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기


신구약 중간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구약의 마지막 책들과 그리스도의 출현 사이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기” (또는 “신구약 사이의 기간") 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400년의 침묵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때 발생한 일들의 대부분은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다니엘 2장, 7장, 8장, 11장을 참조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기원전 532-325년경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는 일도 허용했습니다(역대하 36:22-23; 에스라 1:1-4). 
이 기간은 구약 성경 시대의 마지막 100년과 중간기의 처음 100년을 포함합니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고요한 것처럼, 이 기간은 상당히 평화롭고 안락한 시기였습니다.

중간기가 시작되기 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Darius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헬라제국의 통치를 확립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이었고 헬라 철학과 정치학을 잘 배웠습니다. 
그는 그가 정복한 모든 땅에 헬라 문화를 장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로 인해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은 70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헬라적 생활 방식을 강력하게 장려했습니다. 
헬라 문화는 매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경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일련의 후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에 이르게 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기원전 167년경 그는 합법적인 제사장직을 무너뜨렸으며, 불결한 동물들과 이교도 제단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했습니다(마가복음 13:14를 보면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행동은 종교적인 강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카비 형제들과 하스모니안 가문이 주도한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으로 합법적인 제사장들이 회복되었고 성전이 복구되었습니다. 마카비 항쟁의 시기는 전쟁과 폭력과 내란의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약 63년 경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유대 전체를 시저의 통치 하에 두었습니다. 
로마 황제와 상원 의원에 의해 결국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에 세금을 부과하고 유대인들을 통제하며, 종국에는 메시아를 로마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제 유대 지방에는 로마, 헬라, 히브리 문화가 혼합 되었습니다.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전통을 모세 율법에 추가하였고, 마침내 자신들의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마가복음 7:1-23 참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종종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공허한 율법주의와 긍휼의 마음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들과 부자들을 대표했습니다. 
산헤드린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속한 모세의 책들 외에는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기를 거부했고, 헬라 사람들을 크게 동경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헬라 문화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간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유대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 모두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다신론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인과 헬라인은 이제 그들의 신화에서 벗어나 헬라어와 라틴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히브리어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낙담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정복 당하고, 억압 받고, 더럽혀졌습니다. 소망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믿음도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과 그들의 신앙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시아의 등장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를 깔았고 (복음의 전파를 돕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공통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여행하기에 (복음을 더 편만하게 전파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이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분을 찾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예언을 성취할 것을 인식하고 대망하였습니다. 로마 백부장, 지혜자들,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몇 가지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간기의 "침묵의 400년"은 지금까지 전해졌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개요

시작하는 말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period)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 말라기 선지자에서 신약 세례 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읽고 마태복음을 펼친 독자는 순식간에 약 4세기를 뛰어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사자’1)를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 전까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침묵하셨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혹은 ‘중간기’(中間期)라고 한다.

(1)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王朝)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독자를 거대한 로마제국으로 안내한다. 독자들은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게 되고 수전절(修殿節, Hanukkah)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 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 이해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는 신구약 중간사의 의의와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중간사 기간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 강대한 왕도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크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했다.2) 

또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공회를 만나고,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읽으며, 서기관들의 활동을 대하게 된다. (중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타인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셋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상의 이런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신구약의 중간역사 때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와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3)

그러나 ‘중간사’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다. 자료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 H. 야거스마는 “이 기간의(편집자 주, BC 330년-AD 135년)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주 상당히 많은 불확실한 것들과 가정들로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기간 에 이스라엘 역사의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점이 그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4)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동시에 그는 ‘중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외경(外經, Apocrypha), 위경(僞經, Pseudographia), 필로의 저작, 요세푸스의 저작, 헬라와 라틴저작, 사해사본,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랍비 문헌, 고고학의 증거 등을 말한다.

(2)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성경은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인가?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14 AD)부터 소위 ‘오현제(五賢帝)’5)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叛亂)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은 이 기간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工兵)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步兵)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이 준비해 놓은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언어의 통일과 구약 70인 역 탄생

B.C. 336년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Macedonia) 도시국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필립 2세(Philip II, BC 382-336)가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 전쟁 전문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필립 2세는 암살당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였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사람이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세계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6)고 했다.

또 통일된 헬라어로 구약성경 ‘70인 역’(七十人譯, LXX, Septuagint)이 탄생했다. ‘70인 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래서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

이 ‘70인 역’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들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경우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이 ‘70인 역’ 구약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Κοινὴ Ἑλληνική)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하셨으나 여전히 이같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를 조성해가셨다.

1) 말라기의 뜻, 말라기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9.
3) 같은 책, 11.
4) H.야거스마,『신약배경사』(솔로몬, 2004), 19-20.
5) 오현제는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 13대 트라야누스, 14대 하드리아누스, 15대 안토니우스, 16대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6) 김병국,『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남북분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면서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신(新) 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9)과 신(新) 바빌로니아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 이 연이어 부상(浮上)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Neo-Assyrian Empire)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Neo-Babylonian Empire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으나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넘어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BC?-727,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다.”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라고 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는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바뀌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人頭稅)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한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親) 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5)라며 “(친 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라고 했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했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동맹군의 칼이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에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 사람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한 유대 군사가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앗수르 인들을 다메섹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도록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침공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Sargon II, BC 765-705)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Megiddo)는 완전히 무너졌고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세워졌다. 하솔(Hazor)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Shechem)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10)고 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2)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으나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Sennacherib, BC 740-681), 에살핫돈(Esarhaddon, BC ?-66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27) 때에 본격화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Shamash-shum-ukin, BC ?-648)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통치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사르 이스쿤(Sinsharishkun, BC ?-626)과 이 와중에 반란자 아슈르 에텔 일라니(Ashur-etil-ilani, BC ?-627) 사이에 일어난 수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新) 바벨론의 창건자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58-605)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神)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3)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Necho II, BC ?-595)는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했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애굽의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애굽의 느고는 2세는 다시 한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BC 634-562)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 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Nebuzaradan)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한다.13)

(4) 유대 땅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쳤던 무리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한 이스마엘이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했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 역시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 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3. 바벨론 멸망과 유대인 포로의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 제국은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Amel-Marduk, BC 562-560,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였다.1)  바벨론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2)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로 결국에 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Belshazzar, BC ?-539, 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왕위를 넘겼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Akitu)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했다.

