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 : 호모(homo)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Loquens(로쿠엔스) : "말하기" 라는 뜻
이를 두고 사람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 한다.
세계적 인문학자 스티븐 핀컨은 사람의 언어본능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 본능이라고 했다.
몸으로 교감하는 호모섹스쿠스(Homo Sexcus)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이라는 인식이다.
언어적 본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다.
덩달아 발달한 것이 말을 축약한 모바일 문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음성통화에서 문자메시지로, 다시 SNS메신저로 진화하고 있다. 머지않아 서로 휴대전화로 연결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뇌파로 상대의 의사를 알 수 있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Yo는 그러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세이다.
움직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소통하며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비밀이 아닌 시대가 돼 편리하게 이용한 것이 부메랑이 돼 족쇄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데칼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하였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에게는 언어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찾아가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더니 그 안에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을 알게 한다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예, 들어오세요!"
- 비서라고 합니다.
"통화중!"
- 전화 교화원이라고 합니다.
"오라잇!"
-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 엘리베이트 안내양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 목사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 부흥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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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성령인

저자 정보
데이비드
R. 호킨스
호킨스 박사는 영적으로 진화한 의식 상태 및 참 나로서의 신의 현존의 각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저자이며 강사이다.
그의 강연과 저서들은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저자에게 일어난 대단히 진보한 영적 앎의 상태에 대해, 이해
가능하며 명료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초기 3부작에서는 보통의 에고 상태에서
에고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에 관해 묘사하고 있으며, 이 책 『호모 스피리투스』는 완결편에 해당한다.
앞서 나온 두 책,
『의식혁명』(마더 데레사에게서 상찬을 받기조차 했던)과
『나의 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3부작의 출간에 앞서 의식의 본성 Nature of Consciousness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었으며, 이는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수단을 드러내준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성취를 이뤘다.
작품의 중요성은 《뇌/마음
회보Brain/Mind Bulletin》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식에 관한 국제회의’와 같은 곳에서 인정받았으며, 운동역학
테스트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숍은 옥스퍼드 포럼을 포함한 미국 전역과 세계의 다양한 기관, 단체, 영적 회의, 교회 모임 등에서
수차례 열렸다. 숱한 영적 진실이 설명의 부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오해받아온 것을 관찰해온 호킨스 박사는 매달 하루 종일
하는 세미나를 열고 있으며 이는 비디오로 기록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스승’으로 불리는 호킨스 박사의 평생에 걸친
작업의 전체적 목적은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인간 경험을 재맥락화하고, 생명과 존재의 토대이자 계속적 근원인 내재적 신성의
표현들로서의 마음과 영, 양자에 대한 이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화한 영적 신인류인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의 탄생과 전망에 대한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교사로서 헌신하고 있다.
호킨스 박사의 모든 저서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이라는 진술은 그 봉헌을
나타낸다.
옮긴이 백영미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더 데레사의 단순한
길』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죽음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감각의 박물학』 『황금 두루마리의 비밀』 등이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작을 차례로 읽고, ‘더이상 세상을 향해 화낼 일이 없어지는’ 체험을 하면서부터 박사의 저작물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미국 세도나에 거주하는 호킨스 박사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Publisher Description
이 책은 <의식혁명>에서 <나의눈>으로 이어지는저자의 초기3부작 완결편이다.
저자는 인간의식 진화과정을 짚어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구도자들과 행한 폭넓은 질의응답을 통해 영적수행 여정에서 품게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과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내재와 초월을 넘어선 깨달음의 나, 무한한 나에 이르는 질의 응답을 통해 영적 신인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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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안드로포스. anthrōpŏs)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444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사람(마 4:4, 막 1:17, 고후 4:16), 남(6:31, 마 7:12), 인자(마 8:20, 막 2:28, 눅 1:25), 인간(행 4:12), 범인(행 4:13, 고전 15:32).
ἄνθρωπος (Anthrōpos)
‘사람, 인간’을 뜻하는 단어
성경 전반에 걸쳐 인류 전체를 대표하거나 개인을 가리킬 때 널리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 헬라어 원어 : ἄνθρωπος
- 발음 : Anthrōpos(안드로포스)
- 뜻 : 사람, 인간, 인류
성경 구절 예시
마태복음 4:4
οὐκ ἐπ’ ἄρτῳ μόνῳ ζήσεται ὁ ἄνθρωπος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묵상 포인트
“육신을 넘어,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
‘안드로포스’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인간의 본질, 정체성, 구원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
ανθρωπος θεος(anthropos theos. 안드로포스 데오스)
-또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위를 주셨는데, 이것은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And He gave Him authority to execute judgment because He is the Son of Man.
