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예식(2022년)(2023년)(2024년)



2025년 1월 5일 신년주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το ποτηριον της ευλογιας ο ευλογου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αι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τον αρτον ον κλω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σω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 호 율로구멘 우키 코이노니아 에스틴 투 하이마토스 투 크리스투 톤 아르톤 혼 클로멘 오키 코이노니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스틴.

* 잔(4221)  πο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21

1. 잔.   2. 마 23:25. 3. 고난
발음 [ pŏtēriŏn ]


* 축복(2129) εὐλογ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εὐλογέω 스트롱번호 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눅 24:50
발음 [ ĕulŏgĕō ]


* 몸(4983)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σώζώ 스트롱번호 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 그리스도(5547)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 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 1:1
발음 [ Christŏs ]
어원 / 5548에서 유래

χρίω 스트롱번호 5548

1. 기름 붓다.  2. 기름 바르다. 3. 눅 4:18
발음 [ chriō ]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은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성찬예식 때 사용한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024. 12. 01 성찬예식주일

2024년을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하여 매월  첫주일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 기독교도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허벅지 살을 베었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파피 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참으 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습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 주셨으니 너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떡에 대한 두 개의 본문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The blood will be a sign for you on the houses where you are; and when I see the blood, I will pass over you. No destructive plague will touch you when I strike Egypt.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히브리 민족은 오직 피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만났던 두 관원들 한 사람은 술맡은 관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으나 떡 맡은 관원은 사형을 당합니다.
술과 떡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그 떡과 그 잔을 분배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떤 술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나누신 후에 십자가 형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의 피와 떡이 없이는 우리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피(담. dâm) דָּם 스트롱번호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דָּמָם 스트롱번호 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참고 정보

연관 단어
☞ 피(창 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피는 생명이다(창 9:4).
 따라서 피흘림은 생명의 허비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죽음의 천사가 다시 죽음의 피가 발려 있는 집을 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속의 피이다.
즉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가죽을 만들기위해 잡은 짐승의 피로 예표되었듯이(창 3:21), 장차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건질 수 있음을 뚜렷이 계시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다(요 6:54. 엡 1:7. 벧전 1:1)

떡(레헴) לְחֶם 스트롱번호 3900

1. 음식.  2. 연회. 3. 떡.
발음 [ lechem ]
어원 /  남[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3898. 먹다. 싸우다. (라함)  לָחַם 스트롱번호 3898

1. 먹다.  2. 싸우다. 3. 니팔형 נִלְחַם
발음 [ lâcham ]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떡굽는자  אָפָה 스트롱번호 644

1. 요리하다. 2. 분사형 אֹפֶה로 쓰일 경우 ‘빵굽는 사람’의 뜻을 가짐.  3. 완성되다
발음 [ ’âphâh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바로의 탄일
- 이날은 하나님께서 꿈 해석의 성취를 위한 날로 이미 예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거대한 잔치와 함께 각종 죄수들이 왕의 특별사면을 받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例)는 신약 시대 헤롯의 생일에 침례 요한이 처형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마 14:6-11).


지오바니 파피니 (희생적 사랑)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기독교도로서 교회를 몹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또 한번 허벅지 살을 베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들 파피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피맺힌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 에미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으니, 아들아, 너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이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지오바니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
이탈리아의 소설가 및 평론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수다한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1903-1907), <보체>(1908-1914), <라첼바>(1913-1915)의 여러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 및 철학자)의 프래그머티즘이나 베르그송(프랑스의 철학자, 1859-1941)의 직관주의를 도입하여 금세기 전반(前半)에 있어서 문예사상계의 주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양의 철학자>(1906)나 <24의 뇌수(腦髓)>(1912) 등은 이 시기의 주저이다.

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1912)를 발표하고 난 후부터는 이상주의로 기울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상계의 퇴폐상을 목도하고는 거꾸로 유신론으로 쏠려, 청년시절에 그렇게 매도(罵倒)하던 (神)을 인정하고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전(傳)>(1921), <성 아우구스티누스>(1930)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감각 마비라는 기병(奇病)에 걸렸으면서도 두뇌만은 명석의 도를 더하여 <불행한 자의 행복>을 구술(口述)로 발표하였다.







06-02-2024
3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신약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그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왜 그 작은 떡을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주셨을까?
과연 작은 떡덩어리가 그렇게 많은 군중들을 위하여 배부르도록 먹을만큼 나눠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그 떡은 입으로 들어가서 굶주린 배를 배부르게 하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많은 무리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이 곧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나눠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오늘 성찬의 자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생명의 양식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음료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까?
살과 피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살에 못을 박히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춤을 추며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 고운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서 백성들에게 그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왜 금송아지를 불에 태웠는가?
이 과정은 순금으로 제련하는 것으로 순금가루를 물에 풀었을 때 그 물이 금색이 아니라 붉은색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장차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죄 사함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맛ㄹ 물이 없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잔은 용서를
떡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2024년 상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함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떡을 함께 먹고 마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령한 에너지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6:58b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만찬에 대하여 (I)

마태복음 26장 26-28절 26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2-25, 눅22:14-20, 요13:21-30)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르게 성만찬을 기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만찬의 "유례"는 출애굽기 12장 첫 유월절/무교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2장 8-11절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시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마26:19-20)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신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실 것과 피를 흘려주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유월절 양은 먼 훗날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셨던 떡과 포도주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것을 미리 증거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먹는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니어야 하며, 마시는 포도주 또한 육신의 포도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떡"에 관련된 말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5-12절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셨을 때 그제야 제자들은 육신의 떡이 아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예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인지 우리는 꼭 그 뜻을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3-4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위의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리신 상태였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라는 것을 마귀는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떡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아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한 놀라운 기적입니다(요6:9-13).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는 이 큰 기적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25-27절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위의 말씀과 같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육신의 떡을 위해 찾는 것임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양식에는 "썩는 육신의 양식"과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있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이 썩어질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적을 통해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요6:35)을 먹고자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그것에 만족되지 못했을 때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68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을 먹으라 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어처구니 없게도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자 중 여럿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떡(양식)을 먹여주실 때는 큰 무리가 따랐지만, 정작 영생하는 예수님의 살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 할 때는 다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위해 오신 분이지 우리의 육신의 것 때문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눅12:13-14).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믿음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때문에, 그 말씀 먹기를 사모하여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을 때, 이는 육신의 떡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누룩이 섞이지 않는(출12:15)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7-8절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예수님의 말씀, 벧전2:1-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을 때에는 자신의 생각은 없어야 합니다(고후10:5). 예수님께서 자신의 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여 유월절 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것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의 생각과 지혜, 세상의 이론적인 것들을 버리고, 순전한 어린 아이와 같이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아멘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덧붙여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또한 성만찬 때에만 행할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날마다 행해야 할 일입니다.

성만찬에 대하여 (II)

"포도주(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피로 비유로 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는 우리로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시는 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유례가 되는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에서도 "피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넘어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피에 죄사할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죄인이었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피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양의 피로 대신케 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출애굽기 24장 8절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서 9장 18-22절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위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흘려주신 피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피를 우리의 문설주에 발라야 하고, 다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자는 살 것이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가 죄를 속함 같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죄를 속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는 곧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행전 10장 43절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우리가 예수의 피가 예수의 이름임을 알게 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는 것과 예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기 위해, 예수의 피를 마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을 위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2:4).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운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싸움입니다(눅9:23-24, 눅14:25-35, 빌3:7-8).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3:17)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장 7-8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문설주에 피를 바름과 같이 우리의 전면에 예수의 이름을 내세울 때에, 그 이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요일2:12, 롬4:6-8), 그 예수의 이름 때문에 심판을 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겔20:8-9,13-14,21-22, 계14:1, 계20:4-6). 혹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삶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셨고, 앞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41절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후에 우리가 당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겠다고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피를 받아 마시는 자(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로마서 8장 17-18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결론의 글.

성만찬을 지키고자 할 때에 의식과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만찬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 때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으로 깨달음 받고 그것을 기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만찬에 대하여 성경으로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도 쉽게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서 아래와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34)절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위의 말씀은 성만찬의 예식이 어떻게 빨리 변질되었는가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여주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단지 성만찬의 의식과 형식만이 남았을 뿐이고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모임은 유익이 되는 모임이 아니라 해로운 모임이라고 규정하셨고, 이처럼 유익이 되지 못하는 모임은 결국 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1:12-1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도 성만찬에는 참석하였지만 오히려 사단이 들어 곧 나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요13:21-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구약의 율법을 따라 대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지키려고 하였지만, 정작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고, 누룩 섞이지 않고 순전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만찬의 형식과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 금은보다 승하게 여기며(시119:69-70),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약4:10, 골3:17)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서 성만찬은 반드시 대대로 기념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아멘!




어머니 뱃속에서 겪은 역경…“자라면서 정신 건강에 영향 미친다”


산모가 역경을 겪으면, 그 영향이 태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어머니가 역경을 겪으면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함께 역경을 겪은 태아는 태어난 뒤 인지장애나 우울증 등을 겪을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임상과학연구소(SICS)는 어머니가 임신 기간 중 생활이나 환경, 신체적 어려움을 겪으면 아이에게 장기적으로 인지와 정신 건강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최근 밝혔다.
아이들의 뇌가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 속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멘탈 헬스’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태아가 겪는 역경(ELA)’을 정량화하기 위해 항목별 ELA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채점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임신 중 산모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가족 구조와 재정 상황 등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팀은 아이들의 뇌 발달 속도를 모델링하기 위해 4.5세, 6세, 7.5세 아이들 549명을 대상으로 MRI 뇌 스캔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정신 건강장애가 아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 궤적을 추적하는 연구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면 그 체험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11-05-2023
11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성찬예식은 언약의 완성을 위한 예식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특징을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신약의 언약의 특징은 믿음 언약이라고 합니다.

