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 이원상, 한경직, 박윤식, 김윤식, 배명준, 김창인, 충현교회 김창인, 한만영,


이승혁목사
李勝赫牧師
Pastor Victor S Lee

1949. 10. 16-현재

대광고등학교 졸업 1969년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 

영등포 영남교회 주일학교 담당 교육전도사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4가

창신동 남부제일교회 교육전도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봉로 101-5 (창신동)

상도중앙교회 대학부 지도 전도사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55길 16 (상도동 484번지

온산공업단지 온산제일교회 개척 
훗날 덕신제제일교회로 개명
울산노회 목사 안수 1984년 4월

2000년 7월 4일 미국 뉴욕 이주
뉴욕우리교회 창립
2001년 뉴욕 나사렛지방회 목사 인준
2010년 뉴욕우리교회와 한인중앙교회와 합병 담임목사
뉴욕나사렛교회 개명 
파트리스교회  온라인 교회 
이승혁목사. 최우섭목사. 황선민목사 공동 담임
최우섭목사 사임 20
이호승목사 설교 담당 2021년

이승혁목사 새벽 기도회 담당
황선민목사 찬양 및 수요 성서 마당 담당
이호승목사 주일 설교 담당








20









이원상 목사(1937–2016)

이원상 목사님은 미국 버지니아의 와싱톤중앙장로교회(KCPC)를 1977년부터 2003년까지 26년간 담임하며 한인 이민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섬긴 인물입니다. 2016년 12월 5일 향년 79세로 소천했습니다.

1. 어린 시절과 신앙

  • 1937년 중국 만주 산성진에서 출생
  • 1945년 가족과 함께 북한 만포진으로 이주
  •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피난
  • 1949년 경북 경산으로 이주
  •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를 취득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신앙과 목회에 관심을 가지고 평산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습니다.

2. 미국 유학과 목회자의 길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Dallas Theological Seminary(댈러스신학교)에서 공부했고, 1972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학자의 길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77년 와싱톤중앙장로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약 14가정, 30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였다고 회고됩니다.

3. 와싱톤중앙장로교회 26년 목회

이 목사님이 부임할 당시 교회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많이 떠났고, 1977년 12월 첫 주일 예배자는 약 50명이었습니다. 
이원상 목사님은 기도와 말씀을 목회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를 강조하며 교회를 다시 세워 나갔습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 공식 연혁에 따르면,

  • 1977년 12월 4일 담임교역자로 부임
  • 1978년 12월 목사 위임
  • 2003년 9월 원로목사 추대라는 중요한 목회 여정을 걸었습니다.

4. 이원상 목사의 목회 철학

그의 목회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도하는 목회, 말씀 중심의 목회, 선교하는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목회 인생을 고린도전서 15:10의 말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는 목회하면서 인간적인 능력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능력을 의지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선교를 교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모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5. 다음 세대와 선교

이원상 목사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민교회의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한어권 목회만이 아니라 영어 목회와 1.5세대·2세대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 했습니다.

또한 은퇴 후에도 선교와 기도운동을 계속했습니다.

  • 2013년 PRASSION International 창립
  • 기도와 선교를 연결하는 사역 전개
  • 2009년 영국에서 목회 리더십에 관한 철학박사(Ph.D.) 취득
  • 2015년 목회 리더십에 관한 저서 출간

6. 설교 예화로 사용할 수 있는 핵심

이원상 목사님의 생애는 “작은 교회를 맡아 큰 교회를 만든 사람”이라는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설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부족할 때 기도했고, 환경이 어려울 때 말씀을 붙들었으며, 교회가 성장한 뒤에는 선교와 다음 세대를 붙들었던 목회자.”

특히 이원상 목사님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면서 붙들었던 고린도전서 15:10,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성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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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韓景職, 1902–2000)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이자 교육자·사회봉사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특히 영락교회 설립, 한국교회 연합운동, 교육과 사회복지, 민족복음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아카이브는 그를 장로교 목사·교육가·육영사업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어린 시절과 신앙

한경직 목사는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광학교와 오산학교를 거쳐 숭실에서 공부했으며, 1924년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엠포리아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폐결핵으로 투병했지만, 회복 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숭실대학에서 강의했습니다. 1933년에는 신의주 제2교회에 부임했고 1934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2. 신의주에서 보여 준 목회

한경직 목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을 실제로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신의주 제2교회 목회 당시 그는 고아원을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훗날 서울에서도 고아원·경로원·모자원 등의 사회복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즉 그의 목회는

복음전도 + 교육 + 구제 + 사회봉사

를 함께 실천하는 전인적 목회였습니다.