και εξουσιαν εδωκεν αυτω και κρισιν ποιειν οτι υιος ανθρωπου εστιν.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을 히브리어로 אִישׁ אֱלֹהִים ['ı̂ysh 'ĕlôhı̂ym ; 이쉬
엘로힘]이라고 하는데
이쉬는 '남자, 남편, 사람'이라는 뜻의 남성 명사형 단어이고 엘로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남성 복수형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하나님-사람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힘을 다해 추구하십시오(딤전6:11)."
이 구절의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헬라어로 ανθρωπος θεος [anthropos theos ; 안드로포스 데오스]라고 합니다.
데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며 안드로포스는 '남자, 남편'이라는 뜻의 ανηρ [aner ; 아네르]와 '얼굴, 표정'이라는 뜻의 ωψ [ops ; 옵스]가 합성된 남성 명사형 단어입니다.
따라서
헬라어 어원으로 본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진 남자이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하나되어, 그 결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격에 있어서 사람-하나님이 되지는
못하지만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complete God)이시며 온전한 사람(perfect man)이십니다.
안드로포스 - 위를 바라보는 존재
헬라어에서 사람을 안드로포스(νθρωπο)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위를 바로본다는 뜻이다.
사람은 위로 보고 걷는 동물다.
지상의
모든 동물들이 땅(아래)을 보고 살고 있는데 유독 사람만이 위를 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의미로는 동물은 땅에 속하나
인간은 하늘에 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에 속한 존재, 영원에 속한 존재, 영적인 존재,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태초의 사람이다. 아담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아담의 뜻은 땅 색깔을 상징하는 붉은색인 에돔에서 왔다.
이스라엘 성지를 여행하다보면 실지로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에돔지역은 땅 색깔이 구리색을 띤 붉은 갈색이다.
사람은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결국 허무하고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앙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지만 신앙은 복잡하지 않다.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다.
즉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땅의 연약한 인간이 높고 높은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천상의 비밀을 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 앞에서 흙과 같은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깨달을 때 위를
향해서 하늘을 쳐다볼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는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람은 땅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존재다. 하늘을 향해 늘 갈급해하고 목말라하는 갈망하는 존재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슨에 있는 청교도 기념탑에는 믿음(Faith)에서 자유, 교육, 법, 도덕이 나온다고 새겨놓았다.
미국돈
US달라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trust) 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희망의 땅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신대륙이라는 희망을 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새시대 새역사를
만들었다.
안드로포스의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Homo sursum aspiciens)
다른 하나는 희망을 가진 존재(호모 에스페란스)
돼지를 비록한 짐승은 땅을 바라보고
산다.
짐승은 땅에 것만 주면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땅에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인간은 땅에
것이 아닌 희망을 먹어야 만족 할수 있다.
덴마크의 신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지금 이 시대는 절망의 늪에 허우적 거리고 있다.
이 땅의 젊음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빠져있고 많은 소시민들이 빚더미속에서 절망에 빠져있다.
결국 희망이 이 시대를 살리고 희망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정치란 바르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고 우리시대에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사르트르(J.P.Sartre)의 「구토」라는 소설에는 로캉 땡이라는 역사학자가 나온다.
그의 연구과제는 18세기의 어떤 후작의 일생을 연구 조사 한 것이었다.
로캉 땡은 열심히 그의 행적과 유물과 후손을 찾아 헤매다가
갑자가 "그가 누구냐?" 보다도 "내가 누구냐?" 라는 것에 부딪치게 된다.
자신이 누구냐도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전세기의
후작이 누구이며 그의 삶의 근원이 무엇이가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공허한 일인가를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자 그만 자신이 하는 일이 지겹고도 불쾌한 일이 되고 만다.
여기에 이르자 로캉 땡은 인생의 모든 것에서 심한 구토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은 사상적 정서적 구토였다.
아름다운 꽃도 그 본질을 생각하게 되면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되지 못한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아내의 말도 그 본질을 따져본다면 한결 같이 동물적 본성이나 착오일 뿐이다.
예쁜 여인의 얼굴도 추한 구멍들의 집합으로 보여 구토를 느끼게 된다.
