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일 설교 자료 / 내가 믿는 예수


11-07-2024(목)

플러싱 소셜 시큐리트 사무실에(Social Security Office) 2024년 소득 증명서(Award Letter)를 받으러 가려고 27번 버스를 타고 샌포드 에븐뉴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어제 밤에 인터넷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샌포드 에븐뉴 라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사무실이 없습니다.
문제는 버스 정거장이 샌포드 에븐뉴이었지 사무실 주소는 바클레이 에븐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하여 지나가던 행인에게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다시 검색하며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살펴보니 사무실 주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에븐뉴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목적지 건물을 찾으니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손에는 분명하게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면 그 결과는 세월만 헛되게 보낸 것이 될 것입니다.

1. 잘못 입력된 주소 / 바클레이 에븐뉴 - 샌포드 에븐뉴
2. 손에 든 정확한 주소 / 다른 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리석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해야 합니다.
갈증이 나면 물도 마셔야 합니다.
화장실에도 가야 합니다.
잠도 자야 합니다.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일까요?
주일에 예배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하나님의 생각(thoughts)과 세상의 생각(thoughts)
하나님의 길과(ways) 세상의 길(ways)

* 생각(4284) 마흐솨바( machăshâbâh) מַחֲשָׁבָה     

1. 명상.  2. 공교한 일
발음 [ machăshâbâh ]
어원  / 28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0회 사용
  • 1. 명사, 여성 명상, 숙고, 목적, 계획, 의도, 음모,책략, 삼하14:14, 욥5:12, 잠12:5, 15:22, 19:21, 20:18
  • 2. 명사, 여성 공교한 일, 기묘한 일, 출31:4, 35:33.

  •  관련 성경 /  생각(창6:5, 욥21:27, 사55:8), 방책(삼하14:14), 의도(대상28:9), 사상(시33:10), 심중(대상29:18), 양식(대하2:14), 꾀(에8:3, 렘18:18), 계교(욥5:12, 잠6:18), 경영(잠15:22), 계책(렘18:11, 49:30), 계획(렘49:20, 잠19:21),모략(단11:24,25), 뜻(미4:12), 정교한 일(출31:4, 35:33,35), 기술(출35:32), 고안(대하26:15), 경영하는 것(잠16:3), 모해함[하는 것](애3:60,61). [동] 꾀하다(에8:5, 렘11:19).

  • *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derek ]
    어원  / 186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 1. 명사 여행, 창30:36, 삿17:8, 왕상18:27, 왕상19:4, 잠7:19
    • 2. 명사 길, 통로.
      • a. 명사 [장소의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로향하는 길, 창3:24, 잠7:27, 겔8:5,21:2, 40:20, 41:11,12.
      • b. 명사 [인간의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어떤 사람이 가고자 하는 길, 창19:2,32:2(1), 민20:17, 21:22, 24:25, 수2:16.
    • 3. 명사 방법, 방식, 과정.
      • a.명사 삶이나 행동의 방식, 길, 삼상18:14,왕상16:26, 22:43, 왕하22:2, 대하17:3, 21:12, 22:3, 시5:9(8), 27:11, 사8:11, 잠12:15.
      • b.명사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 종교, 시139:24, 암8:14.
      • c. 명사 운[수동적인 뜻] 욥3:23, 시37:5, 사10:24, 암2:7.
    • 관련 성경  /  길(창3:24, 삼상4:13, 겔48:1), 행위(창6: 12,삼상8:3, 왕상8:32), 도(창18:19, 신13:5, 시18:21), 도리(창19:31, 욥21:14), 생리(창31:35), 도중(왕하10:12), 도로(레26:22, 애1:4), 여행(민9:10, 수9:13), 행사(욥26:14), 중도(시102:23),때문(시107:17), 행실(잠8:13, 13:6), 소행(잠12:26, 호4:9), 바른 길(잠23:19, 사30:11), 옳은 길(말2:8), 자취(잠30:19), 사정(사40:27),행동(겔14:22,23), 풍속(겔20:30). [동] 향하다(겔20:46, 21:2, 40:6,22,46), 위하다(암8:14), 여행하다(수9:11), 가다(삿4:9), 행하다(잠14:2, 28:6), 본받다(사10:24).


    * 달라서(3808)  로( lô)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lôʼ ]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여호와의 생각과 길이 우리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의 의미는 바로 앞절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כִּי)가 있기 때문이다.

    * כִּי

    • 1. 왜냐하면, ~때문에(because) ~하는 것(that절) 진실로(indeed)


    말하자면 본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풍성히 용서하시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악인의 행실과 불의한 자의 생각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용서받을 악인이나 불의한 자의 상태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시 25:11; 롬 5:19).

    본절은 앞절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분명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 만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계획의 차이가 크다고 덧붙이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뒷받침된다 :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시 89:2).
    이상의 구절들이 취하고 있는 사상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의 눈에 용서받을 수 없어 보이는 자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왜?’라는 질문은 올무가 되어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계속 가둬놓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를 십자가에 영원히 못 박아야 한다고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지식을 가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투쟁에 대한 설명을 듣기 원한다. 물론 지식은 인생의 많은 일들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맡김’이 힘이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 

    (나에게 폭풍이 왔다, 잰 해리슨)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

    우리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는 틀린 생각을 하는 영적인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렇게 된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을 하면서 그들은 선악의 모든 기준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네들 중심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판단을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판단해주시는 판단대로  하나님이 이것 좋아 하면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하나님이 요것은 안 좋아 하면 안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로는 직접 내가 선악을 판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은 정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집을 지을 때에나 무엇을 건축할 때에 반드시 밑에서부터 짓습니다.
    바벨탑을 지을 때에도 보면은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때에나 방주를 지을 때에는 우리와는 반대로 위에서부터 짓습니다. 

    창세기 6:15-16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성막을 지을 때에도 먼저 성막 지붕을 먼저 짓고 나서 밑에 들어갈 널판지를 만듭니다.
    이와같이 순서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
    하나님의 생각의 구조와 우리의 생각의 구조는 하늘과 땅입니다. 

    할아버지와 소년이 말 한 마리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가신 날 밤, 말이 병이 들어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말의 열을 내려 주려고 밤을 세워가며 물을 먹이면서 애를 썼지만 말은 싸늘하게 죽어 갔습니다.
    시내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얘야, 말은 열이 날 때 절대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
    넌 네 방식대로 말을 치료한거야
    말을 치료하려면 네 방식이 아닌  말의 방식이어야 하는 거란다”

    소년은 밤을 세워가며 최선을 다하여 말을 돌보았지만 오히려 말에게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더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드슨테일러는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일이다”

    우리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고 뛰고 굴리고 야단법석을 떨고.... 그거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29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이 예루살렘교회에 임하므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이 노력해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간들이 만든 다른 종교도 다 밑에서부터 올라갑니다.

     20년 전에 시애틀에서 원불교 교무과장으로 일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52살 정도 되는데 포교승으로 최기숙이라고 하는 여자 스님이 한국에서 원광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애틀에 불교를 전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시애틀에서 어느 한국목사를 만나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듣다가 갑자기 성령께서 역사하여서 무릎을 꿇고 이 분이 눈물을 쪼르르 흘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이름을 최마리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이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 이분만큼 확실하게 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졸업논문을 쉽게 한줄로 얘기를 하는데  “기독교는 기쁨의 진리”입니다.
    불교는 가도 가도끝이 없는 어려운 철학입니다.”
    52년 믿었지만 어려운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 한순간 나에게 영생이 주어지고 죄 사함받고 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 기쁨이 지금도 나에게는 넘쳐서 그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감격 그 기쁨 예수 믿는 그 순간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52년 믿은 불교는 한 순간도 나에게 기쁨을 준적이 없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더 어려워지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므로 구원도 위로부터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만든 불교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수행은 아무리 해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반대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할 때  하나님의 방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줍니다.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서 일곱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서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번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고 나팔 소리를 길게 부를 바로 그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리고성을 향해 일제히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을 점령하고 함락시키게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거나 포위하거나 성에 맞설 다른 성벽 공성탑을 쌓던지 해야 할텐데...
    하나님의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니 내 방식대로 해야 되겠다..’
    그런데 우직하게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일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까?
    돈 많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하나님이 찾고 계신 사람은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보이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19-20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그 분이 하라는대로 따라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내가 선악을 판단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를 않고, 맥없이 툇자를 맞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상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은  그것은  응답을 받게 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가장 중대한 조건, 즉 완전한 순종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우리에게 나타날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그의 뜻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매사에 예수님 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즉각 즉각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데…

     당연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기도의 응답은 그 때까지 지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하나님께 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응답을 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을 지체하고 우리가 변화되어서 기꺼이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기도응답도 곧

    우리에게 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 제사장이 늦게 오자 사울이 생각하기에는 적군은 쳐들어오지 병사들은 동요가 되어서 흩어지려고 하지…. 그래서 엣다 모르겠다 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직접 제사를 주관해서 드리는 겁니다.  

    이를 지켜본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를 하시고 결국은 왕위를 사울에게서부터 빼앗아서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데는 다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이 다 있습니다.
    다 합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키신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다음의 왕인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이 아니면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일려고 쫓아오는 사울왕을 오히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방법이 아니기에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며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죽였으면 그 때부터  고생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의 편안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심어 놓은 중심진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는 목적이 서로 다르고 원리도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권세나 탐욕이나 야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립니다. 

    세상은 우리더러 성공하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하라고
    세상은 경쟁하라고 하나님나라는 섬기라고
    세상은 자기 권리를 지키라고 하나님나라는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세상은 최상의 거래를 위하여 타협하라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세상은 탁월해지라고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세상은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하나님 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세상은 자기를 자랑하라고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세상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행합니다.
    세상은 복수하라고 하나님 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세상은 장기목표를 세우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보여주시는대로만 살면 된다고
    세상은 소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경건한 성품이 기쁨을 준다고
    세상은 섬김을 받으라고 하나님나라는 섬기라고
    이렇게 사사건건 우리의 사고 방식 그리고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틀립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우리의 본성도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과 공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렇게 묵상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게 됩니다. 
    묵상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들여서 내가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그것은 묵상의 목적이 아닙니다.
    묵상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해가 안 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게 되느냐를 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든지 성경을 통해서든지 듣든지 그렇게 성경을 보는 비율이 한 10%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듣는 자는 5%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그 5%깨닫는 사람 중에  몇 % 정도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실제로 땅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행해지므로 이루어지는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 중에 1%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옆에 있는 분들에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중에서 “꼭 천국에서 사는 것 같아요!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요! 너무나도 황홀해요!”라고  한다면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라는 책을 쓴 다하라 요네꼬양은  어머니의 죽음때문에 괴로워서 달려오는 열차에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오른쪽 손의 손가락 세 개만을 남기고 두 다리와 왼쪽팔이 절단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있는 동안 선교사를 지망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남편과 함께 자기의 삶을 간증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이제는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니까 전에는 사지가 멀쩡해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말씀대로 깨닫고 순종하니까 사는 것이 황홀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아서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부르짖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하면 
    용감하게 담대하게 아슬아슬하게 벼랑끝에서 허공에 한 발자국을 내 딛는 심정으로 눈 질끈 감고 한번도 걸어가보지 못한 곳으로 믿음으로 내 딛는 겁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아직 물은 강을 넘치게 흐르고 있었지만 믿음으로 눈 질끈 감고 법궤를 메고 건넌 것 처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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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첫째로,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양(6629) 촌(tsôʼn) צֹאן 스트롱번호 6629

    1. 집합명사로 떼.   2. 무리.  3. 창 4:2
    발음 [ tsôʼn ]
    어원  /  ‘이동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그릇행하여(8582)

    תָּעָה 스트롱번호 8582

    1. 동요하다.  2. 야자수가지. 3. 사 21:4
    발음 [ tâʽâh ]
    구약 성경  / 50회 사용



    각기(376)  אִישׁ 스트롱번호 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79회 사용



    담당시키다(6293)  פָּגַע 스트롱번호 6293

    1. 부딪다.   2. 적의를 품고 달려들다. 3. 촉구하다
    발음 [ pâgaʽ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새벽 묵상 중에(10-23-2024. 수요일)
    2025년을 준비하며 설교 계획을 생각하며 정리하기 시작하다.


    2025년 1월 5일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예수님을 영접하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 6. 19~1662. 8. 19).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불!(Fire!)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나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항상 내 마음에 담고 믿음으로 나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쁨을 누리며 확인하면서 예배 때마다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迎接)"이란 한자는 " 맞을 영(迎)", "이을 접(接)" 이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시다!

    영접이란 사전적 의미는 "손님을 맞아서 대접(待接)하는 일."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는 고백은 예수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귀한 이름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계시하여 지어주신 이름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 이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예수는 나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그 이름의 증거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예수는 나의 왕이시다!

    왕이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말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나의 왕은 죄라고 것이었습니다.
    내 중심에 죄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를 죄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죄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셨습니까?

    나의 생명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건강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재능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물질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시간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되려면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모두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수입이 있습니다.
    내 모든 수입을 예수님께 양보하는 신앙이 헌금입니다.
    헌금 중에서도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이 물질을 양보하는 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수입이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나면 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당장 해결할 수 없으므로 나의 물질의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 모든 것을 바쳤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주님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를 잘 치는 피아니스트의 경우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도 주님이 주신 재능 곧 달란트라고 합니다.
    그 달란트를 예배 시간에 주님을 위하여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유명한 반주자를 사례금을 주고 모셔옵니다.
    이러한 사례가 마치 교회가 유명해지고 교회가 최고의 반주자를 모시고 있다는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바람직한 신앙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피아니스트 한동씨의 부친이 교향악단의 팀파니 연주자로 생업을 유지했습니다.
    주일에는 출석하는 교회에 지휘자로 섬기면서 일체 교회가 사례하는 것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교향악단에서 내 생계에 필요한 것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나의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섬기는 일에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시던 박태준집사님께서 남대문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섬길 때에 한번은 급한 전화가 당회장실로 걸려왔다고 합니다.
    당회장 목사님께서 급한 전화를 받으라고 연락하여 전화를 받고 오신 후에 주일 예배를 위하여 지휘자로서의 본분을 마치고 예배가 끝날 무렵 목사님의 축도가 있고 마지막 성가대의 송영을 마치자마자 급하게 가운을 벗은 후 연습은 부지휘자에게 맡기고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모두들 무슨 급한 일이 있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었습니다.
    박태준집사님이 급하게 달려간 곳은 세브란스병원입니다.
    병원에 사랑하는 딸이 위독하다며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뵙고 싶다며 어머님을 통하여 급하게 전화로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지휘자에게 연락을 했지만 예배를 마친 후에 급하게 병원으로 가셨지만 사랑하는 딸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집사님의 부인이 역정을 내며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가?
    그때 집사님께서 이렇게 위로했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딸은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주일 예배의 지휘는 물론 부지휘자가 할 수 있어도 내가맡은 직분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예배에 나는 실패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신앙의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고백이 아닐까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첫째는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철저하게 죄를 두려워하고 멀리합니다.

    신경초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신경초 잎사귀에 무엇이 닿기만 하면 앞사귀가 움츠러듭니다.
    죄가 나를 건드리면 온 몸이 움츠러들며 죄에 대하여 경계 태세를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기도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찬송합니다.
    봉사할 때에도 내가 드러나는 자리를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 김홍도 목사

    지난 번 미국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설교 준비하는 중에 오늘의 이 제목을 보고 제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당신 지금까지 말씀 중심의 건전한 목회를 해 왔는데 왜 목회 말년에 이단 소리를 들으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절대로 그 제목으로 설교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지마는,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중에 결코 성경말씀에 이탈된 내용이 아니며 나아가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신이 된다"는 뜻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박태선이나, 자기가 예수라고 하는 문선명이 말하는 의미의 '신'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영접하여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과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잃었던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신의 성품을 가진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이 말씀은 시편 82편 6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만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재판해야 될 재판장들이 불공평한 재판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드러지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작은 신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 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장 14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곧 영원한 생명이 되신 분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어느 집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 호적에 입적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아닌 개를 갖다가 양자를 삼아 호적에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라야 사람의 호적에 올릴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성을 받은 사람, 즉 작은 신이 되어야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의 후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장 22절) 하시며 그룹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다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가 되시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예수님과 같이 신성을 소유한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도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영영 떠나버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신성을 잃어버리고 짐승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생을 얻고 신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자녀,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1. 거듭나는 것은 작은 신으로 태어나는 것 (요한복음 3장 3-6절)

     

    "거듭난다" 혹은 "중생(重生)한다"는 것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셨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두 번 세 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이 자연 인간으로 모태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난 다음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며, 이 말씀은 제일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작은 신으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신의 성품을 받아 작은 신이 되는 것 (베드로후서 1장 4절)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한 말씀에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은 영어로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우리 인간이 신의 성품을 받아 영생하는 작은 신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신의 성품"(divine nature)을 받아들여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고욤나무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물을 잘 주며 가꾸어도 고욤나무 열매밖에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욤나무 가지를 잘라 내고 감나무를 가져다 접을 붙이면 줄기나 뿌리가 고욤나무라도 감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멸망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수양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그의 피를 흘려 우리에게 생명의 진액을 흘려주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생명과 신성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3.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작은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말씀하자 영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상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예수님만의 아버지, 예수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영생을 얻고 신성을 받아 작은 하나님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작은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이 맏아들이 되심은 우리가 작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곧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예수님과 같게 만드시려는 계획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도 작은 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확인한 다음에 고백한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을 주님과 하나님이 되신다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므로 독생자께서 맏아들이 되셨다고 하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즉 작은 신들로 만드셔서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사이 어미의 유전자(DNA)를 새끼의 세포에 접합시켜서 어미와 똑같이 양이나 소를 복제하는 기술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인간 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생명자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좌우간 인간도 똑같은 모습의 인간을 복제하는데 하나님께서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셔서 저를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X·DNA를 심령에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작은 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DNA인 X를 접합시키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5. 주의 재림 때 주와 같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작은 신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치 무정란과 병아리가 될 유정란이 겉으로 봐서는 분별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병아리로 부화되는 날, 분명히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라도 아직은 멸망의 자식들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받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던 성도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올라가듯이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들림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작은 신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당신은 반드시 작은 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해야 맞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멸망 받을 아담의 후손이 마지막 아담 예수님과 같은 신성을 가졌고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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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2일(주일)

    지난 주일 설교를 요약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 예수를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는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과 예수는 나의 주인, 나의 왕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던 사례가 있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례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 신앙생활이 형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것 잘못한 것은 수정을 한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내가 믿는 예수
    -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도입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성장한 동네가 서소문동입니다.
    지금은 아주 번화가로 발전했지만 대법원 후문이 있고 교육청이 있고 한일 병원이 있는 동네입니다.
    당시에는 주유소가 있었고, 한일 병원은 경전 병원으로 운영하던 시절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묻습니다.
    "승혁아, 아버지 집에 계시니?"
    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에 예, 하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님이 "아이구 형님 웬일이십니까?" 하며 반가워 하시더니 제게 인사해라 큰 아버님이시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아무개는 주워 왔다!" 이렇게 놀렸습니다.
    자주 어른들이 주워 왔다고 하므로 제 어린 마음에 나도 주워온 아이인가?
    그런데 그 날 큰 아버님이 방문한 후에 확신하기를 나는 주워 온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아버님이 나를 보고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얼른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야 합니다.
    닮지 않았을 때는 발가락이 닮았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모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으려면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합니다.
    즐거워 하는 방법으로는 읽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적용하는 것, 열매 맺는 것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기도의 범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의 기도에서 점점 더 그 범주를 넓혀 낯선 지역의 선교사들까지 확장시켜야 합니다.

    찬송은 영의 노래라고 합니다.
    내가 즐겨 부르는 찬송(18번)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김은신 권사님께서는 장례식에 부를 찬송을 일러주셨습니다.
    환송예배 시 : 427장(내가 매일 기쁘게), 292장(내 본향 가는 길)
    하관예배 시 : 293장(천국에서 만나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고 할 때 권세라는 헬라 단어의 용법이 중요합니다.
    권세를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권세(權勢)라는 헬라 단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에쿠시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어느 도로에서 교통경찰이 과속차량 및 위법 차량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교통 경찰은 아주 왜소합니다.
    커다란 트레일라가 경찰이 손으로 들고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면 즉각 가던 길에서 멈춥니다.
    힘으로 비교하면 경찰은 트레일러에게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일러가 멈추는 까닭은 교통경찰에게 부여된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레슬링 선수가 도로에 서서 손을 든다면 트레일러가 멈출까요?
    레슬링 선수가 교통 경찰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몸도 아주 좋지만 레슬링 선수의 손짓은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선포하면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 즉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은 깨끗하여 질지어다!"

    (도입 이야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인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과 금은 넘쳐날지라도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행 창고와 같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은행 창고가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충고를 들어야 한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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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19일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둘째. 구원의 광의(廣義) - 넓은 의미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η σωτηρια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불자들에게는 모든 경전을 다 읽을 수 없어도 경전을 읽은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불자들의 기도가 있다.
    그 기도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한다.
    다른 경전은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염불로 사용한다.

    기독교에서는 아주 간단한 기도가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지만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렵다.
    이러한 환경에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삼오신앙(三五信仰)이라고 합니다.
    삼이란 세 가지 이름을 뜻합니다.
    오란 다섯 글자로 이름이 갖는 함축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첫째는 예수(마태 1:21, 누가 1:31)
    -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둘째. 그리스도(마태 1:16) -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마태복음 1:16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셋째. 임마누엘(이사 7:14, 마태 1:23) - 예수 내 권세! Jesus is my Power!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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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피
    영원한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6-29, 히브리서 13:20-21)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피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보배로운 피"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24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니라.

    예수님의 피는 왜 보배로운 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만인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살아 있는 피요, 만인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마가복음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redemption)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의미를 구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5:24-25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구약에서 땅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위기 25:23-25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무를 것 - 리뎀션(redemption)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우리는 예수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을 것이 아니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슴에 새겨지지 않으면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가지고 양심에 역사하여 죄책감을 강하게 가지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가슴에 새겨져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죄가 너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더 이상 죄가 네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에게 한번 말해보세요~ (알아듣고 있는 겨?) 이 말은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죄가 네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죄가 네 인생을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게 끌려 다니면서, 그 죄가 우리 인생을 망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redeem
    1. 동사 (결함 등을) 보완[벌충/상쇄]하다 (=compensate for)
    2. 동사 (실수 등을) 만회하다
    3. 동사 (죄악으로부터) 구하다[구원하다]

    redemption
    1. 명사 격식 구원, 구함
    2. 명사 금융 (주식) 상환(相換)[현금화]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요한일서 1:7
    저가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원죄와 유전죄와 자범죄까지 완전히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마 26: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1:7).
    이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계 1:5).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는 죄에서 해방 받은 몸입니다.
    사망에서 영원하고 확실한 참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죄의 원수가 잡아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주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합니다(엡  2:13).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과거에 죄 지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앙고백하는 순간 다 씻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희고 깨끗하게 해주십니다(히 9:14, 계 7:14).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정결하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합니다(히 10:19-20).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공의로운 피를 믿고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는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피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기쁨, 어느 정도의 행복입니까?
    우리의 죄악을 기억치 않는 행복입니다(렘 31:34).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지웠습니다.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주의 등 뒤로 던졌습니다(사 38:17).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도말해 버렸습니다(사 44:22).
    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I, even I, am he who blots out your transgressions, for my own sake, and remembers your sins no more.

    도말(塗抹)이란 ‘완전히 빼버리다, 완전히 지워버리다’는 뜻입니다.
    도말이란 한자의 훈(訓)은 "칠할 도, 진흙 도(塗)", "지울 말(抹)"
    따라서 도말이란 진흙을 발라서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지워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피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신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0:20에서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악을 찾을찌라도 없겠고 유다의 를 찾을찌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이러한 복을 받았으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32:1
    허물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적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영원한 넉넉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영원한 피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구원입니다.
    교회의 근원입니다(행 20:28).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eep watch over yourselves and all the flock of which the Holy Spirit has made you overseers. 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which he bought with his own bloo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인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날마다 기쁨의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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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을 의미할까?

    대한성성공회 인터넷 검색 창을 사용하여 "예수의 피"라는 구절을 입력한 결과 성경 전체에서 두 개의 구절이 소개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합니다.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예수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피"라는 구절을 입력한 결과 네 개의 구절이 소개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 성찬예식 때 사용한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들을 가깝게 연결하여 친족이 되게 합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그리스도의 피는 화인 맞아 더러워진 양심으로 인하여 죽은 행실과 같은 죄악된 일에서 우리들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리스도의 피” 라는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완전한 속죄 사역을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피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수 세대를 거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수한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피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속죄 수단이라는 사실은 모세 율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성전 제단에 동물들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그러나 이는 그 효과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피흘림이었기에 반복해서 드려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의 전조였습니다(히브리서 7:27).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Unlike the other high priests, he does not need to offer sacrifices day after day, first for his own sins, and then for the sins of the people. He sacrificed for their sins once for all when he offered himself.


    예수님의 희생이 드려진 후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건네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20).

    누가복음 22:20


    잔에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흘려질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동물들을 지속적으로 희생시켜야 했던 옛 언약의 요구는 폐하여졌습니다.
    동물들의 피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사람들의 죄를 덮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죄는 거룩하고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3).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But those sacrifices are an annual reminder of sins,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완전히 갚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19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히브리서 9:12) 완전한 구속 사역이 영원히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예수의 피를 모르면 안됩니다. 예수의 피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옛것과 새것에 대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의 피는 믿는 자들을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브리서 9:14).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 쓸모 없는 (죽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치 없고 비생산적인 육신의 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Sanguis Christi.  Blood of Christ)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보혈(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11-22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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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피가 약속한 은혜

    첫째, 언약의 피(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In the same way, after supper he took the cup,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do this, whenever you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칭의(稱義, 체데크 צדקה (tsedeq), 디카이오시스 δικαίωσις (dikaíōsis), justificatio, iustisia, justification, Rechtfertigung)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는(made or declared to be righteous)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의롭게 됨’ 또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음’을 뜻하며, 기독교 신학에서 속죄를 통해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과 동시에 죄인들이 의로워졌다고 선언받는 것이다.
    칭의를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의화(義化, 의롭게 되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에 의해 의로워진 행위, 과정, 상태이다.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결의 능력(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까워진 관계(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친밀(親密) / 친할 친(親), 빽빽할 밀(密)
    매우 친함, 썩 친(親)하여 사이가 버성기지 않음.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19-20)

    아버지
    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For God was pleased to have all his fullness dwell in him,
    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things on earth or things in heaven, by making peace through his blood, shed on the cross.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화목케 하는 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2:2-3).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3:24,25).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일곱째, 기도하게 하는 피(히브리서 12:24)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니라.
    to Jesus 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 and to the sprinkled blood that speaks a better word than the blood of Abel.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They overcame him by the blood of the Lamb and by the word of their testimony; they did not love their lives so much as to shrink from death.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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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피

    레위기 17:11; 골1:14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며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혼들을 속죄케 하였나니 이는 혼을 속죄케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라."(레17:11)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1:14)

    모든 외과 의사들은 피와 생명은 동일하다고 증언합니다. 피와 생명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둘 다를 잃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성경을 칼로 베면 피가 툭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어디를 베도 피가 나오듯 성경의 어느 부분을 베어도 피가 나옵니다. 창세기 3:21에서 피가 흘러서 계시록에서는 그 피가 말고삐까지 차 오릅니다. 말을 타신 주님의 옷이 피로 적셔 질 정도로 피가 흥건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400회 이상 피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부류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나오면 자꾸 회피합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피"란 단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단어보다 3배나 많이 사용하였으며, 죽음이란 단어보다 5배나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I. 귀한 피(보혈)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벧전1:18-19).

    a. 구원은 살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불할 돈도 없습니다. 이 피는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습니다. '귀한 피'라고 하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는 뜻이지 값이 안 나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는 선물'을 자꾸 외치니까 사람들이 그저 얻는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b. 이 피가 귀한 이유는 흠도 없고, 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술을 할 때 피가 모자라면 급히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란 것이 또 사람마다 다른데다가 어떤 피는 혈소판이 부족하고, 어떤 피는 어떤 병균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수혈 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상한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피입니다. 이 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이 피만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혼을 완전히 정상으로 치유해 줍니다. 한 줌의 피에도 5백만개의 적혈구가 있고, 30만개의 혈소판이 있으며 7천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 속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바다처럼 넘쳐 흐릅니다.

    II. 깨끗하게 하는 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1:3).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

    a. 피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피는 영양을 공급해 주며, 산소를 공급해 주고, 노폐물들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피는 심장에서 생성되어 몸의 구석 구석 마디마디를 돕니다. 이 피가 여행하는 거리는 무려 60,000마일이나 됩니다. 머리카락의 1/10보다 작은 모세 혈관을 통과하며 이산화탄소와 음식물의 노폐물 등을 걸러 냅니다. 몸에 치명적인 독소는 체외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23초만에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돕니다. 보통 적혈구는 이런 운동을 4개월 동안 50만 번 수행합니다.

    b. 우리는 죄의 독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죄는 단절을 가져 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도록 막습니다. "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59:2). "너희의 죄악이 이러한 일들을 쫓아버렸고, 너희의 죄들이 너희로부터 좋은 것들을 거두어 갔느니라."(렘5:25).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해 줍니다. 히브리서 9:14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오직 피만이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지로 묻은 때를 씻는데는 물을 씁니다. 기름 때는 기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의 죄의 때는 피를 써야 합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피입니다. 피도 짐승이나 사람의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 피는 붉은 색입니다. 죄도 붉은 색입니다. 성경은 죄의 색깔을 말씀해 줍니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여러분은 이 피로 깨끗함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을 수도하고, 고행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냉수마찰을 아무래 해대도 깨끗하게 할 수 없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어제 지은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은밀히 숨겨 놓은 죄가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인줄 알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 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탐심이 죄인줄 알고, 정욕이 죄인줄 알지만 시시때때로 마음 가운데 깊은 죄를 짓습니다. 이 시간 모두 저희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화목케 하는 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2:2-3).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3:24,25).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IV. 풍성한 피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일2:2). 주님의 피는 일시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이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된 사람들, 택함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해 흘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효력도 영원하여 우리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모든 죄까지 근본적으로 해결 해 주신 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피로 인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은혜를 모를 때,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거나, 믿음만으로는 안된다거나, 은총을 입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과 화평하게 사는 것, 우리가 두려움없이 주를 섬길 수 있는 것은 이 피가 영원토록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V. 능력있는 피(계12:10-11)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승리의 피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공격용 무기라면 피는 가장 강력한 방어용 무기입니다. 피를 믿는 믿음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피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려면 반드시 피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피가 없는 제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듯이, 피를 믿지 않는 믿음은 종교요,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가증스런 마귀의 제사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교도들의 제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피가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땀만 있습니다. 피가 있는 종교는 모두 더러운 컬트 집단들입니다. 그들은 인신 공양을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외에 어떤 피도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VI. 값주고 사신 피(행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피는 교회를 사는데 지불된 값진 피입니다. 교회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거듭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 사셨습니다. 노예 시장이 열렸습니다. 아주 총명하고 충성스럽게 생긴 한 노예를 발견한 사람이 그 노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이 노예는 얼마요?" 물었더니 "팔지 않습니다." "값을 듬뿍 쳐 드릴테니 파시오." "그 노예는 비쌉니다. 돈으로 받지 않고 대신 당신 몸에 있는 피를 몽땅 준다면 팔겠소!" 아마 남의 종이나 노예를 돈이 아닌 피를 주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세상 영광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요구하지 않고 독생자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대로 자신의 피를 몽땅 내어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VII. 미리 예정하신 피(계13:8, 벧전1:19-20)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사고도 아니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주님께서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계13:8).

    결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피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피를 거부하는 성경들이 속출하고 그 피를 인간의 피인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는 가르침이 많은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피를 믿는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승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주님께 짓밟혀 피를 튀기며 죽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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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宗敎)를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현교(顯敎)
    현교의 특징은 모든 재정과 운영을 공개합니다.

    둘째는 밀교(密敎)
    밀교의 특징은 모든 재정과 운영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재정과 운영이 불투명하다면 엉터리 라고 판단하면 됩니다.
    엉터리를 이단(異端)사이비(似而非)로 구분합니다.
    이단은 전통적인 교리를 전혀 다르게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교회의 이단의 원조는 "김성도"라는 여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종교단체를 등록해야 하는데 새주교라고 등록할 수 없어서 거룩한 종교(聖敎)라고 등록했다고 합니다.
    김성도의 가르침은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초림 예수는 실패하였다.

    성경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를 우리의 은혜와 진리의 근원으로 가리킵니다.
    - 마틴 루터

    All of Holy Scripture, from beginning to end, points solely to Christ as our source of grace and truth.
    - Martin Luther


    성경은 66권의 책으로 방대한 내용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분명히 기록된 목적과 이유가 있고 방향을 가진 핵심 주제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 주제는 역사적 흐름을 타고 내용이 진행될 뿐 아니라,
    목적성과 방향성을 흩어짐 없이 이끌고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는 어느 날 한 번에 전체를 다 예언하듯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를 타고 각 시대마다 점진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신약은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의 성취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혼은 부활하였으나 그 육체는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재림 예수는 육체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온다.

    둘째는 피가름 교리

    피가름 교리는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표현에서 성적 타락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를 따 먹었다는 표현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리를 직접 계시로 받았다고 하여 한국교회에 이단의 시조가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통일교의 원리강론, 박태선, 정명석, ......수 많은 이단 교주가 등장합니다.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었고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 팡세라는 작품에서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첫째는 신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
    -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둘째는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

    셋째는 신을 발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사람
    -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신앙


    1. 김성도(金聖道, 1882~1944)는 1920년대에 평양 일대에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사이비 종교단체인 성주교(聖主敎)의 창시자이자 교주이다. 한국에서 자생한 기독교 계열의 토종 이단의 원조(元祖)라는 평가가 있다. 김성도의 추종자들이 그녀를 새 주님이라 하여 새주파라 했으며, 그외에도 신령파, 1944년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무렵까지는 복중교로도 불리었다.[1] 1935년경 부터는 일제 총독부의 종무과에 성주교(聖主敎)로 정식 등록하여 종교단체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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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교 활동

      • 1923년 입신(入神) 상태에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며 '직통 계시'를 내세웠다.
      • 김성도는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음란이 타락의 동기였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으로 전해진다.[3]
      • 사탄과의 음란한 관계로 타락한 하와의 더러운 피가 후손에게 이어졌기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은 죄가 없는 구원자의 깨끗한 피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피가름' 이론이다.
      • 김성도의 주장은 정득은과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 김백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전도관박태선통일교문선명 등에도 이어진다.[4][5]
      • 김성도는 자신의 주변에 12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한 김성도는 1944년 심한 고문 끝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각주


    3. 최중현 <한국 메시야 운동사 연구 1> 생각하는백성 1999년 p19

    4. 중앙일보

    5. 기독교포탈뉴스

    6. 중앙일보 2020년 4월 3일

    7. 한겨레 2020년 3월 6일

    8. 최중현, 한국메시아운동사 연구, 생각하는 백성, 1999년, 18~25쪽


    이영호 목사 / 평택시기독교연합회장, 팽성장로교회

    1. 金聖道의 生涯

    김성도(金聖道) 여인은 1882년 음력 7월 1일에 태어나 만17세 때에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당40세)과 결혼하였다. 정항준은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철산에서 벼슬도 했고, 재산도 있었는데 결혼을 두 번이나 했던 그는 김성도와는 27세 연상의 사람이었다.

    첫 부인에게서 딸 하나가 태어났고, 둘째 부인에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으나, 친척의 강요에 따라 대를 잇기 위해서 김성도에게 정식 새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김성도는 결혼 후 둘째 부인으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을 고대하다 김 여인이 낳은 첫 아이는 아들 이였으나 그 아이는 1년 만에 쇠고기 먹고 체해서 죽고 말았다. 그 남자 아이는 밤에 죽고 딸아이는 그 이튿날 새벽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딸 쌍둥이를 낳고 1906년 6월 25일 에야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 통일교 장로로 구리시에서 살다 사망한 자)을 낳게 되었다.

    1)

    그런데 이 아들을 낳고 나서 김성도는 일종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김성도의 정신이상증세를 고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고, 병원을 찾는 등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별 차도가 없었는데, 노 권사라는 전도부인(傳道婦人)이 와서 “이 병은 예수를 믿어야 낫는다”고 일러주어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약 3개월 뒤에 정신 이상증세가 완치되었다.

    정석천은 그때 모친 김성도의 나이가 33세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1년 뒤 아들 정석천이 병이 들어 기도로 낫게 되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 여인은 더 돈독한 신앙인을 갖게 되어 정식(正式)으로 입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남편 정항준의 가문은 대대로 유교 가문이었으므로 아내의 기독교 신앙을 못 마땅히 여겨 모진 박해를 가하다 만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문일, 김문석 공동저서인 「기독교이단제설」에는 정항준의 말년에 대해서 “김성도 여인의 남편(정씨)는 자기 부인이 예수 믿어 재산을 축내고 미친 짓한다고 몹시나 미워하고 구타도 많이 했으나 김여인이 사랑과 순종을 함으로 감동되어 예수를 믿다가 임종시에 자식들을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2) 이렇게 남편 정씨는 김성도의 결혼 17년 만에 죽은 것이다. 3)

    김여인의 손자 정수원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핍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돌아 왔을 때 할머니가 집안에 안보이면 교회로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나와 때리고 차고 하면서 집에까지 끌고 왔다.(중략) 할머니가 일요일에 교회 갔다 오면 (중풍으로 누워있던) 할아버지께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고는 ‘교회 갔다 왔다’고 하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여 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아 발가락에 감아 끼우고 목침으로 할머니를 때렸다”고 전한다.

    4)

    2. 入神體驗과 神秘主義 運動

    당시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1919년, 김성도 여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 더욱 열심히 정성을 쌓았고, 1922년에는 세계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中)에 입신하여 여러 가지의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여인의 집은 여섯 칸 집으로 아주 큰 집이었는데 ㅁ 字 형(形)으로 되어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 곳간 그리고 큰 홀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게 되면 역사가 벌어지고 병도 낫게 되었다고 한다.

    5)

    통일교 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1986. p. 155-184)에 나타난 한학자의 모친(母親) 홍순애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김성도 여인은 보통 말할 때에는 새색시 같이 가만 가만 말 하지만 기도할 때 보면 어떤 남자 못지않게 아주 우렁찬 음성으로 기도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故 탁명환은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이단연구」(p.101)에서 “김성도 여인은 3백석 부자였고 창고에 멍석을 깔고 항상 병자들과 함께 하며 그냥 먹이고 입혔고 얼마나 많이 기도를 했는지 무릎과 팔꿈치에 굳은살이 붙을 정도였다. 그녀는 등창이 난 환자나 거지를 손수 씻기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병을 고쳐 주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성도 여인의 손자가 부친 정석천으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증언한 바에 따르면, “김성도는 1923년 음력 4월 2일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지상인 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교회당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는 운동을 전개하라’는 당부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6)

    이때의 대담 내용들은 길이 2m 폭 30㎝의 종이 12장에 기록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죄의 뿌리에 대한 시각, 십자가에 대한 시각, 육신 입은 재림론 등은 오늘의 사이비종교가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골 메뉴다. 그 뒤에 김 여인은 또 입신하여 “때가 급하니 속히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계시를 받고 담임 목사에 보고했더니 사탄의 역사로 돌리면서 자제 하라는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소문이 교회에 나돌아 교우들이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게 되자 1925년 교단으로부터 책벌(策罰)을 받아 출교(黜敎)되었다.

    7)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탁(神託)을 받은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하며 참회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 여인으로부터 기도를 받음으로써 생명의 자유를 찾는다고 믿게 되었고, 계시를 통해서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 노랫말에 보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애정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자유 원사탄이 장사함을 감사합니다.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왔다. 사탄에서 승리함을 감사합니다. 영광 영광 내가 누릴 영광을 감사합니다. 세상사탄권세 다 없어지고 하늘의 주의 음성 들려오는데 새로운 천지에 머리 들고 나서니 광명한 에덴동산 열리는구나 에덴동산 나의 좋은 품속에 무궁한 생명강수 흘러가는데 새로운 천지에 새주님 역사로 죽었던 나의 영혼 부활하였네”라는 식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오고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오셨다”는 식으로 “새주님 왔다”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온다.

    8)

    이래서 항간에서는 김성도 여인을 따르는 무리들을 <감사교>, <감사패>, <새주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손자 정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에 친척과 동리사람들로 부터 ‘새주(主) 새끼’로 불렸다”고 한다.

    9) 그렇게 된 이유는 김성도의 남편 정항준이 임종시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라고 한데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10) 당시 장좌동 현지를 목격한 사람 김선환의 회고에 따르면,

    “평북 철산에 김성도라는 권사가 있어 병 고치는 은혜를 받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사방에서 많은 병자가 모이므로 기도를 받으면 즉석에서 마음이 감동되자 권사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새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새주는 자기 앞에 十二 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도 <새주님>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역사! 역사! 새주님 역사! 진주문에 들어가서 새주님 만나자’고 야단법석을 한참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주는 성신(聖神)을 부어줄 터인즉 입들을 벌리고 기도하라고 한다. 새 주(主)가 냉수를 입에다 뿌려 주면 그 냉수를 받아먹느라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주의 입에서 나오는 냉수를 받아먹는 것이 성신을 받는 줄로 믿었다. 김성도 집단은 ‘감사노래’를 열심히 부르다 보면 춤을 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혁대가 있는 옷도 벗겨지기도 하였고 심취된 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는데 이런 일로 한 사람당 벌금 10원씩인가 문 적이 있다고 한다.

    11)

    이런 집회의 열기가 계속되자 경찰에서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도 권사의 집을 방문하러 오는 이는 누구든지 부서면 面소재지에 있는 경찰지서에 신고를 해야만 하기도 했다.

    12)

    3. 聖主敎 創立

    관(官)의 감시가 심해지는 가운데 1932년에는 이용도, 백남주, 이호빈 등이 김성도 여인의 집에서 접촉하게 된다. 이런 왕래를 시발로 1933년 10월에는 새주파가 원산의 한준명, 백남주, 이용도의 ‘예수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예수」지 제5호(1934년 5월호) 통신(通信)란(p.33)에는 “평북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장좌 예배당은 1933년 10월일에 개천식을 거행하였고 김성도 여사와 정석천 복음사가 무수한 핍박 속에서 희생적 수고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간 백남주 목사와 리종현 복음사가 일주일식 삼차 집회가 열렸고 지난 三월 一일부터 八일까지 리호빈 목사와 한의정 복음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여러 은혜가 풍성하였으며 근지(近地) 참석한 사십(四十)명 교인까지 충만한 기쁨을 얻고 도라 가섯다. 교인 수는 一백 三十명 가량이며 금번 집회에 신자수는 五명이라 한다”고 전(傳)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이 예수교회의 전도사격인 복음사(福音師)로 임명을 받은 것과 당시의 새주파 교인 수가 130명이라는 事實을 찾아볼 수 있다.

    1935년 들어 새주파는, 예수교회의 창립 主役이였으나 ‘天國結婚’ 사건으로 원산의 신학산에서 쫓겨난 백남주 목사를 새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의 뒤를 따라서 그의 弟子 김백문도 왔고 김남조도 왔으니 그때가 1935년 봄이었다. 이때부터 새주파는 예수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1935년 10월 ‘聖主敎’라는 간판을 달고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을 대표로 한 종교단체로 조선총독부 종무과에 정식허가를 받아 등록한다. 이렇게 해서 설립한 ‘성주교’ 창립예배 사회는 김백문이 맡았다.

    관청의 허가를 받고 부터는 장좌동 외(外)에도 안주, 평양과 정주, 숙천, 해주, 서울, 원산 등을 포함하여 약 20여 군데 집회소가 생겨났다. 「기독교 대연감」(1992년 기독교문사 刊) 이 일제총독부 자료(1925 - 1940년)를 인용해 발표한 ‘해방 전 북한교회 통계’에 의하면 성주교회 현황은 교당 수효가 평남8, 평북5, 함남2, 함북3,으로 기록돼 있고, 교직자 수는 평남8, 평북3, 함남3, 함북4, 신도수효는 평남94, 함남28로만 나타나 그 외 지역에는 교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교관련 잡지중의 하나인 「信仰生活」에서 發行人 김인서 씨는(필자주: 당시 장로) 후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군이 새주교회를 시인한 이상 새主之子 鄭복음사 평양 새교회에서 「새주역사」란 주문을 고창 선전함은 당연한 일이오 제직과 교인이 새역사에 열광한 것은 정한 일이다. 이리하여 새주창파 새주불창파로 파장이 생기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13)

    4. 성주교의 主要敎理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도 여인의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한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 간섭하시지 못하시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루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 주님은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14)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는 문선명의 설교를 인용한 「史報」에서(157호, p. 41) 그녀가 하늘로부터 받았던 12가지의 重要한 啓示라며 다음과 같이 傳해주고 있다.

    “1.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해방. 2. 재림주님은 한국으로 오실 것인데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 쓴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한국인이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과일이 아니고, 타락은 사랑의 행위였다. 즉 타락은 사랑의 잘못으로 일어났다. 4. 남자와 여자는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결혼은 참된 결혼이 아니라 거짓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 한 부부에게는 성생활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5. 주님은 새로운 혈통을 세우려고 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 주님을 영접하려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몸은 정결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생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월간 <통일세계>는 “김성도 권사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면서 홍순애 여인의 증언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간추려 紹介하고 있다.

    “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연장된 것이다. ②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해와의 잘못된 성생활, 즉 음란으로 타락했다. ③ 재림 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으로 한국에 태어날 것이며 한국은 에덴동산이 된다.”

    15)

    김성도 여인이 여기서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고 보게 된 것은, 그녀의 출석교회 담임 목사가 남녀 문제로 구속되자 충격을 받고 죄에 대하여 깊이 파고드는 기도를 하다가, “이제까지 너만큼 죄의 뿌리를 알려고 애쓰는 자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죄의 뿌리는 음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 때문이며, 주님은 육신 쓰고 한국으로 오신다는 등의 음성을 들은 데 있다. 이래서 김성도는 아들 며느리에게 부부 생활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16)

    이런 이유로 추종자들은 고기 음식을 금하는 식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음란으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정력이 생기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시가 있어 고기반찬이 없다는 것이고, “음란의 혈통적으로 타락했으니 피를 맑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쌀을 불려 생식을 했는데 이렇게 생식을 해서 피를 깨끗하게 한 다음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복중교로 전승되어 갔다. 복중파를 믿는 가정이 제주도(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 1283번지)에 최형렬 씨(정평화의 수제자) 남매가 사는데 그들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며 살고 있다.

    17) 김여인의 아들 정평화는 경주에 시루미기 생식마을(경주시 산내면 우라 2리 산 90번지)을 조성해 추종자들과 함께 살다가 그곳에 묻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득은의 「생의 원리」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통일교의 「원리해설」, 이만희의 「신탄」 등의 내용이 김성도 여인의 가르침의 골격을 전승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5. 聖主敎의 受難과 終末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이어 1940년대에는 창씨개명이 강요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용 물자 공출, 징용, 징병 등이 강행되면서 자생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강진 출신 김영수라는 청년이 성주교에 와서 은혜를 받고 전도하다가 성주교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오고가던 계시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머지않아 일본이 망하고 해방되어 큰 복을 받게 된다”는 등의 내용 이였다. 그런데 이 김영수에게 전도를 받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경찰 고등계 형사의 정보요원이였다. 이 사람은 성주교회의 일주일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가 들은 내용을 도경(道警)에 보고했고, 그래서 1943년 가을 김성도와 두 아들(정석천과 정석진)과 10여 명의 중심 신도들이 경찰에 연행되게 되었다.

    이래서 김성도 여인은 심한 고문을 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1944년 4월 1일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들 정석천(1976년 11월 4일 71세로 구리 자택에서 사망)은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그해 6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광산 하나를 인수하여 광산업에 손을 대게 되고 장좌동 집회소는 방치되었다.

    18)

    미주

    1. 「한국 메시야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생각하는 백성 刊, 1999), 20; 「뜻따라 한평생」, 통일교역사편찬위원회편(성화사 刊, 1987), 270-71.
    2.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 (칼빈서적, 1991), 149.
    3.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신앙수기, 제1집: 증언(證言)」 (성화사刊, 1982), 347; 세계기독교통일 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편, 「史報」, № 157호, 70; 「한국 메시아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1999. 21.
    4. 「史報」, № 157호, 74.
    5. 「史報」, № 154호, 76.
    6. 「史報」, № 157호, 76.
    7. 「신앙수기, 제1집: 證言」, 347; 「한국 메시야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4.
    8. 「史報」, № 154호, 77.
    9. 「史報」, № 157호, 71;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25.
    10.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칼빈서적, 1991), 149.
    11. 「史報」, № 154호, 77.
    12. 「사회악과 사교운동」, 김경래 편(기문사, 1957), 166-167.
    13. 「신앙세계」, 1935년 7월호, 34-35. 「한국메시아 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8.
    14.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편, 「소명하신 길을 따라」(1986), 197-206; 증언 3집, 198-200. 정석천 통일교 장로의 증언(김성도의 아들), 251-252, 268-269, 정숭원의 증언(김성도의 손자), 158-163, 홍순애의 증언, 299-300, 오영춘 여사의 증언.
    15. 월간 「통일세계」, 1996년 6월호, 167.
    16.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45-46.
    17.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80.
    18. 「史報」, № 154호, 72.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이단의 원조로 분류되는 사람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던 김성도(1882~1944)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입신한 상태에서 예수와 대화도 나누었고 자신에게 직통 계시가 임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녀는 ‘새 주님’을 강조하였으므로 ‘새주파 교주 김성도’라 불리우게 되었다.

    김성도의 신앙과 교리의 핵심적인 특징은 모든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성도는 인류의 원죄와 깊은 연관을 가지는 선악과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김성도는 하와가 먼저 먹은 창세기의 선악과를 하와의 육체적 순결과 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뱀(마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그만 뱀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뱀의 피가 그녀에게 유입되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후 아담과 함께 마귀의 피로 오렴된 더러워진 자손들을 생산하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선악과를 범한 인간의 원죄를 사탄과의 성적 관계로 인해 사탄의 피가 인간에게 유입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했으니, 그녀에게는 구원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영향을 받은 김백문(이스라엘 수도회), 정득은(피갈음), 문선명(통일교), 박태선(천부교), 정명석(JMS) 등의 유명한 이단들이 그녀와 동일한 선악과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자들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선악과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그들은 영생의 자격을 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아담의 선악과 범행을 이해하였다. 선악과를 범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 불순종으로 해석되는 것인지에 대해 청교도들의 어떤 서적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내용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완전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아담은 율법의 선행으로 영생의 자격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생을 청구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능력도 주시었다. 그러나 아담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선악과 원죄론이다. 아담이 지켰어야 할 율법은 아담의 마음에 기록되었었다고 한다. 그 율법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몇 종류였는지에 대해 영국 청교도들은 납득될 정도로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그 율법이 나중에 시내산에게 모세를 통해 돌판에 기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아담에게 분명하게 계시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아담의 마음에 기록하여 주신 것이 아니고 아담에게 귀에 들리는 언어로 말하셨다고 성경에 나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성경은 이와 같이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영국 청교도들은 아담이 율법을 지키기 않아 저주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선악과 범행이 아담이 그의 마음에 기록된 영생의 기준인 율법을 지키지 않겠다는 선포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새주파 김성도

    는 선악과를 하와의 성적인 순결의 상징으로 보았고, 영국 청교도들은 선악과를 아담이 영생을 위해 지켰어야 할 율법과 연관지었다. 과연 누가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했던 것일까? 영국 청교도들도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김성도가 선악과를 성적으로 이해하여 결국 특별한 자와의 성관계를 통한 구원론을 주장한 것처럼, 영국 청교도들도 선악과를 율법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율법적인 구원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먼저 자신의 구원(영생)의 자격을 얻었고, 그리고 자신을 믿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얻으신 구원(영생)의 자격을 물려주었다는 구원론, 능동순종의 의 교리이다.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론이 반드시 비틀어지게 된다는 것을 한국 이단의 원조 김성도와 영국 청교도들을 통해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영국 청교도들의 그릇된 신앙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였다. R. C. Sproul을 비롯하여 여러 개혁신학의 대가들이 청교도들의 잘못된 원죄론과 구원론을 그대로 받고 말았다.


    “만일 예수께서 백성의 새로운 대표자인 둘째 아담이 되려면,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부여해 오신 모든 의무들을 그 자신이 이행하셔야 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성육신으로서, 그 백성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하셔야 했다. 그중에는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에 의한 세례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R. C. Sproul)

    하나님께서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율법 순종의 의무를 그리스도가 대신 맡으셨다는 내용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 받기 위해 부과하신 명령이라는 것은 없다. 구약에서 구원은 훗날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소급하여 적용되어 발생했다. 구약의 율법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섬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었다.

    기독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만 나왔다. 구원을 받기 위해 사람에게 하나님이 부과하신 무슨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사람이 못하니 그리스도가 대신 감당하여 구원이 일어났다는 내용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사람이건, 그리스도이건 하나님이 부과하신 행위를 감당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성경의 기독교가 훼손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찬송하는 백성을 가지시려고 아담을 창조하셨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 모든 은혜와 영생 안에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자기의 인격을 걸고 언약을 맺으셨다.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이 되고, 아담도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인격을 걸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 언약의 내용을 보증하는 두 개의 담보물을 세우셨다. 생명나무를 통해 아담이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음을 보증하셨다.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길을 떠나면 아담이 영원히 죽을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능력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욕을 위해 사용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명확히 하고 선악과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아담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 스스로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으로 남기로 언약했으므로, 자기의 인격을 걸고 아담과 맺은 그 언약을 성취해야 할 의무를 지시기를 마다하지 않다.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아담의 죄를 감당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로 죽은 아담에게 즉시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방법으로 아담을 다시 살리실 것인지를 계시하였다. 스스로 여인의 후손으로 지상에 사람으로 오시어 아담의 죄를 대속할 것임을 밝히셨다(창 3:15).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자신이 피를 흘려 죄를 사하게 될 훗날의 십자가의 효력을 소급적용 받을 수 있는 짐승의 제사 제도를 도입하셨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소급적용 받아 구원을 얻는 죄악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섬김의 원리, 삶의 원리로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영국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처럼, 태초에 아담의 마음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원죄)이 일어난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의 효력이 소급적용되어 구원 받은 구약의 실직적으로 죄악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원리와 기준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성육신하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로 구원 받은 구약 백성들의 하나님 섬김의 원리였던 율법을 스스로 성취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내셨다. 먼저 그리스도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완전한 선과 의와 거룩을 구비하신 죄 없는 사람으로 나셨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곧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의 출생이다. 구약의 율법이 말하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삶의 원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100% 완전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죄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짋어지는 어린양이 되시고 평생을 순종 가운데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다. 그리스도의 흠없는 피를 우리의 죄의 배상물로 받으신 하나님은 완전히 만족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죗값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여겨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자기에게로 받아주시어(연합) 자기의 거룩함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게 해 주셨다.

    이것이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다. 선악과 범함을 아담이 영생을 위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 영생의 자격을 얻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영국 청교도들과 현대의 많은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은 비성경적이다. 마치 새주파 김성도가 선악과를 하와의 성적인 순결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 안에서 구원론을 전개하는 것과 조금 다른 유형의 사이비 이단 사상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출처 :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재림주’ 및 주장에 대한 비판 ①


    말이나 단순한 용어의 실수,
    회개하고 돌아선 이들에 대한 배려 필요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들이 결국은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에 교회와 신앙은 타락의 길과 혼란기를 겪게 된다. 역사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Ⅰ.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재림주에 관한 연구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정리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들이 결국은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에 교회와 신앙은 타락의 길과 혼란기를 겪게 된다. 역사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때이다.
    우리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유입된 것은 이미 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야문화의 흔적 속에 지금도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기독교의 역사가 있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왕머리 마을)에 있는 도마바위(분처바위)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 명전행”(耶蘇花王引導者 名全行), 즉“꽃의 왕 예수의 전도자”가 있었다는 것을 글로 남긴 흔적에 대해서도 우리 기독교가 힘을 다하여 그 근거를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쓴 이는 400년 경 고구려 시대의 유명한 석공 전행(全行)이라는 사람으로 추정이 된다. 또 다른 추정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석공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연구의 대상이다. 그 바위 앞에서 서면 누군가가 정을 들고 예수님의 손을 바위에 땀을 흘리면서 새겨놓은 흔적이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할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어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중인 돌 십자가와 마리아상의 역사적인 유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정도의 역사적인 흔적이라면 기독교야 말로 이미 민족종교라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가 다 묻혀 버린 것도 한국 기독교계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조선 후기의 역사에 관하여 역사적인 흐름을 인식하며 조선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곧 한국기독교 이단 및 사이비의 뿌리를 이해하고 재림주의 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비주의 운동을 통한 자칭 재림주 및 그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던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주파(김성도, 1906), 성주교(백남주, 1901), 강신극(유명화), 목가름(황국주, 1909), 이스라엘 수도원(김백문, 1917), 대성심기도원(정득은, 1897), 통일교(문선명, 1920), 천부교(박태선, 1907), 장막성전(유재열, 1949), 영생교(조희성, 1931), 안증회(안상홍, 1918), 한농복구회(박명호, 1943), 새빛등대(김풍일, 1946), 천국복음전도회(구인회, 1941), 기독교복음선교회(정명석, 1945), 신천지(이만희, 1931)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이는 스스로 ‘재림주’라 칭하고 어떤 이는 추종자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만드는 교활함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자칭 재림주’와 그들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하여 먼저 조선후기의 사회와 그 시대의 신흥종교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들이 혼합되고 발전되고 계승되면서 우리 시대의 자칭 재림주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1. 조선후기의 신흥종교 운동

    ▲ 수운, 최제우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는 급격하게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게 된다. 또한 세계의 역사는 1차 세계전쟁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에 인한 혁명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된다. 정조의 개혁정치 이후에 천주교의 전래가 있은 지 몇 년 후에 유학파인 최제우가 등장하게 된다.

    최제우(催濟愚 1824~1864)는 그리스도교와 유불선의 장점을 융합하여 1860년 동학을 만들게 된다. 1) 1864년 그의 나이 40에 동학을 사학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가 동학을 창설한 것은 1860년이고 1863년에 교인이 3,000명, 접소가 14곳에 이르는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같은 해 본관이 같은 경주 최씨인 해월 최시형(2대교주)을 북접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호응하여 10만 병력을 일으켰으나 잇따른 패배로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후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독립운동가 33중 한사람)가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지하조직으로 이어가다 일본으로 도피하고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증산, 강일순

    이처럼 동학(천도교)이 실패하자 곧 이어 신흥종교인 증산교가 등장하게 된다. 증산 강일순은 우리나라 이단의 계보를 만드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다. 그는 동학혁명 당시 무장봉기에 반대한 인물이지만 동학혁명에 관여도 하였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김제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깨달음을 얻어 후천개벽과 후천선경의 도래를 선포하며 증산교를 창설하게 된다. 그 역시 동학이 일어난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며 동학을 배웠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후에 그의 아내 고판례(정확히 알려진 바 없음)가 명맥을 이은 후에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동화교, 순천교 등으로 분파하게 된다. 오늘날의 증산교, 태극도, 대순진리회 역시 다 그 뿌리가 같다.

    그중 당시 가장 교세가 큰것이 바로 보천교이다. 차경석이 이끌던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인 당시 수백만을 거느리며 1만여 평의 대지에 십일전, 성전 등 웅장한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이 보천교의 한 건물을 뜯어다 이축한 것이라 한다.

    1926년에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직접 정읍의 본부로 찾아와 면담을 할 정도였지만, 1924년부터 교단 내에 분열이 시작되어 1828년에 이상호와 동생 이성영이 탈퇴하고 김제 금산사 아래 동화교를 창설한다.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가 보천교를 강제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원불교를 포함한 전도관 등 모든 현재의 아류작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전도관(천부교)의 박태선을 교주로 만들고 오늘날 기독교 신흥종교들이 잘 우려먹고 있는 격암유록의 저자 2) 의 아버지가 바로 보천교의 교령으로 지냈다. 후에 격암유록의 저자는 우연한 계기로 당시 막 세력을 확장하던 전도관을 알게 되고 그들의 권유로 격암유록을 쓰게 된 것이다. 흔히 450년에 쓰여졌다고 알려졌던 그 신비의 고문서가 최근에 쓰여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동학이 시조라 한다고 해도 그는 유불선을 논하며 거창한 교리인 듯 주장하나 무당의 그것과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옳은 주장도 있긴 하였지만, 서양에서 받아들인 다른 문화를 섞은 인간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후에 생겨난 모든 신흥종교가 모두 그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나고 모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엔 이적을 행한 자도 있긴 하였다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고 설사 있다 하여도 능력 있는 무당들은 지금도 작두를 타기도 한다. 하물며 무당도 작두 타는 세상에 신흥종교의 교주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격암유록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 성경의 몇몇 구절을 비슷하게 적어놓고 그중 나열된 한자를 조합하면 박태선이 나온다. ‘조선에 신이 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될 터인데 그가 바로 박태선이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의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때 격암유록이란 예언서가 우리 사회에 많이 소개되었다. 서양의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 받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일이 다 벌어진 후에 쓰여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도관의 사주를 받은 전도관의 신도 한 명이 박물관에 기증 3) 형식으로 원본도 아닌 필사본을 기증한 것이었으며, 훗날 이 사실을 신동아 일보에 저자의 아들이 넌픽션의 글을 보내 공모에 당선(2007년)됨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4)
    그래서 조선 후기의 국내 신흥종교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유사종교들의 행태를 찾아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정리하면, 천주교(서학)에 비교할 만한 사상인 동학이 전북 정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증산교(강일순)도 정읍출신이며 기독교의 분파의 첫 출발도 역시 같은 정읍에서 자유교(최충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 너무 특이한 경우이다.

    여하튼 동학에서 증산교가 나오게 되었고, 증산교는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동화교, 순천교 등으로 분파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증산교나 태극도, 대순진리회도 같은 뿌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증산교의 최대 분파인 보천교의 출신이 전도관(천부교)를 만나서 위서(僞書)인 ‘격암유록’을 만든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례이다. 한국의 토속종교와 토속 불교 등이 기독교를 만나서 새로운 경전을 탄생시킨 것이 된다.

    2. 한국 기독교의 종파 운동과 그 평가

    한국 기독교 종파주의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1884년 고종 황제의 윤허로 기독교의 복음전파가 공인된 이후에 기독교는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으로 많은 결실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하여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은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뿌리를 내리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게 된다. 하지만 3.1운동을 정점으로 기독교계에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에 1920년대의 기독교 종파주의 운동은 신비주의와 맞물리면서 한국교회에 신학과 신앙의 혼선과 혼탁과 타락을 도입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영향력이 감퇴되고, 신앙적인 구원과 성경적인 진리에 지나친 집착현상을 보이게 된다. 신앙을 지도하는 인도자의 부족현상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과 무속 종교등과 유사한 형태의 신비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국 재림주를 양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 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갈등이라는 내적 대립현상이 첨예하게 드러났고 이와 관련 교파 간 갈등의 여러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 양상은 ‘장감 연합’으로 표현되어 온 교회연합운동이 교파 교회의 이권 분쟁으로 인해 와해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교회 안에서도 신앙과 신학적 갈등과 지방색이 배경이 된 교권분쟁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1930년대는 젊은이들이 회의주의에 빠졌다. 그 이유는 3. 1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독립 쟁취 실패와 아울러 1929년 이래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토지와 경제적 손실이 국민들의 생활을 크게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 문화적 회의주의가 시대를 더욱 암울하게 하여 사람들은 좌절된 심정으로 주색(酒色)과 노름, 아편 등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부녀자들은 안심양명(安心揚名) 외길을 모색하여 각색 무당, 미신을 신봉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첫째, 신앙적인 고난으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일선현장에서 물러나 선교 기관 등으로 은퇴한 데서 발단되었다. 갑자기 신앙의 안내자들을 잃어 일제 강점기와 그들의 통치를 후견인 없이 홀로 이겨내야 했다. 한국의 신학이 정착하기도 전에 혼란기를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물질적 가난은 이 시대 한국교회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의 결과와 더불어 당시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고통을 겪었고 더욱이 미국 선교본부에서의 선교 자금의 원활한 지원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셋째, 사회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이 새롭게 들어와서 반 기독교적 세력으로 확산되어 혼란을 야기 시켰다. 사회주의의 만연은 한국교회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넷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강해지자 교회는 더 깊은 침체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젊은이들 사이에는 회의주의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1920〜30년대의 한국교회는 종합적인 어려운 상황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교회 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갈등이 깊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한국의 기독교가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으며, 교회에 대한 비판세력과 반동으로 생성된 혁신 세력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 기독교의 종파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흥우 중심의 Y.M.C.A. 5) 등이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서면서 활발해졌고, 그런 가운데 선교와 행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 출신의 교회 지성인들이 분립하여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6) 또한 그 당시 한국교회는 노동자, 농민 등 절대다수의 삶과 민족의 질고를 외면했던 기성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종파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여러 형태의 모습을 갖추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자유교회, 독립교회 운동이다. 1910년경에 전라북도 부안, 태인, 정읍, 임실 등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주도적인 선교방침과 간섭에 반대하여 조선교회의 자치와 독립을 주장하고 나선 조선교회 자유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일본을 포함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싫어하는 애국지사들과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단일민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기독교회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한국에 정착한 기독교는 외국선교사들의 지도아래 이루어지는 선교회와 조선교회의 자유와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관하는 선교회로 나뉘어 활동을 하였다.

