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성경은 66권 1,189장으로 구성되었다.
1,189장에서 2장을 선택해야 한다면 로마서 8장과 마가복음 8장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성령, 마가복음 8장은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가복음 8:1-38

성경 한 권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로마서 8장 한 장만 남겨진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로마서 8장의 가치를 치하했다면 저는 마가복음 8장은 첫 복음서라고 여겨지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함께 한 제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12제자 뿐만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따르는 현대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그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1. 칠병이어의 기적(1-8절) 

마가복음 8장은 이른바 칠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은 이방인의 장소에서 또 다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일곱개를 가지고 4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신다. 

단지 장소만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더 적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저들을 먹이라는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은 전혀 못한다고 한다.

오병이어 :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을 통해 주님이 축사해 주시는 사건 

동역의 원리 :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명령하였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는가?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나는 못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 말에 순종하면....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 내가 가진 것만을 보면서 못한다고 한다. 

믿음은 내 가진 것이 아닌 내 순종을 통해 축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와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예수와 함께 하는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2.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뒤에 바로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요구
- 표적을 보여 달라 한다(11-12절) 

도대체 언제까지 표적을 보여줘야 저들은 믿을까?
눈앞에 표적이 계속된다면 정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까?
예수님은 표적을 바라는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탄식한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다름아닌 눈에 보이는 표적, 끊임없이 보여주기만을 간구하는 제자들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적 - 바리새인과의 논쟁 - 그리고 배 안에서 제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한 유대인의 치유... 

이런 싸이클의 대상은 제자들이다.
여기서 비교의 대상은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제자들이지만 결국 이들의 신앙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전통이나 헛된 외식에 빠지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3. 제자들과의 대화(13-21절)
다시 주님과 배를 탔다

그들이 함께 있는 분은 며칠 쌔 오쳔명을,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실의 어려움은 오직 주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문제는 또 떡의 문제이다.
은혜는 받았는데 여전히 배가 고프다.
현실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고 했다.
무슨 떡인가? 

4천명을 먹이고 남은 광주리가 일곱이라 했다.
이 일곱광주리는 모든 교회를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다.
하늘의 만나이다. 

그런데 떡이 하나 밖에 없다(14절) 

하나의 떡은 무엇일까? 
배에 단 하나 남은 떡은 누구일까?
일곱 광주리의 떡을 다 잃어버려도 된다.
남은 하나의 떡만 있으면 언제라도 또 채워질 수 있다.
그 분은 오쳔명을 먹이고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광주리를 이방인의 무리 4천명을 먹이시고도 일곱교회를 상징하는 7개의 광주리를 위해 떡을 남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언제라도 공급받을 수 있다. 

4. 단지 그들은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 

- 바리새인의 누룩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자신들이 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자기가 했던 신앙생활이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가 와서 자기를 맘껏 칭찬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깊은 마음 속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남들보다 낫고, 내가 남들보다 의롭고, 내가 남들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꾸짖으신다. 그냥 꾸짖는 정도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저주하신다" 너무나도 끔찍한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인가?
- 허영심, 허세, 인본주의, 번영신학........성공적 목회의 상징은 과연 대형교회인가?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례요한이 의로운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이목때문에 목을 베어버린 헤롯, 예수가 무죄인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십자가를 지게 했던 빌라도와 같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의롭지도, 정직함도 없이 자기 주관대로도 아닌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교만의 누룩, 헤롯의 이런 세상적인 정욕의 누룩.... 이것만 주의하면 떡은 단지 하나면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먹이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맹인의 정체 :  제자들 

5.  맹인을 고치심 

 -벳세다 :  house of fisher man (어부들의 집) -> 어부는 누구일까 누가 어부인가?  제자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 - 제자들

육적 소경에서 sight를 주고(육적 시력)
영적 소경에게 주시는 것 insigt (영적 시력) 

23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의 질문 : 무엇이 보이느냐? 본질적인 질문. 매서운 질문  -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 

맹인의 대답 :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보는 것이냐, 보지 못하는 것이냐? 
다시 안수 하신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나온 내용으로 다른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과는 좀 특이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시며 맹인의 상태를 물으신 것이지요. 왜 특별히 이 맹인에게는 "두 번의 안수를 하시며 고치셨을까?"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수 하시고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니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소경의 보는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이여도 난 여전히 완전히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의 안수가 (제 2 의 은혜)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자의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무와 같은 물질, 대상으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람을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나를 위하는 자인가? 적인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적으로 사물로서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것 - 유익으로 보는 것, 나 자신 마저도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주님께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난 목사이지만 내가 주님께 필요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언제나 자신이 없다. 

