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聖經的) 신앙(信仰)
(도입 이야기)
믿음 없이 장로직을 20년 이상 하였다니.....
어떤 교우가 꿈에 새 예루살렘 성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높은 시온 산꼭대기는 새 예루 성을 잘 지어 금강석과 홍보석, 녹보석 등 가지 각색의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구나!” 하며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문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습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 성에 왔구나!”
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리자 마자 곧 문이 열리더니 베드로가 걸어 나옵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아무게 올시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城)에 들어오려면 믿음의 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표를 가지고 왔느냐?”
“네, 가져왔습니다.”하며 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의 표가 없었습니다.
옆주머니를 뒤져보니 거기도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믿음의 표는 없었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습니다”
장사꾼이었던 이분은 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믿음의 표는 없지만 아무 교회에 몇 십 년 이상 다녔는데 좀 들어갈 수 없습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되네, 아무리 오래 다녀도 소용없네. 믿음의 표가 있어야 하네” 라고 강하게 대답하자,
“그게 아니올시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 일을 20여 년이나 했습니다. 그래도 들어갈 수 없습니까?” 라고 사정을 하자,
베드로는 ‘장로 일을 20여 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어지간히 말썽꾸러기였겠구먼’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분입니다.
큰 소리를 내며 문을 “꽝” 닫는 소리에 깨어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꿈이 아니었으면 어떻 할 뻔 했겠습니까?
한글개역성경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려고 검색창에 "믿음"이란 단어를 입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사용되었을까요?
구약 성경에서는 1회
신약 성경에서는 224회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성경은 "하박국서" 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새번역)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사람(humble person)
둘째는 정직한 사람(honest person)(truepenny)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할 겸(謙) 겸손할 손(遜)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현대인) 모세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새번역)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공동번역)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
광야(미드바르. midbâr) מִדְבָּר
전치사 민(min) מִן-와 함께, -와 더불어
명사 다바르(dâbâr) דָּבָר
말씀, 사건
"광야는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사건)를 경험하는 장소(시간)"민수기 14: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나?
출애굽기 32:16, 19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민수기 20:8, 11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미디안(Midian) 광야
10가지 재앙을 목격하고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꿈에 그리던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하루 길이면 갈 수 있는 쉬운 길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합니다.
성경은 이를 민수기 14장에 나온 ‘40일간의 가나안 정탐’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으로 설명합니다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번역하면 ‘미드바르’입니다.
이는 ‘∼로부터’ ‘∼와 함께’란 의미의 전치사 ‘민’과 ‘말씀’ ‘사건’이란 의미의 ‘다바르’란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곧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사건)를 체험하는 시간이자 장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때 광야는 나무나 풀 등 생명이 자라기 힘든 역경의 장소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광야는 가나안 입성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곳입니다.
인생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결코 무의미한 시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광야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가 말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숲속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소지품을 다 빼앗고는 “이게 전부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칸트의 아버지는 “그게 전부요.”라고 말하고는 어서 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무언가 묵직한 것이 손에 닿았습니다.
옷 속을 살펴보니 금덩이가 꿰매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되돌아가 강도들에게 금덩이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이걸 옷 속에 넣어둔 걸 깜박했소.”
강도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빼앗은 물건을 모두 되돌려주고 사라졌습니다.
현대 사회는 정직한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하지만, 가장 강한 힘은 바로 정직한 사람의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길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그 결과는 믿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광야' 하면 제일 먼저 황량하고 척박한 땅, 음식과 물이 귀하고 자연환경도 열악한 불모의 사막을 생각하기 쉽다.
광야는 일반적으로 죽음과 쇠퇴, 파멸의 땅을 의미한다. 광야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기아와 갈증이 존재한다. 또 무서운 모래 바람, 위험한 뱀과 전갈 등이 인간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의미가 깊다.
그들은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민수 14,33). 이 광야 체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적의 공격, 부족한 물과 음식, 빗발치는 백성의 불평을 무릅쓰고 민족 지도자 모세는 백성을 이끌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통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닐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5,22-26). 동시에 하느님과의 친교 장소로서 그분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6,32).
성경은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또 백성이 궁핍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간청하는 소리를 듣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은혜란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는, 가장 기본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의 제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징들을 보게 된다.
이처럼 구약에서 광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장소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해 주시는 곳으로 보호와 영적 쇄신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창세 16,7-13). 구약성경은 광야의 이미지를 사용해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표현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 직무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로 40일을 보내셨다(루카 4,1-13).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예수님께 광야는 기도의 장소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셨던 곳이었다(루카 4,42). 신약성경에서 광야는 고행이나 수련, 정화, 기도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극기 생활을 하면서 회개와 세례를 촉구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사는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고 불평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장소다.
성경에 광야의 이름이 일곱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미드바르, 아라바, 예쉬몬, 호르바,치야, 토후, 예레모스
이와같은 어원들을 영역하기를 사막(deser), 황야(wilderness)로 번갈아가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사막이나 황야로만 이해될 수없습니다. 고고학지들은 이른바 광야는 완전히 경작되지 않았다거나,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이거나,그 안에는 목초지와 평원이 있고, 샘물과 가끔 비가 오고 거기에는 물을 끌어들여 마을도 세우고, 대상로를 유지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밝혀줍니다. 성경에서 주로 언급되는 광야, (또는 사막)는 트랜스 요르단,고란고원,사해부근 ,그리고, 시나이 반도에 있는 광양들입니다. 이상 일곱개의 낱말에 나타나 있는 광야의 뜻을 제 나름대로 통합을 해보면은, 양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초장, 한정되었으나 시나이 사막과 같은곳, 씨 뿌리지 못하는 땅, 사람이 없는 땅,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 폭풍이일어나는 바다와 같은 광야, 회오리바람의 현장이요 무서운 땅 적군에 의해서 패배당한 한나라의 모습과 간이 황량한곳 폐허, 버려진 땅, 물이 없는땅 황무지 사막처럼 텅비고 길이 없는 지역, 광야, 사막, 외로운 곳으로 종합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여행하며, 경험한 바로는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춥고, 먹고마실것이 없는 곳, 생존의 위협을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되는 저주받은 공포의 땅으로 느꼈습니다. 나무 그늘이 없어 비탈진 산그늘에서 까마귀떼가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모진 엉겅퀴들이 자라며, 드문드문 멀리 싯딤나무들이 서있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아직도 베드윈 족속들이 양을 치며 사는 땅, 온통 산은 구리빛으로 변하고, 흙이 물을 빨아들일 수 없는 죽은 땅으로 사람 살곳이 못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밑으로 수로가 있어 중간 중간 오아시스를 형성하고 있는 신비의 땅이었습니다.
