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예식(2022년)(2023년)(2024년)(2015년)



2025년 1월 5일 신년주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το ποτηριον της ευλογιας ο ευλογου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αι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τον αρτον ον κλωμεν ουχι κοινωνια του σωματος του χριστου εστιν.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 호 율로구멘 우키 코이노니아 에스틴 투 하이마토스 투 크리스투 톤 아르톤 혼 클로멘 오키 코이노니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스틴.

* 잔(4221)  πο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21

1. 잔.   2. 마 23:25. 3. 고난
발음 [ pŏtēriŏn ]


* 축복(2129) εὐλογ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εὐλογέω 스트롱번호 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눅 24:50
발음 [ ĕulŏgĕō ]


* 몸(4983)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σώζώ 스트롱번호 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 그리스도(5547)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 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 1:1
발음 [ Christŏs ]
어원 / 5548에서 유래

χρίω 스트롱번호 5548

1. 기름 붓다.  2. 기름 바르다. 3. 눅 4:18
발음 [ chriō ]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은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성찬예식 때 사용한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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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성찬식이란 무엇인가 (1)

"이 식사를 우리는 '성찬식'이라고 부른다…이 식사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감사의 기도가 전해 내려오며, 이 식사를 통해 우리의 살과 피가 변화하여 자라나니, 이 식사는 곧 육신이 되신 예수의 살과 피라는 것이 우리의 가르침이다." -저스틴 마러(Justin Martyur, 165년 순교)-

1.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마지막 만찬'과 그 비밀

유월절 다음 날은 무교절로 유대인들에게는 어린 양을 잡는 날이다. (막 14:12) 무교절도 유월절로 포함하는 당시 유대인들은 늘 그렇듯 식사를 하기 전 가장이 떡과 포도주에 축사를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예수 역시 한창 유대인의 명절로 들뜬 제자들에게 축사하지만 다른 날과는 달랐다. (막14:22)

그러나 제자들은 큰 의미를 두지 못한 채 예수가 손에 든 떡을 축복하는 것을 받았고 스스로 손으로 떼어 일일이 한 명씩 자신들에게 준 것을 평범한 것으로 여겼다. 지금 제자들은 현대인들이 사는 오늘날 마지막 만찬을 당시에 기념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였을까? 이러한 어수룩한 사건을 두고서 이승구 교수가 정확한 대답을 했다. "최후의 만찬을 제정한 것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매년 유월절 기념으로 행한 것으로 인식하였다"고 말이다.

나는 성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았다. 사(4)복음서를 넘나들며 찾은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이 이들에게 숨겨진 비밀이었고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삼일 만에 살아난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누가복음의 저자는 기록하고 있고,(누 18:34) 특히 그들 중 베드로가 그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여 항변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막는 사단으로 지목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막 8:32)

예수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한 가지 기이한 말을 덧붙인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막14:25) 과연 무슨 말일까?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어떤 것을 절제할 때 맹세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 일은 이러이러해서 먹지 않겠다" 혹은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게다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유대인들 생각에 유대인은 포도주를 놓고 축복할 때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 그것은 포도주가 끝없이 공급되는 것을 말하는 바(암 9:13)이기도 하다. 과연 그렇다면 이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아마 그가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려는 맹세를 한 것으로 제자들은 이해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전혀 앞으로 일어날 죽음에 대한 십자가 사건과 최후의 만찬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사이로 예수는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한다. "그 하나는 그의 몸이 찢겨질 것을 간접적으로 사사하는 바 사람들에게 형벌을 받고 나의 몸이 이제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의도와, 또 다른 하나는 식사를 나눌 때 생각지 못할 것 같은 십자가의 죽음에 기리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깊은 성찰을 요한다고 한다.

사실 은유적 표현인 예수의 살을 빗대어 말한 "내 몸"과, 피를 맺은 약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수 피인 "언약의 피"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마침내 '예수의 입장'은 자신이 곧 십자가를 질 것임을 '예고'하셨다는 것과 추후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한 사건을 회상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강조하며 "마지막 성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를 마련한다.

2. 부활 후 제자들이 이해한 '마지막 만찬'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의 언약적 사건을 계기로 이제 이들에게는 과거 유대인들이 즐기던 식사의 의미를 예수 공동체 안에서 재정립하면서 올바르게 깨닫기 시작한다.

제자들과 다시 모여든 무리들은 텅 빈 하늘 위로 올라간 예수가 준비하고 있는 성령을 기다리며 매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기념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제 예수가 기념하여 제정한 성찬식을 하며 과거 마지막 만찬을 두고서 그가 고난과 삼 일만에 살아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한 듯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증언하고 있었다.

추후 텅 빈 푸른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들의 묵상은 이러했을 것이다. "왜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채 떡과 포도주를 먹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일 줄이야!", "오라! 우리가 마지막 만찬을 하였구나,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새것이 될 때까지 다시 마시지 않겠다는 말이 정녕 그가 죽음에 이른다는 것과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니 이 땅의 포도주를 마실 이유가 없다는 의미구나. 이제서야 그분의 의도를 알겠노라!"라고 말이다.

이승구 교수는 최후의 만찬의 확증을 두고서 은혜 언약의 "표", "인", "하나됨"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과거 예수가 죽기 전, 마지막 만찬의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절망과 어리석었던 자신들의 무지를 두고서 후회와 감사가 교차하는 가운데 죽음과 피라는 "언약의 표"를 가진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부활 후 이제는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 기도를 할 줄 아는 지혜를 우리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결단했을 것이다.

둘째,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을 목격한 예수 공동체로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사실적 근거로 "도장"과 "객관적 확증"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날마다 확인한다.

셋째, 이제 성만찬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있어서 그 식사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상쾌하게 하는, 확증의 영적인 자양분(영적 음료)임을 알고 매일 힘을 얻어 제자들과 같이 "하나 되어" 늘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며 날마다 살아가는 힘을 충전 받아야 한다.

성만찬의 클라이맥스는 사랑의 하나로서 칼빈 역시 "그는 단 하나의 몸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모두를 그 몸에 참여케 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또한 그러한 참여에 의해 한 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도 바울 역시 "떡이 하나요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고 말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성례를 두고서 "사랑의 끈"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3. 현대인들의 '마지막 만찬'의 의미

칼빈은 성만찬이 주는 그 어떤 힘을 규정하기 위한 어리석은 인간들의 다양한 호기심에 제동을 건다. 그는 "주께서는 성례를 통해 우리의 배가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려 하셨으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게 하려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화체설"을 고안한 카톨릭 혹은 "떡 안에 떡과 함께 떡 밑에 그리스도의 몸이 있다"라고 굳게 믿었던 루터파의 "공재설"을 반박하기에 이른다.

"화체설"은 떡은 떡인데 신부의 기도로 인하여 축도한 후 그 떡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자 본질이라는 엉뚱한 "본질(Substance)과 질료(Matter)" 이론을 펼쳐 떡의 본질이 변한다는 우스꽝스런 사고를 하기도 한다.

루터의 "공재설"을 생각한 자들에 의거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심한 오해를 낳기도 했다. 율리처 쯔빙글리(Ulrich Zwingli)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하늘에 있다고 했으며 성찬식은 그리스도 몸의 표시이자 상징만을 의미한다는 현대인들의 사고와 동일하다.

그러나 존 칼빈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내딛는다. 쯔빙글리의 사고에 대한 기념이라는 상징은 인정하지만 확증이 없다는 그의 생각을 가지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떼래야 뗄 수 없는 "십자가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 유익에 동참하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은총의 수단이자 성찬이 하나의 단순한 효과적인 상징임을 벗어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는 신비적으로 부활의 주와 연합하며, 우리 안에 하나님과 만나 그를 기뻐하게 하는 "영적인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더 쉽게 설명하는 바, 로마 식민지 시절에 태어난 예수가 인성으로 있을 때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성까지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는 목적에 의미를 두는 경우라고 말한다. 부활 승천 후에는 하늘에 인성과 신성이 있는 것에 유념해야 하고 인성이 다시 내려와 무언가를 도우는 것이 아닌 신성이 우리의 영들과 만나고 도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골 2:9)

칼빈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이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이고 또한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우리와 어울려 만나는 과정으로서 성만찬을 깊이 이해하려고 했다.

성찬은 이제 예수 안에서 한 몸이니 먹고 마신다고 해도 아무 문제는 없으나, 그보다는 영적인 부분의 터치(Touch) 즉 주기적으로 성만찬을 통해 내 안에 존재하는 성령과 하늘의 하나님과 교류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믿음 안에서 깊은 영적인 교통이 날로 커져 한 마음으로 하늘을 부유하게 만들어 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예수의 피로 하나 되게 하는 잔도 하나요, 제단도 하나요, 장로와 집사들과 함께 하는 주교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순교자 이그나시우스(Ignatius, 35-107 순교), <적대자들과의 논쟁> 중에서-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성찬식이란 무엇인가 (2)

"The Lord's Supper comes to us like a ring plucked off from Christ's finger, or a bracelet from His arm; or rather like His picture from His breast, delivered to us with such words as these, "As often as you look on this, remember me."

(주님의 최후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따낸 반지처럼 혹은 그분의 팔에 있는 팔지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는 오히려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큼 자주 나를 기억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에게 배달된 그의 가슴에서 나온 스케치처럼 전해진다.) -Rev. John Flavel (존 플라벨, 미국 장로회 신학자, 1630~1691)-


1.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처음 3세기 동안,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다고 한다(롬16:5). 그 이유는 로마 안에서의 박해 때문이기도 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집의 모든 재물을 서로 통용하던 시대였기에 교회는 외견상 건물을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IVP신약성경배경 주석: 사 18:6-7 참조)

고린도 부유한 후견인 집을 빌렸다고 하는데, 아홉 명 정도 들어가는 크기의 "트리클리니움 Triclinium" 또는 사십 명 정도를 수용할 가구 딸린 큰 방인 "아트리움 atrium"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의 유대인 사회는 비록 다른 이들보다 부유하고 교육도 많이 받은 엘리트 집단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 가난했다.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질책하는 편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편지에서 '분쟁'이라는 말로 질책하는데, 그 단어는 바로 "찢어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가난한 자" 그리고 "부유한 자"로서 나뉜 것을 질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같이 먹고 나누어야 하는데, 세상처럼 신분에 따르는 가치관을 보인다. 이승구 교수는 "이 구절은 교회와 거리상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일찍 와서 먼저 먹고 어떤 사람은 먼 거리에 있어 나중에 오는 상황을 말한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성찬을 준비할 때 각자 집에서 준비해 왔던 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였고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2)라고 따끔하게 혼내면서 너희를 어떻게 그 일로 칭찬할 수 있겠느냐고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라고 축사하고, 떡과 피로 새 언약을 기념(회상)하는 것에 분명한 선을 그어 논하고 있다.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념이자 회상인 성찬식을 하기 전 중요하게 여기듯 "우리는 성찬을 할 때 반드시 '자기 성찰' 혹은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여 나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칼빈 역시 "각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고서 자신이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인정하고 있는지에 진정 숙고해 보라는 것이다"라고 고전 11장 28절을 진단하며 우리가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는지, 개인의 모습뿐 아니라 주위의 형제들을 돌아보고 있는지 살피는 것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성찬식을 초기 공동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치심'으로 생각하고, 그들처럼 날마다 고마워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며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고 감사보다는 우리의 부족함과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죄를 지은 두려움이 앞서서는 안 된다. 또 '여호와의 증인'처럼 소수의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떼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행동도 가히 기쁜 것인 아니다.

2. 현대인들에게 적용된 성만찬의 퇴색된 의미와 교훈

혹시 이러한 사례는 비단 사단의 전략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도 했다. 사단은 가급적이면 성찬의 진정성을 많이 떨어뜨려 성찬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천주교는 통회(contrition), 자백(Confession), 보속 혹은 만족(Satisfaction), 사죄선언(absolutio)을 시행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한다고 이해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사죄선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수용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로4:25).

우리는 바울의 징계와 훈계를 교훈 삼아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첫째, "매일 스스로 살피는 삶" 가운데 그 분의 사랑을 늘 간직해야 한다. 초기 공동체가 의례적 행사를 넘어 감사했던 마음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 둘째,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찬식을 자주 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피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기 위해 떡을 떼고 서로 사랑하며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정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승구 교수는 성찬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나아지도록 자아성찰하며 은혜의 방도가 되게 한다"고 말하며 또한 "성찬을 매주 정해준 것은 '우리 믿음의 게으름'을 피하려는 의도인데, 우리 모두는 이를 스스로 망각해 버린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칼빈 역시 세례는 평생 한 번으로 족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매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이라고 지적하며, 제네바 교회와 성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1년에 4번하던 성찬식을 나중에는 매월 1번씩 하게 한다.

과거 성찬을 자주 집행하라고 권고했던 아나클레투스(Anacletus)는 교회법 제정 전까지는 성만찬을 자주 행하였다. 그러나 교회법으로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을 참여해야 한다고 제정한 후 오히려 이를 악용하여 1년에 단 하루만 시행하는 관례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의지하여 자주 성찬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재와 하나됨,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믿음을 강화하고, 감사와 자비를 나누며 단결과 유대를 증진시켜야 함에도, 성찬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믿음의 게으름과 방종"을 낳은 데 칼빈은 통탄했다.

이승구 교수는 "이는 개인이 주체가 되고, 교회는 이를 도와주고 가르쳐야 한다. 어떤 의미로 진정한 성찬식이 열리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예를 들고 있는데, "성찬을 위한 기도"를 자주하는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참고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의 책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성례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 제자회(Disciples of Christ), 주님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성공회의 많은 교회들은 매주 성만찬을 한다고 한다. 또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개혁교회(Reformed), 감리교회, 그리고 루터 교회의 예배 전통은 매월 성찬을 1회 행하거나 매주 성만찬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요, 선교사이자 동시에 신학자이고 철학가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East Windsor, Connecticut(뉴잉글랜드의 코네티컷 주 이스트 윈조) 에서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장인의 교회를 맡게 되었지만 훗날 성도들이 그를 교회에서 내몰았다. 성찬식 문제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행하고, 회심한 세례교인들만의 세례에 참여하게 하고, 성찬식을 자주 행하는 등의 사유로 사임해야 했다.

성찬식이 포함된 예배든 일반 예배든 간에 정상적이라면 예배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효과를 두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니 그것을 바라지 말고, 오히려 개별적 참여보다 공동체적 참여를 더 선호해야 한다. 예배 혹은 성찬식이라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와 예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퇴색시키지 말아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If we show the Lord's death at Communion, we must show the Lord's life in the world. If it is a Eucharist on Sunday, it must prove on Monday that it was also a Sacrament."
(만약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죽음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에 주님의 생명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일요일에 행해지는 성만찬이라면 그것이 또한 성례전이었다는 것을 월요일에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Maltbie Davenport Babcock (몰비 데비포드 뱁컥, 미국 장로교 성직자 및 모럴리스트 작가, 1858~1901)- 




칼빈의 성찬론

李良浩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로서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있었던 성찬론 논쟁을 생각하면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성찬론을 화해시키는 성찬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런 화해적 노력은 칼빈 당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모두에 의해 의심을 받게 되었다. 루터파에서는 칼빈의 성찬론이 사실상 츠빙글리파의 성찬론과 같으나 위장되어 있다고 의심했으며 츠빙글리파에서는 칼빈의 성찬론이 중세 교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의심했다. 칼빈의 성찬론은 당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모두에게서 의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에 칼빈 연구가들 안에서도 칼빈의 성찬론을 츠빙글리의 성찬론과 같은 상징설적인 것으로 보는 해석과 루터의 성찬론과 같은 임재설적인 것으로 보는 해석이 나타나게 되었다.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는 칼빈과 함께 "취리히 일치 신조"를 만들기 전에 칼빈과 주고 받은 한 글에서 "여기서 나는 당신의 교리가 성례들이 그것들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은총을 준다고 가르치는 교황주의자들의 교리와 어떻게 다른지 보지 못한다"1)하고 칼빈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평했다. 한편 루터파의 "일치 신조"에서는 칼빈파를 지칭하여 "모든 상징적 성례주의자들(sacramentarians) 가운데 가장 유해하다"2)하고 비판했다 한편 19세기에는 같은 칼빈주의자인 네빈(John Williamson Nevin)과 하지(Charles Hedge) 사이에 칼빈의 성찬론과 관련하여 논쟁이 있었다. 네빈은 1846년 한 저작에서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의 살아 있는 에너지, 생명을 주는 힘(virtue)이 성찬을 받는 자 속으로 흘러 넘쳐 들어가 그를 점점 더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 되게 하며 그래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밝혀진 그 동일한 불멸성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3)하고 말했다. 또한 네빈은 "표시들은 그것들이 나타내는 것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과 결부되는데, 이는 단순히 예배자의 생각 안에서 주관적으로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의 힘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부된다"4)하고 말했다. 네빈은 그러면서도 칼빈의 언어는 비유적이며, 참여는 실제적이나 입으로 먹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5)

반면에 하지는 네빈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추기경] 벨라마인(Bellarmine)에게서 그것을 님어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6)하고 비판하면서 칼빈의 그런 주장은 칼빈의 사적 견해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는 성찬에 대한 칼빈의 교리는 부분적으로 루터적 영향에서 온 것으로 개혁 신학 내에 있어서 맞지 않는 낮선 요소이며, 개혁 교회 안에서는 천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나오는 신비로운 효력이라고 하는 개념은 곧바로 없어졌다고 주장했다.7) 또한 하트벨트(G. p. Hartvelt)는 칼빈의 성찬론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육체라는 이상한 개념이 있으며 이것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8)

그러나 리출(Otto Ritschl)은 이들과는 발리 칼빈의 성찬론은 부처의 성찬론처럼 루터와 츠빙글리의 견해를 조정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본질적으로 츠빙글리의 상징설에 충실하게 남았다"9)하고 말했다. 그라스(Hans Grass)도 칼빈의 임재적 표현 방식은 에누리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지었으며, 또한 그라스는 칼빈에 의하면 육체와 피를 받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단지 그 육체의 능력, 결과들, 공로들 및 열매들을 받는다고 했다.10)

맥도넬(Kilian McDonnell)도 칼빈은 스코투스주의적이고 오캄주의적인 전통에 서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 방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지만 그는 대상들을 선택한 후에도 어떤 의미에서도 그 데상들에 매이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했다.11) 칼빈은 "인간을, 구원을 얻도록, 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성례는 결코 내재적 힘으로써 이것을 가지고 있지않다"고 보았다고 했다.12) 맥도넬의 이런 해석에 의하면 칼빈은 츠빙글리와 매우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최근에 들어와서 칼빈의 성찬론을 츠빙글리적으로보다는 루터적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게리쉬(B. A. Gerrish)는 1982년 그의 한 저서에서 "칼빈은 츠빙글리가 아니다‥‥그는 루터의 성찬 이해가 본질적으로 자기의 이해와 동일함을 확신했으며, 차이는 다만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혹은 그에게 참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했다"13)하고 말했다. 또한 또한 조지(Timothy George)도 "존 칼빈과 취리히 일치 신조"라는 그의 논문에서 게리쉬의 말을 인용하여 "일치 신조는 칼빈이 성례에 대해 말하고가 한 모든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빼고 싶지 않은 것만 말한 것이다"14)라고 말함으로써 게리쉬의 주장을 지원했다. 게리쉬는 다시 1993년의 한 저서에서 "칼빈은 어느 때에도 순수한 츠빙글리파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는 츠빙글리가 세례와 성찬에 있어서 일차적 행위 주체에 대하여 잘못했다고 확신했다"15)그리고 게리쉬는 개혁파의 성찬론을 "상징적 기념설, 상징적 병행설, 상징적 도구설(symbolic memorialism, symbolic parallelism, and symbolic instrumentalism)"I16)로 구분하고 "여러분은 도구적 언어 없이 성례에 대한 완전한 칼빈주의적 교리를 가지지 못한다"17)하고 말했다 또한 게리쉬는 중세기 프랜시스주의 혹은 스코투스주의의 병행설과 토마스주의의 도구설을 대비시키면서 칼빈은 병행설이 아니라 도추설 사상을 가졌다고 보았다.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성찬론은 루터적이었는가 아니면 츠빙글리적이었는가 하는 논쟁은 아직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의 성찬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칼빈의 성찬론은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성찬논쟁을 염두에 두고 전개된 것이었다. 그래서 칼빈의 성찬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론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례는 거룩한 것의 표시였다. "성례들은-심지어 교황주의자들도 주장하듯이-단순히 거룩한 것들의 표시들이다"19)하고 츠빙글리는 말했다. 빵은 단순히 빵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가 보기에 츠빙글리의 성례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통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맹인인 바보는 '그리스도의 공적'과 '공적의 분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것들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더러운 암퇘지처럼 그것들을 혼합시킨다. 그리스도는 단 한번 십자가에서 공적을 쌓고 우리를 위해

죄의 용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이 용서를 그가 있는 곳마다,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나누어 준다‥‥같은 방식으로 나는 천상의 예언자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실과 그것의 사용-factum et applicatio facti, seu factum et usus facti-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신중하게 썼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십자가에서 단 한번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나누어지고 적용되고 사용되어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유익을 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말씀과 성례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사용되고 나누어질 수 있는가?20)

츠빙글리는 자기의 상징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복음 6: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루터는 이에 대해 여기서 '육'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즉, '나의 가르침은 영적이다. 그것을 육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의 해석은 무익하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 라고."21) 이어서 루터는 "성서에서 영과 육이 대비될 경우 육은 결코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옛 아담을 의미한다"22)라고 말했다. 알트하우스는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 영을 신체성의 의미로서의 육과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영은 죄성의 의미로서의 육과 상반되는 것이다"23)하고 말했는데, 이 해석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츠빙글리는 시도행전 1장과 사도신조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는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방 안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이런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의 편재설로 대답했다. 루터는 오캄주의의 견해를 받아들여 존재의 세 방식-즉, locally 혹은 circumscriptively, definitively, repletively-이 있다고 보았다.24) 한 존재가 locally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통 속의 물처럼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한 대상이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다.25) 한 존재가 definitively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천사나 악마처럼 전체도시에 존재할 수도 있고 상자 속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루터는 말했다.26)6 그리스도께서 닫힌 문을 통과하여 제자들에게 왔을 때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 방식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27) 한 존재가 repletively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우처럼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루터는 말한다.28) 이렇게 말함으로써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방 안에 definitively하게 존재할 수도 있고,29)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repletively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30)

츠빙글리는 자기의 상징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에서 "이다"는 "상징하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요한복음 IS장에서 그리스도는 "나는 포도나무이다"하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가지들이 포도나무에서 자라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지탱되고 자라는 우리와 관계 지어 볼 때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와 같다는 뜻이다. 비슷하게 "너희는 가지들이다"하는 말도 비유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다"는 단어는 특별히 자주 비유적 혹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다. 예컨대 누가복음 8장에서 그리스도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예에서 "이다"라는 단어는 "상징하다"로 사용된다. 즉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이 모든 말씀들에서 "이다"는 "상징하다"는 뜻이다·31)

츠빙글리의 이런 해석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반박했다

"꽃"이라는 단어는 그것의 일차적이고 본래적인 의미에 따르면 장미, 백합…을 의미한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우아한 찬양으로 예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꽃"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비유를 만들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에 새 의미와 적용을 부여할 수 있다. 모든 문법 학자들은 여기서 "꽃"은 새 단어가 되었으며 새 의미를 획득했으며 이제 더 이상 아기 예수 이외에 들에 있는 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여기서 "이다"라는 단어가 은유적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한 꽃인데, 자연적 꽃과는 다른 꽃이기 때문이다.

친구여 당신이 츠빙글리의 견해에 따라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를 상징한다"고 이것을 해석하려고 노력할 때 어떻게 들리는가? 그러면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참 포도나무는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상징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상징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상징하는 것은 항상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보도 어린 아이도 그것을 아주 잘 안다.

‥‥ 어떤 언어도 논리도 우리가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를 상징한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아무도 참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있는 나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본문은 불가항력적으로 "포도나무"를 새 단어로, 포도원에 있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제2의, 새로운, 실제적 포도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다"는 여기서 은유적일 수 없다.32)

요컨대 츠빙글리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상징설을 주장한 것과는 달리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는 임재설을 주장했다.


칼빈이 성찬론을 다룬 저작은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여러 소론들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저작들 중 중요한 저작들을 연대

순으로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판을 거듭하면서 루터의 성찬론에 대해 신중하게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3) 칼빈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 중 프랑소아 1세에게 올린 서문에서 잘못된 성찬론을 비판하면서 "그러므로 그들이 실제적이고 실체적으로 만들 때 경계를 넘어간다(igitur modum praetereunt, cum faciunt reale et substantiale)"34) 하고 말했다. 그러나 1539년 판에서는 "그러므로 그들이 거기에 장소적으로 제한되어 내포된다고 상상할 때 경계를 님어간다(Igitur modum praetereunt quum

localiter illic circurnscripturn contineri fingunt)"35) 하고 말했다. 그리고 1559년 라틴어 최종판에서는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이 낭송될 때 방과 포도주의 실체가 정지되고 몸과 피로 화체된다

고 상상함으로써 경계를 님어간다(Igitur modum praetereunt quifingunt desinere substantiam panis et vim verbis Domini recitatis, ut in corpus ac sanguinem transsubstantietur )"36) 하고 말했다. 1536년 판에서 "실제적"이라는 표현을 줬을 때 그것은 루터파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실제로 임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539년 판에서 "장소적으로 제한되어 내포된다"는 표현을 썼을 때 그것은 루터파에 대한 비판으로도 오해될 수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방 안에 locally하게 존

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했든 그리스도의 몸이 방에 공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559년 판의 표현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칼빈이 성찬에 대해 쓴 중요 저작 중 하나는 1540년에 쓰고 1541년에 출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대한 소론」37)이다. 이당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중용을 지키면서 이 두 파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칼빈은 한편으

로 루터가, 다른 한편으로 츠빙글리와 오이콜람파디우스가 중세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여 일어난 점에서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들이 중세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가운데 지나친 주장을 쳤음을 비판했다.

한편 칼빈은 츠빙글리파와 대화를 시작하여 1544년에 불링거에게 "만약 우리가 반나절만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쉽게 일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합니다"38) 하고 말했다. 칼빈이 논제를 쓰고 불링거가 그 논제에 대해 주석하고 다시 불링거의 주석에 대해 칼빈이 응답하고 칼빈의 응답에 대해 다시 불링거가 주석하는 등 일련의 복잡한 대화를 거쳐 마침내 1549년 "취리히 일치 신조"가 작성되게 되었으며 1551년에 출판되게 되었다.39) "취리히 일치 신조"는 칼빈의 주장 중 필수적인 것은 담았지만 그의 주장을 충분히 담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칼빈이 츠빙글리파와 일치 신조를 만들어낸 후 칼빈에 대한 루터파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우선 함부르크의 목사이었던 베스트팔(Joachim Westphal)이 칼빈을 이단으로 공격했다. 칼빈은 이에 대해 1555년에 Defensio40)를, 1556년에 Secunda defensio41)를, 1557년에 Ultima admonitio42)를 했다. 그리고 다시 루터파의 헤스후시우스(Tilemannus Heshusius Vesalius)가 칼빈을 공격하고 나섰으며 이에 대해 칼빈은 1561년에 Dilucida expzicatio43)를 썼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례라는 표시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증한다. 일단 하나님의 집에 우리를 받아들인 후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통해 우리를 양육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있음을 확증하기 위해준 표시가 바로 성찬이다.44)

첫째로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의 공적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적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결합될 수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신앙에 의해 얻는 것은 사실이다."45)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시적 표시로 이 신비를 나타내 보여 준다. 성찬에서 경건한 영혼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46) 물론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분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상징이지 실체가 아니다.47)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상징을 보여 주는 동시에 실체도 주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는 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공허한 상징을 준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48)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을 때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것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보증이 된다.49)

둘째로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며 그의 피가 우리의 음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50) 칼빈은 이 점에서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입장을 비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

를 마신다는 것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먹는다는 발이나 마신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여기서 내 말과 그들의 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믿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고 말한다."51)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음이 빵과 포도주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듯이 그리스도의 살은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음료이다.52) 그레서 성례는 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유비이다.53) 칼빈은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비판한다. 만약 성찬에서 실체가 변화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빵과 참된 포도주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것에 대한 유비라는 성례 본래적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54)

전술한 바와 같이 칼빈은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논쟁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면서 자기의 입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55) 우선 칼빈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우주에 충만해 있지만 인성으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56) 그러므로 성찬에 실제적으로 임재할 수가 없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분은 성령이다.57) "성령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것들을 참으로 결합시킨다. "58) 이 결합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생명을 얻는다.59) 성령이 결합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도 우리와 그리스도의 몸을 결합시켜 준다.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본질이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다. 이것은 육체에까지 뻗어 있다 그러므로 성찬의 사용과 별도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본

질적으로 믿는 자들 안에 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신성의 임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60) 즉,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를 결합시켜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적을 전해 주는 분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고 참여하는 것은 성찬을 통하지 않고도 이루어진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빵이 입과 목구멍에 들어가는 특정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머리가 지체로부터 항상·분리되어 있을 것이다"61) 하고 칼빈은 루터파의 헤스후시우스를 비판한다 성찬이 그 자체로 이런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놀라운 신비를 가시적 표시로 보여주기 위해 성찬이라는 성례를 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성찬은 단순한 표시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본 츠빙글리파의 주장을 비판한다.62) 칼빈은 하나님이 공허한 상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과 함께 실체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성찬과는 별도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는 하나님이 성찬을 주면서 공허한 표시를 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으로 임재한다고 말한다.63)

우리는 여기서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단순한 표시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찬은 실재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불가시적 실재에 대한 가시적 표시였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먹는 것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성령의 연결에 의해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빈은 자기의 견해를 강화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살펴보고 칼빈의 견해와 비교해 펄기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나 칼빈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으로는 편재하지만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다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곳에 전체적으로 임재하며 또한 하나님의 동일한 성전에 거하지만 참된 몸으로는 하늘 어떤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64) 하고 말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처럼 성찬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보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고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쁘고 유익하게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한다"65) 하고 말한다. 이 구절은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는 그의 몸과 피의 유익한 음식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했으며 "만약 어떤 것을 성례를 통해 가시적으로 먹는다면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먹고 영적으로 마신다"66) 하고 말했다. 이 구절들은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츠빙글리의 설명을 넘어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opus operatum이라는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찬에 있어서 신앙을 강조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성례들은 치명적인 죄의 장벽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신앙은 조금도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한다면 그의 몸과 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를 받는다고 말한다."67) 그래서 칼빈은 "그들은 성례에 대해 주술적인 힘을 부여한다"68) 하고 비판한다 마치 단단한 바위 위에 비가 떨어지면 흘러 내려가 버리듯이 신앙이 없이는 성례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을 수 없다.69)

칼빈은 이 점에서 루터파에서 불신자들도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정죄가 된다고 하는 주장을 비판한다.70) "우리는 그리스도를 합당하지 않게 받음으로써 죽음에 이른다고 말한 것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71) 칼빈은, 성찬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적 몸이 임재해 있기 때문에 합당치 않은 자가 성찬을 받으면 그에게 정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정죄가 된다고 보고 있다.72)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의 성찬론을 살펴보았다 칼빈의 성찬론은 루터적이었는가 아니면 츠빙글리적이었는가. 이 문제는 지금까지 논쟁되어 온 만큼 쉽게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면으로는 칼빈이 철저하게 중용을 지켜서 어 한 진영에 소속시킬 수 없는 것같이 보이며, 다른 면으로는 칼빈의 성찬론이 매우 독자적인 것이어서 루터적이라든가 츠빙글리적이라든가 하고 말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칼빈은 츠빙글리를 지지하고 루터를 반대했다. 그러나 칼빈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를 성령이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몸의 힘을 받게 판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이 점에서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루터가 츠빙글리에 대해 "그리스도의 공적"과 "공적의 분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는데, 칼빈은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공적"과 "공적의 분여"를 구별하고 "공적의 분여"를 받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루터가 중세 교회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 지나치게 주장한 것을 온건하게 돌려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칼빈의 성찬론의 독창성은 무엇인가? 칼빈의 성찬론의 독창성은 그의 독특한 도구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사도행전 22장 16절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 이외 다른 창시자를 찾지 발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피 이외 다른 질료인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형상인으로 말하면 성령이 참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복음의 선포와 세례와 같은 하급 도구가 첨가된다. " 칼빈은 여기서 복음의 선포와 세례를 도구로 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듯이,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속에서 가시적인 말씀인 성례에 의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성찬론의 독특한 공헌이다 하지가 주장하였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칼빈의 가르침이 비록 개혁 교회 안에서 곧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의 이 독특한 도구설은 탁월한 성찬론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각 주

1 CO 7, 693. "Hic non video quid doctrina vestra discrepet a doctrina papistarum, qui docent sacramenta confere gratiam omnibus sumentibus ipas."
2 The Fomula of Concord, art. Ⅶ, Philip Schaff(ed.), Creeds of Christendom (New York: Harper & Brothers, 1919), 3, 136.
3 John Willlamson Nevin, The Mystical Prosence: A Vindication of the Reformed or Christian Doctrine of the Holy Eucharistic, 61, quoted In B. A. Gerrish, Grace and Gratitude :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Minneapolis: Fortress Press, 1593), 4.
4 Ibid., quoted in ibid.
5 Ibid., 237-43, cited by ibid., 6.
6 Charles Hodge, "Doctrine of the Reformed Church on the Lord's Supper"(1848), 275, quoted In Gerrish, ibid., 4.
7 Ibid., 251-52, cited by ibid., 5
8 G. P. Hartvelt, Verun Corpur(1960), 96-97, 114, 165, 20l, cited by Gerrish, ibid.
9 Otto Ritschl, Die refomierte Theologie(1926), 235, quoted in Gerrish, ibid., 6.
10 Hans Grass, Die Abendmahlslehre bet Luther und Calvin(1954) , 240-53, cited by Gerrish, ibid.
11 KiIlian McBonnell, John Calvin, the Church, and the Eucharist(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166.
12 Ibid.. 166-67.
13 B. A. Gerrish, The Old Protestantism and the New: Essays of the Reformation Heritage(Edinburgh : T. & T. Clark Limited, 1982), 115-16
14 Timothy George(ed.), John Calvin and the Church: A Prism of Reform(Westminster . John Knox Press, 1990), 55.
15 Gerrish, Grace and Gratitude, 8.
16 Ibid., 157.
17 Ibid.
18 Ibid., 168. 한편 방델은 칼빈이 프란시스주의의 병행설을 따랐다고 보았다.
"For franciscan doctrine, as for Calvin, there was a parallelism between the reception of the elements In the supper and the action of the Spirit of Christ, but the elements and the Spirit remained distinct. " Francois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llet(Glasgow: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1980), 344-45.
19 Huldrych Zwingli, Of Baptism, in LCC 24, 131.
20 Luther Confession Concerning, LW 37, 215.
21 Ibid., LW 37, 248.
22 Ibid., LW 37, 249.
23 Paul Althaus,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trans. Robert C. Schultz(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0). 95.
24 Luther, Confession Concerning, LW 37, 215.
25 Ibid.
26 Ibid.
27 Ibid., LW 37. 216.
28 Ibid.
29 Ibid.
30 Ibid., LW 37, 218.
31 Huldrych Zwingli, On the Lord's Supper, In LCC 24, 223-24.
32 Luther, Confession Concerning, LW 37, 171-74.
33 Cf. Gerrish, Grace and Gratitude, 10.
34 CO 1. 18.
35 CO 1, 267.
36 CO 2, 19.
37 CO 5, 429-60.
38 George(ed.), John Calvin and the Church, 47.
39 CO 7, 693-744.
40 ) CO 2, 19.
41 CO 9, 41-120.
42 CO 9, 137-252.
43 CO 9, 457-524.
44 Inst. Ⅳ xvii. 1, OS, 342.
45 Inst. Ⅲ, ⅰ. 1, OS, 1, 19-20.
46 Inst. Ⅳ xvii. 2, OS 5, 343, 21-24.
47 Inst. Ⅳ. xvii. 10, OS 5, 352.
48 Inst. Ⅳ. xvii. 10, OS 5, 352.
49 Inst. Ⅳ. xvii. 2, OS 5, 343.
50 Inst. Ⅳ. xvii. 4. OS 5, 345.
51 Inst. Ⅳ. xvii.5, OS 5, 347, IS 17.
52 CO 7, 622.
53 Inst. Ⅳ. xvii.3, OS 5, 344, 27-20.
54 Inst. Ⅳ. xvii, 14, OS 5, 359.
55 Cf. Petit tratct?‥‥OS 5, 458..
56 Inst Ⅳ. xvii. 26, OS 5, 378.
57 Cf. Jean-Daniel Benoit, Calvin: Directeur D'ames(Strasbourg : Oberlin, 1944), 208. Benolt에 의하면 칼빈은 이런 성령의 역사를 하나의 기적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58 Inst. Ⅳ. xvii. 10, 055, 351, 30-31.
59 Secunda defensio‥‥ CO 9, 47..
60 Dilucida explicatio‥‥ CO 9, 509. "Quia coelum et terram implet divina Christi matestas et essentia, id ad carnem extenditur: ergo extra coenae usum caro Christi in fidelibus essentialer habtiat. quia potiuntur deitatis proesentia ."
61 Ibid., CO 9, 479
62 Secunda Defensio‥‥CO 9, 51.
63 칼빈은 '실제적 임재'라는 표현보다 '참된 임재'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Mutual Consent the regard to the Sacraments, T & T 2, 239. Also cf. Joseph N. Tylenda, "Calvin and Christ's Presence In the Supper-True or Real,"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27(1974), 651「. 그러나 Cadier에 의하면 칼빈의 어법에는 'vraiment'은 항상 'r?ellement'을 의미한다고 한다. Jean C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o la Sainte C?ne(Montpellier: Facult? de Thologie Protestante, 1951), 30.
64 Augustine, Ep. L87 xiii. 41, Obras do San Agustin(Madrid: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1958~1975), lla, 564(이하 OSA라 함). (The Fathers of the Church, Washington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ss~1966, 30, 254-55.) "et ubique totum praesentem esse non dubites tanquam Deum, et in eodem templo Dei esse tanquam Inhabitantem Deum, et in loco aliquo caeli propter vert corporis modum." Also cf. Inst. Ⅳ. xvii. 28, 055, 38011.
65 Augustine, De Doctrina Chrisitana 3. xvi 24, OSA 15, 182(NPNF 2, 563). "suaviter atque utiliter recondendum in memoria quod pro nobis caro eius crucifixa et vulnerata slt."
66 Serno, 131, ⅰ. 1, quoted in E. Portali?. A Guide to the Thought of Saint Augustine, trans Ralph J. Bastian(Westport, Conn. . Greenwood Press, Publishers, 1975) , 257.
67 Comm. Ezek. 20. 20, CO 40, 492. "Papistae quum do sacramentis loquuntur dicunt habere efficaciam, modo no ponamus obicem peccati mortalis: illic nulla fidei mentio. exempli gratia, si quis etiam, qui no guttam quidem fidei habeat, se ingerat ad mensam Christi, olle, inquiunt, recipiet non tantum corpus et sanguinem eius, sed fructum mortis et resurrectionis : …"
68 Comm. Acts, 8. 13.
69 Cf. Inst. Ⅳ. xvii. 33, OS 5, 393-94.
70 Last Admonition to Joachim Westphal, T & T 2, 377 if.
71 Inst. Ⅳ. xvii.33, OS 5, 394, 7-9.
72 Inst. Ⅳ. xvii. 40. OS 5. 404-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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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앙교육서 29. 성찬의 신비 - 보여진 그리스도의 말씀

[明泉] 맑은 샘물

칼빈이 종교개혁을 했을 당시에 성찬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었다.

첫째는 로마카톨릭은 화체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 (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둘째는 루터의 공재설

루터는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을 거부하고 그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셋째는 쯔빙글리의 기념설

그는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표(badge)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에는, 보다 깊은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고 성찬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인 또는 보증(pledge)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신자의 믿음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넷째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성찬의 신비

신비에 찬 성찬에 주어진 약속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 성찬이 무슨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며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이 성찬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주님의 몸》이 지금 현재 우리의 것이요, 장차 영원히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떡과 즙이 이 성찬의 표지인 바 주님께서는 이 표지를 통해서 그의 몸과 피를 참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받게 하신다.

성찬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교제

그러나 이 교제는 영적인 교제로 만족한다.
이는 결코 떡과 즙의 형식 밑에 진정한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지상에서 아직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을 끝내시고 하늘로 승귀하셨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주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
신을 허락하시어 교제케 하시기 위해서 전혀 거리감이 없으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찬에서 이 교제의 사실을 아주 분명히 교훈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모든 풍요로운 것들과 더불어 우리
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그를 눈으로 보는 듯하며 손으로 만지는 듯하다.

성찬은 주님의 영적 임재이다.

주님의 영적 임재는 그렇게도 강하고 효과적이어서 그는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확신과 부활체의 영생을 확실히 해 주신다. 사실 우리의 육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체에 의하여 이미 소생함을 얻었고, 어떤 방식으로 그의 영생과 교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떡과 즙의 형식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 목적은 우리가 그것이 우리의 것이요, 우리를 위한 생명과 영양이라는 사
실을 알기 위함이다.
이런 까닭에 이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봉헌될 때
우리는 즉시 다음의 비유를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의 몸이 떡을 먹음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명을 지탱하며 보존될 수 있듯이, 우리의 영적인 삶은 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삶을 영위한다.
만약에 포도주가 피의 표지로 우리에게 제공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영적으로 받아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윤택케 한다.

영적 양식

이제 이 신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치 않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찬송과 감사로 이 신비를 높여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성찬은 한 몸에 속한 자들의 결속을 일으키며 피차 용납하여 일치와 화합에 이르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쾌히 내어주심으로 우리도 그의 모범을 따라 우리 자신들을 이웃을 위하여 내어주어야 하는 사실보다 더 우리들 사이의 《상호간의 사랑》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공유하도록 허락하셨듯이. 그는 자기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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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01 성찬예식주일

2024년을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하여 매월  첫주일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 기독교도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허벅지 살을 베었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파피 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참으 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습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 주셨으니 너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떡에 대한 두 개의 본문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The blood will be a sign for you on the houses where you are; and when I see the blood, I will pass over you. No destructive plague will touch you when I strike Egypt.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히브리 민족은 오직 피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만났던 두 관원들 한 사람은 술맡은 관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으나 떡 맡은 관원은 사형을 당합니다.
술과 떡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그 떡과 그 잔을 분배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떤 술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나누신 후에 십자가 형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의 피와 떡이 없이는 우리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피(담. dâm) דָּם 스트롱번호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דָּמָם 스트롱번호 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참고 정보

연관 단어
☞ 피(창 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피는 생명이다(창 9:4).
 따라서 피흘림은 생명의 허비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죽음의 천사가 다시 죽음의 피가 발려 있는 집을 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속의 피이다.
즉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가죽을 만들기위해 잡은 짐승의 피로 예표되었듯이(창 3:21), 장차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건질 수 있음을 뚜렷이 계시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다(요 6:54. 엡 1:7. 벧전 1:1)

떡(레헴) לְחֶם 스트롱번호 3900

1. 음식.  2. 연회. 3. 떡.
발음 [ lechem ]
어원 /  남[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3898. 먹다. 싸우다. (라함)  לָחַם 스트롱번호 3898

1. 먹다.  2. 싸우다. 3. 니팔형 נִלְחַם
발음 [ lâcham ]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떡굽는자  אָפָה 스트롱번호 644

1. 요리하다. 2. 분사형 אֹפֶה로 쓰일 경우 ‘빵굽는 사람’의 뜻을 가짐.  3. 완성되다
발음 [ ’âphâh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바로의 탄일
- 이날은 하나님께서 꿈 해석의 성취를 위한 날로 이미 예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거대한 잔치와 함께 각종 죄수들이 왕의 특별사면을 받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例)는 신약 시대 헤롯의 생일에 침례 요한이 처형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마 14:6-11).


지오바니 파피니 (희생적 사랑)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기독교도로서 교회를 몹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또 한번 허벅지 살을 베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들 파피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피맺힌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 에미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으니, 아들아, 너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이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지오바니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
이탈리아의 소설가 및 평론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수다한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1903-1907), <보체>(1908-1914), <라첼바>(1913-1915)의 여러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 및 철학자)의 프래그머티즘이나 베르그송(프랑스의 철학자, 1859-1941)의 직관주의를 도입하여 금세기 전반(前半)에 있어서 문예사상계의 주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양의 철학자>(1906)나 <24의 뇌수(腦髓)>(1912) 등은 이 시기의 주저이다.

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1912)를 발표하고 난 후부터는 이상주의로 기울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상계의 퇴폐상을 목도하고는 거꾸로 유신론으로 쏠려, 청년시절에 그렇게 매도(罵倒)하던 (神)을 인정하고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전(傳)>(1921), <성 아우구스티누스>(1930)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감각 마비라는 기병(奇病)에 걸렸으면서도 두뇌만은 명석의 도를 더하여 <불행한 자의 행복>을 구술(口述)로 발표하였다.