주님이 내게 필요한 분이시다. 

주님이 내게 필요해서 난 주님을 의지하고

이 교회가 내 신앙과 영적 여정에 필요해서 주님은 내게 교회의 사역자로 부르셨고 

성도님들이 내게 필요해서 여러분들과 같은 귀한 성도님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는 꼭 내가 아니어도, 주님께는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아니면 돌맹이 하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지만 나의 구원에, 나의 성숙에, 나의 신앙에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값어치 없는 연약한 나를, 연약한 우리를 자녀라고,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생업이 같은 동역자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하시니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쩄든, 학식이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이 형상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진정 사람으로 보는가? 

우상은 다름아닌 image를 만들지 말라.
그것이 사람이든, 형상이든 심지어 하나님이든 그것의 이미지에 갇혀서 바라보지 말라.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
죄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녹아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그 사람의 모습을 밝히 보는 것 - 

성경 한 번 안 읽고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진 면목을 우리는 모르고 산다. 마치 나무처럼, 사물처럼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데가볼리에서 4,000명을 먹이심(8:1-10)

마가복음 8:1-30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6:31-7:37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의 주제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마가는 (6:52)과(8:14-21)에서 두 번에 걸쳐서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한 사건은 유대인의 지역에게 일어났고, 다른 사건은 이방인의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7:14-18).
그러나 이 사건을 본 제자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 같았습니다.
마가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주님께서 귀머거리(벙어리)와 소경을 고쳐 주신 일을 삽입하였습니다(7:31-36, 8:22-26).
이것은 주님께서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에게 주님을 계시해 줄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밝히 계시해 주셨습니다(8:27-30).

*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1-3)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주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이적은 데가볼리 근처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사역하는 동안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며, 이 사역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일이 지나게 되자 무리들은 더 이상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 그들 중에는 벌써 음식이 떨어져서 매우 허기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먼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리들의 사정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2-3). 5병2어의 이적(6:34) 때에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헤메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의 목자와 지도자가 되어 진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도 주님은 말씀을 듣다가 굶주린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5병이어의 사건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이번 사건은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4-5)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5)..."

제자들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일 떡을 광야에서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4),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떡 7개"가 남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5). 주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가지고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몇 개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도 수천 명이 먹고 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부족해도 주님이 원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힘을 받으시고 수많은 이웃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십니다.

* 풍성한 식사(6-10)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6).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8),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9),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10)."

주님은 무리들을 땅에 앉게 하신 후에 제자들이 가진 떡을 앞에 놓고 축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축사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명령대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6). 그리고 주님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 것이 보시고 그것도 축사하시고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7). 이제 모든 무리들은 모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일곱 광주리에 채울 만큼 떡이 남아 있었습니다(8). 5병이어 때에 무리들이 남긴 열 두 광주리는 "작은 바구니"(코피노오이)였으나, 지금 무리들을 먹고남은 일곱 광주리는 "사람을 운반할 수 있는 큰 광주리"(스피리다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남은 음식이 5병이어 사건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음식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들만 약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후에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무리들을 보낸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호수 서쪽) 디베랴 근처의 달마누다(또는 마가단; 마 15:39) 지방으로 가셨습니다(9-10).

*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신 오병이어 사건과 같이 이방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도큰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중에도 여러 대에 걸쳐서 주님을 믿은 사람도 있고, 당대에 혼자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나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죄인이었을 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외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만 합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사와 감격을 잃고, 외식과 형식의 중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우리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2. 주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3. 주님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하신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주님께서 영육간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가?

2. 우리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 드려야 할 떡과 물고기는 무엇인가?

3. 왜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이 큰 범죄인지 말해보자.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막 8:11-13)



묵상 내용



*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함(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1)..."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게 되자 또 다시 외식 적인 바리새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판정했으며, 주님이 하는 일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주님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11). "표적"(세메이온: sign)은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그 행동의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표시"(token)를 의미합니다. 구약을 보면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여러 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도 여러 가지 예언과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바로 이런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그 동안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더 많은 '이적'(두나미스; miracle)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세메이온; sign)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이상 표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이 이단이며 악마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표적을 요구한 것은 주님을 반대할 근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2)..."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아시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시며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은 그 동안 어떤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보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끝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완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12).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도 주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표적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더 이상 다른 표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표적을 구하지 말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께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질병을 통해서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에게 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환경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우리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 저희를 떠나가신 예수님(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13)."