2. 본 론
그런데 이스랑엘 백성들의 역사와 신앙과 신학은 광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의 소명이 그렇고 엘리야의 생애가 그러했으며, 세례요한의 생야가 광야로부터 시작되었고, 사도바울의 생야가 그렇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몰 때 예수님의 공생애 역시 광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살기 힘든 광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광야로부터 시작하셨는가?
첫째,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세계를 떠돌면서 또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면서 많은 우상을 보았고, 또 그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 우상 가운데는 짐승의 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경험도 가졌습니다. 정착된 농경사회 속에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일런지 모르겠으나, 광야생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한인위적인 잘못된 종교행위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양의 짐승은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인간은 너무도 위약한 존재였습니다. 해갈이나 기근, 더위와 추위등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산도, 들도 그들의 안전을 도모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오와 하나님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107:35에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내시고, 식량을 공급하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훈련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곳이었습니다.
왕상 19:4-7에 보면은 바알 선지자 450인을 죽인 엘리야를 이세벧이 죽이려하자 엘리야는 유다 광야로 도망칩니다. 거기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다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마스커스로 보내어 아람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개혁하도록 하십니다. 이와같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처소였습니다.
네번째,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찾아가는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히 11:38에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박해 받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로운 광야로 나가 묵상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공인을 받은 후 인류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는 처소였습니다.
3.결 론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연단하는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케 하는 역사적인 수련장이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롭게 찾아가 묵상하며 기도하는 기도처였습니다. 이러한 광야생활에서 시험을 물리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첫째 경제적인 시험이요, 둘째는 명예와 결부된 종교적인 시험이며, 셋째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야할 정치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종교적인 온갖 시험을 물리치므로 크리스천으로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1139 [코이네자료실]
광야의 의미(신명기 8:1-6)
1. 광야란?
성경에는 광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도 광야 같은 세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여기서 광야라는 말은 에레모스(e[rhmo")로 고독한, 황량한, 외로운 등등의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광야란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힘들고 어려운 척박한 땅을 지칭하지만 성경에서 광야는 늘 시련과 시험, 훈련의 장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그 광야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가 나옵니다.
6절에서는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천이백육십 일은 거룩한 성이 짓밟힘을 당하는 기간(11:2절), 두 증인이 증인의 사역을 하는 기간(11:3절), 그리고 짐승이 통치하는 기간(13:5절)과 같습니다. 마흔 두 달과 천이백육십일은 같은 기간에 대한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보후 가운데 양육되고 성장하고 훈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광야란 교회가 부대끼며 훈련 받고 성장하는 곳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활개를 치며 교회를 공격하는 곳입니다. 치열한 전쟁이 수행되는 곳입니다. 반대로 광야는 양육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훈련은 곧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에서 광야는 교회가 존재하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제 몫을 감당하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성장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치열한 곳입니다. 어려운 곳입니다. 무엇하나 풍족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 광야의 내용적인 의미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만큼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곳도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왜 교회의 자리를 광야에 두는가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이렇게 척박하고 힘든가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본문을 보시면서 광야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광야에서 기억해야 할 것, 그리고 광야의 참된 의미를 배울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광야에서 지켜야 할 원칙
언젠가 잘 모르는 곳에 대한 기독 사진가 협회 회원들과 출사를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자가 길을 헤매는 듯이 보였습니다. 여긴가 저긴가 하는데 해는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을 향해서 무작정 달렸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물어 찾아간 곳은 엉뚱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고생고생해서 다시 길을 올라 처음 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인도자의 안내를 받아 겨우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광야는 거칠고 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인도자가 주는 매뉴얼을 잘 숙지하고 인도자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실족하고 넘어지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원칙은 말씀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여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사실 본문의 구조는 1절과 6절이 봉투를 형성하고 그 안에 광야의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과 6절은 광야에서 살아남는 법이며 2-5절은 광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교회가 생존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광야를 밝히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교회가 길을 잃지 않고 생존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저는 과거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가다가 수 없이 길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생겨서 내비게이션을 정말 잘 보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고속도로 중심으로, 또 가끔은 엉뚱한 길을 돌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진정한 광야의 내비게이션이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잘못된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길 끝에는 항상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의 말씀이라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잘 따라가야 합니다. 딤후 3: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고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져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그럽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제자라는 말이 바로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그런 것처럼 광야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길을 잃지 않고 옳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의 길을 따라가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는 치열한 싸움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샬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는 교회, 그런 광야 교회가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광야의 의미(2-5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교회를 광야에 두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올 때 그 교회 이름을 광야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세상도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왜 교회의 자리를 광야라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치열한 싸움이 있고 길을 잃을 가능성이 많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곳에 두시는 것일까요?
1) 마음이 어떤지
우선 우리는 2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기억하라고 도전합니다.
신8:1-10:11절은 신6:1-11:25절이라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우상을 멀리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신8:1-10:11)은 광야생활의 경험을 말하면서 계속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8:2-10절은 너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8:11-20절은 가나안의 풍요로운 삶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9:1-6절은 하나님이 네게 땅을 주신 까닭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7-10:11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교회가 서 있는 자리인 훈련의 광야에서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까?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하나님이 걷게 하신 것입니다. 척박하고, 물이 귀하고 먹을 것이 귀한 광야입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도 많이 가질 수 없는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를 하나님이 걷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분명히 그 광야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광야의 의미 첫 번째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시는 훈련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광야는 낮추심의 광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낮추심 앞에 마음이 어떠한지를 시험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즉 광야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훈련장입니다. 하나님의 낮추심은 광야라는 혹독한 환경과 배고픔이라는 어려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광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낮추시고 또 낮추십니다.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신뢰하는 훈련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훈련이 40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낮추심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훈련장입니다.
2) 광야는 염려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훈련장
그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입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광야에서만 먹었던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자연적 소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출16:15).