    둘째, 무교회주의 운동이다. 일본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1930년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최태용의 ‘복음교회’가 있다. 무교회주의는 한국 기독교의 교권주의와 교파주의에 반대하고, 성경을 통해 새로운 한국을 만들려고 했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모임이 형성되었으며, 복음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미완성과 다른 사람을 통한 사역의 완성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복음교회의 최태용은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반대하였지만, 자신이 경험한 신비적 신앙체험에 대해서는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복음교회는 외국선교사들의 우월성과 인종차별주의에 반대를 했고, 기성교회의 교권주의와 복음교회에 영향을 준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셋째, 신비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①불교의 미륵불과 ②민중 속에 흐르고 있는 정도령 ③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상과 연관되어 있으며 종파주의를 세운 창교주가 세상 종말에 재림하는 미륵불, 정도령,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패망과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한국사회는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일제의 수탈과 억압된 통치로 부터 그리고 서양 외세의 간섭과 개방으로부터 한민족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또한 정치적 독립은 한시적임을 직감하고, 종교를 통하여 현세에서 일제와 외세에 억압당하는 한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영원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의 미륵사상, 정감록의 정도령사상, 그리스도교의 메시야사상과 잘 융합하여 종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신비주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은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물론 1917년과 1920년경에 ‘정도교’와 ‘남방여왕’이라는 익명의 자칭 여왕이 있었고, 예수 재림의 해를 선포한 ‘한에녹’이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정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단체는 아니었고, 몇 가지의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발굴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 이 지면을 통해 논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일본총독부에서 종교를 담당했던 종무과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던 김성도의 ‘새주파’로부터 자칭 재림주들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신비주의 운동이 김성도 새주파를 비롯하여 원산 신학산의 백남주와 예수교회, 황해도지방에서 활동한 황국주를 거쳐서 이 시대의 주된 연구대상인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까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영향을 주었는가의 흐름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한국 기독교의 종파주의 운동은 그 운동 자체가 어떠한 개인을 중심으로 발생되기도 하였지만, 한국교회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산물이며, 그들 자신의 신학과 신앙의 반영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의 종파운동은 기성교회의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분리되었으며 비신학적인 신앙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교회주의 발생 등의 부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자립화와 민족성 형성을 위한 방편으로서 생겨난 운동으로 자주적, 민족적, 반 선교사적, 반교권적인 종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파운동에 관한 연구는 한국 개신교의 사상과 목적에 대한 중심을 논증함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그 원류를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연구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Ⅱ. 한국교회의 재림주로 등장하는 신흥종교의 교주들

    1. 철산 새주파 김성도(金聖道)와 재림예수

    1) 새주파의 의미와 김성도의 삶의 여정
    ‘새주파’의 뜻은 ‘새로운 주님을 믿는 교파’ 또는 ‘분파’ 라는 뜻으로, 김성도라는 여인을 ‘구세주’(메시야) 또는 ‘재림예수’로 추종하던 사람들을 지칭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새주파의 창교주 김성도는 188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나 만 17세가 되던 해 자신보다 23세가 많은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40세)과 결혼을 했다. 김성도는 정항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김성도는 둘째부인에게서 모질게 시집살이를 살았다고 한다. 7)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에서는 정항준이 김성도에게 장가를 가게 된 계기가 둘째 부인에게서 난 2명의 아들이 정신지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8)

    ▲김성도

    김성도는 다행히 첫 번째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약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 1906년 6월 25일에 대를 이을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을 낳게 된다. 9) 그러나 김성도는 정석천을 낳고 난 후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평안북도 철산군을 전도 순례하던 노권사(이름은 불명)는 김성도를 보고 ‘예수를 믿어야 낫는 병이다’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김성도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약 3개월 정도 되어서 정신이상 증세가 치료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에는 아들 정석천이 병을 앓게 되자 김성도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아들의 병이 치료되는 경험을 한 후 기독교회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남편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김성도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경의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10)

    2) 김성도의 재림주 주장의 근거
    1923년 4월 2일(음력)에는 기도 중에 입신(入神)을 한 후 처음 예수를 만나 예수로부터 “인류의 죄가 음란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들의 불신으로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2일(음력) 예수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재림주는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1)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계시방식을 토대로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었으며 김성도가 받은 계시가 재림주 만드는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성도는 계시의 내용을 길이 2m와 넓이 30cm가 되는 종이 12장에 기록한 후에 ‘세상에 알리라’는 예수의 지시대로 담임목사에게 말씀드렸더니, ‘사탄의 역사이니 자제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계시내용과 신비체험들을 교우들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집에 출입하게 되자, 장로교단에서는 1925년경에 김성도를 징계하였고 소속교회에서도 그녀를 출교시켰다. 12)

    출교당한 김성도는 자신의 집을 집회소로 만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 김성도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들 중에는 영적인 능력과 신유의 은사를 받은 김성도를 징계한 기성교회 목회자들에게 하늘에서 큰 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기성교회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성도의 장손 정수원이 1930년 3월에 출생을 하게 되고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 주님이 오셨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시에 따라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였다. 13)

    심지어 새주파 장좌동 교회의 현장 목격자 김선환의 회고에 따르면, “평북 철산에는 김성도라는 권사가 있어 병 고치는 은혜를 받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사방에서 많은 병자가 모이므로 기도를 받으면 즉석에서 마음이 감동되자 권사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새주님’ 이라고 불렀다. 이 새주는 자기 앞에 12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도 ‘새주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역사 역사 새주님 역사 진주문에 들어가서 새주님 만나자’ 고 야단법석을 한참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주는 성신을 부어줄 터인즉 입들을 벌리고 기도하라고 한다. 새주가 냉수를 입에다 뿌려 주면 그 냉수를 받아먹느라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14) 는 것이다. 이러한 소동은 새주가 냉수를 입에 머금었다가 내뱉는 행위였으며, 이 냉수를 받아 먹는 것이 성신(聖神)을 받는 줄로 믿었다. 15)

    3) 성주교의 주요교리 16)
    김성도는 다음와 같이 신도들에게 계시의 내용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했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도 간섭하시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이었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17)

    4) 성주교의 영향
    김성도가 계시 받았다는 이와 같은 내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말세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자칭하며, 성경에서 약속한 재림주’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자신을 재림주로 선포하는 사람들은 김성도의 주장과 똑같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형태부터 계시를 받은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①번의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따 먹음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교주 문선명과 ‘기독교 복음 선교회’의 창교주 정명석의 실낙원의 내용과 일치한다. ②번과 ③번의 내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④번에서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라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서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⑤번의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는 계시내용도 한국에서 자신을 메시야 및 재림주로 주장하는 창교주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교리이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1904년경에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제 칠일 안식일 재림예수교회에서 출교당한 안상홍이 세운 ‘안상홍 증인회’에서도 ‘성경에서 예언한 재림주는 한국에서 나오며 바로 안상홍 자신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김성도가 ‘죄의 뿌리는 음란’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그녀가 출석한 교회 담임목사가 남녀 간의 연정문제로 구속이 된 후, 이 문제로 고심하고 깊이 기도하던 중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환청을 듣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는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의 『生의 원리』,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의 교리서인『원리강론』, 변찬린의『성경의 원리』의 내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18)

    2. 원산 예수교회 백남주와 재림예수

    김백문의 스승이 되는 백남주는 원산의 강신극 소동, 신학산 소동, 성주교의 창립 및 예수교회의 핵심인물이다.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으로 출생날짜가 1901년 1월 3일이라고 이용도의 제자 변종호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용도 목사가 소천하자, 흑괴(黑怪: 백남주를 지칭함)가 순진한 성도들을 이용하여 교단을 조직하여「XX교회」라는 것을 만들고, 교회 기관지로 「XX」라는 것을 발행하고 교회의 성탄일을 1월 3일로 지키게 하였는바, 1월 3일은 흑괴(黑怪)의 생일(生日)이었다.…(중략) 우연한 기회에 흑괴(黑怪)의 호적을 보았더니, 분명히 그는 1월 3일생이었다. 이 한 가지 1월 3일을 주께서 알려주신 예수의 탄일이라고 믿게 한 것만으로도 그가 구세주, 주님, 예수님 행세를 하려고 연극을 꾸민 것이 분명하다.”19)

    1월 3일은 성주교회, 원산교회, 이스라엘 수도원 등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날짜인데, 백남주의 생일과 일치한다고 하니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남주는 26세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뒤인 1930년 3월 12일에 동기 22명과 함께 제25회 졸업생이 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백남주는 목회보다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서 ‘루씨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원산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일제시대에 가장 큰 노동쟁의로 유명한 곳이다. 루씨 여학교와 원산 여자 성경학교가 동일한 곳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원산에 있던 이 학교는 중등교육을 담당한 개신교 미션학교로 의료시설 등도 갖추고 있었다.

    1) 예수교회의 탄생

    ▲백남주

    예수교회는 대표가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으로 출발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교회는 처남 매부지간인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고, 이호빈, 이용도, 이종현이 후에 합류하게 된다. 20)
    그러나 실상은 예수교회는 ‘강신녀(降神女) 유명화’가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유명화의 말에 따라서 예수교회의 대표들이 움직인 흔적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즉, 유명화의 말에 따라서 백남주, 한준명, 박성걸의 아들들이 성자로서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하는 시대가 온다는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21) 이러한 거짓계시가 원산 예수교회의 실체이다.

    유명화를 필두로 기도모임을 계속하였고, 1933년 1월 3일 새벽에 모든 신도들에게 흰옷을 입고 백남주 자택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그 날 새벽 3시쯤에 50~60명의 신도가 흰 옷을 입고 모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백남주의 설교가 끝날 즈음에 유명화에게 주의 성령이 임재하여 영계의 심판이 눈에 볼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연출되었다. 그 자리에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은 오른쪽으로 불려갔고, 그렇지 않은 신도들은 왼편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된 신도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왼편에 있는 신도들을 모두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왼쪽으로 합류시킨 후 회개와 구원에 대해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으며, ‘예수교회’라는 글씨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쓸 것’과 가운데 ‘+(십자가) 표시는 붉은 색으로 하라’는 신탁이 있었다. 22)

    2) 예수교회의 교리서 – 새생명의 길
    1933년 1월 3일에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의 이름으로 “새 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새 생명의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의 과정을 ‘삼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1시대는 구약시대, 제2시대는 신약시대, 제3시대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삼시대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서 말한 성약시대, 복귀섭리완성시대, 부활완성섭리시대, 그리고 정명석의 30개론에 나오는 실체시대와 애인시대, 더불어 이만희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서 가르치는 실상시대, 말씀시대, 계시록시대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32년 11월 28일에 평양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정된 백남주, 한준명과 이용도는 더 이상 기성교단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용도는 감리교 연회에 목사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이즈음에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백남주는 장로교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 출신 목사인 이용도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의 이름으로 ‘새 교회 창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6월 6일에서 6월 8일까지 새 교회 창립을 위한 모임이 평양교회에서 있었는데 명칭이 ‘예수교회의 창립공의회’였다.
    이 자리에는 116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총회장격인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고 예수교회 헌장 및 그 세칙의 기초위원으로 이용도, 이호빈, 백남주를 선출하였다.

    백남주는 예수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흘에 걸친 창립공의회가 끝나고 6월 9일에 평양 시내의 회중교회당에서 낮에는 한준명이 밤에는 박승걸이 각각 결혼식을 이용도 목사의 주례로 거행하였다. 유명화가 신탁하였던 그 결혼식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23)

    ▲서울시 강서구 화곡4동에 있는 예수교회 제일에배당 모습

    3) 예수교회의 현재
    지금도 1933년 창립한 예수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인터넷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그들은 지난 1967년 “한국 새교회 신학원”을 개원을 기념하면서 “예수교회와 스베덴보리 신학의 관계”를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한강예배당이 1971년까지 25년간 흑석동에 있다가 용산구 갈월동 남영동에 약 2년 셋방살림을 하였고 1973년에 화곡동으로 옮겨와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현재 강서구 화곡4동). 서울, 인천, 광주, 미국에 교회가 있다고 한다.

    3. 광해교회(새 예루살렘 순례단) 황국주의 사상

    1) 황국주의 출생과 활동 24)
    황국주는 1930년대 초반에 출현한 자칭 메시아 중 한 사람으로 1909년에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 아래인 누이동생 은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배재학교에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용정에서 황국주 부친은 용정 중앙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였다. 유족한 환경 탓에 황국주는 서울로 와서 사직동에 있던 법률학원(또는 법정학교)에 재학한 적도 있다.

    황국주의 용모는 잘 생겼으며 열변가는 아니었으나 설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황국주가 신비체험을 했다고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 또는 1931년이었던 것 같다. 황국주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고백하기를 30세 때에 백일기도 중 머리를 길러 내리고 수염을 기르니 그 풍채가 그림에 나온 예수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그 모양으로 교회에 나타나서 ‘내가 기도 중에 예수가 나타나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바꿔서 붙여주고 내 몸의 피를 예수의 피로 교체하여 투석시켜 주었다.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가 보여주신 이적도 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전부 예수화(化) 되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이 바로 ‘목가름’이자 ‘피가름’ 교리이며 황국주의 제자 정득은을 통하여 통일교와 전도관 그리고 정명석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서울에 도착한 황국주 일행은 서울,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등 전국 곳곳을 2, 3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하였다. 황국주와 누이동생 황은자가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집회시간에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집회를 통하여 병(病)이 나은 사람도 있고 부흥회 기간에 봉헌한 헌금으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한 교회도 있었지만, 가정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녀들과 수종드는 처녀들이 황국주를 예수같이 숭배하고 돈과 정조를 바치며 음란한 집단생활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목가름과 피가름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과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종합하여 평양노회에서는 1932년 11월 28일에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 유명화를 이단으로 결의하고 부흥회 인도 금지를 하였다.

    1933년에 들어와서 황국주는 전도여행과 부흥집회 인도보다는 ‘영계’라는 월간지를 발간한다. 사장에 정중명을 세우고 자신은 편집, 발행인이 되어 1933년 11월에 창간호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현재 창간호 한 부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5층 희귀본 서고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김경래의 책 25) 에 의하면 김선환의 회고록을 통해서 백남주에 대한 추종자들의 상태를 볼 수 있다. 김선환은 당시 박태선 장로와 비교해서 말하고 있었다. “설교에 있어 기도에 있어 요즘 박장로의 유가 아니었다. 황국주의 얼굴은 예수님의 사진과 흡사하고 수염도 길게 길러 예수님 얼굴 비슷했다.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이라 하였다. 황국주의 기도와 설교에 감동되어 도취되지 않은 자 없었다. 그러나 황국주는 일년이 못되어서추한 냄새가 드러났다.”
    당시 황국주의 본명은 ‘국주’이지만 별명은 ‘구주’였다고 한다. 국주와 구주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황국주가 출석하는 용정 중앙장로교회의 담임목사는 문제린(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지만 그가 황국주의 이러한 종교체험과 신앙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있지 않다. 26)

    4. 이스라엘 수도원과 김백문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40년대에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김백문이 1990년 12월 20일 경에 별세한 후에, 1954년 3월 2일 제3기생으로 이스라엘 수도원에 입문한 수사 신현식이 계승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재 91세의 나이로 서울시 성북구 정릉에서 ‘이생렬(以生列, 이스라엘) 기념관’과 ‘영원한 복음 선교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신현식은 스승 김백문이 직접 집필한 저서『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과 자신의 저서인 『자서전』, 『재림론』, 그리고 신현식의 처제인 집사 양재숙의 고희 기념문집 『같이 가자 하시던 당신이기에』와 수기『보이지 않는 손길』등의 책을 맡아 출간하고 있다. 이스라엘 수도원 제3기생인 수사(修士) 신임철이 집필한 『40년(年) 신앙(信仰)의 길』은 자신의 신앙고백과 회고담으로 엮어져 있는데 아쉽게도 비매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김백문이 남긴 세 권의 저서 가운데, 성신신학 서론에 보면 김백문은 ‘요한의 신학관’을 통하여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삼위(성부, 성자, 성신)가 일체적으로 기독교구원의 역사’를 도모하시는데 구약 시대는 성부가, 신약 시대는 성자가, 그리고 종말 시대에 성신이 각각 시대적으로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화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한 ‘기독교 삼원리서’와 인류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초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승 김백문의 사상을 통일교 문선명이 자신의 계시로 도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고 박정화는 『야록 통일교회사』에서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최선길과 함께 다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대로 도용했으며, 유효민이 도용한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김백문은 정릉 3동 산 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 처를 옮기게 되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하게 된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70년 10월 3일에 김백문은 『신앙인격론』을 박상래를 통하여 출판하게 한다. 이 무렵에 박상래의 권유로 통일교 초창기 핵심교인이었던 오승택 및 임승희가 청수교회에 입교하게 된다.

    1975년 이후로 신현식의 부인 양재임이 사망하고, 오승택과 임승희도 청수교회를 떠났으며 1981년에는 양재억도 사망한다. 그리고 박상래가 1982년 8월 17일에 탈퇴하니 신현식이 청수교회를 이끌어 가게 된다. 신현식이 김백문에게 교인들의 입교, 직분, 제명처분 등이 기록된 교인들의 명부를 보여드리면서 재정리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김백문이 교적부는 생명록이기 때문에 “신현식과 나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도 김백문과 동일하게 교적부를 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나오는 생명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묘번 3456번)에 묻혀 있다.
    김백문은 재림주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을 미친 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

    5.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

    ▲정득은

    정득은의 출생연도는 1897년으로 정득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태선 전도관이 ‘세계일보’에 폭로되면서 부터이다. 정득은은 1929년 33세의 나이로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가 43세 때에 다시 독실한 신자로 돌아갔다. 정득은은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한 후에 평양에서 살았다. 당시 나이는 50세이었고, 간판이 없는 ‘광해(廣海)교회’(황국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라는 곳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정득은은 H씨 등을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H와 입을 맞추라고 하는 이상한 계시를 받게 된다. 얼마 뒤에 H가 정득은에게 다가와 계시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사실 그대로 시인을 했다. 그 뒤에 정득은은 H와 성관계를 가졌고, H는 박흥식의 장모에게서 먼저‘영체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1946년 11월 경(음력)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한 정득은은 김백문의 집회에 참석도 하고 이스라엘 수도원까지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상도동 소재)에서 방호동(1921년 생)의 모자를 알게 되었고, 이들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에 집회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득은의 기도능력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연희대학교 신학부 학생 김한, 장로교인 이태윤, 남대문교회 박태선 집사 부부(후에 전도관을 세움)등이 전도되어 정득은을 추종하게 된다. 이 무렵에 정득은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방호동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받아쓰게 하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성주교 김성도와 김백문 그리고 통일교 문선명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인류최초의 죄는 천사장 루시퍼(루수벨)와 하와(해와)의 성관계를 통하여 발생했다. 창조 이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를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생령의 사람,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에덴복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득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에 있어 천사장 루시퍼(루수벨)로부터 인류가 더러운 죄의 피를 받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다시 따먹어 새로운 피를 받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정득은은 계시를 통해 하늘에서 택한 사람과의 영체교환을 통해 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피가름 행사를 약 1개월 동안 진행하였다.

    정득은은 6.25 동란이 일어나고 서울수복이 된 후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에덴 유치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돌보며 굶주리고 있던 인근 주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거나 죽을 쑤어 나눠주는 구호사업을 하다가, 잠시나마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담임한 적도 있다. 1949년 4월에 정득은과 결별한 신도들 가운데 기성교회에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박태선은 1955년 1월에 부흥사로 나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박태선은 자신을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말세의 메시야’로 주장하였으며 실수인 ‘십사만 사천 명만이 구원 받는다’라고 함으로 구원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

    이 교리는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박태선과 정득은의 관계가 세상에 폭로되는 결정적 계기가 백영기 목사 사모인 장애삼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탈하면서 이태윤과 영체교환(혼음)을 했음을 남편에게 실토하였다. 1957년 2월 9일에 백영기와 장애삼 부부는 정득은의 친딸이 인간이하의 짓을 하고 다니는 어머니에 대해 한탄하며 제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세계일보’ 김경래 기자에게 폭로하여 박태선과 정득은의 혼음사건 전말이 드러나게 하였다. 김경래 기자는 정득은을 직접 만나 당시 의학으로 손댈 수 없는 임질 매독에 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6. 세계 평화통일 가정연합(통일교)과 사망한 메시야 문선명

    1) 문선명과 통일교
    통일교는 문선명에 의하여 1954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이단종파이다. 그는 이용도, 황국주의 후예이며, 김백문 씨가 쓴‘성서신학’과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표절하여 소위 “원리강론”을 만들었고, 정득은 노파의 범성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형성한 혼합주의적 사교의 교주이다.
    1945년 5월 : 혼음 간음죄로 구속
    1954년 5월 : 성북구 북학동 391번 초가집에서 포교시작.
    1955년 : 김영운(당시 이화여대 조교수) 외 4명과 학생 70여 명이 혼음 사건에 관련하여 기소됨.
    1960년 3월 : 나이 41세 때 18세(고2)인 한학자양과 4번째 결혼함.
    이 결혼을 ‘어린양 잔치’라 하고 한학자를 ‘우주의 어머니’ 또는 ‘참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호색적인 여성편력으로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2) 통일교의 명칭과 의미
    이 명칭이 갖는 의미는 모든 주의(ism)나 사상, 정치, 그리고 종교를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 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문선명씨의 환상적인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다.

    3) 통일교의 역사적 배경
    – 생략

    4) 통일교의 주장교리와 원리강론의 비판
    통일교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성경 외에 그들의 정경인 「원리강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성약서(成約書)라고 부른다. 원리강론을 신이 문선명 씨에게 준 계시의 말씀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김백문 씨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
    ① 새계시 : 원리강론을 새 시대의 새 계시라고 말하고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한다. 「씨앗(유대교)-나무(성경)-열매(원리강론)」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에 불과하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원리강론은 성경의 숨은 진리를 발견하고, 현대인에게 새롭게 해석한 것이며, 천국건설에 합당한 말씀이라고 한다.
    ② 창조원리 : 창조주를 인간과 자유로 유추해서 해석, 정의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계의 제일원인이라고 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의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을 한다.
    ③ 타락론 : 1) 영적타락-천사와 하와의 혈연관계로 인한 타락
    2) 육적타락-하와와 아담의 혈연관계로 인한 타락
    여기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심은 단지 영적 타락의 구원일 뿐이므로 육적인 타락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의 피를 가진 자와의 혈연관계의 방도(성적행위)로써 가능하다고 함.
    ④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자이며, 하나의 선지자와 같은 역활을 했으며, 아담이나 아브라함, 그 외의 구약의 여러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구원과 아울러 육적인 구원을 이룩할 재림주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 하는데, 그가 곧 문선명이라는 것이다.
    ⑤ 복귀원리 :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본래의 창조목적을 완성케 하기 위하여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참부모로 오신 재림주-문선명-에 의하여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와 피가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지금이 재림주의 탕감의 시대(혈통적탕감, 수리적탕감)라고 한다. 특히 수리적 탕감을 말하면서 ① 아담-아브라함:2,000년→탕감실패 ② 아브라함-예수:2,000년→탕감실패 ③ 예수-재림주:탕감의 시대(문선명의 신격화를 통한 인류 구원 성취)를 주장하고 있다.
    ⑥ 재림주 : 재림주(문선명)는 이미 재림(한국)하셨고, 말세는 바로 현세이며, 이 말세에는 기쁨의 한 날이 실현되는데 곧 ‘희망의 날’이라는 것이다.

    5) 통일교와 신천지(이만희)의 관계
    통일교 신도였던 진진화가 이탈하여 만든 단체가 생령교회이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최초의 교리서인 『신탄』은 생령교회 출신인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와 만나서 1985년도에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다. 『신탄』에서 주장하는 교리들은 통일교 원리강론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인 김병희와 김건남의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자, 이만희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측에서는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의 성경해석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담아『신탄』이라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에, 즉시 이 책을 회수, 폐기처분하였다고 변론을 했다. 그러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주장과는 달리 1990년대 초반까지 『신탄』이라는 책은 신도들에게 배포되었다는 증언과 자료들을 찾았고, 현재까지도 시온기독교 신학원 강의 중에 『신탄』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교리를 형성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계속)


    1) 천주교가 서양에서 전해졌기에 ‘서학(西學)’이라는 개념을 가졌고, 이에 반대하는 의미에서의 ‘동학(東學)’이다.
    2) 이 책은 1977년 이도은(본명 이용세)이 자신이 필사한 것이라 하며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도은은 박태선이 세운 신흥종교 천부교의 추종자이다.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 책의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1977년에야 필사본이 나타난 점, 쓰여진 한자가 일본식 한자어가 많은 점, 철학(哲學)이나 공산(共産) 등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한자 조어가 사용된 점, 성경의 일부 내용이 그대로 베껴진 점 등을 이유로 남사고의 이름을 가탁한 위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3) 얼마 전에도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가 많은 사람을 미혹해서 만든 손도장 태극기를 현충원에 기증한 것과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신천지가 전도관의 후예로서 선배의 전철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4) 격암유록에 위서(僞書)인 많은 증거가 있으며, 1995년 9월 26일 방송한 MBC의 PD수첩에서도 이 부분을 다룬 적이 있다. 격암유록이 ‘고서(古書)’라면 사용할 수 없는 많은 현대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것
    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외에도 격암유록이 위서인 증거는 많이 있다.
    ① 군정(軍政) : 군사정권을 의미하는 말이며 1970년대 작품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증거이다.
    ② 도로(道路) : 조선시대의 표기법은 로(路)이며 도로는 일본식 한자이다.
    ③ 반도(半島) : 일본인들이 조선을 낮춰서 부르는 말이다.
    ④ 목욕탕(沐浴湯) : 조선시대에는 이런 표현이 없었고, 이것은 일본식 표현이다.
    ⑤ 정차장(停車場) :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정차할 만한 차도 없었다.

    5) 1930년 10월 28일에 한국 YMCA가 발족되었다. 사회계몽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이만열,「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대한기독교 출판사, 1927), pp. 260-264.
    6) 전택부,「한국교회 발전사」(대한기독교 출판사, 1987), pp. 222-224. 참조.
    7) 최중현, ‘한국의 메시아운동’, (생각하는 백성, 1999), pp.19-20
    8) 정동섭외,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 (국제종교문제연구소, 2000), p. 7
    9) 위의 책, p.20 참고로 현재 정석천은 통일교에 몸담고 있다.
    10)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신앙수기제1집 – 증언’, (성화사, 1982), p347, 최중현, 위의 책, p.21
    11)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史報157호’ p.76

    12) 신앙수기 제1집, 증언, p.347
    13) 최중현, 위의 책, p.25
    14) 김경래, ‘사회악과 사교운동’, 기문사(1957), pp. 166-167
    15) 정동섭, 위의 책, p. 10
    16)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소명하신 길을 따라’, (성화사, 1986), pp. 197-206
    17) 월간 통일세계, 1996. 6월호. p.167
    18) 정동섭, 위위 책, pp. 12-13
    19) 변종호편, ‘이용도 전집 제4권,1993, pp.161-162

    20) 최충현, 위의 책, p. 73
    21) 정동섭, 위의 책, p. 19
    22) 최충현, 위의 책, pp. 67-68
    24) 황국주에 대한 자료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최충현, 위의 책을 주로 참조하였다.
    25) 김경래의 위의 책
    26) 정동섭, 위의 책, p. 31



    허봉랑 할머니 선교사 이단성 해부

    한 독자 분의 질문으로 허봉랑 선교사를 찾아보았다.
    무려 86세나 되는 할머니로 요즘 기독교인들 사이에 꽤나 인기 있는 분이었다.
    90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며 구원의 참 복음을 전하는 할머니라면 얼마나 귀감이 되고 좋겠는가 하는 기대감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허봉랑 할머니는 용문산 출신이었다.
    우리나라 이단들의 요람이며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나운몽의 용문산에서 죽을병을 고침 받았다고 한다.
    먼저 용문산 기도원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자.

    ​용문산 기도원을 운영한 사람은 나운몽 목사다.
    나운몽은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 이단이 뭔지도 몰랐던 시기인 1955년에 각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힌 목사다.
    평북 박천 출신인 나운몽은 전쟁 전 북한 땅을 휩쓸었던 신령파의 혼합 신앙과 신비주의 사상을 그대로 남한 땅의 용문산 기도원에서 전파했기 때문이다.

    북한 땅을 휩쓸었던 신령파의 혼합 신앙과 신비 신앙을 살펴보자.

    ​전쟁 전 북한 땅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주요 인물들은 관성교의 도사(道士) 출신인 길선주와 새주파 김성도, 남방여왕 이순화, 예수 친림자 유명화 등 이다.
    이들이 북한 기독교를 무속적 혼합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원래 관성교 신도였던 길선주는 마포삼열(마펫 사무엘)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유불선 사상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에 혼합시켰다.
    길선주는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한울님, 환인이 여호와라고 주장하고 또 예수와 공자와 석가가 똑같은 성현이라고 주장했다.
    석가를 통해서는 대자대비한 하나님을 나타냈으며 공자를 통해서는 仁 義 禮 智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예수를 통해서는 사랑을 나타냈다고 가르쳤다.
    즉, 우상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켜 버린 것이다.

    ​또 김성도와 이순화는 신비한 이적들을 행하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수시로 입신하여 천사들을 보고 영계를 오가는가 하면 불치병을 고치고 귀신이 소리치고 나가며 방언이 터지는 등 온갖 신비한 이적들을 보였다.
    사람들이 이런 신비한 이적들을 보려고 교회로 몰려들어 평양과 원산에서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북한 기독교는 6.25 전쟁 후 멸절 당했다.
    김일성의 수하들에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혹하게 몰살 당하고 기독교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다.
    참된 복음과 참된 자녀가 있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키셨을 것이다.
    그러나 혼합주의 신령파들이 설치는 북한 땅에는 참된 복음이 없었고 구원 받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소돔처럼 멸망 당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북한 기독교를 망하게 한 혼합주의 신령파 신앙이 남한 땅으로 내려왔다.
    6,7,80 년대에 남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유행시켰던 유명한 부흥사들은 모두 북한의 핍박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신령파 출신들이다.
    이들 중 한명이 용문산 기도원을 세운 나운몽이다.

    ​승려 출신인 나운몽도 길선주처럼 유불선 동양사상과 기독교의 혼합사상을 전파했다.
    공자와 석가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대 선지 몽학선생"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운몽의 제자인 趙용기목사가 동국대 강연에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용문산기도원은 신령파 신앙인 치유, 귀신축사, 방언, 입신,환상 등을 남한 교회에 널리 퍼뜨렸다.

    용문산 기도원의 신앙을 살펴본 이유는 용문산 기도원의 영향을 받은 허봉랑 할머니의 뿌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봉랑 할머니는 북한을 망하게 한 신령파 신앙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1. 허봉랑 할머니는 방언의 종류가 "대신 방언, 대인 방언, 대물 방언"이 있다고 주장했다.

    ​대신 방언이란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이고, 대인 방언이란 사람에게 하는 방언이며 대물 방언이란 동물들과 소통하는 방언을 말한다.
    이러한 방언들은 평양에서 유행했다.
    당시의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방언을 주절댔다.
    이 때문에 평양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방언 패거리"라고 불렀다.

    ​북한의 신령파들은 방언을 대신, 대인, 대물, 애기,방언이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것이 남한으로 내려와 용문산에서 퍼진 것이다.

    2. 허봉랑 할머니는 용문산에서 3일 금식을 통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금식이란 구약의 율법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폐하신 율법(엡 2:15-16 골2:14)을 통해서 치유하셨을까?
    구약의 금식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
    인간이 금식하여 죄에서 돌이키고 의인이 될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영이 죽어버린 죄인의 금식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즉, 죄인의 금식으로는 죄의 흉악한 결박을 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을 대신히여 중보자로 오신 예수께서 죄인 대신 금식을 하시고(마 4:2), 죄인 대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마 4:1).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마 4:4)"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시려 친히 40일 금식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위의 흉악의 결박과 멍에란 죄의 결박을 말하며 죄의 멍에를 말한다.
    죄인들은 죄의 멍에를 지고 죄에 결박당하여 사탄의 포로가 되어 멸망의 지옥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하시려 예수께서 오셔서 대신 금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묶고 있는 죄의 흉악의 결박과 죄의 멍에를 풀어주신 것이다.

    ​즉 구약의 금식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금식의 그림자이고 율법이며 십자가로 폐하신 것이다.
    그런데 허봉랑은 율법인 금식을 통하여 치유받았다고 한다.
    이 영이 성령일까? 아니다. 율법으로 십자가를 능멸하는 거짓 영이 분명하다.

    3. 허봉랑 할머니는 3일 금식 후에 온 몸이 뜨거워 지고 콧구멍에서 죄를 태우는 듯한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죽을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기독일보).

    이런 현상도 신령파들의 현상이다.
    이들은 회개하면 죄가 타는 냄새가 콧구멍에서 진동한다고 하였다. 또 죄가 더러운 가래가 되어 목으로 넘어온다며 죄를 휴지에 뱉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냄새나 가래는 마귀의 장난이다. 죄가 단번에 씻어지는 십자가복음을 가로막고 회개로 죄를 태운다고 믿게 하려는 사탄의 장난인 것이다.

    4.  허봉랑 할머니는 생각나는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강조한다.

    ​이 회개는 회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북한 신령파들의 회개이다. 신령파들은 평양의 대부흥이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자랑했다. 길선주가 도둑질한 것을 회개했고 연이어 다른 사람들도 나쁜 짓을 회개하여 부흥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나는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 회개가 아니다.머리털보다 많은 죄 중에 생각나는 죄만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죄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께서 돌이키는 것이 참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회개하라는 허봉랑 할머니의 회개는 북한 신령파들로부터 내려온 거짓 회개이며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십자가 은혜를 퇴색시키는 회개인 것이다.

    5. 허봉랑 할머니는 교회에서 하는 기도와 산에서 하는 기도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산에서 하는 기도가 훨씬 세고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산을 영험하게 여기고 산기도가 효험이 있다는 무속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즉 유불선 동양사상을 가진 길선주와 나운몽으로부터 나온 무속신앙인 것이다. 신령파들은 산기도를 중시하여 백두산과 금강산, 남쪽의 삼각산 등 영험한 산들을 찾아다니며 산기도를 했다.

    ​이런 무속 신앙이 남한의 교회로 내려와 대부분의 기도원들은 모두 산에 있다.산에서 기도할 때 기도발이 세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의 심령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즉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시다. 따라서 장소에 상관 없이 내가 있는 곳이 성전인 것이다.그러므로 기도발이 세다고 산을 찾는 것은 무속신앙이다.

    6. 허봉랑 할머니는 교회에서 통성기도 중 교회의 천장이 열리고 천사들이 금항아리(금향로)를 들고 내려와 성도들의 머리 위에 서서 성도들의 기도를 금향로에 받아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상도 북한 신령파들이 흔히 본 환상이다. 북한의 신령파들은 수시로 입신하여 환상으로 천군천사들을 본다고 자랑했다. 이 말을 곧이들은 사람들은 이들을 신령하게 여겨 신령파로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본 환상은 "헛된 몽사"라고 말씀하신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夢事)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에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렘23:25-26)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할 소수의 선지자나 사도 외에는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 환상이 성경보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상을 보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허봉랑 할머니가 본 것은 거짓된 허상이거나 사탄의 농간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7. 허봉랑 할머니의 치유 간증에 대하여 살펴보자.

    허봉랑 할머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치유 간증 때문이다. 허봉랑 할머니는 22세 때 폐병,간경화,복막염, 악성 빈혈 등 7가지 불치병이 있었다고 한다. 입원했던 병원에서 강제 퇴원 당한 후 용문산 기도원에 올라가 3일 금식하던 중 콧구멍에서 죄를 태우는 듯한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잠이 들어 12시간을 잤다고 한다. 자고 깨어나보니 신기하게 호흡이 되고 피와 거품과 고름이 다 빠져나가고 큰 냉덩어리가 쑥 빠져나가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극적인 기적에 열광하며 허봉랑 할머니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십자가를 가로막으려는 사탄의 기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신비한 기적을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
    병고치는 기적과 죄 사함을 얻는 기적 중에 어느 기적이 더 클까?

    당연히 죄를 사함 받고 생명을 얻는 기적이 훨씬 더 크다. 병고침의 기적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병은 고쳐봐야 7.80년 밖에 못 살지만 죄를 사함 받으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죄 사함의 기적을 주는 십자가복음은 가벼이 여기고 병 고침의 기적을 더 크게 여기고 치유 사역자를 따른다.

    사탄은 이것을 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병 고치는 체험을 시키는 것이다. 즉, 사탄의 목적은 구원을 막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보지 못하도록 치유의 기적에 매달리게 하는 것이다. 유명한 거짓선지자들은 대부분 큰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기적을 체험을 시키고 치유 사역을 하게 한다.

    허봉랑 할머니가 죽을병에서 치유 받은 후 치유 사역자가 되었듯 유명한 치유 사역자들도 모두 기적을 체험한다. 그 예를 살펴보자.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치유 능력을 보인 사람은 朴태선이다. 朴태선은 무려 3일간이나 소변으로 피를 쏟아내고 허봉랑 할머니처럼 콧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체험했다. 그의 치유 능력은 신문에 날 정도였다.그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했고 많은 불치병 환자를 고쳤으며 목발을 짚고 온 사람들이 버린 목발이 한 트럭씩 나왔다고 한다.이런 소문 때문에 무려 5백만 명이나 朴태선의 치유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아는 치유사역자 조용기목사도 폐결핵으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또 귀신축사로 유명한 김기동도 폐결핵으로 죽다 살아났다. 또 李재록도 불치병을 고침 받는 체험을 한 후 유명한 치유 능력자가 되었다.

    치유 능력자자들의 열매를 살펴보자.

    치유의 큰 능력을 보였던 朴태선은 말년에 "성경은 98% 거짓말"이고 " 예수는 000"이라고 욕설을 하고 죽었다.또 유명한 趙용기도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교자가 되었고 李재록 김기동은 性추행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켜 기독교에 오물을 끼얹고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게 하고 등돌리게 했다. 이처럼 치유 사역자들은 사탄의 하수인들인 것이다. 이들의 등 뒤에 사탄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치유 집회가 어떻게 구원의 십자가를 훼방하는지 살펴보자.

    ​치유 능력자들은 예수도 친히 병을 고치고 제자들에게도 병고치는 은사를 주셨으니 자신들도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짓이다.병고치는 은사는 제자들만 받았다. 사람들은 막16:17절의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의 "믿는 자"는 모든 믿는 자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가 아니다.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즉,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믿는 자"가 되면 은사를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막16:14)

    또 바울도 "다 병고치는 자 이겠느냐"라고 꾸짖으며 자신은 사도이기에 사도의 표로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았다고 말한다.(고후12:12) 예수께서는 왜 사도들에게만 표적을 행하게 하셨을까?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은사를 주신 것이다. 만일 누구나 믿는 자에게 병고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병이나 고치는 값싼 무속 종교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병 고침은 죄 사함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표적이다.

    숨은 뜻을 겉으로 드러내보이는 기적을 표적이라 한다.예수께서도 병을 고치셨지만 아무 뜻 없이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십자가복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으로 병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고 하신 후 고치셨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병이 들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으면 병이 들었다.그 율법을 살펴보자..

    ​신명기 28장 21-29절 여호와께서 네 몸에 병이 들게 하사...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리니.. ,,

    하나님께 불순종한 다윗을 대신하여 아이를 병으로 치셨으며 (사무엘하 12장 15절) 미리암도 죄를 지어 나병에 걸렸고 (민수기 12장 9-10절) 웃시아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역대하 ​26장 19절)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려 칠만 명이나 죽게 하셨다 (사무엘하 24장 15절).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때문에 병이 든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장들은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격리시켰다. 그러다 병이 나으면 제사장이 살펴보고 격리를 해제시켜주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막 1:44 눅 17:14 참조)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 병이 든 자들의 병을 고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다.(눅5:24) 즉,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표적으로 병을 고치셨다. 이처럼 병고침이란 죄 사함의 십자가복음을 나타내는 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병고치는 은사를 사용하도록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 죄를 사해야 병이 고쳐지기 때문이다.

    "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성경이 없던 시절에 사도들은 병 고치는 은사를 사용하여 병을 고치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복음을 전했다. 즉, 십자가복음을 전하기 위한 표적으로 병을 고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치유 사역자들은 병고침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그저 아무 뜻 없는 병고침을 행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고치고 귀신 쫓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경고하셨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왜 거짓선지자라고 쫓겨났을까? 죄 사함과 상관 없이 이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의 죄 사함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병을 고치셨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십자가와 상관 없이 치유 행위를 했기 때문에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버림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병이나 고치려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오직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 오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상관 없는 치유 집회나 쫓아다니고 거짓 방언이나 좇고 있다면 멸망으로 끌고가는 사탄을 좇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허봉랑 할머니 같은 거짓 선지자를 멀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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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믿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

    “종교란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이다(국어사전).”

    이런 정의들은 기독교의 ‘예수 신앙’과 공유되는 점이 별로 없다. 만일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면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다.

    파산자에게만 유효한 예수 신앙

    ‘예수 신앙’은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위에서 ‘뭔가의 상승’을 도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파산시킨 후 구원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먼저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세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regeneration, 重生)’이라 하며, ‘현재에 기반한 개량(improvement, 改良)’을 지향하는 일반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갈 3:24)’의 기능도 바로 그것이다. 죄인의 선(善), 가능성을 무(無)로 만들 뿐더러 그의 존재기반을 싹쓸이 부정한다.

    ‘예수 신앙’은 사실 ‘죽음의 직면’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해부해 보자.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고 한 율법에 의해 인간은 한 번 죽음을 선고받고, 그 후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또 한 번 ‘사망(저주)’를 선고받는다(롬 3:19). 그리고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인 ‘예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로 보건대, ‘예수 신앙’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귀결되는’ 죽음 일색(一色)이다. ‘소망’과 ‘생명’을 시사하는 그것의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 신앙’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이다.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왕의 자기 삶을 긍정하는 기반 하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갈 4:21)’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그에게는 ‘예수 죽음’이 불필요하고 나아가 구원도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다시 말하지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차력사(借力士)가 타력(他力)을 빌어 괴력을 행사하듯, 죄인이 ‘예수의 전능’을 빌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정의(定義)는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과 연합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소망’이라는 말도 오해가 없어야겠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어정쩡한 절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로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는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자 곧, 파산자(bankrupt)의 눈에만 들어온다(갈 4:23).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신앙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신앙’으로 구원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구원’으로 감겼던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 아는 것’, ‘심판’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신앙’은 단지 예수 신앙으로 그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자(聖子) 예수는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요 1:14)’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골 1:15)’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로 가면 그에게로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체(一體)이신 성부(聖父)에게로도 간 것이다. 그리고 일체이신 ‘성자’와 ‘성부’께로 가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聖靈)’께로도 가게 되니 결과적으로 삼위일체(trinitas)께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현현(顯現)’의 시작과 중심엔 언제나 ‘성자’가 계신다. 이는 ‘삼위일체’께선 ‘성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도 계시고, ‘성자’가 없는 곳엔 ‘삼위일체’도 없다. 성자를 부인하는 유대교도들(Judeas)이나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에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자’가 계신 곳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ssion, 發出)하신 ‘성령’도 계시고, 그가(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연합시키시고 ‘신자(信者)’에게 두 위(位)를 일체적으로 계시하신다.

    이렇게 ‘성부·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가 부정될 때 그것(성령)의 발출 기반이 없어지니 당연히 성령도 부정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 theology)이 일컫는 ‘성령’은 단지 ‘기괴한 악령(惡靈)’일 뿐 ‘삼위일체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을 부르는 그들의 의식이 초혼제(招魂祭)나 강신술(降神術)과 방불한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그들처럼 특별한 제의(祭儀)나 의식(儀式)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곳에 현현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성자) 신앙’역시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우리가 ‘성자 신앙’, ‘성부 신앙’, ‘성령 신앙’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성자 신앙’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신앙’은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신앙’은 ‘성령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믿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자(예수) 신앙’과 ‘하나님 신앙’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닌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으라’는 뜻이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는 자는 예수신앙을 가질 수 없고, 예수신앙을 못 가지면 삼위일체 신앙도 못 갖는다’이다.

    이는 높고 위대한 삼위일체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 현현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유 역시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아서이다.




     
    2025년 1월 19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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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라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증거라고 하겠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으로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의 피를 뿌리고 짐승은 완전히 제물로 태워버림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짐승은 멸절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죄를 짊어질 어린 양으로 보내셨다.

    둘째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라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접하다(2983) 람바노(lambanō) 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2983

    1. 취하다. 2. 손에 들다.  3. 가져가다
    발음 [ lambanō ]
    관련 성경  /  얻다(행 3:5), 담당하다(마 8:17), 받다(마 10:8, 막 12:40, 행 2:33), 지다(마 10:38), 영접하다(마 10:41, 요 5:43, 13:20), 가지다(마 14:19, 막 14:23, 요 21:13), 취하다(마 15:26, 막 12: 21, 요 19:23), 가져가다(마 16:5), 가져오다(마 16:7), 줍다(마16:9,10), 잡다(마21:35,39), 걸리다(마 22:15), 들다(마 25:1), 담다(마 25:4), 거두다(마 27:6), 빼앗다(마 27:30, 고후 11:20), 데리다(막 9:36), 입다(요13:12), 모시다(요 19:27), 받게 하다(행 8:19), 먹다(행 9:19), 이어받다(행 24:27), 있다(행 25:16), 받아 가지다(행 26:10), 얻게 하다(행26:18), 타다(롬7:8), 감당하다(고전 10:13), 세우다(고전14:5), 받게 하려하다(갈3:14), 기다리다(약 5:7), 제하다(계6:4).

    영접(迎接, Meet) : ‘영접하는 자’의 의미 /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

    귀한 손님을 맞이하려고 뛰어나가는 우호적인 주인의 태도를 말한다(창 18:2; 삿 4:18).

    창세기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에 굽혀.

    사사기 4: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어떤 사람을 인정하거나 환심을 사려고 맞이하러 나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삼하 19:20).
    그러한 만남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것이다.

    사무엘하 19: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제의적인 용법에서는 주체가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뜻이다(출 5:3; 19:17; 민 23:3).

    출애굽기 5:3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출애굽기 19:17
    모세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민수기 23:3
    발람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찌라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고하리이다 하고 사태난 산에 이른즉.

    대적인 뜻으로 쓰일 때도 있는데 주로 군사적인 적(왕하 23:29; 수 8:5, 22)이나 군사적인 적 이외의 상대(출 5:20; 7:15)를 정식으로 대면한 경우를 포함한다.

    헬라어 ‘데코마이’(dechomai)의 첫째 의미는 ‘받다’이다.

    예컨대 편지, 선물, 급료 등을 받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의 용법은 ‘환영하다, 환대를 베풀다’라는 의미에서의 ‘받아들이다’이다.
    마태복음 10:40 이하에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절들인 까닭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그리스도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똑같이 적용되었다(마 18:5-6).

    헬라어 ‘아판테시스’(apantesis)는 중요한 방문자들에게 베푼 공적인 환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환호하면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영접하는 자’의 의미 :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다.
    헬라어 ‘파라람바노’(paralambano)는 ‘누군가의 삶을 붙들거나 잡는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그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전성경사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서 인격적으로 영접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 그리고 “구세주”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사람, 훌륭한 선생,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인정합니다.
    분명 맞는 말이지만,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 충분하게 정의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은 하나님, 인간의 모습을 지닌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요 1:1, 14).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고, 올바르게 하고, 용서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이십니다.
    당신은 이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구원자란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악한 행위들을 저질렀습니다(롬 3:10-18).
    우리는 우리 죄의 결과로 마땅히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해 저지른 죄악들에 대한 공의로운 처벌은 무한한 형벌뿐입니다(롬 6:23; 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값에 대한 무한한 지불이었습니다(고후 5:21).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롬 5:8).
    예수님이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만이 단 한 명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입니다(요 14:6; 행 4:12).
    예수님을 당신의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교회 참석, 의식 수행 혹은 특정 죄들을 짓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것은 당신이 인격적으로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그분 외에 다른 것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행위들을 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에 대한 지불이었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영생에 대한 보장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3:16).
    예수님이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입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따라해보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어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8:17 / 담당하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요한복음 5:43 / 인정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3:20 / 맞아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40).
    “가져다가”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ἔλαβον, λαμβάνω)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예를 들면, “(참 빛이신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시매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1:11)에서 “영접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람바노’ 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어 놓고 영접한 것입니다.

    결혼 상대로 누구 누구를 받아 드리다(막 12:19-22)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밤에만 예수를 찾아왔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보란듯이 신랑을 맞이하고 영접하듯이, 예수님을 람바노 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빛 가운데 사는 길임을 깨닫고 믿었던 것이지요.

    paralambavnw(파랄람바노) / 데리고 오다,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παρα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3880

    1. 데리고 가다.  2. 인계하다.  3.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 λαβον: 자기 백성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음 [ paralambanō ]
    어원  /  미래 παραλήμψομαι, 제2부정과거 παρέλαβον, 미래수동태 παραλη- μφθήσομαι, 3844와 2983에서 유래
    • 1. 데리고 가다, 데려오다, 마 2:13, 막 4:36, 행 15:39.

    • 2. 인계하다, 받다, 받아들이다, 요 19:16, 갈 1:12, 골 4:17, 히 12:28.
    • 3.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 λαβον: 자기 백성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요 1:11, 고전 15:1, 빌 4:9.
    • 관련 성경 /  데려오다(마1:20), 데리고 가다(마2:13, 눅11:26, 행28:18), 모시다(막4:36), 오다(막7:4), 영접하다(요14:3), 넘겨주다(요19:16), 거느리다(행21:32), 받다(고전11:23, 갈1:9, 살전2:13). [명] 영접(요1:11).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 )는 파라()와 람바노(: 취하다, 가지다, 받다)에서 유래한 합성어이다.

    a. 파랄람바노는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다(취하다), 인계하다, 이어받다', 인격 목적과 함께, 특별히 '동료로 받아들이다', 물질적 목적과 함께, '직책을 인계하거나 이어받다' 또는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인계하거나 이어 받다'를 의미한다.

    b. 파랄람바노는 더욱 특별히 '상속하다'를 의미하며, 지적인 것들, 역사적, 과학적, 자료를 상속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c. 파랄람바노는 신비 종교들에서 특별한 의식이나 비밀 등을 전수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이 경우 그 강조점은 초자연적인 계시보다는 구전을 통한 전달이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약 4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라카흐(3947: 취하다, 데려오다, 인도하다, 22:3; 31:23; 45:18; 47:2; 23:14, 20, 27, 28; 삼상 17:31, 57; 대상 25:11)와 그리고 야라쉬(3423: 상속하다, 49:1, 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는 신약성경에서 4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파랄람바노는 사람을 목적어로 취할 때(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자신에게로(혹은 함께) 데려오다'(예컨대 친밀한 교제를 위해)를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절들은 이 동사가 그리스도를 세상이 영접하는 것(1:11), 그리스도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것(14:3; 24:40 이하; 17:34 이하)에 대해 사용된 경우이다.

    b. 사물을 목적어로 취할 때, 능동태는 직무를 '맡다'(4:17); '유업으로 받다'(바실레이안, 12:28)를 뜻한다.

    ① '토라에 대한 랍비의 해석의 유산을 종교적 율법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다', 7:4(정결에 대한 규율과 특별히 관련되어 나타난다).

    ② (바울에게서만 나타나는 용법으로) 한편으로 킵벨(받다)에 보다 가까이 부합하는 의미로서, 주의 만찬 제정과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기사같은 '일련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고정된 형태로 받다'(고전 11:23; 고전 15:1; 고전 15:3) 혹은 '그리스도교의 도덕률로 자리잡은 법률(즉 그리스도교의 Halakha)을 물려받다'(살전 4:1)를 나타내며, 다른 한편으로 원래의 헬라어 파랄람바노에 보다 더 근접한 의미로서, '종교적 삶의 지적·윤리적 내용을 받다', 계시를 받은 자로서의 바울의 개인적인 종교적 삶에(혹은 이런 삶의 창시자에, 1:12) '애착을 가지고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러한 삶을 물려받다'를 뜻한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이 삶이 어떤 의미에서 계시를 받은 인간으로서의 그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런 방식으로 그 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다메섹 도상에서 이 계시를 주신 자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강조한다. 당연히 이 파랄람바네인의 내용은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전승에서 나온 규범일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의문을 완전히 면제받지 못한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에 종교적 확실성을 부여하는 내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임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에서 파랄람바노는 순전히 지적인 자료들을 받아들이는 것일리가 없다. 그것은 지적인 것 이상의 인간 존재의 핵심 부분 속으로 받아들임이다.

    이 용어의 이와 같은 의미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그 배후에 깔려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만이,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것에 관하여 제기되는 정당성에 대한 엄청난 주장, 즉 어떠한 가능한 실수도 완전히 배제된다고 한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1:9; 참조: 살전 2:13), 또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 회중들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하여 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타오르는 믿음 안에서 동일한 그리스도를 나누어가진다(2:6)는 확신을 이해할 수 있다.

    파랄람바네인은 분명히 하나님 자신에 의한 것이다. 로고스 아크네스는 로고스 데우(살전 2:13)이다. 마지막으로 포스 데이 페리파테인("마땅히 어떻게 행할 것", 참조: 살전 4:1)도 파랄람바네인의 내용에 속하며, 그것은 순전히 전승에 의한 윤리적 가르침의 형식적 수용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파랄람바네인은 모범의 감화력으로 인해 자라나는 삶의 본질과 정신을 내적으로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살후 3:64:9). 이러한 이해는 피스티스(믿음)에서,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에서 나오며, 따라서 그것을 얻는 것은 파랄람바네인 톤 크리스톤("그리스도를 받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2:6).

    ‘영접’을 이해하려면 로마시대 법을 알아야 합니다.

    ‘영접’(람바노)은 본래 로마의 새로운 황제가 부임할 때 백성들과 신하들이 황제를 군주로 ‘영접’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황제만이 오직 우리의 신입니다.”
    “황제(로마)의 법만 지키겠습니다. 거역하면 죽겠습니다.”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하겠습니다.”

    전도용어로 사용되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의 ‘영접’이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던 백성들이 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입니다.
    그동안 로마의 법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하늘의 법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동안 황제에게만 충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모든 생각과 삶을 바꾸는 것이 영접입니다.

    전도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영접’처럼 말만 하는 립싱크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신앙으로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위한 영접이며, 믿음의 근본 교리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로 시작되는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경배의 탄성, 구하소서, 경사로다)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당시 군중들은 로마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회복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 나라를 회복시켜줄 메시야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주일날 입성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주간 동안 마지막 사역을 하십니다.

    월요일 : 성전을 정결케 하심,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저주,
    화요일 : 각종 비유를 가르치시고 논쟁하심, 가룟 유다의 변심,
    수요일 : 기사가 없음,
    목요일 :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기도,
    금요일 : 체포되어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앞에서 신문받으심,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심, 무덤에 장사되심,
    토요일 : 무덤에 머물러 계심,
    주일 :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

    예수님의 한 주간 사역은 성경 말씀을 성취하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특히 성전 정화와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오고 오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예배가 무엇이며, 신앙의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교회가 비즈니스 장이 되고 직장과 사업이 된다면 교회 정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은 하면서 열매 없는 종교 생활에 익숙하다면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가룟 유다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눅 17:2)?
    신앙생활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한 바울처럼 필자는 그런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지고 내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깨달은 만큼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종려가지를 들고 입술로 호산나를 부르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게 되면 로마 황제의 법을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란 믿음으로 당당하게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았습니다.
    그런 초대교회 사역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있습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행 19:26)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랑을 깨달은 만큼 소유하게 됩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초대교회 성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런 신앙생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만 하면서 삶의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 나무와 무엇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3~29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부활이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꽃입니다.
    옛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세례(침례)’란 과거(옛 사람)를 청산하고 새 사람(천국 백성)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입술로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에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입술로 위와 같이 고백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이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의 그 깊이와 넒이, 높이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가 너무나 감격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이 땅에 살 동안 예배도, 헌금도(십일조), 봉사도, 전도도, 너무나 감격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술사 시몬도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권능을 보고서, 예수를 믿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행 8:13)
    그렇지만 그는,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표적이 신기해서,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마술사 시몬을 책망했습니다.  
    내가 보니 그대는 악한 뜻을 품고 있으며, 죄에 사로잡혀 있소.(행 8:23)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당시에도, 세례까지 받았지만 가라지 신자가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기보다는, 다만 자기가 원하는 것(마술처럼, 성령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접한다’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고,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가 ‘영접’하지 않고서도,  (마술사 시몬처럼) 마치 자기가 ‘영접’한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우려할 현상입니다.
     
    영접한다는 의미

    첫째,
    구세주로 믿는 것

    예수의 피로 내 죄가 씻음받음을 믿는 것이요.., 구세주로 믿음

    둘째, 왕으로 모시는 것

    예수가 내 삶의 왕이요, 주인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경우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왕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으로 여전히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세주의 죄사함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음을 믿지만, 왕이요 주님으로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접한다는 말의 본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11절에, 영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힌트를 주는 설명이 나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구세주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한 가지만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주권’입니다.
    주권이란 다스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국가의 3대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
    그러니까 자기 땅에, 자기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 백성들이 구세주를,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그 주권을 인정해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 1:11절은,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자기 땅’이요, ‘자기 백성’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그 분께 왕처럼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한말 대한제국에, 영친왕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이 있었으나, 영친왕에게는 주권/통치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왕이었지만,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되, 마치 영친왕처럼 모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이면서도,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권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수를 나의 왕으로, 주님으로서 믿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마귀 사탄은 교회에 엄청난 미혹의 가라지를 뿌려놓았는데,

    (마귀가 하는 일 중에 현저한 것이 거짓말/미혹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죄를 사해 주시는 구세주로서는 믿게 합니다만,

    예수님을 왕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주권)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교묘히 가려버립니다.

     

    ‘구세주/그리스도로서의 예수’ 그것 하나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모르게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을 구원 못 받고, 지옥에 보내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사도행전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요한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주님께 배우고도.. 구원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눅13;26~27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았을지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다가는... 구원 못 받습니다.

     

    오늘날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전도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왕으로/주님으로, 섬기게/순종하게 됩니다.

    자기 속사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자기 의지적인 순종도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문둥병자 10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1명밖에 없었습니다.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인데 치료는 10명이 다 받았는데, 회개한 사람은 1명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치유사역’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내적치유’는 물론이고, 신유기도를 통한 ‘질병치료’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내적치유든지, 신유치료든지 치유받은 사람은 많은데, 회개하는 사람은 적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관심이 치유에 있지, 회개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치유를 받을지 몰라도,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아서,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치유의 복음도 필요하지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됩시다.

     

     

    ▲여러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할 수 있습니다.  딛1:16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행위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며, 또한 자기 자녀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입술로 시인하기만 해도 구원 받는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입술의 시인이 첫 단추인 셈입니다.

     

    그런데 착각해서

    ‘입술로 시인하기만 해도 구원 받는다’고 믿거나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입술만 가지고는 절대 구원 못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예수를 믿지만, 자녀가 자기의 ‘주님’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구원이 상당히 위태롭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다른 대상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녀를 떠받들어서 ‘주님’처럼 극진히 섬기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해가 됩니다.

    그것은 앞에서 서낭당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무엇이든지, 만약에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잘 되지 못합니다.

    자녀가 만약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다면,

    그 자녀는 서낭당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자기 자녀를 하나님으로 만들어놓으면.. 결코 그 자녀가 잘 되지 못합니다.

    무분별한 자녀사랑 -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자녀 사랑은,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며,

    부모도, 자녀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 중심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결국에 자녀가 잘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중점적으로 관심 기울여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 양육입니까?
    사업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이 정말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주님’ 그 분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라면,
    혹시 그 일에, 현재 엄청난 고난이 따르더라도
    혹시 그 일에, 현재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더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존귀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녀양육/사업/주의 일 등 그 무엇을 하더라도 결국은 꺼풀을 들춰서 보면, 그 본질이 자기 영광/자기 이기심/자기 유익을 위한 일이었다면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말 것입니다. 갈6:8

    죄의 기준은, 어떤 죄악을 범하기 이전에 ‘누가 그의 주인인가?’하는 문제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죄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 솔직히,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것은 물론이요,
    그 일이 아무리 고상한 일이라도, 심지어는 자녀양육/주의 일이라도 우리가 손대는 일은, 다 망하고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이 하나님으로부터, 괜히 우리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를 위한 기독교>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에 매력을 느껴서, 교회로 몰려옵니다.
    자기 힘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성공/부자/출세/치유를 예수의 힘을 빌려서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섬깁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구원 받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로서의 예수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주님의 주되심/로드쉽’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와 이런 방향의 설교와 가르침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행복을 위한 기독교’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주님으로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문제/주제를 가지고 계속 중보기도 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지식적 차원을 넘어서, Lordship(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 마귀는 종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불렀는데, 마 4:6 등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실이다. 약 2:19참조.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입술로 고백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마귀의 교리가 있다.
    교인들이 자기 입술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만 고백하면 .. 구원받는 줄 안다.
    그것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섬겨야 한다.
    Lordship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 사람이 충분한 믿음을 가진 사람, 구원받는 사람이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만, 자기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
    즉,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
    만약에 마귀가 그랬다가는 마귀의 왕 루시퍼에게 굉장히 혼날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구원 못 받는다.
    예수의 주되심/로드쉽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만 알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예수님이 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지 않고, 그 통치에 복종해서 살지 않는 사람은 구원 받기 어렵다고 본다.

     


    (도입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새학기가 되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는 학교 방침에 따라 다음 집을 방문하려면 그 다음 집을 미리 찾아가서 가정 방문을 하도록 계획을 합니다.
    한번은 한 학생이 청파동에 있는 어느 국민 주택 단지에 거주하는 학생의 집을 방문하도록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서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다음 방문할 집을 반드시 알아놓으라고 하였는데 왜 찾지 못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학생이 전에 친구 집에 올 때는 그 앞에 똥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똥차가 없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인지 짐작하시겠지요?
    목표가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똥차는 항상 그 자리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옮겨 다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이유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또는 배고플 때면 반드시 배부르게 먹여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로는 그 가르침이 회당에서 듣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주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다!"

    불교는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를 믿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
    출생은 기원전 560년 경(사캬국 카필라바스투 룸비니 동산 - 현 네팔 룸비니 루판데히구 마야데비사원)
    사망 기원전 480년경(향년 80세)
    아버지 : 슈도다나.  어머니 : 마야부인
    계모 겸 이모 : 마하파자바티
    아내 : 아쇼다라
    아들 : 라훌라

    이슬람교는 교주 마호멧을 믿는다고 합니다.
    마호멧의 영어식 이름은 "마호메트(Mahomet)" 라고 합니다.
    출생 570년, 사망 632년 6월 8일(향년 62세)

    신천지는 교주 이만희 (李萬熙, 1931년 9월 15일 ~)를 믿고 따라갑니다.
    이만희는 경북 청도군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성경은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왜 예수 이름을 믿어야 할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1. 로마서 10:13).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예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Jesus) /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Ἰησοῦς, οῦ , οῦ, οῦν, οῦ, ὁ 스트롱번호 2424

    1. ‘예수’.  2. 여호수아. 3. 예수
    발음 [ Iē- sŏus ]
    어원  /  히브리어 3091에서 유래
    • 1. ‘예수’.
      • a. 여호수아 [모세의 후계자], 행 7:45, 히 4:8.
      • b. 예수[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엘리에셀의 아들], 눅 3:29.
      • c. 예수 그리스도, 마 1:1, 21, 25 등.
      • d. 예수 바라바.
      • e. Ἰ. ὁ λεγόμενος Ἰοῦστος : 유스도라고 불리는 예수, 골 4:11, 몬 1:23.
    • 관련 성경  /  예수(눅 3:29), 여호수아(행 7:45, 히 4:8).