정치도 구토를 느낀다.
이 모든 세상은 이 모든 세상을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다 무의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추하고 두렵고 불안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그의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구토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본질에 대한 무의미와
혐오, 그것이 실존주의자 사르트르가 ‘구토’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은 빵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이면서 희망을 가진 결코 가볍지 않는 존재가 사람이다.
잠시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 따라 하늘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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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ἄνθρωπος) 욥기 7:1-10
-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인간(ἄνθρωπος)”이라는 단어는 "위(ἀνά)"와 "얼굴(πρόσωπον)"의 합성어 입니다.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입니다.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허물만 입었을 뿐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안드로포스의 의미는 두 가지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 창조주를 경외할 때만이 희망을 갖게 한다.
덴마크가 낳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하였다.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거나 그걸 얻고자하는 바람이며 좋은 일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사람은 건강을 희망하고 고시생은 합격을 희망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되기를 희망한다.
모두다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행복이란 심신의 욕구가 충족된 상태이다.
누가 그리고 그 무엇이 우리 인간의 심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가.
지식이 많은 사람은 번뇌도 많다.
재벌도 불편한 인간관계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배우 마릴린먼로도 남모르는 자기만의 번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바닷물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을 느낄 뿐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분이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조건 없는 성부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온갖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대속하셨다.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길 잃은 양이다.
희망이 없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자와 대항해서 싸울 능력도 없고 멀리 내다보지도 못하는 근시안을 가졌기에 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유약한 양에 불과한 존재이다.
자기 힘의 한계상황에서 두려워 떤다.
이런 인생들이기에 위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슨에 있는 청교도 기념탑에는 믿음(Faith)에서 자유, 교육, 법, 도덕이 나온다고 새겨 놓았다.
US달라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고 새겨넣고 있다.
그들은 1620년 9월 7일 102명이 천주교도인 영국 메리여왕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하고 희망을 하나님께 둠으로 새역사를 시작했다.
하나님만이 흑암에서 광명을 얻게 하시는 희망의 근원이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살아도 하늘의 법을 따라 사는 천국시민이다.
하늘의 법은 생명의 법이요 또한 사랑의 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사랑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안드로포스이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에 희망의 해가 된다.
우리 모두 희망찬 새해가 보장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고 이루신다.
골로새서 3:1-2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 역시 결코 작은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 한 분만
바라보며 살게 하신 이유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라는 작가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며,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며,
소망이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소망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희망을 얻기는커녕 너무나 자주 실패와 좌절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마음에 채웠던 것들과
사람들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소망이 아닌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리를 향해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골 3:1-2).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외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 수용소(收容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944년의
추운 어느 겨울 날, 그는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쪽 구석으로 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버터 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에
넣고 거기에 심지를 꽂은 뒤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곤 아들에게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패트릭 휴(Patrick John Hughes)는 아들이
태어나면, 두 세 살 때부터 함께 뒷마당에서 미식축구나 야구를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아들이
크면 유명한 대학의 미식축구 팀에 들여보낼 꿈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담당의사는 아이가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아들(Patrick Henry Hughes)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부모는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 굳이 우리여야 합니까?”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들의
몸을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게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했습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도 속에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행진을 할 때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은 채로
탁월한 연주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찾아온 죽음 같은 절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한 그는 ABC방송의 “Home
Makeover”라는 프로그램과 자신의 책 “나는 가능성이다.”(I Am Potential)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파라과이의
한 의사는 군사 정권에 인권이 유린당한 사실에 대해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경찰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그의 십대 아들을
체포했습니다.
고문 끝에 죽였습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대규모의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그때 그는 다른 데모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전기 충격과 담뱃불과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공개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로 물든 매트리스 위에 놓인 아들의 시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데모였습니다.
사람들이
군사 정권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Goddamn”이라는 욕은, 불공평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원망과 저주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발가벗겨지고 채찍과 창
자국이 선명한 그대로 예수께서 매달렸던 십자가는, 세상의 온갖 잔인한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공평한 세상에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비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겹고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존재 목적대로 살 뿐 아니라,
참된 소망까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망마저 잃어버린 욥은
하나님께 입을 열어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습니다(욥기 7:1-6).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여기서 “노동”은
“군대, 전쟁, 부역” 등의 뜻으로, 징집된 군인이 무거운 고역을 의무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듯, 인간 역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그의 온몸은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피부는 짓무르기 일쑤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를 잃어버린 그의 심적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거기다 그는 마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고용되어
하루의 노동 곧 고난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꾼”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품꾼이 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리듯, 하루속히 고난이 끝나기를 소망했습니다.