3. 월남과 영락교회 설립

해방 후 한경직 목사는 북한에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습니다.

1945년 월남한 27명의 성도가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영락교회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다니 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락교회가 단순히 한 교회의 개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온 피난민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영락교회는 예배당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실향민들에게 신앙·생활·교육·돌봄의 공동체 역할을 했습니다.

4. 한경직 목사의 목회철학

그의 목회를 네 단어로 정리하면 매우 선명합니다.

선교 — 교육 — 봉사 — 애국

그는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 밖에서는 교육과 구제와 사회봉사를 실천했습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도 한경직 목사의 생애를 「영락교회 설립과 한국교회의 부흥」, 「교육봉사 활동」, 「구호복지 활동」, 「나눔과 섬김의 일생」 등의 주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5. 교육에 대한 헌신

한경직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크게 보았습니다.

숭실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학교의 교육사업에 참여했고, 대광학원·보성학원 등 여러 교육기관의 발전에도 관여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6. 한국교회 전체를 섬긴 지도자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만을 섬긴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한국교회 연합과 복음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특히 1973년 영락교회 담임목사에서 은퇴한 후에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위해 활동했습니다.

7. 템플턴상 수상

1992년 한경직 목사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상은 흔히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삶에서 주목할 부분은 큰 교회의 목회자라는 명성보다 평생의 섬김과 청빈입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을 두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8. 한경직 목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교육하며,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교회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드린 목회자.”

특히 목사님의 최근 관심사인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자”**라는 주제와 연결하면 한경직 목사의 삶은 매우 좋은 설교 예화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한경직 목사의 삶은 이 말씀을 목회·교육·선교·구제·청빈의 삶으로 구현한 사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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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윤식 목사는 누구인가

  • 출생: 1928년 5월 17일, 황해도 지역
  • 사망: 2014년
  • 교회: 평강제일교회 설립자·원로목사
  • 대표 저술: 「구속사 시리즈」
  • 특징: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 교회 측 자료에 따르면 성경을 매우 많이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강조했으며, 자신의 목회를 **“말씀 중심의 목회”**로 설명했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 Knox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당시 연합뉴스가 보도했습니다.

2. 가장 중요한 특징 — 「구속사 시리즈」

박윤식 목사의 사역을 이해하려면 구속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강조한 핵심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 족장시대 → 출애굽 → 성막 → 왕정 → 포로와 귀환 → 예수 그리스도 → 교회 → 종말

즉 성경을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로 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의 구속 경륜으로 읽으려 했습니다.

이 점 때문에 박윤식 목사의 성경 강해는 연대기, 족보, 숫자, 히브리어·성경 원어, 성막, 제사제도, 예언 등을 매우 세밀하게 연결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3. 그러나 반드시 함께 다루어야 할 부분 — 이단 논쟁

박윤식 목사를 소개할 때는 이 부분을 빼면 역사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은 1991년 제76회 총회에서 박윤식 목사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고 결의했습니다. 특히 기독론, 타락론, 계시론, 창조론 등의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박윤식 목사의 가르침에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반면 2009년에는 개신대학원대학교 측의 신학검증 과정에서 과거 논란이 된 자료들과 현재의 신학사상을 구별하여 검토했고, 박윤식 목사가 통일교 등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검증보고서도 나왔습니다.

따라서 “박윤식 목사는 이단이다/아니다”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보다는, 어느 교단의 결의와 어떤 시기의 신학검증을 기준으로 하는지를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4. 설교와 성경공부의 특징

박윤식 목사의 사역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교회 측 자료는 그가 평생 **“오직 말씀”**을 강조했으며, 1,800회 이상의 성경 읽기와 지속적인 기도를 실천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박윤식 목사의 신앙을 연구할 때는 다음 네 가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① 말씀 중심
→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연구

② 구속사 중심
→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연결

③ 성경 원어 연구
→ 히브리어·헬라어의 의미를 성경 해석에 활용

④ 종말론적 관점
→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마지막 때까지 이어진다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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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목사 약력