행위 언약에는 노아 언약(무지개), 아브라함 언약(할례), 모세 언약(십계명), 다윗 언약(영원한 왕위 계승)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행위 언약은 완전히 실패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로 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언약의 완성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내려 놓으신 사건입니다.
자기 몸을 내려놓기 전에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려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받는 떡과 잔은 언약의 완성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죄인이 언약의 완성된 예식에 따라 그 떡과 그 잔을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11월 한 달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몸길이는 대체로 50mm-60mm로 황강달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주로 물이 맑은 하천 중류 기수구역이나 2급수 또는 물풀이 많은 곳에서 살며 새우나 작은 수서생물,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국내에선 강원도경상북도의 일부 및 제천시의림지 등에 분포하며, 북한 중국 일본 등에도 존재한다.
먹을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식용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희박하다.

대부분의 다른 어류들과는 다르게 가시고기는 알을 보살핀다.
수컷이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수초로 둥지를 만들어 놓으면 암컷이 와서 교미한 후 알을 낳고 죽거나 떠나 버린다.
그리고 수컷은 알을 보호하다가 새끼가 부화하면 죽고, 태어난 새끼들은 죽은 수컷의 살을 뜯어먹는다.
수컷은 자기 몸까지도 새끼의 먹이로 내준다.
이 습성은 알을 낳은 이후로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 여타 어류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특이한 습성이며, 부성애를 강조할 때마다 인용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09-03-2023
9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Then he took the cup, gave thanks and offered it to them, saying, "Drink from it, all of you.

장로교회의 예전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교회 헌법으로 이렇게 규정하였지만 성경은 이런 규정보다 더 폭넓은 성찬의 참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예식의 자리에 가룟 유다가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유다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도 성찬의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All of you(너희 모두 다)

이것을 다(아우투 판테스) / αυτου παντες

846.
αὐτός, ἡ, ὁ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 12:36 /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 예수
발음 / 아우토스[ autŏs ]
어원 / [재귀] αὖ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로) 그(마 1:20).
신약 성경 / 5601회 사용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1. 매
2. 모든 종류의
3. 어떤 것이든지다
발음 / 파스[ pas ]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 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떡과 잔은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같은 죄인도 떡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문제는 그 떡과 잔이 정말 나의 죄를 용서하는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 넘길 흑심을 품은 도둑같은 사람들이 먹고 마신 후에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참된 성찬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08-06-2023
8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1. 생각나는 것,  2. 기념,  3. 기억
발음 / 아남네시스[ anamnēsis ]
어원 / 3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눅 22:19, 고전 11:24, 25), 생각하게 하는 것(히 10:3).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63. 아나밈네스코(ἀναμιμνήσκω)
 
1. ~에게 ~을 기억나게 하다,  2. 기억하다
발음 / 아나밈네스코[ anamimnēskō ]
어원 / 미래 ἀναμνήσω,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μνήσθην, 303과 34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되다(막 14:72), 생각나다(막 11:21, 고전 4:17), 생각하다(고후 7:15, 히 10:32), 생각 나게 하다(고전 4:17).
신약 성경 / 6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의 젖과 어린 기름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가복음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축복하시고(율로게오) - 찬양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축원한다.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 εὐχαριστέω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15:36, 막8:6, 행27:35), 감사 기도하다(마26:27, 눅22:19), 감사하다(눅 18:11, 요11:41, 고전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07-02-2023
7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개역 개정 호세아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알지 못하도다 / 로 야드(לֹא יָדְעָ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
빵은 생명을 상징

북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호세아(여호와는 구원)는 무너지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을 바알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주신 것인지도 알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성찬예식의 기쁨과 생명을 알지 못하고 참여하는 신앙의 형식만 남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도다" "로 야드" 라고 합니다.
'로'는 부정 접두사
'야드'는 '알다'는 동사
머리로 알고 마음과 감정으로 느끼는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생명과 기쁨이 흘러다니는 것을 체험해서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스라엘이 연애하는 자들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5절) 이 품목들은 백성들의 생필품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상이나 이방 국가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이다(신 7:13; 11:14).
이스라엘의 죄악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었다.
이처럼 축복의 근원자에 대한 무지는 결국 감사치 않는 죄와 은혜를 남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J.Given).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

-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풍성은 상업을 통하여 은과 금을 증대시켰다.
이 은과 금 역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축복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알을 위해 죄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바알을 위하여 쓴'(아스랍바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제출되었다.

1. 바알의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J.Phillips).
그러나 이것은 전치사 '레'(...을 위하여)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2. 바알에게 바쳤다는 견해(Gesenius, Leeser).

3. 바알을 꾸미거나 입히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사 30:22, Harper).

4. 바알을 경배하는 일에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견해(Given, Keil).

이 가운데 3. 4의 견해가 가장 적합하게 보인다.
즉 이스라엘은 은과 금을 신상을 장식하거나(렘 10:4), 우상을 숭배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한 것이다(13절, 겔 16:18,19).
대부분의 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지지한다(prepared for Baal, KJV;used for Baal, NIV, RSV;used in worshiping Baal, LB).
한편 본절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가나안 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모든 거짓 신들을 대표하고 있다(L.Wood, Keil).
사실 예후는 일찍이 바알을 따르는 제사장들과 그 우상들을 전멸시켰었다(왕하 10:19-28).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지속되었다(왕하 10:29).

더하여 준 것이어늘

- 더하여 준 것이라는 동사 '다가'는 '늘리다', '증가시키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을 나타내준다.






06-04-2023
6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Because there is one loaf,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for we all partake of the one loaf.

참에한다는 헬라 단어는 "코이노이아"라고 합니다.
'코이노이아'란 "교제" 라는 뜻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먼저 성도들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제란 내가 보여주기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보여주기 싫은 것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이혼한 교인이 이혼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때 주위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으로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매월 첫번째 주일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면서 아직도 성도의 교제가 진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축복하는 2127. 축복하는(유로게오. 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발음 / 유로게오[ ĕulŏgĕō ]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 (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축복의 2129. 축복의(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152 4952*,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 골 1:18).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클리브랜드 인디언스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은 한국의 추신수 선수가 한 때 있었던 팀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에 마이크 아빌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아드리아나마야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항상 아빠의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딸 중 하나인 아드리아나가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아빌스는 그 때부터 어린 딸 생각에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아빌스는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아빌스가 너무 부진하자 구단주와 면담을 하였는데, 이 때 아빌스는 자신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아빌스의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은 아빌스와 그의 딸 아드리아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2015년 5월 27일 아빌스가 소속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경기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 모든 관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삭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소속의 구단 관계자들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삭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백혈병에 걸려서 치료 중에 모든 머리가 다 빠진 아드리아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삭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응원하는 의미로 아드리아나를 위하는 팀이라는 뜻의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를 티셔츠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원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고, 8월에는 경기 전에 아빠와 함께 모든 관중들 앞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구단 관계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팀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하나 된 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를 또한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영적인 진리를 믿는 성도들이 야구 선수들과 구단의 관계자들보다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니까?




    04-02-2023
    4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개역 개정)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니라.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물이 저온의 물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

    죄가 없다는 사람과
    죄가 많다는 사람 중에 떡과 잔의 효과는 죄가 많다는 사람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음펨바 효과라는 현상 자체는 상당히 옛날부터 알려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상을 "어떤 극단적인 성질일수록 그 상반되는 성질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티페리스타시스(antiperistasis)라는 법칙의 예로 보았다.

    예를 들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더 빨리 차분해지는 것.
    근대에 들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르네 데카르트 등이 이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역시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 이론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역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설명이지만, 이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두자. 문헌을 접근할 때에는 항상 시대적 환경 또는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서양에서 후대에 그의 설명이 절대화된 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까이는 사례가 정말 많다.

    이렇게 잠깐잠깐 언급되다가 잊히기를 반복하던 현상을 현대 물리학의 난제로 되살려 놓은 사람이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Mpemba)[2]라는 학생이었다. 음펨바는 1963년 중학교 가정과 조리실습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덜 식은 채로 냉장고에 집어넣은 아이스크림이 식혀서 집어넣은 것보다 더 빨리 어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음펨바는 학교에 강연을 온 물리학자 데니스 오스본(Dr. Denis G. Osborne)[3]에게 이 현상에 대해 질문했는데, 교사와 친구들은 이에 대해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냐' 라면서 비웃었지만 오스본은 음펨바의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해 봤으며, 그 결과 실제로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오스본은 1969년에 이 현상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며 이 현상을 '음펨바 효과' 라 명명하고,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음펨바의 이름을 올렸다. 한편 음펨바는 졸업 이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아프리카 삼림 및 야생동물위원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2023년 수능특강 영어에 장문독해 지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1학년의 영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개역 한글)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떡과 잔을 직접 나눠주신다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찢겨지신 몸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고난주간 한 주일 동안 나를 통하여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결단의 삶을 함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 49:11, 신 32:14)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3. 하이마(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 [ haima ]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02-05-2023
    2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 축복하시고(2127) 유로게오(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사례하시고(2168)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의 자리를 향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사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떡과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제자들은 떡과 잔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떡을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몸을 던져 로마 권력과 싸워서 피를 흘려 반드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거리감과 더구나 영적인 거리감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 머리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과 감격의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 손에 있는 떡과 잔에 하늘로부터 주의 영이 임하여 거룩한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다함께 떡을 먹습니다.
    이어서 다함께 잔을 들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생명의 영이 저희들에게 임하여 주셔서
    떡과 잔이 저희들의 몸 안에 들어갈 때
    부활의 영이 함께 임하여
    새 생명의 삶을
    능력의 삶을
    회복하는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1-01-2023
    1월 성찬예식 / 이호승목사 

    누가복음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기념하라
    - 킹 제임스 성경 / 기억하라

    364.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Noun 생각나는 것, 기념, 기억 / remembrance

    기념(紀念)하다 : (사람이나 집단이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다.

