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12/25/2022)
뉴욕 파트리스교회 이승혁목사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려는 기준은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에 "호모 루켄스(Homo Luquens)"라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불교)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리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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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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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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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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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코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로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나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십자성호를 왼쪽부터 긋는 가톨릭,
오른쪽부터 긋는 정교회, 십자성호를 긋지 않는 개신교
2023년 성탄예배
예수님이 어디에 오셔야 하는가?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 안에 있어
예수님이 오신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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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 예수(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중보(仲保) 버금 중(仲), 지킬 보(保)
1. 둘 사이에서 일을 주선(周旋)하는 사람
2. 신과 사람과의 사이를 유화(宥和) 매개(媒介)하는 일
3. 그리스도는 신과 사람 사이에 서서 십자가(十字架)에 죽음으로써 인류(人類)를 속죄(贖罪)하고 구제(救濟)했음
중보자란 고대 그리스의 상업 또는 법정 용어이다.
이것은 쌍방의 이견을 제거하거나 계약 또는 언약을 비준함으로써 공동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협상하는 사람
또는 중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중보자(仲保者) : 그리스도 또는 중보를 맡아 하는 사람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바울의 표현은 신인으로서의 그분의 독특성을 나타낸다(딤전 2:5).
구원과 중보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분의 자발적인 자기희생에 정확히 고정되어 있다.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실 수 있다.
예수께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은 두 가지 전제를 인정해야만 가능한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
세상에서는 세계 3대 종교라고 하여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와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둘째는 인간은 죄인(原罪)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물론 방금 막 태어난 새 생명을 향하여 죄인이 또 태어났구나! 이렇게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원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중보자가 되신다고 말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류를 속죄하고 구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좀 더 깊은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첫째, 유일신(唯一神) 신앙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對答)하여 가라사대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智慧)롭고 슬기있는 자(者)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感謝)하나이다.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 주재(主宰) : 임금 주(主), 재상 재(宰)
1. 주장(主掌)하여 맡음
2. 주장하여 맡은 사람
(현대인)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니 감사합니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일컬어 세계3대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세상 사람들을 위한 구분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둘째,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
마태복음 11:25a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對答)하여 가라사대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여.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라고 번역합니다.
셋째, 계시(啓示)의 주(主)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넷째, 중보 기도(仲保 祈禱)의 주(主)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聖靈)도 우리 연약(軟弱)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聖靈)이 말할 수 없는 탄식(歎息)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親)히 간구(懇求)하시느니라.
다섯째, 언약(言約)의 중보(仲保)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職分)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約束)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言約)의 중보(仲保)시라.
히브리서 9:15
이를 인(因)하여 그는 새 언약(言約)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言約) 때에 범(犯)한 죄(罪)를 속(贖)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者)로 하여금 영원(永遠)한 기업(基業)의 약속(約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12:24
새 언약(言約)의 중보(仲保)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에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새 언약과 관계가 깊다.
그분은 화목을 조성한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파괴하고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화목이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신다.
우리는 이 연결고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언약적 관계를 누린다.
미디에이터(mediator)
메시테스(mesités)(μεσίτης) 3316 : an arbitrator, a mediator
Original Word : μεσίτης, ου, ὁ
Part of Speech : Noun, Masculine
성경에서는 Mesites라는 헬라어가 6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통과하다’, 혹은 ‘서로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다’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중개인으로서의 중보자
중보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는 중개인, 화해자란 뜻으로 두 당사자 사이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신약성경에 있는 중보자(仲保者)는 그리스어 메시테스(중재인, 조정관)를 번역한 말입니다.
메시테스는 메소스(중간에, 가운데)에서 유래했습니다.
메소스는 영어로 전해져 접두어 메소(meso-·사이)로 쓰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지역을 이르는 메소포타미아는 포타모스(강) 앞에 메소를 붙여 만든 이름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메시테스를 미디에이터(mediator·중재자)로 번역했습니다.
라틴어 메디아레(끼어들다, 중재하다, 중간에 있다)에 뿌리를 둔 단어입니다.
메디아레는 메디우스(가운데의, 중간의, 보통의)에서 왔습니다.
메디우스는 영어에서 미디벌(medieval· 중세) 미디언(median· 중간값, 중앙을 가로지르는) 미디어(media· 매체) 등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류 사이를 중재하시는 분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적절한 때에 그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증언하도록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믿음과 진리로 이방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딤전 2:4~7,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온전하고 조화로운 관계로 만들어 주시는 든든한 중보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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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단절되었으며 하늘과 땅과의 교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오셨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전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통하셨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교통하셨다. 사탄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영원한 분리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사람과의 연결이 회복되었음이 드러났다”(시대의 소망, 116).
그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하늘과 교통하는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가 되심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을 연결시키고 죄와 불의로 말미암아 하늘과 결별하였던 땅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오셨다”(설교와 강연 1권, 253).
예수님, 비록 이 땅을 밟고 살지라도 주님을 통하여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향해 믿음의 손을 뻗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내미시는 ‘자비의 홀’을 붙잡습니다. 날마다 하늘의 각양 좋은 선물로 제 삶을 채워 주시옵소서.
마태복음 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은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셔서 알게하시고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자기의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만 알게하신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41문
중보자(中保者, MEDIATOR)
반면에 우리는 보통 중보자 예수, 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뭔가를 대신해 주는 의미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의미를 혼용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우리를 대신해서 ……”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대신 했다고 보는 것 보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아니 그 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와 생각과 신분으로서 인정 받으려 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대하여 우리가 대응하고 순종할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인 것이다. 이는 마치 고장 난 자동차는 주인이 타고 다니겠다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기에 주인과 자동차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자동차가 수리가 되면 자동차와 그 주인이 다시 연결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울 역시, 비리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를 갚아주는 그런 중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미가 있고, 그것이 바울의 본심이고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인함인 것이기에 이 중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시대의 상황은 익숙하거나 피부에 와 닿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지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바울이 의도한 바와 같이 그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단순히 도적질한 무례한 종을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 안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하늘의 뜻이고,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또한 오네시모가 다시 빌레몬에게 돌아 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육신적인 관계와 신분과 과거와 이해관계와 기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말씀이시기도 한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신분과 능력과 재물과 예의와 도덕과 같은 것들이 있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서 지나서 그런 것이 바로 구원의 증표라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런 것을 기준으로 교회 안에서 인정하고 인정 받는 모든 생각과 관계 안에서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할 수도 없고, 오네시모 또한 빌레몬에게 돌아갈 수 없으며, 바울 역시 그렇게 중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와 나 서로가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기준으로 만나는 어떤 관계도 온전한 관계가 아니라, 그 연결 고리가 세상에서 온 것에 기반을 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안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범죄한 오네시모를 바울이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낼 수 있고, 모두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예의와 사회적인 규례를 따른다면 오네시모는 죽을 것이나, 그렇지 않고, 돌아가서 다시 주인과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내고 가고 받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이 모두들에게 세상에서 온 것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이루는 각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가시관을 쓰고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목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의 어떤 사상이나 신분이나 공로로 수고하여 하나님께 이르려는 마음,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그 마음의 어느 것 하나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같은 기적과 같은 관계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진정한 공동체가 되고, 또한 이것이 바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신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갭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이 필요하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위치에 선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중개인으로서의 중보자
중보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는 중개인, 화해자란 뜻으로 두 당사자 사이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인의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그는 모세이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시내 산 계약 중개인의 역할을 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던 존재는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천사도 종종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사람 사이에서 중개인의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의 3중 직에 해당하는 제사장, 선지자, 왕들 또한 중개인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약의 언약보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의 중개인은 오직 한 분만이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새 언약의 유일한 중개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브리서 8:6).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9: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 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새 언약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의 계약 당사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인데 구약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아(그리스도),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저주 아래 갇힌 사람을 구원할 이, 그가 이미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 구세주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나사렛 예수시다.
지금까지 죄 가운데 살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로 하고(회개), 나사렛 예수, 그가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고 그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새 언약의 계약 당사자가 되는 방법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1-4).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중개인 이상의 의미인 중보자
중개인은 계약이 성사되도록 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면 끝이지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중보자’란 의미는 이 개념을 뛰어넘는다.
성경에 ‘보혜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 불리어지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정에서 피고인의 상황을 대언하는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고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또 다른’이란 말에서 이미 보혜사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는 헬라어‘파라클레토스’를‘대언자’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 17).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개자일 뿐 아니라, 변호인이 되어 믿는 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신다. 그는 또한 화해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 되어 막혔던 담을 허셔서 화평의 길로 이끄셨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영’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믿는 자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위로자’이시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4, 1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절대적이신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의 권세를 맡아 하나님을 아는 것과 교제하는 일에 불가능한 사람을 초청하여 하나님과 연합시켜 주는 일을 맡은 사람.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
- 하나님은 유일하신 절대적인 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어린 아이 처럼 겸손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성경)를 받아야만 안다는 절대적 사실.
자율주의(自律主義, Autonomism)
자율주의(autonomism) 혹은 자율주의 그룹 또는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통상적으로 독립적인 급진좌파 경향 및 아나키즘적 경향의 운동 흐름을 일컫는다.
자율주의 그룹은 어피너티 그룹을 통해 조직화되어 있다. 그룹들 간에는 느슨한 연결 혹은 네트워크 형태로 소통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지배적인 사회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자유공간을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반권위주의적, 사회혁명적, 아나키즘 친화적인 이상을 따른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국가안보기관들은 자율 운동을 “좌익극단주의”로 평가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8장 1항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을 따라, 독생자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왕, 교회의 머리와 구주, 만유의 후사 그리고 심판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주 예수에게 한 백성을 주시어 그의 후손이 되게 하셨다. 정한 때에 그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되고 영화롭게 되게 하셨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끊어지게 했다.
로마서 8장 7절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미워한다.
그러나 그 미워하는 마음을 감추고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나는 단지 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라고 둘러댄다.
사람들은 본성에 하나님의 거룩, 능력, 전능, 지식, 전지, 항구성, 불변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를 뱓는다고 생각한다.
구속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시는 일이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시는 것이다.
구속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가 시작하신 것이다.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중보자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중보자는 사랑의 다리를 놓아주는 일을 한다. 부동산을 거래할 때 대개 공인중개사를 통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한다. 디모데 전서 2장 5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라고 기록한다.
모세는 옛 언약의 중보자이다(갈3:19).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중보자 역할을 담당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의 중보자들은 세가지 직분들 중에 하나를 담당했다. 선지자, 제사장, 왕 세가지 직분이 있는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대변인 역할이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 시작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렸다. 신약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무를 목회자의 직무를 통하여 이어간다.
교회 예배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는 선지자적 요소와 기도와 간구와 축도의 제사장적 요소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왕도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 유럽의 왕들이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거나 중세 동양의 왕들이 천제 혹은 천황을 주장한 것은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주어진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왕의 대관식 때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하는 것도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고 왕은 하나님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정부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고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롬 13:1).
선민 이스라엘의 사울왕, 다윗왕 역시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별되고 왕의 통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 오는 것을 확인했다.
구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 중보자 역할을 했지만,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 임을 말한다(딤전2:5).
서울로 가는 길이 여러가지 이듯이 천국 가는 길도 여러가지다 라는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부처, 공자, 무함마드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갈 수 있다 혹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 사이에 중보자, 화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 세가지 즉 삼중직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다(요1:1). 말씀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의 주체이시면서 대상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재림하신다고 예언하셨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드린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심으로 이제 짐승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죄사함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하다. 다윗 언약을 통하여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어지다가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함으로 왕권이 끊겼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를 통하여 왕권이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선지자, 완전한 제사장, 완전한 왕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신약 성경은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엡4:15-16). 교회의 사역, 정체성, 목표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결정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 아래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구원자이시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권위, 사장의 직원에 대한 권위,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 등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다. 그리스도는 남편들에게 가장으로서 권위 행사나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명령하신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의 권위아래 이루어진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권위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이루어진다.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십자가의 피로 값을 치르셨다.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을 구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의 아덴 사람들에게 말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
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제2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성부와 한 본체이시고 동등하신 분으로서,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되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약점들을 함께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되시되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잉태되셨다. 따라서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전환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지만 한 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종교개혁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및 초기 공교회 회의에서 고백된 진리들 위에 서 있다.
종교개혁은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받아들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2항은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제2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고 성부와 한 본체이시고 동등하신 분이라고 단언한다.
4세기에 아리우스 이단이 나왔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신론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가 주창한 삼위일체 기독교를 반대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고 시간 안에 시작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니케아 신조가 정해지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기독교가 고백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체를 가지심으로 본질이 하나다.
하나님의 아들은 ………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되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약점들을 함께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되시되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잉태되셨다.
‘때가 차매’는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성취해 나가신다. 구약과 신약의 계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예레미야, 그리스도, 베드로, 바울, 베드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점차적으로 계시가 보여지고 계시가 이루어진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누가복음 2:1-2).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역사적 배경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역사적 배경에서 일어났다. 성육신은 실제 역사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도신경 신앙고백은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한다. 기독교는 실제 사람, 실제 장소, 실제 사건속에서 이루어진 역사다.
따라서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전환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었다.
주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성육신의 신비를 이해하는 우리 능력의 한계를 정한 것이다.
5세기 중반 교회는 유티케스 이단과 네스토리우스 이단의 공격을 받았다.
유티케스파 이단은 단성론이다.
유티케스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하나의 신인 본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합한 것으로 보게했다.
네스토리우스 이단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켰다.
주후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을 가진 한 위격이라고 선언했다.
칼케돈 회의는 그리스도께서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 vere homo, vere Deus 즉 참 사람, 참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했다.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를 가지고 계시고 이 두 본성들은 한 위격 안에서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 없이, 혼동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3대 표지는 말씀 선포, 세례와 성찬 그리고 권징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한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 성찬식에 참여할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늘에 계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찬식에 참여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교제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시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죄용서와 구원을 얻는다.
출처: https://aretz.tistory.com/entry/중보자-그리스도-예수 [아레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해서 1
바른교리 알기 2020. 2. 8. 06:57
1.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1) 선지자,2) 제사장,3) 왕,4) 교회의 머리와 구주,5) 만유의 후사,6) 세상의 심판자7)로 택하시고 임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분에게 한 민족을 주셔서 그분의 씨가 되게 하시고,8) 때가 이르러 그분에 의해 구속함을 얻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고, 영화롭게 되도록 하셨다.9)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begotten Son, to be th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1] the Prophet,[2] Priest,[3] and King,[4] the Head and Savior of His Church,[5] the Heir of all things,[6] and Judge of the world:[7] unto whom He did from all eternity give a people, to be His seed,[8] and to be by Him in time redeemed, called, justified, sanctified, and glorified.[9]
1) 사42:1; 벧전1:19-20; 요3:16; 딤전2:5
2) 행3:22
3) 히5:5-6
4) 시2:6; 눅1:33
5) 엡5:23
6) 히1:2
7) 행17:31
8) 요17:6; 시22:30; 사53:10
9) 딤전2:6; 사55:4-5; 고전1:30
두 개의 세력이 엄청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럴 때 만약 어느 한 쪽도 그 싸움을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면 더 심하게는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망각하고 있다면 그 싸움은 관계의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그럴 때 그 싸움을 조정하고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조정자 혹은 중재자(Mediator)가 필요하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였음을 로마서 8장 7절은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류는 최초의 죄 이후에 하나님과 필연적으로 무한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전혀 믿으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류가 하나님과 전쟁 중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예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의 절정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보내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그 중보자의 역할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담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단지 백성들을 대신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인 중보자가 오신 것이다. 신약의 중보자는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을 감당하셨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만드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속, 구원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이어지며 끝나는 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실 때 매우 기쁜 마음으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중보자는 오로지 한 분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할을 오로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만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중보자가 없음을 입술로 그리고 삶으로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중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2
바른교리 알기 2020. 2. 10. 08:34
2.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와 동일한 본질과 동등함을 가지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때가 차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는데,10) 그 모든 본질적인 속성과 그로 인한 일반적인 연약함을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시다.11) 그분은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실질적으로 잉태되셨다.12) 그렇게 그 두 가지 전인적이고 완전하며 구별된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서 분리될 수 없게 함께 결합되어 있으나, 서로 전환되지 않으며, 합성되지 않고, 혼동되지 않는다.13) 어느 인격이든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지만, 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14)
The Son of God,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being very and eternal God, of one substance and equal with the Father, did, when the fullness of time was come, take upon Him man's nature,[10] with all the essential properties, and common infirmities thereof, yet without sin;[11]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12] So that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13]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14]
10) 요1:1,14; 요일5:20; 빌2:6; 갈4:4
11) 히2:14,16-17; 히4:15
12) 눅1:27,31,35; 갈4:4
13) 눅1:35; 골2:9; 롬9:5; 벧전3:18; 딤전3:16
14) 롬1:3-4; 딤전2:5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논란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있었다. 그는 일신론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삼위일체적 기독교를 강력히 부인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면 일신론은 무너지며 다신론 혹은 성령도 하나님으로 포함하면 삼신론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이에 주후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고 그 공의회에 참여한 참여자들은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래서 나온 유명한 단어가 바로 동일 본질 혹은 동일 본체라는 단어이다(헬라어로 호모우시오스 homoousios). 이 동일 본체라는 말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유사 본질’이라는 단어와 매우 대조되는 단어이며 삼위일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이후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3
바른교리 알기 2020. 2. 11. 08:37
3. 주 예수는 그렇게 신성과 연합된 자기의 인성 가운데 거룩해지셨고, 성령으로 한량없이 기름부음을 받으셨으며,15) 자기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계셨다.16) 성부는 기꺼이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게 하셨고,17) 끝까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18) 그분이 중보자와 보증인의 직책을 수행하도록 철저히 공급하셨다.19) 이 직책은 그분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그것에 부르심을 입으신 것인데,20) 성부는 그분의 손에 모든 권세와 심판을 맡기시고, 그 일을 실행하라는 계명을 그분에게 주셨다.21)
The Lord Jesus, in His human nature thus united to the divine, was sanctified, and anointed with the Holy Spirit, above measure,[15] having in Him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16] in whom it pleased the Father that all fullness should dwell;[17] to the end that, being holy, harmless, undefiled, and full of grace and truth,[18] He might be thoroughly furnished to execute the office of a Mediator and Surety.[19] Which office He took not unto Himself, but was thereunto called by His Father,[20] who put all power and judgment into His hand, and gave Him commandment to execute the same.[21]
15) 시45:7; 요3:34
16) 골2:3
17) 골1:19
18) 히7:26; 요1:14
19) 행10:38; 히12:24; 7:22
20) 히5:4-5
21) 요5:22,27; 마28:18; 행2:36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그 분의 정체성을 잘 모르고 또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의 위격에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이 말을 매우 쉽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성령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가 가능하다. 그 분은 비록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또한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의 교제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한 분이 메시아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과 은혜의 충만함을 공급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보내셨으며 또한 하나의 위격에 두 개의 본성을 가지게 하신 것은 구원을 위한 커다란 계획에 의한 결정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완전히 충족하고 성취하실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비록 당신은 죄가 없는 분이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5
바른교리 알기 2020. 2. 13. 08:26
5. 주 예수는 자기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단번에 제물로 드려진 자신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키셨고,34) 화평뿐만 아니라,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천국의 영원한 기업을 사셨다.35)
The Lord Jesus, by His perfect obedience, and sacrifice of Himself, which He through the eternal Spirit, once offered up unto God, has fully satisfied the justice of His Father;[34] and purchased, not only reconciliation, but an everlasting inheritance in the kingdom of heaven, for those whom the Father has given unto Him.[35]
34) 롬5:19; 히9:14,16; 10:14; 엡5:2; 롬3:25-26
35) 단9:24,26; 골1:19-20; 엡1:11,14; 요17:2; 히9:12,15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 분의 중보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의 중보 사역에 있어서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분야는 바로 “완전한 순종”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종종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을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그 분이 사셨던 모든 생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의 삶을 율법에 복종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구약의 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을 신실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성취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근자에 한 참 논란이 되고 있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능동적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완벽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이 결국 그 자신과 그가 대표하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을 얻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의미하는 바는 그 믿음이 우리를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근거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창세기에서 아담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그 직접적인 원인을 성경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추측이 되는 것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준비했고 가인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또한 이 구절을 증명하는 것이 창세기 4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직후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증언하고 있음을 본다. 즉 가인이 믿음으로 제사를 준비했다면 이렇게 분하고 안색이 변하지 않았을 듯 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그 제사를 준비하고 제물을 드리는 자의 사랑, 존경 그리고 복종의 표현으로서의 제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 본인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늘 기도하셨음을 본다.
그러므로 완벽한 제물이 되셨고 완벽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단 한 번의 제사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완전히 충족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의 반목을 일소하셨고 그 자리에 평강을 심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믿는 자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6
바른교리 알기 2020. 2. 14. 08:46
6. 비록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후에야 비로소 그분에 의해 실제로 시행되었지만, 그로 인한 효력, 효능, 이익들은 창세로부터 모든 시대에 속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분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시며,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이시라는 것이 계시되고 예표 되었던 약속들, 양식들, 제사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전달되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36)
Although the work of redemption was not actually wrought by Christ till after His incarnation, yet the virtue, efficacy, and benefits thereof were communicated unto the elect, in all ages successively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in and by those promises, types, and sacrifices, wherein He was revealed, and signified to be the seed of the woman which should bruise the serpent's head; and the Lamb slain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being yesterday and today the same, and forever.[36]
36) 갈4:4-5; 창3:15; 계13:8; 히13:8
세대주의자들은 종종 구약의 언약은 제사 제도와 의식을 통해서 그 구원이 성취되고 신약의 언약은 믿음에 의한 구원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우리가 의롭게 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단지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하신 언약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 계획에 대한 언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내용이 더욱 증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어 구원에 대한 직접적인 사실들을 성취하시며 보여주셨던 것들을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허락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차 반드시 성취될 그 언약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그 사역이 아직 실현되고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가치를 그리고 그 공로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며 각종 짐승들을 제물로 바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단지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형이, 그림자가 가리키고 있는 실재인 그리스도에 근거해서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 그리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렇듯 구약의 제사나 의식들은 그 자체가 갖는 의미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는 더 높고 깊은 실재를 가리키고 있는 예표들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표를 실재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과 일찍 죽임을 당하게 된 어린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을 미리 가리키는 예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7
바른교리 알기 2020. 2. 17. 08:32
7. 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에 있어서 두 가지 본성에 따라 행동하시되, 각 본성에 적절한 대로 하신다.37) 그러나 인격의 통일성 때문에, 성경에서는 때때로 한 본성에 적절한 행동을 다른 본성에 의해 명명된 인격에 돌리기도 한다.38)
Christ, in the work of mediation, acts according to both natures, by each nature doing that which is proper to itself;[37] yet, by reason of the unity of the person, that which is proper to one nature is sometimes in Scripture attributed to the person denominated by the other nature.[38]
37) 히9:14; 벧전3:18
38) 행20:28; 요3:13; 요일3:16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특별한 존재로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것이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중보 역할을 수행했다. 대표적으로 모세는 구약의 중보자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비록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던 것 같은 초월적인 의미에서의 중보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중요한 관점은 참 인간과 참 하나님에 의해서 수행된 중보 사역이라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신 유일한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두 본성에 따라서 행동하신다. 어떨 때는 철저히 하나님으로서의 행동을 보이실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철저한 인간으로서의 행동으로 보이실 때도 있다. 대표적인 인성에 따른 행동이 굶주리셨다는 표현이나 피곤하다는 표현 그리고 주무셔야 한다는 표현 등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보이는 표현이 있더라도 칼케돈 회의에서 결의한 두 본성에 대한 정의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각각의 본성은 그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섞임, 혼합, 분리 혹은 분할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단언한 것이다. 한 위격 안에 한 위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본성의 이러한 독특한 특성과 위격의 통일성으로 인해서 한 본성의 고유한 특성에 의한 행동이 때로는 다른 본성을 따라 호칭되는 그분에게 돌려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교회를 자기의 피로 사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피를 흘릴 수 없다. 신성이 절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완전한 통일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하나의 본성에 귀속될 수 있는 속성은 무엇이든지 그 위격에 역시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를 흘리는 것은 인성을 따라서만 가능하지만 그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8
바른교리 알기 2020. 2. 18. 08:38
8. 그리스도는 자기가 값 주고 사신 구속을 그 대상이 되는 모든 자들에게 확실하게 효과적으로 적용하며 전달하신다.39)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고,40)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시고,41) 그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성령으로 효과적으로 확신시키시고, 자기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며,42)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로 그들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는데, 기이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경륜에 지극히 합당한 방식과 수단으로 하신다.43)
To all those for whom Christ has purchased redemption, He does certainly and effectually apply and communicate the same;[39] making intercession for them,[40] and revealing unto them, in and by the word, the mysteries of salvation;[41] effectually persuading them by His Spirit to believe and obey, and governing their hearts by His word and Spirit;[42] overcoming all their enemies by His almighty power and wisdom, in such manner, and ways, as are most consonant to His wonderful and unsearchable dispensation.[43]
39) 요6:37,39; 10:15-16
40) 요일2:1-2; 롬8:34
41) 요15:13,15; 엡1:7-9; 요17:6
42) 요14:16; 히12:2; 고후4:13; 롬8:9,14; 15:18-19; 요17:17
43) 시110:1; 고전15:25-26; 말4:2-3; 골2:15
일부 기독교 교단에서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물로 이 말이 전혀 잘못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정의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정의가 구원에 있어서 바른 정의라고 한다면 구원을 받는 적극적인 의지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아직 타락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의 상태에 있는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마음의 결심을 할 만큼 완전히 타락했다고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유효하게 속죄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과를 택자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 하신다. 이 모든 내용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하셨던 기도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이렇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여 도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고 심지어 그 얼굴과 음성을 마주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즉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그분의 살과 피로 바꾸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 하시며 다스리신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믿음은 절대 교만이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그 구원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그 비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유효하게 설득되고 믿으며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신다. 그러할 때 성령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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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탄생의 예언과 성취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회적 거리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가정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대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가정은 대면 생활을 통하여 서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로 잘 알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옷이 없었다.
