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지명 / 갈릴리,



성서의 지명






갈릴리 어부들은 가난한 어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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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 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동유럽 러시아의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 와서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1971년부터 그는 둘레가 66km나 되는 호수 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하여 발표했습니다. 근 20년간의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19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도 정확했다’고 그는 고백 하므로서 성경의 이야기를 실제로 증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경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부의 발견은 이들의 의구심을 부끄럽게 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의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예로 당시 생선을 상당히 비싼 식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 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를 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을 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고고학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 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습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을 것입니다. 주후 1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룻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 길을 마다 않고 판로를 개척했을 것이며, 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발달되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 정어리, 잉어 등입니다. 정어리는 젖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톤을 차지합니다. 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습니다. 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슛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이라 불리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은 벳세다 출신입니다. 갈릴리의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주후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습니다. 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을 것이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실제로 벳새다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습니다. 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안드레, 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요 12:20-21). 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던 선주겸 어부입니다(눅 5:10). 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꾼들도 있었습니다(막 1:19-20).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까요?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갈릴리 호수 어업 현장에서의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아스 북쪽 5km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입니다. 좀 더 높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을 것입니다. 벳새다의 어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려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하여 설교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적대시 하였던 바리새인들중 특히 예루사렘의 제사장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대하는 비꼬는 말을 진실인양 할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제자라고 하는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김성 교수의 글)


* 예수 당시의 갈릴리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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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만들어낸 작은 구리 동전들, 즉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틀림없이 매일같이 갈릴리 마을의 큰 마당이나 시장에서 만지작거렸을 주머니 속의 동전들은 현대에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는 곳에서 흙을 체로 칠 때, 초록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녹슨 금속 조각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동전들을 잘 씻은 후 자세하게 조사해보면, 최초의 교회가 맞붙어 싸웠던 강력한 정치적 상징들이 드러난다. 즉 동전 한쪽 면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찍혀 있고(이스라엘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성서의 묘사를 상기시킨다), 또 다른 면에는 로마의 월계관이 찍혀 있는데(세계를 정복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헤롯 안티파스가 발행한 이 동전들은 그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메시아에 대한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빽빽하게 잉크로 기록된 문장들을 통해서보다는 왕의 휘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선언을 읽을 수 있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동전에 안티파스가 그런 문양(紋樣)을 새겨 넣은 것은, 그가 로마 황제의 공식적 왕관(월계관)의 권위 아래 이스라엘의 이 부분을 소유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교활한 방법이었다.

비록 헤롯 안티파스가 복음서에서는 단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인물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갈릴리와 요르단 강 동쪽의 베레아 지역의 통치자로 등극하게 된 과정의 이야기는, 그의 경우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라면 아마도 잊혀져버렸을 헤롯 왕조의 음모와 로마의 궁정 정치가 어떻게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데 역할을 맡았는지를 보여주는데,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런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기원전 20년경, 사마리아 귀족 출신의 말타스(Malthace)에게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그가 소년기에는 갈릴리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거나 혹은 그 주민들의 독특한 전통에 대해서는 평생동안 별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헤롯 왕가의 응석받이로 키워져, 예루살렘, 여리고, 마사다, 가이사랴 등지의 왕궁들 사이를 계속 왕복하다가, 열 살 정도가 되어서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기원전 4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어서 그의 형 아켈라오에 맞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다음,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태가 그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여섯 살 때였다. 헤롯 왕의 유언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또한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에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 가운데), 이 젊은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대담하게도, 아켈라오나 그의 또 다른 형 빌립(Philip)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선왕의 우선적 계승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 주장을 거절하고, 그 형제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채, 선왕의 왕국을 그 형제들 사이에 분할해줌으로써 유대의 정치적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즉 큰아들 아켈라오는 "부족왕"(ethnarch), 혹은 수장으로 강등되어, 유대, 사마리아, 그 남부의 이두매를 통치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다음 빌립은 "분봉왕"(tetrarch) 혹은 지역 통치자라는 칭호를 받아, 골란니티스, 트라코니티스, 바타내, 파내스(지금의 골란 지역,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가장 북부 지역, 레바논의 가장 남부지역을 포함한다)를 할당받았다. 안티파스는 비록 가장 큰 야심을 품고 있었지만, 역시 분봉왕 칭호를 받아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의 로마 속국 통치자가 되었다.

