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잘 믿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But whatever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 for the sake of Christ.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는 "야다"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오는 "기노스코"
안다는 것은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여자를 안다, 남자를 안다는 말은 여자와 남자와 경험이 있단는 것을 말합니다.
아는 것도 범위가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중에서 영적인 것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3가지 방향
정성욱 교수의 Engagement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1. 유기적 교회론 강화
2. 선교적 교회론 무장
3. 종말론 교회론 지향
2019년 말부터 거의 2년 반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고 있다.
물론 아직도 코로나 확진자들이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크게 보아서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5년 간의 친사회주의적· 전체주의적 방향을 바로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 공고히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더 나아가 이민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유기적 교회론(organic ecclesiology)을 강화해야 한다.
조직신학 교회론의 두 기둥은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과 유기적 교회론이다.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건물, 직분, 회의, 부서 등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반면 유기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공동체성, 생명의 흐름,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를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140여 년 간 한국교회 역사는 조직적/제도적 측면이 유기적 측면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은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특별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은 대면 예배와 대면 사역이 이뤄질 수 없는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타개할 방법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사역이 주류를 이루면서 우리는 유기적 교회론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교회들이 팬데믹 시대 동안 생존과 성장을 구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론은 단순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으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몇 배로
강화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을 접붙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적 교회론이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이 봉사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직분이나, 부서나 회의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이들의 공동체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 성도간의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이다.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교회의 유기적 성격은 소프트웨어이고,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은 하드웨어이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잘 갖춰졌다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컴퓨터는 작동되지 않는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건물, 잘 정비된 직분, 탁월한 회의 준비와 분위기, 체계적인 부서들을 가졌다 해도,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약해지면 교회의 목적은 실현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과 목적이 교회의 유기적 성격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교회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식에 기초해서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으로 무장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존재론이 선교지향적이란 확신에 기초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선교는 교회가 실천하는 여러 기능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깊은 연구를 통해 선교는 교회의 여러 사역들 중 하나이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진리가 회복됐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진 공동체(the sent community)라는 의식이 강한 교회일수록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내부지향적인 근시안적 교회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만족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유람선적인 교회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외부지향적인 영성을 가지고,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구원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거룩한 영적 싸움에 임하는 전투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날 선교적 교회라는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나를 만족시키라”는 소비자 중심주의(consumerism)의 공격에 마구 흔들리는 연약한 교회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당신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실 때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라”고 명령하신다. “나를 만족시켜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그 존재 목적과 사명을 성취할 수 없는 역기능적 교회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셋째는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교회(eschatological church)를 지향해야 한다.
종말론적인 교회란 조만간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정절과 순결로 자신을 단장하는 교회를 말한다.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으로 무장한 교회를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예수님 재림이 가까왔다는 분명한 징조였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최근 원숭이두창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 직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고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징조들과 세계 선교의 현상황을 고려할 때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이 왔다. 필자는 현재 우리가 “배교”의
시대(살후 2:3)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조만간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환난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대환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통과해야 할 준비를 해야한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신랑되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의식으로 무장된 주님의 참된 신부로 성숙해 가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유기적 교회, 선교적 교회, 종말론적 교회라는 방향이다.
부디 성령께서 우리 조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 방향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드러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
미래학자가 본 한국교회 10년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성장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의 유럽화’ 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지금, 한국교회를 향해 ‘10년 뒤 변화를 준비하라’는 미래학자의 예견은 제목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가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를 진단한 책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펴냈다.
미래학자이면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의 지도 아래 부목사로 사역한 경험도 있는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를 향한 염려와 다가올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분명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주신다는 점을 또한 강조한다.