06-02-2024
3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신약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그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왜 그 작은 떡을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주셨을까?
과연 작은 떡덩어리가 그렇게 많은 군중들을 위하여 배부르도록 먹을만큼 나눠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그 떡은 입으로 들어가서 굶주린 배를 배부르게 하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많은 무리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이 곧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나눠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오늘 성찬의 자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생명의 양식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음료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까?
살과 피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살에 못을 박히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춤을 추며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 고운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서 백성들에게 그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왜 금송아지를 불에 태웠는가?
이 과정은 순금으로 제련하는 것으로 순금가루를 물에 풀었을 때 그 물이 금색이 아니라 붉은색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장차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죄 사함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맛ㄹ 물이 없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잔은 용서를
떡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2024년 상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함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떡을 함께 먹고 마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령한 에너지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6:58b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만찬에 대하여 (I)

마태복음 26장 26-28절 26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2-25, 눅22:14-20, 요13:21-30)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르게 성만찬을 기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만찬의 "유례"는 출애굽기 12장 첫 유월절/무교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2장 8-11절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시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마26:19-20)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신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실 것과 피를 흘려주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유월절 양은 먼 훗날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셨던 떡과 포도주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것을 미리 증거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먹는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니어야 하며, 마시는 포도주 또한 육신의 포도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떡"에 관련된 말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5-12절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셨을 때 그제야 제자들은 육신의 떡이 아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예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인지 우리는 꼭 그 뜻을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3-4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위의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리신 상태였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라는 것을 마귀는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떡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아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한 놀라운 기적입니다(요6:9-13).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는 이 큰 기적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25-27절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위의 말씀과 같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육신의 떡을 위해 찾는 것임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양식에는 "썩는 육신의 양식"과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있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이 썩어질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적을 통해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요6:35)을 먹고자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그것에 만족되지 못했을 때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68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을 먹으라 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어처구니 없게도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자 중 여럿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떡(양식)을 먹여주실 때는 큰 무리가 따랐지만, 정작 영생하는 예수님의 살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 할 때는 다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위해 오신 분이지 우리의 육신의 것 때문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눅12:13-14).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믿음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때문에, 그 말씀 먹기를 사모하여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을 때, 이는 육신의 떡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누룩이 섞이지 않는(출12:15)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7-8절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예수님의 말씀, 벧전2:1-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을 때에는 자신의 생각은 없어야 합니다(고후10:5). 예수님께서 자신의 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여 유월절 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것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의 생각과 지혜, 세상의 이론적인 것들을 버리고, 순전한 어린 아이와 같이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아멘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덧붙여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또한 성만찬 때에만 행할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날마다 행해야 할 일입니다.

성만찬에 대하여 (II)

"포도주(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피로 비유로 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는 우리로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시는 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유례가 되는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에서도 "피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넘어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피에 죄사할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죄인이었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피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양의 피로 대신케 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출애굽기 24장 8절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서 9장 18-22절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위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흘려주신 피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피를 우리의 문설주에 발라야 하고, 다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자는 살 것이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가 죄를 속함 같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죄를 속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는 곧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행전 10장 43절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우리가 예수의 피가 예수의 이름임을 알게 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는 것과 예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기 위해, 예수의 피를 마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을 위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2:4).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운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싸움입니다(눅9:23-24, 눅14:25-35, 빌3:7-8).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3:17)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장 7-8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문설주에 피를 바름과 같이 우리의 전면에 예수의 이름을 내세울 때에, 그 이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요일2:12, 롬4:6-8), 그 예수의 이름 때문에 심판을 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겔20:8-9,13-14,21-22, 계14:1, 계20:4-6). 혹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삶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셨고, 앞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41절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후에 우리가 당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겠다고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피를 받아 마시는 자(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로마서 8장 17-18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결론의 글.

성만찬을 지키고자 할 때에 의식과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만찬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 때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으로 깨달음 받고 그것을 기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만찬에 대하여 성경으로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도 쉽게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서 아래와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34)절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위의 말씀은 성만찬의 예식이 어떻게 빨리 변질되었는가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여주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단지 성만찬의 의식과 형식만이 남았을 뿐이고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모임은 유익이 되는 모임이 아니라 해로운 모임이라고 규정하셨고, 이처럼 유익이 되지 못하는 모임은 결국 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1:12-1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도 성만찬에는 참석하였지만 오히려 사단이 들어 곧 나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요13:21-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구약의 율법을 따라 대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지키려고 하였지만, 정작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고, 누룩 섞이지 않고 순전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만찬의 형식과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 금은보다 승하게 여기며(시119:69-70),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약4:10, 골3:17)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서 성만찬은 반드시 대대로 기념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아멘!




어머니 뱃속에서 겪은 역경…“자라면서 정신 건강에 영향 미친다”


산모가 역경을 겪으면, 그 영향이 태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어머니가 역경을 겪으면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함께 역경을 겪은 태아는 태어난 뒤 인지장애나 우울증 등을 겪을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임상과학연구소(SICS)는 어머니가 임신 기간 중 생활이나 환경, 신체적 어려움을 겪으면 아이에게 장기적으로 인지와 정신 건강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최근 밝혔다.
아이들의 뇌가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 속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멘탈 헬스’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태아가 겪는 역경(ELA)’을 정량화하기 위해 항목별 ELA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채점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임신 중 산모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가족 구조와 재정 상황 등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팀은 아이들의 뇌 발달 속도를 모델링하기 위해 4.5세, 6세, 7.5세 아이들 549명을 대상으로 MRI 뇌 스캔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정신 건강장애가 아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 궤적을 추적하는 연구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면 그 체험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11-05-2023
11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성찬예식은 언약의 완성을 위한 예식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특징을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신약의 언약의 특징은 믿음 언약이라고 합니다.

행위 언약에는 노아 언약(무지개), 아브라함 언약(할례), 모세 언약(십계명), 다윗 언약(영원한 왕위 계승)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행위 언약은 완전히 실패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로 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언약의 완성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내려 놓으신 사건입니다.
자기 몸을 내려놓기 전에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려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받는 떡과 잔은 언약의 완성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죄인이 언약의 완성된 예식에 따라 그 떡과 그 잔을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11월 한 달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몸길이는 대체로 50mm-60mm로 황강달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주로 물이 맑은 하천 중류 기수구역이나 2급수 또는 물풀이 많은 곳에서 살며 새우나 작은 수서생물,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국내에선 강원도경상북도의 일부 및 제천시의림지 등에 분포하며, 북한 중국 일본 등에도 존재한다.
먹을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식용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희박하다.

대부분의 다른 어류들과는 다르게 가시고기는 알을 보살핀다.
수컷이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수초로 둥지를 만들어 놓으면 암컷이 와서 교미한 후 알을 낳고 죽거나 떠나 버린다.
그리고 수컷은 알을 보호하다가 새끼가 부화하면 죽고, 태어난 새끼들은 죽은 수컷의 살을 뜯어먹는다.
수컷은 자기 몸까지도 새끼의 먹이로 내준다.
이 습성은 알을 낳은 이후로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 여타 어류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특이한 습성이며, 부성애를 강조할 때마다 인용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09-03-2023
9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Then he took the cup, gave thanks and offered it to them, saying, "Drink from it, all of you.

장로교회의 예전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교회 헌법으로 이렇게 규정하였지만 성경은 이런 규정보다 더 폭넓은 성찬의 참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예식의 자리에 가룟 유다가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유다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도 성찬의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All of you(너희 모두 다)

이것을 다(아우투 판테스) / αυτου παντες

846.
αὐτός, ἡ, ὁ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 12:36 /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 예수
발음 / 아우토스[ autŏs ]
어원 / [재귀] αὖ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로) 그(마 1:20).
신약 성경 / 5601회 사용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1. 매
2. 모든 종류의
3. 어떤 것이든지다
발음 / 파스[ pas ]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 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떡과 잔은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같은 죄인도 떡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문제는 그 떡과 잔이 정말 나의 죄를 용서하는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 넘길 흑심을 품은 도둑같은 사람들이 먹고 마신 후에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참된 성찬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08-06-2023
8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1. 생각나는 것,  2. 기념,  3. 기억
발음 / 아남네시스[ anamnēsis ]
어원 / 3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눅 22:19, 고전 11:24, 25), 생각하게 하는 것(히 10:3).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63. 아나밈네스코(ἀναμιμνήσκω)
 
1. ~에게 ~을 기억나게 하다,  2. 기억하다
발음 / 아나밈네스코[ anamimnēskō ]
어원 / 미래 ἀναμνήσω,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μνήσθην, 303과 34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되다(막 14:72), 생각나다(막 11:21, 고전 4:17), 생각하다(고후 7:15, 히 10:32), 생각 나게 하다(고전 4:17).
신약 성경 / 6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의 젖과 어린 기름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가복음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축복하시고(율로게오) - 찬양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축원한다.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 εὐχαριστέω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15:36, 막8:6, 행27:35), 감사 기도하다(마26:27, 눅22:19), 감사하다(눅 18:11, 요11:41, 고전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07-02-2023
7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개역 개정 호세아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알지 못하도다 / 로 야드(לֹא יָדְעָ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
빵은 생명을 상징

북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호세아(여호와는 구원)는 무너지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을 바알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주신 것인지도 알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성찬예식의 기쁨과 생명을 알지 못하고 참여하는 신앙의 형식만 남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도다" "로 야드" 라고 합니다.
'로'는 부정 접두사
'야드'는 '알다'는 동사
머리로 알고 마음과 감정으로 느끼는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생명과 기쁨이 흘러다니는 것을 체험해서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스라엘이 연애하는 자들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5절) 이 품목들은 백성들의 생필품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상이나 이방 국가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이다(신 7:13; 11:14).
이스라엘의 죄악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었다.
이처럼 축복의 근원자에 대한 무지는 결국 감사치 않는 죄와 은혜를 남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J.Given).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

-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풍성은 상업을 통하여 은과 금을 증대시켰다.
이 은과 금 역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축복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알을 위해 죄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바알을 위하여 쓴'(아스랍바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제출되었다.

1. 바알의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J.Phillips).
그러나 이것은 전치사 '레'(...을 위하여)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2. 바알에게 바쳤다는 견해(Gesenius, Leeser).

3. 바알을 꾸미거나 입히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사 30:22, Harper).

4. 바알을 경배하는 일에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견해(Given, Keil).

이 가운데 3. 4의 견해가 가장 적합하게 보인다.
즉 이스라엘은 은과 금을 신상을 장식하거나(렘 10:4), 우상을 숭배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한 것이다(13절, 겔 16:18,19).
대부분의 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지지한다(prepared for Baal, KJV;used for Baal, NIV, RSV;used in worshiping Baal, LB).
한편 본절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가나안 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모든 거짓 신들을 대표하고 있다(L.Wood, Keil).
사실 예후는 일찍이 바알을 따르는 제사장들과 그 우상들을 전멸시켰었다(왕하 10:19-28).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지속되었다(왕하 10:29).

더하여 준 것이어늘

- 더하여 준 것이라는 동사 '다가'는 '늘리다', '증가시키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을 나타내준다.






06-04-2023
6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Because there is one loaf,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for we all partake of the one loaf.

참에한다는 헬라 단어는 "코이노이아"라고 합니다.
'코이노이아'란 "교제" 라는 뜻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먼저 성도들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제란 내가 보여주기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보여주기 싫은 것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이혼한 교인이 이혼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때 주위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으로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매월 첫번째 주일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면서 아직도 성도의 교제가 진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축복하는 2127. 축복하는(유로게오. 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발음 / 유로게오[ ĕulŏgĕō ]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 (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축복의 2129. 축복의(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152 4952*,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 골 1:18).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클리브랜드 인디언스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은 한국의 추신수 선수가 한 때 있었던 팀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에 마이크 아빌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아드리아나마야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항상 아빠의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딸 중 하나인 아드리아나가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아빌스는 그 때부터 어린 딸 생각에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아빌스는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아빌스가 너무 부진하자 구단주와 면담을 하였는데, 이 때 아빌스는 자신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아빌스의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은 아빌스와 그의 딸 아드리아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2015년 5월 27일 아빌스가 소속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경기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 모든 관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삭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소속의 구단 관계자들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삭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백혈병에 걸려서 치료 중에 모든 머리가 다 빠진 아드리아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삭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응원하는 의미로 아드리아나를 위하는 팀이라는 뜻의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를 티셔츠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원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고, 8월에는 경기 전에 아빠와 함께 모든 관중들 앞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구단 관계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팀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하나 된 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를 또한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영적인 진리를 믿는 성도들이 야구 선수들과 구단의 관계자들보다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니까?




    04-02-2023
    4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개역 개정)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니라.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물이 저온의 물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

    죄가 없다는 사람과
    죄가 많다는 사람 중에 떡과 잔의 효과는 죄가 많다는 사람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음펨바 효과라는 현상 자체는 상당히 옛날부터 알려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상을 "어떤 극단적인 성질일수록 그 상반되는 성질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티페리스타시스(antiperistasis)라는 법칙의 예로 보았다.

    예를 들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더 빨리 차분해지는 것.
    근대에 들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르네 데카르트 등이 이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역시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 이론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역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설명이지만, 이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두자. 문헌을 접근할 때에는 항상 시대적 환경 또는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서양에서 후대에 그의 설명이 절대화된 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까이는 사례가 정말 많다.

    이렇게 잠깐잠깐 언급되다가 잊히기를 반복하던 현상을 현대 물리학의 난제로 되살려 놓은 사람이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Mpemba)[2]라는 학생이었다. 음펨바는 1963년 중학교 가정과 조리실습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덜 식은 채로 냉장고에 집어넣은 아이스크림이 식혀서 집어넣은 것보다 더 빨리 어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음펨바는 학교에 강연을 온 물리학자 데니스 오스본(Dr. Denis G. Osborne)[3]에게 이 현상에 대해 질문했는데, 교사와 친구들은 이에 대해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냐' 라면서 비웃었지만 오스본은 음펨바의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해 봤으며, 그 결과 실제로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오스본은 1969년에 이 현상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며 이 현상을 '음펨바 효과' 라 명명하고,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음펨바의 이름을 올렸다. 한편 음펨바는 졸업 이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아프리카 삼림 및 야생동물위원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2023년 수능특강 영어에 장문독해 지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1학년의 영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개역 한글)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떡과 잔을 직접 나눠주신다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찢겨지신 몸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고난주간 한 주일 동안 나를 통하여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결단의 삶을 함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 49:11, 신 32:14)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3. 하이마(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 [ haima ]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02-05-2023
    2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 축복하시고(2127) 유로게오(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사례하시고(2168)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의 자리를 향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사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떡과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제자들은 떡과 잔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떡을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몸을 던져 로마 권력과 싸워서 피를 흘려 반드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거리감과 더구나 영적인 거리감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 머리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과 감격의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 손에 있는 떡과 잔에 하늘로부터 주의 영이 임하여 거룩한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다함께 떡을 먹습니다.
    이어서 다함께 잔을 들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생명의 영이 저희들에게 임하여 주셔서
    떡과 잔이 저희들의 몸 안에 들어갈 때
    부활의 영이 함께 임하여
    새 생명의 삶을
    능력의 삶을
    회복하는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1-01-2023
    1월 성찬예식 / 이호승목사 

    누가복음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기념하라
    - 킹 제임스 성경 / 기억하라

    364.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Noun 생각나는 것, 기념, 기억 / remembrance

    기념(紀念)하다 : (사람이나 집단이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다.

    벼리기(
    ), 생각 념(염)()
    1. 뒤에 어떤 일을 상기(想起)할 근거(根據)로 삼음. 또는 그 물건(物件)
    2. 지난 일을 상기(想起)하여 기억(記憶)을 새롭게 함.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히브리서 10:3(생각하게 하는 것)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

      "기념하라"는 교훈은 잊지 않고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월 첫 주일 성찬예식에 참여하므로 1년 12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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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4-2022
      12월 성찬예식

      요한복음 6:53-55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예식은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른 후에 장자의 죽음이란 재앙에서 자유를 얻은 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은 예수님의 몸이 되는 떡과 예수님의 피가 되는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022년 마지막 성찬주일을 지키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이 온전히 회복되어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 재앙에서 모두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과 잔은 코비드와 독감의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실 주님의 몸과 피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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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6-2022
      11월 성찬예식


      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세계성찬주일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피지섬의 교회에서 시작해 24시간 동안 일출 시각을 기준으로 전 인류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마치 파도타기처럼 성찬상이 세계를 도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이며, 수십 억명의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성찬주일의 시작은 아픔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평화의 역사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인류가 슬픔과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례 없는 대공황이 몰아닥쳤고,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손잡고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소수 교회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평화와 풍요를 염원하며 세계성찬주일을 제안했습니다.
      1940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킬 것을 제안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이어지고 냉전이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는 이 시대, 다시금 성찬상의 세계 일주를 통한 평화의 실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10-04-2022
      10월 성찬예식

      초대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는 교제의 의미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브리드교회(Hybrid Church)
      - hy·brid  / 1. 잡종,  2. 혼성체



      2022. 07. 03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내 몸(소마) 4983 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소마(sōma)
      어원 / 4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 15:37, 38, 40), 종(계 18:13)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소조(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소조(sōzō)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피(하이마) αἷμα. 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haima)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cf. 육체(사르크스).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4563. 사로오오(σαρόω)

      1. 쓰다,  2. 개끗하게 쓰다,  3. 마태 12:44

      발음 / 사로오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오장육부(五臟六腑)란 한의학에서 인간의 내장 전체를 통틀어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가리킨다.


      오장에 심포(心包)를 더해 '육장'이라고도 한다.

      육부」는 대장, 소장, 위장, 담낭, 방광, 삼초를 가리킨다

      2022. 06. 05 /

      성찬예식에 대한 믿음은 형식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떡과 잔을 받아 먹을 때에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찬,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표징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백성이고, 새생명 얻은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있지만,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견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 떡과 그 잔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또한 영적인 양식


      성찬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아, 견고하고도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들을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성경 공부할 때 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시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성례”

      말씀은 우리가 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성찬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에 우리 지성과 마음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고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Institution 14. 8. p.345)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단순히 우리 지식만 동원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의 손과 눈과 미각만 동원된다면 우리에게 은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추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면, 그 말씀과 성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 안토니오의 결단 / 수도사의 아버지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한 교훈과  "항상 기도하라" 고 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2. 05. 01 / 어린이주일

      2022냔 어린이주일을 맞아 파트리스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4명의 어린이들을 소개합니다.
      이현호, 은미 테일러, 유미 테일러, 김태오
      세상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공동체에 속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20불 지폐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돈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돈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을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 어린이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린 아이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그 공동체가 분명히 미세한 파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수부대 훈련병들이 공중 낙하 훈련을 위해 처음으로 타워에 올라갈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의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타워의 바닥은 10미터 그 위에 훈련병이 서게 되면 바로 그 높이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을 무려 300회 이상 반복하면 아무리 높은 고공에서 뛰어내릴지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11미터의 높이와 1000미터 이상의 높이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라 이미 최고의 높이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십일조 훈련을 잘 하면 반드시 성인이 되어서도 물질 관리를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것
      둘째는 깨닫는 것
      셋째는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자기 중심적" 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어른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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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은 왜 몸이고 포도주는 피인가…동전 양면같은 예수의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 18절)

      40)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걸까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 인물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가룟 유다 뿐만이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한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복음 26장 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 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시라고 했을까.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 ‘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 ‘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 뿌리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어느 신학도가 본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브랜트 피트리(Brant Pitre) 교수의 “Jesus and the Jewish Roots of the Eucharist: Unlocking the Secrets of the Last Supper” 라는 책이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2016년 7월 에클레이시아북스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만찬이 1세기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각 단락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 신학(history of redemption theology) 내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의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요구되지만, 저자는 그런 장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매력 발산으로 허물어뜨린다.



      제1장 마지막 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LAST SUPPER)

      저자는 예수는 역사적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1세기 유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유대교 율법을 위반하는 말 곧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충격 선언 또한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들이 1세기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속에 주어졌다는 해석의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시공간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해석학적 작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2장 유대민족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나?(WHAT WERE THE JEWISH PEOPLE WAITING FOR?)

      저자는 유대 성경과 고대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대다수 “1세기 유대민족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즉 새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대했다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새 모세로 인해(신 18:15-18; 참고. 3, 4세기 랍비 베레키아[Rabbi Berekiah, Ecclesiastes])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기를 소망했다(렘 31:31-33). 이 언약의 절정은 천상의 연회이며(출 24:11), 거기서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는 천상의 식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Babylonian Talmud, Berakoth 17a).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고(미 4:1-2; 사 56:6-7 ;60:1-7; 겔 37:24-28 ;학2:6-9, 참고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 하나님은 그 곳에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장차 올 세상”)의 일부일 약속된 미래의 땅(사 65:17-18; 66:18, 20, 22)으로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사 43:18-19; 계21:5). 그리고 저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 출애굽의 사상이 광범위 하게 펴져 있었고(드다, 이집트인 / Josephus, Antiquties 20:97-98; Josephus, Antiquties 20:169-170), 예수님은 “새 출애굽의 징조인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의 신호이며(사 35:5-10, 참고. 마 11:4-6; 눅 4:18-19), 구원을 전하는 메시아 전령”임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새 출애굽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분이다(눅 9:28-31).



      3장 새 유월절(THE NEW PASSOVER)

      저자는 위의 “새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새 유월절도 함께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열쇠이며 이를 위해 유월절의 성경적 뿌리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고대 유대교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 수컷”을 취해(출 12:1-6), “제물로” 드려(출 12:6), 그 “피를 이스라엘 각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으며(출 12:7), 그 후 “어린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출 12:8-12). 유월절은 매년 ‘기념일’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출 12:24-28).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 당시 유월절의 모습은 고대 유대교 유월절의 모습과의 차이점 네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전에 의해 드려졌다(신 16:5-7, 참고. Josephus, War 6:423-27). 둘째 1세기 유월절 어린 양은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것을 현재화했다(출13:8, 참고. Mishanah, Pesahim 10:5). 넷째,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메시아 시대 도래, 구원의 시대와 연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고, 그가 자기 백성을 속량할 것이다. 즉 메시아의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Jerome, Commentary on Matthew 4 on 25:6).

      유대교의 믿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밤에 시행했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했다(마 26:17-19; 막 14:12; 눅 22:14-15). 이 식사에서 떡의 의미를 설명하고(출 12:26-27, Mishnah, Pesahim 10:5), 마지막은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대할렐[Great Hallel], 시편 118편, 마 26:30, 막 14:26) 마무리했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달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집행자 역할을 하셨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바로 새 출애굽의 새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오늘이 메시아의 유월절이며 내가 새 제물”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의 완성은 첫 출애굽의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새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이다.



      4장 메시아의 만나(THE MANNA OF THE MESSIAH)

      저자는 성만찬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열쇠로 만나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다. 구약성경을 통해 만나의 다양한 의미를 언급하는데 만나는 “하늘에서 온 기적의 떡”(출 16:4-5, 11-15, 참고. 시 78:23-25, 29; 솔로몬의 지혜서 16:20-21)이며, 이중의 기적(하늘에서 온 떡과 하늘에서 온 고기, 출 16:12) 선물이었다. ‘거룩한 성막’에 두고 보존하며 그것을 ‘보게’ 하였고(출 16:32-34),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맛보기(출3 :8)였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새 출애굽을 개시할 메시아를 보낼 때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경 밖의 고대 유대교 문헌의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은 만나가 태초로부터 존재했다(만나의 선재,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4,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15). 하늘 성전안에 영원히 보관되어 있으며(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새 모세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 그쳤던 만나가 다시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2Baruch 29:3, 6-8).

      이러한 유대인의 소망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생명의 떡 담화(요 6:53-55)의 배경은 ‘새 모세의 도래’ 와 ‘하늘에서 온 만나의 재개’ 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된다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찬 전례에 자신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을 하늘에서 온 만나와 동일시한다고 한다. 출애굽의 옛 만나가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었다면 메시아의 만나 또한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즉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를 제시한다(요 6:61-64). 예수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의 형태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신적 정체성(막 2:5-10; 마 10:22-33)과 신적 권능이란 신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6:55).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날 그 분 몸의 부활과 승천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성찬 전례에서 먹으라고 한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생명의 영으로 ‘부활한 나의 육체’인 것이다(요 6:53-55). 저자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지닌 ‘생명’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분의 몸과 그 분의 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늘에서 온 새 만나와 예수님의 부활한 몸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예수께서 그 분의 피를 마시라는 놀라운 명령이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5장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

      저자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새 유월절’과 ‘하늘에서 온 새 만나’ 로 보셨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의 메시아적 성취로도 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진설병(“Showbread”)을 금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출 25:23-24, 29-30), 그 옆에 관제(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음료 제사)를 붓기 위한 ‘병과 잔’이 있었기에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부르며, 이것은 신성한 식사로서 붓는 것이 아니라 마셔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진설병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호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증표이고(레24:5-8), 성막에서 여호와 앞에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영구한’ 제사이다. 중요한 것은 진설병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제물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제물로써 안식일 마다 드려져야 했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진설병은 멜기세덱이 드렸던 ‘태고의 제물’이고(Genesis Rabbah 43:6), 예수님 당시에는 진설병이 제물로 ‘금상 위에 드려질 때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믿었다고 한다(Babylonian Talmud, Yoma 39a). 그리고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유대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있는 진설병을 외부로 가져 나와서 높이 쳐들고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외쳤다(Babylonia Talmud, Menahoth 29a).

      이것은 진설병이 영원한 언약의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였다.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누리게 된다(출 34:23; 23:17).

      이런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새 진설병을 연결시킨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 논쟁(마 12:1-6)에서 레위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아닌, 멜기세덱과 다윗(시 110: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또 다른 계보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새 성전이며 그 성전안에 현존하는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이해했고, 중요한 것은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 새 유월절을 넘어 - 예수님께서 새롭게 현존하는 떡과 포도주 즉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떡을 제정하는 행위이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현존의 신비는 그 분의 신적 권위와 신적 정체성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신적 아들이라면, 그 분이 제정하는 새 언약의 새 떡과 새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기적의 떡이 된다고 한다.



      6장 네번째 잔과 예수님의 죽음(THE FOURTH CUP AND THE DEATH OF JESUS)

      저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과 갈보리 십자가 처형 사건의 관계를 살핀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는 평범한 유대교 유월절 식사 형태와 유사하게,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루어졌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 직후 마셔야 할 네 번 째 잔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와 마태와 마가 모두 네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는 의식 언급이 부재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실제로는 마무리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는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잔을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다(마 26:36-46). 조금 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새 유월절의 제물로, 포도주 잔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성만찬 제정 말씀과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신 것이다. 식사가 종료되고 마지막 잔을 마시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끝내신 이유이다. 그 후 네번째 잔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직전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마실 음료를 직접 요청하셨고 건네 받은 신 포도주를 마셨고 후에 “다 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을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 마시기를 기다리심으로써 마지막 만찬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하나로 묶으셨다.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준 행위를 갈보리에서 자신을 드린 행위와 연결하신 것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유월절로 변화시켰고 십자가를 통해 마지막 만찬을 제사로 변화시켰다고 하며, 마지막 만찬과 십자가 처형 사건을 유대교 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 두 사건을 단일한 제사로 이해했음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7장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THE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

      저자는 예수님의 성만찬의 유대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재언급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유대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새 출애굽과 메시아의 새 유월절의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만찬은 그것들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어린 양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살 즉 성육신하신 신적인 말씀의 살을 먹으며 파스카 유월절을 지켰다.

      저자는 유대교 유월절과 기독교 성만찬 사이의 연관성은 『카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의 가르침에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성취될 새 유월절을 예상하셨고(CCC 1339-1340), 유대교 유월절의 세 번째 잔과 마지막 만찬의 잔, 겟세마네의 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신 잔 사이의 연관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CCC1334)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사도적 전통 그리고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새 만나’로 설명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를 넘어 ‘기적’ 또는 초자연적인 식사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요6; 고전 10:1-3, 16; 계 2:17)과 초기 교회의 교부의 글(Tyconius,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2:17, 어거스틴 요한복음 주석 “Tractate on John, 26:13) 역시 성만찬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는 고대의 기적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CCC1094)도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특정 내용 즉 새 출애굽, 새 유월절, 만나의 기적을 가리키는 신호만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신호로 보셨다고 한다. 실제 예수님은 그 떡을 자신의 개인적 현존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떡은 단순한 현존의 떡 정도가 아니라 얼굴의 떡 즉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얼굴’이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증표이다. 이러한 신비한 현존의 떡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마 12:1-8; 막 2:23-28, 눅 6:1-5; 히 9:1-3)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다(Origen, on Leviticus 13; Saint Cyril, Catechumens(그리스도인 세례 예비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성만찬의 신비를 예수님의 진정한 현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CCC1374-75). 예수님의 성만찬이(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만찬이) 단순한 증표가 아닌 기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카톨릭교회는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떡을 들어올림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메시야의 얼굴을 묵상하게 한다.

      출애굽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성막과 나중의 성전에 현존의 떡을 보관했듯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 떡을 보관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성만찬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던 내용을 다시 진술했을 뿐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와 함께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지 정수”(CCC1324)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8장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EMMAUS)

      저자는 성만찬과 육체적 부활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유대교 소망의 성취이며, 예수께서 성만찬을 - 십자가에서 죽을 그의 육체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몸과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만찬 때의 명령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눅24:13-24).

      또한 떡을 뗀 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들 곁에 현존하는 방식 즉 승귀 후 더 이상 인간의 외양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오직 성만찬의 떡의 모습으로만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원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귀하신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에서 세상의 제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부어주심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한다.



      글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마지막 만찬의 신비한 말씀이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 하며, 그것을 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적 계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어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저자는 메시아 예수께서 새 유월절의 어린 양,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만나, 성전안에 드려질 신비한 진설병 등유대인의 예배 신앙과 미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마지막 만찬의 신비를 심오하면서도 간명하게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고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세기 유대교와 예수의 부활 승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 –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자는 본문 뒤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습과 세계관을 드러내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적, 신학적 학습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 또한 배가시킨다.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제의적인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메시아적 사역 특히 영원한 언약의 피흘림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약속과 성취라는 성경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을 연속적으로 이어가지만, 종속되거나 제한받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고 확장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교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가 갈보리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유대교 유월절 제사의 완성이며 동시에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유대교 유월절을 회상하는데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출애굽의 시작을 보여주고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네번째 잔의 미완의 모습을 겟네마네 기도(마26:36-46) – 몰약의 포도주를 거부하신 예수님(마27:31-36; 막15:23) – 신포도주를 마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완성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에게 엄지척을 치켜 세우고 싶다.

      이러한 저자의 학자적 열정과 통찰력은 성만찬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를 캐내어 보여줌으로써 피상적이며 편협한 성만찬 이해를 성찰하게 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예전의식에 취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임재하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고 누리라며 초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13-22p), 자신은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찬 전례에 “예수의 실제적 현존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저자는 ‘화체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현존”, “기적”, “예수의 신적 정체성” 그리고 포도주 보다는 “떡”(몸)에 집중하여 설명함으로 ‘화체설’ 로 본서의 결론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성만찬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성만찬 제정 본문의 “이것은 내 몸이다(tou'tov ejstin to; sw'mav mou)” 에서 “…….이다(ejstin, is)”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1]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주석가들은 떡과 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또는 “이것은 내 몸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2] 그의 학문적 작업은 논리적이며 타당성 있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고수하고 있는 개혁적이며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적 입장과 필자 자신의 일천한 신학적 지식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본서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유대적 뿌리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기에 성만찬의 신학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성만찬을 통해 그의 한 몸에 참여하고 연합되는 사실(고전 6:12-17; 엡 1:22-23; 4:15-16; 5:23; 골 1:18; 빌 1:20), 두번째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함께 선교적 또는 복음전파적인 측면도 함께 언급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데 있다(고전 11:6).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 질 궁극적 승리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영생 향유를 확인시켜 주며, 더 이상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지 않고 안주하게 만드는 개인적 ‘정신 승리’의 방편이 아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은혜는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 사이의 긴장속에서 ‘많은 사람’을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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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놀랜드는 존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333에서 예수의 말씀들은 아람어로 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아람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성만찬 제정 본문에 대한 가장 원래적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330-40을 참고하라.

      [2] 크레이그 에반스, 『WBC성경주석: 마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1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Vincent Taylor, Jesus and His Sacrifice - A Study of the Passion Saying in the Gospels, (Oxford: Whitaker Press, 2007), 122을 참고하라.

      출처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http://www.woolrimsto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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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3월 6일 성찬예식

      매월 첫 주일은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2, 3, 4, 5주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합니다.

      온라인예배, 온라인 성찬의 의미가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정립 될 것을 기대합니다.

      3월의 성찬 주제는 신앙의 봄을 맞이하자!

      계절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누구가 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 옷을 벗어야 합니다.
      겨울 옷이란 두텁고 무겁고 둔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하여 함께 모이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겨울이 길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봄날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입고 있는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까?
      바람과 햇빛이 서로 내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바람이 더 세게 강하게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외투속에서 움크리고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햇빛이 더 따뜻하고 강한 빛으로 나그네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길을 걷던 나그네는 외투의 단추를 풀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그려집니다.

      신앙의 봄을 맞이하려면 강한 햇빛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찬의 떡은 아주 따뜻한 예수님의 온기가 되어 내 안에서 다정하고 훈훈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의 잔은 몸속으로 흐르는 뜨거운 진한 피가 되어 내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성찬은 나로 하여금 훈훈한 생명의 언어를 회복하여 3월을 봄맞이 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람있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찬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가장 중요 한 핵심축이다.
      이 성찬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 문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성찬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부분들을 살펴보고, 팬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 에서 온라인 성찬이 가능함을 밝힌다.

      첫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공동체성과 현장성에 관련된 문제

      공동체성과 현장성은 공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데,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이해를 통해서 온라인 성찬의 가능 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에도 응급환자 또는 임종 환자들을 위하여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찬에식을 간략하게 실행하기도 한다.

      둘째, 회중의 수동적 참여

      온라인 성찬이라고 청중을 수동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온라인 성찬에서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참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통해서 오히려 회중의 적극적 참여를 강화할 수 있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화상회의를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기에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넓게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셋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거부감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하여 온라인 성찬에 참여시키므로 신앙의 긍지를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성찬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초기 온전한 식사 형태를 가졌던 성찬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시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제들만의 예식으로 변질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성찬의 의미가 되살아나지만, 여전히 성찬은 개신교에서 중심위치를 설교에 내주었다.

      이렇듯 성찬 형식의 변화 가능성은 온라인 성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론 중세와 같은 잘못된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올바른 성찬 신학이 요구된다.
      기술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변화의 시대에 변화를 올바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올바른 신학적 해답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적절한 방향 제시되어야 한 다.
      과거의 관점에 매여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핵심가 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주님이 명령하신 성찬을 계속해서 그리고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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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토스(ἄρτος)는 유교병인가 무교병인가?

      며칠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사용된 떡/빵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떡/빵이라는 단어를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ἄζυμος) 를 사용하지 않고 “유교병”을 뜻하는 ‘아르토스’ (ἄρτος) 를 사용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글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거의 없지만, 이미 오래전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통해 신빙성이 없는 주장임이 이미 밝혀졌고, 고 하워드 마샬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아르토스’는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로서 “무교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편에 서 있다.

      1.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깨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이것은 그가 모세 오경에서 정한 명절들을 깨실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드셨다면, 그는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명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어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성향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정하신 명절을 지키셨다.

      2. 만약 주님이 마지막 만찬에 드신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 어디에도 빵에 대한 질문과 해명이 없다. 사도행전이나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서신에서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또한 어떤 분의 주장대로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새언약을 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이 고의적으로 유월절에 사용된 빵이 유교병이라고 적고 싶었다면, 그들은 ‘아르토스’ (ἄρτος)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교병”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를 사용했을 것이다.

      3. 공관복음을 보건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걸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혹시 율법을 어기는지 철저히 지켜보았고, 그가 조금이라도 어겼다고 생각했을 당시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죽이고자 작정까지 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고,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었다면, 과연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물론, 유월절 만찬과 그 만찬 중에 행하신 새언약을 뜻하는 주님의 만찬의식은 구분해야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한 유월절 만찬과 새언약의 의식에서 사용된 음식의 내용에 한해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동일한 것으로 봐야하는데, 이에 대해 아래에서 서서히 설명을 하기로 한다.

      4. 바벨론 탈무드에 기록된 미쉬나에 의하면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형벌의 대상에는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으며, “유월절에 유교병을 먹은 자”는 채찍의 형벌을 받게 되어있다 (마이클 L. 로드킨슨 번역, 9권, Tract Maccoth, ch. 3, p. 35). 따라서 3번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도들이 유월절에 무교병이 아닌 유교병을 먹었다면, 그 사건이 공관복음이 쓰여진 후에 밝혀졌더라도, 그들은 유대교의 법아래서 매우 엄한 형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어겨 형벌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5. 요세푸스와 필로

      5.1 어떤 분은 요세푸스와 필로를 근거로 한 ‘아르토스’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쉽게 일축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1.1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 3) 에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열두 개의 누룩이 없는 빵” (αρτους τε δωδεκα αζυμους, 아르투스 테 도데카 아쥐무스) 이 어떻게 놓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142 단락). 그는 이 “빵들” (아르투스) 위에 향을 담은 두개의 컵이 놓여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 빵” 곧 ‘아르투스 아쥐무스’ (αρτους αζυμους)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아르토스’의 주격 복수형태인 ‘아르토이’ (αρτοι) 를 ‘아쥐모스’ 없이 홀로 사용하고 있다 (143 단락). 또한 이 “열두개의 빵” (레 24:5: δωδεκα αρτου, 도데카 아르투) 에 대해 “누룩이 없이 구운 곡물” (σιτος οπτος ζυμης αμοιρος, 씨토스 옵토스 쥐메스 아모이로스)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55 단락).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1.2 필로는 “특별법에 관하여” (De Specialibus Legibus 2.156-161) 에서 무교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158 단락에서 “그러나 발효되지 않은 빵은” (ο δ’ αρτος αζυμος)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빵”을 뜻하는 ‘호 아르토스’ (ο αρτος) 를 설명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을 뜻하는 단어는 형용사 ‘아주모스’ (αζυμος) 이다.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문맥에 따라 혹은 형용사에 따라 “무교병” 또는 “유교병”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누룩이 들어간”을 뜻하는 ‘주메’가 함께 사용될 때에만 “유교병”을 의미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아주모스’가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무교병”을 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로는 같은 158 단락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반죽 덩어리” (τα φυραματα του σταιτος αζυμα) 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반죽”을 뜻하는 ‘투 스타이토스’ (του σταιτος) 자체는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 ‘아쥐마’ (αζυμ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무교반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타이스’ (σταις) 나 ‘아르토스’는 꼭 누룩이 들어간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5.1.3 요세푸스와 필로의 ‘아르토스’에 대한 설명은 1세기 유대교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6. 70인 역에서의 ‘아르토스’

      6.1 70인 역에서 ‘아르토스’는 유월절이나 무교병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 특히 ‘아쥐모스’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항상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를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할 때에는 ‘주미테스’/ ‘쥐미테스’ (ζυμιτης) 와 함께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레위기 7:13 (αρτοις ζυμιταις, 아르토이스 쥐미타이스) 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는 히브리 성경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서 홀로 사용되고 있는 ‘하메쯔’ (ץחמ) 를 번역한 것으로서, 이 역시 70인 역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쥐메와 하메쯔: 출 12:15; 13:3; 13:7; 23:18; 34:25; 신 16:3).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꼭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형용사 ‘주메’와 함께 사용되거나 혹은 문맥에 따라 “유교병”이나 “무교병”을 뜻하며 또한 모든 빵을 의미하는 공통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7. 구약에서의 진설병과 무교병

      7.1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 (לחם) 은 70인 역에서 ‘아르토스’ (αρτος) 로 번역하고 있다.

      7.2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마짜’ (מצּ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출 12:8, 15, 17, 18, 20, 39; 13:6, 7; 23:15; 29:23; 34:18; 레 8:2, 26; 23:6; 등…), ‘마짜’ (מצּה) 와 ‘레헴’ (לחם)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레헴’은 ‘마짜’와 달리 “유교병”만을 뜻한다는 주장이 틀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7.3 출애굽기 25:30에는 “진설병”을 ‘레헴’ (לחם)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이며, 이것을 “상 위에…두어”라고 하는데, 이는 상위에 진열하는 빵을 뜻하는 것으로서 문맥에 의해 “진설병”을 뜻한다.

      7.4 출애굽기 29:2 에서는 “누룩이 없는 떡” 혹은 “무교병”을 ‘레헴 마쫏’ (לחם מצות; lxx: αρτους αζυμους, 아르투스 아쥐무스) 으로 표현하는데,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레헴’과 “누룩이 없음”을 뜻하는 ‘마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레헴’은 ‘마짜’ 와 함께 사용하거나 또는 문맥에 의해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5 출애굽기 29:23 (히브리어 성경) 에서는 “빵” (לחם, 레헴) 한 덩어리와 기름 바른 “과자/빵”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무교병 (המצות, 하+마쫏) 광주리에서(מסל, 미+쌀)” 나온 것이다. 70인 역은 조금 다른데, 기름 바른 혹은 기름 섞은 “빵” (αρτον, 아르톤) 하나와 “납작하고 넓은 빵” (λαγανον, 라가논) 하나를 “무교병(τον αζυμων, 톤 아주몬) 광주리에서 (απο του κανου, 아포 투 카누)…”라고 되어있다.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은 바로 “무교병”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짜’ 나 헬라어 ‘아쥐모스’를 히브리어 ‘레헴’과 헬라어 ‘아르토스’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둘은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레헴’이나 ‘아르토스’가 ‘마짜’나 ‘아주모스’와 다른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로 “빵”을 뜻하며, 또 다시 언급하지만, 문맥에 따라 “유교병”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본문에서의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무교병”이다. 왜냐하면, 무교병 광주리에는 유교병을 넣어 둘 수 없으며 오직 무교병만을 담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7.6 레위기 8:26 역시 출애굽기 29:23 과 같은 내용으로서, 여기서 “무교병 광주리에서”는 ‘마쌀 하마쫏’ (מסל המצות) 이며, 이 광주리에서 “무교병 (המצּ, 마짜) 한개”와 “기름 섞은 떡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꺼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레헴’과 ‘전병’을 뜻하는 ‘라킥’은 “무교병 광주리에서” 나온 “무교병”이다. 더 중요한것은 바로 70인 역에서는 “무교병”혹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을 ‘아르토스…아쥐모스’ (αρτος…αζυμος) 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올리브기름과 섞은 빵” 을 ‘아르토스 에크 엘라이온’ (αρτος εκ ελαιον) 그리고 “진병”을 ‘라가논’ (λαγανον) 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아르토스’와 ‘라가논’에는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 역시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것으로서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스’는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7 레위기 7:12에서는 화목제물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기름과 섞은 구멍 난 무교병”은 ‘레헴’이 아닌 ‘할롯 마쫏’ (חלות מצות) 이며; 기름 바른 “무교전병” 혹은 “누룩 없는 전병”은 ‘롸키키 마쫏’ (רקיקי מצות) 이며;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 전병”은 “누룩 없는”이라는 단어 없이 홀로 사용된, “구멍 난 빵”을 뜻하는 ‘할롯’ (חלות) 인데,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만 섞은 것으로서 이 또한 “무교병”이다.

      70인 역을 보면 “고운 가루에 올리브기름을 섞어 만든 빵” (ἄρτους ἐκ σεμιδάλεως ἀναπεποιημένους ἐν ἐλαίῳ) 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빵” 곧 히브리어로 “무교병”을 뜻하는 ‘마쫏’ (מצות) 은 ‘아르토스’ (αρτος)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이는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또 70인 역의 내용상 누룩이 들어가지 않고 다만 “올리브기름”이 들어갔다는 것 역시 ‘아르토스’는 “무교병”임을 뜻한다. “올리브기름을 뿌린/바른 무교전병” (λάγανα ἄζυμα διακεχρισμένα ἐν ἐλαίῳ) 에서 “무교전병”은 “전병”을 뜻하는 ‘라가나’와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마’인데, 누룩이 없는 전병에 기름을 바른 것이며; “올리브기름을 섞어 반죽한 고운 밀가루” (σεμίδαλιν πεφυραμένην ἐν ἐλαίῳ) 역시 누룩을 섞지 않고 올리브기름만을 섞은 밀가루 반죽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이 모든 것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것들로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의미한다.

      7.8 신명기 16:3 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교병”은 ‘레헴’이 아니라 ‘하메츠’ (חמץ; lxx: ζύμην, 주멘/쥐멘) 이며;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먹으라”에서는 무교병은 ‘마쫏’ (מצות; lxx: αζυμα, 아주마/아쥐마) 이며, 고난의 떡은 “고난”을 뜻하는 ‘야니’ (עני; lxx: κακώσεως) 와 “빵”을 뜻하는 ‘레헴’ (לחם; lxx: ἄρτον) 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레헴’은 ‘아르토스’이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마짜’ 그리고 헬라어로는 ‘아주모스’로 불리는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9 역대상 23:29 에서 사용된 “진설병”은 “진열된” (המערכת, 하마아레캇; lxx: τῆς προθέσεως, 테스 프로테세오스) “빵” (לחם, ‘레헴’; lxx: ἄρτους, 아르투스) 이다. 이 “진설병”은 “누룩이 없는” (המצות, 하마쫏; lxx: τὰ ἄζυμα, 타 아쥐마) “전병” (רקיק; 라킥; lxx: τὰ λάγανα, 타 라가나) 과 함께 진열되어있는데, “무교전병”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진설병” (레헴, 아르토스) 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 (아쥐모스) 임이 확실하다.