(3)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Media, BC 727-549, 성경에는 메대)였다.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Persia, 성경에는 바사)에 고레스(Cyrus II of Persia, BC 601-530)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Kingdom of Lydia,  about BC 1200-546)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곧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3)

국력을 견고히 한 후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는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한 뒤 고국 바벨론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 of Media, BC 584-559?)가 많은 양의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태몽을 꾼다. 마고스(magus, 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그 후 딸 만다네를 보낸 첫해 아스티아게스는 또다시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Harpagus)에게 자신의 딸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4)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사리아나와는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을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정복민이 자신들의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굴복당한 이방 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자신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회유(懷柔)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 

고레스는 이같이 각 나라의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레스의 피정복민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5) 유대 포로의 귀환

하나님은 고레스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말씀대로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국으로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편집자,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Persian Empire, BC 539-323)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 초대 왕 키루스 2세(성경에는 고레스) 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고 새로운 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 BC 550-486)가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Xerxes I, BC 519-465, 성경에는 ‘아하수에로’)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1)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리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Greece)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먼저 1차 침공은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Mount Athos)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때렸으며 수많은 함선이 아토스에 내동댕이쳐졌다. 3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었다.”1)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Athens)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치고 전진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 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으나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 전사했다.3)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였다. 그야말로 대군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은 이렇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2)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고레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스(Cambyses II, BC ?-522)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of Persia, BC ?-424)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1)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5. 알렉산더와 그리스제국

그리스(Greece)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Athens)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Sparta)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들 중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衰落)했다.

 (2)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로 테베에서 마게도니아(Macedonia)로 넘어갔다. 마게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전쟁의 천재라고 하는 필립포스 2세(Philippos Ⅱ or Philip Ⅱ, Philip of Macedon, BC 382-336)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暗殺)당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통치자로 등극한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들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으로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Darius III, BC 380-330, 페르시아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Tyres)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 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때 두로 사람 8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1)고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대제국의 대왕(大王)이 되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니아 사람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 전파자로 기록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2)고 밝혔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1.
2) 김병국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6. 애굽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or Alexander The Great, 356-323)이 이룩한 그리스제국(Greek Empire, BC 332-323)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1) 분열된 그리스 대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Roxana, BC 340-310)에게서 유복자(遺腹子)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성년이 되기 전 록산나와 아들(Alexander IV of Macedon, BC 323-309)을 살해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Ptolemy Ⅰ Soter, BC 367-282),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5-297), 리시마코스(Lysimachus, BC 360-281), 셀류쿠스(Seleucus I Nicator, BC 358-281)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 대왕을 뒤이어 그리스제국의 왕이 된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 382- 301, 알렉산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통에 모든 도시는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했다.

(2) 애굽 프톨레미 왕조 지배하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애굽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는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처럼 가장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프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던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주변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프톨레미 왕조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했으나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해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 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문화권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했다.

비록 애굽의 지배는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가 프톨레미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기까지 약 120년간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구약 ‘70인 역’의 탄생

구약 ‘70인 역’(譯)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다. ‘70인 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 308/9-246)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 역’ 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문화권에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때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LXX Bible: Joshua, Egypt, late 2nd C. 몰랐다. 그러므로 만약 ‘70인 역’ 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해도 못 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 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 프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 65-63)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미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Carthage)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1)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뜨린다는 한니발의 평생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賠償金)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전쟁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전(神殿)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Seleucus IV Philopator, BC 218-175)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극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Epiphanes)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 한 레위 지파도 아닌 야손(Jason, 주전 174-172 제37대 대제사장, 셀류쿠스 지배 시 극악한 대제사장 중 하나)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Menelaus)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과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이때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무차별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 된 이교도들과 유대교를 배교 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안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했다.3)

안티오쿠스 4세는 또 안식일 금지, 할례 금지, 율법서 소지 금지 등 유대인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勅令)을 내렸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과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사람들이었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Zeus, 그리스 최고의 신)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카베우스’(Maccabaeus)라는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 급기야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8. 마카비의 반란(Maccabean Revolt, BC 167-160)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지적한다.1)

(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경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모딘(Modein)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 이방신(異邦神, 그리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Modein) 지역 하스몬 가문(Hasmonean)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던 마타디아(Mattathias, BC ?-166)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러 제단으로 나왔다. 이를 본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험준한 산으로 숨었다.

이후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하고 회당을 재건했다.”3)라고 말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BC 166년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 유다(Judas Maccabeus, BC ?-160)가 뒤를 이었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Maccabee, 망치질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2) 마카비의 승리와 성전정화

마카비(Maccabees)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과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 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아스(Lysias)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Lysias)는 그의 부하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 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고 오히려 노예 상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3)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 드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요 10:22)이라 부른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Eleazar Avaran, BC ?-162)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본국으로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 군대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의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Alcimus, High Priest of Israel for BC 162-159)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지원군과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유다 마카베오스는 결국 이 전투에서 BC 160년 장렬히 전사했다.(*) 글쓴 이 / 조믿음 기자

출처, http://www.bami.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53&item=&no=417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 편집자 주 > 이 글은 웹진 ‘바른 믿음’에 연재된 것을 본지에 맞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과 관련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새길: 경기도 과천시 별양상가2로 14, 3층 314호 제호: 바른미디어 TEL: 050-6558-0253, FAX: 050-4092-0935, E-mail: bareunmedia@naver.com

<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 BC 140-37 > 각 이름 아래 연도는 재위 기간





신구약 중간시대란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관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에 직면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구약 시대의 끝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전 43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 히브리어 성경은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주제는 바빌론 유배를 시작으로 외국 제국의 통치 기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성서 중간기에 전개될 복잡한 역학의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헬레니즘 영향의 부상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는 급속도로 퍼졌다. 이 헬레니즘 영향은 유대를 포함하여 알려진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어, 철학, 관습의 도입은 유대 민족에게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부는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반면, 다른 일부는 저항하며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카비 반란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 인구는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167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카비 반란(기원전 160-XNUMX년)이 일어났고, 유다 마카베우스가 이끄는 유대인 전사들이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재헌납했습니다. 이 행사는 하누카 기간에 기념되며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유대인 독립을 향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스몬 왕조의 성립

마카베오 왕조의 성공으로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배 가문은 유대를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갈등과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신약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민족 사이에 다양한 종파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유대 종파의 발전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집단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의 초점은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종파와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신약성서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두개인들은 특히 사제 계급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고, 이는 종종 그들을 바리새인들과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집단들 간의 신학적 차이점을 이해하면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대립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센느

에세네파는 좀 더 금욕적인 그룹이었으며 종종 사해 두루마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물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공동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순결에 대한 강조와 다가오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당시의 종교 풍경에 독특한 관점을 더해주었습니다.