한편, “내가 여러 달 째 고통을 받으니”를
직역하면 “내가 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 :
NIV)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낳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마저도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은 마치 열매 없는 나무 같았습니다. 또 그에게는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고민하며
뒤척일 수밖에 없었던 밤도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입니다.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입니다. 그리고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보내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을 뿐 아니라, 추한 자신의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욥에게 있어서 밤과 잠은 누구보다 간절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밤이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악화된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습니다. 피부는 아물었다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순간순간 “내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영적 회의와 갈등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당연히 간절히 기다리던 밤을 불면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보다는, 무엇도 기대할 수없는 절망이 그의 삶의 대부분 아니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줄어들거나, 고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질병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처음 고난이 시작될 때 가졌던 꿋꿋함과 정력을 다 부식시켜버립니다.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깊은 절망에 빠뜨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한테는 결코 이러한 일들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부인하시겠습니까?
처음에는 그(James I. Packer)의 병명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약을 써 보았지만 자주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그는 자주 열병과 만성적 관절통과 극도의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우울증이었습니다. 끝없는 절망감을 느낀 그는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손에 붙잡은 것을 놓아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즉시 “손에 붙잡은 것을 놓으라니요? 무엇을 놓으란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는 그동안 다섯 아이들 모두에게 수준 높은 학업 성취와 교양을 요구해 왔습니다.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잡지 편집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교도소 전도 집회를 지원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학교의 이사직도 맡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자신의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신비로운 분이고, 그분께 인정받으려면 끊임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고 믿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영적 완전주의 때문에 자신을 자꾸 정죄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통하여 자신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그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셉트 국제본부 창설자인 케이 아더(Kay Arthur)는 “온 몸이 쑤시는데다가 속까지 메스꺼워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는 중국의 가정 교회 동역자들을 떠올리니 나는 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고통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 중에는 이해되지 않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사명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욥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역사를 근거로 갖게 된 왜곡된 신개념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울 수 있습니다. 왜곡된 신개념을 버렸을 때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어디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차가 철로 위에 놓여 져 있을 때 가장 안전하게 운행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형편을 비관하고 친구들에게 험한 말을 퍼부어 대던 욥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해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7-10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여기서 “바람”은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동시에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한 욥은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 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즉, 6:1-7:6까지는 친구들을 상대로 했던 욥의 변론이 본 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사로잡혔습니다. 끝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영적, 육적 생명이 위급해 질수록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갈망해 왔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갔습니다. 마치 독백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사람은 세상에 잠시 머물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천합니다. 오늘 있다 내일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연약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살 만한 존재도 못됩니다. 거기다 고난 중에 있는 저는 하나님의 어떤 관심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 저를 그냥 내버려두십시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죽음이라는 절망조차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존재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십니다.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놓을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구해야합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62:5, 146:5)라고 고백했습니다. 지헤자는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경우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한 분만 붙잡고 있습니까?
탁월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참을성과 이성과 소망”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참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명료한 이성은 혼란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는 말씀대로,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투르니에의 신앙 간증집 “듣는 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금술
좋기로 소문난 투르니에의 부부가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거기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 그의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며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그는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각종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같은 절망이 밀려온 순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인간(ἄνθρωπος)으로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존재할 뿐 아니라, 참된 소망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까지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있는 사람 - 인간의 學名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學名이다. 유인원과 구분되는 특징은 도구를 사용하고, 말을 하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은 크로마뇽 인으로 직립보행을 했으며, 불을 사용했고,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놀이하는 사람
네델란드 역사가 호이징아(Johan Huizinga)가 저서 <호모 루덴스>(1938)를 통해서 제창한 개념이다. 호이징아는 문화 속의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 문화가 발생한다고 하여 기존의 주장을 뒤집었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말하는 사람
소크라테스(Socrates) -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인간은 도시국가(Polis)에서 나서 도시국가(Polis)에서 죽는다.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인
1) 지식사회와 지식경제를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식 마인드
2) 정보기술 능력과 관찰, 추론, 통합의 사고력
3) 전문성과 보편성의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
4) 세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안목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만드는 사람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사람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적극적인 사람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휴대 전화가 없으면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미래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