      8. 이제는 복음에서의 ‘아르토스’사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8.1 마태복음 12:4 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τοὺς ἄρτους τῆς προθέσεως, 투스 아르투스 테스 프로테세오스) 라고 부르고 있고, 히브리서 9:2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ἡ πρόθεσις τῶν ἄρτων, 헤 프로테시스 톤 아르톤) 라고 부르고 있는데, 진설병 (לחם) 은 무교병이다 (출 25:30; 29:2; 35: 13 (לחם הפנים); 레 24:5-9; 역하 2:4 (מערכת)). 따라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8.2 마태복음 26:17-26. 17절을 보면 무교절 (των αζυμων, 톤 아쥐몬) 첫날과 유월절 (το πασχα, 토 파스카) 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φαγειν το πασχα, 파게인 토 파스카) 위해서 이다. 이 유월절 음식은 율법에 의하면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절대로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 18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을…지키겠다” (ποιω το πασχα, 포이오 토 파스카)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의식을 따라 행하시겠다는 것인데, 율법을 따르시겠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의 규율대로 유월절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깨는 행위이다. 따라서 만약에 26절에서 사용된 ‘아르토스’ (αρτον, 아르톤) 가 “유교병”이라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식을 먹은 것이며,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유월절 곧 율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새언약을 뜻하는 의식 곧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8.3 마가복음 14:12-25 에서 마가는 유월절 저녁식사에 대하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유교절 식사는 무교절 첫날과 겹치고 있다. 12절에서 “무교절 첫날은” ‘테 프로테 헤메라 톤 아쥐몬’ (τῇ πρώτῃ ἡμέρᾳ τῶν ἀζύμων) 이다. 그러나 유교절 양과 유교절 식사는 모두 “유월절”을 뜻하는 ‘토 파스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양”과 “식사”로 번역이 가능한 이유는 ‘토 파스카’와 함께 사용한 동사 때문인데, 첫째는 “희생했다” 혹은 “제사했다”를 뜻하는 ‘에튀온’ (εθυον) 을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가 “유월절 양”임을 뜻하며, 둘째는 “먹을 수 있게” 를 뜻하는 ‘파게스’ (φάγῃς)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준비하기를’ 뜻하는 부정과거 분사인 ‘헤토이마소멘’ (ἑτοιμάσωμεν) 과 접속사 ‘히나’ (ἵνα)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그 준비의 목적과 결과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14절에서도 역시 ‘토 파스카’를 “내가 먹기 위해”를 뜻하는 ‘파고’ (φαγω)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식사이다. 따라서 22절에서 26절에 기록된 새언약 의식은 유월절 식사로 드시던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8.4 누가복음 22:7-29. 7절에서도 마가복음과 다르지 않게 “무교절 날”은 ‘헤 헤메라 톤 아쥐몬’ (ἡ ἡμέρα των αζυμων) 으로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다. 여기서 “유월절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단순히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 (τὸ πάσχα) 이다. 그러나 “잡는” 혹은 “죽이는”을 뜻하는 ‘투에스타이’ (θυεσθαι)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양”을 뜻한다. 8절에서는, 이날이 다가와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월절 음식” 이라는 단어 역시 “음식”을 뜻하는 단어가 없이 ‘토 파스카’ (τὸ πασχα) 를 홀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우리가 먹을 수 있게”를 뜻하는 ‘파고멘’ (φαγωμεν) 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음식” 혹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특히 ‘파고멘’은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 (ἵν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특히 앞에 “준비하라”를 뜻하는 부정과거 명령어인 ‘헤토이마사테’ (ἑτοιμασατε) 를 따름으로서 유월절 음식을 꼭 드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7절과 8절에서 사용된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르토스’ 역시 이러한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유월절” (τὸ πασχα, 토 파스카) 을 “준비하였다” (ἡτοιμασαν)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인데, 무교병을 구하지 않았거나 구하지 못했다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시는데, 여기서도 “유월절”은 ‘토 파스카’로서 “먹기를”을 뜻하는 ‘파게인’ (φαγειν) 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 곧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문맥 속에서 (특히 구약에서의 ‘레헴’과 아르토스’의 사용과 이곳에서 ‘토 파스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둘 때), 19절에서 예수님이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빵” (αρτον, 아르톤) 은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으로 봐야한다. 또한,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유교병이라면,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의식을 깬 것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이 먹은 것은 유월절 음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셨다.

      8.5 마태복음 26:17-26과 누가복음 22:7-20에서의 유월절은 칠일동안 행해지는 “무교절”과 겹쳐졌는데, 무교절에 대해 출애굽기 12:15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명하고 있으며,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고 무서운 저주를 함께하고 있다. 출애굽기 12:19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시는데,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날을 지킬지니라”라고 명하신다. 출애굽기 13:7절에는 무교절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신명기 16:4에서는 유월절에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두 명절이 겹침으로서 이방인이 거하는 곳이 아니면 유교병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며, 오히려 무교병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러 오신 분으로서 무교절과 유월절에 대한 강령을 어기셨을 리가 없다. 따라서 눅 22:15에서의 ‘아르토스’가 “유교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8.6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음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유월절 의식에서 사용한 무교병이며, 무교절과 유월절이라는 두 중요한 명절이 겹친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모든 누룩을 제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그 규례를 범했을 때 따르는 심한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식은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으로 행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8.7 요한복음 6:31에서는 만나(מן) 를 ‘아르토스’로 부르고 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31에 의하면 “납작한 떡/과자 과/와 같다” (כצפיחת, 커짜피힛) 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아르토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특정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8.8 정리를 하자면, 유월절 식사에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를 드시면서 행하신 주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빵 곧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9. 이제는 바울 서신에서의 ‘아르토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9.1 고린도전서 5:7-8은 깨끗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하신 새 언약이라면서, 이것을 근거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개역개정)

      9.1.1 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 언약이 아니다. 5:7에 “너희는 분명히 누룩이 없는 자들인데” 혹은 “너희가 누룩이 없는자들인것 처럼” (καθώς ἐστε ἄζυμοι, 카토스 에스테 아쥐모스)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는 복수형이다. 그러나 그 후에 따르는 (원문에는 앞에 온)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ἵνα ἦτε νέον φύραμα) 에서 “새로운 덩어리” (νέον φύραμα, 네온 퓌라마) 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서 개개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빵 덩어리 전체 혹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예수님의 한 몸인 교회를 가르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를 뜻하는 ‘히나 에테’ (ἵνα ἦτε, ‘히나 에테’) 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 ‘에테’와 접속사 ‘히나’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그 목적과 결과는 바로 “새로운 덩어리” 곧 정결한 교회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개개인으로서 “누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인데, 교회가 하나의“오래된 (παλαιὰν, 팔라이온: 단수형) “누룩 (τὴν ζύμην, 텐 쥐멘: 단수형)” 곧 오랫동안 음행을 저지른 사람으로 용납함으로서 부정해졌다는 것인데, 그 오래된 누룩 곧 오랫동안 음행을 해온 자를 쫒아내어, 하나의 빵 덩어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전체가 누룩 곧 죄로 오염되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누룩”이 들어간 유교 병을 뜻하는가? 같지 않다.

      9.1.2 7절 하반 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비유하는데, 여기에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고, 다만 “희생 당하셨다”를 뜻하는 ‘에투테’ (ἐτύθη)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 (το πασχα) 가 “양”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르토스’에 대한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으로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9.1.3 8절에서 “누룩”은 (ζύμῃ) 비유적으로 “악과 악의” (κακίας καὶ πονηρίας, 카키아스 카이 포네리아스) 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러한 “오래된 누룩” (ζύμῃ παλαιᾷ) 으로 명절을 지키지 말고 “순전함과 진실의 빵”으로 지키라는 것인데, “악과 악의”와 달리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지키라는 것 곧 교회로서 죄에 대해 순전하고 진실되라는 것이지, 어떤 이의 주장대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과 교체한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빵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ἀζύμοις, 아쥐모이스) 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보던지 아니면 만찬에 대한 설명으로 보던지 상관이 없다. 다만, 유월절에 사용해하고 있는 빵은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 그리고 만찬의식에서 사용하신 것이 “유교병”으로 가정한다면, 또 “유교병”이 ‘아르토스’라면, 바울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가 아닌 ‘아르토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것은 ‘아르토스’가 아닌 ‘아쥐모스’ 곧 “무교병”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무교병”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했기에 ‘아르토스’가 “유교병”이라는 주장은 성립시키기에 매우 어렵게 보인다.

      9.1.4 마지막으로, 이 두 구절에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ύμῃ) 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아르토스’가 무조건 누룩이 들어간 빵 곧 “유교병”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아르토스’를 이방인과 유대 기독인들이 “유교병”으로 이해했다면, 특히 이미 누룩이 없는 빵 곧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주모스’/‘아쥐모이스’ (ἀζύμοις) 를 사용한 상태에서 구태여 “누룩”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유교병”을 드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는 “유교병”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아르토스’는 더 폭이 넓게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이 아니라 “무교병”과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토스’가 “유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무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초대교회는 “무교병”이나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는 오히려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이해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9.2 고린도전서 11:23-25 에서 구체적으로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쥐모스’나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 바울은 그 단어를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을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이 “내가 주께로 부터 받은 것을”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에고 가르 파레라본 아포 투 키리우) 이라는 문구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주님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핍박하던 교회에서 혹은 다메섹 사건 후로 그 주위에 있는 교회에서 들은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 (παρέλαβον, 파레라본) 곧 그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르토스’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다. 어쨌건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한데로, 공관복음을 참조하자면, 바울이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고전 5:7-8에서 유월절이라는 상황에서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11:23 을 읽는 사람들이 ‘아르토스’를 유대교의 명절인 유월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교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 본문에서도 바울이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만찬이 유월절에 베푸신 만찬에 사용한 같은 음식으로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교회가 무교병을 가지고 혹은 유교병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임하던,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나 “유교병”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그 둘을 포함한 또는 문맥에 따라 그 둘 중 하나를 의미하는 ‘아르토스’를 고의적으로 홀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는것 같다.

      10. 위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뜻하지 않고, 만나, 그리고 무교병 등 여러 종류의 빵을 뜻하는,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유월절, 무교절, 진설병,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문맥에서는, ‘쥐메’와 함께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무교병”을 뜻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떡에는 가래떡, 시루떡, 막걸리가 들어간 떡, 맥주가 들어간 떡, 찹쌀떡, 보리떡, 쑥떡,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모두를 “떡”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새해에는 이 모든 떡 중 가래떡을 썬 떡으로 만든 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를 “썰은 가래떡국”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떡국”이라고 부름에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떡볶이”를 말하면, 그 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로 가느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것임을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경전체에서와 관련 있는 고대문서들을 분석해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몇 개의 본문에 매달려 사용된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것의 차이들을 극대화해서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늘의 교회는 고래의 의례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 반복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동시대 사회 문화적 상황 속의 상징체계의 이해와 발전된 소통 매체 및 수단의 활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최근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고민과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온라인 예배가 교회 공동체성을 지킬 수 있는가?

      현장에 ‘모인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여부가 예배의 정당성을 결정함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초연결 사회에서 교회들이 정보 기반 인터넷을 통해 말씀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일은 또 다른 탁월한 방식의 예배의 목적과 특성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예배자로 하여금 삶의 현장으로 깊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비대면 예배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성은 비슷한 삶의 환경을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구역 및 소그룹 단위 안에서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오프라인 교회가 복음을 위해 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일은 중요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의 면모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 제도가 과거와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는 교회의 공동체성 실현을 위한 방안의 양상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과 같은 급격하고 돌발적인 변화를 늘 예상되고 대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예배와 성찬 실행의, 뉴 노멀에 따른 복음 소통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다만 뉴 노멀 속에서도 예배와 성찬 본연의 의미들이 방해를 받거나 왜곡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배와 성찬 안에 담긴 구속사의 기억(아남네시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 본연의 정위(正位)를 잃지 않도록 가일 층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기독교 공동체는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목회데이타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응답한 개신교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성례전적 공동체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와 성찬을 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몸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와서 세례를 행함으로 교회가 어떻게 이를 행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기념하는 방식도 교회에 알려주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성례를 지키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적으로 성례를 행하며,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은총의 수단을 가르쳤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성례 공동체였다.
      철저한 세례 교육과 세례 예식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공고히 하였고, 연이은 성찬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됨을 말씀으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참여하여, 이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고백하도록 하였다.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성례전적 이해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설교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를 통해서 교회 존재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성례전적 이해 위에 교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코로나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는 성례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과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


      2022년 신년주일 성찬예식 / 1월 2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며 매월 첫째 주일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온라인 성찬예식보다는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복음적 신앙을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빵을 먹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낍니다.

      성찬예식을 통한 신앙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온라인 새벽기도회"라고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시간입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식사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의 자리가 성찬을 위한 신앙을 다짐해야 합니다.
      음식이 내 속에서 영양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영양을 공급받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기도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911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루(1)에 한 번(1) 오전 9시와 오후 9시 어느 시간이든지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에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불낙지교회를 위하여
      둘째는 내가 만들어야 할 초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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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2월 5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관점(觀點)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비슷한 단어 "견지(見地)"

      관점은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기 때문에 관점이 참 중요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거침없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삐에로 신부"이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했다.

      그의 비망록 중에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는데 삐에로 신부는 거기에 이런 경험담을 적어 놓았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청년은 자살 직전에 있었다.
      청년은 나에게 자살하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 파탄, 사회적 지위 등. 그러면서 결론을 맺었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대답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때부터 청년은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얼마 후 청년이 고백했다.
      “신부님이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풀었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2021년 마지막 성찬예식을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찬예식을 준비하며 성찬의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떡과 잔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저 교회는?
      그런데 이런 관점은 비판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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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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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면서 늘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들 중 하나가 "성찬예식" 이었다.
      오늘 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온라인 성찬예식을 갖고자 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은 요한복음 6:53-58 입니다.

      53.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그나티우스는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 피(54절)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 성찬예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성기호목사 성결교 신학대학 교수)

      성만찬의 성서적 기원

      흔히 성찬(聖餐, The Lord's Supper 또는 The Eucharist)이라고 부르는 성만찬(聖晩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最後의 晩餐)를 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성례(聖禮)이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7~20).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명령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는 기록은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나타난다.

      "또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므로 초대교회는 성만찬 예식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주의 만찬에 관한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고전 11:20~34) 떡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은 "이것을 행하라"(24, 25절)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주의 재림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4~26절).

      애찬(愛餐)과 성만찬(聖晩餐)

      성도의 수가 적었던 초대교회 초기에 행해지던 성만찬은 주로 저녁 때 행했다.
      애찬(愛餐, Agape, The Love Feast)이라고 부르는 친교 식사 형식으로 행해졌다.
      각자의 집에서 공동 식사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 오고 성도들이 사랑의 만찬(晩餐)을 함께 나누었다(고전 11:21).
      즉, 성만찬은 애찬의 형식으로 애찬에 포함되어 행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비해 온 음식의 수준이 달라 가난한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교회를 배부르게 먹고 취하는 곳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나타나자 사도 바울은 이를 경계하고 식사는 각자의 집에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22절).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150년 경에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어 성찬은 아침에 행하고 애찬은 저녁에 나누었다.
      그러나 4세기 말경부터는 교회에서 성만찬만 행하고, 애찬은 각 가정에서 사사로이 행하다가 차츰 애찬의 풍습이 사라졌다.

      성만찬 논쟁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Sacramentum baptismatis et eucharistiae)에 관한 최초의 조직신학적 진술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 즉 떡과 잔의 성질 및 이 두 요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점차로 발전하여 뚜렷한 구분을 보이고 있다. 실재설,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등이 그것이다.

      1. 실재설(實在說)

      성만찬의 요소들인 떡과 잔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靈知主義, The Gnosticism)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The incarnation)을 부정하며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 뿐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는데
      성만찬의 떡과 잔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고 한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강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였다(요일 4:1~3).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떡과 잔의 요소에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디다케(Didache 또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 Teachings of Twelve Disciples), 이그나티우스(Ignatius),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칼빈(John Calvin) 등의 주장인데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간주하지만 화체설(化體說)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디다케'는 성만찬을 영생을 위한 영적 양식이라 하였다(고전 10:3).

      이그나티우스는 요한복음 6장 32~51절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54절)는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저스틴은 성만찬의 떡과 잔은 인간이 되신 그리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말한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주의 살과 피로 양육된다"고 주장하며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에 로고스가 결합된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하는 화체설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2. 화체설(化體說)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예루살렘의 시릴은 성령께 부르짖음을 통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했고,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변화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가 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소화기관을 통해 흡수됨으로 우리를 사망의 독소로부터 해방한다고 했다.
      성상(聖像 Icon) 숭배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였던 754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거나 숭배하는 것을 배격한 결의 끝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인성의 상징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나타낸 다메섹의 요한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충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단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성체(聖體, The host, 라틴어로 hostia)"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요한의 주장은 니케아회의(787년)에서 채택되었다. 요한의 주장대로 사제의 기도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바꾼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속죄 희생의 제사(히 9:26)는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제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성별시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주 희생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화체설이 말하는 것처럼 성만찬의 두 요소 즉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그 변화의 기간은 얼마나 지속되는가 또 거룩한 떡을 어떻게 숭배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남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피를 멀리하라"(행 15:29)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어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식인종적인 야만의 혐오감을 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악인도 성찬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그 안에 거하게 되어야 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하신 약속대로(요 6:55, 56)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악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약속이 실제로 악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보아 악인이 떡과 포도주를 성만찬에서 먹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 모실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전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가 되었다고 하거나, 떡과 포도주에 일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섞였다고 하는 이론대로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시게 된다는 주장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3. 공재설(共在說)

      종교개혁자들은 성만찬의 희생설이나 화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루터와 칼빈은 성만찬설에서 그 견해가 동일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실재설을 주장하는 데 비하여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루터는 개혁초기에 "믿음으로만(sola fidei)"을 강조함에 비해 성만찬의 교리에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끝난 뒤 교회의 정통적 교리에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표명하게 될 때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며 중도의 입장에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함에 있어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인 옥캄(Ockham)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옥캄은 물질의 존재 양식에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물질이 그 자체의 점유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榮化)된 그리스도의 몸은 또 다른 물질인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함께 존재(存在)한다고 한다. 이는 사제(司祭)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편재(遍在, 아니 계신 곳이 없다)하신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라 떡과 포도주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요소들 속에(in), 그 요소들 밑에(under), 그 요소들과 함께(with the elements) 임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떡을 그 손에 드셨을 때 그의 몸도 떡의 요소와 함께 임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재가 축복이 되는 고로 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며 떡과 포도주에 함께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살과 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으므로 주어진다고 한다. 떡과 포도주는 "이것이 내 살이니라" 또는 "이것이 내 피니라"하는 식사(式辭)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은 구원은 커녕 도리어 정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루터의 공재설이 갖는 문제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일정한 장소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인성(人性)을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모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어디나 계시다고 하는 공재설은 우리의 보통 음식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임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고 성만찬의 떡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가 구분하는 일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4. 기념설(記念說)

      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는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거나,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깊은 신앙에 임재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몸이 실제로 성찬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 몸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고 말하며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며 회상하는 기념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또한 성만찬 참여자는 신앙 고백의 행위로서 이 성례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즉,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하신 `이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다"의 뜻임을 밝히며 `이니라'의 라틴어인 est가 `표시하다' 또는 `상징하다'라는 뜻의 sihnificatio와 같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성만찬설을 기념설 또는 상징설(象徵說)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성만찬의 떡을 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잔을 나눌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을 기념한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의식이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육체적 임재 대신 영적 임재를 주장하나 성만찬의 교리로부터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떡과 포도주를 상징 또는 기념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는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영적으로 이루어지며 구속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 드려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또는 sacred fellowship)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긴밀한 교제뿐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연합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거룩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주심같이 구원받은 신자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하고 헌신하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성만찬의 참여자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더욱 왕성하게 하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헌신 봉사 충성케 하는 거룩한 예식인 성만찬(Holy Communion)은 이단자(딛 3:10~11, 요이 1:10~11)와 뛰어난 죄인의 참여를 배격한다(고전 5:11~13, 살후 3:14~15).

      중생한 증거가 있는 이에게 세례를 주기 때문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 즉 세례인으로 성만찬에 참여케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를 분변치 못한 채 또는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례 교인들에게 그것도 자기를 살피고 회개한 다음에 거룩함으로 이 성례에 참여케 해야 할 것이다(고전 11:27~29).

      *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영적 임재라는 분명한 신앙을 갖고 떡과 잔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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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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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인, 서평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위원이 신간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성찬』 서평을 동홈페이지 서평란에 기고했다.
      정 위원은 저자 알렉산더 슈메만에 대해 "성공회 사제이지만 신학적 성향은 철저히 성경적 원리를 따른다.
      그의 온화한 예리함은 성공회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동시에 예전을 과도하게 무시하는 기존 개신교를 향한다. 그리고 진정한 성찬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2020년 비아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우리 아버지>는 장엄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하게 기이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진중하면서도 풍성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교향악 같다"고 평가했다.

      정 위원은 이어 "예배학의 신학의 경지에 끌어올린 그는 목회 실천학적으로만 보았던 예배에 깊이를 더함으로 기독교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모두 12장으로 구분하여 성찬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고 있지만 1장에서 전반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슈메만은 성찬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성회'와 '성찬' 그리고 '교회'가 세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리 또는 괴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예전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연합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는 것'(23쪽)이다. 슈메만은 바르지 못한 성찬 이해가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태동하였음을 환기시킨다. 스콜라주의 또는 스콜라적 신학은 '거룩한 모임과 성찬, 그리고 교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철저히 무시'(23쪽)함으로 성찬의 교회론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다시 성찬이 교회론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성찬의 측면들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 성찬'으로 소개한다. 아마도 스콜라적 신학은 현재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과 예전을 중시하는 정교회 전통한 비교하면서 후자의 성찬 의식이 갖는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 위원은 "정교회 사제이기도하는 슈메만은 처음 성찬이 가진 연합의 의미에서 벗이나 참여자의 제한과 영역의 축소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비잔틴식 예전 의식이 점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했고, 섬기는 자와 기도하는 자를 분리'(32쪽)시킴으로 성찬의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슈메만은 이 부분을 3장 입당의 성례에서 좀 더 깊고 예리하게 다룬다. 정교회 예식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저자의 용어들이 낯설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특히 "4장 말씀의 성례는 현대 한국교회 개신교 설교자들의 신경을 곧두세우고 읽어야한다. 슈메만은 성례로서의 말씀 즉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의 무능이나 빈약함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무엇일까?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고도 지적했다.

      "진정한 설교는 해박하고 유능한 신학 지식을 정확히 전달하는 복음서 본문에 대한 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본질은 복음서에 대한, 다시 말해 복음서의 한 주제에 대해 설명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선포다. 설교의 위기는 무엇보다 말씀 선포가 일종의 설교자 개인의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126쪽)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힘입어 정 위원은 설교의 위기가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사화 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 바, 설교의 사유화로 인해 교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설교가 '개인의 일'이 되자 교회는 급격하게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찬의 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교와 사제들이 받은 가르침의 은사는 개인의 은사가 아닌 '믿음과 사랑의 연합체인 교회의 것'(131쪽)이다. 슈메만은 7장 연합의 성례에서 교회 연합의 전제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삶의 근원이자 내용이며 목표'(218쪽)인 것이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연합하고 모인다. 연합과 모임은 분열과 분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627#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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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Table) - 하나님의 뜻 이해하기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가진수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Th.M.)과 미국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박사과정(D.Min.)을 마치고,
      플로리다 주 ‘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IWS)’에서 예배학박사(D.W.S.)과정을 공부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예배의 갱신과 영적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그는 현재 <글로벌 예배 컨퍼런스> <글로벌 예배 심포지엄> 등의 국내외 예배관련 세미나와 집회를 주관하고, 예배 매거진, 큐티, 예배도서 등을 발행하는 예배전문사역기관 ‘글로벌워십미니스트리(Global Worship Ministry)’의 대표다.

      그동안 신학교와 신학대학원, 국내외 지역교회, 예배자 학교 등에서 예배의 중요성과 다음세대를 예배로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해왔으며, 현재 미국 LA에 위치한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 석사과정(M. A. in Worship Studies)의 학과장이자 교수로 ‘현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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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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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 06-09-2021(수)


      원시 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어 하나님 대신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인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자가 그만 구원이 필요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특이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뱀에게 한 말입니다. 뱀은 사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가둬 두지를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상하게 하려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시는 부화사건을 통해, 겨우 발뒤꿈치만 상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부활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궁극의 무기인 죽음이라고 하는 무기가 깨지는 것 보아야 했습니다. 즉 머리가 으깨어져 버린 것이지요. 죽음으로도 어쩔 수없는 마귀는 이제 예수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형편없는 상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예수를 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 즉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최초의 구원 예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 할까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로 죄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은 남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남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대속 제사입니다. 다른 죄없는 생명체가 대신 죽음으로써 생명을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즉 죄를 없애는 방법은 바로 대속의 제사였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속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줄 제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대속 제물의 조건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럴 수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은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예표라고 부릅니다.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사람 제물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수 있는 구원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인간을 대표해서 죽어야 하므로 사람이어야 한다.

      2. 죄도 없고 허물도 없어야 하므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3. 죽음을 이겨야 한다. 즉, 그저 대신 죽는 것으론 부족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인간이 될 수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받아야 한다

      2. 죄가 없기 위해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죄는 남자를 통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자는 우선 남자의 몸을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없는 순결한 영혼이어야 했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했으므로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원자는 완벽하게 인간이면서, 또한 완벽하게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 믿음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우리가 모시는 구원자라네”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성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대속제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타락한 이후, 즉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벌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광경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판의 선언 속에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마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여기서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우리 구원을 인간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선언을 본다. 사람의 노력의 보태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를 본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어떤 장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원리는 역사속에 일관하게 나타난다. 신약의 구원 역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여실 때 믿게 되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의 구원은 마귀와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독을 마시듯이 자기 것이 되어버린 인생은 하나님이 마귀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서 구원이 성립되게 하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는 입장에 서있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곱 마귀의 역사를 대적해야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연합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구원이란 말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신분이 오직 주님을 따르는 신분으로 바꾸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에서 건짐 받는 초보적 부분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정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바로 이 3가지 절대적 요소를 골자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대적하는 용사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안다. 이 놀라운 원시복음의 골자가 내 속에 있는지를 살피자. 정말 내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 향해 나가고 있는가?



      원시복음(元始福音, Proto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박윤선 박사는
      (1) 사람과 마귀(계 12:9, 20:2)가 서로 원수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2) 사람이 마귀와 원수 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3) 여자 후손과 뱀 후손이 상호적대행위를 계속한다는 것,
      (4) 택한 백성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머리 상하게 함으로 성립된다는 네가지 중요 요소를 지적했다.

      여자 후손은 택한 백성 대표할 메시아가 나실 것을 가리킨다(사 7:14, 마 1:23, 갈 4:4).
      원시복음을 포함 에덴동산의 일을 기록한 창 1-3장은 구속사의 네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1. 창조적 은혜와 축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가운데, 생존환경에 적합한 지 구와 그 안에 동물·식물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 남녀로 디자인하여, 손수 빚어 만들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 번성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림,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을 주셔서 그것들을 누리며, 생명과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언약, 교제, 소통하시고, 순종과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살게하심은, 한마디로 창조적 축복의 은혜요, 감사 찬송 기쁨의 주제다(창 1:1-28, 2:15-17, 19, 23, 사 43:7, 21)

      2. 창조질서를 어긴 인간 범죄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받은 정체성, 축복을 누림을 받은 사명,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잊고, 아담은 한 몸된 아내 보호 돌봄 간수하는 남편 역할을, 하와는 한 몸된 남편 돕는 내조 배필로서 협의하는 아내역할 등한하고, 하나님을 언약 어기고, 하나님과 대화보다는 다스려야 할 뱀을 대화 상대로 자기와 동격에 두어, 하나님 말씀보다 뱀말에 귀 기울임으로, 뱀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시 1:1-2, 엡 4:27). 결국 하와는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으로 먹게 해서,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범죄했다. 그 죄 결과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온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롬 5:12).
       
      3.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창 2:17) :

      인간의 죄의식, 수치심, 핑계, 하나님 원망, 노고(勞苦), 죄성(罪性), 사망의 실존적 변화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저주받은 땅 경작, 하나님 한탄하신 죄악관영(貫盈)한 생의 정황 변질로, 하나님 관계, 인간 관계, 자연 관계의 훼손, 실존과 상황이 사람과 악한 사탄마귀의 영적 전투상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다(창 3:7-19, 22-24, 4:7, 6:5-6).

      4. 무조건적 은혜 원시복음(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뱀 후손과 여자 후손 적대 관계는 궁극적으로 여자 후손이 승리하나, 피흘림을 통해서다.
      피흘림은 수치(羞恥) 가림, 죄 씻음이다.
      여자 후손 피흘림으로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 죄씻음, 죄가려줌,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게 됨을 하나님 손수 실천해 보여 주셨다(창 3:21, 레 17:11, 힙 9:22).

      그러나 뱀 후손은 하나님 허락 하에 제한받는 힘으로 최후 심판때까지 여자 후손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절대의존 신앙과 그 열매인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다스림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창 4:7, 욥 1:6-12, 마 4:1-11, 눅 22:31-32, 힙 12:4).
      그래서 모이기를 힘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 힙 10:25),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무장을 취하라 한다.
      악한 사탄마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 두루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말씀과 성령 안에서 함께 더불어 기도 교제로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고, 마귀 물리친 다음 하나님을 의지 가까이함이 영전의 필승전법 이다(엡 6:10-20, 힙 4:12, 약 4:7-8, 벧전 5:7-8; 신 4:7, 시73:28, 145:18).

      원시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사 7:14)과 그 메시야의 피흘림(창 3:21, 4:4, 15:6-18, 9-14, 출 12:13, 24:1-8, 레 17:11, 사 53:4-6) 두 방면으로 예언되어 오던 것이, 신약의 때가 되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성취되었다(마 1:16, 23, 눅 1:34-35, 2:10-11, 요 4:25, 19:30, 갈 4:4, 31). 이 구원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 완성, 우리에게 적용된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 치심으로 중생 구속(救贖) 영생을 얻고, 하나님 자녀의 영, 권세, 명분받아 하나님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구속사는 에덴동산 실낙원에서 새하늘 새땅 복락원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사 나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나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내게 그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해야한다(요 1:12-13, 갈 4:4-7, 엡 1:4-14). 원시복음이 결국 내 구원 위함이라 믿어짐으로, 모세가 죽기전 이스라엘자손을 축복하고 불렀던 찬양을, 천국 갈 때까지 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단에게 내린 저주인 동시에,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원시복음’(Original Gospel)

      원시복음이란 최초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4복음서가 있듯이 구약에는 원시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시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를 멸한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사단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관계, 곧 적대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이 어떻게 영물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결국 사단을 이길, 여자의 후손은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시복음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나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또한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대로 처녀에서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 누구인가?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 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처녀가 낳아야 하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아담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나면 안됩니다. 왜요?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 아래 있고 그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분은 여자의 후손, 즉 처녀에게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인류를 대대로 묶고 있던 원죄와 상관없이 의롭고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한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단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단과 크게 세 번 싸우시는데 두 번은 이미 싸우셨고 한 번은 앞으로 싸우실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과의 싸움은 언제였는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싸움은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입니다. 십자가의 수난 당하심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질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하게 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 사단이 발꿈치를 상하게 함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창 3: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계략 가운데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을 뜻합니다. 실제 사단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역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예수를 부인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넣었고 거짓 증인들에게는 고소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줄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는 헤롯을 사주하여 2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3.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은 부활과 속죄를 말합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신체 기능면에서 크게 중요치 않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해를 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주 중요한 부위로써 한번 상하게 되면 거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단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단도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사단입니다. 우리의 사단과의 싸움은 이겨 논 싸움입니다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사단은 꼼짝 못합니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에 대한 악몽,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요,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다음 선포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피 흘리심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온갖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속죄를 이루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4.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원시복음은 수천 년 전의 메시아 예언의 약속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약속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드디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 ‘때가 찼다’는 것은 메시아를 보낼 적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성경의 나머지 모든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방금 전 말씀에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시복음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악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망의 음부에 당신의 아들을 사흘씩이나 가두어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열심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요. 하나님의 열심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루십니다. 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런 열심으로 찾을 것입니다.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사도바울에게 불붙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일에 열심이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써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바울에게 불붙은 하나님의 열심은 1세기에 소아시아와 유럽 전 대륙을 십자가로 물들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피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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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주일 설교 자료 / 내가 믿는 예수


      11-07-2024(목)

      플러싱 소셜 시큐리트 사무실에(Social Security Office) 2024년 소득 증명서(Award Letter)를 받으러 가려고 27번 버스를 타고 샌포드 에븐뉴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어제 밤에 인터넷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샌포드 에븐뉴 라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사무실이 없습니다.
      문제는 버스 정거장이 샌포드 에븐뉴이었지 사무실 주소는 바클레이 에븐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하여 지나가던 행인에게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다시 검색하며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살펴보니 사무실 주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에븐뉴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목적지 건물을 찾으니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손에는 분명하게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면 그 결과는 세월만 헛되게 보낸 것이 될 것입니다.

      1. 잘못 입력된 주소 / 바클레이 에븐뉴 - 샌포드 에븐뉴
      2. 손에 든 정확한 주소 / 다른 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리석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해야 합니다.
      갈증이 나면 물도 마셔야 합니다.
      화장실에도 가야 합니다.
      잠도 자야 합니다.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일까요?
      주일에 예배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하나님의 생각(thoughts)과 세상의 생각(thoughts)
      하나님의 길과(ways) 세상의 길(ways)

      * 생각(4284) 마흐솨바( machăshâbâh) מַחֲשָׁבָה     

      1. 명상.  2. 공교한 일
      발음 [ machăshâbâh ]
      어원  / 28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0회 사용
      • 1. 명사, 여성 명상, 숙고, 목적, 계획, 의도, 음모,책략, 삼하14:14, 욥5:12, 잠12:5, 15:22, 19:21, 20:18
      • 2. 명사, 여성 공교한 일, 기묘한 일, 출31:4, 35:33.

      •  관련 성경 /  생각(창6:5, 욥21:27, 사55:8), 방책(삼하14:14), 의도(대상28:9), 사상(시33:10), 심중(대상29:18), 양식(대하2:14), 꾀(에8:3, 렘18:18), 계교(욥5:12, 잠6:18), 경영(잠15:22), 계책(렘18:11, 49:30), 계획(렘49:20, 잠19:21),모략(단11:24,25), 뜻(미4:12), 정교한 일(출31:4, 35:33,35), 기술(출35:32), 고안(대하26:15), 경영하는 것(잠16:3), 모해함[하는 것](애3:60,61). [동] 꾀하다(에8:5, 렘11:19).

    • *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derek ]
      어원  / 186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 1. 명사 여행, 창30:36, 삿17:8, 왕상18:27, 왕상19:4, 잠7:19
      • 2. 명사 길, 통로.
        • a. 명사 [장소의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로향하는 길, 창3:24, 잠7:27, 겔8:5,21:2, 40:20, 41:11,12.
        • b. 명사 [인간의 소유격이 수반될 경우], 어떤 사람이 가고자 하는 길, 창19:2,32:2(1), 민20:17, 21:22, 24:25, 수2:16.
      • 3. 명사 방법, 방식, 과정.
        • a.명사 삶이나 행동의 방식, 길, 삼상18:14,왕상16:26, 22:43, 왕하22:2, 대하17:3, 21:12, 22:3, 시5:9(8), 27:11, 사8:11, 잠12:15.
        • b.명사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 종교, 시139:24, 암8:14.
        • c. 명사 운[수동적인 뜻] 욥3:23, 시37:5, 사10:24, 암2:7.
      • 관련 성경  /  길(창3:24, 삼상4:13, 겔48:1), 행위(창6: 12,삼상8:3, 왕상8:32), 도(창18:19, 신13:5, 시18:21), 도리(창19:31, 욥21:14), 생리(창31:35), 도중(왕하10:12), 도로(레26:22, 애1:4), 여행(민9:10, 수9:13), 행사(욥26:14), 중도(시102:23),때문(시107:17), 행실(잠8:13, 13:6), 소행(잠12:26, 호4:9), 바른 길(잠23:19, 사30:11), 옳은 길(말2:8), 자취(잠30:19), 사정(사40:27),행동(겔14:22,23), 풍속(겔20:30). [동] 향하다(겔20:46, 21:2, 40:6,22,46), 위하다(암8:14), 여행하다(수9:11), 가다(삿4:9), 행하다(잠14:2, 28:6), 본받다(사10:24).


      * 달라서(3808)  로( lô)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lôʼ ]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여호와의 생각과 길이 우리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의 의미는 바로 앞절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כִּי)가 있기 때문이다.

      * כִּי

      • 1. 왜냐하면, ~때문에(because) ~하는 것(that절) 진실로(indeed)


      말하자면 본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풍성히 용서하시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악인의 행실과 불의한 자의 생각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용서받을 악인이나 불의한 자의 상태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시 25:11; 롬 5:19).

      본절은 앞절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분명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 만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계획의 차이가 크다고 덧붙이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뒷받침된다 :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시 89:2).
      이상의 구절들이 취하고 있는 사상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의 눈에 용서받을 수 없어 보이는 자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왜?’라는 질문은 올무가 되어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계속 가둬놓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를 십자가에 영원히 못 박아야 한다고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지식을 가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투쟁에 대한 설명을 듣기 원한다. 물론 지식은 인생의 많은 일들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맡김’이 힘이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 

      (나에게 폭풍이 왔다, 잰 해리슨)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

      우리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는 틀린 생각을 하는 영적인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렇게 된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을 하면서 그들은 선악의 모든 기준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네들 중심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판단을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판단해주시는 판단대로  하나님이 이것 좋아 하면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하나님이 요것은 안 좋아 하면 안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로는 직접 내가 선악을 판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은 정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집을 지을 때에나 무엇을 건축할 때에 반드시 밑에서부터 짓습니다.
      바벨탑을 지을 때에도 보면은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때에나 방주를 지을 때에는 우리와는 반대로 위에서부터 짓습니다. 

      창세기 6:15-16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성막을 지을 때에도 먼저 성막 지붕을 먼저 짓고 나서 밑에 들어갈 널판지를 만듭니다.
      이와같이 순서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
      하나님의 생각의 구조와 우리의 생각의 구조는 하늘과 땅입니다. 

      할아버지와 소년이 말 한 마리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가신 날 밤, 말이 병이 들어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말의 열을 내려 주려고 밤을 세워가며 물을 먹이면서 애를 썼지만 말은 싸늘하게 죽어 갔습니다.
      시내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얘야, 말은 열이 날 때 절대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
      넌 네 방식대로 말을 치료한거야
      말을 치료하려면 네 방식이 아닌  말의 방식이어야 하는 거란다”

      소년은 밤을 세워가며 최선을 다하여 말을 돌보았지만 오히려 말에게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더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드슨테일러는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일이다”

      우리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고 뛰고 굴리고 야단법석을 떨고.... 그거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29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이 예루살렘교회에 임하므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이 노력해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간들이 만든 다른 종교도 다 밑에서부터 올라갑니다.

       20년 전에 시애틀에서 원불교 교무과장으로 일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52살 정도 되는데 포교승으로 최기숙이라고 하는 여자 스님이 한국에서 원광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애틀에 불교를 전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시애틀에서 어느 한국목사를 만나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듣다가 갑자기 성령께서 역사하여서 무릎을 꿇고 이 분이 눈물을 쪼르르 흘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이름을 최마리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이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 이분만큼 확실하게 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졸업논문을 쉽게 한줄로 얘기를 하는데  “기독교는 기쁨의 진리”입니다.
      불교는 가도 가도끝이 없는 어려운 철학입니다.”
      52년 믿었지만 어려운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 한순간 나에게 영생이 주어지고 죄 사함받고 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 기쁨이 지금도 나에게는 넘쳐서 그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감격 그 기쁨 예수 믿는 그 순간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52년 믿은 불교는 한 순간도 나에게 기쁨을 준적이 없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더 어려워지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로부터 이루어지므로 구원도 위로부터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만든 불교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수행은 아무리 해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반대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할 때  하나님의 방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줍니다.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서 일곱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서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번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고 나팔 소리를 길게 부를 바로 그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리고성을 향해 일제히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을 점령하고 함락시키게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거나 포위하거나 성에 맞설 다른 성벽 공성탑을 쌓던지 해야 할텐데...
      하나님의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니 내 방식대로 해야 되겠다..’
      그런데 우직하게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일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까?
      돈 많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하나님이 찾고 계신 사람은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보이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19-20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그 분이 하라는대로 따라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내가 선악을 판단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를 않고, 맥없이 툇자를 맞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상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은  그것은  응답을 받게 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가장 중대한 조건, 즉 완전한 순종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우리에게 나타날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그의 뜻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매사에 예수님 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즉각 즉각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데…
      당연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기도의 응답은 그 때까지 지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하나님께 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응답을 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을 지체하고 우리가 변화되어서 기꺼이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기도응답도 곧 우리에게 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 제사장이 늦게 오자 사울이 생각하기에는 적군은 쳐들어오지 병사들은 동요가 되어서 흩어지려고 하지…. 그래서 엣다 모르겠다 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직접 제사를 주관해서 드리는 겁니다.  

      이를 지켜본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를 하시고 결국은 왕위를 사울에게서부터 빼앗아서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데는 다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이 다 있습니다.
      다 합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키신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다음의 왕인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께 물어서 모든 것을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이 아니면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일려고 쫓아오는 사울왕을 오히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방법이 아니기에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며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죽였으면 그 때부터  고생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의 편안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심어 놓은 중심진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는 목적이 서로 다르고 원리도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권세나 탐욕이나 야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립니다. 

      세상은 우리더러 성공하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하라고
      세상은 경쟁하라고 하나님나라는 섬기라고
      세상은 자기 권리를 지키라고 하나님나라는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세상은 최상의 거래를 위하여 타협하라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세상은 탁월해지라고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세상은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하나님 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세상은 자기를 자랑하라고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세상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행합니다.
      세상은 복수하라고 하나님 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세상은 장기목표를 세우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보여주시는대로만 살면 된다고
      세상은 소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경건한 성품이 기쁨을 준다고
      세상은 섬김을 받으라고 하나님나라는 섬기라고
      이렇게 사사건건 우리의 사고 방식 그리고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틀립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우리의 본성도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과 공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렇게 묵상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게 됩니다. 
      묵상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들여서 내가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그것은 묵상의 목적이 아닙니다.
      묵상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해가 안 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게 되느냐를 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든지 성경을 통해서든지 듣든지 그렇게 성경을 보는 비율이 한 10%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듣는 자는 5%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그 5%깨닫는 사람 중에  몇 % 정도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실제로 땅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행해지므로 이루어지는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 중에 1%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옆에 있는 분들에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중에서 “꼭 천국에서 사는 것 같아요!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요! 너무나도 황홀해요!”라고  한다면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라는 책을 쓴 다하라 요네꼬양은  어머니의 죽음때문에 괴로워서 달려오는 열차에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오른쪽 손의 손가락 세 개만을 남기고 두 다리와 왼쪽팔이 절단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있는 동안 선교사를 지망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남편과 함께 자기의 삶을 간증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이제는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니까 전에는 사지가 멀쩡해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말씀대로 깨닫고 순종하니까 사는 것이 황홀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아서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부르짖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하면 
      용감하게 담대하게 아슬아슬하게 벼랑끝에서 허공에 한 발자국을 내 딛는 심정으로 눈 질끈 감고 한번도 걸어가보지 못한 곳으로 믿음으로 내 딛는 겁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아직 물은 강을 넘치게 흐르고 있었지만 믿음으로 눈 질끈 감고 법궤를 메고 건넌 것 처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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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첫째로,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양(6629) 촌(tsôʼn) צֹאן 스트롱번호 6629

      1. 집합명사로 떼.   2. 무리.  3. 창 4:2
      발음 [ tsôʼn ]
      어원  /  ‘이동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그릇행하여(8582)

      תָּעָה 스트롱번호 8582

      1. 동요하다.  2. 야자수가지. 3. 사 21:4
      발음 [ tâʽâh ]
      구약 성경  / 50회 사용



      각기(376)  אִישׁ 스트롱번호 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79회 사용



      담당시키다(6293)  פָּגַע 스트롱번호 6293

      1. 부딪다.   2. 적의를 품고 달려들다. 3. 촉구하다
      발음 [ pâgaʽ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새벽 묵상 중에(10-23-2024. 수요일)
      2025년을 준비하며 설교 계획을 생각하며 정리하기 시작하다.


      2025년 1월 5일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예수님을 영접하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 6. 19~1662. 8. 19).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불!(Fire!)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나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항상 내 마음에 담고 믿음으로 나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쁨을 누리며 확인하면서 예배 때마다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迎接)"이란 한자는 " 맞을 영(迎)", "이을 접(接)" 이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시다!

      영접이란 사전적 의미는 "손님을 맞아서 대접(待接)하는 일."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는 고백은 예수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귀한 이름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계시하여 지어주신 이름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 이름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예수는 나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그 이름의 증거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예수는 나의 왕이시다!

      왕이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말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나의 왕은 죄라고 것이었습니다.
      내 중심에 죄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를 죄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죄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셨습니까?