    벼리기(
    ), 생각 념(염)()
    1. 뒤에 어떤 일을 상기(想起)할 근거(根據)로 삼음. 또는 그 물건(物件)
    2. 지난 일을 상기(想起)하여 기억(記憶)을 새롭게 함.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히브리서 10:3(생각하게 하는 것)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

      "기념하라"는 교훈은 잊지 않고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월 첫 주일 성찬예식에 참여하므로 1년 12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04-2022
      12월 성찬예식

      요한복음 6:53-55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예식은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른 후에 장자의 죽음이란 재앙에서 자유를 얻은 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은 예수님의 몸이 되는 떡과 예수님의 피가 되는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022년 마지막 성찬주일을 지키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이 온전히 회복되어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 재앙에서 모두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과 잔은 코비드와 독감의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실 주님의 몸과 피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06-2022
      11월 성찬예식


      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세계성찬주일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피지섬의 교회에서 시작해 24시간 동안 일출 시각을 기준으로 전 인류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마치 파도타기처럼 성찬상이 세계를 도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이며, 수십 억명의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성찬주일의 시작은 아픔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평화의 역사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인류가 슬픔과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례 없는 대공황이 몰아닥쳤고,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손잡고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소수 교회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평화와 풍요를 염원하며 세계성찬주일을 제안했습니다.
      1940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킬 것을 제안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이어지고 냉전이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는 이 시대, 다시금 성찬상의 세계 일주를 통한 평화의 실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10-04-2022
      10월 성찬예식

      초대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는 교제의 의미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브리드교회(Hybrid Church)
      - hy·brid  / 1. 잡종,  2. 혼성체



      2022. 07. 03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내 몸(소마) 4983 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소마(sōma)
      어원 / 4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 15:37, 38, 40), 종(계 18:13)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소조(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소조(sōzō)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피(하이마) αἷμα. 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haima)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cf. 육체(사르크스).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4563. 사로오오(σαρόω)

      1. 쓰다,  2. 개끗하게 쓰다,  3. 마태 12:44

      발음 / 사로오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오장육부(五臟六腑)란 한의학에서 인간의 내장 전체를 통틀어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가리킨다.


      오장에 심포(心包)를 더해 '육장'이라고도 한다.

      육부」는 대장, 소장, 위장, 담낭, 방광, 삼초를 가리킨다

      2022. 06. 05 /

      성찬예식에 대한 믿음은 형식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떡과 잔을 받아 먹을 때에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찬,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표징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백성이고, 새생명 얻은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있지만,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견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 떡과 그 잔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또한 영적인 양식


      성찬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아, 견고하고도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들을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성경 공부할 때 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시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성례”

      말씀은 우리가 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성찬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에 우리 지성과 마음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고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Institution 14. 8. p.345)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단순히 우리 지식만 동원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의 손과 눈과 미각만 동원된다면 우리에게 은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추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면, 그 말씀과 성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 안토니오의 결단 / 수도사의 아버지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한 교훈과  "항상 기도하라" 고 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2. 05. 01 / 어린이주일

      2022냔 어린이주일을 맞아 파트리스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4명의 어린이들을 소개합니다.
      이현호, 은미 테일러, 유미 테일러, 김태오
      세상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공동체에 속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20불 지폐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돈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돈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을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 어린이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린 아이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그 공동체가 분명히 미세한 파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수부대 훈련병들이 공중 낙하 훈련을 위해 처음으로 타워에 올라갈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의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타워의 바닥은 10미터 그 위에 훈련병이 서게 되면 바로 그 높이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을 무려 300회 이상 반복하면 아무리 높은 고공에서 뛰어내릴지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11미터의 높이와 1000미터 이상의 높이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라 이미 최고의 높이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십일조 훈련을 잘 하면 반드시 성인이 되어서도 물질 관리를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것
      둘째는 깨닫는 것
      셋째는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자기 중심적" 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어른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빵은 왜 몸이고 포도주는 피인가…동전 양면같은 예수의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 18절)

      40)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걸까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 인물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가룟 유다 뿐만이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한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복음 26장 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 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시라고 했을까.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 ‘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 ‘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 뿌리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어느 신학도가 본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브랜트 피트리(Brant Pitre) 교수의 “Jesus and the Jewish Roots of the Eucharist: Unlocking the Secrets of the Last Supper” 라는 책이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2016년 7월 에클레이시아북스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만찬이 1세기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각 단락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 신학(history of redemption theology) 내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의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요구되지만, 저자는 그런 장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매력 발산으로 허물어뜨린다.



      제1장 마지막 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LAST SUPPER)

      저자는 예수는 역사적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1세기 유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유대교 율법을 위반하는 말 곧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충격 선언 또한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들이 1세기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속에 주어졌다는 해석의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시공간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해석학적 작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2장 유대민족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나?(WHAT WERE THE JEWISH PEOPLE WAITING FOR?)

      저자는 유대 성경과 고대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대다수 “1세기 유대민족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즉 새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대했다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새 모세로 인해(신 18:15-18; 참고. 3, 4세기 랍비 베레키아[Rabbi Berekiah, Ecclesiastes])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기를 소망했다(렘 31:31-33). 이 언약의 절정은 천상의 연회이며(출 24:11), 거기서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는 천상의 식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Babylonian Talmud, Berakoth 17a).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고(미 4:1-2; 사 56:6-7 ;60:1-7; 겔 37:24-28 ;학2:6-9, 참고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 하나님은 그 곳에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장차 올 세상”)의 일부일 약속된 미래의 땅(사 65:17-18; 66:18, 20, 22)으로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사 43:18-19; 계21:5). 그리고 저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 출애굽의 사상이 광범위 하게 펴져 있었고(드다, 이집트인 / Josephus, Antiquties 20:97-98; Josephus, Antiquties 20:169-170), 예수님은 “새 출애굽의 징조인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의 신호이며(사 35:5-10, 참고. 마 11:4-6; 눅 4:18-19), 구원을 전하는 메시아 전령”임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새 출애굽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분이다(눅 9:28-31).



      3장 새 유월절(THE NEW PASSOVER)

      저자는 위의 “새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새 유월절도 함께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열쇠이며 이를 위해 유월절의 성경적 뿌리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고대 유대교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 수컷”을 취해(출 12:1-6), “제물로” 드려(출 12:6), 그 “피를 이스라엘 각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으며(출 12:7), 그 후 “어린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출 12:8-12). 유월절은 매년 ‘기념일’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출 12:24-28).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 당시 유월절의 모습은 고대 유대교 유월절의 모습과의 차이점 네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전에 의해 드려졌다(신 16:5-7, 참고. Josephus, War 6:423-27). 둘째 1세기 유월절 어린 양은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것을 현재화했다(출13:8, 참고. Mishanah, Pesahim 10:5). 넷째,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메시아 시대 도래, 구원의 시대와 연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고, 그가 자기 백성을 속량할 것이다. 즉 메시아의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Jerome, Commentary on Matthew 4 on 25:6).

      유대교의 믿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밤에 시행했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했다(마 26:17-19; 막 14:12; 눅 22:14-15). 이 식사에서 떡의 의미를 설명하고(출 12:26-27, Mishnah, Pesahim 10:5), 마지막은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대할렐[Great Hallel], 시편 118편, 마 26:30, 막 14:26) 마무리했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달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집행자 역할을 하셨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바로 새 출애굽의 새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오늘이 메시아의 유월절이며 내가 새 제물”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의 완성은 첫 출애굽의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새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이다.



      4장 메시아의 만나(THE MANNA OF THE MESSIAH)

      저자는 성만찬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열쇠로 만나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다. 구약성경을 통해 만나의 다양한 의미를 언급하는데 만나는 “하늘에서 온 기적의 떡”(출 16:4-5, 11-15, 참고. 시 78:23-25, 29; 솔로몬의 지혜서 16:20-21)이며, 이중의 기적(하늘에서 온 떡과 하늘에서 온 고기, 출 16:12) 선물이었다. ‘거룩한 성막’에 두고 보존하며 그것을 ‘보게’ 하였고(출 16:32-34),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맛보기(출3 :8)였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새 출애굽을 개시할 메시아를 보낼 때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경 밖의 고대 유대교 문헌의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은 만나가 태초로부터 존재했다(만나의 선재,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4,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15). 하늘 성전안에 영원히 보관되어 있으며(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새 모세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 그쳤던 만나가 다시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2Baruch 29:3, 6-8).