로마의 기준에 따르면, 안티파스의 몫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통치 지역도 변두리 지역이며 지리적으로도 그 두 지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고, 두 지역 어디에도 큰 도시가 없었으며,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자원도 없었고, 왕궁에 속한 대규모 농지도 없었다. 베레아는 요르단 강 동편에 그 강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길게 형성된 좁은 농지 지역으로서, 북부의 높은 지역으로부터 좁은 계곡들을 지나 뱀처럼 흐르는 요르단 강을 따라 메마른 요르단 계곡을 지나 사해 동부 해변으로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한편 훨씬 북쪽에 있는 갈릴리는 보다 비옥하고 게네사렛 호수 혹은 "갈릴리 바다"의 북부와 서부 해변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충분한 물과 어장(漁場)을 제공했다. 그러나 갈릴리의 북부 산악지역은 곡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억척스런 농민들만이 바위가 많은 고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갈릴리 남부지역에는 언덕들이 가파르지 않고 평지도 많아 대규모 농원에 적합했으며, 나사렛, 가나, 얍파, 나인 등지의 마을 농민들은 전통적인 농사법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의 소규모 포도원, 과수원, 가족용 채소밭을 가꾸었다. 100년이 넘도록 하스몬 가문과 헤롯 왕조의 관리들이 행정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지대"(Upper) 갈릴리와 "저지대"(Lower) 갈릴리 모두의 주민들은 적어도 로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다. 그들은 외부인의 개입을 원망하는 미개한 변경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나중에 이 지역과 그 주민들에 대해 "갈릴리의 두 지역은 항상 적들의 침략에 저항했는데, 그것은 아이들부터 전쟁에 단련되었고 언제나 그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며, 시골 사람들조차 용기가 넘쳤다"고 표현했다.

안티파스는 재빨리 로마 스타일의 질서를 부과하고자 했다. 그의 첫 번째 조치는 현대적인 행정센터를 확립하여, 경찰력, 시장 감시원, 세금 징수원들을 쉽게 인근 마을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갈릴리의 예전 행정수도였던 셉포리스가 최근의 폭동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안티파스는 그 도시를 현대의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왕궁, 국고(國庫), 문서보관소, 광장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건축공사가 끝났을 때, 그는 예전의 주민들이 바루스의 군단병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기 때문에, 충성스런 공무원들과 노동자들을 그 도시에 이주시켰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를 '오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 이름 붙였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제국의" 혹은 "황제에게 속한" 도시라는 뜻이다. 이 새로운 도시는 전망이 좋은 높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의 마을들과 농경지에 둘러싸여, 갈릴리의 유일한 중심 도시로서 지역의 시장, 세금 보관, 군대 사령부의 기능을 결합한 도시가 되었다. 셉포리스에 대한 최근의 발굴을 통해 안티파스의 대규모 재건사업의 증거가 드러났는데, 그 거리와 광장, 로마식 대형극장을 포함하여 인상적인 공공 구조물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요세푸스는 그 후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 이 도시를 "모든 갈릴리의 광채"라 불렀다. 그러나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는 단지 장식으로서만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분봉왕의 왕좌로서, 또한 안티파스가 어려서부터 존경하도록 배웠던 로마식 정부의 본부로서, 이 도시는 그 주변 농민들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세금 강화, 교역 확대를 통해 연간 수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다.

