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1월 10일(월) 누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별세(別世)하실 것(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榮光(영광) 中(중)에 나타나서 將次(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別世(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후서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별세(別世) 1841. 엑소도스(ĕxŏdŏs) ἔξοδος, ου, ἡ    Storng number 1841


1. 퇴장.  2. 탈출.  3. 떠남  
Pronunciation  [ ĕxŏdŏs ]  
Etymology  /  1537과 3598에서 유래
  •  1. 퇴장, 달아남.
    •  a.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히11:22.
    •  b. [완곡한 표현으로] 떠남, 이탈, 죽음, 눅9:31, 벧후1:15.
    •  c. 운명.
  • 관련 성경  /  별세하실 것(눅 9:31), 떠날 것, 떠남(히 11:22, 벧후 1:15).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몸으로 드러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눅 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나타나실 것(3708)은 보게 될 것을 말합니다.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Pronunciation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별세(別世. 엑소돈)하실 것이란 헬라 단어는 엑소도스라고(1841) 합니다.

구약에서의 출애굽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인생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후에는 두 가지 삶의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생(永生)
둘째는 영벌(永罰)

마태복음 25:46
저희는 永罰(영벌)에 義人(의인)들은 永生(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복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복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死) 죽을 사
부수 [歺]
(죽을사변, 4획)
모양자
歹(살 바른 뼈 알) + 匕(비수 비)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질고(2483) חֳלִי Storng number 2483

1. 병.  2. 내상. 3.  외상  
Pronunciation    [ chôlîy ] 
Etymology  / 2470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4회 사용
  •  1. 명사, 남성 병, 질병.
    •  a. 명사, 남성 내상, 신7:15, 28:61.
    •  b. 명사, 남성 외상, 사1:5
  •  2. 명사, 남성 고통, 괴로움, 근심, 슬픔, 비통, 전5:16(17).
  •  3. 명사, 남성 악, 재난, 불행, 전6:2. 
  • 관련 성경 / 질병(신7:15, 28:61, 렘6:7), 증세(왕상17:17), 병(왕하13:14, 전5:17, 호5:13), 질고(사53:3,4), 고난(렘10:19). [동] 병들다(사1:5).

육신의 몸은 죄가 없을지라도 때로는 불의한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세상의 사건과 사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몽테뉴 /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쇼펜하우에르 / 죽음은 모든 고통의 헤방이다.

셋째는 수고에서 탈출(시편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전도서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살아 있을 동안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수고를 멈추고 쉼을 얻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종류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다양한 차원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 죽음을 단지 ‘육체의 생명 종료’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영적·관계적·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여러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며, 각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결과, 그리고 궁극적인 회복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을 보다 확장하여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죽음의 상징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실제적, 육체적 죽음 (Physical Death)

정의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죽음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본문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특징

  • 전 인류 보편성: 누구도 피할 수 없음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 죄의 결과: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시간 속 존재로 전락.
  • 심판의 예고: 육신의 죽음은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선언입니다.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정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순간에 이미 시작된 죽음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특징

  •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 죄에 대한 감각의 마비: 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됨.
  • 자기중심성의 확산: 생명 대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따름.

회복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관계적 죽음 (Relation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과 왜곡을 겪는 죽음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사랑의 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독소입니다.

본문

  • 아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창세기 3:12) → 책임 회피.
  • 가인과 아벨: 형제를 살해함으로 형제 관계의 파괴 (창세기 4:8).

특징

  • 책임 회피와 비난: 관계의 단절은 신뢰와 책임의 붕괴로 이어짐.
  • 폭력과 시기, 분노: 인간관계가 생명의 통로가 아닌, 고통과 갈등의 현장으로 변함.
  • 사랑의 기능 상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능이 왜곡됨.