      나의 생명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건강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재능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물질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시간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되려면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모두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수입이 있습니다.
      내 모든 수입을 예수님께 양보하는 신앙이 헌금입니다.
      헌금 중에서도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이 물질을 양보하는 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수입이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나면 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당장 해결할 수 없으므로 나의 물질의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 모든 것을 바쳤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주님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를 잘 치는 피아니스트의 경우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도 주님이 주신 재능 곧 달란트라고 합니다.
      그 달란트를 예배 시간에 주님을 위하여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유명한 반주자를 사례금을 주고 모셔옵니다.
      이러한 사례가 마치 교회가 유명해지고 교회가 최고의 반주자를 모시고 있다는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바람직한 신앙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피아니스트 한동씨의 부친이 교향악단의 팀파니 연주자로 생업을 유지했습니다.
      주일에는 출석하는 교회에 지휘자로 섬기면서 일체 교회가 사례하는 것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교향악단에서 내 생계에 필요한 것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나의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섬기는 일에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시던 박태준집사님께서 남대문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섬길 때에 한번은 급한 전화가 당회장실로 걸려왔다고 합니다.
      당회장 목사님께서 급한 전화를 받으라고 연락하여 전화를 받고 오신 후에 주일 예배를 위하여 지휘자로서의 본분을 마치고 예배가 끝날 무렵 목사님의 축도가 있고 마지막 성가대의 송영을 마치자마자 급하게 가운을 벗은 후 연습은 부지휘자에게 맡기고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모두들 무슨 급한 일이 있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었습니다.
      박태준집사님이 급하게 달려간 곳은 세브란스병원입니다.
      병원에 사랑하는 딸이 위독하다며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뵙고 싶다며 어머님을 통하여 급하게 전화로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지휘자에게 연락을 했지만 예배를 마친 후에 급하게 병원으로 가셨지만 사랑하는 딸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집사님의 부인이 역정을 내며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가?
      그때 집사님께서 이렇게 위로했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딸은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주일 예배의 지휘는 물론 부지휘자가 할 수 있어도 내가맡은 직분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예배에 나는 실패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신앙의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고백이 아닐까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첫째는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철저하게 죄를 두려워하고 멀리합니다.

      신경초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신경초 잎사귀에 무엇이 닿기만 하면 앞사귀가 움츠러듭니다.
      죄가 나를 건드리면 온 몸이 움츠러들며 죄에 대하여 경계 태세를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기도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찬송합니다.
      봉사할 때에도 내가 드러나는 자리를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 김홍도 목사

      지난 번 미국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설교 준비하는 중에 오늘의 이 제목을 보고 제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당신 지금까지 말씀 중심의 건전한 목회를 해 왔는데 왜 목회 말년에 이단 소리를 들으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절대로 그 제목으로 설교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지마는,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중에 결코 성경말씀에 이탈된 내용이 아니며 나아가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신이 된다"는 뜻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박태선이나, 자기가 예수라고 하는 문선명이 말하는 의미의 '신'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영접하여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과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잃었던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신의 성품을 가진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이 말씀은 시편 82편 6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만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재판해야 될 재판장들이 불공평한 재판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드러지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작은 신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 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장 14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곧 영원한 생명이 되신 분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어느 집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 호적에 입적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아닌 개를 갖다가 양자를 삼아 호적에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라야 사람의 호적에 올릴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성을 받은 사람, 즉 작은 신이 되어야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의 후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장 22절) 하시며 그룹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다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가 되시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예수님과 같이 신성을 소유한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도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영영 떠나버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신성을 잃어버리고 짐승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생을 얻고 신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자녀,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1. 거듭나는 것은 작은 신으로 태어나는 것 (요한복음 3장 3-6절)

       

      "거듭난다" 혹은 "중생(重生)한다"는 것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셨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두 번 세 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이 자연 인간으로 모태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난 다음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며, 이 말씀은 제일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작은 신으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신의 성품을 받아 작은 신이 되는 것 (베드로후서 1장 4절)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한 말씀에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은 영어로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우리 인간이 신의 성품을 받아 영생하는 작은 신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신의 성품"(divine nature)을 받아들여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고욤나무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물을 잘 주며 가꾸어도 고욤나무 열매밖에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욤나무 가지를 잘라 내고 감나무를 가져다 접을 붙이면 줄기나 뿌리가 고욤나무라도 감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멸망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수양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그의 피를 흘려 우리에게 생명의 진액을 흘려주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생명과 신성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3.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작은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말씀하자 영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상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예수님만의 아버지, 예수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영생을 얻고 신성을 받아 작은 하나님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작은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이 맏아들이 되심은 우리가 작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곧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예수님과 같게 만드시려는 계획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도 작은 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확인한 다음에 고백한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을 주님과 하나님이 되신다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므로 독생자께서 맏아들이 되셨다고 하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즉 작은 신들로 만드셔서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사이 어미의 유전자(DNA)를 새끼의 세포에 접합시켜서 어미와 똑같이 양이나 소를 복제하는 기술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인간 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생명자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좌우간 인간도 똑같은 모습의 인간을 복제하는데 하나님께서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셔서 저를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X·DNA를 심령에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작은 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DNA인 X를 접합시키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5. 주의 재림 때 주와 같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작은 신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치 무정란과 병아리가 될 유정란이 겉으로 봐서는 분별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병아리로 부화되는 날, 분명히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라도 아직은 멸망의 자식들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받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던 성도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올라가듯이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들림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작은 신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당신은 반드시 작은 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해야 맞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멸망 받을 아담의 후손이 마지막 아담 예수님과 같은 신성을 가졌고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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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2일(주일)

      지난 주일 설교를 요약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 예수를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는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과 예수는 나의 주인, 나의 왕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었던 사례가 있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례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 신앙생활이 형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것 잘못한 것은 수정을 한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내가 믿는 예수
      -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도입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성장한 동네가 서소문동입니다.
      지금은 아주 번화가로 발전했지만 대법원 후문이 있고 교육청이 있고 한일 병원이 있는 동네입니다.
      당시에는 주유소가 있었고, 한일 병원은 경전 병원으로 운영하던 시절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묻습니다.
      "승혁아, 아버지 집에 계시니?"
      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에 예, 하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님이 "아이구 형님 웬일이십니까?" 하며 반가워 하시더니 제게 인사해라 큰 아버님이시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아무개는 주워 왔다!" 이렇게 놀렸습니다.
      자주 어른들이 주워 왔다고 하므로 제 어린 마음에 나도 주워온 아이인가?
      그런데 그 날 큰 아버님이 방문한 후에 확신하기를 나는 주워 온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아버님이 나를 보고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얼른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아야 합니다.
      닮지 않았을 때는 발가락이 닮았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모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으려면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합니다.
      즐거워 하는 방법으로는 읽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적용하는 것, 열매 맺는 것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기도의 범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의 기도에서 점점 더 그 범주를 넓혀 낯선 지역의 선교사들까지 확장시켜야 합니다.

      찬송은 영의 노래라고 합니다.
      내가 즐겨 부르는 찬송(18번)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김은신 권사님께서는 장례식에 부를 찬송을 일러주셨습니다.
      환송예배 시 : 427장(내가 매일 기쁘게), 292장(내 본향 가는 길)
      하관예배 시 : 293장(천국에서 만나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고 할 때 권세라는 헬라 단어의 용법이 중요합니다.
      권세를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권세(權勢)라는 헬라 단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에쿠시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어느 도로에서 교통경찰이 과속차량 및 위법 차량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교통 경찰은 아주 왜소합니다.
      커다란 트레일라가 경찰이 손으로 들고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면 즉각 가던 길에서 멈춥니다.
      힘으로 비교하면 경찰은 트레일러에게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일러가 멈추는 까닭은 교통경찰에게 부여된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레슬링 선수가 도로에 서서 손을 든다면 트레일러가 멈출까요?
      레슬링 선수가 교통 경찰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몸도 아주 좋지만 레슬링 선수의 손짓은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선포하면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 즉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은 깨끗하여 질지어다!"

      (도입 이야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인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과 금은 넘쳐날지라도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행 창고와 같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은행 창고가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충고를 들어야 한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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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19일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둘째. 구원의 광의(廣義) - 넓은 의미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η σωτηρια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불자들에게는 모든 경전을 다 읽을 수 없어도 경전을 읽은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불자들의 기도가 있다.
      그 기도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한다.
      다른 경전은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염불로 사용한다.

      기독교에서는 아주 간단한 기도가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지만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렵다.
      이러한 환경에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삼오신앙(三五信仰)이라고 합니다.
      삼이란 세 가지 이름을 뜻합니다.
      오란 다섯 글자로 이름이 갖는 함축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첫째는 예수(마태 1:21, 누가 1:31)
      -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둘째. 그리스도(마태 1:16) -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마태복음 1:16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셋째. 임마누엘(이사 7:14, 마태 1:23) - 예수 내 권세! Jesus is my Power!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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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피
      영원한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6-29, 히브리서 13:20-21)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피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보배로운 피"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24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니라.

      예수님의 피는 왜 보배로운 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만인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살아 있는 피요, 만인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마가복음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redemption)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의미를 구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5:24-25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구약에서 땅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위기 25:23-25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무를 것 - 리뎀션(redemption)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우리는 예수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을 것이 아니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슴에 새겨지지 않으면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가지고 양심에 역사하여 죄책감을 강하게 가지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가슴에 새겨져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죄가 너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더 이상 죄가 네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에게 한번 말해보세요~ (알아듣고 있는 겨?) 이 말은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죄가 네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죄가 네 인생을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게 끌려 다니면서, 그 죄가 우리 인생을 망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redeem
      1. 동사 (결함 등을) 보완[벌충/상쇄]하다 (=compensate for)
      2. 동사 (실수 등을) 만회하다
      3. 동사 (죄악으로부터) 구하다[구원하다]

      redemption
      1. 명사 격식 구원, 구함
      2. 명사 금융 (주식) 상환(相換)[현금화]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요한일서 1:7
      저가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원죄와 유전죄와 자범죄까지 완전히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마 26: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1:7).
      이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계 1:5).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는 죄에서 해방 받은 몸입니다.
      사망에서 영원하고 확실한 참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죄의 원수가 잡아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주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합니다(엡  2:13).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과거에 죄 지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앙고백하는 순간 다 씻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희고 깨끗하게 해주십니다(히 9:14, 계 7:14).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정결하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합니다(히 10:19-20).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공의로운 피를 믿고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는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피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기쁨, 어느 정도의 행복입니까?
      우리의 죄악을 기억치 않는 행복입니다(렘 31:34).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지웠습니다.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주의 등 뒤로 던졌습니다(사 38:17).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도말해 버렸습니다(사 44:22).
      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I, even I, am he who blots out your transgressions, for my own sake, and remembers your sins no more.

      도말(塗抹)이란 ‘완전히 빼버리다, 완전히 지워버리다’는 뜻입니다.
      도말이란 한자의 훈(訓)은 "칠할 도, 진흙 도(塗)", "지울 말(抹)"
      따라서 도말이란 진흙을 발라서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지워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피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신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0:20에서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악을 찾을찌라도 없겠고 유다의 를 찾을찌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이러한 복을 받았으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32:1
      허물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적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영원한 넉넉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영원한 피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구원입니다.
      교회의 근원입니다(행 20:28).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eep watch over yourselves and all the flock of which the Holy Spirit has made you overseers. 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which he bought with his own bloo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인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날마다 기쁨의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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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을 의미할까?

      대한성성공회 인터넷 검색 창을 사용하여 "예수의 피"라는 구절을 입력한 결과 성경 전체에서 두 개의 구절이 소개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합니다.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예수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피"라는 구절을 입력한 결과 네 개의 구절이 소개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 성찬예식 때 사용한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들을 가깝게 연결하여 친족이 되게 합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그리스도의 피는 화인 맞아 더러워진 양심으로 인하여 죽은 행실과 같은 죄악된 일에서 우리들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리스도의 피” 라는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완전한 속죄 사역을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피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수 세대를 거쳐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수한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피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속죄 수단이라는 사실은 모세 율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성전 제단에 동물들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그러나 이는 그 효과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피흘림이었기에 반복해서 드려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희생의 전조였습니다(히브리서 7:27).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Unlike the other high priests, he does not need to offer sacrifices day after day, first for his own sins, and then for the sins of the people. He sacrificed for their sins once for all when he offered himself.


      예수님의 희생이 드려진 후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건네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20).

      누가복음 22:20


      잔에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자들을 위해 흘려질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 동물들을 지속적으로 희생시켜야 했던 옛 언약의 요구는 폐하여졌습니다.
      동물들의 피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사람들의 죄를 덮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죄는 거룩하고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3).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But those sacrifices are an annual reminder of sins,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던 반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완전히 갚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19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히브리서 9:12) 완전한 구속 사역이 영원히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He did not enter by means of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he entered the Most Holy Place once for all by his own blood,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예수의 피를 모르면 안됩니다. 예수의 피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옛것과 새것에 대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의 피는 믿는 자들을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브리서 9:14).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ow much more, then,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unblemished to God, cleanse our consciences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so that we may serve the living God!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 쓸모 없는 (죽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치 없고 비생산적인 육신의 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피(Sanguis Christi.  Blood of Christ)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보혈(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11-22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성제 때 집전 사제의 축복 기도와 동시에 성령의 힘이 내려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이 깃들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로 실체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할 때에 빵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한 말에서 “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하게 “상징한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2세기의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35~110)는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나는 하느님의 빵을 갈망한다. 이 빵은 다윗 가문의 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나는 하느님의 음료를 원한다. 이 음료는 썩지 않는 사랑인 그분의 피다.”

      그리스도의 성혈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기점으로 발전하였는데, 하느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서 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 찬 생명의 샘의 은총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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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피가 약속한 은혜

      첫째, 언약의 피(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In the same way, after supper he took the cup,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do this, whenever you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칭의(稱義, 체데크 צדקה (tsedeq), 디카이오시스 δικαίωσις (dikaíōsis), justificatio, iustisia, justification, Rechtfertigung)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는(made or declared to be righteous)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의롭게 됨’ 또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음’을 뜻하며, 기독교 신학에서 속죄를 통해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과 동시에 죄인들이 의로워졌다고 선언받는 것이다.
      칭의를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의화(義化, 의롭게 되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에 의해 의로워진 행위, 과정, 상태이다.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결의 능력(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까워진 관계(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친밀(親密) / 친할 친(親), 빽빽할 밀(密)
      매우 친함, 썩 친(親)하여 사이가 버성기지 않음.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19-20)

      아버지
      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For God was pleased to have all his fullness dwell in him,
      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things on earth or things in heaven, by making peace through his blood, shed on the cross.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화목케 하는 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2:2-3).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3:24,25).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일곱째, 기도하게 하는 피(히브리서 12:24)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니라.
      to Jesus the mediator of a new covenant, and to the sprinkled blood that speaks a better word than the blood of Abel.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Jesus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They overcame him by the blood of the Lamb and by the word of their testimony; they did not love their lives so much as to shrink from death.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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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피

      레위기 17:11; 골1:14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며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혼들을 속죄케 하였나니 이는 혼을 속죄케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라."(레17:11)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1:14)

      모든 외과 의사들은 피와 생명은 동일하다고 증언합니다. 피와 생명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둘 다를 잃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성경을 칼로 베면 피가 툭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어디를 베도 피가 나오듯 성경의 어느 부분을 베어도 피가 나옵니다. 창세기 3:21에서 피가 흘러서 계시록에서는 그 피가 말고삐까지 차 오릅니다. 말을 타신 주님의 옷이 피로 적셔 질 정도로 피가 흥건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400회 이상 피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부류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나오면 자꾸 회피합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피"란 단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단어보다 3배나 많이 사용하였으며, 죽음이란 단어보다 5배나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I. 귀한 피(보혈)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벧전1:18-19).

      a. 구원은 살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불할 돈도 없습니다. 이 피는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습니다. '귀한 피'라고 하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는 뜻이지 값이 안 나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는 선물'을 자꾸 외치니까 사람들이 그저 얻는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b. 이 피가 귀한 이유는 흠도 없고, 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술을 할 때 피가 모자라면 급히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란 것이 또 사람마다 다른데다가 어떤 피는 혈소판이 부족하고, 어떤 피는 어떤 병균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수혈 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상한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피입니다. 이 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이 피만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혼을 완전히 정상으로 치유해 줍니다. 한 줌의 피에도 5백만개의 적혈구가 있고, 30만개의 혈소판이 있으며 7천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 속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바다처럼 넘쳐 흐릅니다.

      II. 깨끗하게 하는 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1:3).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

      a. 피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피는 영양을 공급해 주며, 산소를 공급해 주고, 노폐물들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피는 심장에서 생성되어 몸의 구석 구석 마디마디를 돕니다. 이 피가 여행하는 거리는 무려 60,000마일이나 됩니다. 머리카락의 1/10보다 작은 모세 혈관을 통과하며 이산화탄소와 음식물의 노폐물 등을 걸러 냅니다. 몸에 치명적인 독소는 체외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23초만에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돕니다. 보통 적혈구는 이런 운동을 4개월 동안 50만 번 수행합니다.

      b. 우리는 죄의 독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죄는 단절을 가져 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도록 막습니다. "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59:2). "너희의 죄악이 이러한 일들을 쫓아버렸고, 너희의 죄들이 너희로부터 좋은 것들을 거두어 갔느니라."(렘5:25).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해 줍니다. 히브리서 9:14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오직 피만이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지로 묻은 때를 씻는데는 물을 씁니다. 기름 때는 기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의 죄의 때는 피를 써야 합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피입니다. 피도 짐승이나 사람의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 피는 붉은 색입니다. 죄도 붉은 색입니다. 성경은 죄의 색깔을 말씀해 줍니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여러분은 이 피로 깨끗함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을 수도하고, 고행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냉수마찰을 아무래 해대도 깨끗하게 할 수 없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어제 지은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은밀히 숨겨 놓은 죄가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인줄 알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 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탐심이 죄인줄 알고, 정욕이 죄인줄 알지만 시시때때로 마음 가운데 깊은 죄를 짓습니다. 이 시간 모두 저희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화목케 하는 피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2:2-3).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3:24,25).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IV. 풍성한 피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일2:2). 주님의 피는 일시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이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된 사람들, 택함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해 흘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효력도 영원하여 우리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모든 죄까지 근본적으로 해결 해 주신 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피로 인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은혜를 모를 때,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거나, 믿음만으로는 안된다거나, 은총을 입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과 화평하게 사는 것, 우리가 두려움없이 주를 섬길 수 있는 것은 이 피가 영원토록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V. 능력있는 피(계12:10-11)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승리의 피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공격용 무기라면 피는 가장 강력한 방어용 무기입니다. 피를 믿는 믿음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피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려면 반드시 피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피가 없는 제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듯이, 피를 믿지 않는 믿음은 종교요,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가증스런 마귀의 제사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교도들의 제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피가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땀만 있습니다. 피가 있는 종교는 모두 더러운 컬트 집단들입니다. 그들은 인신 공양을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외에 어떤 피도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VI. 값주고 사신 피(행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피는 교회를 사는데 지불된 값진 피입니다. 교회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거듭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 사셨습니다. 노예 시장이 열렸습니다. 아주 총명하고 충성스럽게 생긴 한 노예를 발견한 사람이 그 노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이 노예는 얼마요?" 물었더니 "팔지 않습니다." "값을 듬뿍 쳐 드릴테니 파시오." "그 노예는 비쌉니다. 돈으로 받지 않고 대신 당신 몸에 있는 피를 몽땅 준다면 팔겠소!" 아마 남의 종이나 노예를 돈이 아닌 피를 주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세상 영광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요구하지 않고 독생자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대로 자신의 피를 몽땅 내어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VII. 미리 예정하신 피(계13:8, 벧전1:19-20)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사고도 아니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주님께서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계13:8).

      결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피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피를 거부하는 성경들이 속출하고 그 피를 인간의 피인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는 가르침이 많은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피를 믿는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승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주님께 짓밟혀 피를 튀기며 죽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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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宗敎)를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현교(顯敎)
      현교의 특징은 모든 재정과 운영을 공개합니다.

      둘째는 밀교(密敎)
      밀교의 특징은 모든 재정과 운영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재정과 운영이 불투명하다면 엉터리 라고 판단하면 됩니다.
      엉터리를 이단(異端)사이비(似而非)로 구분합니다.
      이단은 전통적인 교리를 전혀 다르게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교회의 이단의 원조는 "김성도"라는 여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종교단체를 등록해야 하는데 새주교라고 등록할 수 없어서 거룩한 종교(聖敎)라고 등록했다고 합니다.
      김성도의 가르침은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초림 예수는 실패하였다.

      성경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를 우리의 은혜와 진리의 근원으로 가리킵니다.
      - 마틴 루터

      All of Holy Scripture, from beginning to end, points solely to Christ as our source of grace and truth.
      - Martin Luther


      성경은 66권의 책으로 방대한 내용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분명히 기록된 목적과 이유가 있고 방향을 가진 핵심 주제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 주제는 역사적 흐름을 타고 내용이 진행될 뿐 아니라,
      목적성과 방향성을 흩어짐 없이 이끌고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는 어느 날 한 번에 전체를 다 예언하듯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를 타고 각 시대마다 점진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신약은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의 성취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혼은 부활하였으나 그 육체는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재림 예수는 육체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온다.

      둘째는 피가름 교리

      피가름 교리는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표현에서 성적 타락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를 따 먹었다는 표현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리를 직접 계시로 받았다고 하여 한국교회에 이단의 시조가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통일교의 원리강론, 박태선, 정명석, ......수 많은 이단 교주가 등장합니다.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었고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 팡세라는 작품에서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첫째는 신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
      -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둘째는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

      셋째는 신을 발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사람
      -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신앙


      1. 김성도(金聖道, 1882~1944)는 1920년대에 평양 일대에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사이비 종교단체인 성주교(聖主敎)의 창시자이자 교주이다. 한국에서 자생한 기독교 계열의 토종 이단의 원조(元祖)라는 평가가 있다. 김성도의 추종자들이 그녀를 새 주님이라 하여 새주파라 했으며, 그외에도 신령파, 1944년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무렵까지는 복중교로도 불리었다.[1] 1935년경 부터는 일제 총독부의 종무과에 성주교(聖主敎)로 정식 등록하여 종교단체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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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교 활동

        • 1923년 입신(入神) 상태에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며 '직통 계시'를 내세웠다.
        • 김성도는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음란이 타락의 동기였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으로 전해진다.[3]
        • 사탄과의 음란한 관계로 타락한 하와의 더러운 피가 후손에게 이어졌기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은 죄가 없는 구원자의 깨끗한 피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피가름' 이론이다.
        • 김성도의 주장은 정득은과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 김백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전도관박태선통일교문선명 등에도 이어진다.[4][5]
        • 김성도는 자신의 주변에 12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한 김성도는 1944년 심한 고문 끝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각주


      3. 최중현 <한국 메시야 운동사 연구 1> 생각하는백성 1999년 p19

      4. 중앙일보

      5. 기독교포탈뉴스

      6. 중앙일보 2020년 4월 3일

      7. 한겨레 2020년 3월 6일

      8. 최중현, 한국메시아운동사 연구, 생각하는 백성, 1999년, 18~25쪽


      이영호 목사 / 평택시기독교연합회장, 팽성장로교회

      1. 金聖道의 生涯

      김성도(金聖道) 여인은 1882년 음력 7월 1일에 태어나 만17세 때에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당40세)과 결혼하였다. 정항준은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철산에서 벼슬도 했고, 재산도 있었는데 결혼을 두 번이나 했던 그는 김성도와는 27세 연상의 사람이었다.

      첫 부인에게서 딸 하나가 태어났고, 둘째 부인에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으나, 친척의 강요에 따라 대를 잇기 위해서 김성도에게 정식 새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김성도는 결혼 후 둘째 부인으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을 고대하다 김 여인이 낳은 첫 아이는 아들 이였으나 그 아이는 1년 만에 쇠고기 먹고 체해서 죽고 말았다. 그 남자 아이는 밤에 죽고 딸아이는 그 이튿날 새벽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딸 쌍둥이를 낳고 1906년 6월 25일 에야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 통일교 장로로 구리시에서 살다 사망한 자)을 낳게 되었다.

      1)

      그런데 이 아들을 낳고 나서 김성도는 일종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김성도의 정신이상증세를 고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고, 병원을 찾는 등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별 차도가 없었는데, 노 권사라는 전도부인(傳道婦人)이 와서 “이 병은 예수를 믿어야 낫는다”고 일러주어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약 3개월 뒤에 정신 이상증세가 완치되었다.

      정석천은 그때 모친 김성도의 나이가 33세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1년 뒤 아들 정석천이 병이 들어 기도로 낫게 되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 여인은 더 돈독한 신앙인을 갖게 되어 정식(正式)으로 입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남편 정항준의 가문은 대대로 유교 가문이었으므로 아내의 기독교 신앙을 못 마땅히 여겨 모진 박해를 가하다 만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문일, 김문석 공동저서인 「기독교이단제설」에는 정항준의 말년에 대해서 “김성도 여인의 남편(정씨)는 자기 부인이 예수 믿어 재산을 축내고 미친 짓한다고 몹시나 미워하고 구타도 많이 했으나 김여인이 사랑과 순종을 함으로 감동되어 예수를 믿다가 임종시에 자식들을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2) 이렇게 남편 정씨는 김성도의 결혼 17년 만에 죽은 것이다. 3)

      김여인의 손자 정수원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핍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돌아 왔을 때 할머니가 집안에 안보이면 교회로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나와 때리고 차고 하면서 집에까지 끌고 왔다.(중략) 할머니가 일요일에 교회 갔다 오면 (중풍으로 누워있던) 할아버지께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고는 ‘교회 갔다 왔다’고 하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여 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아 발가락에 감아 끼우고 목침으로 할머니를 때렸다”고 전한다.

      4)

      2. 入神體驗과 神秘主義 運動

      당시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1919년, 김성도 여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 더욱 열심히 정성을 쌓았고, 1922년에는 세계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中)에 입신하여 여러 가지의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여인의 집은 여섯 칸 집으로 아주 큰 집이었는데 ㅁ 字 형(形)으로 되어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 곳간 그리고 큰 홀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게 되면 역사가 벌어지고 병도 낫게 되었다고 한다.

      5)

      통일교 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1986. p. 155-184)에 나타난 한학자의 모친(母親) 홍순애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김성도 여인은 보통 말할 때에는 새색시 같이 가만 가만 말 하지만 기도할 때 보면 어떤 남자 못지않게 아주 우렁찬 음성으로 기도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故 탁명환은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이단연구」(p.101)에서 “김성도 여인은 3백석 부자였고 창고에 멍석을 깔고 항상 병자들과 함께 하며 그냥 먹이고 입혔고 얼마나 많이 기도를 했는지 무릎과 팔꿈치에 굳은살이 붙을 정도였다. 그녀는 등창이 난 환자나 거지를 손수 씻기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병을 고쳐 주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성도 여인의 손자가 부친 정석천으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증언한 바에 따르면, “김성도는 1923년 음력 4월 2일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지상인 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교회당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는 운동을 전개하라’는 당부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6)

      이때의 대담 내용들은 길이 2m 폭 30㎝의 종이 12장에 기록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죄의 뿌리에 대한 시각, 십자가에 대한 시각, 육신 입은 재림론 등은 오늘의 사이비종교가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골 메뉴다. 그 뒤에 김 여인은 또 입신하여 “때가 급하니 속히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계시를 받고 담임 목사에 보고했더니 사탄의 역사로 돌리면서 자제 하라는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소문이 교회에 나돌아 교우들이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게 되자 1925년 교단으로부터 책벌(策罰)을 받아 출교(黜敎)되었다.

      7)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탁(神託)을 받은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하며 참회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 여인으로부터 기도를 받음으로써 생명의 자유를 찾는다고 믿게 되었고, 계시를 통해서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 노랫말에 보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애정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자유 원사탄이 장사함을 감사합니다.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왔다. 사탄에서 승리함을 감사합니다. 영광 영광 내가 누릴 영광을 감사합니다. 세상사탄권세 다 없어지고 하늘의 주의 음성 들려오는데 새로운 천지에 머리 들고 나서니 광명한 에덴동산 열리는구나 에덴동산 나의 좋은 품속에 무궁한 생명강수 흘러가는데 새로운 천지에 새주님 역사로 죽었던 나의 영혼 부활하였네”라는 식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오고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오셨다”는 식으로 “새주님 왔다”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온다.

      8)

      이래서 항간에서는 김성도 여인을 따르는 무리들을 <감사교>, <감사패>, <새주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손자 정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에 친척과 동리사람들로 부터 ‘새주(主) 새끼’로 불렸다”고 한다.

      9) 그렇게 된 이유는 김성도의 남편 정항준이 임종시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라고 한데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10) 당시 장좌동 현지를 목격한 사람 김선환의 회고에 따르면,

      “평북 철산에 김성도라는 권사가 있어 병 고치는 은혜를 받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사방에서 많은 병자가 모이므로 기도를 받으면 즉석에서 마음이 감동되자 권사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새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새주는 자기 앞에 十二 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도 <새주님>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역사! 역사! 새주님 역사! 진주문에 들어가서 새주님 만나자’고 야단법석을 한참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주는 성신(聖神)을 부어줄 터인즉 입들을 벌리고 기도하라고 한다. 새 주(主)가 냉수를 입에다 뿌려 주면 그 냉수를 받아먹느라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주의 입에서 나오는 냉수를 받아먹는 것이 성신을 받는 줄로 믿었다. 김성도 집단은 ‘감사노래’를 열심히 부르다 보면 춤을 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혁대가 있는 옷도 벗겨지기도 하였고 심취된 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는데 이런 일로 한 사람당 벌금 10원씩인가 문 적이 있다고 한다.

      11)

      이런 집회의 열기가 계속되자 경찰에서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도 권사의 집을 방문하러 오는 이는 누구든지 부서면 面소재지에 있는 경찰지서에 신고를 해야만 하기도 했다.

      12)

      3. 聖主敎 創立

      관(官)의 감시가 심해지는 가운데 1932년에는 이용도, 백남주, 이호빈 등이 김성도 여인의 집에서 접촉하게 된다. 이런 왕래를 시발로 1933년 10월에는 새주파가 원산의 한준명, 백남주, 이용도의 ‘예수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예수」지 제5호(1934년 5월호) 통신(通信)란(p.33)에는 “평북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장좌 예배당은 1933년 10월일에 개천식을 거행하였고 김성도 여사와 정석천 복음사가 무수한 핍박 속에서 희생적 수고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간 백남주 목사와 리종현 복음사가 일주일식 삼차 집회가 열렸고 지난 三월 一일부터 八일까지 리호빈 목사와 한의정 복음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여러 은혜가 풍성하였으며 근지(近地) 참석한 사십(四十)명 교인까지 충만한 기쁨을 얻고 도라 가섯다. 교인 수는 一백 三十명 가량이며 금번 집회에 신자수는 五명이라 한다”고 전(傳)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이 예수교회의 전도사격인 복음사(福音師)로 임명을 받은 것과 당시의 새주파 교인 수가 130명이라는 事實을 찾아볼 수 있다.

      1935년 들어 새주파는, 예수교회의 창립 主役이였으나 ‘天國結婚’ 사건으로 원산의 신학산에서 쫓겨난 백남주 목사를 새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의 뒤를 따라서 그의 弟子 김백문도 왔고 김남조도 왔으니 그때가 1935년 봄이었다. 이때부터 새주파는 예수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1935년 10월 ‘聖主敎’라는 간판을 달고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을 대표로 한 종교단체로 조선총독부 종무과에 정식허가를 받아 등록한다. 이렇게 해서 설립한 ‘성주교’ 창립예배 사회는 김백문이 맡았다.

      관청의 허가를 받고 부터는 장좌동 외(外)에도 안주, 평양과 정주, 숙천, 해주, 서울, 원산 등을 포함하여 약 20여 군데 집회소가 생겨났다. 「기독교 대연감」(1992년 기독교문사 刊) 이 일제총독부 자료(1925 - 1940년)를 인용해 발표한 ‘해방 전 북한교회 통계’에 의하면 성주교회 현황은 교당 수효가 평남8, 평북5, 함남2, 함북3,으로 기록돼 있고, 교직자 수는 평남8, 평북3, 함남3, 함북4, 신도수효는 평남94, 함남28로만 나타나 그 외 지역에는 교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교관련 잡지중의 하나인 「信仰生活」에서 發行人 김인서 씨는(필자주: 당시 장로) 후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군이 새주교회를 시인한 이상 새主之子 鄭복음사 평양 새교회에서 「새주역사」란 주문을 고창 선전함은 당연한 일이오 제직과 교인이 새역사에 열광한 것은 정한 일이다. 이리하여 새주창파 새주불창파로 파장이 생기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13)

      4. 성주교의 主要敎理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도 여인의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한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 간섭하시지 못하시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루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 주님은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14)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는 문선명의 설교를 인용한 「史報」에서(157호, p. 41) 그녀가 하늘로부터 받았던 12가지의 重要한 啓示라며 다음과 같이 傳해주고 있다.

      “1.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해방. 2. 재림주님은 한국으로 오실 것인데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 쓴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한국인이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과일이 아니고, 타락은 사랑의 행위였다. 즉 타락은 사랑의 잘못으로 일어났다. 4. 남자와 여자는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결혼은 참된 결혼이 아니라 거짓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 한 부부에게는 성생활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5. 주님은 새로운 혈통을 세우려고 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 주님을 영접하려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몸은 정결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생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월간 <통일세계>는 “김성도 권사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면서 홍순애 여인의 증언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간추려 紹介하고 있다.

      “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연장된 것이다. ②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해와의 잘못된 성생활, 즉 음란으로 타락했다. ③ 재림 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으로 한국에 태어날 것이며 한국은 에덴동산이 된다.”

      15)

      김성도 여인이 여기서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고 보게 된 것은, 그녀의 출석교회 담임 목사가 남녀 문제로 구속되자 충격을 받고 죄에 대하여 깊이 파고드는 기도를 하다가, “이제까지 너만큼 죄의 뿌리를 알려고 애쓰는 자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죄의 뿌리는 음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 때문이며, 주님은 육신 쓰고 한국으로 오신다는 등의 음성을 들은 데 있다. 이래서 김성도는 아들 며느리에게 부부 생활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16)

      이런 이유로 추종자들은 고기 음식을 금하는 식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음란으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정력이 생기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시가 있어 고기반찬이 없다는 것이고, “음란의 혈통적으로 타락했으니 피를 맑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쌀을 불려 생식을 했는데 이렇게 생식을 해서 피를 깨끗하게 한 다음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복중교로 전승되어 갔다. 복중파를 믿는 가정이 제주도(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 1283번지)에 최형렬 씨(정평화의 수제자) 남매가 사는데 그들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며 살고 있다.

      17) 김여인의 아들 정평화는 경주에 시루미기 생식마을(경주시 산내면 우라 2리 산 90번지)을 조성해 추종자들과 함께 살다가 그곳에 묻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득은의 「생의 원리」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통일교의 「원리해설」, 이만희의 「신탄」 등의 내용이 김성도 여인의 가르침의 골격을 전승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5. 聖主敎의 受難과 終末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이어 1940년대에는 창씨개명이 강요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용 물자 공출, 징용, 징병 등이 강행되면서 자생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강진 출신 김영수라는 청년이 성주교에 와서 은혜를 받고 전도하다가 성주교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오고가던 계시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머지않아 일본이 망하고 해방되어 큰 복을 받게 된다”는 등의 내용 이였다. 그런데 이 김영수에게 전도를 받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경찰 고등계 형사의 정보요원이였다. 이 사람은 성주교회의 일주일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가 들은 내용을 도경(道警)에 보고했고, 그래서 1943년 가을 김성도와 두 아들(정석천과 정석진)과 10여 명의 중심 신도들이 경찰에 연행되게 되었다.

      이래서 김성도 여인은 심한 고문을 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1944년 4월 1일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들 정석천(1976년 11월 4일 71세로 구리 자택에서 사망)은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그해 6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광산 하나를 인수하여 광산업에 손을 대게 되고 장좌동 집회소는 방치되었다.

      18)

      미주

      1. 「한국 메시야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생각하는 백성 刊, 1999), 20; 「뜻따라 한평생」, 통일교역사편찬위원회편(성화사 刊, 1987), 270-71.
      2.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 (칼빈서적, 1991), 149.
      3.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신앙수기, 제1집: 증언(證言)」 (성화사刊, 1982), 347; 세계기독교통일 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편, 「史報」, № 157호, 70; 「한국 메시아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1999. 21.
      4. 「史報」, № 157호, 74.
      5. 「史報」, № 154호, 76.
      6. 「史報」, № 157호, 76.
      7. 「신앙수기, 제1집: 證言」, 347; 「한국 메시야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4.
      8. 「史報」, № 154호, 77.
      9. 「史報」, № 157호, 71;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25.
      10.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칼빈서적, 1991), 149.
      11. 「史報」, № 154호, 77.
      12. 「사회악과 사교운동」, 김경래 편(기문사, 1957), 166-167.
      13. 「신앙세계」, 1935년 7월호, 34-35. 「한국메시아 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8.
      14.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편, 「소명하신 길을 따라」(1986), 197-206; 증언 3집, 198-200. 정석천 통일교 장로의 증언(김성도의 아들), 251-252, 268-269, 정숭원의 증언(김성도의 손자), 158-163, 홍순애의 증언, 299-300, 오영춘 여사의 증언.
      15. 월간 「통일세계」, 1996년 6월호, 167.
      16.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45-46.
      17.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80.
      18. 「史報」, № 154호, 72.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이단의 원조로 분류되는 사람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던 김성도(1882~1944)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입신한 상태에서 예수와 대화도 나누었고 자신에게 직통 계시가 임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녀는 ‘새 주님’을 강조하였으므로 ‘새주파 교주 김성도’라 불리우게 되었다.

      김성도의 신앙과 교리의 핵심적인 특징은 모든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성도는 인류의 원죄와 깊은 연관을 가지는 선악과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김성도는 하와가 먼저 먹은 창세기의 선악과를 하와의 육체적 순결과 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뱀(마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그만 뱀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뱀의 피가 그녀에게 유입되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후 아담과 함께 마귀의 피로 오렴된 더러워진 자손들을 생산하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선악과를 범한 인간의 원죄를 사탄과의 성적 관계로 인해 사탄의 피가 인간에게 유입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했으니, 그녀에게는 구원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영향을 받은 김백문(이스라엘 수도회), 정득은(피갈음), 문선명(통일교), 박태선(천부교), 정명석(JMS) 등의 유명한 이단들이 그녀와 동일한 선악과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자들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선악과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그들은 영생의 자격을 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아담의 선악과 범행을 이해하였다. 선악과를 범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 불순종으로 해석되는 것인지에 대해 청교도들의 어떤 서적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내용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완전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아담은 율법의 선행으로 영생의 자격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생을 청구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능력도 주시었다. 그러나 아담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선악과 원죄론이다. 아담이 지켰어야 할 율법은 아담의 마음에 기록되었었다고 한다. 그 율법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몇 종류였는지에 대해 영국 청교도들은 납득될 정도로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그 율법이 나중에 시내산에게 모세를 통해 돌판에 기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아담에게 분명하게 계시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아담의 마음에 기록하여 주신 것이 아니고 아담에게 귀에 들리는 언어로 말하셨다고 성경에 나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성경은 이와 같이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영국 청교도들은 아담이 율법을 지키기 않아 저주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선악과 범행이 아담이 그의 마음에 기록된 영생의 기준인 율법을 지키지 않겠다는 선포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새주파 김성도

      는 선악과를 하와의 성적인 순결의 상징으로 보았고, 영국 청교도들은 선악과를 아담이 영생을 위해 지켰어야 할 율법과 연관지었다. 과연 누가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했던 것일까? 영국 청교도들도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김성도가 선악과를 성적으로 이해하여 결국 특별한 자와의 성관계를 통한 구원론을 주장한 것처럼, 영국 청교도들도 선악과를 율법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율법적인 구원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먼저 자신의 구원(영생)의 자격을 얻었고, 그리고 자신을 믿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얻으신 구원(영생)의 자격을 물려주었다는 구원론, 능동순종의 의 교리이다. 선악과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론이 반드시 비틀어지게 된다는 것을 한국 이단의 원조 김성도와 영국 청교도들을 통해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영국 청교도들의 그릇된 신앙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였다. R. C. Sproul을 비롯하여 여러 개혁신학의 대가들이 청교도들의 잘못된 원죄론과 구원론을 그대로 받고 말았다.


      “만일 예수께서 백성의 새로운 대표자인 둘째 아담이 되려면,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부여해 오신 모든 의무들을 그 자신이 이행하셔야 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성육신으로서, 그 백성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하셔야 했다. 그중에는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에 의한 세례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R. C. Sproul)

      하나님께서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율법 순종의 의무를 그리스도가 대신 맡으셨다는 내용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 받기 위해 부과하신 명령이라는 것은 없다. 구약에서 구원은 훗날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소급하여 적용되어 발생했다. 구약의 율법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섬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었다.

      기독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만 나왔다. 구원을 받기 위해 사람에게 하나님이 부과하신 무슨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사람이 못하니 그리스도가 대신 감당하여 구원이 일어났다는 내용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사람이건, 그리스도이건 하나님이 부과하신 행위를 감당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성경의 기독교가 훼손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찬송하는 백성을 가지시려고 아담을 창조하셨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 모든 은혜와 영생 안에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자기의 인격을 걸고 언약을 맺으셨다.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이 되고, 아담도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인격을 걸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 언약의 내용을 보증하는 두 개의 담보물을 세우셨다. 생명나무를 통해 아담이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었음을 보증하셨다.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길을 떠나면 아담이 영원히 죽을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능력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욕을 위해 사용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명확히 하고 선악과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아담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 스스로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으로 남기로 언약했으므로, 자기의 인격을 걸고 아담과 맺은 그 언약을 성취해야 할 의무를 지시기를 마다하지 않다.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아담의 죄를 감당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로 죽은 아담에게 즉시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방법으로 아담을 다시 살리실 것인지를 계시하였다. 스스로 여인의 후손으로 지상에 사람으로 오시어 아담의 죄를 대속할 것임을 밝히셨다(창 3:15).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자신이 피를 흘려 죄를 사하게 될 훗날의 십자가의 효력을 소급적용 받을 수 있는 짐승의 제사 제도를 도입하셨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소급적용 받아 구원을 얻는 죄악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섬김의 원리, 삶의 원리로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영국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처럼, 태초에 아담의 마음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원죄)이 일어난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의 효력이 소급적용되어 구원 받은 구약의 실직적으로 죄악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원리와 기준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성육신하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로 구원 받은 구약 백성들의 하나님 섬김의 원리였던 율법을 스스로 성취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내셨다. 먼저 그리스도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완전한 선과 의와 거룩을 구비하신 죄 없는 사람으로 나셨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곧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의 출생이다. 구약의 율법이 말하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삶의 원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100% 완전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죄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짋어지는 어린양이 되시고 평생을 순종 가운데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다. 그리스도의 흠없는 피를 우리의 죄의 배상물로 받으신 하나님은 완전히 만족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죗값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여겨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자기에게로 받아주시어(연합) 자기의 거룩함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게 해 주셨다.

      이것이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다. 선악과 범함을 아담이 영생을 위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 영생의 자격을 얻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영국 청교도들과 현대의 많은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은 비성경적이다. 마치 새주파 김성도가 선악과를 하와의 성적인 순결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 안에서 구원론을 전개하는 것과 조금 다른 유형의 사이비 이단 사상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출처 :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재림주’ 및 주장에 대한 비판 ①


      말이나 단순한 용어의 실수,
      회개하고 돌아선 이들에 대한 배려 필요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들이 결국은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에 교회와 신앙은 타락의 길과 혼란기를 겪게 된다. 역사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Ⅰ.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재림주에 관한 연구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정리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들이 결국은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할 때에 교회와 신앙은 타락의 길과 혼란기를 겪게 된다. 역사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때이다.
      우리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유입된 것은 이미 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야문화의 흔적 속에 지금도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기독교의 역사가 있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왕머리 마을)에 있는 도마바위(분처바위)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 명전행”(耶蘇花王引導者 名全行), 즉“꽃의 왕 예수의 전도자”가 있었다는 것을 글로 남긴 흔적에 대해서도 우리 기독교가 힘을 다하여 그 근거를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쓴 이는 400년 경 고구려 시대의 유명한 석공 전행(全行)이라는 사람으로 추정이 된다. 또 다른 추정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석공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연구의 대상이다. 그 바위 앞에서 서면 누군가가 정을 들고 예수님의 손을 바위에 땀을 흘리면서 새겨놓은 흔적이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할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어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중인 돌 십자가와 마리아상의 역사적인 유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정도의 역사적인 흔적이라면 기독교야 말로 이미 민족종교라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가 다 묻혀 버린 것도 한국 기독교계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조선 후기의 역사에 관하여 역사적인 흐름을 인식하며 조선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곧 한국기독교 이단 및 사이비의 뿌리를 이해하고 재림주의 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비주의 운동을 통한 자칭 재림주 및 그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던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주파(김성도, 1906), 성주교(백남주, 1901), 강신극(유명화), 목가름(황국주, 1909), 이스라엘 수도원(김백문, 1917), 대성심기도원(정득은, 1897), 통일교(문선명, 1920), 천부교(박태선, 1907), 장막성전(유재열, 1949), 영생교(조희성, 1931), 안증회(안상홍, 1918), 한농복구회(박명호, 1943), 새빛등대(김풍일, 1946), 천국복음전도회(구인회, 1941), 기독교복음선교회(정명석, 1945), 신천지(이만희, 1931)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에 대하여 어떤 이는 스스로 ‘재림주’라 칭하고 어떤 이는 추종자들이 그렇게 말하도록 만드는 교활함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자칭 재림주’와 그들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하여 먼저 조선후기의 사회와 그 시대의 신흥종교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들이 혼합되고 발전되고 계승되면서 우리 시대의 자칭 재림주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1. 조선후기의 신흥종교 운동

      ▲ 수운, 최제우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는 급격하게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게 된다. 또한 세계의 역사는 1차 세계전쟁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에 인한 혁명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된다. 정조의 개혁정치 이후에 천주교의 전래가 있은 지 몇 년 후에 유학파인 최제우가 등장하게 된다.