      이러한 유대인의 소망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생명의 떡 담화(요 6:53-55)의 배경은 ‘새 모세의 도래’ 와 ‘하늘에서 온 만나의 재개’ 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된다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찬 전례에 자신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을 하늘에서 온 만나와 동일시한다고 한다. 출애굽의 옛 만나가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었다면 메시아의 만나 또한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즉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를 제시한다(요 6:61-64). 예수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의 형태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신적 정체성(막 2:5-10; 마 10:22-33)과 신적 권능이란 신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6:55).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날 그 분 몸의 부활과 승천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성찬 전례에서 먹으라고 한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생명의 영으로 ‘부활한 나의 육체’인 것이다(요 6:53-55). 저자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지닌 ‘생명’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분의 몸과 그 분의 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늘에서 온 새 만나와 예수님의 부활한 몸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예수께서 그 분의 피를 마시라는 놀라운 명령이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5장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

      저자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새 유월절’과 ‘하늘에서 온 새 만나’ 로 보셨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의 메시아적 성취로도 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진설병(“Showbread”)을 금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출 25:23-24, 29-30), 그 옆에 관제(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음료 제사)를 붓기 위한 ‘병과 잔’이 있었기에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부르며, 이것은 신성한 식사로서 붓는 것이 아니라 마셔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진설병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호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증표이고(레24:5-8), 성막에서 여호와 앞에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영구한’ 제사이다. 중요한 것은 진설병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제물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제물로써 안식일 마다 드려져야 했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진설병은 멜기세덱이 드렸던 ‘태고의 제물’이고(Genesis Rabbah 43:6), 예수님 당시에는 진설병이 제물로 ‘금상 위에 드려질 때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믿었다고 한다(Babylonian Talmud, Yoma 39a). 그리고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유대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있는 진설병을 외부로 가져 나와서 높이 쳐들고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외쳤다(Babylonia Talmud, Menahoth 29a).

      이것은 진설병이 영원한 언약의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였다.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누리게 된다(출 34:23; 23:17).

      이런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새 진설병을 연결시킨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 논쟁(마 12:1-6)에서 레위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아닌, 멜기세덱과 다윗(시 110: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또 다른 계보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새 성전이며 그 성전안에 현존하는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이해했고, 중요한 것은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 새 유월절을 넘어 - 예수님께서 새롭게 현존하는 떡과 포도주 즉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떡을 제정하는 행위이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현존의 신비는 그 분의 신적 권위와 신적 정체성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신적 아들이라면, 그 분이 제정하는 새 언약의 새 떡과 새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기적의 떡이 된다고 한다.



      6장 네번째 잔과 예수님의 죽음(THE FOURTH CUP AND THE DEATH OF JESUS)

      저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과 갈보리 십자가 처형 사건의 관계를 살핀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는 평범한 유대교 유월절 식사 형태와 유사하게,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루어졌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 직후 마셔야 할 네 번 째 잔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와 마태와 마가 모두 네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는 의식 언급이 부재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실제로는 마무리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는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잔을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다(마 26:36-46). 조금 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새 유월절의 제물로, 포도주 잔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성만찬 제정 말씀과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신 것이다. 식사가 종료되고 마지막 잔을 마시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끝내신 이유이다. 그 후 네번째 잔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직전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마실 음료를 직접 요청하셨고 건네 받은 신 포도주를 마셨고 후에 “다 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을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 마시기를 기다리심으로써 마지막 만찬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하나로 묶으셨다.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준 행위를 갈보리에서 자신을 드린 행위와 연결하신 것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유월절로 변화시켰고 십자가를 통해 마지막 만찬을 제사로 변화시켰다고 하며, 마지막 만찬과 십자가 처형 사건을 유대교 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 두 사건을 단일한 제사로 이해했음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7장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THE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

      저자는 예수님의 성만찬의 유대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재언급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유대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새 출애굽과 메시아의 새 유월절의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만찬은 그것들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어린 양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살 즉 성육신하신 신적인 말씀의 살을 먹으며 파스카 유월절을 지켰다.

      저자는 유대교 유월절과 기독교 성만찬 사이의 연관성은 『카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의 가르침에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성취될 새 유월절을 예상하셨고(CCC 1339-1340), 유대교 유월절의 세 번째 잔과 마지막 만찬의 잔, 겟세마네의 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신 잔 사이의 연관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CCC1334)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사도적 전통 그리고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새 만나’로 설명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를 넘어 ‘기적’ 또는 초자연적인 식사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요6; 고전 10:1-3, 16; 계 2:17)과 초기 교회의 교부의 글(Tyconius,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2:17, 어거스틴 요한복음 주석 “Tractate on John, 26:13) 역시 성만찬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는 고대의 기적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CCC1094)도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특정 내용 즉 새 출애굽, 새 유월절, 만나의 기적을 가리키는 신호만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신호로 보셨다고 한다. 실제 예수님은 그 떡을 자신의 개인적 현존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떡은 단순한 현존의 떡 정도가 아니라 얼굴의 떡 즉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얼굴’이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증표이다. 이러한 신비한 현존의 떡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마 12:1-8; 막 2:23-28, 눅 6:1-5; 히 9:1-3)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다(Origen, on Leviticus 13; Saint Cyril, Catechumens(그리스도인 세례 예비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성만찬의 신비를 예수님의 진정한 현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CCC1374-75). 예수님의 성만찬이(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만찬이) 단순한 증표가 아닌 기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카톨릭교회는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떡을 들어올림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메시야의 얼굴을 묵상하게 한다.

      출애굽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성막과 나중의 성전에 현존의 떡을 보관했듯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 떡을 보관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성만찬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던 내용을 다시 진술했을 뿐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와 함께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지 정수”(CCC1324)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8장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EMMAUS)

      저자는 성만찬과 육체적 부활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유대교 소망의 성취이며, 예수께서 성만찬을 - 십자가에서 죽을 그의 육체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몸과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만찬 때의 명령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눅24:13-24).

      또한 떡을 뗀 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들 곁에 현존하는 방식 즉 승귀 후 더 이상 인간의 외양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오직 성만찬의 떡의 모습으로만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원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귀하신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에서 세상의 제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부어주심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한다.



      글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마지막 만찬의 신비한 말씀이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 하며, 그것을 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적 계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어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저자는 메시아 예수께서 새 유월절의 어린 양,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만나, 성전안에 드려질 신비한 진설병 등유대인의 예배 신앙과 미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마지막 만찬의 신비를 심오하면서도 간명하게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고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세기 유대교와 예수의 부활 승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 –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자는 본문 뒤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습과 세계관을 드러내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적, 신학적 학습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 또한 배가시킨다.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제의적인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메시아적 사역 특히 영원한 언약의 피흘림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약속과 성취라는 성경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을 연속적으로 이어가지만, 종속되거나 제한받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고 확장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교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가 갈보리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유대교 유월절 제사의 완성이며 동시에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유대교 유월절을 회상하는데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출애굽의 시작을 보여주고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네번째 잔의 미완의 모습을 겟네마네 기도(마26:36-46) – 몰약의 포도주를 거부하신 예수님(마27:31-36; 막15:23) – 신포도주를 마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완성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에게 엄지척을 치켜 세우고 싶다.

      이러한 저자의 학자적 열정과 통찰력은 성만찬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를 캐내어 보여줌으로써 피상적이며 편협한 성만찬 이해를 성찰하게 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예전의식에 취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임재하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고 누리라며 초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13-22p), 자신은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찬 전례에 “예수의 실제적 현존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저자는 ‘화체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현존”, “기적”, “예수의 신적 정체성” 그리고 포도주 보다는 “떡”(몸)에 집중하여 설명함으로 ‘화체설’ 로 본서의 결론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성만찬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성만찬 제정 본문의 “이것은 내 몸이다(tou'tov ejstin to; sw'mav mou)” 에서 “…….이다(ejstin, is)”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1]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주석가들은 떡과 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또는 “이것은 내 몸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2] 그의 학문적 작업은 논리적이며 타당성 있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고수하고 있는 개혁적이며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적 입장과 필자 자신의 일천한 신학적 지식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본서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유대적 뿌리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기에 성만찬의 신학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성만찬을 통해 그의 한 몸에 참여하고 연합되는 사실(고전 6:12-17; 엡 1:22-23; 4:15-16; 5:23; 골 1:18; 빌 1:20), 두번째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함께 선교적 또는 복음전파적인 측면도 함께 언급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데 있다(고전 11:6).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 질 궁극적 승리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영생 향유를 확인시켜 주며, 더 이상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지 않고 안주하게 만드는 개인적 ‘정신 승리’의 방편이 아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은혜는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 사이의 긴장속에서 ‘많은 사람’을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

      <각주>

      [1] 놀랜드는 존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333에서 예수의 말씀들은 아람어로 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아람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성만찬 제정 본문에 대한 가장 원래적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330-40을 참고하라.

      [2] 크레이그 에반스, 『WBC성경주석: 마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1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Vincent Taylor, Jesus and His Sacrifice - A Study of the Passion Saying in the Gospels, (Oxford: Whitaker Press, 2007), 122을 참고하라.

      출처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http://www.woolrimstory.net)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2년 3월 6일 성찬예식

      매월 첫 주일은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2, 3, 4, 5주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합니다.

      온라인예배, 온라인 성찬의 의미가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정립 될 것을 기대합니다.

      3월의 성찬 주제는 신앙의 봄을 맞이하자!