회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가 관계적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한일서 4:12)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에베소서 2:14) 

존재론적 죽음 (Existenti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왜곡, 공허, 허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 전도서의 흐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 아담이 숨은 장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특징

  • 존재 불안과 공허: 인간은 목적을 잃고, 인생의 의미를 상실함.
  • 자기 정체성의 붕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분을 잃고, 자기 욕망에 끌림.
  • 삶의 허무감: 모든 수고와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짐.

회복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존재 의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

정의

회개 없이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지속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본문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 “지옥에서는 그 벌이 끝이 없으며…” (마태복음 25:46)

특징

  •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끝남.
  • 의식 있는 고통: 존재는 유지되나,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는 단절됨.
  • 영원한 분리와 슬픔: 생명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음.

회복

이 죽음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약: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단절'이다

죽음의 차원  특징 회복의 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삶의 끝, 죄의 물리적 결과 부활 신앙, 영생의 소망 (고전 15장)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 죄 가운데 죽은 상태 성령 안에서 거듭남 (요 3:3, 엡 2:5)
관계적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된 신뢰, 사랑의 왜곡 화해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엡 2)
존재론적 죽음 자기 정체성과 의미 상실, 공허와 불안 창조주 안에서의 정체성 회복 (고후 5:17)
영원한 죽음 회개 없는 자에게 임하는 영원한 단절과 심판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 (요 3:16) 

결론 :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은 다양한 차원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영적·관계적·존재적 죽음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내며,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죽음을 분리로 묘사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a.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온 세상이 죽음을 겪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창세기 2:17에서, 주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죽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그는 즉각적인 영적 죽음을 경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8). 이후에,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5: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또한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0). 차이점은 아담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9). 그 후, 예수님은 사흘째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죄를 뛰어넘는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 요한계시록 1:18). 그리스도 덕분에, 사망은 패배한 적이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호세아 13:14).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의 막을 내리게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구원을 받은 자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도 진실되어 크리스천의 육체적인 죽음은 “잠” (고린도전서 15:51, 데살로니가전서 5:10)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다시는 사망이 없[을]” (요한계시록 21:4) 때를 기대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서론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첫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 동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주제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결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인류역사상 변천해 온 내용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그에 대한 태도가 변천해왔습니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

윤리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죽음의 여러 가지 의미와 인류 역사 속에서의 태도 변천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죽음의 의미

1) 생물학적 의미

죽음은 생물체의 생리적 기능이 멈추는 상태로, 생명 주기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2) 철학적 의미

철학적으로 죽음은 존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는 주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죽음이 오히려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3) 종교적 의미

죽음은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구원의 과정으로 보고, 사후 세계를 믿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윤회와

카르마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음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2. 역사적 변천

1) 고대 사회

고대 사회에서 죽음은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 왕과 귀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죽음은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되었으며, 장례 의식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2) 중세 시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이 구원의 관점에서 중시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와 구속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장례식은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3) 근대와 현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강조하며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죽음은 점차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며,

장례 문화와 의식도 변화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현대적 관점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명 연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삶의 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4. 죽음과 삶의 질

현대인들은 죽음을 단순한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질과 깊이 연결된 주제로

인식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합니다.


5. 결론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와 태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생물학적,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개인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로 바라보며, 삶의 질과

직결된 주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죽음에 대한 명언(名言) 20篇

1. "죽음은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바라지 말라."

- 존 테러 -

2. "죽음은 생명의 일부로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 -

3.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대우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살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 루이스 스타인 -

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알버트 카뮈 -

5. "죽음은 빈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6.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7. "죽음은 마치 커튼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뒤에서 삶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8. "죽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이다."

- 제임스 콜맨 -

9. "죽음은 생명의 빛깔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10.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목표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 로버트 핀크 -

11.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유이다."

- 헨리 반 다이크 -

12.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 데일 카네기 -

13. "죽음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14. "죽음은 우리가 가진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 윈스턴 처칠 -

15. "죽음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의 연결고리이다."

- 매튜 아놀드 -

16.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7.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

18.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희망에 대한 계기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19. "죽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해주며, 더 나은 버전의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도와준다."

