으로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있다. 세습반대운동연합 자료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300여 개의 교회가 세습을 진행했다. 대형교회가 세습이
아니고서는 자신들 조직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됐다고 본다. 전임목사와 후임목사의 분열이 일어나는 등 세대교체에 실패한 대형교회들이
위협을 느끼고 세습을 해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는 것 같다.
또한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교회 운영 자체에 권한이 분산되고
합리적인 조직 운영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목회자 중심으로 교회운영이 이뤄진 성직주의와 같은 이유도 있다. 목회자에
과도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니 권한, 권위를 가진 목사가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후임자를
들이는 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봐서 아들이나 사위 등 친인척을 들여 현재 만들어 놓은 구조를 가능한 변화시키지 말고 최대한
유지하자는 생각이 목회자와 성도들 안에서도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Q 세습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양 대표:
신학적인 측면에서 비판하자면 기본적으로 교회가 혈연공동체가 아니고 언약공동체라는 점에서 혈연으로 목사직을 승계하는 것이 옳지
않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11세기 무렵 서양에서 기독교 국가체제가 이뤄지고 난 후 성직자들 친인척들이 중요한 교회 직책
등을 독식한다. 혈연중심의 족벌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은 중세교회에서도 금지를 했고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선례가 있다. 한국교회의
세습은 중세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던 상황과 굉장히 흡사하다. 그런 면에서 개신교인으로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Q 세습의 해결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양 대표:
세습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대형교회들은 자기 덩치를 주체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 세대 목회자들이 성장시켜놓은
것들 다음 세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세대교체에 거의 다 실패하고 있다. 그 덩치를 분할하거나 쪼개서 적정한 규모로 나누는 것이
유력한 대안이지 않을까.
Q 교회 내 여성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양 대표: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 안과 서양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가 고착되고 그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사례가 무수히 많이 등장했다.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이 오·남용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여성에 대해서도 오남용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여성의 권리, 존재를 두드러지게
보호하고 높게 끌어올리는 모습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특별히 신약의 예수님의 태도나 초대교회 공동체 내 여성들의 역할은
당대 문화에 비춰볼 때 굉장히 전향적이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남녀차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의 소중함을
훼손하는 것을 어느 방식으로도 용납하지 않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지금 사회에 와서는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주요 교단에서 여성의 권리를 억압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이다. 여성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여성 목사안수가 되는 교단에서도 여성 목사의 자리가 제대로 확립돼있는가에 대해서도 갈 길이 먼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의 변화에 발맞춰가면서 자기 변신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Q 교회 내 여성 문제 해결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양 대표:
일차적으로 공부하는 게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맥락에 이야기들이고, 이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왔는가, 문제를
바라보는 주요한 입장이나 시각은 어떤 것이 존재했는가. 사전학습 없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개신교나 교회가 페미니즘에 썩 친화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 잘 공부할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 맥락이나 조건과 연관 지어 페미니즘을 바라보면 좋겠다. 여러 강연을
듣거나 페미니즘 관련한 개론서나 고전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독서모임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적어도 대학 이상의
지성인의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대화와 학습이라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어떤 사안을 들여다보는게 필요하지 않나. 전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대학생 이상 글을 읽고 합리적 사고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우선적인 태도는 아니지 않는가 싶다. 어떤 종류의
사회적 이슈들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토론하고 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교회 안에서 문제 되는
사안은 말도 못 꺼내게 하는데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 때는 포스터 모더니즘은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반기독교적이라고. 그런
방식은 비판적 사고를 할 겨를 없이 모르면서 반대하거나 모르면서 찬성하는 맹목적인 방식의 대립밖에는 안 만들어진다. 꺼내 놓고
토론을 해야 각각의 논점에 대한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이슈에 대해서 가로막는 방식의 대응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초보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자체를 못 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덮어놓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이야기를 해가며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Q 교회 내에서 여성 문제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양 대표:
교회가 지적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이 사람들이 이런 것에 노출되면 신앙에 위험이나 위협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성도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비판적인 능력을 키울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거다. 그건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전면으로 위배되는 거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성직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교황이나 사제에 의존해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 나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가 개신교 정신이다.
성직자가 중심에 서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마틴 루터의 입장이고 개신교의 출발이다. 계속 대화, 토론,
공부, 학습을 이야기하는게 개신교적 신앙이 확립될려면 이것들이 필요하다. 사제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순종하는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깨우치고 학습하려는 태도가 확보되지 않으면 개신교적 신앙은 불가능하다. 한국교회에 여러가지 많은 문제에 이유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개신교적 특성을 잃어버린 것, 성직자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의 최우선적 미덕이라고 만들어버린 문제가 가장
크다.
Q 재정비리, 학력위조 등과 같은 세속화는 원인과 해결 방향성은?
양 대표: 일반론적 차원에서도 세속화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중요하다는 생각하는 가치가 정립이 안 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 신앙에 무엇이
중요한가. 교인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가. 큰 건물을 갖는 것 무엇이 중요한가. 예수 따라 산다는 결단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 사람들에게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교회가 내보여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불분명하고 다른 것들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세속화 현상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교회 본질이 뭔지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실천여성회 ‘판’ 의 최은영 공동대표
Q 실천여성회 ‘판’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
최은영 대표(이하 최 대표):
1980년대에 조직된 ‘한국여신학자협의회’라는 기독여성단체가 있다. 우리는 대전지역내 신학전공자들이 모여 지회 형태의
‘대전여신학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2000년에 출발했다. 2014년에 여신학자라는 명칭이 갖는 벽으로 모임에 들어오기를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계셔서 부담을 줄이고 일반기독여성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고자 실천여성회 ‘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판은 여성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의 성 평등, 정의, 평화에 대한 독서모임, 공개강좌개최 등의 활동을 한다.
Q 교회 내에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이 대두되고 있다. 어떤 활동이나 이야기들이 이뤄지고 있나
최
대표: 사실 한국에는 1980년대부터 여성신학이 들어왔다. 1980,1990년대부터 선배여성신학자들이 꾸준히 번역, 저술해오고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에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여성 신학이 주목받게 됐다. 여러 강좌를 열거나 여성 신학을
배우는 단체들이 늘고 있다. 교회내 여성차별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에 대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관심은
늘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성 신학, 페미니즘적으로 성서읽기에 대해 들어보기 어렵다. 교회 내에 여성 문제에 대한 큰 변화도
없다.
Q 한국교회 내의 여성 문제에 대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최 대표:
이전에는 7~80% 정도가 여성일 정도로 여성이 많았다면 지금은 여성들이 교회를 많이 떠나고 있는 추세다. 과거에는 그때의
순종과 헌신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부정적으로 보기만은 어렵지만, 여성들이 고정적인 성 역할에 맞춰진 어르신들이 하던
주방봉사나 허드렛일 등을 도맡으면서 여성들이 남아있기를 힘들어한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들이나 소위 당위원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여전히 이전 것을 고수하면서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탓하는 분위기의 문제도 있다.
또한 목회자의 성폭행, 성범죄의
문제와 성서와 교회 전통을 가지고 와서 그 잣대로 성서에 나오는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인 언급이 통용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과
대표적인 교단에서 여성 목사 안수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 등의 여성차별 문제가 있다. 한 사례로 우리 회에 연락이 온 20대
여성분이 있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과 여성 혐오까지는 아니여도 여성 차별적인 언사, 비유들이 많이
나오는 거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은혜를 못 받았다 믿음이 없는 거다, 왜 목사님 말에 딴지를 거냐 식의 답변을 들은 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 죄의식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여성 목회자
같은 경우 어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기 원하고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부서들을 맡기도 한다. 의결기구에는
여성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들도 교회 내에 문제들로 볼 수 있다.
Q 교회 내 여성차별의 원인은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최 대표:
유교,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가 교회 내에도 영향을 준다. 성서해석의 문제도 있다. 성서에 아담과 하와 창조 구절에서 어떤
이들은 여성이 죄를 이 땅에 가져왔고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부차적인 존재라고 얘기하며 여성을 부정적 존재로 바라본다.