16일 열린 신간 기자간담회에서 최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변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 시기, ‘불확실성만이 유일한 확실함’이라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7년의 풍년과 흉년을 준비했던 요셉의 지혜가 절실하다”며 “책을 통해 한국교회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7년의 흉년’ 시작된 한국교회 위기의 모습은…
최윤식 박사가 예측하는 2020년 한국교회의 미래는 창세기 41장의 일명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 시나리오다. 풍년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기를 거쳤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대 흉년기를 맞으며 극심한 침체기로 접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먼저 최 박사는 외형적인 면에서 2050년 경 한국교회 성도 수가 300만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고,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주일학교 숫자는 대략 30~40만 명으로 추락, 교인 중 60~70% 이상이 은퇴자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과 교인 수의 감소로 개척교회가 교회 문을 닫는 상황이 속출하고, 교회 시장 법칙이 자리를 잡아 초대형 교회들만 살아남는 기형적인 목회 환경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내부적으로는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한 교인들의 신앙 모습이 교회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위기가 된다.
세계화 물결이 자본, 노동,
문화, 종교를 국경 없이 넘나들어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변화된 교인들이 등장한다.
노마드교인, 코쿠닝 성도, 브랜드 교회, 다운시프트 신앙, 트랜스챤 등 이전에 보지 못한 성도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최 박사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부는 심각한 영양 실조에 걸린 상황이다.
복음의 열정은 시들고, 주일마다
외쳐지는 설교는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며 “교회가 근원적인 에너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의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현재 위기가 지속되고, 뼈를 깎는 갱신이 없다면 두려운 미래가 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이 위기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해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시대적 소명 감당하는 교회, 제2부흥기 이끈다”
벼랑 끝에 선 한국교회, 지금부터라도 위기를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최 박사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10년은 또 다른 제2의 부흥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다양한 대책을 세워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지금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그 전환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교회가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전 건축 등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가 아닌, 사람과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새로운 활로 모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최 박사는 “성장 한계의 늪에 빠진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의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영성의 수준을 높이고, 목회자의 자질을 높여 복음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새로운 시대에 위기를 감당하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제2의 부흥기에 다시 일으키시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소멸시킨다”며 “전환기에 많은 교회들의 영향력과 교세가 자연적으로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박사는 그의 책을 통해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공론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교단 차원에서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서 교회가 미래에 갖춰야 할 시대적 소명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목회자들에게 전수했으면 좋겠다”며 “기존의 리더십과 시스템 구조의 혁신부터 시작해 모든 신앙생활 방식이 새롭게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자 소개 - 최윤식 박사
미국의 권위 있는 미래학 정규과정인 휴스턴대학교 미래학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학위를 받은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아시아미래협회 회장, 전경련 최고위 과정(미래창조혁신) 및 전략포럼 주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또한 ‘소망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국교회의 미래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2030년 부의 미래지도>, <2020 부의 전쟁 in Asia>, <그들과의 전쟁> 등이 있으며 <2030년 부의 미래지도>는 출간 이후 일본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한국교회, 무너져야 할 것은 목사중심 신앙생활
기독교 독립언론사 뉴스앤조이가 지난 4월 30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교회에서 분쟁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에서 기존 교회와 목사로부터 상처 입은 마음을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기록한 책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다”를 출판됐다.
저자인 구권효 기자는 언론이 분쟁 교회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피해자의 마음에 집중하고자 회복적 정의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한다.
Q. 기획취재를 통해 바랐던 목적이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교인들이 교회 분쟁을 겪을 때 언론 기사 중에 교인들의 마음에 집중한 기사는 별로 없다.
사건 초반에는
언론들이 교인들의 억울함이나 배신감을 성토하는 내용을 한두 문장 담긴 하지만 그 이후로는 대부분 소송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결국
누가 졌고, 누가 이겼다는 소송의 결과만 보도되고, 소송이 끝나면 보도가 더 이상 안 나온다. 하지만 교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시간이 가거나 소송의 결과가 좋게 나온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교회 분쟁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집중하고 싶었다.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이야기 있는데, 어떤 회복의 과정이 있었을지, 그렇게까지 상처받고
새로운 공동체를 또 세우게 된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과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둘째는 교회 분쟁 원인은 담임목사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목사들이 그 무게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한 다섯 교회뿐만
아니라 사실 분쟁이 생긴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 담임목사가 진심으로 엎드려서 사과하고, 거취를 교인들에게 맡기고, 자기 잘못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사실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교회들이다. 책을 통해서 목사들이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셋째는 분쟁도 한국교회의 역사다.