- 마하트마 간디 -

20.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현재 순간을 귀중히 여기도록 유도한다."

- 스티브 잡스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라는 말을 통해, 죽음을 삶과 분리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과 본질적인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명언은 하루키 작품 세계의 근간이자, 그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루키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반대편으로 두지 않고,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필연적 순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지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45.

이러한 하루키의 시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죽음이라는 마지막 이정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키가 전하는 철학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

삶과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근대 철학, 현대 실존철학, 동양철학, 그리고 현대 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소크라테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이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아래 있으며, 철학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 영혼의 불멸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은 영혼이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철학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귀향이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

기독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 즉 신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삶은 일시적이며, 죽음은 참된 삶을 여는 문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데카르트: 인식 주체로서의 존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보다 사고하는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사유의 대상이며,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사고하는 한 존재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인식 가능한 '사건'이며, 주체성은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현대 실존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하이데거: 죽음은 삶의 완성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을 외면하면 삶도 피상적이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 죽음은 무의미, 의미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카뮈: 부조리와 죽음

알베르 카뮈는 인간 존재를 '부조리'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야 한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노자: 삶과 죽음은 하나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운 변화다. 

불교: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불교는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연기) 존재한다고 봅니다.
죽음 역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인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삶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 삶과 죽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 수용 과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 수용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 부정(Denial)
  2. 분노(Anger)
  3. 타협(Bargaining)
  4. 우울(Depression)
  5. 수용(Acceptance)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심리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심리학적 통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 성장의 일부이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의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는 노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적 통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음조차 삶을 빛나게 한다. 

삶과 죽음: 종합적 사유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2.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는 열쇠다.
  3.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5. 죽음의 자각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결론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합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 죽음을 성찰할 것.
  •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삶을 사랑할 것.

오늘 하루,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는 그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임종의 순간, 그는 웃었다…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문이기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의 수도자 묘지. 허성석 신부 제공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도가

①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 (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과정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② 장자: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변화하여 ( 기 )(氣)가 생기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변화하여 ( 죽음 )이 된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연결된 ( 순환 )과정으로 보며 죽음에 ( 초연 )할 것을 강조함.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기빼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이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장자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며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는 것[徒]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게 된다. -장자 (학평 제시문)

③ 장자: “사람이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 준 때를 마음 편히 여기고 운명에 ( 순응 )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 삶을 달관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도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 -장자

문상(問喪)하러 가서 대성통곡하는 것은 자연[天]의 도(道)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받아들여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장자 (학평 제시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픈 일인가? 생명이란 본래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 마치 티끌과 같고, 삶과 죽음의 이치는 밤낮의 변화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자연스런 변화를 바라보노니, 그것이 내게 왔다고 해서 어찌 싫어하겠는가. -장자 (모평 제시문)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대자연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장자 (모평 제시문)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Loyalty is like a mountain, and death is like a red hair)9

단비 2025. 7. 17. 6:06

이 속담(俗談)의 의미는 "의리는 산(山)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Righteousness is as heavy as a mountain, and death is as light as a goose's feather)는 뜻으로, 의리(義理)를 위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뤼순 감옥"(旅顺监狱)에 투옥돼 있을 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뜻은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Think about what's right when you see a profit, and if you see a country at stake, give it your life)는 글대로 국가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본명. 조성녀 趙姓女)는 아들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My son, die with honor for your country!)고 말하였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배신은 내부(內部)에서 시작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부( 外部)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다. 이것을 "내파(內破 implosion)와 외파(外破External break)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신 "최후의 성만찬"(Last Supper) 앞에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背信)을 당하셨다.

그 이름 '가롯 유다'(Garrot Judas)이다.

그는 은(銀 silver)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가롯 유다'(Garrot Judas) 가장 불명예를 남긴 역사의 죄인이요, 가장 불행한 이름, 가장 슬픈 이름을 남겼다.

첫째, , 이력(履歷)이 불명예롭다.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背信者)이다.