      최제우(催濟愚 1824~1864)는 그리스도교와 유불선의 장점을 융합하여 1860년 동학을 만들게 된다. 1) 1864년 그의 나이 40에 동학을 사학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가 동학을 창설한 것은 1860년이고 1863년에 교인이 3,000명, 접소가 14곳에 이르는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같은 해 본관이 같은 경주 최씨인 해월 최시형(2대교주)을 북접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호응하여 10만 병력을 일으켰으나 잇따른 패배로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후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독립운동가 33중 한사람)가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지하조직으로 이어가다 일본으로 도피하고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증산, 강일순

      이처럼 동학(천도교)이 실패하자 곧 이어 신흥종교인 증산교가 등장하게 된다. 증산 강일순은 우리나라 이단의 계보를 만드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다. 그는 동학혁명 당시 무장봉기에 반대한 인물이지만 동학혁명에 관여도 하였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김제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깨달음을 얻어 후천개벽과 후천선경의 도래를 선포하며 증산교를 창설하게 된다. 그 역시 동학이 일어난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며 동학을 배웠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후에 그의 아내 고판례(정확히 알려진 바 없음)가 명맥을 이은 후에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동화교, 순천교 등으로 분파하게 된다. 오늘날의 증산교, 태극도, 대순진리회 역시 다 그 뿌리가 같다.

      그중 당시 가장 교세가 큰것이 바로 보천교이다. 차경석이 이끌던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인 당시 수백만을 거느리며 1만여 평의 대지에 십일전, 성전 등 웅장한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지금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이 보천교의 한 건물을 뜯어다 이축한 것이라 한다.

      1926년에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직접 정읍의 본부로 찾아와 면담을 할 정도였지만, 1924년부터 교단 내에 분열이 시작되어 1828년에 이상호와 동생 이성영이 탈퇴하고 김제 금산사 아래 동화교를 창설한다.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가 보천교를 강제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원불교를 포함한 전도관 등 모든 현재의 아류작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전도관(천부교)의 박태선을 교주로 만들고 오늘날 기독교 신흥종교들이 잘 우려먹고 있는 격암유록의 저자 2) 의 아버지가 바로 보천교의 교령으로 지냈다. 후에 격암유록의 저자는 우연한 계기로 당시 막 세력을 확장하던 전도관을 알게 되고 그들의 권유로 격암유록을 쓰게 된 것이다. 흔히 450년에 쓰여졌다고 알려졌던 그 신비의 고문서가 최근에 쓰여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동학이 시조라 한다고 해도 그는 유불선을 논하며 거창한 교리인 듯 주장하나 무당의 그것과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옳은 주장도 있긴 하였지만, 서양에서 받아들인 다른 문화를 섞은 인간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후에 생겨난 모든 신흥종교가 모두 그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나고 모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엔 이적을 행한 자도 있긴 하였다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고 설사 있다 하여도 능력 있는 무당들은 지금도 작두를 타기도 한다. 하물며 무당도 작두 타는 세상에 신흥종교의 교주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격암유록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 성경의 몇몇 구절을 비슷하게 적어놓고 그중 나열된 한자를 조합하면 박태선이 나온다. ‘조선에 신이 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될 터인데 그가 바로 박태선이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의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때 격암유록이란 예언서가 우리 사회에 많이 소개되었다. 서양의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 받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일이 다 벌어진 후에 쓰여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도관의 사주를 받은 전도관의 신도 한 명이 박물관에 기증 3) 형식으로 원본도 아닌 필사본을 기증한 것이었으며, 훗날 이 사실을 신동아 일보에 저자의 아들이 넌픽션의 글을 보내 공모에 당선(2007년)됨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4)
      그래서 조선 후기의 국내 신흥종교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유사종교들의 행태를 찾아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정리하면, 천주교(서학)에 비교할 만한 사상인 동학이 전북 정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증산교(강일순)도 정읍출신이며 기독교의 분파의 첫 출발도 역시 같은 정읍에서 자유교(최충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 너무 특이한 경우이다.

      여하튼 동학에서 증산교가 나오게 되었고, 증산교는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동화교, 순천교 등으로 분파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증산교나 태극도, 대순진리회도 같은 뿌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증산교의 최대 분파인 보천교의 출신이 전도관(천부교)를 만나서 위서(僞書)인 ‘격암유록’을 만든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례이다. 한국의 토속종교와 토속 불교 등이 기독교를 만나서 새로운 경전을 탄생시킨 것이 된다.

      2. 한국 기독교의 종파 운동과 그 평가

      한국 기독교 종파주의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1884년 고종 황제의 윤허로 기독교의 복음전파가 공인된 이후에 기독교는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으로 많은 결실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하여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은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뿌리를 내리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게 된다. 하지만 3.1운동을 정점으로 기독교계에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에 1920년대의 기독교 종파주의 운동은 신비주의와 맞물리면서 한국교회에 신학과 신앙의 혼선과 혼탁과 타락을 도입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영향력이 감퇴되고, 신앙적인 구원과 성경적인 진리에 지나친 집착현상을 보이게 된다. 신앙을 지도하는 인도자의 부족현상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과 무속 종교등과 유사한 형태의 신비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국 재림주를 양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 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갈등이라는 내적 대립현상이 첨예하게 드러났고 이와 관련 교파 간 갈등의 여러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 양상은 ‘장감 연합’으로 표현되어 온 교회연합운동이 교파 교회의 이권 분쟁으로 인해 와해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교회 안에서도 신앙과 신학적 갈등과 지방색이 배경이 된 교권분쟁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1930년대는 젊은이들이 회의주의에 빠졌다. 그 이유는 3. 1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독립 쟁취 실패와 아울러 1929년 이래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토지와 경제적 손실이 국민들의 생활을 크게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 문화적 회의주의가 시대를 더욱 암울하게 하여 사람들은 좌절된 심정으로 주색(酒色)과 노름, 아편 등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부녀자들은 안심양명(安心揚名) 외길을 모색하여 각색 무당, 미신을 신봉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첫째, 신앙적인 고난으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일선현장에서 물러나 선교 기관 등으로 은퇴한 데서 발단되었다. 갑자기 신앙의 안내자들을 잃어 일제 강점기와 그들의 통치를 후견인 없이 홀로 이겨내야 했다. 한국의 신학이 정착하기도 전에 혼란기를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물질적 가난은 이 시대 한국교회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의 결과와 더불어 당시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고통을 겪었고 더욱이 미국 선교본부에서의 선교 자금의 원활한 지원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셋째, 사회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이 새롭게 들어와서 반 기독교적 세력으로 확산되어 혼란을 야기 시켰다. 사회주의의 만연은 한국교회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넷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강해지자 교회는 더 깊은 침체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젊은이들 사이에는 회의주의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1920〜30년대의 한국교회는 종합적인 어려운 상황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교회 내부의 신학적, 신앙적 갈등이 깊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한국의 기독교가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으며, 교회에 대한 비판세력과 반동으로 생성된 혁신 세력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 기독교의 종파주의 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흥우 중심의 Y.M.C.A. 5) 등이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서면서 활발해졌고, 그런 가운데 선교와 행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 출신의 교회 지성인들이 분립하여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6) 또한 그 당시 한국교회는 노동자, 농민 등 절대다수의 삶과 민족의 질고를 외면했던 기성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종파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여러 형태의 모습을 갖추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자유교회, 독립교회 운동이다. 1910년경에 전라북도 부안, 태인, 정읍, 임실 등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주도적인 선교방침과 간섭에 반대하여 조선교회의 자치와 독립을 주장하고 나선 조선교회 자유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일본을 포함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싫어하는 애국지사들과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단일민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기독교회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한국에 정착한 기독교는 외국선교사들의 지도아래 이루어지는 선교회와 조선교회의 자유와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관하는 선교회로 나뉘어 활동을 하였다.

      둘째, 무교회주의 운동이다. 일본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1930년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최태용의 ‘복음교회’가 있다. 무교회주의는 한국 기독교의 교권주의와 교파주의에 반대하고, 성경을 통해 새로운 한국을 만들려고 했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모임이 형성되었으며, 복음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미완성과 다른 사람을 통한 사역의 완성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복음교회의 최태용은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반대하였지만, 자신이 경험한 신비적 신앙체험에 대해서는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복음교회는 외국선교사들의 우월성과 인종차별주의에 반대를 했고, 기성교회의 교권주의와 복음교회에 영향을 준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셋째, 신비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①불교의 미륵불과 ②민중 속에 흐르고 있는 정도령 ③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상과 연관되어 있으며 종파주의를 세운 창교주가 세상 종말에 재림하는 미륵불, 정도령,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패망과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한국사회는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일제의 수탈과 억압된 통치로 부터 그리고 서양 외세의 간섭과 개방으로부터 한민족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또한 정치적 독립은 한시적임을 직감하고, 종교를 통하여 현세에서 일제와 외세에 억압당하는 한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영원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의 미륵사상, 정감록의 정도령사상, 그리스도교의 메시야사상과 잘 융합하여 종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신비주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은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물론 1917년과 1920년경에 ‘정도교’와 ‘남방여왕’이라는 익명의 자칭 여왕이 있었고, 예수 재림의 해를 선포한 ‘한에녹’이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정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단체는 아니었고, 몇 가지의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발굴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 이 지면을 통해 논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일본총독부에서 종교를 담당했던 종무과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던 김성도의 ‘새주파’로부터 자칭 재림주들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신비주의 운동이 김성도 새주파를 비롯하여 원산 신학산의 백남주와 예수교회, 황해도지방에서 활동한 황국주를 거쳐서 이 시대의 주된 연구대상인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까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영향을 주었는가의 흐름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한국 기독교의 종파주의 운동은 그 운동 자체가 어떠한 개인을 중심으로 발생되기도 하였지만, 한국교회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산물이며, 그들 자신의 신학과 신앙의 반영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의 종파운동은 기성교회의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분리되었으며 비신학적인 신앙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교회주의 발생 등의 부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자립화와 민족성 형성을 위한 방편으로서 생겨난 운동으로 자주적, 민족적, 반 선교사적, 반교권적인 종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파운동에 관한 연구는 한국 개신교의 사상과 목적에 대한 중심을 논증함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그 원류를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연구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Ⅱ. 한국교회의 재림주로 등장하는 신흥종교의 교주들

      1. 철산 새주파 김성도(金聖道)와 재림예수

      1) 새주파의 의미와 김성도의 삶의 여정
      ‘새주파’의 뜻은 ‘새로운 주님을 믿는 교파’ 또는 ‘분파’ 라는 뜻으로, 김성도라는 여인을 ‘구세주’(메시야) 또는 ‘재림예수’로 추종하던 사람들을 지칭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새주파의 창교주 김성도는 188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나 만 17세가 되던 해 자신보다 23세가 많은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40세)과 결혼을 했다. 김성도는 정항준의 3번째 부인이 되었다. 김성도는 둘째부인에게서 모질게 시집살이를 살았다고 한다. 7)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에서는 정항준이 김성도에게 장가를 가게 된 계기가 둘째 부인에게서 난 2명의 아들이 정신지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8)

      ▲김성도

      김성도는 다행히 첫 번째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약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 1906년 6월 25일에 대를 이을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을 낳게 된다. 9) 그러나 김성도는 정석천을 낳고 난 후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평안북도 철산군을 전도 순례하던 노권사(이름은 불명)는 김성도를 보고 ‘예수를 믿어야 낫는 병이다’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김성도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약 3개월 정도 되어서 정신이상 증세가 치료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에는 아들 정석천이 병을 앓게 되자 김성도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아들의 병이 치료되는 경험을 한 후 기독교회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남편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김성도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경의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10)

      2) 김성도의 재림주 주장의 근거
      1923년 4월 2일(음력)에는 기도 중에 입신(入神)을 한 후 처음 예수를 만나 예수로부터 “인류의 죄가 음란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람들의 불신으로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2일(음력) 예수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재림주는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1)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계시방식을 토대로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었으며 김성도가 받은 계시가 재림주 만드는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성도는 계시의 내용을 길이 2m와 넓이 30cm가 되는 종이 12장에 기록한 후에 ‘세상에 알리라’는 예수의 지시대로 담임목사에게 말씀드렸더니, ‘사탄의 역사이니 자제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계시내용과 신비체험들을 교우들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김성도의 집에 출입하게 되자, 장로교단에서는 1925년경에 김성도를 징계하였고 소속교회에서도 그녀를 출교시켰다. 12)

      출교당한 김성도는 자신의 집을 집회소로 만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 김성도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들 중에는 영적인 능력과 신유의 은사를 받은 김성도를 징계한 기성교회 목회자들에게 하늘에서 큰 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기성교회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성도의 장손 정수원이 1930년 3월에 출생을 하게 되고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 주님이 오셨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계시에 따라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였다. 13)

      심지어 새주파 장좌동 교회의 현장 목격자 김선환의 회고에 따르면, “평북 철산에는 김성도라는 권사가 있어 병 고치는 은혜를 받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사방에서 많은 병자가 모이므로 기도를 받으면 즉석에서 마음이 감동되자 권사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새주님’ 이라고 불렀다. 이 새주는 자기 앞에 12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도 ‘새주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역사 역사 새주님 역사 진주문에 들어가서 새주님 만나자’ 고 야단법석을 한참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주는 성신을 부어줄 터인즉 입들을 벌리고 기도하라고 한다. 새주가 냉수를 입에다 뿌려 주면 그 냉수를 받아먹느라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14) 는 것이다. 이러한 소동은 새주가 냉수를 입에 머금었다가 내뱉는 행위였으며, 이 냉수를 받아 먹는 것이 성신(聖神)을 받는 줄로 믿었다. 15)

      3) 성주교의 주요교리 16)
      김성도는 다음와 같이 신도들에게 계시의 내용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했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도 간섭하시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이었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17)

      4) 성주교의 영향
      김성도가 계시 받았다는 이와 같은 내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말세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자칭하며, 성경에서 약속한 재림주’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자신을 재림주로 선포하는 사람들은 김성도의 주장과 똑같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형태부터 계시를 받은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①번의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따 먹음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교주 문선명과 ‘기독교 복음 선교회’의 창교주 정명석의 실낙원의 내용과 일치한다. ②번과 ③번의 내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④번에서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라고 하는 주장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교리서인 ‘원리강론’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⑤번의 재림주는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는 계시내용도 한국에서 자신을 메시야 및 재림주로 주장하는 창교주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교리이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1904년경에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제 칠일 안식일 재림예수교회에서 출교당한 안상홍이 세운 ‘안상홍 증인회’에서도 ‘성경에서 예언한 재림주는 한국에서 나오며 바로 안상홍 자신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김성도가 ‘죄의 뿌리는 음란’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그녀가 출석한 교회 담임목사가 남녀 간의 연정문제로 구속이 된 후, 이 문제로 고심하고 깊이 기도하던 중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환청을 듣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는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의 『生의 원리』,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의 교리서인『원리강론』, 변찬린의『성경의 원리』의 내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18)

      2. 원산 예수교회 백남주와 재림예수

      김백문의 스승이 되는 백남주는 원산의 강신극 소동, 신학산 소동, 성주교의 창립 및 예수교회의 핵심인물이다.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으로 출생날짜가 1901년 1월 3일이라고 이용도의 제자 변종호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용도 목사가 소천하자, 흑괴(黑怪: 백남주를 지칭함)가 순진한 성도들을 이용하여 교단을 조직하여「XX교회」라는 것을 만들고, 교회 기관지로 「XX」라는 것을 발행하고 교회의 성탄일을 1월 3일로 지키게 하였는바, 1월 3일은 흑괴(黑怪)의 생일(生日)이었다.…(중략) 우연한 기회에 흑괴(黑怪)의 호적을 보았더니, 분명히 그는 1월 3일생이었다. 이 한 가지 1월 3일을 주께서 알려주신 예수의 탄일이라고 믿게 한 것만으로도 그가 구세주, 주님, 예수님 행세를 하려고 연극을 꾸민 것이 분명하다.”19)

      1월 3일은 성주교회, 원산교회, 이스라엘 수도원 등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지키는 날짜인데, 백남주의 생일과 일치한다고 하니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남주는 26세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뒤인 1930년 3월 12일에 동기 22명과 함께 제25회 졸업생이 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백남주는 목회보다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서 ‘루씨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원산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일제시대에 가장 큰 노동쟁의로 유명한 곳이다. 루씨 여학교와 원산 여자 성경학교가 동일한 곳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원산에 있던 이 학교는 중등교육을 담당한 개신교 미션학교로 의료시설 등도 갖추고 있었다.

      1) 예수교회의 탄생

      ▲백남주

      예수교회는 대표가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으로 출발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교회는 처남 매부지간인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고, 이호빈, 이용도, 이종현이 후에 합류하게 된다. 20)
      그러나 실상은 예수교회는 ‘강신녀(降神女) 유명화’가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유명화의 말에 따라서 예수교회의 대표들이 움직인 흔적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즉, 유명화의 말에 따라서 백남주, 한준명, 박성걸의 아들들이 성자로서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하는 시대가 온다는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21) 이러한 거짓계시가 원산 예수교회의 실체이다.

      유명화를 필두로 기도모임을 계속하였고, 1933년 1월 3일 새벽에 모든 신도들에게 흰옷을 입고 백남주 자택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그 날 새벽 3시쯤에 50~60명의 신도가 흰 옷을 입고 모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백남주의 설교가 끝날 즈음에 유명화에게 주의 성령이 임재하여 영계의 심판이 눈에 볼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연출되었다. 그 자리에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은 오른쪽으로 불려갔고, 그렇지 않은 신도들은 왼편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된 신도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왼편에 있는 신도들을 모두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왼쪽으로 합류시킨 후 회개와 구원에 대해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으며, ‘예수교회’라는 글씨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쓸 것’과 가운데 ‘+(십자가) 표시는 붉은 색으로 하라’는 신탁이 있었다. 22)

      2) 예수교회의 교리서 – 새생명의 길
      1933년 1월 3일에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의 이름으로 “새 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새 생명의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의 과정을 ‘삼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1시대는 구약시대, 제2시대는 신약시대, 제3시대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삼시대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서 말한 성약시대, 복귀섭리완성시대, 부활완성섭리시대, 그리고 정명석의 30개론에 나오는 실체시대와 애인시대, 더불어 이만희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서 가르치는 실상시대, 말씀시대, 계시록시대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32년 11월 28일에 평양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정된 백남주, 한준명과 이용도는 더 이상 기성교단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용도는 감리교 연회에 목사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이즈음에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백남주는 장로교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 출신 목사인 이용도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의 이름으로 ‘새 교회 창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6월 6일에서 6월 8일까지 새 교회 창립을 위한 모임이 평양교회에서 있었는데 명칭이 ‘예수교회의 창립공의회’였다.
      이 자리에는 116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총회장격인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고 예수교회 헌장 및 그 세칙의 기초위원으로 이용도, 이호빈, 백남주를 선출하였다.

      백남주는 예수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흘에 걸친 창립공의회가 끝나고 6월 9일에 평양 시내의 회중교회당에서 낮에는 한준명이 밤에는 박승걸이 각각 결혼식을 이용도 목사의 주례로 거행하였다. 유명화가 신탁하였던 그 결혼식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23)

      ▲서울시 강서구 화곡4동에 있는 예수교회 제일에배당 모습

      3) 예수교회의 현재
      지금도 1933년 창립한 예수교회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인터넷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그들은 지난 1967년 “한국 새교회 신학원”을 개원을 기념하면서 “예수교회와 스베덴보리 신학의 관계”를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한강예배당이 1971년까지 25년간 흑석동에 있다가 용산구 갈월동 남영동에 약 2년 셋방살림을 하였고 1973년에 화곡동으로 옮겨와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현재 강서구 화곡4동). 서울, 인천, 광주, 미국에 교회가 있다고 한다.

      3. 광해교회(새 예루살렘 순례단) 황국주의 사상

      1) 황국주의 출생과 활동 24)
      황국주는 1930년대 초반에 출현한 자칭 메시아 중 한 사람으로 1909년에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 아래인 누이동생 은자가 있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배재학교에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용정에서 황국주 부친은 용정 중앙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였다. 유족한 환경 탓에 황국주는 서울로 와서 사직동에 있던 법률학원(또는 법정학교)에 재학한 적도 있다.

      황국주의 용모는 잘 생겼으며 열변가는 아니었으나 설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황국주가 신비체험을 했다고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 또는 1931년이었던 것 같다. 황국주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고백하기를 30세 때에 백일기도 중 머리를 길러 내리고 수염을 기르니 그 풍채가 그림에 나온 예수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그 모양으로 교회에 나타나서 ‘내가 기도 중에 예수가 나타나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바꿔서 붙여주고 내 몸의 피를 예수의 피로 교체하여 투석시켜 주었다.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예수가 보여주신 이적도 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전부 예수화(化) 되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이 바로 ‘목가름’이자 ‘피가름’ 교리이며 황국주의 제자 정득은을 통하여 통일교와 전도관 그리고 정명석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서울에 도착한 황국주 일행은 서울,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등 전국 곳곳을 2, 3명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하였다. 황국주와 누이동생 황은자가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집회시간에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집회를 통하여 병(病)이 나은 사람도 있고 부흥회 기간에 봉헌한 헌금으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한 교회도 있었지만, 가정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녀들과 수종드는 처녀들이 황국주를 예수같이 숭배하고 돈과 정조를 바치며 음란한 집단생활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목가름과 피가름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과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종합하여 평양노회에서는 1932년 11월 28일에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 유명화를 이단으로 결의하고 부흥회 인도 금지를 하였다.

      1933년에 들어와서 황국주는 전도여행과 부흥집회 인도보다는 ‘영계’라는 월간지를 발간한다. 사장에 정중명을 세우고 자신은 편집, 발행인이 되어 1933년 11월에 창간호를 세상에 내어 놓는다. 현재 창간호 한 부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5층 희귀본 서고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김경래의 책 25) 에 의하면 김선환의 회고록을 통해서 백남주에 대한 추종자들의 상태를 볼 수 있다. 김선환은 당시 박태선 장로와 비교해서 말하고 있었다. “설교에 있어 기도에 있어 요즘 박장로의 유가 아니었다. 황국주의 얼굴은 예수님의 사진과 흡사하고 수염도 길게 길러 예수님 얼굴 비슷했다.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이라 하였다. 황국주의 기도와 설교에 감동되어 도취되지 않은 자 없었다. 그러나 황국주는 일년이 못되어서추한 냄새가 드러났다.”
      당시 황국주의 본명은 ‘국주’이지만 별명은 ‘구주’였다고 한다. 국주와 구주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황국주가 출석하는 용정 중앙장로교회의 담임목사는 문제린(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지만 그가 황국주의 이러한 종교체험과 신앙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있지 않다. 26)

      4. 이스라엘 수도원과 김백문

      초원(初園) 김백문(金百文)은 1940년대에 스승 백남주의 곁을 떠나 독자노선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립했고 ‘이스라엘 수도원(以生列 修道院)’을 이끌었다. 김백문이 1990년 12월 20일 경에 별세한 후에, 1954년 3월 2일 제3기생으로 이스라엘 수도원에 입문한 수사 신현식이 계승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재 91세의 나이로 서울시 성북구 정릉에서 ‘이생렬(以生列, 이스라엘) 기념관’과 ‘영원한 복음 선교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신현식은 스승 김백문이 직접 집필한 저서『성신신학』, 『기독교 근본원리』, 『신앙인격론』과 자신의 저서인 『자서전』, 『재림론』, 그리고 신현식의 처제인 집사 양재숙의 고희 기념문집 『같이 가자 하시던 당신이기에』와 수기『보이지 않는 손길』등의 책을 맡아 출간하고 있다. 이스라엘 수도원 제3기생인 수사(修士) 신임철이 집필한 『40년(年) 신앙(信仰)의 길』은 자신의 신앙고백과 회고담으로 엮어져 있는데 아쉽게도 비매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김백문이 남긴 세 권의 저서 가운데, 성신신학 서론에 보면 김백문은 ‘요한의 신학관’을 통하여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삼위(성부, 성자, 성신)가 일체적으로 기독교구원의 역사’를 도모하시는데 구약 시대는 성부가, 신약 시대는 성자가, 그리고 종말 시대에 성신이 각각 시대적으로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화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한 ‘기독교 삼원리서’와 인류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초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승 김백문의 사상을 통일교 문선명이 자신의 계시로 도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고 박정화는 『야록 통일교회사』에서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최선길과 함께 다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대로 도용했으며, 유효민이 도용한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김백문은 정릉 3동 산 1번지(현재는 정릉 3동 769의 5번지)에 있는 김정옥의 집으로 예배 처를 옮기게 되고, 간판을 “기독교 청수교회”로 명명하게 된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70년 10월 3일에 김백문은 『신앙인격론』을 박상래를 통하여 출판하게 한다. 이 무렵에 박상래의 권유로 통일교 초창기 핵심교인이었던 오승택 및 임승희가 청수교회에 입교하게 된다.

      1975년 이후로 신현식의 부인 양재임이 사망하고, 오승택과 임승희도 청수교회를 떠났으며 1981년에는 양재억도 사망한다. 그리고 박상래가 1982년 8월 17일에 탈퇴하니 신현식이 청수교회를 이끌어 가게 된다. 신현식이 김백문에게 교인들의 입교, 직분, 제명처분 등이 기록된 교인들의 명부를 보여드리면서 재정리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김백문이 교적부는 생명록이기 때문에 “신현식과 나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도 김백문과 동일하게 교적부를 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나오는 생명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백문은 1990년 12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기독교인 공원묘지(묘번 3456번)에 묻혀 있다.
      김백문은 재림주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을 미친 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

      5. 삼각산 기도원 정득은

      ▲정득은

      정득은의 출생연도는 1897년으로 정득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태선 전도관이 ‘세계일보’에 폭로되면서 부터이다. 정득은은 1929년 33세의 나이로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가 43세 때에 다시 독실한 신자로 돌아갔다. 정득은은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한 후에 평양에서 살았다. 당시 나이는 50세이었고, 간판이 없는 ‘광해(廣海)교회’(황국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라는 곳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정득은은 H씨 등을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H와 입을 맞추라고 하는 이상한 계시를 받게 된다. 얼마 뒤에 H가 정득은에게 다가와 계시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사실 그대로 시인을 했다. 그 뒤에 정득은은 H와 성관계를 가졌고, H는 박흥식의 장모에게서 먼저‘영체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1946년 11월 경(음력) 월남하여 서울에 도착한 정득은은 김백문의 집회에 참석도 하고 이스라엘 수도원까지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상도동 소재)에서 방호동(1921년 생)의 모자를 알게 되었고, 이들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에 집회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득은의 기도능력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연희대학교 신학부 학생 김한, 장로교인 이태윤, 남대문교회 박태선 집사 부부(후에 전도관을 세움)등이 전도되어 정득은을 추종하게 된다. 이 무렵에 정득은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방호동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받아쓰게 하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성주교 김성도와 김백문 그리고 통일교 문선명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인류최초의 죄는 천사장 루시퍼(루수벨)와 하와(해와)의 성관계를 통하여 발생했다. 창조 이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를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생령의 사람, 영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에덴복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득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에 있어 천사장 루시퍼(루수벨)로부터 인류가 더러운 죄의 피를 받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다시 따먹어 새로운 피를 받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정득은은 계시를 통해 하늘에서 택한 사람과의 영체교환을 통해 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피가름 행사를 약 1개월 동안 진행하였다.

      정득은은 6.25 동란이 일어나고 서울수복이 된 후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에덴 유치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돌보며 굶주리고 있던 인근 주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거나 죽을 쑤어 나눠주는 구호사업을 하다가, 잠시나마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담임한 적도 있다. 1949년 4월에 정득은과 결별한 신도들 가운데 기성교회에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박태선은 1955년 1월에 부흥사로 나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박태선은 자신을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말세의 메시야’로 주장하였으며 실수인 ‘십사만 사천 명만이 구원 받는다’라고 함으로 구원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

      이 교리는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만희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박태선과 정득은의 관계가 세상에 폭로되는 결정적 계기가 백영기 목사 사모인 장애삼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탈하면서 이태윤과 영체교환(혼음)을 했음을 남편에게 실토하였다. 1957년 2월 9일에 백영기와 장애삼 부부는 정득은의 친딸이 인간이하의 짓을 하고 다니는 어머니에 대해 한탄하며 제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세계일보’ 김경래 기자에게 폭로하여 박태선과 정득은의 혼음사건 전말이 드러나게 하였다. 김경래 기자는 정득은을 직접 만나 당시 의학으로 손댈 수 없는 임질 매독에 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6. 세계 평화통일 가정연합(통일교)과 사망한 메시야 문선명

      1) 문선명과 통일교
      통일교는 문선명에 의하여 1954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이단종파이다. 그는 이용도, 황국주의 후예이며, 김백문 씨가 쓴‘성서신학’과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표절하여 소위 “원리강론”을 만들었고, 정득은 노파의 범성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형성한 혼합주의적 사교의 교주이다.
      1945년 5월 : 혼음 간음죄로 구속
      1954년 5월 : 성북구 북학동 391번 초가집에서 포교시작.
      1955년 : 김영운(당시 이화여대 조교수) 외 4명과 학생 70여 명이 혼음 사건에 관련하여 기소됨.
      1960년 3월 : 나이 41세 때 18세(고2)인 한학자양과 4번째 결혼함.
      이 결혼을 ‘어린양 잔치’라 하고 한학자를 ‘우주의 어머니’ 또는 ‘참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호색적인 여성편력으로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2) 통일교의 명칭과 의미
      이 명칭이 갖는 의미는 모든 주의(ism)나 사상, 정치, 그리고 종교를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 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문선명씨의 환상적인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다.

      3) 통일교의 역사적 배경
      – 생략

      4) 통일교의 주장교리와 원리강론의 비판
      통일교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성경 외에 그들의 정경인 「원리강론」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성약서(成約書)라고 부른다. 원리강론을 신이 문선명 씨에게 준 계시의 말씀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김백문 씨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
      ① 새계시 : 원리강론을 새 시대의 새 계시라고 말하고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한다. 「씨앗(유대교)-나무(성경)-열매(원리강론)」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에 불과하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원리강론은 성경의 숨은 진리를 발견하고, 현대인에게 새롭게 해석한 것이며, 천국건설에 합당한 말씀이라고 한다.
      ② 창조원리 : 창조주를 인간과 자유로 유추해서 해석, 정의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계의 제일원인이라고 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의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을 한다.
      ③ 타락론 : 1) 영적타락-천사와 하와의 혈연관계로 인한 타락
      2) 육적타락-하와와 아담의 혈연관계로 인한 타락
      여기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심은 단지 영적 타락의 구원일 뿐이므로 육적인 타락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의 피를 가진 자와의 혈연관계의 방도(성적행위)로써 가능하다고 함.
      ④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자이며, 하나의 선지자와 같은 역활을 했으며, 아담이나 아브라함, 그 외의 구약의 여러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구원과 아울러 육적인 구원을 이룩할 재림주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 하는데, 그가 곧 문선명이라는 것이다.
      ⑤ 복귀원리 :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본래의 창조목적을 완성케 하기 위하여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참부모로 오신 재림주-문선명-에 의하여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와 피가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지금이 재림주의 탕감의 시대(혈통적탕감, 수리적탕감)라고 한다. 특히 수리적 탕감을 말하면서 ① 아담-아브라함:2,000년→탕감실패 ② 아브라함-예수:2,000년→탕감실패 ③ 예수-재림주:탕감의 시대(문선명의 신격화를 통한 인류 구원 성취)를 주장하고 있다.
      ⑥ 재림주 : 재림주(문선명)는 이미 재림(한국)하셨고, 말세는 바로 현세이며, 이 말세에는 기쁨의 한 날이 실현되는데 곧 ‘희망의 날’이라는 것이다.

      5) 통일교와 신천지(이만희)의 관계
      통일교 신도였던 진진화가 이탈하여 만든 단체가 생령교회이다.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최초의 교리서인 『신탄』은 생령교회 출신인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와 만나서 1985년도에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다. 『신탄』에서 주장하는 교리들은 통일교 원리강론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인 김병희와 김건남의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자, 이만희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 측에서는 김병희와 김건남이 이만희의 성경해석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담아『신탄』이라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에, 즉시 이 책을 회수, 폐기처분하였다고 변론을 했다. 그러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주장과는 달리 1990년대 초반까지 『신탄』이라는 책은 신도들에게 배포되었다는 증언과 자료들을 찾았고, 현재까지도 시온기독교 신학원 강의 중에 『신탄』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의 교리를 형성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계속)


      1) 천주교가 서양에서 전해졌기에 ‘서학(西學)’이라는 개념을 가졌고, 이에 반대하는 의미에서의 ‘동학(東學)’이다.
      2) 이 책은 1977년 이도은(본명 이용세)이 자신이 필사한 것이라 하며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도은은 박태선이 세운 신흥종교 천부교의 추종자이다. 학계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 책의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1977년에야 필사본이 나타난 점, 쓰여진 한자가 일본식 한자어가 많은 점, 철학(哲學)이나 공산(共産) 등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한자 조어가 사용된 점, 성경의 일부 내용이 그대로 베껴진 점 등을 이유로 남사고의 이름을 가탁한 위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3) 얼마 전에도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가 많은 사람을 미혹해서 만든 손도장 태극기를 현충원에 기증한 것과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신천지가 전도관의 후예로서 선배의 전철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4) 격암유록에 위서(僞書)인 많은 증거가 있으며, 1995년 9월 26일 방송한 MBC의 PD수첩에서도 이 부분을 다룬 적이 있다. 격암유록이 ‘고서(古書)’라면 사용할 수 없는 많은 현대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것
      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외에도 격암유록이 위서인 증거는 많이 있다.
      ① 군정(軍政) : 군사정권을 의미하는 말이며 1970년대 작품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증거이다.
      ② 도로(道路) : 조선시대의 표기법은 로(路)이며 도로는 일본식 한자이다.
      ③ 반도(半島) : 일본인들이 조선을 낮춰서 부르는 말이다.
      ④ 목욕탕(沐浴湯) : 조선시대에는 이런 표현이 없었고, 이것은 일본식 표현이다.
      ⑤ 정차장(停車場) :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정차할 만한 차도 없었다.

      5) 1930년 10월 28일에 한국 YMCA가 발족되었다. 사회계몽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이만열,「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대한기독교 출판사, 1927), pp. 260-264.
      6) 전택부,「한국교회 발전사」(대한기독교 출판사, 1987), pp. 222-224. 참조.
      7) 최중현, ‘한국의 메시아운동’, (생각하는 백성, 1999), pp.19-20
      8) 정동섭외,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 (국제종교문제연구소, 2000), p. 7
      9) 위의 책, p.20 참고로 현재 정석천은 통일교에 몸담고 있다.
      10)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신앙수기제1집 – 증언’, (성화사, 1982), p347, 최중현, 위의 책, p.21
      11)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史報157호’ p.76

      12) 신앙수기 제1집, 증언, p.347
      13) 최중현, 위의 책, p.25
      14) 김경래, ‘사회악과 사교운동’, 기문사(1957), pp. 166-167
      15) 정동섭, 위의 책, p. 10
      16)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소명하신 길을 따라’, (성화사, 1986), pp. 197-206
      17) 월간 통일세계, 1996. 6월호. p.167
      18) 정동섭, 위위 책, pp. 12-13
      19) 변종호편, ‘이용도 전집 제4권,1993, pp.161-162

      20) 최충현, 위의 책, p. 73
      21) 정동섭, 위의 책, p. 19
      22) 최충현, 위의 책, pp. 67-68
      24) 황국주에 대한 자료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최충현, 위의 책을 주로 참조하였다.
      25) 김경래의 위의 책
      26) 정동섭, 위의 책, p. 31



      허봉랑 할머니 선교사 이단성 해부

      한 독자 분의 질문으로 허봉랑 선교사를 찾아보았다.
      무려 86세나 되는 할머니로 요즘 기독교인들 사이에 꽤나 인기 있는 분이었다.
      90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며 구원의 참 복음을 전하는 할머니라면 얼마나 귀감이 되고 좋겠는가 하는 기대감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허봉랑 할머니는 용문산 출신이었다.
      우리나라 이단들의 요람이며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나운몽의 용문산에서 죽을병을 고침 받았다고 한다.
      먼저 용문산 기도원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자.

      ​용문산 기도원을 운영한 사람은 나운몽 목사다.
      나운몽은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 이단이 뭔지도 몰랐던 시기인 1955년에 각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힌 목사다.
      평북 박천 출신인 나운몽은 전쟁 전 북한 땅을 휩쓸었던 신령파의 혼합 신앙과 신비주의 사상을 그대로 남한 땅의 용문산 기도원에서 전파했기 때문이다.

      북한 땅을 휩쓸었던 신령파의 혼합 신앙과 신비 신앙을 살펴보자.

      ​전쟁 전 북한 땅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주요 인물들은 관성교의 도사(道士) 출신인 길선주와 새주파 김성도, 남방여왕 이순화, 예수 친림자 유명화 등 이다.
      이들이 북한 기독교를 무속적 혼합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원래 관성교 신도였던 길선주는 마포삼열(마펫 사무엘)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유불선 사상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에 혼합시켰다.
      길선주는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한울님, 환인이 여호와라고 주장하고 또 예수와 공자와 석가가 똑같은 성현이라고 주장했다.
      석가를 통해서는 대자대비한 하나님을 나타냈으며 공자를 통해서는 仁 義 禮 智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예수를 통해서는 사랑을 나타냈다고 가르쳤다.
      즉, 우상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켜 버린 것이다.

      ​또 김성도와 이순화는 신비한 이적들을 행하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수시로 입신하여 천사들을 보고 영계를 오가는가 하면 불치병을 고치고 귀신이 소리치고 나가며 방언이 터지는 등 온갖 신비한 이적들을 보였다.
      사람들이 이런 신비한 이적들을 보려고 교회로 몰려들어 평양과 원산에서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북한 기독교는 6.25 전쟁 후 멸절 당했다.
      김일성의 수하들에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혹하게 몰살 당하고 기독교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다.
      참된 복음과 참된 자녀가 있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키셨을 것이다.
      그러나 혼합주의 신령파들이 설치는 북한 땅에는 참된 복음이 없었고 구원 받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소돔처럼 멸망 당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북한 기독교를 망하게 한 혼합주의 신령파 신앙이 남한 땅으로 내려왔다.
      6,7,80 년대에 남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유행시켰던 유명한 부흥사들은 모두 북한의 핍박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신령파 출신들이다.
      이들 중 한명이 용문산 기도원을 세운 나운몽이다.

      ​승려 출신인 나운몽도 길선주처럼 유불선 동양사상과 기독교의 혼합사상을 전파했다.
      공자와 석가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대 선지 몽학선생"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운몽의 제자인 趙용기목사가 동국대 강연에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용문산기도원은 신령파 신앙인 치유, 귀신축사, 방언, 입신,환상 등을 남한 교회에 널리 퍼뜨렸다.

      용문산 기도원의 신앙을 살펴본 이유는 용문산 기도원의 영향을 받은 허봉랑 할머니의 뿌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봉랑 할머니는 북한을 망하게 한 신령파 신앙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1. 허봉랑 할머니는 방언의 종류가 "대신 방언, 대인 방언, 대물 방언"이 있다고 주장했다.

      ​대신 방언이란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이고, 대인 방언이란 사람에게 하는 방언이며 대물 방언이란 동물들과 소통하는 방언을 말한다.
      이러한 방언들은 평양에서 유행했다.
      당시의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방언을 주절댔다.
      이 때문에 평양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방언 패거리"라고 불렀다.

      ​북한의 신령파들은 방언을 대신, 대인, 대물, 애기,방언이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것이 남한으로 내려와 용문산에서 퍼진 것이다.

      2. 허봉랑 할머니는 용문산에서 3일 금식을 통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금식이란 구약의 율법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폐하신 율법(엡 2:15-16 골2:14)을 통해서 치유하셨을까?
      구약의 금식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
      인간이 금식하여 죄에서 돌이키고 의인이 될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영이 죽어버린 죄인의 금식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즉, 죄인의 금식으로는 죄의 흉악한 결박을 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을 대신히여 중보자로 오신 예수께서 죄인 대신 금식을 하시고(마 4:2), 죄인 대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마 4:1).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마 4:4)"는 성경말씀을 실천하시려 친히 40일 금식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위의 흉악의 결박과 멍에란 죄의 결박을 말하며 죄의 멍에를 말한다.
      죄인들은 죄의 멍에를 지고 죄에 결박당하여 사탄의 포로가 되어 멸망의 지옥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하시려 예수께서 오셔서 대신 금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묶고 있는 죄의 흉악의 결박과 죄의 멍에를 풀어주신 것이다.

      ​즉 구약의 금식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금식의 그림자이고 율법이며 십자가로 폐하신 것이다.
      그런데 허봉랑은 율법인 금식을 통하여 치유받았다고 한다.
      이 영이 성령일까? 아니다. 율법으로 십자가를 능멸하는 거짓 영이 분명하다.

      3. 허봉랑 할머니는 3일 금식 후에 온 몸이 뜨거워 지고 콧구멍에서 죄를 태우는 듯한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죽을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기독일보).

      이런 현상도 신령파들의 현상이다.
      이들은 회개하면 죄가 타는 냄새가 콧구멍에서 진동한다고 하였다. 또 죄가 더러운 가래가 되어 목으로 넘어온다며 죄를 휴지에 뱉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냄새나 가래는 마귀의 장난이다. 죄가 단번에 씻어지는 십자가복음을 가로막고 회개로 죄를 태운다고 믿게 하려는 사탄의 장난인 것이다.

      4.  허봉랑 할머니는 생각나는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강조한다.

      ​이 회개는 회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북한 신령파들의 회개이다. 신령파들은 평양의 대부흥이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자랑했다. 길선주가 도둑질한 것을 회개했고 연이어 다른 사람들도 나쁜 짓을 회개하여 부흥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나는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 회개가 아니다.머리털보다 많은 죄 중에 생각나는 죄만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죄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께서 돌이키는 것이 참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회개하라는 허봉랑 할머니의 회개는 북한 신령파들로부터 내려온 거짓 회개이며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십자가 은혜를 퇴색시키는 회개인 것이다.

      5. 허봉랑 할머니는 교회에서 하는 기도와 산에서 하는 기도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산에서 하는 기도가 훨씬 세고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산을 영험하게 여기고 산기도가 효험이 있다는 무속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즉 유불선 동양사상을 가진 길선주와 나운몽으로부터 나온 무속신앙인 것이다. 신령파들은 산기도를 중시하여 백두산과 금강산, 남쪽의 삼각산 등 영험한 산들을 찾아다니며 산기도를 했다.

      ​이런 무속 신앙이 남한의 교회로 내려와 대부분의 기도원들은 모두 산에 있다.산에서 기도할 때 기도발이 세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의 심령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즉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시다. 따라서 장소에 상관 없이 내가 있는 곳이 성전인 것이다.그러므로 기도발이 세다고 산을 찾는 것은 무속신앙이다.

      6. 허봉랑 할머니는 교회에서 통성기도 중 교회의 천장이 열리고 천사들이 금항아리(금향로)를 들고 내려와 성도들의 머리 위에 서서 성도들의 기도를 금향로에 받아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상도 북한 신령파들이 흔히 본 환상이다. 북한의 신령파들은 수시로 입신하여 환상으로 천군천사들을 본다고 자랑했다. 이 말을 곧이들은 사람들은 이들을 신령하게 여겨 신령파로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본 환상은 "헛된 몽사"라고 말씀하신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夢事)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에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렘23:25-26)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할 소수의 선지자나 사도 외에는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 환상이 성경보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상을 보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허봉랑 할머니가 본 것은 거짓된 허상이거나 사탄의 농간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7. 허봉랑 할머니의 치유 간증에 대하여 살펴보자.

      허봉랑 할머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치유 간증 때문이다. 허봉랑 할머니는 22세 때 폐병,간경화,복막염, 악성 빈혈 등 7가지 불치병이 있었다고 한다. 입원했던 병원에서 강제 퇴원 당한 후 용문산 기도원에 올라가 3일 금식하던 중 콧구멍에서 죄를 태우는 듯한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잠이 들어 12시간을 잤다고 한다. 자고 깨어나보니 신기하게 호흡이 되고 피와 거품과 고름이 다 빠져나가고 큰 냉덩어리가 쑥 빠져나가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극적인 기적에 열광하며 허봉랑 할머니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십자가를 가로막으려는 사탄의 기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신비한 기적을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
      병고치는 기적과 죄 사함을 얻는 기적 중에 어느 기적이 더 클까?

      당연히 죄를 사함 받고 생명을 얻는 기적이 훨씬 더 크다. 병고침의 기적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병은 고쳐봐야 7.80년 밖에 못 살지만 죄를 사함 받으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죄 사함의 기적을 주는 십자가복음은 가벼이 여기고 병 고침의 기적을 더 크게 여기고 치유 사역자를 따른다.

