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하나님(요한복음 17장)



파스칼의 하나님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

제우스와 님프인 플루토(Pluto)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탄탈로스(Tantalos)는 신들의 총애를 받아 올림포스에 초대되어 그들과 어울리는 특권을 누리곤 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오만해지더니 신들의 식탁에서 그들만 먹는 불사의 음료인 넥타르(nectar)와 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를 훔치기도 하고 신들에게 들은 비밀을 인간에게 발설하기도 했다. 
결국 신들의 미움을 받게 된 그는 벌로 지하세계의 가장 밑에 있는 나락의 세계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 떨어지게 되었다. 
제우스는 탄탈로스를 타르타로스의 한 연못에 박힌 말뚝에 묶어 놓았다. 
물은 탄탈로스의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가 고개를 숙여 목을 축이려 하면, 순식간에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열매 가득한 가지가 드리워 있지만 언제나 배가 고팠다. 
이유인즉 열매를 따먹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바람이 불어 가지를 멀리 밀어내었기 때문이었다. 
탄탈로스는 풍성한 물과 음식물을 바로 옆에 두고도 영원히 갈증과 기아의 고통에 시달렸다.

탄탈로스의 이야기는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인간의 '휴브리스(hubris)'에 대한 형벌 이야기다.
그리스어 휴브리스는 ‘오만'을 뜻한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그 욕망의 근저에는 오만 혹은 교만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가?
손으로 움켜 쥔 모래처럼, 잡으려 하면 멀리 도망가 버리는 것이 욕망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난 욕망의 구멍을 욕망으로 메우려 하는 이들은 일상을 지옥으로 사는 것이다.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 공백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 텅 빈 공백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텅 빈 공(空)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온갖 것으로 쏟아 붓고 채우려 든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자리인데, 어떻게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채우려 하면 할수록 그 공은 더욱 허해진다.
이 공간을 채우려고 사람들은 스스로 갈증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큰 고통 중의 하나가 육신의 갈증이라 하는데,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갈증은 영혼의 갈증이다.

아모스는 장차 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 갈증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전도서 기자는 그 텅 빈 마음의 공간은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 채울 수 없는 공간, 끝없는 욕망의 공간이라 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7-8).

프랑스의 철학자인 카뮈(Albert Camus)는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 뿐”이라고 말했다. 
그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고독을 메울 수 있는 것은, 그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에는 없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다. 하나님을 품은 마음속에만 있다.

내려놓는 충만함과 비움으로 채워지는 역설의 복음만이 가없는 우리의 영적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다.
이 역설의 복음은 이 땅의 복음이 아니다.
천상의 복음이다.
타르타로스와 같은 생의 우물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길은 후 오욕(汚辱)에 찌든 물동이를 버려야 해갈되는 은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파스칼이 말한 우리의 마음 속,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은 이 허허로운 세상에서 당신의 현존으로 꽉 채워 그 충만함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상의 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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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이  죽은 후 그의 옷 안쪽에 그가 꿰매 놓은 신앙고백문이 발견됩니다.
파스칼이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 사이에 불같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경험을 기록한 을 양피지와 종이에 쓴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파스칼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파스칼이 이때 경험한 구체적 상황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신비한 시간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때의 감격의 순간을 놓칠세라 종이에 적고 양피지에 정서하여 평소에 자주 입고 있던 옷의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깊이 간직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고 파스칼이 죽은 뒤 비로소 이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약 600여자 정도가 되는 짧은 신앙고백은 뜨거운 확신과 기쁨에 찬 감동이 서려 있습니다.
두 시간여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파스칼의 온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고 새로운 영적 능력과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전혀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불! 성령의 불!" 로 시작되는 그의 신앙고백
전율이 이는 파스칼의 순결한 신앙고백
죽을 때까지 옷 속에 꿰매어 간직한 그 순수함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그의 심장고백

파스칼의 호심경(Pascal's talisman)으로 불리는이 신앙고백문...그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불!(Fire!)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뛰어났던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6.19~1662.8.19).
그가 남긴 수학원리와 공식과 정의와 도식 그리고 물리학의 원칙 등은 지금도 과학과 건축과 현대기계의 발명 등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동시에 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신앙 고백문을 친지들이 펴내어준 유명한 명상집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는 몇 세기가 지나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깊고도 맑은 청정한 샘물같은 영성의 어울어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시인 엘리어트(T.S. Eloite)의 말처럼 파스칼은 과학자였지만 사실은 가장 위대한 수도사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수학자로서 확률 부분에 대단한  공헌을 남긴 그는 흥미롭게도 신앙에 대해서도 의심과 불신으로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구원 문제에 확률 개념을 적용한 '파스칼의 내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파스칼 그 자신은 이런 확률에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간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같은 성령체험의 감동을 마지막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은혜 가운데 지켜나갔습니다.