셉포리스에서 동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갈릴리 해변가 성읍 막달라(성서전통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에서 행해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헤롯 왕족이 다스리던 갈릴리에서 적어도 어업 생산이 급증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드러났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광경은 흔히 성경의 그림이나 교회학교 교재에서 어부가 홀로 노 젓는 작은 배 위에 서서 평화롭게 그물을 던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갈릴리 어업의 규모와 목적은 안티파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천 년 동안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는 일은 그 지역 농민들이 파종기와 수확기 사이의 중간에 비교적 한가한 때 했던 일이었다. 생선은 장거리 교역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기술이 발전되어, 어업이 산업 규모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시장이 커지게 되었고, 로마제국 전역의 도시인들이 맵고 냄새가 강한 '가룸' (garum)이라는 생선 소스와 생선의 머리와 몸통을 잘게 썰어 소금에 절인 스튜로 만든 '살사멘툼'(salsamentum)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두 가지는 일상적인 조미료로서 매우 값비싼 것이 되었다.

안티파스의 시대에 이르러, 막달라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어 흔히 "소금에 절인 생선의 성읍"이라 불려졌다. 따라서 예수 당시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단지 노 젓는 작은 배 위에서 일하던 농민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부들이 매일 잡아 올려야 했던 생선들의 엄청난 무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 생선들을 막달라로 보내 소금에 절이고 눌러 발효시킨 후 맑게 하여 '가룸'과 '살사멘툼'으로 만들어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해외로 팔았던 과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업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함에 따라, 몇몇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막달라의 발굴을 통해 그 성읍에서 비린내나는 일을 했던 건물들, 좁은 도로들, 저수조들이 드러났으며, 큰 저택에서는 그 주인이 자신을 부자가 되도록 만들어준 원천, 곧 배와 큰 물고기 모습을 자기의 저택 현관 바닥에 모자이크로 만들어 과시했던 모습도 드러났다.

그러나 어업의 발전만이 갈릴리의 농촌 풍경, 곧 올리브 과수원, 포도원, 채소밭, 농경지의 광경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속국 왕들처럼, 안티파스 역시 그 지역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했는데, 더욱 악랄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공사업에 투입하고 자신의 개인 영지를 개간하도록 만들었다.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매년 금(金) 200 달란트(약 9톤)를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물론 그의 영토에는 금광이 없었고, 단지 밀, 보리, 포도, 올리브, 채소와 가축만이 생산되었다. 따라서 그는 수확기에 모든 마을에 감시원, 세금 징수원, 군인들을 보내 자신의 몫을 확보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대략 전체 생산량의 1/3을 챙긴 것으로 계산한다.  

그 이전에 갈릴리 지역이 멀리 있던 제국들 혹은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왕국들에 의해 통치되고 세금이 부과되었을 때에는, 세금 징수가 한결같지 않았었다. 그래서 좀더 독립적인 주민들은 헤롯 대왕 시절에 세금 징수원들이 갈릴리 지역에 도착하면, 폭력으로 맞서거나 산으로 도피하거나 했었다. 그러나 이제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자신의 주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 갈릴리 중심부인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에 그의 관리들이 상주(常住)하는 상황에서는, 세금 징수가 더욱 빈번해지고 무거워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서 안에는 세리, 현물세 징수원, 통행세 징수원, 장원(莊園)의 청지기, 그림자와 같은 "헤롯 당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역사적 인물들은 단순히 악당들로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에는 안티파스의 궁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체제가 더욱 커짐에 따라, 갈릴리의 거의 모든 농민 가족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거나 알거지로 내몰리게 된 데에는 그 관료체제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갈릴리 이웃들과 친척들에게는 안티파스의 도시 건설 사업과 중과세가 단순히 그들의 생계에 대한 위협과 전통적 농경방식 및 어업방식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유지해왔던 마을 문화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 로마가 지배하기 시작한 초기 시대의 갈릴리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그 지역의 거의 전부가 농경지였으며, 구릉지대와 계곡들마다 농민들과 목동들이 작은 밭과 목초지 안쪽으로 조잡한 돌집들을 짓고 마당들을 잇대어 작은 공동체들을 열 군데 정도씩 이루고 있어서, 아마도 전체적으로 200개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들 가운데 일부는 철기시대 이스라엘 국가가 생성될 때부터 존속해왔으며, 어떤 마을들은 비교적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는데, 모든 마을들이 매우 비슷한 구조로서 단순한 집들(집의 크기나 구조가 특별난 것이 거의 없다)과 혼합경제, 곧 밭농사와 가축 사육, 직물, 가죽, 토기 생산의 구조였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결과는 성경의 최초의 법령과 사회법규에 규정된 생활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즉 가족과 친척 중심의 혈연 공동체들이 좀 더 큰 씨족과 지역의 부족들로 집단을 이루어 소규모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이것은 가뭄, 전쟁,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던 생활방식이었다. 