      사탄은 이것을 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병 고치는 체험을 시키는 것이다. 즉, 사탄의 목적은 구원을 막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보지 못하도록 치유의 기적에 매달리게 하는 것이다. 유명한 거짓선지자들은 대부분 큰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기적을 체험을 시키고 치유 사역을 하게 한다.

      허봉랑 할머니가 죽을병에서 치유 받은 후 치유 사역자가 되었듯 유명한 치유 사역자들도 모두 기적을 체험한다. 그 예를 살펴보자.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치유 능력을 보인 사람은 朴태선이다. 朴태선은 무려 3일간이나 소변으로 피를 쏟아내고 허봉랑 할머니처럼 콧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체험했다. 그의 치유 능력은 신문에 날 정도였다.그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했고 많은 불치병 환자를 고쳤으며 목발을 짚고 온 사람들이 버린 목발이 한 트럭씩 나왔다고 한다.이런 소문 때문에 무려 5백만 명이나 朴태선의 치유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아는 치유사역자 조용기목사도 폐결핵으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또 귀신축사로 유명한 김기동도 폐결핵으로 죽다 살아났다. 또 李재록도 불치병을 고침 받는 체험을 한 후 유명한 치유 능력자가 되었다.

      치유 능력자자들의 열매를 살펴보자.

      치유의 큰 능력을 보였던 朴태선은 말년에 "성경은 98% 거짓말"이고 " 예수는 000"이라고 욕설을 하고 죽었다.또 유명한 趙용기도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교자가 되었고 李재록 김기동은 性추행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켜 기독교에 오물을 끼얹고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게 하고 등돌리게 했다. 이처럼 치유 사역자들은 사탄의 하수인들인 것이다. 이들의 등 뒤에 사탄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치유 집회가 어떻게 구원의 십자가를 훼방하는지 살펴보자.

      ​치유 능력자들은 예수도 친히 병을 고치고 제자들에게도 병고치는 은사를 주셨으니 자신들도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짓이다.병고치는 은사는 제자들만 받았다. 사람들은 막16:17절의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의 "믿는 자"는 모든 믿는 자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가 아니다.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즉,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믿는 자"가 되면 은사를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막16:14)

      또 바울도 "다 병고치는 자 이겠느냐"라고 꾸짖으며 자신은 사도이기에 사도의 표로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았다고 말한다.(고후12:12) 예수께서는 왜 사도들에게만 표적을 행하게 하셨을까?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은사를 주신 것이다. 만일 누구나 믿는 자에게 병고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병이나 고치는 값싼 무속 종교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병 고침은 죄 사함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표적이다.

      숨은 뜻을 겉으로 드러내보이는 기적을 표적이라 한다.예수께서도 병을 고치셨지만 아무 뜻 없이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십자가복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으로 병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고 하신 후 고치셨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병이 들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으면 병이 들었다.그 율법을 살펴보자..

      ​신명기 28장 21-29절 여호와께서 네 몸에 병이 들게 하사...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리니.. ,,

      하나님께 불순종한 다윗을 대신하여 아이를 병으로 치셨으며 (사무엘하 12장 15절) 미리암도 죄를 지어 나병에 걸렸고 (민수기 12장 9-10절) 웃시아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역대하 ​26장 19절)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려 칠만 명이나 죽게 하셨다 (사무엘하 24장 15절).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때문에 병이 든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장들은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격리시켰다. 그러다 병이 나으면 제사장이 살펴보고 격리를 해제시켜주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막 1:44 눅 17:14 참조)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 병이 든 자들의 병을 고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다.(눅5:24) 즉,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표적으로 병을 고치셨다. 이처럼 병고침이란 죄 사함의 십자가복음을 나타내는 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병고치는 은사를 사용하도록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 죄를 사해야 병이 고쳐지기 때문이다.

      "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성경이 없던 시절에 사도들은 병 고치는 은사를 사용하여 병을 고치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복음을 전했다. 즉, 십자가복음을 전하기 위한 표적으로 병을 고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치유 사역자들은 병고침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그저 아무 뜻 없는 병고침을 행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고치고 귀신 쫓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경고하셨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왜 거짓선지자라고 쫓겨났을까? 죄 사함과 상관 없이 이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의 죄 사함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병을 고치셨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십자가와 상관 없이 치유 행위를 했기 때문에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버림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병이나 고치려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오직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 오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상관 없는 치유 집회나 쫓아다니고 거짓 방언이나 좇고 있다면 멸망으로 끌고가는 사탄을 좇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허봉랑 할머니 같은 거짓 선지자를 멀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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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믿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

      “종교란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이다(국어사전).”

      이런 정의들은 기독교의 ‘예수 신앙’과 공유되는 점이 별로 없다. 만일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면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다.

      파산자에게만 유효한 예수 신앙

      ‘예수 신앙’은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위에서 ‘뭔가의 상승’을 도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파산시킨 후 구원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먼저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세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regeneration, 重生)’이라 하며, ‘현재에 기반한 개량(improvement, 改良)’을 지향하는 일반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갈 3:24)’의 기능도 바로 그것이다. 죄인의 선(善), 가능성을 무(無)로 만들 뿐더러 그의 존재기반을 싹쓸이 부정한다.

      ‘예수 신앙’은 사실 ‘죽음의 직면’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해부해 보자.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고 한 율법에 의해 인간은 한 번 죽음을 선고받고, 그 후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또 한 번 ‘사망(저주)’를 선고받는다(롬 3:19). 그리고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인 ‘예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로 보건대, ‘예수 신앙’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귀결되는’ 죽음 일색(一色)이다. ‘소망’과 ‘생명’을 시사하는 그것의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 신앙’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이다.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왕의 자기 삶을 긍정하는 기반 하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갈 4:21)’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그에게는 ‘예수 죽음’이 불필요하고 나아가 구원도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다시 말하지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차력사(借力士)가 타력(他力)을 빌어 괴력을 행사하듯, 죄인이 ‘예수의 전능’을 빌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정의(定義)는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과 연합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소망’이라는 말도 오해가 없어야겠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어정쩡한 절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로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는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자 곧, 파산자(bankrupt)의 눈에만 들어온다(갈 4:23).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신앙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신앙’으로 구원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구원’으로 감겼던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 아는 것’, ‘심판’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신앙’은 단지 예수 신앙으로 그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자(聖子) 예수는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요 1:14)’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골 1:15)’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로 가면 그에게로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체(一體)이신 성부(聖父)에게로도 간 것이다. 그리고 일체이신 ‘성자’와 ‘성부’께로 가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聖靈)’께로도 가게 되니 결과적으로 삼위일체(trinitas)께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현현(顯現)’의 시작과 중심엔 언제나 ‘성자’가 계신다. 이는 ‘삼위일체’께선 ‘성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도 계시고, ‘성자’가 없는 곳엔 ‘삼위일체’도 없다. 성자를 부인하는 유대교도들(Judeas)이나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에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자’가 계신 곳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ssion, 發出)하신 ‘성령’도 계시고, 그가(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연합시키시고 ‘신자(信者)’에게 두 위(位)를 일체적으로 계시하신다.

      이렇게 ‘성부·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가 부정될 때 그것(성령)의 발출 기반이 없어지니 당연히 성령도 부정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 theology)이 일컫는 ‘성령’은 단지 ‘기괴한 악령(惡靈)’일 뿐 ‘삼위일체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을 부르는 그들의 의식이 초혼제(招魂祭)나 강신술(降神術)과 방불한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그들처럼 특별한 제의(祭儀)나 의식(儀式)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곳에 현현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성자) 신앙’역시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우리가 ‘성자 신앙’, ‘성부 신앙’, ‘성령 신앙’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성자 신앙’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신앙’은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신앙’은 ‘성령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믿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자(예수) 신앙’과 ‘하나님 신앙’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닌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으라’는 뜻이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는 자는 예수신앙을 가질 수 없고, 예수신앙을 못 가지면 삼위일체 신앙도 못 갖는다’이다.

      이는 높고 위대한 삼위일체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 현현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유 역시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아서이다.




       
      2025년 1월 19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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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라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증거라고 하겠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으로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의 피를 뿌리고 짐승은 완전히 제물로 태워버림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짐승은 멸절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죄를 짊어질 어린 양으로 보내셨다.

      둘째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라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접하다(2983) 람바노(lambanō) 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2983

      1. 취하다. 2. 손에 들다.  3. 가져가다
      발음 [ lambanō ]
      관련 성경  /  얻다(행 3:5), 담당하다(마 8:17), 받다(마 10:8, 막 12:40, 행 2:33), 지다(마 10:38), 영접하다(마 10:41, 요 5:43, 13:20), 가지다(마 14:19, 막 14:23, 요 21:13), 취하다(마 15:26, 막 12: 21, 요 19:23), 가져가다(마 16:5), 가져오다(마 16:7), 줍다(마16:9,10), 잡다(마21:35,39), 걸리다(마 22:15), 들다(마 25:1), 담다(마 25:4), 거두다(마 27:6), 빼앗다(마 27:30, 고후 11:20), 데리다(막 9:36), 입다(요13:12), 모시다(요 19:27), 받게 하다(행 8:19), 먹다(행 9:19), 이어받다(행 24:27), 있다(행 25:16), 받아 가지다(행 26:10), 얻게 하다(행26:18), 타다(롬7:8), 감당하다(고전 10:13), 세우다(고전14:5), 받게 하려하다(갈3:14), 기다리다(약 5:7), 제하다(계6:4).

      영접(迎接, Meet) : ‘영접하는 자’의 의미 /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

      귀한 손님을 맞이하려고 뛰어나가는 우호적인 주인의 태도를 말한다(창 18:2; 삿 4:18).

      창세기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에 굽혀.

      사사기 4: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어떤 사람을 인정하거나 환심을 사려고 맞이하러 나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삼하 19:20).
      그러한 만남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것이다.

      사무엘하 19: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제의적인 용법에서는 주체가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뜻이다(출 5:3; 19:17; 민 23:3).

      출애굽기 5:3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출애굽기 19:17
      모세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민수기 23:3
      발람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찌라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고하리이다 하고 사태난 산에 이른즉.

      대적인 뜻으로 쓰일 때도 있는데 주로 군사적인 적(왕하 23:29; 수 8:5, 22)이나 군사적인 적 이외의 상대(출 5:20; 7:15)를 정식으로 대면한 경우를 포함한다.

      헬라어 ‘데코마이’(dechomai)의 첫째 의미는 ‘받다’이다.

      예컨대 편지, 선물, 급료 등을 받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의 용법은 ‘환영하다, 환대를 베풀다’라는 의미에서의 ‘받아들이다’이다.
      마태복음 10:40 이하에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절들인 까닭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그리스도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똑같이 적용되었다(마 18:5-6).

      헬라어 ‘아판테시스’(apantesis)는 중요한 방문자들에게 베푼 공적인 환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환호하면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영접하는 자’의 의미 :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다.
      헬라어 ‘파라람바노’(paralambano)는 ‘누군가의 삶을 붙들거나 잡는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그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전성경사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서 인격적으로 영접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 그리고 “구세주”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사람, 훌륭한 선생,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인정합니다.
      분명 맞는 말이지만,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 충분하게 정의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은 하나님, 인간의 모습을 지닌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요 1:1, 14).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고, 올바르게 하고, 용서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이십니다.
      당신은 이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구원자란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악한 행위들을 저질렀습니다(롬 3:10-18).
      우리는 우리 죄의 결과로 마땅히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해 저지른 죄악들에 대한 공의로운 처벌은 무한한 형벌뿐입니다(롬 6:23; 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값에 대한 무한한 지불이었습니다(고후 5:21).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롬 5:8).
      예수님이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만이 단 한 명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입니다(요 14:6; 행 4:12).
      예수님을 당신의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교회 참석, 의식 수행 혹은 특정 죄들을 짓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것은 당신이 인격적으로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그분 외에 다른 것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행위들을 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에 대한 지불이었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영생에 대한 보장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3:16).
      예수님이 당신의 인격적인 구원자입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따라해보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어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8:17 / 담당하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요한복음 5:43 / 인정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3:20 / 맞아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40).
      “가져다가”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ἔλαβον, λαμβάνω)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예를 들면, “(참 빛이신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시매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1:11)에서 “영접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람바노’ 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어 놓고 영접한 것입니다.

      결혼 상대로 누구 누구를 받아 드리다(막 12:19-22)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밤에만 예수를 찾아왔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보란듯이 신랑을 맞이하고 영접하듯이, 예수님을 람바노 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빛 가운데 사는 길임을 깨닫고 믿었던 것이지요.

      paralambavnw(파랄람바노) / 데리고 오다,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παρα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3880

      1. 데리고 가다.  2. 인계하다.  3.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 λαβον: 자기 백성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음 [ paralambanō ]
      어원  /  미래 παραλήμψομαι, 제2부정과거 παρέλαβον, 미래수동태 παραλη- μφθήσομαι, 3844와 2983에서 유래
      • 1. 데리고 가다, 데려오다, 마 2:13, 막 4:36, 행 15:39.

      • 2. 인계하다, 받다, 받아들이다, 요 19:16, 갈 1:12, 골 4:17, 히 12:28.
      • 3.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 λαβον: 자기 백성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요 1:11, 고전 15:1, 빌 4:9.
      • 관련 성경 /  데려오다(마1:20), 데리고 가다(마2:13, 눅11:26, 행28:18), 모시다(막4:36), 오다(막7:4), 영접하다(요14:3), 넘겨주다(요19:16), 거느리다(행21:32), 받다(고전11:23, 갈1:9, 살전2:13). [명] 영접(요1:11).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 )는 파라()와 람바노(: 취하다, 가지다, 받다)에서 유래한 합성어이다.

      a. 파랄람바노는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다(취하다), 인계하다, 이어받다', 인격 목적과 함께, 특별히 '동료로 받아들이다', 물질적 목적과 함께, '직책을 인계하거나 이어받다' 또는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인계하거나 이어 받다'를 의미한다.

      b. 파랄람바노는 더욱 특별히 '상속하다'를 의미하며, 지적인 것들, 역사적, 과학적, 자료를 상속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c. 파랄람바노는 신비 종교들에서 특별한 의식이나 비밀 등을 전수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이 경우 그 강조점은 초자연적인 계시보다는 구전을 통한 전달이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약 4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라카흐(3947: 취하다, 데려오다, 인도하다, 22:3; 31:23; 45:18; 47:2; 23:14, 20, 27, 28; 삼상 17:31, 57; 대상 25:11)와 그리고 야라쉬(3423: 상속하다, 49:1, 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파랄람바노는 신약성경에서 4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파랄람바노는 사람을 목적어로 취할 때(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자신에게로(혹은 함께) 데려오다'(예컨대 친밀한 교제를 위해)를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절들은 이 동사가 그리스도를 세상이 영접하는 것(1:11), 그리스도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것(14:3; 24:40 이하; 17:34 이하)에 대해 사용된 경우이다.

      b. 사물을 목적어로 취할 때, 능동태는 직무를 '맡다'(4:17); '유업으로 받다'(바실레이안, 12:28)를 뜻한다.

      ① '토라에 대한 랍비의 해석의 유산을 종교적 율법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다', 7:4(정결에 대한 규율과 특별히 관련되어 나타난다).

      ② (바울에게서만 나타나는 용법으로) 한편으로 킵벨(받다)에 보다 가까이 부합하는 의미로서, 주의 만찬 제정과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기사같은 '일련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고정된 형태로 받다'(고전 11:23; 고전 15:1; 고전 15:3) 혹은 '그리스도교의 도덕률로 자리잡은 법률(즉 그리스도교의 Halakha)을 물려받다'(살전 4:1)를 나타내며, 다른 한편으로 원래의 헬라어 파랄람바노에 보다 더 근접한 의미로서, '종교적 삶의 지적·윤리적 내용을 받다', 계시를 받은 자로서의 바울의 개인적인 종교적 삶에(혹은 이런 삶의 창시자에, 1:12) '애착을 가지고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러한 삶을 물려받다'를 뜻한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이 삶이 어떤 의미에서 계시를 받은 인간으로서의 그가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런 방식으로 그 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다메섹 도상에서 이 계시를 주신 자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강조한다. 당연히 이 파랄람바네인의 내용은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전승에서 나온 규범일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의문을 완전히 면제받지 못한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에 종교적 확실성을 부여하는 내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임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에서 파랄람바노는 순전히 지적인 자료들을 받아들이는 것일리가 없다. 그것은 지적인 것 이상의 인간 존재의 핵심 부분 속으로 받아들임이다.

      이 용어의 이와 같은 의미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그 배후에 깔려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만이,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것에 관하여 제기되는 정당성에 대한 엄청난 주장, 즉 어떠한 가능한 실수도 완전히 배제된다고 한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1:9; 참조: 살전 2:13), 또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 회중들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하여 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타오르는 믿음 안에서 동일한 그리스도를 나누어가진다(2:6)는 확신을 이해할 수 있다.

      파랄람바네인은 분명히 하나님 자신에 의한 것이다. 로고스 아크네스는 로고스 데우(살전 2:13)이다. 마지막으로 포스 데이 페리파테인("마땅히 어떻게 행할 것", 참조: 살전 4:1)도 파랄람바네인의 내용에 속하며, 그것은 순전히 전승에 의한 윤리적 가르침의 형식적 수용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파랄람바네인은 모범의 감화력으로 인해 자라나는 삶의 본질과 정신을 내적으로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살후 3:64:9). 이러한 이해는 피스티스(믿음)에서,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에서 나오며, 따라서 그것을 얻는 것은 파랄람바네인 톤 크리스톤("그리스도를 받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2:6).

      ‘영접’을 이해하려면 로마시대 법을 알아야 합니다.

      ‘영접’(람바노)은 본래 로마의 새로운 황제가 부임할 때 백성들과 신하들이 황제를 군주로 ‘영접’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황제만이 오직 우리의 신입니다.”
      “황제(로마)의 법만 지키겠습니다. 거역하면 죽겠습니다.”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하겠습니다.”

      전도용어로 사용되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의 ‘영접’이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던 백성들이 그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입니다.
      그동안 로마의 법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하늘의 법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동안 황제에게만 충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모든 생각과 삶을 바꾸는 것이 영접입니다.

      전도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영접’처럼 말만 하는 립싱크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신앙으로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위한 영접이며, 믿음의 근본 교리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로 시작되는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경배의 탄성, 구하소서, 경사로다)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당시 군중들은 로마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회복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 나라를 회복시켜줄 메시야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주일날 입성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주간 동안 마지막 사역을 하십니다.

      월요일 : 성전을 정결케 하심,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저주,
      화요일 : 각종 비유를 가르치시고 논쟁하심, 가룟 유다의 변심,
      수요일 : 기사가 없음,
      목요일 :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기도,
      금요일 : 체포되어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앞에서 신문받으심,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심, 무덤에 장사되심,
      토요일 : 무덤에 머물러 계심,
      주일 :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

      예수님의 한 주간 사역은 성경 말씀을 성취하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특히 성전 정화와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오고 오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예배가 무엇이며, 신앙의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교회가 비즈니스 장이 되고 직장과 사업이 된다면 교회 정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은 하면서 열매 없는 종교 생활에 익숙하다면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가룟 유다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눅 17:2)?
      신앙생활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한 바울처럼 필자는 그런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지고 내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깨달은 만큼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종려가지를 들고 입술로 호산나를 부르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게 되면 로마 황제의 법을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란 믿음으로 당당하게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았습니다.
      그런 초대교회 사역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있습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행 19:26)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랑을 깨달은 만큼 소유하게 됩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초대교회 성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런 신앙생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만 하면서 삶의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 나무와 무엇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3~29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부활이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꽃입니다.
      옛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세례(침례)’란 과거(옛 사람)를 청산하고 새 사람(천국 백성)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입술로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에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입술로 위와 같이 고백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이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의 그 깊이와 넒이, 높이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가 너무나 감격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이 땅에 살 동안 예배도, 헌금도(십일조), 봉사도, 전도도, 너무나 감격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술사 시몬도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권능을 보고서, 예수를 믿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행 8:13)
      그렇지만 그는,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표적이 신기해서,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마술사 시몬을 책망했습니다.  
      내가 보니 그대는 악한 뜻을 품고 있으며, 죄에 사로잡혀 있소.(행 8:23)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당시에도, 세례까지 받았지만 가라지 신자가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기보다는, 다만 자기가 원하는 것(마술처럼, 성령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접한다’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고,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가 ‘영접’하지 않고서도,  (마술사 시몬처럼) 마치 자기가 ‘영접’한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우려할 현상입니다.
       
      영접한다는 의미

      첫째,
      구세주로 믿는 것

      예수의 피로 내 죄가 씻음받음을 믿는 것이요.., 구세주로 믿음

      둘째, 왕으로 모시는 것

      예수가 내 삶의 왕이요, 주인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경우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왕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으로 여전히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세주의 죄사함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음을 믿지만, 왕이요 주님으로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접한다는 말의 본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11절에, 영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힌트를 주는 설명이 나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구세주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한 가지만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주권’입니다.
      주권이란 다스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국가의 3대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
      그러니까 자기 땅에, 자기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 백성들이 구세주를,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그 주권을 인정해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 1:11절은,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자기 땅’이요, ‘자기 백성’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그 분께 왕처럼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한말 대한제국에, 영친왕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이 있었으나, 영친왕에게는 주권/통치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왕이었지만,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되, 마치 영친왕처럼 모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이면서도,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권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수를 나의 왕으로, 주님으로서 믿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마귀 사탄은 교회에 엄청난 미혹의 가라지를 뿌려놓았는데,

      (마귀가 하는 일 중에 현저한 것이 거짓말/미혹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죄를 사해 주시는 구세주로서는 믿게 합니다만,

      예수님을 왕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주권)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교묘히 가려버립니다.

       

      ‘구세주/그리스도로서의 예수’ 그것 하나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모르게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을 구원 못 받고, 지옥에 보내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사도행전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요한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주님께 배우고도.. 구원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눅13;26~27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았을지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다가는... 구원 못 받습니다.

       

      오늘날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전도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왕으로/주님으로, 섬기게/순종하게 됩니다.

      자기 속사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자기 의지적인 순종도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문둥병자 10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1명밖에 없었습니다.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인데 치료는 10명이 다 받았는데, 회개한 사람은 1명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치유사역’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내적치유’는 물론이고, 신유기도를 통한 ‘질병치료’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내적치유든지, 신유치료든지 치유받은 사람은 많은데, 회개하는 사람은 적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관심이 치유에 있지, 회개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치유를 받을지 몰라도,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아서,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치유의 복음도 필요하지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됩시다.

       

       

      ▲여러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할 수 있습니다.  딛1:16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행위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며, 또한 자기 자녀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입술로 시인하기만 해도 구원 받는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입술의 시인이 첫 단추인 셈입니다.

       

      그런데 착각해서

      ‘입술로 시인하기만 해도 구원 받는다’고 믿거나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입술만 가지고는 절대 구원 못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예수를 믿지만, 자녀가 자기의 ‘주님’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구원이 상당히 위태롭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다른 대상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녀를 떠받들어서 ‘주님’처럼 극진히 섬기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해가 됩니다.

      그것은 앞에서 서낭당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무엇이든지, 만약에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잘 되지 못합니다.

      자녀가 만약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다면,

      그 자녀는 서낭당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자기 자녀를 하나님으로 만들어놓으면.. 결코 그 자녀가 잘 되지 못합니다.

      무분별한 자녀사랑 -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자녀 사랑은,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며,

      부모도, 자녀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 중심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결국에 자녀가 잘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중점적으로 관심 기울여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 양육입니까?
      사업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일이 정말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주님’ 그 분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라면,
      혹시 그 일에, 현재 엄청난 고난이 따르더라도
      혹시 그 일에, 현재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더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존귀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녀양육/사업/주의 일 등 그 무엇을 하더라도 결국은 꺼풀을 들춰서 보면, 그 본질이 자기 영광/자기 이기심/자기 유익을 위한 일이었다면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말 것입니다. 갈6:8

      죄의 기준은, 어떤 죄악을 범하기 이전에 ‘누가 그의 주인인가?’하는 문제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죄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 솔직히,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것은 물론이요,
      그 일이 아무리 고상한 일이라도, 심지어는 자녀양육/주의 일이라도 우리가 손대는 일은, 다 망하고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이 하나님으로부터, 괜히 우리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를 위한 기독교>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에 매력을 느껴서, 교회로 몰려옵니다.
      자기 힘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성공/부자/출세/치유를 예수의 힘을 빌려서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섬깁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구원 받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로서의 예수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주님의 주되심/로드쉽’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와 이런 방향의 설교와 가르침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행복을 위한 기독교’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주님으로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문제/주제를 가지고 계속 중보기도 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지식적 차원을 넘어서, Lordship(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 마귀는 종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불렀는데, 마 4:6 등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실이다. 약 2:19참조.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입술로 고백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마귀의 교리가 있다.
      교인들이 자기 입술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만 고백하면 .. 구원받는 줄 안다.
      그것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섬겨야 한다.
      Lordship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 사람이 충분한 믿음을 가진 사람, 구원받는 사람이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만, 자기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
      즉,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
      만약에 마귀가 그랬다가는 마귀의 왕 루시퍼에게 굉장히 혼날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구원 못 받는다.
      예수의 주되심/로드쉽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만 알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예수님이 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지 않고, 그 통치에 복종해서 살지 않는 사람은 구원 받기 어렵다고 본다.

       


      (도입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새학기가 되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는 학교 방침에 따라 다음 집을 방문하려면 그 다음 집을 미리 찾아가서 가정 방문을 하도록 계획을 합니다.
      한번은 한 학생이 청파동에 있는 어느 국민 주택 단지에 거주하는 학생의 집을 방문하도록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서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다음 방문할 집을 반드시 알아놓으라고 하였는데 왜 찾지 못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학생이 전에 친구 집에 올 때는 그 앞에 똥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똥차가 없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인지 짐작하시겠지요?
      목표가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똥차는 항상 그 자리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옮겨 다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이유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또는 배고플 때면 반드시 배부르게 먹여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로는 그 가르침이 회당에서 듣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주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다!"

      불교는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를 믿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
      출생은 기원전 560년 경(사캬국 카필라바스투 룸비니 동산 - 현 네팔 룸비니 루판데히구 마야데비사원)
      사망 기원전 480년경(향년 80세)
      아버지 : 슈도다나.  어머니 : 마야부인
      계모 겸 이모 : 마하파자바티
      아내 : 아쇼다라
      아들 : 라훌라

      이슬람교는 교주 마호멧을 믿는다고 합니다.
      마호멧의 영어식 이름은 "마호메트(Mahomet)" 라고 합니다.
      출생 570년, 사망 632년 6월 8일(향년 62세)

      신천지는 교주 이만희 (李萬熙, 1931년 9월 15일 ~)를 믿고 따라갑니다.
      이만희는 경북 청도군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성경은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왜 예수 이름을 믿어야 할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1. 로마서 10:13).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예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Jesus) /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Ἰησοῦς, οῦ , οῦ, οῦν, οῦ, ὁ 스트롱번호 2424

      1. ‘예수’.  2. 여호수아. 3. 예수
      발음 [ Iē- sŏus ]
      어원  /  히브리어 3091에서 유래
      • 1. ‘예수’.
        • a. 여호수아 [모세의 후계자], 행 7:45, 히 4:8.
        • b. 예수[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엘리에셀의 아들], 눅 3:29.
        • c. 예수 그리스도, 마 1:1, 21, 25 등.
        • d. 예수 바라바.
        • e. Ἰ. ὁ λεγόμενος Ἰοῦστος : 유스도라고 불리는 예수, 골 4:11, 몬 1:23.
      • 관련 성경  /  예수(눅 3:29), 여호수아(행 7:45, 히 4:8).

      * 히브리어 3091.  יְהוֹשֻׁעַַ 스트롱번호 3091

      1. 여호와의 구원 : 여러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여호수아’.  2. ‘눈’의 아들로서 모세를 계승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사람
      3. ‘스룹바벨’ 당시의 대제사장
      발음 [ Yehôwshûwaʽ ]
      어원 / 3068과 34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8회 사용
      • 관련 성경 /  여호수아(출 17:9, 24:13, 삼상 6:14, 18, 왕하 23:8, 슥 3:1, 학 1:1, 12).
      * 3068. 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 1961. הָיָה 스트롱번호 1961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hâyâh ]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 3467. יָשַׁע 스트롱번호 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105회 사용


      둘째, 그리스도(Christ) /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 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 1:1
      발음 [ Christŏs ]
      어원 / 5548에서 유래
      • 1.  ‘그리스도’.
        • a.  [칭호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 마 2:4, 눅 3:15.
        • b.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마 1:1, 막 1:1, 요 1:17.
      • 관련 성경 /  그리스도(눅 3:15, 요 1:17).

      * 5548.  χρίω 스트롱번호5548

      1. 기름 붓다.  2. 기름 바르다. 3. 눅 4:18
      발음 [ chriō ]
      관련 성경 /  기름을 붓다(눅 4:18, 고후 1:21, 히 1:9).



      셋째, 임마누엘(Immanuel) /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 - 함께 계시다
      누 - 우리
      엘 - 하나님

      Ἐμμανουήλ, ὁ 스트롱번호 1694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 누엘’.  2. 마 1:23.
      발음 [ Ĕmmanŏuēl ]
      어원  / 히브리어 6005에서 유래
      •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 누엘’, 마 1:23.
      • 관련 성경 /  임마누엘(마 1:23).

      * 히브리어 6005.  עִמָּנוּאֵל 스트롱번호 6005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 메시야의 별명 ‘임마누엘’.  2. 사 7:14.  3. 사 8:8.
      발음 [ ʽImmânûwʼêl ]
      어원 / 5973과 4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메시야의 별명 ‘임마누엘’, 사 7:14, 8:8.
      • 관련 성경 / 마누엘(사 7:14,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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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12일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1:12) -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권세를 사용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자냐가 되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 청각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아들
      듣지 못하는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는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는 믿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는 확신합니까?

      권세(權勢)라는 헬라 단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에쿠시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어느 도로에서 교통경찰이 과속차량 및 위법 차량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교통 경찰은 아주 왜소합니다.
      커다란 트레일라가 경찰이 손으로 들고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면 즉각 가던 길에서 멈춥니다.
      힘으로 비교하면 경찰은 트레일러에게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일러가 멈추는 까닭은 교통경찰에게 부여된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레슬링 선수가 도로에 서서 손을 든다면 트레일러가 멈출까요?
      레슬링 선수가 교통 경찰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몸도 아주 좋지만 레슬링 선수의 손짓은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이렇게 선포하면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 즉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은 깨끗하여 질지어다!"

      (도입 이야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인노센트 4세가 말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과 금은 넘쳐날지라도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행 창고와 같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은행 창고가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충고를 들어야 한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륫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키에르케고르도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집중(集中)하는 기도

      1. 한나의 기도(사무엘상 1:10-11. 2:1-10)

      2. 블레셋 진영에 붙잡혀 두 눈이 뽑힌 삼손의 기도
      3. 아브라함의 기도
      4. 다윗의 기도


      집중하는 가장 좋은 기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

      첫째.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둘째.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나의 뜻을 예수님의 뜻에 맞추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것이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셋째.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넷째.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다섯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섯째.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찾아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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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어로 테레우오(Thereuo)의 의미 탐구

       θηρεύω 스트롱번호 2340

      1. 사냥하다.  2. 잡다. 3. 눅 11:54.
      발음 [ thērĕu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θήρευσα, 2339에서 유래
      • 1. 사냥하다, 잡다, 눅 11:54.
      • 관련 성경 /  잡다(눅 11:54).
      1. 사냥하러 가다, 사냥하다, 사냥하다
      2. 은유. 기다리다,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애쓰다, 능숙하게 붙잡다

      성경의 맥락에서 Thereuo는 그리스어로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스어 “테레우오”(θεραπεύΩ)는 “치유” 또는 “치료”를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육체적 치유, 영적 회복, 예수와 추종자들의 기적적인 행위 등의 맥락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다양한 성경 구절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치유의 문화적 중요성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테레우오의 뿌리

      Thereuo의 전체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 뿌리를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단어는 “봉사하다” 또는 “헌신하다”를 의미하는 “therapeia”(θεραπει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보살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치유가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또한 감정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포함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의사가 행한 치유는 종종 신에 대한 봉사의 한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치유는 신성과 영성의 개념과 복잡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Thereuo가 신약에서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높여줍니다. 신약에서 치유 행위는 종종 신성한 힘의 순간과 일치합니다.

      테레우오의 성서적 맥락

      신약성서에는 테레우오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각 사례는 치유의 독특한 측면을 반영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병자의 치유

      테레오의 두드러진 사용 사례 중 하나는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이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색 질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에게 눌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러므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질병의 범위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테레오는 치유 행위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질병만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영적인 치유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의 개념은 육체적 질병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영적 치유의 맥락에서 테레오는 믿음과 용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5장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치유는 믿음과 용서의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치유에는 몸, 마음, 영 등 사람 전체가 관련된다는 생각이 강화됩니다.

      사도들의 치유 사역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사도행전 3:6은 "베드로가 이르되 내게는 은과 금이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에 따라 치유를 행할 뿐만 아니라 치유가 예수님의 사명의 연속이라고 확언합니다. Thereuo라는 용어는 사도들에게 부여된 이 신성한 권위를 요약하며, 초기 교회에서의 치유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심의 표징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치유의 문화적 중요성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치유는 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신념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종종 질병을 신의 형벌이나 영적 전쟁으로 일축했습니다. 따라서 치료사의 역할은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달래고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Thereuo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 문화적 배경과 공명합니다. 영적 신념에 젖은 세상을 마주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치유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신앙과 사명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의 치유는 그의 정체성과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신학적 의미

      Thereuo의 사용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병을 고쳤을 때 그들은 단순히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치유는 창조의 온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갈망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복음서에서 치유에 대한 일관된 강조는 영적 변화에 대한 은유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병을 고치신 것처럼, 그분은 인류에게 영적인 쇄신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측면에서 깨어진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맥락에서의 치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테레오의 의미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기적적인 치유가 흔하지는 않더라도 치유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표현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반영하면서 기도와 공동체를 통해 정서적, 영적 치유를 추구합니다.

      테루오를 이해하면 정서적 지원, 환자 돌보기, 영적 지도 등 다양한 형태의 치유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유형적 수단이든 영적인 격려를 통해서든 치유하라는 부르심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적절하고 필수적입니다.

      결론 : 치유사역을 받아들이다

      Thereuo의 탐험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경적 맥락에서 치유의 전체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육체적 질병부터 영적 회복까지, 테레우오(Thereuo)는 기독교 신앙에 내재된 연민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치유 사역에 참여하면서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육체적 치유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의 회복을 촉진하도록 격려하는 야고보의 말을 기억합시다. Thereuo는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행동 촉구이며, 우리 지역 사회와 세상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치유 사역에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Q. 테레오를 그리스어로 직역하면 무엇인가요?
      A. 테레오(Thereuo)의 문자 그대로 번역은 “치유하다” 또는 “치료하다”입니다.

      Q. 신약성서에서는 테레오(Thereuo)가 어떻게 사용되나요?
      A. Thereuo는 주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신체적, 영적 치유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Q. 테레오는 육체적인 치유만을 말하는 건가요?
      A. 아닙니다. 테레오는 육체적 치유와 영적 회복을 모두 포함합니다.

      Q.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치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A. 치유는 신에 대한 봉사로 여겨졌으며, 이는 종종 의학과 영적 신념을 모두 포함했습니다.

      Q.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테루오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예수님의 치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며 자비의 행위를 통해 그분의 왕국이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Q. 신약성서의 테레오와 현대 치유 관행 사이에 유사점이 있습니까?
      A. 그렇습니다. Thereuo는 오늘날 지속적인 치유 요구를 반영하여 환자에 대한 신체적 돌봄과 정서적, 영적 지원을 모두 권장합니다.

      Q. 테레오의 맥락에서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A. 기도는 치유를 불러오는 수단으로 강조되며, 육체적, 영적 안녕을 회복하는 신앙의 힘을 강조합니다.

      Q. 테레오에 따르면 평신도도 치유에 참여할 수 있나요?
      A. 그렇습니다. 치유의 개념은 모든 신자들에게 확장되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지원하도록 격려합니다.

      질문. Thereuo에 대한 이해가 건강과 웰빙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A. Thereuo를 인식하는 것은 몸과 마음,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Q. 신자들은 Thereuo라는 개념에서 어떤 격려를 찾을 수 있습니까?
      A. 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지역 사회 내에서 치유에 기여하는 능력에서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θεραπεύω 스트롱번호 2323

      1. 섬기다.   2. 행 17:25. 3. 돌보다
      발음 [ thĕrapĕuō ]
      어원  /  미완료 ἐθεράπευον, 미완료 수동태 ἐθεραπευόμην, 미래 θεραπ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θεράπευσα, 완료 수동태분사 τεθεραπευ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θεραπεύθην, 2324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섬기다, 종이 되다.
        • a. 섬기다, 행17:25.

        • b. 돌보다, 시중들다, 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 마4:24, 8:7,16, 10:8, 막1:34, 눅4:23등.
      관련 성경 / 고치다(마 4:23, 막 1:34, 눅 10:9), 고쳐주다 (마 8:7, 12:22, 눅 14:3), 병 고치다(마 12:10, 눅 13:14), 섬김을 받다(행17:25), 나음을 얻다 (행 5:16), 고침 받다(눅 8:43, 13:14), 병 낫다 (요 5:10, 행 4:14), 낫다(행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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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본문에서 표적이란 헬라 단어는 "세메이온"이라고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다.
      표적이란 헬라 단어를 살표봅시다

      세메이온(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sēmĕiŏn ]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 12:12)



      테라스(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059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tĕras ]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295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thauma ]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표적이란 요어가 주로 요한복음에서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라고 소개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는 왕으로 오신 메시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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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16:31)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도를 위한 여정에서 뜻밖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방중이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감옥에 갇혔던 죄수들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옥문이 열리며 옥에 갇혔던 죄수들은 모두 감옥 밖으로나갔지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감옥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당시 제도는 죄수를 지키다 그 죄수가 도망하면 죄수를 지키던 간수가 대신 처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상황을 파악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은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간수는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간수의 놀라운 결단은 바울과 실라가 옥문이 열렸을 때에 다른 죄수들처럼 감옥 밖으로 도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이 바로 예수를 믿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현실적인 상황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인의 현주소가 분명해야 합니다.


      19~23절 :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 그 종의 주인들이 자기들의 수입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시장거리의 관원들에게 끌어간다.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사람들인 우리가 받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고 하면서 바울과 실라의 전도 행위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 고발한다.
      그러자 흥분된 군중과 관원들은 재판도 열지 않고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친 후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해서 순종하고 왔다. 회당도 없는 곳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겨우 기도처를 찾아가 여자 하나 전도했다. 그리고는 또 하나 점하는 여종의 귀신을 내쫓고는 죽도록 맞고 감옥에 갇힌 꼴이 된 것이다.

       

      24~34절 : 한밤중에 전신의 고통 가운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가 현재의 형편을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이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졌지만 그래도 하나님밖에는 해법이 없다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그들의 눈이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그러자 찬양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온 몸에는 채찍의 상처로 고통스럽고, 차꼬에 매여 꼼짝달싹도 못하는 그 고통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바라볼 소망이 있었고 위로를 경험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자 지진이 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땅이 움직였기 때문에 모든 장치가 틀어져서 더 작동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옥문이 자동으로 열린 것이다.
      또 바울과 실라의 발을 묶고 있었던 차꼬가 풀렸다는 점이다.
      열쇠 아니고는 풀 수 없는 것이 풀어진 것이다.
      그것도 모든 죄수의 것까지 풀린 것이다.
      거기다 모든 죄수들이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간수는 감옥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자결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울과 실라의 외침에 자결하려던 것을 멈춘 간수가 감옥을 살피게 되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0~31절, 새번역)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주인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상을 섬겼고 왕을 퀴리오스로 섬겼고 돈을 섬겼고 점보는 여종의 귀신을 섬겼지만 이제는 주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복음을 들은 간수와 그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는다.

      35~40절 : 치안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려 하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밝힌다.

      그러자 치안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두려워한다.
      로마 시민을 때린 행동은 범법행위이고 상부에 보고 되면 문책감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데리고 나가서,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청하였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빌립보를 떠나게 된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은 옥터가 흔들리는 지진 속에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린 것이다. 거기다 죄수가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루디아와 여종과 간수 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주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은, 그들 인생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가장 큰 기적은 복음을 듣고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다.
      죄의 종, 마귀에게 얽매여 살아가던 자,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자의 눈을 뜨게 하셔서 생명의 주님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루디아와 여종과 간수로 하여금 진정한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게 하셨듯이 주님께서 내게도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노래하던 자가,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네요’를 고백하며, 억지가 아니라, 그것을 기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
      복음을 듣고 또 들으며, 매일 생명의 교제를 하며 사는 자는 기적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무진장 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것이 찬양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보내셔 놓고, 이렇게 하심이 맞습니까?’ 항변할 법도 한데, 원망은커녕 주님께 맡기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내 주인이 되었으니, 주인이신 그분이 맡아서 해 주실 것을 믿으니 얼마나 홀가분할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고 그것을 절망의 탄식으로 아뢸 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알고 생명의 교제를 하면서 이만큼 살아보니 자녀들에게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공부 잘 하고 똑똑하기를 바란다.
      그 이유를 처음에는 소박하게 말한다. 험한 세상에서 자신의 앞가림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하지만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부모나 자식이나 그 욕구가 점점 강해진다.
      그러나 그것에 매여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이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종말의 이 세상인데, 마치 영원히 이어지는 듯 생각하며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오늘 바울 사도의 음성이 다시 가슴을 뛰게 한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 이것은 내 실력으로는 절대 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기적의 하루를 살아간다.

      * 죄(罪)는 내가 주인되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고 인정하고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아직도 내가 주인으로 앉은 자리를 확인해야 한다.
        내 생각, 내 언어, 내 행동, 내 습관, 내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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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도입 이야기)

      어느 여름날 들판에서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저녁이 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일이란게 뭐야?"
      그렇게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개구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라는게 뭐니?"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을리가 없죠.
      또, 메뚜기 역시 한 해에만 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하니까 내년이라는 말을 알 수가 없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또는 경험이 전부라고 믿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영생을 받았습니까?
      영생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 믿는다는 것은 맡기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고 합니다.
      찰스 브론딘이라는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외줄타기를 한다고 광고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젊은 곡예사가 외줄타기를 마친 후에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이번에는 제가 제 등에 사람을 업고 이 외줄을 건너려고 합니다.
      제가 사람을 업고 이 외줄을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성을 지르며 믿는다고 하며 얼른 시도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중에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에게 제 등에 업히시겠습니까? 하고 제안을 합니다.
      그 어르신은 나는 나이가 많아서 겁이 많아요 젊은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젊은이에게 부탁을 하지 나는 내일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 곡예사의 등에 업히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연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고보서에서는 행도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맡기려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던져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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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 - 예수를 믿는 이유(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만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또는 “당신이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 믿는 이유를 성경에 근거해서 “나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믿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서울행 기차를 타고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지식은 몰라도 예수 믿는 이유만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성장한 교회는 서울역 앞에 위치한 남대문교회입니다.
      제가 성장할 때에 담임목사님이셨던 고 배명준목사님께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긴 시간 여정을 위해 옆에
      앉은 승객과 인사를 나누고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 같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혹시 사업하십니까?" 라고 대답하여 마음속으로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어떻게 장사꾼으로 보이는가?