옷이 많다는 것은 뭔가 감출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두 벌 옷과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부의 상징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도시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이 없었다.
주방이 없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옷과 집과 음식이 필요 없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예수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 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5-8)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의 삶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은 가정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고 그 가정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먼저 가정에서 확인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에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터에 나가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정에서 회복되고 무장한 후 다시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가정의 에덴동산
에덴동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옷이 없었습니다.
주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옷이 늘어났고 주방도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눈만 뜨면 배가 고플 때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냉장고도 필요없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아혀 대면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일터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증거
1. 여자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실 것을 예언(창 3:15, 사 7:14, 미 5;3, 마 1:23, 눅 1:34~3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2. 아담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가죽 옷 : 십자가에 몸이 상하여 죽어 주심을 예표(창 3:22)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스겔의 증거
1. 세상의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예언(겔 37:1~28)
2. 평화의 왕으로 예언(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 화평의 언약(베리트 솰롬)
①. 하나님만이 계약의 주체가 되어 계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②.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핵심이 된다.
③. 물질적인 것이나 상호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언약 성취는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BC 538년에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예레미야 23:5, 33:14∼16, 26)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예레미야 33:26,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3. 선지자로 예언(겔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4. 공평하실 것을 예언(겔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성탄을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대신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세속 문화에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성탄의 의미는 축제의 한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산타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탄절의 주인이 2000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왜 이땅에 말구유에 오셔야만 했는가?
예수탄생의 복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예수탄생의 복음을 가진 자인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탄생의 복음 증거자로 만세전에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일컬어서 택정함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로마세계에 있어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일개 기구와 같았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가 로마를 연구하는 중에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가구, 말할 줄 모르는 가구
호미, 낫, 삽,
둘째 가구, 말을 못하지만 움직이는 가구
말, 소, 나귀 등
셋째 가구, 말을 하는 가구
노예를 가구로 봤기 때문에, 말을 하는 노예를 가구와 같이 취급한 사회가 로마사회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친히“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함은 타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는 것이요, 예수탄생의 복음을 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종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선지자들로 말미암아서 그의 아들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요,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라는 단어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찬송 122장 4절에“육신을 입고”이렇게 찬송을 하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되요.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입다’라는 것은 옷을 입듯이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이 들게 하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일컬어서 이단이 주장하는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인성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어요. 왜?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참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어디서 나오셨냐?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요, 신비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죄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될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성을 가지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디에서 들어나냐 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분이시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들과 같이 그냥 흥청망청 성탄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성탄절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깨어서 근신하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다른 날들도 1년 365일 우리의 몸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 성탄의 계절에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는 부르지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인 이 몸을 가지고, 육적인 일에만 육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쓴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 라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입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하면‘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7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셔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말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나심을 축하면서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예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은혜로 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났고, 복음증거하다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어도 거기서 찬송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기뻐하고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지지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와 여러분 중에 아직도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눌려 지내면서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된 심령들이 잇습니까?
저와 여러분 내 맘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심령이 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들이 얻는 호의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주요하고 기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그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에 평강이 없고, 은혜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써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잖아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못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계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질병하나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감옥에 있을 때에도 감사했고, 무슨 일이 주어지던 지간에 노동을 하면서도 감사했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감사했다”고, 감사한 생활이 감옥 생활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정말 내 삶속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데, 내 맘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없고, 평강이 없으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살롬?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어요. 삭막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들어가면 푸르른 숲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복음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통(疏通)(누가복음 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소통(疏通)이란 한자의 훈(訓)을 살펴봅니다.
"소통할 소(疎), 트일 소(疎). 통할 통(通)"
1. 사물이 막힘이 없이 잘 통함.
2. 의견이나 의사 따위가 남에게 잘 통함.
소통이란 단어를 영어로 "컴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회복을 위한 소통" 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이란 안식년을 일곱번 지낸 후에 맞이하는 50년을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들을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회복됩니까?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4.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세 가지 회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기쁜 소식을)
2. 포로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죄의 멍에를 벗는 것)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영적 시력)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the Lord's favor)
은혜를 원어로 살펴보면 "받으실만하다"는 뜻입니다.
받으실만하다는 뜻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의미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나니" 라는 말씀에서 성령은 영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의미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믿음에는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포로되고 눌린 자는 죄의 포로가 되어 죄의 짐에 짓눌린 사람입니다.
죄는 내가 내 마음대로 죄를 짓지만 한 번 죄를 지으면 내 마음대로 벗어버릴 수 없을만큼 무겁습니다.
눈먼 자는 심판의 때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탄(聖誕) : 성스러울 성(聖), 태어날 탄(誕)
쉽게 설명하면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태어나야 할 시기를 세 가지 절기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아기 예수께서 2천 년전 태어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성탄의 참된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2천 년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서 성탄의 의미를 완성하시려고 그 다음의 성탄을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제1, 제2, 제3의 성탄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제1의 성탄
제1의 성탄은 "성육신(成肉身)"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이 날을 성탄절(聖誕節) 또는 크리스마스(Chfist + Mas)라고 합니다.
영어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이란 영이 육으로 내려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제2의 성탄
제2의 성탄은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날을 성 금요일 또는 굿 프라이데이(Good Friday)라고 합니다.
영어로 Crucifixion이라고 합니다.
성 금요일은 육이 죽는 사건을 말합니다(死亡).
성 금요일 사건은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습니다.
셋째는 제3의 성탄
제3의 성탄은 "부활(復活)"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이 날을 부활절(復活節)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Easter 또는 Resurrection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사건은 육이 영으로 완전하게 회복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부활의 사건은 빈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제1의 성탄과 제2의 성탄 그리고 제3의 성탄 과정을 거쳐 비로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은혜가 오직 주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때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19절을 읽어봅니다.
"주께서 은혜 베푸실 때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은혜 베푸실 때는 희년(禧年)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회복되는 해를 말합니다.
(도입 이야기)
팬데믹 시대에 성탄을 맞이하는 분위기를 풍자하는 산타 할아버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20년 12월 25일에 산타 할아버지가 도착했지만 14일 동안 격리해야 하므로 산타 할아버지는 2021년 1월 9일에 등장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의견을 말합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지혜롭기 때문에 격리 기간을 미리 알고 서둘러서 12월 9일에 출발하셨기 때문에 12월 25일에 등장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거나 방문 할 때 14일 동안 격리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칙을 풍자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와 소통이 잘 된다면 정해진 날자에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와 소통이 잘 안된다면 정해진 날자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 주제를 소통이라고 정했습니다.
성탄이란 하늘과 땅의 소통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 6. 19~1662. 8. 19)은 인간을 "중간적 존재" 라고 정의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 의미
인간은 과거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에 머물며 살아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둘째는 형태적 의미
인간은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사탄도 아닌 다르게 표현한다면 영적인 형태가 아니라 육체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육체적 존재이므로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셋째는 공간적 의미
인간은 하늘 위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고기처럼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땅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이 중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공중을 날던 참새들이 먹이를 찾아 눈 덮인 땅을 빙빙 돌고 있습니다.
마침 그 광경은 농부가 보고는 참새들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해서 저렇게 공중을 돌고 있구나!
내가 먹을 것을 주어야지 하고는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땅 위에 참새들이 먹을 수 있는 곡식들을 흩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참새들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칩니다.
"참새야! 이리로 내려와서 여기 있는 곡식을 쪼아 먹어라!"
그런데 참새들은 여전히 공중을 빙빙 돌며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왜 참새들이 농부가 눈을 쓸어버리고 곡식을 뿌려놓은 것은 먹지 못할까요?
참새와 농부의 존재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육체로 존재합니다.
영적 존재가 영적인 방법을 아무리 설명하지만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은 모두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곧 영적인 하나님이 육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성탄이라고 합니다.
성탄은 곧 영적인 하나님과 육체적인 인간이 소통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은 소통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통의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까?
인크루레(InCruRe)
성육신(Incarnation) : 영이 육신이 되었으므로 육신으로 영적인 삶을 회복하는 것(하늘에서 땅으로)
십자가(Crucifixion) : 육신이 죽어야만 하는 것(땅 위에서 땅 아래로)
부활(Resurrection) : 육이 온전한 영으로 회복하는 것(땅에서 하늘로)
첫째는 사랑의 소통
어른들이 철 없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이 다음에 네 자식 낳아 길어보면 그때 내 심정을 알 것이다!"
육체로 살아가는 어른들과 아이들도 서로 소통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 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께서 땅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사랑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너무 막막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려고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30년 동안 세상에서 모두가 겪는 과정을 다 겪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0년 후에 비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가르침을 받았고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도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제자들은 모두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다이바 부인(Lady Godiva, 990년경 - 1067. 9. 10)
고대 머시아 왕국(현재 코번트리)의 백작 부인.
전설에 의하면 레프릭 영주의 무리한 세금 징수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의 부인 고다이바는 남편에게 백서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레프릭 영주는 부인에게 "당신이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고심하던 고다이바 부인은 남편의 제안을 받아드리기로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감면해 주려고 영주의 부인으로 몸소 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
잠언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으니라.
사랑은 내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일방적인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사랑을 확인한 후에는 양방적인 사랑으로 발전해야 믿음이 형성됩니다.
사랑의 소통이 실현된 후에는 반드시 믿음의 소통이 따라와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소통
믿음이란 서로 신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한다면 같은 공간에 머물지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활동하셨던 채필근목사님이 어느 날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마침 어느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방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에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채필근목사님이 머물게 된 그 방에 나중에 낯선 사람이 또 들어와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당시 지방의 여러 교회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교회를 지원한 돈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밤중에 곁에 있는 사람이 부스럭하고 움직이면 목사님은 헛기침을 하며 나도 깨어있소 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밤새도록 부스럭 거리면 헛기침을 하였는데 날이 밝고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여관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같은 밥상에 앉았는데 채목사님이 식사기도를 하는데 마침 함께 머물렀던 그 사람도 기도를 합니다. 서로 기도를 마친 후에 누구십니까? 하고 서로 통성명을 하는데 나는 채필근목사외다! 아 그러시군요 나는 아무게 영수라고 합니다.
그때 채필근목사님께서 깨달은 것은 목사와 영수가 같은 방에 머물면서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부시럭 거리면 헛기침을 하는구나! 밤이 늦었더라도 서로 통성명을 먼저했으면 평안한 밤을 보냈을텐데 하며 믿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화근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보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비난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모든 것이 이해되겠지만 문을 열지 않으면 여전히 어둠 가운데서 서로 부스럭 거리며 헛기침만 계속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이 없는데 어떻게 문을 열어야 할까요?
1. 듣는 단계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먼저 들어야 합니다.
2. 이해하는 단계
들은 것이 있으면 들은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들어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3. 아는 단계
듣고 이해했다면 그 다음에는 알아야 합니다.
영어라는 것을 모두 듣습니다.
어떤 것은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믿는 단계
아는 것은 행동하므로 정확하게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행하므로 믿음은 더욱 크게 확산되고 증가될 것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빛을 들고 서 있는 예수님이란 그림을 소개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셋째는 소망의 소통
소망이란 내일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어떻게 제1의 성탄을 제2와 제3의 성탄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4:18a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사야 61:1a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사도행전 1:8
오직 성려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팬데믹 시대에 맞이하는 2020년 성탄은 우리들에게 제1의 성탄을 제2의 성탄으로 그리고 제3의 성탄으로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2020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팬데믹 시대
둘째는 로마 정치 역사적 배경
성탄을 맞이하는 환경이 처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상이 억눌린 상태에서 맞이합니다.
그렇다면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는 로마 정치적인 억눌림에서 일어났습니다.
억눌림이란 사건이 같다고 하겠습니다.
정치 역사적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은 당시 최대 국가인 페르시아제국을 무찌르고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렇게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지만 미처 정비하기도 전에 33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프톨레미, 안티오쿠스, 셀루커스” 같은 부하 장군들 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유대 땅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 사이를 오가며 처참하게 유린당합니다.
알렉산더 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은 자기가 정복한 국가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려 세계화시켰다. 정치적 문제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화적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까지 헬레니즘 문화는 역사, 철학, 예술 등 각종 문화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 철학자 칼 마르크스, 알베르트 카뮈, 장 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 등은 헬레니스트들이라 볼 수 있다. 베드로성당 옆 가톨릭 교황을 뽑는 시스티나성당의 벽화 '천지창조'에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그려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로마제국은 정복한 국가들을 식민화하고 각 국가에 총독을 보내 고통스럽고 가혹한 정책을 시행했다(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을 생각해 보라). 이 분열된 제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1, 2차 삼두정치의 권력투쟁이 이어져 갔다. 1차 삼두정치는 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사람 간의 권력 투쟁이었다. 카이사르는 오늘의 프랑스, 영국 등을 비롯한 서유럽을 정복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함께 카이사르를 죽이려 했다.
나는 한국교회 역사 부재 문제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 성경 번역에 일차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라틴어 카이사르를 우리말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페르시아를 바사 등과 같이 쓴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와 전혀 다른 단어로 변형시킴으로 성경의 역사와 일반 역사를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한국교회 역사 부재 원인 중 하나라 본다.
카이사르는 BC 49년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리고, 그 유명한 이탈리아 북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카이사르는 이후 폼페이우스를 이기고 로마의 실권자가 됐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우발성은 카이사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의 수하 장군 부루투스 일당에 의해 BC 44년에 암살된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로마가 통일되는가 싶었으나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2차 삼두정치 즉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중심으로 벌어진 싸움이었다.
안토니우스 측 군대가 훨씬 우세했음에도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는 BC 29년 로마로 향하며 개선식을 가졌다. 이어 원로원은 BC 28년 로마제국을 평정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존귀한 자”라는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Augustus)” 라는 칭호를 주었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평정된 이후 로마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기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라 불렸다. 그러나 이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한 것이었다.
BC 169년 헬라화 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바닥난 국고를 채우려 했다. 유대 땅은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했고, 특히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안식일에 할례를 금지했고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그것도 모자라 제사를 폐하고 제우스 신상을세웠으니 유대인의 저항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에 크게 반발한 이스라엘의 하스몬 왕가는 전쟁을 일으켰다. 하스몬 왕가는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BC 142~63년 80여 년간 짧게나마 독립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아버지 헤롯이 등장했다. 헤롯은 세계 정치 동향을 살피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해 총애를 받았다. 결국 이스라엘 땅 일부를 다스리게 된다. 이두메 사람 이방인 헤롯은 유대 땅을 다스리면서 유대인과 로마를 함께 만족시키려 했다.
거기다 헤롯은 매우 잔인한 왕이다. 왕권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왕비, 장모, 두 아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서 말할 것 없는 정치적, 문화적 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러한 헤롯의 정통성과 도덕성 시비에 유대인은 계속 저항했다. 그 예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헤롯은 유대인을 달래기 위해 대규모 건축 토목공사를 했다. 주둔군 기지촌, 수로, 극장 등이 갖춰진 로마식 도시 건설과 감세 정책으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도시화는 우리나라 현대사가 보여 주듯 극심한 빈부 격차를 가져온다. 하지만 한편으로 호황을 누리는 새로운 졸부들이 등장하게 돼 헤롯 왕의 든든한 권력 기반이 된다.
솔로몬 왕 때 지어졌던 성전, 느헤미야 시대 때의 조촐한 성전과 함께 법궤와 속죄소는 바벨론 제국 시대에 일어난 성전 파괴로 모래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이방인 헤롯 왕은 유대인 신앙의 중심인 성전을 솔로몬 시대 때보다 훨씬 크게 지어서 유대의 많은 종교 지도자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BC 31년 성전 봉헌을 통해 대제사장 출신 등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은 헤롯 왕의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이때헤롯 왕은 어느 정도 평화로운 시대를 누리게 되었다.
메시아의 탄생
그런데 어느 날 변방 땅에서 심상찮은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어떤 아이의 소문이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다. 예수 탄생이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오늘날 크리스마스 성극에서는 동화 같은 이야기, 천사의 계시, 말구유, 동방박사, 밤새 양을 치던 목동들, 긴장한 정치·종교 지도자들, 무참한 학살 등과 거룩한 이미지가 뒤범벅된 이상한 모습이 나타난다.
예수 탄생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를 것이다. 마태와 누가가쓴 버전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며 성경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어느 날 헤롯 왕에게 동방박사(magi)가 등장한다. 마기(magi)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을 말한다. 마기는 점성술사, 마법사들이다. 당시 세계에서 마기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마기는 왕과면대하여 조언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기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 계시느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라고 직접 헤롯 왕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헤롯 왕에게는 새로 태어난 아들, 왕자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헤롯과
신하들은 크게 당황하며 성경을 잘 아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종교 지도자를 불러
긴급하게 국가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한다. 그 당시 유대의 정치사회는 너무 어렵고 가난해 많은 유대인이 메시아가 오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가 메시아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15명이 넘을 정도였다.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헤롯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무시무시한 뜻을 가진다. 메시아란 말은 헤롯과 대제사장들을 흔드는, 권력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 헤롯 왕은 즉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아라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조사하라고 명령한다.
메시아가 태어나는 곳은 베들레헴이었다. 헤롯 왕은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알고 마기들을 이용하려 한다.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 2:8) 그날 밤 마기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한 후 꿈에서 헤롯 왕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속았다 생각한 헤롯 왕은 길길이 날뛰었다. 헤롯은 자기 왕권에 도전하는 아기 예수를 찾지 못하자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2년 안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당시 예루살렘 인구 2,000여 명 중 20명(약 1%)가 죽었다고 말한다. 얼마나 끔찍한 대학살인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 헤롯 왕은 죽는다. 그때가 기원전 BC 4년이다. 로마 역사가 클라우스너는 헤롯을 평하여 “여우같이 왕좌를 훔치고, 호랑이처럼 다스리고, 개처럼 죽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아버지 헤롯이 죽기 얼마 전에 태어나신다.
다시 옥타비아누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옥타비아누스(BC 63~AD 14년)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 칭호를 받으면서(BC 28년) 붙은 또 다른 이름이 “구원자, 복음(기쁜 소식), 왕, 은혜, 평화” 라는 말이다. 이것은 BC 28년 개선식 이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신화화되면서 받은 칭호들이다. 헬라어는 특히나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로마제국 당시의 세계 전용 언어였다. 예수님보다 25여 년 전에 먼저 붙은 칭호들이다.
옥타비아누스가 받은 칭호가 대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옥타비아누스가 받은 칭호들은 하나의 신화이며 선전, 선동(propaganda)으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구원자요, 복음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역사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명백할지 몰라도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 내용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에 둘러싸여 잘 짜인 구원이니 복음 같은 개념은 예수님 당시에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원자라는데는 세계를 정복하고 해방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그가 전 세계를 장악한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나라는 거꾸로 선 나라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우리말로 “복음” 영어로는 “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번역됐다. 복음이라는 말보다 “기쁜 소식”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옳다고 본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기쁜 소식”이었다. “유앙겔리온” 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복음”이라는 번역과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가 정복한 나라에 평화가 왔다는 것은 전쟁이 없는 복지국가를 건설했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평화(구약 “샬롬” 신약 “에이레네”), “팍스로마나”는 로마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로마제국)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요14:27)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붙은 복음, 구원, 왕, 평화 등 낱말은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또한 정치사회적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 부른다. 전유란 “훔친다”는 뜻이다. 어디서 사용했던 용어를 훔쳐 와서 사용한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46∼55,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 부른 찬양, 이른바 “마그니피카트(Magnificat)”에는 이런 고백이 나온다. 예수님을 통해 권세 있는 자를 끌어내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일 것이며,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며, 부자를 빈손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고백에 나타난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도널드 크레이빌(Donald B. Kraybill)이 쓴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나라”(복 있는 사람)에서는 “마그니피카트”를 설명하면서 하나님나라를 “거꾸로 선 나라” 라고 말했다.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미사여구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요, 복음이요,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 탄생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첫째, 역사적 정치적 맥락의 구원 복음 평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복음, 평화의 의미가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하나님 나라(Kingdom)”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왕국(王國)”이라고 합니다. 나라와 왕국은 정치적인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헤롯이나 옥타비아누스, 히틀러, 박정희, 박근혜 등은 우리가 충성할 대상이 아니다. 해체하고 저항해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 히틀러 시대에 대부분 신학자와 교인이 히틀러를 왕이라 외쳤지만, 칼
바르트와 본회퍼를 비롯하여 일부 중요한 신학자는 히틀러를 향해 “Nein(아니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저항은 비폭력 저항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것이지만 이 구원이 인간과 세계, 모든 피조물까지 이르는 광범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개인적으로 죄를 버리고 교리를 믿는 것이라면 헤롯과 옥타비아누스가 유대 땅을 난자질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히틀러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짐 월리스(Jim Wallis)가 “하나님 편에 서라”(IVP)에서 “모든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대단히 신학적이고 영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 사령관 맥아더도 그의 자서전에서 “전쟁은 신학적 문제다”라고 말했다.
둘째, 성육신(Incarnation)
예수님 탄생의 또 다른 의미는 성육신(incarnation)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거(居)한다”는 말은 “tabernacle with us” 또는 “dwell with us”로 번역한다.
그런데 여기서 “tabernacle”은 구약에서 말하는 “성막”이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성막, 성전에서 함께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장막 치셨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NIV)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KJV)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beheld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NASB)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begotten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임마누엘이다!
그러나 이 말을 그때 당시 당장에 부정하고 나선 자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철학(헬레니즘)의 이원론자 이었다. 그들은 영만이 신성하다고 봤다. 육은 영혼의 감옥이라 말했으며, 몸은 더러운 것이라고 했다. 가현설(假顯說)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가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영지주의자(靈知主義)는 영적으로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요,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톰 라이트는 “시대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IVP)에서 오늘날에도 “신영지주의자”가 많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보수주의자는 신영지주의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구원하고, 사랑과 정의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셨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하나가되어야 한다.
“세금 문제는 정치가 아니다”
“노동자(근로자) 문제는 정치가 아니다”
“광화문 촛불 집회는 정치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한국 보수주의 교회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영지주의, 곧 이단이라고 본다.
나는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의심스럽다. 한국 보수주의 교회는 이미 사이비(似而非)임에 틀림없다. 사(似)는 '비슷하다'는 말이요, 이(而)는 '같다'라는 말이고 비(非)는 '아니다'는 말이다. 한국 보수주의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비슷하지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공동선을 이루는 데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예수 탄생을 기념하며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사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분투하기를 바란다. 오늘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위대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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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마태복음 6:19~34)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베벌리 쉐아(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셰아는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것은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정하길 원했습니다.
쉐아는 이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 -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상 에 데리고 가서 가르쳐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산상보훈이라고도 합니다.
산상보훈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즉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산상보훈은 그 시작이 말해주듯이 복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마음에 품고 삶의 우선순위에 먼저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를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對神關係)
말씀에 대한 순종과 기도생활에서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둘째는 인간과의 관계(對人關係)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래도 노력합니다만 인간관계는 조금 등한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5:23절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인간관계는 5:39-41절에 잘 요약되어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되며」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 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봉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對物關係)
그런데 인간관계는 그래도 노력하는 편입니다만 물질관계에서는 그의 대부분 교인들이 성경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가 더 잘 알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이 바로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나의 물질관이 확립되어 복된 삶을 살아가는데 자기원칙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까?
1.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19-21절)
19-20절에서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 ] 고 합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말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는 곳에 마음이 그곳에 다 가 있습니다. 21절 보세요. [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느니라 ]
사람은 소망이 잇는 곳에 마음이 집중 되어 있고 따라서 시간도 그기에 다 투자합니다.
나아가 물질도 그기에 다 쌓아놓습니다. 바울도 딤전4:10절에 진정 경건한 성도는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땅에 그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도적질 해간다는 것입니다.
꼭 도둑이라 해서 밤손님만 도둑이 아니라 질병, 재난, 불의의 사고, 실패 등이 재물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다가 보물을 쌓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헌금생활을 바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보물, 귀한 재물 가운데서 얼마를 구별해서 교회 헌금함에 넣는 것이 헌금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헌금만큼 우리의 신앙인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없습니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입니다.
특전대원 출신 목사님이 십일조는<10m 점프대>다 라고 비유합니다.
군인들 중에서 낙하산을 타는 특전 대원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 보기에는 아주 낭만적입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상에서 피 눈물 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전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곳에는 10미터 높이의 점프대가 있습니다.
10미터 짜리 점프대 위에 딱 서면 눈 높이가 11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아찔하죠? 거기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아니할 때까지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0미터 점프대가 두렵지 않고 맘대로 뛰어 내릴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비행기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아무리 높아도 무섭기는 똑같으니까요.
어디든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냐? 면 `10미터 점프대`입니다.
거기서 뛰면 비행기에서도 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에서 겁 없이 뛰어 내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을 수가 있습니다.
2.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22-24절)
1)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22-23절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
눈이 어둡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영안 즉 믿음의 눈이 뜨여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입니다.
물질에 욕심이 생겨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double vision 이 되어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double vision 아시죠? T. V 화면에 물체가 두개로 보이는 것 있죠?
그러니 잘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침침해져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게 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니 성도가 물질에 집착하게 되면 염려가 생겨 하나님과 물질에 마음이 갈라집니다.
마음이 물질에 빼앗깁니다. 그러니 믿음의 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온전히 행동하려면 눈이 밝아야하듯이, 영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투자하는 삶을 살려면 영적인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청춘과 생명을 불살라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와 담을 쌓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적 눈`이 흐르려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2) 두 주인을 섬기려는 약은 마음 때문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에 재물이란 말 - Mammon 이라 하여 본래는 <신뢰하다>란 말인데
돈만 믿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Mammonism 하면 배금주의를 말합니다.