둘째, 유산(遺産)이 불명예롭다. 은 30냥으로 ''피의 땅 아겔다마"를 샀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이 불명예롭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自殺)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Martyr)는 못 될지언정 역적(逆賊 Rebel)을 스스로 자처했으니 그는 천추만대 부끄러운 존재로, 예수님은 그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의 불행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His bad luck is all of his own doing)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 것이다(He has sown the seeds he has sown)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Death is not a period. by 김소엽 시인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우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사 재 미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지겨운 세상, 모든 고통을 순간적으로 끝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 다. 그리고 인생사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죽지 않고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으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늘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는 것과 죽음은 정말 어감이 다릅니다. 자는 것은, 마치 쉬는 것과 같습 니다. 자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 을 때, 저들은 홀연히 죽음이 쉼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기분좋은 쉼표입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지난 날의 피로가 다 풀려, 새롭게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 럼,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쉼표’로 만들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샬롬. 2021.04.04.



죽음이 인생에게 말하는 것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 연구소
4–5 minutes

인간의 실존, 유한하고 때론 무력한 존재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실존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와 무력한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으로 인해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보다는 살아가야 함에 대한 깊은 무게와 걱정이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만인에게 공평한 조건이기도 하다.

  Gustav Klimt 18621918 Tod und Leben Death and Life 191015   1805   2005 mm    삶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이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못다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죽음과 삶', 1910/15, 캔버스에 오일, 180.5 × 200.5 cm,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

죽음 앞에서 삶을 조우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보통은 어떠한 경험보다도 강력한 삶의 역경이다. 죽음이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죽어감의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교차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역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후회는 개념적으로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불만족과 불쾌감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반추하는 경험도 한다Tomer & Eliason, 2008. 그리고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통합의 반대 개념인 절망despair으로 다가오기도 한다Erikson, 1963.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어떤 후회를 할까? 과거에 대한 후회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와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과거에 한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후회를 한다Tomer & Eliason, 1996. 예를 들어, 자신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게 되는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의 것을 더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인관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깨어진 가족관계, 용서하지 못한 타인, 단절되고 고립되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무리할 것인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큰 연관이 있다장민희, 정태연, 2018.

흥미롭게도 이러한 후회는 젊은이들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토머와 엘리아슨은 백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과거 후회할만한 일을 제시하고 어느 정도 후회하는지 평가하도록 했다Tomer & Eliason, 2005. 그 결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한 것, 친구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공통된 후회에는 돈의 축적과 같은 것이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죽음은 존재와 삶에 대한 반추를 하게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추의 힘이 과거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한 동안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어린 나이에 무턱대고 시작한 연구 주제였는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조각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큰 의미이다. 그리고 때로 내 인생의 무게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기도 한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일, 나의 여러 삶의 조건에 불만족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특히나 내 옆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머지않아 큰 후회가 될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일, 내 옆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에 반드시 깨달아야할 삶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인생에게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야할 이유와 희망을 제시하는 삶의 역설이지 않을까.mind


<참고문헌>

  • Erikson, E. H. (1963). Childhood and society (2nd ed.). New York: W. W. Norton.
  • Tomer, A. & Eliason, G. T. (1996). Toward a comprehensive model of death anxiety. Death Studies, 20, 343-365.
  • Tomer, A. & Eliason, G. T. (2005). Life regrets and death attitudes in college students. Omega, 51, 173-195.
  • Tomer, A. & Eliason, G. T. (2008). Regret and death attitudes. In A. tomer, G. T. Elisson, & P. T. P. Wong (Eds.), Existential and spiritual issues in death attitudes, (pp. 159-172). New York: Lawrence Erlbaum Associates.
  • 장민희, 정태연 (2018). 호스피스 봉사 경험이 삶과 죽음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연구, 26(2), 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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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대학원 겸임교수 사회및문화심리 Ph.D.

전 생애에 걸친 자기(Self)와 정체성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와 문화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연구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