  • 출생: 1927년 경북 예천 출생
  • 목사 안수: 1953년 경안노회
  • 초기 목회: 1953~1970년 예천교회 목회
  • 교단 사역: 1971~1975년 교단 총무
  • 종암교회: 1976년 부임하여 장기간 목회
  • 노회장: 경안노회와 서울북노회 총회장 역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39대 회장(1984~1986)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76회 총회장 역임
  • 말년: 종암교회 원로목사
  • 별세: 2016년 8월 23일, 향년 89세

특히 김윤식 목사는 교회 목회뿐 아니라 교단 행정과 한국교회 연합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목회자입니다.
 한국기독공보는 그가 1971년 총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혼란스러웠던 총회 행정을 정비하고 교단의 위상을 세우는 데 힘썼다고 평가합니다.

종암교회와 김윤식 목사

김 목사는 1976년 종암교회에 부임했고, 훗날 종암교회 원로목사가 되었습니다. 
1993년 심혈관 질환으로 크게 쓰러져 장기간 투병했지만 회복하여 이듬해 부활절 종암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축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우들이 크게 감격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김윤식 목사는 자신의 목회와 신앙 여정을 담은 회고록 **《영원한 사귐》**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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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준 목사 약력

  • 출생: 1915년 7월 23일, 평안북도 영변
  • 소천: 2002년 2월 21일, 캐나다 밴쿠버
  •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 주요 목회: 1949년 서울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여 약 30년간 목회
  • 1979년: 남대문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특히 배 목사님은 197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교파를 초월한 연합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중요한 지도자였습니다.

주요 활동

배명준 목사님은 단순히 교회 목회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사회·선교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회장(1965)
  • 사회사업재단 성신원 재단이사장(1968)
  • 사회사업재단 인애원 재단이사장(1969)
  • 한국기독교경찰선교회장(1971)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1972~1973)
  • 제1회 한인교회선교대회 준비위원장(1979)
  •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회장

또한 1973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방한 당시 열린 신구교 일치기도회에도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교회의 교회일치운동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남대문교회 목회

동아일보의 부음 기사에 따르면, 배명준 목사님은 1949년 남대문교회의 제7대 목사로 부임하여 30년간 시무하면서 남대문교회를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교회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저서로는 《화해의 복음》, 《광야의 외치는 소리》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설교에 활용한다면

배명준 목사님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주제의 설교 예화에 적합합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의 삶에는 목회 → 교회연합 → 사회봉사 → 경찰선교 → 의료선교 → 해외 한인교회 선교로 이어지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은 개인의 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설교의 실제 역사적 사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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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인 목사(金昌仁, 1933–2022)

김창인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광성교회를 37년간 목회한 원로목사이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78회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2022년 3월 12일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1. 출생과 성장

  • 1933년 7월 5일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붕암리 출생
  • 1남 2녀 중 장남
  • 어린 시절 큰 병을 앓았으나 부모의 기도로 회복하면서 신앙을 깊이 경험했다고 광성교회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 6·25전쟁 당시 약 6개월 동안 땅굴에 숨어 지내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했고, 이후 피난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다고 소개됩니다.

2. 신학교육

김 목사는 부산에서 신학과 대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 1958년 부산장신대학교 졸업
  • 196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본과 졸업
  • 1964년 동아대학교 졸업
  • 1987년 Fuller 신학교 목회학 박사(D.Min.) 학위 취득

3. 광성교회와 37년 목회

김창인 목사의 이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곳은 광성교회입니다.

1966년 1월 23일 강도사로 광성교회에 부임했고, 같은 해 5월 목사로 청빙받아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6년부터 2003년까지 약 37년간 광성교회를 섬겼습니다.

2003년 12월 21일 원로목사 및 공로목사로 추대되면서 담임목회에서 은퇴했습니다.

광성교회의 역사 자료를 보면 김 목사의 목회 기간 동안 교회가 성장했을 뿐 아니라 학원선교, 새신자 교육, 찬양선교, 교육관 건축, 교회 개척 등의 사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4. 총회와 한국교회에서의 활동

김창인 목사는 개교회 목회에만 머물지 않고 교단과 한국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78회 총회장(1993년)
  • 총회 서기
  • 총회 총무대행
  •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
  • 총회 훈련원장
  • 평신도교육대학원장
  • 서울남노회장
  • 서울동남노회장
  • 부산장신대학교 총장
  • 전주예수병원 이사장
  • 영신학원 이사장
  • 한국기독공보 이사장 등

여러 직책을 맡았습니다.