이런 농경문화는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걸쳐 자세하게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상들의 땅에서 가족이 생존하는 것으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옛 전통과 사회제도들을 간직하고 다음 세대에 충실하게 전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복음서들, 랍비 문헌들, 그리고 요세푸스의 단편적 묘사들을 통해 얻은 증거들에 따르면, 갈릴리 사람들 역시 조상들의 전통을 열심히 고수했으며,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들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약속들의 상속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창 22:17)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조상들의 율법, 곧 사회적 관계, 재산권, 개인 도덕, 축제일, 안식일, 안식년 등에 관한 율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추상적인 종교적 도그마나 개인윤리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지역 공동체들에게 현실적 헌법이며 행동강령과 지침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지키면 그들의 가족과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인 상황의 도전 속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믿어졌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갈릴리의 주민들도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왕들과 그 관리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무거운 짐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세금과 공물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신들의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에게 바치는 세금만이 유일한 강제징수는 아니었다. 갈릴리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 주민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상당부분을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십일조로, 첫 열매의 헌물로, 그밖에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한 여러 기부를 위해 떼어놓도록 가르쳐졌다. 1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성전을 위해 십일조 이외에도 매년 반 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반 세겔의 동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곡식이나 농산물과 교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뭄이나 병충해로 인해 수확이 대폭 줄어든 때조차도 세금 징수원들과 제사장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모든 타작 마당과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에 나타나 자신들의 몫을 챙겨갔다. 만일 특정한 마을이나 지역의 농민들이 헤롯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이 요구하는 세금을 기꺼이 바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처벌이 매우 엄했고 난폭했다.   

역사가 마틴 굿만(Martin Goodman)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문헌상의 증거들을 토대로 당시 유대의 마을들에서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는지를 분석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서들이 갈릴리의 경제적 상황을 묘사한 것과 끔찍할 만큼 똑같았다. 이스라엘 전역의 농업생산량은 아무리 작황이 좋은 해였다 해도 특별히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곡식 생산이 조금만 줄어도 수많은 농민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동시에 세금을 납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농민들이 다음 해의 수확을 담보로 해서 곡식을 빌려야만 그 다음해까지 가족들과 가축들이 버틸 수 있었다. 실제로 랍비문헌들과 당시의 법적인 문서들에 나타난 증거들을 보면, 헤롯 왕족 시대를 거치면서 시골 농민들의 부채가 급증하였으며, 기댈 곳이 없던 농민들은 심지어 헤롯 왕족의 관리들과 제사장 귀족들로부터도 대부를 받으려 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임시방편으로 당장 구멍을 틀어막는 방법은 조만간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농민들이 다음해의 수확 가운데 더욱 많은 부분을 떼어내어 빚을 갚기로 작정을 하면, 그 다음해에 더욱 큰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이 대부를 받기 위해 담보로 잡힐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토지뿐이었기 때문에, 그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가족이 오랜 세대를 거쳐 경작해왔던 그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수많은 경우에 이런 법적인 조치로 인해 한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자작농으로 살았던 농민들이 영원히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당시 급속하게 증가하던 귀족들의 대규모 농지에 빌붙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만일 성경의 율법이 엄격하게 집행되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15장 2절의 분명한 규정에 따르면, 매 7년마다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고 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성결법전(Holiness Code)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빚을 탕감해야 하며 재산권을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진정한 소유주이며,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 25:23). 그러나 헤롯 왕족 시대에 이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힘겹게 발버둥치는 농민들에게 꾸어 준 돈을 되돌려 받고 그 이자도 받아내기 위해, 이 명백한 율법규정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냈다. 랍비문헌에서 차압동의서(prosbul)로 알려진 이 계략을 종교 당국과 법 당국자들이 받아들임으로써, 개인 대출을 그 지역 법정에 등록한 경우에는, 심지어 안식년에 상환하도록 된 경우일지라도, 강제로 (법원을 통해 - 옮긴이) 상환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출이 더욱 쉬워짐에 따라, 부채와 차압의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한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족들, 씨족들, 부족들에게 적절하고 엄숙하게 분배했던 이스라엘의 마을들이 서서히 귀족 가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귀족들은 왕족들과 제사장 집단 혹은 유휴 동산을 많이 지닌 부자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안식일과 축제일에 정기적으로 읽던 율법 두루마리의 친숙한 출애굽 이야기와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현실이었다. 이런 경제적 상황은 영적인 위기를 초래했다. 즉 이스라엘 전역에서 많은 농민들이 생계가 위협 당하게 되자,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긴박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종교의례적인 설명을 하여, 백성들의 당면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들이 종교의례적 순결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 않았거나 레위기 법전에 명시된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온전하게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는 것을 귀신이나 악령의 조화 탓으로 돌렸는데, 민간전승에 따르면, 이들 귀신이나 악령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탐욕과 분란, 불행을 가져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폭력적인 보복에 대한 환상에서 위로를 찾았는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악을 씻어내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보여준 것처럼, 부자들과 악한 자들, 우상숭배자들에게 벌을 내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단순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통치를 확립할 것이며, 이사야의 예언처럼,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포악한 자는 사라질 것이다. 비웃는 사람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죄 지을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모두 끝장 날 것이다"(사 29:19-20).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은 이미 지평선 위에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처럼, 묵시문학 속에 그처럼 생생하게 예언된 사건들이 나타날 징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 하나님의 복수를 지금이라도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설교한 예언자들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기울였다.