마침내 주님은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신앙으로 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편으로 건너 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을 만한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의로 주님의 행하시는 표적에 눈을 감았으며, 끝없이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은혜의 기회를 거두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다.
2. 이미 주신 은혜 외에 또 다른 표적을 찾는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이다.
3. 은혜를 받으면서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기회를 잃게 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가?

2. 왜 불신앙의 사람에게 표적을 보여 주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는지 말해보자.

3. 주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어떻게 대해주시는가?


바리새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막 8:14-21)



묵상 내용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4-15)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14).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15)..."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떡 한 개밖에는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4).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안디바)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15). 누룩은 볼 수 없지만 매우 적은 양으로 많은 반죽을 발효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 누룩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침투력과 영향력을 나타냅니다(천국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으니...). 그러나 누룩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와 부패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누룩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이단으로 몰았으며,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으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헤롯은 스스로 율법을 범하고(동생의 아내를 취함)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 요한이 의인인 줄 알면서도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헤롯은 둘 다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헤롯은 정치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교훈과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모두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였습니다.

* 너희가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16-18(상))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16),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18(상))"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왜 미리 떡을 준비하지 못했느냐?" 고 책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16).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교훈을 듣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17). 그들은 마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하며 수많은 이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도 영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의 책망을 받기에 마땅했습니다.

*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18(하)-21)
"또 기억지 못하느냐?(18) 내가 또 다섯 개를 오 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19).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20).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

주님은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주님이 말하는 것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조각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열두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19). 주님은 두 번째로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떡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일곱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20).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초점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기시는 주님께서 떡 문제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주님께서 떡이 없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질문을 하신 후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21). 이러한 기록은 주님을 가깝게 모신 제자들도 영적인 면에서 헤롯과 바리새인, 그리고 다른 무리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5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고친 일을 기록하였으며, 4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귀와 눈을 열어 주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주는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교훈을 조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진전한 경건과 사랑을 버리고 형식과 외식만을 좆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많은 말씀과 은혜에 대해 무감각해진 영적인 불감증 환자는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적 불감증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수많은 은혜를 체험하고도 의식주 문제에 매여 서로 원망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우리의 눈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우리는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3. 주님은 우리의 닫혀진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 주시는 분이다.

적용을 위한질문
1.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형식과 외식을 좆고 있지는 않는가?

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있는가?

3. 이 시간 우리 눈과 귀를 열어 주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자.


소경의 눈을 고치심(막 8:22-26)



묵상 내용



마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 앞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제자들이 주님을 바로 보게 될 것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된 이적(5병2어, 7병2어)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마치 소경과도 같았습니다. 주님은 소경을 고쳐주시듯이 제자들의 눈을 떠서 주님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고치신 이적은 다른 이적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다른 이적들은 주님께서 치유를 선고하는 순간 즉시 치유를 받았지만, 본문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병자를 놓고 두 번이나 안수한 것도 다른 이적과는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1. 소경을 데리고 옴(22-23(상))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22),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밖으로 데리고나가사..."(23(상))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벳세다 율리아스로 갔습니다. 이 곳은 헤롯 빌립이 다스리던 구역으로 규모 면에서는 도시였지만, 행정적으로는 마을이나 부락의 조직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벳세다에 들어가셨을 때에 몇 사람이 소경 하나를 주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해서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22). 주님은 그 요청을 받으신 후에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이와 같이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적을 베푸신 일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5:35-43, 7:31-37, 8:22-26 참조). 이 경우 주님께서 비공개적으로 병자를 치료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경과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병자들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병자가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본문에서 주님이 소경을 마을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일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을 지 모릅니다.

2) 공개적인 이적으로 인해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주님은 종종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그 사실을 알리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에 찾아오기 때문에 복음 전도 사역이 지장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소경을 고쳐 주신 후에 마을로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사실이 공개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소경을 고쳐 주심(23(하)-25)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23(하)),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24),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25)."