5. 교육과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

김창인 목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육과 학원선교에 대한 관심입니다.

광성교회 자료에 따르면 그는 서울 중계동에 영신학원을 설립·운영했으며, 교육 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교육부분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또한 부산장신대학교 총장으로 섬기면서 교회 지도자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6. 목회적 특징

김창인 목사의 목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① 기도의 목회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기도와 전쟁 중의 성경 묵상을 통해 형성된 신앙이 그의 목회 기반이 되었습니다.

② 말씀 중심의 목회
전쟁 중에도 성경을 읽고 묵상했던 경험은 평생 목회와 설교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③ 교회 성장과 제자교육
광성교회를 장기간 목회하면서 교회 성장뿐 아니라 새신자 교육과 평신도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④ 교육과 선교를 함께 보는 목회
학교와 교육기관을 통한 복음 전파, 다음 세대 양성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7. 생애의 마지막

김창인 목사는 2022년 3월 12일,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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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인 목사(金昌仁, 1917–2012)

김창인 목사는 충현교회를 개척하고 크게 성장시킨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목회자입니다. 동시에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일을 공개적으로 회개하여 한국교회에 큰 울림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1. 출생과 신앙의 길

  • 1917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
  • 일제강점기와 해방, 북한 공산정권을 경험한 뒤 월남
  • 목회자로 활동하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서 목회를 이어갔습니다.
  • 1950년대 한국교회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켰습니다.

2. 충현교회 개척

김창인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충현교회 개척과 성장입니다.

1953년 9월 6일 서울 중구 인현동의 한명덕 집사 집에서 1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교회 이름은 ‘동일교회’였습니다. 이후 충무로로 이전했고, 1956년 8월 12일 ‘충현교회’로 교회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김창인 목사는 1953년부터 충현교회를 이끌었으며, 1957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8년 충현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3. 충현교회의 대형교회 성장

김창인 목회 시기에 충현교회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1970년 역삼동에 새로운 교회 부지를 마련했고, 오랜 기간 성전 건축을 추진하여 1980년대에 현재의 역삼동 성전으로 이전했습니다. 충현교회 공식 연혁에 따르면 김창인 목사는 1987년 12월 31일 정년은퇴했습니다.

당시 충현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으며, 한때 출석 교인이 약 4만 명에 이르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4. 예장 합동 총회장

김창인 목사는 목회뿐 아니라 교단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따라서 김창인 목사는 단순히 한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당시 한국 장로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가장 중요한 말년의 사건 — 교회 세습에 대한 회개

김창인 목사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는 1987년 은퇴 후 1997년 자신의 아들 김성관 목사를 충현교회 담임목사로 세웠습니다. 이 일은 한국교회에서 이른바 ‘교회 세습’ 논란을 크게 일으킨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김창인 목사가 생애 마지막에 자신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점입니다.

2012년 6월 그는 원로목회자 모임에서 자신의 아들을 무리하게 목사로 세운 일을 **“일생일대의 최대의 실수”**라고 표현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2일, 95세로 소천했습니다.


설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김창인 목사의 마지막 교훈

김창인 목사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큰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충현교회를 개척했고,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교단의 지도자까지 지냈습니다. 그러나 인생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장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을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이 점은 **로마서 12:1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과도 연결하여 설교할 수 있습니다.

헌신은 성공적인 목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헌신에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도 포함됩니다.

충현교회는 현재도 공식 디지털 역사관에서 김창인 목사를 초대 담임목사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설교 자료도 역사 콘텐츠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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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영 목사는 서울대 국악과 교수와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뒤 목회자가 된 **고(故) 한만영 목사(1935–2007)**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만영 목사 약력

  • 1935년 8월 15일 서울 출생
  • 서울대학교 영문과 졸업 후 교사로 근무
  •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학사·석사 취득
  • 1969–1991년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 1983–1985년 국립국악원 제6대 원장
  • 유네스코 한국위원, 1986 아시안게임·1988 서울올림픽 문화행사 관련 활동
  •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
  • 1992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목회에 전념
  • 1984년 서울부활의교회 개척
  • 이후 교회가 서울대치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007년 별세할 때까지 담임목사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한만영 목사는 국악학자로서의 전문성과 목회 사역을 함께 한 독특한 인물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그가 1992년 교수직을 사임한 뒤 목회활동에 전념했다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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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석 목사