로마 상황

로마 정복과 통치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은 유대를 정복하여 유대인의 경험에 새로운 복잡성을 더했습니다. 로마 통치는 유대인들 사이에 새로운 세금, 정치적 혼란, 억압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로마의 권력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의 영향

로마가 확장되면서 로마 고유의 관습과 관행이 도입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의 철학, 문학, 관습을 포함하는 그리스-로마 문화가 유대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혼합은 초기 기독교 운동으로 퍼져 복음이 공유되고 이해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 문헌 및 문학

외경의 발전

신구약 중간기에 현재 외경이나 신명기로 분류되는 여러 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유대 민족의 생각과 신앙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종종 예언, 지혜,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칠십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유대 성경을 이방인 세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칠십인역은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것처럼 신약성경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 시대로의 전환

기대의 시간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 민족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로마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기독교 전파를 위한 비옥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은 신구약 중간기에 배양된 기대와 믿음 위에 직접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 회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혁명적인 관점은 유대 공동체와 신앙을 탐구하는 이방인 모두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결론: 시대 간 연결

신구약 중간기는 신약성경의 배경을 형성하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사건, 갈등, 종파는 초대 교회가 어려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대를 이해하면 역사를 통해 짜여진 신앙의 태피스트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Q. 신구약 중간기는 어떤 시대였나요?
A.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간 지속되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Q. 신약을 이해하는 데 왜 신구약 중간기가 중요한가?
A. 이는 신약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믿음과 관습에 영향을 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구약중기에는 어떤 주요 사건이 일어났는가?
A. 주요 사건으로는 마카베오 반란, 하스몬 왕조의 등장, 바리새파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다양한 유대 종파의 설립 등이 있습니다.

Q. 바리새인들은 누구였나요?
A.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유명한 유대인 종파로서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Q. 헬레니즘은 유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헬레니즘은 그리스어를 도입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 이러한 관습이 전파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수용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질문. 사해 두루마리는 무엇이었나요?
A. 사해 두루마리는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인 문서로, 에세네파가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Q. 어떻게 로마의 통치가 유대에 영향을 미치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이었나요?
A. 로마 정복은 정치적 억압, 무거운 세금, 문화적 영향력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Q. 칠십인역이란 무엇입니까?
A.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질문. 신구약 중간기 동안 유대의 주요 종파는 무엇이었습니까?
A. 주요 종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포함되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신앙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신약성경을 어떻게 형성했습니까?
A.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초대교회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었는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400년 요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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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ngmocsa 날짜22-04-26

본문

신·구약 400년 중간사 요약
• 제1장 페르시아의 유대 통치와 알렉산더 대왕의 등극(BC 539-332년)
• 제2장 초기 헬레니즘과 마카비 혁명(BC 332-160년)
• 제3장 하스몬 왕가 1(BC 160-67년)
• 제4장 하스몬 왕가 2(BC 67- 37년)
• 제5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1(BC 37-20년)
• 제6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2(BC 20-7년)
• 제7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3(BC 7-AD 6년)
• 제8장 헤롯 왕국의 분할과 제1차 로마 총독 시대(AD 6-41년)
• 제9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시대(AD 41-44년)
• 제10장 제2차 로마 총독 시대(AD 44-70년)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북왕조에 속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 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했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종교 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B.C. 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 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후에 느헤미야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와 단 일 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세스, 다리오 2세였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 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를 알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그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 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 냈다. 그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키고 방향을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로 돌렸고, 시돈과 비블리스, 아라두스를 정복하였고, 7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두로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던 중 당시 제사장이었던 야두아가 그를 맞아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어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믿게 되어, 이후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332년 그는 애굽을 침략하였고,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설립했고 그곳에 동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하는,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는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이전 페르샤의 모든 지역을 평정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는데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년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미 그의 제국 안에는 그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많은 친가와 처가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에서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 그리고 리시마쿠스는 제 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결국,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카터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 애굽을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 없이 정복당하였고, B.C. 315년에는 프톨레미의 적수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 전투 이후에는 프톨레미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다.

당시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고, 301년의 입수스 전투에서는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고,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아,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智)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319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좋은 기간이었지만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의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하였다.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316년에 프리기아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301년 입수스 전투 후에 다시 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부터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 이후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게 된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지만 이후 안티오쿠스가 로마군과의 서머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 받게 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세류쿠스 4세의 통치 시기에도 동일했고, 셀류쿠스 4세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의 집정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만술과 가장함과 숙달된 통치를 행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제사장직을 뇌물을 통하여 사들이는 이들이 발생했고,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에 적극적인 자들의 충성으로 인해 곳곳에 체육관과 경기장, 대중목욕탕 등이 생겨났다.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강한 반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뇌물에 의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상실한 야손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고, 이 보고를 접하게 된 안티오쿠스 4세는 격노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약탈을 했고,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하였다. 무거운 세금을 유대인들에게 부과하였고,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 추수 열매의 절반,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들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서기관들에 의해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그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매우 엄격하였고, 이 집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고,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지방 수령을 죽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이 독립 운동은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우스라는 별명을 가짐)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는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을 갖춘 압도적인 수리아 병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이 맞게 되었다.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예루살렘만을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하나씩 수리아군으로부터 탈환해 나갔고, 급기야 수리아로부터의 화친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수리아 내의 분쟁이 요인이 되어 수리아 장군 트리포의 계략에 말려 무참하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시몬은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로마와의 평화 협정체결을 위해 사자를 파견하고,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반역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므로 마카비가의 다섯 형제의 영웅적인 헌신과 투쟁은 시몬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시몬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수리아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은 틈을 타서 독립을 되찾고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시딤들과 마찰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바라새, 사두개, 에세네 등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통치하면서 보다 더 친 헬라적인 정책을 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구금시켰던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한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에 의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이었고, 그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 등 왕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반란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원성을 샀고, 결국 그는 죽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했다.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친 바리새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생전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였지만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두매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구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알렉산드라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에서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스몬-왕조-가계도 (1)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유대의 역사에 있어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로마의 통치 기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할 수 있다.

7.1. 이두매 왕조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했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총독이 되자,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유대군의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씨저의 사후 그들은 다시금 가이사(Cassius)에 협력하여 그의 호의를 얻게 되어 헤롯은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 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24년에 단독으로 유대의 왕이 된다.

7.2. 헤롯 대왕
왕이 된 헤롯은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 로마에 충성하였고,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였고, 결국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반대자들을 치밀하게 제거하였고,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그에 의해 제거 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고, 많은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해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1년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마지막 10년간은 다시 정권 쟁취를 위한 가족 내의 암투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세아들, 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에 의해 각각 분할되어 유대, 갈릴리와 베뢰아,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된다.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지 못해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헤롯이 남긴 복잡한 문제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혐오감을 샀고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관련되어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으로 인한 세례 요한의 지적으로 그를 투옥하고 참수한 인물이며 빌라도에 의해 보내진 예수님을 심문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욕에 의해 로마에 갔다가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헤롯 빌립은 갈릴리 동부와 남동부 지방의 분봉왕이었고, 헤롯의 세 아들 가운데 최상의 통치자였다.