창세기 1장 27절에 대한 남성과 여성, 여기에는 어떠한 순서상의 차별도 역할상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2장과 3장에
나오는 하와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준다. 바울 성서에 여성은 잠잠하라라는 구절 등
여성차별적인 몇몇 언급으로 인해 교회와 사회는 영향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는 자연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라는 성서 구절을 뒷받침으로 자연개발을 강행했다. 이 구절은 자연과 인간을 동반적인 관계로 바라보지 인간이 더 위계적인
존재로 얘기하는게 아니다. 한쪽만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신학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원래 뜻을 같이 고민하고 좀 더 근본적으로 확장해 바라보자는 것이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갈 것을 얘기하는데 자칫 문구에 갇혀 다른 것을 보지 못할 수가 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외국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있다. 노예계급제도에 대한 옹호도 있고. 문자적으로만
이해 하기엔 지금 사회적 상황과 너무 괴리가 있다.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역사비평적, 공시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에 써있으니까 반대해야 한다 등의 지엽적인 사고가 아닌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역사비평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시대주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공시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본문자체는 그대로이지만 그
본문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지배자의 눈으로 볼지 약자의 눈으로 볼지. 성서에 대한 질문을 가지면서 해석하고
성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Q 교회 내 여성차별의 해결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최 대표:
남성과 여성이 대립각으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에 과격한 면들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속 초대교회 당시에 읽혀진
바울의 선언을 보면 남녀가 같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같고 종과 주인이 같다고 말한다. 바울의 평등 선언이고 초대교회 당시
세례식에서 읽혔다고 한다. 이 선언은 당시 시대의 상황을 살펴봤을 때 혁명적인 선언이다. 성서 내에 그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여성들이 부각되지 않지만 약자, 소수, 여성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고 교회내에 자연스럽게 있었던 남성
위계적인 문화를 바꿔 가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개인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엄하게 만들어진 존재인데,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차별을 이어가는 교회 내, 그리고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시선들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의 당면과제와 대처방안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를 크게 교회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내부적 과제로는 탈교회 현상, 교회 분쟁, 인구 고령화 문제, 저출산과 다음세대를 포함하는 교인수 및 신학교 지원자 감소, 이단 문제 등이 있다. 외부적 과제로는 개정사학법, 이슬람 스쿠크, 종교인과세, 포괄적차별금지법,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문제 등이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 한국교회 보수 연합기관이 하나 되어야 한다.
현재 ‘문화전쟁’을 치르며 ‘갈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 속에서 종교는
‘사회통합’에 공헌해야 한다. 레이 달리오는 중도층이 없고, 이념이 양극화돼 갈등이 심화되는 현상을 한 사회가 쇠락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국교회 보수 연합기관은 화해, 상생, 연대, 평화라는 가치의 문화를 형성하고 연합된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통합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이중언어와 다중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교회 내 문제를 다룰 때는 종교적·교리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교회 밖 문제는 그러한
언어를 번역하여 공론장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과제들을 신앙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하기보다는 각각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다차원적이며 입체적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다중언어를 구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셋째, 공론장의 소통방식인 대화와 토론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공론장은 소수가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민주적이며, 열린 대화의 장이다. 더욱이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적 감정과 신념에 호소하는 탈진실 시대와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적 분위기 속에서,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동시에, 정확한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해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넷째,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
과거 과제들이 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주로 문화
사상, 제도, 법 등과 관련된 문화적 차원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사회과학과 인간의 삶과 의미를
성찰하는 인문학의 소양을 동시에 키워, 기독교 사상과 다양한 학문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다학제적 대화 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미래지향적인 비전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보수교단은 복음화 의제, 진보교단은 인간화 의제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 각
진영마다 의제로 삼고 있는 담론만을 되풀이하지 말고, 양극화를 극복하고, 사회를 통합하며, 도덕적 결속력과 안정화를 제공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비전과 상상력을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윤리적 성찰을 수행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과 리차드 마우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기독교인의 덕목을 ‘겸손한 자신감’이라고
했다. ‘겸손’과 ‘자신감’ 모두 중요한 덕목이지만, 방점은 ‘겸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신뢰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을 성찰하는 윤리적 작업이 반드시 수행돼야 한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를 끌어안고, 내가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서 당면과제와 그 대처 방안을 실천, 실행하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한국 교계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선도하는 우리 총회와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교회 검진 결과, “지식· 실천 간 괴리 있으나 희망도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이 십수 년째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그 원인을 명확히 짚는 이들은 드물다. 교회 관련 사건·사고를 다룬 보도나 통계 자료, 설문조사 결과에 따라 문제를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잦아서다. ‘일부 교회와 개별 목회자가 문제’란 시선도 종합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한 요인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의 공동체다. 특별히 각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한 몸 된 공동체다. 책은 한국교회란 한 몸에 드러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종합건강검진을 시도한 결과를 담았다. 한국교회 환부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들은 기독교 비영리연구기관 목회데이터연구소다. 연구소는 이를 위해 2022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2년여간 성도(성인, 청소년)와 담임목사, 선교사와 일반 국민 1만2303명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설문을 진행했다.
교회 내부 상황 파악을 위해 연구소는 교회 사역을 5개 분야로 세분화해 분야별 설문을 진행했다. 종교교육학자 마리아 해리스의 이론에 따라 이들이 구분한 5개 사역은 예배·교육·친교·봉사·선교다. 이들 분야의 현상을 정밀 분석하기 위해 전·현직 신학 교수와 목회자, 선교사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도 꾸렸다.
공저자로 참여한 자문단은 교회의 5개 핵심 사역을 2가지로 분류한다. 예배와 교육, 친교는 교회 내부를 위한 ‘내적 사역’으로, 선교와 봉사는 교회 담장을 넘어서는 ‘외적 사역’으로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교회는 내적 사역엔 강세를 보이는 데 비해 외적 사역엔 다소 소극적이다. 성도와 목회자 모두 국내외 선교나 대사회 봉사에 이견이 없지만 이를 실천한 경험은 응답에 비해 낮았다. ‘사회봉사 활동 의향’을 물었을 때 성도의 73.9%가 ‘있다’고 답했지만 ‘출석 교회 사회봉사에 관심 있다’고 답한 성도는 53.7%에 그쳤다.
목회자 역시 교회가 속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문제’에 70.5%가 ‘관심이 많다’고 답했지만 ‘지역 사회 봉사를 핵심 사역으로 인식한다’에 수긍한 비율은 이보다 22.3%나 낮은 48.2%였다. ‘사회봉사를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고 답한 목회자는 36.3%로 더 낮았다. 사회봉사에 있어 교회의 인식과 실천 간 괴리가 적잖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엔 ‘인적·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해도 되지만 여유가 없으면 굳이 안 해도 된다’(성도 57.6%, 목회자 38.4%)거나 ‘교회는 영적 기관이므로 사회봉사와는 관련이 적다’(성도 12.6%, 23.1%)는 인식이 교회 내 꽤 퍼져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권했다.
선교의 경우는 이에 관심이 있는 성도(35.7%)보다 물질로 후원하는 성도(43.0%)가 더 많았다. 세계 복음화란 당위성에 공감해 금전적 후원은 하지만 관심이나 참여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저자들은 이들 현상의 주요 원인을 ‘사회적 책임에 대한 목회자의 설교 부족’으로 꼽는다. 설교를 통한 인식 변화를 묻는 말에 성도들은 ‘성경과 교리를 더 잘 알게 됨’(68.6%)과 ‘삶의 지침을 얻음’(67.5%) 순으로 응답했다. ‘사회 정의’(43.0%)나 ‘환경 문제’(35.5%)에 대한 관심은 후순위로 밀렸다.