    * 히브리어 3091.  יְהוֹשֻׁעַַ 스트롱번호 3091

    1. 여호와의 구원 : 여러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여호수아’.  2. ‘눈’의 아들로서 모세를 계승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사람
    3. ‘스룹바벨’ 당시의 대제사장
    발음 [ Yehôwshûwaʽ ]
    어원 / 3068과 34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8회 사용
    • 관련 성경 /  여호수아(출 17:9, 24:13, 삼상 6:14, 18, 왕하 23:8, 슥 3:1, 학 1:1, 12).
    * 3068. 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 1961. הָיָה 스트롱번호 1961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hâyâh ]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 3467. יָשַׁע 스트롱번호 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105회 사용


    둘째, 그리스도(Christ) /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 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 1:1
    발음 [ Christŏs ]
    어원 / 5548에서 유래
    • 1.  ‘그리스도’.
      • a.  [칭호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 마 2:4, 눅 3:15.
      • b.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마 1:1, 막 1:1, 요 1:17.
    • 관련 성경 /  그리스도(눅 3:15, 요 1:17).

    * 5548.  χρίω 스트롱번호5548

    1. 기름 붓다.  2. 기름 바르다. 3. 눅 4:18
    발음 [ chriō ]
    관련 성경 /  기름을 붓다(눅 4:18, 고후 1:21, 히 1:9).



    셋째, 임마누엘(Immanuel) /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 - 함께 계시다
    누 - 우리
    엘 - 하나님

    Ἐμμανουήλ, ὁ 스트롱번호 1694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 누엘’.  2. 마 1:23.
    발음 [ Ĕmmanŏuēl ]
    어원  / 히브리어 6005에서 유래
    •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 누엘’, 마 1:23.
    • 관련 성경 /  임마누엘(마 1:23).

    * 히브리어 6005.  עִמָּנוּאֵל 스트롱번호 6005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 메시야의 별명 ‘임마누엘’.  2. 사 7:14.  3. 사 8:8.
    발음 [ ʽImmânûwʼêl ]
    어원 / 5973과 4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메시야의 별명 ‘임마누엘’, 사 7:14, 8:8.
    • 관련 성경 / 마누엘(사 7:14,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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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12일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권세를 사용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자냐가 되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 청각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아들
    듣지 못하는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는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는 믿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는 확신합니까?

    권세(權勢)라는 헬라 단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에쿠시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어느 도로에서 교통경찰이 과속차량 및 위법 차량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교통 경찰은 아주 왜소합니다.
    커다란 트레일라가 경찰이 손으로 들고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면 즉각 가던 길에서 멈춥니다.
    힘으로 비교하면 경찰은 트레일러에게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일러가 멈추는 까닭은 교통경찰에게 부여된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레슬링 선수가 도로에 서서 손을 든다면 트레일러가 멈출까요?
    레슬링 선수가 교통 경찰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몸도 아주 좋지만 레슬링 선수의 손짓은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선포하면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 즉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은 깨끗하여 질지어다!"

    (도입 이야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인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과 금은 넘쳐날지라도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행 창고와 같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은행 창고가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충고를 들어야 한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집중(集中)하는 기도

    1. 한나의 기도(사무엘상 1:10-11. 2:1-10)

    2. 블레셋 진영에 붙잡혀 두 눈이 뽑힌 삼손의 기도
    3. 아브라함의 기도
    4. 다윗의 기도


    집중하는 가장 좋은 기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

    첫째.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둘째.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나의 뜻을 예수님의 뜻에 맞추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것이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셋째.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넷째.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다섯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섯째.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찾아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어로 테레우오(Thereuo)의 의미 탐구

     θηρεύω 스트롱번호 2340

    1. 사냥하다.  2. 잡다. 3. 눅 11:54.
    발음 [ thērĕu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θήρευσα, 2339에서 유래
    • 1. 사냥하다, 잡다, 눅 11:54.
    • 관련 성경 /  잡다(눅 11:54).
    1. 사냥하러 가다, 사냥하다, 사냥하다
    2. 은유. 기다리다,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애쓰다, 능숙하게 붙잡다

    성경의 맥락에서 Thereuo는 그리스어로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스어 “테레우오”(θεραπεύΩ)는 “치유” 또는 “치료”를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육체적 치유, 영적 회복, 예수와 추종자들의 기적적인 행위 등의 맥락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다양한 성경 구절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치유의 문화적 중요성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테레우오의 뿌리

    Thereuo의 전체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 뿌리를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단어는 “봉사하다” 또는 “헌신하다”를 의미하는 “therapeia”(θεραπει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보살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치유가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또한 감정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포함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의사가 행한 치유는 종종 신에 대한 봉사의 한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치유는 신성과 영성의 개념과 복잡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Thereuo가 신약에서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높여줍니다. 신약에서 치유 행위는 종종 신성한 힘의 순간과 일치합니다.

    테레우오의 성서적 맥락

    신약성서에는 테레우오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각 사례는 치유의 독특한 측면을 반영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병자의 치유

    테레오의 두드러진 사용 사례 중 하나는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이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색 질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에게 눌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러므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질병의 범위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테레오는 치유 행위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질병만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영적인 치유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의 개념은 육체적 질병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영적 치유의 맥락에서 테레오는 믿음과 용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5장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치유는 믿음과 용서의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치유에는 몸, 마음, 영 등 사람 전체가 관련된다는 생각이 강화됩니다.

    사도들의 치유 사역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사도행전 3:6은 "베드로가 이르되 내게는 은과 금이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에 따라 치유를 행할 뿐만 아니라 치유가 예수님의 사명의 연속이라고 확언합니다. Thereuo라는 용어는 사도들에게 부여된 이 신성한 권위를 요약하며, 초기 교회에서의 치유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심의 표징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치유의 문화적 중요성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치유는 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신념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종종 질병을 신의 형벌이나 영적 전쟁으로 일축했습니다. 따라서 치료사의 역할은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달래고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Thereuo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 문화적 배경과 공명합니다. 영적 신념에 젖은 세상을 마주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치유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신앙과 사명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의 치유는 그의 정체성과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신학적 의미

    Thereuo의 사용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병을 고쳤을 때 그들은 단순히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치유는 창조의 온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갈망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복음서에서 치유에 대한 일관된 강조는 영적 변화에 대한 은유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병을 고치신 것처럼, 그분은 인류에게 영적인 쇄신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측면에서 깨어진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맥락에서의 치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테레오의 의미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기적적인 치유가 흔하지는 않더라도 치유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표현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반영하면서 기도와 공동체를 통해 정서적, 영적 치유를 추구합니다.

    테루오를 이해하면 정서적 지원, 환자 돌보기, 영적 지도 등 다양한 형태의 치유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유형적 수단이든 영적인 격려를 통해서든 치유하라는 부르심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적절하고 필수적입니다.

    결론 : 치유사역을 받아들이다

    Thereuo의 탐험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경적 맥락에서 치유의 전체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육체적 질병부터 영적 회복까지, 테레우오(Thereuo)는 기독교 신앙에 내재된 연민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치유 사역에 참여하면서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육체적 치유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의 회복을 촉진하도록 격려하는 야고보의 말을 기억합시다. Thereuo는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행동 촉구이며, 우리 지역 사회와 세상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치유 사역에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Q. 테레오를 그리스어로 직역하면 무엇인가요?
    A. 테레오(Thereuo)의 문자 그대로 번역은 “치유하다” 또는 “치료하다”입니다.

    Q. 신약성서에서는 테레오(Thereuo)가 어떻게 사용되나요?
    A. Thereuo는 주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신체적, 영적 치유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Q. 테레오는 육체적인 치유만을 말하는 건가요?
    A. 아닙니다. 테레오는 육체적 치유와 영적 회복을 모두 포함합니다.

    Q.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치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 치유는 신에 대한 봉사로 여겨졌으며, 이는 종종 의학과 영적 신념을 모두 포함했습니다.

    Q.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테루오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예수님의 치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며 자비의 행위를 통해 그분의 왕국이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Q. 신약성서의 테레오와 현대 치유 관행 사이에 유사점이 있습니까?
    A. 그렇습니다. Thereuo는 오늘날 지속적인 치유 요구를 반영하여 환자에 대한 신체적 돌봄과 정서적, 영적 지원을 모두 권장합니다.

    Q. 테레오의 맥락에서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A. 기도는 치유를 불러오는 수단으로 강조되며, 육체적, 영적 안녕을 회복하는 신앙의 힘을 강조합니다.

    Q. 테레오에 따르면 평신도도 치유에 참여할 수 있나요?
    A. 그렇습니다. 치유의 개념은 모든 신자들에게 확장되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지원하도록 격려합니다.

    질문. Thereuo에 대한 이해가 건강과 웰빙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A. Thereuo를 인식하는 것은 몸과 마음,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Q. 신자들은 Thereuo라는 개념에서 어떤 격려를 찾을 수 있습니까?
    A. 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지역 사회 내에서 치유에 기여하는 능력에서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θεραπεύω 스트롱번호 2323

    1. 섬기다.   2. 행 17:25. 3. 돌보다
    발음 [ thĕrapĕuō ]
    어원  /  미완료 ἐθεράπευον, 미완료 수동태 ἐθεραπευόμην, 미래 θεραπ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θεράπευσα, 완료 수동태분사 τεθεραπευ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θεραπεύθην, 2324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섬기다, 종이 되다.
      • a. 섬기다, 행17:25.

      • b. 돌보다, 시중들다,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 마4:24, 8:7,16, 10:8, 막1:34, 눅4:23등.
    관련 성경 / 고치다(마 4:23, 막 1:34, 눅 10:9), 고쳐주다 (마 8:7, 12:22, 눅 14:3), 병 고치다(마 12:10, 눅 13:14), 섬김을 받다(행17:25), 나음을 얻다 (행 5:16), 고침 받다(눅 8:43, 13:14), 병 낫다 (요 5:10, 행 4:14), 낫다(행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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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본문에서 표적이란 헬라 단어는 "세메이온"이라고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다.
    표적이란 헬라 단어를 살표봅시다

    세메이온(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sēmĕiŏn ]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 12:12)



    테라스(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059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tĕras ]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295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thauma ]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표적이란 요어가 주로 요한복음에서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라고 소개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는 왕으로 오신 메시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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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16:31)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도를 위한 여정에서 뜻밖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방중이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감옥에 갇혔던 죄수들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옥문이 열리며 옥에 갇혔던 죄수들은 모두 감옥 밖으로나갔지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감옥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당시 제도는 죄수를 지키다 그 죄수가 도망하면 죄수를 지키던 간수가 대신 처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상황을 파악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은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간수는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간수의 놀라운 결단은 바울과 실라가 옥문이 열렸을 때에 다른 죄수들처럼 감옥 밖으로 도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이 바로 예수를 믿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현실적인 상황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인의 현주소가 분명해야 합니다.


    19~23절 :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 그 종의 주인들이 자기들의 수입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시장거리의 관원들에게 끌어간다.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사람들인 우리가 받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고 하면서 바울과 실라의 전도 행위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 고발한다.
    그러자 흥분된 군중과 관원들은 재판도 열지 않고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친 후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해서 순종하고 왔다. 회당도 없는 곳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겨우 기도처를 찾아가 여자 하나 전도했다. 그리고는 또 하나 점하는 여종의 귀신을 내쫓고는 죽도록 맞고 감옥에 갇힌 꼴이 된 것이다.

     

    24~34절 : 한밤중에 전신의 고통 가운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가 현재의 형편을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이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졌지만 그래도 하나님밖에는 해법이 없다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그들의 눈이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그러자 찬양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온 몸에는 채찍의 상처로 고통스럽고, 차꼬에 매여 꼼짝달싹도 못하는 그 고통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바라볼 소망이 있었고 위로를 경험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자 지진이 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땅이 움직였기 때문에 모든 장치가 틀어져서 더 작동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옥문이 자동으로 열린 것이다.
    또 바울과 실라의 발을 묶고 있었던 차꼬가 풀렸다는 점이다.
    열쇠 아니고는 풀 수 없는 것이 풀어진 것이다.
    그것도 모든 죄수의 것까지 풀린 것이다.
    거기다 모든 죄수들이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간수는 감옥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자결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울과 실라의 외침에 자결하려던 것을 멈춘 간수가 감옥을 살피게 되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0~31절, 새번역)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주인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상을 섬겼고 왕을 퀴리오스로 섬겼고 돈을 섬겼고 점보는 여종의 귀신을 섬겼지만 이제는 주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복음을 들은 간수와 그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는다.

    35~40절 : 치안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려 하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힌다.

    그러자 치안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두려워한다.
    로마 시민을 때린 행동은 범법행위이고 상부에 보고 되면 문책감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데리고 나가서,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청하였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빌립보를 떠나게 된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은 옥터가 흔들리는 지진 속에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린 것이다. 거기다 죄수가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루디아와 여종과 간수 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주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은, 그들 인생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가장 큰 기적은 복음을 듣고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다.
    죄의 종, 마귀에게 얽매여 살아가던 자,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자의 눈을 뜨게 하셔서 생명의 주님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루디아와 여종과 간수로 하여금 진정한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게 하셨듯이 주님께서 내게도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노래하던 자가,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네요’를 고백하며, 억지가 아니라, 그것을 기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
    복음을 듣고 또 들으며, 매일 생명의 교제를 하며 사는 자는 기적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무진장 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것이 찬양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보내셔 놓고, 이렇게 하심이 맞습니까?’ 항변할 법도 한데, 원망은커녕 주님께 맡기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내 주인이 되었으니, 주인이신 그분이 맡아서 해 주실 것을 믿으니 얼마나 홀가분할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고 그것을 절망의 탄식으로 아뢸 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알고 생명의 교제를 하면서 이만큼 살아보니 자녀들에게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공부 잘 하고 똑똑하기를 바란다.
    그 이유를 처음에는 소박하게 말한다. 험한 세상에서 자신의 앞가림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하지만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부모나 자식이나 그 욕구가 점점 강해진다.
    그러나 그것에 매여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이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종말의 이 세상인데, 마치 영원히 이어지는 듯 생각하며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오늘 바울 사도의 음성이 다시 가슴을 뛰게 한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 이것은 내 실력으로는 절대 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기적의 하루를 살아간다.

    * 죄(罪)는 내가 주인되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고 인정하고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아직도 내가 주인으로 앉은 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내 생각, 내 언어, 내 행동, 내 습관, 내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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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도입 이야기)

    어느 여름날 들판에서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저녁이 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일이란게 뭐야?"
    그렇게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개구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라는게 뭐니?"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을리가 없죠.
    또, 메뚜기 역시 한 해에만 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하니까 내년이라는 말을 알 수가 없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또는 경험이 전부라고 믿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영생을 받았습니까?
    영생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 믿는다는 것은 맡기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고 합니다.
    찰스 브론딘이라는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외줄타기를 한다고 광고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젊은 곡예사가 외줄타기를 마친 후에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이번에는 제가 제 등에 사람을 업고 이 외줄을 건너려고 합니다.
    제가 사람을 업고 이 외줄을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성을 지르며 믿는다고 하며 얼른 시도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중에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에게 제 등에 업히시겠습니까? 하고 제안을 합니다.
    그 어르신은 나는 나이가 많아서 겁이 많아요 젊은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젊은이에게 부탁을 하지 나는 내일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 곡예사의 등에 업히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연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고보서에서는 행도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맡기려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던져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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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 - 예수를 믿는 이유(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만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또는 “당신이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 믿는 이유를 성경에 근거해서 “나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믿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서울행 기차를 타고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지식은 몰라도 예수 믿는 이유만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성장한 교회는 서울역 앞에 위치한 남대문교회입니다.
    제가 성장할 때에 담임목사님이셨던 고 배명준목사님께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긴 시간 여정을 위해 옆에
    앉은 승객과 인사를 나누고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 같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혹시 사업하십니까?" 라고 대답하여 마음속으로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어떻게 장사꾼으로 보이는가?

    여러분을 누군가 지켜본 후에 당신은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군요!
    이런 말을 듣는다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멸망 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 가운데 첫 번째는 우리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흑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검은 피부를 갖고 태어나고, 백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흰 피부를 갖고 태어납니다.
    이는 태어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결정됩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동일한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했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하나같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6일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되던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어 아담의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간교한 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함으로 둘 다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식물을 얻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게 되었고,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영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육신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세상에 사망이 임한 것은 아담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사망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범죄하였고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엡 2:1).
    그뿐 아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도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출생할 때부터 그 가슴에 죽음의 씨를 품고 그것을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죽음을 모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병자는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아야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받고 살 수가 있지,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하면 병이 깊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토록 죄에 대하여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지, 자신에게 부처가 있음을 발견하기만 하면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는 사람이 본래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세상 종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늪에 빠진 사람더러 제 힘으로 거기서 나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힘쓰고 애쓸수록 더 사정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우선 자기의 노력을 멈추고 밖에서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죄의 깊은 늪에 빠진 인생들을 구하기 위해 보냄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므로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자선을 베풀어도 그런 것으로 자신의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수양을 한 사람은 수양한 죄인이요, 도를 닦은 사람은 도 닦은 죄인이요,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은 자선을 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중세에는 연금술이 유행했습니다. 연금술이란 철이나 구리나 납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합니다. 값싼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처럼 매력적이고 수지맞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연금술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진주가 될 수 없고, 유리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어디까지나 유리일 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듯이, 죄인은 아무리 자신을 꾸밀지라도 죄인이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훌륭한 성현들이 적지 않게 출현하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다 사망에게 삼킨 바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죽었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도 죽었습니다. 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죽었습니다. 석가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들이 지금도 세계의 여러 유명 사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으며 매년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냅니다. 마호메트의 무덤은 아라비아의 메디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참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사망에게 삼킨바 되고서야 어찌 남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예수님과 같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죽어 사람들이 메고 무덤으로 가던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청산하셨음을 입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으며,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은 곧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냐, 아니냐?”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메시야 대망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뱀은 계시록 20장 2절에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하신 대로 사탄 또는 마귀를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와 상관없는 무죄하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속하실 메시야는 죄가 없는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고 했는데, 이새는 곧 다윗 왕의 부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호칭할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메시야께서 행하실 기적에 대한 예언입니다.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기적은 아무나 행할 수 없고 오직 메시야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일컬어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곧 메시야이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의 표적은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기적을 셀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께서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마음이 병든 자들, 마귀에게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동리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신 후에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으며, 죄와 인습에 매인 자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멸시 받던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죄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면서 천국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장벽이 가로막혀서 감히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야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경은 구약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보지 못했으나 멀리서 바라보며 기뻐했다고 증거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비교해 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의심 없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성도들에 비하여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시,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혹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이유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은 성경을 더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비기독교인 가운데도 성경을 애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훌륭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찾아냅니다. 또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문학적인 표현에 감탄합니다. 또는 히브리 민족과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영생의 진리에 관해서는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왜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과 같이 믿는 친구가 좋아서 교회에 따라 나오기도 합니다. 또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축복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존경한 나머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은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점점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영생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장차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계시록 20장 11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각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에 서서 두 가지 책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를 기록한 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고 이름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습니다.
    행위록은 생전에 우리 각자의 행실을 기록한 것인데 그 책에 기록한 대로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생전에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을 행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으면 불못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조건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영생과 영벌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 사실처럼 위대하고 복 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주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이유’에 대하여 누구 앞에서나 분명하게 대답하실 수 있게 되셨을 것입니다.
    주 예수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믿는 이유를  증거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어떤 모습일까?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중요한 목적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의 예수

    마태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마가복음의 예수

    마가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을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누가복음의 예수

    누가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을 인자복음 즉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요한복음의 예수

    요한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래퍼 비와이가 최근 한 시상식에서 성경 말씀을 나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복음의 장엄한 시작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비와이가 믿는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나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사순절을 맞아 복음서의 예수를 만나보자. 사복음서의 이해를 넓혀줄 새 책들을 소개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예수의 생애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명한다. 요한복음 1장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란 구절을 읽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야곱이 벧엘에서 꿈꾸는 장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창 28:12)란 말씀이 연상된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야곱의 사다리 이미지가 떠오르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 이스라엘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원천인 예수를 언급한다. 예수는 새로운 야곱이다. ‘요한복음의 예수’에선 이렇게 구약의 이야기와 연결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찾고 이를 과거 이스라엘 이야기에 비춰 해석하게끔 이끌어간다.

    저자의 해석으로 보면 요한복음은 둘로 나뉜다. ‘표적의 책’이라 불리는 전반부와 ‘수난의 책’ ‘영광의 책’으로 불리는 후반부다. 전반부에서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빠르게 전하다 13장인 후반부부턴 수난과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에 집중한다. 90쪽 분량의 소책자를 덮고 나면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마음이 든다.

    복음서와 만나다는 사복음서의 특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부제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가 암시하듯 이 책은 복음서의 저자 네 명이 그린 네 개의 예수 초상화를 해석하고 있다.
    고전학자인 저자 리처드 A 버릿지는 복음서를 고대 전기문학으로, 저자를 문예가로 이해한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는 각각 포효하는 사자, 이스라엘의 선생, 짐을 지고 가는 힘센 소, 높이 나는 독수리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는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 전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의 여러 초상화를 예로 든다.
    각각 다른 상황의 처칠을 그리고 있지만 모두 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마가가 그린 예수는 ‘다이너마이트처럼 강한 폭발력을 지니고 활동하는 인물’이다(93쪽).
    권력자들과의 갈등이 자주 나온다.
    마태가 그린 예수는 ‘인간의 얼굴을 한 하나님’(177쪽)이다. 이 모두가 예수다.

    버릿지는 적절한 비유와 활기찬 문체로 사복음서의 차이를 설명한다.
    예수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지한 신앙인과 신학 연구자에게 모두 매력적인 책이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는 지난해 국내에 소개돼 주목 받았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의 저자인 케네스 E 베일리의 대표작이다. 원제는 ‘시인과 농부’(Poet & Peasant)이고 부제는‘누가복음 비유의 문학적·문화적 접근’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농부의 입장에서 누가복음에 나온 예수의 네 가지 비유를 설명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탕자의 비유, 잃은 양 비유 등을 예수가 살았던 중동의 농경문화 속에서 문학적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비유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요한복음은 대표적 큐티집 ‘매일성경’ 편집장을 지낸 박대영 목사의 요한복음 6∼12장 강해서다. 박 목사는 “요한복음은 지금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오늘 누리고 있는 영생을 미래에 완성될 종말보다 더 강조해 ‘실현된 종말론’의 성경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의미와 적용점을 각 장별로 안내하고 있다. 영원의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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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2:21.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And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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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는 믿음의 주(히브리서 12:1-8)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분통이 터져도 참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애써 웃으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하는 상황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버텨야 할 순간순간이 자주 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과 핍박을 받고 죽어야만 했다.

    ​예수님을 믿는 나는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느 수준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예수님 때문에 내 자존심, 내 생계, 내 스펙, 내 즐거움, 내 가족, 내 생명 등 모두 빼앗길지라도 그래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히브리서는 초지일관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 어떤 타협도, 그 어떤 협상도, 그 어떤 물러섬도 없이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시다'라고 선포한다.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기쁨이 있는가?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감격이 있는가?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소망이 있는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우리가 가진 처음 확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확신 위에 서 있기를 원한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보게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 것처럼 보게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고, 이 믿음으로 죽었다.
    현재 내 상황이 죽을 거 같고, 너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앞이 캄캄해서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믿음으로 진리를 바라보자.
    그리스도인은 사실과 상황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믿고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수도 없이 넘어지고, 수도 없이 흔들리고, 수도 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저 멀리서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형제자매들, 식구들이 우리를 열렬히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끝까지 달리기 위해선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무엇이 나를 무겁게 하며, 무엇이 나를 얽매이게 하는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끊어내야 한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께 집중하고 싶어도 머리를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내가 예수님께 마음을 쏟고 싶어도 가슴을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내가 예수님께 의지적으로 달려가고 싶어도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이런 짐은 그때그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체크하여 우리의 영혼을 가볍게 해야 한다.

    ​이런 무거운 짐이 계속 쌓이는 이유는 얽매이게 하는 죄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죄다.
    내 생각의 주인, 내 감정의 주인, 내 의지의 주인, 내 생계의 주인, 내 관계의 주인, 내 건강의 주인, 내 선택의 주인, 내 음식의 주인, 내 의복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주인이 되어서 끊임없이 내가 나서게 되는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무거워지게 되고 자유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자유함이 없게 하고, 눌리게 하고, 틀에 갇히게 하고, 매이게 하는 모든 것을 전부 끊어버리고 우리가 가야 하는 이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완주해야 한다.
    이렇게 가볍게 해야 지치지 않고, 인내하며 달릴 수 있다.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뛰지도 못하고 매번 주저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믿음의 시작이 되시며, 믿음을 완성하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것이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을 보고 지금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지금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서 달려오셨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참고 끝까지 완주하셨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우리를 보시면서 마치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기뻐하셨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을 기뻐하셨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고, 십자가를 참으셨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완주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분명한 목적지를 바라보고 뛰어야 한다.
    '죄인의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주인이시며, 믿음을 완전하게 하실 예수님도 이 길을 쉽게 가시지 않으셨다.
    수많은 공격들, 수많은 아픔들, 수많은 배신과 조롱, 수많은 배고픔과 헐벗음, 수많은 시험들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래야 그분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래야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다.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
    죄와의 싸움은 피 흘리기까지의 싸움이다.
    팔 다리가 잘려나가도, 머리가 잘려나가도 결코 항복해서는 안 된다.
    때론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패배와 항복은 다르다.
    패배했을지라도, 다시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항복은 영원한 죄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와 끊임없는 싸움이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내 감정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지 않고, 내 의지를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 모든 것, 내 모든 영역, 내 모든 시간, 내 모든 물질, 내 모든 호흡이 전부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어야 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이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자!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5.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7.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날보다, 패배하는 날이 훨씬 더 많다.
    예수님을 보면서 물 위를 걷다가 주변의 파도와 바람을 보면서 두려워하여 물에 빠진 베드로처럼 우리의 믿음이 굉장히 좋은 거 같으면서도 상황과 현실 앞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내 믿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것저것 다 잘 하고, 최선을 다해 잘 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믿음이 좋은 것인가?
    아니다.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믿음까지 주님께 드린 사람이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이 붙들어 주셔야만 끝까지 붙어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다.

    ​가장 온전한 믿음이란 믿음으로 담대하게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한 믿음을 주님이 붙잡아 일으켜 인도함을 받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다.
    물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내 믿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앞에 있는 예수님만 보면서 처음에는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베드로라고 해도, 그의 시선이 바다로 향하는 그 순간 꼬꾸라지는 것이다.

    ​진짜 믿음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징계하신다.
    '왜 의심하느냐?' 하시면서 꾸짖기도 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신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나의 믿음조차 주님께 있구나, 예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님 저를 꽉 붙잡아 주세요!'라고 고백하게 된다.

    ​고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없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파도가 불어왔고, 앞으로도 더 거센 미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
    마치 물 위를 걸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길이 될 수 없는 곳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대단한 사람은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걸어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센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럴 때마다 붙잡아 주시는 우리 예수님이 계시다.
    이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놓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시고, 우리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신다.
    정말 믿음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인데, 이런 나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붙잡고 인도하신 것처럼 거기까지, 하나님 나라까지, 예수님의 품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나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나의 믿음을 완성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은 우리를 믿고 계신다.
    '나의 자녀가 이 시험은 뛰어넘을 수 있을 거야, 나의 자녀가 이 죄는 이길 수 있을 거야.'라고 믿고 응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나 넘어진다면 다시 일으켜주시며, 뛰어넘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훈련시키실 것이고 응원해 주실 것이다.
    나의 믿음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믿음을 완성하실 것이다.
    내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나를 책임지고 붙들어 주실 것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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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물인가?

    (행 16:31, 엡 2:8-9, 롬 10:17)

    과연 믿음은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물인가?

    오늘도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산다고 할 때, 내가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주셔서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즉, 내가 믿기로 한 것인가? 아니면 믿어지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고 답한다.

    믿음은 내가 믿기로 결정해서 시작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을 받아서 그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자라는 것이다.

    (1) 믿음은 인간의 결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성경구절(요 3:16)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 자마다] 이 말은, 내가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내가 믿지 않기로 결정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분명히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내가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도 주 예수를 믿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을 거부한 채, 믿지 않기로 선택하고 결정하면

    예수 없는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원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정] 이다.

    내 인생의, 그 어느 한 순간에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모멘트(순간)의 사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믿어지는 때를 기다리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수 있다.

    (2) 동시에 믿음은 [선물] 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성경구절은 (엡 2:8-9)이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믿음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약 2:1)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여기서도 믿음을 받았다고 한다.

    (살후 3:2) 믿음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다 믿더라.

    이 말씀들에서 믿음은 인간 의지의 작용으로 선택하여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야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믿음을 주셔야 믿음을 갖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봅시다.

    (롬 10:17)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 안에는 믿음의 양면성이 다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러니까 우리가 듣지 않기로 결정하고 귀를 막아 버리면, 믿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러버려도 믿음은 생성되지 않는다.

    믿음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믿음들음에서 나며...]

    여기서 들음이라는 말 대신에 [깨달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믿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 난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아예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결코 생겨나지 안는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신념도 그 자체로서는 대단한 위력이 있다. 그렇지만, 믿음과 신념은 다르다.

    그러나, 믿음을 정신력의 산물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산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 말씀깨달아질 때 내 마음 안에서 성령이 역사해서

    생성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외면하고, 듣지도 않기로 결심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리지도 않고,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다.

    의지력을 굳게 하고, 정신력을 굳게 한다고 믿음이 굳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생성하게 되는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니,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의 전반부는 믿음은 결정라는 말이고,

    후반부는 믿음은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믿기로 결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열어야 그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깨달아지는 말씀 때문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Cf) 아무 것도 안 들었는데, 저절로 [믿음]이 내 속에서 툭하고 생겨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전체를 대표하는 성경구절은 (롬 1:17)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From Faith to Faith : 믿음에서 믿음으로...

    처음도 믿음, 중간도 믿음, 나중도 믿음이다

    원문에 가까운 다른 번역 :

    Through Faith for Faith : 믿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것은 통로로서의 믿음에서 실체로서의 믿음이다.

    즉, 믿음은 내가 믿기고 결정할 때, 그 때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의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로서, 믿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화) 빌리 그래함 목사님 (지난 한 세기 동안 최대의 복음 전도자)

    1928년 출생하여 ∼ 2018년 2월에 소천하심. 꼭 100년의 생을 사셨다.

    그도 처음부터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간 것은 아니다.

    그도 청년 시절에 믿음의 회의와 의심이 있었다.

    그가 가까이 교제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불가지론자들, 회의론자들이 있어서,

    그들과 대화하다보면 믿음이 흔들거림을 느끼고

    신앙의 회의와 갈등을 느끼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 청년 빌리 그래함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내가 언제까지 믿음과 의심의 사이에서 방황할 것인가?]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이 성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믿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때부터 확고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해서 그 믿음 가지고 온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지난 세기에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은 믿기로 결정하는

    믿음의 출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Cf) 언제까지나 100% 다 알아보고 믿음을 결정하겠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믿기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어느 한 순간, 믿음의 결정을 내리는 모메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화) 두 개의 책을 소개한다. (저자 : 멀링 게도로스) :

    1) prison to praise (감옥 생활에서 찬송 생활로)

    2) Power to praise (찬송 생활의 권능)

    군목 출신으로 자기 간증을 수록한 책. : 군목으로 수 많은 군인 가족들의 애환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으로 찬송생활을 하게 되었는가를 기록한 간증책이다.

    그런데 이 두 책의 주제는 같은 것이다. (살전 5:18)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 인생에는 좋은 일도 오지만, 슬픈 일, 괴로운 일, 고통스러운 일, 비참한 일들이 생길 때,

    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감사>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

    (롬 8:28)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이 책들의 주제이다.

    인간적으로는 감사할 수 없다.

    불평과 원망과 짜증이 나타나고, 세상을 저주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찌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나는 무조건 <감사하며 살리라>하며 결정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를 기록한 두 개의 책이다.

    이 두 책을 [강추] 강하게 추천합니다.

    우리는 사실 내 인생을 다 알지 못한다.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믿기로 결정하면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내 주시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감사>와 <찬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과 의심의 그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게 된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양단간에 결정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흉흉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와서 때때로 불안하고 두려움을 갖는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어려움이나, 재난이 닥쳐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삶을 결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임한다.

    (시 112:7)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마음의 확정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내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한다. 그러면 평안하게 살 수 있다.

    (사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로 결정하면 평안을 누린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 생기면 근심은 사라진다.

    (사 7:8)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믿음도 인생도 견고히 설 수 있다. (아멘)

    (예화)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난해한 말씀]을 하시니 군중들이 다 떠나갔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요 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믿고 알았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믿어야 알게 된다.

    내가 다 알고 깨달은 다음에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죽을 때까지 아무리 노력하고 탐구하고 도를 닦아도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더욱이 신령한 세계의 비밀은 타락한 죄인은 도저히 알 길 없다.

    그러니, 다 알아보고 믿겠다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단, 믿기로 결정이 내릴 때, 시작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계속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더 깨달아지고, 이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믿음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선물이기 때문에 구해야 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을 구하지 아니함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하여야 한다.

    또한 나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그러므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예화) 눅 17장 :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이 때 주님께서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다.

    (눅 17:5-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비유의 말씀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한 요청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이해가 잘 안 된다. 거기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믿음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자기의 공로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오다가도 사라진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자신의 실력, 능력으로 살아가는 교만한 자에게는

    믿음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려놓고, 다만,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고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이 주어진다는 주님의 답변이다.

    믿음은 [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아직도 믿음의 결정을 미루고 계신 분이 있다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또한 내 주변의 신실한 신앙인들을 볼 때,

    전부는 다 모르겠지만, 영적인 진리있는 것 같다.

    정말, 진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라도 들어오면 믿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참 믿음의 실체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선물로 받은 겨자씨 같은 적은 믿음이지만,

    계속적으로 믿음 생활하는 가운데 예배말씀기도성도의 교제

    성경공부봉사 생활을 통하여 점점 믿음도 성장하여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내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고, 삶의 보람도 생기고,

    인생의 목적의미가 분명해 지고, 기도 응답도 체험하게 되고,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기로 결심 해 버리고 믿음의 결정을 계속 미루다보면

    언제까지나 의심불신앙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다가

    죽음 앞에서 믿음 없이 세상을 떠나 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

    죽을 때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의인믿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 믿음의 결정을 내려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여서 [오직 의인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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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이유

    디 제임스 케네디의 ‘내가 믿는 이유’를 읽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믿는지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들이 나옵니다.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 보라면 망설이는 분들도 있지요.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게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거기에는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사역을 믿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서 죄 용서의 확신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신경의 깊은 믿음의 고백을 구절마다 풀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요체는 이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찰해 봅니다. 한자로 믿음은 (信)이지요. 이 글자를 잘 살펴보면 사람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진실한 본보기가 되고 사람의 대표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람’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믿지 않으시거나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은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님이 실제로 이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삶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통 인간은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자는 없습니다. 선각자나 현인들도 진리에 근거한 완벽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완벽한 삶을 살아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더욱 빛이 나고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고 따를 수 있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씀을 믿습니다. 단 한 번의 오류도 수정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서 지금까지 선포된 이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폐지된 것 하나 없습니다. 인간은 말하고도 수시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바꾸고 폐하기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하지요. 그러므로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무한이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상황이나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형편에 따라 관점이 계속 변한다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진리는 우리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는 가치로 남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디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께서 쓰신 ‘내가 믿는 이유(Why we believe)’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13 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절대적 진리를 믿는 이유를 통해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경

    먼저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쉰이 다 될 무렵 성경을 읽게 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제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가.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서 묻어나는 진리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면서 저를 깨우고 감동하게 하고 눈물 나게 하는 이 책을 왜 이제야 읽는가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찾아, 인생의 가치를 찾아 47년을 살았는데 성경을 접하고 보니 그 안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목사님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2,000여 가지 구약의 예언 중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세상의 많은 선지자들이라 칭하는 자들의 예언은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쏟아낸 말들이 폐하여지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성경의 예언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벨론(Babillon)을 위시하여 에굽(Egypt), 두로(Tyre), 시돈(Sidon), 사마리아(Samaria), 예루살렘(Jerusalem), 에돔(Edom) 등 수 많은 도시나 국가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인간이 허구로 만들어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상기한 어떤 것 내지는 성경의 어떤 예언도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성경은 저작이 아니라 기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학자 토리(R. A. Torrey)박사의 말처럼 ‘수많은 성읍들, 장소들, 왕들과 개인들의 이름 등 과다하게 보이는 성경의 세목들은 종이에 비치는 무늬와 같아서 그 저작 시기와 장소를 알려 주는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관심의 부재 또는 가슴의 저항으로 인해 성경을 밀어내지 말고 단 한 가지의 예언이라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면 불신의 어둠에서 믿음의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고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구글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고고학적 증거

    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게 성경의 예언과 일치하고 신화처럼 들리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성경의 사건들이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하나하나 실존한 역사로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고고학적인 발굴과정을 통해서 크리스천으로 전향하였듯이 무신론자로서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겠다던 옥스퍼드 대학의 박사 학위를 지닌 윌리엄 람지 경도 고고학적 발굴과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답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고고학자 넬슨 글루엑은 “고고학의 발견이 성경에 언급된 내용을 부정한 경우는 한 건도 없음을 단언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토판은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확중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아담의 10대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 토판은 홍수 이전에 살았던 바벨론의 열(10) 왕들의 이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또 다른 토판은 바벨론의 모든 왕들의 이름을 망라하고 있는데, 처음 10명의 왕들이름을 열거하고 나서 "대 홍수가 임하여…”라는 말을 잇고 있습니다. 이런 토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삽은 성경을 확증해 주는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관계된 장소들만 해도 2만 5천이 넘는 곳에서 발굴을 하였습니다. 수만 명의 인물과 사건에 관한 기록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점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전에 했던 그러한 증거들과 마찬가지로 비평가들이 재구성해 놓은 성경을 뒷받침해 주기보다는 분명하고도 일관성 있게 우리의 본래 성경을 액면 그대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올브라잇 박사는 “고고학이 구약성경 전통의 실제적인 역사성을 확증해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존재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논리적 변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심을 증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여기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계시지 않으신다면 인간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지력으로는 만물의 존재 근거 내지는 근원을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하고 있고 이를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학이 논리적 근거로 증명할 수 있는 분야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을 연구하는 양자 물리학자들의 90%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근원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원자 내부의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 등 의 소립자 차원에서 서로 간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강한 충돌이 있다는 사실과 우주 전체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우주의 수 많은 법칙과 질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구만 놓고 보더라도 크기, 태양과의 거리, 자전하는 축, 달과의 관계, 대기권, 질소의 순환, 오존층, 물 심지어 먼지까지 그 오묘한 비밀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불필요할 것 같은 먼지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지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며, 17마일을 하늘로 올라가면 먼지가 없고 검은 하늘이 존재할 뿐입니다. 먼지는 비를 내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인데 한 방울의 비는 8백만 개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둘러싸고 있고 먼지가 없다면 지구상의 생물은 다 메말라 존재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를 두고 보아도 그 신비로움은 형언하기가 힘들죠. 아울러 형체가 없지만 누구나 그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을 생각해 보시지요. 인간의 두뇌는 겨우 1,500 그램 밖에 되지 않지만 500톤의 전자장비와 전기장비가 해낼 수 있는 일을 감당합니다. 또 그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단위가 되는 약 150억 개의 신경 세포들(neurons)이 우리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묘기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4. 창조

    지금보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저도 성경을 읽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진화론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진화의 과정을 설명할 화석의 존재가 전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이 정도는 쉽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일부의 추종자들-헉슬리, 스펜서- 같은 이들은 왜 자신이 증명도 할 수 없는 진화론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을까요. 그들은 서로 주고 받은 수많은 편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초자연에 대한 편견 때문에 진화론을 교리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것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학자도 밝혀낼 수 없는 이 우주 만물의 경이로움은 절대자의 창조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겠지요. 단백질 분자 하나가 우연히 생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의 262승 년이 걸린다는 확률은 다시금 가장 작은 단세포 생명체인 마이크로플라즘 호미니스 에이치 39(microplasm hominis H 39)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10의 119,841승 년이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진화론의 어이없음을 확고히 합니다.

    300억 광년의 넓이를 지닌 끝없는 우주가 대폭발설(Big Bang Theory)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은 최근에 그가 다시 언급하는 대폭발 이전의 상태에 관한 학설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명석한 두뇌를 따라갈 수가 없지만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이던 우주가 거듭되는 대폭발에 의해 생성되어지고 팽창되어진다면 그 혼란의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주는 행성끼리 서로 충돌하고 폭발하면서 질서는 커녕 대혼란(Kaos)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5 & 6. 천국과 지옥

    복음을 전하려고 대화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필자 역시 불신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듯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아무런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얻게 된 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제는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첫째, 성경에서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성경 전체를 통해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의미함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없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이거나 논리적 오류를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문명세계를 접해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게 문명의 존재를 얘기하면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를 뿐이지 그 세계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혹자가 호주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있다’라고 함으로 두 사람은 같이 호주에 갔습니다. 운이 좋게도 ‘있다’라고 주장한 자는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아몬드를 길에서 줍게 됩니다. ‘없다’를 주장하던 자는 그것은 ‘우연이다’라며 다이아몬드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없다’를 증명하고자 호주 대륙을 다 돌아보고 나서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를 주장하는 자는 이를 수용할 수 없으니 땅을 파보라고 합니다. ‘없다’라는 자는 전력을 다해 호주 땅을 1미터 깊이로 다 파 보고는 ‘없다’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라는 자는 그것이 몇 미터 깊이에 나올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결국 ‘없다’를 주장하는 자는 자신의 논거를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셋째, 임사체험을 한 분들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은 다시 한 번 확증을 줍니다. 상상 외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 임한 체험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증언이 존재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분으로 18세기에 뉴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스웨덴의 과학자 스베덴 보리의 27년간 이어진 임사 체험은 너무도 다양하고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내세의 세계를 환히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 박사는 직접 자신의 임사 체험 이후 미국 전역의 유사 체험 사례를 연구하여 죽음 이후에는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자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방법들, 독서, 논리적 유추, 타인의 증언 등을 통해 현상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독단적 무지에 머물다가 사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는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 땅의 삶처럼 잠시 있다가 떠날 곳이 아니라 영원히 지내야 할 곳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영원한 삶을 지낼 것인가는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7. 절대도덕

    케네디 목사님의 저서에는 절대 도덕의 존재를 믿음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저는 현 시대의 문제점을 다원주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너무나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다름으로 인정하여 충돌을 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진리인지 깊은 성찰이 없다 보니 지력이 현저히 떨어져 사고의 중심 즉, 가치관이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헨리 박사의 말대로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당위 개념이 사라져 버린 세대를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절대적 가치는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비판할 능력도 없이 맹종하거나 도무지 가치를 두기가 민망할 우상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붙잡고 마는 것이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지존의 가치관이 없다보니 절대도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저잣거리의 노인 보듯이 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보듯이 합니다. 심지어 종교계의 큰 어른격에 있는 분이 ‘절대선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진리를 흔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분의 말 한 마디에 수 억 명의 인류는 정신을 잃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쉽게 치부해 버립니다.

    절대도덕이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진리이십니다. ‘진리’라 함은 ‘참된 이치’인데 ‘참되다’는 것은 상황 논리에 불변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 불변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옳으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음은 성경의 기록이 너무도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해 보고자 숱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에는 항상 반대 견해와 오류가 있어 왔고 불완전하였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고뇌에서 추론된 논리나 사상도 창조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1,700 동안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주심으로 완벽함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8. 그리스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증거들에 기초를 둔 유일한 종교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맹목적인 신앙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증거에 의해서 확립된 사실들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절대적이어서 우리를 압도합니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를 불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뿐만 아니라 수 많은 역사서에서 예수님의 기록은 너무도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아울러 나폴레옹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깜짝 놀라게 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라고” 하면서 “그는 인간이 아니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도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영생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지요. 바이런 경도 “만일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거나 하나님과 동일한 인간이 있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무주의자였던 톨스토이도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나서 나의 모든 삶은 갑자기 변화되었다... 죽음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괴테도 “나는 네 복음서들 모두를 철저히 참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숭고한 영광의 빛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결정한 본디오 빌라도마저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에게 드리며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나의 구주로 바라볼 때였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하여 이마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8). 나는 거기 십자가 위에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을 뵈었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 자식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를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대신당하셨습니다.. 나는 앉았던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삶에 모셔 들였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감동하셔서 마음을 열고 그에게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구원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또한 믿게 되었습니다.

    9.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십자가마저도 단순히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처형당하신 사실로 치부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힘있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어떤 성인도 부활을 경험한 자는 없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사실을 뒤집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공격을 했으나 이 실제적 사건을 뒤엎은 사람은 없습니다. 루 월러스(Lew Wallace)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하는 책을 쓰기 위해 착수하는 책을 쓰는 일에 착수하였다가 결국은 인정하는 유명한 책으로 마쳤습니다. 그 책이 바로 벤 허(Ben Hur)입니다. 하버드대의 저명한 법학교수였던 싸이먼 그린리프는 부활을 법정적 증거의 채택 방법에 의해 집중 심리한 결과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 증거를 정직하게 검토하면 이것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앞두고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그를 부정했던 제자 베드로와 뿔뿔이 자신의 삶을 찾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목숨을 바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망하여 갈 길을 몰라 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복음을 전한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신분이 낮고 교육 수준도 낮아서 무슨 야심을 품거나 미룰 수도 없는 초라한 지위에 살면서 어떠한 목표를 두고 그들의 삶을 고난과 죽음으로 맞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이외에도 예수님을 보고 만난 사람들이 수 백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현재의 토요일 다음 첫째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기념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므로 지금의 달력이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던 유월절을 버리고 부활절을 지키게 된 이유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빈 무덤과 남겨진 수의, 최후의 만찬, 당시의 벽화나 조각, 찬송가 등에서 이 사건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10. 기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 아버지의 부속물 취급을 당하던 아이들이 인격적 대우를 받게 되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여성이 인권을 가지게 되고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곳에서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혹은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의해 계급과 성별로 말미암아 차별을 받는 곳이 너무도 당연시되며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로마의 끔찍한 검투사 경기가 막을 내리게 된 것도 텔레마쿠스(Telemachus)라는 크리스천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경기를 막음으로 인하였습니다. YMCA를 통한 빈민가의 구제, 선교사들이 자신의 삶을 내어 놓고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의 암울한 인간들에게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시키고 병원을 지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옛 시대의 나라는 왕이나 다스리는 자들이 최고였고, 백성은 종속물에 불과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무신론에 입각하여 유물주의로 국민을 몰아감으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고유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의 자녀가 된 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 뛰는 일이 아닐까요.

    11. 중생 (重生)

    예수님을 참으로 믿게 되면 인간은 거듭난다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의 교리를 신학적으로는 중생론(重生論, 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성경전체의 메시지는 창조(혹은 초생(初生)generation), 타락(degeneration), 중생(重生, regeneration), 세 낱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중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만져서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땅의 문 앞에서 우리의 옛 삶은 낡은 옷처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감정, 새로운 삶, 새로운 힘, 새로운 목적, 새로운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2. 성령

    성경은 성령이 인격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성령은 누구이신가를 말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무엇을 하시는가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를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놀라운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하시는 일들의 목록은 너무 길어서 다 열거할 수가 없으나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록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리라”(누가복음 1:35)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임하시고, 그를 인도하시고, 그에게 권능으로 함께 해주신 분이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또한 오순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죄로 죽어 있던 그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크리스찬 안에 거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특히 이러한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가 성령을 믿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을 ‘보증’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죄와 자기 의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성령이 충만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우리의곧은 목을 숙여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의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요 또한 희락의 영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오시리라고 선언하셨고, 기독교의 역사관 전체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성경이 재림에 앞서 나타나리라고 선언한 징조들-엄청나게 빈번해진 지진들, 지식의 폭발적 증가, 도덕의 부재, 절망의 확산, 방종한 성행위-로 인함입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세계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유일한 존재로 남을 것은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갈등이며 나머지 모든 주제들은 그것에 종속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 주어진 삶의 가치를 위하여,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많은 현상과 주제의 근간을 알기 위하여 꼭 성경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글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책 내용의 핵심을 전하고자 하였고, 이해를 돕고자 필자의 개인적인 공부에 의거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믿는 이유’의 원고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인 자료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심의 부재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고자 하는 도덕적 결단을 내릴 의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위대함은 면밀히 살펴볼수록 감소될 것이나, 그리스도의 인격은 우리가 깊이 알수록 더욱 순결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책에 쓰인 논증에 수긍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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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마가복음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마태복음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many who are last will be first.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영접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사업이 번창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삶이 기쁨이신 분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지옥 같은 삶이 천국 같은 변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수 없이 좋은 일들이 우리 삶에 가득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를 믿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모두 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축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면서 사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어 건강이 나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업이 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가족 관계가 불편해진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더 가난해 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인간 관계가 힘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주님이 이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잠시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 (막 10:29-30)’  

    예수를 믿어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지금 당장은 불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채워주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 불편하게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백 배나 더, 충분히,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주님의 채워주심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베이비 박스’ 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한국 서울에 있는 ‘주사랑공동체 교회’에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며, 간난 아이를 넣어두고 가는 장소가  ‘베이비 박스’입니다. 가난 때문에, 환경 때문에, 장애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한 곳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 받았던 아이들이 들어 오는 곳입니다.  어찌보면 저주의 장소이고, 버림받았음을 상징하는 장소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베이스 박스를 통해 맡겨지는 아이들을 위한 목사님의 기도가 인상 깊습니다. ‘하나님 이곳이 이들에게 축복의 장소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관련된 영상을 함께 보겠습니다.

    ‘베이비 박스’는 이 종락 목사를 통해 시작된 일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불편한 삶을 살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분들이 이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감동했고, 함께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베이비 박스를 보면서, 주님의 채워주심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도 주님이 큰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그에게 큰 사랑으로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이비 박스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는 천국가는 특권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잠시 건강을 잃어도, 잠시 불편해도, 잠시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건강한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자로 편하게 사는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빌게이트는 예수 안 믿어도 세계 제일의 부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함으로 천국도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구절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마가복음 10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된자는 부자 청년이고, 나중 된 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던 부자 청년은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고 떠났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누렸지만, 주를 위해 적은 것을 희생하지 못했습니다. 영생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 땅의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희생했습니다. 나중되었지만 먼저 된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9장 30절은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되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주님이비유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천국의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비유의 내용은 포도원 주인이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내용입니다.
    아침 6시에 일군을 고용하고, 100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오전9시에 일력 시장에 나가 봤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고용합니다. 오후12시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도 고용했습니다. 오후 3시에도, 심지어는 오후 5시에도 일군을 고용했습니다.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일을 마친 일군들이 품삯을 받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주인은 100불을 줍니다. 한 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횡재를 한 것입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도 100불을 줍니다. 이 사람도 횡재를 한 것이지요.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전 6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온 자입니다. 그들에게 기대가 생겼습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받게 될까?’ ‘한 시간 일한 사람이 100불이면, 12시간 일한 나는?’ 이들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에게도 100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왔는데, 나중 온 사람과 똑같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겨우 이것 밖에 안 주나요? 이것 불공평한 것 아니예요?”라고 말입니다. 주인이 산수 실력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편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3-15)’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품삯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누구든지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일군은 능력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일군은 외모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일군은 학력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 그리고 초청된 모든 사람에게는 얼마나 일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같은 삯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공평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공평한 것입니다.

    누가 가장 기뻤을까요? 일을 조금했는데, 많이 받은 사람일 겁니다.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일당을 받은 사람입니다. 황송하지요. 포도원 주인에게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일군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일이 없는데, 에수만 믿으면 구원의 열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중 된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신다면, 내 인생 실컷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일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를 보시면, 일군이 포도원 주인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군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가 응답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늦게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그 초대의 시간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불러 주실 때, 나이가 들었든지 나이가 어리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영생입니다. 이것을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나중 된 자처럼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먼저 된자가 자신의 의를 내 세우다가 주님에게 혼을 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먼저 불러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된 자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나중 된 자들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중된 자들은 누군가의 선택을 한 동안 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고, 감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사람이 구원 받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먼저 되었든, 나중 되었든,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이 이 교회에, 우리의 삶 속에도 적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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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 - 역사적 증거와 기록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저서 <나는 왜 믿는가, 생명의 말씀사> 145쪽에 있는 글입니다.

    ​역사적 증거와 기록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를 믿는가? 어떠한 감정, 어떠한 특별한 성향, 머리로는 진리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는 믿으려는 갈망 때문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실질적인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역사적인 증거를 토대로 삼는 종교이다. 성경은 우리를 맹목적인 신앙으로 초청하지 않으며, 항상 증거에 의해 확립된 것들을 믿는 신앙으로 초청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대단히 압도적이다. 증거가 부족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 세기에 걸친 이 큰 논쟁에서, 독일의 문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 Wolfgang Goethe)는 이런 말을 했다. "믿음과 불신의 갈등은 여전히 세계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정당하고 깊이 있는 유일한 주제이며, 다른 모든 것들이 이 주제 아래에 있다."

    이 세상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이 큰 논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이자 예일대학교 교수인 필립 샤프(Philip Shaff)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무신론자들은 논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불신의 원천은 머리보다는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지성과 마음은 경건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낳는다.

    기독교인 친구 한 명과 내가 다수의 불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더러운 말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자리를 옮기고 나서 친구가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타락한 마음들이군."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샤프 박사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위해 확실한 증거를 바라던 나다나엘과 도마처럼 정직하게 묻는 자들과 열심 있는 회의론자들은, 자기들 앞에 증거가 놓이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그 증거를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정직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증거는 풍성하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까? 그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의 창시자이시다. 기독교는 그 다음으로 큰 종교보다도 2배가 크다. 20세기 후반에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13억 2천만 명이었다.

    예수는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가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

    한 역사가는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전설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모순으로 여기고 폐기했다고 썼다. 역사가인 길크리스트 로손(Gilchrist Lawson)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전설 가설, 즉 신화 가설을 주장한 사람 가운데는 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고대 역사의 다른 어떠한 사건을 뒷받침하는 증거보다 훨씬 더 많다. 편견 없는 학자라면 고대 역사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증거들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아서 역사가라면 감히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존재했었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단순히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 주기 때문인가? 그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는 하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전기가 4개 있으며, 복음서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증언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다룬 것처럼 어느 세속 역사가의 증언보다 훨씬 더 정확하며 상세하다.

    복음서 말고는 고대의 어떠한 저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완전히 틀렸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소(小)블리니우스, 에픽테투스, 루시안, 아리스티데스, 갈레누스, 람푸리디우스, 디오카시우스, 힌네리우스, 리바니우스,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 유나피우스, 조시모가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언급했다. 완전히 기독교에 반대하는 책을 쓴 작가로는 루시안, 셀수스, 포르피리, 히에로클레스,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있다. 그 밖에 유대인 작가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글을 썼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에 서 있으면 나는 불신앙의 모든 공격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내게는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크고 확실하다. 내 자신의 개인적인 존재만큼이나 말이다."

    그리스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 특별한 일에 관하여 황제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글을 썼다는 것은 다른 역사적인 인물 몇 명도 언급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몇 년 후 한 기독교 변증가가 다른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기록보관소를 조사해서 본디오 빌라도의 보고서를 찾아 이러한 일들이 사실인지 알아보기를 권했다.

    그 긴 보고서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서술한 후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그를 헤롯과 아켈라오와 빌립, 안나스와 가야바와 백성이 제게 넘겨 주었고, 저더러 그(그리스도)를 재판해야 한다고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했고, 우선 그를 채찍질했는데, 그를 악행으로 고발할 근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온 세상이 캄캄했고, 한낮인데 태양이 어두워졌으며 별들이 나타났지만, 별들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달은 마치 피로 변한 것처럼 빛을 잃었습니다."

    주후 52년에 다른 세속 작가인 탈루스(Thalius)는 정오부터 3시까지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썼고, 그것은 일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유월절 무렵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때이고, 보름달이 뜨는 때에는 일식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작가는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을 멈춘 현상에 대해 자연 현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맨체스터 대학교의 성경비평 및 주경신학 교수인 부르스(F. F. Bruce)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작가들은 장난삼아 '그리스도 신화'라는 공상을 할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토대로 한 것은 아니다. 편견 없는 역사가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사성만큼이나 자명하다. '그리스도 신화'라는 이론을 전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로마에 화재를 일으킨 것을 감추려고 했던 것을 논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 소문을 막기 위해 네로는 흔히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죄를 덮어 씌웠으며, 가장 지독한 고문으로 벌을 주었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으로 오해를 받아 증오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창시자인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다스리던 때에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을 당했는데, 이 해로운 미신은 한동안 탄압을 받았지만 유대뿐 아니라 로마 시 전역에도 다시 급속히 퍼졌다."

    이렇게 타키투스도 그리스도께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기간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알려 준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크리스투스, 즉 그리스도이며, 이 종교가 그 당시에 유대 전역을 통해 로마에까지 퍼졌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알려 준다.

    기독교인을 모두 처형하던 소(小)플리니는 마침내 트리아누스 황제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지, 특정한 몇 명만 죽여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같은 편지에서 플리니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죄나 잘못이란, 정기적으로 특정한 날에 해가 뜨기 전에 모였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며, 모였을 때 그들은 번갈아가며 신에게 하듯이 그리스도에게 찬송가를 불렀고, 거룩한 맹세를 했고, 어떠한 악한 일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플리니의 글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그들이 매주 어느 한 날에 일찍 모여서 그분을 예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 시리아의 작가인 마라 바 세라피온(Mara Bar-Serapion)은 주후 73년 경에 자기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를, 악행에 연루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이 맞이하는 끔찍한 결과를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지혜로운 왕을 사형에 처해서 얻은 유익이 무엇이냐?
    그 직후에 그들의 왕국이 완전히 파괴된 것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신다. ……
    유대인들은 멸망당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서 완전히 흩어진 채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로운 왕의 가르침은 살아 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없애려고 몹시 애를 썼다.
    그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에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기간에 구레뇨가 유대에서 과세를 청하던 시기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단언하고 있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가 티베리우스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확증한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실제적 근원으로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신빙성도 주장한다.

    율리아누스는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나 증명하지 못했다.
    그는 바벨론 성벽을 파괴하여 성경의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성취한 사람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외쳤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율리아누스는 자기가 재건하고자 애썼던 이교신앙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
    율리아누스의 모든 노력이 그 갈릴리 사람의 능력 앞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에 대해 글을 남긴 다른 작가들도 많다. 유명한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이 그 시대에 나타난 한 위대한 인물을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게 했는데, 그가 그리스도라고 말해 준다.

    이것은 첨가된 문장일 것이며, 요세푸스는 한 번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고,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개종을 하고 로마에 항복했으며, 황제의 은혜를 입고서 로마에 살았다. 그러면 요세푸스가 과연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

    이 구절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편견밖에 없다. 요세푸스가 쓴 글의 모든 사본에는 이 구절과 아울러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세례 요한과 그 밖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일들에 대한 언급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공격받을 수 없으며, 신화나 전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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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사는데 나는 왜 유독이 예수 없이는 못 사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히 예수 없이는 못 살아요. 예수님 믿기 때문에 삶에 용기와 힘이 생기고 또 예수 믿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행복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스칼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었으며 시편 16편 2절에“내가 야훼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예수님 없이는 복도 행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본론>

    1.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첫째로, 저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깨달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하나님 보시지 못했잖아요.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셨으므로 우리가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계신 것을 확실히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도 안받으면 정말 외롭고 쓸쓸하고 버림받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믿는 자마다 공부 잘하는 사람마다, 돈 많은 사람마다, 지위가 높은 사람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장막집 벗어 버리면 하늘나라 집으로 간다는 것을 가르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육신은 장막집입니다. 장막집이라는 것은 쉬운말로 말하면 천막집인 것입니다. 천막이라는 것은 영구히 있을 곳이 못됩니다. 비도 새고 낡아지고 바람불면 날라가고 나중에는 걷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육신은 장막집이 되어서 언제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위해서 천국에는 집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장막집이 아닌 주택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운 영광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천국을 체험한 사람도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바울 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막 속에 바람불고 비새며 덥고 춥고 하는 곳에 사는 우리들이 영원한 주택으로 들어간다는 것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이처럼 사랑을 받았으므로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정욕이나 탐욕도 사랑하고 그 부분에 하나님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사랑이요, 전적인 사랑이 되지 못하고 가짜 사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할 것 먼저하면 나중할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다 돌보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로 밥 먹인 것을 보십시오. 3백만을 매일같이 하나님이 아침, 점심, 저녁을 준비하셨습니다. 보통 많은 손님들 아니지 않습니까? 3백만을 대접하려니까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집에 손님 30명이 와도 감당하기 힘들 것인데 하나님은 매일같이 3백만을 아침, 점심, 저녁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고기도 먹이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물을 다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 왜 그랬느냐.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는 나는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이 돌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때 진짜로 응답해 줄 것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하면서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 많습니다. 정말 기도 응답하실까? 마음 속으로 안하실꺼야. 그러나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 많은데 밑져야 본전으로 기도해서는 안돼요. 정말로 하나님 진리를 알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예수님 안계시면 천국 있는 것을 모르지요. 예수께서 천국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처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맨션인지 아파트인지 모르겠지만 천국에 아파트는 없을거에요. 맨션일 것인데 예수님이 같이 있겠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십자가에서 희생해 주신 예수님은 그 전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어제가 무슨 날입니까? 부부의 날이지요? 많은 남편들이 부부의 날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잊어 버렸어요. 저도 잊을뻔 하다가 기억을 했습니다. 그러면 부부의 날에는 무엇을 해야 되나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입술의 말로만 사랑해서는 증명이 되지 않아요. 말로써 사랑합니다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돈 안드니까. 그러나 부부의 날이 다가왔을 때 나 당신 사랑합니다. 그 말하면 아내가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40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입술로 얼마나 그런 말을 많이 해도 증명되지 못했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증명하려면 뭐냐. 뭘 드려야 돼요. 조금 드려가지고서는 효과가 없어요. 듬뿍 드려야 돼요. 예수님은 우리 남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입술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뭘 조금 해주시고 난 다음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가면 입이 딱 벌어지고 놀라서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놀라운 우리 남편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장차 어떻게 할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딱 믿고 가십시다. 지금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죽는 것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은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잠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 또 살고 살고 또 살고 영원히 사는데 늙어지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나는 어떠한 사람이냐. 죄와 흑암에 잡힌 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받아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조용기 너가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죄에서 용서받은 나, 더러움에서 씻음 받고 거룩하고 의롭다함을 얻은 나, 채찍에 맞은 공로로 병에서 고침받고 건강한 나,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나, 부활 영생 천국을 얻은 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나를 보면 내가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전인구원을 받은 사람 아니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또렷이 말할 수 있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고 당신은 누구냐고 말하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땜쟁이입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장사꾼입니다. 나는 공무원입니다. 나는 관리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자기가 누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정체성이 뭐냐. 모르지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구름같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 가면 예수님을 쳐다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첫조상 아담을 통해서 얻은 육신의 삶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청산되고 육의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사람된 것은 매일같이 갈보리산 밑에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확인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가 누구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형통케 해주는 것입니다. 꿈이 없고 환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형통케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밑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된다

    둘째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어떤 고생이 있어도 참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내일 희망이 없으면 오늘 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으면 정말 양쪽 날개단 것과 같은 것입니다. 훨훨 날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도 그 가운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 아니십니까? 우리 함께 이 성경구절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려움을 당하거든 하나님을 찾을 때 아실 것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내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지 재앙을 주어서 나를 낭패와 실망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재앙에서 건져내 주지 않았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재앙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있을 때 모든 재앙에서 해방되고 미래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그 깃으로 너를 덮으시리니 내가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해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패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려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시 91:2~7)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참으면 내일과 희망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얻게 되므로 예수님 믿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어떻게 벗어버립니까? 내가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옛사람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요, 더럽고 추하고 마귀의 종이 된 사람, 아무리 물로 씻어도 때가 지지 않는 옛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돌보아 주마. 우리를 덥썩 안고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우리는 실제로 안죽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안고서 죽어서 누가봐도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죽었어요. 내가 옛사람을 청산했어요. 내가 예수를 통해서 부활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벗고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고통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벗어준 것 우리가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새로 지어준 것 입는 것입니다. 그 속에 희망과 꿈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새것이 되는 희망과 꿈을 예수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 은혜로 치료받고 축복받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로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도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 예수 안에서 새것입니다. 죄가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더러움이 씻어진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병이 와서 여러분 들러붙고 병이 여러분을 물고 찢고 하지만 하나 아십시오. 병의 주인은 누구냐. 마귀입니다. 귀신이 여러분 몸에 강제로 쳐들어와서 점령을 했는데 그 귀신이 점령을 하고 난 다음 자기 성품을 나타내는데 폐병 귀신은 폐병으로 나타나고 암의 귀신은 암으로 나타나고 관절염의 귀신은 관절염으로 나타나고 그 귀신이 자기 모습들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암은 암 자체가 암이 된 것이 아니라 암의 귀신이 들어와서 암의 집을 지은 것입니다. 암 귀신이 암의 집을 짓고 폐병의 귀신이 폐병의 집을 짓고 관절염의 귀신이 들어와서 관절염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자꾸 집을 허무러 뜨리려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수술도 하는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신앙적으로는 주인을 쫓아내 버리면 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암의 귀신은 물러가라! 폐병은 물러가라! 관절염은 물러가라고 대항하는 것은 그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인이 쫓겨나가면 주인이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었을 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십시오. 저항을 하십시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다가왔는데 저항을 안합니다. 아이구 아파라. 아이구 고통스럽다. 아이구 괴롭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환영사입니다. 너 성공했다. 네가 와서 정말 성공을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다. 내가 죽을 고생이다. 너 정말 훌륭하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를 피하리라. 이 귀신아 물러가라! 이 관절염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고혈압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당뇨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심장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어지럼증의 귀신아 물러가라! 강제로 들어와서 점령한 놈이 한두번 말한다고 물러가겠어요? 백번이고 천번이고 명령을 하라고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안물러갑니다. 왜냐하면 갈데가 없으니까 귀신이 여러분을 집을 삼고 들어왔으니까 강제로 점령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강제로 물리쳐야 돼요. 침례 요한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침노라는 것은 나팔 불고 북치며 걸어가는 것이 침노가 아닌 것입니다. 총을 쏘고 창을 찌르고 전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침노입니다. 마귀와 싸움은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각오하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사람은 마귀에게 집을 허락해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병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귀신들 참 흉악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귀신에게 점령당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데 제발 물리쳐야 돼요. 저는 귀신이 점령해서 병을 가져온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틀려요. 알고 있으면서도 안깨달으니까 별로 실천을 안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하나님께서 제게 하루 기도하는데 야, 병이 오면은 병의 집주인은 귀신인데 귀신이 집주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너 그만 두느냐. 몰랐습니다. 네가 알면서 깨닫지 못했다. 깨달으면 이제부터 싸우라. 요사이는 귀신하고 적극적으로 싸웁니다. 제가 싸워서 이겨보니 참 기분이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싸우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깨달아 주므로 우리는 깨닫고 이 진리에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간구한다. 간구가 무슨 말입니까? 간절히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회개하고 성령받고 영적으로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사업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고 그리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절히 원한다. 이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로 6절에 선한 목자로써 내 삶을 자비와 긍휼로 채워주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세상에 어디가도 부족함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되면 내가 양이니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우리가 그대로 지나가면 안됩니다. 목자되신 주님께 부족함을 채워 달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은 형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있으니 먹을 것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쉴만한 물가는 마음에 평안을 말합니다. 쉴만한 물가에 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를 형통케 하시고 평안케 하시고 우리를 행복케 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롭게 이끌어 주신다. 죄에서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가 매일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어두움의 세력이 와서 우리를 크고 적은 골짜기로 끌고가도 해를 받지 않는다. 왜냐, 주께서 같이 간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 같이 계시므로 주님은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막대기를 들고 원수를 쳐 주어서 상처입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진짜 원수가 달라들어서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원수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원수를 대적해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얻게 밥상 차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 밥상 베풀어 준다.