7.4. 로마의 총독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고,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와 그곳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그리고 중요한 사건의 재판 등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가 아니라 씨저에 속한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 초과된 금액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고, 외세에 협력하는 자들이라 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투옥 되었다가 친분을 쌓았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고, 결국 A.D. 44년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7.6.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는 아버지의 영토가 아닌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나 네로에 의해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지역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게 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7.7.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총독들은 모두 7명으로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고 이 기간 동안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에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보다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려 했다. 이 시기의 유대는 로마에 대한 반란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전투를 치렀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고도 피어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총독 플로루스의 통치시기에 터져 나오게 된다.
총독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약탈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였고, 헤롯 아그립바 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했지만 도중 네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로마로 회군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4개 군단을 맡겨 예루살렘으로 출정시켰고, 결국 4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 상실을 가져왔고, 성전 제사는 중단 되었으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었던 제사장직은 소멸되게 되었다. 또한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산헤드린 역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독립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게 되고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때까지 종식되게 되었다.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바리새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리새파의 유래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 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고, 자신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와 이방인들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의 교제를 거부했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는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이 이마와 손목에 매어졌고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고, 유대인의 거의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고,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구전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나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전승까지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그들의 모습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길게 기도하며,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며, 그들의 경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식상의 결례를 많이 행하고 자만하며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 받고,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 두 번째의 중요한 종파였다. 이들은 구전 율법을 주장하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종 이들에 대한 명칭은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보통의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A.D.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들은 지배계급에 머물러 있었고, 성전을 본거지로 사용했다.

3. 에세네파
이들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보다 더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마카비가의 요나단의 때에 활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들은 주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들의 숫자는 예수님 당시 약 4천명 정도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 파에 가입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세 개의 상징,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아 1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치고 다시 2년간의 견습을 통과한 후에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았고, 대부분 독신생활을 했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에 의해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생활하였다. 노예가 없었고 기름 붓는 일이 금지 되었으며 매 식사 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해야 했고, 죽은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옷도 식물성 섬유로 된 옷을 입었다.

4. 열심당
이들은 공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조공에 반대했다. 파이퍼(Robert Pfeiffer)에 의하면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이듯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다”라고 한다.

이들은 마카비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본받았기에 열심당이라고 불려 졌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민 25:11)의 본을 좇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A.D. 66-73에 있었던 전쟁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나 A.D. 73년 5월,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면서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A.D. 1세기 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 2개 구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 번역본이 필요했으며,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역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헬라어역의 구약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70인경은 구약의 본문 비평에 있어 중요한데 이것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해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대한 환한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들인데, 사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의 두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 바르 코흐바에 의하여 일어났던 제 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1962년에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국동양연구학회가 근처의 동굴들을 탐사하여 발견한 아람어 파피루스의 연대는 B.C. 375~33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제1, 제4, 제11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또한 다른 쿰란의 동굴들은 성경적 자료들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특히 제11 동굴은 현재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들과 약간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두루마리와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 등이 발견 되었다.

3. 외경과 위경
구약의 외경은 길이와 주제, 표현방법이 각기 다양한 14권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영어역 성경들이 수록한 외경의 순서는 흠정역(King James)의 번역자들이 익숙한 구약의 라틴어역을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약 정경, 곧 팔레스틴 사본(맛소라 사본을 따르는)과 알렉산드리아 사본(70인역을 따르는)을 가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지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외경이 구약 정경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외경에 정경적 지위를 주었다.

70인경에서 외경에 속한 책들(에스드라 2서 제외)은 항상 정경적인 책들과 나란히 동일 계급으로 취급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외경 가운데 어느 한 책도 정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외경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는데 트렌트 종교회의는 다양한 외경들의 정경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루터는 외경 가운데 그 어떤 책의 정경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여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위치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성경에서의 외경의 제거는 한 제네바 성경에서 외경을 생략시켰던 청교도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1629년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외경이 없이 출판이 되었고, 1827년 이후 점차 외경은 무시되고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외경이 영감된 정경의 일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역사적 면에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외경들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세기들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의 영적이며 철학적, 지적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제1장 신·구약 중간 시기

1. 중간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거쳐 세 왕이 통치하다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다.

- 사사시대 → 통일왕국시대 → 분열 왕국시대

○ 북왕국은 B.C. 722년 당시 세력이 크던 앗수르에 멸망하여 그 백성들은 흩어졌고, 그 후 남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

- 유다 시대 → 포로시대

○ 그 뒤 B.C. 536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인을 이끌고 유다로 귀환하였다.

- 포로 귀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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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말라기로부터 마태 사이에는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중간 시기”.

-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아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유다의 바벨론 포로와 메시아 탄생 사이의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해 주셨다.

2. 중간시대의 중요한 변화

구분 시기 중간시대 이전 중간시대 이후
정치적 변화 바사(페르시아) 통치 로마 통치
사고적 변화 동양적 사고 서양적 사고
언어적 변화 히브리어 ⇨ 헬라어 ⇨ 아람어

3. 정치적 변화

(1) 바벨론 통치 : B.C. 612~536년

○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 남왕국 유다를 정복

○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불태워 파괴, 남왕국 완전 멸망

○ 그 후 유대인들은 70년간 포로생활(B.C. 606년 최초의 정복으로부터 70년, B.C. 586년으로부터는 50년간)

- 예루살렘 성전 대신에 회당을 만들어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

회당은 나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장소가 되고(눅 4:15),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됨(행 6:9 스데반, 행 9:20 바울).

-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동안 율법을 재해석하는 서기관 그룹이 생겨남.

○ B.C. 536년 어느 날 다니엘은 바벨론 벨사살 왕의 잔치에 부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신비스러운 손에 의해 벽에 쓰인 글을 해독하였는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되었고, 바벨론 도성은 바사 군에게 함락.

(2) 바사(Persia) 통치 : B.C. 536~332년

○ 바사 왕 고레스는 B.C. 536년 유대인들에게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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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차 복귀 : B.C. 536년 스룹바벨 인도하에 42,360명 복귀

➡ B.C. 515년 예루살렘 성전 재건

② 2차 복귀 : B.C. 458년 에스라 인도하에 5,400명 복귀

➡ 율법 개혁운동

③ 3차 복귀 : B.C. 445년 느헤미야 인도 ➡ 이스라엘 성곽 재건

○ 바사 통치 중 B.C. 400년경 구약의 예언 종식, 400간의 중간기

○ 유대교의 발생

- 연혁 : 에스라의 율법 개혁운동 이후 유대교 발생

- 교리 : 모세오경을 신앙과 생활의 원리로 삼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규칙 제정

- 유대주의(Judaism)의 세 기둥

① 정경(Cannon) : 교육의 내용

② 회당(Synagogue) : 교육의 환경

③ 랍비(Rabbis) : 교육의 주체

(3) 헬라 통치 : B.C. 332~167년

○ 알렉산더 대왕은 B.C. 333년 바사의 다리오Ⅱ세를 격퇴한 후 B.C. 332년 다시 바사 군 격퇴, 바사 붕괴

○ 헬라 통치 시의 업적

- 고대 세계에 70여 개의 상업도시들을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주시켜 희랍 문화를 전파.