부정적 소견만 나온 건 아니다. 한국교회 성도는 ‘예배·설교로 변화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88.8%)하고 ‘예배에서 깨달은 내용을 주중에서 실천하려고 노력’(84.3%)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주 1회 오전 예배(온라인 포함) 참석 비율도 79.2%로 다른 종교에 비해 높다. 설교 수용도와 예배 참여도가 높은 만큼 말씀의 씨앗을 성실히 뿌린다면 교회 부흥뿐 아니라 사회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할 때 교회의 미래가 있다’는 원론적 결론이지만 이를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했다는 데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 닥친 위기의 실체
한국교회가 최근 급격한 교세 감소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특히 대형 교단들의 사정이 더 심각해 보인다. 예장 통합이 9월 총회를 앞두고 교세 통계를 발표했는데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교인 수가 230만 2천여 명으로 1년 만에 5만6천여 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 측의 교인 수는 2012년 281만 명대에서 2013년 280만 명대로 소폭 줄었다가 2014년에 281만 명대를 회복했다. 하지만 그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지난해까지 10년간 50만8천여 명이나 줄었다.
합동 측의 경우도 통합 측의 추세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합동 측은 공식적인 교세 통계를 9월 총회 때 발표하기 때문에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난해 자료(2021년 기준)만 보면 그 전해보다 9만여 명이나 감소했다.
주요 교단의 통계 지표는 한국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타 교단들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한국교회는 부흥·성장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1천2백만 성도를 헤아렸으나 이런 추세로 가다간 교세가 곧 반 토막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교인은 갈수록 줄어드는 데 교회 수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통합 측의 경우만 봐도 교회 수가 2012년 8,417개에서 계속 늘어 지난해 9,476개를 기록했다. 10년 사이 1,059개 교회(+12.6%)가 증가한 것이다. 목사 수도 같은 기간 16,853명에서 22,180명으로 5,327명(+31.6%)이나 늘었다.
교인은 줄어드는 데 목사 수가 늘어나고 교회까지 많아지는 건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좋게 보면 교회의 사회 저변 확대 측면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겠지만 긍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교인 없는 교회가 늘어나는 건 그만큼 많은 교회가 존립 위기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이제 채 14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때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서구교회로부터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 됐다. 영적인 열정으로 이룬 부흥·성장이었기에 영적인 불이 꺼진 지 오래된 서구교회 인사들이 거꾸로 한국교회를 배우러 오는 일까지 있었다. 오늘 세계 10대 대형 교회가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이런 눈부신 번영이 영구히 갈 것으로 믿었던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다. 한국교회에도 바야흐로 ‘버블(거품) 꺼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이 완전히 닫힌 서구교회와 비교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교회는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더니 일상회복이 되고 나서는 내 교회는 그런대로 괜찮지 않은가, 또는 내 교회만 아니면 괜찮다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 안일해 보이는 이런 인식에 많은 목회자들이 젖어있는 이유는 위기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벗어날 방법도 묘안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각 교단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통합 측은 9월 총회를 명성교회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면서 총회 기간중에 목사·장로 1만명이 참석하는 ‘영적 대각성 집회’를 열기로 했다. 합동 측도 ‘샬롬부흥’을 기치로 전도, 다음세대, 출산장려 등 현안과 미래를 대비하는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주요 교단들이 침체 상태에 있는 교세 회복을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 처방이 주효할지는 미지수다. 한국교회에 닥친 오늘의 위기가 그동안 대규모 영성집회나 전도운동을 벌이는 데 소홀해서였을까.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전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한 쪽으로 들어온 교인들이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는 데는 방법이 없다. 저출산이란 사회 구조적인 벽을 탓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럼 교회를 떠나 ‘가나안’(안나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약 30%의 성도들은 누구 탓인가.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드러난 행실로 교회를 평가한다. 그들 눈에 비친 교회와 기독교인의 모습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거나 그보다 더 못하기에 비난과 조롱을 쏟아내는 거다.
그런데 예전에 교회를 비판하는 게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 몫이었다면 지금은 교회를 떠난 교인들의 비난이 더 신랄하다. 그래서 더 쓰리고 아픈지 모르겠다. 이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없어진 데서 온, 즉 교회의 세속화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성경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바닥에 버려져 사람들 발아래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는 것에 대한 주님의 냉철하신 경고다. 오늘 한국교회에 닥친 위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한 말씀이란 점에서 한국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문제는 무엇일까? (#탄핵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심지어 교회를 향한 실망과 적대감이 교회 안에서 일고 있다.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많은 지체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났다.
하지만 다들 문제의 심각성을 말할 뿐 신학적인 분석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부족하지만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는 사회와의 괴리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주장 그리고 정치적 언행, 문화까지 모두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친한 목사님 한 분이 목회를 그만두고 일반 직장에 취업하셨다. 큰 매장의 관리자로 들어갔는데 일하는 어린 친구들이 하나 같이 경계했다고 한다. 이전에 함께 일했던 크리스쳔들이 하나 같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목사였던 사람이 오자 더욱 경계했던 것이다. 왜 사회의 일반적 상식과 동떨어진 신자가 많아질까? 아니 왜 교회는 갈수록 세상보다 못하게 보이는 걸까?
이 문제의 본질에는 한국 교회가 너무 구원에만 집중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특별히 구원이 지옥을 떠나 천국을 보장받는 권리로 전해지다 보니 신자들은 구원을 세상과의 분리로 쉽게 이해했다. 구원이 죄인을 불러 의로 이끄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측면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성도들은 점점 현실을 등지고 천국을 향해 나아갔지만 도리어 교회는 현실에 빠져들고 있었다. 성도의 우매화와 목회자의 세속화가 함께 만난 현상이 오늘날 전광훈 목사와 사랑제일교회이다. 이런 현상 속에 지적인 성도들은 신앙이 자신의 현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릇된 교회가 아니라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 현상을 정치의 우경화나 목회자의 일탈 정도로 정리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복음의 의미와 신학적 정립이 있어야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구원의 편중화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첫째, 복음이 어떻게 삶과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지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서 줄곧 제기되어왔던 주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개념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분으로 정립했다.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여 다루신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이지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은 이 구분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다. 나라를 교회로 만들거나 구원을 현실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며 구원은 현실문제의 직접적 해결이 아니다(구원이 곧 세상의 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교회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원은 한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켜 참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버리게 한다. 이렇게 죄에서 벗어난 신자는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 의로운 삶을 문화적으로 드러낸다. 이 패러다임의 확장이 바로 교회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 사회의 허물을 바꾸어 선한 문화를 이끌어낸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이 땅에 직접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었다. 이 땅의 나라보다 훨씬 탁월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보고 불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높은 윤리가 한 사회의 거짓된 문화를 돌아보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에베소 도시에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던 탈우상화가 그러한 실례이다.
둘째, 구원의 적용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한국 성도들은 그동안 교회 안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교회 안에 영적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어디로 표출해야 할지를 몰랐다. 보통 이 에너지를 한국 교회는 전도와 외연확장에 소진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 채워지면 건물을 세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나라는 모든 국민의 삶의 총합과 같다. 나라경제가 수출에만 전념한다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영적 은혜를 외부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만 집중했다. 공동체는 커갔지만 모여서 실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는 몰랐다. 처음 올 때 반겼던 교회는 정작 새가족반이 끝나고나면 정착하기 힘든 공동체가 된다. 교회 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기준은 그렇게 까다로우면서 교회 밖의 학생들에게는 그냥 장학금을 나눠준다. 교회 안에 있는 병자는 내버려두고 교회 밖에 있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봉사를 한다. 나는 구제라는 개념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받는 사람은 구제를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특별한 희생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 이제 교회도 구제가 아니라 교인들의 복지를 생각할 때가 됐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삶의 마지노선을 교회가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런 적극적 시도를 통해 교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길을 교회가 열어주어야 한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교회는 하늘과 땅을 잇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실천이 없다면 교회는 하늘에만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런 하늘의 사다리가 사라지면 교회는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변질된다.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열심인 신자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에 예산을 쓰는 것에 분노한다. 교회와 사회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교회 안에 사회의 모습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역시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장로교의 정치체계는 대의 민주체제이다. 칼빈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긴 정치체계를 교회의 정치 체계로 끌어왔다. 교회라는 사회에서 한 성도가 잘 훈련받고 자라나야 한다. 그래야 잘 자라난 성도가 사회에 나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시민이 될 수 있다.
탄핵이라는 비상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이 교회를 향한 탄핵을 앞두고 있기도 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이 많다고 믿는다. 다만 교단과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올바른 물꼬를 터주길 바랄 뿐이다.