누군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것일지 몰라도 분쟁 교회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Q. 기사로 이미 나온 내용들을 굳이 책으로 엮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책으로 낼 생각이긴 했다. 취재를 해보니까 시간이 가면서 교인들이 새롭게 세운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이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인터넷 기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통해 그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분쟁 교회 교인들한테도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낸 것 같다.
Q. 서론에서 책의 취지를 “‘회복적 정의’의 렌즈로 교회 분쟁을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언론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중에 잘못한 가해자에게만 너무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근데 정말 중요한 것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가해자의 처벌도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회복에 있어서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보도할 때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는 일도 기본적으로 하되 교인들의 마음과 상처와 피해의 회복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시도를 좀 남모르게 계속해 왔다. 2021년 12월에 발행한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이라는 시리즈가 역시 그런 취지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통상적으로 가해자가 교단으로부터 징계나 형사처벌을 받으면 사건이 끝났다고 여겨진다. 가해자 처벌은 사건의 끝이 아닌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의 시작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언론이 너무 무관심하다. 그래서 피해자의 회복에 집중한 내용을 담고 싶었고, 나름대로 남모르게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책의 출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Q.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인터뷰이(interviewee)들께서 말씀을 잘해주셔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서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간혹 과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기자 입장에서 그런 반응들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책과 기사를 통해서 이미 밝혔지만 그걸 통해서도 교회 분쟁이라는 게 10년이 흐르고,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을 직면하기 힘들 정도의 상흔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상 깊었던 점은 어느 교회의 분쟁과 회복에 관한 기사를 써서 교인들에게 보여드렸는데 기사를 보신 분들이 교회를 나오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치유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본인들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진짜 옳은 길인가? 이게 맞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때 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Q. 본인 스스로 교회를 떠나게 된 경험도 있고, 교회의 분쟁을 취재하면서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독립언론사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좀 쉽게 대답하자면 계속 ‘적’이 나온다. 해치웠나 싶으면 곧바로 ‘적’이 나와버리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긴다.(웃음)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하면서 연차가 계속 쌓여가는 상황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Q. 교회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고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다고 해석된다.
아니다. 잘못된 해석이다.(웃음) 애정보다는 당위성에 가까운 것 같다. “교회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애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인 것 같다.
Q. 서론에서 “분쟁의 역사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다. 무너져야 할 것들은 무너질 테지만 그런 중에도 새롭게 일어나는,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무엇이 무너져야 하고, 무엇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다소 납작한 표현인 것 같기는 하지만 한 가지만 뽑으라면 목사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무너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목사를 과도하게 의지하고,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관행들이 실제로 권위적인 목회자를 만든다. 교인들도 권위의식이 없는 목사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신앙생활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가나안 교인이긴 하지만 나는 평등한 교회를 꿈꾼다. 목사 스스로 권위를 많이 내려놓는 것이 멋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너무 창피해하지 말고, 성도와 목회자는 똑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기능이 다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Q. 한국의 여러 교회가 상처 입고 회복 중에 있는 교회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쓰면서 하나 배운 것은 회복의 모습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상처를 교인들 사이에서 꺼내보기 어렵고 힘든 정서가 있다. 반면에 어떤 교회는 1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너무 활기차고 그런 교회가 있다. 그러니까 고정 관념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 분쟁을 회복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정서를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건 살짝 위험하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는다면 교인들 스스로 회복하는 모습들을 살피는 게 중요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쟁 교회를 경험해 보신 많은 분들이 평소에는 교회 정관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담임목사가 사고 친 그제야 정관 찾아보고 민주적인 교회운동 공부하면서 이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교회 분쟁에 관해 물어볼 데도 없고 잘 모르기도 해서, 컨설팅해 준답시고 돈 요구하고, 정답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사짜’들이 많기 때문에 제대로 컨설팅해 줄 수 있는 기관과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을 정도만 체크해 주는 컨설팅은 필요하다.