호슬리 &실버만, 2장에서

 

 

갈릴리(Galilee) 

 

 

 샤론의 백합 |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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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동편에 잇는 남북 14마일 동서 9마일의 호수다.

(1) 구약에는 긴네렛(수13:27).

(2) 신약에서는 게네사렛(눅5:1).

(3)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요6:1) 단지 바다(마4:18).

(4) 풍랑을 잔잔케 함(마8:26).

(5)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4제자를 이 바다에서 불렀다(마4:18).

(6) 이 바다에서 일곱 비유를 가르쳤다(마13:).

(7) 바다 위를 걸으심(마14:22).

(8) 부활 후에 이 바닷가에 나타나서 그물을 배 우편에 던지라 햐여 많은 고 기를 잡음(요21:). 예수님이 갈릴리 도에서 행한 24회 이적 가운데 18회를 이 바다에서 행하셨다.

갈릴리 바다가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예수님이 전도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고 다음은 바다의 수면이 지중해 보다 208미터나 낮은 점이다.

 

갈릴리 바다 위의 그리스도 : 이 작품에 보이는 격렬한 표현주의로 보아 이 그림의 작자는 최고로 재능이 풍부한 틴토레토의 정신적 후계자였던 엘 그레코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확실히 흑암의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의 표현은 엘 그레코의 시정에 극히 유사하고 음화처럼 표현된 묵시록적 공간이 격정을 풍겨내고 있다.캔버스 117*168.5cm.

 

 

갈릴리(Galilee)

뜻:둥글다

1) 구약 시대에는 요단강 서쪽 팔레스틴의 북부를 보통 갈릴리라 하였다(수20:7,왕상9:11왕하15:29,대상6:26).


2)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스불론(수19:10-16)아셀 (수19:32-39)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차지 하였으며 여러번 혈투를 하였지 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엿다(삿1:30-33,4,).


3) 예수님이 12제자중 11제자를 이곳에서 택하였다.


