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 예수님의 재림 시기에 대한 힌트
1.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나무는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나무 중 하나다.
무화과나무의 열매인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아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꽃이 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열매 속에서 꽃을 피운다.
무화과를 은화과(隱花果)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에 대해 주목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재림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는 시기를 알 수 있는 징조로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태복음 24:32~33)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화 중에 하셨던 말씀이다.
당시 대화의 주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한 것이었다(마태복음
24:3).
눈앞에 예수님을 두고 ‘주의 임하심’을 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낼 때 다시 올 것이다.”라고
답하셨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시기는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서 출발하여 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 아침에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습니다!”(쉬운성경 마가복음 11:12~14, 20~22)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화과나무의 잎들 아래서 쉬기도 하고, 그 열매를 날로 먹거나, 말려서
먹거나, 빵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요한복음 1:48, 사무엘상 25:18, 30:12).
무화과 열매는 의학적 효능이 있어
상처 치료제로도 사용되었다(열왕기하 20:7, 이사야 38:21).
그만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숙한 나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30년 이상 사셨다.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언제 열리는지 모르실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또 다른 말씀을 보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포도밭에 심었다. 그는 이 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 종에게 말했다. ‘내가 삼 년 동안,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나무를 찍어버려라. ···’ 종이 주인에게 대답했다. ‘주인님 ··· 내년에 ···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버리십시오’”
(쉬운성경 누가복음 13:6~9)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한 사람이 있다.
그분은 3년 동안 열매를 얻으려고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에 종에게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 유다 백성을 그 좋은 무화과처럼 좋게 여기겠다” (쉬운성경 예레미야 24:5)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비유 속 이스라엘에서 열매를 구한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운명하시기까지, 3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 새 언약의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호언했다(마태복음 27:25).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사건,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한 이스라엘 나라의 심판을 예고하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멸망
베스파시아누스는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 A.D. 68년에는 예루살렘 성새를 둘러싸고 공격할 체제를 거의 굳혔다. ··· 예루살렘 공략전이 시작되려 할 때 갑자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 네로가 ··· 자살로 30년의 생애를 끝마쳤다. A.D. 68년 9월 9일 새벽의 일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철수하고 ··· A.D. 70년 ··· 예루살렘 공략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제의 아들 티투스는 14군단을 이끌고 4월부터 9월말까지 격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신전도 성벽도 도시도 다 불타버려 다만 기왓장과 흙덩이만 뒹굴 뿐이었다. ··· 포위공격되어 전사한 자가 110만, 포로 9만 7천이라 전해진다.(『대세계의 역사』, 삼성문화개발)
AD 68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해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로마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예루살렘 진압은 잠시 주춤했다. 로마로 돌아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추대됐다. 그사이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났다(누가복음 21:20~24).
2년 후인 AD 70년, 베스파시아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다의 군사작전권을 갖게 됐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은 예루살렘성을 둘러싸며 완전 포위했다.
예루살렘에 갇힌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떤 이들은 허리끈과 구두를 벗겨 먹었다. 급기야 서로의 음식을 빼앗기 위해 야만적인 행동들도 일어났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예루살렘을 도망가는 사람들은 로마군에 잡혀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 약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 성벽은 붕괴되고 말았다. 거룩한 성전은 화염에 휩싸였고 성전 기명들은 약탈당했다. 110만 명 사망, 9만 7천 명이 노예로 팔렸다. 독립 주권은 완전히 빼앗겨 버렸고, 나라 없는 유랑민으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입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메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멸망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
그 후 이스라엘 땅은 로마, 비잔티움, 무슬림, 십자군을 거쳐 다시 무슬림 세력인 맘루크와 오스만 튀르크가 지배했다. 유럽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경제, 문화적으로 뛰어난 기지를 발휘했으나 ‘예수를 살해한 민족’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됐다. 영국과 스페인에서는 아예 집단 추방을 당했고, 영국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유대인이 간사하고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사회집단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랑민으로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눈물과 설움의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1933년 1월 30일부터 시작하여 1945년 5월 8일에 끝난 ‘나치’의 6백만 유대인 대학살은 가장 잔혹한 사건이었다. 이 기간 동안 폴란드, 소련,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유럽의 15개국에서 어린이 150만 명을 포함한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다. 어떤 이는 기아와 질병으로 죽고, 어떤 이는 거리에서 교수대에 달리고, 어떤 이들은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죽어갔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국가 건설만이 수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결국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유엔의 자유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유대 민족의 역사적 권리와 국제연합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수립하고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을 선포한다.(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 수상의 이스라엘 독립선언문 낭독)
1948년.