∙ 유대인들도 분산시켜 버림(흩어진 유대인, Diaspora)

∙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도 회당을 만들어 모여(행 13:5) 후에 바울 전도여행 시 복음전도의 거점.

- 헬라어가 고대사회에 넓게 확산되어 세계 공용어로 사용(코이네)

∙ 예수님 이후 복음의 확산 시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됨.

∙ 언어의 통일에 따라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고(70인 역),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됨으로써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

○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헬라 제국은 분열하게 되었고, 결국은 프톨레미(Ptolemy), 셀루커스(Seleucus) 두 장군에 의해 양분.

- 팔레스틴은 처음에는 애굽을 근거지로 한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리아의 다메섹을 수도로 정한 셀루커스 왕조에게 복속.

-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평화를 누렸으나, 셀루커스 왕조(수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받기 시작.

-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호와 예배를 폐하고 이방신 예배 강요

- 더욱이 제사장 ‘야손’이 황제에게 유대의 희랍화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과 돈을 들여 대제사장이 됨으로써 유대의 본격적인 희랍화 시작.

∙ 예루살렘 성전에 Zeus신상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성전 예배를 중지시켰으며 희랍 신에게 경배토록 강제

∙ 완전한 미의 조화는 육체미라고 하면서 할례 금지

∙ 안식일 금지, 성경 소지 금지

※ 성직자의 타락을 참으로 참담한 것.

- 이러한 타락에 대해서는 진리에 근거해서, 그러나 가능한 한 평온한 방법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 그러나 분명하게 시정해 나가야 한다.

- 여기에는 기도와 먼저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유다의 독립 : B.C. 167~63년

○ 이에 따라 유대에서는 헬라화 운동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핫시딤운동(Hasidim, 경건한 무리들)으로서 나중에 “바리새파”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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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모딘 지역 마카비家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와 그의 5명의 아들, 유대인 청년들은 헬라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도(이 시기를 “마카비 시대”라고도 함).

-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아 Zeus신상 없애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성전 성결 후 하나님께 봉헌

∙ 이때 성전에 촛불이 켜진 것을 기념해서 “빛의 축제라고 해서 「하누카 명절」을 지키게 됨.

∙ 이것이 신약시대의 수전절(修殿節, 요 10:22), 봉헌식의 기원

- 요나단 마카비 때 수리아와 평화조약 체결한 결과 유대의 종교적 자유 허락, 수리아는 요나단 마카비를 대제사장 및 유대 통치자로 인정

- 시므온 마카비 시절인 B.C. 142년경 정치적 독립 쟁취

○ 마카비 독립운동 뒤 3대 종파가 생겨나기 시작.

① 바리새파

-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 개혁자들을 조상으로 하여,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주력. 보수주의자.

- 희랍화에 대항하던 핫시딤의 후예로서, Pharises의 어원 자체가 “갈라진 사람들(Hellenism으로부터 갈라져 Hebraism 고수)

- 전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율법과 옛 유대의 전통, 많은 율례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

- 마카비의 독립운동에는 무관심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헌신

- 사회적 중간계층, 회당 중심

② 사두개파

- 솔로몬의 대제사장 사독(삼하 8:17)의 이름을 대제사장의 후예로 자처

- 종교적·정치적 자유주의 노선 ⇨ 헬라의 철학, 문화에 충성하고 헬레니즘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내 유대인들의 미움 자초

-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기관들의 율법해석을 불신. 바리새인들과 유대 전통에 반대

-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는 경향을 나타내, 영혼불멸과 부활 및 천사와 마귀의 존재 부인

- 대제사장 등 상류 부유층, 성전 중심(성전 의식 강조)

③ 에세네파

-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태도로 사해 서북 방면에 공동체 형성

- 주된 관심은 율법서(토라)와 종교서적의 연구, 해석

- 종말론적 사고가 팽배하여 광야생활

- 신조는 “선한 사회, 금욕, 명상, 노동, 독신생활”등

○ 시므온 마카비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죽자 정권투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수리아에 와 있던 로마 대제 폼페이우스에게 도움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유대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마에 예속

- 마카비家의 힐카누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지목하였고, 이때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에 오름.

(5) 로마 통치 : B.C. 63 ~ 신약시대

○ 로마에 의해 갈릴리 분봉왕에 오른 헤롯은 로마의 비위를 맞춰 힐카누스에 이어 결국 유대왕이 됨(B.C 37~4년).

- 예루살렘 성전 재건(헤롯 성전), 유대인의 경전과 의식 인정

- 그러나, 사마리아에 아구스도 황제 숭배 신전을 건축했고, 유다에 헬라 문화를 도입

- 이에 반발하여 열심당원 출현(현실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바리새파와 견해차를 보여 분리)

- 예수님의 탄생 당시 왕위에 있으면서 2세 이하 영아 학살 명령.

○ 로마 총독의 통치

-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왕국은 헤롯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 복음서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헤롯 안디바스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한 헤롯 대왕의 아들(세례 요한 처형,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이송 받음)

∙ 유대 ⇨ 아켈라오, 갈릴리 ⇨ 헤롯 안디바스, 북동부 ⇨ 빌립

(마 2:22) (마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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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의 아켈라오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유대 관원의 이중적 수탈정책을 벗어나기 위해 로마에 대해 직접통치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로마는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총독(눅 3:1~2)

- 많은 군사도로 건설

∙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고속도로화

○ 예수님은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시, 헤롯 대왕 지배 시 탄생

○ 그 후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66년 반란이 일어나 로마의 침공을 받고 70년에는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 성 파괴(마 24:2).

4. 복음서의 배경

(1) 유대민족의 사회적 계층

① 「왕」과 「대제사장」

○ 제사장 마카비가 유대를 회복한 이후 제사장이 왕직을 겸직하였으나, 헤롯 이후 분리

-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헤롯은 대제사장 격하 정책을 폈다.

○ 대제사장은 민중의 정신적 대표자요, 산헤드린의 의장.

- “산헤드린”은 B.C. 196년 생김. 70인의 유대 장로(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 기구. 예수님을 심문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공회.