한국교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상)

현재 한국교회는 2가지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다. 하나는 한국교회와 성도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의 파도’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자체의 ‘급격한 쇠퇴기 시작’이라는 변화다.
한국교회는 성장의 정체, 성장의 멈춤을 지나, 급격한 ‘쇠퇴기 시작’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 중이다. 무언가 잘 되는 상황에서 거대한 변화를 맞닥뜨려도 불안한데, 한국교회처럼 쇠퇴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거대한 변화는 공포 그 자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아직도 위기감이 부족하다. 성장이 멈춘 것은 알지만, 급격한 붕괴는 자신의 목회 기간에는 일어나지 않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춘 원인을 외부의 공격이나 일부 목회자나 대형교회의 일탈에서 찾는다. 저출산 같은 외부적 환경 즉 사회의 심각한 변화와 세계적 경기침체의 물결에서 찾는다. 한 마디로, ‘내 잘못’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교회’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급격한 침몰은 도둑처럼 찾아 올 것이다.
위와 같은 요인들이 한국교회의 쇠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한국교회 내부, 우리 안에 있었다.
미국교회의 예를 들어 보자.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교회는 1970년도를 정점으로 심각한 영적인 침체로 접어들었다.
그 보고서가 밝힌 영적 침체의 원인은 “1970년대의 미국교인 가운데 20%는 전혀 기도하지 않으며, 25%는 전혀 성경을 읽지 않으며, 30%는 교회 출석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며, 50%는 교회 주일 학교에 출석하지 않으며, 60%는 저녁예배에 불참하며, 70%는 선교헌금에 동참하지 않으며, 80%는 각종 기도회에 불참하고, 90%는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95%는 전도하지 않는다”였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도하지 않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며, 교회 출석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며, 저녁예배에 불참하며, 선교헌금에 동참하지 않으며, 각종 기도회에 불참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전도하지 않는다’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현실이다. 한국교회 쇠퇴의 진정한 이유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감지하기 쉽지만,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처럼 감지하기 쉽지 않다.
필자가 미래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국가든 조직이든 그것을 쌓아 올리는 것은 오랜 시일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고, 급작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세워놓은 유럽의 교회들이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역사도 교훈한다. 한 나라의 패망, 한 기업의 멸망의 진정한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서서히 성장했으니, 서서히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다.
영국 일간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라프 (Daily Telegraph)는 2000~2002년까지 영국교회의 예배 참석자가 10만 명이 줄었다고 했다. 단 3년 만에 영국 전체 출석교인의 8%가 줄어든 셈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우리의 무너짐이 외부의 공격과 외부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도 착각이다. 진짜 원인은 우리 안에 있다.
미래를 연구하는 미래학자로서, 한 가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들이닥친 현실을 직시하고 이미 온 위기나 앞으로 다가올 잠재적 위기들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쉽지는 않아도 위기를 극복할 방법과 지혜를 배울 수 있다”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소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아직도 버리지 않으셨다”이다. 우리가 바라는 치유와 회복, 그리도 다시 부흥하는 미래는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그냥 주어지는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한다.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직시하고, 다시 되돌아가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앞을 내다보는 일은 어렵다. 필자가 비록 미래학(Future Studies)을 전공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들을 배웠지만, 인간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캄캄할 때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가야 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우리가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2).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나의 삶을 설계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모순들과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질서 구조 등을 바꿀수 있다. 무인가 신학교 정리하면 종교 탄압으로 몰린다. 김영삼 정부시절에 시도하자고 했지만 정치적 부담으로 실패했다. 현재 신학교가 220개가 있다.
내가 정리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먼저 목사들을 62세 은퇴시키겠다. 나이가 들면 창조적인 것이 나오지 않고 과거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 또한 현직 목회자중에서 자질과 함량 미달하는 이들을 퇴출시키겠다. 그리고 10년간 신학생 뽑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정예화된 목회자들로 교회를 새로짜면 지금보다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방식들은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한국교회를 개혁해야한다. 그런데 막상 생태계, 시스템을 바꾸려면, 기존의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기득권으로 인해서 바꾸기 어렵다. 틀을 바꾸기가 대단히 어렵고, 7-8년 후에 망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산다. 악은 자기 증식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악과 부조리가운데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다. 이런 악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내버려두도록 한다. 따라서 악을 다 걷어내려는 것은 교만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위한 부름이 있다. 기독교를 통해서 입신양명을 위해서 신학교에 온 자들은 나가야 한다.
악과 싸우기 위해서 신학교에 왔다.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나와서 목양을 하고,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가 전국에 수천개가 세워져야 한다. 100-300명 정도의 교회가 전국에 수천개가 있는 생태계를 그린다. 대형교회를 해체하고.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변화하는 것이다.
거시 담론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다보면 개개인이 가진 가치와 능력을 간과할 수 있다. 한사람이 깨어나고 변혁되고 준비되면 한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파도가 더 강하고 클수 있다. 10년 후를 바라볼 때, 신실하게 준비가 되면, 여러분이 일으킬 수 있는 폭과 강도와 범위가 생각보다 더 클수가 있다.
새물결프러스 출판사가 6년이 되었다. 서구권의 좋은 책들이 나오고 있고, 거기는 정직성을 가지고 출판하는 현실에서 시작했다. 책은 일반적으로 이천권이 팔리면 본전이다. 그런데 신학책이 나오면 오백권 팔리면 맥시멈이다. 첫해 사억팔천적자 이후 삼억, 이억 순으로 적자가 줄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고 해서 질을 낮추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적지않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다른 출판사들에서 자기들의 책을 내는 형태가 부끄럽다고 한다. IVP가 90-2000년을 지나면서 스피릿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두꺼운 책을 내고 있다.
한사람이 가치를 가지고 그 길을 가준다면, 그리고 서로 네트워킹이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판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희망은 여러분 자신들이다. 기성의 요구대로의 길들려진 목사가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고 불편해하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한 사람이 준비되는 것이 필요하다. 의외로 한 사람때문에 변화가 일들이 일어난다.
기본적인 목회자의 소양 네 가지를 나누고 싶다.
첫째는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서론에서 종말론까지 50개 타이틀로 세분화시켜서 각 주제별로 강의안 없이 자기 프레임으로 두 시간이상 설명할수 있어야 한다. 성서신학은 66권마다 최소 두-세시간씩 각 권의 신학을 자기 프레임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경신학적인 한 주제를 가지고 창-계시록을 관통하면서 최소 50개의 이슈를 설명할수 있어야 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사 현대교회사에서 흐름을 차고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서의 준비와 함께 십년은 숨어서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이슈가 생길때 응답해야 한다. 성경을 나름대로 현장에서 필요한만큼 요리할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보는 눈을 키워라.
둘째는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 문학 사회학 철학 사회 경제학 공부가 필요하다. 현대예언자는 사회학쪽에서 나온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수 있는 정도 즉 교회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들을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이 통찰력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 이야기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케트의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15년간 세계의 세금을 통계로 처리했다. 우리는 그런 작업은 아니고 단지 불평등을 적시하면 된다. 인류가 어떻게 공공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를 공감하고 상식적인 노력한다.
셋째는 역사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너무 근시안적이다. 눈앞에 이익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지난 60년, 백년안에 한국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한국교회의 공과에 대해서 바르게 보고, 한국사회와 교회를 함께 고려하면서 책임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서북청년단을 한경직 목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해방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강준민 목사가 이승만 등을 높이고 있다. 전두환 장군을 위한 기독교의 조찬 기도회의 역사등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지식이 없으니, 부화뇌동하거나 휩쓸려 간다. 고난과 한과 아픔의 역사에 대해서 역사 인식이 교회에 필요하다.