 

파스칼 (Pascal, Blaise) [1623.6.19~1662.8.19]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과학, 철학
출생지 : 프랑스 오베르뉴 클레르몽페랑
주요저서 : 《팡세》(1670)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 출생.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기하학(幾何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試論)》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04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세무장관이던 아버지가 하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시작(試作)하였다.

루앙에 있을 때 얀센주의의 신앙혁신운동(信仰革新運動)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眞空)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新實驗)》을 발표하였다. 16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山頂)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16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公),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數三角形論)》 및 그 《부대논문(附帶論文)》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귀납법의 훌륭한 전형(典型)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 ·조합 ·확률과 이항식(二項式)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16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要約)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氏)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센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書翰體)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16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16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積分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三線形論)》 《사분원(四分圓)의 사인론[正弦論]》 《원호론(圓弧論)》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說得術)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斷片的)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 Pens暴es》의 초판본(1670)이다.

 

파스칼(Pascal)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

이 말은 파스칼이라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문학자이며 철학자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잘 나오는 말이다. 이 사람의 어릴 적의 천재성은 수학계의 왕자라는 가우스를 오히려 능가할 정도이다. 만일 파스칼이 좀더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수학상의 여러 가지 업적들은 파스칼의 이름이 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허약하고, 심약한 사람이었고, 오늘날에는 수학자로 알려지기보다는 "팡세"라는 책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여러 가지 업적을 사전 식으로 열거하는 것은 피하고, 어릴 적의 천재성을 비롯한 유명한 몇 가지 일화들을 중심으로 수학자로서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타고난 어린 천재]

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의 오베르뉴 지방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학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그는 과로하지 않도록 집에만 갇혀 있었다. 그리고, 파스칼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매우 신중해서, 너무 빠른 시기에 아이의 머리 속에 기성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먼저 파스칼의 눈을 자연 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다 돌리기로 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파스칼이 12세가 될 때까지, 수학과 과학은 15세가 될 때까지 가르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교육 방침이 적절했던지 자라면서 파스칼은 모든 현상에 흥미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학습에서 수학을 배제시킨 것이 오히려 소년 파스칼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가정교사에게 기하학의 특성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노는 시간을 아껴서 수학 공부를 하는 등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12세 때 삼각형의 내각이 180도라는 것을 어떠한 기존 기하학의 학습 없이 혼자서 발견해서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이 일로 파스칼의 아버지는 파스칼에게 유클리드의 "원론"의 복사본을 주고, 수학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이후 청소년기의 파스칼의 수학적인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13세 때 파스칼의 삼각형이라고 알려진 수의 피라미드를 발견하였다. 14세 때 파스칼은, 나중에 프랑스 학술원이 된 프랑스 수학자 단체의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6세 때 그는, 데카르트가 소년의 작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아버지의 것임이 틀림이 없다고 추측한, 원추 곡선에 관한 작은 논문에서 중요한 정리를 발표했다. 파스칼의 정리라고 알려진 이 정리는 "한 원뿔 곡선에 내접하는 6각형의 대변의 교접은 동일 직선 위에 있다"라는 것이며, 사영 기하학의 기본 정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7세 때, 그는 원뿔 곡선에 관한 한 논문에서 이 정리를 이용하여 400개의 명제를 유도하였다. 18세 땐가 19세 때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하였는데, 그것은 르왕에서 정부의 회계감사를 하고 있었던 부친을 돕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21세 때 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비범한 재능을 물리학에 사용하기 시작한 결과 유체의 압력과 부피에 관한 "파스칼의 법칙"이 오늘날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배우는 모든 학생에게 알려지고 있다.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그의 12살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업적은 마치 진정한 천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차 사고]

파스칼이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게 만든 것은 그의 허약한 체질과 약간은 광적인 종교적 명상이었는데, 1650년에 이르러 급기야 수학과 과학의 연구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파스칼이 이런 종교적 명상에 빠져 든 것은 17세기의 시대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파가 생겨나고, 서로 격투를 벌이던 시기였다.

어쨌든 그 후 3년 간 연구를 중단했던 파스칼은 다시 수학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그는 "수삼각형론"을 저술하였고 유체의 압력에 관한 여러 실험을 행하였으며, 페르마와 서신 왕래를 통하여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기초를 세우는데 노력했다.