오랜 기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민족이 건국을 이룬 기적적이고 역사적인 해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뒤 갖은 고생과
학대 아래 약 1900년 동안 세계를 유랑한 유대인들은 기적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건설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가 약 1900년 만에 나라를 재건한 예는,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예언을 보면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국권 회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였다.
이스라엘의 국권회복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셨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지 않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내가 문 밖에 가까이 온 줄 알아라(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24:32~33)
성경은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있다(누가복음 13:7, 예레미야 24:5). 죽어버린 무화과나무가 연해지고 생명이 돋아날 때, 곧 무화과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그때가 재림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시는 시기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재림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언제 오실까 하늘만 바라보던 기독교인들에게 재림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그렇다면 1948년에 등장하신 재림 그리스도는 어떤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을까.
그분이 오시면 ···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 너희에게 알려 줌으로써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6:8~14)
재림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교훈하신 새 언약의 진리를 가지고 인류를 가르치셨다. 새 언약의 진리는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예레미야 31:31, 누가복음 22:20, 히브리서 12:24).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따라 1948년에 새 언약의 진리를 전파하신 분을 찾아야 한다. 그분은 2천 년 전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후스토 L. 곤살레스, 『간추린 교회사』, 세종문화사
- ‘갖은 박해에도 선진국 반열···건국 자체가 기적인 이 나라’, 중앙일보, 2018. 5. 14.
-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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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는지요?
마태복음
21:18-22 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번영"과 "심판"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유월절 즈음에 첫 열매를 맺는데 이 열매를 "파게(Phage)" 라고 합니다.
또는 "탁쉬"라고도 합니다.
이후에 열리는 열매를 "테에나(Thena)"라고 합니다.
파게라는 열매가 없으면 그 후에 반드시 맺혀야 할 열매 "테에나"를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리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시점이 열매를 맺는 여름이나 가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후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 유하신 그 다음
날입니다.(마 21:1-17)
마지막 고난 주간의 둘째 날 아침에 다시 성으로 들어 오실 때(21:18) 무화과 나무 곁을
지나치시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 그 때가 언제입니까?
유월절 며칠 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양력 3월말
내지 4월 초순 경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도저히 열매를 맺을 절기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3월에 잎이 나서 6월에 가야 열매를
맺습니다.
말하자면 무화과 나무 자체로선 아무 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이 보이신 다른 모든 이적은 생명을 살리는 긍정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만은 유일하게 그 성격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해석하기가 조금
까다롭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따져서 질문자께서 해석하신 대로 성도가 신앙 생활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구절과 사건에 그런 원론적인 해석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런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이상해 보이는(?) 기적까지 동원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해석의 전제
예수님이 보이신 모든 이적은 그 하나하나마다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각 이적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당시의 전후 상황을 잘 분석하여 전체 문맥과 연결하여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 해석에 필수적으로 감안해야 할 몇 가지 참고 사항부터 먼저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우선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가 이제 겨우 잎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을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서도 그 나무를 저주했다면 괜히 죄 없는 나무에다 당신이 시장하신 것을 화풀이 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의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11:13에선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시장했던 사정과는 상관 없이 그 이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어떤 다른 가르침을 주시려는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단지 신앙 생활에 열매를 잘 맺으라는 원론적 가르침을 주려 했다면 나중에 무화과나무가 마른 이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과 잘 일치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와 이 사건을 연결시켰습니다. 만약 성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 때에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해석으로 그쳐버리면 역설적으로 따져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성도가 믿음이 약한 기도를 해서 비록 비유이긴 하지만 무화과나무가 마르거나 산이 바다에 던지우는 식의 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도 심판 받아야 한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수 나무로 항상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로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9:10)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에서 보듯이 간혹 성도들 개인의 신앙 생활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무화과나무는 특정 개인과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므로 성도 개인의 성화와 관계 없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의미는 당신의 설명에 무화과나무 사건과 기도를 연결하셨듯이 반드시 기도와 연결되는 어떤 내용과 또 무화과 나무가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전체의 어떤 영적 상태와도 관련 되는 내용 두 가지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가?