그리고 그 때부터 40년 동안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 일용할 양식으로 지족하고 자족하는 훈련을 하게 하십니다. 안식일에는 이틀 분을 거두어 먹을 수 있게 하셔서 그침의 훈련도 겸하게 하십니다. 그 40년 동안 만나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의 세계관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40년 동안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한 벌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다고 읽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그들을 낮추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용할 양식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장이었습니다. 광야는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 자체로 척박하고 온갖 공경들에 노출된 곳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낮추신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내일 일에 대한 염려의 세계관이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일 하나님이 만나를 주셔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내일 주실 만나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장이면서 염려의 세계관을 내려놓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훈련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용할 양식의 훈련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하십니다.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떡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뒷날 이 말씀을 누가 인용합니까? 예수께서 마4:4절에서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주님이 답변하신 것입니다. 이 돌들을 들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 성도가 매일 먹어야 하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은 단순히 떡으로만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게 하시는 훈련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만나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 앞에 서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과 만나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는 단순히 먹거리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 만나를 매일 먹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깊은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도 매일 먹어야 삽니다. 광야는 그것을 가르치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만나는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의 광야에는 징계의 성격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징계함같이 징계하는 줄 마음에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징계라는 말은 '야사르'(rs'y:)는 '고치다' 흑은 '교육하다' 혹은 훈련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자리가 광야인 것은 믿음의 훈련장이라는 의미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는 오늘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존재해야 하는 우리의 광야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신명기의 광야는 훈련의 광야요 거친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광야는 오히려 흘러 떠내려가는 광야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는 광야에서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흘러 떠내려가게 하고 미혹하여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시대의 광야가 거칠고 험난한 광야가 아니라 너무 편하고 안락해서 흘러 떠내려가는 광야라고 느낍니다. 위험은 이 광야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사사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거친 광야를 지나 안락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적들을 남겨두시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을 온전히 내 쫓고 말씀에 순종해서 타협하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좀 편안해 지면 여지없이 흘러 떠내려갑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자녀들을 이방 사람들에게 시집보내고 장가보냅니다. 치열한 광야에서는 그래도 원방과 불평을 하고 징계를 당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흘러 떠내려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안함의 광야에서는 타협과 변질이 난무합니다.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 치명적인 독이 난무하는 광야가 바로 가나안이라는 광야입니다.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이 땅이 영원하지 않고 우리네 인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처럼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광야의 의미를 분명히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는 분명한 목적지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더라도 길을 잃기 쉬운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유일한 빛이 바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광야는 훈련장입니다. 어려움이 많습니다. 유혹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믿음이 있어야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쳐서, 실족해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이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믿음입니다.
거친 광야보다 더 어려운 광야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리 했던 것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게으름의 광야입니다. 이 광야는 타협과 변질이 난무합니다. 샛길이 옳은 길로 둔갑하는 곳입니다. 말씀 대신 다른 것들이 신앙생활을 채우는 곳입니다. 거친 광야보다 훨씬 치명적인 유혹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광야보다 계시록의 광야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으로 인도받지 못하면 이 광야에서는 언제 흘러 떠내려갔는지 내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이 광야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광야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올바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광야는 편안하고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광야의 의미를 기억하시면서 광야의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이 광야를 잘 살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받아 영원한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맛보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을 바꾸라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 사람은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었다.
집에는 며칠 동안 직장을 못 얻어서 처자식들이 굶고 앉았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망하면서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본래 이 사람은 슈퍼마켓을 경영했는데 동업하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원망을 하며 길을 가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하면서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까 두발이 없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발이 없어 휠체어에 앉은 분이 날씨 좋은 건 또 뭐요. 저 사람도 날씨 좋은 날이 있나?’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만에 가득한 자기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화장실에 있는 큰 거울에 써 붙였다.
“구두가 없어서 불편하거든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라!”
그 순간 생각이 바뀐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넉넉하다.’
그는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전개 이야기)
믿음이란 무엇일까?
한글개역성경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려고 검색창에 "믿음"이란 단어를 입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사용되었을까요?
구약 성경에서는 1회
신약 성경에서는 224회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성경은 "하박국서" 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새번역)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사람(humble person)
둘째는 정직한 사람(honest person)(truepenny)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사무엘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받은 사랑이란 사실상 내가 모를 때 받은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 중지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육학에서 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엄마의 모유를 먹었습니까?
아마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4살 이후에도 모유나 우유를 먹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몰라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저 분이 나를 도왔다더라, 그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피부로 기억으로 알게 되어 있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를 때, 알지 못할 때에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집 갈 때 새색시를 가마에 태우고 갔습니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보며 가지만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옛날 어른들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서 따라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다.
그래서 신랑집에 도착하면 소망과 믿음의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안에서 신부가 나와 신랑에게 간다.
그러므로 사랑이 영원한 것이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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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믿음'은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지식 (episteme, 에피스테메)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정보를 쌓고,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으면 믿음이 생성되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찾아 다닙니다.
그러다가 정작
가져야 할 바르고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한다.
믿음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믿음과 지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과 동일시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할수록 믿음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이나 신유나 축사와 같은 신비한 체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에 기초한 어떤 신앙적 체험과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이고 신비한 경험을 믿음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없이 그냥 덮어
놓고 성경을 믿고, 지도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소위 따지지 않는 믿음 즉 맹신이 큰 미덕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된 믿음에 대한
세 가지 태도는 현재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본질은 위의 세 가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첫째, 인격적인 신뢰 (personal trust)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뢰란 믿어 주는 것(believing in), 그 사람이 믿을만한(trustworthy)분임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depending on), 의존하는(relying on) 것을
뜻한다.
믿음의 대상에게 기대고 의탁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entrusting)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격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선한 의도와 능력을 믿고, 그 분에게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며, 또한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시고, 동시에 예수님 만이
우리의 참된 주님이시요 임금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주권을 양도하는 것 즉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인격적인 신뢰라는 말은 어떤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우리 믿음의 간접적인 대상이긴 해도,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설명되고 정리된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적 진리와 교리가 증거하고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 바른 지식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하고,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바른 지식을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지식이 바른 믿음의 기초가 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그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믿음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의심도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지성적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그 지식과 함께 시작된다. 그래서 때로는 의심이 일어날 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번도 우리에게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도리어 질문과 의심이 섞인 약한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이 되도록 도움을 요청하라고 권면한다 (롬 1:17). 중세 신학자 안셈 (Anselm of Canterbury, 1033/4-1109) 이 주장한 것처럼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일 수 밖에 없다.
셋째, 신앙적 경험과 체험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믿고
의지할 때,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삶에 실재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믿음이 가진 그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경험,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체험, 용서가 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는 경험,
사랑과 무관했던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가는 경험, 때로는 신비한 은사에 대한 체험 등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이 바로 참되고 바른 믿음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넷째, 믿음에 일치하는 행동
참된 믿음은 순종과 실천에 이르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의 삶 속에서 순종과 선행과 실천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고백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 가짜
믿음, 귀신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 (약 2:19).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순종이
따른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 주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우리의 순종이 연약하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믿음은 항상 순종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뿌리라면, 순종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나무는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마련아닌가?
성경이 말하는 참되고 바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사이에 높이 48미터, 너비 9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다.