Q.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독자들로부터 기대하는 변화나 개선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얼마 전 뉴스앤조이의 요청으로 삼일교회에 다니셨던 권대원 집사님이 서평을 써주셨다. 그분은 전병욱 사건 때 앞장섰던 분이다. 그분의 서평을 보는데 내가 다 위로를 받고 ‘꿈보다 해몽’이었다. 권대원 집사님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서 너무 잘 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교회 분쟁을 겪어본 사람들은 좀 남다르실 것 같다. 지금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보시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쟁이 일어나고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찾고 혹은 만들고 있는 분들에게 그러한 시도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런 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하나님 앞에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려는 그런 노력들은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설령 그게 잘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잘 모를 수 있지만 말이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책을 몇 권 냈는데, “이게 발행할 만한 내용의 글인가? 그럴만한 책인가?”하는 생각에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있고,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회사에서 함께 출판을 준비하면서 고생한 직원들도 있어서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많이 사주십사 부탁드린다.
미래를 위해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5가지’
김두현 21C목회연구소 소장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두 트랙의 조화이다. 하나는 목회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이다. 목회의 기능은 예배 전도 훈련 섬김 돌봄 기도 교육
교제 등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는 개인은 물론 모든 회중에게 유익을 주어 궁극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세우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목회는 목양(牧羊) 활동이다. 목회자는 매년 목회 계획을 세워 교회의 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동기 부여를 한다.
그러나 목회를 개발하고 활성화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는 않는다. 제도가 잘못됐거나 오늘날 교회 현실과 맞지 않으면 교회 성장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는 21C목회연구소를 통해 지난 21년 동안 교회를 세우는 목회 연구에 전념해 왔다. 목회자들에게 매주 강의를 하고 멘토가 돼 코칭을 하면서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화된 목회 자료 개발에 힘써왔다.
전반적인 목회 프로세스를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도 힘을 다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러 제도가 목회의 발목을 잡거나 걸림돌이 됐다.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가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5대 제도 개혁이 이뤄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첫째, 원로 제도
모든 교단이 시행하고 있는 교회 내 원로목사, 원로장로 제도는 변화돼야 할 우선순위에 해당한다. 한국교회
80% 이상의 작은 교회들은 원로 목사나 장로 제도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20% 정도의 교회들은 원로 제도로
인해 교회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미래 한국교회를 위해 기득권 당사자들은 이제 과감한 결단을 보여야 한다. 은퇴하면 모든 직함을 내려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를 따라 우리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청빙 제도
목회 패러다임이 개척에서 청빙으로 변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목사 청빙과 관련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청빙 이후 교회 내홍과 충돌, 성장 저하와 분열이 발생하는 교회들이 절반을 넘는다. 목사 청빙 제도에 혁신적이고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청빙 당사자 목사는 물론 청빙하는 교회 인사권자들 모두가 획기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현 관행인 신문 광고,
이력서 제출, 설교 테스트, 연고주의는 탈피해야 한다. 대신 인재 양육 시스템 개발과 네트워크를 통해 개 교회에 맞는, 존경받는
목사를 공정 신뢰 섬김으로 모시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당회 제도
당회는 순기능일 때만 필요하다.
만일 당회의 신분 자리 권위가 사역보다 우위를 점하면 그 당회는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한국교회 대부분 당회는
회의 정책 의결 중심이다. 당회원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목회의 팀워크 증진과 사역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요즘엔 전도하거나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명자들이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있다.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당회 제도를 운용하는 교회들은 뼈를 깎는 희생이 필요하다. 더 나은 21세기 목회 환경을 위해 당회원 모두 새로운 각오로 사명을 다해야 한다.
넷째, 세습 제도
세습 혹은 대물림은 한국교회 중 0.1% 교회에만 해당하는 소수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전체가
세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은 초대형 교회들의 책임의식 결여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70~80%는 자립의 위기에 놓여 있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모든 일에 신중하고 롤 모델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따라서 중대형 교회들과 목사는 희생하는 각오로 후임 목회자
제도에 본이 돼야 한다. 절대로 비판받거나 악영향을 주는 교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총회 제도
모든
한국 기독교 교단 총회는 정치를 위한 총회에서 교회를 세우는 총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총회장과 임원을 뽑는 선거 중심이 아니라
실제적인 처치 플랜팅을 통해 교회 개척과 작은 교회 네트워크, 젊은 세대 목회자 지원, 비전과 정책 연구 발표, 교단 간 연합을
통한 혁신적 교회 세움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총회가 해야 할 최우선 사업은 교회
개척과 지원, 차세대 목회자 양성과 공공선의 영향력 확장이다.