그런데, 다시 수학적인 재능을 꽃피우려는 그 순간에, 그를 수학에서 완전히 떠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1654년 말 그는 사두마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말의 고삐가 풀려 버렸다.
선두의 말은 뉘일르의 다리 난간으로 돌진했으나, 다행히 그는 가죽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처럼 행운으로 참변을 면하였다는 사실은 파스칼처럼 신비주의적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 병적인 자기 분석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는 이 사건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몸을 빼라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조그만 양피지 조각에 신비적인 신앙의 감정을 써서 이후부터 그것을 몸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다녔으며, 신학의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만년에는 못을 박은 벨트로 몸을 감고, 육체를 괴롭히거나 자신의 신앙심이 충분히 경건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팔꿈치로 벨트를 때렸다고 한다.

[위대한 치통]

운명의 마차 사고 이후에 파스칼은 자기의 구원과 인간의 비참함에 관한 문제에 대해 몰두하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수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번 파스칼을 수학의 세계로 잠시 돌아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지독한 치통이었다.
요즘이야 치과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으면 되는 일이지만, 그 때 당시의 치과는 병원이 아니라 거의 대장간 수준이었다.
심약한 파스칼이 이발사의 핀셋에 치아를 맡기지는 않을 테고, 그냥 치통을 견디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치통으로 밤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1658년) 밤에 파스칼은 사이클로이드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것을 생각하면 치통에 두통까지 생길 일이지만,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일을 제쳐놓고 사이클로이드의 일을 생각해도 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해석하고 생각을 진행시켰다.

8일간을 사이클로이드 문제에 몰두한 결과, 그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하였다.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치통'이 수학에 공헌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여기서 잠깐 사이클로이드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그림 3과 같은 곡선을 사이클로이드(cycloid)라고 부르는데, 원이 직선 위를 구를 때 원 위의 한 점의 자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수학적·물리학적 특성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는 이 곡선은 미적분학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이 곡선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사람으로 그것을 다리의 아치에 이용되도록 추천한 바 있다. 곧 바로 그 곡선의 한 아치 아래 면적이 구해졌고 접선을 작도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인하여 수학자들은 여러 가지 직선을 축으로 하여 사이클로이드의 한 아치를 회전시켜서 얻어진 회전체의 표면적과 체적에 관한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도형의 중심에 관한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파스칼에 의해서 풀렸고, 약간의 결과가 다른 수학자들에게 난제로서 제시되었다. 파스칼의 풀이는 미적분학 이전의 불가분량법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오늘날 미적분학 강의 접하는 많은 정적분 계산과 동등하였다. 사이클로이드는 많은 매력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기하학의 헬레네', '분쟁의 씨'라고 불린다.

 

[도박꾼의 하찮은 질문]

시간적인 순서로 따지면 마차 사고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메레(Chevalier Mere)라는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도박꾼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까지 '득점의 문제'에 대한 그 때까지의 추론이 도박을 하면서 관찰한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득점의 문제'란 일정한 점수를 따면 끝내기로 하고 도박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그만두어야 할 때, 어떻게 판돈을 나눌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 일인 도박에 충실했던 메레는 좀 더 판돈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서 파스칼에게 이것을 질문했다. 종교적인 명상에 집착한기 시작했던 파스칼이 이 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스칼은 페르마와 서신 왕래를 통해서 서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두 사람이 1654년에 주고받은 편지는 파스칼과 페르마가 확률이라는 수학적 이론을 건설하는데 동등하게 기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파스칼과 페르마는 1654년의 역사적인 서신 왕래에서, 세 사람 이상의 경기자가 있는 경우의 판돈 분배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두 경기자의 경우에 판돈을 분배하는 것과 같은, 득점의 문제와 관련된 다른 문제도 고려했다. 이 것을 계기로 확률에 대한 수학적인 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우연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법칙들을 확립하는 확률에 대한 수학적 이론을 수학자들이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매혹적이며 동시에 약간은 놀랍다. 우수한 연구소에서 시행된 실험들과 매우 신뢰받는 보험회사들의 존재 및 사업과 전쟁에서 병참술에 의해서 입증된 것과 같이, 이 분야는 비실용적인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확률론에 대해서,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 라플라스는, "비록 이 학문이 분명히 비천한 도박에 대한 고찰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이 학문은 인간 지식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승화되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작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최초의 개척자인 파스칼은 '득점의 문제'가 가지고 있는 이런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지, 이 일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일을 취급한다는 것은 번거롭다. 하지만 사소한 일을 갖고 놀 시간은 있다."