이 엄청난 폭포와 관련한 일화가 많은데, 19세기 중반 찰스 블론딘이라는 곡예사가 외줄타기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한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줄 위에서 눈을 감고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찰스 블론딘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물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열렬한 응원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저는 솔직히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게 너무 싱겁습니다. 제 실력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저는 사람 한 명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널 수도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환호하며 “당연히 믿지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곡예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블론딘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토록 저를 믿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누가 저의 등에 올라타고 저와 이 계곡을 건너시겠습니까?”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젓고 있을 때, 실망한 블론딘은 그의 매니저이자 오랜 친구인 해리에게 가서 “자네도 나를 믿지 못하나?”라고 물었다. 친구는 “믿고말고”라고 대답하고 그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무사히 계곡을 건너갔다.
믿기는 믿는데 타지는 못하겠다?
그것이 과연 믿음인가?
믿는다고 말만 하고 그 진리에 몸을 싣지는 않으면서 믿었다고 여기고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지식적인 동의나 희망사항은 믿음이 아니다.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로마서 10장 17절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저에게도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게
하옵소서.
진짜 믿음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내가 주님을 믿는 자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 믿음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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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Belief, Faith)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信念)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信仰), 신심(信心), 신앙심(信仰心) 등으로 불리며, 신과 신이 주신 말을 믿는것이다.
맹목적 믿음이 분쟁과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믿음이란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믿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기독교에서 믿음이란 예수에
대하여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 정, 의가 작용하는 신뢰를 말한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점점 사후에 신격화되어 만들어진 "예수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여지고, 삶의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며,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거듭나서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한편 기독교에서 신앙 또는 믿음(faith)이란 낱말에 대한 정의에 관해서는 논란이 되곤 한다.
계통적 서술에 의하면 히브리서에 있는 "희망하는 것에 대한 확신,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으로 본다.
대부분의 기독교 이론들이 역사적으로 이 성경적 서술을 따라왔다.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여 신이 그의 자비로운 의지, 또는 인간에 대한 계획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해 관리한다는 - 현실을 초월한 영역을 실제로 믿음을 포함한다.
기독교가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구분되는 것은 예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그가 고난과 부활이 예언에 따라 입증된 구원자(그리스도, 크라이스트)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성서의 믿음에 포함되는 내용이다.
기독교의 대부분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믿음)은 예수가 그의 아버지 성령에 의해 부활했음을 믿는다.
정확한 “믿음”이란 단어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전통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보편적으로 예수가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믿음에는 공통점을 보인다.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중심이 되기 때문에 “믿음의
종교”라 불리기도 한다. 신앙 또는 믿음(faith)과 믿음(belief)이란 개념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사람’으로 간주되듯
빈번히 동의어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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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 찰스 스펄전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때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설명하는 말은 많습니다만, 거의 모든 설명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 이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읽으면 믿음을 설명하기가 더욱 복잡해진다고 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누구도 이해시키지 못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 지식, 동의, 신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지식과 동의와 신뢰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다(지식)
지식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로마 가톨릭 사제 들은 모르는 것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모양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롬 10:1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어떤 사실에 대해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저것을 믿지만, 듣지도 못한 많은 것들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들어야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신뢰한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그는 여러분의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선지자는'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55:3)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복음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찾아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알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자 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십니다(히11:6).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복음을 아십시오. 기쁜 소식이 무엇이며, 값없이 주시는 용서가 무엇인지, 회개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외에 수없이 많은 축복들에 대해 배우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십시오. 복음을 배우십시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를 아십시오.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신으로서 하나성과 연합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 손으로 각각 하나님과 사람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분은 죄인과 세상의 심판자 사이를 연결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바울은 회심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수록 더욱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은 더 욱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교리를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이 지향하는 목표의 중심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노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히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음을 알기 바랍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를 깊이 연구하십시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죄에 대한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믿음은 동의(belief)하는 것이다
이제 생각은 그 지식이 진실하다고 동의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분은 진실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또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사실이라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이 말세에 그의 성령으로 전에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신 위대한 진리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 다음에는 분명히 그리고 진실로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요, 인류의 구속자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완전하고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은혜로운 복음에 두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죽으시고 살아나신 구주께 위탁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대속의 피에 씻으십시오. 그의 완전한 의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신뢰는 믿음에 생명을 주는 피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을 종종 '기대 누움'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의미를 알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단에 기대고 있습니다. 저의 체중을 모두 여기에 기댔습니다. 이처럼 늘 그리스도께 기대십시오. 온몸을 한껏 뻗쳐서 바위에 기대어 남작 드러눕듯 그리스도께 완전히 던지십시오. 자신을 그리스도께 던져 그분 안에서 쉬며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짐작이 아닙니다. 확실한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비실제적인 것, 꿈같은 것도 아닙니다. 신뢰하는 것으로 계시된 진리에 그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리에 거는 것입니다. 쉬운 말은 아니지만,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시인의 말은 제가 의미하는 바를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 걸어라, 모든 것을 걸어라.
다른 어떤 신뢰도 침투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이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한 방법입니다. 혹시 제가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는가?
다시 살펴봅시다. 신앙이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친히 말씀 하신 그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행하신 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고, 성품은 완전하시며,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지고 친히 나무에 달리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허물을 해결하셨으며, 죄에 종지부를 찍으셨고, 그리하여 영원한 의를 가져오셨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가 ‘부활’하셨으며, 그리하여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증보하고 계시고, 그는 영광을 입으셨으며, 천국에 자기 백성이 있을 곳을 마련하시고, 곧 세상을 의로, 그의 백성을 공평으로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다고 굳게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9:7)고 증거 하신 사실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도 증거 하신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과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심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 하신 대로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그분은 분명 우리가 그분께로 갈 때 우리를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수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다면, 이 생명수는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생명의 샘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약속하신 것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밀고 그분의 약속에 따라서 용서와 칭의와 견인과 영원한 영광을 그분께 받을 것이라 믿어야합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행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그 분을 신뢰 하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에게 그분은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친히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나를 위해 행하신다.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지정되신 그분의 손에 나를 맡긴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실 것이라 믿으며, 그분의 약속을 의지한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그에게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닥치든, 그가 어떤 어들과 침체에 빠지든, 그가 어떤 허물과 죄를 가지든 이 처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정죄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설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설명이 하나님의 성령께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믿음에 대한 예화
믿음은 지식의 분량이나 혹은 다른 이유들에 따라 그 수준이 매우 다릅니다.
때로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께 매달리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의지한다는 생각, 또는 의지하겠다는 의지에 불과한 것 입니다.
바닷가에 가면 우리는 바위에 붙은 조개를 볼 수 있습니다.
바위 위를 살금살금 걸어가 막대기로 힘껏 내려친다면 조개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조개를 내려치는 소리를 옆의 조개가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옆의 조개는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립니다.