      계절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누구가 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 옷을 벗어야 합니다.
      겨울 옷이란 두텁고 무겁고 둔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하여 함께 모이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겨울이 길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봄날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입고 있는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까?
      바람과 햇빛이 서로 내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바람이 더 세게 강하게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외투속에서 움크리고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햇빛이 더 따뜻하고 강한 빛으로 나그네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길을 걷던 나그네는 외투의 단추를 풀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그려집니다.

      신앙의 봄을 맞이하려면 강한 햇빛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찬의 떡은 아주 따뜻한 예수님의 온기가 되어 내 안에서 다정하고 훈훈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의 잔은 몸속으로 흐르는 뜨거운 진한 피가 되어 내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성찬은 나로 하여금 훈훈한 생명의 언어를 회복하여 3월을 봄맞이 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람있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찬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가장 중요 한 핵심축이다.
      이 성찬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 문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성찬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부분들을 살펴보고, 팬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 에서 온라인 성찬이 가능함을 밝힌다.

      첫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공동체성과 현장성에 관련된 문제

      공동체성과 현장성은 공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데,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이해를 통해서 온라인 성찬의 가능 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에도 응급환자 또는 임종 환자들을 위하여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찬에식을 간략하게 실행하기도 한다.

      둘째, 회중의 수동적 참여

      온라인 성찬이라고 청중을 수동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온라인 성찬에서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참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통해서 오히려 회중의 적극적 참여를 강화할 수 있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화상회의를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기에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넓게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셋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거부감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하여 온라인 성찬에 참여시키므로 신앙의 긍지를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성찬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초기 온전한 식사 형태를 가졌던 성찬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시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제들만의 예식으로 변질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성찬의 의미가 되살아나지만, 여전히 성찬은 개신교에서 중심위치를 설교에 내주었다.

      이렇듯 성찬 형식의 변화 가능성은 온라인 성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론 중세와 같은 잘못된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올바른 성찬 신학이 요구된다.
      기술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변화의 시대에 변화를 올바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올바른 신학적 해답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적절한 방향 제시되어야 한 다.
      과거의 관점에 매여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핵심가 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주님이 명령하신 성찬을 계속해서 그리고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르토스(ἄρτος)는 유교병인가 무교병인가?

      며칠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사용된 떡/빵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떡/빵이라는 단어를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ἄζυμος) 를 사용하지 않고 “유교병”을 뜻하는 ‘아르토스’ (ἄρτος) 를 사용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글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거의 없지만, 이미 오래전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통해 신빙성이 없는 주장임이 이미 밝혀졌고, 고 하워드 마샬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아르토스’는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로서 “무교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편에 서 있다.

      1.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깨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이것은 그가 모세 오경에서 정한 명절들을 깨실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드셨다면, 그는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명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어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성향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정하신 명절을 지키셨다.

      2. 만약 주님이 마지막 만찬에 드신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 어디에도 빵에 대한 질문과 해명이 없다. 사도행전이나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서신에서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또한 어떤 분의 주장대로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새언약을 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이 고의적으로 유월절에 사용된 빵이 유교병이라고 적고 싶었다면, 그들은 ‘아르토스’ (ἄρτος)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교병”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를 사용했을 것이다.

      3. 공관복음을 보건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걸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혹시 율법을 어기는지 철저히 지켜보았고, 그가 조금이라도 어겼다고 생각했을 당시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죽이고자 작정까지 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고,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었다면, 과연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물론, 유월절 만찬과 그 만찬 중에 행하신 새언약을 뜻하는 주님의 만찬의식은 구분해야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한 유월절 만찬과 새언약의 의식에서 사용된 음식의 내용에 한해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동일한 것으로 봐야하는데, 이에 대해 아래에서 서서히 설명을 하기로 한다.

      4. 바벨론 탈무드에 기록된 미쉬나에 의하면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형벌의 대상에는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으며, “유월절에 유교병을 먹은 자”는 채찍의 형벌을 받게 되어있다 (마이클 L. 로드킨슨 번역, 9권, Tract Maccoth, ch. 3, p. 35). 따라서 3번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도들이 유월절에 무교병이 아닌 유교병을 먹었다면, 그 사건이 공관복음이 쓰여진 후에 밝혀졌더라도, 그들은 유대교의 법아래서 매우 엄한 형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어겨 형벌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5. 요세푸스와 필로

      5.1 어떤 분은 요세푸스와 필로를 근거로 한 ‘아르토스’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쉽게 일축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1.1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 3) 에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열두 개의 누룩이 없는 빵” (αρτους τε δωδεκα αζυμους, 아르투스 테 도데카 아쥐무스) 이 어떻게 놓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142 단락). 그는 이 “빵들” (아르투스) 위에 향을 담은 두개의 컵이 놓여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 빵” 곧 ‘아르투스 아쥐무스’ (αρτους αζυμους)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아르토스’의 주격 복수형태인 ‘아르토이’ (αρτοι) 를 ‘아쥐모스’ 없이 홀로 사용하고 있다 (143 단락). 또한 이 “열두개의 빵” (레 24:5: δωδεκα αρτου, 도데카 아르투) 에 대해 “누룩이 없이 구운 곡물” (σιτος οπτος ζυμης αμοιρος, 씨토스 옵토스 쥐메스 아모이로스)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55 단락).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1.2 필로는 “특별법에 관하여” (De Specialibus Legibus 2.156-161) 에서 무교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158 단락에서 “그러나 발효되지 않은 빵은” (ο δ’ αρτος αζυμος)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빵”을 뜻하는 ‘호 아르토스’ (ο αρτος) 를 설명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을 뜻하는 단어는 형용사 ‘아주모스’ (αζυμος) 이다.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문맥에 따라 혹은 형용사에 따라 “무교병” 또는 “유교병”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누룩이 들어간”을 뜻하는 ‘주메’가 함께 사용될 때에만 “유교병”을 의미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아주모스’가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무교병”을 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로는 같은 158 단락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반죽 덩어리” (τα φυραματα του σταιτος αζυμα) 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반죽”을 뜻하는 ‘투 스타이토스’ (του σταιτος) 자체는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 ‘아쥐마’ (αζυμ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무교반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타이스’ (σταις) 나 ‘아르토스’는 꼭 누룩이 들어간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5.1.3 요세푸스와 필로의 ‘아르토스’에 대한 설명은 1세기 유대교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6. 70인 역에서의 ‘아르토스’

      6.1 70인 역에서 ‘아르토스’는 유월절이나 무교병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 특히 ‘아쥐모스’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항상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를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할 때에는 ‘주미테스’/ ‘쥐미테스’ (ζυμιτης) 와 함께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레위기 7:13 (αρτοις ζυμιταις, 아르토이스 쥐미타이스) 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는 히브리 성경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서 홀로 사용되고 있는 ‘하메쯔’ (ץחמ) 를 번역한 것으로서, 이 역시 70인 역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쥐메와 하메쯔: 출 12:15; 13:3; 13:7; 23:18; 34:25; 신 16:3).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꼭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형용사 ‘주메’와 함께 사용되거나 혹은 문맥에 따라 “유교병”이나 “무교병”을 뜻하며 또한 모든 빵을 의미하는 공통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7. 구약에서의 진설병과 무교병

      7.1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 (לחם) 은 70인 역에서 ‘아르토스’ (αρτος) 로 번역하고 있다.

      7.2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마짜’ (מצּ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출 12:8, 15, 17, 18, 20, 39; 13:6, 7; 23:15; 29:23; 34:18; 레 8:2, 26; 23:6; 등…), ‘마짜’ (מצּה) 와 ‘레헴’ (לחם)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레헴’은 ‘마짜’와 달리 “유교병”만을 뜻한다는 주장이 틀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7.3 출애굽기 25:30에는 “진설병”을 ‘레헴’ (לחם)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이며, 이것을 “상 위에…두어”라고 하는데, 이는 상위에 진열하는 빵을 뜻하는 것으로서 문맥에 의해 “진설병”을 뜻한다.

      7.4 출애굽기 29:2 에서는 “누룩이 없는 떡” 혹은 “무교병”을 ‘레헴 마쫏’ (לחם מצות; lxx: αρτους αζυμους, 아르투스 아쥐무스) 으로 표현하는데,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레헴’과 “누룩이 없음”을 뜻하는 ‘마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레헴’은 ‘마짜’ 와 함께 사용하거나 또는 문맥에 의해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5 출애굽기 29:23 (히브리어 성경) 에서는 “빵” (לחם, 레헴) 한 덩어리와 기름 바른 “과자/빵”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무교병 (המצות, 하+마쫏) 광주리에서(מסל, 미+쌀)” 나온 것이다. 70인 역은 조금 다른데, 기름 바른 혹은 기름 섞은 “빵” (αρτον, 아르톤) 하나와 “납작하고 넓은 빵” (λαγανον, 라가논) 하나를 “무교병(τον αζυμων, 톤 아주몬) 광주리에서 (απο του κανου, 아포 투 카누)…”라고 되어있다.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은 바로 “무교병”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짜’ 나 헬라어 ‘아쥐모스’를 히브리어 ‘레헴’과 헬라어 ‘아르토스’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둘은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레헴’이나 ‘아르토스’가 ‘마짜’나 ‘아주모스’와 다른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로 “빵”을 뜻하며, 또 다시 언급하지만, 문맥에 따라 “유교병”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본문에서의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무교병”이다. 왜냐하면, 무교병 광주리에는 유교병을 넣어 둘 수 없으며 오직 무교병만을 담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7.6 레위기 8:26 역시 출애굽기 29:23 과 같은 내용으로서, 여기서 “무교병 광주리에서”는 ‘마쌀 하마쫏’ (מסל המצות) 이며, 이 광주리에서 “무교병 (המצּ, 마짜) 한개”와 “기름 섞은 떡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꺼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레헴’과 ‘전병’을 뜻하는 ‘라킥’은 “무교병 광주리에서” 나온 “무교병”이다. 더 중요한것은 바로 70인 역에서는 “무교병”혹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을 ‘아르토스…아쥐모스’ (αρτος…αζυμος) 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올리브기름과 섞은 빵” 을 ‘아르토스 에크 엘라이온’ (αρτος εκ ελαιον) 그리고 “진병”을 ‘라가논’ (λαγανον) 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아르토스’와 ‘라가논’에는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 역시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것으로서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스’는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7 레위기 7:12에서는 화목제물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기름과 섞은 구멍 난 무교병”은 ‘레헴’이 아닌 ‘할롯 마쫏’ (חלות מצות) 이며; 기름 바른 “무교전병” 혹은 “누룩 없는 전병”은 ‘롸키키 마쫏’ (רקיקי מצות) 이며;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 전병”은 “누룩 없는”이라는 단어 없이 홀로 사용된, “구멍 난 빵”을 뜻하는 ‘할롯’ (חלות) 인데,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만 섞은 것으로서 이 또한 “무교병”이다.

