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 성경적 사고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비뀌면 운명이 바뀐다.
- 철학자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년 9월 7일 ~ 1784년 12월 3일)
영국의 시인· 평론가이다.
후에 문학상 업적으로 박사 학위가 추증되어 ‘존슨 박사’라 불렀으며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10권의 《영국시인전》은 만년의 대사업으로 특히 유명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 또는 작품 선정에서 그를 최고의 저자로 선정했다.
존슨은 학자· 문학자·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Talker Johnson’이라고도 불릴 만큼 담화의 명인이기도 하다.

사무엘 존슨의 열 가지 명언

1. 자신감은 큰일을 해내기 위한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2. 여행에서 지식을 얻어 돌아오고 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 한다.

3. 지식이 없는 성실은 허약하고 쓸모없다. 성실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4. 사람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들이 일거리처럼 읽은 책은 대부분이 몸에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5. 노력 없이 쓰인 글은 대게 감흥 없이 읽힌다.

6.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

7. 작은 일에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은 피하라.

8.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게 소비하라.

9.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은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넓은 범위를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미래의 이익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면 현재 모처럼 손아귀에 있는 기회는 고사하고 손에 들어오는 이익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인생은 그렇지 않아도 짧은데 시간은 낭비한다면 더욱더 짧아진다.

10.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착하게 살면 그리스도인다워진다.”
“독서를 많이 하고 이것저것 배우면 똑똑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면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믿고 있는 대표적인 신념들이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변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답이 없고 변화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지 답답해하지만, 사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자신의 생각에 있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삶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전도와 선교, 헌신 등에 대해서는 수없이 강조해 왔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 아무 생각 없는 ‘무개념’, ‘무분별’ 교인을 양산해낸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우리는 ‘개독교’라는 비판과 함께 ‘안티기독교 현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적 사고방식이란 과연 무엇인지 파헤친다.

‘노답청춘’을 위한 성경적 사고방식 입문서다.
성경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변화를 위한 결단과 훈련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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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말씀을 읽고 보아도 왜 우리 삶에는 변화가 없을까?
성경대로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오는 행동과 문제 해결방식은 그 사람의 평상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일본의 어느 경건하다고 소문났던 여인의 이야기
입을 열면 언제나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가까왔을 무렵 자기 집에서 불이 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이구 맙소사 왜 하필이면 내 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바꿔라”
<성경대로 생각하라>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의 방식이 완전히 바뀔 때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거룩한 생각으로 전환될 때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랄프 카이퍼는 한쪽 눈에만 약간의 시력이 남은 선천성 시각장애인으로, 그 자신이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경험한 성경적 사고방식의 증인이다.

시각 장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삶에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이 이끄실 거라 믿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관점대로 삶을 바라본 그의 생활방식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베드로의 넘치는 자신감의 비밀은 무엇이었나?

바울, 예레미야, 욥, 가나안 여인, 모세, 베드로, 솔로몬 등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떠한 사고방식으로 각각의 상황을 해석하고 결정했는지 표본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현실을 뛰어넘는 진짜 긍정의 힘’의 주인공으로 대표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의 넘치는 자신감 속엔 ‘이유 있는 긍정’이 숨어 있다.

“바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헛된 희망이나 어리석은 교만, 소망 없는 자의 두려움 따위가 없다.
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있다.
그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실재를 붙잡음으로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기술했다.

바울은 이러한 긍정의 힘으로 개인적 제약을 이길 힘,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은혜,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분노한 예레미야를 바꾼 건 바로 ‘말씀’

또 한 명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상처를 평안으로 바꾸는 관점의 변화’를 이룬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며 깊은 상처를 받았다. 화가 나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변한 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없이 예레미야를 분노케 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원수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비통한 심정이었다.

예레미야의 마음을 ‘비통’에서 ‘기쁨’으로 바꾼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라고 말한다.