 

[천재의 비극]

지금까지 그의 어릴 때의 천재성과 몇 가지 사건들 그리고, 확률의 창시와 관련된 중요한 일화를 중심으로 파스칼의 수학적인 업적을 살펴보았다. 이젠 그의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이야기할까 한다. 파스칼이 치통에 시달렸던 1658년에 그는 생애 중 가장 심하게 앓았다. 끊임없는 두통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고, 이전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4년을 지냈다. 1662년 6월, 자기 부정의 행위로써, 그는 천연두에 걸린 가난한 가족에게 자기 집을 내주고 시집간 누이 집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19일, 그의 고통에 찬 생애는 경련 발작으로 막을 내렸다. 39세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사체 해부 결과 위장과 몇몇 중요 기관이 정상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뇌에 중요한 외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천재들은 천천히 그 재능을 꽃피운다. 이를테면 뉴턴, 오일러, 아인슈타인은 모두 신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학에서조차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다. 신동으로 태어나서 일생 동안 비상한 능력을 유지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드문 경우는 아르키메데스나 가우스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재능만으로 따진다면, 아르키메데스나 가우스와 같은 수준의 천재였지만, 두 거인들이 일생을 건강하게 살면서 지속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에 반해서, 그는 일생을 고통 속에 살면서 아깝게 자신의 수학적 천재성을 낭비해 버렸다. 그는 분명 "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파스칼은 도박이 열리는 많은 파티에 참석했으며, 불행히도 이런 생활방식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1654년 마차가 튕겨 나가는 사고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의 말은 죽었으나 그 자신은 무사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그 당시 생활방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즉, 31세부터, 39세에 죽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가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 소망은 사람들의 생각을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그 당시에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확신! 기쁨! 평화!'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세상과 모든 것을 다 잊는다...'

'나는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킨다.'

 

파스칼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종교적 저술에 헌신하였다. 그는 'Provincial Letters'로 알려진 그 유명한 18개로 구성된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현대 프랑스 산문의 시초로 간주된다. 파스칼은 또한 탁월한 저서 팡세(불어로 '사상'을 뜻함)를 저술하였다. 팡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자신의 신념에 대해 논한 책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믿음은 감각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해 주며, 그것은 나타난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단순한 창조자 이상이심을 알았다. 즉,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개개인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파스칼은 구원문제에 확률의 개념을 적용한 '파스칼의 내기'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스칼의 내기는 다음과 같이 쉽게 풀이된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파스칼은 기록하기를 '나는 나를 위해 고통받고 죽으신 나의 구원자를 향해 팔을 펼치고 있다.'

파스칼은 파리에서 1662년 8월 19일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부단히 병고에 시달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이 헌신된 크리스천은 과학, 수학 및 문학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갔다.

(Ann Lamont, Creation ex nihilo Vol. 20 No. 1) 

 

 

파스칼의 신앙고백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 그는 불의 놀라운 체험을 했다. 이때 파스칼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파스칼이 이때 경험한 구체적 상황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신비한 시간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파스칼은 이때의 감격의 순간을 놓칠세라 종이에 적고 양피지에 정서하여 평소에 자주 입고 있던 옷의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깊이 간직해 놓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파스칼이 죽은 뒤 비로소 이 메모가 발견되었다. 이 메모는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약 600여자 정도가 되는 짧은 신앙고백은 뜨거운 확신과 기쁨에 찬 감동이 서려 있다. 두 시간여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파스칼의 온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고 새로운 영적 능력과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전혀 다르게 태어났다. (박철수 저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에서)

 

< 파스칼의 생애 >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오베르뉴 주 클레르몽에서, 세무관리인 아버지 에티엔느 파스칼과 어머니 앙트와네트 베공 사에에서 태어남. 1639년 발표. 3년간의 연구 끝에 계산기를 제작함.

1646년 새로이 종교에 눈을 떠 이른바 '제 1의 회심'에 이르었다.

논문;

(1663년 출판),

(1665년에 출판)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는 현명한 도전이 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파스칼의 ‘팡세’(Pensées)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 내기는 이런 것이다.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의 이성은 선택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신의 존재와 부재라는 극단 사이에 놓인 무한한 거리에 대한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이성으로는 … 신의 존재나 부재 중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다. …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골라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내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뭘 고를 것인가? … 무엇을 선택하든 ‘이성’은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반드시 골라야 하므로 고른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의 ‘행복’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고르면 어떤 득실이 있는지 계산해보자. …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만일 하나님이 없다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 이 내기에서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무한히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즉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다. … 무한성을 취할 가능성이 있고 질 가능성은 유한하기만 하다면 우물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


득실 가능성이 동일한 어떤 도박에서 만일 유한한 것을 걸고 이김으로써 무한성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도 명백하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를 오도할 ‘파스칼의 내기’


흔히들 생각하듯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지 않고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때나 못 박히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하나는 골라야 해,’ ‘하나님을 선택해’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당신에게 확신을 주고 당신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초자연성이 배제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증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이성과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분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죽어있는 영혼 속으로 불어 넣어진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요일 5:1). 이것이 바로 믿음이 세워지는 방식이다.