장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지배권을 갖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교회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이끄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리고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결혼 관계를 해치는 셈이다.”
어떤 제도든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해쳐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나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5대 제도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이 명령하시고 사도들이 이행한 사도행전 교회의 처치 플랜팅을 본받자. 그리하여 한국교회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목숨을 다하자.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보통 회개를 무언가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 정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metanoeō)는 잘못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라면 누가 그 길을 계속하려 하겠습니까? 내가 가는 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목이라면 누가 그 길을 고집하겠습니까? 인간의 눈은 보이는 욕망만 보고서 좇아가지요. 바로 그 길을 성경에서는 넓은 길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지요. 그런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게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 700여 년 전의 선지자인 이사야는 그런 예언을 선포했지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거기에서 너희란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지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닦도록 한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도록 촉구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700여 년 뒤에 세례요한이 똑같이 선포하지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 1:23)." 세례요한은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 그를 위해 광야 빈 들에서 외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그가 외친 회개가 무엇입니까? 옷이 두 벌 있는 자, 옷이 많은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게 회개라고 했지요. 또 먹을 게 있는 자,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사는 자도 먹을 게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것, 그것이 회개라고 했지요. 세리들에게는 또 뭐라고 합니까? 부과된 세금 이외에는 더 거두지 않는 게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하지요. 군인들은 또 무슨 회개를 요청합니까? 사람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아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알지요. 그것이 인간의 천성으로 되는 게 아님을 말이지요. 오직 그의 심령 속에 죄와 거짓을 몰아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어야 그 삶이 가능함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외치는 소리를 넘어 삶을 회개시키는 주체임을 밝히고 있지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이지요. 나는 비록 회개의 촉매제 역할만 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회개의 주체임을 밝힌 것이지요.
사실이 그렇지요. 그 어떤 유능한 목사나 선교사가 와서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 삶을 회개하며 사는 게 그분의 설교나 권면으로 되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 가능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곁에서 간구하고 계시고(롬 8:26)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요 16:13)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분께 인생의 항로를 내어 맡기는 자들은 참생명의 길을 걷게 되지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테네 입구에 들어선 바울의 심령이 격분했지요.
그곳 시가지에 온통 우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여러 석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섬기고 있었지요.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전의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였지요. 그도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조각하던 석공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돌을 깎아 여러 형상의 우상을 만들던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 석상을 사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지 않을까요? 왜 저들은 내가 만든 이 돌 형상을 신으로 떠받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게
무슨 냄새를 맡기나 하는 것인지, 이게 무슨 귀가 있어서 듣기나 하는 것인지(시 115:6) 하고 말이지요.
그건 우리가 생각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면 기가 막힌 형상으로 된 조각상들이 있지요. 나무로 혹은 돌로 된 조각상들 말이지요. 또 무당집에 가면 대부분 무엇을 꽂아 놓고 있나요? 대나무로 된 깃대지요. 그것들이 무슨 신이냐며, 그것들이 무슨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냐며, 그것들이 사람의 심령을 감찰할 수 있는 것이냐며 그냥 무시해 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교 연구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갖가지 나무와 돌로 된 조각상 앞에 사람들이 빌고 빌면 그 마음에 귀신의 영이 자리 잡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건 부적만 해도 마찬가지지요. 중국에서 들여오는 300원짜리 부적이 우리나라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1억도 가고, 10억도 가지 않습니까? 그 종이쪽지 하나가 무슨 영험한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그걸 부적이라 믿고 빌고 비는 사람들의 심령에 귀신의 영이 자리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 돌이나 나무 조각상이 아니라, 부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나무 깃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이요,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과 거짓의 영이 문제지요.