여러분은 그 조개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치고 또 쳐 보십시오.
막대기만 부서질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조개는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달립니다.
자기가 매달린 바위에 대해, 그 바위의 지질학적 성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매달립니다.
그 조개는 매달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조개가 아는 작은 지식입니다.
그리고 조개는 그 구원 의 바위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사용합니다.
매달림으로 써 조개가 생명을 얻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이상의 지식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목숨을 다해 예수님께 매달리는 데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강하고 능한 구주십니다.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반석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이 매달림이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매달리는 성향을 주십니다.
마당에 자라는 완두콩을 보십시오. 혹시 콩 줄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면, 줄기를 들어 시렁 위에 올리거나 붙들어 매 보십시오. 줄기가 이내 시렁을 붙잡을 것입니다. 완두콩은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는 덩굴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두콩은 위로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덩굴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모두 하나님을 향한 덩굴손이 있습니다. 생각과 소원, 소망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믿음이지만 아주 완전하고 효과적인 형태의 믿음입니다. 사실 이것이 모든 밀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거나 우리의 생각이 병들고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종종 이 믿음으로 이끌립니다. 다른 무엇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매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에 대해 마땅히 알바를 알지 못한다 해도, 아는 것에 매달리십시오. 자신이 아직 생명의 강에 겨우 들어선 어린양 같습니까?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갈 만큼 강하지 않다 해도 그 생명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헤엄치기 때문이 아니라 마시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달리십시오! 예수님께 매달리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 다른 믿음의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따릅니다. 첫 번째 예화에 나온 조개는 바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하려는 단계의 믿음에는 더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내자를 신뢰합니다. 안내자 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내자를 신뢰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습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도, 그는 시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내자는 시각을 가졌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을 안내자의 손에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좋은 예화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가 가지지 못한 공로와 능력과 축복을 가지고 계심을 압니다. 그래 서 기쁨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뢰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권위와 사랑에 근거한 믿음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자신이 배우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리 선생님이 지구의 형태와 어떤 큰 도시, 또는 국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학생은 이것이 사실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선생님과 교과서를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믿음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의 과학적 발견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확신합니까? 저명한 학자의 권위가 그 근거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한 실험을 직접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증거 한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무한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와 주인으로서 자신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과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또 하나의 고상한 형태의 믿음은 사랑에서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신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그 아이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 약간 더 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신뢰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사명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인애에 흠뻑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은 힘듭니다. 만일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 다음에는 질투라는 끔찍한 감정이 기 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처럼 강하고 무덤처럼 잔인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온통 신뢰하고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합니다.
구주를 사랑으로 신뢰하는 방법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는 매우 심각 한 병에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자기 남편이 그 질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수없이 치료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손에 맡겼으니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최선을 다해 모든 기술과 사랑을 쏟을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합당하고 담연합니다. 남편은 어느 모로 보나 아내가 그런 신뢰를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갖는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의사는 없습니다. 그분처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그분이 어떤 처방을 내리든 받아들이고, 무엇을 요구하든 따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도하시는 한 잘못된 지시를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량하시기에 우리로 멸망을 당하게 하시거나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
믿음은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주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 결과 다음 예화의 어린아이가 보이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그 영혼 안에 생깁니다. 광풍이 불자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그 귀여운 아이는 즐거워하며 기뻐서 박수를 칩니다. 번개가 번쩍여도 창가에 서서 "엄마 보세요. 아름다워요, 정말 아름다워요" 라고 소리칩니다. 어머니는 "얘야 이리 온. 번개는 무섭단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만드시는 그 아름다운 빛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의 어린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하지만 저 무서운 천둥소리를 들어 봐." 라고 말하자, 아이는 "엄마가 하나님께서는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래" 라고 대답하자,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니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아주 큰소리로 말씀하셔요.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엄마? 아이는 새처럼 즐거워합니다.
아이가 이처럼 평온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바라보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번개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입니다.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자연 법칙과 전기 에너지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녀에게 위로를 주지는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작지만, 그 지식은 확고하고 소중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해져서 자명한 진리에 위로받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이론들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를 더 좋아합니다. 후드(Hood)의 다음 노래는 심오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그 검고 커다란 전나무.
나는 이따금 생각했지.
가느다란 꼭대기가 하늘에 닿겠구나!
어렸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그러나 이제 나는 슬픔을 느끼네.
그때보다 지금 더
천국에서 멀어졌음을 알기에.
저는 그릇된 길로 똑똑하게 성장하기 보다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해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을 믿는 것 입니다. 이것은 유치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행복 하려면 우리는 모두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18:17).
믿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과거, 현재, 미래를 아주 단순하게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는 증거가 필요 없는 믿음
확고한 믿음은 분명한 지식에서 나오며, 은혜 안에 성장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그를 알기에, 그의 한결 같은 신실함이 입증되었기에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제 증거와 증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용감하게 믿습니다.
항해사의 믿음을 보십시오. 저는 종종 그의 믿음에 놀랍니다. 그는 닻줄을 풀고 해안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며칠, 몇 주, 몇 달씩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밤낮으로 항해하여 어느 아침, 그가 가려고 했던 안식처에 이릅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그는 어떻게 길을 찾았을까요? 그는 나침반과 항해력, 망원경, 천체를 신뢰하고 그것들의 안내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항해하여 목표했던 항구에 도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로 항해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보이는 해 안을 떠나 "내안의 느낌, 증거, 증표여 안녕.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즉시 천국을 향해 항해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복된 일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들은 언젠가 멋지게 입항할 것입니다. 그 항해길도 안전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 영혼과 그 모든 영원한 관심들을 구주께 쉽게 맡기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신뢰만으로 은행에 가서 자신의 돈을 맡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은행의 거래 내역을 살피고 은밀한 내용을 조사하여 그 은행이 막대한 투자금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자기 돈을 맡깁니다. 그는 알고 믿음을 가겼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은행에 맡깁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알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은 갈수록 많은 확신을 주셔서 우리가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게 됩니다. 쟁기질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나무에 잎도 없고 즐거운 새소리도 없는 추운 겨울 동안 열심히 쟁기질을 합니다. 쟁기질을 한 다음에는 소중한 씨앗을 이랑에 심습니다. 싹이 날 것을 확신하며 말입니다. 그 농부는 이미 수십 번 추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추수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소중한 곡식을 뿌립니다.