앞에서 해석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살펴 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예수님이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지 않고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당시 마음을 감히 우리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앞뒤 상황을 잘 살펴서 말씀과 연결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따져 본다는 것은 무화과나무 사건을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앞 뒤 사건과 종속된 사건으로 보느냐를 구분하는 것이며 또 그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독립된 사건으로 보면 몇 번 언급된 대로 신자의 신앙 생활에서 열매가 없는 것을 심판하신다는 원론적인 해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도 개인들의 믿음 생활에 열매가 없음을 상징하기 위해 잎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택한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시간별로 더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11:12-25)을 보면 이 이적은 그 앞에 있었던 성전 청소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청소를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는 날 아침에 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청소를 하신 후에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나무 앞을 지나갈 때에 베드로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왜 저주하셨는지 질문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그 사이에 성전 청소 사건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무화과 나무 사건은 별개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성전을 청소한 사건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21:13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면서 성전을 청소하신 후에 다시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에 관한 말씀으로 무화과나무 사건을 결론지으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재구성 해 봅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첫날 성전에 올라 가보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바뀌어져 있음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하셨습니다. 아마도 첫날 성으로 들어 가실 때나 성밖으로 유하러 베다니로 가실 때도 분명히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며 앞에서 예로든 호세아서의 말씀에 표현된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다시 보자 열매 없는 성전 제사의 종교행위를 비유하기에 적합한 상징물로 보고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올라가 장사치들을 몰아 내셨고 그 후 셋째 날 아침에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풀어 주셨습니다.(참고로 마태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잎이 마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 전체에 사건의 연대기적 기록보다 구약의 율법과 연결된 사건의 의미를 기술하는 데 더 초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전체적 순서는 마가복음을 따르는 것이 정확합니다.)
성전과 무화과나무
당시는 유대 각지와 이방 나라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일년에 몇 차레 모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세를 바칠 수 있도록 외국 화폐를 유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과 먼 여행 길에 희생제물을 갖고 올 수 없으므로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이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그런 장사를 하기 위해선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자연히 장사한 이익금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게 되었고 또 폭리를 취해야 그런 뇌물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장사치를 다 몰아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21:23)라고 따졌습니다.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그들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전 청소 사건으로 주수입원이 사라진 대제사장들과 그 권속들은 그 이후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모의하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사건 이후로는 줄곧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 당, 대제사장 그룹 등과 천국과 구원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지적하고 야단치셨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 내내 예수님은 형식적 기복신앙으로 바뀐 이스라엘의 영적상태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런 가식적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아무 쓸모 없이 허울만 남게 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성전 파괴를 예언합니다.(마24:1)
성전에 제사 지내러 오는 유대인들은 흠이 있든 없든 무조건 제물만 바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을 지도해야 할 영적인 지도자들조차 하나님의 신령한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배를 채울 궁리만 했습니다.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에 바빴고 성전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이권과 연결시켰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탄식한 그대로 돈이 우상이 되었고 성전은 그 돈을 숭배하는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과 장사치들의 부정한 거래만 성행하는 성전 중심의 외식적 종교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진정한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는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고 단지 형식적이고도 문자적인 율법 준수와 성전 제사에만 매달려 있는 구약의 유대교로선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인간적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풀어 설명한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11:22)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고 제사장들이 강도의 굴혈로 바꿔 놓은 성전을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건물로서 성전은 없어져도 능력 있는 기도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믿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11:25)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장사치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권을 다스리는 권세로 가난한 자와 이방인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이에 반해 이제 복음 안에 믿음으로 들어오는 성도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책임을 갖고 세상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면 무화과나무는 외식적 형식적 종교행위에 의존한 부패한 유대 종교와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토록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한 까닭은 이제 곧 성전은 파괴 될 것이며 율법 시대는 끝이 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복음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특별히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무화과나무의 이적 사건은 강도의 굴혈과 기도하는 집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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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태복음 21:18-22)
형식적인 신앙의 실체 일깨우심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책을 쓴 버트란드 러셀은 영국이 낳은 유명한 철학자요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예수님이 말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그 행위를 자기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적 그리고 비윤리적 처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연 러셀만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 또한 이 본문을 대할 때 예수님은 왜 사람도 아닌 나무를
저주하여 뿌리까지 말라죽도록 하셨을까.