바울이 아테네 입구에서 격분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바울이 그것들을 부수고 깨트리고 목을 쳤던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것들을 부순다고 한들 귀신의 영이 그 속에 깃든 것도 아니고, 그 속에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보다는 그것들을 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는, 악한 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를 바르게 회개시키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대인의 회당과 토론장 아고라에서 쾌락과 금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했지요. 그 주된 내용은 바로 예수와 부활, 곧 죄와 사망과 어둠의 영을 깨트리시고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마음 문을 연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호기심이 있었던 까닭에, 바울을 데리고 논쟁의 종결지를 뜻하는 아레오바고로 갔지요. 그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함이었지요. 그곳에서 바울은 우선 세 가지를 전했다고 했지요. 첫째,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으로 손으로 지은 형상이나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나 건물 안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둘째,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손으로 섬김 받기를 원하거나 적선받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 셋째,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갈비뼈를 통해 하와를 만드사, 그 후손으로 모든 혈통을 잇게 하셨지만 그들이 죄를 범하자, 그들을 모두 흩으셨고 그들의 수명도 120세로 정하셨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유한함을 아는 인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다른 신들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마 1:23)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회개를 촉구
오늘은 그 다음 부분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연이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가장 큰 골자는 그것이지요. 하나님은 너희들이 섬기는 그런 신과는 다른 분이요,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이 새긴 조각이나 형상에 비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넘어가셨을지(hyperoraō) 모르지만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소개받고 알게 되었으니, 다 명하여 회개하도록 하셨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그 증거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확고히 하고 계시고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니, 그것이 곧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이자 곧 신실이다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차를 사도 보험을 드는 것은 사고에 대한 예방 차원이 제일의 목적이지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도 그 부분이지요. 머잖아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죄와 사망을 깨트리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뿐이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보증도 없고 그것보다 더 신실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테네 사람들이 해야 할 게 있다면 그분 앞에 나아와 회개하는 것뿐이라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이 아테네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를 참된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내버려 두실지 몰라도, 이제는 아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지요. 제 아이들이 지금도 어린데, 더 어렸을 적에 무심코 어린이집에서 남의 물건을 가지고 올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잘못인지 모르고 가져왔었죠. 그때는 저와 제 아내가 용서해 주었지요.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이니 다음부터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고 다음에 한 번 더 가져왔을 때는 단단히 혼을 내 준 적이 있었지요.
그게 가벼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것이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한 것 아닙니까?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모를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지만, 내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그때부터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깊이 이야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자기 감정에 치우쳐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에게 권면했겠지요. 그렇게 했기에 그들 중에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디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다고 밝혀 주고 있지요. 단지 바울 자신의 말로 했다면 결코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자신의 유한함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면 되겠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매개체로, 촉매제로 쓰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사야처럼, 세례요한처럼, 주님을 위한 길을 닦는
통로로 쓰이길 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부분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를 통해 찬양과 영광을 받기 위함이시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길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분의 길을 닦는 통로가 되는 데 있지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내게 주어진 일을 박차고 모두가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지요. 지금 주어진 일을 통해 복음 전도자, 복음 증거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어떻게요?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면 됩니다. 그것 하나면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 찬송하는 삶이 되고, 복음을 위한 손과 발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뭘까요? 그것은 징계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요 2:15) 호된 야단을 친 적이 있으시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한 거래 수단쯤으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목적쯤으로, 그밖에 내가 죽어 어디에도 갈 데 없다면 그래도 천국이라는 보증수표를 얻고자 하는 이유 등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상을 엎으셨지요. 오늘 우리들은 마음의 일그러진 형상들을 갈아엎는 회개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 징계를 촉구하시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실 한국교회에 징계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지요.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일반 교우들이 잘못을 해도 징계를 하지 못하지요? 이유가 뭘까요. 징계를 하면 그 즉시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리기 때문이고, 교인들은 '이 교회만 있는 줄 아냐, 얼마든지 나를 받아 줄 교회가 널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징계를 못하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자신의 심장을 때리는 채찍과 같은 말씀보다는 축복, 성공, 건강 강좌 같은 설교만 좋아하는 쪽으로 변질돼 있지요. 설교 말씀을 통해 심장을 때리는 것은 귀를 가려서 듣지요. 어떻게 그런 교회에 주님께서 살아 계실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라면 초대교회의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가(계 2:1) 이미 떠난 지 오래겠지요. 겉으로는 교회인 듯하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났고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난 교회 말이지요.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주보 뒷면에도 기록한 바 있지만,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온 교우 한 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분의 지난 삶은 죄와 폭력으로 얼룩진 삶이었지요.