맘몬은 현대인의 우상인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신앙생활 보다 사업이 더 바쁜 교인
예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교인을 두고 말합니다.
그럼 물질하고 담 쌓고 어떻게 세상 살아가느냐?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질하고 담 쌓아라 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노예가 되지 마라. 돈을 사랑하지 마라.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경제학자는 한나라의 피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피가 흘러야 살듯이 국가에 돈이 흘러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확실한 수단`으로 생각을 합니다.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막강한 무기`로 생각을 합니다.
또 `안전을 지켜주는 확실한 방패막이`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생명도 나의 건강까지도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돈을 높이니 자연히 돈의 횡포가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그 세력이 무서운지요. 돈의 힘 앞에 국가도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돈의 위세 앞에서는 法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삽니다.
돈은 이미 화폐라고 하는 가치를, 그 영역을 뛰어넘은 지가 오랩니다.
이미 월권행사를 한지가 오랩니다. 돈은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치관까지 마음대로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파괴하고도 남을 수 있고
이 세계의 도덕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과 돈의 밀접한 관계를 꿰뚫어 보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충성은 한 분에게 충성해야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면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집니다.
돈은 사이비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하고 돈 하고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25-29절)
25절에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하십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딜레마, 곤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자고나면 끼니 걱정해야하는 제자들에게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하지 말라
하니 예수님 참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하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2. 또 어떤 분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먹는 문제 입는 문제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 하느냐?
그렇지요 지금 여기 있는 성도들 중에 먹는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교인 있긴 합니다만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이 땅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만 하신 말씀만이 아니요
또 돈 있다고 염려가 없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 아무리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이고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염려하지 말라 ] 합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 합니까?
1) 첫째는 신분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듭니다.
(1) 26절 공중 나는 새를 보라
(2) 28절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11절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분상 맞게 삽시다. 손에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것, 교회 와서 손들고 찬송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보고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느냐?
예수 믿으니 저러겠지 하고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 정말 다르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들이 주저앉을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서는 것이고 그들이 염려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두번째는 염려는 백해무익이기 때문입니다.
27절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
더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 25절에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이 말은 염려하면 목숨만 상하고 몸만 상한다고 합니다.
염려하면 제 명데로 못산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영육간에 백해무익 합니다.
염려 잘하는 사람치고 믿음 좋은 사람 있는가 보세요.
눅21:34절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 하면서
[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
마음이 둔하여지면 신앙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신앙 병들면 결국 삶이 말라지는 것입니다.
염려의 본질을 살펴보면 염려는 <물어 뜯는다 숨통을 죈다>는 뜻입니다.
마치 동물의 왕국에 사자가 얼룩말이나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죄이지요.
염려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염려하면 우리의 신앙이 맥을 못춥니다.
염려는 백해무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염려하는 것 그것 백해무익이야
그러니 너희는 마음 푹 놓아라. 염려 붙들어 매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질 대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물질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0-32절)
1)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뒤집어 생각해보면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비결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염려 뚝! 하면 뚝!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32절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아멘~!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4:6-7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 분의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약속이 무엇입니까?
5. 성경이 제시하는 성도의 최우선인 삶이 무엇이라 합니까?(33-34절)
33절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이것이 성도의 바른 물질관입니다. 현대인들 보너스 참 좋아 하지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너스 주시기를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예수님 닮아가고 예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적인 삶의 목표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이제 막 신부 입장의 웨딩마치가 울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신랑이 갑자기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식장은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축하객들의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몇몇은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신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약 30분이 지난 후였습니다. 헐떡거리며 되돌아온 신랑의 예복은 검댕과 물기로 젖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진행해 주십시오`.
`아니, 신랑은 어딜 갔다 오는 길인가?` 목사님 물었습니다.
“네 목사님. 저는 소방대원입니다.
신랑 입장과 동시에 화재 싸이렌이 들리는데 가만히 멈춰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 진화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축하객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고 칭찬해마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소방대원의 마음에는 우선순위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대한 대한 우선 순위가
이 소방수만큼만 확실하게 세워져 있다면 아마도 하늘나라의 일은 더 쉽게 전파되게 될 것이고
나의 삶에 그토록 내가 짝사랑하던 물질도 더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너희가 욕심을 부리기까지 모으려고 하는 재물 심지어 몸을 상해가며 까지 염려하는 돈 문제
그런 것 다 보너스로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질 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은행은 천국은행입니다. 그기는 사소한 오차도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신학자 <죠지 스위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 마지막 날 내가 얼마나 벌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그 때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주님께 드렸느냐?’ 가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 즉 복음전파를 위해 드려지는 삶이
우선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로렌 커닝햄>의 책이 있습니다.
<로렌 커닝햄>은 이 책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를 `카렌 라페티`의 예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카렌 라페티>는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에 출연했었는데,
주님이 그녀를 전임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카렌은 그 곳에서 계속 일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일자리를 그만 두면 무엇으로 먹고 살까?
남캘리포니아 갈보리 예배당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석한 카렌의 머릿속에 마6장33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구절이 카렌의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카렌은 기타를 집어들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가사에 맞추어 곡을 섰습니다.
지금 카렌은 암스테르담에서 선고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때 지은 곡은 테이프와 악보로 나왔고 그 곡에 대한 로열티는 지금까지 카렌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물질관이 분명할 때 물질적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쳐 줍니다.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 보다 물질이 더 크게 보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고 맘몬도 섬기면 되지 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돈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이렇게 내일이 염려될지 모르지만 염려는 백해무익이야
그리고 염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에게 신분상 맞지 않는 일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나의 삶의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붙들어 들어 쓰시며
이 모든 것을 나의 삶에 넘치도록 더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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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소통은 병든 몸에도 치료의 효과를 갖게 합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가장 염려하는 질환이 "치매"라고 합니다.
치매를 약으로만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인지 중재 치료"를 강조합니다.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2/18/2020121801255.html
'약'에 대한 의존만으론 치매를 극복할 수 없다. 치매를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인류의 끊임없는 노력은 눈물겹지만, 한계도 뚜렷하다([치매 전쟁] 1, 2편). 중요한 것은 재활이다. 아픈 관절에 운동 재활이 필요하듯, 치매 환자에게도 '뇌 재활'이 필수적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인지중재치료'라고 부른다. 인지중재치료에는 가족의 사랑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처럼 변해버린 치매 환자를 섬세하게 지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가족의 노력을 통해 조그마한 추억 하나라도 더 기억할 수 있다면 환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 아이들 교육하듯… 치매 환자도 훈련이 도움
아이들이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노년기에도 지적, 사회적, 신체적 활동을 통해 인지기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한 것이 인지중재치료다. 인하대병원 신경과 최성혜 교수(인지중재치료학회 차기이사장)는 "인지중재치료는 치매의 진행을 늦추고, 낮아진 인지능력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치매 전 단계 환자에게는 예방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인지중재치료학회에 따르면 인지중재치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인지 훈련'은 경도의 인지기능 저하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거나, 보존된 인지기능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로 정해진 환경에서 특정 인지영역을 훈련하기 위해 과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인지 재활'은 인지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 최대한 일상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다. ▶'인지 자극'은 인지 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광범위한 중재 활동을 말한다. 단어 게임, 퍼즐, 악기 연주, 원예, 요리 등 다양한 활동이 인지 자극에 포함된다.
◇ 비약물적 노력한 미국·유럽, 치매 발병 줄어
치매는 약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데, 인지중재치료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도 많다. 최성혜 교수는 "인지중재치료로 치매 진행을 완전히 멈추는 것은 어렵다"며 "다만, 인지중재치료를 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확실한 지연 효과가 있다는 점이 임상에서 밝혀졌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양동원 교수(인지중재치료학회 회장) 또한 "치매 초기 환자에게는 약물 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최성혜 교수는 직접 개발한 '슈퍼브레인' 프로그램을 통해 인지중재치료의 효과성을 입증했다. 최 교수는 치매 전 단계나 고령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6개월 동안 ▲운동 ▲영양 관리 ▲혈관 위험인자 관리 ▲인지훈련 등을 진행했다. 그 결과, 교육을 받은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인지 기능, 우울감, 삶의 질, 건강 상태가 모두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비약물적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유럽에서는 치매 발병률이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 일기 쓰고 그림 그리기… 생활습관도 개선을
인지중재치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 걸까. 인지중재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으면 종이나 펜,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활용한 인지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파악해서 인지재활적 접근을 하기도 한다. 치매 환자에게는 생활 중재도 중요하다. 운동, 영양, 건강 상태를 파악해 치매 위험요인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교육도 이뤄진다. 예컨대 고혈압, 당뇨병, 비만 등은 치매 발병률을 높이는 위험요인으로 개선을 권하게 된다.
당장 병원에 방문하기 어렵다면 집에서 간단히 해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일기 쓰기'다. 글을 읽고 쓰며 창의성을 요구하는 뇌 활동은 인지기능 향상에 매우 효과적이다. 저녁 취침 전 온종일 있었던 일과를 돌이켜 보면 반복 학습할 수도 있고, 나중에 기억이 가뭇할 때 다시 읽어보며 회상할 수도 있다. 일기에 간단한 그림을 추가하면 좌·우뇌를 고루 발달시킬 수 있다. 역사, 문학, 미술, 무용 등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취미를 찾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집에서 하는 인지재활은 꾸준히 실천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치매 환자는 저마다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치료법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최성혜 교수는 "학생들이 학원에 가는 것도 혼자서는 지속적으로 공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100% 집에서 하기보다는, 1~2주에 한 번 교육받고 숙제를 받아서 병행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치료를 진행하시는 게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탄 주일 예배를 위한 그림 세 가지
1. 고다이버 백작 부인(사랑)
2. 윌리엄 홀맨 헌트(믿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111162051265
성탄은 소통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
(전개 이야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선물을 받기 위하여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선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공통된 메시지는 "이기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팬데믹 세상을 이기는 것이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구약의 이사야의 글은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은혜의 해를 전파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나사렛 동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읽으셨고 읽은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b).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700-680년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말씀을 읽으셨을 때는 대략 33년 경입니다.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에도 성탄주일을 맞이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눈먼 자와 눌린 자의 공통점은 모두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소외된 사람들은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습니다.
소식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려주고 들려주는 것이 성탄입니다.
(
2. 믿음의 소통
사랑이 선물이라면 믿음 또한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셨다.
(예) 십자가 믿음 - 다 이루었다!
이방 모압의 여인 룻이 베들레헴의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는 기근으로 모압 지방을 찾아왔으나 두 아들 말론과 기룐 그리고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모압의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그리고 시어머니만 남은 육신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랑도 믿음도 선물입니다.
사랑을 확인한 후에 믿음이 형성된 사람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주님 안에서 소망이 보입니다.
3. 소망이 소통
세상은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소망은
(예) 십자가 소망 -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이와 같은 소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소통이 가능합니다.
공생애의 지상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분부하셨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이때도 성령이 임하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팬데믹 시대에 성탄을 맞이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셨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받아 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야 할 것입니다.
(도입 이야기)
팬데믹 시대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렇게 풍자합니다.
2020년 12월 25일에 산타 할아버지가 도착했지만 14일 동안 격리해야 하므로 산타 할아버지는 2021년 1월 9일에 등장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의견을 말합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격리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12월 9일에 미리 출발하셨기 때문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세상 사람들은 선물을 받기 위하여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선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공통된 메시지는 "이기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팬데믹 세상을 이기는 것이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성탄의 기쁨을 세상이 빼앗아 갔다는 것입니다.
성탄을 가장 먼저 준비하는 곳을 찾는다면 "백화점" "음식점" "술집"
성탄은 주님을 전하는 날입니다.
성탄은 기뻐하는 날입니다.
성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날입니다.
엉뚱한 아이 Vs 깜찍한 아이
한 아이가 성탄절에 어떻게 하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성탄절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선물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자 엄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시지 않겠니?’ 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아이는 예수님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착한 일만 했어요. 그러니 저에게 선물을 주세요.’
그런데 써놓고 보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서 썼던 편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예수님, 솔직히 저는 거짓말을 조금은 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고 착한 일만 할께요.’
편지는 그렇게 썼지만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는 편지를 다시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성당 앞에 있는 작은 성모 마리아상을 들고 집으로 와서 이불속에 넣어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 당신의 어머니가 내게 있소. 이번 성탄절에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 없소. 이상’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의 왜곡된 마음과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반면에 이런 아이도 있다.
한 아버지가 성탄선물을 준비하여 가족 모두에게 주었다.
모든 가족이 각기 선물을 하나씩 받았는데 아버지의 선물이 없었다.
그 때 어린 딸이 자신의 선물 꾸러미에서 리본을 풀어 자기 머리에 꽂고는 귀엽게 웃으며 ‘받으세요.
아빠의 선물!’ 하면서 아빠의 품에 안겼다.
성탄의 세 가지 색
성탄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물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런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때문에 먼저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탄의 의미를 모르니까 앞의 아이와 같은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탄의 의미를, 성탄의 세 가지 색상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성탄의 중요한 색은 ‘붉은색, 푸른색, 흰색’이다.
붉은색은 산타의 모습에서, 푸른색은 성탄장식 나무에서, 흰색은 하얀 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붉은, 푸른, 흰색이 성탄의 세 가지 색상인데, 이러한 색은 분명한 성탄의 의미를 담고 있다.
1. 붉은색은 ‘희생적인 사랑’
성경은 기적의 책이고,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그리고 기적 중에 기적은 성탄이다. 성탄은 초월적인 존재가 시간적인 존재가 된 사건,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된 사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본문말씀처럼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진 ‘희생적인’ 사랑이다(롬5:8).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에서부터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비참한 일생을 보내시다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신 모든 것이 희생적인 사랑을 잘 보여준다. 교회가 주로 붉은색을 많이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붉은색이 주님의 보혈을 상징한 것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또한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다.
산타 때문에 붉은색이 성탄절의 상징색이 된 것이 아니다. 산타가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쓰고, 붉은 선물보따리 들고, 붉은 포장지를 두른 선물을 전달하는 것도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생각나게 하고 전하기 위해서다. 본문말씀처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의 증거다. 그 사랑은 십자가 보혈로 분명히 나타났다. 그러기에, 이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성탄절이면 희생적인 사랑의 상징인 붉은색이 중요한 색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2. 푸른색은 ‘영원한 생명’
그렇다면 붉은색의 희생적인 사랑, 곧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는 무엇인가? 푸른색이 의미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푸른색은 전나무로 만든 성탄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성탄나무의 시작이 어디에서 되었는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한 의견은 6~7세기 유럽에서 성탄전야에 성경내용으로 연극을 하게 되었다. 그 연극의 내용 중에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주요한 장식이 생명나무였다. 이 때 겨울에도 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전나무를 사용하면서 이 나무가 생명나무로 사용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성탄나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이 성탄나무에 초기에는 금단의 열매를 상징하는 사과를 장식해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도록 했다. 그리고 생명의 빵을 상징하기 위해서 빵도 달아놓고, 생명의 빛을 상징하기 위해서 촛불도 달아놓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장미)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35:1) 라는 이사야의 말씀에 따라 ‘속된 나무 이새의 줄기에서 이 추운 겨울에 한 싱싱한 가지가 솟았도다. 굳은 땅 위에 고요하고 청명한 이 밤에 한 송이 장미가 피었도다.’ 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종이로 만든 장미를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성탄트리는 생명나무의 상징이고, 녹색도 역시 영원한 생명의 의미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붉은색의 희생적인 사랑이 푸른색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적색은총이 우리에게 녹색은총을 가져다준 것이다.
3. 흰색은 ‘순결함’
우리는 희생적인 적색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녹색생명을 받았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흰색과 연결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흰색의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흰색은 순결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즉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성탄의 색이 주는 또 하나의 성탄의미다.
영적인 순결이란 고단한 영적 싸움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자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요, 주님이 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1930년대 프로펠러 하나 달린 조그마한 비행기로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이 있다. 미국인 린드버그 대위다. 많은 사람이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그가 해냄으로 영웅이 되었다. 그가 프랑스를 방문하였을 때 어느 담배회사 사장이 자기 회사 담배를 손에 들고 있든 입에 물고 있든 마음대로 하되 사진 한 장만 찍게 해달고 했다. 그러면 5만 불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5만 불은 큰돈이었다. 그 큰돈을 주면서 피우라는 것도 아니고 사진만 찍도록 해달라고 하는데, 린드버그는 정색을 하며 ‘나는 세례 받은 신자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 요구를 거절했다. 이튿날 이 사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 뉴스를 접한 경건한 신자들이 선금을 모아서 그에게 10만 달러를 만들어주었다. 5만 달러의 유혹을 거절했더니 10만 달러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중요한 것은 5만 달러의 유혹 앞에서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순결이다. 이것이 적색사랑을 통해서 녹색생명을 받은 사람이 살아야 할 모습이다.
마2:12절에,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박사들의 귀향길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 성탄을 경험한 사람들, 적색사랑을 통해 녹색생명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야할 삶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고,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흰색의 삶이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고난도 그들의 신앙을 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신앙을 지키는 일이라면 7배나 더한 풀무에도, 며칠을 굶주린 사자굴에도 당당하게 들어갔다. 아무리 마귀의 강력한 도전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시험을 이겼다. 세상의 어떤 화려한 유혹 앞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사람들’(히11:38)이라고 했다. 이것이 영적 순결을 지킨 사람들의 모습이고, 또한 평가이다.
4세기 경, 터키에 해당하는 미라 시에, 성 니콜라우스(270-310) 라는 주교가 살았습니다.
니콜라우스는 남몰래 선행을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너무나 가난해서 결혼하지 못하는 세 자매의 집이 있었는데,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세 자매를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금덩이는 자매들이 벽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고
그 금돈으로 세 자매는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말을 걸어두는 풍슴이 생겼고, 산타 클로스가 굴뚝으로 들어 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가 죽은 후에도 12세기 초 프랑스 수녀들이 니콜라우스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성 니콜라우스가 과거 행했던 것처럼,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달란드 사람들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성 니콜라우스라는 이름대신, '산테 클라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게 '산타 클로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섬기며,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성 니콜라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자들의 기쁨이 됩니다.
첫째, 성탄은 소통의 은혜
소통(疏通) / 소통할 소(疎), 트일 소(疎). 통할 통(通)
1. 사물이 막힘이 없이 잘 통함
2. 의견이나 의사 따위가 남에게 잘 통함
(예화) 어느 산골 마을 지난 밤 많은 눈이 내렸다.
산새들이 먹이가 없어 공중을 배회하고 있을 때 마당에 쌓였던 눈을 쓸어버리고 그 위에 산새들이 먹을만한 곡식 낟알을 흩어 놓고 새산새들을 향하여 외쳤다.
"이리 내려와서 마음껏 먹어라!"
소리를 외치면 외칠수록 산새들이 도망하버린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언어를 산새들이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아가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인간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은 육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 사랑의 소통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 느꼈나요?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철저하게 느낄 수 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알지 못한다.
(예) 십자가 사랑 -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2. 믿음의 소통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셨다.
(예) 십자가 믿음 - 다 이루었다!
3. 소망이 소통
세상은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소망은
(예) 십자가 소망 -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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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
영국의 어느 시 위원회가 크리스마스를 ‘윈터벌’(Winterval)로 바꾸자는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1998년). 윈터벌은 겨울(winter)과 축제(festival)를 합친 말로 ‘겨울축제’란 뜻이다. 그 이유는 최근 들어 크리스마스가 단지 예수님의 탄생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말연시의 흥겨운 잔치 분위기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성탄절의 세속화에 대한 세상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성탄절이 성탄 본연의 모습을 잃고 세속적인 축제로 변질되니까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런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오늘날 신자들이 이런 사람들인 것 같다.
최소한 성탄절에 있어서 이런 어리석음에 빠진 것 같다.
붉은색이 상징하는 의미보다 붉은 옷을 입은 산타에만 관심이 있고,
푸른색이 상징하는 의미보다 성탄나무 장식에만 관심이 있고,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보다 하얀 눈에만 관심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리키고 있는 달이 아니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산타의 붉은 옷은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의 상징이고, 푸른 성탄나무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고, 하얀 눈은 희생적인 사랑으로 영생을 얻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상징이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다. 성탄의 붉은, 푸른, 흰색은 이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이 오신 뜻 깊은 이 날, 주님이 주신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한 영원한 생명에 감사하며, 이러한 사랑과 생명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삶을 결단하자.
첫째로, 성탄절은 기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10절에 언급한 것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한 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구원자가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1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란 만인이 아닌 하나님의 친 백성(자기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즉, 만세전에 택한 자들을 말합니다. 성탄은 만인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한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친 백성, 자기 백성, 택한 백성만을 위한 성탄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과 저주와 심판 아래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죄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자가 오셨다는 소식은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적인 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감사하지요. 이제 절망에서 산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기뻐하는 날인 것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감사하고 기뻐하며 지내야 합니다. 이날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성탄의 구주를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성탄절은 죄에 대해 애통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탄하신 것은 의인들이 아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안타깝게도 구원자이며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탄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원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성탄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성탄절은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죄에 대해 통렬하게 애통하고 반성하고 미워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마냥 기뻐만 하는 것은 충분한 성탄의 날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자식이 인질로 잡혀 갔을 때 그 자식을 살리기 위해 여러분의 형제나 부모가 인질들이 있는 죽음의 장소로 왔다면 마냥 기뻐만 하시겠습니까? 기쁘면서도 애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대신하여 인질이 되어 죽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날입니다. 오직 철이 없는 자식만 자신이 살았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개념이 없거나 미숙한 자들만 희희낙락할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리 단순한 날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 교회와 신자들은 그 어느 날보다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애통하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미워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생동안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기겠다고 새롭게 다짐과 결심을 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성탄절은 예수님을 전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에 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까?
이 날은 구원자가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복되고 기쁜 소식인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둘째,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셋째,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넷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다섯째,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인자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 아들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 그 분은 신성의 기능까지 내려놓으셨지만 신성의 본질은 유지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시편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둘째,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셋째,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넷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요한일서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Whoever claims to live in him must walk as Jesus did.
다섯째,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제 안에 계신 당신의 생명 외에는
그 무엇도 제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제 안에 계신 주 예수님,
일어나셔서 오늘 저를 통해 당신의 삶을 살아주세요.
제 머리를 통해 생각하시고
제 눈을 통해 보시며
제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제 눈을 통해 보시며
제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제가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제 마음을 통해 사랑하시고
제 손을 통해 만지시며
제 발을 통해 걸어주세요
주님만이 오늘 저를 통해 일어나는 일의 유일한 설명이 되도록 해 주세요.
* 자료출처 / 내가 닮고 싶은 예수(조이 도우슨, 양혜정 옮김, 예수전도단) p. 19
9.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방법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 그렇다. 누구라도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취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회개한 다음에 첫째, 그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인 것과, 둘째,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셋째,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언제 중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데에는 단 번에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1년에서 2년 걸리기도 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10년에서 40년이 걸리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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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요한복음 5:19~29)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예수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한을 다 아들에게 위임하셔야 했는가? 오늘은 아버지의 생명에 관한 놀라운 진리들을 만나보자.
1.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가지 큰 목적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요(요 3:16) 또 하나는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다(요일 3:8). 이것들 중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은 인간구원이다. 다만 사탄과 그의 세력을 박멸하시는 일은 보조적인 목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언제 인간구원과 사탄박멸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첫째, 인간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이미 끝마치셨다. 다시 말해 인간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요건은 다 충족된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다만 둘째로, 사탄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처단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마귀박멸의 일은 1차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재림하신 이후 마귀박멸의 집행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2. 성경에 2번 등장하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두 번에 걸쳐 "다 이루었다(원문:그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완성하실 때에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것이다(요19:30). 하지만 그때에도 사탄마귀가 그만 죄없으신 예수님을 사망권세로 쳤기에, 그날 사탄마귀도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께 빼앗겼기 때문이다(계1:18).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일만이 남아 있다. 만약 그날이 오게 된다면, 예수께서는 사탄마귀를 즉시 잡아서 불못에 처녛어버릴 것이다(계20:10). 그리고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쳐넣어버릴 것이다(계20:14). 그리고 두번째로 "다 이루었다(원문:그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실 것이다(계21:6).
3.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2가지 목적(인간의 측면에서)
이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보자.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우리 인류의 죄를 없이하는 일 곧 죄사함을 베풀어주시는 일이요(계1:5b, 마20:28, 엡1:7),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일이다(요3:16, 10:1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영생을 주시고자 하더라도 사람에게 죄가 있기에, 예수께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결국 인류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오셨고 고난받으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우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곧바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인류는 먼저 그 죄값을 치러야 했다. 그것은 '사망'이었다. 그것도 육체적인 죽음에다가 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에게 선악과를 타먹게 되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부 사망에 처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살다가 죽음으로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서 우리 대신 고난받으셨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고전15:3, 사53:5~7).
4. 예수는 심판하러 오셨는가 아니면 생명을 주려 오셨는가?
고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곧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고 구약시대에 수백 가지를 예언을 먼저 주셨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자)도 되셨다. 그런데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면 그는 죽은 죽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영생을 취하지 못했을 때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심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요3:17~1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척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응당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의 하나님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성의 하나님 곧 아들이신 예수님께 심판의 모든 권한을 맡겨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요5:22,27).
5.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순종
그렇다면, 사람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 아들의 뜻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인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라고(요6:38~40). 여기서 우리가 잠깐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지칭하실 때에 그 아버지와 및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을 때에 아들은 과연 동일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인격의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는 신격의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아들은 인격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두 가지 모양을 하고 나타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동시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아버지로 계시고, 땅에서는 아들로 존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원래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하신 분은 신격을 가지고 계신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은 오직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6.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께서 인류가 받을 고난을 대신 받으실 수 있었고, 인류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자기대속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시이기에 죽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대신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더러 영원토록 잊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 바로 성찬식의 제정이었던 것이다.