* 신약 시대에 팔레스틴을 3도로 나누어 갈릴리의 경게는 동은 요단강과 갈릴리해, 서는 지중해 남은 사라리아도, 서는 지중해 남은 사마리아도 서북은 베니게로서 남북이 50마일,동서가 25마일 내지 35마일로 북방은 산지가 많고 남쪽은 평원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404개의 중소도시 및 촌락이 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의 중심지 였다. 제자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도 이곳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 마을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바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으며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 언덕 위에서 였다. 믿음이 부족했던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였다. 해면보다 그 수면이 200m 나 낮은 갈릴리 호수. 평상시에는 잔잔하고 맑으나 때때로 큰 폭풍으로 성난 파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호수 연안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 이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를 갖고 있어서 주변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남쪽으로 360Km나 떨어져 있는 네게브 사막의 세데보케(Ssede Boque)까지 물을 공급해 준다. 호수에서 처음 시작되는 송수관은 큰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로 크지만 점차 가늘어 지면서 흡사 사람 몸의 혈관처럼 이리 저리 연결되어 전 국토를 적셔 주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갈릴리 호수, 바다의 수면보다 700피트 아래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북부 납달리 지파의 땅에 속한 이 담수호수는, 하프의 모양같이 생겼기에 히브리어로 키노르라 불리었고 이는 게네사렛의 어원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이나 주후 1세기의 갈릴리를 연구한 고고학자는, 최근에 와서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배와 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돌들과 파도를 막기 위해 항구에 쌓은 방파제(눅 8:23)들을 갈릴리에서 발견함으로써, 과거 초대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21세기의 문턱에 올려 놓았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수산업이 크게 번창한 곳으로서, 남방 출신인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했던 것만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주후 1세기경의 갈릴리 호수내의 항구는 최소 15개나 되는데 그 중에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디베랴거라사 등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 모두가 항구에 속한 도시로 밝혀지게 됐다. 당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여러개 항구들을 통해 많은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배를 이용하여 동서편을 왕래하곤 했던 것이다. 로마시대 때에는 오늘날보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이 약 4피트 정도가 더 낮았다고 전한다. 특히,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던 곳으로서 가버나움 항과 막달라항 사이에 위치한 타브가 항구는 초대교회의 사적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타브가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소명을 주셨고(막 1:17), 또 부활 후 이른 새벽에 이 항구에 나타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유명하다. 타브가란 헬라어로 '일곱개의 샘물'이란 뜻으로 이곳에 따뜻한 미네랄 온천이 솟아올랐기에 전통적으로 가버나움 출신의 어부들은 겨울철에 꼭 이곳에 와서 어업을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타브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고 부활 후에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 제자들과 조반을 먹었던 장소로 확증된다(눅 5:1-7; 요 21:1-8).