② 부 제사장(제1급의 제사장, 왕하 25:18))

○ 정치적, 경제적 富를 누림

※ 제사장의 세 종류

1) 대제사장

2) 부 제사장

3) 일반 제사장

③ 일반 제사장

○ 특권과 혜택은 없이 의무만 담당 (7,000명 정도)

○ 24 반열에 따라 반차가 정해져 있어서, 평소에는 각자 직업에 종사하다가 절기 때마다 자기 반차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1년에 2주간씩 성전 봉사(눅 1:8, 9)

④ 서기관

○ 유대가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형성. 율법적 지식으로 대제사장과 장로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회세력으로 등장

○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 존칭은 랍비(Rabby)

○ 율법 지식이 유대인의 일상생활에 본질적 요소였기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율법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쟁으로 허비.

(2) 유대의 종파들

① 바리새파

② 사두개파

③ 에세네파

④ 서기관

⑤ 열심당 : 모세 때처럼 신정정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

헬라어 “셀롯”의 번역(눅 6:15, 12제자 중 하나인 시몬도 열심당원 출신)

로마인들에 대해 폭력까지도 사용했던 헤롯의 정적.

일명 시카리이(자객들) - 단검 소지, 불시 공격 후 도망

⑥ 헤롯당 : 유대 분봉 왕과 정부 당국을 지지하면서 헤롯가가 집권하기를 희망.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대세력으로 보아 배척(말 3:6)

(3) 사회적 배경들

○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큰 불황기

- 제국 신민의 2/3는 노예(6천만 명)

- 서민생활도 크게 빈곤

○ 관리들은 크게 부패

- 세리들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 부과, 차액을 착복

-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로부터 불공정하게 돈을 벌어들였다. 상인들을 성전에 들여 장사하게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

○ 지역적 갈등

- 팔레스타인은 세 지역으로 구분(이방, 사마리아, 유대)

-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가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 정복 후 이주정책, 혼혈 정책을 펼 때 이방인과 통혼, 혼혈인이 되어 유대인의 멸시를 받음.

하나님은 신·구약 중간기의 침묵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완전하게 준비된 세계에 임하셨다(갈 4:4, 5). 메시아를 갈망하는 정치적 상황, 예수님의 가르침의 거점이 된 회당 제도의 정착, 복음 전파를 위해 잘 닦인 도로, 전도의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린 언어의 통일, 복음을 받고자 했던 흩어진 Diaspora들. 적절한 준비는 보다 적은 시간 안에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 역사 개요


Table of Contents

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기원전 1050년 사울이 이 왕이 된다. 40년 동안 통치한다. 그 뒤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제2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역시 40년 동안 통치한다. 다윗과 우리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죽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40년 동안 통치한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신구약 중간기를 제성전기로 부르는 이유는 중간기라는 명칭이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말라기로 끝이 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말라기는 재건기 중간 어디쯤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연대기적으로 분다면 구약의 끝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보다는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진 이후를 중간기의 개념으로 받는 것이 훨씬 그 시대를 정의하기에 양호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중간기보다는 ‘제2성전기’로 호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1. 헬라시대(The Greek Era)

  • B.C. 331-B.C. 143년까지의 약 190년의 시기

1) 알렉산더 시대 (B.C. 336-3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세계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곧 마케도니아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중심을 근동에서 지중해로 옮겼다.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와 인도 경계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인 BC 323년, 33세에 요절했고, 결국 그의 제국은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쿠스 왕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 원래 본거지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은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가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2) 톨레미(프톨레미) 왕조 시대(B.C. 301-200)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왕조는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위로를 셀류쿠스 왕조가 통치했고, 아래로 이집트 지역은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다. 두 왕조는 지역적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두 왕조의 야망에 의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두 왕조 사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나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기 일쑤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약 100년 동안 톨레미 왕조가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 이 시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BC 312년 톨레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시킨다. 유대인 회당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유대인 밖에 성전이 지어진다. 후에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 히브리어로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경(LXX)이 만들어진다. 70인의 학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하여 70인 역, 또는 70 인경으로 불린다. 70 인경 번역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은 가톨릭 성경 구약 외경인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있다. 식민 시민으로서 조공을 바쳤으나 제사장에 의해 유대인 고유의 통치권이 상당히 부여되었으며, 중대한 사건이 아닌 이상 유대인 자치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 시대(B.C. 198-167)

이러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서로의 땅을 넓히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5번 정도의 큰 전쟁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설류쿠스 왕조에 편입시킨다. 이것으로 팔레스타인은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초기는 톨레미 왕조에 우호적 있지만 말기에는 셀류쿠스 왕조를 돕게 된다. 그 덕분인지 셀류쿠스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인을 대했고, 적지 않은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 벌린 서머나(Smyrna)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서머나 전쟁은 로마와 한니발 장군과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이 패함으로 안티오쿠스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 여파로 타우러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금 5,000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여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 안티오쿠스는 열악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에 부치는 세금을 부과한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하던 많은 보물들까지 탈취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은 다음 통치자에게 일어난다.

안티오쿠스 3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장남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Ⅲ)를 파문시킨다. 오니아스 3세의 파문 뒤에는 시리아파(셀류커스왕조)와 이집트파(톨리미 왕조)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시리아파는 득세하게 되고 이집트 파는 위축되었다. 시리아파는 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 3세를 처리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니아스 3세를 처리해 달라고 청을 한다. 문제는 오니아스 3세는 사독 계열의 합법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오니아스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는 달랐다.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3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충동질해 오니아스 3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킨 것이다.

시리아파 지도자였던 시몬은 자신의 동생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야손은 안티오쿠스 3세와 결탁하여 예루살렘을 헬라적으로 재정비한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손은 시몬은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헬라풍의 옷을 입게 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정통 유대인들과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아론이 자손, 특히 사독의 제사장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 체계를 전복시킨 그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헬라인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기는 했지만 야손은 정통파였기에 불만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메넬라우스라는 유대인이 토비야 가문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메넬라우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헬라의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고, 정통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야손파와 메델라우스파의 그리고 정통 유대인파들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하게 된다. 소문을 전해 들은 야손과 추종들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를 거의 정복할 뻔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돕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 원정의 실패와 로마의 패창을 지켜보던 안티오쿠스 4세는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세운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했던 유대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보고 그들에게 철저히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다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직에 복귀시킨다. 자신의 군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내 가져가 버린다.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유대교 전통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

먼저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다. 심지어 토라를 찢어 불사른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게 하며, 곳곳에 우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항했고, 반항한 자들은 지체 없이 죽였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경인 마키 1서와 2서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2. 저항과 독립(B.C 162-64)

*마카비(Maccabee)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 시대 안에 있지만 독립했던 하스몬 왕조와 함께 묶는 것이 선명해 보인다.