    제가 젊을 때는 그것을 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까 배가 고프니까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많이 먹어야 돼요. 그러므로 집회에 나갈 때는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여,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냐, 집회 나가는데 설교 반쯤 하다가 배가 텅비면 소리가 안 나와요. 배가 불러야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힘이 있어 집회를 할 수 있는데 여기 싸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먹어야 싸울 수 있다. 원수가 오면 목전에서 우리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어서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잔이 넘치게 해주신다.

    결국 원수가 오는 것은 우리가 삶에 잔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원수가 와도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밥상을 차려 주시고 여러분 인생에 잔이 넘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만족을 말하지 않습니까?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축복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꿈을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수가 와도 여러분 속으로는 하나님은 나에게 결국 복을 주신다.

    요셉이 보십시오. 형들에게 발가벗겨서 종으로 팔렸죠.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지요. 그 아내 참소를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지요. 사사건건이 안되는 것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잔이 넘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고통이 나중에 보니까 결국 잔이 넘치게 하는 길로 이끌어 가게 하더라. 사람들은 요셉을 고통주고 괴로움을 주고 죽이려고 했지만 그 도모가 다 결국에는 요셉에게 잔이 넘치게 되고 축복이 되고 말았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같이 계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두고 보세요. 나중에 잔이 넘치게 만드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고통은 그 후에 큰 축복을 가져온다. 거짓말 아니에요. 여러분 괜히 내가 꾀려고 이런 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살아보면서 신앙을 체험하면 더 큰소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했으니까요. 한두번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원수가 오고 고통이 다가오면 또 진수성찬 차리고 잔이 넘치게 하려고 오는구나. 그러므로 꿈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시고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4절로 26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니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떠한 원수가 다가와도 크고 적은 원수를 결국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같이 결국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게 돼요. 좋은 하나님 모시고 있으니 좋게 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유는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린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려서 여러분을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차원 높은 삶

    셋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을 믿고 차원 높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이성적이고 체험적인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를 몰라요.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호킹 박사도 이번에 신문에 발표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것처럼 뇌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죽어버리고 없는 것이지 뭐가 있느냐. 그렇게 모른다구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운명을 바꾸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많은 사건을 믿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을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놓으면 험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하겠네. 믿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누어 주셨는데 믿음을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용하면 내가 달라지고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죽고 사는 권세를 믿음을 가지고서 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합동하여 유익이 된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믿으면 그런 것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렇게 되는데 안 믿으면 그런게 안온다 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대로 크면 큰대로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신령한 믿음을 분량대로 주셨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분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므로 믿음 없다는 말 하지 마세요. 믿음을 안쓰고 있지 쓰기만 하면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세요. 나는 영원히 잘된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없는데도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범사에 형통한다고 믿으십시오. 믿으면 그렇게 된다구요. 나는 강건하게 된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고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세요.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음과 생각과 꿈과 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꿈꾸게 되고 그렇게 말하게 돼요. 그러므로 믿음은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 인생을 변화시켜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안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대로 돼요. 된다 할 수 있다 변화된다. 믿으면 그대로 돼요.

    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앞에 보여줬잖아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어요.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대로 두면은 썩어서 살은 다 흙이 되고 뼈다귀만 남습니다. 누가 그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르다야 무덤문을 열어 놓아라. 마르다가 우리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마르다는 말할 때 예수님 마르다를 보고 마르다야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믿으면 영광을 보고 안 믿으면 영광을 안봅니다. 여러분 생애에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안 믿으면 영광이 안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안쓰니까 문제지. 안쓰니까 문제에요.

    오늘도 주님 여러분 보고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마르다가 믿고 무덤문을 옮겨 놓으니까 나사로야 나와라! 살아 나왔습니다. 환경과 운명이 변화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마귀의 공격 속에 살면 우리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마귀의 텃밭입니다. 두려워하면 마귀가 춤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오고 가난이 두려우면 가난이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가 오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사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나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쁘지 않아요.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에요.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부터 여러분 여러분 환경과 운명에 좋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써 믿음을 주셨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므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오면 거기에 남부공동묘지가 있어서 많은 시체를 파뭍은 공동묘지가 있어요. 그 옆을 제가 지나와야 돼요. 그러니 언제나 학교 갈때도 그렇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그렇고 그 공동묘지 지나갈 때는 반 죽음이에요. 꼭 귀신들이 나와서 나를 확 덮칠 것 같아요. 겁이 나서 거기가서는 뭘 하느냐. 뛰기 시작하는데 한번 뛰기 시작하면 내 발걸음에 놀래가지고서 끝까지 뛰어야 해요. 숨이 턱에 닿도록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나 너무 겁이 나서 여기 오기가 힘들어 날 좀 도와줘.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 할머니 나이가 70이 넘은 것 같아요. 그런 할머니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런데 내가 올 때쯤 되면 가파른 산꼭대기에 할머니가 앉아가지고서 늘 불러요. 용기야~ 오냐~ 그런데 그 산밑에 와서 할머니의 음성만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져요. 마음에 기쁘고 용기 백배해서 할머니 나 여기있어~ 아이구 내 새끼야 빨리 오너라. 그 할머니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지고 할머니 손을 잡으면 천지가 다 내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할머니가 나보다 더 힘이 없는데 걸음도 더 빠르지 못한데 그 할머니가 있어도 용기백배한데 예수님이 용기야~ 거기 있느냐~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시편 91장 1절로 7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우리 좋은 하나님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실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지 나쁜 것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의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질그릇 아닙니까? 이 질그릇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사방으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낭패와 실망에 욱여쌈을 당하여도 여기 예수님이 턱 들어 앉아 있으니까 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환경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우리가 싸이지 아니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싸이지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낙심할 리가 있습니까?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사람이 핍박해도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데 뭘 두려워할 것입니까?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망하려고 달려들어도 거꾸러뜨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 망해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여러분의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십자가에서 다 멸해 버렸던 것입니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 위해서 승리를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면 하늘과 땅이 내 편에 서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백성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믿음을 탁 가지면 분위기가 내 마음에도 분위기가 확신의 분위기가 있고 주위 환경에도 분위기가 좋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잡아 놓으면 온 천지에 악한 귀신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면 벌과 나비가 날라오듯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좋은 것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 너무나 좋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근심하고 늘 두려워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내가 대신 근심했고 내가 대신 두려움과 싸웠다고 말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님이시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말할 필요없이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노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환자들이 노이로제에서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시편 23편 한번 읽고 저녁에 한번 읽게 했는데요.

    미국의 하워드 캘리 박사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동료 의사의 역할을 해 줍니다. 성경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한 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 캘리 박사는 의사입니다. 의학박사이면서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데로 의학과 같이 환자를 치료하니까 환자가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암 전문의사인 황성주 박사는 치료 과정에서 한 부인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들었답니다. 그녀는 매일 밤 불면증과 번민으로 시달리는 남편에게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편 23편을 읽어주었더니 남편이 신앙도 회복하고 불면증도 완전히 나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뿐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정신질환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서 겪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를 승리와 평안의 분위기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내가 한탄하도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 손에 쥐었으니 내가 어찌 너를 버리랴. 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너희를 값주고 샀으니 어찌 내가 내것을 버리고 떠나랴. 마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속지 말라. 항상 나는 너와 같이 있느니라. 이와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 감사 박수를 드립시다.

    <결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 나는 사는 이유도 알고, 내일의 희망과 꿈도 예수 때문에 가질 수 있고,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믿음으로 마음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고 예수님이 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다 되시므로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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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이승혁이라고 하면 목사를 강조합니다.
    이승혁 목사라고 하면 이승혁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 메시아가 사람으로 오심

    예수 그리스도예수를 강조하는 객관화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주관화된 이름으로 부활 이후에 사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는데(신분)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마음 즉 자기를 버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마음, 겸손의 마음, 섬김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 가톨릭교회 해석 / good news
    https://maria.catholic.or.kr/bible/

    신약을 읽는 모든이들에게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집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은 먼저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먼저 봅니다.
    그 분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 우리와 동일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동생이나 그 분의 고향에서는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을 먼저 보게 되고, 후에 이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담당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예수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직접 예수님께서 나타나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은 회심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먼저 만나게 되었고, 그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연약하게 죽으셨지만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달리 바울 형제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십작에서 연약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님이라고 밖에 고백하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이셨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런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항상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신약성경에는“예수그리스도”와“그리스도예수”로 기록된 수많은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기독교인들은“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를 분별을 못하며 그 말씀이 그 말씀으로 똑같은 말씀으로 알고 있을 뿐 영적의미를 아는 신학자들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모르는데 과연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를 분별을 못하면 성경 한구절도 올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라는 문구를 접할 때는“성찬식”의 영적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라는 문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5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식“은 주님오실 때 까지 예수님을 기념하기위해서 “떡과 포도주”로 교회의 행사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 말씀에는 엄청난 영적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아는 사람이 기독교인들 중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 문장에 내“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는데
    참된 양식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떡과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 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다.

    즉 예수님의 “살“(몸)은 말씀을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내 ”피“(생명)는 참된 음료란 뜻은 ”포도주“로 ”비유“하는데 이것도 생명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13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같이 ”살“이나 ”피“도 생명의 말씀을 뜻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떡과 살, 피와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복음)으로 “비유”가 되지만 “떡과 살”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받아먹는 자의 입장이요 “피와 포도주”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하실 때 예수님이 먹으라고 주신 ”떡과 포도주는 살과 피“인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이란” 요한복음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신 것과 같이 육신(살)은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이며 또 “피“는 포도주(말씀)를” 비유“하며 십자가에서 희생의”피“(말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 ”피“(포도주)를 주는 것이고 먹는 자의 입장은 ”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살”(떡)을 받아먹고 살아난 자는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필히 그들에게 자신의“피”(포도주)를 주어 그들을 살려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소유한“아가페 사랑”을 소유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의“살”(떡)을 받아먹고 살아난 자는 죽어있는 이웃에게 자신의 희생의“피”(포도주)를 주어 살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복음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피”(포도주)를 주는 것이고 받아먹는 자의 입장에는“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피”(포도주)를 먹고 성장해서“예수”가된 자는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고“예수“에서“그리스도”로 부활한자를“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며“그리스도예수”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희생의“피”(포도주)를 이웃의 죽어있는 영혼에게 주어 살려야 하는 것이“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여러 곳에 기록된“그리스도예수와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라 “양식”을 주는 자의 입장은“그리스도예수”라고하며“양식”을 먹고 살아난 자의 입장은”예수그리스도“라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성찬식”의 깊은 영적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온전한 십일조”가 된 자를“예수”라 하며 이“예수”가“십자가”에서 죽고“예수”에서“그리스도”로 부활한 자를“예수그리스도”라 말하며 하나님의“아가페사랑”을 소유한자를 말 합니다 말3:8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온전한 십일조”를“창고“에 들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양식”(말씀)을 하나님의성전이 된 자의 몸을 창고로“비유”해서 하나님의 집에“양식“(말씀)이 있게 하는 것을“온전한 십일조”라고 하며 그의 몸을“창고“로”비유”한 것입니다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성전인 것과 성령(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같이 하나님의 성전인“창고”(몸)에”양식”(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영의 양식”을 반드시 하나님의집인 자신의 몸 성전“창고”(몸)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창고“(몸)에“양식”을 저장을 해야 그“양식”으로 이웃에게“양식”을 주어 구원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성전인”창고“(몸)에 저장한 자는 그 말씀의”양식“으로 반드시 이웃에게 그”양식“을 먹이므로 이웃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해서 장성한자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이웃을 구원해야”예수그리스도”에서”그리스도예수“로 거듭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아들(예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나님의 아들”예수“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준은 기독교인들이 모두”예수“가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5-16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웃에 죽은 영혼들에게“영의양식”을 먹여서“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씀은“첫째계명”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해 “온전한 십일조”가 되어 하나님의” 창고“(몸)에 ” 식”을 저장한 자를“예수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계명“은 “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죽어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희생의 “피”(말씀)를 흘려 자신의 몸에 저축한“양식”을 이웃에게 먹여서 살려내는 것이“그리스도 예수”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전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서“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해”예수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둘째”는”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이웃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그리스도예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아가페사랑”을 소유한자가 이웃의 영혼에게 하나님의“양식”을 주어 구원하는 자를“그리스도예수”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사랑“과 이웃에 대한“사랑“이 온”율법”과 선지자의”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5: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 사랑(구원)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롬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아가페)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 었느니라,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 예수”까지 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을 오늘날기독교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천국을 간다는 것은 목사들의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가페 사랑“이 으뜸이며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야말로 죄 많은 인간에게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장 먼저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구원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나 이“사랑”은 인간의 윤리도덕의“사랑”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피(포도주)를 주고 복음을 받는 자 즉 먹는 자의 입장은 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과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려 죽으신 희생의 “피”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살아난 자는 예수님의 “피”(복음)로 죽어있는 이웃에게 복음을 주어 살리라는 오묘한 진리가 숨어있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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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예수를 믿는가? 


    사람은 왜 사는가?

    유대인들은 "티쿤 올람(Tikun Olam)" 이라고 대답합니다.
    Tikkun olam (תיקון עולם 세상을 바꾼다)은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 를 극복 할 전망으로 정교회 유대교 에서 해석되는 유대교 의 개념이다.

    "티쿤(תיקון) "이란 "고친다"는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티쿤(tiˈkun) תיקון
    1. 수리, 수리하기, 고치기,  2. 개정, 향상, 정정

    "올람( ʽôwlâm,  עוֹלָם"이란 "세상" 이란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עוֹלָם  5769
    1. 영원,  2. 오랜 시간이 지남,  3. 일생동안
    어원 / 5956에서 유래

    한국인의 목표

    티쿤 올람 정신은 우리 겨레의 홍익인간(弘益人間)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정신이다.
    티쿤 올람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함으로 세계를 변화시켜 나간다는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정신과 뜻을 같이 한다.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고쳐 나가며 세상에서 더 높은 도덕과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믿는 사상이 티쿤 올람 정신이다.

    이스라엘의 기술혁신의 동기가 되고 있는 정신이 티쿤 올람이라면 그러한 혁신정신은 후츠파(CHUTZPAH)로 대변된다. 후츠파 말은 "대담함과 당돌함"을 뜻하는 이스라엘 고유의 말로 어려움과 고난, 좌절과 위협에 굴하지 아니하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1948년 같은 해에 건국하였다.
    건국 이후 두 나라가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며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우리는 머뭇거리고 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흔히 하는 말로 한강의 기적까지는 성취하였는데 한반도의 기적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리에게 티쿤 올람 정신과 후츠파 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한강의 기적을 한반도의 기적으로 마무리 하자!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濟世理化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하는자연의 순리와 이치대로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참된 사람이 되라!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자연의 이치와 순리대로 살아가며 

    천지자연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널리 이로움을 주는
    참된 사람이(-진정한 만물의 영장)되도록 하라! 는
    실로 심오하고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금과옥조의 귀한 말씀입니다.


    홍익인간...에서 

    인(人)은 사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인간(人間)이라는 글자는

    천지간의 모든 만물(天地萬物)을 뜻합니다.

    인간은 결코, 이 우주의 주체가 아니며, 

    인간은(사람)은 우주의 무수한 생명체 중 

    미미한 한 종류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구의 생명체중에서 영적능력이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나, 결코 지구의 주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물의 주인-주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인간의 오만과 방종이 적정선의 한도(限道)를 넘쳐서
    자연을 거스르고, 자연에 가장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상이고 현세의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와 이기를 위해서,
    자연을 동격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인간 편의를 위한 이용물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지구상의 가장 기괴한 괴물로 변해버렸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애석한 사실이긴 하지만...

    오늘날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독충(毒蟲)같은 존재들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우주는 우리와 한 몸입니다.
    자연은 우리와 같은 몸입니다.
    우리와는 시공간과 크기와 형태가 좀 다를 뿐...


     

    천부경에서 이르는 금언(金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참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잘못된 인식과 

    자연에 해악을 끼치는 나쁜 습성들을 버리고 고쳐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와 자연에 해악을 끼친 그 인과응보로 받게 될
    자연의 재앙과 그 앙화를 조금이라도 감소 시키려면
    지금부터라도 문명의 해악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실은, 매우 시급하기도 합니다...)
    과학을 자연과 조화롭게 융화시켜
    자연과 만물에 최대한으로 해악을 줄여야 하고, 부득히
    개발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가능한 빠르게 복구가능한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도모하고 개발을 하는 우주 정신과 우주 마음을 닮은
    전인적인 마음자세-

    -새로운 인류의식의 신인류 과학정신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밝은 미래도 인간의 어두운 미래도
    인간의 정신에 달려있음을 새삼 재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신의 영역도 아니고, 하느님의 영역도 아닙니다.
    오직, 인간 스스로가 만들고 짓는 것으로 인간의 인과(因果)영역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메릴린 히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이윤호 목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두 권의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
    2.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
    3. 유전적인 그 죄의 뿌리를 끊지 않으면 저주가 가계를 타고 계속 흘러간다.
    4. ‘가계 점검표’를 사용하여 조상들의 죄를 일일이 알아내서 죄의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
    5. 예수를 믿는 사람도 가계의 저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여전히 저주 아래 있다.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조상이 지은 죄의 저주가 3~4대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삼사대라면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려오는 각종 질병들, 알코올 중독, 편두통, 정신이상, 일찍 죽는 것, 열등감, 신경쇠약 등 무려 58가지의 저주의 행위들을 열거하며 그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계저주론’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게 보여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예외적인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드리면, 가계저주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특이한 일이 있을 때 종종 ‘집안 내력’이라고 말합니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면 축복이지만, 좋지 않은 일이 내려오는 것은 저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내력이 실제로 후손들에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당신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와 같은 일들이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저주가 더 이상 없습니다.
    혹여 저주와 같이 보이는 일들이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며, 장차 정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삶, 정죄의 심판, 영원한 죽음의 형벌,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저주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받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장차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와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 저의 가정에는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 있었습니다. 헛된 것임에도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받아들여 행하였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귀신을 섬기는 것과 술 취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헛된 행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귀신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탄의 권세를 멸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담대하게 그 모든 행실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와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믿음에 대하여 한마디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설명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무더운 날 사람 만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음악을 감상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돈이 생기기 때문에 오셨습니까? 행여나 잠자려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왔습니다.
    바울의 설명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가지고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 2년 반 동안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지낼 때 자기도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을 너희도 잘 알 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4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의 증언에서 그 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8:31절 이하에 유명한 승리의 개가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까지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9절) 여기에서 바울은 세상의 힘보다 더 강한 내적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간증하면서 이것은 자기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힘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더욱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내적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증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메이슨 이란 마을에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가 총을 듣고 디그라핀리드씨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남편 나단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 루이스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운 손님처럼 대하여 주었습니다.
    “무거운 총을 들고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콧노래로 찬송까지 부르면서 식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루이스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 믿는 기쁨과 새로운 인생을 그 죄수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침범하여 오전 10시가 되기까지 그 집에 머물렀는데 불과 일곱 시간 사이에 탈옥수는 자기 발로 교도소에 돌아갔다는 실화를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컨트롤(조종, 제압, control)과 파워(능력, power)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영적능력은 죽음을 이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란 바로 컨트롤(제압)을 뜻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역사는 컨트롤 보다 내적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류에 입증해 주었습니다.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국수적 민족주의 등 모두가 국민이나 이웃나라들을 컨트롤 하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 힘이 있는 민주주의가 더 강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이 내적 힘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이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는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 깃발 아래 벌레처럼 약해 보였으나 로마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예수의 능력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선채가 약할 때 “예수의 사랑의 능력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하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능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점심식사를 하고 열두광주리가 남은 기사가 나옵니다. 디베랴 호숫가 넓은 초장에 배고픈 무리 5천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점심을 먹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두 제자 빌립과 안드레의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빌립은 “2백 데나리온(한화 약2,000만원)을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계산에 근거해서 불가능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군중속에서 어떤 소년 하나가 지참해 온 도시락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5천명은 일대 천(1:1000)의 엄청난 차이지만 안드레는 예수의 잠재적인 능력에서 작은 믿음을 걸어 본 것입니다. 이때 정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potential)을 믿는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디베랴 초원에는 계산기 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수, 주홍같은 죄로 눈같이 희게 할 수 있는(사1:18)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리오 질라드(Leo szilard)는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이론 물리학자였습니다.
    1933년 그는 런던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12일 신문을 읽던 그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들이 학술회의에서 “원자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꿈이다”라는 결론이 났다는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질라드세는 한방에서 연구하는 동료인 엘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가능성을 믿고 탐구하는 것이 옳은 자신이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이요” 화를 내면서 그는 신문을 찢어 버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랜 연구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장 작은 원자속에도 대 우주를 흔드는 위력을 나오게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보유시켜 두셨다는 것입니다. 원자 그덧은 가장 작은 입자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속에 더 큰 위력을 숨겨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원리를 발견한 순간 세계사에 큰 영향을 일으킨 핵 시대가 연구소에 돌아와 자기의 해답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했더니 아인슈타인은 감격스럽게 “당신은 놀라운 점심을 먹었소”(you had an incredible Lunch)하며 기뻐했답니다. 모든 발견과 발명도 가능성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런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엡 3:20-21)

    믿음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에게는 그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동료, 여러분이 시원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 여러분이 부도덕하거나 죄인처럼 생각하는 그에게 회개의 가능성, 큰일을 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머리를 돌리 때 하나님은 그를 더 사랑하십니다.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근거도 이 가능성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주님의 큰일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아야 좋은 교회가 이룩되고 2세 교육과 전도에 열심히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예수님과 안드레의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능력이란 에너지(동력)입니다. 이 에너지에 나를 접선 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나와 여러분의 가능성이 힘으로 변화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드린다면서 제물인 양은 왜 안 가지고 갑니까?” 그렇게 묻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아들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인 준비하신다는 뜻인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막힌 슬픔속에서도 준비하시는 하나님,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속에서 무지개를 보았고, 야곱의 믿음은 광야 가운데서 하늘나라에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바위속에 생수를 보았고, 삼손은 사나운 사자의 몸에서 꿀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장 약할 때 나는 가장 강하다”고 고백함으로서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달린 사과를 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한 알을 놓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과 나무를 세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보고 창조물을 보면서 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십니까? 이 땅에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왜 부활을 믿지 못하십니까?

    창조의 근원을 해명 못하면 모두가 헛소리 일 뿐입니다. 첨단과학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극소수의 부분적인 재료를 이용하는 것을 대단한 발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고, 큰 배가 대양을 떠갑니다. 우주선이 달과 다른 횡성을 이착륙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과학이 하나님을 부인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의 유속의 차이가(베르루이의 원리) 아니면 비행기가 어떻게 날으며 물의 부력이 없으면 배가 어떻게 뜹니까? 인공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란 하나님께 창조하신 물질 중에서 원리와 성질을 활용한 미미한 학문에 불과한데 교만한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의 존재까지 건방지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들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우주만물이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믿으십니까?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 보면 어린아이들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총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던 탈옥수 같은 세상의 힘보다 믿음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내적 능력으로 죽음을 이긴 예수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신체가 약할 때 “예수의 능력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원리에서 가장 큰 위력이 나왔습니다. 별 것 아닌 나에게도 엄청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빌립처럼 계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빵1개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잠재적인 능력에 작은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을 믿은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때 앉은 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에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이성적으로 믿지 못할 내용이 많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란 이성을 포기하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납득이 안가는 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믿는 것을 보고 광신이라고 생각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요행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신자들의 논리에는 한가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실 불신자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이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뉴욕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한국에 간다고 하자. 우리가 그 비행기를 타는 것은 그 비행기의 기장이 우리를 약속한 시간에 한국에 데려다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 비행기가 우리를 북한으로 데려갈 것을 의심하거나 우리를 쌍둥이 빌딩으로 돌진할 거라고 의심한다면 우리는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왕재 서울대학병원 해부학 교수가 비타민C가 생명의 물질이라고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면서 3개월 이상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매일 끼니때마다 비타민C 6g을 복용하고 한 달 만에 퇴원한 다음 그로부터 11년을 더 살고 82세에 소천한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비타민C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비타민C 복용법은 식사 때마다 최소한 2000mg을 식사 중간에 또는 식후에 복용을 하면 당뇨ㆍ고혈압ㆍ위암 그리고 대장암 등이 예방ㆍ치유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 두 부류로 갈라졌다. 이 교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말이다.

    세상적인 지식도 받아 들이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 심지어 과학자의 말도 믿음이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지식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어지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말씀 말이다. 이 교수의 비타민C와 같이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두 부류로 갈라진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말이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 가운데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것이다.

    비타민C를 먹으면 건강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십자가의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마음의 절대적인 평안이다.

    평안이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절대적인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이전에는 미웠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그들이 불쌍히 여겨지는 것이다.

    여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교회에서 순교 당하실 때까지 사역하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 청년을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 세계 22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천당 가려고 믿는가?

    왜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은 나는 왜 사느냐하는 질문과 같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구도 내 인생을 내가 원해서 선택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인생을 시작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도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신 상태로 있다가 교회를 나가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혹은 죽을병이 들어서 건강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낙심 중에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누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도 한다.
    부모 때부터 믿는 가정에 태어나 믿음을 갖기도 하고 혹 먼저 믿는 아내나 남편을 따라 믿음을 갖게도 되지만 성경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될 사람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미 있는 것으로 때가 이를 때 사람들이 여러 경우를 통해 믿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에베소서 1:3-1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해놓은 것으로 이 땅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받도록 작정된 사람을 믿음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예수를 믿느냐 하는 질문의 답은 "전능하신 창조주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불러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믿으면 천당 가는 것이지 천당 가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꿈에 한 불신자 청년에 나타나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예수님을 믿어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지!"
    그러자 그 청년의 표정이 어딘지 어색합니다.
    좀 못마땅하다는 표현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옳은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청년에게는 저의 대답이 그리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꿈을 꾸고 새벽 예배에 나와서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왜 그 청년의 표정이 안좋은 거지?"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그 청년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 청년에게는 나의 대답이 좀 이해가 안될 수 있겠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불신자 청년은 아마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한국의 독립 운동을 위해서 죽어간 유관순 누나도 결국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고, 결국 그 혜택은 우리 모든 한국 사람들이 받은 것이기에 엄격히 따지면 유관순 누나도 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유관순 누나를 믿지, 왜 남의 나라 사람인 예수님을 믿는 거야?
    목사님은 애국심도 없나?
    목사님은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은 좀 고리타분한 분이구나!
    만약 자기 육신의 아버지나 조상이 자기를 위해서 죽으면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나 자기 조상님을 믿고 신으로 섬기겠네? 그럼 뭐야?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 아닌가? 그리고 만약 내가 목사님을 위해서 죽으면 목사님은 나를 신으로 믿을 것인가? 나에게 십일조를 낼 것인가? 에이, 어쩐지 그 대답은 좀 그렇다."

    이렇게 불신자 청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아마 이 자리에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즉 저의 대답에는 불신자에게 좀 더 이치에 맞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여태까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분이 있다면 제 손가락을 자르고 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피를 갖고 태어난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것은 1%의 오차도 없는 100%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어느 개인,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간에 합당한 이치입니다. 특히 가장 큰 죄로 취급되는 반역죄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단지 선악과라는 과일 하나를 따먹은 죄가 아닙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과일 하나 따먹어서 그토록 저주를 받고 죽는다면 우리 하나님은 참 옹졸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과일 하나 따먹어서 사형을 당한다면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하나라도 서리해서 먹은 사람들은 다 사형을 당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남의 것을 조그만 것이라도 훔친 사람은 모두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하여간 성경을 잘못해석하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아주 못되고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안티 기독교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이의를 매사에 제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틀리다고 반대하고,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악하다고 반대하므로 결국 하나님과 반대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피조물로서 감히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창조주 하나님을 죄인석에 세워놓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재판관인지 위치를 바꾸겠다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우위에 있겠다는 교만이요 반역입니다.

    만물의 매니저로 세운 인간이 이렇게 마귀의 꾐을 받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반역하니 우주의 질서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님인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간은 마치 흐르는 강에서 떨어져 나온 지류의 물이 썩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하와에게 잘 다스리라고 맡겨준 이 지구라는 에덴동산도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는 저주와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영원히 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고,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도 모른 채 죽는 안타까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해도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닦아보려고 종교를 만들고 철학을 만들고 사상을 만들어보았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즉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이 사실에 의문부호를 제기합니다. "예수쟁이들 예수님 믿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났느냐?"

    이때 저와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예, 저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만난 사실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저는 이렇게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5-7)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자 곧 바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7-18)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며,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하며, 성령이라고도 하는 분을 우리 각 사람에게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하신 말씀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고로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만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요,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했는데, 바로 그 약속한 성령이 내 안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까지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를 죄에서 해방하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죄의 형벌과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는 내가 어떤 큰 공로가 있어서 된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쉽게 생각해보세요. 요즘 사람들 돈 참 좋아합니다. 물론 과거의 사람들도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돈을 너무나 좋아해서 돈 때문에 인륜도 천륜도 포기하는 시대가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을 했는데, 요즘은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 만큼 돈의 위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돈이 얼마나 있으면 여러분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크게 잡아서 100억 정도면 됩니까? 제가 드리지요. 너무 쉽게 대답했습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일 것 같지요.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아니, 100억을 얻는 조건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왜 안믿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예수님을 안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의심이 가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아니, 예수님 믿으면 진짜 100억을 줍니까?"

    예수님 믿으면 100억 보다 좋은 천국도 얻고, 이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에게 참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돈도 내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런데 또 이 말에 토를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예수님 믿어서 천국도, 얻고, 평안과 기쁨도 얻는다고 합시다. 어차피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믿으면 진짜 돈을 줍니까? 100억 말이에요?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니 한번 저에게 줘 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먼저 네가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이것을 주마?" 그러나 인간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100억을 저에게 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줄다리기를 하는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제법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저의 질병을 해결해 주시면, 저에게 좋은 직장을 주시면, 저에게 아름다운 배우자를 주시면..."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이러한 줄다리기를 어느 순간 그치고 맙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100억이 아니라 그보다 수천 배, 수만 배, 수억 배를 주신 것을 깨달은 날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온 우주의 상속권을 주신 것을 깨닫는 날에는 100억을 달라는 것이 마치 눈깔사탕 하나 달라는 것처럼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에게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좋은 직장도 주시고, 장래 좋은 아내감도 주시고, 어쩌고저쩌고 조건 조건 조건..."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다 주었느니라." 아- 얼마나 기쁜지! 내가 구하지 않은 것, 마음에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두 주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그와 동시에 저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마음속에 "아니-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왜 믿지 않는 거냐? 야 너도 예수 믿어라." 하며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장장 25년간 지내면서 제가 돈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돈을 안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우리 목사님은 참 부자이신 모양이네! 목사님 지갑에 돈 얼마 있어요? 꽤 있겠지요?"

    여러분, 부자가 돈 가지고 다닙니까?
    요즘은 돈 안 가지고 다녀요. 카드 하나면 다 돼요?
    그런데 카드가 분실되는 날에는, 혹은 잔고가 없는 날에는 꽝이에요.
    그러나 하늘나라 잔고는 꽝이 나는 법이 없어요. 우리의 믿음은 도적이 훔쳐가질 못해요, 분실되지도 않아요.
    제가 이 정도 말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 나도 예수님 믿자! 믿어 보자!" 오늘 예수님 믿고 100억, 아니 100억 보다 더 좋은 모든 것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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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력 / 대강절. 사순절(四旬節)과 부활절(復活節) 고난(苦難)



    대강절(待降節)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 사순절(Lent), 오순절(Pentecost), 대강절(Advent) 등이 있거니와, 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강절(또는 ‘대림절’, ‘강림절’로도 불림)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 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 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 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째의 의미 즉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나신, 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000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 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 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 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 의 합성어로서, 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 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 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 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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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四旬節) Lent

    사순 시기(四旬時期) 

    헬라어 Σαρακοστή(사라코페) 
    라틴어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
    영어 Lent(렌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티'(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다.

    사순절 주간별 주제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렀다(라틴어 명칭).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뜻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주 -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합니다.

    인보카비트(Invokavit)인데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 91:15)라는 라틴어의 처음 말이다.
    즉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이다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둘째 주 -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합니다.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인데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셋째 주 -  회개로의 요청을 생각합니다.

    오쿨리(Okuli)인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 25:15)라는 뜻이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는 뜻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라에타레(Laetere)인데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사 6:10)라는 뜻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절제하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절기이다.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다섯째 주 -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 불리기도 하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 치유와 회심을 생각합니다.

    유디카(Judika)인데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 43:1)에서 온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m sunday. 팔맘 선데이), 또는 고난 주일(Dominica Passionis. 도미니카 파시오니스)이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여섯째 주일 -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arum) 혹은 고난주일로서 이 주간은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절정이다. 우리는 사순절기간 동안 절제를 통한 경건의 훈련과 자신을 다 주신 주님의 베풂을 본받은 나눔의 실천으로 사순절을 뜻있게 보내야겠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 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40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 모세가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한 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던 성찬식과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행하던 금식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을 행하였습니다.
     
    사순절의 행사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왔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이 규정은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습관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 collation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행위는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의 호화 생활은 자제 되었습니다. 대신에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어졌습니다. 이후 1517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는 폐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순절과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 폐지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여전히 받아들여져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엄격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금식은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된 자로서의 삶을 돌이키게 하는 행위로써 초대교회 때부터 행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이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 절식節食기도의 형태로 변모되어졌습니다.
     
    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따라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의 여정으로, 자기 부인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순절을 통해 자기 부인과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 성경말씀을 매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 하루 1끼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이 항목은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서약이 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항목에 ∨표 해봅시다.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1장 이상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주 1회 이상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주현절은 마감한다. 그러기에 주현절의 길이는 최대 9주일부터 최소 4주일까지로 사순절의 출발점에 따라 일정치 않다. 주현절은 고정절기로 1월 6일부터 그 시작이 늘 일정하지만, 사순절은 해마다 달라지는 이동절기인 부활주일 날짜 확정에 따라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로, 그 기간 중 6회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이다. 주일을 빼는 까닭은 예배의 전통에 따라 주일은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계산법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동·서교회가 다른 날로 지키는 성탄절과 달리 부활주일은 세계교회가 일치하여 지키고 있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성경강림주일 전날까지이다. 성령강림주일을 흔히 오순절이라고 하는 까닭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날 수로 50일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간을 뜻한다. 40일은 대략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날 수로 6세기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1년의 십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쳤다. 사순절 기간은 처음에는 무덤에 머물던 40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마4:2)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시험받으셨다. 우상의 권력과 맞서 싸우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도 40일(왕상19:8)동안 이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향해 선포한 40일(욘3:4)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집행유예시간이었다. 또 노아가 겪은 40일(창7:17)간의 홍수는 인류에게는 심판의 깊은 밤이었으나 그에게는 구원의 새벽이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역시 꼭 40년(신2:7)간이었다. 이 기간은 내내 고통스러웠으나 새 세상을 향한 해방의 행진기간이었다.

    사순절을 수요일에 시작하는 까닭은 수요일은 예로부터 금요일과 함께 기독교의 금식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교회에서는 참회와 경건의 뜻하는 보라색으로 강단색을 장식한다. 재의 수요일에는 전 해의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재로 만들었다가 머리에 뿌렸다고 전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개를 의미하는 표시로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날을 선포하였다. 재는 다양한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재는 회개를 뜻한다.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시90:3).” 또한 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 90:3)”. 한편 재는 겸비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정할 때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나라도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대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40일 간은 믿음의 순례기간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부터 부활절까지 욕망을 절제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는 신앙의 수련기간을 갖는다. 기독교 경건주의 전통은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칼빈파인 위그노처럼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강요하였다. 보기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일, 댄스, 발레, 연극, 고리대금, 어음거래, 환금업, 연회와 술 취하는 일, 주사위 놀음, 호화롭게 옷 입는 일 따위를 금지하였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금지규칙으로 정하는 것을 ‘아디아포리즘’ 또는 ‘프레찌시스무스’라고 한다.

    사순절의 경건생활은 일상의 쾌락과 관련하여 그 경건의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습관을 ‘포기’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유럽과 남미의 세계적 축제인 카니발은 사순절의 전통과 관련 있다. 카니발은 해마다 11월 11일 11분에 시작한다. 한겨울 내내 축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던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이틀 앞두고 최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젠 윌요일에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카니발은 이날을 고비로 막을 내리면서 이튿날 화요일에는 사순절의 밤을 맞이한다. 가장 소란하고, 흥청대는 카니발과 가장 조용하고 경건한 재의 수요일은 이렇게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사순절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실감시켜준다. 카니발은 이름 그대로 집에 저장해둔 고기를 먹어 치우는 전통 절기이다. 우리말로 사육제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순절 기간의 경건생활 캠페인을 독일 개신교에서는 ‘일곱 주간의 포기’라고 부른다. ‘일용품-생명을 위한 수단’이란 주제로 벌이는 사순절 경건생활운동은 술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 소비 축소,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시청 절제 그리고 과도한 취미생활과 고질적인 습관 중단 및 고치기에 힘쓰는 일이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있다.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5)라는 뜻이며,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로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이고,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라고 하는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이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로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시편 66:10)는 뜻이며,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이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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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四旬節. Lent)의 뜻 

    ‘사순절’ 기간은 부활주일 전 일부터 소급하여 40일 간의 기간으로 산정한 것인데, 속죄일로 명명된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첫째날로 시작된다.

    사순절(四旬節. Lent)의 개념은 교회사적으로 오랜 기간의 변천 과정을 거쳐 확정된 것인데, 예수님의 40일 간의 광야의 금식과 시험을 받던 수난을 기억하고 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고, 모세의 시내산 40일 간 금식과 엘리야의 40일 간의 금식,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간의 광야생활 등이 간접적인 배경이 되어 부활절 전에 행해지는 40일 간의 금식과 기도하는 기간으로 일명 제기(齊期)라고도 하는 기간을 말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사순절은 3세기까지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한 금식기간은 대체로 2~3일을 초과하지 않았으나 40일 간을 가리키는 용어 ‘테사라코스테’라는 말의 최초 언급이 니케아 교회법(A.D 325. 교회법 5조)에 언급된 것에서 그 기간을 주목할 수 있는데, 본래는 실제 금식기간을 6주로 하여 주일을 제외하고 36일이었으나 여기에 4일을 추가하여 40일(四旬)이 되었고 ‘그레고리우스’ 교황 때부터 재(灰)의 수요일을 사순절의 시작 일로 잡아 엄격히 지켜왔다.

    ‘사순절’은 기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한 교회사적 절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절기를 물리적인 답습(踏襲)으로 고행주의나 또는 금욕주의적인 발상에서 형식적인 재현을 위한 관점에서라면 하나님의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언약의 통전성(通典性)에서 볼 때 옳지 않다.

    사순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겨 동참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면 물리적 상황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의 참 정신을 실천적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에서 그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인들의 전 삶이 사순절의 참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을 것인 바 특별히 절기화하여 그 정신을 재확인하고 영성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진다는 의미는 큰 것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날수의 채움이나 고난을 형상화하여 프로그램화에 중점을 두고 절기의 내재적 정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해한 자를 원망 없이 용서하고, 인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고통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참 정신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은 십자가 정신에 참예하고 실천하는 영성을 일깨우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절 후 40일  / 예수님의 승천일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승천일" 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의 승천일이 되는 이유는 아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서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부활절 후 40일을 계수하여 그 날을 "예수 승천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의 말씀을 보면,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올라가실 때 곧 승천하실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승천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재림)'라는 약속 또한 우리에게 해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늘로 올리우신(=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담대히 믿음으로 자신과 형제들을 굳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할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소망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지금의 삶이 오래갈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를 풀의 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벧전1:24-2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강림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3절 "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전서 1장 7-9절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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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사순절 7주간 기도학교

    제1주 / 왜 기도하는가?

    1)왜 기도하는가?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 생활에 승리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과 나아가서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마음 문을 열고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
    보고 먼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아 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2.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성도에게 영적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4. 성도의 영혼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5.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2주 / 무엇을 기도하는가?


    약 4:2a-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어떤 것을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인가, 즉 무엇을 기도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자녀의 바람직한 기도 제목에 기뻐 응답하십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죄의 용서를 기도합니다.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일이 있으면 그 회복을 기도합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일용할 양식을 기도합니다.
    이기적이거나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입니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성령 충만하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합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제3주 / 어떻게 기도하는가?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당신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절차를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절차를 기억하면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지하면 자칫 형식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없이 말로만 하는 기도보다 말은 없어도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도의 순서 - ACTS
    Adoration (찬양, 경배) -+
    Confession (고백, 회개) +- 나 하나님
    Thanksgiving (감사) -+
    Supplication (간구) - 하나님 나
    2. 하나님을 경배 (Adoration)
    대상 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3. 하나님께 죄를 고백 (Confession)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4. 하나님께 감사 (Thanksgiving)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5. 간구 (Supplication)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외식하지 말라(마6:5) 열심히 간구하라(약5:16)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요일5:14-15) 쉬지말고(살전5:17)


    제4주 /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당연한 질문 같지만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실하고도 생생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엡 5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제5주 / 언제 기도하는가?

    언제 기도하는가?
    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므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경건의 시간으로 마련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일정하게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아침인가? 낮인가? 혹은 저녁인가?

    1. 일정한 시간을 정합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일정한"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2. 새벽 시간에 기도합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 46: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잠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3. 바쁜 시간을 피합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6주 / 어디서 기도하는가?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공부할 때 어디서 하면 효과가 좋습니까? 혼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럿이 함께 모여 하는 것이 좋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요. 거기서 하나님을 나 홀로 만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만날 수도 있습니다.
    단, 다른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1. 홀로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2.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 결론은


    제7주 /  기도 응답의 확신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이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
    마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3.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원인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난주간 일정
    고난주간 묵상자료

    (십자가의 길)

    고난 주간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에 중점을 두고 맞이한 절기이기에 그 어느 해 보다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먼저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자료는 교우들이 고난의 한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행하신 한주간의 사역을 묵상하면서 의미 있게 보내고자 정성껏 준비된 자료입니다. 요일별로 자료를 읽고 묵상하시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1 일 (고난(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1-11, 막11:1-11, 눅 19:28-40, 요12:12-19)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전도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유월절 행사에 참여키 위해, 그리고 구약 시대의 예언자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9:9)대로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과는 다른 의미의 호산나(지금 곳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면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보여진 가증스러움은 다음날 채찍을 드심으로 동안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1.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믿음과 용기를 보면서 나의 믿음을 돌아 봅시다.
    2. 오늘 주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제 2 일 (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이는 무화과로 상징되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 제물에 필요한 짐승,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고, 지역 화폐를 성전 화폐로 교환하여 주는 환전 행위도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시장화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 자신과 주의 몸된 교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이 세상을 성결케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 이셨습니다.



    1. 나의 신앙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전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 3 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1-44, 눅21:1-4)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한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두 렙돈(가장 작은 히브리 화폐단위)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 하였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많이 있는 가운데서 일부를 하였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서 신앙의 핵심은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2. 다음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여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제 4 일 (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6-13, 막14:3-9, 요11:45-53)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과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향유 한 병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노동자 한사람이 1년 동안 노동하여야 얻을 수 있는 금액)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일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일도 증거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울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 적은 없으시나요?
    3. 마리아가 만일 향유값(1년 품삯)을 생각하고 망설였다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영광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주님께 대한 봉사의 기회를 잃 어버린 적은 없나요?


    제 5 일 (세족 목요일)
    최후의 만찬

    (막14:22-24)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17-30, 막14:22-25, 눅22:7-20, 요13:26-30)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로부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심과 더불어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온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실물 교육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슬픔과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몇 번이고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깨어 있어 당신을 본받고 증언할 것을 원하십니다.



    1.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겠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제자들처럼 잠만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오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봉사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제 6 일 (성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마27:45-56, 막15:16-41, 눅23:44-49, 요19:28-30)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가지를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극하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침밷고 창으로 찌른 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던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2.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요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4.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입니다.
    5.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였다는 하나님 어린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오신 예수님의 삶의 결론입니다.


    1. 용서함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을 아시나요?


    제 7 일 (성 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마27:57-61,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자 산헤드린의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지금껏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언이 성취된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즉 요셉은 모든 눈총을 무릅쓰고 자신을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인도 받아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에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처럼 죽었고 그리고 무덤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악을 물리치시기 위해 무덤에 묻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 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 나는 남들이 주님을 외면할 때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용기 있게 주님을 찾고 따를 수 있나요?
    2.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무덤속에 장사 지내야 할 내 죄의 목록을 생각해 보세요.


    제 8 일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

    (마28:5-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8:1-7, 막16:1-13, 눅 24:25-35)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입니다. 금요일에 장사지낸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니다.
    우리 교우들은 금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의 절기로 지나쳐 보내지 마시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은;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였습니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검을 향하여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시체를 향하여 올라갔으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하고 빈 무덤과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였습니다.
    4.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관심사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향하여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The Crucified Is My Love: Morning and Evening Devotions for the Holy Season of Lent,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무료 영문 전자책을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7-8) 선지자 이사야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희생제물로 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 양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6-9>)

    세례 요한은 지금 비옥한 요단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그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그의 가르침은 번개가 치듯 날카롭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뒤섞인 무리들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은 갑자기 입을 다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예수가 군중들의 시야 앞으로 걸어옵니다. 요한은 그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고, 요한은 순전한 그 방랑자가 수천 년 동안 사모하며 기다리던 약속된 여호와의 종이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임을 알아챘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압도된 요한은 다가오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중대한 말을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선포를 통해 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오한 말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과 그분의 가장 깊은 본성, 또 그분의 뜻과 사역을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천국이 활짝 열린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인류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저주가 이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은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짐을 인류에게서 걷어 가셔서 몸소 지시고, 잃어버린 세상에 자유를 주시고 변화된 새 세상을 찾게 해 줄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이 순전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어떤 죄명으로도 고발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7). 그는 또한 죽기까지 인내하는 어린양이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신 순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범사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 거룩한 희생양이시니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온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대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신실하게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순절을 겪었고 또 얼마나 쉽고 가볍게 그것을 지나쳤습니까!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이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사순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어린양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옛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저항을 제압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이 사순절을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재의 수요일 저녁

    누가 세상의 죄를 없애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요한의 이 증언은 복음 전체의 핵심이자 정점입니다. 복음의 심장이요 별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임에 의해 요한의 입은 폐쇄당했지만, 사도들은 더 더욱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사도들 또한 죽었으나 복음은 모든 세기에 걸쳐 울려 퍼지며 사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성만찬으로 모일 때,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내리소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일과 근심, 고통때문에 짓눌릴 때가 있는데 만약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를 우리 스스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영원한 암흑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찢기고 피나는 어깨로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가신 십자가 나무는 심히 무거웠으나 저주받은 그 나무에 얹힌 보이지 않는 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게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위에 놓여진 것은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곧 온 세상의 죄와 그 책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권면하며, 요한의 “보라”는 간곡한 외침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한때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사나운 뱀에게 물렸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놋뱀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짐을 지고 대속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충만하고 깊고 감사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자면 새롭고 순수한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가장 깊숙한 곳에서 구세주의 고통을 깨달아 이해하길 원한다면 이 새롭고 순수한 눈을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눈과 영혼으로 고난당하시는 구세주를 바라보십시오. 어두운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핏방울을 쏟으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잔혹한 사형 집행인의 채찍질과 침 뱉음과 가시관을 침묵으로 견디며 재판장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 서십시오. 그리고 죽어가는 그분이 하시는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들으십시오. 상처받아 피로 얼룩진 머리, 극심한 고통으로 떨리는 팔다리, 눈물로 가득 찬 그분의 눈을 마주 하십시오.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순종,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 그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숨을 거두시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고통과 사랑으로 깨지고, 감사의 눈물이 넘칠 때까지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이렇게 영혼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마음에 품는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게 되며 그 교회는 장차 영광의 날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어린양을 영광스럽고 영원한 교회의 왕으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교회는 새 언약의 예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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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의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과 교회력 복원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의 “예배복고운동”에서 시작된 예배갱신운동은 초대교회의 예배회복이라는 과제를 통해 개신교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문화적 흐름에 맞추려는 이 예배갱신운동을 계기로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행사나 축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절기나 행사에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색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전통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에 참여하는 교단의 실천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력과 축일을 폐지한 것을 마치 어린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어다 버린 것인 양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중세의 예전과 교회력과 예배의식을 버린 것이 예배의 통전성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예배복고 운동가’들의 주도하에 중세의 전통을 다시 도입하여 예배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서도 예배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혼란을 불러왔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목회적 지침과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사순절에 대한 관심은 교회력과 절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보다 큰 움직임의 일환이다. 예배를 비롯해 기독교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적응하려는 경향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단을 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예배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 글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는 사순절에 대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개혁주의 신앙고백, 그리고 청교도 신학과 더불어 다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기사들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1. 고대 교회의 교육중심의 사순절


    고대 교회의 사순절은 세례식과 연관되어 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배운 후에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3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고서 교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였으며, 세례 받을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맞이할 교우들이 함께 금식하기도 하였다. 어떤 교회는 세례를 받기 전에 40시간 동안 금식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사순절(quadragesima, ‘40번째’라는 뜻으로 ‘40시간’ 혹은 ‘40일’을 가리킴)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두 주간 동안 부분적인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세례를 위한 교육을 받는데 있어 기간이나 방식이 달랐다는 것은 그에 대한 사도적인 전통이 부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교육들이 있었지만, 부활절 때에 시행될 성례를 위하여 수제자들을 교육하고 금식과 기도로 준비함으로 그들은 사순절을 실행하였다.

     

    이런 사순절이 고대 교회에서 정착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의 일이다. 4세기의 교회들은 부활절 전의 일곱 주간 동안 매일 3시간의 세례를 위한 교육을 시켰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이런 시행은 제국의 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사순절을 40일로 정하고 부활절에 있을 성례를 준비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교회가 40일을 지킨 것은 아니고, 40일을 정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했다. 어느 교회에서는 수난일 6주일 전부터 계산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회는 8주일 전부터 금식을 하되, 토요일과 주일은 제외하고 일주일에 5일씩 금식이나 절식을 하였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7주일 전부터 금식의 날로 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여섯 주일을 제외하여 40일을 맞추어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니케야 종교 이후로 정해진 사순절이 형식을 갖추고 모든 지역에서 실행된 것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로마 교회가 교회와 세속의 모든 권리를 장악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정치적인 기초를 놓았던 레오 대교황(Pope Leo I, 재위기간: 440-461)은 로마의 전통을 따라 주일을 제외한 6주일을 금식의 날로 정하여 36일을 지켰고, 7세기에 다른 교황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the first day of Lent))부터 토요일의 4일을 더하여서 40일로 확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일곱째 주일 월요일부터 부활절 9일 전 금요일까지를 사순절로 지켰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보다 2일 먼저 시작하고 8일 먼저 끝났다. 동방 교회는 주일을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40일의 금욕 기간을 지킴으로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순절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카니발 축제로서의 사순절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게르만 족의 축제와 결합하면서 더 변질되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지는 시기에 그들은 3일 동안 사육제(謝肉祭, Carnival, ‘고기를 금한다’의 뜻)의 축제를 하고서 40일 동안 금욕하였다. 금욕의 방법도 지역마다 달랐다. 육류와 달걀은 금하고 빵만 먹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생선까지 허용하는 곳도 있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우유를 포함한 낙농제품의 모든 음식까지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엄격한 금식을 행하기도 했지만, 낮에 한 끼만 먹고 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관습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것이 춘궁기(春窮期)를 이기는 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사육제에서 큰 잔치를 하고 봄 농사를 준비하는데 처음 수확할 때까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식을 하였고, 여기에다 종교적인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사순절은 고대 교회의 사순절에 비하여 매우 변질된 내용을 가졌다. 중세에서는 성례가 약해지면서 사회적 성격을 지닌 정교한 예식으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이런 축제의 후에 있을 로마 가톨릭의 금식의 전통인 사순절 이후에는 사회적 범죄가 훨씬 더 기승을 부렸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축제가 끝날 무렵 마지막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에 이르러 성체성사(미사 중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축성 기도와 성찬 재정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되는 거룩한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죄책을 지울 절호의 기회를 갖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사람들은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당 앞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자기의 죄를 써서 거기에 못 박기도 하였다. 수난의 금요일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고 거기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은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공로를 가미한 미신적인 전통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을 준비하고 참여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주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려고 금식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행하는 금식 자체가 강조되고, 수난극 자체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사람의 선행을 강조하려는 로마 교회의 신학과 직결되어 행위 구원까지 연관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순절 비판

    1. 미신적 풍습에 대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비판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말씀만을 높였던 개혁자들은 사순절이 미신적이며 이방 풍속이 가미된 비신앙적인 실행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의 선행이 강조되었음을 칼빈은 지적하였다. 물론 고대 교회에서도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어 왔다. 그들이 이렇게 해 왔던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여. 지도자들이 이것을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경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내려온 것임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마 4:2, 기독교강요, 4권 12장 20절). 당시에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을 모방하려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실행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믿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의지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칼빈은 다수의 고대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사순절에 대한 고대교회의 약점과 특별히 로마 교회의 그릇된 사순절 시행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사순절의 관행이 복음을 가리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어조로 사순절 시행을 비판한 것이다.

    2. 미사와 비슷한 실행에 대한 비판

    중세 교회는 사순절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극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미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전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미사와 동일한 우상숭배이며 미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성찬의 떡과 잔이 사제가 축성(祝聖, consecratio)하는 순간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인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둔다.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에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31절). 로마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고 기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교회의 사순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천주교에서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사순절을 지키라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미신적인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규정한 것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양심의 자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3. 사순절 금식에 대한 비판으로 개혁의 기치를 든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1522년 3월 9일 츠빙글리는 당시의 취리히 시의 출판업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사순절 금식 전례를 깨고 소시지를 먹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했기에, 그 벅찬 일을 감당하느라 스위스 소시지를 충분히 먹었다. 취리히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그들의 행동을 묵과해 주었다. 사순절이나 금식 같은 인위적 절기 전통은 성경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경이 신앙과 행습 문제에 있어 최종 권위이기에, 성경적인 바탕이 없는 사순절과 그 준수는 간과해 넘길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 후 츠빙글리는 [선택의 자유와 음식 고르기의 자유]에 관하여 설교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의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더 악해져 가고 더 부패해져가는 시대의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평민들은 사순절에만 참회를 하고 금식을 준수하고, 성찬을 하기만 하면, 일 년 내내 범사가 괜찮다고들 생각할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식철인 사순절 때에만 신경을 쓰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역행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순절의 금식에 대하여 츠빙글리 중심의 취리히와 콘스탄츠의 가톨릭 주교단(Prince-Bishopric of Constance, 585년부터 1821년까지 존재함) 사이에 논쟁의 내용이 있다. 1522년 4월 7-9일 사흘간, (스위스-독일 국경도시인) 콘스탄츠의 주교가 보낸 대표단이 취리히에 도착하여 취리히의 사순절 금식 불이행 건을 놓고 시의 성직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522년 사순절 기간 중 츠빙글리는 사순절 육식금지 전통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는 설교를 했고, 이에 따라 그와 함께 했던 몇몇 형제들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했다. 이것이 당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콘스탄츠 주교는 강력한 대표단을 보내어 전통적인 금식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츠빙글리 일동과 주교대표단은 취리히에서 만나 해당 이슈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4월 9일, 행정관은 사순절 금식 준수 위반에 대한 금지 선언을 했고, 위반자는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4월 16일 자유로운 육식에 관한 논고로서 자기 방어를 했다. '선택과 음식의 자유'라는 이 논고는 그의 첫 저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런 중립적 사안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있고, 교회당국은 이 자유를 금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사도바울의 입장을 취했다(고전 8:8; 10:25; 골 2:16; 딤전 4:1; 롬 14:1-3; 15:1-2),

    이에 대하여 콘스탄츠 주교는 신성한 교회 규정을 방어해 달라고 권면하는 내용의 칙령을 5월 24일자로 취리히 시정부에 발부했으며, 이단적인 교리들의 확산을 막으라고 경고했다. 츠빙글리는 위기에 빠졌고, 거듭 암살협박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대한 논쟁이 츠빙글리의 취리히 개혁의 발단이 된 셈이다. 그는 성경을 붙들었고 콘스탄츠 주교는 전통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개혁교회의 절기에 대해 언급한 고백서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갖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으며,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 예배는 없었다.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지만, 다른 절기들은 없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 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다.
    네덜란드에서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미신 :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식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선지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그의 단편집 3,Ⅰ].

    2. 츠빙글리 67개 신조(The 67 Articles, 1522)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 24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a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조 :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Westminster, the Form of Church Government), "공적 예배의 날과 장소에 대하여"

    복음 시대에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어느 날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각종 절기들이라고 말하면서 지키는 행해지는 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장이 없으므로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당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경우에 그럴 이유와 기회가 백성들에게 주어질 때에 하루나 여러 날을 금식이나 감사 날로 구별하는 것은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절기에 관한 대회와 총회

    1556년 에딘버러(Edinburgh) 대회와 1577년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부활절, 크리스마스 날과 그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절기 때에 성찬을 집례 하는 목회자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을 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것을 시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1638년 글라스고우(Glasgow) 총회(11월 찰스 1세에 반발하여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진 스코틀랜드의 총회)에서는, 교회의 다양한 절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증되지 않음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좋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목회자들은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좋다고 명문화 하였다.

    청교도들의 사순절 철폐

    킬빈의 입장을 따라 청교도들은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 남아 있던 인간들의 규례를 철폐해 나가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고 청교도들을 존중하는 이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이 기간 어떤 특정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히 사순절 금식이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 전체가 헛된 거짓 금식에 불과함을 알았다.
    교회들이 ‘재의 수요일’에 사순절 참회기간의 시작을 알리고, 금식과 (육식 등의) 절식을 알리며 14살 이상의 사람들은 육식이나 고기로 된 어떤 음식도 삼가게 하고, 18~60세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그들은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개혁신앙의 근본적인 원칙은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만 교회의 여러 행위를 한다는 원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명백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기독교의 절기들을 거절하였다.
    사순절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십자가와 고난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는 루터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순절 기간을 지켜가는 루터파, 성공회와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에 의지해 예배와 교회의 모든 일을 하려던 청교도적 개혁교회가 이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순절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의 입장

    현재에도 다수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파와 교단들이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제84회 총회 결의를 통해 사순절 지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8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83회 총회 보고서에는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인가?' 라며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라고 했다.(제 83회 총회 보고서 p.369-420).

    이듬해인 1999년 9월에 있었던 예장합동 제84회 총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만들어낸 사순절을 개신 교회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기로 결의했다. 제84회 총회보고서에 실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순절 문제에 대한 예장합동 제84회 총회 보고서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행사이다.

    이 40일간에 로마교회는 금식을 하고 금식을 권장하고 또 음식을 제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 고기 양을 점차 줄여가다가 고난 주간과 특히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금지하였다.

    2. 종교개혁은 사순절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 기독교강요 IV. 12).

    3.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였다.

    금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거짓되고 유독한 의견으로 부패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제시하였다(강요 IV, 12, 19).
    하나님도 마음의 변화 없이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대로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은 가장 큰 혐오라고 제시하였다. 또 금식을 의무인 것처럼 엄격하게 지킴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강요 IV, 12, 20).

    ​4. 칼빈은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킴이 널리 퍼졌다고 개탄하였다.

     사순절을 지킴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착각하였고, 예수의 모본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 연례적으로 행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주님은 모범을 위해 금식하지 않고 복음 선포의 장비로만 금식하였다고 칼빈은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반복적으로 금식하지 않았고, 구약에서 모세가 금식하였지만 선지자들이 그 모본을 따라서 금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강요IV, 12, 20).

    ​5. 사순절 기간에 로마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 예배가 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여겨 고기는 금지시키고 다른 단 것들을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먹었다.

    오히려 더 성대히 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금식하였다고 칼빈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금식이 폐지되었다고는 칼빈이 결코 말하지 않고 재난의 때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할 것으로 말하였다(강요 IV, 12, 17).

    6. 우리 교회가 이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채택하여 지키기로 하면,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해야 하고 또 고기를 그 기간에 먹지 않게 되며, 그러면 고기 먹는 것을 위해 사육제를 열 것이다. 그래서 많이 먹고 점점 줄이다가 완전히 금하는 일을 할 것이다.

    7. 40일간에 걸쳐서 사순절 금식과 고기 금지 등을 하고 철야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이런 경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양심이 심히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 참가하면 정상적인 사업과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형식이 되고 외식적이 되어 로마교회처럼 절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8.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면, 로마교회가 지키는 많은 다른 교회 경절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강절, 주의 현현절, 삼위일체 주간 등등 참으로 많은 절기들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9. 사순절과 다른 절기들을 로마교회의 습관대로 지키게 되면,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 이럴 바에는 이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母)교회인 로마교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제103회 총회에서는 제84회 총회결의를 재확인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하고 찬송가 교독문의 사순절 교독문은 사순절을 제하고 사용하도록 결의 하였다.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난주간을 오래도록 지킴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은혜롭게 시행해 왔다.