좋은 곡식을 흩뿌려 땅에 심는 행위는 겉보기에 인간이 하는 행위 중 가장 어리석어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 결과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면, 그저 낭비요 농사일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씨를 뿌리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씨 뿌리기에 좋은 날씨를 고대합니다. 만일 그에게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농부는 여러분의 무지함을 비웃으며 추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도록 합니다.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삶을 그와 함께 묻으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기쁨으로 확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시도 기쁨과 평안을 수확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더욱 풍성하게 되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한 믿음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구주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구주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님을 의뢰했고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아무리 믿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그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찰스 스펄전 외, 생명의 말씀사, p.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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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 거의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에는 다 믿음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에
믿음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나요?
1. 믿음은 누가 주신 것인가?
믿음이란 누가 주신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로마서 12장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은 믿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생활의 모든 일에 기름을 치듯 믿음을 보태야 되는
것입니다. 이목구비를 하나님이 주신 것 같이 믿음도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이 선물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미국기독교출판협회 골드 메달리온을 받은 마이크 메이어슨은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을 겪으며 삶의 회의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빌립보서 4장 4절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매일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한번 시험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앞으로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는 마음의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했더니 실제로 우울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이 밀려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라”는 말씀뿐만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와 같은
말씀들도 적용하면서 행복한 삶을 지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아가면 놀라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크거나 작은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의 크고 작은 것은 왜 그런가? 왜 저 사람 믿음은 상당히 크고 내 믿음은 이렇게 적은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일 작은 믿음을 겨자씨에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의 위력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 조그마한 것,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태산을 옮길만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를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지마는요. 여러분 믿음. 솔직히 겨자씨를 보신 분 별로 많지 않지요? 겨자씨
보신 분 한번 손 들어봐 주십시오. 예. 보신 분도 많이 있군요.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제가 새벽기도 때 겨자씨를 성경책에 얹어서 사람들 줄을 서서 앞에 나와서 겨자씨 보고 지나가라 했는데
나이 잡수신 권사님 한분이 앞에 나와서 잘 안 보인다고 그래서 내가 눈 밑에 까닥 대면서 “여기 있네요. 여기 보세요.” “안
보이는데요?” 그만 그 입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내가 마음에 화가 나서, “권사님 말을 좀 조심스럽게 해야지. 그렇게
가까이대고 하면 다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아이고 미안해요.”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화내지 마라. 권사님 입술 바람에 날아갈 만한 겨자씨면 얼마나 작으냐? 그런 겨자씨만 있어도
산들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것만 개발한다면 인생에 어려운 문제에 당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믿음이 개발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함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한번 따라 말씀해 주세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말씀이 이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행한다. 성령이 들어오면 믿음에 활기를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 어려움을 경험하고 극복함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겠다고 각오를 하고 어려운 역경이 다가올
때에 믿음으로 그를 참고 견디며 하나님께 감사기도하고 나가면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어려움이 생길 때 믿고 기도하고 견뎌야지 믿음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내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이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면 왜 이렇게 많은 병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려면
먼저 소낙비가 와야 돼요. 소낙비가 없이 하늘에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꽃 피고 열매 맺는 아름다움이 오기
전에 반드시 비바람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비바람 통하고 난 다음에 아름다운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를 개척한 윌리엄 펜은 “고생하지 않고는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밭길을 걷지 않고는 왕의 길을 걸을 수
없으며, 쓴맛을 보지 않고는 영광을 맛볼 수가 없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나아갈 때,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믿음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100년 만의 최대 강우량을 동반한 태풍이 중국을 덮쳐서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철제 건물이 무너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풍이 올 때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는 강력한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풍지대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고난의 바람이 반드시
불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토네이도나 쓰나미가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있는 신앙이냐
아니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을 맘속에 가지고 있으면 믿음을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믿어야 될 때는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될까 안 될까’를 계산하면,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되면 큰일 나겠지, 과연
될까? 그렇게 의심이 마음 속에 들어오면 문제가 고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든 안 되든’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면,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죽으면 죽지 뭐, 망하면 망할 것이다. 한번 해 보자. 아주 믿을 때는 결단을 내리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한국에서 저명한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목사님이요 지금은 세상을
떴습니다. 나하고 동갑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는 내내 믿음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교인들이 그래도
아멘하고 따라오는 것이 희한하다”고 그래서 내가 “목사님, 목사님 한번 믿어보십시오. 목사님은 수술도 여러 번 했고 세계적으로
좋은 약도 많이 먹어보아도 낫지 않았는데 제가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믿음으로 역사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믿고 난 다음 하나님이 역사 안하면 조 목사가 책임지겠소?” 그럽니다. “목사님 아픈 것을 내가 책임질 수야
없지요. 목사님이 스스로 책임져야 되겠지만 한 번 믿어보십시다. 한 번 믿어보고 주님의 기적을 바라십시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과연 역사하실까?” 의심이 생겨서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하고 난 다음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빨리 뜰 바에야 믿어보고 떴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예 안 되려거든 믿어보고 안 되는 것이
좋지 안 되는 것을 일찌감치 미리 받아들이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면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만,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계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이룬 적은 없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적은
계산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의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무슨 일이 생길 때 계산을 하면 하나님 자리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믿고 기도하려고 할 때, “어 그거? 내가 계산하마. 너는 믿어라.”
여러분, 믿고 나가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계산해서 대처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누에를 많이 쳤는데 누에
방에 들어가면 고치가 그 집을 뚫고 나와서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놓고 하루
종일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가기 전에 “야 고치야 불쌍하다. 너 오늘 편안하게 나오게 해주마.” 그래서 제가 쭉
찢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준 고치는 나비가 되어 나와서 몇 번 몸을 흔들어보다가 그대로 죽었어요. 그리고 개미들이 박신박신
뜯어먹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보니까 고치에 구멍이 뚫려있어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몸에서 기름이 나와서 날개를 적셔주니까 날개가 쫙
펴져서 나는 거예요. 그런데 몸에 부딪혀서 몸의 기름이 날개에 묻지 않은 고치는 그냥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미 밥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고난을 통해야 성령의 은혜가 마음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의 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구멍은 좁은데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고치가 보기에는 애처롭지만은
구멍을 뚫어주면 안됩니다. 자기가 그를 뚫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비가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날개를 제대로 펴지 못하게 구멍을 뚫어주면 기름이 날개를 펴지 않게
하므로 그만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뚫고 나오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다가오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이기고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고 나가십시오.
