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십일조(말라기 3:10)


말라기 3:10 / 온전한 십일조(콜 함마아셀) all the tithes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Bring the whole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Test me in this," says the LORD Almighty, "and see if I will not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 and pour out so much blessing that you will not have room enough for it.

온전한(3605)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콜(kôl)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 3634.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발음 / 카랄(kâlal)
관련 성경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구약 성경 / 2회 사용

1. (동사) 완성하다, 성취하다, 숙달시키다, 완전히 하다, 겔 27:4,11
2. (동사)  왕관을 쓰다, 왕관을 씌우다.

십일조(4643) מַעֲשֵׂר  

1. 십분의 일,   2. 십일조,  3. 열번째

발음 / 마아셀(maʽăsêr) 
어원 / 624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십일조(민 18:21, 대하 31:6, 느 10:37), 십분지 일(겔 45:11, 14).
구약 성경 / 32회 사용

(명사) 남성  - 십분의 일, 십일조, 열 번째, 창 14:20, 신 14:23, 28,  26:12, 느 10:37

* 6240. עָשָׂר 
1. 열,  2. אַחַד עָשָׂר

발음 / 아사르(ʽâsâr) 
구약 성경 / 337회 사용

뜻풀이부

1. 수사, 남성 열 [다른문자와 함께 사용].
a. 수사, 남성   [주]אַחַד עָשָׂר, 열하나, אַרְבָּעָה עָשָׂר: 열넷. שִׁשָּׁה עָשָׂר: 열여섯.

온전한 십일조
전체에 대한 1/10 이라는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10/10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10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작은 것 즉 최소한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체를 바칠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한 아주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 1/10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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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성경에 나오는 온전(穩全)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온전"이란 티끌만큼도 죄가 없는 무흠한 상태를 온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온전할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어 "온전"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온전하신 분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온전"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베드로전서 5:10.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너희를 친히 "온전케"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잠언 20: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다.

누가복음 6:40.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그리스도)과 같으리라.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온전한 십일조"란 흠 없고 죄 없는 제물을 뜻하며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강한 양과 소와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소를 잡아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꺽음과 다름이 없고"(사 66:3)
그리스도가 담기지 않은 제물을 꾸짖으셨습니다.

말라기 3:7-11을 살펴보며 도적질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핵심은 "내게로 돌아오라"입니다.
물질의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예수를 믿는 방법 뿐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바울도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고 말하고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히 12:2)

구약의 이스라엘도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장차 오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는 철저했으나 제물의 참뜻인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헛된 제물로 헛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십일조의 참뜻인 예수를 믿고"내게로 돌아오라"고 명령 하신 것입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다고 하십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렇게 죽으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가 빠진 헛된 제물을 드리며 행위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빠진 예물은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것인 그리스도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커버"(COVER)라고 합니다.
커버(COVER)는 "덮다""감추다"라는 뜻 외에"속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즉,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와 헌물이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를 "덮고,감추고,행위에만 매달리게 하여 헛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행위에는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양들 중 열 번째 양이나 소를 가져갔을 것입니다.
이 제물은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지 못합니다(레 27:32-33).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더러운 떡'"눈먼 희생'"병든 것'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것'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말 1:7-13)

이렇게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이유는 제물이 예표하는 그리스도를 덮고 감추고 훔치고(토색) 눈먼 희생에만  열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십일조 도적'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구약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도 십일조에 나타난 예수를 카바(COVER)하여 덮어버리고, 십일조를 돈으로 요구하는 자들은 십일조 도적들입니다.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리스도를 도적질하고 행위에만 열중한 육적 이스라엘은 늘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고 외세의 침입으로 포로로 끌려다니는 등,저주를 받았으며 끝내는 오신 그리스도마저 죽이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창고" "나의 집에 양식""하늘 문을 열고""복"의 뜻이 무엇인지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창고"와 "나의 집"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양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보고 하나님의 양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간 사이에(요 4:8)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 믿게 하셨습니다(요 4:26).
이때 제자들이 돌아와 먹을 것을 드리며 "랍비여 잡수소서"라며 음식을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라고 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34)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양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셔서 몸찟고 피흘려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양식을 모아 창고에 저장하듯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나의 집" "창고"인 하늘 곳간에 모으는 일을 하십니다.
즉,구원 얻은 성도들을 양식이라는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 복"