7. 홀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당신의 생명을 이 땅에 사람의 신분으로 태어나시는 예수님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때에는 예수만이 독생자였다(요3:16). 예수님만이 그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사람의 생명인 몸의 생명과 혼의 생명만을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몸의 생명은 '비오스'라고 부르며, 혼의 생명은 '프쉬케'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주어진 그 생명은 영이 취하는 생명으로서, '조에'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그 하나님의 생명 곧 '조에'를 소유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것을 온 인류에게도 나눠주시려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그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8.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생명의 놀라운 특징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실 때에 가지고 왔던 하나님의 생명은 어떠한 생명인가? 그 생명은 한 마디로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생명은 아들의 생명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인 것이며, 셋째, 하나님의 생명은 죽어 없어지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으로서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부활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왜 부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실 때에 그분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부활생명 곧 '조에'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5:26). 이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다. 혼의 생명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사탄이라도 이 생명을 파괴할 수는 없다. 이 생명은 죽일 수 있는 생명, 죽음으로 정복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록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을 때에 몸의 생명이 파기되었고 혼의 생명(일명 '목숨')이 죽게 되었지만(실제는 내어주신 것이다), 그분이 가지고 온 아버지의 그 생명 곧 부활생명은 죽임당할 수가 없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는 사탄마귀도 파괴할 수 없는 부활생명이 들어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9.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방법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 그렇다. 누구라도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취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회개한 다음에 첫째, 그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인 것과, 둘째,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셋째,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언제 중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데에는 단 번에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1년에서 2년 걸리기도 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10년에서 40년이 걸리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10.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
그러므로 내가 지금 예수 믿고 있다고 나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니 나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자만하지 말라. 우리가 범죄 하면 우리는 곧바로 우리는 마귀에게 속하게 되고, 그러한 하나님의 생명이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믿는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요 16:8). 회개하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성령님과 생명(조에)은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 결국 나의 범죄가 나로 하여금 천국 가는 데에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회개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회개하기를 꼭 힘쓰라.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또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주 예수님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설령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우리의 혼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 그분 외에 절대 구원자가 없음을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서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붙들어야 한다(사 9:6). 그래야만 우리가 육체를 벗는 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이 계신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둘째,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셋째,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넷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다섯째,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인자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 아들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 그 분은 신성의 기능까지 내려놓으셨지만 신성의 본질은 유지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시편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둘째,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셋째, 사탄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넷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요한일서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Whoever claims to live in him must walk as Jesus did.
다섯째,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제 안에 계신 당신의 생명 외에는
그 무엇도 제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제 안에 계신 주 예수님,
일어나셔서 오늘 저를 통해 당신의 삶을 살아주세요.
제 머리를 통해 생각하시고
제 눈을 통해 보시며
제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제 눈을 통해 보시며
제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제가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제 마음을 통해 사랑하시고
제 손을 통해 만지시며
제 발을 통해 걸어주세요
주님만이 오늘 저를 통해 일어나는 일의 유일한 설명이 되도록 해 주세요.
* 자료출처 / 내가 닮고 싶은 예수(조이 도우슨, 양혜정 옮김, 예수전도단) p. 19
9.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방법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 그렇다. 누구라도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취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회개한 다음에 첫째, 그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인 것과, 둘째,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셋째,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언제 중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데에는 단 번에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1년에서 2년 걸리기도 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10년에서 40년이 걸리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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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요한복음 5:19~29)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예수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한을 다 아들에게 위임하셔야 했는가? 오늘은 아버지의 생명에 관한 놀라운 진리들을 만나보자.
1.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두 가지 큰 목적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요(요 3:16) 또 하나는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다(요일 3:8). 이것들 중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은 인간구원이다. 다만 사탄과 그의 세력을 박멸하시는 일은 보조적인 목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언제 인간구원과 사탄박멸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첫째, 인간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이미 끝마치셨다. 다시 말해 인간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요건은 다 충족된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다만 둘째로, 사탄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처단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마귀박멸의 일은 1차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재림하신 이후 마귀박멸의 집행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2. 성경에 2번 등장하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두 번에 걸쳐 "다 이루었다(원문:그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완성하실 때에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것이다(요19:30). 하지만 그때에도 사탄마귀가 그만 죄없으신 예수님을 사망권세로 쳤기에, 그날 사탄마귀도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께 빼앗겼기 때문이다(계1:18).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일만이 남아 있다. 만약 그날이 오게 된다면, 예수께서는 사탄마귀를 즉시 잡아서 불못에 처녛어버릴 것이다(계20:10). 그리고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쳐넣어버릴 것이다(계20:14). 그리고 두번째로 "다 이루었다(원문:그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실 것이다(계21:6).
3.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2가지 목적(인간의 측면에서)
이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보자.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우리 인류의 죄를 없이하는 일 곧 죄사함을 베풀어주시는 일이요(계1:5b, 마20:28, 엡1:7),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일이다(요3:16, 10:1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영생을 주시고자 하더라도 사람에게 죄가 있기에, 예수께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결국 인류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오셨고 고난받으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우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곧바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인류는 먼저 그 죄값을 치러야 했다. 그것은 '사망'이었다. 그것도 육체적인 죽음에다가 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에게 선악과를 타먹게 되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부 사망에 처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살다가 죽음으로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서 우리 대신 고난받으셨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고전15:3, 사53:5~7).
4. 예수는 심판하러 오셨는가 아니면 생명을 주려 오셨는가?
고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곧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고 구약시대에 수백 가지를 예언을 먼저 주셨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자)도 되셨다. 그런데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면 그는 죽은 죽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영생을 취하지 못했을 때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심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요3:17~1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척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응당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의 하나님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성의 하나님 곧 아들이신 예수님께 심판의 모든 권한을 맡겨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요5:22,27).
5.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순종
그렇다면, 사람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은 누구의 뜻인가? 아들의 뜻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인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라고(요6:38~40). 여기서 우리가 잠깐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지칭하실 때에 그 아버지와 및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을 때에 아들은 과연 동일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인격의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는 신격의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아들은 인격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두 가지 모양을 하고 나타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동시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아버지로 계시고, 땅에서는 아들로 존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원래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하신 분은 신격을 가지고 계신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은 오직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6.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께서 인류가 받을 고난을 대신 받으실 수 있었고, 인류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자기대속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시이기에 죽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대신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더러 영원토록 잊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 바로 성찬식의 제정이었던 것이다.
7. 홀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당신의 생명을 이 땅에 사람의 신분으로 태어나시는 예수님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때에는 예수만이 독생자였다(요3:16). 예수님만이 그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사람의 생명인 몸의 생명과 혼의 생명만을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몸의 생명은 '비오스'라고 부르며, 혼의 생명은 '프쉬케'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주어진 그 생명은 영이 취하는 생명으로서, '조에'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그 하나님의 생명 곧 '조에'를 소유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것을 온 인류에게도 나눠주시려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그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8.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생명의 놀라운 특징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실 때에 가지고 왔던 하나님의 생명은 어떠한 생명인가? 그 생명은 한 마디로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생명은 아들의 생명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인 것이며, 셋째, 하나님의 생명은 죽어 없어지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으로서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부활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왜 부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실 때에 그분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부활생명 곧 '조에'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5:26). 이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다. 혼의 생명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사탄이라도 이 생명을 파괴할 수는 없다. 이 생명은 죽일 수 있는 생명, 죽음으로 정복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록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을 때에 몸의 생명이 파기되었고 혼의 생명(일명 '목숨')이 죽게 되었지만(실제는 내어주신 것이다), 그분이 가지고 온 아버지의 그 생명 곧 부활생명은 죽임당할 수가 없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는 사탄마귀도 파괴할 수 없는 부활생명이 들어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9.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방법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 그렇다. 누구라도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취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회개한 다음에 첫째, 그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야인 것과, 둘째,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셋째,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언제 중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이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데에는 단 번에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1년에서 2년 걸리기도 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10년에서 40년이 걸리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10.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
그러므로 내가 지금 예수 믿고 있다고 나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니 나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자만하지 말라. 우리가 범죄 하면 우리는 곧바로 우리는 마귀에게 속하게 되고, 그러한 하나님의 생명이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믿는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요 16:8). 회개하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성령님과 생명(조에)은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 결국 나의 범죄가 나로 하여금 천국 가는 데에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회개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회개하기를 꼭 힘쓰라.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또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주 예수님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설령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우리의 혼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 그분 외에 절대 구원자가 없음을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서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붙들어야 한다(사 9:6). 그래야만 우리가 육체를 벗는 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이 계신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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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축년(辛丑年)
“신축(辛丑)”은 60간지 중 38번째로 “신(辛)”은 “백(白)”이기 때문에 “하얀 소의 해” 라고 하겠다.
2022년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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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2022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자료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8)
감사(感謝) :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
1. 느끼다
2. 감응하다(感應--), 느낌이 통하다(通--)
3. 감동하다(感動--), 마음이 움직이다
1. 사례하다(謝禮--)
2. 갚다, 보답하다(報答--)
3. 양보하다
감사(유카리스테오) 2168 εὐχαριστέω
발음 /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 신약 성경 / 38회 사용
* 부사 / 유(εὐ)(좋은) + 명사 / 카리스(χάρις)(은혜)
은혜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의 태도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에서는 성찬식을 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유카리스트에서 감사라는 유카리스테오가 파생합니다.
ἐν παντὶ εὐχαριστεῖτε
In everything give thanks
감사(感謝)
-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
느낄 감(感) : 다할 함(咸) + 마음 심(心)
사례 할 사(謝) : 말씀 언(言) + 쏠 사(射)
플라톤(Platon) /
감사의 속성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감사(感謝)
우리의 천국(天國)은 어디일까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어디서 천국을 찾았을까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중
한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총각 시절에 여러 명의 친구와 비좁은 방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 좁은 방에 여럿이 살면 불편하고 짜증이 날텐데 뭐가
그리 즐거워 그렇게 웃고 다닙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사니 즐겁습니다.
서로 경험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그 뒤에 같이 있던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하나 둘씩 떠나고
소크라테스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여럿이 살아 좋다더니,
지금은 혼자가 되어
상황이 나빠졌다고 해야 하는데
여전히 웃고 있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여기 있는 많은 책들을
내 마음대로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선생님들을 내가 독차지한 셈이지요.
이렇게 감사한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뒤 소크라테스가 결혼을 했는데
건물의 제일 아래층에 살았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래층에 살면 위층에서 물도 쏟고 쓰레기도 던지고
쥐도 많고 냄새도 나는데,
자네는 뭐가 좋아서 그리 웃고 다니나?”
“1층에 사니까
채소도 내 손으로 심을 수 있고
꽃도 가꿀 수 있네.
친구가 와도 찾기 쉽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안 해도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이후 위층에 사는
친구 아버지의 다리가 불편해져서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지자
소크라테스는 집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전에는 1층이 좋다했는데,
지금은 위층으로 옮겼으니 불만일텐데
여전히 웃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위층에 있으니 조용하고
멀리 좋은 경치도 보이네.
계단을 오르내리니 운동이 되어 건강에도 좋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으니 감사할 따름이네.”
그 친구는 소크라테스 제자인
플라톤에게 묻습니다.
“자네 선생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플라톤이 대답합니다.
“사람이 갖는 감사의 속성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지요.”
감사할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고난과 시련
그리고 억울함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구해야 하고
하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높은 차원의 감사요,
깊은 신앙과 인격의 소산입니다."
그의 철학과 삶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악처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는 있을 것입니다.
철인의 삶을 살았던 그가
가장 가까이서 이해 해줄 수 있던
아내로 부터는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의 부인을 악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소크라테스는
그의 나이 51세에 결혼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날 부인은 잔소리를 퍼붓다가
그의 머리에 물 한 바가지를 퍼부었습니다
그랬어도 그는 말하기를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 비가 내리는 법이지...” 라며
태연해 하더랍니다.
그가 남긴 명언중에
“반성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는 말과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다”라는 말 속에는
삶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반성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함축된 뜻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는 말과
“칭찬하는자 보다
자신의 결점을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반역적인 언론을 통해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는
국외탈출의 기회도 거부한체
스스로 독약을 받아 마셨습니다.
죽기전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악법도 법이다”였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4대 성인중의 한사람이라 평가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마음에서 기쁨과 평정을 유지하는
우리의 마음은 테스형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마음의 천국" 입니다.
오늘도 마음에서 천국을 이루니
정말 기쁘고 행복한 날입니다.
오늘의 명언
“반드시 결혼하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다.
만약에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것이다”
- 철인 소크라테스
범사에 감사(感謝)하라!
‘감사’라는 한자는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라는
훈(訓)으로 “느낀 것을 사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라는 한자를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느낄 감(感)’은 “다할 함(咸)”과 “마음 심(心)”이 합성된 것이며
‘사례 할 사(謝)’는 “말씀 언(言)”과 “쏠 사(射)”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감사’란 “마음을 다한 후에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파트리스 공동체의 믿음의 동지들이여!
2022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주님을 위하여
마음을 다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여 예배자로 살아보셨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셨습니까?
감사는 내가 받아 누린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을 마음을 다하여 베풀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 성경에서 ‘감사’를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라고 합니다. ‘유카리스테오’는 “좋은(유, εὐ)”이란 형용사와 “은혜(카리스, χάρις)”라는 명사가 합성된 단어이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생명까지 완전히 내려놓으신 후에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감사하는 믿음의 삶은 시작될 것이며, 이와 같은 삶을 결단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데살로니가전서 1:1).
“은혜”(카리스, χαρισ)란 기독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용어 가운데 하나 라고 하겠지요.
‘기쁨’(카라, χαρσ), ‘은사’(카리스마,
χαρισματα), ‘감사’(유카리스테오, ευχαριστεω), ‘성찬’(유카리스티아, ευχαριστια) 등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용어들입니다.
기뻐하는 것도 은혜이며, 능력을 가진 것도 은혜이며,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며, 성찬에 참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더욱이 이런 단어들은 은혜를 주는 분과 그것을 받아 감사하는 사람과의 관계, 마치
상호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곳에 참된 평화가 주어지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에
감사하며 그 분과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당신은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주님과 하나되는 신앙의 경험이요 고백이다!
은혜(恩惠), 은사(恩賜), 감사(感謝), 성찬(聖餐)은 한가지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은혜-카리스라는 단어에서 모든 것이 시작이 됩니다.
은혜(恩惠) χαρισ 카리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만남과 깨달음의 감격입니다.
*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사-카리스마를 선물로 받습니다.
은사(恩賜) χαρισματα 카리스마
"다 병 고치는 은사(恩賜-카리스마)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
* 우리도 병고침의 은사(恩賜)와 능력 행함의 은사등을 선물로 받고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감사(感謝) ευχαριστεω 유카리스테오"범사에 감사(感謝)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
감사의 유카리스테오는 카리스(은혜)가 풍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은혜를 고백하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감사와 은혜는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연결되어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은사의 기적과 능력도 체험합니다.
성찬(聖餐) ευχαριστια 유카리스티아
" 축사(祝謝)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 전서 11:24)
영어로 성찬(聖餐)을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성찬 때에 축사(祝謝)하셨다는 단어에서 왔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 축사(祝謝)로 번역된 단어는 감사(感謝)하셨다는 뜻의 ευχαριστεω '유카리스테오'와 같은 단어입니다.
단어의 원래 뜻은 감사이지만 성찬에 관한 용어로서 ευχαριστία '유카리스티아' 라고 고유명사화 해서 부릅니다.
성찬(聖餐)의 성경적 용어는 고린도 전서11:20에 나오는 '주(主)의 만찬(晩餐)'입니다.
"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晩餐)을 먹을 수 없으니" (공동번역은 '주의 만찬'을 성찬(聖餐)으로 번역했습니다.
성찬(聖餐)예식은 이 너저분한 물질계, 이차원, 삼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같은 삶을 사시기 위해 친히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를 맛보며 예수님과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의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에 꼭 필요한 중요한 요소는 '감사(感謝)'라는 사실입니다.
성찬예식은 '감사'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되는 의식입니다.
즉 '감사(感謝)'는 내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는, 하나되기 위한 거룩한 의식의 신앙고백입니다.
“신앙인의 존재 방식,” 감사
감사에
대한 언급이 문학 작품에는 매우 빈번합니다.
『고백록』의 저자 성 어거스틴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
(Ambrose)는 “감사에 대한 보답보다 더 긴급한 의무는 없다”고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감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지 않고, 또 은혜의 원천인 하나님께 감사를 되돌려 보내지 않기
때문에 은혜의 선물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은혜는 항상 감사함으로 보답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추수감사절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설교자 헨리 조웨트는 “감사와 분리된 모든 미덕은 불구적이며 영적인 여정에 절뚝거릴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저명한 헌신적 작가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독자들에게 감사의 의무에 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내가 이미 받은
것과 또 주님께서 준비해 놓은 것을 감사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받는 확실한 비결이다.”
시청각 장애를 딛고 일어나 인간 승리의
본보기가 된 헬렌 켈러는 감사를 열렬하게 찬양하며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날마다 삶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감사한다.
첫째, 하나님의 일에 관한 지식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한다.
둘째, 어둠 속의 나에게 믿음의 등불을 밝혀 주심에
깊게 감사한다.
셋째, 빛과 꽃과 하늘의 노래가 있는 또 다른 즐거운 삶을 보게 해 주신 하나님께 더더욱 감사한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감사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나라가 국가로 설립되기 전에 시민들을 친절하게 도우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행복하고 안전한 정부가 구성될 수 있도록 평화롭고 이성적인 방법을 알게 하신 그분께 감사합시다.”
장군에서
대통령이 되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이룩한 진정한 위대함을 고무시킨 성경의 영원한 진리와 우주적 원리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호소합니다.
“관대하심과 은혜로 우리를 대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분의 신성한 인도와 지혜 그리고 힘을 간구하며, 영원히 헌신할 것을
맹세합시다.”
인류가 이토록 감사를 중요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사”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유카리스테오” 입니다.
이 낱말은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교회에서 “성찬식” 혹은 “주의 만찬”을 설명하는 단어인 “유카리스트”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바르게 행하는” 혹은 “매우 잘”을 뜻하는 희랍어 부사 “유 eu”와, “호의” 혹은 “은혜”를 뜻하는 희랍어 “카리스”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 의미로 “은혜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자기 자신이나
민족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과 하나님께 감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낱말은 단순히 감사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발전했으며,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은총에 감사할 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낱말의
근원적인 뿌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감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희랍어를 가르쳤던 트렌치 교수는
감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최상의 은총에 대한 최상의 감사하는 행위가 ‘유카리스테오,’ 즉
감사다.”
그는 감사는 기도의 한 방식으로써 경건의 시간이나 예배 때에 결코 빠뜨리지 않고 표현해야 하는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걱정 말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아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라고, 기도의 바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를 드리십시오”라고, 무슨 일을 하든 또한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 감사할 것을 알립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쉬지 말고 기도 하십시오”라고 언급한 후에
감사에 관해서 이렇게 씁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가
직면한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성도의 삶에 현재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감사의 더 근원적인 이유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은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 바울은 먹는 음식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사람들의 회심과 신앙 성장에도 감사, 자기 사역을 위해 중보 기도한 사람들 때문에 감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감사, 신자들이 받은 은사로 인해 감사, 또한 성도들이 복음 전하기 때문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단지 받은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인의 윤리적 미덕 때문도 아니며, 구원받은 자들의 삶의 총체적인 존재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에 선하신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삶 전체를 주장하시며 완벽하게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너무 간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원천이 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인도 지방에 전해내려오는 민화 중에 어느 지혜로운 "라크샤타 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라크샤타 왕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쟁에서 공을 세운 모든 신하들에게 적절한 상을 후하게 내렸습니다.
그런데 전쟁 막바지에 임금님의 목숨을 구한 신하에게는 이상한 열매 하나만 주셨습니다.
그 신하는 적군이 임금님 뒤에서 활을 쏘려는 적군을 창으로 찔러 죽이므로 위기를 모면케 했던 신하이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그 신하는 여전히 궁궐의 문지기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임금님의 처사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 임금님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데 그 신하가 궁궐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색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궁궐로 돌아와서 그 신하를 다시 불러서 이번에는 열매를 두 개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지난번에는 열매를 한 개를 주셨는데 이번에는 두 개를 주시므로 도무지 임금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임금님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데 여전히 그 신하가 궁궐 문을 지키고 섰는데 그 행색이 너무 초라합니다.
궁궐로 돌아온 임금님은 또 다시 그 신하를 불러서 이번에는 열매를 세 개를 하사했습니다.
열매를 받던 신하가 그만 하나를 떨어트렸습니다.
그 순간 그 열매가 깨지면서 그 안에는 값진 보석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열매 하나에 들어 있는 보석만 팔아도 평생을 넉넉하게 지낼 수 있을만한 재산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그 열매를 열어보지도 않고 열매를 받아가지고 나오다가 마침 옷 장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열매를 주고 부인의 옷과 바꿔버렸습니다.
두번째는 열매 두 개를 주고 아이들의 옷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만일 그 신하가 임금님이 주신 열매를 열어보았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려면 지난 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열어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022년 지난 시간 동안 잊혀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들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다면 감사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건강을 지켜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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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2022년 성찬예식주일 설교 자료
아 하나님의 은혜로(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NIV
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한국인들은 애창곡을 18번이라고 합니다.
18번이란 일본의 가부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부키는 17세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통 연극으로 노래, 춤, 연기가 가미된 것이라고 합니다.
찬송 중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을 애찬송(愛讚頌)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찬송을 즐겨 부르십니까?
제 경우에는 처음 은혜를 받을 때는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하는 찬송을 자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결정했습니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아멘'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이야기 할 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막연하게 은혜를 생각합니다.
은혜를 분명하게 확인하려고 '은혜'를 '씨앗'으로 비유해서 생각해 봅니다.
은혜를 씨앗으로 비유하면 씨앗을 화분에 심었다면 화분에서는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마음 밭에 심는다면 반드시 은혜의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나는 과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국악인 박동진(朴東鎭)선생의 간증(1916. 7. 12∼2003. 7. 8)
신대원 시절 유명 인사를 초청하여 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국악인 박동진선생이 초청 연사로 단위에 섰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였는가를 이야기하는데 기독교방송국에서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의 일생을 창으로 녹음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예수의 일생을 창으로 노래하려면 성경을 읽고 대사를 만들어야 하므로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돈벌이를 위해서 성경을 읽었겠지요.
예수의 일생이란 창이 거의 녹음이 끝날 무렵 박동진선생이 방송국 담당 직원에게 예수의 일생에 대한 창을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담당 직원은 깜짝 놀라서 방송국에서 예산을 편성한 것이 더 이상 없으므로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왜 다시 녹음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더니 박동진선생께서 그동안 녹음한 것은 내가 돈을 받고 녹음을 한 것이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으므로 예수의 일생을 창으로 노래하려면 반드시 예수를 영접한 믿음으로 창을 불러야 더 많은 감동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제안하기를 이제부터는 돈을 받지 않을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다시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장면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성경을 여러 차례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동진선생은 그 말씀을 읽고 예수를 영접하는 은혜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성경을 읽기도 하였고 전하기도 하였으며 듣기도 하였는데 주님을 영접하는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박동진선생에게 은혜는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심어졌을 때는 돈을 받고 창을 불렀으나 이제는 돈이 아니라 나의 신앙으로 창을 불러야 한다는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가나안교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가나안교인"이란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라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오기 전에 교계에서는 예수를 믿지만 제도권에 속한 교회에 안나간다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시작되면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였고 최근에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
첫째는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플로팅 크리스천을 직역하면 “붕 떠 있는 크리스천” 또는 “여기저기 떠도는 크리스천” 이라고 하겠습니다.
플로팅 크리스천은 가나안 성도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난 지역적인 현상입니다.
반면에 ‘플로팅 크리스천’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코로나 19라는 불가항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등장했지만 코로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동안 익숙해졌던 예배 형식에 만족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교회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주일 예배 출석의 비율이 대략 54% 라고 합니다.
심지어 작은 교회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북미주의 경우 대략 40-50%의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이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교인들을 "플로팅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하이브리드 처치(Hybrid Church)
'플로팅 크리스천'이란 신조어에 맞춰 "하이브리드 처치"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이브리드 처치'란 온라인 예배(On Line Service)와 오프라인 예배(Off Line Service)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팬데믹 시대에는 모든 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규제가 풀리면서 대면 예배 즉 오프라인 예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 3년 동안 익숙해 졌던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는 교인들이 전체 교인의 대략 50%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문이 닫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역을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신학적, 목회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대립이나 선택의 요소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대면 예배가 옳고 비대면 예배는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가
미래이고 대면 예배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면(요
4:24),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장소가 예배이다.
때문에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각 영역을
고유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이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둔다.
그 때를 위하여 온라인 예배에 적응할 수 있는 적당한 훈련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에스비엔알 /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셋째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SBNR이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뜻의 약자를 말합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조직화된 종교를 영적 성장을 위한 유일한 또는 가장 가치 있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영적 삶의 자세를 스스로 확인하는 데 사용되는 대중적인 문구를 말합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믿음은 있지만 신앙은 없어요.)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흥미로운 답이 나온다.
‘종교는 있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I do
have religion but no relationship.)는 대답이 가장 많고
‘Spiritual but not
religious’(SBNR, 마음으로는 갖고 있을 뿐 특별히 종교는 없다)라고 응답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는 의미와 아예 신은 믿지 않으면서 마음과 육체와 영혼을 다스리는 행위인
yoga나 중국의 타이치(tai chi) 우리나라의 태극권 혹은 레이키(靈氣, reiki) 수양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교’라는 개념을 ‘믿음을 갖고 반복적으로 취하는 의식이나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이 말은 그럴 듯하다.