이러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육(肉, flesh)이요, 인간이요, 자연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고(롬 8: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 8: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게만 본다(고전 2:1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개함을 주셔야 한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해주셔야 한다는 뜻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된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의 빛을 비춰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기반이다. 우리의 눈으로 하늘의 태양을 보듯,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압도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그 맛을 거부할 수 없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면 그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내기를 흔히들 생각하듯 단순하게 대하면 이 내기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체험하지 않고도 말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 그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다.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주는 ‘파스칼의 내기’


사실 파스칼 자신도 위와 같은 오류를 인지하고 있었다. 파스칼은 내기의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래도 카드 앞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아마도 성경과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날 보세요. 손이 묶였고 입도 막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자유가 없어요. ‘속박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믿을 수가 없네요. 이제 나에게 뭘 하게 할 건가요?’”


파스칼의 대답은 이렇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오. 이성으로 인해 여기까지는 왔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소.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것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설득하도록 계속 애쓰시오. 믿음을 얻고 싶소?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의 불신앙을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을 찾고 싶소? 당신처럼 한때 속박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자신의 모든 소유를 걸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그들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그 길을 알고 있소. 그들은 당신이 치유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병을 치유받은 자들이라오.”


팡세의 간결함으로 인해 우리는 불신앙에 대해 파스칼이 어떤 “치유책”을 제공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대답의 요지는 당신이 이미 믿는 것처럼 가정하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 그 확실함을 모두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 이 여정에서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분명히 얻는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이 내기에서 당신이 전혀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확실하고도 영원한 무언가를 골랐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에 네 자신을 헌신하여 거듭남의 기적을 추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파스칼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주의(sacramentalism)에 여전히 갇혀 있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수(聖水)를 받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라 말한다. “이렇게만 해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파스칼의 내기 자체는 그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준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이제 성수나 미사를 통해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것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내기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복음에 나타난 바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고, 그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확신을 얻고 그것에 압도당한 채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원제 : Pascal’s Wager: Misleading, But Challenging


A: 신을 믿어야 할지 망설이는 이들에게 ‘팡세’의 저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내기(betting·베팅)로 결정하라고 권유한다. 파스칼은 이미 16세 나이에 원추곡선 기하학 공식을 발표한 천재였으며 산술삼각형, 압력의 원리, 적분법, 확률 이론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베팅

그가 살던 시대는 근대철학과 근대과학의 태동기로 기독교 신앙을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짙어지던 때였다. 파스칼은 도박을 좋아하던 그의 친구들에게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설명할 수 있는 논증을 구상한다. 일반인들에게는 형이상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일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었다. 손익을 따지려는 인간의 본성을 감안할때 거부감 없는 내기 방식이 적절해보였다.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회장이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한달 전 24가지 질문을 남겼다. 그는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무신론자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종착지에 선 사람은 신과 영혼, 천국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파스칼은 확률 이론의 거장답게 신의 존재 유무와 이에 대한 인간의 믿음 유무가 만들어내는 4가지 경우의 수를 비교했다(표 참조).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인지 설명한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죽음 이후의 영생과 영벌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전에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둘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경우의 수’로 본 하나님의 존재

<표>에서 ①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사후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경우’다. 이 선택은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믿음을 통해 영생과 무한한 행복을 얻기 때문이다. ②는 ‘내가 믿었지만, 사후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인데, 이 선택은 약간의 이익을 가져온다. 신자는 경건의 유익, 도덕적인 삶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③의 경우는 ‘내가 믿지 않았는데, 사후에 신이 존재하는 경우’다. 이 선택은 가장 큰 손실을 가져온다. 불신을 선택한 대가는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④는 ‘나도 믿지 않고, 사후에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로 아무런 이익도 손실도 없다.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이익과 손실을 동반한다. 하나님을 믿기로 한 선택은 가장 큰 이익(영생)을, 불신앙을 선택한 경우에는 ‘무한대 손실’이라는 가장 큰 손해(영벌)를 얻게 된다. 그래서 샤르트르와 같은 무신론 철학자도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믿음이 사람에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내기 논증의 교훈, 믿음의 습관

프랑스 사회학자인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 1913~1970)은 저서 ‘숨은 신’에서 ‘파스칼의 내기’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유한자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으로 평가했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파스칼의 내기 논증이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겠다는 습관의 결정에 대한 것으로 이해했다.