젊어서는 스스로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길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지요? 이 세상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니, 이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오직 저 영원한 하늘 생명을 바라보도록(골 3:1) 촉구하는 그분의 음성이지요? 이 세상에서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교인이 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다면(마 23:15)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그런 음성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만 교회에 소속돼 있는 선데이 크리스천 집사요 장로요 권사로 살지 말고, 오직 속사람을 새롭게 하여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살라는, 주님의 음성이지 않을까요?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지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지셨나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으셨나요? 우리에게 저 영원한 생명, 천국을 허락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 생명은 교회에 속해 있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는 직함으로 얻는 게 아니지요. 그 생명은 예수의 심장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죄송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려도 그분의 심장이 없는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비록 초라해도, 그분의 심장을 지니고 사는 자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입성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라면,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여러분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우리 생명은 아침에 내렸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약 4:14)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코끝의 호흡(눅 12:20)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찢으셨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닫아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계 3:7)이 바로 그분이지요. 그렇기에 이 시간 욕망의 영에 붙잡혀 살아왔던 것, 거짓과 불의의 영, 미혹의 영에 이끌려 왔던 것,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신 6:18)보다는 나 보기에 좋은 길만 택하여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오늘 당장 하나님께서 내 코끝의 호흡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비록 아테네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인이신 줄 모르고 살 때는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을 때는 결코 넘어가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 같지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 물질, 재산, 자녀들, 재능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주인인 줄 알고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보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며 더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습니다. 오! 주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을 떠난 우상들이오니, 이 시간 내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지울 수 있게 도우시옵소서. 이제부터는 나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사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길을 택하여 사는 당신의 종들이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도 건물도
초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지 않는, 마지막 때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지니며, 손과 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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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고치고 개혁해야 할 것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첫째, 주일예배 시간에 드럼과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오르간과 피아노 위주의 경건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 2:4)고 했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 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 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6:44). 이것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나님은 신명기(申命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복된 삶을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 언약 백성은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 말씀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신 6:1-3). 실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신명기 6장 10-11절에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조심하라”(신 6:12)는 경고였다. 복지국가와 웰빙의 삶을 살 때 조심해야 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 때에는 특별히 조심할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던 시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였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번성할수록......범죄......”(호 4:7) 했다.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첫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12절)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13절)
셋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13절)
넷째,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14절)
웰빙의 삶에서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복지국가의 부요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 매우 시의적절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부요가 오히려 영적인 빈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하는 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점에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을까?
‘조심하다’(shamar)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쳐 지키다’라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가나안 땅의 세속 이방 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in the world)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not of the world) 살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세워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확신 있는 삶을 살며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도록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롬 12:2).
그렇게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명기 6장 4-6절의 말씀이다.
한국교회의 쇠퇴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까?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면 다음세대는 희망이 없다. 물질적으로 번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에 처할 수 있다. 성경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사 시대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을 겸하여 섬기는 부모세대는 신명기 6장 7-9절을 말씀도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교회 다음세대가 가야할 길은 이상이 없나?
더 구체적으로 우리 아이가 가야 할 길에는 이상이 없을까?