하늘 문이 무엇일까요?
하늘 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만 들어갑니다.
하늘 문은 천국 열쇠를 가지신 예수입니다.
믿음의​ 선진이며 신약성도를 상징하는 야곱은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창 28:12)
즉, 예수를 본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를 보고 하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28:17)
즉 예수님이 하늘 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즉, 하늘 문인 예수를 통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내리는 하늘 보화는 물질이 아니라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에 눈이 가려진 삯군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돈을 부어주신다며 신도들을 기복신앙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삯군들에게 미혹된 신도들은 구원의 복이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고 물질 복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모든 것을 다 팔고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소유해야하는 값진 진주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신도들은 재물복을 받으려 십일조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물질 복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십자가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시며 세상 복을 좇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한 물질에 대해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고 말씀하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성경에 나오는"황충"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는 마귀,사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토지,"밭.은 마음 밭인 심령을 뜻합니다.
또 소산과 과실(열매)는 심령에 맺힌 믿음의 열매를 뜻하며(요 15:16)
포도나무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또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는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기 전에는 결단코 실족하여 떨어지지 않게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땅은 세상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름다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가나안 땅,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이 거하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을 "복되다"할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라기를 통하여 십일조에 담겨진 온전한 제물이신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이 바로 말라기 3:7-12입니다.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오직 죄 없이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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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서에 나타난 십일조에 대한 책망은 표면적으로는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인 것 같지만 포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책망이다.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보았겠지만 더욱 큰 도둑질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였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신앙에서 파생되어 나온 열매가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라기 3장 9절에 보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관습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다. 말라기 3장 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관계를 요구 하신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열매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에 대한 해석도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복의 개념에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복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므로 공급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을 가리킨다. 10절에서 말하는 “양식”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연결해야 한다. 시험해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물질적 축복을 주는지 아니 주는지 시험해보라는 그런 취지로만 해석을 하면 온전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하므로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땅의 물질세계에서 얻는 복이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이다. 이 영원한 복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곧 궁극적 복의 핵심이 된다. 이 땅에서 얻는 물질적 축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 하면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 할지라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의 과정을 지나게 하면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인격을 다듬어서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서는 성품의 열매 없이 물질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물질이 빈곤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성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빈곤한 과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잘 순응하여서 성품의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물질로도 복을 주실 수 있으실 것이다. 이렇게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의 복은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원래 받고 싶은 온전한 십일조는 눈에 보이는 물질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이다. 원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하는 헌물인데 대신하여 표면적으로 수입의 십일조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드려진 제물이 그리스도 예수다. 그러므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때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히 채워진 자기 자신과 함께 그 표징으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짜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가득 찬 성도들로 성전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은 정말 그러한지 아니한지 테스트 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되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말 그런지 아니 그런지 실험해보라는 의미는 충분한 해석이 될 수가 없다. 그런 해석들이 지난날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을 낳게 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오지 않았는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한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곧 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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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요?


성도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특징이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일상생활에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범사가 감사의 대상이 된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사는 보통 몸을 드리는 것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통해 밖으로 표현이 된다. 물질을 드리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십일조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당연히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의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손해를 보는 경우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제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십일조의 기원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를 중심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성격의 십일조를 요구했다.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이스라엘 왕들도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8:15, 17). 현재에도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 나라들은 부가가치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치적 세금 형태의 십일조를 여전히 국민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있는 십일조란, 재산이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종교 기관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또는 기업(재산이나 직업)이 없는 레위인(목회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에 관한 규정은 광야에 머물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여러 하나님의 계명들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민수기 18장과 레위기 27장). 그리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여리고 맞은편에서 다시 한 번 십일조에 대한 계명이 반복된다(신명기 14, 26장). 하지만 십일조 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사람인(히 7:1)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다(창 14:20). 이 전통에 따라 야곱도 벧엘에서,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약했다(창 28:22).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고 십일조를 지칭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심지어 우상에게까지 십일조를 바쳤다(암 4:4). 또 부패한 대제사장의 탐욕 때문에 가난해진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십일조를 강탈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3, 33 참조)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10),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누가 자비량 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때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고 하신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드려진 십일조를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을 해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2. 십일조의 종류

성경에는 다음 세 가지 경우의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 종류의 십일조는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셋으로 나눌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1)  땅의 소산과 육축의 십일조(레위기 27:30~33)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표하고, 또 늘어나는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표하는 십일조이다. 땅에서 추수한 곡식과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의 기름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쳤다. 만일 이것을 속하려면, 그것의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했다.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열 번째 것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의 성물로 정해진 소나 양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다. 만일 바꾸게 되면, 둘 다 거룩하게 여겨져 일체 속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십일조는 신 26:1~15에 나오는 첫 이삭을 드리는 명령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족장 시대부터 이러한 십일조가 드려졌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서 바치고 먹어야 했다. 따라서 멀고 행로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 돈으로 다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여 바쳤다.

2)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수기 18:21~32)

가나안에 들어 간 이후, 모든 지파들에게는 땅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는 예외적으로 땅을 분배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전의 일만을 맡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다. 레위인은 땅의 소유주이시며 땅의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십일조도 결국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였다. 한편, 레위인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3)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신명기 14:28~29)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저축하였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우거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데 사용한 십일조이다. 매 삼년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별도의 십일조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두 해의 십일조 중에서 일정량을 모아두었다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 십일조의 목적

십일조의 목적은 앞에 말한 십일조의 종류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소득의 증가가 하나님의 복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적 일에만 전념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소득도 돌볼 사람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 즉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소유물을 사용하게 하려는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심각한 책망과 저주가 뒤따르게 된다(말 3:8, 9). 반면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소유의 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임에 대한 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암 3:10)고 말씀하셨다.