파스칼이 내기 논증을 통해 강조한 것은 습관의 중요성이다. 신의 존재를 믿기로 결정했다면 믿음을 실천하고 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은총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논증은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론과 수지타산의 원칙을 신앙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으로 단순하지만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기 논증은 도박사처럼 수지타산을 따지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의 전도전략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과 영벌을 고려하게 하는 확률 논증이기도 하다.

믿음, 수지타산이 맞는 선택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이유가 고상하지 않아도 괜찮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손익 계산을 따지는 본성에만 충실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선택이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주저없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제안한다.




파스칼은 근대 과학과 근대 철학의 여명기에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는 기독교를 멸시하는 풍조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존경심으로 돌려놓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품고 약 7년간 이 책을 썼다.
유고작인 ‘팡세’는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의 유한성을 통찰한 기독교 실존주의 사상의 백미이자 믿어야 할 이유를 잘 설명한 기독교 변증의 고전이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39세로 요절)은  팡세’(Pensee: 불어로 생각이란 뜻)의 저자
프랑스가 자랑하는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신학자로 불리는 다재다능, 박학다식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파스칼은 말년에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더니 살아계신 하나님께로의 순종이 내게 임하옵나이다"는
요지의 위대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는 명제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갈파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수상록인 “Pensee”처럼 많이 읽힌 책이 드물기도 하지만 이해하기 난해한 책 역시 드물다는 평가가 많다.
팡세”하면 떠오르는 구절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코가 한치만 더 낮았더라면 지구의 온 표면이 변했을 것이다” 라는 것이 연상되기 마련인데 원래 다음 구절 중 따온 일부라고 합니다: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황후들을, 모든 군대를, 온 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팡세’의 제1부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자의 비참을 논하고, 제2부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인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파스칼의 신학은 철저하고 신비적인 체험신앙인데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이란 ‘생각하는 갈대’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무섭게 만든다’고 독백하는데 인간은 신(神)을 찾아가는 존재라고 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을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을 찾아내고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시냇가 심은 씨앗-나무)

둘째는
을 발견하지 못하고 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을 구하려고 한편 애쓰지만 결국 세속에 찌들어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가시덤불 위에 던져진 씨앗)

셋째는
을 발견하려고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다.”
(을 구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않고 세상적 가치관의 타성에 젖어 그냥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길가에 던져진 씨앗)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의인(義人)이 있고,
또 하나는 스스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의인(義人)으로 여기는 죄인(罪人)이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간구하는 존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종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그는 다음과 같이 위대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주에게 두 손을 내민다.
그는 4천년 동안 예언되어 오다가 예언된 시기와 예언된 모든 사정 밑에서 나를 위해 죽고자 땅에 오셨다.”

그리고 나와 영원히 결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조용히 그의 은혜로써 죽음을 기다린다”
라는 고백 속에서 인간세상의 물질만능, 권력욕과 명예욕과 인정중독의 굴레 속에 살다 보면 세속적 염증과 함께 영적 갈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에 의해서 스스로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모두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사고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다.”
<Blaise Pascal의 "팡세" 중에서>

파스칼이 34세 되던 해인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에서 12시 30분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이 날의 체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임재가 방을 가득히 채웠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양피지에 간결하게 기록하고는 맨 위에 빛으로 둘러싸인 십자가를 새겨 넣었으며 그리고는 그 양피지를 코트 안쪽에 꿰매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662년 그가 죽은 후에 그 양피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불>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하나님 외에 세상과 다른 모든 것의 망각.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떠나고, 그분에게서 도망하고, 그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는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않으리라.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만 우리는 그분을 붙든다.
전적인 포기이지만, 달콤한 포기.
예수 그리스도 나의 인도 자에 대한 전적인 순종
지상에서 하루를 정진하는 동안 누리는 영원한 기쁨


 

1.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기술 문명과 수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을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는 현대의 학문들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의 놀라운 업적들에 비추어볼 때 수천 년 전 유대 땅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교는 현대인들에게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폴 틸리히는 이러한 현대의 세태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해석하여 현대인들에게 해명하기 위해 노력한 신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를 중재하는 ‘철학적 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틸리히는 그의 신학을 ‘경계선 상에 위치한 신학’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신을 향한 믿음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대립하곤 하였습니다.
이 대립은 철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으로 흔히 표출되었습니다. 