주님은 마을 밖으로 소경을 데려가신 후에 소경의 눈에 침을 뱉었으며 계속해서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23). 소경은 이 말을 듣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하여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력은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습니다(24). 이 사람이 나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나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의 눈이 아직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두 번째로 손을 그 사람의 눈에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안수를 받은 소경의 눈은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25).


3.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26)."

주님은 그 사람을 고치신 후에 그에게 마을(벳세다)로 들어가지 말고 그의 집으로 바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26). 그는 벳세다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른 마을에서 병을 고침을 받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 사실이 마을에 알려져서 전도 사역이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림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시대가 되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마가는 소경을 고친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였으며, 주님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던 것입니다.

2.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심.
주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주님께 나아왔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자기의 질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를 고쳐 주십니다. 영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은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한 영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적인 믿음의 안약을 주실 것이며, 단련된 금(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이 사건은 영적인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을 예고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5병 2어와 같은 기적을 보고도 주님이 메시아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소경을 고쳐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실 것임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소경을 고친 사건이 주님의 메시아성을 증거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 아닌지 돌이켜 보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3. 지금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병이 낫기를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하자.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마가복음 1-8장에 나타난 이적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는 종종 예수님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가복음에서 10번 예수님을 "선생"으로 언급하였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서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매우 적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는 (막 1:14-8:30)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10장)에서 예수님의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보면 마가가 얼마나 예수님의 이적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1장 21, 30, 32-34, 39, 40-45절
* 2장 1-12절
* 3장 1-6, 10-11절
* 4장 35-41절
* 5장 1-13절
* 6장 5, 30-44, 45-52, 53-56절
* 7장 24-30, 31-37절
* 8장 1-10, 22-26절
* 9장 14-29절
* 10장 46-52절

그러면 왜 마가는 이적들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이적들이 예수님이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 복음서에 기록된 4가지 이적들 *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들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이사야적인 이적들
"이사야적인 이적"이란 이름은 (마 11:2-6)과 (눅 7:18-23)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곳을 보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메시야)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주님은 "내가 메시아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대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마 11: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때에(메시야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6, 42:7, 61:1)

유대인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이사야가 언급했던 이러한 "표적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눈 먼 자와 귀머거리, 그리고 벙어리와 다리 저는 병자를 고쳐 주신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세히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자연에 대한 이적들
마가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4:35-41), 물위를 걸으셨으며(6:45-52), 무리들을 먹이신 이적들(6:30-44, 8:1-10)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적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바다와 심연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해양 민족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통해서 화물을 실어왔습니다. (계 21:1)에 보면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말한 후에 "바다가 다시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 65:7)은 하나님을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을 잠재우시는 분"이라고 찬양하였으며, (시 89:9)은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십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잠재우시고, 물위를 걸으셨을 때 마가는 주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시 107:23-32). 마가복음은 무리를 먹이신 두 개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30-44)에 보면 5천명을 먹이신 일이 나오며, (막 8:1-10)에는 4천명을 먹이신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그의 백성을 먹이셨듯이(출 16장, 시 78:23-29) 주님도 광야에서 그의 "새로운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께서 바로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귀신들에 대한 이적 기사
마가에는 귀신들을 쫓아낸 이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구약의 예언에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 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귀신의 세력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는 사탄과 귀신들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질병은 인간의 죄와 사탄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주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귀신의 세력들을 내어쫓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3:27).


4. 죽음에 대한 이적들
또한 마가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2-43). 요한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요 11장). 그리고 누가는 주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일을 기록했습니다(7:11-17). 우리는 구약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수넴 지방에서 죽었던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17-24, 왕하 4:21-37)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생명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주님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신 주님의 이적들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게 될 기쁨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라"(사 25:8)"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은 주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스스로 부활 하심으로 이것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장차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내실 장본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메시아의 시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
2.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만물을 주관하는 창조자임을 증거한 사건이었다.
3.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사단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4.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며 마지막에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 주실 분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중심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두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1-8장)까지의 내용을 결론 짓는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 동안 주님은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습니다(1:27, 2:7, 6:2). 주님은 죄인들과 교제하였으며 전통적인 경건 의식을 무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정통성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2;15-20, 3:22-30, 7:1-5).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4:41, 6:51). 바로 이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27-28)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27)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8)."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이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 지역 전체를 적시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물로 인해 이 지역은 매우 땅이 비옥했고 경치 또한 장관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에게 준 도시였습니다.헤롯은 이에 감사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의 이름으로 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 곳을 주전 3년에 자기 아들인 빌립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헤롯의 아들 빌립은 이곳을 개발하고, 이 곳에 자기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를 로마 황제의 이름인 시이저, 즉 가이사라는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중해 해안에는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 빌립은 가이사랴 항구 도시와 이 도시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도시를 자기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빌립의 영토에 있는 가이사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도시는 황제 숭배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도시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의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길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습니다(27).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당시 주님에 대한 백성들의 견해는 세가지였습니다.