    오늘의 교회와 사순절 절기

    사순절을 절기로 지키는 예전을 중요시하는 교단도 있고, 특정 기독교 미디어도 공공연히 이 절기를 지킨다.
    재의 수요일에 죄 목록을 작성하고 태운 후, 그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이것은 제 2계명에도 이탈된다.
    사순절은 결국 로마 가톨릭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기간에 선한 뜻에서 자신을 절제의 시간에 머물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회들도 많다.
    또 그런 분들과 여전히 우정을 같이 하지만,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면 사순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근래에 많은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본받아 고난 주간과 더불어 사순절을 지키고 있다.
    기독교 서점가에서 봄철 베스트셀러는 ‘사순절에 대한 묵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하되 사순절 기간에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다.
    수난 주간에 상영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는 중세의 수난극 전통을 할리우드식으로 각색한 영화이다.
    감독인 멜 깁슨(Mel Gibson)은 보수적인 로마 교회 신자로 마리아의 시각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마지막 12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그는 그 영화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어떤 교회는 교회에서 단체로 그 영화 전체를 관람하는 것으로 수난 주간 집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행하여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신 그 주간과 금요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지나쳐 수난의 40일을 지키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나 이에 유추하여 믿음으로 시행해왔던 교회사적인 근거도 없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의 교훈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사순절을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복음의 근본을 허무는 매우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가톨릭의 영향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사순절을 비롯하여 교회의 절기를 규정한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 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뒤섞이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계속 싹터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 뿐 아니라 교회력 자체를 철폐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이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을 지속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며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적용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순절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행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으로 내려온 사순절을 지정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를 좇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의 발상이며, 이는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일에 불과하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과연 성도들이 성경의 의도를 따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있을까?
    성도들이 하루를 금식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보다, 금식 후에 또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고 즐기는 것에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사순절에 따라 그때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여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도자들은 그 비성경적인 그릇됨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어디에도 교회가 절기 속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금하여 왔었다.
    왜냐하면 개혁신앙 선배들은 이 사순절 시행이 ‘그리스도에 반(反)’하는 것으로 얼마나 불신앙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재현하며 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이 고난은 누가 함께 받아보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고난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아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배척하였고,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가게 하였다. 우리는 사순절 행사로 우리의 경건의 의를 세우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들도 함께 미움을 받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여 드러낼 자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겪는 복음 전파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게 되는 고난이 따름을 말씀했다.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과 같은 인위적인 행사를 만들고 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등에 져보고 나무에 묶여 보기도 하고, 못에 박혀 보기도 한다고 해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이란 이런 특정한 기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껴보고 체험해 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말하여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오직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도록 권면 받고 있다(히브리서 12:5).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삶은 사순절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19
    “그러므로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정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사순절은 ‘절기’로 ‘꾸며낸 겸손’과 ‘과장’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기도 기간을 만들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새벽기도를 체질화 하기,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이나 TV 시청하는 시간을 없애기, 회개 운동, 소외된 이웃 돌보기 등에 더욱 역점을 두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더욱 보람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되,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좌우되지 말고, 십자가 사랑의 신앙 회복, 경건과 기도의 생활화, 나눔 운동의 확산, 사랑을 기반으로 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시간을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삶이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특별한 절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 곧 개혁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배들이 강조하며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매일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순절 뿐 아니라, 신앙생활 방식 중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상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고, 믿음의 유추에 따라 집약되는 것들과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와 성경적인 교리에 합당한 도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생활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부활절(復活節)

    부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자 서구권 국가들의 연중 최대 명절이다.



    고난(苦難)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2022년 고난주일을 맞이하며(4월 10일) 고난주간을 시작합니다(4월 11일-16일).
    고난이란 의미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고난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그럼에도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은 아주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그 구멍의 지금은 2mm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어른 나방으로 되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을 낳는다.
    생물학자 한 사람은 이 사실을 매우 눈여겨보았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이 딱하기도 하고 또한 신기하기도 해서 나방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학자는 특별히 제작한 가위로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6mm 정도 되도록 넓혀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학자의 예상대로 더 큰 구멍을 통해 나온 나방들의 크기가 더 컸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자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속도가 더디었으며, 날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알도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덩치만 큰 쓸모 없는 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자는 보고서를 통해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그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통해 건강해 지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결론 내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국 크고 쓸모 없는 나방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역경을 피해 편한 길로 가려 하거나 변화를 피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역경과 변화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에고치의 사례처럼 역경과 고통 없이는 훌륭한 나방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삶에 있어 역경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역경과 고통은 우리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또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역경이 두려운가?
    변화를 거부하는가?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과 변화를 훌륭한 성장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 당신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결코 없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 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 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 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은 어떠한 험한 세상에서도,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잘 이겨나가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같이 어려움이 없이, 크게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각종 고통과 좌절, 역경과 온갖 슬픔들이 오히려 연단이 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반석이 됨을 잊지말고 시련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잘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자기 십자가(Self Cross)

    마태복음 16:13-24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고 고백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날 것이라”(21절)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재빨리 대답했다.
    주님은 그를 ‘사탄’이라 부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 하시고(2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24절).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다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부인 (Self Denial)

    자기부인은 ‘자기 생각과 뜻’의 부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
    우리가 주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선택의 기준은 내가 아닌 주님이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바다에서 그 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을 한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장)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자기 부인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육의 사람을 부인하고 영의 사람이 되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육의 사람은 삶의 목적과 동기가 세상이 되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사는 사람이다.
    영의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자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예화) 워치만니를 찾아와서 계단식 논의 맨 위쪽 주인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에 대한 답변

    둘째, 겉사람을 부인하고 속사람을 다듬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이란 죽어 흙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을 말하고, 속사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한 영의 사람을 말한다. 보이는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예화) 육체의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어느 여인의 고백

    셋째, 옛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이 되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바울은 우리의 거듭난 상태를 의복과 비유를 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냄새 나는 옛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새 옷을 입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예화) 어느 설교자의 고민

    자기 십자가
    (Self Cross)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인으로 인한 십자가이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의 고난을 간과할 때가 많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인데, 다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지 않고 살려니까 그것이 문제이다.
    또한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바로 자기 십자가 이다.

    베드로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루터포드 (Samuel Rutherford)는 “새에게서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간다.” 했다.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키는 것고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자기 십자가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난 (Pa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십자가와 연관 짓는다.
    자식이 사고를 치면 ‘자기 십자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십자가’, 사업이 망해도 ‘자기 십자가’, 시험이 떨어져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지로 인한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믿음과 연관된 고난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 십자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이고, 믿음을 지키려다 받는 고난이며, 믿음을 전파하다 받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예화) 주일 성수를 위하여 주일 날 가게 문을 닫아야 헀던 상인의 고백

    (예화) 이비인후과 의사의 고민

    둘째, 사랑 (Love)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의 십자가’로 승화시켰다.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개, 하라는 것 248개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 (Commission)이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 (Omission)이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의 요약은 마태복음 22:36-40절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람’이다.
    ‘사랑’이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에 있다.

    사랑에는 4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친구의 사랑인 펠레오,
    부모의 사랑인 스톨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화) 배우자를 찾는 젊은이 '믿음만 좋으면...'

    셋째, 사명 (Mi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이를 ‘지상최대의 위임’(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보통 ‘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뜻은 ‘위임이고 위탁’이다. Com+mission은 ‘함께'(Com)와 ‘사명’ (Mission)의 합성어이다.

    ‘Mission’에는 ‘사명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곧 선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것이 ‘Commission’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 아니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 부인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빌 1:21)라고 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사순절 (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을 배우는 절기이다. ‘사순’ (四旬)이란 40일을 뜻하는 말로 근신과 금식으로 자기 절제를 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이다.
    재의 수요일 전날을 불어로 ‘마디그라’ (Mardi Gras)라 부르며, 이는 ‘뚱뚱한 화요일’ (Fat Tuesday)이란 뜻으로 ‘영양보충’하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호주에서는 ‘마디그라’가 ‘퀴어 (Queer) 축제’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혼의 닻과 돛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 신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저자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언급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유대인인 신자들에게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히브리서 내용은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의 모형들을 열거하면서 새 언약의 주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성경에 종종 ‘반차 (班次)’란 용어가 등장한다. 아론의 반차, 멜기세덱의 반차가 그것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반차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에만 5번 등장한다. (히 5:6,10, 6:20, 7:11,17) 사전을 찾아보면 반차 (班次)의 동의어는 계열 (系列)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히브리 기자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고’ (히 7:3),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 (히 5:6, 7:17)’이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멜기세섹의 반차’의 의미는 육신의 혈통이 아닌 영적 혈통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의 제단 위에,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읽고 감동을 받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원래는 지옥의 문 윗부분에서 지옥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작은 형상이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만들어,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하게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켰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란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시편 107편에는 인생을 항해로 비유하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바다는 순풍에 돛단 것 같이 순조롭지가 않다. 높은 파도, 강한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등으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적지가 없는 배는 표류하지만, 목적지가 있는 배는 항해한다. 우리의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은 그곳을 ‘소원의 항구’ (시 107:30)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소원의 항구’를 향하여 낮에는 돛을 높이 올려 전진하고, 밤에는 닻을 깊이 내려 휴식한다. 닻과 돛은 항해의 필수품이다.

    나는 1979년 4월 17일에 입대했다. 군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쯤 큰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자신의 군 생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출항하기 위해 닻을 올리던 중 줄이 풀리면서 닻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부대원 중 한명이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 들어 줄을 연결한 후, 닻을 올리고 출항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 닻의 기능은 배를 정박하게 한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출렁일 때, 닻을 깊이 내린 배는 흔들릴 수는 있지만 파도에 쓸려가지 않는다. 쉼 없는 거센 물결과 바람 앞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균형과 절제와 안정의 추이다. 항구에 돛을 내린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정박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 배는 돛을 올리고 출항해야 한다. 순풍에 돛을 올리면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역풍에도 삼각돛은 전후의 압력 차이로 전진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닻을 내려 정박해야 하고, 낮이 되면 돛을 올려 항해해야 한다. 세상의 바다에서 소망이 ‘영혼의 닻’이 되고, 소망이 ‘영혼의 돛’이 되어,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오늘도 믿음으로 항해하자.

    종교개혁과 3명의 사람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 루터가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츠빙글리’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문과 비슷한 67개 개혁안을 내놓고, 취리히 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는 루터보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연합을 위해 두 사람이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견은 일치하였으나, 성찬에 관한 이견(異見)으로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가톨릭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애 반대는 했지만 루터는 ‘공재설’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기념설’ (Memorialism)를 주장했다. 연합을 상징하는 성찬식이 개신교 최초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개혁의 2세대인 칼빈은 두 사람의 의견을 절충하여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을 내놓았다.

    첫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505년 5월부터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약 2달 뒤, 고향인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옆으로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루터는 번개가 떨어지자 큰 두려움에 떨며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했다.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16살 아래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가 개혁이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을 때이다. 카타리나가 소복을 입고 루터에게 갔다.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냐”고 화를 내자, “당신이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하나님은 죽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후 루터는 ‘살아계신 하나님’ (living God)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둘째,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루터와 더불어서 종교 개혁의 양대산맥이다. 츠빙글리의 신학의 핵심은 성경이다.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고 했다. 1506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글라루스의 성직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 희랍과 고대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에 대해 배웠다. 이 기간에 인문학자이자 성직자인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던 츠빙글리는 어거스틴과 바울 신학을 독학했고,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1522년, 츠빙글리는 그의 사상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67개 신조’를 작성했고, 다음해인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공개토론을 개최하여 ‘67개 신조’를 중심으로 로마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다. 그는 두 차례나 군종 사제로 이탈리아에 갔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체험을 바탕으로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츠빙글리는 성서주의 영향 때문에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은 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루터가 개인의 신앙 양심에 근거했다면, 츠빙글리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별히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였다. 스위스 용병은 용감하기로 정평이 났었다. 아직도 바티칸 근위병은 스위스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성서학자이며, 프로테스탄트요, 진보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다. 츠빙글리는 인생의 황금기인 47세에 전사하고 개혁의 바통을 다음세대에게 넘겼다.

    셋째, 존 칼빈 (Jean Calvin, 1509~1564)

    칼빈은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태어났다.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혹은 ‘장 칼뱅’ 등으로 부른다. 영어로 ‘존 칼빈’이고 불어로 ‘장 칼뱅’이다. 루터나 츠빙글리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다.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아들에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그는 파리에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쳤다. 1532년에는 부르주에서 법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는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개신교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됐고, 칼빈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됐다.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요약하고 교리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그의 저작 동기 속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부탁했다. 칼빈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된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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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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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예식(2022년)(2023년)(2024년)



    2025년 1월 5일 신년주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το ποτηριον της ευλογιας ο ευλογου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αι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τον αρτον ον κλω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σω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 호 율로구멘 우키 코이노니아 에스틴 투 하이마토스 투 크리스투 톤 아르톤 혼 클로멘 오키 코이노니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스틴.

    * 잔(4221)  πο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21

    1. 잔.   2. 마 23:25. 3. 고난
    발음 [ pŏtēriŏn ]


    * 축복(2129) εὐλογ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εὐλογέω 스트롱번호 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눅 24:50
    발음 [ ĕulŏgĕō ]


    * 몸(4983)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σώζώ 스트롱번호 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 그리스도(5547)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 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 1:1
    발음 [ Christŏs ]
    어원 / 5548에서 유래

    χρίω 스트롱번호 5548

    1. 기름 붓다.  2. 기름 바르다. 3. 눅 4:18
    발음 [ chriō ]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은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성찬예식 때 사용한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024. 12. 01 성찬예식주일

    2024년을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하여 매월  첫주일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 기독교도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허벅지 살을 베었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파피 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참으 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습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 주셨으니 너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떡에 대한 두 개의 본문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The blood will be a sign for you on the houses where you are; and when I see the blood, I will pass over you. No destructive plague will touch you when I strike Egypt.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히브리 민족은 오직 피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만났던 두 관원들 한 사람은 술맡은 관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으나 떡 맡은 관원은 사형을 당합니다.
    술과 떡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그 떡과 그 잔을 분배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떤 술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나누신 후에 십자가 형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의 피와 떡이 없이는 우리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피(담. dâm) דָּם 스트롱번호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דָּמָם 스트롱번호 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참고 정보

    연관 단어
    ☞ 피(창 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피는 생명이다(창 9:4).
     따라서 피흘림은 생명의 허비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죽음의 천사가 다시 죽음의 피가 발려 있는 집을 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속의 피이다.
    즉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가죽을 만들기위해 잡은 짐승의 피로 예표되었듯이(창 3:21), 장차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건질 수 있음을 뚜렷이 계시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다(요 6:54. 엡 1:7. 벧전 1:1)

    떡(레헴) לְחֶם 스트롱번호 3900

    1. 음식.  2. 연회. 3. 떡.
    발음 [ lechem ]
    어원 /  남[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3898. 먹다. 싸우다. (라함)  לָחַם 스트롱번호 3898

    1. 먹다.  2. 싸우다. 3. 니팔형 נִלְחַם
    발음 [ lâcham ]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떡굽는자  אָפָה 스트롱번호 644

    1. 요리하다. 2. 분사형 אֹפֶה로 쓰일 경우 ‘빵굽는 사람’의 뜻을 가짐.  3. 완성되다
    발음 [ ’âphâh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바로의 탄일
    - 이날은 하나님께서 꿈 해석의 성취를 위한 날로 이미 예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거대한 잔치와 함께 각종 죄수들이 왕의 특별사면을 받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例)는 신약 시대 헤롯의 생일에 침례 요한이 처형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마 14:6-11).


    지오바니 파피니 (희생적 사랑)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기독교도로서 교회를 몹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또 한번 허벅지 살을 베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들 파피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피맺힌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 에미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으니, 아들아, 너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이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지오바니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
    이탈리아의 소설가 및 평론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수다한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1903-1907), <보체>(1908-1914), <라첼바>(1913-1915)의 여러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 및 철학자)의 프래그머티즘이나 베르그송(프랑스의 철학자, 1859-1941)의 직관주의를 도입하여 금세기 전반(前半)에 있어서 문예사상계의 주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양의 철학자>(1906)나 <24의 뇌수(腦髓)>(1912) 등은 이 시기의 주저이다.

    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1912)를 발표하고 난 후부터는 이상주의로 기울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상계의 퇴폐상을 목도하고는 거꾸로 유신론으로 쏠려, 청년시절에 그렇게 매도(罵倒)하던 (神)을 인정하고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전(傳)>(1921), <성 아우구스티누스>(1930)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감각 마비라는 기병(奇病)에 걸렸으면서도 두뇌만은 명석의 도를 더하여 <불행한 자의 행복>을 구술(口述)로 발표하였다.







    06-02-2024
    3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신약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그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왜 그 작은 떡을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주셨을까?
    과연 작은 떡덩어리가 그렇게 많은 군중들을 위하여 배부르도록 먹을만큼 나눠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그 떡은 입으로 들어가서 굶주린 배를 배부르게 하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많은 무리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이 곧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나눠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오늘 성찬의 자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생명의 양식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음료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까?
    살과 피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살에 못을 박히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춤을 추며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 고운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서 백성들에게 그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왜 금송아지를 불에 태웠는가?
    이 과정은 순금으로 제련하는 것으로 순금가루를 물에 풀었을 때 그 물이 금색이 아니라 붉은색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장차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죄 사함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맛ㄹ 물이 없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잔은 용서를
    떡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2024년 상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함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떡을 함께 먹고 마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령한 에너지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6:58b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만찬에 대하여 (I)

    마태복음 26장 26-28절 26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2-25, 눅22:14-20, 요13:21-30)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르게 성만찬을 기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만찬의 "유례"는 출애굽기 12장 첫 유월절/무교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2장 8-11절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시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마26:19-20)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신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실 것과 피를 흘려주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유월절 양은 먼 훗날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셨던 떡과 포도주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것을 미리 증거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먹는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니어야 하며, 마시는 포도주 또한 육신의 포도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떡"에 관련된 말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5-12절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셨을 때 그제야 제자들은 육신의 떡이 아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예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인지 우리는 꼭 그 뜻을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3-4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위의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리신 상태였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라는 것을 마귀는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떡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아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한 놀라운 기적입니다(요6:9-13).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는 이 큰 기적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25-27절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위의 말씀과 같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육신의 떡을 위해 찾는 것임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양식에는 "썩는 육신의 양식"과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있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이 썩어질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적을 통해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요6:35)을 먹고자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그것에 만족되지 못했을 때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68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을 먹으라 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어처구니 없게도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자 중 여럿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떡(양식)을 먹여주실 때는 큰 무리가 따랐지만, 정작 영생하는 예수님의 살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 할 때는 다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위해 오신 분이지 우리의 육신의 것 때문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눅12:13-14).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믿음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때문에, 그 말씀 먹기를 사모하여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을 때, 이는 육신의 떡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누룩이 섞이지 않는(출12:15)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7-8절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예수님의 말씀, 벧전2:1-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을 때에는 자신의 생각은 없어야 합니다(고후10:5). 예수님께서 자신의 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여 유월절 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것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의 생각과 지혜, 세상의 이론적인 것들을 버리고, 순전한 어린 아이와 같이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아멘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덧붙여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또한 성만찬 때에만 행할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날마다 행해야 할 일입니다.

    성만찬에 대하여 (II)

    "포도주(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피로 비유로 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는 우리로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시는 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유례가 되는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에서도 "피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넘어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피에 죄사할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죄인이었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피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양의 피로 대신케 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출애굽기 24장 8절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서 9장 18-22절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위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흘려주신 피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피를 우리의 문설주에 발라야 하고, 다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자는 살 것이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가 죄를 속함 같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죄를 속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는 곧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행전 10장 43절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우리가 예수의 피가 예수의 이름임을 알게 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는 것과 예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기 위해, 예수의 피를 마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을 위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2:4).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운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싸움입니다(눅9:23-24, 눅14:25-35, 빌3:7-8).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3:17)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장 7-8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문설주에 피를 바름과 같이 우리의 전면에 예수의 이름을 내세울 때에, 그 이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요일2:12, 롬4:6-8), 그 예수의 이름 때문에 심판을 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겔20:8-9,13-14,21-22, 계14:1, 계20:4-6). 혹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삶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셨고, 앞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41절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후에 우리가 당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겠다고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피를 받아 마시는 자(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로마서 8장 17-18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결론의 글.

    성만찬을 지키고자 할 때에 의식과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만찬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 때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으로 깨달음 받고 그것을 기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만찬에 대하여 성경으로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도 쉽게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서 아래와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34)절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위의 말씀은 성만찬의 예식이 어떻게 빨리 변질되었는가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여주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단지 성만찬의 의식과 형식만이 남았을 뿐이고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모임은 유익이 되는 모임이 아니라 해로운 모임이라고 규정하셨고, 이처럼 유익이 되지 못하는 모임은 결국 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1:12-1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도 성만찬에는 참석하였지만 오히려 사단이 들어 곧 나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요13:21-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구약의 율법을 따라 대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지키려고 하였지만, 정작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고, 누룩 섞이지 않고 순전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만찬의 형식과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 금은보다 승하게 여기며(시119:69-70),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약4:10, 골3:17)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서 성만찬은 반드시 대대로 기념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아멘!




    어머니 뱃속에서 겪은 역경…“자라면서 정신 건강에 영향 미친다”


    산모가 역경을 겪으면, 그 영향이 태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어머니가 역경을 겪으면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함께 역경을 겪은 태아는 태어난 뒤 인지장애나 우울증 등을 겪을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임상과학연구소(SICS)는 어머니가 임신 기간 중 생활이나 환경, 신체적 어려움을 겪으면 아이에게 장기적으로 인지와 정신 건강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최근 밝혔다.
    아이들의 뇌가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 속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멘탈 헬스’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태아가 겪는 역경(ELA)’을 정량화하기 위해 항목별 ELA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채점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임신 중 산모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가족 구조와 재정 상황 등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팀은 아이들의 뇌 발달 속도를 모델링하기 위해 4.5세, 6세, 7.5세 아이들 549명을 대상으로 MRI 뇌 스캔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정신 건강장애가 아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 궤적을 추적하는 연구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면 그 체험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11-05-2023
    11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성찬예식은 언약의 완성을 위한 예식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특징을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신약의 언약의 특징은 믿음 언약이라고 합니다.

    행위 언약에는 노아 언약(무지개), 아브라함 언약(할례), 모세 언약(십계명), 다윗 언약(영원한 왕위 계승)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행위 언약은 완전히 실패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로 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언약의 완성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내려 놓으신 사건입니다.
    자기 몸을 내려놓기 전에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려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받는 떡과 잔은 언약의 완성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죄인이 언약의 완성된 예식에 따라 그 떡과 그 잔을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11월 한 달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몸길이는 대체로 50mm-60mm로 황강달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주로 물이 맑은 하천 중류 기수구역이나 2급수 또는 물풀이 많은 곳에서 살며 새우나 작은 수서생물,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국내에선 강원도경상북도의 일부 및 제천시의림지 등에 분포하며, 북한 중국 일본 등에도 존재한다.
    먹을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식용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희박하다.

    대부분의 다른 어류들과는 다르게 가시고기는 알을 보살핀다.
    수컷이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수초로 둥지를 만들어 놓으면 암컷이 와서 교미한 후 알을 낳고 죽거나 떠나 버린다.
    그리고 수컷은 알을 보호하다가 새끼가 부화하면 죽고, 태어난 새끼들은 죽은 수컷의 살을 뜯어먹는다.
    수컷은 자기 몸까지도 새끼의 먹이로 내준다.
    이 습성은 알을 낳은 이후로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 여타 어류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특이한 습성이며, 부성애를 강조할 때마다 인용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09-03-2023
    9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Then he took the cup, gave thanks and offered it to them, saying, "Drink from it, all of you.

    장로교회의 예전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교회 헌법으로 이렇게 규정하였지만 성경은 이런 규정보다 더 폭넓은 성찬의 참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예식의 자리에 가룟 유다가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유다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도 성찬의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All of you(너희 모두 다)

    이것을 다(아우투 판테스) / αυτου παντες

    846.
    αὐτός, ἡ, ὁ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 12:36 /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 예수
    발음 / 아우토스[ autŏs ]
    어원 / [재귀] αὖ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로) 그(마 1:20).
    신약 성경 / 5601회 사용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1. 매
    2. 모든 종류의
    3. 어떤 것이든지다
    발음 / 파스[ pas ]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 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떡과 잔은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같은 죄인도 떡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문제는 그 떡과 잔이 정말 나의 죄를 용서하는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 넘길 흑심을 품은 도둑같은 사람들이 먹고 마신 후에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참된 성찬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08-06-2023
    8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1. 생각나는 것,  2. 기념,  3. 기억
    발음 / 아남네시스[ anamnēsis ]
    어원 / 3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눅 22:19, 고전 11:24, 25), 생각하게 하는 것(히 10:3).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63. 아나밈네스코(ἀναμιμνήσκω)
     
    1. ~에게 ~을 기억나게 하다,  2. 기억하다
    발음 / 아나밈네스코[ anamimnēskō ]
    어원 / 미래 ἀναμνήσω,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μνήσθην, 303과 34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되다(막 14:72), 생각나다(막 11:21, 고전 4:17), 생각하다(고후 7:15, 히 10:32), 생각 나게 하다(고전 4:17).
    신약 성경 / 6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의 젖과 어린 기름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가복음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축복하시고(율로게오) - 찬양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축원한다.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 εὐχαριστέω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15:36, 막8:6, 행27:35), 감사 기도하다(마26:27, 눅22:19), 감사하다(눅 18:11, 요11:41, 고전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07-02-2023
    7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개역 개정 호세아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알지 못하도다 / 로 야드(לֹא יָדְעָ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
    빵은 생명을 상징

    북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호세아(여호와는 구원)는 무너지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을 바알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주신 것인지도 알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성찬예식의 기쁨과 생명을 알지 못하고 참여하는 신앙의 형식만 남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도다" "로 야드" 라고 합니다.
    '로'는 부정 접두사
    '야드'는 '알다'는 동사
    머리로 알고 마음과 감정으로 느끼는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생명과 기쁨이 흘러다니는 것을 체험해서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스라엘이 연애하는 자들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5절) 이 품목들은 백성들의 생필품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상이나 이방 국가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이다(신 7:13; 11:14).
    이스라엘의 죄악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었다.
    이처럼 축복의 근원자에 대한 무지는 결국 감사치 않는 죄와 은혜를 남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J.Given).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

    -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풍성은 상업을 통하여 은과 금을 증대시켰다.
    이 은과 금 역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축복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알을 위해 죄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바알을 위하여 쓴'(아스랍바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제출되었다.

    1. 바알의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J.Phillips).
    그러나 이것은 전치사 '레'(...을 위하여)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2. 바알에게 바쳤다는 견해(Gesenius, Leeser).

    3. 바알을 꾸미거나 입히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사 30:22, Harper).

    4. 바알을 경배하는 일에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견해(Given, Keil).

    이 가운데 3. 4의 견해가 가장 적합하게 보인다.
    즉 이스라엘은 은과 금을 신상을 장식하거나(렘 10:4), 우상을 숭배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한 것이다(13절, 겔 16:18,19).
    대부분의 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지지한다(prepared for Baal, KJV;used for Baal, NIV, RSV;used in worshiping Baal, LB).
    한편 본절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가나안 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모든 거짓 신들을 대표하고 있다(L.Wood, Keil).
    사실 예후는 일찍이 바알을 따르는 제사장들과 그 우상들을 전멸시켰었다(왕하 10:19-28).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지속되었다(왕하 10:29).

    더하여 준 것이어늘

    - 더하여 준 것이라는 동사 '다가'는 '늘리다', '증가시키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을 나타내준다.






    06-04-2023
    6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Because there is one loaf,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for we all partake of the one loaf.

    참에한다는 헬라 단어는 "코이노이아"라고 합니다.
    '코이노이아'란 "교제" 라는 뜻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먼저 성도들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제란 내가 보여주기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보여주기 싫은 것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이혼한 교인이 이혼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때 주위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으로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매월 첫번째 주일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면서 아직도 성도의 교제가 진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축복하는 2127. 축복하는(유로게오. 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발음 / 유로게오[ ĕulŏgĕō ]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 (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축복의 2129. 축복의(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152 4952*,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 골 1:18).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클리브랜드 인디언스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은 한국의 추신수 선수가 한 때 있었던 팀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에 마이크 아빌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아드리아나마야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항상 아빠의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딸 중 하나인 아드리아나가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아빌스는 그 때부터 어린 딸 생각에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아빌스는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아빌스가 너무 부진하자 구단주와 면담을 하였는데, 이 때 아빌스는 자신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아빌스의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은 아빌스와 그의 딸 아드리아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2015년 5월 27일 아빌스가 소속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경기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 모든 관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삭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소속의 구단 관계자들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삭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백혈병에 걸려서 치료 중에 모든 머리가 다 빠진 아드리아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삭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응원하는 의미로 아드리아나를 위하는 팀이라는 뜻의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를 티셔츠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원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고, 8월에는 경기 전에 아빠와 함께 모든 관중들 앞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구단 관계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팀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하나 된 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를 또한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영적인 진리를 믿는 성도들이 야구 선수들과 구단의 관계자들보다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니까?




      04-02-2023
      4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개역 개정)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니라.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물이 저온의 물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

      죄가 없다는 사람과
      죄가 많다는 사람 중에 떡과 잔의 효과는 죄가 많다는 사람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음펨바 효과라는 현상 자체는 상당히 옛날부터 알려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상을 "어떤 극단적인 성질일수록 그 상반되는 성질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티페리스타시스(antiperistasis)라는 법칙의 예로 보았다.

      예를 들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더 빨리 차분해지는 것.
      근대에 들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르네 데카르트 등이 이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역시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 이론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역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설명이지만, 이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두자. 문헌을 접근할 때에는 항상 시대적 환경 또는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서양에서 후대에 그의 설명이 절대화된 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까이는 사례가 정말 많다.

      이렇게 잠깐잠깐 언급되다가 잊히기를 반복하던 현상을 현대 물리학의 난제로 되살려 놓은 사람이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Mpemba)[2]라는 학생이었다. 음펨바는 1963년 중학교 가정과 조리실습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덜 식은 채로 냉장고에 집어넣은 아이스크림이 식혀서 집어넣은 것보다 더 빨리 어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음펨바는 학교에 강연을 온 물리학자 데니스 오스본(Dr. Denis G. Osborne)[3]에게 이 현상에 대해 질문했는데, 교사와 친구들은 이에 대해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냐' 라면서 비웃었지만 오스본은 음펨바의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해 봤으며, 그 결과 실제로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오스본은 1969년에 이 현상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며 이 현상을 '음펨바 효과' 라 명명하고,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음펨바의 이름을 올렸다. 한편 음펨바는 졸업 이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아프리카 삼림 및 야생동물위원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2023년 수능특강 영어에 장문독해 지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1학년의 영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개역 한글)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떡과 잔을 직접 나눠주신다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찢겨지신 몸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고난주간 한 주일 동안 나를 통하여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결단의 삶을 함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 49:11, 신 32:14)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3. 하이마(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 [ haima ]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02-05-2023
      2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 축복하시고(2127) 유로게오(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사례하시고(2168)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의 자리를 향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사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떡과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제자들은 떡과 잔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떡을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몸을 던져 로마 권력과 싸워서 피를 흘려 반드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거리감과 더구나 영적인 거리감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 머리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과 감격의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 손에 있는 떡과 잔에 하늘로부터 주의 영이 임하여 거룩한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다함께 떡을 먹습니다.
      이어서 다함께 잔을 들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생명의 영이 저희들에게 임하여 주셔서
      떡과 잔이 저희들의 몸 안에 들어갈 때
      부활의 영이 함께 임하여
      새 생명의 삶을
      능력의 삶을
      회복하는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1-01-2023
      1월 성찬예식 / 이호승목사 

      누가복음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기념하라
      - 킹 제임스 성경 / 기억하라

      364.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Noun 생각나는 것, 기념, 기억 / remembrance

      기념(紀念)하다 : (사람이나 집단이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다.

      벼리기(
      ), 생각 념(염)()
      1. 뒤에 어떤 일을 상기(想起)할 근거(根據)로 삼음. 또는 그 물건(物件)
      2. 지난 일을 상기(想起)하여 기억(記憶)을 새롭게 함.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히브리서 10:3(생각하게 하는 것)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

        "기념하라"는 교훈은 잊지 않고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월 첫 주일 성찬예식에 참여하므로 1년 12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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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4-2022
        12월 성찬예식

        요한복음 6:53-55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예식은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른 후에 장자의 죽음이란 재앙에서 자유를 얻은 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은 예수님의 몸이 되는 떡과 예수님의 피가 되는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022년 마지막 성찬주일을 지키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이 온전히 회복되어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 재앙에서 모두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과 잔은 코비드와 독감의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실 주님의 몸과 피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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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6-2022
        11월 성찬예식


        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세계성찬주일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피지섬의 교회에서 시작해 24시간 동안 일출 시각을 기준으로 전 인류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마치 파도타기처럼 성찬상이 세계를 도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이며, 수십 억명의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성찬주일의 시작은 아픔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평화의 역사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인류가 슬픔과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례 없는 대공황이 몰아닥쳤고,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손잡고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소수 교회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평화와 풍요를 염원하며 세계성찬주일을 제안했습니다.
        1940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킬 것을 제안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이어지고 냉전이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는 이 시대, 다시금 성찬상의 세계 일주를 통한 평화의 실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10-04-2022
        10월 성찬예식

        초대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는 교제의 의미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브리드교회(Hybrid Church)
        - hy·brid  / 1. 잡종,  2. 혼성체



        2022. 07. 03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내 몸(소마) 4983 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소마(sōma)
        어원 / 4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 15:37, 38, 40), 종(계 18:13)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소조(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소조(sōzō)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피(하이마) αἷμα. 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haima)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cf. 육체(사르크스).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4563. 사로오오(σαρόω)

        1. 쓰다,  2. 개끗하게 쓰다,  3. 마태 12:44

        발음 / 사로오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오장육부(五臟六腑)란 한의학에서 인간의 내장 전체를 통틀어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가리킨다.


        오장에 심포(心包)를 더해 '육장'이라고도 한다.

        육부」는 대장, 소장, 위장, 담낭, 방광, 삼초를 가리킨다

        2022. 06. 05 /

        성찬예식에 대한 믿음은 형식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떡과 잔을 받아 먹을 때에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찬,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표징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백성이고, 새생명 얻은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있지만,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견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 떡과 그 잔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또한 영적인 양식


        성찬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아, 견고하고도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들을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성경 공부할 때 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시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성례”

        말씀은 우리가 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성찬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에 우리 지성과 마음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고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Institution 14. 8. p.345)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단순히 우리 지식만 동원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의 손과 눈과 미각만 동원된다면 우리에게 은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추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면, 그 말씀과 성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 안토니오의 결단 / 수도사의 아버지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한 교훈과  "항상 기도하라" 고 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2. 05. 01 / 어린이주일

        2022냔 어린이주일을 맞아 파트리스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4명의 어린이들을 소개합니다.
        이현호, 은미 테일러, 유미 테일러, 김태오
        세상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공동체에 속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20불 지폐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돈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돈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을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 어린이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린 아이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그 공동체가 분명히 미세한 파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수부대 훈련병들이 공중 낙하 훈련을 위해 처음으로 타워에 올라갈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의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타워의 바닥은 10미터 그 위에 훈련병이 서게 되면 바로 그 높이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을 무려 300회 이상 반복하면 아무리 높은 고공에서 뛰어내릴지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11미터의 높이와 1000미터 이상의 높이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라 이미 최고의 높이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십일조 훈련을 잘 하면 반드시 성인이 되어서도 물질 관리를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것
        둘째는 깨닫는 것
        셋째는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자기 중심적" 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어른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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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은 왜 몸이고 포도주는 피인가…동전 양면같은 예수의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 18절)

        40)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걸까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 인물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가룟 유다 뿐만이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한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복음 26장 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 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시라고 했을까.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 ‘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 ‘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 뿌리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어느 신학도가 본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브랜트 피트리(Brant Pitre) 교수의 “Jesus and the Jewish Roots of the Eucharist: Unlocking the Secrets of the Last Supper” 라는 책이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2016년 7월 에클레이시아북스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만찬이 1세기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각 단락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 신학(history of redemption theology) 내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의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요구되지만, 저자는 그런 장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매력 발산으로 허물어뜨린다.



        제1장 마지막 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LAST SUPPER)

        저자는 예수는 역사적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1세기 유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유대교 율법을 위반하는 말 곧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충격 선언 또한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들이 1세기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속에 주어졌다는 해석의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시공간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해석학적 작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2장 유대민족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나?(WHAT WERE THE JEWISH PEOPLE WAITING FOR?)

        저자는 유대 성경과 고대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대다수 “1세기 유대민족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즉 새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대했다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새 모세로 인해(신 18:15-18; 참고. 3, 4세기 랍비 베레키아[Rabbi Berekiah, Ecclesiastes])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기를 소망했다(렘 31:31-33). 이 언약의 절정은 천상의 연회이며(출 24:11), 거기서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는 천상의 식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Babylonian Talmud, Berakoth 17a).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고(미 4:1-2; 사 56:6-7 ;60:1-7; 겔 37:24-28 ;학2:6-9, 참고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 하나님은 그 곳에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장차 올 세상”)의 일부일 약속된 미래의 땅(사 65:17-18; 66:18, 20, 22)으로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사 43:18-19; 계21:5). 그리고 저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 출애굽의 사상이 광범위 하게 펴져 있었고(드다, 이집트인 / Josephus, Antiquties 20:97-98; Josephus, Antiquties 20:169-170), 예수님은 “새 출애굽의 징조인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의 신호이며(사 35:5-10, 참고. 마 11:4-6; 눅 4:18-19), 구원을 전하는 메시아 전령”임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새 출애굽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분이다(눅 9:28-31).



        3장 새 유월절(THE NEW PASSOVER)

        저자는 위의 “새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새 유월절도 함께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열쇠이며 이를 위해 유월절의 성경적 뿌리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고대 유대교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 수컷”을 취해(출 12:1-6), “제물로” 드려(출 12:6), 그 “피를 이스라엘 각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으며(출 12:7), 그 후 “어린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출 12:8-12). 유월절은 매년 ‘기념일’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출 12:24-28).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 당시 유월절의 모습은 고대 유대교 유월절의 모습과의 차이점 네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전에 의해 드려졌다(신 16:5-7, 참고. Josephus, War 6:423-27). 둘째 1세기 유월절 어린 양은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것을 현재화했다(출13:8, 참고. Mishanah, Pesahim 10:5). 넷째,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메시아 시대 도래, 구원의 시대와 연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고, 그가 자기 백성을 속량할 것이다. 즉 메시아의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Jerome, Commentary on Matthew 4 on 25:6).

        유대교의 믿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밤에 시행했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했다(마 26:17-19; 막 14:12; 눅 22:14-15). 이 식사에서 떡의 의미를 설명하고(출 12:26-27, Mishnah, Pesahim 10:5), 마지막은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대할렐[Great Hallel], 시편 118편, 마 26:30, 막 14:26) 마무리했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달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집행자 역할을 하셨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바로 새 출애굽의 새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오늘이 메시아의 유월절이며 내가 새 제물”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의 완성은 첫 출애굽의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새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이다.



        4장 메시아의 만나(THE MANNA OF THE MESSIAH)

        저자는 성만찬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열쇠로 만나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다. 구약성경을 통해 만나의 다양한 의미를 언급하는데 만나는 “하늘에서 온 기적의 떡”(출 16:4-5, 11-15, 참고. 시 78:23-25, 29; 솔로몬의 지혜서 16:20-21)이며, 이중의 기적(하늘에서 온 떡과 하늘에서 온 고기, 출 16:12) 선물이었다. ‘거룩한 성막’에 두고 보존하며 그것을 ‘보게’ 하였고(출 16:32-34),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맛보기(출3 :8)였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새 출애굽을 개시할 메시아를 보낼 때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경 밖의 고대 유대교 문헌의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은 만나가 태초로부터 존재했다(만나의 선재,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4,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15). 하늘 성전안에 영원히 보관되어 있으며(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새 모세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 그쳤던 만나가 다시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2Baruch 29:3, 6-8).

        이러한 유대인의 소망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생명의 떡 담화(요 6:53-55)의 배경은 ‘새 모세의 도래’ 와 ‘하늘에서 온 만나의 재개’ 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된다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찬 전례에 자신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을 하늘에서 온 만나와 동일시한다고 한다. 출애굽의 옛 만나가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었다면 메시아의 만나 또한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즉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를 제시한다(요 6:61-64). 예수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의 형태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신적 정체성(막 2:5-10; 마 10:22-33)과 신적 권능이란 신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6:55).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날 그 분 몸의 부활과 승천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성찬 전례에서 먹으라고 한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생명의 영으로 ‘부활한 나의 육체’인 것이다(요 6:53-55). 저자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지닌 ‘생명’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분의 몸과 그 분의 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늘에서 온 새 만나와 예수님의 부활한 몸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예수께서 그 분의 피를 마시라는 놀라운 명령이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5장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

        저자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새 유월절’과 ‘하늘에서 온 새 만나’ 로 보셨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의 메시아적 성취로도 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진설병(“Showbread”)을 금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출 25:23-24, 29-30), 그 옆에 관제(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음료 제사)를 붓기 위한 ‘병과 잔’이 있었기에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부르며, 이것은 신성한 식사로서 붓는 것이 아니라 마셔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진설병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호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증표이고(레24:5-8), 성막에서 여호와 앞에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영구한’ 제사이다. 중요한 것은 진설병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제물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제물로써 안식일 마다 드려져야 했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진설병은 멜기세덱이 드렸던 ‘태고의 제물’이고(Genesis Rabbah 43:6), 예수님 당시에는 진설병이 제물로 ‘금상 위에 드려질 때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믿었다고 한다(Babylonian Talmud, Yoma 39a). 그리고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유대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있는 진설병을 외부로 가져 나와서 높이 쳐들고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외쳤다(Babylonia Talmud, Menahoth 29a).

        이것은 진설병이 영원한 언약의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였다.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누리게 된다(출 34:23; 23:17).

        이런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새 진설병을 연결시킨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 논쟁(마 12:1-6)에서 레위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아닌, 멜기세덱과 다윗(시 110: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또 다른 계보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새 성전이며 그 성전안에 현존하는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이해했고, 중요한 것은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 새 유월절을 넘어 - 예수님께서 새롭게 현존하는 떡과 포도주 즉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떡을 제정하는 행위이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현존의 신비는 그 분의 신적 권위와 신적 정체성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신적 아들이라면, 그 분이 제정하는 새 언약의 새 떡과 새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기적의 떡이 된다고 한다.



        6장 네번째 잔과 예수님의 죽음(THE FOURTH CUP AND THE DEATH OF JESUS)

        저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과 갈보리 십자가 처형 사건의 관계를 살핀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는 평범한 유대교 유월절 식사 형태와 유사하게,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루어졌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 직후 마셔야 할 네 번 째 잔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와 마태와 마가 모두 네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는 의식 언급이 부재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실제로는 마무리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는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잔을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다(마 26:36-46). 조금 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새 유월절의 제물로, 포도주 잔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성만찬 제정 말씀과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신 것이다. 식사가 종료되고 마지막 잔을 마시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끝내신 이유이다. 그 후 네번째 잔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직전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마실 음료를 직접 요청하셨고 건네 받은 신 포도주를 마셨고 후에 “다 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을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 마시기를 기다리심으로써 마지막 만찬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하나로 묶으셨다.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준 행위를 갈보리에서 자신을 드린 행위와 연결하신 것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유월절로 변화시켰고 십자가를 통해 마지막 만찬을 제사로 변화시켰다고 하며, 마지막 만찬과 십자가 처형 사건을 유대교 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 두 사건을 단일한 제사로 이해했음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7장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THE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

        저자는 예수님의 성만찬의 유대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재언급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유대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새 출애굽과 메시아의 새 유월절의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만찬은 그것들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어린 양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살 즉 성육신하신 신적인 말씀의 살을 먹으며 파스카 유월절을 지켰다.

        저자는 유대교 유월절과 기독교 성만찬 사이의 연관성은 『카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의 가르침에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성취될 새 유월절을 예상하셨고(CCC 1339-1340), 유대교 유월절의 세 번째 잔과 마지막 만찬의 잔, 겟세마네의 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신 잔 사이의 연관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CCC1334)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사도적 전통 그리고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새 만나’로 설명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를 넘어 ‘기적’ 또는 초자연적인 식사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요6; 고전 10:1-3, 16; 계 2:17)과 초기 교회의 교부의 글(Tyconius,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2:17, 어거스틴 요한복음 주석 “Tractate on John, 26:13) 역시 성만찬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는 고대의 기적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CCC1094)도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특정 내용 즉 새 출애굽, 새 유월절, 만나의 기적을 가리키는 신호만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신호로 보셨다고 한다. 실제 예수님은 그 떡을 자신의 개인적 현존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떡은 단순한 현존의 떡 정도가 아니라 얼굴의 떡 즉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얼굴’이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증표이다. 이러한 신비한 현존의 떡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마 12:1-8; 막 2:23-28, 눅 6:1-5; 히 9:1-3)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다(Origen, on Leviticus 13; Saint Cyril, Catechumens(그리스도인 세례 예비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성만찬의 신비를 예수님의 진정한 현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CCC1374-75). 예수님의 성만찬이(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만찬이) 단순한 증표가 아닌 기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카톨릭교회는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떡을 들어올림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메시야의 얼굴을 묵상하게 한다.

        출애굽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성막과 나중의 성전에 현존의 떡을 보관했듯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 떡을 보관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성만찬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던 내용을 다시 진술했을 뿐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와 함께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지 정수”(CCC1324)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8장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EMMAUS)

        저자는 성만찬과 육체적 부활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유대교 소망의 성취이며, 예수께서 성만찬을 - 십자가에서 죽을 그의 육체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몸과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만찬 때의 명령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눅24:13-24).

        또한 떡을 뗀 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들 곁에 현존하는 방식 즉 승귀 후 더 이상 인간의 외양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오직 성만찬의 떡의 모습으로만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원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귀하신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에서 세상의 제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부어주심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한다.



        글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마지막 만찬의 신비한 말씀이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 하며, 그것을 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적 계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어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저자는 메시아 예수께서 새 유월절의 어린 양,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만나, 성전안에 드려질 신비한 진설병 등유대인의 예배 신앙과 미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마지막 만찬의 신비를 심오하면서도 간명하게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고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세기 유대교와 예수의 부활 승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 –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자는 본문 뒤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습과 세계관을 드러내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적, 신학적 학습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 또한 배가시킨다.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제의적인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메시아적 사역 특히 영원한 언약의 피흘림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약속과 성취라는 성경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을 연속적으로 이어가지만, 종속되거나 제한받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고 확장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교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가 갈보리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유대교 유월절 제사의 완성이며 동시에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유대교 유월절을 회상하는데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출애굽의 시작을 보여주고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네번째 잔의 미완의 모습을 겟네마네 기도(마26:36-46) – 몰약의 포도주를 거부하신 예수님(마27:31-36; 막15:23) – 신포도주를 마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완성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에게 엄지척을 치켜 세우고 싶다.

        이러한 저자의 학자적 열정과 통찰력은 성만찬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를 캐내어 보여줌으로써 피상적이며 편협한 성만찬 이해를 성찰하게 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예전의식에 취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임재하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고 누리라며 초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13-22p), 자신은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찬 전례에 “예수의 실제적 현존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저자는 ‘화체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현존”, “기적”, “예수의 신적 정체성” 그리고 포도주 보다는 “떡”(몸)에 집중하여 설명함으로 ‘화체설’ 로 본서의 결론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성만찬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성만찬 제정 본문의 “이것은 내 몸이다(tou'tov ejstin to; sw'mav mou)” 에서 “…….이다(ejstin, is)”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1]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주석가들은 떡과 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또는 “이것은 내 몸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2] 그의 학문적 작업은 논리적이며 타당성 있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고수하고 있는 개혁적이며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적 입장과 필자 자신의 일천한 신학적 지식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본서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유대적 뿌리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기에 성만찬의 신학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성만찬을 통해 그의 한 몸에 참여하고 연합되는 사실(고전 6:12-17; 엡 1:22-23; 4:15-16; 5:23; 골 1:18; 빌 1:20), 두번째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함께 선교적 또는 복음전파적인 측면도 함께 언급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데 있다(고전 11:6).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 질 궁극적 승리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영생 향유를 확인시켜 주며, 더 이상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지 않고 안주하게 만드는 개인적 ‘정신 승리’의 방편이 아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은혜는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 사이의 긴장속에서 ‘많은 사람’을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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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놀랜드는 존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333에서 예수의 말씀들은 아람어로 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아람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성만찬 제정 본문에 대한 가장 원래적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330-40을 참고하라.

        [2] 크레이그 에반스, 『WBC성경주석: 마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1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Vincent Taylor, Jesus and His Sacrifice - A Study of the Passion Saying in the Gospels, (Oxford: Whitaker Press, 2007), 122을 참고하라.

        출처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http://www.woolrimsto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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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3월 6일 성찬예식

        매월 첫 주일은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2, 3, 4, 5주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합니다.

        온라인예배, 온라인 성찬의 의미가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정립 될 것을 기대합니다.

        3월의 성찬 주제는 신앙의 봄을 맞이하자!

        계절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누구가 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 옷을 벗어야 합니다.
        겨울 옷이란 두텁고 무겁고 둔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하여 함께 모이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겨울이 길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봄날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입고 있는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까?
        바람과 햇빛이 서로 내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바람이 더 세게 강하게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외투속에서 움크리고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햇빛이 더 따뜻하고 강한 빛으로 나그네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길을 걷던 나그네는 외투의 단추를 풀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그려집니다.

        신앙의 봄을 맞이하려면 강한 햇빛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찬의 떡은 아주 따뜻한 예수님의 온기가 되어 내 안에서 다정하고 훈훈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의 잔은 몸속으로 흐르는 뜨거운 진한 피가 되어 내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성찬은 나로 하여금 훈훈한 생명의 언어를 회복하여 3월을 봄맞이 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람있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찬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가장 중요 한 핵심축이다.
        이 성찬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 문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성찬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부분들을 살펴보고, 팬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 에서 온라인 성찬이 가능함을 밝힌다.

        첫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공동체성과 현장성에 관련된 문제

        공동체성과 현장성은 공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데,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이해를 통해서 온라인 성찬의 가능 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에도 응급환자 또는 임종 환자들을 위하여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찬에식을 간략하게 실행하기도 한다.

        둘째, 회중의 수동적 참여

        온라인 성찬이라고 청중을 수동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온라인 성찬에서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참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통해서 오히려 회중의 적극적 참여를 강화할 수 있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화상회의를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기에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넓게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셋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거부감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하여 온라인 성찬에 참여시키므로 신앙의 긍지를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성찬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초기 온전한 식사 형태를 가졌던 성찬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시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제들만의 예식으로 변질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성찬의 의미가 되살아나지만, 여전히 성찬은 개신교에서 중심위치를 설교에 내주었다.

        이렇듯 성찬 형식의 변화 가능성은 온라인 성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론 중세와 같은 잘못된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올바른 성찬 신학이 요구된다.
        기술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변화의 시대에 변화를 올바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올바른 신학적 해답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적절한 방향 제시되어야 한 다.
        과거의 관점에 매여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핵심가 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주님이 명령하신 성찬을 계속해서 그리고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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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토스(ἄρτος)는 유교병인가 무교병인가?

        며칠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사용된 떡/빵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떡/빵이라는 단어를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ἄζυμος) 를 사용하지 않고 “유교병”을 뜻하는 ‘아르토스’ (ἄρτος) 를 사용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글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거의 없지만, 이미 오래전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통해 신빙성이 없는 주장임이 이미 밝혀졌고, 고 하워드 마샬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아르토스’는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로서 “무교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편에 서 있다.

        1.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깨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이것은 그가 모세 오경에서 정한 명절들을 깨실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드셨다면, 그는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명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어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성향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정하신 명절을 지키셨다.

        2. 만약 주님이 마지막 만찬에 드신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 어디에도 빵에 대한 질문과 해명이 없다. 사도행전이나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서신에서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또한 어떤 분의 주장대로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새언약을 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이 고의적으로 유월절에 사용된 빵이 유교병이라고 적고 싶었다면, 그들은 ‘아르토스’ (ἄρτος)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교병”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를 사용했을 것이다.

        3. 공관복음을 보건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걸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혹시 율법을 어기는지 철저히 지켜보았고, 그가 조금이라도 어겼다고 생각했을 당시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죽이고자 작정까지 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고,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었다면, 과연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물론, 유월절 만찬과 그 만찬 중에 행하신 새언약을 뜻하는 주님의 만찬의식은 구분해야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한 유월절 만찬과 새언약의 의식에서 사용된 음식의 내용에 한해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동일한 것으로 봐야하는데, 이에 대해 아래에서 서서히 설명을 하기로 한다.

        4. 바벨론 탈무드에 기록된 미쉬나에 의하면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형벌의 대상에는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으며, “유월절에 유교병을 먹은 자”는 채찍의 형벌을 받게 되어있다 (마이클 L. 로드킨슨 번역, 9권, Tract Maccoth, ch. 3, p. 35). 따라서 3번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도들이 유월절에 무교병이 아닌 유교병을 먹었다면, 그 사건이 공관복음이 쓰여진 후에 밝혀졌더라도, 그들은 유대교의 법아래서 매우 엄한 형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어겨 형벌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5. 요세푸스와 필로

        5.1 어떤 분은 요세푸스와 필로를 근거로 한 ‘아르토스’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쉽게 일축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1.1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 3) 에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열두 개의 누룩이 없는 빵” (αρτους τε δωδεκα αζυμους, 아르투스 테 도데카 아쥐무스) 이 어떻게 놓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142 단락). 그는 이 “빵들” (아르투스) 위에 향을 담은 두개의 컵이 놓여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 빵” 곧 ‘아르투스 아쥐무스’ (αρτους αζυμους)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아르토스’의 주격 복수형태인 ‘아르토이’ (αρτοι) 를 ‘아쥐모스’ 없이 홀로 사용하고 있다 (143 단락). 또한 이 “열두개의 빵” (레 24:5: δωδεκα αρτου, 도데카 아르투) 에 대해 “누룩이 없이 구운 곡물” (σιτος οπτος ζυμης αμοιρος, 씨토스 옵토스 쥐메스 아모이로스)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55 단락).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1.2 필로는 “특별법에 관하여” (De Specialibus Legibus 2.156-161) 에서 무교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158 단락에서 “그러나 발효되지 않은 빵은” (ο δ’ αρτος αζυμος)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빵”을 뜻하는 ‘호 아르토스’ (ο αρτος) 를 설명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을 뜻하는 단어는 형용사 ‘아주모스’ (αζυμος) 이다.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문맥에 따라 혹은 형용사에 따라 “무교병” 또는 “유교병”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누룩이 들어간”을 뜻하는 ‘주메’가 함께 사용될 때에만 “유교병”을 의미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아주모스’가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무교병”을 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로는 같은 158 단락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반죽 덩어리” (τα φυραματα του σταιτος αζυμα) 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반죽”을 뜻하는 ‘투 스타이토스’ (του σταιτος) 자체는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 ‘아쥐마’ (αζυμ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무교반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타이스’ (σταις) 나 ‘아르토스’는 꼭 누룩이 들어간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5.1.3 요세푸스와 필로의 ‘아르토스’에 대한 설명은 1세기 유대교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6. 70인 역에서의 ‘아르토스’

        6.1 70인 역에서 ‘아르토스’는 유월절이나 무교병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 특히 ‘아쥐모스’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항상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를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할 때에는 ‘주미테스’/ ‘쥐미테스’ (ζυμιτης) 와 함께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레위기 7:13 (αρτοις ζυμιταις, 아르토이스 쥐미타이스) 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는 히브리 성경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서 홀로 사용되고 있는 ‘하메쯔’ (ץחמ) 를 번역한 것으로서, 이 역시 70인 역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쥐메와 하메쯔: 출 12:15; 13:3; 13:7; 23:18; 34:25; 신 16:3).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꼭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형용사 ‘주메’와 함께 사용되거나 혹은 문맥에 따라 “유교병”이나 “무교병”을 뜻하며 또한 모든 빵을 의미하는 공통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7. 구약에서의 진설병과 무교병

        7.1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 (לחם) 은 70인 역에서 ‘아르토스’ (αρτος) 로 번역하고 있다.

        7.2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마짜’ (מצּ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출 12:8, 15, 17, 18, 20, 39; 13:6, 7; 23:15; 29:23; 34:18; 레 8:2, 26; 23:6; 등…), ‘마짜’ (מצּה) 와 ‘레헴’ (לחם)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레헴’은 ‘마짜’와 달리 “유교병”만을 뜻한다는 주장이 틀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7.3 출애굽기 25:30에는 “진설병”을 ‘레헴’ (לחם)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이며, 이것을 “상 위에…두어”라고 하는데, 이는 상위에 진열하는 빵을 뜻하는 것으로서 문맥에 의해 “진설병”을 뜻한다.

        7.4 출애굽기 29:2 에서는 “누룩이 없는 떡” 혹은 “무교병”을 ‘레헴 마쫏’ (לחם מצות; lxx: αρτους αζυμους, 아르투스 아쥐무스) 으로 표현하는데,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레헴’과 “누룩이 없음”을 뜻하는 ‘마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레헴’은 ‘마짜’ 와 함께 사용하거나 또는 문맥에 의해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5 출애굽기 29:23 (히브리어 성경) 에서는 “빵” (לחם, 레헴) 한 덩어리와 기름 바른 “과자/빵”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무교병 (המצות, 하+마쫏) 광주리에서(מסל, 미+쌀)” 나온 것이다. 70인 역은 조금 다른데, 기름 바른 혹은 기름 섞은 “빵” (αρτον, 아르톤) 하나와 “납작하고 넓은 빵” (λαγανον, 라가논) 하나를 “무교병(τον αζυμων, 톤 아주몬) 광주리에서 (απο του κανου, 아포 투 카누)…”라고 되어있다.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은 바로 “무교병”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짜’ 나 헬라어 ‘아쥐모스’를 히브리어 ‘레헴’과 헬라어 ‘아르토스’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둘은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레헴’이나 ‘아르토스’가 ‘마짜’나 ‘아주모스’와 다른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로 “빵”을 뜻하며, 또 다시 언급하지만, 문맥에 따라 “유교병”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본문에서의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무교병”이다. 왜냐하면, 무교병 광주리에는 유교병을 넣어 둘 수 없으며 오직 무교병만을 담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7.6 레위기 8:26 역시 출애굽기 29:23 과 같은 내용으로서, 여기서 “무교병 광주리에서”는 ‘마쌀 하마쫏’ (מסל המצות) 이며, 이 광주리에서 “무교병 (המצּ, 마짜) 한개”와 “기름 섞은 떡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꺼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레헴’과 ‘전병’을 뜻하는 ‘라킥’은 “무교병 광주리에서” 나온 “무교병”이다. 더 중요한것은 바로 70인 역에서는 “무교병”혹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을 ‘아르토스…아쥐모스’ (αρτος…αζυμος) 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올리브기름과 섞은 빵” 을 ‘아르토스 에크 엘라이온’ (αρτος εκ ελαιον) 그리고 “진병”을 ‘라가논’ (λαγανον) 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아르토스’와 ‘라가논’에는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 역시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것으로서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스’는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7 레위기 7:12에서는 화목제물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기름과 섞은 구멍 난 무교병”은 ‘레헴’이 아닌 ‘할롯 마쫏’ (חלות מצות) 이며; 기름 바른 “무교전병” 혹은 “누룩 없는 전병”은 ‘롸키키 마쫏’ (רקיקי מצות) 이며;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 전병”은 “누룩 없는”이라는 단어 없이 홀로 사용된, “구멍 난 빵”을 뜻하는 ‘할롯’ (חלות) 인데,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만 섞은 것으로서 이 또한 “무교병”이다.

        70인 역을 보면 “고운 가루에 올리브기름을 섞어 만든 빵” (ἄρτους ἐκ σεμιδάλεως ἀναπεποιημένους ἐν ἐλαίῳ) 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빵” 곧 히브리어로 “무교병”을 뜻하는 ‘마쫏’ (מצות) 은 ‘아르토스’ (αρτος)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이는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또 70인 역의 내용상 누룩이 들어가지 않고 다만 “올리브기름”이 들어갔다는 것 역시 ‘아르토스’는 “무교병”임을 뜻한다. “올리브기름을 뿌린/바른 무교전병” (λάγανα ἄζυμα διακεχρισμένα ἐν ἐλαίῳ) 에서 “무교전병”은 “전병”을 뜻하는 ‘라가나’와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마’인데, 누룩이 없는 전병에 기름을 바른 것이며; “올리브기름을 섞어 반죽한 고운 밀가루” (σεμίδαλιν πεφυραμένην ἐν ἐλαίῳ) 역시 누룩을 섞지 않고 올리브기름만을 섞은 밀가루 반죽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이 모든 것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것들로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의미한다.

        7.8 신명기 16:3 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교병”은 ‘레헴’이 아니라 ‘하메츠’ (חמץ; lxx: ζύμην, 주멘/쥐멘) 이며;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먹으라”에서는 무교병은 ‘마쫏’ (מצות; lxx: αζυμα, 아주마/아쥐마) 이며, 고난의 떡은 “고난”을 뜻하는 ‘야니’ (עני; lxx: κακώσεως) 와 “빵”을 뜻하는 ‘레헴’ (לחם; lxx: ἄρτον) 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레헴’은 ‘아르토스’이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마짜’ 그리고 헬라어로는 ‘아주모스’로 불리는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9 역대상 23:29 에서 사용된 “진설병”은 “진열된” (המערכת, 하마아레캇; lxx: τῆς προθέσεως, 테스 프로테세오스) “빵” (לחם, ‘레헴’; lxx: ἄρτους, 아르투스) 이다. 이 “진설병”은 “누룩이 없는” (המצות, 하마쫏; lxx: τὰ ἄζυμα, 타 아쥐마) “전병” (רקיק; 라킥; lxx: τὰ λάγανα, 타 라가나) 과 함께 진열되어있는데, “무교전병”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진설병” (레헴, 아르토스) 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 (아쥐모스) 임이 확실하다.

        8. 이제는 복음에서의 ‘아르토스’사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8.1 마태복음 12:4 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τοὺς ἄρτους τῆς προθέσεως, 투스 아르투스 테스 프로테세오스) 라고 부르고 있고, 히브리서 9:2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ἡ πρόθεσις τῶν ἄρτων, 헤 프로테시스 톤 아르톤) 라고 부르고 있는데, 진설병 (לחם) 은 무교병이다 (출 25:30; 29:2; 35: 13 (לחם הפנים); 레 24:5-9; 역하 2:4 (מערכת)). 따라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8.2 마태복음 26:17-26. 17절을 보면 무교절 (των αζυμων, 톤 아쥐몬) 첫날과 유월절 (το πασχα, 토 파스카) 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φαγειν το πασχα, 파게인 토 파스카) 위해서 이다. 이 유월절 음식은 율법에 의하면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절대로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 18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을…지키겠다” (ποιω το πασχα, 포이오 토 파스카)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의식을 따라 행하시겠다는 것인데, 율법을 따르시겠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의 규율대로 유월절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깨는 행위이다. 따라서 만약에 26절에서 사용된 ‘아르토스’ (αρτον, 아르톤) 가 “유교병”이라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식을 먹은 것이며,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유월절 곧 율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새언약을 뜻하는 의식 곧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8.3 마가복음 14:12-25 에서 마가는 유월절 저녁식사에 대하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유교절 식사는 무교절 첫날과 겹치고 있다. 12절에서 “무교절 첫날은” ‘테 프로테 헤메라 톤 아쥐몬’ (τῇ πρώτῃ ἡμέρᾳ τῶν ἀζύμων) 이다. 그러나 유교절 양과 유교절 식사는 모두 “유월절”을 뜻하는 ‘토 파스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양”과 “식사”로 번역이 가능한 이유는 ‘토 파스카’와 함께 사용한 동사 때문인데, 첫째는 “희생했다” 혹은 “제사했다”를 뜻하는 ‘에튀온’ (εθυον) 을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가 “유월절 양”임을 뜻하며, 둘째는 “먹을 수 있게” 를 뜻하는 ‘파게스’ (φάγῃς)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준비하기를’ 뜻하는 부정과거 분사인 ‘헤토이마소멘’ (ἑτοιμάσωμεν) 과 접속사 ‘히나’ (ἵνα)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그 준비의 목적과 결과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14절에서도 역시 ‘토 파스카’를 “내가 먹기 위해”를 뜻하는 ‘파고’ (φαγω)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식사이다. 따라서 22절에서 26절에 기록된 새언약 의식은 유월절 식사로 드시던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8.4 누가복음 22:7-29. 7절에서도 마가복음과 다르지 않게 “무교절 날”은 ‘헤 헤메라 톤 아쥐몬’ (ἡ ἡμέρα των αζυμων) 으로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다. 여기서 “유월절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단순히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 (τὸ πάσχα) 이다. 그러나 “잡는” 혹은 “죽이는”을 뜻하는 ‘투에스타이’ (θυεσθαι)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양”을 뜻한다. 8절에서는, 이날이 다가와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월절 음식” 이라는 단어 역시 “음식”을 뜻하는 단어가 없이 ‘토 파스카’ (τὸ πασχα) 를 홀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우리가 먹을 수 있게”를 뜻하는 ‘파고멘’ (φαγωμεν) 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음식” 혹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특히 ‘파고멘’은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 (ἵν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특히 앞에 “준비하라”를 뜻하는 부정과거 명령어인 ‘헤토이마사테’ (ἑτοιμασατε) 를 따름으로서 유월절 음식을 꼭 드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7절과 8절에서 사용된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르토스’ 역시 이러한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유월절” (τὸ πασχα, 토 파스카) 을 “준비하였다” (ἡτοιμασαν)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인데, 무교병을 구하지 않았거나 구하지 못했다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시는데, 여기서도 “유월절”은 ‘토 파스카’로서 “먹기를”을 뜻하는 ‘파게인’ (φαγειν) 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 곧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문맥 속에서 (특히 구약에서의 ‘레헴’과 아르토스’의 사용과 이곳에서 ‘토 파스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둘 때), 19절에서 예수님이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빵” (αρτον, 아르톤) 은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으로 봐야한다. 또한,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유교병이라면,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의식을 깬 것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이 먹은 것은 유월절 음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셨다.