      70인 역을 보면 “고운 가루에 올리브기름을 섞어 만든 빵” (ἄρτους ἐκ σεμιδάλεως ἀναπεποιημένους ἐν ἐλαίῳ) 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빵” 곧 히브리어로 “무교병”을 뜻하는 ‘마쫏’ (מצות) 은 ‘아르토스’ (αρτος)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이는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또 70인 역의 내용상 누룩이 들어가지 않고 다만 “올리브기름”이 들어갔다는 것 역시 ‘아르토스’는 “무교병”임을 뜻한다. “올리브기름을 뿌린/바른 무교전병” (λάγανα ἄζυμα διακεχρισμένα ἐν ἐλαίῳ) 에서 “무교전병”은 “전병”을 뜻하는 ‘라가나’와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마’인데, 누룩이 없는 전병에 기름을 바른 것이며; “올리브기름을 섞어 반죽한 고운 밀가루” (σεμίδαλιν πεφυραμένην ἐν ἐλαίῳ) 역시 누룩을 섞지 않고 올리브기름만을 섞은 밀가루 반죽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이 모든 것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것들로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의미한다.

      7.8 신명기 16:3 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교병”은 ‘레헴’이 아니라 ‘하메츠’ (חמץ; lxx: ζύμην, 주멘/쥐멘) 이며;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먹으라”에서는 무교병은 ‘마쫏’ (מצות; lxx: αζυμα, 아주마/아쥐마) 이며, 고난의 떡은 “고난”을 뜻하는 ‘야니’ (עני; lxx: κακώσεως) 와 “빵”을 뜻하는 ‘레헴’ (לחם; lxx: ἄρτον) 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레헴’은 ‘아르토스’이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마짜’ 그리고 헬라어로는 ‘아주모스’로 불리는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9 역대상 23:29 에서 사용된 “진설병”은 “진열된” (המערכת, 하마아레캇; lxx: τῆς προθέσεως, 테스 프로테세오스) “빵” (לחם, ‘레헴’; lxx: ἄρτους, 아르투스) 이다. 이 “진설병”은 “누룩이 없는” (המצות, 하마쫏; lxx: τὰ ἄζυμα, 타 아쥐마) “전병” (רקיק; 라킥; lxx: τὰ λάγανα, 타 라가나) 과 함께 진열되어있는데, “무교전병”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진설병” (레헴, 아르토스) 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 (아쥐모스) 임이 확실하다.

      8. 이제는 복음에서의 ‘아르토스’사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8.1 마태복음 12:4 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τοὺς ἄρτους τῆς προθέσεως, 투스 아르투스 테스 프로테세오스) 라고 부르고 있고, 히브리서 9:2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ἡ πρόθεσις τῶν ἄρτων, 헤 프로테시스 톤 아르톤) 라고 부르고 있는데, 진설병 (לחם) 은 무교병이다 (출 25:30; 29:2; 35: 13 (לחם הפנים); 레 24:5-9; 역하 2:4 (מערכת)). 따라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8.2 마태복음 26:17-26. 17절을 보면 무교절 (των αζυμων, 톤 아쥐몬) 첫날과 유월절 (το πασχα, 토 파스카) 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φαγειν το πασχα, 파게인 토 파스카) 위해서 이다. 이 유월절 음식은 율법에 의하면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절대로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 18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을…지키겠다” (ποιω το πασχα, 포이오 토 파스카)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의식을 따라 행하시겠다는 것인데, 율법을 따르시겠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의 규율대로 유월절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깨는 행위이다. 따라서 만약에 26절에서 사용된 ‘아르토스’ (αρτον, 아르톤) 가 “유교병”이라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식을 먹은 것이며,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유월절 곧 율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새언약을 뜻하는 의식 곧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8.3 마가복음 14:12-25 에서 마가는 유월절 저녁식사에 대하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유교절 식사는 무교절 첫날과 겹치고 있다. 12절에서 “무교절 첫날은” ‘테 프로테 헤메라 톤 아쥐몬’ (τῇ πρώτῃ ἡμέρᾳ τῶν ἀζύμων) 이다. 그러나 유교절 양과 유교절 식사는 모두 “유월절”을 뜻하는 ‘토 파스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양”과 “식사”로 번역이 가능한 이유는 ‘토 파스카’와 함께 사용한 동사 때문인데, 첫째는 “희생했다” 혹은 “제사했다”를 뜻하는 ‘에튀온’ (εθυον) 을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가 “유월절 양”임을 뜻하며, 둘째는 “먹을 수 있게” 를 뜻하는 ‘파게스’ (φάγῃς)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준비하기를’ 뜻하는 부정과거 분사인 ‘헤토이마소멘’ (ἑτοιμάσωμεν) 과 접속사 ‘히나’ (ἵνα)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그 준비의 목적과 결과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14절에서도 역시 ‘토 파스카’를 “내가 먹기 위해”를 뜻하는 ‘파고’ (φαγω)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식사이다. 따라서 22절에서 26절에 기록된 새언약 의식은 유월절 식사로 드시던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8.4 누가복음 22:7-29. 7절에서도 마가복음과 다르지 않게 “무교절 날”은 ‘헤 헤메라 톤 아쥐몬’ (ἡ ἡμέρα των αζυμων) 으로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다. 여기서 “유월절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단순히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 (τὸ πάσχα) 이다. 그러나 “잡는” 혹은 “죽이는”을 뜻하는 ‘투에스타이’ (θυεσθαι)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양”을 뜻한다. 8절에서는, 이날이 다가와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월절 음식” 이라는 단어 역시 “음식”을 뜻하는 단어가 없이 ‘토 파스카’ (τὸ πασχα) 를 홀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우리가 먹을 수 있게”를 뜻하는 ‘파고멘’ (φαγωμεν) 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음식” 혹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특히 ‘파고멘’은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 (ἵν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특히 앞에 “준비하라”를 뜻하는 부정과거 명령어인 ‘헤토이마사테’ (ἑτοιμασατε) 를 따름으로서 유월절 음식을 꼭 드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7절과 8절에서 사용된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르토스’ 역시 이러한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유월절” (τὸ πασχα, 토 파스카) 을 “준비하였다” (ἡτοιμασαν)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인데, 무교병을 구하지 않았거나 구하지 못했다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시는데, 여기서도 “유월절”은 ‘토 파스카’로서 “먹기를”을 뜻하는 ‘파게인’ (φαγειν) 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 곧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문맥 속에서 (특히 구약에서의 ‘레헴’과 아르토스’의 사용과 이곳에서 ‘토 파스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둘 때), 19절에서 예수님이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빵” (αρτον, 아르톤) 은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으로 봐야한다. 또한,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유교병이라면,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의식을 깬 것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이 먹은 것은 유월절 음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셨다.

      8.5 마태복음 26:17-26과 누가복음 22:7-20에서의 유월절은 칠일동안 행해지는 “무교절”과 겹쳐졌는데, 무교절에 대해 출애굽기 12:15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명하고 있으며,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고 무서운 저주를 함께하고 있다. 출애굽기 12:19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시는데,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날을 지킬지니라”라고 명하신다. 출애굽기 13:7절에는 무교절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신명기 16:4에서는 유월절에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두 명절이 겹침으로서 이방인이 거하는 곳이 아니면 유교병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며, 오히려 무교병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러 오신 분으로서 무교절과 유월절에 대한 강령을 어기셨을 리가 없다. 따라서 눅 22:15에서의 ‘아르토스’가 “유교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8.6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음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유월절 의식에서 사용한 무교병이며, 무교절과 유월절이라는 두 중요한 명절이 겹친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모든 누룩을 제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그 규례를 범했을 때 따르는 심한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식은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으로 행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8.7 요한복음 6:31에서는 만나(מן) 를 ‘아르토스’로 부르고 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31에 의하면 “납작한 떡/과자 과/와 같다” (כצפיחת, 커짜피힛) 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아르토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특정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8.8 정리를 하자면, 유월절 식사에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를 드시면서 행하신 주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빵 곧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9. 이제는 바울 서신에서의 ‘아르토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9.1 고린도전서 5:7-8은 깨끗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하신 새 언약이라면서, 이것을 근거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개역개정)

      9.1.1 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 언약이 아니다. 5:7에 “너희는 분명히 누룩이 없는 자들인데” 혹은 “너희가 누룩이 없는자들인것 처럼” (καθώς ἐστε ἄζυμοι, 카토스 에스테 아쥐모스)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는 복수형이다. 그러나 그 후에 따르는 (원문에는 앞에 온)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ἵνα ἦτε νέον φύραμα) 에서 “새로운 덩어리” (νέον φύραμα, 네온 퓌라마) 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서 개개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빵 덩어리 전체 혹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예수님의 한 몸인 교회를 가르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를 뜻하는 ‘히나 에테’ (ἵνα ἦτε, ‘히나 에테’) 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 ‘에테’와 접속사 ‘히나’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그 목적과 결과는 바로 “새로운 덩어리” 곧 정결한 교회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개개인으로서 “누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인데, 교회가 하나의“오래된 (παλαιὰν, 팔라이온: 단수형) “누룩 (τὴν ζύμην, 텐 쥐멘: 단수형)” 곧 오랫동안 음행을 저지른 사람으로 용납함으로서 부정해졌다는 것인데, 그 오래된 누룩 곧 오랫동안 음행을 해온 자를 쫒아내어, 하나의 빵 덩어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전체가 누룩 곧 죄로 오염되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누룩”이 들어간 유교 병을 뜻하는가? 같지 않다.