네째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깊은 기도의 경험이 없다: 하나님의 심장이 없다. 하나님의 슬픔과 애통함을 경험하고 배우는 체현하는 기도가 없다. 기도하면서 단지 능력만을 구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와 진실의 길을 갈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치관을 가지고 10년에 300명만 등장하면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 판을 못바꾸는 현실에서 신학생들이 꿈이고 미래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한국교회의 개혁의 핵심이 무엇인가? 목사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첫째는 목사들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두번째로는 시민종교의 포로가 되어 있다. 교회가 속해있는 문화에 노예가 되어 있다. 체제를 위한 봉사자가 된다.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되었다. 세번째로는 개교회주의가 문제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 핵심은 목사들이 질이 너무 떨어진다. 새물결프러스의 책의 구독자 절반은 성도들이다. 목사와 신학도들은 어렵다고 한다. 성도들의 학력이 높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권을 독점하고 있다. 권리에 준하는만큼의 책무, 성실함과 충성심 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리더쉽 부실에 설교도 부실하고, 세상을 통전적으로 보는 해석학적인 능력도 부족하다. 과도한 종교적 권력을 행사한다. 장로들의 문제도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장로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첫째 뛰어난 아이디어 아니면 둘째는 독종이어야 한다. 부실한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다. 이런 리더쉽이 체제옹호적인 교회가 되게 한다. 교회 구성의 문제이다.
오늘까지 산 것보다 두 세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민화 교인들로 만든다. 갈급한 영혼들과 대화하고 교회밖의 지성들과 함께 대화하고 끌어들일수 있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지적인 능력을 두 세배는 끌어올려야 한다. 목사와 전도사 질이 너무 낮다. 가나안 성도들의 평가이다.
다른 질문; 가난한 자들과 우는 자들과 함께 하길 원한다. 역사 의식, 이념측면 등의 문제가 있다. 탈북자들을 섬기기를 원하는데, 대상자들이 보수화된다. 이때 어떤 입장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도구가 정치이다. 그런데 정치는 동시에 사탄적 속성을 가진다. 정사와 권세라는 영적 실체가 있다. 천사의 세계에서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국가와 대륙, 제도 단위내에서 활동하는 영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율성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탄성으로 나타난다. 정사와 권세에 포섭되었기에 근본적으로 자율성을 추구한다.
교회는 모든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사탄성에서 정도의 문제가 있다. 예언자적 비판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근거는 첫째 정부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가? 하나님의 샬롬을 더 실현하는가?(복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누가 더 배려하는가? 현 정부는 사회적 약자를 너무 학대한다. 한국교회의 7-80%가 이런 정권을 지지한다. 한국개신교가 시민종교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학적 기준이 필요하다.
탈북자 문제에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안변한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북한 체제안에서 일평생 보고 들은 것이 기존에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힘있는 자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발언하는 습관이 들었다.
다른 질문: 목회자의 질적 향상이 필요하다. 부교역자로서 사역할 때 질적 성장의 시간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려면 투잡을 가지고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동기부여가 약하지 않는가? 동기부여와 모델들이 있어야 하겠다.
강의자는 총신 87회다. 그런데 장신 출신들은 통합의 안정된 시스템에서 무난한 분위기라고 하고, 총신은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를 이야기한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투잡한다고 공부하나? 생계, 사역 걱정 없는 상황에서 많은 시간을 독서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잠을 줄인다. 작년 봄에 교단탈퇴한다(합동). 강력한 동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미래를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 한반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아야한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과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리더쉽의 영성은 하나님의 심장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진 심장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본다. 내가 보는 미래는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에서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국땅에 세우시는 교회가 있다. 하나님 편에서 목말라하는 교회가 있다. 정말 깊이 있는 성경해석이 있는 교회, 지성적인 세상과 의사소통이 되는 교회,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된 교회,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배우고 본받는 교회, 이런 것들이 균형잡힌 교회를 세우기 원한다. 조각난 교회가 아니라. 한 리더쉽 아래서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런 말씀의 사역자들이 나오면 지금 10대들 가운데서 특별한 자들을 일으킬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나면서 10대들의 의식이 바뀌고 있다.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통일과 같은 기회를 주실려고 한다. 준비하는 마음이 있으면 현실이 된다. 선배 세대의 생태계, 엄청난 불평등의 생태계, 종교적 탐욕의 생태계의 노예가 되어서 생존만을 꿈꾸면, 하나님이 가지고 오시는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안명준 교수 |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안명준(安明俊, 1955- )
독립운동가 안봉순 선생의 손자이며, 중앙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합동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미국 리폼드신학교 신학석사〔Th.M.〕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Th.M.〕남아공 프레토리아대학교 교의학 전공 철학박사〔Ph.D.〕칼빈의 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개혁신학회(IRTI) 한국대회 준비위원과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을 역임했다.
2019년 개혁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잘못된 신학의 목사가 있다.
시작하는 말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 존립(存立)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소형교회들 태반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에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조사했다. 물론 미국이었지만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 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 의식의 실종(失踪)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을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孫鳳鎬, 1938- ) 교수는 이원론 정의를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이원론이란 용어는 영국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 1636-1703)가 ‘고대 페르시아인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對立)하는 종교체계를 이원론이라는 말로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 형태는 플라톤(Plato)의 이데아계(idea, 靈知界)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티메우스’(Timaeus)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우주론 요약으로 세상은 ‘데미우르게’(Demiurge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복사(複寫)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과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과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한 영원하고 참된 것의 복사(複寫)요 상(像)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 교부(敎父)들,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複寫)나 유사(類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라고 한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
결국에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 즉 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해 클레멘트, 오리겐, 어거스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또 인간의 영혼의 불멸성(不滅性)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서구 철학의 이원론은 대표적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이 또한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誘惑)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 된 선교사들을 통해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日帝)의 핍박과 6.25사변(事變)의 아픔을 이겨냈다. 그리고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經濟成長)으로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현세와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圖式)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세와 내세’라는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特別恩寵)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一般恩寵)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했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으나 후자는 점차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에 한국은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또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 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 교육이 바르게 이뤄질 수 없다.
또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非)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2) 로마 가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두 번째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의식(儀式)으로의 복귀(復歸)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Cyprian, 210-258)은 성례전(聖禮典, Sacrament)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基礎石)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주교(主敎)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도나투스(Donatus Magnus, ?-355)와 논쟁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강조했다. 특히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을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靈)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Pope Gregory II, 669-731)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했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을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했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 된 지상 교회를 강조했다. 결국에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성경에서 벗어난 교회관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 역시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獨占的)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主人)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보다는 교회의 전통(傳統)과 기구적인 교회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독재적(獨裁的)이며 카리스마(charisma, 권위적)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이들의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 대교회 목회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도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외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 )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 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적이며 영적인 면의 강조보다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像)과 질료(質料)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라는 말은 로마가톨릭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해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했다. 따라서 후에 로마가톨릭에 구원에 있어 공로(功勞)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같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해 개혁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으로 비판했던 개혁자들의 우려와 비판의 소리가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또 다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외형적(外形的) 대형화(大型化)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가 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聖禮典)과 올바른 치리(治理)를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관심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1926-2015)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 교회는 많은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의 대가 맥가브랜(Donald Anderson McGavran, 1897-1990)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즉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또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초대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각 교파의 세계 최대 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몰려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 존폐(存廢)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과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를 예배당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작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렸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와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성도를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 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과거 교황과 같은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잇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世襲)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했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權勢)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지 않겠는가?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어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4) 개교회주의
한국교회는 그 저변에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普遍性)과 통일성(統一性)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 자신의 지(支)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他) 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가 서로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어떤 학자는 그 나라의 젊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인 손실이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지나치게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개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한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둘째, 지나친 개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빠지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셋째, 개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 한국 사회는 무속(巫俗)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머니즘(shamanism)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에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postmodernism)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단체가 행사에서 진혼(鎭魂)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迷信)을 조장하는 무속인 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보다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 왕국으로서 심지어 신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방송됐다. 무속(巫俗)이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미신(迷信)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은 시베리아 퉁그스족 언어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巫女), 예언자(豫言者), 의사(醫師)를 뜻한다. ‘샤만’의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에 제사의식(祭祀儀式)의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巫俗)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무당(巫堂)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편적으로 백제,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한때 멸종한 듯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全盛期)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巫俗)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傳道)에서 나타난다. 전도할 때 기독교를 기복(祈福)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전도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다. 한때 유행한 ‘삼박자 구원’처럼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 이런 신앙은 현세(現世) 중심의 기복(祈福)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로 고난의 모습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는 그 사역이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 정도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을 고치는 일에만 제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妄覺)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祈福的)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물질 축복’이 자신을 위해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祈福信仰)에 가깝다.