1) 마카비(Maccabee) 혁명

순교를 당하거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 시작된 것은 예루살렘이 북서쪽에 자리한 모데인이란 마을이었다.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곳에 찾아와 이교 제사를 강요했다. 이 대 다섯 아들을 둔 마타티아스(Mattathias, 한글성경은 ‘맛다디아’로 번역, 이곳에서 마카비라는 이름이 생긴다)라는 제사장이 명령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헬라 관리와 배교자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정통을 지키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카비 혁명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세 아들인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하여 이어간다. 기원전 165년 12월 25일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정확히 성전이 더럽혀진 3년 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또는 빛의 절기로 알려진 수전절이 생겨난다.(요 10:22) 도중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망하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극한다. 나이가 어렸던 탓에 리시아스가 섭정하면서 기원전 162년 유대인들에게 절기를 자유롭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리시아스는 그것뿐 아니라 유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메넬라우스를 죽인다. 핫시딤은 정치적이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는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다메트리우스 1세가 지배하면서 아론 계열의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 상태가 된다.

유다가 죽자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셀류쿠스 제국은 이때 한참 세력다툼 중이었다. 더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가 충돌한 상태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했다. 결국 승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돌아갔고, 덕분에 요나단은 발라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2년 요나단을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만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했던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힌 그가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을 참다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키비 가문에 분노를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등지게 된다. 이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이나 시골에 내려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을 자칭하던 자기 일어나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자신을 더메트리우스 2세로 명명한다. 그는 다시 안티오쿠스 6세와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는 시시각각 세력을 확장하며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을 죽여 버린다.(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뒤를 이어 시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더메트리우스 2세에게 세금 면제와 유대인들의 독립을 요구한다. 오니아스 3세 이후 유대는 정통적인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몬은 주전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한다. 시몬을 대신해 그의 아들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된다.

2) 하스몬 왕조(B.C134-63)

‘하스몬’이란 용어는 하스몬(Hasmon)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비는 마타디아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한다. 하스몬 왕조로 불린 이유는 70여 년 동안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요한 힐카누스 1세 시절 잠시 속국이 되었지만 주전 129년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아 독립국이 된다. 힐카누스 1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선다. 팔레스타인 남부에 자리한 이두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 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것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이두메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가 큰 저항 없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점령한다. 그곳에 있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사독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 정통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친권력자들은 사두개파가 되고 율법을 경건하게 추구했던 이들은 바리새파가 되어 완전히 구분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과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경건한 핫시딤들이었으며 전통적인 신앙관과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경건한 평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바리새파는 두 가지에 반대했다. 하나는 힐카누스가 대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과 다윗이 후손이 아님에도 왕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3)가 돼서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문화를 사랑했고, 친헬라적(나중에는 로마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을 지원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가 어머니와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과 사건들은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과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격한 분노에 휩싸였고, 잠잠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는 비정통적이지만 분명히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거리끼지 않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주화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자신이 왕임을 새겨 놓았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직을 혐오하는 것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장막절에 제단에 부어야 할 전제를 땅에 의도적으로 쏟아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던 시트론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며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군대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한다.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6년이나 지속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8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아내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충고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특정한 집단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공유된 교리적 관점과 경건 습관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Salome Alexandra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는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여리고 근처에서 격퇴시킨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원전 66부터 6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이 된다. 하스몬 왕조는 갑자기 몰락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총독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의 충동질로 전쟁을 일으킨다. 힐카누스는 아라비아 통치자인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불루스는 공격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폼페이는 스카우루스(Scaurus) 장군을 보내 처리하도록 한다. 그러나 뒤로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뇌물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아리스토불루스의 음모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폼페이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해 버린다.

로마 황제 가시사의 지지와 권위를 받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미드리다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63년 미드리다테스를 다시 반격을 시도하지만 결국 패하고 자결함으로 본도(Pontus) 지방은 폼페이우스 장군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십 대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격적이고 잔인한 장군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락을 진압하는 것을 비롯해 마리우스파의 잔당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를 자청하기까지 한다. 그때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기원전 72년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67년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얻게 된다.

폼페이우스(Pompeius) 

그는 뛰어난 전술과 지휘로 3개월 만에 로마 근처의 대부분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다. 이러한 인기와 신임을 통해 폼페이우스는 최고의 절대 사령관이 되고 연장되는 해운까지 얻는다. 결국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했던 것이다. 시리아를 거쳐 곧바로 유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유다는 시리아 소속의 로마 속국이 된 것이다. 후에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자신의 군사들에게 배반당해 죽고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다. 제2성전기 문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 유대 분봉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왕’도 사라지게 되고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제 로마의 치하에서 헤롯의 가문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로마 시대(BC 63-AD135)와 헤롯 왕조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하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 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헤롯 안티파터 1세(Antipater, B.C. -45)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본디오 빌라도(A.D. 26-36)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빌립1세( -34)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1)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특이하게도 하스몬 왕조의 역사에 말기에 갑자기 이두메 사람인 헤롯 안티파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힐카누스 1세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외에 등장하지 않다 갑자기 등장하여 하스몬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두메 지역은 거의 소외되거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롯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Ⅱ세 때문에 피난중이었던 힐카누스 2세를 충동질한다. 무능하고 유약했던 헬라누스는 안티파터에게 속아 자신의 동생을 로마의 힘을 빌어 몰아낸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하스몬 왕조는 몰락하고 대신 헤롯 안티파터가 대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만다. 안티파터는 교활하고 잔인했다. 안티파터는 초기에 폼페이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즉각 카이사르(Caesar)에 충성을 바친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교활했던 그는 카이사르에게 가서 자신의 왕관을 바치고 죽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다시 그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일으켜 준다.

안티파터로 인해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입지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활용하기로 하고, 즉각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두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고 또한 과도하게 로마를 등에 업고 활개 쳤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그는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자신의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로 임명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우스(Cassius)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유대에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결국 안티파터는 43년 독살되고 만다.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2)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43- B.C. 4)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후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리암이 청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헤롯이 강제로 청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헤롯은 도리스라는 부인과 3살 된 아들 안티파스(자신의 아버지와 동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사려했다. 기원전 42년 드디어 로마의 정치 내전이 막을 내린다. 권력을 잡은 안토니(Antony)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을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분봉왕, tetrachs)로 임명한다. 이들의 중요한 임무는 로마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실패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자금 조달이었다.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한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도 자신의 왕좌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포위하였고, 붙잡혔지만 곧 자살한다. 그러나 헤롯은 가족들을 마사다 요새에 숨기고 로마로 피신한다. 로마에 달려간 헤롯은 곧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접견한다. 그들은 헤롯을 원로원에 소개했고, 원로원은 헤롯에게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B.C 40) 헤롯은 안토니가 지원한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37년에서 3년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안티고누스를 죽인다. 드디어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헤롯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손을 잡고 자신을 적지 않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겨우 붙잡은 권력도 모두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함으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만 것이다.