      9.1.2 7절 하반 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비유하는데, 여기에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고, 다만 “희생 당하셨다”를 뜻하는 ‘에투테’ (ἐτύθη)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 (το πασχα) 가 “양”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르토스’에 대한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으로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9.1.3 8절에서 “누룩”은 (ζύμῃ) 비유적으로 “악과 악의” (κακίας καὶ πονηρίας, 카키아스 카이 포네리아스) 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러한 “오래된 누룩” (ζύμῃ παλαιᾷ) 으로 명절을 지키지 말고 “순전함과 진실의 빵”으로 지키라는 것인데, “악과 악의”와 달리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지키라는 것 곧 교회로서 죄에 대해 순전하고 진실되라는 것이지, 어떤 이의 주장대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과 교체한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빵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ἀζύμοις, 아쥐모이스) 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보던지 아니면 만찬에 대한 설명으로 보던지 상관이 없다. 다만, 유월절에 사용해하고 있는 빵은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 그리고 만찬의식에서 사용하신 것이 “유교병”으로 가정한다면, 또 “유교병”이 ‘아르토스’라면, 바울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가 아닌 ‘아르토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것은 ‘아르토스’가 아닌 ‘아쥐모스’ 곧 “무교병”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무교병”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했기에 ‘아르토스’가 “유교병”이라는 주장은 성립시키기에 매우 어렵게 보인다.

      9.1.4 마지막으로, 이 두 구절에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ύμῃ) 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아르토스’가 무조건 누룩이 들어간 빵 곧 “유교병”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아르토스’를 이방인과 유대 기독인들이 “유교병”으로 이해했다면, 특히 이미 누룩이 없는 빵 곧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주모스’/‘아쥐모이스’ (ἀζύμοις) 를 사용한 상태에서 구태여 “누룩”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유교병”을 드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는 “유교병”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아르토스’는 더 폭이 넓게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이 아니라 “무교병”과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토스’가 “유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무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초대교회는 “무교병”이나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는 오히려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이해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9.2 고린도전서 11:23-25 에서 구체적으로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쥐모스’나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 바울은 그 단어를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을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이 “내가 주께로 부터 받은 것을”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에고 가르 파레라본 아포 투 키리우) 이라는 문구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주님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핍박하던 교회에서 혹은 다메섹 사건 후로 그 주위에 있는 교회에서 들은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 (παρέλαβον, 파레라본) 곧 그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르토스’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다. 어쨌건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한데로, 공관복음을 참조하자면, 바울이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고전 5:7-8에서 유월절이라는 상황에서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11:23 을 읽는 사람들이 ‘아르토스’를 유대교의 명절인 유월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교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 본문에서도 바울이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만찬이 유월절에 베푸신 만찬에 사용한 같은 음식으로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교회가 무교병을 가지고 혹은 유교병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임하던,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나 “유교병”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그 둘을 포함한 또는 문맥에 따라 그 둘 중 하나를 의미하는 ‘아르토스’를 고의적으로 홀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는것 같다.

      10. 위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뜻하지 않고, 만나, 그리고 무교병 등 여러 종류의 빵을 뜻하는,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유월절, 무교절, 진설병,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문맥에서는, ‘쥐메’와 함께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무교병”을 뜻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떡에는 가래떡, 시루떡, 막걸리가 들어간 떡, 맥주가 들어간 떡, 찹쌀떡, 보리떡, 쑥떡,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모두를 “떡”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새해에는 이 모든 떡 중 가래떡을 썬 떡으로 만든 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를 “썰은 가래떡국”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떡국”이라고 부름에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떡볶이”를 말하면, 그 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로 가느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것임을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경전체에서와 관련 있는 고대문서들을 분석해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몇 개의 본문에 매달려 사용된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것의 차이들을 극대화해서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늘의 교회는 고래의 의례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 반복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동시대 사회 문화적 상황 속의 상징체계의 이해와 발전된 소통 매체 및 수단의 활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최근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고민과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온라인 예배가 교회 공동체성을 지킬 수 있는가?

      현장에 ‘모인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여부가 예배의 정당성을 결정함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초연결 사회에서 교회들이 정보 기반 인터넷을 통해 말씀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일은 또 다른 탁월한 방식의 예배의 목적과 특성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예배자로 하여금 삶의 현장으로 깊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비대면 예배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성은 비슷한 삶의 환경을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구역 및 소그룹 단위 안에서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오프라인 교회가 복음을 위해 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일은 중요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의 면모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 제도가 과거와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는 교회의 공동체성 실현을 위한 방안의 양상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과 같은 급격하고 돌발적인 변화를 늘 예상되고 대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예배와 성찬 실행의, 뉴 노멀에 따른 복음 소통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다만 뉴 노멀 속에서도 예배와 성찬 본연의 의미들이 방해를 받거나 왜곡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배와 성찬 안에 담긴 구속사의 기억(아남네시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 본연의 정위(正位)를 잃지 않도록 가일 층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기독교 공동체는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목회데이타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응답한 개신교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성례전적 공동체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와 성찬을 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몸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와서 세례를 행함으로 교회가 어떻게 이를 행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기념하는 방식도 교회에 알려주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성례를 지키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적으로 성례를 행하며,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은총의 수단을 가르쳤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성례 공동체였다.
      철저한 세례 교육과 세례 예식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공고히 하였고, 연이은 성찬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됨을 말씀으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참여하여, 이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고백하도록 하였다.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성례전적 이해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설교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를 통해서 교회 존재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성례전적 이해 위에 교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코로나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는 성례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과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


      2022년 신년주일 성찬예식 / 1월 2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며 매월 첫째 주일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온라인 성찬예식보다는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복음적 신앙을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빵을 먹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낍니다.

      성찬예식을 통한 신앙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온라인 새벽기도회"라고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시간입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식사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의 자리가 성찬을 위한 신앙을 다짐해야 합니다.
      음식이 내 속에서 영양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영양을 공급받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기도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911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루(1)에 한 번(1) 오전 9시와 오후 9시 어느 시간이든지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에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불낙지교회를 위하여
      둘째는 내가 만들어야 할 초장을 위하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1년 12월 5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관점(觀點)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비슷한 단어 "견지(見地)"

      관점은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기 때문에 관점이 참 중요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거침없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삐에로 신부"이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했다.

      그의 비망록 중에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는데 삐에로 신부는 거기에 이런 경험담을 적어 놓았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청년은 자살 직전에 있었다.
      청년은 나에게 자살하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 파탄, 사회적 지위 등. 그러면서 결론을 맺었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대답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때부터 청년은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얼마 후 청년이 고백했다.
      “신부님이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풀었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2021년 마지막 성찬예식을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찬예식을 준비하며 성찬의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떡과 잔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저 교회는?
      그런데 이런 관점은 비판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면서 늘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들 중 하나가 "성찬예식" 이었다.
      오늘 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온라인 성찬예식을 갖고자 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은 요한복음 6:53-58 입니다.

      53.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그나티우스는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 피(54절)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 성찬예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성기호목사 성결교 신학대학 교수)

      성만찬의 성서적 기원

      흔히 성찬(聖餐, The Lord's Supper 또는 The Eucharist)이라고 부르는 성만찬(聖晩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最後의 晩餐)를 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성례(聖禮)이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7~20).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명령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는 기록은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나타난다.

      "또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므로 초대교회는 성만찬 예식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주의 만찬에 관한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고전 11:20~34) 떡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은 "이것을 행하라"(24, 25절)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주의 재림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4~26절).

      애찬(愛餐)과 성만찬(聖晩餐)

      성도의 수가 적었던 초대교회 초기에 행해지던 성만찬은 주로 저녁 때 행했다.
      애찬(愛餐, Agape, The Love Feast)이라고 부르는 친교 식사 형식으로 행해졌다.
      각자의 집에서 공동 식사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 오고 성도들이 사랑의 만찬(晩餐)을 함께 나누었다(고전 11:21).
      즉, 성만찬은 애찬의 형식으로 애찬에 포함되어 행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비해 온 음식의 수준이 달라 가난한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교회를 배부르게 먹고 취하는 곳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나타나자 사도 바울은 이를 경계하고 식사는 각자의 집에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22절).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150년 경에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어 성찬은 아침에 행하고 애찬은 저녁에 나누었다.
      그러나 4세기 말경부터는 교회에서 성만찬만 행하고, 애찬은 각 가정에서 사사로이 행하다가 차츰 애찬의 풍습이 사라졌다.