St. Thomas
Aquinas가 말한 식물의 생장혼(anima vegetativa) 동물의 감각혼(amima sensibilis) 인간의
지성혼(amima rationalis)의 분류를 할 필요도 없고 Jessie Penn-Lewis이 말한 영(Spirit)와
혼(Soul)의 구분을 할 필요도 없다.
SBNR은 1960년대 미국에서 자아실현이 활발할 때
나온 얘기다.
그 후 비종교인수가 15%에서 근래에는 20% 이상으로 많아졌는데 미국인의 20%와 30세 미만의 경우 3분의
1이 무종교이고 전체 인구 중 SBNR이라고 대답하는 비중이 37%나 된다고 한다.
SBNR은 주로 젊은층과 남성이고 65세
이상은 8%만 이런 태도를 취한다.
이런 특징은 영어권 문화, 특히 북미 지역에 국한되는데 영어에서 spirit의 정의는 문화에
비해 더 좁은 의미로 해석된다.
일부에서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두고 ‘You love food, but hate
cooking.’(음식은 좋아하면서 요리는 싫어한다)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It's harder to be spiritual
than religious’ ‘Can you be good without God’처럼 종교를 갖는 것보다 spiritual하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I believe in God but not
church.’
‘I believe in God but I don't go to church.’
‘I believe in God
but not religion.’
‘I believe in God but not the Bible.’ 처럼 말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표현은 ‘X but not Y’의 구조로 ‘X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Y는 아닌’것이다.
접속어로 잘 알려진 ‘last but
not least’도 비슷한 예이고 이는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인데’ 의 뜻이다.
이런 말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술은 마셨는데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I was drunk but not driving.)와 같은 모순된 표현
때문이다.
‘돈은 받았는데 뇌물은 아니었다’는 말도 같은 부류다.
모두가 종속변수(dependent variable)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실험과 체험의 결과이지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무신론자들이 SBNR을 조롱하는 일도 흔한데 말
자체가 모호하고 그만큼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말은 먼저 한 종교인으로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먼저 자신을 의식인 영으로서 인정해 놓고 종교는 그걸 담는 그릇 정도로 보는 태도(관점)를 가진 사람의 행동을 말합니다.
종교인은 타종교인을 배척하며 차별을 두지만 영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나 석가는 사실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 높은 영성을 추구하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단체들은 사람들을 종교인으로 만드느라고 혈안입니다.
열혈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타종교에도 활짝 열린 영성을 가진 사람은 위험하다며 반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석가가 오늘날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면 과연 그러하실까요?
예수, 석가야말로 그시대에 가장 위험한 사상을 가진 불온한 인물이 아니던가요?
불교나 기독교나 [깨어있으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대체 무엇에 대해 깨어있으라는 것일까요?
자기를 의식으로 여기는 영적인 사람은 그 의식이 특정한 생각의 틀에 갇히는 걸 잠든다고 봅니다.
하지만 육체로 여기는 이는 자기 종교나 신조를 부정하는 사상에 속지 말라는 말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I'm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최근 들어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자신의 신앙적 상황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유행 중인’ 표현이다.
그러나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상태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많은 종교인들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CNN이 보도했다.
이 짧은 한 마디는 자신의 삶의 문제들에 대해 종교적인 해답을 찾지만,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종교에 소속되기는 싫어하는 젊은 미국인들의 성향을 드러내 준다.
기독교 전문 설문조사 기관 라이프웨이 리서치의 200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18세에서 29세까지의 미국 젊은이들의 72%는 자신이 “종교적이기보다는 영적이다”고 답했다.
줄여서 간단히 ‘SBNR’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같은 성향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며, 그들만의 세계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형성해나가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뉴욕시에 거주하고 있는 히더 캐리우 역시 SBNR을 따르는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다.
그는 “어떤 틀 속에 나를 한정시키는 것이 싫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며 “내가 죽어 영원한 삶으로 접어들 때 침례교도나 가톨릭교도, 또는 무슬림이라고 이름 붙여진 문으로 들어가진 않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종교적 교리와 규범에서도 자유롭고, 자신이 곧 그 기준이 되는’ 영적인 것에 대한 추구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다.
미국 예수회의 제임스 마틴 신부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SNBR은 한마디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표현”이라며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건 곧 현실에의 안주와 자기중심주의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종교적 전통과 가르침에서 단절된 채, 각자의 장소에서 신과 단둘이만 있을 수 있다면 그 신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물음이다.
“적어도 그 신이 가난한 자와 당신의 것을 나누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마틴 신부는 지적했다.
신앙에 대한 어떤 신념을 뛰어넘어 패션,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로도 급속하게 번져가고 있는 이같은 흐름은 종교적인 것보다는 확실히 ‘쿨하게’ 보이기는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 종교에 속하고 그 종교 안에 신실하게 머물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과 노력이 뒤따른다.
마틴 신부는 “사람들은 종교를 싫어한다. 종교에 헌신하는 대신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더 멋진 일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진실한 것이 그렇듯, 종교는 힘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회피는 기존 종교가 현재 갖고 있는 문제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허핑튼 포스트 블로거인 BJ 갤러거는 “권력과 금력 투쟁으로 부패한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반항”으로서 젊은이들 사이에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진 않다’란 식의 종교 회의주의가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SBNR의 신학자이다.
Kierkegaard's "Charistianty does not exist at all."
SK는 재판관의 책에서 “종교”라는 특별한 타이틀로 자신의 의견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가 이른바 세계 5대 종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대교, 힌두교에 대한 연구도 심층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연구한 종교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면, 그는 종교철학자이다. 비단 기독교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다.
종교들의 역사적 역할을 볼 때, 그 관계성에 대하여 S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는 마차에 앉아있는 주인이다.
유대교는 마부이다.
이슬람교는 마부와 함께 앉아 있지 않고 뒤에 앉아 있는 하인이다.BJ. No.447.
몰라큘 라이프(Molecule Life)
넷째는 ‘몰라큘
라이프(Molecule Life)’
1인 가정으로 이해하면 바람직합니다.
사회관계는 더 단절됐지만, 최소한의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것을 뜻한다.
삶의 방식은
‘언택트’로 변했지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모든 조직과 개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의 행태가 교회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이 같은 SK의 평가에 대하여 마부와 하인 취급하는 두 종교는 화가 날 것이다.
일신론(monotheism)BJ. No.2211, 2734, 3276은 역사적으로 이신론(deism)과는 다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등장한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은 율법제정자로서 전능하신 신으로 나타난다. 모세가 바로 그 배경이다. 욥기에서는, 분리된 개성이 하나님과는 반대편에서 나타난다. 시편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BJ. No.5222. 6, 204, 243-4, 274, 305, 324, 378, 387, 410, ... 832, ... 1006, ... 2068, ... 2206-2227, 3028, ... 4460, ... 5047, ... 6033, 6273, 6321. 참고.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신성한 단일신론과 기독교의 하나님의 성육신 교리와 구별되는 “추상적인 단일신론”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에서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나는 나다”(I am who I am.)*출3:14와 비교하여 “하나”라는 수(number)를 강조한다.
이슬람교에서 모든 것은 중간지점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추상적인 출발점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관계성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사용된 상징 속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다. “달은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빌려온다.”(the moon borrows its light from the sun) 즉 이슬람교는 기독교로부터 빛을 빌려온 것이다.BJ. No.2736.
이슬람교에 대하여 한 분의 마호메트 자신이외에 더 서술적인 표현으로 예언자나 역사가를 찾아 볼 수 없다. 모하메트는 그의 거룩한 무덤의 부유 상태에서 인간이 되지 않았던, 즉 성육신을 하지 않은 신성과 신성이 되지 않았던 인간성 사이의 두 자석 사이에 존재한다.
여기서 개성화된 다신교도 아니고 구체화된 여호와 일신교도 아니지만 추상적 일신교-“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갈3:20)-여기서 긍정해야만 하는 것은 특히 그 수(number)에 있다. 어느 정도 예측된 유대인의 하나님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구체적이다: “나는 나다.” 그것은 성육신한 메시야가 아니다. 단순히 예언자, 모세도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 상 어떤 차이가 없이 유대인들 사이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하메트는 성육신에 가까워지지만 그러나 이슬람교에서 그 밖의 모든 것처럼, 중간 지점에서 중단하는 특별한 우수성을 요구했다.BJ. No. 2734.
이슬람교는 하나의 풍자로 전개시킨다. 하나님의 전능함이 독단성이 되며 그의 통치는 운명론이 된다. 이신론은 기본적으로 그 관계성을 뒤집는다. 일신론은 신은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신은 신이다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당연한 축복을 실현시키는 것에 대한 필요한 부속물로 여긴다.BJ. No.5222. 124, 412, 413, 447, 1709, 2207, 2734-2738, 5071, 5212, 5410, 6353. 참고.
가톨릭은 유대교와 비교된다. 이 땅에 주권적으로 내려오신 분이며 (시나이의 천둥 속에서) 자신의 주권에 집착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늘이 땅위에 있을 때, 즉 그 역사적인 순간이 반영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비하나 굴욕으로부터 시작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스스로 종의 형태를 취하셨다. 그리고 가톨릭의 교황은 스스로 “종의 종”(Servus Servorum)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교황은 “종”이라고 불리 수 없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하늘로부터 끌어 내렸다. 기독교의 (개신교)는 인간을 하늘에까지 끌어 올렸다.BJ. No.244.
SK는 인간 중심적인 조직체에 대하여 3개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이상적인 충성파들이 천주교를 지향해가는 것은 재미있는 이유”가 된다.BJ. No. 4061. 83, 164, 242-244, 252, 273, 419, 431, 614, 825, 1463, 1698, 1698, ..... 4504, 4814, 5181. 참고.
II. SK는 자신의 종교철학에 대하여, 1837년, 바우어의 정기 간행물(Bauer’s Zeitschrift, II, 1. pp. 1-32)에 실린 기사, 칼 로젠크란츠(Karl Rosenkranz)의 평행 관계철학(Eine Parallele zur Relationsphilosophie)을 자세히 분석한다.*SK와 칼 로젠크란츠의 관계성에 대하여, Niels Thulstrup의 Kierkegaard’s Relation to Hegel, Princeton University Press(1980), 108-9, 157, 202-3, 285-295, 316, 337, 351, 377을 참고.
칼 로젠크란츠에 의하면, 만약 다른 종교들이 가장 단순한 조건들에 의한 것이라면, 세 가지 입장을 주장한다.
1. 인간은 신이다.
2. 신은 신이다.
3. 신은 인간이다.
첫째는
민족성 중시주의이다.
그것은 자체 중재하는 것으로서 통일을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며 자발적인 것으로서 통일을 단정한다.
그리고 즉 중재의 과정이 발생하는 장소를 망각한다. 그것은 독단적인 하나의 주장이다. 이교도적 종교(paganism)에서,
마술사들은 기본적인 권력을 생성시키는 힘과 같다.BJ. No.48, 141, 413, 417, 428-30, 452, 534, 584, 714, ... 3058-3063. ... 6150. 참고.
인도의 종교에서, 그것은 “브라마”(Brahma)이며 누구나가 브라마에 속죄함으로써 즉시 신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적인 현현이 영적인 실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방향에서 가톨릭의 신부와 같다.
인도의 범신론은 성육신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과 의도라는 두 가지 양태 속에서 우연한 특성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마치 하나님이 의식을 성취하기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 생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종교에서, “라마”(Lama)는 직접적인 신이다. 이원론적 종교에서, 그 과정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은 중간적인 존재이다. 두 세력들이 그들의 완성을 위하여 그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정적주의 대신에, 긍정과 부정적인 실체 사이에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즉, 이것으로부터 영웅적인 것, 비극적인 것이 나온다. 행동이 주제이지만, 죽음이 그것에 대한 한계를 설정한다.BJ. No.5222.
그리스 정교에서, 그것은 예술의 종교, 혹은 미적 개성이었다. 영웅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이 개인적 자유의 확대된 정의와 함께 전면으로 등장하지만, 그 후에는 반대로 전환된다. 그 행위에 있어서 스스로 신이 되는 영웅은 사상의 변증법을 통하여 신들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와 반대편에 서게 된다. 희곡에서의 비극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처럼 특별한 개성을 절대화한다. 헤겔은 그들의 종교성을 “진실성”(Ernsthaftigkeit)으로 묘사한다.BJ. No.5222.
이교적 사상은 시적이었다. 일신론은 산문적이었다. 전자는 결국 미치게 된다. 본질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는 단지 수많은 분리되고 제한된 개성들의 수단들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최초의 원시적인 세력들은 개성적인 제한에 의하여 길들여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것, 추한 것, 변태적인 것이 나타난다.BJ. No.5222.
III. 기독교 낭만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동양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양에서 온 3명의 왕들이었다. 별들을 추적해 오면서, 황금, 유향, 몰약의 선물을 어린 아기 예수를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의 종교는 이른바 점성술에 기초한 종교적 신념이었다. 이들의 신념에 대하여 SK는 부정하지 않는다.BJ. No.3818. Romanticism에 대하여, 16-7, 421, 699, 825, 1232, 1563, 1966, 2304, 3268, 3796-3823, 4063, 4070, 4072, 4398, 5131, 5137, 참고
기독교는 일신론 안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하여 두 개의 분리적이며 추적이 가능한 부정적인 정체성이다. 그러나 또한 이교적 숭배의 직접적이며 단정적인 입장을 폐지한다. 일신론의 입장은 절대적이다. 이교사상의 입장은 불확실하며 일신론의 가설이다. 기독교의 입장은 구체적인 통일성 속에서 신성과 인간성의 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다. 따라서 기독교는 가장 영광스런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SK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판하는 것은 루터가 자신 스스로 “순교자”가 되기보다는 그는 모임을 만들고, 루터교단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에 혼란을 부추겼다고 비판한다. 루터교는 외향적인 모임에 관심을 가지고 과거의 “가톨릭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고 비판한다.BJ. No.2046.
만약 프로테스탄티즘(Prostestanism)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필수적인 개선책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재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간성의 반항이다.
만약 기독교가 복음서에서, 존재-모방, 순수한 고통, 불행, 통곡, 모든 말씀이 설명되는 곳에서 심판의 배경으로, 그것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선포된다면, 그 때, 그것은 공포의 고통, 불안, 흔들림, 전율이다. 아주 옳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생의 삶을 초월하는 어떤 곳이 있다면, 복음서에서 실재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곳은 어디인가?
인간의 본성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평안함, 평온함(tranquillity)이다. 안식할 수 없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Nothing is happy that is not at rest). 인간의 본질은 지금 이 땅에서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이 유한한 삶을 채우기 위한 평온함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실재적으로 기독교에 반대하는 인간의 반항이다. 우리는 평온함을 원하며 기독교가 평화를 남겨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를 기독교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존재하는 기독교의 끔찍스런 염세주의로부터 벗어나 김빠진 낙천주의를 추구하며 그 열매를 얻는다.
이것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를 완벽하게 밀어내고 인생의 즐거움과 더불어 콧노래를 부르는 일들을 시작해야한다. 인간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BJ. No.6863. 83, 164, 223, 405, 581, 825, 830, 1463, 1496, 3617-3626, 3878, 4061, 4242, 4814, 5007, 5088, ..... 6932. 참고.
이것이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다. 이교숭배는 현재 혹은 과거의 종교였다. 심지어 유대교조차도 예언적 특성을 가지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너무 많이 집중한다. 유대교는 현재시대 속에 미래이다. 기독교는 미래의 종교이다. 미래 시대의 현재이다. BJ. No.1639.
IV. 이 글의 제목-“기독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은 SK의 아바타와 같은 앤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의 선언이다. 그가 자신은 클리마쿠스와 앤티-클리마쿠스의 중간지점에서 머뭇거리는 그림자라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는 기독교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SK는 “나 자신에 관하여”라는 제목에서 “기독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BJ. No.6731, 6809.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에 기독교는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계혁명에 준하는 대개혁이 필요하다.BJ. No.385, 1148, 1765, 2054, 2058, 2101, 2902, 2915, 2958, 3170, 4816, 4978, 4981, 5007, 5021, 6732, 6734, 6784, 6809, 6842, 6875, 6878, 6892, 6908, 6918, 6934. 참고.
“사랑과 잔임함”이라는 타이틀에서, SK는 “기독교는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죽은 자들을 매장하고 기억하는 사랑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마8:22.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공식적인 설교에서 조차 신화나 시로 전락하고 말았다.BJ. No. 2439.
수백만의 성도가 있으며, 설교 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기독교는 난센스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일이다.BJ. No. 2455.
전통적인 교회론을 주장했던 그룬투비(Grundtvig) 목사의 교회론, 즉 형식주의, 제의주의, 도그마, 권위를 SK는 난센스라고 비판한다.JG. KM, 318-322. 이러한 주장은 코펜하겐대학의 신학과 교수였던 클라우센(H. N. Clausen)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클라우센 교수는 기독교의 모든 것은 “역사-비평적”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BJ. No.5089. 클라우센에 관한 주장은 Niels Thulstrup, Kierkegaard’s Relation to Hegal, 40-42, 57, 104, 108, 127, 196, 212. JG, SKB, 29, 32, 36, 61, 139, 147-148, 321, 493, 536, 729. 참고.
SK가 종교철학자로서,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그가 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종교에 대한 공평성은 의인과 악인의 지붕위에 햇살과 비를 공정하게 내려 주시는 것처럼 공정하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위는 던져 졌다. 나는 루빈콘 강을 건너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즉, 영적인 세계에서는 햇살과 비의 공정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미션이 무엇인지를 자각한다. 그래서 그는 덴마크 군주, 크리스천 8세(Christian VIII)를 세 번씩이나 알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주권력의 찬스를 이용하지 않는다. 종교의 수장이며 아버지의 친구였던, 뮌스터(Mynster) 주교의 찬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안수목사라는 ‘안수의 찬스’를 사용하지 않는다.BJ. No.5089.
이러한 SK의 신념은 “권위 없음”(without authority)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가장 잘 보여준다.BJ. No.2653, 5646, 5686, 5903, 6220, 6256, 6257, 6271, 6317, 6325, 6338, 6367, 6526, 6533, 6577, 6587, 6616, 6655, 6665, 6753, 6936, 6947. 참고.
SK는 흑수저가 아니고 금수저였다. 금수저로서 주변의 환경은 그가 신학과 목회의 꽃길만을 걸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누리는 권위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BJ. No.3304. CUP, 59.
시스템이 나를 끌어 들이기 위하여, 나에게 고위직을 위한 게스트 룸이 배당되 어 있었지만, 나는 나무 잔가지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처럼, 여전히 사상가가 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뮌스터, 마르텐센 등 전통신학을 고수해온 국가교회 시스템의 기득권 세력들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 정상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육식의 독수리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SK는 독수리와 같은 권위를 포기한 숲 속 계곡 에서 채식을 주로 한 채 살아가는 한 마리 작은 새였다. 그는 권위를 가장 싫어한 겸손한 ‘하늘나그네’였다.
V. SK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BNR: Spiritual But Not Religious) 메시지를 전했다. 기독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기독교인이 아닌, 즉 "영적이지만 소속되지 않음"(SBNA: Spiritual But Not Affiliated)을 지향해 갔다.
그러나 19세기 덴마크 기독교는 국가종교로서 전형적인 “종교적이지만 영적이지 않음”(RBNS: Religious But Not Spiritual)의 모습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SK는 화살을 날린다. 그의 눈에는 1세기 이후부터 교회의 시스템이 복음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을 지적한다.BJ. No.2004. 하나님은 피라미드 체계pyramidal system와 같은 하이러키 구조를 증오하신다.JG. KM, 500-502.
SBNR의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국가교회”였던 덴마크뿐만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교회의 조직체, 시스템을 지향하는 종교들의 집단적 양태들이다. 그래서 SK는 “체계”(System)시스템과 “수”(number)를 부정한다. 특히 수로 구성되는 시스템을 부정하면서, 자아의 예언자답게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를 주장했다. 대중은 비진리이다. 대중은 “키메라”(Chimera)이다. 군중은 난센스이다. 공동체 안에서, “단독자”는 우주를 질적으로 생성시키는 소우주이다.BJ. No.2952.
SYB에 의하면, 1851년, “..... 기독교가 없어도 성도가 될 수 있다”(One becomes a Christian-without Christianity)BJ. No.526고 주장하는 SK의 신학사상은 성경에서 등장하는 “만인, 만유, 만물, 만상, 만국, 만방”의 세계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 즉 모든 언어와 민족주의적 문화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세계주의와 복음의 보편성, 그 “코스모포리타니즘”(Cosmopolitanism)을 추구한다. 이러한 세계주의는 모세의 ‘만인 예언자설’, 요엘의 ‘만인 영감설’, 베드로의 ‘만인 제사장설’,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신부의 생명계의 사유층, 즉 “누스피어”(Noosphere)의 영역과 파르테니아Partenia를 운영하는 프랑스의 사이버 주교 가일롯(Jacques Gaillot)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나에게 교회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있다”고 고백하는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국의 인터넷의 행성 "지구촌 신경 네트웍"을 주장하는 제니퍼 캅 크레이스베르그(Jennifer Cobb Kreisberg)와 “사이버은총”(Cyber Grace)를 주장하는 제니퍼 캅(Jennifer J. Cobb)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심영보, 사이버신학과 디지털교회, 65-73, 이러한 SBNR 신학사상은 한국의 김정식,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SBNR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VI. 선악과(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창2:9 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스토리는 사람들이 왜 병에 걸리는지를 설명하려고 만들어 낸 개념이다. 왜 사람들이 육체적-정신적 바이러스에 걸리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브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은 그녀가 선/악의 개념을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즉 여러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메타바이러스를 세상에 등장시킨 것이다.*닐 스티븐슨, 스노크래시, 357-358.
정보가 담긴 존재들 가운데에 메타바이러스라는 것이 있다. 정보를 다루는 여러 시스템이 스스로 다양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도록 하는 존재이다. 다윈에 의한, 자연적인 선택처럼, 기초적인 자연원칙일 수 있고, 혜성이나 전자기파에 실려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실재하는 정보일 수 있다. DNA가 어느 정도 복잡하다면, 반드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다. 그 내부에서 스스로 바이러스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는 일반적으로 DNA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과거 인간을 감염시킨 메타 바이러스는 그 이후 늘 인간과 함께 했다. 천연두, 페스트를 비롯한 독감 같은 것들이다. 메르스, 사스, 역병들도 일종의 정체기가 있었지만, 인간의 건강한 생활과 장수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인류는 편안한 생활에서 병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쫓겨났다는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한 에덴동산의 스토리 속에 내포되어 있다.
메타바이러스는 아세라(Asherah) 신전의 창녀처럼*왕상15:13, 왕하13:6, 21:7, 병을 퍼트린다. 병은 악이다. 악은 질병이다. 악은 마약이다. 메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혈청을 화학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악은 바이러스다. 누가 그걸 퍼트리는 것인가? 제2의 이브는 누구인가? 아니면, 제3의 아담이란 말인가?*닐 스티븐슨, 스노크래시, 192.
21세기에 다시금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DNA 바이러스로 가득 찬 “판도라 상자”(Pandora’s box)가 다시금 열리었다.*닐 스티븐슨, 스노크래시, 246-7. 새로운 DNA 메타바이러스가 나타난다. 누가 열어 제친 것인가?
지구촌의 코로나—19를 비롯한 “메타바이러스”(Metavirus)의 등장은 SBNR와 SBNA의 의미를 가속화내지는 지향해가라는 것이며, ‘RBNS를 지양하고 차단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모든 종교들의 수직적인 피라미드식 그리고 하이러키한 문화를 해체하고 수평적인 생명 중심적 패러다임의 관계성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특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의 도그마와 교리, 시스템에 갇혀 있는 ‘체계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 어떤 도그마를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을 위한 구속이 있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인간들을 구속했을 뿐이다. 특히 그리스도는 행동, 행위, 실천으로 그 구속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코로나-19의 의미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뭉치는 문화’의 ‘흩어지는 문화’에로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더 나아가 가상현실(VR)의 메타버스와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코로나-19의 “메타바이러스”(Metavirus)때문에, 인간의 생활문화가 180도로 전환될 것이다.
VII. ‘성직자들이란 종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목사들이란 기독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얼마나 종교들이, 기독교가, 성직자들이 부패 했으면 이러한 항변(?)을 하는 것인가?
지구촌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대한민국 기독교가 보여준 작태들(?)을 지켜보면서,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회는 사회의 어머니이다. 사회가 교회의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비참해지지 않했으면, 나는 벌써 망했을 것이다.”(Perrissem, nisi perrissem)가 인생의 모토BJ. No.6154, SLW. 187. SK의 또 하나의 모토-“낡은 옷에 새 헝겊 조각을 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마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다. No.6184라고 한다면, 그 비참함과 망하는 현실을 종교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21세기 사이버시대, 메타버스 채플이 진행되는 현대의 기독교는 ‘내가 행복해지지 않했으면, 나는 망했을 것이다’라고 그 모토가 변질되어 가고 있다.
SBNR은 지구촌의 민족주의적 종교문화의 장벽과 경계선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보편주의적 사랑과 구원의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섭리적 현상이며 실재이다. 이러한 현상과 실재에 SK가 나팔을 불어댄 것뿐이다. 이러한 나팔 소리는 SK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로 향한다.
SYB에 의하면, 하나님은 기독교 안과 밖에 존재하신다. 그리고 기독교를 초월해 있다. 그는 SK가 불어댄 ‘나팔소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사냥꾼이
훌륭하게
자신의 나팔을 불었다
능숙하게 자신의 나팔을
그리고
그가 불어댄 모든 것이
사라졌다
BJ. No.5215.