3. 믿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을 태산을 옮기는 능력과 늘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귀가 와서 “너 믿음 없다. 너 믿음 없다”고 할 때,
“내 믿음은 태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다.”고 대답을 하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누구든지 목사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대단한 말씀이 아니십니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2-25). 태산을 보고 물러가라고 말하고 난 다음 마음에 그대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믿음이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남을 미워하면 방해되는데 남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해주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태산을 옮길 믿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마음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태산이 옮기도록 믿음으로 행하면 의심이
따라오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될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심이 안 따라옵니다. 믿음이
없는데 마귀가 의심을 가지고 따라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마음에 생기거든 아 믿음이 내 마음 속에 확실히 있구나.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탄아, 내가 믿음이 있으니 네가 그 믿음을 빼앗으려고 따라오지만 어림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음에 의심을 하지 말도록 믿음을 강하게 붙잡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붙잡아주는 것은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아이고 의심이 되네, 마음이 두렵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원수마귀야 물러가라! 네 거짓말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치료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그 믿음을 빼앗으려고
나를 꾀지만은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물러가라! 타협을 하지 말고 받아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번에 북한이 한번 협박을 해보았는데 우리 대통령 이하 정부 지도자들이 대단히 강하게 대하니까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까?
약하게 나오면 그것을 틈타거나 고난을 가지고 올라고 했는데... 우리 박 대통령이 강하게 잘한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게 대하면
저쪽에서 우리가 힘이 있는 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재기도 안하고 겁도 먹지 아니하고 우리 국민 전체가 조용하고 담담하게
있으니까 ‘이거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당하겠구나.’ 겁을 집어먹고 타협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탄도 한 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담대하게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잘못했다가 우리 마귀나라가 절단 나겠다. 물러가는 게 좋겠다.’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입니다. “나는 나았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하다.” 우리가 응답받은 것을 마음에 꿈꾸어 보고 마음에 믿고 입술로 명령하면 마귀의 훼방을 이기고 능히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을 극복하고 계속 믿으면 기적이 생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히브리서 11장 6절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마음속에
태산이 옮겨가는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태산이 옮겨가는 꿈을 마음에 꾸라. 그 꿈이야 아무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9절에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태산을 움직이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산이 옮겨가는 명령을 하십시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 앞에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짱 있게 “가난은 물러가라! 고난은 사라져라! 질병은 고침 받으라! 슬픔과 괴로움은 떠나가라!” 태산을 옮기는
명령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21편 2절에 ‘그의 마음은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였도다’
입술로 우리의 요구를 담대하게 말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태산을 옮기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시작부터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것인데 우리가 꿈을 꾸어 그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글렌 커닝엄은 기적을 만든 사람으로 불립니다. 7살 때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서 의사들이 다리를 잘라야
된다고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걷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서 걷는 꿈을 마음속에 가졌습니다. 집에는
혼자 못 걸어 다니기 때문에 엄마가 휠체어에 앉혀서 그를 정원으로 나가서 산책도 시키고 시장에 갈 때도 그 의자에 앉혀서 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휠체어에 그를 싣고 정원에 갖다놓고 다른 일을 보는 동안에 얘가 의자에서 굴러서 떨어져서 정원을
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팔로써 기어요. 밑에 두 다리는 못쓰니까.
엄마가 보니까 온 전신에 흙더미가 되어서 손으로 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면 어떻게 하느냐?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엄마 나는 꼭 걷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나는 두 다리를 가지고 걸을 것입니다.” 매달, 일마다 엄마를 조여서
마당에 나와서 그는 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서 두 다리로 서서 저벅저벅 걷기 시작해요.
그 다음 그는 하는 말이 “나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저 선수들이 뛰는 것처럼 뛰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같이 정원에 나와서 뜁니다. 뛰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이 자기에겐 뛰는
것이에요. 그런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자기가 뛰는 꿈을 꾸고 뛸 수 있다고 믿고 늘 자기에게 말하기를 “너는 뛸 수 있다.”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말하면서.
그 어머니가 “괜한 수고하지 말고 이만큼 걷는 것도 기쁘게 여겨라.” “아니요. 어머니 저는 단거리 선수가 될 것입니다.”
“그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아니요. 나는 내가 뛰는 것을 바라보고 믿고 성경에 태산더러 명하여 바다로 던지라고 한 것처럼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뛰기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점점 뛰기 시작해서 미국의 1934년 남자 육상 1,5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4년 베를린올림픽대회에 미국선수로 나가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잘라버려야 될 두
다리를 가지고 그가 꿈꾸고 믿고 말한 결과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서 육상선수가 되고 꿈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꿈과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꾸십시오! 사람들이 너무나 꿈을 안 꿉니다. 여러분,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여러분을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고
치료받아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축복을 받아 남에게 나누어줄지라도 구걸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여러분은 주님의 백성으로 천국 가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꿈꾸고 믿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십시오.
여러분을 믿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우리가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이 되어서 패배하고 낙심하고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입술로 고백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여러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어찌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이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음으로써 믿음이 자라고 성령이 믿음을
자라게 하고 시련을 견디므로 믿음이 자라게 되어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사과만큼 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을 위한 믿음만 가지지 말고 이웃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면 그 기도가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음으로 양으로
믿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 굉장한 도움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안수기도를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시험을 칠
때 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런데 항상 내 맘속에 내가 기도한다고 시험을 치는 사람이 도움이 될 것이냐? 그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가 기도해주는 것이냐? 네 기도를 통해서 내가 축복을 해주는 것이다. 내가 축복을 해주면 내 능력으로서
잘된다.”
제가 참 존경하는 법조계에 계시는 분이 계신데 그 아들들이 미국에 하버드 대학 그 외, 훌륭한 대학에 졸업을 하고 미국의
중요한 시험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그럽니다. 그 지금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날짜를 정해주면 미국에서
한국까지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내 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보다 그 사람 믿음이 더 강한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내게
기도를 받고 미국에 들어가서 시험을 치겠다. 그래서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나오지 말라고도 할 수도 없고. 나오라고 하려니 내가
믿음도 없는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내가 시련을 겪었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할까요? 나오라고 할까요? 나오지 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마음에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
“니가 그에게 축복을 주겠느냐? 내가 주겠느냐?” “그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면 내가 팔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니는 팔다리를 좀 빌려다오.” “아 그야 빌려드리지요.” 그래서 나오라했습니다. 나오라 해서 제가 그들에게 안수기도를 간절히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이 다 중요한 시험에 합격을 해서 지금은 대단히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나를 만나서 말씀하기를 “그때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우리 조카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는데 이제
나를 위해서 좀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나이가 많이 먹었지만은 할 일 없이 세상을 지나갈 수야 있겠습니까? 나도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조카 위해서 기도할 때보다도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일이 생겨날지어다!” 곧 좋은
소식을 들어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제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좋은 일이 생겨날 줄 믿으면 받으러 오십시오.