그가 ‘먹은’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 말씀이 그의 생각과 관점을 통째로 바꾼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먹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단순히 눈으로 글씨만 읽는가? 아니면 말씀을 충분히 알고 이해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말씀을 ‘먹는다’는 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먹었을 때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연구하라”

저자가 말하는 성경적 사고의 시작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을 끝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성경을 읽어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리 주님은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 행하여 보라. 주님 품이 집처럼 편안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성경적인 생각을 실천하라’는 제목으로
△장애물 앞에서 내 생각 항복시키기
△예수님의 세심한 사고방식 배우기
△일곱 가지 그리스도의 마음 품기
△성경적인 생각을 삶에 적용하기 등이 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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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 성경적 성품, 성경적 인격”

칼빈은 정말 능력있는 신학자입니다. 그의 모든 사고와 생각은 언제나 성경과 함께 갑니다. 칼빈의 중요하다 싶은 모든 말들은 전부 성경 구절들로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인용되거나, 성경 구절들이 괄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학은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 못하는 신학자들의 말은 그 자신의 사색입니다. 신학 이론은 언제나 성경의 강물에 젖어서 나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신학자의 이론이 그 자신과 독자들의 신앙과 영혼에 해악을 미칩니다.

정독하다가 잠시 멈추어둔 서철원 박사님의 저술 「교의신학전집」의 특징도 중요한 모든 부분마다 관련 성구들이 풍성하게 괄호안에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서 박사님의 모든 신학 사고가 성경의 물줄기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물줄기 근처에 단 일초도 가보지 못하고 탄생한 이론이다 싶은 것 하나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받아야 할 형벌)를 해결하시었고, 명확한 성경적 근거도 없는 아담이 못 지킨 율법을 예수께서 준수하시어 하나님 백성의 생존 권리(의)를 얻어 우리에게 주었다는 이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

거창하게 많은 신학자들의 논문과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서 얻는 힘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을 모르고, 이전의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와 사상을 따라 신앙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는 아주 그럴싸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 교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정감록'을 모르는 얼뜨기라는 식으로 떠들어 댑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에 관한 내용은 신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주가 자기를 배반하여 저주받아 죽은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하고 살려서 자신의 본래의 창조경륜을 이루어 내는 종교입니다.
창조주가 죄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돌리는 방법은 오직 흠 없으신 피의 속죄였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버린 타락한 자기 백성 가운데서 피 흘림의 속죄로 죄를 배상할 자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날 때부터 죄인이고, 모두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여 버려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자기 백성의 죄를 배상하는 제물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속죄의 피를 흘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특별하신 역사하심으로 아담의 죄를 전가 받지 않은 한 완전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그 죄 없는 사람을 자신과 연합(위격적 통일)시키심으로 완전한 사람-완전한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위해 오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피로 하나님께 죄를 배상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신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피 흘려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고, 자기 백성의 의가 되시어 구원을 주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계시 해설자 사도 바울도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음이 우리의 의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 안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와 연합됨이 우리에게 의를 얻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피 흘리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아담이 못한 율법준수를 성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권리(의)를 얻어 줄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신.구약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변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미쳤습니다. 계속 미친 듯이 그것만 주장하나, 모든 내용들이 전혀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항상 누구도 이 같은 주장을 했다! 라는 인간의 사설들뿐입니다.



성경이 묻어나지 않는 신학 이론은 사람의 사변입니다. 「기독교강요」를 보니, 칼빈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성경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이 우리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피 흘리신 그 분과 믿음으로 연합되어 전가되는 예수의 의로 우리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의 모든 말들은 언제나 성경으로 뒷받침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3)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기독교강요, 3.11.3)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독교강요, 3.11.22)

칼빈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나 어떤 행위가 우리에게 의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만 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사색하고 이론으로 만드는 일은 칼빈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가르쳤습니다.


서철원 박사도 칼빈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음다는 믿음 고백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강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신학을 세우는 분들은 다릅니다. 이전 사람들이 만든 교리로 신학하는 것과 성경으로만 신학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무효화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믿음을 고백하는 죄인들의 의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사역으로 이룬 죄용서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죄인에게 전가하여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롬 5:8-10).”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부름 받은 자들을 그냥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고백하게 하셔서 의롭다고 하신다. 단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롬 3:21,22)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로 보신다.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이므로, 그가 당한 모든 고난과 행한 것을 부름 받음 자들이 당한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죄용서를 죄인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13)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 하는 선언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따라서 법정적이지 도덕적일 수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오직 성경으로만 신학해야 합니다. 명확하게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성경의 단 한 줄을 찾지 못하는 이론은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는 거짓 사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뒷받침하는 명확한 성구 하나를 찾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서는 ...

성경! 성경! 성경!