갈릴리의 예수님의 발자취

갈릴리 바다 주변은 온통 예수님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 예수님은 특별히 갈릴리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가지셨다. '이방의 갈길리에 먼저 복음이 전해질 것을 암시한 이사야의 예언 (이사야 9:1)을 생각지 않는다고하더라도 공생애 이전의 삼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신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 갈릴리를 답사하는 우리는 발걸음 하나마다 예수님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 숨 한번 들이쉴 때마다 같은 공기를 숨쉬셨을 주님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갈릴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그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복의 개념을 뒤집어 엎으시고 , 새로운 복의 나라를 선언하신 팔복산이다 . 이 곳은 산이라기 보다는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이다 . 예수님은 여기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다 . 구릉 위에는 팔각형으로 된 교회가 있다 . 그리고 교회당 꼭대기에는 작은탑이 서있는데 , 이 교회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그 탑을 통하여 아홉 번째 복을암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 그가 생각한 아홉 번째 복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 그렇게 생각해 보면 팔복의 내용 전체가 아홉 번째 복에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내용 모두가 고난에 귀결되지 않는가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야 말로 모든 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작은탑이 교회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 그리고 그 고난의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온 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 오늘 우리 신앙의 마지막 표현은 바로 그 아홉 번째 복을 통해 드러난 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팔복 교회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을 뒤로 한 우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오병이어 교회였다 . 1930 년대 초에 독일 고고학 발굴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있는 다브가 (Tabgha)란 곳에서 매우 소중한 유적을 발굴했다 . 그것은 약 400 년경에 건축된 교회의 유적이었는데 , 그 교회는 아랍인에 의해 파괴되어 1000 년이 넘는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었다 . 특이 이 유적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교회 바닥에서 모자이크로된 오병이어 모자이크였다 . 그림은 두 마리의 물고기 사이에 둥근 떡들이 그려진 모습 이었다 . 독일 캐톨릭 교회는 발굴된 모자이크를 기념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교회를 지었는데 , 이것이 오병이어 교회인것이다 . 교회당 안에서 우리 마음속에는2천년 전 어느날 예수님 앞에 둘러앉아 있었을 군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어린아이가 음식을 내놓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람들 , 그리고 떡과 고기를 받아먹은 후 배신하여 예수님을 떠난사람들,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왔지만 , 그 보다 먼저 은총의 떡을 먹은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두워질 때까지 말씀을 들었다. 그 사모함과 인내심만으로도 떡과 고기를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오늘날 예수님께로 잘 가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으며, 짧은 한 시간 예배도 인내치 못하는 우리들에 비하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주여 저희에게도 생명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내려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 들러 모자이크가 그대로 새겨진 잔 두 개를 샀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잔을 깨지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오병이어 교회 근처에 우리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한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 검은색 돌로 지어진 이 작은 예배당은 베드로교회였다 . 교회 안에는 바닥에 넓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인은 그 바위 위에서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에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라기 보다는 예수님과 시몬의 대화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시몬은 아직 제자답지 못한 불완전한 자연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베드로는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날 바위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던 사람은 스승을 부인한 부끄러운 시몬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베드로라고 불리울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 시몬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시몬은 오고 오는 모든 시몬들의 대표이다. 그와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 모두와 예수님의 대화이다. 시몬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는 곧 우리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질문을 던지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먼저 사랑하신 후 던지신 질문이기에 그 누가 이 질문 앞에 숙연하지 않겠는가? 우리 일행은 그 바위 앞에서 모두 2천년 전으로 돌아간 듯 숨죽인 채 깊은 묵상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나는 그 질문에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지? 그러나 예배당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우리 마음이 어둡지 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묻기 전에 제자들을 숯불가의 만찬으로 초청하셔서 사랑의 떡을 먹이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김운성 목사)

 

 

 갈릴리바다가 위치하고 있는 중앙계곡은 지형적으로 갈릴리바다 자체와 갈릴리바다 주변의 비옥한 계곡형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의 계곡형 평원들은 갈릴리바다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벳세다평원,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 그리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야르묵-요르단평원 등이다.

 

1. 갈릴리바다

   동쪽으로는 바산고원, 서쪽으로는 하부 갈릴리산지로 둘러 싸여있는 갈릴리바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자연 담수호이다. 이곳은 일반 바다가 아닌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의 바다 개념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 바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얌'은 바다와 호수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물이 모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 뜰에 있었던 물두멍을 '바다'라고 이름하였던 것도 이런 '얌'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왕상 7:23) 갈릴리바다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비옥한 해변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1) 갈릴리바다의 명칭

   역사적으로 갈릴리바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갈릴리바다를 가리키는 데에 네 가지의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ㄱ) 갈릴리바다 (Sea of Galilee): 신약성경에서 이 바다는 주로 '갈릴리바다'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

     ㄴ) 긴레렛바다 (Sea of Kinneret): 구약성경에서는 갈릴리바다를 '긴네렛'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 바다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긴네렛'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하프 모양을 띄고 있는 갈릴리바다와 연관

                            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키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갈릴리바다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였던 '키나로트'

                            라는 도시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이곳에는 뵈니게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키나르'라는 신을 섬겼다.