        8.5 마태복음 26:17-26과 누가복음 22:7-20에서의 유월절은 칠일동안 행해지는 “무교절”과 겹쳐졌는데, 무교절에 대해 출애굽기 12:15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명하고 있으며,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고 무서운 저주를 함께하고 있다. 출애굽기 12:19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시는데,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날을 지킬지니라”라고 명하신다. 출애굽기 13:7절에는 무교절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신명기 16:4에서는 유월절에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두 명절이 겹침으로서 이방인이 거하는 곳이 아니면 유교병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며, 오히려 무교병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러 오신 분으로서 무교절과 유월절에 대한 강령을 어기셨을 리가 없다. 따라서 눅 22:15에서의 ‘아르토스’가 “유교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8.6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음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유월절 의식에서 사용한 무교병이며, 무교절과 유월절이라는 두 중요한 명절이 겹친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모든 누룩을 제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그 규례를 범했을 때 따르는 심한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식은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으로 행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8.7 요한복음 6:31에서는 만나(מן) 를 ‘아르토스’로 부르고 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31에 의하면 “납작한 떡/과자 과/와 같다” (כצפיחת, 커짜피힛) 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아르토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특정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8.8 정리를 하자면, 유월절 식사에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를 드시면서 행하신 주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빵 곧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9. 이제는 바울 서신에서의 ‘아르토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9.1 고린도전서 5:7-8은 깨끗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하신 새 언약이라면서, 이것을 근거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개역개정)

        9.1.1 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 언약이 아니다. 5:7에 “너희는 분명히 누룩이 없는 자들인데” 혹은 “너희가 누룩이 없는자들인것 처럼” (καθώς ἐστε ἄζυμοι, 카토스 에스테 아쥐모스)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는 복수형이다. 그러나 그 후에 따르는 (원문에는 앞에 온)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ἵνα ἦτε νέον φύραμα) 에서 “새로운 덩어리” (νέον φύραμα, 네온 퓌라마) 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서 개개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빵 덩어리 전체 혹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예수님의 한 몸인 교회를 가르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를 뜻하는 ‘히나 에테’ (ἵνα ἦτε, ‘히나 에테’) 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 ‘에테’와 접속사 ‘히나’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그 목적과 결과는 바로 “새로운 덩어리” 곧 정결한 교회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개개인으로서 “누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인데, 교회가 하나의“오래된 (παλαιὰν, 팔라이온: 단수형) “누룩 (τὴν ζύμην, 텐 쥐멘: 단수형)” 곧 오랫동안 음행을 저지른 사람으로 용납함으로서 부정해졌다는 것인데, 그 오래된 누룩 곧 오랫동안 음행을 해온 자를 쫒아내어, 하나의 빵 덩어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전체가 누룩 곧 죄로 오염되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누룩”이 들어간 유교 병을 뜻하는가? 같지 않다.

        9.1.2 7절 하반 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비유하는데, 여기에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고, 다만 “희생 당하셨다”를 뜻하는 ‘에투테’ (ἐτύθη)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 (το πασχα) 가 “양”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르토스’에 대한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으로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9.1.3 8절에서 “누룩”은 (ζύμῃ) 비유적으로 “악과 악의” (κακίας καὶ πονηρίας, 카키아스 카이 포네리아스) 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러한 “오래된 누룩” (ζύμῃ παλαιᾷ) 으로 명절을 지키지 말고 “순전함과 진실의 빵”으로 지키라는 것인데, “악과 악의”와 달리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지키라는 것 곧 교회로서 죄에 대해 순전하고 진실되라는 것이지, 어떤 이의 주장대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과 교체한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빵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ἀζύμοις, 아쥐모이스) 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보던지 아니면 만찬에 대한 설명으로 보던지 상관이 없다. 다만, 유월절에 사용해하고 있는 빵은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 그리고 만찬의식에서 사용하신 것이 “유교병”으로 가정한다면, 또 “유교병”이 ‘아르토스’라면, 바울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가 아닌 ‘아르토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것은 ‘아르토스’가 아닌 ‘아쥐모스’ 곧 “무교병”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무교병”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했기에 ‘아르토스’가 “유교병”이라는 주장은 성립시키기에 매우 어렵게 보인다.

        9.1.4 마지막으로, 이 두 구절에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ύμῃ) 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아르토스’가 무조건 누룩이 들어간 빵 곧 “유교병”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아르토스’를 이방인과 유대 기독인들이 “유교병”으로 이해했다면, 특히 이미 누룩이 없는 빵 곧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주모스’/‘아쥐모이스’ (ἀζύμοις) 를 사용한 상태에서 구태여 “누룩”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유교병”을 드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는 “유교병”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아르토스’는 더 폭이 넓게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이 아니라 “무교병”과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토스’가 “유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무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초대교회는 “무교병”이나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는 오히려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이해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9.2 고린도전서 11:23-25 에서 구체적으로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쥐모스’나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 바울은 그 단어를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을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이 “내가 주께로 부터 받은 것을”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에고 가르 파레라본 아포 투 키리우) 이라는 문구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주님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핍박하던 교회에서 혹은 다메섹 사건 후로 그 주위에 있는 교회에서 들은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 (παρέλαβον, 파레라본) 곧 그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르토스’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다. 어쨌건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한데로, 공관복음을 참조하자면, 바울이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고전 5:7-8에서 유월절이라는 상황에서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11:23 을 읽는 사람들이 ‘아르토스’를 유대교의 명절인 유월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교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 본문에서도 바울이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만찬이 유월절에 베푸신 만찬에 사용한 같은 음식으로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교회가 무교병을 가지고 혹은 유교병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임하던,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나 “유교병”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그 둘을 포함한 또는 문맥에 따라 그 둘 중 하나를 의미하는 ‘아르토스’를 고의적으로 홀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는것 같다.

        10. 위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뜻하지 않고, 만나, 그리고 무교병 등 여러 종류의 빵을 뜻하는,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유월절, 무교절, 진설병,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문맥에서는, ‘쥐메’와 함께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무교병”을 뜻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떡에는 가래떡, 시루떡, 막걸리가 들어간 떡, 맥주가 들어간 떡, 찹쌀떡, 보리떡, 쑥떡,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모두를 “떡”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새해에는 이 모든 떡 중 가래떡을 썬 떡으로 만든 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를 “썰은 가래떡국”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떡국”이라고 부름에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떡볶이”를 말하면, 그 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로 가느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것임을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경전체에서와 관련 있는 고대문서들을 분석해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몇 개의 본문에 매달려 사용된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것의 차이들을 극대화해서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늘의 교회는 고래의 의례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 반복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동시대 사회 문화적 상황 속의 상징체계의 이해와 발전된 소통 매체 및 수단의 활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최근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고민과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온라인 예배가 교회 공동체성을 지킬 수 있는가?

        현장에 ‘모인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여부가 예배의 정당성을 결정함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초연결 사회에서 교회들이 정보 기반 인터넷을 통해 말씀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일은 또 다른 탁월한 방식의 예배의 목적과 특성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예배자로 하여금 삶의 현장으로 깊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비대면 예배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성은 비슷한 삶의 환경을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구역 및 소그룹 단위 안에서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오프라인 교회가 복음을 위해 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일은 중요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의 면모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 제도가 과거와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는 교회의 공동체성 실현을 위한 방안의 양상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과 같은 급격하고 돌발적인 변화를 늘 예상되고 대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예배와 성찬 실행의, 뉴 노멀에 따른 복음 소통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다만 뉴 노멀 속에서도 예배와 성찬 본연의 의미들이 방해를 받거나 왜곡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배와 성찬 안에 담긴 구속사의 기억(아남네시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 본연의 정위(正位)를 잃지 않도록 가일 층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기독교 공동체는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목회데이타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응답한 개신교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성례전적 공동체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와 성찬을 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몸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와서 세례를 행함으로 교회가 어떻게 이를 행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기념하는 방식도 교회에 알려주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성례를 지키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적으로 성례를 행하며,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은총의 수단을 가르쳤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성례 공동체였다.
        철저한 세례 교육과 세례 예식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공고히 하였고, 연이은 성찬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됨을 말씀으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참여하여, 이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고백하도록 하였다.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성례전적 이해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설교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를 통해서 교회 존재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성례전적 이해 위에 교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코로나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는 성례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과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


        2022년 신년주일 성찬예식 / 1월 2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며 매월 첫째 주일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온라인 성찬예식보다는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복음적 신앙을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빵을 먹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낍니다.

        성찬예식을 통한 신앙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온라인 새벽기도회"라고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시간입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식사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의 자리가 성찬을 위한 신앙을 다짐해야 합니다.
        음식이 내 속에서 영양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영양을 공급받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기도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911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루(1)에 한 번(1) 오전 9시와 오후 9시 어느 시간이든지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에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불낙지교회를 위하여
        둘째는 내가 만들어야 할 초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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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2월 5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관점(觀點)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비슷한 단어 "견지(見地)"

        관점은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기 때문에 관점이 참 중요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거침없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삐에로 신부"이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했다.

        그의 비망록 중에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는데 삐에로 신부는 거기에 이런 경험담을 적어 놓았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청년은 자살 직전에 있었다.
        청년은 나에게 자살하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 파탄, 사회적 지위 등. 그러면서 결론을 맺었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대답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때부터 청년은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얼마 후 청년이 고백했다.
        “신부님이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풀었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2021년 마지막 성찬예식을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찬예식을 준비하며 성찬의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떡과 잔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저 교회는?
        그런데 이런 관점은 비판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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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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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면서 늘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들 중 하나가 "성찬예식" 이었다.
        오늘 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온라인 성찬예식을 갖고자 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은 요한복음 6:53-58 입니다.

        53.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그나티우스는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 피(54절)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 성찬예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성기호목사 성결교 신학대학 교수)

        성만찬의 성서적 기원

        흔히 성찬(聖餐, The Lord's Supper 또는 The Eucharist)이라고 부르는 성만찬(聖晩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最後의 晩餐)를 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성례(聖禮)이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7~20).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명령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는 기록은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나타난다.

        "또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므로 초대교회는 성만찬 예식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주의 만찬에 관한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고전 11:20~34) 떡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은 "이것을 행하라"(24, 25절)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주의 재림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4~26절).

        애찬(愛餐)과 성만찬(聖晩餐)

        성도의 수가 적었던 초대교회 초기에 행해지던 성만찬은 주로 저녁 때 행했다.
        애찬(愛餐, Agape, The Love Feast)이라고 부르는 친교 식사 형식으로 행해졌다.
        각자의 집에서 공동 식사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 오고 성도들이 사랑의 만찬(晩餐)을 함께 나누었다(고전 11:21).
        즉, 성만찬은 애찬의 형식으로 애찬에 포함되어 행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비해 온 음식의 수준이 달라 가난한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교회를 배부르게 먹고 취하는 곳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나타나자 사도 바울은 이를 경계하고 식사는 각자의 집에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22절).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150년 경에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어 성찬은 아침에 행하고 애찬은 저녁에 나누었다.
        그러나 4세기 말경부터는 교회에서 성만찬만 행하고, 애찬은 각 가정에서 사사로이 행하다가 차츰 애찬의 풍습이 사라졌다.

        성만찬 논쟁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Sacramentum baptismatis et eucharistiae)에 관한 최초의 조직신학적 진술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 즉 떡과 잔의 성질 및 이 두 요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점차로 발전하여 뚜렷한 구분을 보이고 있다. 실재설,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등이 그것이다.

        1. 실재설(實在說)

        성만찬의 요소들인 떡과 잔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靈知主義, The Gnosticism)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The incarnation)을 부정하며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 뿐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는데
        성만찬의 떡과 잔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고 한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강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였다(요일 4:1~3).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떡과 잔의 요소에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디다케(Didache 또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 Teachings of Twelve Disciples), 이그나티우스(Ignatius),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칼빈(John Calvin) 등의 주장인데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간주하지만 화체설(化體說)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디다케'는 성만찬을 영생을 위한 영적 양식이라 하였다(고전 10:3).

        이그나티우스는 요한복음 6장 32~51절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54절)는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저스틴은 성만찬의 떡과 잔은 인간이 되신 그리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말한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주의 살과 피로 양육된다"고 주장하며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에 로고스가 결합된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하는 화체설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2. 화체설(化體說)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예루살렘의 시릴은 성령께 부르짖음을 통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했고,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변화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가 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소화기관을 통해 흡수됨으로 우리를 사망의 독소로부터 해방한다고 했다.
        성상(聖像 Icon) 숭배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였던 754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거나 숭배하는 것을 배격한 결의 끝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인성의 상징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나타낸 다메섹의 요한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충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단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성체(聖體, The host, 라틴어로 hostia)"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요한의 주장은 니케아회의(787년)에서 채택되었다. 요한의 주장대로 사제의 기도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바꾼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속죄 희생의 제사(히 9:26)는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제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성별시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주 희생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화체설이 말하는 것처럼 성만찬의 두 요소 즉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그 변화의 기간은 얼마나 지속되는가 또 거룩한 떡을 어떻게 숭배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남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피를 멀리하라"(행 15:29)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어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식인종적인 야만의 혐오감을 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악인도 성찬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그 안에 거하게 되어야 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하신 약속대로(요 6:55, 56)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악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약속이 실제로 악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보아 악인이 떡과 포도주를 성만찬에서 먹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 모실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전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가 되었다고 하거나, 떡과 포도주에 일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섞였다고 하는 이론대로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시게 된다는 주장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3. 공재설(共在說)

        종교개혁자들은 성만찬의 희생설이나 화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루터와 칼빈은 성만찬설에서 그 견해가 동일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실재설을 주장하는 데 비하여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루터는 개혁초기에 "믿음으로만(sola fidei)"을 강조함에 비해 성만찬의 교리에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끝난 뒤 교회의 정통적 교리에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표명하게 될 때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며 중도의 입장에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함에 있어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인 옥캄(Ockham)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옥캄은 물질의 존재 양식에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물질이 그 자체의 점유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榮化)된 그리스도의 몸은 또 다른 물질인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함께 존재(存在)한다고 한다. 이는 사제(司祭)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편재(遍在, 아니 계신 곳이 없다)하신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라 떡과 포도주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요소들 속에(in), 그 요소들 밑에(under), 그 요소들과 함께(with the elements) 임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떡을 그 손에 드셨을 때 그의 몸도 떡의 요소와 함께 임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재가 축복이 되는 고로 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며 떡과 포도주에 함께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살과 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으므로 주어진다고 한다. 떡과 포도주는 "이것이 내 살이니라" 또는 "이것이 내 피니라"하는 식사(式辭)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은 구원은 커녕 도리어 정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루터의 공재설이 갖는 문제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일정한 장소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인성(人性)을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모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어디나 계시다고 하는 공재설은 우리의 보통 음식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임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고 성만찬의 떡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가 구분하는 일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4. 기념설(記念說)

        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는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거나,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깊은 신앙에 임재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몸이 실제로 성찬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 몸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고 말하며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며 회상하는 기념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또한 성만찬 참여자는 신앙 고백의 행위로서 이 성례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즉,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하신 `이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다"의 뜻임을 밝히며 `이니라'의 라틴어인 est가 `표시하다' 또는 `상징하다'라는 뜻의 sihnificatio와 같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성만찬설을 기념설 또는 상징설(象徵說)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성만찬의 떡을 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잔을 나눌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을 기념한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의식이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육체적 임재 대신 영적 임재를 주장하나 성만찬의 교리로부터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떡과 포도주를 상징 또는 기념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는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영적으로 이루어지며 구속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 드려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또는 sacred fellowship)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긴밀한 교제뿐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연합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거룩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주심같이 구원받은 신자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하고 헌신하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성만찬의 참여자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더욱 왕성하게 하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헌신 봉사 충성케 하는 거룩한 예식인 성만찬(Holy Communion)은 이단자(딛 3:10~11, 요이 1:10~11)와 뛰어난 죄인의 참여를 배격한다(고전 5:11~13, 살후 3:14~15).

        중생한 증거가 있는 이에게 세례를 주기 때문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 즉 세례인으로 성만찬에 참여케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를 분변치 못한 채 또는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례 교인들에게 그것도 자기를 살피고 회개한 다음에 거룩함으로 이 성례에 참여케 해야 할 것이다(고전 11:27~29).

        *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영적 임재라는 분명한 신앙을 갖고 떡과 잔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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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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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인, 서평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위원이 신간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성찬』 서평을 동홈페이지 서평란에 기고했다.
        정 위원은 저자 알렉산더 슈메만에 대해 "성공회 사제이지만 신학적 성향은 철저히 성경적 원리를 따른다.
        그의 온화한 예리함은 성공회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동시에 예전을 과도하게 무시하는 기존 개신교를 향한다. 그리고 진정한 성찬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2020년 비아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우리 아버지>는 장엄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하게 기이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진중하면서도 풍성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교향악 같다"고 평가했다.

        정 위원은 이어 "예배학의 신학의 경지에 끌어올린 그는 목회 실천학적으로만 보았던 예배에 깊이를 더함으로 기독교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모두 12장으로 구분하여 성찬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고 있지만 1장에서 전반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슈메만은 성찬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성회'와 '성찬' 그리고 '교회'가 세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리 또는 괴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예전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연합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는 것'(23쪽)이다. 슈메만은 바르지 못한 성찬 이해가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태동하였음을 환기시킨다. 스콜라주의 또는 스콜라적 신학은 '거룩한 모임과 성찬, 그리고 교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철저히 무시'(23쪽)함으로 성찬의 교회론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다시 성찬이 교회론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성찬의 측면들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 성찬'으로 소개한다. 아마도 스콜라적 신학은 현재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과 예전을 중시하는 정교회 전통한 비교하면서 후자의 성찬 의식이 갖는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 위원은 "정교회 사제이기도하는 슈메만은 처음 성찬이 가진 연합의 의미에서 벗이나 참여자의 제한과 영역의 축소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비잔틴식 예전 의식이 점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했고, 섬기는 자와 기도하는 자를 분리'(32쪽)시킴으로 성찬의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슈메만은 이 부분을 3장 입당의 성례에서 좀 더 깊고 예리하게 다룬다. 정교회 예식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저자의 용어들이 낯설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특히 "4장 말씀의 성례는 현대 한국교회 개신교 설교자들의 신경을 곧두세우고 읽어야한다. 슈메만은 성례로서의 말씀 즉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의 무능이나 빈약함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무엇일까?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고도 지적했다.

        "진정한 설교는 해박하고 유능한 신학 지식을 정확히 전달하는 복음서 본문에 대한 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본질은 복음서에 대한, 다시 말해 복음서의 한 주제에 대해 설명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선포다. 설교의 위기는 무엇보다 말씀 선포가 일종의 설교자 개인의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126쪽)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힘입어 정 위원은 설교의 위기가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사화 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 바, 설교의 사유화로 인해 교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설교가 '개인의 일'이 되자 교회는 급격하게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찬의 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교와 사제들이 받은 가르침의 은사는 개인의 은사가 아닌 '믿음과 사랑의 연합체인 교회의 것'(131쪽)이다. 슈메만은 7장 연합의 성례에서 교회 연합의 전제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삶의 근원이자 내용이며 목표'(218쪽)인 것이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연합하고 모인다. 연합과 모임은 분열과 분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627#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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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Table) - 하나님의 뜻 이해하기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가진수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Th.M.)과 미국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박사과정(D.Min.)을 마치고,
        플로리다 주 ‘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IWS)’에서 예배학박사(D.W.S.)과정을 공부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예배의 갱신과 영적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그는 현재 <글로벌 예배 컨퍼런스> <글로벌 예배 심포지엄> 등의 국내외 예배관련 세미나와 집회를 주관하고, 예배 매거진, 큐티, 예배도서 등을 발행하는 예배전문사역기관 ‘글로벌워십미니스트리(Global Worship Ministry)’의 대표다.

        그동안 신학교와 신학대학원, 국내외 지역교회, 예배자 학교 등에서 예배의 중요성과 다음세대를 예배로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해왔으며, 현재 미국 LA에 위치한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 석사과정(M. A. in Worship Studies)의 학과장이자 교수로 ‘현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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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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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恩惠) 예화(例話)


        은혜(恩惠)

        1. 히브리어

        헨 : 자비함, 즉 주관적으로 호의, 은혜, 또는 객관적으로(아름다운) 은총, 은혜(로운), 즐거운, 현숙 한, 사랑스러운.

        토브 : 넓은 의미에서 선하다(또는 잘되다, 타동사로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 더 낫다(더나은 일 을 행하다), 기쁘게 하다, 선하다(선을 행하다, 선히 여기다)

        라하밈 : 죄사함을 말하는데(출 34:6), 긍휼, 사랑, 호의 자비, 애정 등 표현.

        2. 헬라어

        카리토 :  은총을 베풀다, 크게 호의를 가지다, 축복을 하다.

        카리스 : 긍휼, 은혜로운 행위, 선물, 애정스러움, 기쁨을 주는 것

        * 기쁨(카라) - 은혜(카리스) - 은사(카리스마)

        3. 한자

        베풀어 주는 혜택, 고마움.

        은혜에 대한 성구

        1. 은혜란 무엇인가?

        삼하 15:25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
        시 5:12 - 호위하는 것
        행 20:24 - 복음
        갈 1:15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엡2:8 - 거저 받은 것이 은혜
        벧전 1:7-10 - 구원이
        벧전 3:7 - 생명의 은혜

        2. 은혜는 누가 주는가?

        왕상 3:6 - 주께서
        출 33:19 - 하나님께서
        요 1:17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후 1:2 -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살후 2:16)
        시 90:17 - 하나님께서
        롬 12:6 - 은사를 받게 됨

        3. 은혜의 가치 평가

        행 15:11 - 은혜로 구원얻음
        롬 3:24 - 의롭게 함
        롬 4:16 - 후사가 됨
        롬 5:17 - 생명의 왕 노릇함
        고전 15:10 -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고후 9:14 -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것

        4. 은혜를 받은 자세

        욥 33:26 -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시 31:19 - 주께 피하는 자
        잠 3:34 - 겸손한 자에게
        잠 14:9 - 정직한 자가
        롬 5:20 - 죄를 인식함으로
        히 4:16 - 보좌앞을 담대히 나아감으로
        벧전 1:13 - 은혜를 바라므로

        가장 큰 은혜는 "겸손(謙遜)"


        인도의 철학자 브하그완은 겸손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합니다. 

        겸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자가 가진 “Self-Control”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겸허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함으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즉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올바른 지성, 상대가 가진 장점을 장점으로 볼 줄 아는 안목과 인격적 여유, 상대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배우려는 자세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배움의 지경을 넓히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힘을 제공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환경을 바꾸며 나를 세우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강한 당신, 용기 있는 당신,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당신에게서 드러나는 당신의 겸손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성공 여정에 힘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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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Humility)

        -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 저. 번역 이득환.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9세에 영국의 아버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십대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후 네덜란드의 우크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세 되던 해에 남아프리카 부롬폰테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볼체스터,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도 다년간 목회를 하였고 그 밖에 선교, 교육 분야에 정통한 인재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 외에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남겼는데 심오함과 평이함, 실제성을 두루 갖춘 그의 책들을 읽고 영적인 도움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의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더라."(계 4:10,11)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영광과 완전함에 참여하는 존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고,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선(goodness)과 영광(glory)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선과 영광을 소유할 수 있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goodness)과 영광(glory)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진실하게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위하여 현재는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빈 그릇과 같이 비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신의 능력과 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그저 한 순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영역입니다. 본빌작인 면에서 볼 때 겸손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것과 더불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됩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이미 타락해 버린 천사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뱀이 교만-그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의 독을 우리의 최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내쉴 때, 그들 또한 그들의 높은 지위를 잃고 멸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교만과 자기를 높이는 것은 지옥의 저주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상실된 겸손을 회복시킬 만한 수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겸손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고,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겸손을 소유하셨고,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도 그분의 성품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은 가장 귀한 것이 되었고, 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단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토양과 뿌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의 구속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완전한 겸손의 삶으로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셨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이 곧 우리의 구원이고, 그의 구원이 곧 우리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악에서 옮기웠다는 증표를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원래의 상태(original sin)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는 겸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없이는 신앙이나 사랑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기쁨과 삶을 살아갈 힘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겸손이야말로 은혜가 뿌리내리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우리의 모든 흠과 부족함들은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근본된 뿌리가 됩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하나님을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reason)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이성으로 인해 우리가 실재의 본성과 하나님의 명령의 명백한 필요를 알아갈수록 우리가 더욱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겸손의 본질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취하여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뜻과 정성을 다해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그에게 역사하여 채워지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위치를 내어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뛰어난 신앙을 나타내 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겸손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모본에 있어 겸손에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 진리-겸손-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도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징표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축복을 받는 비결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망과 기도,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시면서 자주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겸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며, 교만만큼 더럽고 다루기 어려워서 우리의 통찰을 흐리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잠잠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겸손을 얻기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공부합시다. 우리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고 지쳐서 더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그 교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마가복음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도적질

        κλοπή, ῆς, ἡ 스트롱번호2829

        1.

        도둑질

        2.

        마15:19

        3.

        막7:21.

        발음 [ klŏpē ]
        어원
        281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도둑질, 마15:19, 막7:2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도둑질(마15:19, 막7:21).

        ὑπερηφα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5243

        1. 오만. 2. 거만. 3. 자랑
        발음 [ hüpĕrēpha- nia ]
        어원 / 5244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오만, 거만, 자랑, 막 7: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교만(막 7:22).

        간음
        μοιχ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3430
        1.

        간음

        2.

        마15:19

        3.

        막7: 21

        발음 [ mŏichĕia ]
        어원
        343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간음, 마15:19, 막7: 21, 요8: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간음(마15:19, 요8:3), 음란(막7:21), 음행(갈5:19).

        탐욕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124

        1.

        탐심

        2.

        탐욕

        3.

        눅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탐심, 탐욕, 눅12:15, 롬1:29, 고후9: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고르반(2878) [ kŏrban ]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고르반, 예물, 막 7: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코르반).

        -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 '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J.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에서는 '장로'를 1절에서 처럼 굳이 '직분자'로 해석하거나, '젊은 자'(*, 네오테로이)를 '성직자'나 '집사'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네오테로이'가 성경에서 직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 - 17)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 잠 3:34(LXX) 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탓세타이'(*)는 군대를 배치시킬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ὑψηλοφρονέω 스트롱번호5309

        1.

        교만하다

        2.

        거만하다

        3.

        딤전6:17.

        발음 [ hüpsēlŏphrŏ- nĕō ]
        어원
        5308과 5424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교만하다, 거만하다, 딤전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마음을 높이다(딤전6:17).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5012

        1.

        겸손

        2.

        겸양

        3.

        행20:19

        발음 [ tapĕi- nŏphrŏsünē ]
        어원
        5011과 5424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겸손, 겸양, 행20:19, 엡4:2, 빌2:3, 골3: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행20:19, 엡4:2, 벧전5:5, 빌2:3, 골2:18).


        ταπ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011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tapĕinŏs ]
        어원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뜻풀이부

        • 1.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1: 52, 롬12:16, 고후7:6, 약1:9.
        • 2.
          [감정의 상태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 a.
            [나쁜 의미] 비굴한, 비열한, 고후10:1.
          • b.
            [좋은 의미] 겸손한, 겸비한, 마11: 29, 약4:6, 벧전5: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한(마11:29, 약4:6, 벧전5:6), 비천한 (눅1:52, 고후7:6), 낮은(롬12:16, 약1:9), 유순 한(고후10:1).

        φρήν, φρενός, ἡ 스트롱번호5424

        1.

        생각

        2.

        이해

        3.

        고전14:20.

        발음 [ phrēn ]
        어원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생각, 이해, 고전14: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지혜(고전14:20).

        제 2 장

        구속의 비밀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어떤 나무든지 근본된 뿌리를 따라 자라게 마련입니다. 즉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모든 기간동안 나무의 씨가 처음 가졌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필요성과 본질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 뱀-그는 교만으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그의 본성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말을 속삭일 때, 그의 말들은 지옥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뱀의 말을 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욕심에 넘어 갔을 때 지옥의 독이 그녀의 영혼과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축복받은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dependence)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서 말미암을 모든 후손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고, 교만이라고 하는 사단의 독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끔찍한 죄와 저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은 우리 인간들 모두 안에 잠재해 있는 교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과 피흘림, 모든 이기주의와 고통, 모든 욕망과 시기, 그리고 모든 상한 마음과 아픔의 삶, 매일 겪는 불행들은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오 교만의 본성과 권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삶에 던져 놓은 교만의 권세는 원래는 지옥에 속해 있던 것이며, 모든 영역을 통하여 막강한 권세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권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며, 때로는 투쟁하기도 하며, 그것을 멀리 쫓아 내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의 권세가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기인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강한 영적인 권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을 고백해야 하고, 통회해야 하며 교만이 사단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극복하여 떨쳐 버리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영적 권세 아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한 부질없는 싸움은 교만의 뒤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권세와 생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그가 심어 놓은 교만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부으시는 하늘에 속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알기 위해 "첫째 아담"과 그의 타락을 보았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교만했던 자신을 극복하여, 또다시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겸손의 생명을 주시는 "둘째 아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7)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심"(골 2:19)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인간의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가 서고 자라야 할 뿌리입니다. 그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한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며,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소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그분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 또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은 오직 '겸손' 그 한가지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낯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 올리우심과 그 영광은 보좌 앞과 영광의 관을 쓰신 주님께 마땅히 올려져야 할 겸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신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어 보좌 위에 앉히신 모든 것이 그의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섬기기 위해 온유와 친절함으로 옷입으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케하심이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보혜사와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고 종이시며, 앞으로도 겸손의 표상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셔서까지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겸손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겸손의 본질이 모든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에서 나타아냐 할 것입니다. 겸손이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전부이고 가장 요한 것이며 속죄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 또한 우리 안에 그 겸손의 은혜를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며,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겸손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력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구하지 않을 때 구원의 기쁨이 식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보다도 겸손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을 환영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이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함과 자신을 낮추심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느낌, 연약함들에 대해 무관심한가를 생각해십시오. 또한 정직과 고결함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웃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마음에 쓴뿌리를 주며 이간질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단에게서 오는 교만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살며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성도인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겸손에 영원토록 입도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내 안에 예수님의 겸손이 가득차 있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겸손이 넘쳐 흐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보여졌던 그러한 겸손이 없음을 정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이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을 구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여!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십시오. 겸손이야말로 구속의 근저에 감춰진 비밀입니다. 날마다 더욱더 이 겸손에 깊이 잠기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겸손함을 배워 갖추도록 우리의 온 삶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다. 구원이 그러하듯이 겸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제 3 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내면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과 아버지(God the Father)와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근원과 행하는 권세에 대해 자신이 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주님의 겸손하심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이라고 하는 이 은혜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도록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에서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복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9)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자신을 가리켜 "아니요"(not, nothin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내가 아니요"(not I)라고 표현했던 바울의 표현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리켜 여러번 말씀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 5:19)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 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요 7: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요 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요 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요 14:24)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진정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하시는 구속의 본질과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아무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그의 모든 의지와 능력을 전부 아버지께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사역과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의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지만 결국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존귀하게 하사 그의 영광의 오른손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낯추셨고, 항상 하나님이 그 앞에 계셨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더욱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 영과 뜻과 성품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시도록 비워져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진정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욕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소욕을 버리고 예수님께 늘 순응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고 아무것도 행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뿌리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겸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요, 진정한 겸손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이 어디에서 나며, 또 그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 임의대로 행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나누어주신 그 생명은 우리의 죄와 우리 자아를 죽임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생명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생명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거룩한 지식의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이 비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지 빈 그릇으로, 통로로 내어드리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만물이 증인이며,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늬 모든 자녀들이 그 증인입니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그리고 모든 신앙과 진정한 예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경배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그의 전 삶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존귀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않으셨고, 그의 능력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은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당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친구들과 세상을 향해서도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겸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드리십시오. 이전까지 결코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겸손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제 4 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7-28)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의 마음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겸손이 나타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겸손한 자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인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그 말씀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겸손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 5)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처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마음이 온유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겸손은 이땅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축복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온유와 겸손 가운데서우리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중에 세워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라 칭함을 받는 자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천국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은혜 중에 가장 놀라운 은혜는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눅 9:48)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겸손의 세례를 받을 준비된 잔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표이며, 겸손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5.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리라."(마 23:11)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닥다리입니다.

        6.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상좌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4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전에서 예배할 때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깊고 진실한 겸손을 충만치 못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의 권위와 모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생각들과 순종하신 모습들을 볼 때 겸손은 제자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9. 최후 만찬 석상에서조차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투었습니다.(눅 22:26-27)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길은 겸손에 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도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겸손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을 삶으로 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의 기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겸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신실한 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번성함과 존귀, 행복을 즐거워 합니다. 언제나 그런 신실한 종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이름은 곧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다른 면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주님의 그 섬김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새롭고 완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한 자유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곧 피조물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정신이며,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조차 도 섬겨야 하는 섬김의 도를 전심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섬김의 도 위에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화(sanctification)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눈다면, 너무 낮은 자리라 하여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굽혀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여기 지극히 높은 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입니다. 높아지고자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 분이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흘려 보내 주셔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지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난님께서는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가 우리에게서 고상함과 대담함, 그리고 남자다운 용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가장 고상한 성품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겸손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하늘의 정신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겸손케 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것들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믿읍시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들어와 거하실 것입니다.

        제 5 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주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니라"

        (눅 22:26)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열두명의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본다면 겸손이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에게 있어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인간에게 불어 넣은 교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겸손에 우리도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제자들이 얼마나 겸손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또 한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 중 하나는 우편에, 나머지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들중 누가 과연 우두머리인가를 놓고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지는 겸손의 모습들이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들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이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에 관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겸손의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지만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모든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에도 그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는 구세주되신 예수님의 권능을 전파하기 위해 증인들이 되기 전에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많지만 정작 겸손의 은혜가 결핍된 교수와 목회자, 사역자, 그리고 선교사와 교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는 겸손의 은혜를 지키려는 노력이 미미해서 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은 가장 중요하고 높은 은혜 가운데 하나라는 교훈을 확인시켜 줍니다.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겸손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때에만 능력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외적인 가르침과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교만을 이길 수도 없으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겸손 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놀라운 겸손으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그들 중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그에 따라 일하는 사람에 의한 인간의 미덕입니다. 겸손은 자부심과 반대되는 가치입니다.

        겸손의 의미는 어원 적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이
        단어는 라틴어 humilĭtas 에서 유래하며 , 이는 '육지'를 의미 하는 근원 부식 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 감각이 나타납니다.

        가치로서의 겸손,
        사회 경제적 기원으로서의 겸손,
        복종으로서의 겸손.

        가치로서의 겸손

        가치로서 겸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사람의 질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각 사람이 "땅에서"올 때마다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의미는 겸손을 겸허 의 미덕과 관련된 태도로 만듭니다 .

        겸손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 한 인간의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구보다 위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존재가 같은 정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겸손의 가치는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우월한 복합물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업적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짓밟 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적습니다.

        겸손하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발육, 오만 및 자부심을 거부하고 겸허, 절제 및 구속과 같은 가치를 행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겸손의 특성

        미덕으로서 겸손은 행동에 명백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주제의 평등과 존엄성 이해; 일과 노력의 가치 평가;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면서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친밀감으로 표현하기; 겸손하고 단순하고 구속력있는 행동; 수평 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기; 듣기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고려하고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십시오.

        경제적 근원으로서의 겸손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입장은 종종 겸손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원이 거의없고 번영 할 기회가없는 가정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Juan은 겸손한 원산지"라는 표현은 경제적 자원이 거의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복종으로서의 겸손

        특정 상황에서 겸손은 더 높은 사례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항복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종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수장이나 경찰 당국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피하고 오히려 준수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겸손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우월과 완전성 앞에서, 그리고 존재의 은혜를 주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하는 선덕 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겸손은 인생의 신비에 앞서 자신의 작은 것을 인식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받아들이고, 선하고 유쾌하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 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에 저항하고 겸손에 은혜를 베푸시 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베푸십시오 ."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이 하느님의 눈에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양심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겸손의 가장 큰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신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이 느낌이 종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남자처럼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상태에있을 때, 그는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순종하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 빌립보서 2:5-8.






        겸손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능력으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 아는 체하는 회의론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하나님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겸손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시작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 .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진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논쟁을 좌지우지하거나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자아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섬김과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주장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예수]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 . .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 4:5)

        4. 겸손은 모든 지식과 믿음이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비판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념을 허용하셨고 때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원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6. 겸손은 우리 삶이 수증기와 같으며, 하나님이 우리 죽음의 때를 결정하고, 우리의 모든 업적을 주관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1908년에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그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미숙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천박한 상대주의"(마이클 노박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한 표징은 인간의 확신에 대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도하고 인간의 의심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겸손이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불행스러운 일이다.
        겸손은 더이상 야망 혹은 야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겸손은 확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전에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었다.
        하지만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확신하지 말하야 하는 부분 - 자기 자신- 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 - 하나님의 이성(신적 이성) 등 - 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오늘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회의론자들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조차 의심한다...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겸손이 있는데, 고행을 통해 덕을 쌓으려는 격렬한 노력보다 실제로 더 독성이 강한 겸손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일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겸손해서 구구단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길 위에 서 있다. (Orthodoxy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 1957], pp. 31-32)

        우리는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겸손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그러한 겸손의 실상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신에 대한 세상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대의 겸손은 절대로 "불이야!" 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기가 세탁 건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겸손이 미숙한 회의론의 상대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겸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 적어도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느낌으로 시작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바라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함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된 권리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논쟁을 주도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자아를 높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며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 [예수님]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4:5).

        4. 겸손은 모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위하여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in humility)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비판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허락해 주신 것과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포대 만드는 사람(희랍의 민화)
        그리스 민담

        1. “다리 위에 놓고 올 수가 없어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글쎄,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에 가까이 오더니 ‘지난 수년 동안은 눈을 뜬 채 이 다리를 건넜으니 오늘 한 번만은 눈을 감고 건너봐야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는 바람에 이 자루를 보지 못하고 건넜답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딜 뻔하기도 했답니다.”

          “아이고, 저 못난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정말로 들어오는 복도 제대로 못 받고 발로 걷어차는구먼!”

          다음 날이 되자 왕은 포대 만드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생각이 없느냐! 잘난 척하고 떡과 거위를 팔아먹었으니 너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주려고 그 속을 금화로 가득 채워놓았었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어제는 또 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서 내가 너를 위해 놓아둔 금화가 든 돈 자루도 못 보고 지나갔단 말이냐?”

          “임금님,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제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그 다음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음식점 주인을 불러오게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너는 어째서 이 사람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느냐? 떡과 거위에 금화가 든 것을 알았으면 적어도 그중 반은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더러운 음식과 마른 빵만 주어 보냈느냐? 당장 돌아가서 한 푼도 빠짐없이 금화를 전부 이리 가지고 오너라. 그 금화는 내가 저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음식점 주인은 집으로 가서 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그 금화를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 스스로가 네 운명의 샘을 막았고 나는 너 몰래 막힌 샘을 뚫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너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이 금화를 받아 가지고 편안하게 살면서 그 노래만은 더 이상 부르지 않도록 해라.”

          포대 만드는 사람은 왕에게서 금화를 받아 그 돈을 밑천으로 후에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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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마을에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가사는 아주 단순하여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님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묻기를 "왜 자네는 항상 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그러자 그 포대 만드는 사람은 "예, 그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인도하는 아주 넓은 광야로 나갔는데 그 광야에는 수 많은 샘물들이 솟아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샘물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샘물을 찾았는데 내 샘에서는 물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샘물의 구멍을 넓게 뚫어주면 샘물이 많이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에 긴 장대를 가져다가 샘물을 마구 쑤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샘물이 솟구치더니 그 다음에는 아예 물이 솟아오르지 않았지요. 천사가 말하기를 샘물이 솟아나는만큼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내 샘물을 막아버렸기에 내 신세 한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어진 임금님은 포대만드는 사람에게 신하를 시켜  그 날 저녁 빵 한 덩어리를 보냈습니다.
        궁궐에서 보낸 떡을 받은 포대만드는 사람은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인데 떡 한덩어리로는 끼니를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제과점을 찾아가서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낸 빵인데 이 빵을 받고 마른 빵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빵집 주인은 한 바구니의 빵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임금님이 그 가에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하구나!
        아직도 부족한가?

        그 다음에는 거위요리를 접시에 담아 보냈습니다.
        일을 마치고 좁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위에 금화를 담은 자루를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포대만드는 사람은 몇 십년을 건넜던 다리인데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며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금화를 담은 자루를 신하가 다시 궁궐로 가져왔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 1472-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못받으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다.

        어느날이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그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샇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떻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바 은헤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에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 반석평(潘碩枰, 1472년 ~ 1540년 6월 24일)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다.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가두리 꿩사냥 (은혜. 사랑)

        수꿩은 어느 한 산에 한 마리 밖에 살지 않는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유별하다 하여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던 것이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거나 하는 사생 결단이지, 약세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한다.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깃을 꽂고 다닌 이유는 바로 사생 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도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기도 하다.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 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그를 구하러 날아들어 타 죽거나 알을 품고 있는 중에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꿩의 습성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은혜를 입으면 보은한다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이란 산 이름과 상원사(上院寺)가 연기(緣起)되고 있다.
        그런 꿩을 가로 세로 겨우 7-8 미터 남짓한 방에 가두어놓고 석궁을 쏘아 살생하는 가두리 꿩사냥이 성행하고 있다 한다.
        장마가 지면 길에 나다니는 벌레를 밟더라도 죽이지 않게 하고자 오합혜(五合鞋)라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고 나들이했던 우리 선조요, 피를 빠는 이를 잡더라도 죽이지 않고 보살통(菩薩筒)이라는 대통에 담아 나뭇가지에 매어두었을 만큼 살생에서 초연한 조상들이었다. 그 후손들의 동물 학대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충격이 더 크다. 짐승을 가두어 놓고 쏘는 가두리 사냥을 한 사람은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연산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냥을 삼가하길 상소하는 소문에 보면, 짐승은 가두어 놓고 쏘지 않으며, 불을 지르거나 물을 등지게 하고서 몰지 않으며, 새끼와 더불어 있으면 쏘지 않으며, 쫓겨가다가 지쳐 도망치기를 멎고 돌아보고 서 있으면 쏘지 않으며, 떼지어 있으면 놀라게 하여 분산시킨 다음 한 마리만 쫓는 것이 엽도(獵道)라고 했으니 너무나 인간적인 사냥 정신이 우리에게 계승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데도 하필이면 온 세상이 자연 환경과 동식물 보호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이 시점에 그 못된 짓을 자행하다니 말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날씸한 몸매를 자랑하는 방아깨비는 유난히 벗겨져 있고 고지새라는 새는 별나게 심술 궂은 부리를 지니고 있다.한편 개미의 허리는 끊어질 듯이 잘록하지 않은가?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연관지어 엮어 낸 전래의 고담 하나가 있다.
        한 여름 내내 일만 하고 있는 개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동물이 있다. 방아깨비와 물가에서 물고기 잡아 먹고 사는 고지새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미를 꼬드겨 여름철의 낭만을 함께 즐겨보자고 유혹한다.
        남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개미가 흔쾌히 승락하고 함께 즐길 요량으로신나게 물가로 달려 갔다.
        경망스러운 방아깨비가 선뜻 나서며 자기가 우선 솜씨를 보여 고기 한마리를 멋있게 잡아ㅗ겠노라고 큰소리치더니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메기가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순간적으로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남아있는 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개미는 발만 구르고 안타까와 하는데 고지새는 메기를 찾아 천벙지축 날뛰더니 마침내 놈을 찾은 모양이다.
        잽사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건적으로 메기를 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지체하면 친구가 죽는다.
        고지새는 급히 그 예리한 부리로 메기의 배를 갈라 방아깨비를 구출한다. 여부없이 요나 신세가 된 방아깨비는 메기 뱃속에서 나오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 야, 내가 잡은 물고기 좀 좌 크지?이 녀석 잡느라고 놈의 뱃속에 들어가 땀을 꽤나 흘렸지"라고 말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지새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은혜를 베풀적엔 그 은혜를 구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아예 들어 본 적이 엇는 고지새가 아니던가? 메기를 제가 잡았노라고 기고 만장한 상대를 보고 어찌 그 입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터무니 없는 자랑을 계속하는 방아깨비의 엄행과 묘한 앙상불을 이루는 고지새의 입술이 어찌나 우스운지 개미는 웃고 또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울러 고지새의 튀어나온 부리는 그대로 귿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남의 공을 제것이라고 설치는 공짜 근성의 얌체 방아깨비가 하도 얄미워서 그 이마를 홀랑 벗겨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받은 은혜 때문에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대표할만한 영웅으로 오자서(俉子胥,B.C.? -48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충신으로 못난왕과 간신의 흉계에걸려 목숨을 잃은 오사(俉奢)의 둘째아들이다.
        이에 평왕은 자서마저 죽이기 위하여 그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5만석의 곳식을 주고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상대부 벼슬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오자서가 요행으로 소관이라는 국경 검문소를 벗어나려면 눈앞에 놓인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갈대밭이 숨어서 물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자서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차고 있던 전가의 보도를 그 노인에게 끌러 주었다.
        어부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면서 내 듣건데 당신을 잡아 바치면 초나라 임금이 5만석의 곡식과 상대부의 벼슬을 준다고 합디다.
        그 엄청난 상급도 초개같이 여기고 당신을 도망시켜 주었는데 어찌 이따의 칼을 받겠소라고 말한다.
        자서가 어옹을 떠나면서 만약 뒤쫓아 오는 군사가 있거들랑 이몸의 종적을 누설하지 말아주시오 한마디 당부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난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구했는데 그대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니 그대가 붙들리면 당장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의 의심을 풀어 주리다 하더니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뒷날의 일이다.
        자서는 오나라의 왕 함려에게 발탁되어 초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깨끗히 복수한다.
        이어서 그는 망명생활을 할 때 자기를 괴롭힌 정나라마저 징벌하기위하여 군대를 그리로 향했다.
        약소국 정나라로써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한것이다.
        이에 정나라 왕은 만알 오자서를 자기 나라에서 물러가게 한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사람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노라고 선언했다.

        어느 날이었다.
        정나라에 초라한 어부 한사람이 자기가 오자서의 군대를 돌아가게 하겠노라고 나섰다.
        예날 악저땅에서 오자서를 구출해 주고 죽은 그 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자서를 찾아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봐서라도 정나라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남다른 의리의 사나이 오자서는 즉각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에서 철수했고 그 노인의 아들은 사방 백리의 땅의 주인이되어 살았다고 하는 중국 고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죄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자기들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하지 않은가?

        성경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주인을 위해 은혜를 베푼 사나이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제나라 맹상군은 후세사람들로부터 멋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널리 공인받고 있다.

        이조시대의 고가사로 맹상군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  "천추전 존귀키야 맹상군만 하랴마는..." 이라는 구절이 등장할만큼 만복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맹상군도 자기가 거느린 3,000명의 식객을 치다꺼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 문제의 타개책으로 자기의 식량이 나오는 설(薛)지방 사람들로 부터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돈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일을 풍환이라는 종에게 맡겼다.

        맹상군의 명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풍환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올만한 것이 없는가를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집안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풍환이 주임에게 빚진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풍환은 맹상군의 이름으로 그들의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온 풍환을 보고 화가난 맹상군이 불쾌한 표정으로 힐책을 하는데 풍환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올까 궁리해 보니 이 집에 없는 것이라곤 오직 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구하다 보니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만금을 주고 정의를 사가지고 왔으니 주인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한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라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후 맹상군은제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정승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3천명의 식객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뿔뿔히 흩어졌고 그는 결국 자기 몸뚱아리 하나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풍환은 주인을 설지방으로 인도했다.
        맹상군은 거기서 의외의 환대를 받았고 아울러 설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다시 멋지게 기사회생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억지로 의를 사서 누렸던 맹상군의 복보다 더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슴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지름 길

        의학공부를 하는 한 미국의 여대생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곤할 때 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하면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약을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리자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날 저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나아갔다.
        뚝 위에 올라서서 여태껏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할려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깨끗이 마약을 끊어버렸고 지금은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옛것을 완전히 벗어 버리는 일은 내 의지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하다.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이다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 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보상

        초기 영국의 케스, 교단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들 중의 하나였던 웹피플이라는 성직자는 젊은이였을 때 해변에 갔다가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중의 하나를 갑자기 잃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이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이 슬픔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았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에게 아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벽난로 위에 길게 내려진 이 말씀을 맺힌 눈물을 통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단어를 주목하게 되었다.
        “족하다(is sufficient)"그는 성별된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외쳤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나는 족한 은혜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며 그것을 이제 1제 것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 유용하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은혜는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머물게 된다.
        이 언급이 얼마나 웅대하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실패한 결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무정한 가정,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선교 생활의 압박감, 압도해 오는 비애 중에도 은혜는 족하다.

        우리의 무능력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붙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이는 위장된 축복들인 것이다.

        손때 묻은 벽돌 한장

        레이몬드 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사는 거치장스럽고 꼴보기 싫은 존재이기에 목사를 때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벽돌을 한장 싸들고 교회에 들어갔다.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릴리 청년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고 들어간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치게 되었고 그 자리가 릴리 청년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발견한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되었다.

        수년 후에 세계의 최대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크 카운티병원에는 가난한 가운데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가는 수천의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목사가 한명 있게 되었다.

        이 흑인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목사'로 불리운 과거의 릴리 청년이었던 것이다.

        릴리 목사가 하늘 나라에 간 장례식의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벽돌 한장이 전시되어 보는 사람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괴롭건 즐겁건 어느 때나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구원하시고 은혜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레이몬드 릴리가 밤마다 어루만지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벽돌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안락의자에 앉아서 애독하는 잡지를 펼쳐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다고 가정합시다.
        한창 흥미가 절정에 달해 있는데, 그만 “다음 호에 계속”이란 문구가 나오면 얼마나 안타깝고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호에 계속”이란 말이 큰 기쁨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예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오랜 순례의 생활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이제 거의 다 쓰여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는 끝없이 엮어진 줄과 같고, 끝을 모르는 강물과 같고, 끝없이 돌아가는 바퀴와 같고, 영원한 별빛과 같다.
        옛날 베들레헴 아기 예수에게 비쳤던 별이 그때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미래에 언젠가는 우리를 주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책으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속편이 끝없이 나오는 만년 연재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크리스챤 생활이 재미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과거에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다음에 계속될 것입니다.

        또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심령에 고통을 주는 것들은 이번 호에서 끝나고, 다음 호에는 계속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찬송 시인이 쓴 대로 “점차로 영광만이”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광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영원이 있습니다.
        하늘의 광채들은 “다음 호에 계속”될 것입니다.

        값싼 은혜

        독일의 신학자인 본 훼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 교회의 능력과 사회를 향한 영향력의 상실 원인을 말하면서
        이는 교회가 .값싼 은혜, 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이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강조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고 그는 비판했습니다.

        “그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의 생활 속에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삼았다면 참으로 내 삶 속에 이러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누가 나에게 어떠한 신앙 사상을 가져와서 나를 미혹하거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번 걸프전쟁관련 사진 중에서 한 전투병 철모에 쓰인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의 분위기를 느끼게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임사호천(臨死呼天)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임사호천(臨死呼天) 이란 "죽음에 임하여 하나님(하늘)을 찾는다"는 뜻이다.                   

        臨  :  임할                      
        死  :  죽을
        呼  :  부를
        天  :  하늘 천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형편에 처한 사람은 바로 죽음 직전에 처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죽음 직전에 처한 이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좀 더 사는 일일 것이다.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그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람은 어머님을 찾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라는고백은 절대절명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비장한 고백이요, 절규다. 그야말로 생사문제가 아니고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앞에서 이제까지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죽음앞에서 그 신념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 
        민족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 민족을 멸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요." 라고 절규하던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바울의 위대한 민족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앞에서 충심을 변치 않고 더욱 강해지는 사육신들. 
        노량해전의 결전을 앞두고 "이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몸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다짐하든 충무공 이순신.

          "나는 내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라고 부르짖던 미국 독립운동의 젊은 투사.

          "예수께서는 내 한평생 84년 동안에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 데, 내가 어찌 그 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랴." 하며 순교의 제단에 몸을 던진,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 선생 등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을 고수한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참한 사형방법에 의해 죽음의  고통으로 다가가시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통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머리에 가시관, 양손과 양발에 못박힘이라는 육신적인 고통을 포함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는 영적, 정신적인 고통의 극치를 잘 보여주신다 하겠다.

         임사호천으로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함께 죽어가던 강도 일것이다.  
        고통속에 숨져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으로 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확답을 받았으니 말이다. 비록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죽음앞에 직면하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꼭 기억하시고 구원(救援)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찬송가 405장의 작사자 존 뉴톤도 임사호천의 대상자다.
        그는 아프리카노예상 이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큰 풍량을 만나 죽음을 느끼자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살아났다.
        이후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2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다윗도 찬양한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시103:4).



        잊어버린 만나

        한 100여 년 전에 영국의 한 청년이 속도가 매우 느린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닷새나 걸리는 여행 길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고 건빵이나 치즈를 먹으면서 고생을 했습니다. 미국 대륙에 가까이 오면서 식당 앞을 지날 때 맛있는 음식을 보자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식당
        에 들어가서 밥을 한 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돈이 없어 미안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식당 주인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며 이미 당신의 선표 가운데 식사 대금이 치뤄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표에 이미 닷새 동안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비가 포함이 되어 있는데도 그 청년은 무지해서 그냥 건빵만 먹고 고생을 하면서
        왔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풍성한 하늘의 만나를 날마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면서 건빵만 씹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한밤중에 일어난 화재

        헬름시에서 어느 날 큰 불이 일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랍비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불을 끄고 있었다. 그 불은 한 30채 가량의 가옥을 태우고는 가까스로 동네 사람들의 힘에 의하여 진화되었다.
        사람들이 겨우 숨을 돌리고 둘러앉아 쉬고 있자니 랍비가 말하였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총일 거요. 우리들은 행운이었소."
        동네 사람들은 놀랬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에 불이 안 났더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 깜깜한 한밤에 어떻게 불을끌 수가 있었단 말이오."


        *보호받는 작은 새

        마르틴 루터는 어느날 저녁 작은 새 한마리가 나무가지에서 자고 있는 것
        을 보고 "이 작은 새는 이미 저녁 먹이를 마치고 자려는 중인데 참으로 저
        의 잠자리는 안전하구나! 저는 내일 아침에 먹을 것에 대하여서도 걱정하는
        것이 없고 내일밤 잠자리에 대하여서도 아무 염려가 없구나! 저는 다윗처
        럼 전능하신 자의 보호 아래 그 몸을 맡기고 아무 염려없이 작은 가지에서
        자는 것으로 만족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모욕하는 작은새가 아닌
        가"고 하였다는 것이다.
        루터는 작은 새 한마리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새를 보호하
        시듯 자녀들을 또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고 한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보은(報恩) 하는 마음

        보스톤 해변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 아래 모여들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다.
        많은 이들이 분을 내며“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반응이 달라졌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 남게 되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갈매기였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이제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장군의 행동은 겸손하게 감사를 표현한 단순한 행동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새우 한 조각 조각마다 하나님과 갈매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 헤드 쉬링크(Headshrink)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은 능히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잘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면서 자기로부터 차 하나님을 축출해 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찾아온 불청객이 있다. 그것은 ㅂ로 고독과 번민, 절망과 무기력이 찾아와 그들의 하나님같은 머리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잘난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터질 것 같은 머리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신의학 용어로 말하면 쉬링크(Shrink)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오그라들다""줄이다" 또는 "비운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바로 정신과 병원을 찾는 이유는 머리를 좁히기 위해서,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남미 페루에 살고 있는 지바로라는 종족이 여러 가지 약품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의 두개골을 줄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헤드 쉬링크라고 했는데 그 말을 정신과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잘난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해 지고 고민거리로 비대해지면 터질 것 같은 그들의 머리를 비원주는데 그것을 줄여서 쉬링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영어로 "헤드 쉬링커(Headshrinker)"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골 비우는 사람", "골빈 사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골이 꽉찬 사람에게 가서 골을 비워달라고 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꽉찬 골을 비울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골빈 사람이 될려면 한 번에, 완벽하게 할 수 있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처방까지 내릴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예수를 믿어 그 분을 내 왕좌에 모시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밝고 명랑한 삶을 회복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예수

        남북 전쟁이 끝난 수년 후 일리노이주의 어떤 농부는 테네시주 내시빌에 있는 군인묘지를 가끔 방문하면서 일년에 한번씩 묘를 돌보고 꽃을 심는 등 헌신적 노력을다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묘인가?"고 물어 보았더니,
        "아닙니다. 그는 바로 우리 마을에 살았어요.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일곱명의 아이가 있었고 처는 허약했습니다. 나 없이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고 식구가굶주림에 허덕일 것이 두려워 징병을 기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때
        문에 공포에 싸였으며 내가 출두해야 할 바로 그날 이웃에 사는 소년이 찾아와서 나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겠다고 제의하면서 그는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으니 나를대신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기어이 그는 출전하여 치카만카에서 부상하여 이곳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묘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서
        는 묘석에다 그의 손가락을 잘라 쓴 거칠은 비명 "그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노라"를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엡 5:2)


        *자비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만 남북전쟁 중 링컨 대통령만큼 너그러움을 자주 베풀어 준통치자는 역사상 없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군기를 어긴 자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공소는 지난 2년 동안의 전투 결과로 링컨은 이 문제를 세심히 연구하였다. 이러한 공소 전문(전문)은 국방성에 수백통이나 서류로 철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 누구의 처형을 중지하라."
        이 모든 공소는 그의 부하 특히 국방부 장관이 도울 것을 거절한 후 마지막으로링컨에게 의뢰되어 오는 것이었다.
        링컨의 변명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전선에 있다면 총을 버리고 도망칠는지 모르지."
        "하루종일 어려운 일에 시달리다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든가 혹은 용서를 한다
        는 일을 발견하면 그것은 나에게 평안한 기분을 주는 것입니다."
        "펜을 약간 움직이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을 죽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러분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총살형을 선도당한 외아들의 늙은 아버지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찾아왔다.
        링컨 대통령은 늙은이에게 붓틀러 장군으로부터 온 전문을 보았다. 그 전문의 내용은,
        "군대의 규율을 완전히 파괴한 이자에 대한 군법회의의 판결에 간섭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 전문을 읽고 난 늙은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울었다. 갑자기 링컨은 펜을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붓틀러 사령관에게, 욥 스미스는 나로부터 명령이 있을 때까지 총살하지 마시오."
        그의 아버지는 안절부절하였다. 다음 명령이 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물었다. 링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과 나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은 나로부터 총살의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는 므두셀라(노아의 홍수이전 사람으로 969세까지 산 사람, 창세기 6장 25절 참조)보다 더 오래 살 것입니다."
        입초근무 중 졸았던 탓으로 수감된 윌리암 스캇트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순시를하는 도중 링컨 대통령은 그를 보자 인자한 태도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아, 너는 총살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일어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나는 믿는다. 그러나 너 때문에 나는 퍽 골머리를 앓았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네가 어떻게 하여 나의 빚을 갚을 것인가 하는 것일세."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젊은 병사는, "저당으로 666달러 정도면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병사로서 너의 임무를 완수하면 그 빚은 갚게 되는 거야."라고 링컨은 말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않는 성도는 주님이 주신일에 충성된자이다.
        (역대하 39:9, 시 78:38)


        하나님

        연소한 동방의 어떤 임금은 현명하고 선량한 왕이 되리라 마음먹고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려 하였다.
        그는 온 나라의 현인을 모아 "모든 지혜를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여 그것을 스스로 읽고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인가를 배우리라 생각하였다.
        현인들은 이 힘드는 사업에 착수하여 30년 후에 그 일을 끝내었다.
        5,000여권의 책을 실은 긴 낙타의 대열이 궁전에 도착하자 "임금님, 여기에 모든 지혜가 가득 차있습니다."라고 현인들은 그들의 힘들인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벌써 중년에이른 왕은 많은 직무와 계획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형편이었으며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바빠서 이 많은 책을 전부 읽을 수 없다. 도로가져가서 분량을 축소시켜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책의 분량을 줄이는데 1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현인들은 자랑스럽게 500권의 책을 왕에게 가져가니 왕은
        "아직도 많아. 50권이면 족하다."라고 말하였다.

        대부분의 현인들은 지루하고 힘드는 일에 지쳐 죽어갔고 그들의 계승자가 10년을더 소모하여 줄인 50권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지금에는 왕도 늙고 피로하였기에 "너희들은 그것을 한 권으로 요약하라."
        5년 후 고귀한 노력의 결정인 한 권의 책을 왕에게 진정하러 왔을 때 이미 때가늦어 왕은 죽음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드셨나를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한 지능과 학식을 갖출 만큼 시간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독생자(독생자)를 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가장 최선의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 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부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 십만 명의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생명을 지키시는 주님

        어느 날 영국 궁성 앞에 요란스러운 교통 정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장갑을 낀 교통 순경이 오는 차량을 전부 스톱시켰습니다. 통행인도 전부 스톱이 되었습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발을 내려놓고 어떤 행렬이 지나가는가를기다렸습니다. 틀림없이 영국 여왕의 행렬일 것이라며 여왕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윽고 그 행렬이 지나가는데 어미 오리가 열 마리의 새끼 오리를 데리고 아장아장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오리들이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왕의 행
        렬처럼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차가 스톱을해야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험한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이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은 자기 생애의 전기를 쓰면서 '천직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아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죽음 속에서 주님이저를 건져 주셨던가? 저는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천직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승부의 미학

        가을하늘이 높아지고 구름빛이 솜털처럼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계절을 가을이라고 부른다.
        가을에 생각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이다.
        서울이라고 하는 삭막한 공간에 살면서부터 그런 낭만적인 추억들이 사라진 지 오
        래됐다.
        문득 야구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나의 발길을 끌었다. 아직도 스포츠를 사랑하
        는 팬들은 여전했다. 전과는 달리 질서의식이 많이 발전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구경을 온 부부도 아이가 버리는 휴지에 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표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느긋한 행복감마
        저 엿보였다. 어렵사리 표를 사가지고 스탠드에 가서 앉았다.
        경기가 시작이 되면서부터 열기는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경기하는 팀은 모두 프로팀이었고 그 팀마다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지방명칭이
        붙어 있었다. 관중들은 제각기 자기 도에 소속된 팀을 응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작 운동하는 선수들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열기를 올렸다.
        어깨가 빠져라고 피칭한 공을 힘껏 타자가 쳤다.
        백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행히도 공은 파울이 되어
        홈런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상대편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나
        왔다.
        승부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이성이 접근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임을 다시 한번 확
        인할 수 있었다.
        다혈질 관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심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어떤 관중은 열광한 나머지 웃저고리를 훌덕 벗어버리고 관중의 앞에 나와 응원을
        지휘하기도 했다.
        땀을 흘리며 선전하는 선수들에게 격려 대신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쳐 힘내라. 베터푸어(타자 바보)다"
        흥분된 군중들은 모두얼굴에 핏대가 서 있었다.
        야구란 참으로 재미나는 운동임을 알았다. 마치 인생처럼 엎치락 뒤치락의 연속이
        었다.
        이사후에 점수를 내기도 하고 끝까지 추적을 하여 역전극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좋은 공을 골라서 치고자 하는 타자의 예리한 눈동자, 어찌하든 교묘한 방법으로
        공을 던져 타자를 무력하게 하고자 하는 투수의 몸부림, 그리고 한 발짝이라도 앞으
        로 나가보고자 애쓰는 주자의 안간힘, 도루를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아웃당하는 도루
        꾼들,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가슴
        이 뭉클해진다.
        지역감정으로 들끓던 야구경기가 끝났다.
        열을 올리던 관중들도 선수들도 모두 허탈함을 공감하는 순간이 왔다.
        열기오른 관중석에는 홈런의 아름다운 환상만이 바람에 날려 딩굴고 있었다.
        운동장 한모퉁이에서는 이긴 선수들이 진편의 감독과 코치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운동의 유종의 미가 저런 것이구나 하는 흐뭇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승부의 미학이여 모든 선수들에게 큰 축복 있을지어다"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마지막으로 터벅 터벅 걸어나왔다.
        내 머리속으로 다시 시골 학교 운동자에서 있었던 운동회의 모습이 아름답게 떠올
        랐다.