중세기에는 신앙을 그리스 철학으로 증명하려던 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이후의 철학은 신학에서 독립하여 철학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틀 속에 얽매이지 않고 그들의 진리를 찾아 나섰으며, 신학에서 역시 철학적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철저하게 보수주의적인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파스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 수학자인 동시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하였지만 철학과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구분 지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남긴 말입니다.

 

 수학자의 신이 아니었고, 철학자의 신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틸리히가 보기엔 신앙의 내용은 좀 더 책임 있게 고찰되어져야 하였습니다.
신앙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하며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대답하는 신학’을 강조하였습니다.
신학은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실존적 물음들을 해결하여한 한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에 반대하여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또한 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부정입니다.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종류의 종교와 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절대적인 것에 관한 의문을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자신의 전존재를 바쳐서 찾으려는 삶의 의미와 방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궁극적 관심’입니다. 인간이 이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일 때 그는 그것을 종교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신의 호칭은 각각의 종교마다 다르지만, 그 용어가 가리키고 있는, ‘인간이 거기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그 종교들의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신을 ‘존재자체(Being-itself)’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신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진술들 가령,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같은 설명들은 그 표현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부분적이고 상징적인 진술밖에 할 수 그러나 ‘존재자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을 포괄하며, 그 모든 것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그에 의하면 신은 세계의 본체이고 세계는 신의 몸이며, 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원인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신은 마치 새가 날아가고 있는 하늘이나,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물과도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신은 존재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있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범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틸리히는 그의 신론을 스피노자적인 범신론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이다.”
(Sein ist das transcendens schlechthin).

존재는 인간과 무관하게 절대적 초월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존재와 무관할 수는 없다.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응답하기를 기다린다.
인간이 그 말에 응답하지 않는 한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이다. 따라서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라는 명제는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에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응답하는 공속사건(서로에게 속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비로소 존재가 인간에게 자기를 건네준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초월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말을 걸어오고 있지만 인간이 응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유하는 믿음을 통해 응답할 때 계시는 사건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건네주신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건네주시고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사건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이론이다.
그리고 이런 체계화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해이다.
그리고 계시에 대한 이해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책의 목표는 계시와 해석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근거한다는 전제에서 계시의 필연성에 대한 철학적 근거와 계시에 대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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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Grace)


은혜는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Grace)'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된다.
흔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명 받았을 때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초신자들에게는 “은혜 받아야 된다”고 권념한다.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쁘다, 감동되었다, 찔렸다, 깨달았다’는 등의 상태를 은혜 받은 것으로 본다.
또는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은혜스럽게 넘어가자고 말한다.
여기는 ‘이해와 사랑’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령의 은사와 은혜를 혼동하기도 한다.
은혜와 은사를 혼동해 은사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은사는 은혜의 부산물이지 은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은혜는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은총·자비·인자·인애’ 등으로도 표현된다.
구약성경에서 은혜를 의미하는 단어는 ‘헤세드’와 ‘’이 있는데, 헤세드는 불변의 사랑(인자), 언약적 사랑을 뜻하고 헨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렘 31:2)를 뜻한다.
이중 헤세드는 구약의 은혜 개념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동기를 말한다(시 136:1-). 

신약성경에서 은혜는 ‘카리스’로 단어적 의미는 ‘매력을 느끼게 된 상태나 기뻐하게 된 상태’에 대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친절한, 예의바른, 관대한 처분’ 등의 사상을 띤 의미로 사용됐다.
신약시대에는 보다 발전하여 구체적으로 ‘은총이나 혜택’을 나타나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카리스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라는 용어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구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의와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구약적 의미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말의 동의어로 나타난다.
즉 신약의 은혜 개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근간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활동(성육신-생애-고난-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계시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은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성육신은 은혜의 최고 절정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로운 언약(은혜 언약)이 시작되었다.
죄 가운데 있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 은혜이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통해 그 깨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의 은혜인 것이다.
거듭남과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상태를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은혜는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할 수 없는 구원과 성화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즉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며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은혜는 찾아오는 자를 향해 주시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베풀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를 받는 통로와 종류

은혜는 특별은혜일반은혜로 구분된다.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말하고, 일반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연적 축복을 말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교회는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주기 위한 기관이다.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을 읽고 깨달았을 때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과 세례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데 성찬과 세례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일체로 나타나는데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근원으로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부 은혜의 전달통로로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속하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은 은혜를 선포하고 구속받은 성도를 감화 감동케 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질서 속에 내포된 근원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열리고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은혜
-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화 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성육신과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의 최고 표현이다.