한국 기독교와 무교
무교를 단지 원시적인
종교로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무가(巫歌)는 오랜 역사 속에서 타종교와 통속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축적된 무당의 노래이며 결코 그 원래의 것을 보존하고자 했던 노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교가 주술신앙(呪術信仰)일 뿐 교리도 윤리도 없기 때문이다. 무교는 단지 타종교와 혼합하여 신령한 요소들을 그대로 흡수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 뿐 발전된 교리나 윤리를 갖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교는 타종교와 대중문학을 흡수해서 발전되었으며, 또 그 반대로 타종교와 전통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현대적 감각을 가진 역사적으로 축적된 종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교의 발전은 불교와 기독교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전통사상과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종교는 무교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 때문에 무교의 발전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전통 한국문학의 장르에 대한 훌륭한 지식이 필요하며, 무가의 역사와 전통문학과의 관계를 추적해야 한다. 무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 시대 특히 제정일치 시대에는 대중 종교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에 무당 비슷한 인물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에서 거듭 등장하고 있고, 유동식은 1450여년전 신라시대의 화랑도에서 이미 무교의 큰 영향을 발견하고 있다. 원래는 무교가 이들 삼국의 주요한 세계관 이였다. 그러나 무교는 불교, 유교, 도교와 같은 중국문화의 소개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교는 점차 하류계층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계층에 관계없이 여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는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단군신화나 팔관회(고려 때 해마다 대궐 안에서 동짓달이면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큰 규모의 의식)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무교가 민중생활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후 이조선의 유교정책의 영향으로 무교는 하류층의 민간신앙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이 무교는 민간신앙이 되어 한국의 종교적 바탕 또는 정신적 바탕이 되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근저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대 종교들도 이 무교신앙의 바탕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유동식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쉽게 수용되는 이유와 기독교신앙이 기복신앙으로 흐르는 이유 그리고 교역자들이 무당적인 중재역할을 하게 된 이유를 여기서 찾고 있다. * 자료 출처 /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p. 15-39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왈러벤(B. C. A. Walraven)은 한국 무교를 원시 종교로 보지 아니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 혼합 발전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는 무교의 역사적 발전을 무가의 변천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고 믿는다. 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큰 변화를 겪어왔고, 그 시대 시대의 영향들을 흡수하여 왔다는 점이 자료들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무가가 역사 속에서 수정되지 않은 채 수세기에 걸쳐서 변함없이 전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금세기에 수집된 무가는 역사적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입증할 뿐이라고 말한다. 왈러벤은 현금의 무가의 문학 형식이 이조선 후기에 등장한 대중문학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18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통속문학의 영향은 무가의 형태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무가의 제문(祭文), 제문구조, 주제들이 이들 문학의 구조와 유사할 뿐 아니라, 무가의 형식이 새로운 통속문학의 등장과 그 영향 아래서 크게 변화를 겪어왔음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가에서 일부 설화 주제들과 또 이들 주제들의 일부 연관성은 상당히 오랜 고대의 것일지 모르나, 무가와 설화문학의 다양한 양식사이의 관계는 무가의 형태가 시대와 함께 변천되어 왔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현대 무가조차도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며, 본래 양식을 보존하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무가는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무가가 무당의 직접적인 신앙의 표현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왈러벤은 무가의 역사가 무당의 역사와 한국 사회와의 관련성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무당이 18세기와 그 이후의 통속문화의 요소들을 상당히 흡수하였다는 사실이 단순하고 무식한 농부들과 어부들이 아닌 사회의 중간계층인 하급 공무원들과 관리들의 문화가 무당에까지 침투될 수 있는 채널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대개는 광대가 여기서 중간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광대는 사회의 상류계층에 무교적 요소들을 상향전달함으로서 판소리 창작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그 요소들을 하향전달하였다. 광대로부터 상류계급의 문화적 요소들을 빌린 무당은 차례로 일반 대중사이에 이 문화를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무교는 종교 혼합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한국인 심성에 흐르는 또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무교신앙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타 종교나 통속 문학에서 신령에 관한 부분을 받아 들여 무가를 발전시켰거나 그 시대적 상황을 표출하였다 하더라도 교리도 윤리도 없는 무교는 여전히 주술신앙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무교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무교가 타 종교나 문학에서 받은 영향보다는 타 종교에 끼친 영향 특히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B.C.A. Walraven, Muga: The Songs of Korean Shamani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