헤롯은 두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위기에 모면했지만 나바테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전쟁에 안토니우스를 돕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헤롯은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있던 도로스 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 헤롯 안티파터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려놓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안티파터가 아니라 헤롯 대제가 원형인 듯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안토니우스를 도운 것을 사죄하고 같이 동맹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헤롯은 교활했지만 많이 유용한 존재였다. 겉으로는 기꺼이 받아 들였고 헤롯의 충성도 진심인 것처럼 인정했다.

헤롯의 통치는 이전의 헬라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적이었다. 그러나 우월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완전한 헬라나 로마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헤롯 가문이 양가적 성향은 헤롯 안티파스 2세에서 극에 이른다. 그는 이전세대보다 더 심한 헬라화 정책을 편다. 그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다. 또한 기원전 20년 스룹바벨 성전은 보수하고 증축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헤롯 성전’으로 불렀다. 제자들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왕은 될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은 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몇 가지를 고안해 낸다. 먼저 대제사장직의 세습을 철폐하고 자신이 임명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평생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만을 할 수 있도록 기한제로 바꾸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이나 뇌물을 주는 세속적인 대제사장이 선출되게 된다. 헤롯 대제는 유난힌 건축사업에 몰두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갈릴리 해변을 정비하고 카이사랴라 명명한다. 사막의 요새인 마사다를 재정비하고, 사바스테에 있는 고대 사마리아 도시들을 등을 건축한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를 축소시키고 헬라주의자들을 중심한 왕실 고문단을 세운다. 또한 세습된 귀족신분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로 대체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어 모든 행정과 권력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극장을 세우고, 들에는 원형극장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5년을 주기로 행사를 치르게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인은 로마 황제임을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신의 자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이고 싶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헤롯의 말년은 치욕의 시간이었다. 첫 번째 아내인 미리암을 기원전 30년 경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의 장모까지 죽인다. 그의 숙부였던 요셉도 함께 처형한다.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자신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몇 명의 아들을 처형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 분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로마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대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아들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년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세 명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켈라오는 자신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뵈레아를, 빌립1세에게는 갈릴리 북쪽과 동쪽인 골란과 베타니아, 트라크노파스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단지 유언일 뿐이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누스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아들 누구도 아버지가 받았단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헤롯 대왕이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나 유아학살 사건의 장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난 것이라면 헤롯 대제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곧바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음을 암시한다. 즉 그의 죽은 사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당대의 어느 기록물에도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헤롯 대제를 원수처럼 여기는 요세푸스까지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아학살사건은 후대에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팔레스타인 통치는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에게 넘어간다.

3) 헤롯 아켈라오(B.C.23/4 – A.D. 18/6)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여러 아들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의 연줄을 찾고 대려고 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던 유대인의 대표단들도 로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두매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유대인 대표단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통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종 등장한다.(눅 19장)

아켈라오는 신약 성경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아켈라오가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로 간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소문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는 무자비하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통치지역 전반에서 그에 대한 거센 항의가 일어나고 로마에 항의서를 보낸다. 결국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 로마는 그를 직위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하여 헤롯의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왕으로 3년(기원후 41-44) 정도 통치한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남게 된다. 아켈라오는 폐위되어 갈릴리오 유폐되어 18년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신약 성경에 등장한 그 유명한 빌라도(A.D. 26-36)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된다.

4) 헤롯 안티파스(B.C. 4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요단강 서남부지역은 로마 직할이 되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들이 통치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사건은 빌라도 관할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간교한 헤롯 역시 예수를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 즉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버린다.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특히 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군기를 내려놓고 가야했다. 산헤드린 공의회도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형집행은 로마 총독에게 위임해야 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가결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을 언도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빌라도는 잔인하고 간교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항거를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으며,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릴 때 혁명자들로 의심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다.(막 15:7, 27)

안티파스는 무려 43년을 갈릴리를 통치한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여 티베리아(Tiberiras, 성경은 디베랴)로 부른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였으나 안티파스는 무척 마음에 들어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싫어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이곳에 거주하기를 싫어했고, 가까이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안티파스는 이복동생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성경은 헤로디아가 그의 친동생인 빌립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비평적으로 다루어져야할 부분이다. 다른 동생 헤로데가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의 손녀이기 때문이며, 헤롯에게 처형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친정인 다마스쿠스 왕국으로 추방된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였던 안티파스를 공격하여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 사이에 딸 살로메가 태어난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간교하면서도 권력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례요한 비판을 넘기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죽인 것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계했다. 비록 헤로디아의 간청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세례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세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활동이 알려지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막 6:14-16)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보고 싶어 했고, 결국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심심해진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눅 13:32)라 불렀다.

안티파스의 추락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소영주로 있지 말고 진정한 ‘왕’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한 두 번 간청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결국 안티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칼리쿨라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칼리쿨라의 의심을 받아 갈리아로 추방 당하고 만다.(39년)

5) 헤롯 빌립2세(Herod Phillip)

헤롯의 아들인 빌립 1세는 분봉왕이 아니다. 성경은 그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고,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으로 나온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의 다른 이름은 헤로데였고, 헬로디아가 그의 아내였을 것이다. 살로메 역시 헤롯 안티파스의 딸이기보다 빌립의 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취했으며, 빌립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형에게 주었을까? 단지 추즉에 불과하지만 안티파스와 빌립 사이에 모종의 밀의(密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립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빌립2세 역시 그다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그는 로마 황제의 초상을 화폐에 새긴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갈릴리 북쪽은 유대인들이 드물어 영향력이 많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34년에 후손도 없이 세상을 뜬다.

6)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헤롯이다.(행 12장)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머물며 칼리쿨리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칼리쿨라는 37년 그에게 필립이 다스렸던 갈릴리 북동쪽을 선물한다. 그리하여 그 지역은 다시 헤롯 가문의 수중에 들어온다. 2년 후인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근방까지 아그립바에게 주어진다.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까지 주어짐으로 다시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때의 모든 영토를 아그립바가 관활하게 된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아그립바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죽음까지 불사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41년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아그립다는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경건한 유대인처럼 대부분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만 그렇게 했을뿐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한다. 누가는 그가 연설을 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蟲)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한다.(행 12장)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지 못하고 시리아 식민지로 떨어진다.

7)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로마가 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50년 칼키스(Chalcis)지역의 왕이었지만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된다. 누이였던 베니게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바울이 가이샤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서 바울을 대면한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관할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유대인들의 미움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멸망 후 로마에 돌아가 행정관으로 살다 100년 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기 또는 제2성전기로 알려진 시기를 살펴봤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개론적인 부분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유용합니다.

중간기 이전의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 개요는 아래의 링크글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