*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요 12:47)
2023년 한국교회,
‘플로팅 크리스천’·‘하이브리드 처치’ 주목하라
조사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과 예측을 시도해, 목회자들이 내년 목회 방향을 계획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19일 오전 기아대책과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는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에서 ‘2023년 한국교회 트렌드’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이번 책은 두 기관이 함께 TFT를 구성한 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조사와 집필을 주관해 탄생했다.
기아대책은 ‘목회자미래비전네트워크’를 통해 연구협력과 출판에 따른 프로세스 및 모든 예산을 지원했다.
기아대책과 목회데이터연구소는 한국교회의 담임목사, 부목사, 개신교인과 대한민국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관련된 총 6개의 조사를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전문 리서치 데이터에 기반한 한국교회 최초 트렌드 분석서로 불리는 이번 저서는 10가지 트렌드 키워드를 한국교회에 제안했다.
첫 번째 키워드는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
‘붕 떠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코로나19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들이 온라인이나 방송을 통해 예배를 드리거나 일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현상을 빗댄 신조어다.
넓은 의미에서 여러 교회의 예배를 떠돌고 있지만, 코로나 이전 신앙생활의 고정된 패턴을 버리면서도 신앙생활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두 번째는 SBNR
‘Spritual But Not Religious’의 약자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것은 교회라는 조직과 더 연관이 있고, 영적인 것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
서구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종교가 없어질 줄 알았는데, 다른 형식의 종교적 흐름이 생겼다.
교회는 쇠퇴하고 SBNR은 증가한 것이다.
한국 역시 SBNR의 두드러진 증가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해야 할 시점으로 보고 있다.
세 번째는 ‘하이브리드 처치(Hybris Church)’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에 우선성을 두지 않고 두 영역 모두를 매우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살핀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니다. 유기적인 옴니채널을 통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네 번째는 ‘몰라큘 라이프(Molecule Life)’
사회관계는 더 단절됐지만, 최소한의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것을 뜻한다.
삶의 방식은 ‘언택트’로 변했지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모든 조직과 개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의 행태가 교회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여섯 번째로 꼽은 ‘쫓아가면 도망가는 MZ세대’는 자기중심적이고, 공정한 보상에 민감하며, 자기 성장과 개발에 열정적이다.
더욱 진실하고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갈망하는 그들에 교회만큼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와 영적 필요를 살펴봤다.
집필 기관들은 이 외에도
‘액티브 시니어’, ‘
올라인(All Line) 목회’,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의식을 강조한 ‘퍼블릭 처치(Public Church)’,
‘격차교회 서바이벌목회’,
‘기후교회(Climate Church)’를 한국교회 키워드로 제시했다.
유원식 기아대책 회장은 “한국교회는 유례없는 변화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고, 더욱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목회 환경의 분석에 대한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지역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변화하는 목회 환경에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는 “그간 목회자들로부터 한국교회도 이제는 트렌드 책이 나올 때가 됐다며 출간에 대한 요청을 많이 받았다”며 “이 책의 특징은 진단과 예측이다. 개교회 리더들이 내년도 목회 전략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주일 예배는 이호승목사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수요 성경 여행은 황선민목사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새벽 매일의 묵상과 기도는 제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목회자들을 축소하고 온라인 예배를 담당할 수 있는 기능적인 목회자로 교체한다고 합니다.
최근 어느 교회는 2023년부터 목회자들을 마치 기업의 직원들처럼 대우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들을 위한 사례를 월초에 지급하지 않고 월 말에 지급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비록 아직 저희들이 어렵지만 맡은 일에 서로 협력하며 작은 공동체에서 세 명의 목회자들이 함께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경험케 하며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교회들이 늘어가는 때에 공동목회 즉 Team Minister의 새로운 목회를 먼저 경험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은 목사님들과 2023년의 목회를 위한 의논을 하지 않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방향을 함께 결정하려고 합니다.
최근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신을 이 “SBNR”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즉 영적인 다양성을 추구하는 영적인 무신론자로, 교회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영적 구도자로 표현하며 무엇인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특정 종교의 형식이나 틀에는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CNN은 “나는 내 자신의 믿음을 정의하는 데 있어 침례교나 카톨릭이나 모슬렘 등의 특정 종교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과 회계(accounting)할 것들이 내가 죽으면 모두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면서 침례교나 카톨릭이나 모슬렘 등의 특정 종교를 통해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SBNR”을 따르는 한 여성과의 인터뷰를 소개하며,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종교에 소속되기 싫어하는 오늘날의 젊은 미국인들의 개인주의적, 자기중심적 성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SBNR”이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공적”인 부분과 “종교”를 연관 짓고 “사적”인 부분과 “영적”인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 말해 종교를 갖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방법을 통해 자기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는, 그들이 영적 여정(journey)이라고 표현하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며 찾고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인 것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 혼, 몸으로 이루어진 존재다(살전 5:23, 히 4:12).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이 하나님께 대해 죽어 버렸고(창 2:17) 그의 후손인 우리들도 사망이 전달된 죄인의 상태로(롬 5:12), 영이 죽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엡 2:1-8).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때는 죄인의 죽어 있던 영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되살아나 그 영으로 하나님을 인지하고 성경과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이다. 영적인 삶이란 바로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다.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엡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구원 없는 종교나 교회는 저주이다.
구원 없는 종교나 교회를 무엇인가 되는 줄 알고 거기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보려 하다가 종교적인 틀 안에서 질식해 버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SNBR”라고 표현하며 그 뒤에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거듭남 없이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구원과 점점 더 멀어지는 저주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영이 살려냄을 받지 못한 채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면 혼적 달관이나 악령의 역사를 좇아갈 계기가 더 많아지게 되고, 이로 인해 분별력 없이 모든 신비적인 체험들을 성령의 역사로 오인하여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채 교회에만 다니는 교인들의 실상이다. 인간은 종교적인 행위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를 하고, 우상 앞에서 몇 천 번 몇 만 번씩 절하고, 몇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명상하고, 성지를 순례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며(사 1:14), 만약 누군가가 종교적 행위로 죽었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으신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갈 2:21).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을 보고서 그들이 너무 미신적이라고 말했다(행 17:22). 아테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 자신을 “SBNR”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 또한 미신적인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구원 없는 종교에 지치고, 혼적 달관과 악령의 역사에 현혹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찾아 나서고 영적인 것들을 추구한다며 스스로 안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도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던 때가 있었는데(판 17:6), 그 시기야말로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다. 영적으로 암흑과 같은 지금 이 시대도 개인의 인격이 신격화되어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좇아가며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며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으로 오인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며 섬기는 그 대상을 알게 하겠노라고 말하면서(행 17:22-29) 『이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고 구원으로 초청하였다. 진정으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영이 거듭났는지를 먼저 점검해 봐야 한다. 거듭남이 없이 영적인 것만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마귀를 섬기게 된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바울의 초청에 바로 지금 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고후 6:2).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높이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 했던 사탄과 함께(사 14:12-27)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는 종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25:41).
히브리서를 "신약의 레위기" 또는 "제5복음서"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거룩한 신성을 강조합니다.
최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일어난 할로윈데이 참사 사건을 온 세계가 충격적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좁은 골목에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압사당하고 부상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가치관이 무엇일까?
다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국민소득이 65달러에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급성장한 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한강의 기적과 더불어 교회도 급성장했습니다.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지만 아직도 선교의 대상이 국내에도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현재는 보수 우파에서 선출한 대통령이 겨우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번 참사로 인하여 좌파 진영에서는 더 강력하게 대통령 탄핵 운동을 거세고 강열하게 펼쳐갈 것입니다.
좌파 진영에서 목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전환하려는 것
둘째는 시장경제를 사회경제로 전환하려는 것
셋째는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미군을 철수하려는 것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주장과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202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 진영이 의석 수의 2/3를 확보할 때에 어떤 세상이 될까 생각하면 정말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뜻이 있는 교회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에 기도하지 않으면 중국의 지하교회와 북한의 지하교회와 같이 한국교회도 지하교회로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좌파가 주장하는 정치와 경제에 동참하지 않는 교회는 외부적으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생명이 있고 뜻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때를 위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래방에 가면 애창곡이 있다고 합니다.
애창곡을 18번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18번과 같은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라는 찬송을 자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찬송을 부르고 나면 모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순식간에 평안으로 회복되는 것을 자주 경험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왜냐하면 제 경우는 할아버지 이성봉장로님과 외할아버지 김창하장로님이 이북 원산에서 노회에서 서로 만나 교제하던 중 아들과 딸을 결환하게 하면서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으면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여자 전도사로 헌신하도록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배경에 따라 태어나기 전부터 목사라고 결정되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하셨을까?
내가 나를 가장 알 고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붙잡아 놓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 경우는 너무 못되어서 이렇게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만일 제가 이러한 배경이 없었다면 아주 세속적인 삶에 재미를 느끼며 살아갈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찬송의 가사가 참 은혜롭습니다.
입관예식 때에 부를 찬송을 찾아보세요
발인예식 때 부를 찬송을 찾아보세요
하관예식 때 부를 찬송을 찾아보세요
왜냐하면 영적 전쟁은 "소리의 전쟁" 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현대인들의 귀를 듣기에 좋은 소리만 듣도록 고정화 시켰습니다.
자주 보는 드라마, 자주 듣는 음악, 즐겨보는 각종 SNS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자주 듣던 소리에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찬송 소리와 성경을 읽는 소리가 마치 공해와 같은 소음으로 들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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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헬라적, 히브리적 배경의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실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림자에서 실체를 탐구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들이 찾는 실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히브리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로 닫힌 하나님께로 향한 길을 열어줄 완전한 희생을 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완전한 제사장이며 완전한 제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자주 불렀던 찬송은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찬송만 불러도 마음에 참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주여! 하고 부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목회 현장에서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찬송가에서 인용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찬송을 자주 부르시나요?
저희 어머니 권사님은 장례식 때 사용할 찬송으로 입관예식 때, 발인 예식 때, 하관예식 때 부를 찬송을 결정하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때를 따라(유카이론)'는 "적절한 시기"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때를 따라"를 헬라어로 '유카이론'이라고 합니다.
'유카이론'이란 "유(εὖ)"와 "카이로스(καιρός)"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주심을 나타낸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보좌'의 헬라어 '드로노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를 말합니다(1:3, 8).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 출 25:21, 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 레 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Hewitt).
한편 '체휼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파데사이'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10:34;13:23;4 Macc 4:25, Lane).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Schenk).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Cullmann)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Bruce,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Buchanan, Williamson).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
2.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Bruce).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드 호모이오테타'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Lane).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이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온갖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면서 자주 부르는 찬송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라는 찬송입니다.
어떤 때는 혼자 길을 걷다가도 조용히 이 찬송을 부르면 복잡한 거리에서도 혼자 있는 것같은 고요함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정했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는 세 부류의 사람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둘째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불신자들
셋째는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불신자들
히브리서 안에 있는 어떤 말씀을 읽고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어떤 부류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4장 16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긍휼하심을 받도 돕는 은혜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무슨 은혜를 받아셨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각자 마음 속으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씨앗'으로 비유해 봅시다.
은혜의 씨앗을 심으면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날 것이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고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내가 받았다는 은혜가 정말 은혜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분명한 은혜인데도 싹이 나지 못하고 있다면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내 삶에 적용하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어느 성공한 작은 기업의 대표가 은퇴할 때가 되어 모든 직원들에게 앞으로 일 년 후에 은퇴할 예정인데 나의 자녀들에게 기업을 물려 줄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세워 기업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일 모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 직원들은 혹시 내가 대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표는 직원들에게 서로 다른 씨앗들을 나눠주며 내년 이 맘 때에 씨앗을 잘 가꾼 후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원들은 집으로 돌아가 화분에 씨앗을 심고 정성껏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약속된 그 날에 모든 직원들이 정말 화려하고 예쁜 꽃들을 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필립이라는 직원은 화분만 들고 왔습니다.
대표가 모인 사람들을 둘러 본 후에 필립을 앞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직원들에게 오늘부터 필립이 이 회사의 대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나눠준 씨앗은 증기에 찐 씨앗이므로 도저히 싹이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죽은 씨앗에서 싹을 피우고 아름다운 꽃으로 가꾸는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정직한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필립은 빈 화분을 들고 회사로 갈 마음이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왜 망설입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빈 화분일지라도 갖고 가세요."
이렇게 아내가 필립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에 용기를 얻어 빈 화분을 들고 온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초라하게 느꼈던 것이 전혀 부끄럽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찾아봅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활동에 있어서 그분의 뛰어남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글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유대교의 의례와 예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교의 예식은 장래에 있을 일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는 단순한 종교가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가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종교의 모든 화려함과 환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활동, 사역과 비교할 때 무색해집니다. 이처럼 우리 주 예수님의 뛰어남은 역력하게 기록된 이 서신의 주제입니다.
첫째는 게쉬히테(Geschichte)
해석된 역사 즉 간증이란 개인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객관성을 갖지 않을 수 있다.
둘째는 히스토리에(Historie)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사건을 말합니다.
2. 은혜를 받으셨다면 무슨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구체적으로 은혜를 확인하세요)
은혜를 씨앗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씨앗은 땅에 심으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라는 씨앗이 식물의 씨앗과 같이 내 마음 밭에 심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과정을 찾아볼 수 없다면 씨앗이 가짜이든지 아니면 아직 씨앗이 마음 밭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 1)
미국의 어느 성공한 회사 사주이자 대표가 관리직 직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고 합니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회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관리직 직원들중에서 한 명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는 말에 직원들은 저마다 대표로 발탁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회사의 대표는 직원들에게 씨앗을 하나씩 나눠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나눠 드린 씨앗은 아주 특별한 씨앗으로 모두 다른 품종입니다.
일년 후에 얼마나 잘 길렀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내년 오늘 이 자리에 모두 각자가 키운 화분을 들고 모이시기 바랍니다.
그 날 우리 회사의 새로운 대표를 발표하겠습니다"
많은 직원들은 씨앗을 받아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빌(Bill)은 아내와 함께 화분에 물을 주며 열심히 길렀으나 싹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빌은 실망하여 아무 것도 없는 화분을 회사에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빌의 아내는 양심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했기에 빌은 빈 화분을 들고 회사에 갔습니다.
관리 직원 모두 화려하고 멋있게 잘 기른 화분의 나무를 자랑하며 당당하게 모였습니다.
다만 빌이 들고온 빈 화분을 보고는 서로들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렸기에 빌은 풀이 죽어 조용히 한 구석에 서 있었습니다.
드디어 회사 대표는 모든 화분을 살펴본 후에 빌을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왜 식물이 자라지 않았습니까?"
빌은 자초지종을이야기 하였으나 모든 직원들은 웃었습니다.
이때 회사의 대표는 "관리 직원 여러분! 오늘 제가 약속한대로 회사 대표를 뽑겠다고 하였지요. 여기 빌이 오늘부터 이 회사의 대표가 될 것입니다."
혹시 해고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빌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표가 말을 이어가기를, 제가 작년 오늘 날자에 여러분께 드린 씨앗은 제가 삶아놨던 것이기에 절대로 싻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씨앗을 바꿔 키운 것입니다.
나는 정직한 사람에게 대표자리를 물려 주어 바른 경영을 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할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 정직(正直)이라는 교훈입니다.
(도입 이야기 #. 2)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습니다.
미국 캔자스 여자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23세 때 미 남감리회 선교사로 지원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2년을 기다린 후 1907년 25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1908년 8월 15일 자신의 부르심의 땅 조선에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다음은 그녀가 죽기 전 부모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 중 일부이다.
“아버지, 어머니!
이 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 미터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자라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이곳 조선 땅에도 많은 꽃들이 피어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조선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낯선 나라에서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 젊은 여성 루비 켄드릭은 은혜를 조선 땅에 심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여러분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1949년 10월 16일(양력) 서울에서 출생했습니다.
조부와 외조부는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며 아들을 낳으면 목회자로 딸을 낳으면 평생 독신으로 전도사로 헌신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따라 나는 태어나면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집안의 불문율에 따라 성장했습니다.
1982년 5월 울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목사가 된 후 2000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날에 뉴욕 JF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이때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교회로부터 월 $1,000만 받기로 한다.
둘째는 만 65세가 되면 은퇴한다.
첫번째 기도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65세에 은퇴하려던 계획은 몇 차례 차질을 빚어 아직도 온전하게 짐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아직도 짐을 지고 있을까?
그 짐을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 코로나 시대를 기나면서 기독교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교회를 중심으로 신조어가 나타났습니다.
둘째는 하이브리드 처치(Hybrid Church)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On Line)과 오프라인(Off Line)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갖고 진행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문이 닫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역을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신학적, 목회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대립이나 선택의 요소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대면 예배가 옳고 비대면 예배는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가
미래이고 대면 예배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면(요
4:24),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장소가 예배이다.
때문에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각 영역을
고유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이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둔다.
그 때를 위하여 온라인 예배에 적응할 수 있는 적당한 훈련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SBNR이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뜻의 약자를 말합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조직화된 종교를 영적 성장을 위한 유일한 또는 가장 가치 있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영적 삶의 자세를 스스로 확인하는 데 사용되는 대중적인 문구를 말합니다.
주일 예배는 이호승목사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수요 성경 여행은 황선민목사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새벽 매일의 묵상과 기도는 제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목회자들을 축소하고 온라인 예배를 담당할 수 있는 기능적인 목회자로 교체한다고 합니다.
최근 어느 교회는 2023년부터 목회자들을 마치 기업의 직원들처럼 대우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들을 위한 사례를 월초에 지급하지 않고 월 말에 지급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비록 아직 저희들이 어렵지만 맡은 일에 서로 협력하며 작은 공동체에서 세 명의 목회자들이 함께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경험케 하며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교회들이 늘어가는 때에 공동목회 즉 Team Minister의 새로운 목회를 먼저 경험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은 목사님들과 2023년의 목회를 위한 의논을 하지 않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방향을 함께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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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사사기 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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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정리
하이브리드 교회(Hybrid Church)와 온라인 예배(소망교회 온라인 사역실장 조성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문이 닫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역을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신학적, 목회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대립이나 선택의 요소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대면 예배가 옳고 비대면 예배는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가
미래이고 대면 예배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면(요
4:24),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장소가 예배이다.
때문에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각 영역을
고유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이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둔다.
콘텐츠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온라인 예배’는 단순히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현장을 생동감 있게 중계하는(streaming)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예배 중계를 위해 많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음향을 조정하고, 자막을 적절히 배치하여도, 그것이 온라인에서 일방적인
스트리밍으로 끝난다면,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온라인
예배는 현장 예배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 아닌, 온라인 예배 참석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예배 콘텐츠를 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들백 교회의 경우에는 주일 예배 스트리밍의 도입과 끝에 항상 ‘웰커머’(welcomer)가 등장한다.
이들은 화면을 통해 온라인
성도들을 환영하고, 그들만을 위한 안내와 공지를 전달한다.
현장 예배에서도 설교자는 항상 카메라 너머의 온라인 예배자를
고려하며, 그들을 위한 멘트를 준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온라인 예배를 위해서는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온라인 예배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은 너무나 다양하다.
페이스북은 교인들이 매우 쉽고 간편하게 접속할 수 있게 만든다.
유튜브는 방대한 사용자 수와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성도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가진다.
비메오는 유튜브나 페이스북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좋은 영상 퀄리티를 제공하고 광고로 인한 피로감을 줄여 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줌’을 활용하고, 메타버스 기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게더타운’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에는 각각의 단점이 존재한다.
페이스북은 계정이 없이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유튜브는 계속해서 다른 채널의 콘텐츠를 추천하기 때문에 이단의 영상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작년(2021년 6월)부터 모든 영상에 유튜브 자체 광고를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피로도가 높아졌다.
비메오는 확장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유료라는 단점이 있고, 줌과 게더타운은 아직 비디오와 오디오의 품질이 낮다는 한계가 있다.
교회 지도자나 온라인 사역 담당자는 이러한 각 플랫폼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계획과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한 플랫폼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멀티 스트리밍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실시간으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녹화된 예배를 송출해야 하는가?
교회의 실무자는 각 예배의 목적과 상황에 맞게
온라인 예배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두 형식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실시간 예배는 공동체의 관계성을
증대시킨다.
예배 인도자나 설교자는 채팅이나 이모티콘 등의 반응을 통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회중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각자의 자리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여 예배를 통해 공동체성을 강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
봉사자들은 채팅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환영하고, 개별적으로 반응하며 상호 교류한다.
라이프닷처치에서 제공하는 ‘처치
온라인 플랫폼’(churchonlineplatform.com)을 보면, 예배 중 ‘채팅 기능’과 ‘하트, 박수, 찬양’ 등의
‘리액션 버튼’이 존재한다.
성도들은 채팅과 리액션 버튼으로 예배에 참여한다.
온라인 봉사자들은 각 예배 순서마다 필요한 안내
사항을 채팅창을 통해 제공한다.
가령 새가족 환영의 시간에는 새가족 등록 링크를 올려주고, 헌금 시간에는 온라인 헌금 링크를
안내해 준다.
또한 ‘기도 요청’(Request Prayer) 버튼을 누르면 즉시 온라인 기도 봉사자와 연결되어 1:1로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기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기적인 실시간 예배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인력, 그리고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실시간으로 생동감을 전할 수 있는 중계 역량이 갖추어져야 하고, 또한 온라인 예배 봉사자들을 모집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비해서 녹화 예배는 비교적 적은
예산과 노력으로 높은 수준의 예배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NG가 났을 경우에는 다시 재촬영을 할 수 있고, 훨씬 더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예배의 생동감을 연출하기에 용이하다.
찬양의 경우, 세팅된 환경에서 최적의 음질로 녹음하고
이후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된 비디오 촬영 결과물로 편집하면, 평면적인 실시간 스트리밍 찬양보다 훨씬 몰입감 높은 찬양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녹화 예배는 촬영 이후에 편집에 투입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확보되어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실시간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예배 참여나 공동체의 관계성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이처럼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 효과를 고려하여 예배 형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의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예배 형태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
코로나19(COVID-19)를 겪으면서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 양태가
달라졌다. 매주 교회에서 활동하고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던 분주한 크리스천들의 활동이 멈춰졌고,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익숙했던
많은 크리스천들이 ‘붕’ 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은 “붕
떠 있는 크리스천”, “여기저기 떠도는 크리스천”이라는 뜻이다.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이라고 평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코로나19로 비록 신앙생활의 고정적인 패턴이 바뀌었을지라도 신앙생활 자체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플로팅 크리스천은 가나안 성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난 점진적인 현상인데 반해 ‘플로팅 크리스천’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코로나19라는 불가항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다르다. 플로팅 크리스천은 코로나19와 연관이 있는
다른 현상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19는 서구 기독교가 몇백 년에 걸쳐 지나온 긴 변화의 여정을 한순간에 당겨왔다.
한국 교회는 이 급격한 변화의 전환기에 서 있다. 여러 변화 중에서도 ‘플로팅 크리스천’의 등장에 대해 다루어본다.
“코로나 이후에 교회를 나가지 않아요.
온라인 예배도 몇 번 드리다가 집중이 안 되어 안 드리고 있어요.”
“교회는 가지 않고 온라인 예배를 드려요.
저희 교회 예배를 드릴 때도 있고, 다른 교회 예배를 드릴 때도 있어요.”
코로나19는 신앙인들의 신앙체계를 변화시켰다. 가장 대표적인것이 ‘예배’이다. 2022년 4월 18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전면 해제 직후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실시한 개신교인 조사 자료에 의하
면, “주일예배를 반드시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라고 대답한 응답자는34.1%였다. 반면에 61.1%의 응답자는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인식이 약화된 현상은 다른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적 거리두기 전면 해제 직후 실제로 교회에 가서 직접 예배를 드린 사람은 응답자의 절반이 조금 넘는 57.4%였다. 코로
나19 초반에 현장 예배 참석률이 13.6%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늘어난 숫자이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절반 정도의 사람들은 다른 형식의 비대면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코로나19를 겪으
면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일성수(主日聖守)의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때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온라인이 더 좋은것 같아요. 더 편해요. 교회 간다고 준비 안 해도 되고 시간도 더 많아요.”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이야기이다.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의 편리함을 알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굳이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고,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옷을 차려입거나 격식을 갖출 필요도 없다. 송출되는 예배 영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내 생활방식에 맞게 예배 시간과 형태를 선택할 수 있고 예배 한 번으로 주일을 마칠 수 있으니 봉사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애써 교회에서 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석할 필요도 없어졌다. 주일성수에 대한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에 크리스천들에게 ‘주일성수’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과거 “주일성수 = 신앙이 있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 정식예배”라는 등식이 성립되기도 했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다운 예배였고, 집에서 TV로 방영되는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다운 예배로 간주되지 않았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크리스천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오래된 등식이 코로나19를거치면서 깨져버렸고 “신앙이 있어도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을 수 있다”, “다양한 비대면 예배도
예배다”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붕 떠 있는, 떠도는 크리스천
이 책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자유로운 신앙 패턴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플로팅 크리스천’이라고 명명한다. 플로팅(floating)은 “공중이나 물에 떠 있는, 떠도는, 유동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32 한국 교회 트렌드 2023즉 고정된 가치나 비율을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이란 기존의 한국 기독교 문화, 고정된 신앙적 전통이나 가치, 특정한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한국 교회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한국 크리스천들의 신앙적인 전통과 가치, 교리에서 자유로워진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교회 비출석자로 분류되어 ‘가나안 성도’라고 불린 크리스천들이 있었지만, ‘플로팅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이 현상을 다시 재정의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코로나19 이후 이런 현상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가나안 성도와는 미묘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크리스천들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적 사고를 하고 있으며 모든 측면에서 신앙생활이 유연해졌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한 변화이기는 해도 명백히 변화되고 있다.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시작된 인식의 변화가 그 바탕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교회에서 용납되지 않던 것들이 이제 교회 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용인된것이다.