      성만찬 논쟁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Sacramentum baptismatis et eucharistiae)에 관한 최초의 조직신학적 진술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 즉 떡과 잔의 성질 및 이 두 요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점차로 발전하여 뚜렷한 구분을 보이고 있다. 실재설,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등이 그것이다.

      1. 실재설(實在說)

      성만찬의 요소들인 떡과 잔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靈知主義, The Gnosticism)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The incarnation)을 부정하며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 뿐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는데
      성만찬의 떡과 잔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고 한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강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였다(요일 4:1~3).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떡과 잔의 요소에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디다케(Didache 또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 Teachings of Twelve Disciples), 이그나티우스(Ignatius),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칼빈(John Calvin) 등의 주장인데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간주하지만 화체설(化體說)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디다케'는 성만찬을 영생을 위한 영적 양식이라 하였다(고전 10:3).

      이그나티우스는 요한복음 6장 32~51절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54절)는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저스틴은 성만찬의 떡과 잔은 인간이 되신 그리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말한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주의 살과 피로 양육된다"고 주장하며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에 로고스가 결합된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하는 화체설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2. 화체설(化體說)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예루살렘의 시릴은 성령께 부르짖음을 통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했고,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변화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가 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소화기관을 통해 흡수됨으로 우리를 사망의 독소로부터 해방한다고 했다.
      성상(聖像 Icon) 숭배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였던 754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거나 숭배하는 것을 배격한 결의 끝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인성의 상징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나타낸 다메섹의 요한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충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단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성체(聖體, The host, 라틴어로 hostia)"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요한의 주장은 니케아회의(787년)에서 채택되었다. 요한의 주장대로 사제의 기도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바꾼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속죄 희생의 제사(히 9:26)는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제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성별시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주 희생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화체설이 말하는 것처럼 성만찬의 두 요소 즉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그 변화의 기간은 얼마나 지속되는가 또 거룩한 떡을 어떻게 숭배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남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피를 멀리하라"(행 15:29)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어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식인종적인 야만의 혐오감을 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악인도 성찬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그 안에 거하게 되어야 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하신 약속대로(요 6:55, 56)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악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약속이 실제로 악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보아 악인이 떡과 포도주를 성만찬에서 먹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 모실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전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가 되었다고 하거나, 떡과 포도주에 일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섞였다고 하는 이론대로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시게 된다는 주장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3. 공재설(共在說)

      종교개혁자들은 성만찬의 희생설이나 화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루터와 칼빈은 성만찬설에서 그 견해가 동일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실재설을 주장하는 데 비하여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루터는 개혁초기에 "믿음으로만(sola fidei)"을 강조함에 비해 성만찬의 교리에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끝난 뒤 교회의 정통적 교리에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표명하게 될 때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며 중도의 입장에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함에 있어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인 옥캄(Ockham)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옥캄은 물질의 존재 양식에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물질이 그 자체의 점유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榮化)된 그리스도의 몸은 또 다른 물질인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함께 존재(存在)한다고 한다. 이는 사제(司祭)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편재(遍在, 아니 계신 곳이 없다)하신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라 떡과 포도주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요소들 속에(in), 그 요소들 밑에(under), 그 요소들과 함께(with the elements) 임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떡을 그 손에 드셨을 때 그의 몸도 떡의 요소와 함께 임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재가 축복이 되는 고로 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며 떡과 포도주에 함께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살과 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으므로 주어진다고 한다. 떡과 포도주는 "이것이 내 살이니라" 또는 "이것이 내 피니라"하는 식사(式辭)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은 구원은 커녕 도리어 정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루터의 공재설이 갖는 문제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일정한 장소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인성(人性)을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모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어디나 계시다고 하는 공재설은 우리의 보통 음식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임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고 성만찬의 떡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가 구분하는 일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4. 기념설(記念說)

      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는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거나,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깊은 신앙에 임재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몸이 실제로 성찬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 몸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고 말하며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며 회상하는 기념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또한 성만찬 참여자는 신앙 고백의 행위로서 이 성례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즉,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하신 `이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다"의 뜻임을 밝히며 `이니라'의 라틴어인 est가 `표시하다' 또는 `상징하다'라는 뜻의 sihnificatio와 같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성만찬설을 기념설 또는 상징설(象徵說)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성만찬의 떡을 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잔을 나눌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을 기념한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의식이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육체적 임재 대신 영적 임재를 주장하나 성만찬의 교리로부터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떡과 포도주를 상징 또는 기념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는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영적으로 이루어지며 구속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 드려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또는 sacred fellowship)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긴밀한 교제뿐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연합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거룩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주심같이 구원받은 신자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하고 헌신하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성만찬의 참여자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더욱 왕성하게 하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헌신 봉사 충성케 하는 거룩한 예식인 성만찬(Holy Communion)은 이단자(딛 3:10~11, 요이 1:10~11)와 뛰어난 죄인의 참여를 배격한다(고전 5:11~13, 살후 3:14~15).

      중생한 증거가 있는 이에게 세례를 주기 때문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 즉 세례인으로 성만찬에 참여케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를 분변치 못한 채 또는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례 교인들에게 그것도 자기를 살피고 회개한 다음에 거룩함으로 이 성례에 참여케 해야 할 것이다(고전 11:27~29).

      *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영적 임재라는 분명한 신앙을 갖고 떡과 잔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인, 서평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위원이 신간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성찬』 서평을 동홈페이지 서평란에 기고했다.
      정 위원은 저자 알렉산더 슈메만에 대해 "성공회 사제이지만 신학적 성향은 철저히 성경적 원리를 따른다.
      그의 온화한 예리함은 성공회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동시에 예전을 과도하게 무시하는 기존 개신교를 향한다. 그리고 진정한 성찬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2020년 비아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우리 아버지>는 장엄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하게 기이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진중하면서도 풍성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교향악 같다"고 평가했다.

      정 위원은 이어 "예배학의 신학의 경지에 끌어올린 그는 목회 실천학적으로만 보았던 예배에 깊이를 더함으로 기독교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모두 12장으로 구분하여 성찬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고 있지만 1장에서 전반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슈메만은 성찬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성회'와 '성찬' 그리고 '교회'가 세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리 또는 괴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예전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연합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는 것'(23쪽)이다. 슈메만은 바르지 못한 성찬 이해가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태동하였음을 환기시킨다. 스콜라주의 또는 스콜라적 신학은 '거룩한 모임과 성찬, 그리고 교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철저히 무시'(23쪽)함으로 성찬의 교회론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다시 성찬이 교회론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성찬의 측면들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 성찬'으로 소개한다. 아마도 스콜라적 신학은 현재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과 예전을 중시하는 정교회 전통한 비교하면서 후자의 성찬 의식이 갖는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 위원은 "정교회 사제이기도하는 슈메만은 처음 성찬이 가진 연합의 의미에서 벗이나 참여자의 제한과 영역의 축소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비잔틴식 예전 의식이 점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했고, 섬기는 자와 기도하는 자를 분리'(32쪽)시킴으로 성찬의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슈메만은 이 부분을 3장 입당의 성례에서 좀 더 깊고 예리하게 다룬다. 정교회 예식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저자의 용어들이 낯설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특히 "4장 말씀의 성례는 현대 한국교회 개신교 설교자들의 신경을 곧두세우고 읽어야한다. 슈메만은 성례로서의 말씀 즉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의 무능이나 빈약함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무엇일까?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고도 지적했다.

      "진정한 설교는 해박하고 유능한 신학 지식을 정확히 전달하는 복음서 본문에 대한 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본질은 복음서에 대한, 다시 말해 복음서의 한 주제에 대해 설명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선포다. 설교의 위기는 무엇보다 말씀 선포가 일종의 설교자 개인의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126쪽)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힘입어 정 위원은 설교의 위기가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사화 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 바, 설교의 사유화로 인해 교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설교가 '개인의 일'이 되자 교회는 급격하게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찬의 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교와 사제들이 받은 가르침의 은사는 개인의 은사가 아닌 '믿음과 사랑의 연합체인 교회의 것'(131쪽)이다. 슈메만은 7장 연합의 성례에서 교회 연합의 전제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삶의 근원이자 내용이며 목표'(218쪽)인 것이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연합하고 모인다. 연합과 모임은 분열과 분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627#shar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찬(Table) - 하나님의 뜻 이해하기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가진수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Th.M.)과 미국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박사과정(D.Min.)을 마치고,
      플로리다 주 ‘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IWS)’에서 예배학박사(D.W.S.)과정을 공부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예배의 갱신과 영적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그는 현재 <글로벌 예배 컨퍼런스> <글로벌 예배 심포지엄> 등의 국내외 예배관련 세미나와 집회를 주관하고, 예배 매거진, 큐티, 예배도서 등을 발행하는 예배전문사역기관 ‘글로벌워십미니스트리(Global Worship Ministry)’의 대표다.

      그동안 신학교와 신학대학원, 국내외 지역교회, 예배자 학교 등에서 예배의 중요성과 다음세대를 예배로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해왔으며, 현재 미국 LA에 위치한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 석사과정(M. A. in Worship Studies)의 학과장이자 교수로 ‘현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