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자 루커와 칼빈의 성경 해석 차이

루터의 해석

루터의 성서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문자적 의미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실존적-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성은 시편 51편 해석에서 대표적으로 고찰된다.
그의 시편 51편 해석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한 구원’, ‘의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의 해석

칼빈의 성서해석도 ‘원문을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목회-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된다.
시편을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라고 인식한 칼뱅은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원문에 철저함’,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교회를 위한 해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문자적-역사적 해석)
둘째,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게 하라(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실존 - 실천적 해석)

칼빈의 시편연구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anatomiaom-niumanimaepartium)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기도 하였다.

2. 시편 51편의 해석
(1) 원문에 철저함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무엇보다 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옴’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 (awb)로 표현된다.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편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59)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안에서 인용의 자유로움을 인정했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과정,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2)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칼뱅은 자신의 시편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뱅은 1절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ds,x,)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n:x').
당신의 긍휼(~ymix]r;)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v;P,)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를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루터는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 51편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나 칼빈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설에서 칼뱅의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뱅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적인 활동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또한 칼뱅은 10-12절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64)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3) 교회를 위한 해석칼뱅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힌다.
그는 ‘의인법(擬人法)’(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한다.65)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66)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의 시편 주석에는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예컨대, 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게 하며,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51편 18절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처럼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고,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과 같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 칼뱅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의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의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IV.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과 그 함의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70)67)위의 책, 307.68)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69)위의 책, 261.70)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라. 배덕만, “‘헬조선’과 하경택 |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그 함의(含意)311.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문자적-역사적 해석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brevitasetfacilitas)에 있었다.71)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는 칼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루터와 칼뱅 모두 역사적 어의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it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itmeans)가 드러날 수 없다.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교리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쳐 본문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경향을 경험한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일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다면 것은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interpres)는 원리다. 이것은 성경‘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임희국은 라가츠(Ragaz)의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는 해석학적 원리가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원리를 계승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의 극단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임희국,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장신논단』 48-4 (2016), 13-35. 71)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W. J. Bouwsma,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이양호, 박종속 역,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32장신논단|Vol. 50 No. 2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편중되거나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가 보여주었던 잘못대로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자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 루터와 칼뱅에게는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원리이다. 루터와 칼뱅은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모두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하였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 기능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열광주의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이러한 원리들은 해석자가 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해석자는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경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

실존-실천적 해석루터와 칼뱅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이거나 예전적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동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해석을 지향하였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하였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의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에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면에서 칼빈은 순종을 강조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tertiusususlegis).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은 루터와 칼뱅이 보여주었듯이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V. 결론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지나오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길 바란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케 하였던 물과 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 작동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