1) 일부 사람들(헤롯 같은)은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 계속해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 주님은 세례요한이 자기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온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는 메시아 시대에 오면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님이 바로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28). 이스라엘에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일부는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는 이적을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세 가지 대답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대답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결국 그 대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그때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이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베드로가 앞에 나서서 그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12제자의 대표자로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29).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라는 말 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시인한 고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와 같은 특별한 직분을 수여할 때에는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사단을 멸하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4-16, 사 55:3-50, 렘 23:5 등).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 자신을 알리시기를 유보하심(30)
"이에 자기의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30)...."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주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깨달음을 하나님(성령)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시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직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폭력을 써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여 참된 메시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나타낼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숨기셨던 것입니다(30).


* 마가복음의 중요한 두 가지 주제
마가복음에는 마가가 묻고 대답하려고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신앙 고백)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제자의도)"

마가는 전반부(1-8장)에서 첫 번째 주제를 다루었으며, 후반부(9-16장)에서 두 번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제의 중심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질문을 결론 짓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주제로 출발하는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성인, 훌륭한 교사, 정치가, 해방 자 등). 이러한 대답이 왜 옳지 않은 지에 대해서 말해보자.

2. 우리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3. 우리는 누가 진정한 주님(Lord)이라고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세상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막 8:31-33)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30).
그러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신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아 비밀"(the messianic secre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였다고 하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파된 것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셨을 때였습니다(행 2장).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때까지 전파하지 않고 유보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일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일을 계시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 유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해 주신 것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미리 작정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31)

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주님은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1)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G. Vermes) 주님 당시 "인자"라는 말은 "나"라는 말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내가"를 낮추어서 부를 때에 "제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자들은 주님 당시에 "인자"라고 말은 능욕이나 위험, 또는 죽음과 관계되어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M. Black, An Aramaic Approach to the Gospel and Acts, Oxford 1967).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주님은 자기를 겸손하게 표현하였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데에 적합한 표현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했다.
주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된 메시아 관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세계적인 정부를 세울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러한 메시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메시아"라는 말대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3)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함.
주님이 자신을 인자로 부른 것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인자"라는 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와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에 예언된 "인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을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영광은 능욕과 죽음을 지나서 도달하게 될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 죽음과 부활 예고의 의미(32)

주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에 죽을 것이며,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8:1, 9:31, 10:33).주님이 이 사실을 미리 예고해 주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메시아의 길(수난, 부활)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8:31).
2) 누가 더 큰 자인지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섬기러 온 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9:32-).
3)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 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메시아를 따르는 일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10:35-37,41).


* 베드로의 만류와 주님의 책망(32-33)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간하매(3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하시고(33)..."

주님은 지금까지 진리를 전하실 때에 비유를 통해서 완곡하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제자들)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무력한 메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는 로마를 치고 이 세상에 세계적인 신정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로마인에 의해 처형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32). 그러자 주님은 걸어가시다가 몸을 뒤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면서 엄히 책망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도다"(33).

주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부인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유혹하기 위해 던진 말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유혹하는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생각해 주는 척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 계획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 제자의 도(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도가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의 도에 대해서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자기 명예나 영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4).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가 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순교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사형 당할 각오가 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 잃으면 찾으리라(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생명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발각되어 체포되면 고문을 받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그들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황제 만세를 외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 주님을 포기하고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 세상을 떠났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영생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들의 피를 통해서 로마를 점령하셨습니다.
로마는 공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당할 운명(36-3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3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

주님은 온 세상을 얻고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37).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한 성도들은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잠시 생명을 연장하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38).

당시 로마 당국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만이 주(Lord)라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할 것을 볼 사람들(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9:1).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이 바로 뒤에 나오는 변화 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세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부활 하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여기에서 세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에 제자들은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예언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광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장차 주님의 재림이 분명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 겪게될 운명을 미리 예고해 주심으로 성도들에게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명예,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8: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