      여러분을 누군가 지켜본 후에 당신은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군요!
      이런 말을 듣는다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멸망 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 가운데 첫 번째는 우리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흑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검은 피부를 갖고 태어나고, 백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흰 피부를 갖고 태어납니다.
      이는 태어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결정됩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동일한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했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하나같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6일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되던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어 아담의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간교한 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함으로 둘 다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식물을 얻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게 되었고,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영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육신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세상에 사망이 임한 것은 아담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사망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범죄하였고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엡 2:1).
      그뿐 아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도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출생할 때부터 그 가슴에 죽음의 씨를 품고 그것을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죽음을 모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병자는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아야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받고 살 수가 있지,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하면 병이 깊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토록 죄에 대하여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지, 자신에게 부처가 있음을 발견하기만 하면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는 사람이 본래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세상 종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늪에 빠진 사람더러 제 힘으로 거기서 나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힘쓰고 애쓸수록 더 사정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우선 자기의 노력을 멈추고 밖에서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죄의 깊은 늪에 빠진 인생들을 구하기 위해 보냄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므로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자선을 베풀어도 그런 것으로 자신의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수양을 한 사람은 수양한 죄인이요, 도를 닦은 사람은 도 닦은 죄인이요,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은 자선을 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중세에는 연금술이 유행했습니다. 연금술이란 철이나 구리나 납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합니다. 값싼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처럼 매력적이고 수지맞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연금술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진주가 될 수 없고, 유리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어디까지나 유리일 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듯이, 죄인은 아무리 자신을 꾸밀지라도 죄인이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훌륭한 성현들이 적지 않게 출현하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다 사망에게 삼킨 바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죽었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도 죽었습니다. 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죽었습니다. 석가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들이 지금도 세계의 여러 유명 사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으며 매년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냅니다. 마호메트의 무덤은 아라비아의 메디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참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사망에게 삼킨바 되고서야 어찌 남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예수님과 같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죽어 사람들이 메고 무덤으로 가던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청산하셨음을 입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으며,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은 곧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냐, 아니냐?”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메시야 대망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뱀은 계시록 20장 2절에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하신 대로 사탄 또는 마귀를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와 상관없는 무죄하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속하실 메시야는 죄가 없는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고 했는데, 이새는 곧 다윗 왕의 부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호칭할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메시야께서 행하실 기적에 대한 예언입니다.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기적은 아무나 행할 수 없고 오직 메시야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일컬어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곧 메시야이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의 표적은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기적을 셀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께서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마음이 병든 자들, 마귀에게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동리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신 후에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으며, 죄와 인습에 매인 자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멸시 받던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죄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면서 천국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장벽이 가로막혀서 감히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야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경은 구약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보지 못했으나 멀리서 바라보며 기뻐했다고 증거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비교해 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의심 없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성도들에 비하여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시,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혹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이유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은 성경을 더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비기독교인 가운데도 성경을 애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훌륭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찾아냅니다. 또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문학적인 표현에 감탄합니다. 또는 히브리 민족과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영생의 진리에 관해서는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왜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과 같이 믿는 친구가 좋아서 교회에 따라 나오기도 합니다. 또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축복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존경한 나머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은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점점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영생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장차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계시록 20장 11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각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에 서서 두 가지 책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를 기록한 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고 이름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습니다.
      행위록은 생전에 우리 각자의 행실을 기록한 것인데 그 책에 기록한 대로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생전에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을 행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으면 불못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조건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영생과 영벌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 사실처럼 위대하고 복 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주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이유’에 대하여 누구 앞에서나 분명하게 대답하실 수 있게 되셨을 것입니다.
      주 예수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믿는 이유를  증거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어떤 모습일까?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중요한 목적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의 예수

      마태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마가복음의 예수

      마가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을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누가복음의 예수

      누가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을 인자복음 즉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요한복음의 예수

      요한복음의 예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래퍼 비와이가 최근 한 시상식에서 성경 말씀을 나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복음의 장엄한 시작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비와이가 믿는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나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사순절을 맞아 복음서의 예수를 만나보자. 사복음서의 이해를 넓혀줄 새 책들을 소개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예수의 생애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명한다. 요한복음 1장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란 구절을 읽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야곱이 벧엘에서 꿈꾸는 장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창 28:12)란 말씀이 연상된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야곱의 사다리 이미지가 떠오르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 이스라엘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원천인 예수를 언급한다. 예수는 새로운 야곱이다. ‘요한복음의 예수’에선 이렇게 구약의 이야기와 연결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찾고 이를 과거 이스라엘 이야기에 비춰 해석하게끔 이끌어간다.

      저자의 해석으로 보면 요한복음은 둘로 나뉜다. ‘표적의 책’이라 불리는 전반부와 ‘수난의 책’ ‘영광의 책’으로 불리는 후반부다. 전반부에서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빠르게 전하다 13장인 후반부부턴 수난과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에 집중한다. 90쪽 분량의 소책자를 덮고 나면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마음이 든다.

      복음서와 만나다는 사복음서의 특징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부제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가 암시하듯 이 책은 복음서의 저자 네 명이 그린 네 개의 예수 초상화를 해석하고 있다.
      고전학자인 저자 리처드 A 버릿지는 복음서를 고대 전기문학으로, 저자를 문예가로 이해한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는 각각 포효하는 사자, 이스라엘의 선생, 짐을 지고 가는 힘센 소, 높이 나는 독수리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는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 전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의 여러 초상화를 예로 든다.
      각각 다른 상황의 처칠을 그리고 있지만 모두 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마가가 그린 예수는 ‘다이너마이트처럼 강한 폭발력을 지니고 활동하는 인물’이다(93쪽).
      권력자들과의 갈등이 자주 나온다.
      마태가 그린 예수는 ‘인간의 얼굴을 한 하나님’(177쪽)이다. 이 모두가 예수다.

      버릿지는 적절한 비유와 활기찬 문체로 사복음서의 차이를 설명한다.
      예수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지한 신앙인과 신학 연구자에게 모두 매력적인 책이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는 지난해 국내에 소개돼 주목 받았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의 저자인 케네스 E 베일리의 대표작이다. 원제는 ‘시인과 농부’(Poet & Peasant)이고 부제는‘누가복음 비유의 문학적·문화적 접근’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농부의 입장에서 누가복음에 나온 예수의 네 가지 비유를 설명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탕자의 비유, 잃은 양 비유 등을 예수가 살았던 중동의 농경문화 속에서 문학적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비유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요한복음은 대표적 큐티집 ‘매일성경’ 편집장을 지낸 박대영 목사의 요한복음 6∼12장 강해서다. 박 목사는 “요한복음은 지금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오늘 누리고 있는 영생을 미래에 완성될 종말보다 더 강조해 ‘실현된 종말론’의 성경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의미와 적용점을 각 장별로 안내하고 있다. 영원의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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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사도행전 2:21.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And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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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예수는 믿음의 주(히브리서 12:1-8)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분통이 터져도 참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애써 웃으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하는 상황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버텨야 할 순간순간이 자주 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과 핍박을 받고 죽어야만 했다.

      ​예수님을 믿는 나는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느 수준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예수님 때문에 내 자존심, 내 생계, 내 스펙, 내 즐거움, 내 가족, 내 생명 등 모두 빼앗길지라도 그래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히브리서는 초지일관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 어떤 타협도, 그 어떤 협상도, 그 어떤 물러섬도 없이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시다'라고 선포한다.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기쁨이 있는가?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감격이 있는가?
      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에게 소망이 있는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우리가 가진 처음 확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확신 위에 서 있기를 원한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보게 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 것처럼 보게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고, 이 믿음으로 죽었다.
      현재 내 상황이 죽을 거 같고, 너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앞이 캄캄해서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믿음으로 진리를 바라보자.
      그리스도인은 사실과 상황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믿고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수도 없이 넘어지고, 수도 없이 흔들리고, 수도 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저 멀리서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형제자매들, 식구들이 우리를 열렬히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끝까지 달리기 위해선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무엇이 나를 무겁게 하며, 무엇이 나를 얽매이게 하는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끊어내야 한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께 집중하고 싶어도 머리를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내가 예수님께 마음을 쏟고 싶어도 가슴을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내가 예수님께 의지적으로 달려가고 싶어도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알고 끊어내야 한다.
      이런 짐은 그때그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체크하여 우리의 영혼을 가볍게 해야 한다.

      ​이런 무거운 짐이 계속 쌓이는 이유는 얽매이게 하는 죄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죄다.
      내 생각의 주인, 내 감정의 주인, 내 의지의 주인, 내 생계의 주인, 내 관계의 주인, 내 건강의 주인, 내 선택의 주인, 내 음식의 주인, 내 의복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주인이 되어서 끊임없이 내가 나서게 되는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 무거워지게 되고 자유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자유함이 없게 하고, 눌리게 하고, 틀에 갇히게 하고, 매이게 하는 모든 것을 전부 끊어버리고 우리가 가야 하는 이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완주해야 한다.
      이렇게 가볍게 해야 지치지 않고, 인내하며 달릴 수 있다.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뛰지도 못하고 매번 주저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믿음의 시작이 되시며, 믿음을 완성하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것이 무거운 짐과 얽매이는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을 보고 지금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지금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서 달려오셨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참고 끝까지 완주하셨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우리를 보시면서 마치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기뻐하셨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을 기뻐하셨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고, 십자가를 참으셨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완주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분명한 목적지를 바라보고 뛰어야 한다.
      '죄인의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주인이시며, 믿음을 완전하게 하실 예수님도 이 길을 쉽게 가시지 않으셨다.
      수많은 공격들, 수많은 아픔들, 수많은 배신과 조롱, 수많은 배고픔과 헐벗음, 수많은 시험들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래야 그분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래야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다.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
      죄와의 싸움은 피 흘리기까지의 싸움이다.
      팔 다리가 잘려나가도, 머리가 잘려나가도 결코 항복해서는 안 된다.
      때론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패배와 항복은 다르다.
      패배했을지라도, 다시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항복은 영원한 죄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와 끊임없는 싸움이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내 감정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지 않고, 내 의지를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내 모든 것, 내 모든 영역, 내 모든 시간, 내 모든 물질, 내 모든 호흡이 전부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어야 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이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자!

      히브리서 12장, 새번역

      5.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7.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날보다, 패배하는 날이 훨씬 더 많다.
      예수님을 보면서 물 위를 걷다가 주변의 파도와 바람을 보면서 두려워하여 물에 빠진 베드로처럼 우리의 믿음이 굉장히 좋은 거 같으면서도 상황과 현실 앞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내 믿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것저것 다 잘 하고, 최선을 다해 잘 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믿음이 좋은 것인가?
      아니다.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믿음까지 주님께 드린 사람이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이 붙들어 주셔야만 끝까지 붙어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다.

      ​가장 온전한 믿음이란 믿음으로 담대하게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한 믿음을 주님이 붙잡아 일으켜 인도함을 받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다.
      물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내 믿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앞에 있는 예수님만 보면서 처음에는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베드로라고 해도, 그의 시선이 바다로 향하는 그 순간 꼬꾸라지는 것이다.

      ​진짜 믿음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징계하신다.
      '왜 의심하느냐?' 하시면서 꾸짖기도 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신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나의 믿음조차 주님께 있구나, 예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님 저를 꽉 붙잡아 주세요!'라고 고백하게 된다.

      ​고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없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파도가 불어왔고, 앞으로도 더 거센 미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
      마치 물 위를 걸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길이 될 수 없는 곳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대단한 사람은 베드로처럼 예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걸어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센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럴 때마다 붙잡아 주시는 우리 예수님이 계시다.
      이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놓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시고, 우리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신다.
      정말 믿음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인데, 이런 나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붙잡고 인도하신 것처럼 거기까지, 하나님 나라까지, 예수님의 품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나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나의 믿음을 완성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은 우리를 믿고 계신다.
      '나의 자녀가 이 시험은 뛰어넘을 수 있을 거야, 나의 자녀가 이 죄는 이길 수 있을 거야.'라고 믿고 응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나 넘어진다면 다시 일으켜주시며, 뛰어넘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훈련시키실 것이고 응원해 주실 것이다.
      나의 믿음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믿음을 완성하실 것이다.
      내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나를 책임지고 붙들어 주실 것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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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물인가?

      (행 16:31, 엡 2:8-9, 롬 10:17)

      과연 믿음은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물인가?

      오늘도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산다고 할 때, 내가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주셔서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즉, 내가 믿기로 한 것인가? 아니면 믿어지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고 답한다.

      믿음은 내가 믿기로 결정해서 시작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을 받아서 그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자라는 것이다.

      (1) 믿음은 인간의 결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성경구절(요 3:16)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 자마다] 이 말은, 내가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내가 믿지 않기로 결정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분명히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내가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도 주 예수를 믿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을 거부한 채, 믿지 않기로 선택하고 결정하면

      예수 없는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원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정] 이다.

      내 인생의, 그 어느 한 순간에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모멘트(순간)의 사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믿어지는 때를 기다리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수 있다.

      (2) 동시에 믿음은 [선물] 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성경구절은 (엡 2:8-9)이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믿음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약 2:1)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여기서도 믿음을 받았다고 한다.

      (살후 3:2) 믿음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다 믿더라.

      이 말씀들에서 믿음은 인간 의지의 작용으로 선택하여 내가 믿기로 결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야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믿음을 주셔야 믿음을 갖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봅시다.

      (롬 10:17)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 안에는 믿음의 양면성이 다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러니까 우리가 듣지 않기로 결정하고 귀를 막아 버리면, 믿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러버려도 믿음은 생성되지 않는다.

      믿음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믿음들음에서 나며...]

      여기서 들음이라는 말 대신에 [깨달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믿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 난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아예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결코 생겨나지 안는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신념도 그 자체로서는 대단한 위력이 있다. 그렇지만, 믿음과 신념은 다르다.

      그러나, 믿음을 정신력의 산물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산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 말씀깨달아질 때 내 마음 안에서 성령이 역사해서

      생성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외면하고, 듣지도 않기로 결심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리지도 않고,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다.

      의지력을 굳게 하고, 정신력을 굳게 한다고 믿음이 굳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생성하게 되는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니,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의 전반부는 믿음은 결정라는 말이고,

      후반부는 믿음은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믿기로 결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열어야 그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깨달아지는 말씀 때문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Cf) 아무 것도 안 들었는데, 저절로 [믿음]이 내 속에서 툭하고 생겨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전체를 대표하는 성경구절은 (롬 1:17)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From Faith to Faith : 믿음에서 믿음으로...

      처음도 믿음, 중간도 믿음, 나중도 믿음이다

      원문에 가까운 다른 번역 :

      Through Faith for Faith : 믿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것은 통로로서의 믿음에서 실체로서의 믿음이다.

      즉, 믿음은 내가 믿기고 결정할 때, 그 때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의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로서, 믿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화) 빌리 그래함 목사님 (지난 한 세기 동안 최대의 복음 전도자)

      1928년 출생하여 ∼ 2018년 2월에 소천하심. 꼭 100년의 생을 사셨다.

      그도 처음부터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간 것은 아니다.

      그도 청년 시절에 믿음의 회의와 의심이 있었다.

      그가 가까이 교제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불가지론자들, 회의론자들이 있어서,

      그들과 대화하다보면 믿음이 흔들거림을 느끼고

      신앙의 회의와 갈등을 느끼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 청년 빌리 그래함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내가 언제까지 믿음과 의심의 사이에서 방황할 것인가?]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이 성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믿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때부터 확고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해서 그 믿음 가지고 온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지난 세기에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은 믿기로 결정하는

      믿음의 출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Cf) 언제까지나 100% 다 알아보고 믿음을 결정하겠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믿기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어느 한 순간, 믿음의 결정을 내리는 모메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화) 두 개의 책을 소개한다. (저자 : 멀링 게도로스) :

      1) prison to praise (감옥 생활에서 찬송 생활로)

      2) Power to praise (찬송 생활의 권능)

      군목 출신으로 자기 간증을 수록한 책. : 군목으로 수 많은 군인 가족들의 애환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으로 찬송생활을 하게 되었는가를 기록한 간증책이다.

      그런데 이 두 책의 주제는 같은 것이다. (살전 5:18)이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 인생에는 좋은 일도 오지만, 슬픈 일, 괴로운 일, 고통스러운 일, 비참한 일들이 생길 때,

      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감사>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

      (롬 8:28)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이 책들의 주제이다.

      인간적으로는 감사할 수 없다.

      불평과 원망과 짜증이 나타나고, 세상을 저주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찌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나는 무조건 <감사하며 살리라>하며 결정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를 기록한 두 개의 책이다.

      이 두 책을 [강추] 강하게 추천합니다.

      우리는 사실 내 인생을 다 알지 못한다.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믿기로 결정하면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내 주시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감사>와 <찬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과 의심의 그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게 된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양단간에 결정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흉흉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와서 때때로 불안하고 두려움을 갖는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어려움이나, 재난이 닥쳐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삶을 결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임한다.

      (시 112:7)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마음의 확정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내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한다. 그러면 평안하게 살 수 있다.

      (사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로 결정하면 평안을 누린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 생기면 근심은 사라진다.

      (사 7:8)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믿음도 인생도 견고히 설 수 있다. (아멘)

      (예화)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난해한 말씀]을 하시니 군중들이 다 떠나갔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요 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믿고 알았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믿어야 알게 된다.

      내가 다 알고 깨달은 다음에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죽을 때까지 아무리 노력하고 탐구하고 도를 닦아도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더욱이 신령한 세계의 비밀은 타락한 죄인은 도저히 알 길 없다.

      그러니, 다 알아보고 믿겠다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단, 믿기로 결정이 내릴 때, 시작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계속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더 깨달아지고, 이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믿음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선물이기 때문에 구해야 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을 구하지 아니함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하여야 한다.

      또한 나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그러므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예화) 눅 17장 : 제자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이 때 주님께서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다.

      (눅 17:5-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비유의 말씀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한 요청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이해가 잘 안 된다. 거기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믿음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자기의 공로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오다가도 사라진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자신의 실력, 능력으로 살아가는 교만한 자에게는

      믿음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려놓고, 다만,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고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이 주어진다는 주님의 답변이다.

      믿음은 [결정]인 동시에 [선물]이다.

      아직도 믿음의 결정을 미루고 계신 분이 있다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또한 내 주변의 신실한 신앙인들을 볼 때,

      전부는 다 모르겠지만, 영적인 진리있는 것 같다.

      정말, 진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라도 들어오면 믿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참 믿음의 실체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선물로 받은 겨자씨 같은 적은 믿음이지만,

      계속적으로 믿음 생활하는 가운데 예배말씀기도성도의 교제

      성경공부봉사 생활을 통하여 점점 믿음도 성장하여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내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고, 삶의 보람도 생기고,

      인생의 목적의미가 분명해 지고, 기도 응답도 체험하게 되고,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기로 결심 해 버리고 믿음의 결정을 계속 미루다보면

      언제까지나 의심불신앙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다가

      죽음 앞에서 믿음 없이 세상을 떠나 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

      죽을 때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의인믿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 믿음의 결정을 내려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여서 [오직 의인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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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이유

      디 제임스 케네디의 ‘내가 믿는 이유’를 읽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믿는지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들이 나옵니다.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 보라면 망설이는 분들도 있지요.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게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거기에는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사역을 믿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서 죄 용서의 확신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신경의 깊은 믿음의 고백을 구절마다 풀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요체는 이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찰해 봅니다. 한자로 믿음은 (信)이지요. 이 글자를 잘 살펴보면 사람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진실한 본보기가 되고 사람의 대표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람’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믿지 않으시거나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은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님이 실제로 이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삶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통 인간은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자는 없습니다. 선각자나 현인들도 진리에 근거한 완벽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완벽한 삶을 살아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더욱 빛이 나고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고 따를 수 있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씀을 믿습니다. 단 한 번의 오류도 수정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서 지금까지 선포된 이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폐지된 것 하나 없습니다. 인간은 말하고도 수시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바꾸고 폐하기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하지요. 그러므로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무한이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상황이나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형편에 따라 관점이 계속 변한다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진리는 우리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는 가치로 남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디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께서 쓰신 ‘내가 믿는 이유(Why we believe)’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13 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절대적 진리를 믿는 이유를 통해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경

      먼저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쉰이 다 될 무렵 성경을 읽게 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제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가.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서 묻어나는 진리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면서 저를 깨우고 감동하게 하고 눈물 나게 하는 이 책을 왜 이제야 읽는가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찾아, 인생의 가치를 찾아 47년을 살았는데 성경을 접하고 보니 그 안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목사님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2,000여 가지 구약의 예언 중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세상의 많은 선지자들이라 칭하는 자들의 예언은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쏟아낸 말들이 폐하여지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성경의 예언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벨론(Babillon)을 위시하여 에굽(Egypt), 두로(Tyre), 시돈(Sidon), 사마리아(Samaria), 예루살렘(Jerusalem), 에돔(Edom) 등 수 많은 도시나 국가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인간이 허구로 만들어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상기한 어떤 것 내지는 성경의 어떤 예언도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성경은 저작이 아니라 기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학자 토리(R. A. Torrey)박사의 말처럼 ‘수많은 성읍들, 장소들, 왕들과 개인들의 이름 등 과다하게 보이는 성경의 세목들은 종이에 비치는 무늬와 같아서 그 저작 시기와 장소를 알려 주는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관심의 부재 또는 가슴의 저항으로 인해 성경을 밀어내지 말고 단 한 가지의 예언이라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면 불신의 어둠에서 믿음의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고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구글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고고학적 증거

      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게 성경의 예언과 일치하고 신화처럼 들리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성경의 사건들이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하나하나 실존한 역사로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고고학적인 발굴과정을 통해서 크리스천으로 전향하였듯이 무신론자로서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겠다던 옥스퍼드 대학의 박사 학위를 지닌 윌리엄 람지 경도 고고학적 발굴과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답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고고학자 넬슨 글루엑은 “고고학의 발견이 성경에 언급된 내용을 부정한 경우는 한 건도 없음을 단언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토판은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확중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아담의 10대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 토판은 홍수 이전에 살았던 바벨론의 열(10) 왕들의 이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또 다른 토판은 바벨론의 모든 왕들의 이름을 망라하고 있는데, 처음 10명의 왕들이름을 열거하고 나서 "대 홍수가 임하여…”라는 말을 잇고 있습니다. 이런 토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삽은 성경을 확증해 주는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관계된 장소들만 해도 2만 5천이 넘는 곳에서 발굴을 하였습니다. 수만 명의 인물과 사건에 관한 기록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점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전에 했던 그러한 증거들과 마찬가지로 비평가들이 재구성해 놓은 성경을 뒷받침해 주기보다는 분명하고도 일관성 있게 우리의 본래 성경을 액면 그대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올브라잇 박사는 “고고학이 구약성경 전통의 실제적인 역사성을 확증해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존재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논리적 변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심을 증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여기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계시지 않으신다면 인간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지력으로는 만물의 존재 근거 내지는 근원을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하고 있고 이를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학이 논리적 근거로 증명할 수 있는 분야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을 연구하는 양자 물리학자들의 90%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근원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원자 내부의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 등 의 소립자 차원에서 서로 간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강한 충돌이 있다는 사실과 우주 전체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우주의 수 많은 법칙과 질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구만 놓고 보더라도 크기, 태양과의 거리, 자전하는 축, 달과의 관계, 대기권, 질소의 순환, 오존층, 물 심지어 먼지까지 그 오묘한 비밀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불필요할 것 같은 먼지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지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며, 17마일을 하늘로 올라가면 먼지가 없고 검은 하늘이 존재할 뿐입니다. 먼지는 비를 내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인데 한 방울의 비는 8백만 개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둘러싸고 있고 먼지가 없다면 지구상의 생물은 다 메말라 존재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를 두고 보아도 그 신비로움은 형언하기가 힘들죠. 아울러 형체가 없지만 누구나 그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을 생각해 보시지요. 인간의 두뇌는 겨우 1,500 그램 밖에 되지 않지만 500톤의 전자장비와 전기장비가 해낼 수 있는 일을 감당합니다. 또 그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단위가 되는 약 150억 개의 신경 세포들(neurons)이 우리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묘기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4. 창조

      지금보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저도 성경을 읽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진화론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진화의 과정을 설명할 화석의 존재가 전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이 정도는 쉽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일부의 추종자들-헉슬리, 스펜서- 같은 이들은 왜 자신이 증명도 할 수 없는 진화론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을까요. 그들은 서로 주고 받은 수많은 편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초자연에 대한 편견 때문에 진화론을 교리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것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학자도 밝혀낼 수 없는 이 우주 만물의 경이로움은 절대자의 창조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겠지요. 단백질 분자 하나가 우연히 생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의 262승 년이 걸린다는 확률은 다시금 가장 작은 단세포 생명체인 마이크로플라즘 호미니스 에이치 39(microplasm hominis H 39)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10의 119,841승 년이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진화론의 어이없음을 확고히 합니다.

      300억 광년의 넓이를 지닌 끝없는 우주가 대폭발설(Big Bang Theory)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은 최근에 그가 다시 언급하는 대폭발 이전의 상태에 관한 학설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명석한 두뇌를 따라갈 수가 없지만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이던 우주가 거듭되는 대폭발에 의해 생성되어지고 팽창되어진다면 그 혼란의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주는 행성끼리 서로 충돌하고 폭발하면서 질서는 커녕 대혼란(Kaos)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5 & 6. 천국과 지옥

      복음을 전하려고 대화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필자 역시 불신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듯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아무런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얻게 된 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제는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첫째, 성경에서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성경 전체를 통해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의미함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없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이거나 논리적 오류를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문명세계를 접해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게 문명의 존재를 얘기하면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를 뿐이지 그 세계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혹자가 호주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있다’라고 함으로 두 사람은 같이 호주에 갔습니다. 운이 좋게도 ‘있다’라고 주장한 자는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아몬드를 길에서 줍게 됩니다. ‘없다’를 주장하던 자는 그것은 ‘우연이다’라며 다이아몬드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없다’를 증명하고자 호주 대륙을 다 돌아보고 나서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를 주장하는 자는 이를 수용할 수 없으니 땅을 파보라고 합니다. ‘없다’라는 자는 전력을 다해 호주 땅을 1미터 깊이로 다 파 보고는 ‘없다’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라는 자는 그것이 몇 미터 깊이에 나올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결국 ‘없다’를 주장하는 자는 자신의 논거를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셋째, 임사체험을 한 분들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은 다시 한 번 확증을 줍니다. 상상 외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 임한 체험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증언이 존재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분으로 18세기에 뉴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스웨덴의 과학자 스베덴 보리의 27년간 이어진 임사 체험은 너무도 다양하고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내세의 세계를 환히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 박사는 직접 자신의 임사 체험 이후 미국 전역의 유사 체험 사례를 연구하여 죽음 이후에는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자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방법들, 독서, 논리적 유추, 타인의 증언 등을 통해 현상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독단적 무지에 머물다가 사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는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 땅의 삶처럼 잠시 있다가 떠날 곳이 아니라 영원히 지내야 할 곳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영원한 삶을 지낼 것인가는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7. 절대도덕

      케네디 목사님의 저서에는 절대 도덕의 존재를 믿음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저는 현 시대의 문제점을 다원주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너무나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다름으로 인정하여 충돌을 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진리인지 깊은 성찰이 없다 보니 지력이 현저히 떨어져 사고의 중심 즉, 가치관이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헨리 박사의 말대로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당위 개념이 사라져 버린 세대를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절대적 가치는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비판할 능력도 없이 맹종하거나 도무지 가치를 두기가 민망할 우상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붙잡고 마는 것이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지존의 가치관이 없다보니 절대도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저잣거리의 노인 보듯이 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보듯이 합니다. 심지어 종교계의 큰 어른격에 있는 분이 ‘절대선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진리를 흔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분의 말 한 마디에 수 억 명의 인류는 정신을 잃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쉽게 치부해 버립니다.

      절대도덕이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진리이십니다. ‘진리’라 함은 ‘참된 이치’인데 ‘참되다’는 것은 상황 논리에 불변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 불변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옳으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음은 성경의 기록이 너무도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해 보고자 숱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에는 항상 반대 견해와 오류가 있어 왔고 불완전하였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고뇌에서 추론된 논리나 사상도 창조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1,700 동안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주심으로 완벽함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8. 그리스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증거들에 기초를 둔 유일한 종교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맹목적인 신앙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증거에 의해서 확립된 사실들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절대적이어서 우리를 압도합니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를 불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뿐만 아니라 수 많은 역사서에서 예수님의 기록은 너무도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아울러 나폴레옹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깜짝 놀라게 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라고” 하면서 “그는 인간이 아니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도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영생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지요. 바이런 경도 “만일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거나 하나님과 동일한 인간이 있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무주의자였던 톨스토이도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나서 나의 모든 삶은 갑자기 변화되었다... 죽음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괴테도 “나는 네 복음서들 모두를 철저히 참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숭고한 영광의 빛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결정한 본디오 빌라도마저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에게 드리며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나의 구주로 바라볼 때였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하여 이마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8). 나는 거기 십자가 위에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을 뵈었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 자식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를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대신당하셨습니다.. 나는 앉았던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삶에 모셔 들였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감동하셔서 마음을 열고 그에게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구원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또한 믿게 되었습니다.

      9.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십자가마저도 단순히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처형당하신 사실로 치부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힘있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어떤 성인도 부활을 경험한 자는 없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사실을 뒤집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공격을 했으나 이 실제적 사건을 뒤엎은 사람은 없습니다. 루 월러스(Lew Wallace)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하는 책을 쓰기 위해 착수하는 책을 쓰는 일에 착수하였다가 결국은 인정하는 유명한 책으로 마쳤습니다. 그 책이 바로 벤 허(Ben Hur)입니다. 하버드대의 저명한 법학교수였던 싸이먼 그린리프는 부활을 법정적 증거의 채택 방법에 의해 집중 심리한 결과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 증거를 정직하게 검토하면 이것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앞두고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그를 부정했던 제자 베드로와 뿔뿔이 자신의 삶을 찾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목숨을 바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망하여 갈 길을 몰라 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복음을 전한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신분이 낮고 교육 수준도 낮아서 무슨 야심을 품거나 미룰 수도 없는 초라한 지위에 살면서 어떠한 목표를 두고 그들의 삶을 고난과 죽음으로 맞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이외에도 예수님을 보고 만난 사람들이 수 백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현재의 토요일 다음 첫째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기념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므로 지금의 달력이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던 유월절을 버리고 부활절을 지키게 된 이유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빈 무덤과 남겨진 수의, 최후의 만찬, 당시의 벽화나 조각, 찬송가 등에서 이 사건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10. 기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 아버지의 부속물 취급을 당하던 아이들이 인격적 대우를 받게 되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여성이 인권을 가지게 되고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곳에서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혹은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의해 계급과 성별로 말미암아 차별을 받는 곳이 너무도 당연시되며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로마의 끔찍한 검투사 경기가 막을 내리게 된 것도 텔레마쿠스(Telemachus)라는 크리스천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경기를 막음으로 인하였습니다. YMCA를 통한 빈민가의 구제, 선교사들이 자신의 삶을 내어 놓고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의 암울한 인간들에게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시키고 병원을 지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옛 시대의 나라는 왕이나 다스리는 자들이 최고였고, 백성은 종속물에 불과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무신론에 입각하여 유물주의로 국민을 몰아감으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고유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의 자녀가 된 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 뛰는 일이 아닐까요.

      11. 중생 (重生)

      예수님을 참으로 믿게 되면 인간은 거듭난다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의 교리를 신학적으로는 중생론(重生論, 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성경전체의 메시지는 창조(혹은 초생(初生)generation), 타락(degeneration), 중생(重生, regeneration), 세 낱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중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만져서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땅의 문 앞에서 우리의 옛 삶은 낡은 옷처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감정, 새로운 삶, 새로운 힘, 새로운 목적, 새로운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2. 성령

      성경은 성령이 인격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성령은 누구이신가를 말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무엇을 하시는가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를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놀라운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하시는 일들의 목록은 너무 길어서 다 열거할 수가 없으나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록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리라”(누가복음 1:35)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임하시고, 그를 인도하시고, 그에게 권능으로 함께 해주신 분이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또한 오순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죄로 죽어 있던 그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크리스찬 안에 거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특히 이러한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가 성령을 믿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을 ‘보증’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죄와 자기 의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성령이 충만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우리의곧은 목을 숙여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의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요 또한 희락의 영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오시리라고 선언하셨고, 기독교의 역사관 전체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성경이 재림에 앞서 나타나리라고 선언한 징조들-엄청나게 빈번해진 지진들, 지식의 폭발적 증가, 도덕의 부재, 절망의 확산, 방종한 성행위-로 인함입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세계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유일한 존재로 남을 것은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갈등이며 나머지 모든 주제들은 그것에 종속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 주어진 삶의 가치를 위하여,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많은 현상과 주제의 근간을 알기 위하여 꼭 성경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글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책 내용의 핵심을 전하고자 하였고, 이해를 돕고자 필자의 개인적인 공부에 의거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믿는 이유’의 원고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인 자료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심의 부재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고자 하는 도덕적 결단을 내릴 의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위대함은 면밀히 살펴볼수록 감소될 것이나, 그리스도의 인격은 우리가 깊이 알수록 더욱 순결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책에 쓰인 논증에 수긍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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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마가복음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마태복음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many who are last will be first.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영접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사업이 번창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삶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삶이 기쁨이신 분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지옥 같은 삶이 천국 같은 변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수 없이 좋은 일들이 우리 삶에 가득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를 믿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모두 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축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면서 사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어 건강이 나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업이 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가족 관계가 불편해진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더 가난해 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인간 관계가 힘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주님이 이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잠시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 (막 10:29-30)’  

      예수를 믿어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지금 당장은 불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채워주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 불편하게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백 배나 더, 충분히,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주님의 채워주심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베이비 박스’ 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한국 서울에 있는 ‘주사랑공동체 교회’에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며, 간난 아이를 넣어두고 가는 장소가  ‘베이비 박스’입니다. 가난 때문에, 환경 때문에, 장애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한 곳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 받았던 아이들이 들어 오는 곳입니다.  어찌보면 저주의 장소이고, 버림받았음을 상징하는 장소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베이스 박스를 통해 맡겨지는 아이들을 위한 목사님의 기도가 인상 깊습니다. ‘하나님 이곳이 이들에게 축복의 장소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관련된 영상을 함께 보겠습니다.

      ‘베이비 박스’는 이 종락 목사를 통해 시작된 일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불편한 삶을 살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분들이 이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감동했고, 함께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베이비 박스를 보면서, 주님의 채워주심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도 주님이 큰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그에게 큰 사랑으로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이비 박스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는 천국가는 특권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잠시 건강을 잃어도, 잠시 불편해도, 잠시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건강한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자로 편하게 사는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빌게이트는 예수 안 믿어도 세계 제일의 부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함으로 천국도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구절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마가복음 10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된자는 부자 청년이고, 나중 된 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던 부자 청년은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고 떠났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누렸지만, 주를 위해 적은 것을 희생하지 못했습니다. 영생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 땅의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희생했습니다. 나중되었지만 먼저 된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9장 30절은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되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주님이비유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천국의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비유의 내용은 포도원 주인이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내용입니다.
      아침 6시에 일군을 고용하고, 100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오전9시에 일력 시장에 나가 봤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고용합니다. 오후12시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도 고용했습니다. 오후 3시에도, 심지어는 오후 5시에도 일군을 고용했습니다.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일을 마친 일군들이 품삯을 받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주인은 100불을 줍니다. 한 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횡재를 한 것입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도 100불을 줍니다. 이 사람도 횡재를 한 것이지요.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전 6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온 자입니다. 그들에게 기대가 생겼습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받게 될까?’ ‘한 시간 일한 사람이 100불이면, 12시간 일한 나는?’ 이들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에게도 100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왔는데, 나중 온 사람과 똑같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겨우 이것 밖에 안 주나요? 이것 불공평한 것 아니예요?”라고 말입니다. 주인이 산수 실력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편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3-15)’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품삯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누구든지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일군은 능력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일군은 외모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일군은 학력 순으로 뽑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 그리고 초청된 모든 사람에게는 얼마나 일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같은 삯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공평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공평한 것입니다.

      누가 가장 기뻤을까요? 일을 조금했는데, 많이 받은 사람일 겁니다.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일당을 받은 사람입니다. 황송하지요. 포도원 주인에게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일군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일이 없는데, 에수만 믿으면 구원의 열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중 된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신다면, 내 인생 실컷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일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를 보시면, 일군이 포도원 주인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군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가 응답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늦게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그 초대의 시간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불러 주실 때, 나이가 들었든지 나이가 어리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영생입니다. 이것을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나중 된 자처럼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먼저 된자가 자신의 의를 내 세우다가 주님에게 혼을 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먼저 불러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된 자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나중 된 자들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중된 자들은 누군가의 선택을 한 동안 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고, 감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사람이 구원 받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먼저 되었든, 나중 되었든,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이 이 교회에, 우리의 삶 속에도 적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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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 - 역사적 증거와 기록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저서 <나는 왜 믿는가, 생명의 말씀사> 145쪽에 있는 글입니다.

      ​역사적 증거와 기록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를 믿는가? 어떠한 감정, 어떠한 특별한 성향, 머리로는 진리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는 믿으려는 갈망 때문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실질적인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역사적인 증거를 토대로 삼는 종교이다. 성경은 우리를 맹목적인 신앙으로 초청하지 않으며, 항상 증거에 의해 확립된 것들을 믿는 신앙으로 초청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대단히 압도적이다. 증거가 부족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 세기에 걸친 이 큰 논쟁에서, 독일의 문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 Wolfgang Goethe)는 이런 말을 했다. "믿음과 불신의 갈등은 여전히 세계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정당하고 깊이 있는 유일한 주제이며, 다른 모든 것들이 이 주제 아래에 있다."

      이 세상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이 큰 논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이자 예일대학교 교수인 필립 샤프(Philip Shaff)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무신론자들은 논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불신의 원천은 머리보다는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지성과 마음은 경건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낳는다.

      기독교인 친구 한 명과 내가 다수의 불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더러운 말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자리를 옮기고 나서 친구가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타락한 마음들이군."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샤프 박사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위해 확실한 증거를 바라던 나다나엘과 도마처럼 정직하게 묻는 자들과 열심 있는 회의론자들은, 자기들 앞에 증거가 놓이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그 증거를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정직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증거는 풍성하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까? 그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의 창시자이시다. 기독교는 그 다음으로 큰 종교보다도 2배가 크다. 20세기 후반에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13억 2천만 명이었다.

      예수는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가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

      한 역사가는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전설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모순으로 여기고 폐기했다고 썼다. 역사가인 길크리스트 로손(Gilchrist Lawson)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전설 가설, 즉 신화 가설을 주장한 사람 가운데는 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고대 역사의 다른 어떠한 사건을 뒷받침하는 증거보다 훨씬 더 많다. 편견 없는 학자라면 고대 역사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증거들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아서 역사가라면 감히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존재했었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단순히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 주기 때문인가? 그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는 하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전기가 4개 있으며, 복음서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증언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다룬 것처럼 어느 세속 역사가의 증언보다 훨씬 더 정확하며 상세하다.

      복음서 말고는 고대의 어떠한 저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완전히 틀렸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소(小)블리니우스, 에픽테투스, 루시안, 아리스티데스, 갈레누스, 람푸리디우스, 디오카시우스, 힌네리우스, 리바니우스,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 유나피우스, 조시모가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언급했다. 완전히 기독교에 반대하는 책을 쓴 작가로는 루시안, 셀수스, 포르피리, 히에로클레스,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있다. 그 밖에 유대인 작가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글을 썼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에 서 있으면 나는 불신앙의 모든 공격에서 안전함을 느낀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내게는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크고 확실하다. 내 자신의 개인적인 존재만큼이나 말이다."

      그리스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 특별한 일에 관하여 황제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글을 썼다는 것은 다른 역사적인 인물 몇 명도 언급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몇 년 후 한 기독교 변증가가 다른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기록보관소를 조사해서 본디오 빌라도의 보고서를 찾아 이러한 일들이 사실인지 알아보기를 권했다.

      그 긴 보고서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서술한 후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그를 헤롯과 아켈라오와 빌립, 안나스와 가야바와 백성이 제게 넘겨 주었고, 저더러 그(그리스도)를 재판해야 한다고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했고, 우선 그를 채찍질했는데, 그를 악행으로 고발할 근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온 세상이 캄캄했고, 한낮인데 태양이 어두워졌으며 별들이 나타났지만, 별들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달은 마치 피로 변한 것처럼 빛을 잃었습니다."

      주후 52년에 다른 세속 작가인 탈루스(Thalius)는 정오부터 3시까지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썼고, 그것은 일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유월절 무렵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월절은 보름달이 뜨는 때이고, 보름달이 뜨는 때에는 일식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작가는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을 멈춘 현상에 대해 자연 현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맨체스터 대학교의 성경비평 및 주경신학 교수인 부르스(F. F. Bruce)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작가들은 장난삼아 '그리스도 신화'라는 공상을 할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토대로 한 것은 아니다. 편견 없는 역사가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사성만큼이나 자명하다. '그리스도 신화'라는 이론을 전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로마에 화재를 일으킨 것을 감추려고 했던 것을 논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 소문을 막기 위해 네로는 흔히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죄를 덮어 씌웠으며, 가장 지독한 고문으로 벌을 주었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으로 오해를 받아 증오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창시자인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다스리던 때에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을 당했는데, 이 해로운 미신은 한동안 탄압을 받았지만 유대뿐 아니라 로마 시 전역에도 다시 급속히 퍼졌다."

      이렇게 타키투스도 그리스도께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기간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알려 준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크리스투스, 즉 그리스도이며, 이 종교가 그 당시에 유대 전역을 통해 로마에까지 퍼졌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알려 준다.

      기독교인을 모두 처형하던 소(小)플리니는 마침내 트리아누스 황제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여야 하는지, 특정한 몇 명만 죽여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같은 편지에서 플리니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죄나 잘못이란, 정기적으로 특정한 날에 해가 뜨기 전에 모였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며, 모였을 때 그들은 번갈아가며 신에게 하듯이 그리스도에게 찬송가를 불렀고, 거룩한 맹세를 했고, 어떠한 악한 일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플리니의 글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그들이 매주 어느 한 날에 일찍 모여서 그분을 예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 시리아의 작가인 마라 바 세라피온(Mara Bar-Serapion)은 주후 73년 경에 자기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를, 악행에 연루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이 맞이하는 끔찍한 결과를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지혜로운 왕을 사형에 처해서 얻은 유익이 무엇이냐?
      그 직후에 그들의 왕국이 완전히 파괴된 것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신다. ……
      유대인들은 멸망당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서 완전히 흩어진 채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로운 왕의 가르침은 살아 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없애려고 몹시 애를 썼다.
      그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에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기간에 구레뇨가 유대에서 과세를 청하던 시기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단언하고 있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가 티베리우스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확증한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실제적 근원으로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신빙성도 주장한다.

      율리아누스는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나 증명하지 못했다.
      그는 바벨론 성벽을 파괴하여 성경의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성취한 사람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외쳤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율리아누스는 자기가 재건하고자 애썼던 이교신앙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
      율리아누스의 모든 노력이 그 갈릴리 사람의 능력 앞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에 대해 글을 남긴 다른 작가들도 많다. 유명한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이 그 시대에 나타난 한 위대한 인물을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게 했는데, 그가 그리스도라고 말해 준다.