4.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든 헌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액수보다는 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가 빠진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십일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한 감사, 내리신 명령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배어 있어야 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세 또한 온전한 십일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온전한 십일조는 정해진 액수대로 하는 십일조여야 한다.
자기 소유와 소득의 십분의 일이 그 정해진 액수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달리 정해진 액수를 계산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세금이나 공제금을 포함하여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액수를 계산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에 유념을 해야 한다.

십분의 일뿐만 아니라 십분의 십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계산하기 어려울 때에는 십분의 일 이상이라도 드리겠다는 넉넉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십분의 이를 드리겠다는 목표를 가져 볼 수도 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손해를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부담을 갖지 않고 일정액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액수의 세밀한 계산은 정확한 순종의 믿음에서 나오기보다 인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임을 쉽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성도는 십일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해진 액수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던 과부의 두 렙돈 같은 십일조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역할을 계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을 가져 한다.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아니하나 시험하여 보라고까지 함에야, 어찌 십일조 생활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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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①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메시지성경) “정직한 일부터 시작하여라.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날마다 내 것을 훔친다. 너희가 묻는다. ‘저희가 어떻게 주님의 것을 훔쳤단 말씀인가요?’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에 대해 또다시 반항하며 항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의 척도는 물질(돈, 보화)이다. ‘척도(scale, 尺度)’는 자로 재는 길이의 표준이나 평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바로미터다. ‘바로미터(barometer, 기압계)’는 사물의 수준이나 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하나를 보면 열을 알 듯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보면 무엇을 섬기며 사는지 알 수 있다.

 

② (마23장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구약의 십일조에 관한 신약의 유일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시며 십일조의 정신을 ‘정의, 긍휼, 믿음’이라고 하셨다. ‘정의(正義)’는 정직한 계산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정직한 고백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땅에서 거둔 소산물도 하나님의 소유다. 삶에서 누리는 생명과 건강, 물질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의 결과물이다. 이 고백 위에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이 십일조를 비롯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물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다. 말라기 시대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은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면서 여전히 물질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말라기가 하나님의 것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는 부정직한 행위를 불의한 도둑질로 정죄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의 조건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제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③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메시지성경) “지금 너희와 너희 모두가 저주 아래 있는 것은, 너희가 내 것을 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왜 한해에 수십 만 명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실까?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양극화로 인한 절대 빈곤의 원인은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 탓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필요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물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을 충분한 양식을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다만 타인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탐욕으로 인해서 세상은 빈곤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십일조의 두 번째 정신인 ‘긍휼’이다.

 

 

3. 하나님의 명예를 건 보증

 

①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의 세 번째 정신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준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보답하신다는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성경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누이 강조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척도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일조를 단지 물질적인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언약이 전하는 본뜻은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하게 증거 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최우선 과제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 만물의 주관자가 친히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保證, guarantee)으로 읽어야 한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언약을 준행하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약속 위에 세워진 신앙이다. 구약과 신약,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약속은 수많은 삶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져왔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친히 보증하신다.

 

② (11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예수께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통치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친히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셨다. 말라기 시대의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보다 물질에 두고 살았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에서 속내가 드러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3~14)” 그들은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열의 아홉은 자신의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서 부의 축적을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삶의 목적을 물질적인 부요에 두고 살았다. 십일조를 물질적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하는 건 그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③ 「강단과 목회」,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김명섭, 2021년 9‧10월호에서 인용.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는 예수님의 선명한 가르침 앞에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일말의 여지없이 종결된다. 하지만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교회의 부요가 교회의 타락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철저한 십일조로 인해 크고 강한 교회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만과 타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날이 선 비난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재정에 대한 건전성과 투명성을 철저하게 재고하고 재정립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십일조가 복이 아니라 도리어 화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십일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2:29)”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게 드려진 제물을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남용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은 성경 속에만 나오는 추태가 아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만큼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온전하게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십일조의 준수와 더불어 십일조의 정신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리까지 성숙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의 통치를 삶에서 체험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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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하나님의 도움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드리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는 십일조나 정의가 없는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물질로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라야 복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수가 많다 할지라도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보다는, 수가 적어도 전 성도가 하나님 앞에 시간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의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그의 자녀를 복되게 하신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세상 마귀 사탄의 탐욕과 욕심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풀러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세금을 안 내고 등록금을 안 내고 자기 의무를 지키지 않은 학생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명단에서 빠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의 반열에서 빠지게 되고 이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교회 성도다”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고 외쳐도, 허공에 소리 지르는 것과 같다.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한 부는 복이 되지 않는다. 정직하고 깨끗한 부자가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사람에게 칭찬 받는다.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라고 하셨다. 온전한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쪼개서 선교비 쓰고 구제하고 밥 사먹고 혼자서 인심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십일조는 손대면 안 된다. ‘성물’, 즉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온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받는 복이 진짜 복이 된다. 하나님이 복되게 하셔야 그 사람의 재물이나 재능 등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