아무 조건(條件)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참된 헌신(獻身)이다. 어떤 대가(代價)를 기대하고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해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獻身)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로 목회자 윤리(倫理)가 붕괴(崩壞)되고 있다. 기독교는 윤리에서도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교회 재정 사용을 문제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랜 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빚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타락에서 심각성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감각(感覺)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感性) 시대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性)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 전 성(性) 경험은 해마다 그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純潔) 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기존의 성윤리(性倫理)가 다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快樂的)으로 즐기고 보자는 사고(思考)로 전환 되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많은 인터넷 음란(淫亂) 사이트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e-mail)로 음란물(淫亂物)을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에까지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 여성상담소에 따르면 19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性暴力)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19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異性) 문제는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가 이성(異性)과 불미스러운 문제로 교회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 타락은 목회자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性)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또 목회자의 탈선은 교회 재정(財政) 관리 문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高額)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의 한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연간 수입이 10억이라는 말 – 편집자) 요즘 한국 어떤 목회자는 조용한 사임이나 퇴임을 조건으로 교회와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해 어떤 목회자는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횡령(橫領)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名譽)에 대한 욕망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 명예의 직함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 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 술수와 야비한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해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病理)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했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또 최근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權威)를 주장한다는 비난의 여론이 높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가 왕 같은 지위를 행사하는 곳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해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의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하나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어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2. 한국교회 문제 극복을 위한 과제
▸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개혁자로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
▸ 잘못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 은사에 따른 교회 지체로서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 일로에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 과거 한국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해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해 한국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질 것이다.
▸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축복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예배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
▸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비성경적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뿐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마치는 말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들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 교회가 변질이 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글쓴 이 /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 출처 : https://godpeople.or.kr/mopds/34033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
1. 서론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 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의 존립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태만의 소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의 실시를 앞두고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을 조사하였다. 물론 미국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의식의 실종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먼저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dualism)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원론에 대한 정의로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 (Thomas Hyde)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하는 종교체계를 이 말로 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형태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영지계)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Timaeus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책은 우주론에 대한 요약으로, 그는 세상은 Demiurg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인쇄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보이는 세계는 영원하고 참된 것의 하나의 복사요, 하나의 상(像)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서 교부들과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나 유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라고 한다.
결국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 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하여 클레멘트, 오리겐, 어거스틴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서구 철학에서는 이원론이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들이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하여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하여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핍박과 6 25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었다.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세상과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자의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자의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하였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지만, 후자는 점차적으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의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적으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위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2)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많은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은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주교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와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특히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한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로마 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시켰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하였다.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하였다.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하였다.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 보다는 전통과 기구적인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재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그런 지도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멸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에 공로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을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 대형교회는 많은 목회자들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이론의 대가인 맥가브랜(Donald A. McGavran)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 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한국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 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 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에 지각 변동이 왔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 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를 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바로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있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한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하지 않을까?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4) 개 교회주의
한국 교회는 그 저변에 개 교회주의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 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 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서 지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 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 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이 서로 경쟁을 심하게 해야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나라의 젋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 많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 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 시킨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두 번째 지나친 개 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되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세 번째 개 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 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 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 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 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 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 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마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 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 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 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만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적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라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 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의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의 목회자의 윤리적 붕괴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의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의 사용에 문제를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빛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 타락에서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의 시대라고도 불리 운다.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전 성 경험은 해마다 그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성 윤리는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으로 즐기고 보자 라는 사고로 전환 되고있다. 많은 인터넷 음란사이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로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까지 보내고 있다.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문제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성문제로 교회에서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타락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최근의 한 언론에서 보도 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 요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를 조용한 사임을 조건으로 또는 퇴임하는 조건으로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하여 어떤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자기가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그 명예의 직함 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들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 전에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왕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하여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에 의하여 공식으로 결정된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3.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의 극복을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서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변혁자로서 사는 크리스천의 삶을 말해야 한다.
잘못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이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의 은사에 맞는 교회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거 한국 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 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샤마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축복을 바르게 가르켜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켜야 한다.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지나치게 비 성경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 뿐만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의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4. 결론
한국교회의 여러 신학적 문제점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서 교회가 변질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가 실시되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 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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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또 다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외형적(外形的) 대형화(大型化)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가 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聖禮典)과 올바른 치리(治理)를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관심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1926-2015)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 교회는 많은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의 대가 맥가브랜(Donald Anderson McGavran, 1897-1990)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즉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또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초대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각 교파의 세계 최대 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몰려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 존폐(存廢)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과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를 예배당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작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렸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와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이 글은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2014년 8월 25일 올린 칼럼입니다. 주제는 매우 무겁습니다. 길을 잃은 양 같은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내용도 그렇습니다. 평신도의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과 ‘왜곡’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신앙, 세속과 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제는 무거운데 글이 매우 따스합니다. 사회와 교회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서는 시간의 무게감을, 교회안에 안주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신앙에 대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참 가치를 역설하며 아주 천천히 독자를 설득해 갑니다.
참고로,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일부에서 말하는 ‘자아의 죽음’이나 ‘자기부인, 자아 파쇄’ 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변호사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종교적 희생, 선교사급의 ‘헌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화된 평신도의 실체와 교회안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죄악된 자기에 대한 부인을 하고, 사회적 차원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십자가를 지라는 견지에서의 ‘자기 부인’입니다. A4 용지 23페이지에 이르는 원 글을 3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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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칼럼]: 길을 잃은 양들,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
1. 평신도의 믿음 - 위로받는 믿음 vs. 씨름하는 믿음
우리 평신도들의 믿음에는 ‘위로받는 믿음’과 ‘씨름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위로받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씨름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개신교) 평신도들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구하고 ‘씨름하는 믿음’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또한 ‘위로받는 믿음’만을 가르치고 ‘씨름하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점으로 느껴집니다.
‘위로받는 믿음’은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 갇혀서 절망하는 인간을 보며 슬퍼하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그렇게 구원된 사람을 십자가(十字架)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길로 이끌어, 여전히 풍파가 이는 세상의 압도적인 힘과 가치관에 휩쓸려 살아가지 않도록 믿는 사람의 팔과 다리와 머리의 힘줄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의 ‘더 큰’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니 위로받는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평안히 누워 쉼을 누리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씨름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일어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인생을 씨름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들의 신앙이 계속 위로받는 신앙에서 시작하여 위로받는 신앙만을 반복하여 추구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면, 한국 교회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겠지만) 생기와 자부심과 존경을 잃고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시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백수십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젊고 팔팔한 한국 기독교가 이대로 시들어 버린다면 우리도 억울하고 하나님도 억울합니다. 수많은 문제점과 스캔들과 답답함과 분열과 지리멸렬과 압도적인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이제 막 구원받은 사람들의 감격과 기쁨의 에너지가 강력하게 살아있습니다. 이 강력한 믿음의 에너지가 안타깝게도 지금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타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하는』 ‘위로만 받으려는 믿음’의 울타리, ‘위로받는 믿음’의 감옥(監獄)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에너지가 강력하니 그것이 왜곡되게 발현되는 이기적 양상도 강력하고 폭발적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묶이고 갇혀 있는 신앙 에너지의 해방(解放)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위로만 받는 신앙’에서 ‘씨름도 하는 신앙’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과 교회의 자랑과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평신도들 입장과 관점에서의 적극적인 고민과 토론과 연구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계속하여 위로만 받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목회자 등 교회 지도자들이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씨름하는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과 내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것을 대신 만들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셋째 목회자들만이 주도하고 평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제주의적 신앙생활의 행태는 확실히 성경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출발 이념에도 맞지 않으며 현실세계의 신앙적 조건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평신도 신앙의 현실 분석 -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과 ‘씨름하는 믿음’의 결핍(缺乏)
2.1. 평신도 신앙의 두 국면(Phase) – ‘만나는 신앙’과 ‘살아가는 신앙’
⓵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 (1st Phase) - 고독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세상은 거칠고 악하고, 인간은 연약하고 또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독하고 힘듭니다. 무한 경쟁의 세상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몰아대면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삶의 고통과 고독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좀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부유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세상의 자랑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이것도 만족이 불가능한 쉬지 않는 갈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인생의 고독과 고통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사랑’을 애타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구원해 줄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랑 노래는 오히려 「오지 않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떠나버린 사랑」의 슬픔만을 애절하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온전한 위로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 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수시로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거칠고 차가운 눈초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나누는 다정한 시간과 부모 자식 간의 살가운 보살핌, 그리고 부부간 남녀 간의 친밀한 동행관계가 없다면 사람은 아예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정과 애착관계는 영원하거나 온전하지 않고, 마치 양날의 칼처럼 우리를 심하게 할퀴고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장 강력한 사랑의 원천이자 인생의 존립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족관계는 동시에 인생의 가장 깊고 오래가는 상처들을 만들어내는 갈등과 고통의 생산 공장(工場)이기도 합니다. 같은 뜻으로 통하여 서로를 기뻐하던 동료와 동지들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뜻이 갈라져 부딪치고 싸우는 비난과 논쟁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내가 극도로 힘들어지면 다정한 친구들도 나를 도와줄 능력이 없고, 친구가 극심하게 힘들 때 우리는 벗에게 손을 내어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우리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무너질 때,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힘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경험합니다. 고독한 인생의 실존(實存)이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은 믿음’은 ‘(세상에서) 죽었던 내가 (믿음으로) 살아나는’ 감격과 기쁨을 줍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불완전한 위로를 받으려고 애쓰고 기댈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와서 강력한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방감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은 우리 믿음의 출발점이 되고,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의 분량은 첫 만남의 일회적 감격과 기쁨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고독하게 살아가던 인생의 기간과 무게만큼 상당기간 반복적인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깊고 누적된 고독과 상처가 치유를 받고 건강한 영혼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믿음을 가진 후 초심자 시절 몇 년 동안 우리가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미친 듯이) 열심히 예배와 기도와 성경 말씀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떡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먹는 것이 더 달콤합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세상에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감격만이 중요하고 세상이야 어찌되었든지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救贖)한 주(主)만 보이는’ 우리 신앙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입니다(찬송가 288장).