마가복음 4장 35절로 41절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주님께서 환경을 바라보시고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시니 바람과 바다도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음은 그냥 자기 일신의 문제 뿐 아니라 환경의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사를 형통케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은 말할 필요 없습니다. 구원받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 고침 받는 건강 하라는 믿음도 있고,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아
부하게 되는 믿음도 있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도 있고, 그 믿음을 여러 방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주셨으므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자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늘
읽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만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기도하면 성령의 은혜가 와서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기도하고 믿음으로 이기므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평소에 말씀을 읽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시련을 참고 견디고, 경험을 얻고, 그래서 믿음이 자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자기도
자라고 발전하고 이웃도 자라고 발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활용할 때 항상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소원하는바 목적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음속에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무지개를 바라보듯 꿈을 바라봐야 돼요. 적은 꿈도 있고 큰 꿈도 있는데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에 별들
같이 많은 자손들의 꿈을 꾸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바라는 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마음에 꿈꾸고 그걸 바라보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는 입술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물결은 고요하라! 병은 물러가라! 사업은 이루어질지어다!” 창조적인 명령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를
여러분 꼭 잊지 마십시오. 따라 말씀하세요. “첫째, 꿈을 가지자. 둘째, 믿자. 셋째, 입술로 고백하자!” 꿈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 이 세 가지 형태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 속에 주신 믿음은 자라고, 활동하고, 기적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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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견해가 잘못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은
마음을 끄는 특성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믿음이란 아무런 명백한 증거 없이 그냥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믿음은 맹신과 다릅니다.
믿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며, 그저 무언가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맹신은 위험합니다.
단순한 느낌은 생겼다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저 믿기만
하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는 “악귀들도 믿고 떤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You believe that there is one God. Good! Even the demons believe that--and shudder.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어떤 두 가지 부류의 것에 초점을 맞춥니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확고한 근거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진정한 믿음에는 그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믿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바울은
믿음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두 가지 부류의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현재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문자적인 눈으로는 여호와 하느님이나 그분의 아들, 지금 하늘에서 통치하는
왕국 등 영계에 있는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둘째로, “바라는 것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금 우리는 조만간 하느님의 왕국이 가져올 신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실체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믿음은 확고한 근거에 기초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리켜 “보증된
기대”라고 했을 때 “권리 증서”로도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집 한 채를 주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집에 대한 증서를 건네주면서 “당신 집 여기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
말은 당신이 그 종이 위에서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문서가 강한 법적 구속력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집 자체와 같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하신 모든 약속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진정한 믿음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따라서
진정한 믿음에는 여호와 하느님께 명확히 초점을 맞춘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충분한 근거에 기초한 확신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느님을 사랑 많은 아버지로 여기게 되며 그분이 하신 약속이 모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명체와도
같아서 자양분을 공급해 주어야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한 말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믿음이
없으면 여호와께 다가가거나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성 있는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목적을 이루려면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께 가까이 가고 그분께 영예를 돌리려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길러 나가고 나타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여러 모범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회중에 인도하는 일을 하는 모범이 되는 충실한 남자들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하느님이 주신 모범은 그 외에도 더 있습니다.
바울은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 다시 말해 믿음의 탁월한 본을 남긴 고대의 남녀들에 대해 썼습니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한 이들이 충실한 사람들 전부는 아닙니다.
성서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갖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믿음을 나타낸 그들의 삶은 믿음 없는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됩니다.
충실한 사람들의 믿음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가?
성서에 나오는 충실한 남녀를 본받는 데 개인 연구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누군가를
본받으려면 먼저 그를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믿음을 나타낸 남녀들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그와 같이 스스로 연구와 조사를 해 볼 수
있습니까?
개인 연구를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도구를 사용하여 성서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어 가 보십시오.
연구하는 내용을 묵상하면서 성서에 기록된 일이 일어난 상황과 배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당시의 장면을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려고 해 보십시오.
더 중요한 점으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감정을
분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충실한 남녀들의 감정을 이해해 감에 따라 그들이 더욱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친숙해질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인물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중한 친구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아브람과 사래가 더 친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까?
한나와 엘리야, 사무엘의 모범으로부터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서
인물들을 정말로 잘 알게 되면 그들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새로운 임무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인가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라는
제의를 받았습니까?
어쩌면 전파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지역으로 이주하라는 권고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혹은 익숙하지
않거나 별로 내키지 않는 형태의 봉사를 시도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숙고하고 기도하면서
아브람의 본을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과 사래는 우르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기꺼이
포기했고 그 결과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틀림없이 그들을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가까운
누군가가 당신을 악의적으로 대해서 낙담해 있습니까?
심지어 집회에 가지 않고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까?
한나가 브닌나에게서 악의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어떻게 인내했는지 그의 모범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한나가 더 친밀한 친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엘리야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었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를
위로해 주셨는지 연구해 보면 엘리야가 더욱 가깝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은 사무엘의 모범을 연구해 보십시오.
장막에서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행동을 했을 때 사무엘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연구한다면 사무엘이 더 친한 친구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성서 인물들의 믿음을 본받으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당신의 믿음이 지닌 가치가 떨어집니까?
성서 인물들의 믿음을 본받으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당신의 믿음이 지닌 가치가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데살로니가후서 3:7, 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For you yourselves know 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 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We did this, not because we do not have the right to such help, but in order to make ourselves a model for you to follow.
마리아는 한나의 기도에 들어 있는 표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한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의 믿음이 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한나의
모범 덕분에 마리아는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었고 여호와 하느님 앞에서 비길 데 없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믿음은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관계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존재합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말합니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GOD)
둘째는 나와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JESUS)
히브리서 5:7-10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셋째는 나와 성령님의 관계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SPIRIT)
성경은 비유로 말씀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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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자신은 실수를 하면서도 남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거나,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다가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에는 냉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죄성과 모순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갈등이나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죄성과 모순이 만나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험의 과정이라 합니다.
본문에서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 뒤에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시험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알아가고 깨달아가며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욥이 갑자기 들이닥친 고난 앞에서 엄청난 시험을 겪으면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양심의 시험을 만날 때 남이 아니라 자신을 시험해야 하고 또 다른 시험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또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나 ‘본질에 충실하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기본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욕심이나 자기 우월감이나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본질에 충실히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기회는 인간을 바른길로 가게 하기보다는 바르지 않은 길로 가도록 방향을 열어주기가 쉽습니다.
창세기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질문 속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고 자신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으나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교회를 세우는 것은 세상의 어떤 공동체를 세우는 것보다 힘든 일입니다.
각기 다른 성격 성향 기질 환경 습관 경험 인식 사고방식을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시험에 빠지게 되면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지만, 사람의 욕심으로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후유증이 오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믿음의 선물과 성경의 약속과 성령의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