언제나 최고의 권위와 기준은 성경입니다. 청교도 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 1차 대각성 운동, 2차 대각성 운동, 그 무엇이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절대로 어닙니다. 에드워즈, 존 오웬, 리차드 박스터, 로이드 존스, 그 누구라도 성경의 말씀과 다른 이론이나 주장으로 큰일을 이루었으면, 예외 없이 광명의 천사이고 거짓 선생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고와 이해를 성경 속에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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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심, 그리고 훗날 천사 장의 나팔 소리와 호령으로 이 땅에 임하실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Advent)은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손님은 당연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온 마음을 다하여 손님을 기다립니다. 이유는 기다리는 손님을 놓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세상은 추수감사절로 시작하여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보내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연말은 일 년 중 거룩함과 세속적 사고가 가장 강하게 충돌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정되었고, 성탄절이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절기인데, 세속적 개념이 기독교적 두 절기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거룩함보다 세속적 사고가 더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과 대림절, 성탄절은 모두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도 성경을 토대로 연말을 맞이하고, 하나님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맞아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더 강해짐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성경적 사고를 더 강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자녀들조차 연말을 세속적으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간이 갈수록, 세속적 사고가 더 굳어져 감에 있습니다.

작고 연약하지만, 우리라도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살아가며, 성경적 사고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주님의 말씀과 은혜에 깊이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오심이 바로 나를 위해 오셨음을 확신하며 연말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적 사고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올해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보내야 세속적 사고를 이길 수 있고, 마침내 우리는 물론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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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신실히 믿는 이들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의 네 가지 속성들을 주목해왔는데, 그 네 가지는 필요성, 권위, 명료성, 충분성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성경 밖에서 설정한 속성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지닌 속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자율성까지도 계시 의존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계시나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 이성은 인간의 견해를 만들 뿐 사람들이 찾는 확실성은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합리성의 기초를 세워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를 만드시고 또한 붙드시고 다스리십니다. 신자가 할 일은 진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고 그 진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가정(假定)하기 때문에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필요성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유일한 권위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명료하다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뜻이지 모든 부분이 다 분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분명한 구절로부터 불분명하고 어려운 구절이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은 스스로를 해석하여 신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순종하여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신자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의 충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대한 완성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 66권이 완성된 정경이기 때문에 거기에 추가할 다른 계시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이비 종파에서는 성경 이외에 성경적 권위를 갖는 어떤 예언이나 이상이나 계시나 가르침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많은 실수도 하였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믿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릇된 것을 깨우치고 인간 사회를 증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명의 흥망성쇠의 과정에서 성경은 신자들의 마음과 지성에 그 자리를 유지해 오면서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궁극적 권위자로 높이려는 모든 형태의 지식에 반대합니다.

죄의 특징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명과 지식과 사상까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시대와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생활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서도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그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다가 그 길이 잘 못된 길임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심정적인 뉘우침이나 후회하는 마음이나 자기의 잘못을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들과 아울러 잘못된 모든 생활 방식에서 돌아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걸어가는 행위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온전한 회개란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셔야 비로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죄를 고백하며 통회하고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로 간다고 해도 그것이 바른 회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아 바네스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정탐꾼을 보내고 그 후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고 한 사건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출애굽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신 1:41) 하지만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정탐을 한 결과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하고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악평하는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그들이 걱정하던 그들의 자녀들은 들어가게 한다고 하시며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시자 태도를 바꾸어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경솔히 올라갔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하나님을 인간의 뜻대로 조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회개나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그 어떤 선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고집대로 회개하였고, 회개하였으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고집하며 경솔히 행동하였습니다. 회개나 예배나 기도나 물질을 드리는 것이나 모든 선한 일을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과 법을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계명과 법 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계명과 법 앞에 인간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도록 정하신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계명과 법과 질서와 규례와 명령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생각할 때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데, 율법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율법 배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이란 언약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과 동시에 언약 백성의 의무 규정입니다.