이것은 교회 전반적으로 묵직한 변화를유도하고 있다. 본서에서 다루는 모든 영역이 이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진자들이다. 교회학교에 대한 인식이나 MZ세대에대한 부분,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한 이해,
온라인 예배나 온라인 성만찬 문제, 환경문제 모두 다 연결되어 있는 큰 흐름이다.
플로팅 크리스천 (Floating Christian)
플로팅 크리스천이란 전통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자들로 코로나19로 인해 불가항력적 으로 생겨났다. 그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사회변화 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며 자 신들에게 가장 알맞은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는 교회 안에서 만들어져 나왔다기보다 교회 밖 세상에서 만들어져 교회 안으로 밀어 넣어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플로팅 크리스천이라는 변화도 이 큰 흐름에서
만들어진 현상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몇 년 뒤, 혹은 몇십 년 뒤에 올 미래였는데, 미처 준비되지 않은 지금 찾아온 것이다.
플로팅 크리스천의 양상
플로팅 크리스천들은 현장 예배 참석 여부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출석 교회의 현장 예배를 참석하면서 다른 교회의 설교를 듣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그룹은 교회 등록은 했지만 현장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소속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리거나, 다른 교회 설교를 듣거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있었고, 코로나19 이전에도 그렇게 해왔다. 이 그룹의 사람들이 다른 교회의 설교를 듣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인 관심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한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신앙적으로 더 많이 알고 싶고 영적으로 더 충족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번 설문에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 중 출석 교회의 현장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57.4%였다. 57.4%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 다른 교회 설교나 예배 동영상에 접속하는 사람은 전체 교회 출석자의
31.6%에 해당된다. 이들은 출석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현장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개인적인 신앙적 욕구로 다른 교회 동영상에 접속한 다. 31.6%가 첫 번째 유형의 플로팅 크리스천인 셈이다.
하지만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코로나19 이후 다소 다른 형태로 등장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 사람 중 출석하는 교회의 온라인 예배로 주일예배를 드린 사람이 26.9%,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예배를 드리지
않은 11.1%,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 2.3%,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린다는 0.9%, 기독교 방송 예배를 드리고
있는 0.9%, 다른 교회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는 0.7%가 두 번
째 유형의 플로팅 크리스천으로, 전체 교회 출석자의 42.6%가 여기에 해당된다.
1. 두 종류의 플로팅 크리스천
플로팅 크리스천은 가나안 성도와 유사하지만 가나안 성도보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더 많다. 교회에 등록되어 있지만 교회 예배 참석에
비교적 자유롭고 교회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나안 성도보다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으며 온라인
예배를 더 많이 드리고 있다. 가나안 성도는 신앙생활 자체에 크게 흥미가 없거나 제도교회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지만, 플로팅
크리스천은 신앙생활을 적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제도교회에 대한 거부감도 크지 않다. 이 현상이 초반이라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는힘들지만 플로팅 크리스천과 가나안 성도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플로팅 크리스천은 첫 번째,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을 다 포함한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만 플로팅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그룹을 다 생각해 보기로 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첫 번째 그룹을 ‘닻형’ 플로팅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그룹을 ‘부평초형’ 플로팅 크리스천 이라 부른다.
닻형 플로팅 크리스천은 밑바닥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처럼 신앙적 형태가 유동적이기는 해도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표면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닻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어 근본적으
로 흔들리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반경 안에서만 움직이고 그 반경 을 떠나지는 않는다.
부평초형 플로팅 크리스천은 개구리밥 같은 부평초처럼 뿌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조차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단 기독교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국교회 트렌드 2023> 녹회데이타 연구소·희망친구 기아대책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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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어렸을 때부터 극도의 불안함과 공항증세를 보이면서 자기 자신을 한계짓고 폐쇄적으로 살아왔다. 결혼이 8개월만에 파경을 맞고 그런 증세가 더더욱 심해질 때쯤 그녀는 갑자기 달리기가 하고 싶어 달리기에 도전을 한다.
집 바깥을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사람들 눈에 띄기를 싫어했던 그녀지만 점점 더 달리는 시간, 지역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결국 번화가까지 달리고 걸었다.
그녀는 달릴 때 슬프지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달리기가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즐거움, 환희를 느끼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더 추구하게 된다.
비극에서 한숨 돌리게 해주는 길을 발견하면 그것에 중독되기 쉽다. 약물과 술에 손대면 금방 의존증이 생기는 것처럼 운동도 그렇다…. 사람은 자칫 운동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동에 휘둘릴 수 있다(p 32-33)
사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좋아하던 나는 땀흘려 운동을 끝낸 이후의 성취감, 그리고 샤워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의 개운함을 좋아한다.
몸이 점점 더 단단해짐을 느낄 때 더욱 더 열심히 해서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게 될 날을 꿈꾼다.
운동을 가야 하기 때문에 식사를 같이 하자는 직장 동료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거나, 꼭 가야 하는 결혼식이나 행사가 있으면 운동을 못 가는 것에 대해 신경 쓰인다.
최근에는 빡독 10월 스피치를 하게 되면서 1주일동안 운동을 못 간 적도 있었다.
결국 무사히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다.
몸이 다시 물렁물렁해지고 배가 다시 나왔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필자가 운동중독이라는 거 인정한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싶고 그와 동시에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도 하고 싶다. 1석 2조 아닌가
불안과 걱정의 차이 – ‘이유’의 유무 -
불안은 내 인생을 망가뜨린다.
면접을 앞두고 망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일반적인 걱정이다.
면접이 끝나면 걱정도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은 면접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면접관이 내 모습을 보고 나중에 자기들끼리 비웃지 않을까, 옆에 지원자가 왠 찌질한 놈 하나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들은 점점 더 악화되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 심란한 것은 당연한 것인데 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온종일 뚜렷한 이유도 없이 두렵다.
걱정과 불안은 신체적 증상도 다르다.걱정거리가 있으면 손에 땀이 나거나 소화가 안될 수도 있지만 상황이 지나가면 해결된다.
하지만 불안증은 정말 여러가지 증상을 유발한다.
결론은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즉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 정서상 이런 문제를 남한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강박장애
공황장애
공포증(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사회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범불안장애
책은 위의 증상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문제는 나도 몇 가지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저자는 ‘우리 모두는 뇌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매일같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면서 정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산다면 오히려 신기할 것이다.
어쨌든 문제가 감지된다면 바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가만히 두면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치료방법은 걱정되는 것에 대해서 적고 그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들 얘기하는 ‘셀프 토크(SELF TALK)’ 기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걱정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만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어니 젤린스키 ‘모르고 사는 즐거움’
수 많은 걱정거리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객관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근심걱정은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가 해결되면 계속해서 다른 것이 튀어나올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나의 내적 전쟁은 항상 백전백승이어야 한다. 1패라고 하면 모든 게 무너진다.
운동이 중요한 청소년기에 입시전쟁에 내몰린 그들
성인기 정신 질환의 50%가 15세 이전에, 75%가 18세 이전에 시작된다.
청소년의 정신질환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물론 저자가 영국 사람이기 때문에 영국 통계를 인용했지만 2017년 영국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13세 이상 여자 청소년 3명 중 1명이 불안증이나 우울증을 겪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보다 10% 오른 수치다)
어쨌든 청소년기에 질풍노도의 시기도 겪고 별의별 이상한 생각도 들고 감정이 휘몰아치는 시기인 건 맞다.
이 때 운동이 중요하다
한국도 청소년시기의 운동의 중요성은 수능공부에 의해 홀대당하고 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그 시기에 운동을 통해 해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 앉아있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 만큼의 공부를 하지 못할 터이다.
사람의 몸은 그것이 필요할 때 뇌에서 그것을 하라고 시킨다고 하던가, 저자도 그렇고 운동을 시도하긴 했다.
헬스장에 등록하여 운동하러 갔지만 여성으로써 여러가지 성적 수치심이나 무시를 당했다. 그래서 그 뒤로 얼씬도 안했다고.
어렸을 때 운동선수를 하거나 아니면 운동을 꾸준히 한 사람은 나중에 뭘 하더라도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다. 이미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그 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체력과 집중력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후에 자식을 낳게 되면 운동부터 시킬 예정이다.
나중에 커서 하고싶은 일을 하게끔 기반을 닦아줄 예정이다.
뭘 해도 해낼 수 있게끔
달리기를 통해 ‘임계점’을 넘다
저자는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달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달리는 범위도 넓어졌다.
나는 달리기를 통해 겁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P183
자신감 덕분에 내 몸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P184
단순히 마음이 단단해진 게 아니라 삶의 태도가 바뀐 기분이었다 P189
자신의 임계점을 나날이 돌파해 나간 것이다.
임계점을 돌파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삶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저자가 자신의 정신질환을 ‘상당부분’ 이겨내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적어도 집순이는 아니다.
저자도 인정한다.
중증 이상의 불안증세를 가진 사람이나 몸을 가눌 수 없는 사람에게 달리기를 권하면 안된다.
저자도 지금도 불안증세가 덮쳐올 때가 있다고 한다.
전과 다른 점은 그녀는 이제 이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마무리 : 자신에게 도전하라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임계점을 넘는 경험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은 삶에 무기력감은 찾아올 지언정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근자감이 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도 필요에 따라서 강제로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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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채프만의 기도] -(Rex Chapman) 영국 성공회 목사
팔복1-가난과 부를 모두 알게 하소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3)
주님, '팔복'이 얼마나 멋지게 들리는지요!
간구하오니 이 말씀을 제게 새겨 주소서.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지!
가난하다 할 것이 제겐 별로 없습니다.
때로 돈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주신 재능과 능력이 제게 있습니다.
그것을 제 교육과 삶과 활동에 잘 투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게는 가난하다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가진 물건들이 나누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하소서.
제가 가진 것들이 인생의 결정적인 것들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안정감과 마음의 평화를 재능, 업적, 지위로부터 얻으려 하지 말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없이는 의미가 없음을 깨달음으로 얻게 하소서.
주님,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가난과 부를 모두 아는 것입니다.
팔복2-후회의 족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슬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지!
왜 제가 그 말을 해야 했나요? 그럴 필요가 정말 없었습니다.
그 말은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상처받았음에 분명합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제가 왜 그 말을 해야 했나요?
주님, 후회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지금 제게 살아나게 합니다.
후회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다시 살도록 강제합니다.
말실수, 잘못 행동한 것,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후회하는 한,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주님, 제게 후회가 많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이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만 못하다는 후회,
제 존재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안이한 평화, 안이한 안정감 그리고 냉담함이
결국 아무런 만족이 되지 못한다는 자각과 후회.
이 깊은 후회의 찌르는 가시를 제거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 주시는 분은 주님, 당신뿐입니다.
팔복3.온유의 영을 주소서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마5:5)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복된지!
주님, 정말 두려운 것은
생명을 질식시킬 것 같은 무기력, 그 '침착함' 그 온유함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척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제 비겁함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대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것은
저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이 역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게 하려는 지나친 열심 때문입니다.
생명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영 때문입니다.
주님, 이 어리석음을 제거하소서.
주님이 보여주셨던 그 온유한 영을 제게 허락하소서.
진리를 추구하기에 지치지 않는,
끝까지 참고 견디는,
모욕당할 때 평정을 잃지 않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온유한 영을 제게 허락하소서.
팔복4.때로 저도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마5:6)
때로 저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짜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저는 주님이
기대하시는 간절함의 정도가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무관심으로부터 저를 흔들어 깨우소서.
불완전한 의에 만족하는 제 마음을 흔들어 깨우소서.
생명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의가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할 때까지 저를 흔들어 깨우소서.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인가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먼 곳으로 도망가지 않도록 도우소서.
제가 활동하고 있는 영역에서 그리고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의가 지배하도록 노력하는 일에 먼저 정성을 다하게 하소서.
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이 말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리는지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셔가 그렇게 말했지요.
"자비는 억지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드러운 빗방울처럼 오는 것이야."
하지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문간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 몇 푼 주고는
마음에 위로를 얻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선단체 위원회 몇 군데에 참여하여 봉사하는 것,
이 정도야 비교적 쉽습니다. 주님.
잃는다 해야 약간의 시간과 약간의 여가 그리고 돈 몇 푼이죠.
정말 어려운 것은 제 자신을 주는 것,
가시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일에 노력을 다하는 것,
도움이 절실한 곳에서 함께 머물면서 실패의 아픔을 견디는 것,
사람들이 겪는 고난의 깊이, 온 몸으로 참여하는 것,
자비를 베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소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는 상상력을 허락하소서.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겪으신 주님의 자비는 크십니다.
저도 주님 같은 자비를 느끼고 베풀게 하소서.
팔복6.주님이 저를 찾으시고 아시듯
마음이 정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마5:8)
주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제 마음의 동기들을 조사해 봅니다.
주님이 저를 보시듯 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고 있나요?
제 마음속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제가 누릴 특권들이 아닌가요?
이 행동, 이 감정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요?
주님, 제 동기들이 이렇게 뒤섞여 있습니다.
제 내면이,
제 존재의 깊은 곳이,
제 존재의 중심이 어둡습니다.
주님이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제 안에서 일하시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제 내면을 빚고 계십니다.
저의 인격을 바르게 하소서.
저의 내면적인 탐구를 밝혀 주소서.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생겨나는 지나친 철저함으로부터 구하소서
저를 다시 살게 하소서.
팔복7.값비싼 평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과 박해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마5:9-12)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적말 벅찬 일입니다.
집에 물러나 있는 것,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
친척들과 같이 있는 것,
이런 일들은 참 좋고 편안하고 따뜻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
장벽이 있는 곳에서
제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 삶은 좋지도, 편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제가 어쩌다가 한도 끝도 없이 사랑하셨던 그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던가요?
주님, 저를 강하게 하시어 죄책감과 두려움,
근심과 분노 사이를 중재하는 이 위험천만한 과제를 직면하게 하소서.
주님, 인생의 모든 문제와 아픔들을 기쁨과 환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저를 성장시키소서.
나중에 천국에서 뽐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실한 인간,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렉스 채프만(Rex Chapman) 영국 성공회 목사
마태복음 6:33
먼저(4412) πρωτον
발음 / 프로톤(prōtŏn)
- 관련 성경 / 처음(막 4:28, 요 10:40, 행 15:14), 일찍이 (요 19:39), 먼저(롬 1:8, 고전 11:18), 첫째(약 3:17).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ζητεῖτ δὲ πρῶτο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αὐτοῦ καὶ ταῦτα πάντα προστεθήσεται ὑμῖν.
Seek however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the righteousness of him and these things all will be added to you. - 09-18-2022(주일)
11월 주일 설교를 위한 자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29-34)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아멘
역설의 진리
세상에
살다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역설의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리없는 아우성”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소월의 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그러나 논리는 모순되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은
궤변과 다릅니다.
궤변은 논리도 모순이고 내용도 참이 아닙니다.
미국의 켄트 케이스라는 사람이 역설적 진리 십계명을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상은 미쳐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케이스의 말처럼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고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말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 중에 대표적인 역설적 진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의 길이다”
“남이 너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런 교훈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손해만 보는 일들이 생길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4-26에서 세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역설은 자신의 죽음의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2.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고
3. 종처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것이 오히려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역설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속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죽은 척 하면서 죽지 않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 12:25)
‘골방의 시간 갖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기, 1시간 기도하기, 성경일독하기 등등이 그
내용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많은 교우들이 실제로 골방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발견하는 역설들이 있습니다. 역설, 혹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것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가치와 사고 등과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에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고 모순되는 역설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역설에 해당되는 말씀들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하라.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참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설이 되는 겁니다.
산상설교라고 하는 부분의 첫 대목인데, 특별히 이 부분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복인데,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데 복이 있다? 모순 아닙니까? 우리야 이미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20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가난이 어떻게 복입니까? 가난은 화죠. 저주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고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가난한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 모순되는 말에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과 경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유함이 자칫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해도 그 안에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증오심이 되어서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만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아주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부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졸부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화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권력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부자 역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는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거만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이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부자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라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겸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을 히브리어로 'ענו'(아나브)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자든 가난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겸손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자체부터 복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사야 57: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통회한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통회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통회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떻게 될까요? "겸손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찌 그 영이 소생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영을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시금 힘을 주어서 일어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아물게 해주십니다. 그 마음 가운데 깊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시편 10:17을 보면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소원을 들으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 저 출세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일까요?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에 대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또 악한 생각을 품었고 상처주는 말을 했고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당신을 더 알기 원합니다. 믿음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겁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겠지요.
"하나님 저의 삶에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고, 자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나의 장래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옵소서. 주님께 의탁합니다. 인도해주시고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갈 때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으로 인해 죄짓거나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런 기도가 겸손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령에 겸손이 없으면 성황당 앞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응답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언가가 보여지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그 때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주십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그런 상한 심령,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응답받은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주십니다.
행여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구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백배 천배 옳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옳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내가 구했는데 응답해주시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인데, 그것을 고쳐달라고 얼마나 구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는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주어지는 않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응답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그를 바르게 세워주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충성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제 경우도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 겸손하게 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은 마음 가득한 평안과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를 가졌다라고 했을 때 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하면 다 그런 복입니다. 오복이니 칠복이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의 복, 현세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편 33: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분깃이 됩니다. 기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면 그 영혼이 잘됩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복도 덤으로 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영혼이 잘 되어 있으면 그건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잘되는데 그건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해주시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을 미리 맛보면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인 극락이나 무속신앙적인 저승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죄악이 없고 사탄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만이 충만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젖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거룩과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으로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워질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워나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한 나라, 그래서 죄악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현재형을 쓰신 겁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쓰인 동사형이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복을 발견한 사람, 이 복을 맛 본 사람은 신앙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 믿는 복이 이거구나, 정말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요.
또한 이런 분들은 세상적인 복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불편하죠.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죽는 겁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마음이 죽어요. 마음이 죽으면 하루하루가 고달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은 세상적인 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염러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 때, 염려할 때 위험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단순히 자기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lifestyle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시렵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고 믿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주님께서 말하신 복이라면 진짜 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이 복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거룩한 욕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잘 기억하시고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해질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시고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구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세요.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한 약속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하는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구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구하십시오. 반드시 만족케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설
1) 고린도후서 6: 8-10
2) 고린도후서 12:9-10
3) 고린도전서 3: 18- 20
4) 마태복음 16:25
5) 마태복음 19:30
6) 마태복음 23:12
7) 요한복음 12:25
역설의 신앙
1) 낮아짐과 높아짐
약4:10, 막9:35
2) 약함과 강함
고후12: 9-10
3) 내려놓음과 얻음
마10:39, 눅5:11
4) 죽음과 생명
빌2:8-9, 고후4:10, 갈2:20, 갈5:24, 갈15:3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거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7:14-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좇지 말고 진리에 대한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올바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맛보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6장 21절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배제학당을 창설하였고, 정동제일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도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02년 6월11일. 성서번역의 일로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한국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은 토마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권의 성경책만 던지듯 전해
주었는데, 그것을 주어간 소년과 그 성경책을 찢어 벽에 붙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나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니까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나의 거짓된 모습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작은 거짓도 죄는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의를 행하는 내가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 앞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은 죄는 그 열매를 먹게 됨을 인정하게 하소서.
그러나 동시에 돌이키고 하나님을 바라보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주소서.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처럼, 그러나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았다는 그의 고백처럼 나의 오늘도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 죽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다시 사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
주님,
내 안에 있었던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갑니다.
나의 "할수 없음"이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가능케 됨을 알게 하옵소서.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And he left for Tarsus to look for Saul; and when he had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And for an entire year they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considerable numbers; and the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in Antioch. (NASB).
‘그리스도인’ 이란 단어는 (헬)‘크리스티아노스’ 입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 라는 의미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제자(성도)들에게서 시작된 특별한 호칭입니다.
그렇게 불리게 된 데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며 이방의 교역 중심지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다르게 불러야만 할 정도로 교회가 성장했으며, 그
곳에 모이는 제자들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삶도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
자신들과는 달랐기에 그렇게 불렸겠습니다.
영어로는 ‘Christian’ 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Christ + people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우리를 놀래키기에 충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
둘째, 문명인
셋째, 훌륭한 사람
넷째, 점잖은 사람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
Christian 이란 단어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풀어놓았습니다.
Christ + I +am + nothing :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Christ + is + all +now :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나의 전부이십니다.
깨달음의 의미
깨달음이란 "영적 이해력"이라고 하겠다.
"듣고 깨달으라!"
깨닫지 못하는 말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일지라도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한 말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은 울리는 징과 꽹과리와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깨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보기만 해도 깨닫고, 한 번만 들어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몇 번이나 말해 주고,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전의 문제입니까?
지능 지수의 문제입니까?
교육의 문제입니까?
이런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 중의 짐승 같은 자들아, 너희는 깨달으라.
백성들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운 자가 되려느냐?" 시편 94:8
부모들은 자식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주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역시 자기 백성들을 향해, 제자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 단순한 자들아, 너희는 지혜를 깨달으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한 마음을 가질지어다." 잠언 8:5
주님은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15:10).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기를 구해야만 합니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지만 깨달음을 주지 못합니다. 삶의 경험은 많은 눈물과 슬픔과 절망을 주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풍부한 경험, 경륜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에 이르기를, [위대한 자라고 늘 지혜롭거나 나이 든 자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32:9)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지만 그들은 실상 자기 길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도 인생을 계획대로, 뜻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사람이 가는 것은 [주]께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깨달을 수 있으리요?](잠20:24)라고 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은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오 단순한 자들아, 너희는 지혜를 깨달으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한 마음을 가질지어다.](잠8:5).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지식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책망해서라도 깨닫게 하라고 하십니다. [비웃는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단순한 자도 주의하리라. 명철이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깨달으리라.](잠19:25). 깨닫는 데는 둔해서 안 됩니다. [형제들아, 깨닫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깨닫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14:20).
우리는 인생을 달관하며 사는 초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걷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통해 말씀의 깨달음을 얻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도자들은 도(道)를 깨닫고자 합니다. 달관(達觀)의 경지 즉 해탈(解脫)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몸을 벗어 버리고, 옛 사람을 죽음에 처하고 새 사람을 입기를 원합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진리도 진리지만 먼저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잘못들과 허물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잘못들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주여,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시19:12).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인 됨, 죄성, 허물, 더러움 등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깨닫고 두려움에 떨지만 그보다 자신의 더러움과 죄인 됨을 더욱 깊이 깨닫습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보게 됩니다. 비참한 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산다 할지라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귀족이다, 왕족이다, 백만장자다, 유명한 학자다, 남이 없는 기술을 가졌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에 불과합니다. [존귀함 중에 거하는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49:20). [짐승 같은 자는 알지 못하며 어리석은 자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나이다.](시92:6).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달으려 하지도 아니하여 어둠 속에 다니니 땅의 모든 기초가 궤도를 벗어났도다.](시82:5). 우리는 깨닫기를 구해야 하며,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의 종말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은 자신이 한 때 악인들의 종말을 깨닫지 못해 그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가 사악한 자의 번영을 보고 어리석은 자를 부러워하였음이로다.](시73:3). 이런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판도 없어 보이고, 악인들은 잘 살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된다면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마음에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며 종일토록 [주]를 두려워할지니](잠23:17). [너는 악한 자들을 향하여 부러워하지 말며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지도 말지니](잠24:1). [너는 악한 자들로 인하여 초조해하지 말며 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지니](잠24:19).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은 성도들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깨닫는 마음을 주노니 너 이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 이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리라.](왕상3:12). 금은과 보물을 얻는 것보다 지혜롭고 깨닫는 마음을 얻는 것이 낫습니다. 이는 생선 한두 마리를 얻는 것보다 생선 낚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은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 신앙을 배우는 것은 원리와 원칙을 얻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지혜를 얻었습니까? 주님께 바른 마음으로 바른 것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바른 마음으로 바른 것을 구하면 주님은 ‘지혜롭고 깨닫는 마음’을 주십니다(약1:5). 다니엘은 기도할 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내게 알리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능숙함과 깨달음을 주려고 나아왔느니라, 하니라.](단9:22). 깨달음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다니엘, 솔로몬과는 반대로 삼손은 자신 안에 있던 성령이 떠났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영적 둔감함의 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덮치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에서 깨며 말하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내 몸을 흔들리라, 하였으나 그는 [주]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16:20). 이 모습은 오늘날 범죄한 그리스도인, 타락한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계신 성령이 소멸하든지, 슬퍼하든지, 억눌림을 당하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깨달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때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들은 ‘때’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언제가 적기인가? 이는 농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시기(時期)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도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무너뜨릴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애곡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들을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함께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금할 때가 있으며 얻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도다.](전3:1-8). 말을 해도 때에 맞는 말을 해야 합니다. 때에 맞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때를 깨닫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한 것과 모든 일에 때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도다.](전3:17). 성경에는 때를 깨닫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잇사갈 자손 중의 우두머리들입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때를 깨닫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의 온 형제들이 그들의 명령을 따랐더라.](대상12:32).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 목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에스라는 백성들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을 명료하게 낭독하고 그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느8:8).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시고, 가르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스승이 되시지만 그 도구로 쓰임받는 사람들은 목자요, 교사입니다. [빌립이 내시에게로 달려가서 그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이르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하매 내시가 이르되,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하고 빌립에게 청하여 올라와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8:30-31).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을 통독하고 있었지만 성령께서는 빌립을 통해서 그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 훈계들을 지킬 때 잘 깨닫습니다.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시119:100). 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훈계들은 참고 사항이나 견해가 아닙니다. 권면이 아닙니다. 생명의 법이요, 성령의 법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법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 말씀을 부지런히 찾을 때 깨닫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들을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잠2:4,5). 말씀을 대하는 열정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진리 탐구를 위한 성도들의 바른 모델입니다.
- 주를 찾는 자들은 깨닫습니다. [악한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 주를 두려워할 때 속히 깨닫습니다.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사11:3). 두려움은 지혜와 지식의 첫 걸음입니다. 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도 성경도 알지 못합니다.