⓶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 (2nd Phase) - 믿는 자로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는 신앙
이제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많은 위로를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어도 세상에서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이 생기면 먹고 사는 부담이 더 커집니다. 원하는 학교에도 진학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장사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경쟁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승진도 해야 합니다. 거룩한 일에 바치는 시간보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바치고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와 내 가족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평신도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믿음의 일에 집중하려고 세상의 직업을 버리고 목회자의 길을 걷는 분들의 인생이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목회자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단이 사실상 무력화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취직을 하든지 개척을 하든지 자기 개인의 책임으로 됩니다. 이 지점에서 갈라졌던 목회자의 삶과 평신도의 삶은 의도와는 달리 다시 만나게 됩니다. 분명히 다른 점도 있고 분명히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도 거룩한 것에 세속적인 것이 달라붙고 평신도의 삶에서도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이 연결됩니다. 그 나타나는 모습의 선후는 다릅니다. 그 본질이 다른지 비슷한지는 차분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갑니다. 변한 사람이 되어 변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세상도 돌아오고 나도 돌아온 상태에서 구속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평신도 신앙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입니다. 이제 믿음의 황홀경은 지나갔습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고갑니다. 신앙의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끼어 삽니다. 말씀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떡도 있어야 삽니다.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 세상의 일을 하면, 안 믿을 때보다는 덜 고독하고 더 평안하고 안정감이 생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통과 고독과 풍파는 다시금 믿는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닥칩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몰아대는 세상은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변함이 없고, 연약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기질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큰 차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은 후에도 세상과 부딪히고 아내와 싸움질을 하고 자녀들을 몰아대고 친구와 직장의 동료와 세상의 정적(政敵-정치적 반대파)들을 미워하고 감정적으로 대립합니다.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덜 힘들기도 하지만,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한심하기도 합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통스러웠지요. 믿은 다음의 인생도 비슷하게 고통스럽습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독했습니다. 믿은 후의 인생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고독합니다. 믿기 전의 세상은 우리에게 가혹했습니다. 믿은 후의 세상도 우리에게 여전히 냉정합니다. 믿기 전의 나는 불안하고 위험했습니다. 믿은 후의 나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뭔가 ‘바뀐’ 것은 분명한데 세상의 풍파와 인생의 힘겨움은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기 전에도 사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믿은 후에도 사는 것은 아주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 ‘위로받는 믿음’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믿기 전에도 눈물을 흘렸고, 믿을 때에도 눈물을 흘렸지만 믿은 뒤에도, 아주 오래 믿은 후에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에게는 바로 이 ‘위로받는 믿음’의 간증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악한 세상 속에 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위로받는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자 필수적인 실존적 믿음의 원천으로 됩니다. 지금 아무리 한국교회가 욕을 먹어도, 지난 백 수십 년간 땀과 기도와 헌신으로 쌓아올린 한국교회(개신교)에는, ‘망국(亡國)과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가난’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괴로움을 한데 모아서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우리 현대사(現代史)와 동행하면서, 그 속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절망하고 지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님을 아는 기쁨으로 인생을 감당하게 해 준 ‘위로받는 믿음’의 위력과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위로받는 믿음’의 일탈이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의 출발점이자 기반(base)인 ‘위로받는 믿음’ 그 자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너무 건조(dry)해 지고 물이 빠진 시들은 가지처럼 에너지를 잃고 비틀거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이제 ‘위로받는 믿음’의 지나친 반복과 재생으로 인한 왜곡과 부작용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2.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⓵ –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모든 좋은 것에는 악이 달라붙습니다. 의도적인 잘못이 있든지 의도적인 잘못이 없든지, 우리를 살리는 좋은 것은 잠시 긴장을 푸는 사이에 나와 우리를 죽이는 악을 만들어냅니다. 항생제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주지만, 너무 많은 항생제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위로받는 믿음’은 그 속성상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라는 개인적(個人的) 성격을 강하게 가집니다. 세상에서 무너진 사람이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위로를 받는 우리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에서는 당연히 ‘위로받는 믿음’의 개인적 요소가 절대적입니다. 마땅히 믿음의 젖을 먹고 믿음의 걸음마를 배우고 서서히 믿음의 이유식(離乳食)을 먹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에게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거나 세상과 삶의 부조리와 싸우라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어린 아이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얘기해도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신도 믿음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이 문제로 됩니다. 믿는 자의 인생도 힘겨우므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위로받는 신앙’이 계속 필요하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문제(問題)의 핵심은 이 단계에서도 우리들 평신도 신앙의 대부분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구하는 무한재생(repeat)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유아기(幼兒期)를 지나면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물결에 맞서 씨름하고 싸워야 하는데, 믿음의 청장년기(靑壯年期), 믿음의 성년기(成年期)에도 싸우지는 않고 자꾸 세상에 얻어맞고 돌아와 하나님께 위로해 달라고만 합니다. 여기에서 아름답고 좋은 ‘위로받는 믿음’의 남용과 오용으로 인한 문제점과 신앙의 왜곡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위로받는 믿음’만을 계속 추구하면, 우리 평신도들이 신앙으로 구하는 위로의 내용이 갈수록 그 질(質)이 떨어지고 세상적인 가치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에서 얻는 위로(慰勞)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 위로에는 한 사람 인생의 고통과 고독 그 전부의 중량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존재(存在)’의 혁명과도 같습니다. 이 위로는 고상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결정적입니다. 이 구원의 위로에는 인생의 세세한 내용과 요구와 이익이 별로 끼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아름다운 첫사랑입니다.