        *기독교 신자 증가*
        <1>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10년 후인 1895년에 전국의 신도 수는
        746명이었던 것이 1년 후인 1896년에 8,496명, 1900년에는 18,081명으로 급속도로
        증가되었으며 현재 한국교회의 신도 수는 약 960만명에 달하고 있어 기독교 전래
        근 100년 동안 무려 10,000배가 훨씬 넘는 세계적인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P.10)

        <2>
        1900년에 전 인구의 0.9%가 신자였으며 1910년에는 1.62%, 1920년에는 1.72%,
        1930년에는 1.93%, 1940년에는 2.13%, 1950년에는 4.1%, 1960년에는 6.4%, 1980년
        에는 22.6%로 나타났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 P.10)


        *사랑과 정성이 결여된 카드

        카드 동서 비교
        우리 한국의 연하장(年賀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된 글귀는 천편일률적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나 축성탄(祝聖誕), 그리고 그 말의 영어 표현인 뉴 해피 이어나 메리 크리스마스가 고작이다. 그러기에 자기 감각에 맞는 그림이나 디자인 위주로 카드를 고른다. 한데 미국 사람들 카드 고르는 걸 보면 카드에 적힌 글귀의 내용이 자기가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들어맞은 사연인가 여부로 선택을 한다. 그만큼 카드에 적힌 글귀가 다양하고 세분화돼 있으며 개성적이다. 우리 나라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롭지가 않다.
        병원에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외국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일선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선물이나 호의에 사의를 표하는 글귀 등 내용이 다양하게 유형화돼 있어 자기의 사연에 맞는 글귀를 고른다. 생일 축하 카드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딸에게, 할머니가 손자에게, 약혼자로부터 미래의 아내에게, 제자가 옛날 소학교 스승에게, 심지어는 '다섯 살 맞는 딸에게'라고 세분돼 있기도 하다.
        이런 우스갯 이야기를 외지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아가씨가 가게에 들어 '오로지 당신에게만(Only to you).....' 하는 글귀의 카드만을 수십 장 골라 사자, 가게 주인이 "얼마나 많은 오로지 당신입니까" 하고 감탄하는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그걸 받아든 놈팡이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하고 오금을 저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번져가는 복제문화(複製文化)의 희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단조로운 우리 한국의 카드보다는 편리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활자로 사연을 유형화시킨 데다가 자신의 사인 하나만으로 복제 사연을 사유화한 것에 불과하기에 인간미가 결여된다. 보내지 않고 또 받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나 이렇게 인간의 사연이나 인정이 복제화돼 나간다면 세상 살 맛이 자꾸 반감돼 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이렇게 사연이 세분화돼 나간다면 앞으로는 "당신과 만나게 되어 세상을 다시 사는 느낌입니다"느니, "다음 데이트가 기다려집니다", 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여, 당신의 사랑과 헌신을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쇄된 카드가 나오게 될 것이요, 이런 은밀한 사적인 사연을 복제화된 카드로 받아들었을 때 액면대로의 정감이 전달될 리도 만무하다. 아무나 사 입을 수 있는 기성복 사입듯 상품화된, 그래서 퇴색된 정감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올해 나온 연말연시 카드는 예년에 비겨 사연이 다소 다양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복제문화의 통폐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짤막한 사연일망정 친필로 쓰는 작은 정성을 잊지 말았으면 싶다.



        * 개국과 의료.교육사업의 윤허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
        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
        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
        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
        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면
        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고자 혼신
        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
        (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
        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
        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
        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
        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
        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
        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
        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
        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
        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
        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
        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
        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
        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
        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
        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
        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
        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
        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
        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
        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
        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
        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
        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
        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
        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

        이른 새벽에 인근 공원이나 약수터나 운동장에 나가보면 직립(直立)해서 걷는 사람 틈에 역립(逆立)해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걷는 사람 틈에 뒷걸음질로 걷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왜 사람은 역립해 걸어선 안 되며 뒷걸음질해서 안 될 게 뭐냐 하는 이 세상의 상식에 대한 반역의 성토장만 같다. 그러하듯이 시계바늘도 오른쪽으로만 돌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시계가 생긴 이래 수백 년 동안 오른쪽으로만 돌아 클라크와즈(clockwise:시계방향)란 말까지 생겨나기까지 했는데, 왼쪽으로 돌린대서 무슨 큰 이변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아프리카 대륙의 끝 케이프타운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 중앙공원에 구경갔을 때 훌륭하게 만들어놓은 석조(石造)태양시계를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것은 시계의 문자판에 3시가 왼쪽에 있고 9시가 오른쪽에 있었다. 곧 시계바늘이 왼쪽으로 돌게 돼 있는 거꾸로 가는 시계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최초의 시계는 해시계였을 것이다. 적도의 북쪽에 위치한 북반구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떠 남쪽으로 돌기에 가운데 꽂아 놓은 해시계의 막대그늘이 오른쪽으로 돌지만, 남반구에서는 북쪽으로 돌기에 그늘이 왼쪽으로 돈다고 한다. 나팔꽃 줄기도 북반구에서는 오른쪽으로 감아 도는데 남반구에서는 왼쪽으로 감아 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른쪽으로 도는 시계는 이 지구의 절반에 불과한 북반구문명의 소산일 뿐이다. 만약 거꾸로 도는 시계를 만들어 남반구에 팔아먹는다면 일확천금 할 것이 아닌가.
        역시계(逆時計)는 비단 남반구에 들어맞는 논리만은 아니다. 모든 육상경기, 빙상경기, 사이클, 모터 경기가 왼쪽으로 돌고 야구 베이스도 왼쪽으로 돌게 돼 있다. 사람이 맨 첫발을 디딜 때 본능적으로 왼발부터 나오며, 말이나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때도 왼쪽에서 탄다.
        자동차 운전석이 왼쪽인 것도 인간의 좌향(左向)능동성과 무관하지가 않다. 바구니를 짜거나 뜨개질을 할 때도 왼쪽으로 얽고 짜나가며 맷돌을 갈때도 왼쪽으로 돌린다.
        고스톱의 화투놀이도 짝을 왼쪽으로 돌린다. 시계도 왼팔에 차고 반지도 왼손가락에 끼지 않는가. 인간의 활력원인 심장이 왼쪽에 붙어 있어서인지 좌향이 우향보다 능동적이다. 시계만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그래서 불합리하다 할 수가 있다.
        또한 역시계의 심리적 효과도 대단하다. 늙은이에게는 젊음으로 역행하고 싶은 잠재의식을 충족시켜주고, 젊은이들에게는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체제에 대한 반항과 반골심리를 충족시켜준다. 여성에게는 남성우위 사회에 대한 반감을, 억눌린 사람은 억누르는 사람에 대한 배리감을 이 역시계가 대행, 위안시켜준다. 어린이들에게는 마냥 요정의 나라 시계만 같아 신나게 해주고.
        얼마 전 누군가가 거꾸로 가는 시계를 발명해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올림픽에 밀어닥칠 남반구 주민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고, 더우기 이 역시계의 논리와 심리학이 잘 먹혀 든다면 관광상품으로도 각광받을 받을 만하다.
        다만 역행은 시계 정도에서 그쳐야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도의나 양식 같은 것까지 역행해서는 물론 안될 일이지만.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랑 병

        다정(多情)도 병이라는데 하물며 지나친 너무 사랑이 병이 안 될 수 없다.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남주락적(南州樂籍)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첩(妓妾)과 이별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했던 터라 기첩은 오로지 임만을 사랑할 수 있게끔 아무 누구도 자신을 유혹할 수 없게 해놓고 떠나라고 안달을 했다.
        그리고 촛불을 건네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롯하여 유방이며 얼굴이며 온몸을 어느 한군데 남기지 않고 화상을 입힐 것을 애원했고 또 그렇게 상처를 입혔다.

        '너무 사랑'이 가공할 피학증(被虐症)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가극(歌劇)으로도 곧잘 상연되고 있은 12세기의 엘로이즈아벨라르의 너무 사랑도 병이 되고 있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것만으로 사랑을 충족 못 해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거세시켜가면서까지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그 후 수도승과 수도녀가 되어 사후 나란히 매장되고 있다.

        근년에 인상적이던 너무 사랑병으로 '인형의 집'의 주연으로 유명해진 여배우 리브 아르망과 명감독 잉그마 버그만의 격렬한 사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위치한 연중 겨울인 불모의 무인도에 단 둘이만을 위한 집을 짓고 도피,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사랑을 했다.

        "외계로부터 문을 닫고 친구도 친척도, 그리고 과거며 추억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별, 행복과 소유욕을 충족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각기 "고독을 슈트케이스에 담아 들고....."

        이별의 길을 떠나가고 있다.
        너무 사랑이 중증이 되면 별의별 변태로 다 나타난다.

        변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너무 사랑(too much loving)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성이 적지않다.
        지금 미국에서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라는 이 증후군을 다룬 책이 40주간 베스트 셀러로 2백만 부를 돌파하고 있다.

        알콜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환자수 이상으로 많은 여인이 이 너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 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한다.

        이 너무 사랑병의 원인은 결손가정-부모가 없거나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없이 자랐거나,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여인들일수록 이 증후군에 걸리기 쉽다 한다.
        너무 사랑병 환자는 버림받는다는 것이 최대의 불안이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피학으로 자신을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만들려 하기도 하고 지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상대를 그 결함을 미끼로 잡아두고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채우려 들기도 한다. 헌신적일수록 아름답다는 사랑도 한계가 있는 것이 되니 무상하다.

        한계애정량(限界愛情量)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도 없는 것일까.


        향기나는 미끼

        깊은 사색의 글을 많이 남긴 알랭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한 노파가 바람에 꺾여진 꽃가지를 세워 받침대를 대고서 실로 묶어주는 것을 창 너머로 본다.
        꺾어진 꽃가지를 묶어준다 해서 살아날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노파는 꽃의 생사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묶어주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알랭은 꽃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거기에 인간성을 투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오묘한 심성을 보아낸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植物)에 투사되는 이 같은 인간주의 플랜트와 휴머니즘을 합자(合字)하여 플랜튜머즘이라는 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인간주의가 벌레나 새나 짐승에 투사되었을 때는 애니멀류머니즘이 되고 물론 사전에는 없는, 자신의 사색을 위해 자신만이 쓰는 말이다.

        수년 전 미국 중부의 과수원업계에서 가지가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를 열리게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사과나무를 학대하는 일이라 하여 자숙하는 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플랜튜머니즘이라는 말을 찾아내어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지(大地)'의 작가 고(故)펄 벅 여사에게 한국 여행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물었을 때의 대답이 생각난다.
        소달구지에 짚단을 싣고 소를 모는 한 농부가 역시 짚단을 가득 지게에 지고 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라 했다.
        등짐을 소달구지에 얹고 갈 수도 있을 텐데, 소의 노력(勞力)을 감안하여 굳이 지고 가는 그 농부의 애니멀류머즘을 예리하게 보아낸 것이다. 그 등짐을 얹어서 소가 힘이 들지, 안 들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힘이 들 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아름답느냐는 것이다.

        황희(黃喜)정승이 길을 가다가 밭을 갈고 있는 두 마리의 소를 보고 농부를 불러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귀엣말로 대답했다는 고사(故事)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소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은 애니멀류머니즘의 아름다운 발로를 그에서 보는 것이다.
        근대화는 이 같은 아름다운 심성마저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플래스틱으로 꿈틀거리는 가짜 미끼를 만들고 고기에게까지 사기치는 것도 뭣한데, 이제 멀리까지 향기를 풍기게 하여 고기떼를 유인하는 가짜 미끼가 나왔다고 한다. 고기에게 사기를 치건 말건 낚아올리는 결과 측면에서 피장파장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기 입장에서 보면 죽고 사는 중대사인데 사기까지 당해가며 죽는다는 것이 너무너무 억울하여 얼마나 사람을 원망하겠는가.
        낚시는 본질적으로 사기이긴 하지만 유혹하는 먹이쯤은 실물이게 하는 것이 애니멀류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원격탐사(遠隔探査)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가시광선,적외선, 마이크로파에 의한 사진 촬영등에 의하여 원격 대상물의 정보를 수집하여 해석하고 거기 필요한 정보를 읽어 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이더와 같은 별도의 파장 영역을 사용하여 지하의 사물이나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는 다른 실물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는 기술로 까지 발전했다.

        1981년의 일이다.

        미국의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는 원격 탐사기구를 사용하여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옛날에 흘렀던 큰 강을 발견했다.
        이로써 그곳이 지금은 50년에 한번 비가 올까 말까하는 지역이지만 옛날에는 비가 많이 왔고 사람들이 모여 문화생활을 하던 곳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결론은 땅 밑에 감추어져 있던 하상을 실제로 발굴해 봄으로써 사실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히 증명이 되었다.
        발굴된 지하의 하상에서 달팽이 껍질이 발견되고 손도끼를 위시하여 석기시대의 유물이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기술이 얼마나 발달이 되어 있겠는가?

        오늘날의 고고학계는 이 원격탐사기라는 첨단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가 미처 상상할 수 없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여기 고대인의 무덤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구태여 삽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이 원격 탐사기술을 이용하여 고분속에 있는 물건들을 소상히 아는 것은 초보적인 기술에 속하고 그 고분벽화의 완전한 모습까지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물감의 재료가 무엇이라는 것도 확연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땅에 보물을 숨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적국의 땅속에 무기가 얼마나 어떻게 숨겨져 있으며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운일인 것이다.
        못난 인간들의 기술로도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게서 우리의 영적인 내면세계를 완벽하게 통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 세계를 완벽하게 보이고 있는 상대를 향하여 거짓을 늘어놓고 도는 겉다르고 속다른 짓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보시고 그렇게도 심한 반응을 보이신 이유를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살면서 원격탐사의 기술까지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중심을 환하게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앞에서 보다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세상을 사는 지혜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앟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않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유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고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고,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러운 세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가인의 마음

        내 인격속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우리는 가인을 악한 사람이고 아벨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산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아벨과 같이 선한 의로움만 갖고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희망일뿐 내면에 잠겨 있는 또 다른 내 속에는 추악한 가인의 속성을 갖고 살아간다.
        즉, 우리의 인격속에 아벨과 가인의 피가 공존하여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가인과 아벨의 두마음이 내 자아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다.
        아벨의 마음만 갖고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또 내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을 느낀다.
        얼마전 지존파라고 하는 악당들이 세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하여 침을 뱉고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고 흥분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들과 같은 적개심과 살의가 가득하다면 감히 누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인가?
        가인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앞에서 분노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도 간음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돌을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율법으로 잘 포장된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있었던 것을 그들은 순간 알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섰던 군중들의 마음에도 가인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인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도 그렇게 자신의 이중성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인하여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영혼이 건강한 자라 할 것이다.
        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에 이끌려 사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심각한 병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애통해 한다. 가인의 마음이 내 속에서 꿈틀대지 않도록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기를 힘스게 된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인을 이기기 위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의미있는 존재다.

        에베레스트 산은 해발 약 8,000미터라고 한다.그리고 필리핀 해구는 수심이 약 8,000미터정도이다,만일 잠수부가 지구상에서 가장 낯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몰 수 있다면 그 16키로에 달하는 관경은 사람이 정상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엄청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태양 위에서서 지구를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지구가 당구공처럼 표면이 밋밋할 것은 분명하다 그 위치에서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깊은 해구나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가 되는 그것들이 우주에서 볼때는 아무런 문제점이나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산처럼 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필리핀 해구와 같이 낮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차이점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무 차이점이 없이 다만 그저 인간일 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고자질하는 양심(죄책감)

        19세기 미국의 작가 애드가 엘렌 포우는 그의 작품 [고자질하는 양심]의 주인공을 통하여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양심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 자기 집 지하실에 묻었는데,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온몸은 식은 땀으로 촉촉히 젖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도 계속 들려오는 그 섬뜩한 고동치는 소리를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 소리가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인 것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다.

        양심은 헬라어로 인데, 이는 사람이 자기와 함께 나누는 지식, 즉 자아 의식 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람 모두를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 해결치 못한 죄책감은 병을 불러 온다.

        *양심

        한 여인이 빨간 차만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빨간 색의 차만 보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에 결국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신혼 초에 남편이 징집갔을 때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물론 관계는 그 한번으로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 그 일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그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일이 무마되고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빨간 차면 보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psycho- somatic- illness)나타난 것이다. 현대인의 앓고 있는 질병의 85%가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이라고 한다.

        *사(私:사사로이 할 사,간통할 사)와 사(邪:간사할 사,희롱할 야,)

        私는 곧 邪와 통한다.
        邪는 곧 악(惡)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대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우리의 마음에 사(私)라고하는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흐려지고 만다.
        독선,아집,자만,이기,독단등은 私에서 생기는 악한 종자들이다.

        *맑음의 상징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
        시냇물에 깨끗히 씨기운 하얀 조약돌,
        갓난아기의 티없이 영롱한 눈동자,
        깊은 산속의 하얀 눈,
        그리고 남의 고통을 보고 눈물 흘리는 깨끗한 눈이다.

        *용모의 美(외형)

        용모의 미는 품성의 미에 뒷받침되고, 외형의 아름다움은 정신의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올핸 생명과 향기를 발할 수 있다.

        *마음

        마음은 매우 깊은 우물과도 같다. 바닥에 있는 두터운 침전물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거기에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하지만 격렬한 감정이라는 바람에 의해 그 우물이 휘저어질 때, 너무나도 보기 흉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오물이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 올라 표면에 나타난다. 분노, 미움, 시기, 질투, 육욕,잔인함, 복수,등 심지어 살인까지 나타난다. 그러한 가장 민감한 순간들마다 악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 가능성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문

        유명한 예술가 홀맨 헌터라고 하는 분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성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 밖에서 한편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편 손으로는 계속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의 문밖에서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하여 어떤 때는 이성을 통하여서 때로는 경험을 통해서 슬픔, 기쁨 등, 때로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의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문 밖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어야 하며 다른 이가 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 문의 주인은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주님의 문 두드리시는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어서 주님께서 마음 속에 들어오시어 자신과 같이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쇠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나 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멸망의 책임도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계시는 에수님

        소련의 쟈부르스키라고 하는 청년은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깡패 출신의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자, 소련사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손해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한 번은 군대 상관이 그를 불러서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만 부인하면 계급도 올려주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쟈부르스키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상관이 쟈부르스키를 불러놓고 자기의 과거 경험담을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 부대에 너와 비슷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지. 그는 목에 십자가를 항상 걸고 다녔어. 내가 한번은 그를 불렀네. 그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오래 했다네. 이야기를 다 끝마치자 그 친구는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끌러 탁자 위에 놓더니 다시는 십자가를 목에 걸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공산당 입당원서를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쓰고 공산당에 입당했다네. 그 후로 아주 자랑스러운 공산당원이 되었다네 "
        상관의 설득은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쟈부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도 목에 건 십자가를 벗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제 마음에 계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저도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하면 제 생명에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목에 건 십자가는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어도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벌금

        어느 유대인 회사에서 유대인 사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원이 회사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다. 유대인 사장은 성을 내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그 회사의 간부가 유대인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상담을 청하였다.
        번호사는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쳤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오. 만일그가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하더라도 법망에 걸려서 그가 기소된다면 반드시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며 안되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다운 방식이 아니오."라
        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감방에 들어가 버리면 돈을 돌려 받을 수 없다. 유대의 법률로는어떤 사람이 돈을 훔쳤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고서 돈을 돌려주어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내서 감옥에 집어넣느니 보다는 먼저 돈을 돌려받고 거기에 벌금을 물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령 "어떤 사람이 백만원을 훔친 경우, 랍비의 재판에 걸려유죄가 되고 벌금을 가하여 백십만원을 갚아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백십만원을 돌린 후에는 그는 전혀 전과가 없고 결백한 사람과 같아진다.
        도난당한 쪽에서 저 놈은 돈을 훔쳤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 욕을 한쪽이 나빠진다.
        벌금은 대체로 20퍼센트 이상이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규칙이 있다. 이를테면 무엇을 훔쳤느냐 하는데 따르기도 하고, 그것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든가, 밤에훔쳤다든가, 낮에 훔쳤다든가, 아침에 훔쳤다든가 하는 갖가지 조건에 의하여 등급이 달라진다. 탈무드에서는 말을 훔쳤을 경우 벌금은 굉장히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말을 사용하여 돈을 벌 수가 있고 도난당한 쪽은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트럭이겠는데, 이경우는 4백 퍼센트 가량의 벌금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나귀쪽이 말보다 벌금이 싸다. 말 쪽은 순종을 잘해서 훔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훔친 사람의 입장도 참작된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20퍼센트 정도의 싼 벌금이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벌금이나 돈을 지불치 않는다든가 금리를 물지 않는다든가하면 노동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는 감옥에 집어넣게 되지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비밀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흔히 우리는 여러 사람이 알아서는 안될 이야기를 남의 귀에 가까이 대고,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한 것이 얼마 안 가서 여러
        사람이 다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서기 25년 경 중국의 후한시대에 양진이라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높은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태수라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관하의 어떤 관리가 찾아와서 전에 신세를 많이 입었으니 그 사례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뇌물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자 양진은 그 돈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완강히 사절했다. 뇌물을 가온 관리는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양진에게 돈을 받도록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했다.
        "지금 밤도 깊은데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어서 받아 두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양진은 조용하게 그러나 힘있게 저 유명한 양진의 사지, 즉 "하늘이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을 하고 끝내 그 뇌물을 받지 않고그대로 돌려보냈다.
        뇌물을 가지고 온 관리의 말과 같이 두 사람만이 아는 일이라고 좋지 않은 일을
        알면서 할 것이 아니다. 더우기 이 양진의 교훈에서 중요한 것은 "나도 안다"고 하는 말이다. 이 "나도 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양진의 건전한 자세를 이름이다.
        이러한 양심적인 양진은 점점 높은 벼슬자리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양진은 그 고결한 성품 때문에 환관들의 미움을 샀다. 환관들은 양진에게 뇌물을 주고 마음대로하려고 했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므로 결국은 모략으로써 그를 관직에서 추방하였
        다.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양진이 죽었을 때, 그의 청렴결백하고 덕이 높은 데 감탄하여 천하의 명사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를성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어디서인지 큰 새 한마리가 그의 무덤앞에날아와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사랑

        문학은 허구의 세계를 그리지만 그것이 인간현실의 재현일 수 있기 때문에 강한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속의 인물은 곧 현실의 우리의 분신이기도 한 것이다.
        첫째, 전당포이다. 이 할멈은 무고한 피해자지만 그 비정하고 다대한 착취를 통하여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보복을 단행하게 유도하므로 해서 피해자학 이론이나 사회윤리학으로 볼 때 "범죄유발범"이다. 흔히들 이 노파와 같은 인간을 수전노나 황금의 노예라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자"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다만 황금을 자기의 유일한 절대 주인 또는 절대 가치(목적)로서 경배하는 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라스꼴리니꼬바"라는 허무사상에 사로잡힌 청년 법학도이다. 그는 사회의 부정을 시정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허용된다는 허무주의적 초인사상을대표하는자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즉 평범한 인간과 천재적인 두 인간군으로 나누고 범인은 기존도덕과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나 비범인은 그러한 도
        덕과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확신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마땅히 허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범인 자신은 사회의 기생충과도 같은 노파를 살해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행사는정당하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실상 노파를 살해한 직후 그는 자기 철학과 행위간에
        극심한 갈등을 통감하게 된다. 그는 지나친 피해의식과 영웅주의에 사로 잡힌 돈키호테식 과대망상 주의자이며 그런 유형을 우리는 오늘날 소위 인질범들에게서 쉽게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이기적이고 현실적 향략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쇼냐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이다. 전자는 자기처를 독살시키고 하녀를 능욕하여 자살케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나 결국 자살로 막을 내리며 후자는 딸의 몸을 팔아서까지술을 마시는 비열한 위인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섹스와 알콜이 난무하는 소
        돔의 거리와 그것만을 탐닉하고 기생하는 지저분한 군상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있다.
        네번째는 크리스찬 "쇼냐"이다. 그녀야말고 작가가 창조한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며 구원의 여상이다. 빈곤과 불행한 가족에게는 희생의 제물이요 살인한 청년에게는사랑의 천사이다. 실로 이것은 허무주의와 무신적 철학에 대한 신앙의 승리이며 사랑의 쾌거이자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를 향하여 내가 뿌리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야말로 너 뿐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전체까지 포괄하여 전인적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묘약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15)


        * 성실

        무슨 일에나 진실성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비록 장난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일 때와 같은 성의로 해야 한다.
        일찌기 공자도 어린이들이 노는 자리를 지나다가 그 아이들의 진실된 놀이 모양에다소 무례한 짓이 있었으나 감탄했다고 하였거니와 이와 비슷한 어사 박문수에 관한이야기가 있다.
        박문수는 영조때의 이름난 암행어사로서 신분을 감추고 팔도를 두루 순회하면서군수와 그 밖의 지방관리들의 어질고 우둔함과 민정을 잘 살펴서 정치에 크게 공을끼친 사람이다.
        언젠가 박어사가 남도 지방을 암행할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닿아 서당을 찾아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수십명의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고 있었다. 박어사가 유심히 보니, 한 아이가 군수로 뽑혀서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자못 엄숙한 태도로 좌우에 두 아이를 관졸처럼 세워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 하나가 그 앞에 나와서 공손하게 절을 한 뒤 하소한다.
        "군수님, 저는 지금 제가 갖고 있던 새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대단히 흥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만약 저런 하소연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군수된 아이의 대답을기다렸다. 이윽고 이 하소연에 군수된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를 놓쳤다. 그 새는 산으로 도망갔을 것이 틀림없으니, 너는 지금 새를 감추고있는 산을 잡아오너라!" 하고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군수놀이 하는 그 아이 앞에 나아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색을 하면서 큰 소리로, "이 웬놈이 함부로 관청에 들어가서 군수를 모욕하느냐? 이놈들아! 이자를 포박해
        서 옥에 가두어라!" 하고 관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관졸이 된 아이들이 달려와서 박어사를 잡아 뜰 한 모퉁이에 있는 뒷간에가두었다. 박문수도 비록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그 하는 짓이 하도 진지해서 조금도나무랄 생각이 없어 몹쓸 냄새가 나는 뒷간에서 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아까 군수가 되었던 아이가 박문수를 찾아와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는 무례한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들이 원님놀이를 하였는데, 비록놀이 일지라도 태도를 진실하게 하는 버릇을 길러 뒷날 법을 그대로 엄수해야 하겠기에 존장을 이런 누추한 곳에 가두었던 것입니다."하고 빌었다.
        박어사는 그 모습이 또한 진지한데 더욱 감탄해서 그 아이를 자기 친자식처럼 기르기로 결심하고 교육시켰다. 박문수가 본 대로 그 아이는 뒷날 정승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박어사의 눈에 들었고, 그 뒤 더욱 노력해서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 술

        <탈무드>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 하는데(창 9:20-27)사탄이 찾아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지요"하고 대꾸했다. 사탄은 다시 "포도란 어떤 나무지요?"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오. 그리고 이것을 발효 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라는 것이 된다오."했다. 그러자 사탄은 "그렇게도좋은 것이라면 나도 거들기로 하지요."했다. 노아는 사탄을 고맙게 여겼다.
        사탄은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 흘려서 비료로했다. 그렇게 하여 자란 그 포도 열매로 술을 담갔다. 그리고 나서 노아가 술을 마셨더니 먼저 양처럼 약해지고, 좀더 마시니 사자처럼 강해지고, 좀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좀 더 마시자 원숭이처럼 떠들고 돌아다녔다.
        하나님께서 가장 의인이라고 하신 노아까지도 이와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만일 인간이 마시면 어떤 일이 되는지 알리라.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나간다."


        * 인간

        블란서 태생 과학자이며 소설가였던 야달베르트 폰 사밋소의 "페어테 슐레밀"이란소설이 있다.
        어느 항구에서 "슐레밀"은 회색 외투를 걸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얇은주머니에서 쌍안경도 꺼내고 양탄자도, 승마용 말도 꺼내는 것이었다. 사나이는 "슐레밀"에게 다가와서 "당신의 그림자와 이 마법의 주머니와 바꾸자"는 흥정을 제의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슐레밀은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 만다. 사나이는 "슐레밀"의 그
        림자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고 훌쩍 떠나 버린다. 정신을 차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슐레밀"의 그림자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노파나 여인네와 꼬마들의 의혹과 놀림 때문에 곤욕을 치르어야 한다. 그는 곧 그림자를 판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를 후회한다. 두문불출 방에 처박혀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촛불을 방 전체
        에 켜 놓고도 도무지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몇 번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림자의 비밀이 탄로되어 실연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그는 그림자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깨닫고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림자를 되찾으려 한다.
        허나 악마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이번에는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줄곧비웃고 유혹하는 악마의 간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마법 지갑을 던져버린다. 그리고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노동을 통하여 번민으로부터 해방받으려 한다. 우연히 그는마법의 장화를 사게 된다. 그는 거리를 단축하는 신비의 장화를 신고 이집트의 피라
        밋을 보고 구라파와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자연의 연구에 몰두하게된다. 그리고 끝에는 친구 "사밋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 나의 벗이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그다음에 돈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슐레밀"이 팔아버린 그림자, 그리고, 이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나 영원히 찾을 수 없었던 그림자, 그것이 없음으로 해서 인간 사회에서 백안시 당하고 사랑의 저버림을 당하는 그 그림자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는 것이나 우리 인간 본연의 소유물인 것이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무시하면 아쉽고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이 세상에는 흔히 있다. 그것은 조국일 수도 있으며 신앙이며 양심이며 눈물일 수도 있다.


        *인생

        어떤 배가 항해를 계속하고 있을 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지며 폭풍우가 일어나 배는 항로를 벗어나고 말았다.
        아침이 되니 바다도 고요해지고 어느 아름다운 섬이 곁에 있었다. 배의 닻을 내리고 잠깐 쉬기로 했다. 그 섬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흐느적거리고 맛있어 보이는열매가 달린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으며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다섯 명씩 일행이 되어 나뉘었다.
        첫째 일행은, 그들이 섬에 간 새에 순풍이 불어 배가 떠나 버릴지도 모르므로 섬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의 목적지로 빨리가고 싶다고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에 남았다.
        둘째 일행은, 서둘러 섬에 상륙하여 향기로운 꽃냄새를 맡고 녹색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고 원기를 회복하자 곧 배로 돌아왔다.
        셋째 일행도 상륙했으나 너무 지나치게 오래 섬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순풍이 일면 배가 출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헐레 벌떡 돌아왔으므로 소지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들이 애써 잡아 놓았던 배의 좋은 자리도 잃고 말았다.
        네째 일행은 순풍이 불어 선원들이 닻을 감아올리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돛이 달리지 아니했다는 둥 선장이 자기들을 남겨두고 출항할 까닭이 없다는 둥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계속 섬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정말로 배가 항구를 떠나 가려하는데 문득 정신이 들어 황급히 헤엄쳐 뱃전에 올랐기 때문에 바위나 배둘레 같은
        데서 몸을 다쳐 그 상처는 항해가 끝날 때까지 낫지 않았다.
        다섯째 일행은 너무 먹고 지나치게 들떠 출항할 때 배에서 울리는 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숲속에 있는 맹수에게 잡아 먹히고 더러는 독이 든 열매 따위로 병에 걸려서 전멸해 버렸다.
        독자라면 어느 일행에 속했을 것인지 잠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배는 인생에 있어서 선행을 상징하고 있다. 섬은 쾌락을상징하고 있다. 첫 일행은 살아가면서 조금도 쾌락을 맛보려 하지 않았다. 둘째 일행은 쾌락에 조금은 젖었지만 자기들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닿지 않으면 안된다는의무를 잊지 않았다. 세째 일행은 지나치게 쾌락에 젖지 않고 돌아오기는 했으나 역
        시 좀 애를 먹었고 네째 일행도 돌아오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것이 늦었으므로 목지에 오기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떨어지기 쉬운 것은 다섯째 일행이다. 평생 허영 뿐인 것만을 위해 산다든지 장래일을 잊어버린다든지, 달콤한 과일 속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먹기도 한다.


        *인형-마음속이 비어 있는 사람의 비유

        중국의 고전인 대학이라는 책 속에 있는 이야기이다.
        문장이 어려서 여러 어린이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할 때이다. 바로 어린이들이 가장 기뻐하는 정월 명절이 가까왔을 무렵이었다.
        문장은 명절 때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부 시간에도 글에는 마음이 쏠리지를 않았다. 그저 즐거운 놀이나 그밖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을 마음 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르치는글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선생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기가 가르친 글을 알고 있는 지를 묻는 일이 가끔있었다. 이 날도 전례에 따라 그렇게 하려고 우선 종이에다 큰 글자를 하나 써서 여러 어린이들에게 보였다. 그것은 바로 쉴 휴자였다.
        선생은 쉴 휴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쉰다는 뜻의 글자인데, 어째서 이 글자를 쉴 휴라고 하는지 알겠느냐! 왼쪽의 인변은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고, 그리고 바로 오른쪽의 글자는 나무라는 글자이다. 이두 글자를 합친 모양이 다름 아니라,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이 된다."
        선생이 "알겠느냐?"하고 되묻는 말에 모두 알아 들었노라는 표정이었으나 그중 문장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선생은 휴자를 크게 쓴 종이를 감추고 문장 앞에 가서방금 가르친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그러나 문장은 손에 붓을 든 채 움직일 줄을몰랐다. 선생은 문장을 보고 물었다.
        "왜 쓰지 않느냐?"하고 말하자, 문장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 지금 막 내가 큰 종이에다 써서 보여준 것을 보지 않았느냐?"하고 선생이묻자, 문장은,
        "아니올시다."하고 고개를 흔든다. 선생은 다시,
        "뭣이! 보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너는 보았으나 잊은 것이 아니냐?"
        하고 말했으나, 문장은 여전히 "아니 못 보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선생은 화를 내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 종이에 쓴 근자를 보일 때, 너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이쪽을 보았는데"하고 곧 말을 이어서 다른 어린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모두들 "네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선생은 다시 엄숙한 어조로, "얘, 문장아, 보았으나 잊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보고서도 안 보았다고 하면 거짓
        말을 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나쁜짓이 된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문장은 역시,
        "아니예요. 보지 않았어요."하면서 울고 있었다.
        문장이 억울하다는 듯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응, 알았다. 보기는 했는데 보이지를 않았구나.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너는 글자를 향해서 보고는 있었으나, 머리속에는 딴 생각을 했으니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모양이다."
        이 말을 듣자 문장은 울음을 그치고 선생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만 돌리고 마음을 딴데 파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이 없는 인형과 같으니라."
        문장은 이때부터 공부할 때, 정신을 다른데 파는 일이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

        옛날에 덕망이 높은 한 승려가 있었다.
        불량한 아들 때문에 속을 썩고 고생을 하던 어떤 아버지가 그 스님을 찾아가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그는 그 아들이 도무지 아비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매사에 어긋나기만 하니 자기로서는 도저히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침식을 같이 하며 그 아들로 하여금 듣고 보고 깨닫는 가운데 스님의 감화를 받아서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생각끝에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이제 그 고약한 소년과 같은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갔다.
        처음 하루 이틀은 제법 얌전하게 굴던 그 소년은 또 다시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스님은 그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않았다.

        두 달의 세월이 흘렀으나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고 스님은 그대로 침묵을 지켰을뿐이다.
        그 불량자의 아버지도 차차 스님의 무관심에 대해 의심 뿐 아니라 불만을품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기약한 3개월이 지났다.
        이제 이 스님은 그 집을 떠나 절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불량자 아들은 꾸중만 매일 들으리라 생각했다가 뜻밖에도 잔소리 한 마디 듣지 않은 사실을 한편 다행하게 생각하고 한편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날은 특별히 밖에도 나가지 않고 떠나가는 스님을 전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님은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게 되었는데, 그는 그 불량자 더러 신들매를 좀 매줄 수 없겠느냐고 하였다.
        그 소년은 작별하는 이 마당에 그만한 봉사야 못하랴 생각하고 허리를 구부려 스님의 신들매를 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등이점점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소년은 놀라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손등에 떨어진 것은 스님의 눈물이었다.
        석 달 동안 그 불량한 소년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않은 그였으나 얼마나 밤낮으로 그 어린 놈을 생각하였으면 이별의 자리에서 그처럼 눈물이 쏟아졌겠는가?

        손등에 쏟아진 그 눈물 때문에 이 불량자는 뉘우치고 삶의 바른 길을 걷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기는 하면서도 이 말의 진실함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든 일에 있어 훌륭한 방법이다.
        방책을 아무리 열심히 강구하여도 정성이 부족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믿는다.

        신변의 위험이 겁이 나서 예수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잡아뗀 베드로를 돌아다 보는예수를 한번 상상해 보라.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다. 돌아다
        보는 스승의 정성어린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눈초리에 베드로도 감격하였으리라. 술책이나 권모는 사람의 참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정성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어느 인간의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 감격하지 않을 것인가?

        처세(處世)

        "좋은 단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날 중에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

        "정직한 자는 자기 욕망을 지배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는 욕망에 지배당한다."

        "타인의 자비로 사느니 보다는 가난한 생활을 하는 편이 좋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과 자기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거리가 있다."

        "세상에는 도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이 있다. 여행, 여자 친구, 부, 일, 술,수면, 약, 그리고 향료이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 되는 것 셋이 있다. 빵의 누룩, 소금, 망설임이다."

        "단지 안에 들어간 한 개의 동전은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만 동전이 가득찬 단지는조용하다. "

        "전당포는 과부가 가진 물건을 저당 잡으면 안된다. 여자나 아이가 가진 물건을저당 잡아도 안된다."

        "명성을 구하여 달리는 자는 명성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렇지만 명성으로부터 피해 달리는 자는 명성에 붙잡히게 된다."

        "물건을 취하지 않은 도둑은 자기를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의 목적은 기쁨, 회장자의 목적은 침묵, 강의의 목적은 듣는 일, 사람을 방문할 때의 목적은 일찍 도착하는 일, 가르치는 일의 목적은 집중, 금식의 목적은 있는 돈으로 자선하는 일."

        "인간에게는 요긴한 부분 여섯이 있다. 그 중 셋은 자신이 지배할 수 없지만 셋은인간의 힘으로 아무렇게나 되는 부분이다. 눈, 귀, 코가 전자고 입, 손, 발이 후자다."

        "당신의 혀에게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하는 말을 힘을 다해 가르치라."

        "장미꽃은 가시틈에서 자란다."

        "공짜로 처방전을 쓰는 의사의 충고를 듣지 말라."

        "항아리를 보지 말고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라." (신 10:17, 욥 34:19)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고 사람은 일로 말미암아 평가된다."(마 7:15-20, 눅 6:43,44)

        "어린 오이를 보아도 그 오이가 장차 맛있게 될지 어떨지 모른다."

        "행동은 말보다도 소리가 크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게는 하여도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지는 말라."

        "위대한 사람이 손아래 사람의 말을 듣고, 노인이 젊은 사람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은 복될 것이다."

        "노화를 재촉하는 네 가지 원인 --- 두려움, 노여움, 아이, 그리고 악처."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세 가지 --- 명곡, 조용한 풍경, 향기"

        "사람에게 자신을 가지게 하는 세 가지 --- 좋은 가정, 좋은 아내, 좋은 의복"

        "자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인간은 아무리 굉장한 부자라도 맛있는 요리가 차려진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선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1.  자진해서 물건이나 돈을 사람에게 주지만 남이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
        2. 남이 자선을 행함을 바라지만 자기 자신은 자선 따위를 베풀려 하지않는다.
        3. 자기도 기꺼이 자선을 하고 남도 자선을 베풀 것을 바란다.
        4. 자기도자선을 좋아하지 않고 남이 자선을 베푸는 것도 싫어한다.

        첫째 유형은 질투가 깊고,
        둘째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고 있으며,
        셋째 사람은 선한 사람,
        넷째 유형은 완전한 악인이다."

        "한 자루의 양초로 많은 양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양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세 가지 일"
        1. 가난한 사람이 물건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 주는 일.
        2. 부자로서남몰래 자기의 수입의 10퍼센트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사람.
        3. 도시에 살고 있는독신자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

        "일생에 한번 오리와 닭을 한껏 먹고 다른 날은 굶주리는 것보다는 평생 파만 먹고 있는 편이 낫다."

        "자기 보존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온갖 것에 우선한다. 단, 다음 세 가지 경우에는 자기를 버리고 목숨을 버리는 편이 좋다."

        1. 남을 죽일 때,
        2. 불륜한 성관계로 들어갈 때,
        3. 근친상간을 할 때

        "상인이 해서는 안되는 일"
        1. 과대선전을 하는 일,
        2. 매점매석을 하는 일,
        3. 계량을 속이는 일.

        "단 과일에는 그만큼 벌레도 많이 먹고,"
        "재산이 많으면 근심도 많고, 여자가 많으면 그만큼 꾸지람도 많고, 하녀가 많으면 그만큼 풍기도 문란하고,"
        "사환이 많으면 집의 물건도 많이 도둑을 맞고,"
        "스승보다 깊이 배우면 일생은 보다 풍요해지고,"
        "명상에 더 오랜 시간을 내면 지혜도 보다 늘고,"
        "사람을 만나 유익한 말을 들으면 좋은 길이 열리고, 자선을 보다 많이 베풀면 평화가 찾아온다."
        "발가벗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다 입었을 때는,"
        "입지 말라, 남들이 다 발거벗을 때에는. 서지 말라, 남들이 다 앉아 있을 때에는앉지 말라, 남들이 다 서 있을 때에는. 웃지말라, 남들이 다 울고 있을 때에는 . 울지 말라, 남들이 다 웃고 있을 때에는."


        세계 3대 단편작가 하면 "안톤 체홉", "모파상", "에드가 알란 포우"를 손꼽는데"체홉"의 "카멜레온"이라는 작품은 "카멜레온"이라는 제목 그대로 주위상황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오츄멜로프" 서장의 무기력한 인간성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새 외투를 입은 경찰서장 "오츄멜로프"가 광장을 지나다가 마침 개에게 손을 물려서 피를 흘리며 개를 닥달하는 귀금속 상인 "흐류겐"을 만난다.
        진상을 알아 본 서장은 개주인을 찾아 손해 배상을 받음은 물론 개를 풀어 놓은과실을 엄중히 다스려야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모여든 군중들 틈에서 "저 개는 장군 댁의 것이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여 피해자를 향해 "자네가 못에 찔려 가지고 연극을 하는게 아니냐"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곁을 따르던 순경이 "저 개는 장군 댁의 개가 아닌것 같습니다."말하자 서장은 되받아 "글쎄 나도 알고 있어. 장군 댁의 개는 이보다 훨씬 큰 사냥개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아닙니다. 저 개는 틀림없이 장군 댁의 것입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서장은 순경에게 "자네 이 개를 장군 댁에 끌고
        가 보이게. 내가 발견하여 보낸거라고 말하게나. 잊지말고." 그런데 이 때 장군 댁의 요리사가 그 광경을 보고 "우리 집엔 이 따위 개는 없습니다."고 내뱉는다. 화가난 서장은 "이 따위 떠돌이 개를 당장 처치해 버려라."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그요리사는 "서장님, 그러나 이 개는 장군님의 동생이 데리고 온 개입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 지금까지 호통을 치던 서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럼 장군의동생께서 오셨단 말인가? 자네가 끌고 가게. 개에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그 요리사는 개를 데리고 가고 서장은 "흐류겐"을 혼내줘야 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을 물어뜯은 개 한 마리를 두고 소신껏 추궁하지 못하는 경찰서장 "오츄멜로프"의 서글픈 상황 --- 여기에 관료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있고 병폐가 매사에 직위와 권위를 민감하게 의식한 나머지 전전 긍긍하여 주변 정세부터 살펴야 하는 소시
        민적 서글픈 현상, 이것은 "오츄멜로프"서장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상전들아 저희에게 공갈을 그치라."(엡 6:9)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탐욕

        <아메리카의 비극>하면 아마 대부분 생소하겠지만 영화화된 <젊은이의 양지>하면누구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크리프트를 생각하며 기억을 새롭게 할 것이다.
        원래 <아메리카의 비극>은 신문기자 출신 작가 드라이저(Theodore Dreiser, 1871-1945)의 역작인데 그는 물질문명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하는 일단의 미국 현대사회와
        그 사회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저속한 인간생활 저변의 예리하게 파헤치므로 급속한산업 사회와 비인간화 현상이 심각해 가는 현대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문제작가인 것이다.
        주인공 "크라이드.그리피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호화로운 옷과 맛있는 음식과 멋있는 자동차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 약방점원을 거처 호텔급사가 된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유흥에써버렸다.
        어느 날 남의 자동차를 훔쳐 아가씨들과 드라이브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치어 죽이게 되고 멀리 부자인 친척을 찾아간다. 교양은 없으나 어엿한 청년인 그는친척의 배경을 이용 상류자제들과 어울리게 되고 부호의 딸을 유혹하여 결혼까지 약속받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거해 온 여공이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까지 했다.
        이 여공만 없어지면 하고 열망하던 그는 결국 그녀를 유인하여 죽게 만들었다. 행복은 이제 눈 앞에 왔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전기의자였던 것이다.
        첫째, 이기심의 문제이다. "너를 죽여서까지라도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이선이다."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소설속의 "크라이드.그리피스" 뿐이겠는가? 인간의 이기심은 그것이 현대에 와서만 특별히 문제시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어느시대보다도 가장 탁월하고 숭배 할 만한 기술 과학 시대를 창조한 현대인들이 왜 인
        간 내심에서 이기심만은 축출해 내지 못하느냐 이 말이다.
        때문에 치유가 요원한 이기심은 인간의 원죄와 숙명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둘째로 탐욕의 문제이다. 탐욕은 저급한 가치관을 낳게 된다. 지금 모든 사람의두뇌를 벅차게 점유하고 있는 사상은 황금만능과 물질지상주의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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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 (2)

        지금으로부터 수 백년 전 불란서에는 부유하고 욕심많은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재산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성의 구석진 곳 아무도 모르는 밀실에 숨겼다
        . 밀실에 이르는 통로는 깊숙하고 협소하였다. 그리고 입구에는 철문이 출입을 제한하고 이 문은 닫힐 때면 저절로 잠기었다.여기서 여러해 동안 이 수전노는 아무도모르게 돈을 만지작 거리며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었다.
        어느 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땅에 예속되어 억압과 착취에 허덕이는 농민들로부터징수한 소작료의 돈주머니를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밀실 금고로 가져가 언제나 하듯이돈을 만지작 거리며 돈더미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방을 나오려고 열쇠를찾으니 열쇠를 바깥에 두고 온 것을 알고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잠겼으
        니 그는 분명히 갇혀 있는 죄수와 같았다. 아무리 외치고 두드려도 그 방은 견고하여 소리나 빛이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갇힘을 알고 달려와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려 애썼으나 결국 그는 누군가에 유괴되어 살해당했
        다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수개월이 지난 뒤 먼 마을에 사는 자물쇠 만드는 어떤 노인이 백작의 실종을 듣고 30년 전에 그가 특수한 자물쇠를 고안하여 달아 준 희귀하게 만든 견고한 방을 회상하였다. 그 노인이 백작 친척의 안내로 간 그 밀실은 여전히 잠겨 있었으며 방안에는 백작의 부패한 사체가 돈더미 위에 발견되었으며 그 광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의 단말마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준다.



        * 허사가

        어렸을 적에 부흥회에 가보면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잔치라도 하는 기분인데, 풍채도 좋고 목청 한번 시원한 이성봉 목사님이 허사가를 한 바탕 불러 제끼면살맛이 저절로 솟아나는 느낌이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일생일귀 북망산 불귀객이 되니
        일배 황토 가련코 가이 없구나.
        솔로몬의 큰 영광 옛말이 되니
        부귀영화 어디가 자랑해 볼까?

        추조중의 만월대 영웅의 자취
        석양천에 지난 객 회고의 눈물
        반월산성 무너져 여우집 되고
        자고새가 울 줄을 뉘 알았으랴.

        일생 백 년 산대로 슬픈 탄식뿐
        우리 생명 무언가 운무로구나.
        그 헛된 그림자 지남 같으니
        부생낭사 헛되고 또 헛되구나.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 널 기다린다.

        한강수는 늘 흘러 쉬지 않건만
        무정하다 이 인생 가면 못오리.
        서시라도 고소대 한 번 간 후엔
        소식조차 막연해 연년 춘색 오건만
        어이타 인생 한 번 가면 못오니 한이로구나.
        금일 향원노던 객 내일 아침에
        청산 매골 마른 뼈 한심하고나.
        요단 강물 거스릴 용사 있으며
        서산낙일 지는 해 막을 자 있나.
        하루 가고 이틀 가 홍안이 늙어
        슬프도다 죽는 길 뉘 면할소냐.

        토지 많아 무엇해 죽은 후에
        삼척 광주 일장지 넉넉하오며
        의복 많아 무엇해 나 떠나갈 때
        수의 한 벌, 관 한 개 족치 않으랴,

        땀 흘리며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가나 지고 가나 헛 수고로다.
        빈 손 들고 왔으니 또한 그 같이
        빈 손 들고 갈 것이 명백치 않나.

        모든 육체 풀같이 썩어 버리고
        그의 영광 꽃같이 쇠잔하리라.
        학문도 지식도 그러 하리라.
        인간 일생 경영이 바람잡일 뿐
        우리 희망 무엔가 뜬 세상 영화
        분토 같이 버리고 주님 따라가
        천국낙원 영광 중 평화의 생애
        영원무궁하도록 누리로다.



        * 혀


        "유대인 둘이 모이면 세 사람 몫의 의견이 나온다."는 속담이 있다. 유대인에게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돌아온다고 할 만큼, 그들은 호기심이 강하다. 아뭏든 유대인만큼 매우 수다스러운 민족도 다시 없으리라. 이 경구는 <탈무드>에 나오는 말인데 주전(B.C.) 5백년부터 주후(A.D.) 5백년까지사이에 연 수만명의 랍비가 토의한 과정이나 결과가 수록된 이 성전은 혼자서는 한평생 걸려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이 돼버렸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탈무드>에는 입에 관한 경구가 많다.
        "부주의하게 이야기 하지 말아라."
        "비밀을 흘리고 다니지 말아라."
        "잘 들으라."따위들이다.
        유럽의 한 유대인 거리에 수다스런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청산유수처럼 잘하며 상대에게는 말 참견할 틈을 주지 아니했다.
        한번은, 이 남자가 이웃 도시의 유대인 거리에 와서 랍비를 찾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읍의 랍비님이 선생님의 욕을 했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랍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뇌까렸다.
        "아니죠. 나는 이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요."남자도 질세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자네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 랍비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을게 아니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담이다.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는 집과 같다."


        *능력본위


        생긴 대로 살아가고, 꾸밈새 없이 지낸다는 것은 한결 마음이 편한 일이다.
        누구나 생긴 것 이상을 드러내 보이려고 억지 춘향식으로 꾸미고자 하고, 때로는그로 말미암아 무리한 짓도 하게 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 소신대로 행하고,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고 꾸미려는 것보다 한결 훌륭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농사를 짓는 것이 제격에 맞는 사람이 장사를 하려다 실패하게 되고,또 그와 유사한 경우를 보게된다.
        옛부터 우리나라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는말이 있다.
        이 경우에 알맞는 고대 그리스의 예화가 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팁푸스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으나,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디오게네스는 세상 사람들이 거지라고까지 할 만큼 겉치레가 허술할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도 변변치 않은 반면에, 아리스팁푸스는 사치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 신분에 넘칠 정도로 매사에 호화스럽게 하느라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는 자기가 먹을 야채에 묻은 흙을 털고 있으려니까 때마침 아리스팁푸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빈둥빈둥 놀면서도 늘 사치를 좋아하는 아리스팁푸스를 충고하려고 생각했다.
        "자네도 나처럼 이런 야채를 먹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쓸데없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굽실거릴 필요가 없을 걸세." 하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 말에 아리스팁푸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네야 말로 나처럼 사람들과 잘 사귀는 기술을 배웠다면 시시하게 야채의 흙이나 털고 있지 않아도 됐을 걸세."



        *작별인사

        그는 굉장히 오랜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피로에 지치고 굶주리고 목이 바싹바싹말라 있었다. 사막을 오랫동안 걸어서 간신히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나왔다.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익은 과일로 굶주림을 채우고 그 곁의 물을 마시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여행하기 위하여 다시 출발해야만 했다.
        그는 이 나무에 크게 감사하여 "나무여, 굉장히 고맙다. 나는 어떻게 네게 보답하면 좋을까? 네 열매가 달도록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네 열매는 충분히 달다. 상쾌한나무 그늘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새삼 너를 자라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물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물의 혜택도 충분히 받고있다. 너를 위하여 내가 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는데로 많은 열매를 맺어열매가 많은 나무가 되어 너같이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가 자라도록 원할 수 밖에 없구나."했다.
        당신이 작별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원할 때 그 사람이 훨씬 슬기있게 되기를원해도 이미 충분히 풍부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도이미 충분히 선한 사람일 때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당신과 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자라기를!"하고 축원하는 것이 제일 슬기롭다.



        * 광고

        오늘의 사회에서는 광고를 할 때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맥주, 또는 담배 등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반드시 바른 정보만을 전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상품 측이 다른 상품보다 좋다고 일컫지만 반대로 또 다른 한 상품의 광고를보면 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품과는 관계없는 포장이나 도안도 퍽 많이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그같은 일은 예삿일처럼 되어 좋은 판매방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담배광고를 보면 아름다운 처녀가 자동차 안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실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그 처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탈무드에서는 이와같은 판매방법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을속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탈무드에서는 소를 팔 때에 실제 빛깔과 틀리게 색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또갖가지 도구류에 색칠하여 새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금하고 있다.
        말하자면 속일 목적으로 그것에 색칠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곳에 노예가 있는데 그 노예가 먼저 머리에 물을 들이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젊게 보이게 하고서 자기를 사가는 이를 속였다는 실예가 있다. 또 과일가게에서 신선한 과일을 묵은 과일 위에 얹어 놓고 파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또 탈무드에서는 건물의 안전 규명에 있어서 이를테면 처마의 길이를 제한하고,발코니 기둥의 굵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노동시간을 초과해서 사람을 부려서는 안된다고 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과일을 따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 그 노동자가 어느 정도 과일을 손에 쥐고 먹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고 하였
        다.
        또 탈무드에서는 상품을 팔 때 그 물건과 틀리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광고에서는 킹 사이즈라든가 풀야드라든가 하는 과대한 말이 사용되고 있다. 풀야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 야드밖에 안 되므로 그런 말은 일찍부터금지되어 있었다.


        * 꿈

        20C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5)의 <지평선 저 너머>는 꿈과 이상과 행복이 한데 어우러진 지평선 건너 편을 동경하면서 젊은 가슴에 꿈과 이상을 가지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라는 사실을 묘사해주고 있다.
        이 희곡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안드류와 로버트 형제,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애인루우스라는 여성이다. 로버트는 농가의 자식이면서도 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어릴적부터 병약한 몸으로 늘 저 산너머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많을까하고 미지의 나라를 동경하는 것이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늘 책을 벗삼으며 항상 꿈을 그
        리며 지냈다. 그러나 형 안드류는 그와 정 반대의 성격으로 건실한 인간이며 땅을사랑하는 선천적인 농부였다. 이렇게 두 형제는 성격이 달랐으나 어릴 때부터 다투거나 싸움을 모르고 지냈다.
        루우스는 가까운 농장의 딸로서 아름답고 건강하였으나 그저 교양이 없는 평범한처녀에 불과했다. 형 안드류는 일찍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앞으로 결혼할 심산이었고그녀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로버트와 루우스는 결합하게 된다. 로버트는 지평선 너머로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루우스를 만나 사실은 자기형 보다 더 그녀를 사랑해 왔다고고백하면서 형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의 시적인 말에감동된 루우스는 "내가 진정 사모해 온 분은 당신의 형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부디
        떠나지 말고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여기에서 로버트는 자기가 동경하던미와 행복이 멀리 가지 않아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구나 생각하면서 여행을 중단하고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일이 여기에 이른 사실을 알게 된 형 안드류는 깊은 절망에 빠져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로버트가 타려던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조그마한 운명의 장난으로 시인인 로버트가 농장을 맡게 되고 농부인 안드류가 선원이 되었으니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로버트는 농장경영에 완전히 실패하고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생 끝에 폐병을 앓게 된다. 고달픈 생활과 더불어루우스의 아름다움도 퇴색되었고 감정마저 말라버린 것 같았다. 형 안드류 또한 배
        에서 내린 후 사업에 실패하고 황금만을 추구해 온 지난 날의 생활이 무의미했음을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처절한 비극의 종장에 가서야 로버트는 병상을 뛰쳐나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제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다. 자유를 얻게 된다. 영원히 자유로워진다."외치면서 숨을 거둔다.
        꿈은 인생을 키우는 양식이다. 로버트의 실패와 폐병과 죽음의 비운 --- 그것은벌써 그가 꿈을 묻어버리는 순간부터 시작된 재앙이었다. 교양없고 경박스러운 루우스야말로 로버트의 꿈을 산산히 부셔버렸던 유혹자였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느니라."(잠 29:18)


        *남자

        유대인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등대립되는 것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언제나 대립하는 것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언제나 두 대립하는 것 사이에 살아가며, 두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 안에도 남자의 늠름함과 여자의 상냥함이 공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적인 남성이란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상냥함을 겸비하고 있는 자다."



        * 돈

        돈을 잘 쓴다는 것은 결코 낭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돈을 쓸 데에 인색해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돈을 쓸 때에 생각해야 할 기준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부잣집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돈을 탐낸 사람이 있었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돈을 잘 벌 수가 없는데, 주인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돈벌이가 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머슴은 주인에게, "주인님, 어찌하면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주인은 머슴에게 이렇게말했다.
        "그것을 말로 하기보다는 실제로 몸소 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머슴은 어떻게든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주인은 머슴을 뜰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로 올라가라고 했다. 머슴은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돈버는 방법을 알고 싶은 욕심으로 주인이 하라는 대로 그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달리라고 했다.
        머슴은 심신이 떨렸다. 그것은 그 바로 밑은 깊은 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가지를 잡고 떨어지지만 않으면 우물에 빠지지 안겠기에 역시 주인이 하라는 대로했다.
        두 손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꼭 잡고 늘어진 머슴에게 이번엔 버드나무 가지에서한 손을 떼라고 했다. 조금 있다가 주인은 나머지 한 손마저 놓으라고 했다. 머슴은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우물에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주인은 그제서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게 돈을 벌려거든 돈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돈을 쓸 때마다 지금 버드나무가지를 잡은 마지막 손을 뗄 때의 조심스러운 태도, 바로 그대로 해야 하네."


        * 돈 (2)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존경할 때에는 그 사람은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가 가진 권력이나 지위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마을에서 제일 가는 금력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뱅이였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부자 쪽이 조금 앞서 도착했으므로 랍비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한 시간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가난뱅이 남자가 그 뒤를 이어 들어갔다. 상담은 단 5
        분만에 끝났다.
        "랍비님! 부자의 경우는 선생님께서 한 시간이나 걸리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이 걸렸습니다. 이래도 공평하다고 하시겠습니까?" 가난한 남자는 항의했다.
        랍비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자자, 내 아들아, 그대의 경우는 가난한 걸 이내 알았네. 그러나 부자의 경우 마음이 가난한 것을 알기 전까지 한 시간이 걸린거라네." "돈있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칭찬하고있는 것이다."


        *돈 (3)


        유대인은 천주교도처럼 육체에 특별히 높은 지위를 주지 않는다. 천주교에서는 육체는 육욕의 원천이며 따라서 육체는 죄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육체를 정신을 담는 그릇이므로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육체, 그자체가 죄가 죄를 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돈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천주교도는 언제나 돈을 악이라고 생각하여 죄많은 것이라고해왔다.
        이런 견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자신없음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육체나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르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은 못된다.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을 가져온다."


        *돈 (4)

        매춘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을 읽어도 매춘부는 자주 등장하며 또 중세의 유대인 거리에는 매춘부가 많았었다. 하긴 오늘날에 와서 유대인은 애쓴 보람이 있어서 모두들 제법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유대인 매춘부를 만나는 일은 꽤 어려울른지도 모른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 때 그 여자가 "어머나,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는것은 무슨 뜻이냐면 매춘부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뜻이겠다. 비단매춘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한다고 하는 위인들이 있다.
        이것은 우회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예컨대 누군가에게 5백원을 주고 얼굴에 침을뱉아 놓고 "비가 뿌렸다."고 한다면 "그렇군, 비가 뿌렸군."할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이 5백원이 5십만원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매춘부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 여자는 비가 온다고 한다."

        *맛의 성격

        맛은 그 성격상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생리적인 조건에 의해 크게 죄우되는 생리적인 맛과, 생리적인 것과는 별반 관계가 없이 감정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정서적인 맛이 그것이다.
        맛을 짠맛, 단맛, 신맛, 쓴맛 네 가지로 나눈다면 짠맛과 단맛은 생리적인 맛이요, 신맛과 쓴맛은 정서적인 맛이다.
        생리적인 맛이란, 땀을 많이 흘리거나 핏속의 염분이 모자란 듯하면 염분이 많은 음식이 당기고, 또 노동을 많이 하고 나면 핏속의 당분이 감소 단 것이 먹고 싶고 당기는 것처럼 핏속의 염분이나 당분의 농도에 따라 그 기호가 크게 달라진다.


        *순결

        어떤 남자가 어떤 처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병이 들었다. 의사가 와서"이건 당신의 상사(상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이 든 것으로 그 여성과 성적인 교섭을 가지면 반드시 낫는다."고 했다.
        남자는 랍비한테 가서 의사로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상담을 했다. 랍비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가지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나체로 그의 앞에 서 있어 그가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걷어낼 수 있음으로 해서 병이 나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 역시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와 담 너머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면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도 안된다고 했다.
        물론 탈무드에서는 이 여성이 기혼자였는지 혹은 독신자였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남자와 다른 여러 사람이 랍비에게 어째서 당신은 그처럼 강경히 모든 일에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인간은 순결한 것이 아니면 안되고 만일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하여 금새성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사회의 질서는 지켜질 수 없다."고 랍비는 대답했다.



        *성결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 중에 "성모의 마술사"라는 작품이 있다. 어떤 보잘 것 없는 마술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바르나베>인데 여러가지 재주와 마술사로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유랑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수도승을 만나 자기도 날마다 성모를 찬양하며 순결하게 살고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성모를 섬기기위해 자기 재능과 기술과 지식을 다투어 뽐내고 있었다. 원장은 성모의 미덕을 다룬책을 편찬하고 어떤 수도사는 익숙한 솜씨로 그 논문을 송아지 가죽에 베끼고 또 다
        른 수도사는 거기에 섬세한 성화를 그리고, 또 어떤 수도사는 석상을 다듬고 있는것이었다.
        여기에서 <바르나베>는 자기의 무지함과 무력함에 서글픔을 느낀다.
        "모두들 성모님께 사랑을 바치고 있는데 나는 뭐람." 백방으로 자기 할 일거리를찾아 보았으나 매일 더욱 슬퍼질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뻐하며 예배당으로 뛰어갔다. 그때부터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예배당 안에서 보냈다. 그는 이제 슬퍼하거나 한탄하지도않았다. 다른 수도사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득찬 수도사들은 예배당 문틈으로 들여다 보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나베>가 성모의
        제단 앞에서 꺼꾸로 선 자세로 두발로 여섯 개의 공과 12자루 비수를 가지고 마술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를 위해 단지 자기가 가진 유일한 재주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참 수도사들은 그가 성모를 모독한다고 소리쳤다. 원장은 그가 순진하기는 하지만 아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우격다짐으로 <바르나베>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제단의 성모께서 내려와 푸른 만또 자락으로 마술사의
        이마에서 방울져 내리는 땀을 씻어 주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원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명예

        세상 살면서 이기고 또 이긴 사람이 있다. 조선왕조 말기 우리네 대부분이 깊은 역사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으로써 미국이 우리와 가까히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노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그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였다.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어찌 이기고 또 이기기만 계속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이 완용(1858-1926)이라는 사람의 얘기다
        그런데 신가한 것은 우리들 어느 누구도 그를 생의 승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요 생을 통틀어 결산할 때 결단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릴 수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슴 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사슴의 뿔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늘 그 뿔을 자랑했는데. 어느날 사자에게 쫓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만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지요.
        평소에는 아름다와 보이고 자랑거리가 되어도 정작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는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것,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한 것, 이런 것들에 일생을 걸려는 분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 진정한 만족

        <벤허>를 읽어 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를 했는데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끝까지, 세상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
        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썬다싱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구하면 의에 주리고목마르게 됩니다. 진실로 주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사모하면 배가 불러집니다.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의 홍수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
        는 것은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덕을 추구하고, 철학을 추구하고, 종교를 추구하고,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물으면 예수를 발견하게 되어 거기서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내가 주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 평안이 없었나이다'는
        말처럼 진정한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3-15)



        시기심에서 해방

        헬라의 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월계관을 차지한 일등선수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 라이벌 선수가 밤마다 몰래 가서 그 기념비를부수려고 끌로 그것을 쪼았습니다.
        며칠 밤을 몰래 가서 그것을 쪼았는데 마지막 밤에는 그 기초를 다 쪼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비가 넘어지는 바람에 자기가 죽었습니다.