- 말씀을 읽을 때 깨닫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너희가 깨닫게 되리라.)](엡3:4). 성경을 매일 꾸준히 읽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 기도할 때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잘 깨닫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도 그것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이것을/ 원하였노니 곧 너희로 하여금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하시고](골1:9). 알지 못하는 것은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약1:5).
- 믿음으로 깨닫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히11:3). 영적인 일은 믿음을 통해 깨닫지 관찰이나 탐구나 실험이나 사유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오감(五感)으로는 더욱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입니다.
- 말씀을 깊이 생각할 때 깨닫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 {주}께서 모든 일에 네게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노라.](딤후2:7). 묵상은 깨달음에 이르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영적 이해의 증가를 위한 사고력 증진은 말씀 묵상에서 비롯됩니다. 꾸준히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그 말씀을 자신의 내면과 삶의 사건들에 적용할 때 주님은 모든 일에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는 깨달음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계십니다. 죄로 인해 영적 지각이 어두워지고, 마귀의 유혹과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신 것과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요일5:20).
우리는 모두 [듣고 깨달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Ashamed of the Gospel)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 Jr.) 지음 / 황성철 옮김. 생명의말씀사
1993년 영문판 발간과 1994년 한글판 발간 이후 15년 만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초판은 읽지 못했지만, 그 내용도 개정증보판과 크게 다르지는 않고, 추가된 부분만 있는 모양이다.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여겨진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어온 책 중에서 성경을 빼고는 가장 많은 밑줄을 치며 읽은 책이다.
‘나의 서재’에서는 소장한 책 중에서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단순히 소개하려 하므로 독서감상문을 쓰지는 않기로 한다. 다만 밑줄친 부분을 몇 군데 옮겨보기로 한다.
오늘날 강단의 약점은 지옥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는 광적인 괴짜가 원인이 아니다. 그것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타협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긴 결과이다. 교회는 올곧은 설교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본문 p84에서.
성경 전체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가르친 분은 주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보다 이 주제에 대하여 더 많이 가르치셨다. 본문 p112에서.
우리가 우리 사역의 깊이에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은 우리 사역의 넓이를 보살피실 것이다. 우리가 영적 성장을 목적으로 사역하면, 수적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 p126에서.
확실히 우리 세대의 미국 복음주의가 가지고 있는 비극적인 재난 가운데 하나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실패한 후에도 지도자직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안일함이다. 기독교 지도자가 심각한 도덕적 실패로 교회를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나쁜 평판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지도자직에 복귀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이 전혀 아니다. 이는 성경적 기준에 대한 치명적인 타협이다. 이는 현대 실용주의가 낳은 가장 해로운 결과 중 하나이다. 본문 p296에서.
부록으로 실린 스펄전과 내리막길 논쟁 등은 유익한 보너스를 제공한다.
이스라엘의 본질(The Uniqueness of Israel)
지은이 랜스 램버트(Lance Lambert) / 옮긴이 유평애, 펴낸곳 램프레스
랜스 램버트는 유대인으로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홀로코스트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 리치몬드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2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대인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유용한 자료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이 유용한 것은 그가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땅을 회복시켜 주셨고, 장차 영적으로도 메시야를 통해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성경 본문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다.
책의 뒷부분에는 메시야의 독특성을 말하고 있는데,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너무 비슷한 것에 놀라며 읽게 되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 땅에 오셨는지, 장차 재림도 그 땅에 하실 수 밖에 없는지 알고자 한다면 일독을 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곽희문 지음. 아가페북스
늦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처럼 아프리카 케냐의 쓰레기마을 고로고초에서 복음에 올인하고 있는 선교사 열전입니다. ‘열심히’ 라고 하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만큼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곽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간 ‘평안’이 아니라 ‘편안’한 목회와 신앙 생활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정작 저자 자신은 잘 몰랐겠지만, 그의 평신도 입장과 교회 문화에 오래되지 않은 관점에서 쓰여진 직설적이고도 참신한 멘트가 종종 들어있다는 점이 독서를 지루하지 않게 합니다.
“기독교의 문화를 전해 주고 찬양 몇 마디를 화음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선교라면, 온몸을 던지신 최초의 선교사 예수님은 정말 헛고생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나쁜 소식을 알아야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된다.”(본문 중에서)
사도 바울을 주님께서 부르셨는데, 오늘날에도 그런 종류의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을 ‘복음이면 충분합니다’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무엇인가를 베푸는 단체가 돼야 함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모쪼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충분한 기도와 연구로 말씀을 준비해야 하며, 또한 성도들 역시 설교를 잘듣기 위해 준비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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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는 다음 10가지를 잘 지켜야 한다.
1. 충분한 잠과 아침식사를 하라. 그래야 졸지 않고 설교에 집중할 수 있다.
2. 제 시간에 교회가기. 최소 10분 전에 예배당에 들어와 마음을 집중한다.
3. 주보를 보고 오늘 말씀이 어디인지를 미리 찾아놓고, 본문의 말씀을 읽고 기도한다.
4. 예배를 드리는 생활의 규칙을 만든다.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예배당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흐트리지지 않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만들어 둔다.
5. 간절한 마음과 기대감. 하루 전 예배에 입고갈 옷을 챙겨두고, 헌금을 미리 준비하며, 예배를 위해 기도한다.
5. 열린 마음, 어린이마음. 항상 말씀으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6.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설교 듣는다.
7. 식상한 설교를 들을 때는 내가 저 부분을 설교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한다.
8. 맹목적으로 듣지 않고 비판적 사고를 겸하여 설교를 듣는다.
9. 말씀을 듣기 위해 먼저 회개하며, 나의 감정을 정리해둔다.
10.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고 애쓴다.
스펄전이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설교자들에게서 형편없는 설교를 많이 들어 보았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서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어느 것 하나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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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이병석목사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Zrm&articleno=17177986
성경인물설교(5) 아브라함(창25:1-11)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없다.
아브라함은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의 최초 조상이 되고,
영적으로는 구약 선민에 대응하는 신약 선민인 교회, 즉 모든 믿는 성도들의 조상이 된다.
셈의 후손으로 데라의 아들이었으며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언약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하나님과 최초로 할례언약을 체결한 사람이다.
이복 누이동생 사라와 결혼했고,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개명되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갈대아 우르에는 우르(남무) 왕조가 번성했으며,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가 흥왕했다.
당시 일곱 성읍의 수호신들을 비롯한 3600여 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합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아브라함은 이렇게 어지러운 다신 숭배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려가긴 했지만, 셈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던 집안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교도들의 다신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아브라함의 집안은 갈대아 우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본래 고향인 하란으로 돌아와 머물게 된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계속해서 그 부근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후일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지금도 하란의 서쪽에는 아브라함 탄생기념 사원이 있다.
하란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모르나, 아브라함이 75세 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런데, 하나님의 그 지시에는 약속이 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그는 우르 땅에 살 때에 사람들이 거짓 신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가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고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가나안 땅에는 이미 여호와를 모르는 토착 정착민들이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역시 많은 신들이 있었다. 가나안의 주민들은 하나님을 ‘엘’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바알을 비롯, 땅의 여신 아세라와 음란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의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부족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쉽게 해석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신앙적으로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자신만을 믿고 먼 길을 따라온 가족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처했다. 가장인 아브라함은 엄청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냥 버틸 것인가? 아니면, 일단 애굽으로 내려가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곤궁에 빠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애굽으로 내려갈 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벗어나 이방 땅 애굽에서, 아내 사라까지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고심한 모습은 있으나 하나님께 매달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자리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도록 아내와 조카에게 얼마나 입조심을 시켰을까? 비겁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와 조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건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자칫하면 우리 모두 다 죽어. 사실 나도 마음이 아프다구.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나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구.”
그는 자신의 거짓말을 열심히 합리화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체면도, 자존심도 버렸다. 거짓말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을 것이다.
애굽 왕에게 아내를 바친 대가로 아브라함은 양과 소, 노비와 나귀, 약대를 얻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아무리 호의호식을 해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실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한 거짓말이 실제로는 자신을 죽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살았으나 살아 있다고 차마 말하기 어려운 상황. 그에게 남은 건 수치심과 무능함뿐이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신다. 이기적이고 변덕스런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건져내시고 아내를 다시 찾게 해 주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의 무능함과 비참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창세기 12장 첫장면에서, 왜 성경은 믿음의 조상답지 않은 초라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을까? 이것은, 비록 믿음의 조상이라고는 하나, 선택받은 사람이라고는 하나, 인간인 이상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고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장래를 열어주고 계심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후일, 그랄 땅에 거할 때도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범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어 위경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후손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강요에 못이겨 인내하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인간적 방법으로 서자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그의 후손인 아랍 계열의 민족들과 적자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후대에 영원한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두라라는 후처를 취하였는데,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두라의 후손은 구약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대표적인 이방민족(미디안 등)으로 출현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동문제의 근원적인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애초부터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인가? 스스로 이만한 믿음이면 괜찮지 하고 자평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끄시지 않으시면, 온전한 믿음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음을 이 시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엡2:8,9).
왜 성도들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겸손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고 내어주는 삶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인지를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결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부족하지만 믿음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시켜간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시고 다듬고 인도하신 결과이다. 이시간 아브라함의 성품 가운데 특히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몇 가지 알아보자.
1) 조카 롯과 분리할(창13) 때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
자신과 조카 롯의 소유가 점점 늘어나서, 자신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되었을 때, 롯에게 먼저 거주지 선택권을 부여한 풍부한 아량과 관용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좀더 좋은 위치, 좀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현대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성도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본받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삶에 찌들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포기하면 다툼은 일어나기 어렵다.
2) 소돔땅에 거하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84세,BC2082/창14)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
가족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침략자를 추격하여 가족을 찾아오는 모습에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소돔 왕의 대적자들을 물리쳤으나 빼앗은 물품을 소돔 왕으로부터 전혀 취하지 않은 청렴결백한 모습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 물질 앞에서 고귀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또한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치는데,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하는 성도들에게 또한 귀감이 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3) 멸망당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창18) 아브라함의 모습
죄악된 소돔성을 심판하기 위해 천사들이 떠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서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조카 롯을 위해 간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은, 특별히 태신자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과연 죽어가는 불신자들을 위해 얼마나 애써 중보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다시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낯설은 손님일지라도 정성으로 대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돔성으로 가는 천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성도들도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사랑의 경로식당, 사랑의 도시락 배달을 통해 지역사회 노인들과 거택보호대상자들을 우리가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분은 쓸데 없는 일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와 피를 나누지도 않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경제적으로 볼 때, 투자를 해봐야 별로 소득도 없는, 그래서 외면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이 정성으로 지역의 어르신들, 소외된 분들을 대접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4) 모리아산 제사(창22)
아브라함의 성품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대 순종’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아간 것이나,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순종한 모습은 정말 믿음의 조상다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마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이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렸을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25장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향년 175세에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살아 움직일 힘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살고 있지만,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오늘 밤에라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인가?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일지 이시간 스스로 점검해보자.
그날, 그 순간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자.
비록 부족한 사람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듯이, 우리 역시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할 때,
놀라운 신앙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확신한다.
● 구약 민수기에 보면 발람이라는 인물이 아주 비중있게 등장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이 전한 말 중에는 상당수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민23:19인데,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는 내용이 있고, 또 민24:17에 나오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라는 내용인데, 이것은 온 세상의 구세주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탄생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후일 동방박사들이 성탄의 별을 좇아 먼 여행을 떠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 별을 장식하게 만든 첫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도들 중에는 민수기만 읽고 발람에 대해 좋게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발람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이방인 점쟁이 무당이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모델로 발람을 지적할 만큼 그는 사악한 이미지의 대표적인 악인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은 예언자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바로 그것이 자신의 신앙고백이거나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이방 잡신을 숭배하는 이방인 예언자, 점쟁이, 복술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 출애굽(B.C.1446년)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땅 동쪽 건너편 모압땅에 도착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땅이다. 모압평지는 약 20km 너비의 광활한 초원지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동안 아모리 족속을 비롯 이방족속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여 모압땅까지 오게 되었는데, 60만 대군에다가 200만명이 넘는 인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나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모압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다. 저들이 여호와의 섭리를 제대로 깨닫고 있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여호와의 신앙에서 멀었기 때문에 형제 나라인 이스라엘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었고 두려워했다. 이에 모압의 왕 발락은, 그 당시 만연했던 사신숭배적 술법으로써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당대의 유명한 복술가인 발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방 잡신의 예언자 발람은 메소보다미아 브돌 사람으로 브올의 아들이다. ‘발람’은 히브리 말로 ‘이방인’ 혹은 ‘탐닉자’, ‘백성을 망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으로 볼 때,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 같다. 브돌은 유브라데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그곳에는 잡다한 우상숭배자들과 복술자들이 자연히 모여들게 되었으며, 발람은 당시 그들 중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모압으로부터 약 650km 떨어진 브돌까지 모압왕 발락이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모압 평지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모압 왕 발락이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게 되자, 사자를 브돌에 보내어 발람의 도움을 청했다. 발람은 먼 나라 모압의 발락왕으로부터,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 내가 앎이니라”(민 22:5-6) 하고 특별한 초대를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 얼마나 유명한 인물이었는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발락 왕의 사자가 처음 그에게 왔을 때, 발람은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8)고 말하고, 이튿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신다”(13)고 알리고 동행을 거절했다.
다시 발락 왕이 사자를 보내어,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그 백성을 저주하라”(17)고 자기 의사를 전했을 때에도, 발락은 거절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발람은 참으로 당당한 하나님의 선지자 같다. 그 후 발락 왕에게로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라고 말했다.
발락은 세 차례나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발람은 세 번 다 그 요구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오히려 축복했다. 그러자 발락 왕은 드디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발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빛나는 장래를 예언하는 한편, 모압 족속에게 내려질 두려운 심판을 예고했다. 그 무엇으로도 발람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점에서 그는 어떤 선지자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담대한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켰다. 그의 눈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를 통찰하고 그 장래의 운명을 예견했다. 발람은 이렇게 노래를 짓기까지 했다.
“발락이....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23:7-)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24:5)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라(24:19).”
그는 영안이 띄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笏)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24:17)”라고 메시야의 탄생까지 예언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 어떻게 이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자! 이처럼 발람은 위대한 예언을 담대히 쏟아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불릴 만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발람이 잡신 숭배하는 이방인 점쟁이, 복술자로 낙인 찍히고 말았을까.
● 발람이 파멸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물질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명리(名利)를 쫓으려는 욕심도 잠재해 있었다. 그는 이득을 위해, “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불의의 삯을 사랑한” 예언자였다. 발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의 욕심대로 움직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발람은 우연한 기회에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발람은 하나님과의 그 신비한 만남의 기회를 통해 그분을 영접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욕에 눈멀어 가장 소중한 보배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처음 모압의 사신들이 왔을 때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응답대로 돌려보냈던 발람이 두 번째 더 높은 귀족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는 단호히 대처하지 않는다. “발락이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라고 말은 그럴사하게 했지만, 발람은 사절단에게 또 하룻밤을 유하라고 말한다.
사실 하나님의 응답은 벌써부터 분명하고 명쾌하게 내려졌다.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지만 발람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9).” 이건 참 교묘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더하신단 말인가?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끝났지만, 그것을 우직하게 순종하기보다, 발람은 어떡하든지 자기에게 이득이 될만한 응답의 징조 한 조각을 얻어 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건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욕심이다.
어떤 문제를 놓고 자기 뜻대로 이루어 내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며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상태이다. 그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대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기도하고 있다. 그 기도는 아무리 간절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이루어질 어떤 빌미를 찾아 헤매는 욕망의 기도다. 발람이 바로 이런 자세였던 것이다.
과연 그날 밤에 발람은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그 기도의 내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
“하나님, 저렇게 자꾸 부르러 오는데 한번만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그냥 저들을 따라서 모압 왕만 만나고 오겠습니다. 제가 괜히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그냥 갔다가만 오겠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압왕에게로 갈 것을 허락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은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날 아침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신 줄 알고 기꺼이 이욕의 곁길로 달려간다.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1000년 앞을 내다본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검을 빼들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금지”했을 때 비로소 눈이 열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인으로 취급하신다. 인간의 소원을 억제해서까지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복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발람이 자유롭게 그 길을 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태도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을 경우에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를 주셨을 뿐, 그들의 그릇된 행위를 못하게 막지는 않으셨다.
● 민수기 24:25을 보면, 발람이 발락의 요청을 결코 들어주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다가 그냥 자기 처소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흑막이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외부에서 저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단 하나의 길을 알고 있었다.
사건은 바로 다음 민25장에서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한다. 광야시절 단장품을 제거하고 정숙하게 생활했던 이스라엘 여성들에 비해 매력적이기 이를데 없는 이방여인들 앞에서 이스라엘 남정네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마침내 이스라엘 진영에 온통 음란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이방신의 제사에 참석하여 우상에게 절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진중에 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물론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의분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 일로 자그마치 2만 4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민31:16을 보라!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두 번째 귀족들이 방문했을 때, 이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22:18)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영접하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은금과 명예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킬 계책을 모압왕 발락에게 지시하고 떠났던 것이다. 물론 발람은 큰 재물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31:8에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다. 발람이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은 수13:22에 다시 기록되어 있다.
● 발람은 자신이 의인처럼 죽기를 원했다.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23:10).” 그러나 의인처럼 살지 않고 어떻게 의인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발람은 초기에 다른 하나님의 선지자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다. 여러 번의 유혹도 잘 극복했다. 그러나 발람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자신의 욕심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좇아 하나님 신앙을 교활하게 이용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는 알았다해도 전인격적으로 신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단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세상의 물질과 명예를 주겠다고 유혹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삶을 지향하지 아니할 때 이러한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다.
끝까지 잘해야 한다. 끝까지 마음의 고삐를 쥐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겸손한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방심과 타락은 순간에 오고 그 대가는 너무 혹독하다.
혹시 나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과 명예욕으로 인해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늘 예수를 힘입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깨닫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미천한 짐승인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볼 수 있었던 반면, 당대의 최고 복술가였던 발람은 보지 못했다. 이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의 심령은 신령한 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신령한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도 알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도 알았던 발람, 그러나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재물과 명예의 향기에 취해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던 발람. 우리는 실패한 예언자 발람을 통해, 어리석은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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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설교(46) 도마(요20:19-31)
●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고도 불렸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였던 모양인데, 그가 형제 쌍둥인지 자매 쌍둥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불확실하다. 성경에는 그의 부모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이름만 소개된 제자였을 것이다. 공관복음(마10:3, 막3:18, 눅6:15)과 사도행전(행1:13)에는 단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 덕분이다.
● 도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도마는 이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먼저 요한복음에 소개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나사로를 도우려 가자고 하신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궤계가 임박해 있고 실상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가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가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의 이러한 반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이 용기였을까 아니면 운명론자들이 갖는 염세주의적 기질에서 나온 것일까? 만일 예수께서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려 하자 스승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도마는 단순하고 의협심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유대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자포자기의 의미를 지닌,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수께서 가시자고 하니, 모든 것 다 운명에 맡기고 올라가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각도로 해설을 해 놓았는데,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은, 요14장인데,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요14:1-4 읽기) 그러자 도마는 질문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마는 이미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귀머거리인가? 그는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 떠나 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다른 도시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요13장에서 베드로도 질문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잘 믿지 못하는 깨달음이 둔한 자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알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는가?
3) 세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의심많은 제자 도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와 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완고하게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다. 성경은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마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믿기 전에 부활하신 자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도마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다시 보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죽지 않으셨음을 알기 원했다. 의심과 실망 가운데 있던 도마는 7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사실이었나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일주일이 지체되었다. 그동안 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즐거운 일주일이었지만 도마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주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느꼈으므로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4) 네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의 손을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직접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는 말씀으로 이전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지람을 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주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지체하시며,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인과 가정, 교회를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신다. 이에 도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도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주는 요한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도마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직업도 같았다. 또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요한은 특별히 도마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다.
도마에 대해 변함없이 묘사되고 있는 특징은 우울하고 의심 잘하는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경험은 예사로이 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악한 불신의 마음”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의심과 싸웠으며 그런 의심들을 과감히 물리쳐서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으레 도마를 생각할 때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상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그러하고 또한 주석가들도 “도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자”라고 예사로 논평을 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성격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누구와 함께 융화되기 어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과 쉽게 융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기질상 쾌활하거나 명랑하기보다는 다소 우울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냉담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질문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하게 하려는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실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난에 도전하고 정면으로 역경을 돌파하고 시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도마는 분명히 용기 있는 제자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질문이 없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퇴보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도마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문을 가지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얻고 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바른 질문에 있다.
도마의 오랜 의심은 드디어 강한 믿음으로 변했다. 그의 의심만큼 신앙도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 그리고 자신의 삶에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이후 도마는 주님을 위해 능력 있게 사용되었다. 염세주의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였던 도마가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이란)에 교회를 설립했고 나아가 인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으며, 인도 마라폴에 묻혔다. 그곳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여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도마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것처럼, 비록 우리 자신 역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확증하고 점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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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수요성서학당 / 11-04-20 오후 7:00
기독교와 코로나 19(베드로전서 5:10)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And the God of all grace, who called you to his eternal glory in Christ,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will himself restore you and make you strong, firm and steadfast.
처음에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우한 폐렴” 이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이런 명칭이 다양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대구 폐렴” “한국인 폐렴” “문재인 폐렴” 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학명은 “코로나 19” 라고 합니다.
그리고 팬데믹(pandemic) 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라는 “팬더믹(pandemic)” 상황 속에서 고난의 역경의 폭풍 속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고난을 통하여 말씀하신 네 가지 약속을 묵상하며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팬데믹과 같은 불안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영광, 구원의 은총의 신분과 세계로 부르신 하나님이시다.
장차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잠깐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모든 것이 은혜의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과정이다.
그 하나님께서 기필코 성도들에게 네 가지 약속을 하신다고 직접 체험의 현장을 가진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코로나 대유행의 시대에 우리가 꼭 붙잡고 의지해야 할 근본 진리, 핵심진리, 분명한 약속들이 주옥같이 소개되고 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영원한 영광으로 초대된 감격적인 신분이다. 그러나 이 땅에 살면서, 잠깐 고난의 광야를 지나게 된다. 잠깐이라는 말씀에 또한 위로를 얻는다.
지난 몇 개월의 코로나 시대가 너무나 길다고 느껴진다. 현재 각자가 당하는 고난의 터널이 끝이 안 보인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잠시일 뿐이다.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기필코 반드시 하실 4가지 약속을 묵상하면 큰 위로와 용기와 인내심을 얻게 된다.
첫째,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온전케 하신다는 것은 “충분하게 하신다”, “완성케 한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찢어진 그물을 수리하여 고기를 잡을 준비하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뜻에서 “회복”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한 때,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 사도가 성령의 은총을 체험한 후,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십자가에 거꾸어 매달여 순교하기까지 그의 영성과 사명이 회복되었음을 증명하고 간증하고 있는 말씀이다.
주여, 찢겨 진 삶, 상처 입은 영혼, 지쳐 기진맥진하는 심령, 깨어지고 분열된 공동체를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줄 믿고 확신하게 하소서!, 주여, 속히 찢겨 진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게 하소서!, 주여, 속히 마스크를 벗고 형제, 자매가 마음을 주님을 높이 찬양하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마음 껏, 그들의 원대한 꿈을 꽃피우고 학업에 몰두하게 하소서, 잃어버린 직장을 되찾고, 닫혀진 일터 문들이 활짝 열리게 하소서,
둘째,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너희를 친히 굳건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철통같이 견고한 위치에 서있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서 마귀의 무차별한 공격 속에서도 성도들이 그 위치에서 쫒겨남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삶은 영적 전투이다. 마귀는 성도들을 성도의 신분과 위치에서 떨어지고 무너지고 쓰러지길 맹공격한다.
우리는 때로 수많은 걱정을 한다. 가정이 파괴될까? 건강이 큰 어려움이 올까? 자녀들이 피해를 입을까? 직장에서 실직을 당할까? 노후가 어떻게 될까? 교회가 위기를 당할까? 국가의 장럐가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두려움과 염려의 깊은 수렁이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반드시 굳게 지켜 주신다. 설령 위기 상황 속에 잠시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도의 자리와 신분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
셋째,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앞서 언급한 “굳게 하신다”는 말씀은 방어적 말씀이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준다는 말씀이라면 여기 언급한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공격적 말씀이다. 이 약속은 사탄의 악한 계략과 공격, 외부의 물리적 어떤 세력 등으로부터 보호해 주시 것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세력으을 맞설 수 있도록 영적 체력과 대응 도전력을 강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이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5장 9절에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했다. 그는 바로 사탄이다. 굳건할 뿐 아니라 대적하고 하신다. 믿음으로 굳건해질 수 있고 대적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여 마귀를 대적할 영적 권능을 주신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마귀가 성도들을 피할 것이다. 주여, 환란의 날, 위기의 순간, 질고의 위협, 어둠의 세력들로부터 승리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넷째로, 터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확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 튼튼한 것처럼 “안전하게 머물게 하신다”는 뜻이다. 태풍으로 무너진 건물, 지진으로 허물어진 건물을 볼 수 있다. 반면에 확실하게 다져진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은 어떤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기초의 터가 건물의 견고성을 좌우한다. 기초는 바로 성도들의 믿음이요,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탄의 공격은 성도가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게 무차별 공격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굳게 붙잡아 주신다.
믿음에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시는 주님, 회개하고 회복시킨 후에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주님이시다(눅22:32). 베드로는 이 약속의 말씀을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며 자신이 직접 체험한 말씀이다. 코로나 팬더믹 시대에 믿음의 기초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 있도록 도와 주소서, 결코 코로나의 위협 속에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더욱 믿음의 터를 굳건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