언약을 전제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이야기하면 율법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적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는 그 언약의 배후에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에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 언약의 책무에 관계된 모든 계명과 규례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말씀과 언약과 구원행위와 하나님 자신까지를 포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안에 구원의 역사가 있고 새 언약이 있으며 율법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계시의 큰 그림을 통해서 구체적인 말씀과 사건을 보아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예배와 은사와 십일조와 선교와 믿음에 관한 그 어떤 것이라도 이 관점에서 보는 안목과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교조주의 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성경 계시의 이런 큰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때 마치 머리카락을 쪼개듯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율법에 많은 것을 첨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말씀을 살필 때 그 구체적인 말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 언약 배후의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그 구원의 행위 배후에 계신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피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4:6,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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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라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야단을 맞았고 다른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하였기 때문에 번번히 칭찬을 받았다.
둘 다 업무 수행 능력은 비슷했지만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일을 하느냐의 차이로 인해 유능한 사원과 무능한 사원으로 구분된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라는 구분만 분명히 하여도 우리는 많은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이런 죄, 저런 죄 한 두 가지를 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전혀 성경과는 상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이것은 사고가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는 증거이다.
결혼, 자녀 교육, 재정 등 등. 이런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나 가치관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진 신자들이 많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이런 훈련, 저런 훈련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인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훈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적 가치관은 소유, 군림, 눈에 보이는 것, 물량, 업적, 과시를 중시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관은 소유 보다는 관계, 군림 보다는 섬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 물량이나 업적 보다는 마음의 동기, 과시 보다는 은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회도 세속화 되다 보니 세상적인 성공을 영적 부요로 착각하여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자기 뜻'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하나님이 기도 응답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끊임 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그것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한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이 내용은 ‘묵상 기도’에 있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자신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보다 깊고 높다.
개인의 직접적인 필요 위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말씀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항상 개방적인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높은 뜻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도와 안내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쉽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은 추리와 경험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면 과거의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기 쉽다.
“아, 과거에 이런 예가 있었죠.
그때 이렇게 처리했으니 지금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죠”
“그렇지, 지난 번에 이런 일이 있었지.
난 그때 이렇게 처리했지.
이번에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군”
이처럼 사람은 전례에 따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이 생기고 소위 말하는 교단의 “법”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과 전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믿음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을 그냥 많이 읽더라도 믿음이 자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듯 중요한 구절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먹을 때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건강하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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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God`s Eye View Worshiping Your Way To A Higher Perspective (Hardcover)

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올려다 볼 것인가? 내려다 볼 것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는가?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 본 적이 있는가?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무엇이든 작게 보이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당신의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도더 이상 당신을 제압하지 못하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당신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미 테니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선포한다.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예배하라.
당신이 예배하는 순간 그분이 당신을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이다.
관점의 변화가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라.

■ 책 속으로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신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하나님은 사람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신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당신을 구할 것입니다."(사 26:9를 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가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0-13)

만약 우리가 버릇없이 하나님의 부엌에 난입해서 "아빠 내 몫을 주세요. 지금 당장 약속하신 유산을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요구에는 지상에 있는 부모들에게나 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나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109~110p)

하나님의 관점, 사람의 관점(The Perspective of God, The Perspective of Man)
야고보서 4:14

하나님의 관점은 "무한자(The Unlimited)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영(Spirit)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여야 함을 선포하는 것이 본문 야고보서 4:14절의 "관점(Perspective)"의 메시지입니다.
관점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할 수 있습니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올려다 볼 것인가?
아니면 유한자이며 안개에 불과한 인간의 관점에서 내려다 볼 것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을 감히 상상으로 추측해본다면,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창공위로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에 비유를 했습니다.
오래전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종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낙타 떼를 소유하며 모든 것이 탄탄대로(坦坦大路)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라 할지라도 오늘 혹은 내일, 혹은 그 어느 날에 갑자기 강도의 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원하지 않는 허리케인이나 질병 혹은 불의의 사고, 그 외에도 무수한 돌발적 상황들이 엄습해올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관점(觀點)에 따라 무엇이든 작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 쉽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은 인생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불리한 조건으로서 더 이상 제압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그 당사자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

1. 시험(Test)
2. 위탁(Commitment)
3. 잠시(Transitory)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였던 요셉은 그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고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13년이란 인생시험을 견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성군 다윗도 마침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기까지는 14년의 인생시험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요셉처럼, 다윗처럼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어 예배하는 순간, 전능의 왕 하나님은 당신을 반드시 높이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Turning Point of Perspective)이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십시오.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십니다.
'세속적인 관점(Secular Perspective)'에서, '사람의 관점(Perspective of Humans)'에서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시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고백을 할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학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명쾌한 기도응답의 최고의 롤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주님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사 26:9)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가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면 마치 거대한 언덕처럼 오래 견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의 큰 탑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영혼에게 많은 재물을 약속하신 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리라."(눅12:20) 오늘 밤에 내 영혼을 찾으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재조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시험을 만나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위임받은 청지기(Steward)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여도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임을 직시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을 맞이하므로 "놀라운 결과(Amazing Prospect)"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과 사건과 세상 바라보는 법

관점을 디자인하라(개념확장판).  박용후 | 쌤앤파커스 | 296쪽 | 16,000원

의식하든 않든, 자신만의 관점 있어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우리 삶 달라
사람이 자신의 관점 바꿀 수 있을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람은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사람이 바라보는 것은 똑같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똑같이 바라보았지만, 서로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똑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자기만의 관점만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관점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투자해야 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곧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이런 측면에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람이 가진 관점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고 자신이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피와이에이치 박용후 대표다.