이제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에서는, 이 위로의 내용에 조금 변화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가서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 가르치고 다투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은 결정적인 약이지만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취직과 학업과 직장과 사업과 사회생활과 건강상으로 여전히 힘들고 답답하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아버지(하나님)가 없었을 때에는 혼자서 울고 몸부림쳤었는데 이제 믿을만한 아버지가 있으니 교회로 와서 기도를 하면서 이 세상적 어려움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믿음을 시작한 처음에는 세상의 것들을 허무하게 여기고 하나님만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세상의 것들을 다시 찾아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구합니다. ‘취직과 성적을, 재물과 안정을, 직장과 사업의 성공’을.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심하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현실적 실존적 과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고 구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고상하고 우아하고 (다소 가식적인) 기도만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색을 하고 따져 보아야 할 문제는, 과연 ‘우리의 현실적 과제와 세상적 소망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自由)이지요.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고는 하나님의 자유(自由)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필요가 없는 것에, 우리가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억지로 끌어오려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되고 참람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들이 교회와 신앙모임과 개인기도의 시간에 수없이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사실 그 대답은 성경에 거의 100% 분명(分明)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비참한 사형수로 돌아가시게 한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세상적 성공과 자랑과 명예에 대한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실 필요나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분투하고 실패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치고 아프다가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이 직면할 현실(現實)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일들을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 어렵고 빡빡한 얘기지만, 원칙적으로 ‘믿음은 믿음이고 취직은 취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성적은 성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생업은 생업’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나’를 위해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눈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특정한 일자리에 믿는 사람을 취직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세상과 직장에서 잘 풀리게 만드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착하고 봉사하는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그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도록 밀어주셔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세상의 사적 경제생활과 공적 사회정치생활에는 각각 그 자체의 고유한 작동원리와 운동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따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짧게 기도를 하고는 곧바로 세상에 나가 세상의 법칙에 따라 내 팔과 내 다리와 내 머리를 쓰면서 착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산출물이 많거나 성과가 좋으면 감사하고 일의 산출물이 적거나 성과가 좋지 않으면 감당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사회의 구조적 잘못은 집단적으로 다투고 고쳐야 합니다. ‘결과가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많아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세상 사랑(‘the boasting of what you have and what you do’-요한일서 2:16-17)으로의 유혹입니다.
‘결과가 안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적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정신(spirit)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가난한 사람의 복(누가복음 6:20)입니다. 서점의 기독교 코너에 넘쳐나는 축복과 성공의 간증 스토리들은 대부분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먼저 자기 나라와 자기의 뜻을 구하는’ 성공담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나를 세상 속에 높이 들어 올리셨다.’는 주장은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자기기만입니다. 미안하지만, 쓰는 사람도 거짓이고 파는 사람도 거짓이고 사는 사람도 거짓입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솔직하고 정확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갔고 열심히 교회 봉사해서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간증이 아니라 성공신앙의 간증입니다.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주어진 사회와 인생의 조건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 우리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을 이루고 사회적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금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신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한 ‘사람의 이해관계와 하나님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까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적 성공과 안정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의 자유이고, 그런 기도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배척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던」 ‘위로받는 믿음’의 시작이, 그 과잉된 재생반복을 통하여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적 욕망에 비끄러매어 끌어당기려는」 ‘위로받는 배신(背信)’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진지하고 착한 기독교 평신도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3.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⓶ – ‘세상과 화합(和合)하는 평신도 신앙’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위로’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세상적 위로’로 변질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신도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두 번째 국면(2nd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으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논리필연적으로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화합하는 기독교 신앙,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긴장과 갈등도 느끼지 않는 평신도의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혁명적으로 대립하였는데, 두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사이좋은 동맹관계로 변했습니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같은,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포도주가 물로 변하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평신도의 체감적 신앙 차원에서의 진술입니다.) 이 기적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리가 세상을 따라 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은 거의 다 해소되어 버립니다. 한량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오해가 일어나고, 여기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주문(呪文)처럼 사용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자 우리가 세상에서 구하는 모든 것, 즉 사적·경제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과 공적·정치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 좋은 점수와 진학과 좋은 직장에의 취직과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과 명예와 권력은 모두 갈등 없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는 자들이 물질적 성공을 누리고 세상의 큰 사람이 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주 교묘하고 정교한 개념조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향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세상을 믿는 맘몬 신앙의 완벽한 통일이요 일치요 화합이요 통합이요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의 이러한 변질과 왜곡에 대한 책임은 첫째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평신도들의 이기적인 본성과 연약한 종교성 탓일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이기심과 종교성을 방조·조장해온 한국 교회와 강단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기독교의 이 완벽한 통일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애(障碍)는,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덜 열심히 믿는 것’입니다. 이 장애를 피하는 것은 일차원적으로 간단합니다. 세상의 형통을 누려도 계속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쉽고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의 축복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1등, 세상이 2등’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순서만 바꾸지 않으면 안전합니다.
정의(definition)가 모호하고 열린 개념(open concept)인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블랙홀(Back Hole)처럼 하나님과 세상, 기독교의 믿음과 세속적 욕망을 모두 빨아들여 뜨거운 열로 용해시키고 하나로 합일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보면 얼핏 이상해 보이는 일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국경제의 성장이라는 축복의 주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모시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경제의 축복을 자랑하며 자본주의를 절대시하는 것도, 경제성장에 더 초점을 두는 보수정당을 격렬하게 지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개별 교회가 누리는 인적·물적 성장과 성공의 영적 축복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사회적 성장과 성공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축복과 다분히 닮은꼴입니다. 기독교를 탄압하지만 않으면,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과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독재정권이라도 기독교의 활동과 선교와 전도에 협조적이기만 하면 이 세상의 권력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친근하게 동맹하고 동행합니다.
이상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해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편안하게 사랑해도 되는 것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뭐 우리가 지고 갈만한 마땅한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것은 평신도 신앙에 관한 진술입니다.) 교회 일에 열렬히 봉사하는 것, 믿는 일에 최대한의 시간을 내는 것, 이 정도가 그나마 쓸 만한 질 만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것은 믿는 자로서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교회 일 믿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주고받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식의 계산으로도 우리에게 별로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믿음은 예수님과 성경의 어려운 말씀들을 모두 쉽게 만들어서 희석해 버립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불신자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으라는 의미로만 해석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즉 교회당’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요한일서의 말씀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제한해석하고 조금씩 자제하면 됩니다. 이건 너무 쉽습니다. 믿음이 이 정도로 편안한 일이라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으면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셔야 했는지 조금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세상의 완벽한 일치와 화합, 세상과 갈등하고 긴장하지 않는 편안한 믿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과 화합한 믿음은 세상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요한일서 2:16-17)도 진지하게 따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보다는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기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려는 소원을 갈구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는 무슨 실질적인 내용물(內容物)이 별로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의 일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다,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긴장(緊張)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과 원리에 적응해서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으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부대낌을 경험하며, 세상이 주는 시험을 하나님의 원리로 받아넘기고, 힘을 내서 반격하여 다투는 믿음의 씨름과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땅에 떨어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세상과 너무 일체화된 기독교, 세상의 가치와 사이좋은 동맹관계를 맺은 우리 한국 교회(개신교)는 벌써 세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회개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 평신도들은 잘못을 저지른 일부 교회의 목사님들 때문에 억울하게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살아온,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일체화된 우리 자신의 평신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의 책임과 잘못으로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세상과 화합하는 평신도의 믿음은 다음으로 ‘교회의 울타리에 갇힌 평신도 신앙’과 ‘세상일에 무관심한 평신도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이 일들은 서로 무관하거나 상충되는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오히려 긴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신앙’이 평신도의 발걸음을 주로 교회로 이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화합하는 신앙’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과 갈등하면서 씨름할 만한 일 자체가 없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딱히 할 만한 신앙적 활동이란 것이 없어지고, 자신의 신앙적 열정을 교회 봉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신앙은 또한 ‘신앙과 세상의 대립과 갈등, 인생과 믿음의 모순과 긴장’에 관한 평신도의 신앙적 고민을 없애거나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함’은 세상에 없고 세상과 구별된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액면(額面)상 교회의 일만 생각하고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초월한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참 묘(妙)합니다. 세상을 무시(無視)하는 것과 세상에 항복(降伏)하는 것이 서로 아귀를 맞춘 듯이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인생의 통합이라는 숙제가 이상한 세트(set) 메뉴로 달성됩니다. ‘성(聖)과 속(俗)의 외면적 단절(斷絶)을 통한 내면적 통합(統合)’이라는 모습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