  • 독일에서 약 15년간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여러 자료에서 소개됩니다. 일부 자료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고 기록합니다.
  • 귀국 후에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지만, 신학적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 이후 전남 영암의 영호 한센인 정착촌으로 들어가 그곳의 교회를 섬겼으며, 약 10여 년 동안 영호교회에서 목회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선교와 목회를 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티베트 지역의 한센인들을 섬겼다는 증언이 전해집니다.

대표적인 책

김요석 목사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이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1997년 홍성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당시 국민일보도 이 책을 소개하면서 김 목사님을 “얼굴 없는 천사”로 표현하고,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대학 강단을 떠나 한센인 정착촌으로 들어간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김 목사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을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 복음을 몸으로 살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교 → 대학 강단 → 영호 한센인 마을 → 중국의 한센인 선교

라는 흐름으로 정리하면 김요석 목사님의 생애와 사역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의 생애는 정확한 출생연도나 각 사건의 연도가 공개된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확인되지 않은 연도는 억지로 채우지 않고, 확인 가능한 시기와 사건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김요석 목사 생애 연대기

시기 생애와 사역
청년기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
독일 유학 약 15년 독일에서 약 15년 동안 신학을 공부. 여러 자료에서는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것으로 소개됨.
독일 유학 말기 독일의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신학 지식과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신앙 사이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것으로 간증에서 전해짐. 특히 신약학 교수의 강의를 통해 성경을 단순한 학문적 대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됨.
귀국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함. 그러나 신학 이론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충분히 전할 수 없다는 영적 갈등을 경험함.
교수직을 떠남 신학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실제 삶 가운데서 만나고자 하는 결단을 함. 한 목회자의 소개로 전남 영암의 영호 한센인 정착촌을 알게 됨.
영암 영호마을 사역 시작 전남 영암군의 한센인 정착촌에 있는 영호교회에 부임. 
당시 아무도 쉽게 가려고 하지 않았던 오지의 교회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목회함.
영호교회 약 10여 년 10년 이상 영호교회를 섬김. 단순히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한센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과 삶을 함께 나누는 사역을 했다고 전해짐.
1991년 독일인 친구 클라우스 디터 그래스(Klaus-Dieter Gress)가 영호마을을 방문하여 김 목사와 주민들의 삶을 경험함. 
그 체험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Das Dorf der Vergessenen》(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함.
1990년대 후반 독일에서 소개된 이야기가 한국에 알려지고,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됨. 
국민일보는 1998년 이 책을 소개하면서 김 목사가 영호마을에서 10여 년간 헌신적으로 사역했다고 보도함.
영호교회 이후 영호교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중국으로 이동. 이후 중국 오지의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목회 사역을 한 것으로 여러 자료에서 소개됨.
중국 선교 시기 중국의 한센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하는 사역을 계속함. 
일부 자료에서는 중국·티베트 지역에서 한센인들을 섬겼다고 소개함. 
다만 이 시기의 구체적인 연도와 사역 지역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주의가 필요함.
2000년대 이후 미국의 한인교회 등을 방문하여 자신의 신앙과 한센인 사역에 관한 간증집회를 한 기록이 있음. 
극동방송을 통해 그의 간증이 알려지기도 함.
이후 중국 및 해외에서 한센인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알려졌으나, 
현재의 정확한 거처·활동 상황과 생존 여부를 신뢰할 만한 최신 자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중요한 전환점 4가지

김요석 목사님의 생애는 단순히 **“독일에서 공부한 신학자 → 한센인 선교사”**로 요약하기보다 다음 네 단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① 독일의 신학 공부
② 한국의 신학교 교수
③ 영호 한센인 마을의 목회자
④ 중국 오지 한센인 선교사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②에서 ③으로의 이동입니다.

김 목사님의 글에서 그 이유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신학적 질문에는 답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이 실제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고, 
자신이 그것을 이론만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데 깊은 갈등을 느꼈습니다. 
결국 교수직을 내려놓고 한센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김요석 목사님의 생애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신학을 배우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목회자의 길”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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