박용후 대표는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책을 5년 전 이미 출간했다.
그런데, 출간 이후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사이에 있는 것들을 새롭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간 바뀐 생각을 기반으로, 들어내고 걸러내고 바로잡아 오늘의 관점으로 다시 책을 손보고 <관점을 디자인하라> 개념확장판을 내놓았다.

보통은 ‘개정판’이라고 명명하는데, 관점 디자이너라 ‘개념확장판’이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첫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돈 아닌 꿈 이루고 싶은 이들 함께해
1년에 20번 월급받는 사람으로 관심

저자는 대한민국 1호 ‘관점 디자이너’이다. 그를 수식하는 별명이 수없이 많지만 그는 다른 무엇보다 국내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로 불리기를 원한다.

‘관점 디자이너’로서 그는 유독 ‘착한 기업’의 성장을 도와 함께 성공하는 일을 보람으로 삼는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조직에 깊숙이 몸담지 않는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매 순간 새로 디자인되어야 할 관점이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한 목표에 도달한 순간까지만 함께한다는 원칙으로 계약직 신분을 유지하는 대신,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그 결과 그는 ‘한 달에 13번 월급받는 사람’로 알려지면서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그 숫자는 현재 20번으로 불어났다.

고정적으로 출근할 곳은 없지만, 세상 어느 곳이라도 스마트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다양한 사람과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어디든 남다르고 창의적인 그의 행복한 일터가 된다.

그는 ‘기업체에서 가장 초청하고 싶은 강사’로 손꼽히는 사람이 되어 다양한 청중들과 부지런히 만나며, 그들로부터 매일 새로운 관점을 얻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같은 영화와 같은 책을 봐도,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다.

관점 바꾸면,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해
고정관념, 신체 능력까지 틀에 가둬
당연함 부정하고, 질문 던져야 바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능력의 차이는 바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느냐?’에서 기인한다.

관점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수와 김치를 사 먹는 것이 언제부터 당연해졌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아마도 선뜻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나브로’,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나브로 바뀌는 세상을 읽어내는 힘도 바로 통찰을 이끌어내는 ‘관점’에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이제 그 도구의 해답은 ‘관점’이다.”

사람이 관점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관점을 바꾸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의식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인 능력까지 관념의 틀 속에 가둔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는데도, ‘나는 안 돼’라는 고정 관념에 갇히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뒤흔들라고 말한다. 자신을 수시로 재조립해 변화의 바람에도 제 가치를 해내는,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는 명품이 되라고 말한다.

둘째, 당연함이다.

‘당연’이란 무엇인가? 보편화된 관점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사는가,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당연함’이라는 우물에 갇히면, 우물 밖 세상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한 것을 부정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당연하지 않지만 미래에 당연해질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의 당연함 속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에 당연해 질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특별한 생각이 미래를 바꾼다.”

저자는 누구든지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고정관념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관점을 바꾼다면 당연함과 관성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을 부정하고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습관이나 관성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라도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당신의 관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 같은 상황, 같은 사물일지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진다.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까지 달라진다.

그러니 남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일을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 다른 사람과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그러면 놀라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자녀들, 하나님의 관점 가져야
하나님과 사람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
남다른 관점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
하나님 관점 보면 하나님나라 주인공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남다른 관점도 가져야 하지만, 더 중요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의 관점인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폭이 좁을 때가 많다. 한 면만 보고 한 방향을 볼 때가 많다. 또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폭넓고 깊게 볼 수 있다.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는 땅에서 바라보는 것과 하늘에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땅에서 바라보면, 내 눈앞에 들어오는 것만 볼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커 보인다.

하지만 하늘에서 이 땅의 것을 바라보면 어떤가? 전체가 보인다. 땅에서 볼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것이, 하늘에서 보면 작아 보인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늘에서는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건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남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영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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