예수님은 유월절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시장하신 지라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 곁에 가시어 열매를 구했으나 그 나무는 잎만 무성 했지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성전 밖으로 나오셨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몰인정하게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화과 나무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통해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당시 유대교도들을 비유해서 책망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대해 저주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의 저주받은 무화과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두고두고 기억시키기 위한 실물교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이 경고를 무시하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 위에 처형하지 않았던가.
그 죄의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 처형한 대가는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보상받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기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나무
그것은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신앙의 실재가 없는 오늘의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어 신앙의 실재인 그 열매를 요구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Ahiqar 史話(기원전 5세기의 것으로 확인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너는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
이제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 버려야 하게 되었다.
그 때 그 나무가 주인에게 말했다.
나를 옮겨
심어 주세요.
그 때에도 내가 열매를 맺니 못하거든 나를 베어버리세요.
그러나 그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장소에 옮겨진다고 열매를 맺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民話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민화에서는 무화과나무의 간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곧 문 앞에 가까이 온 것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어원 / 481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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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화과나무, 마24:32, 막13:28, 눅13:6, 21:29, 요1:48, 약3:12, 계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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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무 / 무화과나무(마21:19, 요1:48, 계6:13).
성경에는 무화과나무(Ficus carica)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예수님은 여러 비유와 예화들에 무화과 나무를 사용하셨다. 이 나무의 잎사귀는 매우 일찍 돋아 나므로 봄을 알리는 전령이라 할 수가 있다. 열매는 가을에 지는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서 여름 동안에 익는다. 무화나 나무는 이 무화과 위에 애굽 무화과(Ficus Sycomorus)가 있다.
예수님 시대의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유실수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Bethphage(무화과 나무들의 집)이 위치한 예루살렘 근처는 더욱 그러했다.
무화과 나무는 히브리어로 "테에나"이며 헬라어로는 "수콘", 덜 익은 무화과를 "팍가"라는 말로
아2:13절에
사용되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테에나"로 23번, 신약에서 "수케"로 16번 언급되었습니다. 무화과 학명은 피쿠스
카리카(Ficus carica)입니다. 무화과 나무 열매는 즙이 많고 열매를 자르지 않으면 꽃을 볼 수 없도록 생겼다. 무화과는
둥근 종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계절에 따라 일정하게 두 차례 열매를 맺는데
5,6월에 익는 일반적인 겨울 무화과가 있고 8,9월에 익는 여름 무화과가 있다. 매년 4월쯤 입이 나타나며 열매의 싹은 2월쯤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1년에 9-10개월 이상 열매를 딸 수 있다는데 어린 무화과 나무는 겨울에 얼어죽어 첫
번째 열매는 딸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무화과 나무가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더운 지방에서 무상한 커다란 잎사귀와 고마운 그늘을 제공해 준다. 우물 옆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올리부나 잡목, 그리고 감람 나무와는 달리 무화과 나무는 겨울이 다가오면 잎을 떨어진다. 그리고 다른 여러 낙엽송들이 봄철에 일찍이 생명의 신호를 보여주기 시작할 때도 무화과나무는 그 앙상한 가지를 여름이 오기 직전까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리고는 눈이 나고 봉우리가 터져 며칠만에 부드러운 잎이 나옵니다. 자연은 살인적인 밤의 추위는 지나가고 여름철이 왔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은 4월 첫 주 동안에 싹이 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바로 그 때가 무화과 나무에서 생명의 첫 신호를 보여주는 시기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24:32) 이 말씀은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