        시기라는 것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0절에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시기는 가시와 같아서 뻗치는 곳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남을 상하게 하고 자기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가시가 뻗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해지는 것마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살아 갑니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기뻐하는사람은 기뻐할 조건이 많아지지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배가 아픈 사람은 잘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의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못된 짓을 했고, 하만이 모르드개를잡아 죽이려고 시기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장대에 매어달려 죽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여인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학생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사업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예술계. 정치계. 학계에 시기가 있습니다.

        종교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목사지만 종교계에 너무 시기가 많고 너무 질투가 많습니다.
        시기는 가장 원시적 감정이며 천한 감정입니다.
        이 시기에서 해방받기 위해 어떤 사람에 대한 시기가 생길 때, 시기 발언을 하고 싶을 때, 시기를 보복하는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주님께 그것을 가지고 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품성이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이기게 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0, 32)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구습을 벗자

        어느 마을 골목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구두를 수선하며 늘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구두를 수선하면서 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언제부터 구두 수선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일생 동안 다른 직업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구두 수선을 했으며 전쟁이 나자 그 할아버지는 구두 통을 들고 다니면서 만주까지 가서구두 수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8선을 넘어올 때에 다른 사람들은모두 고생을 했지만 그 할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기술 때문에 고생을 안했답니다.
        전쟁 중에도 구두를 닦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한번도 다른 일을 해 보려고생각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그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할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다른 일을 했더라면 훨씬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고향에서 같이 38선을 넘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처럼 무식하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서 처음에는 자기 밑에서 조수 노릇을 하다가 그것도 기술이 없어서 나가서 거리에서 치약도 팔고치솔도 팔고 수건도 팔고 하더니 구멍 가게를 빌리고 나중에는 도매 상점을 하고지금은 아주 부자가 되었답니다.
        한 사람은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이고 한 사람은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때 그 구두 통에다 마음을 두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보따리 장수가 되었더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할아버지는 구두 통 하나에 자기의 전생애를 다 걸었기 때문에 평생 구두 짓는 일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궤도가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그 아기는 '아! 여기는 따뜻하고 좋다.'고 이렇게 어머니의 배꼽에 탯줄을대고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것도 주고 아무런 노력을 안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아기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굉장한 고통이 있습니다.
        아기가 밖으로 나올 때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아기는 고통과 진통을 겪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0-24)




        무한대의 밀도

        우리의 최초의 힘은 인력(人力)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력(馬力)이라고 하는 가축의 힘을 빌려서 노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력(火力)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온천 지대에 가면 온천 물을 가지고 밥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합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밀도가 무한합니다.

        중성자 별에 갈 것 같으면 찻숟갈만한 물질이 10억 톤의 무게와농도를 가질 수 있고, 온도는 1억 도가 넘는 그런 물체가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블랙 홀이라는 별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처럼 전파나 광선이나 중력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아무 것도 통과가 안 되는 무한 밀도의 물질이 있다는 말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 속에 이렇게 무한한 밀도가 있다고 하면 정신계의 세계에는 더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활용을 못한 많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비상한 힘을 이 시대가 필요료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신념의 힘이나, 양심의 힘이나, 정신의 힘이나, 지식의 힘이나, 돈의 힘이나, 몸의힘은 너무나 작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마치 자기의 힘만으로 뛰어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다르듯이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사는 사람과 자기힘의 극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태평양을 뛰어가는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과의 차이만큼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굉장한 힘이 필요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이 기독교 학교로 변했던 때와 같은 특수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활용할수 있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성령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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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의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 준비된 사람
        성 구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요한 웨슬리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목사님인 뼈대있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사회에는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진리를 전파할 사람으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처음부터 뜨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때까지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숨이 막힐 정도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이 쇠약해지고 극심한 궁핍을 겪게되자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던 그의 어릴적 서원이 생각나서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성경공부 모임을 요한 웨슬리가 주관하게 되었고 모임은 날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대학교 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 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성된 것이 '감리교'입니다. 한국도 많은 사회혼란과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암울한 시대에 빛을 전하는 등불을 세우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복음의 주역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사람다운 사람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어느 사립학교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나는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문기술을 습득한' 공학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스실!
        '전문교육을 받은'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어 독살된 어린아이들!
        '전문훈련을 받은' 간호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유아들!
        '고등 교육과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총살당한 후 화장되는 여인들과 젖먹이들!

        "그래서 나는 교육에 대하여 큰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교육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아이들이 머리 좋은 괴물이나, 전문기술을 습득한 미치광이나, 아이히만과 같이 전문교육을 받은 살인마가 되어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읽기도 중요하고, 쓰기도 중요합니다. 계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 중심이 선 사람
        "중심이 딱 선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홀리지 않지만,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늘 망상 속에 있으니 걸리게 돼요.
        같은 꽃을 보고도 한숨 지으며 눈물 뿌리는 사람이 있고,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노래하는 꽃,
        눈물뿌리는 꽃이 따로 있나요?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 서화동의《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중에서 -
        * 중심이 선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갑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중심이 서 있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좋은 사건이다.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
        *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생 길을 걷는 행로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진심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 인생의 그릇을 풍요롭게 채워간다는 뜻도 됩니다.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 살아있는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를 보세요.-죽은새는 날지 못합니다.
        빨갛게 물들은 단풍을 보세요.-죽은 나무는 물들지 않습니다.
        어항속의 열대어를 보세요.-죽은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합니다.
        달리는 말의 힘찬 모습을 보세요.-죽은 말은 달리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건강한 웃음을 보세요-죽은 사람은 웃지 않습니다.
        저 노란 국화화분을 보세요 -죽은 국화는 꽃피지 않습니다.
        400개나 달린 배나무를 보세요-죽은 배나무는 열매맺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묵묵부동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체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으면 움직이고 꿈틀대며 활동을 하지만 죽어있다면 활동이 없는 시체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상(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일을 하지 않고, 의미없이 살며, 희망이 없으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돈 물질 마음 가난)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단히 가난한 사람이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만에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 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일세.` 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다.

        ♥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제일 잘 달리고 골프 잘 치고 사업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과로하지 말고 사업도 좀 쉬고 건강에 유의하시오`라고 말했다. 간염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5년간을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말하기를 `이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운동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시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된다.

        ♥ 무지한 사람의 근심
        어느 영국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서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식사 시간이 되면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슬그머니 갑판으로 나와서 싸가지고 온 비스켓과 치즈를 먹곤 하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허기진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 선장은 식사시간만 되면 혼자 갑판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왜 당신은 식사시간만 되면 여기서 비스켓만 잡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선장님, 저에겐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하였다.
        그 때에 선장이 하는 말이 `당신이 이 배를 탈 때 사둔 승선비 속에는 이미 식사대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놓고 가서 잡수십시요`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식당을 이용했고 겨우 한끼의 음식을 먹으니 미국에 도착하였다.


        ♥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
        겸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얼굴을 위로 향해 올려보지만 그러다가도 막상 꼭대기에 다 오르고 나면 단번에 사다리에 등을 돌려버리고 더 높은 구름을 쳐다보며


        ♥ 새벽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늘 새벽도 설레임을 안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한다. 늘 만나는 얼굴인데도 반가운 얼굴들이요 새벽마다 만나는 얼굴들 인데도 늘 신선하고 아름다운 얼굴들이다.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리는 성도의 모습에서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늘 보이는 얼굴 중에 안보이는 성도가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에서 새로운 얼굴을 대할 때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목회를 할수록 새벽기도회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벽기도회 예배를 마치고 성도의 가정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해 교 적부를 뒤적이는 기쁨 역시 너무도 크다. 사진이 없는 성도는 눈을 감 고 기도하고 사진이 있는 성도는 사진을 보면서 기도한다. 가끔 어려운 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성도의 얼굴을 보노라면 안타까운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파 온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 주실만 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혹시 주위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 에너지가 넘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가?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위에는 전부 재미있는 일로만 가득 차 있어 주위 사람들도 그런 열성스런 분위기에 동화된다. 자신의 가슴속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야, 즉 당신이 품고 있는 열정, 소망, 흥미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런 분야의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지는 다음에 생각하라.
        - 로빈 쉬어러의 《더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중에서 -
        * 살다보면 온갖 고통과 번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스리지 못해 자기도 남도 해치는 독(毒)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기 안에서 잘 다스리고 녹여 향기(香氣)로, 활력(活力)으로,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향기, 그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화요일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다 즐겁습니다.

        ♥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을까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고 돼지는 돼지만 낳을까.그 이유는 각 생물마다 자신의 독특한 정보를 DNA라는 물질에 갖고 있기때문이다.DNA는 뉴클레오티드란 구성단위가 길게 연결돼 있는 거대한 분자인데 여기에는 염기의 종류에 따라 ATCG라는 네가지가 있다.이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돼 생물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마치 자음과 모음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팩시밀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면 기계가 글씨를 전자파로 바꿔 상대편 팩시밀리에 전송한 후 정해진 코드대로 바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글로 인쇄한다.
        오직 정보만 전달될 뿐 실제로 아무런 물질을 받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DNA가 생명인줄 착각하고 있다.그러나 DNA는 글씨와 같이 정보만 갖고 있는 죽어 있는 화학물질에 불과하다.그러므로 DNA는 살아 있는 세포속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우연히 A­T­C­G뉴클레오티드가 합성,결합된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팩시밀리가 있고 편지를 쓸 사람이 있어야 「나는 너를 사랑해」란 문장이 의미가 있듯이 생명을 만드시고 모든 정보를 기록하신 하나님과 생물이 존재할 때 DNA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75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으며 한 개의 세포속에 저장된 정보를 인쇄하면 1천쪽짜리 1천권정도에 해당된다.그러나 이 정보가 2m정도밖에 안되는 DNA에 모두 저장돼 있으며 46개의 염색체로 나뉘어 실패처럼 감겨 작은 세포속에 저장돼 있다.
        만약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의 DNA를 한 줄로 연결하면 적어도 1천5백억㎞에 달하며 이는 지구를 3천5백만번 돌 수 있는 엄청난 길이인 것이다.이러한 엄청난 정보를 가진 인간이 우연히 진화됐다는 가설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DNA를 마음대로 조작,실험을 해 왔다.결국 양을 복제하는데 성공,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원숭이의 복제까지 성공했다.동일한 기술로 인간의 복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모든 정보를 기록해 놓은 유전자조작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죄악인 것이다.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든 생물의 복제는 궁극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복제는 인간의 윤리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마음대로 복제하고 이용한다면 미인을 다량 복제해 상품화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인간의 복제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것이다.
        남녀 관계없이 원하는 형질의 인간을,심지어 자기자신을 마음대로 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결혼의 존엄성및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기존의 사회를 받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본단위인 가정이 파괴되고 이는 결국 총체적인 사회의 파괴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 잘못한 사람을 칭찬하기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부족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니다.
        행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의식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계도한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르면 그 부족원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우고 모든 부족원이 모여듭니다.
        모여든 부족원들은 잘못한 그 부족원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세워진 부족원이 그동안 베풀었던 선행을 하나씩 말합니다. 그의 건설적인 능력과 선행, 친절한 행위 등이 빠짐없이 열거됩니다.
        반면 그에 대한 불만이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원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 그 부족원의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게 되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은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그로 하여금 부족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상대방의 약점에 대해 그것을 가만 두려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용서할 줄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빌면 그것을 받아주는 관용과 아량이 필요한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보니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려 하고 흠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사회는 위선과 거짓,독설과 정죄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길 원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5:8).
        손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시 24:3∼4).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심판해야 할 자리에서 행해진 예수님 말씀의 울림이 모인 사람들의 손에서 돌을 버리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내가 심판과 정죄의 자리가 아닌, 용서와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롬 12:21).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그는 이 세상에는 거
        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영적인 사람
        A.W. 토저; "영적인 사람"
        진정으로 영적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갈망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갈망은 생명을 주게 하며 또 절제하고자 하는 깊이 내재한 심오한 소원이다.
        영적인 사실에 있어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 순서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하기로 하자.
        1. 첫째의 갈망은 행복해지려는 것보다는 거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불명예나 손실이 올지라도 자기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기 원하는 사람이다.
        4. 또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견해대로 보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사람이다.
        5. 영적인 사람은 잘못 살아가기 보다는 바르게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6. 한편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큰 댓가를 치뤄도 다른
        사람이 성장하며 믿음에서 진보되기를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되어진다.
        아무도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자유롭게 움직이시어야 영적인 스리스도인을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선한 사람
        가브리엘 마즈세르의 희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누구의 눈에도 신통치 않은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멸시하는데 뭇 남자들의 우상같은 존재인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해 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 의식으로 인해 그 여자의 결혼의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든지 꼬집어 주고 싶다든지 하는 야릇하고 못된 심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아내는 그 열등 의식을 고쳐 주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 보려는 선의를 지닌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수모와 열등감과 불만을 남편에게 보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남편의 열등감을 고척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열등감이 있는 척하여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천사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을 학대하고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결국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내는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을 가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기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사람의 선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이란 때묻은 의복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제일 흉악한 사람은 자기를 악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악한 사람은 내가 별로 악하지는 않지만 별로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자들은 '아 ! 나는 죄인의 괴수다. 오 ! 괴로운 사람이다'라고 하며 참회록을 씁니다. 이 말만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착하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일수록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 13,14)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 : 15)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
        지친 자, 목마른 자, 상처 입은 자, 눈물 흘리는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이 나에게 와서 안식할 수 있도록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욕망으로 인하여 힘들고 지친 자가 되었으니 누가 우리에게 와서 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쉼을 얻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안식만을 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버리면 누구든 내게 와서 쉼을 얻고 내게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생수를 먹고 마시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참된 쉼을 가져 상처 입은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그늘이 되어 예수님의 나라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 향기나는 사람
        사모님이 치자향 가득한 화분 한 개를 사오셨습니다.
        차에 화분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특별히 깎아줘서 싸게 사셨다는데 과연 그향기가 진하고 다른 냄새들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쾌쾌한 꼬랑내만 나던 사무실이 일순간 항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하는 향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꽃의 향기는 있는듯 없는듯 은은합니다.
        그러나 그 꽃을 치우면 단번에 향기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꽃의 향기도 있습니다. 주로 동양란과 같은 기품 있는 꽃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치자향처럼 압도하는 향기로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명인이 되기를 원하고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남을 비방하지 않으면서 성실한 자세로 삶을 사는 그런 동양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책상에는 동양란 한 촉이 있습니다.
        언제 그 기품있는 향기를 줄 것이지 기약이 없지만
        이놈을 볼 때마다 오래 참고 때를 기다려 꽃 한송이 향기 한줄기 줄 그날을 기다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0)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토록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사는지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편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육신과 그럴 듯한 학력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면 그 피해는 더 큽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지금 내게서 나오는 향기는 어떤가요.

        ♥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본문:열왕기하 2:1∼14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내게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나이다”(열왕기하 2:9)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서점에서는 성공이란 주제의 다양한 책들이 팔리고 있으며 성공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흥미있는 이야깃거리이며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즐겨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 드라마를 통해 감동과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한동안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이 유행했었습니다. 지난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서재에서 꺼내 목차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7가지 습관이란 주도적이 되라,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시너지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 등입니다.
        ‘글로벌리더십센터’에서는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크게 6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특징 1,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징 2,적극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특징 3,항상 개방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특징 4,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특징 5,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특징 6,성공의 미래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엘리사의 예를 통해 성공자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그 첫번째 특징은 ‘더불어’입니다(1절).“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엘리사는 계속하여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이처럼 ‘더불어’의 습관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혼자서 승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함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특징은 끈기입니다. 엘리사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등을 쫓아다니며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 끈기와 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2절과 4절,6절에 계속하여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끈기있게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습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
        세번째 특징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하나이다”(9절).엘리사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상당수가 대화에서나 그 삶에,그 행동에 목표가 없는 것을 봅니다.“원하나이다” 내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네번째 특징은 과감한 결단입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 엘리사는 자기 옷을 잡아 둘로 찢었습니다. 옷은 신분의 상징입니다. 또 자신의 습관이며 살아온 방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웠습니다.그러므로 자신의 옷이 필요없었습니다.오늘도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사람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과감한 결단이 있습니까? 분명 성공자가 됩니다.
        기도: 세상에서 성공자 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우리들은 주 안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으로 터를 닦은 사람들
        빅톨 위고는 영국은 두 개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저서이고 하나는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책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대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6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찬란한 대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독일에서도 마틴 루티가 종교 개혁을 해서 성경을 서민들의 손에 나누어 준 후부터 독일국민들이 깨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도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학생 운동을 하면서도 느끼는 일입니다.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여자라도 성경의 교양이 몸에 배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무르익습니다. 지식만 백과 사전처럼 집어넣은 대학을 나온 사람과는 다릅니다. 성경만으로 기본 교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통계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으로 되를 닦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 섬을 사랑하는 사람
        섬을 사랑하는 사람 (The man who loved Island ) E.H. 로렌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아서 섬을 삽니다. 그 섬에 가서 사는데 그 섬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해서 그 섬을 팔고 다른 섬을 삽니다. 이섬, 저 섬, 옮겨 다니다가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 주님께 무관심한 사람
        *어느날 워싱톤에 있는 어느 교회 목사관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교회를 잘 출석하지 않던 교인의 전화였습니다.
        그는 0목사님,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사실입니
        까?0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0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예배에 참석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0라고 대답했습니다
        -전화를 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신을 만날 수있는 사람
        어떤 젊은이가 늙은 율법학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질문해도 좋겠습니까?`
        늙은 율법학자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뭐든 물어보게나.` `선생님, 옛날의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 만났으며 신은 땅위를 걸어다녔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으며 사람들은 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왜 신은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제 땅위를 걷지 않는가요? 왜 신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걸까요?` 늙은 율법학자가 대답했다.
        `이보게 젊은이! 신은 아직도 도처에 있다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어서 그렇다네.`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 그는 이 세상에는 거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 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
        나치 독일의 박해하에 놓였던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
        했던 플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
        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건
        강해져서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꿈을 품은 사람들
        윌리엄 페더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 짜리 지폐를 길어서 주웠습니다. 어릴 때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중독이 되어서 길바닥만 보고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데에 전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 핀이 54,172개나 되었고 수천 개의 동전도 길에서 주웠습니다.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이나 푸르름을,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과 아름다움을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생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곧 넝마주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넝마주이는 꿈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사회 구조 속에서 20프센트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토이든지 정신 세계이든지 간에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개척하는데 전생애를
        보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미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일생의 비젼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꿈은 온 세계가 질서를 지켜서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했지만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33살에 죽었지만 그는 거의 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징기스칸도 영토욕에 광분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가였습니다. 종교적 동기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말을 합니다만 그에게는 이글대는 꿈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에게 절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유럽의 통일이었습니다. 새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을 두고 싸우기만 하니까 유럽을 정복해서 질서를 확립하고 살기좋은 유럽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상계의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는 정치범이 되고 말았지만 철인 나폴레옹은 꿈의 사람,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 인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굉장히 큰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조그마한 힘들이 비슷비슷해지면 싸움이 되니까 훨씬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빠른 시일 안에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불모지에 가서 작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3만의 군대 앞에서 영광과 부가 있는 불모의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3만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생명을 걸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그는 거의 신과 같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유럽에 자유와 평등과 우애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비젼이 있고 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군인이 되든지 정치가가 되든지 이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 기도의 사람
        유다왕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혹독한 상황에 직명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펼펴 놓았읍니다(왕하19:14-). 열왕기하 18장 17절에서 우리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 휘하의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 대해 읽게 됩니다. 그들은 와서 히스기야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위협을 퍼부어댔읍니다. 그들은 많은 나라들이 앗수르를 대적하려 했으나, 모두
        멸절되었다고 했읍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그가 믿는 신을 의지하는 것보다 항복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읍니다(왕하18:17-35).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출된 것이 왕하19:35절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히스기야처럼 했읍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말했읍니다. "만일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높은 직책을 결코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일 것입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세계1차 대전 중에, 한 군사회의가 있었읍니다.
        총사령관인 프랑스의 군인 포쉬(Ferdnand Foch)원수는 그곳에 없었읍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말했읍니다. "나는 어디로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읍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들을 조그만 황폐된 예배당으로 인도했읍니다. 그곳에서 포쉬 장군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 아프리카 작전을 지도한 몽고메리 원수는, "매일 밤 나는, 내가 나의 장병들을 패배하지 않게 하기를 기도했읍니다"고 말했읍니다.
        우리가 삶에 있어서 그토록 자주 실패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일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듯 자주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해 줄 때, 그 찬송은 옳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과 권력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데도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그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같은 일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그날 그날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늙은 영국의 장군 애스틀리(Jacob Astley) 경이 전투에 앞서서 "주님은 제가 오늘 얼마나 분주할 것인지를 알고 계시나이다. 제가 만일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해도, 주님은 저를 잊지마옵소서"하고 기도드린 것처럼 그도드릴 시간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든가, 어떤 곤란한 과업에 직변한다든가, 어떤 특별히 강한 유혹을 극복해야 하는 곤경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관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 깊은 한 친구가 그에게 말해 주었읍니다. "잠시 앉아서 의자 하나를 자네 맞은 편에 가져다 놓고, 하나님께 그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말로 그분과 이야기해 보라." 그는 일생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침대 옆에 빈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있는 것을 밝견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히스기야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될 힘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 꿈꾸는 사람
        본문:창세기37:5∼8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세기 37:5)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 함께 바닷가의 쓰레기더미와 선창가의 고깃배 주위를 맴돌면서 먹다버린 빵조각을 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조나단은 먹기 위해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갈매기 조나단은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인내로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 리처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그리고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질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먼저는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고, 다음은 해와 달과 11개의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셉이 스스로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계시적인 꿈이요, 예언적인 성격의 꿈입니다. 그러나 이 꿈은 요셉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위대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찾아오고 준비된 사람은 그 기회를 움켜잡습니다. 요셉은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지만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활용함으로써 술을 맡은 관원장의 천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둘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거기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주인의 눈에 들고 그 집의 모든 재산과 하인을 관리하는 총무의 직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셋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험한 파도가 능숙한 어부를 만들어가듯이 꿈꾸는 사람은 오히려 실패와 시련을 인생의 좋은 연단의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루 아침에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히 그 종의 임무를 다하고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일가족과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구해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그 꿈을 이루어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런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테니까요...

        사랑을 할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무언가를 잃어버릴 때가 와도 잃어버린다는 것의 아픔을 알고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방황을 할때
        그저 이유없이 당신을 기다려줄테니까요... 슬픔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슬퍼질때 당신의 슬픔을 함깨 해줄수 있을테니까요...

        항상 가까이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어느때 갑자기 보고 싶어지더라도 뛰쳐나가 만날 수 있을테니까요...
        가슴이 따뜻한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가슴이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그대의 따뜻한 가슴에 몸을 녹일 수 있을테니까요...
        진실된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그대 나의 거짓된 모습을 보더라도 그대의 진실로 나를 감싸줄테니까요...

        진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이와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의 한 모습이 나빠보이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다른 모습을 보며 감싸안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와 사랑하세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 또한 사랑할 줄 안데요...


        ♥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
        '샘미 모리스'(Sammy Morris)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이었다. 그가 인디애나 업랜드에 있는 테일리 대학교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방을 배정 받기를 원하는가'라고 학장이 물었다. 그때 그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방을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후에 학장은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돌아서서 과연 나는 어느 누구도 하기 싫어했던 일을 기꺼이 했던 적이 있는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한다.

        ♥ 정말로 성숙한 사람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때마침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 일을 책임지는 하인이 대신해서 그를 맞아주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거라며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가 소파에 앉자 하인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내왔다. 하인이 건넨 쟁반에는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읽을 만한 책 한 권까지 곁들여 있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 하인은 하던 일을 끝마치려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쓱해진 셰익스피어는 차라도 한 잔 더 얻어마실 생각에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부엌문을 연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었다. 그곳은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억지로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셰익스피어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어냐는 질문과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 신들린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유대 종교층을 향해 '뱀의 자식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짓을 한다(요8:44)고 하셨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 인류를 두 가지 영족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녀와 사단의 영을 받고 그 권세와 지배하에 있는 사람이다(요일5:19). 과학 시대 사람들은 신들렸다는 사실을 싫어한다.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속에 사단의 영을 몰아내고 예수의 신 곧 성신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찬은 신들린 사람들이다. 도덕심, 종교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에 철저히 들려야 한다. 성령 충만이란 말은 공기나 물이 채워지는 것 같은 물리 개념이어서 그보다는 성신들렸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요새 신들린 현상이 도처에 나타나 문외한들이 유명한 음악가나 문인 화가들의 신이 들려서 갑자기 베에토벤을 치고 램브란트를 그리고 밀톤처럼 글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악령의 장난인 듯하다. 예수신이 들려야 예수처럼 생기고 예수처럼 살 수 있다.

        ♥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
        미국의 대중 연설가 나폴레옹 힐(Hill)은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을 말한 적이 있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7가지는
        첫째, 자기 확신, 신념이 있는 사람,
        둘째, 창의력이 있는 사람
        셋째, 위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
        넷째, 열심을 품고 사는 사람
        다섯째, 자기에게 주어진 연단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사람,
        여섯째,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
        일곱째,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이 중에 세 가지 정도 적어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주어진 능력을 성실하게 활동하지 못할 때 그는 실패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기도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겼던 마퀴스 디렌티가 한번은 사환 아이에게 “삼십 분이 지나면 나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사환 아이가 문틈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찌나 거룩하고 성스럽게 보였던지 그는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이를 알리기를 주저했다. 그의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시간 반이 지난 후에 시간이 다 되었다고 신호를 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소리가. “벌써 30분이 다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브레이너드 감독은 매일 5시간을 기도와 말씀을 묵상함으로 보냈다. 헨리 해블록경은 항상 매일 새벽의 두 시간을 하나님과 보냈다. 야영이 6에 시작되면 그는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했다. 얼 케언즈는 매일 6시에 일어나 성경공부와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8시 40분의 가정 예배에 임했다.

        ♥ 만나고 싶은 사람
        하루에 만나
        일상을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주에 한번 만나
        연극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한달에 한번을 만나
        음주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게절에 한번 만나
        여행을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년에 한번 만나
        가치관을 점검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십년에 한번 만나
        강산의 변화를 느끼고픈 사람이 있고...

        삼십년 후에 한번만 만나
        주름진 모습에서 살아온 발자취를 유추해 보고픈 사람이


        ♥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
        사람에 대한 겸손, 나눔과 깊은 사랑은 남을 위한 배려보다 먼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삶의 귀중함과 풍부함을 발견한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사람들의 됨됨이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라는 그들의 됨됨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들을 다른 사람으로 다시 만들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은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움이고 친절함이다. 무관심이나 잔인함을 없애는 것이다. 가혹과 증오가 제거된다. 대신 자비와 자선과 관용의 정신이 있다. 우리 주변이 우리의 배려 대상이다. 우선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고 그 다음 이성을 따르도록 하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머리를 주장하도록 하라. 사랑이 없는 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거기에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이성을 따르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머리가 마음을 주장하면 이성은 외롭다. 그러나 마음이 머리를 주장할 때, 삶은 풍성하고 값지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남을 위한 배려를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의 남을 위한 배려도 알게 된다. 우리의 남을 위한 배려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시는 방법이다.

        ♥ 사람다움을 지켜야
        본문 : 출애굽기 21;12∼17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마음은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서 몇 점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10점,30점,50점,70점,90점).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에는 죽어 마땅한 죄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사람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정당방위이거나 살해 동기가 없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으면 우선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실수로 살인이 일어난 경우에 개인적인 복수를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입니다.
        죽을 죄 두번째는 ‘짐짓 모살한 경우’입니다.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을 말합니다. 첫번째 경우가 순간적인 충동이나 격정에 휩싸여 저지른 열광적인 살인이라면 두번째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저지르는 냉정한 살인입니다. 계획적으로 살인했을 때는 도피성으로 도망했다고 해도 끌어내어 죽일 수 있습니다.
        세번째 죽을 죄는 부모공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것은 죽을 죄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공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주한다는 것은 저주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부정적인 말이 최악의 상황으로 강도높게 표현된 것을 저주라고 하지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저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을 죄 마지막은 사람을 ‘후리는’ 행동입니다. 요즈음 말로 유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도 같은 죄입니다. 유괴는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사람은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런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유괴나 인신매매 등은 이를 정면으로 대항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어린이 유괴는 더할 수 없이 악한 일입니다.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순진한 존재를 악용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을 배려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오늘 말씀에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 시험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속아서 시험에 빠진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되겠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약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그 말이다.
        시험에는 강한 사람이 없다.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정작 시험 장소에 갔을 때 베드로는 그만 약해졌다.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인생은 죄에 대하여, 시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약할 뿐더러 또한 사람은 그 육신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이는 특별히 폐가 약하고, 어떤 이는 심장이 약한 것 같이,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누구든지 약점 한 가지씩은 있는 것이다.
        에서 같은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점이 있었고, 노아 같은 사람은 술 같은 것을 마시는데 약점이 있었으며, 솔로몬 같은 사람은 특히 정욕 방면에 약점이 있었는가 보다.
        이와 같이 사람 사람마다 특별히 자기의 약점이 있다. 서양 속담에 "사람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각각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각각 어떤 점에서는 조금 잘못하면 지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다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내가 어떤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가 스스로 살피어 특별히 조심해서 유혹에 들지 않도록 힘을 써야 되겠다.


        ♥ 한 사람이 주신 선물
        본문: 롬 5:14-15
        지난 4월 5일 2001년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이번 개막경기에는 애덤 킹이라고 하는 9살 난 소년이 시구를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1995년 미국으로 입
        양되어 간 아이인데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이 붙어서 손가락을 펼 수 없었고, 다리가 썩고 뼈가 굳어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나라의 의학으
        로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몸부림치다가 혹시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거기서 어떤 의학적 혜택을 받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고아원에 버렸는데 로버트 킹이라고 하는 미국의 젊은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자기의 아이가 세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다 붙어있고 걷지도 못하고 너무 너무 불쌍한 이
        아이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양하고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손가락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했고 다리도 절단을 하고 더 이상 썩지 않게 하였
        으며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를 보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밝게 자라났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의족을 끼고 양아버지에게 코치를 받으면서 야구를 했습니다.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소망 없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밝고 건강하고 희망이 넘치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래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시편 51편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리가 태어나면 바로 물로 가듯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 바로 죄악으로 달려갑니다.
        이 죄악된 길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거룩한 길, 믿음의 길, 신령한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죄악의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 앞에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부귀가 아니라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생명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 나라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신이 가득하였고, 무지하였고 말할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살아가던 절망의 땅이었고 저주의 나라였습니다. 몇 천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 앞에 끊임없이 빌고 빌어 보았지만 이 나라는 병들었고 하나의 소망도 없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아침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주와 불행이 떠나갔습니다. 지하자원이나 많은 농토를 가지고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선물 받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샘물처럼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누가 훌륭한 사람인가?
        임금으로부터 거대한 자기의 석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석공이 있다. 그로서는 일생 일대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날부터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같은 대형 기중기가 없던 시절이다. 엄청난 크기의 입상을 세우려면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조립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고민하던 석공의 발길이 어느 날 바닷가를 찾았다. 적당한 자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무심한 어린이 몇이 자기 곁에서 모래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던 석공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혀 한달음에 석상을 세울 현장에다 세운 다음 석공은 그것을 완전히 흙으로 덮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마치 신라시대 왕릉과도 같이 둥글게 구릉을 이룬 곳 정상에서 또 다시 석상의 몸통 부분을 조각했고 그것을 파묻혀 있는 다리 윗 부분과 연결했다. 그리곤 다시 전과 같은 요령으로 흙으로 파묻어 버렸다. 다음, 같은 방식으로 석상의 두부를 조각하여 몸체 위에 조립한 그는 지금까지 덮어 두었던 흙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렇게 하니 거기 우람한 임금의 석상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석공은 해변가 코흘리개 어린이들에게서 배워 마침내 이 거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햇병아리 첼리스트 피아티로르스키가 첫 연주회를 가졌다. 바로 그날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인 카잘스가 청중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더 잘하려고 하면 동티 나기 쉬운 법이 아니던가. 그 날의연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연주회가 끝나자 카잘스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카잘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입어 마침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뒷날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가 된 피아티고르스키가 카잘스에게 그 옛날 자기에게 보내 준 까닭모를 박수의 이유를 물었다. 이에 카잘스는 그때 당신은 이렇게 첼로를 잡고 이렇게 활을 놀려 바로 이 음을 낸 적이 있소. 그런데 난 그때까지 바로 그 음을 내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오. 나는 당신의 연주를 통하여 그 음을 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거요.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내 스승으로 생각한다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내 스승같이 생각하고 도왔던 것이오라고 말했다.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라` (고전 14:31)


        ♥ 꿈 해몽한 사람
        *어느 책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해몽을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이 사실은 꿈을 꾸지도 않았으면서 찾아가 꿈을 꾼 것처럼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0간밤에 돼지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가0고 했더니 해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오늘 중으로 맛있는 음식을 선사 받아서 잘 먹을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생각치도 않았던 출가한 딸이 찾아오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 왔더라는 것입니다. 며칠후 다시 찾아갔습니다.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다시 돼지꿈을 꾸었노라고 했더니 이번엔 좋은 양복을 얻어 입겠다고 해몽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친척되는 사람이 양복을 한 벌해 주어서 잘 입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도 돼지 꿈을 꾸었노라니까 그는 머리를 흔들더니 이번엔 크게 다칠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두번씩이나 맞았던 점으로 미루어 조심하느라 외출도 삼가고 방에 누워만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선반위에 올려놓은 물체들이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해서 그를 찾아가 사연을 전부 이야기하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해몽자의 대답인즉 첫번째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은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니 밥을 얻어먹게 되고, 배가 부른 다음에도 꿀꿀거리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이니 잠자리를 마련해 주게 되고, 배부르고 잠자리 편한데도 꿀꿀거리게 되면 매밖에 맞을 게 있겠는가?하는 말이었습니다.
        = 세상 이치도 다 이와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싸고 입고 그리고 꿀꿀거리는 것으로 그 생애가 일관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기루를 잡는 것처럼 언젠가는 무슨 일이 되겠지 개천에 물이 흐르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어린이들이 하는 농담 중에 “죽을 뻔한 것이 좋으냐. 살 뻔한 것이 좋으냐.”고 묻는다.
        성급한 어린이는 생각도 없이 살 뻔한 것이 좋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살 뻔하였으나 아쉽게 죽은 사람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다고 했다. 이는 영적으로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믿을 뻔한 것은 소용이 없다. 못 믿을 뻔했어야 한다. 말구유의 아기를 못찾을 뻔했어야지 찾을 뻔했었다면 안 된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받을 뻔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은 목수들이다. 길이는 300규빗, 넓이는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3층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뿐인가.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한 때가 아니니 산에서 나무 를 찍어 내려와 다듬는 데서부터 운반하는 데까지, 또는 그것을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조립 하고 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런지는 모르나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다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뿐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건축에 참여하고 교회 강대상 밑에 까지 가 보았으나 구원과는 먼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으나 아그립바 왕처럼 거의 구원받을 뻔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해도 당선이 아니면 낙선이요. 될 뻔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가 구원받을 뻔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며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샬롬이다. 평강의 왕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인격자로 우리가 나라마다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개인 차원에서 평화란 성취를 의미한다. 평화롭게 죽는 것은 성취된 삶을 산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평화는 평안이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이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필요하다. 그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시며 또한 샬롬을 전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샬롬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돌보고 계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물려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 주심의 기도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 이 모든 것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룬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결국은 실패다.

        ♥ 빛의 사람으로
        40년 전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 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챠찍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빛,진리의 빛, 평화의 빛,생명의 빛을 나타낼 때 자랑스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이 땅에 천국을 건설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 본향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람 예수
        (딤전 2:5)
        조병수 교수
        손톱사이마다 까맣게 때 낀 어린아이들의 조막손을 매만지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곱게 빗겨주시며 쓰다듬던 예수는 사람이셨다.
        때 구정물에 찌든 꾀죄죄한 옷에서 비린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갈릴리 아이들을 그대로 덥석 안아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아이들, 이방 여자, 따돌림당하는 세리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문둥병자, 가난한 사람들, 바리새인, 어부들, 청년, 마음이 상한 사람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만나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을 물리칠 줄 몰랐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온 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고통스러운 상태에
        서도 강도에게 하늘의 소망을 말해주셨다. 사람 예수의 중심에는 연민과 동정이 있다.
        늦은 밤 대화를 신청한 바리새인을 앉혀놓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회당에 들어가면 회당에서, 바닷가에 서면 바닷가에서, 산에 올라가면 산에서, 집안에 앉으면 집안에서 어느 곳이든지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예수께는 말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닌 곳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잔치자리에서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예수는 사람이셨 다.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 들녘에 피는 꽃, 씨뿌리는 사람, 양치는 목자, 혼인잔치, 포도원, 맷돌질하는 것, 반죽덩어리, 하인들의 모습, 전쟁하러 나간 왕, 모래와 반석에 지은 집... 사람들 사이에는 일어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문을 두드리며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자기만을 위하여 창고를 짓고 모든 수확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흐뭇해하다가 하룻밤에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나오고, 일하러 간다 안 간다 하며 아버지의 속을 썩이던 아들들의 괘씸한 행동이 나온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들어있다. 예수는 인생사에 관하여 말하는 듯 싶더니 어느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웃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웃던 사람 예수. 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을 때 우르르 몰려나와 슬피 우는 그의 누이동생이며 이웃집 여자들 앞에서 그냥 눈물을 쏟으신 사람 예수. 태양 아래 걷고 걸어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음처럼 무거운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우물곁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 예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고난의 처절함을 영혼과 육체로 느끼며 잔이 옮겨지기를 피땀으로 기도하신 사람 예수. 예수는 사람이셨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이셨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셨다.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딤전 3:16). 예수는 참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희생물이며 인간을 위하여 완전한 대언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참 사람 이신 예수에게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희생물을 발견하시고, 사람들은 참 사람이신 예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표현하는 완전한 대언자를 발견한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돌짝길에 상하고 흙탕물에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그 귀하신 손을 아끼지 않고 내미신 예수, 베데스다 못에 반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누워 불신과 원망으로 얼룩진 영혼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 그 예수는 사람이셨다. 오늘도 부드러운 손과 자비로운 눈을 가지신 사람 예수께서 어루만지시도록 죄악으로 때묻은 육체와 영혼을 나는 내놓는다.

        ♥ 혼돈을 만든 사람
        의사와 건축가와 정치인이 누구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는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다. 의사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했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건축가는 하나님이 혼돈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치인이 질세라 말했다. '그렇다면, 혼돈은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주실 만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개만도 못한 사람~
        별로 쓸데(?)도 없는 개를 사람들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지요?
        특히 서양 사람들이 개를 좋아함은 유별납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전에 목사님이 애완견을 기른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개가 병이나서 동물병원
        에 데려갔더니 입원을 시키랍디다. 의료보험도 안되니 하루에 2만원씩이나
        드는데, 입원을 시키자니 지금도 돈이 없어서 입원을 못하는 교인들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결국은 개를 입원을 시키고 말았답니
        다.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평소에 반짝이던 눈이 게슴츠레해진채 죽어가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개를 길러본 사람이면 그 이유를 다알 수 있습니다.
        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개가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지요?
        아무데나 똥싸고 오줌싸고 아직 펴보지도 않은 신문 물어뜯어 놓고, 새 신발
        까지도 물고가 뜯어 놓는데 말입니다.
        직장에서 시달리다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제일 먼저 달려나와 반기나요?
        여우같은 마누라는 이웃집에 마실가서 코빼기도 안보이지요...
        토끼같던 애들은 컴퓨터 오락하느라고 정신없지요...
        그런데 개는 재빨리 쫓아나와 팔딱팔딱 뛰고 데구르르 구르고 뒷발로 벌떡
        일어서서 앞발을 번쩍쳐들고는 핵핵거리며 좋아합니다.
        주인이 즐거울때는 개의 발쳐든 모습이 "할렐루야~"로 보이지만,
        스트레스 팍 받아 우거지상일때는 아양을 떠는 개를 발길로 걷어 찹니다.
        깨갱거리며 물러섰던 개는 자존심도 없는지 잠시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슬며시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옆에와서 앉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늘 복종합니다. 병들었을때도 주인을 보면 축쳐진
        꼬리를 흔들지요. 힘없이...
        이것이 개가 사랑을 받은 비결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늘 보셨으니 목사님도
        개를 동물병원에 입원을 시킬 밖에요.
        우리는 개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개가 잘나서 주인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잘따르며 순종을 잘하
        며 잘 섬기기때문임을 요...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그런데 사람은 요...
        웬 자존심이 그리 강한지... 목에 기브스한 사람도 허다하고
        잘난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불복종하고 들여 받기를 잘합니다.
        그 상대가 비록 하나님일지라도...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 해서 진 사람~)
        개같은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해서 똑같이 꼴인한 사람~)
        개를 기르시는 분들이여...
        개가 사랑받는 비결을 배우십시요.
        개를 따라하십시요.
        하나님께 사랑받으실 것입니다.
        개따라 하기~
        시이~ 작
        멍멍~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 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하며 지내십니까 ?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증거입니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는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서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 별것 아닌 사람들
        링컨이 꿈속에서 겪은 일.그가 대집회 강연을 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링컨도 별것 아니군』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들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그런데 곧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그는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별것 아닌 사람들을 좋아한다.그래서 이렇게 별것 아닌 사람을 많이 만들지 않았겠니? 다만 별것 아닌 사람들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때 그 별것 아닌 사람에게 나머지 별것 아닌 사람들을 맡기게 된단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고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27).

        ♥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쉬운 방법
        사나운 산돼지로 인해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숙련된 사냥꾼을 동원해 산돼지를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산돼지를 잡으러 간다고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달 후 노인은 산돼지를 찾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떻게 산돼지를 잡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산돼지가 음식을 구하는 곳을 찾아서 곡식을 계속 뿌렸더니 산돼지들은 별 노력없이 공짜로 곡식을 먹게 된 것을 깨닫고
        날마다 그 곳으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옆에 함정을 파 놓아 잡았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 심리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땀을 흘려 얻은 대가야말로 참 기쁨의 소산이 아닐는지요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이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구 게리그병(Lou Gehrig, 근육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나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랄까. 죽음의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 세기이상을 더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다시 페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번 상상을 해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다. 어찌 색다르다 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그뿐만이 아니다.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감사가 넘치는 생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었겠는가. 호킹이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 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쉬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시공의 마술사`,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감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는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루 게리그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읫로부터 이 병에 걸렦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이 선고가 있은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데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1942 -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하에 기술하고 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ㅂ다 적극적이고 활방한 삶의 자세로 간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
        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호킹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원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쇠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공의 마술사""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운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구 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50:14-15)라고 말씀하고 아울러 범사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당부하고 있다.

        ♥ 게으른 사람에게는 후회가 따른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반드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다.먼저 황소가 나섰다.“나는 주인님이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다.
        “도둑을 누가 막는가.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나는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다.“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하다.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이다.



        ♥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머리칼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다른 사람은 메달을 달아주며 칭찬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그때 머리칼이 아파서 혼이 났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더랍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대로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Springfield에 있는 위튼벌그 대학에서는 34년 전에 200달러를 갚지 못했던 학생한테서 백만불을 기부받은 일이 있는데 그 분은 대 Power회사의 사장인 Dr.Stanley Hanley입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 감사를 잊지 않는 성품때문일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로새4:2)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는 서양격언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 소명받은 사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애굽기 3:12)
        기독교 신앙인은 두 번 태어납니다. 자연인으로서 몸으로 태어나는 것 한번,그리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두번째 태어납니다. 그런데 한번 더 태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고향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의 심부름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심부름을 왔는지조차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심부름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를 깨닫는 것은 인생의 최고 목표이겠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겐 걱정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실패도 없습니다.


        ♥ 세 종류의 사람
        현세에는 약 6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실상은 세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곧 없어야 할 사람과, 있으나 마나한 사람과, 있어야 할 사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보면 강도는 없어야 할 존재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요, 사마리아인은 꼭 있어야 할 존재이다.
        여기에 대한 기준은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때로는 사회적인 공헌도를 기준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이 결정할 것이다.


        ♥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영국왕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자였다.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다.그런데 한번은 암스트롱이라는 좀도둑이 양을 훔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렀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임금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제임스 1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답했다.“참 기특한 죄인이로군.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그리고 성경을 모두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 암스트롱은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그는 하루에 딱 한절씩만 성경을 묵상했다.성경의 절수가 무려 3만 1102절이니 그것을 모두 읽으려면 80년 이상이 필요했다.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다.“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라” 암스트롱은 그 후 새사람이 돼 봉사의 삶을 살았다.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 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지혜로운 사람
        성 구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미국 오클라호마 에이다의 제일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때 한 시각장애인 복음가수가 들려준 간증 한 토막이다. "열 살 때 아버지와 사냥을 가게 됐어요.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일 예배 드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주일 한 번 어긴다고 그리 걱정할 것은 없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사냥터에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아버지는 저를 남겨두고 급히 토끼를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한 물체를 발견하고 총의 방아치를 당겼어요. 제 머리카락을 토끼의 꼬리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저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일로 모두 구원을 받았어요. 제 눈을 잃고 그대신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탄은 항상 "딱 한 번인데 뭘 "이라는 말로 사람을 유혹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본문: 사도행전2:43-47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출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가 점차 성도수가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교회의 체제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질서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에 따라, 자발적이면서도 풍성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구심점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이루며 교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놀라운 이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미 앞의 42절의 "서로 교제하며" 부분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면서 어느 정도는 충분하게 전해드렸으므로, 앞부분은 대강 정리만하고 주로 47절 하반절에 중심을 두고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사람마다 두려워 하였습니다.(43절상)
        여기서의 "사람마다"는 뒤에 나오는 45절의 "각 사람"이나 47절의 "구원 받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무섭다는 의미의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그들이 보거나 듣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현상들로 인하여 생겨진 것입니다.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그 다음 구절들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능히 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2.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43절하).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은 그들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표증입니다. 이 표증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으로 세상의 그릇된 사단의 세력의 영에 사로잡혀 나타나는 그것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에게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곧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대의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말하기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이라."라고 했습니다.

        3. 그들은 주 안에서의 ‘한 몸 사상’을 가지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44-47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동안 충분히 앞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 이것은 초대교회의 하나됨, 곧 통일성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것입니다. 이들은 가정을 버리거나 만사를 제쳐두고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2)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 이 부분은 사도행전 4:34,35절을 보면 보충설명이 됩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 "각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는 그들의 영적 일체감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한 몸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영적인 깊은 이해와 자기 발전적 신앙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적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닫고 배워야 할 너무나 귀중한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인지라, 영적으로 하나면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기 위하여 주변의 성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는 가난한 성도를 찾아 섬기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이고 여력이 있는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와 관계없이 이웃의 작은 개척교회들을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 이들이 모임의 장소가 없어서 성전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에 모인 것도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모였지만,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감동되고 이끌리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5) 성찬과 애찬을 했습니다.
        - 이들은 어느 한 집을 선택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음식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으며, 이 애찬에는 주님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성찬이 따랐습니다.
        (6)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 하나님을 찬미함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오는 당연한 것입니다.
        (7)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 이 부분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성도가 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살라는 주님의 명령과 같은 분부는 도무지 우리의 가슴에서 흐려진지 오래고, 지금은 오히려 세상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저는 목사로서 저 자신부터 자성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잠시 살펴 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결코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목회자와 성도 간의 갈등으로 서로가 너무나 많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원인에 대하여 단적으로 이것이다 말하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의 바르지 못한 목회관과 그릇된 세속적인 욕심과 왜곡된 교회관 등으로 인하여 발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신실한 목회자들과 이제 막 개척을 하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는 초년 목회자들에게 힘을 잃게 만들고, 목회자를 존경하던 성도들의 가슴에 가시를 꽂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성토하며 교회 밖에까지 알리며 떠드는 일도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리를 높여 외치는 자들의 심정은 이해가 되나, 그들 또한 자칫 옳은 것을 주장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상대를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되며, 교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는 일에 참으로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자기 스스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그가 그렇게 자기 공로를 생각한다면 그는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며, 주께서 부흥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목사는 주님의 도구로 성도를 섬기도록 보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부흥되기까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성도들의 눈물과 피흘림이 있었음을 그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목사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하여 성토해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강단에서 수 십년 동안 외쳐대던 바로 그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엾은 그 목회자와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그저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들추어 용서를 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설교를 잘하고 심방을 잘하는 목회자보다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그런 목회자를 우리 주님과 성도들은 지금 필요로 여깁니다.

        ♥ 고독한 사람들
        고독은 대용품에 의존하여 사는 삶에서 오는 영혼의 영양 실조다.
        슬픈 일은 많은 사람들이 대용품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기쁨을 주실 때 저들은 여흥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평강을 주실 때 저들은 수면제를 먹으며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가치있는 것을 주실 때 저들은 가격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실 때 저들은 희롱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그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실 때 저들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
        본문: 고린도후서 12; 1∼10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여러 사람들이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짜증내거나 낙심하고 어려워지면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또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높이기보다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고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겸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소개합니다.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간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2절). 그러나 이 체험을 소개하면서 ‘무익하나마’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득불(하는 수 없이) 자랑한다고 합니다(2절). 매우 사려 깊은 태도이며 겸손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합니다. 6절에 “내가 참말을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부흥회 때 설교나 간증을 들어보면 진실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은혜가 될 텐데 왜 꾸며서 설교하고 간증할까? 안타깝습니다. 어느 분이 신문 칼럼에 그리스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이야기를 하면서 “신들이 보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가 피터 드래커의 책에 예화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진실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앞에 불렀던 찬송 518장에 5절 가사를 덧붙인다면 “진실하기 원합니다.진심으로”입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는 능력,외국어 구사 능력 혹은 사람 잘 사귀는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난의 가시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머무르게”(9절)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능력이 붙들어줍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월드컵 시즌의 유행어처럼 권면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어느 순간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10절). 은혜받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얼굴을 늘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은혜받으셨습니까? 기뻐하십시오.

        네 종류의 사람

        감사할 것이 100이고, 불평할 것이 200일 때 우리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1. 불평할 것 200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는 사람.
        아마 60% 이상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불평할 것 200에서 감사할 것 100을 제하고 100 전도만 불평하는 사람.
        이런 사람도 30%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조금 나은 분들입니다.

        3. 불평할 것 200이 있어도 감사할 것 100은 아예 따로 떼어놓는 사람.
        이 사람은 기본적인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4. 불평할 것 200은 작게 생각하게 감사할 것 100은 크게 생각하는 사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모두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평할 것은 10분의 1로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10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불평할 것은 20이 되고, 감사할 것은 1000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살면 대략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창 45:3-11, 고전 15:35-38, 42-50, 눅 6:27-38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들을 위하여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위의 열번째까지 형들은 다른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이고, 자기와 동생 베냐민은 '라헬'이라고 하는 야곱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야곱은 이 두번째 부인을 사랑했고, 자연히 그 아들인 요셉을 다른 열 아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위의 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셉은, 이상한 꿈을 꾼 다음에 형들에게 들려주는데, 그 꿈 이야기가 형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게 됩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형들이, 요셉이 나타나자 그를 죽이기로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말리고 유다가 말리는 바람에 죽음은 면하고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몇 사람을 거쳐 요셉은 애굽 왕실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집 종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요셉은 죽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성실한 요셉이 보디발의 눈에 들어 그 집 총무가 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철창 신세를 지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때 중동 지방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가뭄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양식이 비축되어 있어서 염려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부모와 형제가 있는 유대 나라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갑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네 보통 사람 같으면,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요셉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수를 갚았더라면, 일순간은 승리의 쾌감을 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자기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 모두가 멸망하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 모두를 살리는 대승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여러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을 건져내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니요,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삶, 곧 화목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

        힘과 슬기,덕 이 세 가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소중한 보화이며 그 중에 가장 으뜸은 덕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덕장이 되려 하고 덕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덕스럽다는 평판은 듣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의 재주와 지혜,학식과 문무를 다 겸했지만 덕장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농민의 아들 유비 현덕은 배운 것도 많지 않고 힘도 남보다 세지 못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덕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덕스럽게 만들며 또 사람을 부덕하게도 만드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면 사람을 부덕하게 만드는 것 세 가지가 지적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가면
        둘째는 분노
        셋째는 더러운 말

        첫째 가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십시다.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언제 돈을 벌고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을 썩게 만들고 타락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는 결국 그 사람을 가면의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을 부덕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분노인 것입니다.

        성경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분을 안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시비로,사소한 이해타산으로,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과오 때문에 분을 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재빨리 풀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빠른 시간내에 분을 풀어버리지 아니하면 결국은 마귀가 틈을 타고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을 부덕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더러운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말이란 건전하지 못한 말을 두고 하는 동시에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해치는 말들을 남발함으로써 점점 부덕한 사람이 되고 기피의 인물로 전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진실입니다.
        이웃에게 진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에게 진실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고는 남에게 진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헌입니다.
        성경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이 땀흘려 가꾼 곡식을 순식간에 가로채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덕인이 되려면 우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스스로 자기 생활을 지탱해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남의 생활에 보탬을 주는 구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선한 말입니다. 사람이 선한 말을 아니하고 살면 마음에 녹이 슬고 입에 좀이 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을 꼬집는 말,해치는 말,할퀴는 말,짓밟는 말들을 골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례한 말,무익한 말,무가치한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복을 비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느 때든지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상한 자에게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에게 격려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특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덕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

        얼마 전에 바보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보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외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한참 후배들이 통일운동을 한다면서 북한을 제집처럼 마음껏 들락날락할 때도 그분은 "고향에 못간 많은 실향민을 두고 나만 어찌 고향에 가겠는가?"고 하며 바보처럼 그분은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천국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웅변도 몰랐고, 쇼맨십도 없었고, 그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바로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다시 한번 얼마 전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분이 가졌던 마음의 깊은 평화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내면의 깊은 평화를 가져야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년에는 엄청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전쟁이 있었습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긴 시신 사이에서 사단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겁니다 이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일까요?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 앞에 벌벌 떨면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벌에 신경 쓰고, 연줄에 신경 쓰고, 힘이 있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어둠의 힘은 커지고 영혼은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보다 힘이 없는 곳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힘을 얻으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서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칭송 받는 이유는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선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싸움은 내 욕망을 위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남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우리 속에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내 욕망을 조금 덜어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보는 삶을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 없는 세상이라고 느끼신다면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길을 걷기로 작정해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길이 없어 보여도 내가 평화의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은 생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그렇게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평화의 길을 걷기로 새롭게 작정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에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거듭난 사람의 증거
        - 바로 설수 있는 사람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5∼17.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어느날 어떤 목사가 한 탄광촌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귀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갱도 입구에 있는 시커먼 땅 위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흰 꽃이 피어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 동안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목사는 문득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이 꽃은 표면이 무척 매끄러워. 그래서 어떤 먼지도 앉을 수 없었던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석탄 가루가 날리는 탄광촌보다 더 시커먼 곳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깨끗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세상의 것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자신의 색깔로 당신을 시커멓게 물들일 것입니다.

        “주님, 세상은 저희에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때마다 진리의 말씀을 저희에게 먹이시사 저희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친구도 없고 남의 집에도 가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심하게 살면서 평생을 나약하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한 번뿐인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감하게 자신을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머금고 인사부터 하고는 상대편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멋있는 분이군요."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런 말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해했고, 좋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국의 달변가요, 시인이요, 극작가인 버나드 쇼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면 자신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약속...하나님의 약속

        어느 젊은이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해서 주일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교회로 찾아가 잠을 잤습니다.
        저녁이면 교회에서 자고 낮이면 구걸을 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별명은 성씨를 따서 "박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자연히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있었고 교회를 짓기 위하여 작정헌금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옆에 앉아 계신 장로님이 1,50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장로님은 교회에 일주일에 몇 번 나오시지도 않았으면서 1,500만원을 하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잠을 잤으니 2,000만원 정도는 해야겠다고 2,000만원을 별 의무 없이 적어냈습니다.
        적어내고서는 한동안 까맟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 개월이 흐른후 새벽기도 때 갑자기 마음속에 충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이 마음을 움직여 주신 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그 작정한 것을 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의 약속은 파기하거나 조정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 청년은 한참을 깊이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제가 고물을 주워 팔아 헌금을 하겟습니다.
        작정한 헌금액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이 청년은 그날부터 고물을 주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줍다보니 차츰 고물장사에 눈을 떠 1년 반만에 약속한 금액의 작정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장로님이 이 청년을 후원하여 공부를 시켜주었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의 20가지 특징

        1. 시험발표가 나야 공부한다.(보통때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2. 계획만 잘 세운다.(고치기도 여러번 고친다.)
        3. 공부하기전 할 일이 참 많다.(특히,책상정리)
        4. 처음에 책상에서 하다가 갑자기 상을 펴더니 침대에 눕고 그러다 잔다.
        5. 1시간 공부하고 3시간 쉰다.
        6. 시험발표나면 해야지 하고서 막상 발표나면 자포자기한다.
        7. 잘 세운 계획만으로 흡족해한다.
        8. 동태를 살피고 동지를 찾는다.(같이 포기하자는 속셈)
        9. 조금 자고나서 해야지 하고 막상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떠있다.
        10. 밤샘을 철썩같이 믿는다.
        11. "공부하고 자야지"가 아니라 "좀 자고나서 해야지"라고 다짐한다.
        12. 두꺼운 책은 베게하기에 좋다
        13. 오색찬란한 필기노트(보는 것만으로도 뿌듯)
        14.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 관심없던 국민좌담이나 시사프로그램 같은게 무지하게 재미있다.
        15. 책상에 필기 복사물만 그득히 쌓여있다.
        16. 기적을 믿는다.
        17. 머리는 좋지만 안해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18. 시험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19. 공부는 못해도 인간성은 캡이라고 생각한다.
        20. 시험성적 발표후 다음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 사람은 사람대로 맛과 멋을 지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으로 160㎞쯤 떨어진 산자락에 ‘엘불리’라는 식당이 있다.엘불리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군침을 삼키는 식당으로 명성이 나있다.4월부터 6개월 동안만 영업을 하는가 하면 규모는 50명 정도의 음식 준비만 가능할 만큼 작다.

        엘불리의 명성은 규모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방장인 페란 아드리아의 조리솜씨 때문이라고 한다.미식가들은 그가 만드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 2개월 전부터 예약을 하고 기다린다.페란 아드리아야말로 맛 하나로 엘불리를 세계의 명소로 만든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대로,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맛과 멋을 지닌다.맛잃은 소금은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식당도 음식맛이 떨어지면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지금 우리에겐 맛과 멋을 만드는 제2,제3의 페란 아드리아가 필요하다.서툰 요리사들이 요리를 망치기 전,그래서 식당이 문을 닫기 전에 주방장부터 바뀌어야 한다.

        ♥ 두 사람의 이웃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잔뜩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동네는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은 맣고,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해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 온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간 그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그리고 이사를 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될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오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힘자라는 데까지 그들을 도와 볼까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 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임을 이 이야기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잠언 21:1-6

        저자는 2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실망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장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행실의 특징을 대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혜자가 취해야 할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義와 信과 仁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겸손한 사람

        교만한 자는 그의 교만에 의하여 자신의 도덕적 눈멂을 선언합니다.
        그의 눈이 높은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졌다는 것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도 없습니다.

        3. 거짓없는 사람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으며, 작은 거짓의 성공은 또 다른 거짓을 연속적으로 낳게 되고, 더 큰 거짓으로 인도하여 물방울이 점점 커지나 막이 엷어져 터지듯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구합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은 보복을 합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당한것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만족을 모릅니다.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만들어 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 역전되어 속은 자가 속이고 속인 자는 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레미아 5:1)

        지금 정치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소리가 드높다.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민운동은 낡고 부패하고 줜워주의적인 정치를 타파하고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치,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요, 그것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국민의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정치권이요, 그 주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높건만 정작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대하 지도자들은 공감을 표가혹 취지 수용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그럼 말만 있을 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방안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자기들이 공천을 주고 감투를 씌원준 정치인들이 부패, 저질, 불성실 등을로 시민운동의 배척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하 보스들은 스스로 낯을 붉히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텐데, 이런 반성의 빛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하나의 위선이요, 이중적 형태이다. 지도자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완벽한 사람

        한 사역자가 한번은 누구를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간에 그것이 친절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기적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린도후서 5:17-18).

        나는 내게 문제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서만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의 위대한 가능들이 숨겨진 기회인 것이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당신은 새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소중한 한사람

        하나님은 한사람을 통해서도 세상을 움직이게 하신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설 때 세상은 환경이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

        1809년 2월 12일 켄터기의 산골에서 아브라함 링컨이 탄생하는 순간 미국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흑인이 해방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기운이 싹 텃던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방탕에서 회개하던 그 시간,바로 그 시간이 전유럽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때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기독교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요한 웨슬레가 은혜를 받던 그 순간, 그때 영국이 구원받는 순간이었다.한사람은 이렇게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매년 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틴 라이프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는 모습을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의 대답은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 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그것은 엎드리고 얻은 선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을 내세워 엎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고넬료보다 더 위대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

        15.어리석은 사람
        성경엔 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있다.
        복받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저주 받은 한 사람도 있다.
        구변 좋고, 논리 정연한 똑똑한 사람이지만 자기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상으로 값진 인생은 없는 것이다.
        우선 놀고나서 일하라고 하는 사람,
        쉬어가며 일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
        자기 맡은 일에 부지런히 할 필요없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일을 해봐야 별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
        주의 일 한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있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
        어뜻 보면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망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지런해도 자기가 해야할 일에 대하여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남의 일 비판하고, 남의 일 간섭하는 데 부지런한 사람도 그렇다.
        남의 다리 부지런히 긁어보았자 내 다리는 항상 가려운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값진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의 돌쩌귀

        자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돌쩌귀는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돌쩌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때 문제에 빠집니다.
        의기 소침, 편집증, 정신분열, 강간, 자살,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불안증세는 고립감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분 경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경영자들에게 매일 최소한 1분 동안 고용인들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매일 단지 1분 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면 많은 회사들에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고용인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며, 점차 자동화되어 가는 작업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쩌귀에 기름을 칩시다.
        매일 다른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두 가지 일을 시작합시다.
        그것이 음식이든, 전화든, 편지든, 카드든, 1분 간의 감사의 말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 당장 그 일을 합시다.
        누군가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거든, 그를 칭찬합시다.
        누군가 일을 철저히 하고 있거든, 그를 격려합시다.

        거듭난 사람

        미국에 있는 어떤 자매가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정을 살펴보니 남편은 여전히 세상의 쾌락을 좇고 있었다고 한다.
        TV프로도 세속적인 것만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자매도 전에는 그런 프로를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설교가 나오는 프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자매의 모습을 본 남편은 빈정거렸다.

        “당신, 완전히 돈 사람 같군. 술이나 담배도 안하고 바가지도 안 긁고 욕도 안하고 이젠 하루 종일 기도하고 성경만 읽네. 그러고도 얼굴엔 늘 기쁨이 가득하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그래.”

        주일이 되어 성경을 들고 집을 나서면 남편과 시누이들이 비웃었다.

        “아니, 성경은 왜 가지고 가?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읽어 주시는데 뭐하러 귀찮게 성경을 가지고 가?”

        미국의 교회 목사님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세상적인 말을 더 많이 하고, 또 성도들은 그런 말만 듣고 성찬만 행하면 다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답답한 일인가?

        거듭나기 전의 자매 모습도 물론 이들과 같았지만, 이제 은혜를 받고 나니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던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처럼, 그 자매님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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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도



        축도에서 성삼위의 순서를 본문과 달리 해도 되는가?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예배의 마지막에 축도를 할 때에 축도 본문인 고린도후서 13:13의 성삼위 순서 즉 성자 성부 성령의 순서대로 하지 아니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들어서 하는 데 신학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같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면서 구별된 인격과 사역을 가졌다는 것(one substance in three persons)이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이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심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으면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써 잘 알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신약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증언, 약속과 성취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신분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바로 이해되는 것이며, 그러한 구도(構圖: 성부의 성자 파송과 성자의 성령 파송)에서 볼 때 축도 본문에서의 성자의 은혜를 먼저 언급한 것은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아론의 축복 기도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레위 사람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이 축복할 말을 다음과 같이 정해 주셨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은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즉 영적, 정신적, 감정적, 물질적인 방법으로 축복하신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사람을 말로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한 말은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순간이 된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우리가 일터에서 사용하는 말에는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능력이 담겨 있으며 다른 사람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능력도 있다. 우리가 선택해 쓰는 말은 종종 우리가 깨닫는 것 이상의 권능을 발휘한다.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터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다. 즉 안심시키고 보호해 주고 지원해 줄 수 있다.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로 오세요.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반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역할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에 오류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은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사이에 뭔가가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좋은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찾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적하거나 비평하거나 꾸짖거나 때로는 심지어 벌을 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문제가 된 행동만을 비난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 전체를 정죄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훌륭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 평판이나 체면이 약간 구겨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대신 그들을 칭찬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