     ㄷ) 디베랴바다 (Sea of Tiberias): 갈릴리바다의 또 다른 명칭은 '디베랴바다'이다. 이것은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 안티파스에 의하여 건설된 티베리아스'에서 기원된 

                            명칭이다. 안티파스는 당시 로마왕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빌어 이곳 이름을

                            붙였다. 신약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 경전에서도 이곳을 '티베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아랍사람들도 이곳을 '바하르 타바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ㄹ) 게네사렛바다 (Sea of Gennesaret):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갈릴리바다의 네 번째 명칭은 

                           '게네사렛'이다. '게네사렛'은 '지방장관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명칭은 갈릴리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르평원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신약시대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역시 갈릴리바다를   '게네사렛'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리바다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들은 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나 그 지역에 있었던 중요한 도시 이름들과 연관되어 있다. 헬라의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Strabo)는 갈릴리바다 남동쪽 야르묵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바다를 '가다라'(Gadara)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2) 갈릴리바다의 지형

   갈릴리바다의 남북간 최장 길이는 21km이며, 티베리아와 막달라 근처에서의 동서간 폭은 각각 8km과 12km가 된다. 갈릴리바다 전체 면적은 약 165km2 이다. 갈릴리의 해수면은 지중해보다 210m나 낮다. 그러나 갈릴리바다의 해수면 높이는 계절과 년간 강우량에 따라 기복이 있다. 갈릴리바다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49m인데, 서쪽보다 동쪽이 더 깊으며 남쪽보다 북쪽이 더 깊다. 이것은 동쪽에 있는 골란고원의 경사면이 서쪽에 있는 갈릴리산지 경사면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갈릴리바다의 전체 수량은 약 45억6천2백만m2에 달하고 있다.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요단강을 비롯한 그 외의 다른 유입 물줄기들은 모두가 깨끗한 담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바다에는 약간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대략적으로 1리터의 물 속에 약 250-400mg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염분 농도는 건조기에는 조금 더 높아지고, 우기에는 낮아진다. 갈릴리바다 물에 포함된 염분은 바다 주변과 바다 밑바닥에 있는 광천수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성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요인과 더불어 건조한 날씨로 인한 물의 증발도 염분 형성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을 갈릴리바다 속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특별 수로를 만들어 갈릴리바다 아래 지역으로 빼내고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지역은 언제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제2 성전시대 갈릴리 주변에는 어림잡아 5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갈릴리바다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은 특별히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였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유대전쟁사 3:7-8), 이곳은 비옥하고 좋은 토양 덕분으로 잘 맺지 못하는 과실이 없을 정도였으며,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며 살았다. 이곳은 기후도 알맞아 많은 종류의 생물이 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놀라운 혜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갈릴리바다 근방에는 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바다 주변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식으로 지어진 궁전, 원형 경기장, 극장, 그리고 목욕탕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버나움, 타브가, 고라신, 아르벨, 벳세다, 수시타, 엘하마, 가다라 같은 도시들의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번창하였던 유대인 지역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들이다. 높은 문명 수준을 지녔던 헬라와 로마시대의 번영과 갈릴리바다 주변에서 꽃피었던 신약성경 및 초기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탈무드와 같은 경전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의 영적 유산은 갈릴리바다 주변의 좋은 자연의 조건 속에서 크게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갈릴리바다 주변은 300m 이상 되는 가파른 산지로 둘러 싸여 있어 마치 깊은 분지 속의 바다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산지의 급경사는 주변 산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급작스러운 돌풍으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는 특히 헬몬산의 차가운 공기가 나무가 별로 없는 완만한 골란고원의 경사지를 거쳐 갈릴리바다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돌풍현상은 오늘날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크게 요동시키는 갑작스러운 폭풍은 어부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돌풍으로 일어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을 보여주셨다.(마 8:26) 

   갈릴리바다에는 많은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를 내는 메기종류인 '바르부트'도 이곳에서 서식한다. 호수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아들이는 어업은 주변의 비옥한 평원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이러한 좋은 여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바다 가까운 주변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다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 근처에서 발견된 인간의 두개골은 1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의 인간 거주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신약성경과 유대인의 탈무드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헬라와 로마 통치시대에 갈릴리 해변가에는 많은 유대인 어부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갈릴리 주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았던 어부들이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는 이곳에서 개발된 저장하는 방법에 따라 상품화되었고 이런 사업은 이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는 로마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잘 알려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