성령의 은혜
- 성령의 은혜는 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태의 직책(은사)으로 나타나며, 그 은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교회공동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혹은 믿음을 받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말씀을 전하는 능력, 방언의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르심을 입었으며(갈 1:15), 의롭다 하심을 입고(롬 3:24), 거룩함을 입는 것이다(롬 6:14).
또한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살후 2:16),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딤후 2:1). 

율법과 은혜의 관계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율법은 행위를 강조하여 선행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은혜는 인간의 공적 없이 값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표준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이다. 은혜는 어떠한 기준이나 노력 없이도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해주며 죄에서 구원해 준다. 즉 은혜는 어떤 일체의 공로를 배제하며,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분에 넘치게 받는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율법이 구약의 중심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의 중심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구약시대를 율법시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시대 곧 '교회시대를 은혜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은혜는 신약시대부터 생겨났다고 봐야 되는가에 대해 성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및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어졌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거절하였을 때에 ‘더하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출15:13, 18:9), ‘주께서 행하심대로 다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함으로서 은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었다(출19, 24장).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는 전혀 다른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단지 외형상 다른 형태를 취할 뿐 율법의 중심사상도 사실상 은혜와 같이 사랑, 긍휼이지만 영적 지적 성숙도가 낮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엄격한 형태의 금기식 율법을 주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본질적 방편이 아니었다. 율법이 다스렸던 구약시대에도 은혜는 존재했다. 
한편 ‘은혜’를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은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약적 은혜의 개념은 은혜의 실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보다는 신약적 은혜의 그림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창조에서부터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안타까워 하와를 주신 것도 은혜에 속한다. 인류 구원을 위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힌 은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애굽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나뭇가지 옷을 대신에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창3:21). 거친 환경 속에 살아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인 동시에 예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나타낸다. 

② 가인에게 보호 표를 주신 은혜
제사 문제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 대해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가인에게 보호의 징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창4:15). 이것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악된 인간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밧줄을 던지시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 

③ 에녹에게 주신 승천의 은혜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은 당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 경건한 생활을 했다(창5:21-24).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회복되는 곳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에녹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고 변화 승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④ 노아 홍수심판과 구원의 은혜
노아 때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온전히 살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방주를 지을 수 있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창6:8-22). 구원의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대홍수 심판을 모면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⑤ 아브라함을 찾으신 소명의 은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 부르시고, 열국의 아비로서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약2:23).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⑥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율법 은혜
모세를 부르셔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맡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인도하고 구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은혜를 선택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은혜 대신 율법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은혜 아래 있었다. 

⑦ 죄악된 백성을 성결케 하는 성막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의 장막인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피의 제사를 통해 죄악된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케 하는 곳을 주셨다. 만일 성막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속죄할 방법은 없었다. 또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⑧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은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통치자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인해 이방민족의 지배를 당하게 됐고,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보내주셨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되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을 요구했다(삼상8장). 

⑨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은혜 
말씀이 육신 되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화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었다. 

은혜의 사역 - 구원 · 성화 · 소명

은혜의 중요한 사역은 성도의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위한 소명을 불어넣는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만 역사로 나타날 때는 인간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다.
은혜의 능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인간 영혼의 파멸을 회복시킨다.

1. 구원의 사역 - 죄악된 인간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사하게 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며 구원을 이루게 하는 역사를 한다. 즉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실체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기만 하면 죄악된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 
행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 성화의 사역 -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도는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은혜는 구원 사역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때를 따라 돕는 역사를 계속한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3. 소명의 사역 - 특별한 직무를 맡기고 능력을 공급한다

은혜는 성도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특별한 직무를 맡긴다.
바울도 사도로 임명을 받고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록 복음을 전파에 부적합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은혜는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영적 도덕적 능력을 공급한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닌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재능인 은사가 주어진다. 

고린도전서 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견해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을 기복적인 신앙이나 그릇된 생각에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붙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닌 모든 인류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란 선물이다. 또한 은혜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무법을 허용하는 것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는데 본인은 동일한 사업에서 특별한 이익을 얻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만족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것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고 힘들다고 해서 은혜가 떠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 받으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무관하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짓도록 허용하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소명을 짓밟도록 허용하는 허가증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구원)는 선한 일을 하거나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등 공로에 따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롬 11:6, 딛 3:5).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롬 4:4, 엡 2:8-9).

은혜 받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은 은혜가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은혜가 역사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뿐 아무 일(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책임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명분으로 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신앙적 책임까지 부정되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은혜 받아도 율법은 철저히 지켜야 된다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많이 나타난 잘못된 생각으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