      이것은 첨가된 문장일 것이며, 요세푸스는 한 번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고,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개종을 하고 로마에 항복했으며, 황제의 은혜를 입고서 로마에 살았다. 그러면 요세푸스가 과연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

      이 구절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편견밖에 없다. 요세푸스가 쓴 글의 모든 사본에는 이 구절과 아울러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세례 요한과 그 밖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일들에 대한 언급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공격받을 수 없으며, 신화나 전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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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사는데 나는 왜 유독이 예수 없이는 못 사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히 예수 없이는 못 살아요. 예수님 믿기 때문에 삶에 용기와 힘이 생기고 또 예수 믿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행복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스칼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었으며 시편 16편 2절에“내가 야훼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예수님 없이는 복도 행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본론>

      1.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첫째로, 저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깨달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하나님 보시지 못했잖아요.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셨으므로 우리가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계신 것을 확실히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도 안받으면 정말 외롭고 쓸쓸하고 버림받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믿는 자마다 공부 잘하는 사람마다, 돈 많은 사람마다, 지위가 높은 사람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장막집 벗어 버리면 하늘나라 집으로 간다는 것을 가르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육신은 장막집입니다. 장막집이라는 것은 쉬운말로 말하면 천막집인 것입니다. 천막이라는 것은 영구히 있을 곳이 못됩니다. 비도 새고 낡아지고 바람불면 날라가고 나중에는 걷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육신은 장막집이 되어서 언제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위해서 천국에는 집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장막집이 아닌 주택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운 영광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천국을 체험한 사람도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바울 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막 속에 바람불고 비새며 덥고 춥고 하는 곳에 사는 우리들이 영원한 주택으로 들어간다는 것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이처럼 사랑을 받았으므로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정욕이나 탐욕도 사랑하고 그 부분에 하나님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사랑이요, 전적인 사랑이 되지 못하고 가짜 사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할 것 먼저하면 나중할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다 돌보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로 밥 먹인 것을 보십시오. 3백만을 매일같이 하나님이 아침, 점심, 저녁을 준비하셨습니다. 보통 많은 손님들 아니지 않습니까? 3백만을 대접하려니까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집에 손님 30명이 와도 감당하기 힘들 것인데 하나님은 매일같이 3백만을 아침, 점심, 저녁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고기도 먹이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물을 다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 왜 그랬느냐.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는 나는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이 돌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때 진짜로 응답해 줄 것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하면서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 많습니다. 정말 기도 응답하실까? 마음 속으로 안하실꺼야. 그러나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 많은데 밑져야 본전으로 기도해서는 안돼요. 정말로 하나님 진리를 알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예수님 안계시면 천국 있는 것을 모르지요. 예수께서 천국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처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맨션인지 아파트인지 모르겠지만 천국에 아파트는 없을거에요. 맨션일 것인데 예수님이 같이 있겠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십자가에서 희생해 주신 예수님은 그 전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어제가 무슨 날입니까? 부부의 날이지요? 많은 남편들이 부부의 날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잊어 버렸어요. 저도 잊을뻔 하다가 기억을 했습니다. 그러면 부부의 날에는 무엇을 해야 되나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입술의 말로만 사랑해서는 증명이 되지 않아요. 말로써 사랑합니다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돈 안드니까. 그러나 부부의 날이 다가왔을 때 나 당신 사랑합니다. 그 말하면 아내가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40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입술로 얼마나 그런 말을 많이 해도 증명되지 못했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증명하려면 뭐냐. 뭘 드려야 돼요. 조금 드려가지고서는 효과가 없어요. 듬뿍 드려야 돼요. 예수님은 우리 남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입술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뭘 조금 해주시고 난 다음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가면 입이 딱 벌어지고 놀라서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놀라운 우리 남편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장차 어떻게 할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딱 믿고 가십시다. 지금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죽는 것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은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잠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 또 살고 살고 또 살고 영원히 사는데 늙어지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나는 어떠한 사람이냐. 죄와 흑암에 잡힌 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받아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조용기 너가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죄에서 용서받은 나, 더러움에서 씻음 받고 거룩하고 의롭다함을 얻은 나, 채찍에 맞은 공로로 병에서 고침받고 건강한 나,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나, 부활 영생 천국을 얻은 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나를 보면 내가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전인구원을 받은 사람 아니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또렷이 말할 수 있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고 당신은 누구냐고 말하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땜쟁이입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장사꾼입니다. 나는 공무원입니다. 나는 관리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자기가 누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정체성이 뭐냐. 모르지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구름같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 가면 예수님을 쳐다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첫조상 아담을 통해서 얻은 육신의 삶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청산되고 육의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사람된 것은 매일같이 갈보리산 밑에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확인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가 누구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형통케 해주는 것입니다. 꿈이 없고 환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형통케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밑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된다

      둘째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어떤 고생이 있어도 참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내일 희망이 없으면 오늘 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으면 정말 양쪽 날개단 것과 같은 것입니다. 훨훨 날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도 그 가운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 아니십니까? 우리 함께 이 성경구절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려움을 당하거든 하나님을 찾을 때 아실 것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내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지 재앙을 주어서 나를 낭패와 실망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재앙에서 건져내 주지 않았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재앙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있을 때 모든 재앙에서 해방되고 미래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그 깃으로 너를 덮으시리니 내가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해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패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려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시 91:2~7)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참으면 내일과 희망이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얻게 되므로 예수님 믿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어떻게 벗어버립니까? 내가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옛사람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요, 더럽고 추하고 마귀의 종이 된 사람, 아무리 물로 씻어도 때가 지지 않는 옛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돌보아 주마. 우리를 덥썩 안고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우리는 실제로 안죽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안고서 죽어서 누가봐도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죽었어요. 내가 옛사람을 청산했어요. 내가 예수를 통해서 부활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벗고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고통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벗어준 것 우리가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새로 지어준 것 입는 것입니다. 그 속에 희망과 꿈이 넘쳐 나는 것입니다. 새것이 되는 희망과 꿈을 예수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 은혜로 치료받고 축복받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로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도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 예수 안에서 새것입니다. 죄가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더러움이 씻어진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병이 와서 여러분 들러붙고 병이 여러분을 물고 찢고 하지만 하나 아십시오. 병의 주인은 누구냐. 마귀입니다. 귀신이 여러분 몸에 강제로 쳐들어와서 점령을 했는데 그 귀신이 점령을 하고 난 다음 자기 성품을 나타내는데 폐병 귀신은 폐병으로 나타나고 암의 귀신은 암으로 나타나고 관절염의 귀신은 관절염으로 나타나고 그 귀신이 자기 모습들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암은 암 자체가 암이 된 것이 아니라 암의 귀신이 들어와서 암의 집을 지은 것입니다. 암 귀신이 암의 집을 짓고 폐병의 귀신이 폐병의 집을 짓고 관절염의 귀신이 들어와서 관절염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자꾸 집을 허무러 뜨리려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수술도 하는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신앙적으로는 주인을 쫓아내 버리면 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암의 귀신은 물러가라! 폐병은 물러가라! 관절염은 물러가라고 대항하는 것은 그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인이 쫓겨나가면 주인이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었을 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십시오. 저항을 하십시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다가왔는데 저항을 안합니다. 아이구 아파라. 아이구 고통스럽다. 아이구 괴롭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환영사입니다. 너 성공했다. 네가 와서 정말 성공을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다. 내가 죽을 고생이다. 너 정말 훌륭하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를 피하리라. 이 귀신아 물러가라! 이 관절염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고혈압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당뇨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심장병의 귀신아 물러가라! 이 어지럼증의 귀신아 물러가라! 강제로 들어와서 점령한 놈이 한두번 말한다고 물러가겠어요? 백번이고 천번이고 명령을 하라고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안물러갑니다. 왜냐하면 갈데가 없으니까 귀신이 여러분을 집을 삼고 들어왔으니까 강제로 점령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강제로 물리쳐야 돼요. 침례 요한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침노라는 것은 나팔 불고 북치며 걸어가는 것이 침노가 아닌 것입니다. 총을 쏘고 창을 찌르고 전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침노입니다. 마귀와 싸움은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각오하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사람은 마귀에게 집을 허락해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병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귀신들 참 흉악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귀신에게 점령당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데 제발 물리쳐야 돼요. 저는 귀신이 점령해서 병을 가져온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틀려요. 알고 있으면서도 안깨달으니까 별로 실천을 안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하나님께서 제게 하루 기도하는데 야, 병이 오면은 병의 집주인은 귀신인데 귀신이 집주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너 그만 두느냐. 몰랐습니다. 네가 알면서 깨닫지 못했다. 깨달으면 이제부터 싸우라. 요사이는 귀신하고 적극적으로 싸웁니다. 제가 싸워서 이겨보니 참 기분이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싸우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깨달아 주므로 우리는 깨닫고 이 진리에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간구한다. 간구가 무슨 말입니까? 간절히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회개하고 성령받고 영적으로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사업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고 그리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절히 원한다. 이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로 6절에 선한 목자로써 내 삶을 자비와 긍휼로 채워주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세상에 어디가도 부족함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되면 내가 양이니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우리가 그대로 지나가면 안됩니다. 목자되신 주님께 부족함을 채워 달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은 형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있으니 먹을 것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쉴만한 물가는 마음에 평안을 말합니다. 쉴만한 물가에 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를 형통케 하시고 평안케 하시고 우리를 행복케 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롭게 이끌어 주신다. 죄에서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가 매일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어두움의 세력이 와서 우리를 크고 적은 골짜기로 끌고가도 해를 받지 않는다. 왜냐, 주께서 같이 간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 같이 계시므로 주님은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막대기를 들고 원수를 쳐 주어서 상처입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진짜 원수가 달라들어서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원수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원수를 대적해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얻게 밥상 차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 밥상 베풀어 준다.

      제가 젊을 때는 그것을 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까 배가 고프니까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많이 먹어야 돼요. 그러므로 집회에 나갈 때는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여,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냐, 집회 나가는데 설교 반쯤 하다가 배가 텅비면 소리가 안 나와요. 배가 불러야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힘이 있어 집회를 할 수 있는데 여기 싸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먹어야 싸울 수 있다. 원수가 오면 목전에서 우리에게 진수성찬 차려 주어서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잔이 넘치게 해주신다.

      결국 원수가 오는 것은 우리가 삶에 잔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원수가 와도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오면 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밥상을 차려 주시고 여러분 인생에 잔이 넘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만족을 말하지 않습니까?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축복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꿈을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수가 와도 여러분 속으로는 하나님은 나에게 결국 복을 주신다.

      요셉이 보십시오. 형들에게 발가벗겨서 종으로 팔렸죠.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지요. 그 아내 참소를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지요. 사사건건이 안되는 것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잔이 넘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고통이 나중에 보니까 결국 잔이 넘치게 하는 길로 이끌어 가게 하더라. 사람들은 요셉을 고통주고 괴로움을 주고 죽이려고 했지만 그 도모가 다 결국에는 요셉에게 잔이 넘치게 되고 축복이 되고 말았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같이 계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두고 보세요. 나중에 잔이 넘치게 만드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고통은 그 후에 큰 축복을 가져온다. 거짓말 아니에요. 여러분 괜히 내가 꾀려고 이런 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살아보면서 신앙을 체험하면 더 큰소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했으니까요. 한두번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원수가 오고 고통이 다가오면 또 진수성찬 차리고 잔이 넘치게 하려고 오는구나. 그러므로 꿈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시고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4절로 26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니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떠한 원수가 다가와도 크고 적은 원수를 결국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같이 결국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게 돼요. 좋은 하나님 모시고 있으니 좋게 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유는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린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려서 여러분을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차원 높은 삶

      셋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을 믿고 차원 높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이성적이고 체험적인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를 몰라요.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호킹 박사도 이번에 신문에 발표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것처럼 뇌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죽어버리고 없는 것이지 뭐가 있느냐. 그렇게 모른다구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운명을 바꾸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많은 사건을 믿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을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놓으면 험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하겠네. 믿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누어 주셨는데 믿음을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용하면 내가 달라지고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죽고 사는 권세를 믿음을 가지고서 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합동하여 유익이 된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믿으면 그런 것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렇게 되는데 안 믿으면 그런게 안온다 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대로 크면 큰대로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신령한 믿음을 분량대로 주셨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분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므로 믿음 없다는 말 하지 마세요. 믿음을 안쓰고 있지 쓰기만 하면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세요. 나는 영원히 잘된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없는데도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범사에 형통한다고 믿으십시오. 믿으면 그렇게 된다구요. 나는 강건하게 된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고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세요. 그러면 그대로 된다구요. 믿음과 생각과 꿈과 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꿈꾸게 되고 그렇게 말하게 돼요. 그러므로 믿음은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 인생을 변화시켜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안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대로 돼요. 된다 할 수 있다 변화된다. 믿으면 그대로 돼요.

      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앞에 보여줬잖아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어요.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대로 두면은 썩어서 살은 다 흙이 되고 뼈다귀만 남습니다. 누가 그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르다야 무덤문을 열어 놓아라. 마르다가 우리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마르다는 말할 때 예수님 마르다를 보고 마르다야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믿으면 영광을 보고 안 믿으면 영광을 안봅니다. 여러분 생애에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안 믿으면 영광이 안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안쓰니까 문제지. 안쓰니까 문제에요.

      오늘도 주님 여러분 보고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마르다가 믿고 무덤문을 옮겨 놓으니까 나사로야 나와라! 살아 나왔습니다. 환경과 운명이 변화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마귀의 공격 속에 살면 우리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마귀의 텃밭입니다. 두려워하면 마귀가 춤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오고 가난이 두려우면 가난이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가 오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사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나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쁘지 않아요.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에요.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부터 여러분 여러분 환경과 운명에 좋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써 믿음을 주셨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므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오면 거기에 남부공동묘지가 있어서 많은 시체를 파뭍은 공동묘지가 있어요. 그 옆을 제가 지나와야 돼요. 그러니 언제나 학교 갈때도 그렇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그렇고 그 공동묘지 지나갈 때는 반 죽음이에요. 꼭 귀신들이 나와서 나를 확 덮칠 것 같아요. 겁이 나서 거기가서는 뭘 하느냐. 뛰기 시작하는데 한번 뛰기 시작하면 내 발걸음에 놀래가지고서 끝까지 뛰어야 해요. 숨이 턱에 닿도록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나 너무 겁이 나서 여기 오기가 힘들어 날 좀 도와줘.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 할머니 나이가 70이 넘은 것 같아요. 그런 할머니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런데 내가 올 때쯤 되면 가파른 산꼭대기에 할머니가 앉아가지고서 늘 불러요. 용기야~ 오냐~ 그런데 그 산밑에 와서 할머니의 음성만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져요. 마음에 기쁘고 용기 백배해서 할머니 나 여기있어~ 아이구 내 새끼야 빨리 오너라. 그 할머니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이 싹 사라지고 할머니 손을 잡으면 천지가 다 내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할머니가 나보다 더 힘이 없는데 걸음도 더 빠르지 못한데 그 할머니가 있어도 용기백배한데 예수님이 용기야~ 거기 있느냐~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시편 91장 1절로 7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우리 좋은 하나님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실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지 나쁜 것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의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질그릇 아닙니까? 이 질그릇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사방으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낭패와 실망에 욱여쌈을 당하여도 여기 예수님이 턱 들어 앉아 있으니까 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환경보다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우리가 싸이지 아니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싸이지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시니 낙심할 리가 있습니까?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사람이 핍박해도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데 뭘 두려워할 것입니까?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망하려고 달려들어도 거꾸러뜨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 망해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여러분의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십자가에서 다 멸해 버렸던 것입니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 위해서 승리를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면 하늘과 땅이 내 편에 서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백성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믿음을 탁 가지면 분위기가 내 마음에도 분위기가 확신의 분위기가 있고 주위 환경에도 분위기가 좋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잡아 놓으면 온 천지에 악한 귀신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면 벌과 나비가 날라오듯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좋은 것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 너무나 좋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근심하고 늘 두려워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내가 대신 근심했고 내가 대신 두려움과 싸웠다고 말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님이시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말할 필요없이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노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환자들이 노이로제에서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시편 23편 한번 읽고 저녁에 한번 읽게 했는데요.

      미국의 하워드 캘리 박사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동료 의사의 역할을 해 줍니다. 성경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한 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 캘리 박사는 의사입니다. 의학박사이면서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데로 의학과 같이 환자를 치료하니까 환자가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암 전문의사인 황성주 박사는 치료 과정에서 한 부인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들었답니다. 그녀는 매일 밤 불면증과 번민으로 시달리는 남편에게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편 23편을 읽어주었더니 남편이 신앙도 회복하고 불면증도 완전히 나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뿐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정신질환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서 겪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를 승리와 평안의 분위기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내가 한탄하도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 손에 쥐었으니 내가 어찌 너를 버리랴. 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너희를 값주고 샀으니 어찌 내가 내것을 버리고 떠나랴. 마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속지 말라. 항상 나는 너와 같이 있느니라. 이와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 감사 박수를 드립시다.

      <결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 나는 사는 이유도 알고, 내일의 희망과 꿈도 예수 때문에 가질 수 있고,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믿음으로 마음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고 예수님이 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다 되시므로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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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이승혁이라고 하면 목사를 강조합니다.
      이승혁 목사라고 하면 이승혁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 메시아가 사람으로 오심

      예수 그리스도예수를 강조하는 객관화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주관화된 이름으로 부활 이후에 사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는데(신분)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마음 즉 자기를 버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마음, 겸손의 마음, 섬김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 가톨릭교회 해석 / good news
      https://maria.catholic.or.kr/bible/

      신약을 읽는 모든이들에게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집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은 먼저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먼저 봅니다.
      그 분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 우리와 동일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동생이나 그 분의 고향에서는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을 먼저 보게 되고, 후에 이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담당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예수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직접 예수님께서 나타나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은 회심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먼저 만나게 되었고, 그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연약하게 죽으셨지만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달리 바울 형제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십작에서 연약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님이라고 밖에 고백하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이셨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런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항상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신약성경에는“예수그리스도”와“그리스도예수”로 기록된 수많은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기독교인들은“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를 분별을 못하며 그 말씀이 그 말씀으로 똑같은 말씀으로 알고 있을 뿐 영적의미를 아는 신학자들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모르는데 과연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를 분별을 못하면 성경 한구절도 올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라는 문구를 접할 때는“성찬식”의 영적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예수”라는 문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5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식“은 주님오실 때 까지 예수님을 기념하기위해서 “떡과 포도주”로 교회의 행사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 말씀에는 엄청난 영적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아는 사람이 기독교인들 중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 문장에 내“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는데
      참된 양식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떡과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 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다.

      즉 예수님의 “살“(몸)은 말씀을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내 ”피“(생명)는 참된 음료란 뜻은 ”포도주“로 ”비유“하는데 이것도 생명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13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같이 ”살“이나 ”피“도 생명의 말씀을 뜻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떡과 살, 피와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복음)으로 “비유”가 되지만 “떡과 살”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받아먹는 자의 입장이요 “피와 포도주”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하실 때 예수님이 먹으라고 주신 ”떡과 포도주는 살과 피“인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이란” 요한복음 1:1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신 것과 같이 육신(살)은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이며 또 “피“는 포도주(말씀)를” 비유“하며 십자가에서 희생의”피“(말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 ”피“(포도주)를 주는 것이고 먹는 자의 입장은 ”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살”(떡)을 받아먹고 살아난 자는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필히 그들에게 자신의“피”(포도주)를 주어 그들을 살려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소유한“아가페 사랑”을 소유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의“살”(떡)을 받아먹고 살아난 자는 죽어있는 이웃에게 자신의 희생의“피”(포도주)를 주어 살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복음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피”(포도주)를 주는 것이고 받아먹는 자의 입장에는“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피”(포도주)를 먹고 성장해서“예수”가된 자는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고“예수“에서“그리스도”로 부활한자를“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며“그리스도예수”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희생의“피”(포도주)를 이웃의 죽어있는 영혼에게 주어 살려야 하는 것이“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여러 곳에 기록된“그리스도예수와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라 “양식”을 주는 자의 입장은“그리스도예수”라고하며“양식”을 먹고 살아난 자의 입장은”예수그리스도“라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성찬식”의 깊은 영적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온전한 십일조”가 된 자를“예수”라 하며 이“예수”가“십자가”에서 죽고“예수”에서“그리스도”로 부활한 자를“예수그리스도”라 말하며 하나님의“아가페사랑”을 소유한자를 말 합니다 말3:8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온전한 십일조”를“창고“에 들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양식”(말씀)을 하나님의성전이 된 자의 몸을 창고로“비유”해서 하나님의 집에“양식“(말씀)이 있게 하는 것을“온전한 십일조”라고 하며 그의 몸을“창고“로”비유”한 것입니다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성전인 것과 성령(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같이 하나님의 성전인“창고”(몸)에”양식”(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영의 양식”을 반드시 하나님의집인 자신의 몸 성전“창고”(몸)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창고“(몸)에“양식”을 저장을 해야 그“양식”으로 이웃에게“양식”을 주어 구원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성전인”창고“(몸)에 저장한 자는 그 말씀의”양식“으로 반드시 이웃에게 그”양식“을 먹이므로 이웃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해서 장성한자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이웃을 구원해야”예수그리스도”에서”그리스도예수“로 거듭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아들(예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나님의 아들”예수“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준은 기독교인들이 모두”예수“가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5-16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웃에 죽은 영혼들에게“영의양식”을 먹여서“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씀은“첫째계명”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해 “온전한 십일조”가 되어 하나님의” 창고“(몸)에 ” 식”을 저장한 자를“예수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계명“은 “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죽어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희생의 “피”(말씀)를 흘려 자신의 몸에 저축한“양식”을 이웃에게 먹여서 살려내는 것이“그리스도 예수”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전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서“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한 자로 성장해”예수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둘째”는”예수그리스도“가 된 자는 반드시 이웃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그리스도예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아가페사랑”을 소유한자가 이웃의 영혼에게 하나님의“양식”을 주어 구원하는 자를“그리스도예수”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사랑“과 이웃에 대한“사랑“이 온”율법”과 선지자의”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5: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 사랑(구원)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롬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아가페)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 었느니라,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 예수”까지 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을 오늘날기독교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천국을 간다는 것은 목사들의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가페 사랑“이 으뜸이며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야말로 죄 많은 인간에게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장 먼저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구원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나 이“사랑”은 인간의 윤리도덕의“사랑”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주는 자의 입장은 희생의피(포도주)를 주고 복음을 받는 자 즉 먹는 자의 입장은 살(떡)을 먹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과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려 죽으신 희생의 “피”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살아난 자는 예수님의 “피”(복음)로 죽어있는 이웃에게 복음을 주어 살리라는 오묘한 진리가 숨어있는 말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예수를 믿는가? 


      사람은 왜 사는가?

      유대인들은 "티쿤 올람(Tikun Olam)" 이라고 대답합니다.
      Tikkun olam (תיקון עולם 세상을 바꾼다)은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 를 극복 할 전망으로 정교회 유대교 에서 해석되는 유대교 의 개념이다.

      "티쿤(תיקון) "이란 "고친다"는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티쿤(tiˈkun) תיקון
      1. 수리, 수리하기, 고치기,  2. 개정, 향상, 정정

      "올람( ʽôwlâm,  עוֹלָם"이란 "세상" 이란 뜻의 히브리 단어입니다.

      עוֹלָם  5769
      1. 영원,  2. 오랜 시간이 지남,  3. 일생동안
      어원 / 5956에서 유래

      한국인의 목표

      티쿤 올람 정신은 우리 겨레의 홍익인간(弘益人間)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정신이다.
      티쿤 올람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함으로 세계를 변화시켜 나간다는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정신과 뜻을 같이 한다.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고쳐 나가며 세상에서 더 높은 도덕과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믿는 사상이 티쿤 올람 정신이다.

      이스라엘의 기술혁신의 동기가 되고 있는 정신이 티쿤 올람이라면 그러한 혁신정신은 후츠파(CHUTZPAH)로 대변된다. 후츠파 말은 "대담함과 당돌함"을 뜻하는 이스라엘 고유의 말로 어려움과 고난, 좌절과 위협에 굴하지 아니하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1948년 같은 해에 건국하였다.
      건국 이후 두 나라가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며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우리는 머뭇거리고 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흔히 하는 말로 한강의 기적까지는 성취하였는데 한반도의 기적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리에게 티쿤 올람 정신과 후츠파 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한강의 기적을 한반도의 기적으로 마무리 하자!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濟世理化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하는자연의 순리와 이치대로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참된 사람이 되라!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자연의 이치와 순리대로 살아가며 

      천지자연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널리 이로움을 주는
      참된 사람이(-진정한 만물의 영장)되도록 하라! 는
      실로 심오하고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금과옥조의 귀한 말씀입니다.


      홍익인간...에서 

      인(人)은 사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인간(人間)이라는 글자는

      천지간의 모든 만물(天地萬物)을 뜻합니다.

      인간은 결코, 이 우주의 주체가 아니며, 

      인간은(사람)은 우주의 무수한 생명체 중 

      미미한 한 종류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구의 생명체중에서 영적능력이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나, 결코 지구의 주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물의 주인-주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인간의 오만과 방종이 적정선의 한도(限道)를 넘쳐서
      자연을 거스르고, 자연에 가장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상이고 현세의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와 이기를 위해서,
      자연을 동격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인간 편의를 위한 이용물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지구상의 가장 기괴한 괴물로 변해버렸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애석한 사실이긴 하지만...

      오늘날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독충(毒蟲)같은 존재들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우주는 우리와 한 몸입니다.
      자연은 우리와 같은 몸입니다.
      우리와는 시공간과 크기와 형태가 좀 다를 뿐...


       

      천부경에서 이르는 금언(金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참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잘못된 인식과 

      자연에 해악을 끼치는 나쁜 습성들을 버리고 고쳐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와 자연에 해악을 끼친 그 인과응보로 받게 될
      자연의 재앙과 그 앙화를 조금이라도 감소 시키려면
      지금부터라도 문명의 해악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실은, 매우 시급하기도 합니다...)
      과학을 자연과 조화롭게 융화시켜
      자연과 만물에 최대한으로 해악을 줄여야 하고, 부득히
      개발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가능한 빠르게 복구가능한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도모하고 개발을 하는 우주 정신과 우주 마음을 닮은
      전인적인 마음자세-

      -새로운 인류의식의 신인류 과학정신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밝은 미래도 인간의 어두운 미래도
      인간의 정신에 달려있음을 새삼 재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신의 영역도 아니고, 하느님의 영역도 아닙니다.
      오직, 인간 스스로가 만들고 짓는 것으로 인간의 인과(因果)영역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메릴린 히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이윤호 목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두 권의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
      2.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
      3. 유전적인 그 죄의 뿌리를 끊지 않으면 저주가 가계를 타고 계속 흘러간다.
      4. ‘가계 점검표’를 사용하여 조상들의 죄를 일일이 알아내서 죄의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
      5. 예수를 믿는 사람도 가계의 저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여전히 저주 아래 있다.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조상이 지은 죄의 저주가 3~4대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삼사대라면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려오는 각종 질병들, 알코올 중독, 편두통, 정신이상, 일찍 죽는 것, 열등감, 신경쇠약 등 무려 58가지의 저주의 행위들을 열거하며 그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계저주론’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게 보여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예외적인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드리면, 가계저주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특이한 일이 있을 때 종종 ‘집안 내력’이라고 말합니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면 축복이지만, 좋지 않은 일이 내려오는 것은 저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내력이 실제로 후손들에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당신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와 같은 일들이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저주가 더 이상 없습니다.
      혹여 저주와 같이 보이는 일들이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며, 장차 정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삶, 정죄의 심판, 영원한 죽음의 형벌,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저주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받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장차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와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 저의 가정에는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 있었습니다. 헛된 것임에도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받아들여 행하였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귀신을 섬기는 것과 술 취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헛된 행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귀신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탄의 권세를 멸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담대하게 그 모든 행실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와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믿음에 대하여 한마디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설명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무더운 날 사람 만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음악을 감상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돈이 생기기 때문에 오셨습니까? 행여나 잠자려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왔습니다.
      바울의 설명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가지고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 2년 반 동안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지낼 때 자기도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을 너희도 잘 알 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4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의 증언에서 그 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8:31절 이하에 유명한 승리의 개가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까지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9절) 여기에서 바울은 세상의 힘보다 더 강한 내적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간증하면서 이것은 자기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힘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더욱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내적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증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메이슨 이란 마을에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가 총을 듣고 디그라핀리드씨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남편 나단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 루이스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운 손님처럼 대하여 주었습니다.
      “무거운 총을 들고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콧노래로 찬송까지 부르면서 식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루이스는 자기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믿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 믿는 기쁨과 새로운 인생을 그 죄수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 3시에 침범하여 오전 10시가 되기까지 그 집에 머물렀는데 불과 일곱 시간 사이에 탈옥수는 자기 발로 교도소에 돌아갔다는 실화를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컨트롤(조종, 제압, control)과 파워(능력, power)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영적능력은 죽음을 이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란 바로 컨트롤(제압)을 뜻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은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역사는 컨트롤 보다 내적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류에 입증해 주었습니다.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국수적 민족주의 등 모두가 국민이나 이웃나라들을 컨트롤 하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 힘이 있는 민주주의가 더 강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란 이 내적 힘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이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는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 깃발 아래 벌레처럼 약해 보였으나 로마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예수의 능력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선채가 약할 때 “예수의 사랑의 능력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하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능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점심식사를 하고 열두광주리가 남은 기사가 나옵니다. 디베랴 호숫가 넓은 초장에 배고픈 무리 5천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점심을 먹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두 제자 빌립과 안드레의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빌립은 “2백 데나리온(한화 약2,000만원)을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계산에 근거해서 불가능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군중속에서 어떤 소년 하나가 지참해 온 도시락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예수께 드리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5천명은 일대 천(1:1000)의 엄청난 차이지만 안드레는 예수의 잠재적인 능력에서 작은 믿음을 걸어 본 것입니다. 이때 정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potential)을 믿는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디베랴 초원에는 계산기 대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수, 주홍같은 죄로 눈같이 희게 할 수 있는(사1:18)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리오 질라드(Leo szilard)는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이론 물리학자였습니다.
      1933년 그는 런던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12일 신문을 읽던 그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들이 학술회의에서 “원자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꿈이다”라는 결론이 났다는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질라드세는 한방에서 연구하는 동료인 엘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가능성을 믿고 탐구하는 것이 옳은 자신이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이요” 화를 내면서 그는 신문을 찢어 버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오랜 연구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장 작은 원자속에도 대 우주를 흔드는 위력을 나오게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보유시켜 두셨다는 것입니다. 원자 그덧은 가장 작은 입자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속에 더 큰 위력을 숨겨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원리를 발견한 순간 세계사에 큰 영향을 일으킨 핵 시대가 연구소에 돌아와 자기의 해답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했더니 아인슈타인은 감격스럽게 “당신은 놀라운 점심을 먹었소”(you had an incredible Lunch)하며 기뻐했답니다. 모든 발견과 발명도 가능성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런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엡 3:20-21)

      믿음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에게는 그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동료, 여러분이 시원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 여러분이 부도덕하거나 죄인처럼 생각하는 그에게 회개의 가능성, 큰일을 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머리를 돌리 때 하나님은 그를 더 사랑하십니다.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근거도 이 가능성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주님의 큰일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아야 좋은 교회가 이룩되고 2세 교육과 전도에 열심히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예수님과 안드레의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능력이란 에너지(동력)입니다. 이 에너지에 나를 접선 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나와 여러분의 가능성이 힘으로 변화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드린다면서 제물인 양은 왜 안 가지고 갑니까?” 그렇게 묻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아들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인 준비하신다는 뜻인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막힌 슬픔속에서도 준비하시는 하나님,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속에서 무지개를 보았고, 야곱의 믿음은 광야 가운데서 하늘나라에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바위속에 생수를 보았고, 삼손은 사나운 사자의 몸에서 꿀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가장 약할 때 나는 가장 강하다”고 고백함으로서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달린 사과를 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한 알을 놓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과 나무를 세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보고 창조물을 보면서 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십니까? 이 땅에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왜 부활을 믿지 못하십니까?

      창조의 근원을 해명 못하면 모두가 헛소리 일 뿐입니다. 첨단과학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극소수의 부분적인 재료를 이용하는 것을 대단한 발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고, 큰 배가 대양을 떠갑니다. 우주선이 달과 다른 횡성을 이착륙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과학이 하나님을 부인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공기의 유속의 차이가(베르루이의 원리) 아니면 비행기가 어떻게 날으며 물의 부력이 없으면 배가 어떻게 뜹니까? 인공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란 하나님께 창조하신 물질 중에서 원리와 성질을 활용한 미미한 학문에 불과한데 교만한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의 존재까지 건방지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들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우주만물이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믿으십니까? 생각을 조그만 바꾸어 보면 어린아이들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총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던 탈옥수 같은 세상의 힘보다 믿음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내적 능력으로 죽음을 이긴 예수로부터 받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유의 힘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올 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바울처럼 병들고 신체가 약할 때 “예수의 능력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원리에서 가장 큰 위력이 나왔습니다. 별 것 아닌 나에게도 엄청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빌립처럼 계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빵1개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잠재적인 능력에 작은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계산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잠재력을 믿은 것이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때 앉은 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에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5절)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power)을 갖게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이성적으로 믿지 못할 내용이 많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란 이성을 포기하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납득이 안가는 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믿는 것을 보고 광신이라고 생각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요행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신자들의 논리에는 한가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실 불신자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이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뉴욕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한국에 간다고 하자. 우리가 그 비행기를 타는 것은 그 비행기의 기장이 우리를 약속한 시간에 한국에 데려다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 비행기가 우리를 북한으로 데려갈 것을 의심하거나 우리를 쌍둥이 빌딩으로 돌진할 거라고 의심한다면 우리는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왕재 서울대학병원 해부학 교수가 비타민C가 생명의 물질이라고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면서 3개월 이상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매일 끼니때마다 비타민C 6g을 복용하고 한 달 만에 퇴원한 다음 그로부터 11년을 더 살고 82세에 소천한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비타민C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비타민C 복용법은 식사 때마다 최소한 2000mg을 식사 중간에 또는 식후에 복용을 하면 당뇨ㆍ고혈압ㆍ위암 그리고 대장암 등이 예방ㆍ치유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 두 부류로 갈라졌다. 이 교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말이다.

      세상적인 지식도 받아 들이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 심지어 과학자의 말도 믿음이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지식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어지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말씀 말이다. 이 교수의 비타민C와 같이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두 부류로 갈라진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말이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 가운데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것이다.

      비타민C를 먹으면 건강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십자가의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마음의 절대적인 평안이다.

      평안이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절대적인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이전에는 미웠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그들이 불쌍히 여겨지는 것이다.

      여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교회에서 순교 당하실 때까지 사역하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 청년을 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 세계 22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천당 가려고 믿는가?

      왜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은 나는 왜 사느냐하는 질문과 같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구도 내 인생을 내가 원해서 선택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인생을 시작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를 믿는 이유도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신 상태로 있다가 교회를 나가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혹은 죽을병이 들어서 건강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낙심 중에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누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도 한다.
      부모 때부터 믿는 가정에 태어나 믿음을 갖기도 하고 혹 먼저 믿는 아내나 남편을 따라 믿음을 갖게도 되지만 성경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될 사람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미 있는 것으로 때가 이를 때 사람들이 여러 경우를 통해 믿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에베소서 1:3-1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해놓은 것으로 이 땅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받도록 작정된 사람을 믿음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예수를 믿느냐 하는 질문의 답은 "전능하신 창조주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불러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믿으면 천당 가는 것이지 천당 가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꿈에 한 불신자 청년에 나타나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예수님을 믿어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지!"
      그러자 그 청년의 표정이 어딘지 어색합니다.
      좀 못마땅하다는 표현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옳은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청년에게는 저의 대답이 그리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꿈을 꾸고 새벽 예배에 나와서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왜 그 청년의 표정이 안좋은 거지?"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그 청년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 청년에게는 나의 대답이 좀 이해가 안될 수 있겠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불신자 청년은 아마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한국의 독립 운동을 위해서 죽어간 유관순 누나도 결국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고, 결국 그 혜택은 우리 모든 한국 사람들이 받은 것이기에 엄격히 따지면 유관순 누나도 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유관순 누나를 믿지, 왜 남의 나라 사람인 예수님을 믿는 거야?
      목사님은 애국심도 없나?
      목사님은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은 좀 고리타분한 분이구나!
      만약 자기 육신의 아버지나 조상이 자기를 위해서 죽으면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나 자기 조상님을 믿고 신으로 섬기겠네? 그럼 뭐야?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 아닌가? 그리고 만약 내가 목사님을 위해서 죽으면 목사님은 나를 신으로 믿을 것인가? 나에게 십일조를 낼 것인가? 에이, 어쩐지 그 대답은 좀 그렇다."

      이렇게 불신자 청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아마 이 자리에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즉 저의 대답에는 불신자에게 좀 더 이치에 맞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여태까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분이 있다면 제 손가락을 자르고 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피를 갖고 태어난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것은 1%의 오차도 없는 100%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어느 개인,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간에 합당한 이치입니다. 특히 가장 큰 죄로 취급되는 반역죄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단지 선악과라는 과일 하나를 따먹은 죄가 아닙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과일 하나 따먹어서 그토록 저주를 받고 죽는다면 우리 하나님은 참 옹졸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과일 하나 따먹어서 사형을 당한다면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하나라도 서리해서 먹은 사람들은 다 사형을 당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남의 것을 조그만 것이라도 훔친 사람은 모두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하여간 성경을 잘못해석하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아주 못되고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안티 기독교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이의를 매사에 제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틀리다고 반대하고,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악하다고 반대하므로 결국 하나님과 반대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피조물로서 감히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창조주 하나님을 죄인석에 세워놓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재판관인지 위치를 바꾸겠다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우위에 있겠다는 교만이요 반역입니다.

      만물의 매니저로 세운 인간이 이렇게 마귀의 꾐을 받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반역하니 우주의 질서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님인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간은 마치 흐르는 강에서 떨어져 나온 지류의 물이 썩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하와에게 잘 다스리라고 맡겨준 이 지구라는 에덴동산도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는 저주와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영원히 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고,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도 모른 채 죽는 안타까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해도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닦아보려고 종교를 만들고 철학을 만들고 사상을 만들어보았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즉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이 사실에 의문부호를 제기합니다. "예수쟁이들 예수님 믿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났느냐?"

      이때 저와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예, 저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만난 사실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저는 이렇게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5-7)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자 곧 바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7-18)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며,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하며, 성령이라고도 하는 분을 우리 각 사람에게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하신 말씀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고로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만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요,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했는데, 바로 그 약속한 성령이 내 안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까지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를 죄에서 해방하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죄의 형벌과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는 내가 어떤 큰 공로가 있어서 된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쉽게 생각해보세요. 요즘 사람들 돈 참 좋아합니다. 물론 과거의 사람들도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이 돈을 너무나 좋아해서 돈 때문에 인륜도 천륜도 포기하는 시대가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을 했는데, 요즘은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 만큼 돈의 위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돈이 얼마나 있으면 여러분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크게 잡아서 100억 정도면 됩니까? 제가 드리지요. 너무 쉽게 대답했습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일 것 같지요.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아니, 100억을 얻는 조건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왜 안믿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예수님을 안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의심이 가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아니, 예수님 믿으면 진짜 100억을 줍니까?"

      예수님 믿으면 100억 보다 좋은 천국도 얻고, 이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에게 참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돈도 내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런데 또 이 말에 토를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예수님 믿어서 천국도, 얻고, 평안과 기쁨도 얻는다고 합시다. 어차피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믿으면 진짜 돈을 줍니까? 100억 말이에요?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니 한번 저에게 줘 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먼저 네가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이것을 주마?" 그러나 인간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100억을 저에게 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줄다리기를 하는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제법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저의 질병을 해결해 주시면, 저에게 좋은 직장을 주시면, 저에게 아름다운 배우자를 주시면..."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이러한 줄다리기를 어느 순간 그치고 맙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100억이 아니라 그보다 수천 배, 수만 배, 수억 배를 주신 것을 깨달은 날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온 우주의 상속권을 주신 것을 깨닫는 날에는 100억을 달라는 것이 마치 눈깔사탕 하나 달라는 것처럼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에게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좋은 직장도 주시고, 장래 좋은 아내감도 주시고, 어쩌고저쩌고 조건 조건 조건..."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다 주었느니라." 아- 얼마나 기쁜지! 내가 구하지 않은 것, 마음에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두 주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그와 동시에 저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마음속에 "아니-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왜 믿지 않는 거냐? 야 너도 예수 믿어라." 하며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장장 25년간 지내면서 제가 돈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돈을 안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우리 목사님은 참 부자이신 모양이네! 목사님 지갑에 돈 얼마 있어요? 꽤 있겠지요?"

      여러분, 부자가 돈 가지고 다닙니까?
      요즘은 돈 안 가지고 다녀요. 카드 하나면 다 돼요?
      그런데 카드가 분실되는 날에는, 혹은 잔고가 없는 날에는 꽝이에요.
      그러나 하늘나라 잔고는 꽝이 나는 법이 없어요. 우리의 믿음은 도적이 훔쳐가질 못해요, 분실되지도 않아요.
      제가 이 정도 말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 나도 예수님 믿자! 믿어 보자!" 오늘 예수님 믿고 100억, 아니 100억 보다 더 좋은 모든 것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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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 마음이 둔하여, 눈이 어두워, 깨닫는(야다) 마음



      눈(眼) -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


      1. 육안(肉眼)

      불교(佛敎)에서 이르는 오안(五眼)의 하나.
      육신(肉身)에 갖춰진 안구(眼球)
      안경(眼鏡)을 쓰지 않은 천생(天生)의 시력(視力). 맨눈
      눈으로 보는 표면적(表面的)인 안식(眼識).

      육안(肉眼)

      중생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눈
      중생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
      눈물의 형태나 빛깔을 구분하여 형상 있는 것밖에 볼 수 없고, 어떤 한계 안에서만 볼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관절과 골수’를 말씀하셨다.
      관절과 골수는 몸이다.
      그러므로 몸의 관절과 골수로 보는 것이 곧 육안이다.


      2. 심안(心眼)

      마음속으로 사물(事物)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그 작용(作用).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마음의 생각과 뜻’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의 생각과 뜻으로 보는 것이 곧 심안이다.

      심안(心眼)

      수행인은 육안에 대하여 심안(心眼) 곧 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을 갖도록 노력한다
      《금강경》에 제시된, 사물을 인지하는 눈인 오안(五眼) 중 육안을 제외한 천안ㆍ혜안ㆍ법안ㆍ불안

      천안(天眼) 삼세를 직관하는 신령한 눈
      혜안(慧眼) 대소 유무의 이치를 보고 일체의 선악 시비를 분별하는 견성한 눈
      법안(法眼) 견성성불하여 일체 법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는 눈
      불안(佛眼) 육안ㆍ천안ㆍ혜안ㆍ법안의 네 가지 눈을 다 갖추어 만능 조화와 천만 방편을 구비하고 일체중생을 대자대비로 보며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눈

      참고  【원불교대사전】 육안(肉眼)

      중생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눈. 중생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사물의 형태나 빛깔을 구분하여 형상 있는 것밖에 볼 수 없고, 어떤 한계 안에서만 볼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수행인은 육안에 대하여 심안(心眼) 곧 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을 갖도록 노력한다. 《금강경》에서는 오안(五眼)을 말하는 가운데 육안을 제시하고 있다. 오안은 사물을 인지하는 눈으로, 육안ㆍ천안ㆍ혜안ㆍ법안ㆍ불안이다.

      【대산종사법어 적공편 44장】

      대산 종사, 시각장애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다섯 개의 눈을 갖고 있다고 하였나니
      첫째는 육안(肉眼)으로 현실의 일체 색을 분별하는 눈이요,
      둘째는 천안(天眼)으로 삼세를 직관하는 신령한 눈이요,
      셋째는 혜안(慧眼)으로 대소 유무의 이치를 보고 일체의 선악 시비를 분별하는 견성한 눈이요,
      넷째는 법안(法眼)으로 견성성불하여 일체 법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는 눈이요,
      다섯째는 불안(佛眼)으로 이상의 네 가지 눈을 다 갖추어 만능 조화와 천만 방편을 구비하고 일체중생을 대자대비로 보며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눈이라, 진리가 그대들에게 지금의 눈을 주신 것은 더 큰 것을 주기 위함이므로 불행을 다행으로 돌려 부처님의 심안을 얻는 성자가 되기 바라노라.」


      3. 영안(靈眼)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하다(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암직하고”(창세기 3:6)
      “보암직하고”란 ‘눈이 추구하는’ 뜻이다.
      즉, 욕망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眼目의 情慾”에서 “정욕(epithumia)”은 사물에 대한 탐욕을 뜻한다.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탐욕의 포로가 된다.
      하와의 눈이 밝아 진 것은 금지된 것을 탐욕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 해도 시각과 청각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심령이 왜곡되게 마련이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내용에 따라 인품은 꼴 지어진다.
      그래서 관상학에서 몸은 1천 냥, 눈은 900냥이라고 한다.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곧 영안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육안이 있고, 심안이 있고, 영안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육안과 심안과 영안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육안과 심안은 우리가 확실히 설명할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는데, 영안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증명하기도 어렵다.
      그런 것은 심안과 영안을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하면 심안과 영안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다.
      예수 믿는 신자 된 우리 안에 마음의 생각과 뜻으로 보는 것은 심안이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는 눈은 영안이다.

      그러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가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것(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자들은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 있지만, 예수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은 육안과 심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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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6:52 / 마음이 둔하여

      πωρόω 스트롱번호 4456

      1. 굳게 하다.  2. 돌같이 굳게 하다. 3. 둔하게 하다
      발음 [ pōrŏ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ώρωσα, 완료 πεπώ- ρωκα, 제1부정과거 수동 ἐπωρώθην, 완료 수동분사 πεπωρωμένος, πῶρος ‘돌’에서 유래된 듯함
      • 1. 굳게 하다, 돌같이 굳게 하다, 둔하게 하다, 무디게 하다, 어둡게 하다, 막6:52, 요12:40, 롬11:7, 고후3:14.
      • 관련 성경

        둔하게 하다(막 8:17), 완고하게 하다(요 12:40, 고후 3:14), 우둔하여지다(롬 11:7).


      마태복음 6:23 / 눈이 어두워

      σκοτ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4652

      1. 어두운.  2. 마 6:23. 3. 눅 11:34, 36.
      발음 [ skŏtĕinŏs ]
      어원  / 4655에서 유래
      • 1. 어두운, 마6:23, 눅 11:34,36.
      • 관련 성경 /  어두운(눅 11:34,36).

      * σκότ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4655

      1. 어둠.  2.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냄. 3. 종교적 도덕적 암흑
      발음 [ skŏtŏs ]
      어원  / 4639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흑암(마4:16, 골1:13, 유1:13), 어둠(행26:18, 벧후2:17, 마6:23, 고후4:6, 요일1:6).
      * 4639 그림자 σκιά, ᾶς, ἡ 스트롱번호4639

      1. 그림자.  2. 예표
      발음 [ skia ]
      • 1. 그림자, 그늘, 행 5:15.
      • 2. 그림자, 예표, 전조, 히 8:5.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보는 눈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깨닫는 마음...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에 대하여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자세를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라고 주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본절의 참 뜻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에 완벽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더러
      2. 그렇지 아니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이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빛을 받지 못하면 백주(白晝)에도 소경이다"라고 주해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깨우침을 강조한 해석이긴 하나, 이 역시 본절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이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추궁한 역설적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사 6:9,10; 행 28:26, 27).
      즉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전달받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친히 목격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뜻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강퍅하고도 굳은 마음(출 32:9; 34:9)을 역설적으로 경책(警責)한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깨닫다(야다. 3045)

      יָדַע 스트롱번호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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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총명한 자(단 2:21), 감각(잠 23:35), 지식(느 10:28), 지식인(전 9:11),친구(왕하 10:11, 시 31:11), 친족(룻 2:1), 친우(시 55:13).
      [부] 능히(대하 2:14), 부지중(아 6:12), 반드시(창 15:13), 밝히(삼상 20:3), 분명히(왕상 2:37, 렘 28:15), 순식간에(시 35:8), 부지런히(잠27:23).


      보는(7200)

      רָאָה 스트롱번호7200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1299회 사용


      눈(5869)

      עַיִן 스트롱번호5869
      1.

      흐르다

      2.

      .

      3.

      분사 עוֹיֵן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발음 [ ʽayin ]
      구약 성경
      868회 사용

      듣는(8085)



      שָׁמַע 스트롱번호8085
      1.

      듣다

      2.

      창3:10

      3.

      창37:17

      발음 [ shâmaʽ ]
      구약 성경
      1159회 사용

      귀(241)
      אֹזֶן 스트롱번호241
      1.

      2.

      출29:20.

      발음 [ ’ôzen ]
      어원
      238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7회 사용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맞아서(2743) 카우테리아조(kautēriazō) καυστηριάζω 스트롱번호 2743

      1. 불에 그슬리다.  2. 태우다. 3. 딤전 4:2.
      발음 [ kautēriazō ]
      어원  / 2545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불에 그슬리다, 태우다, 딤전4:2.
      * 2545. καίω 스트롱번호2545

      1. 불붙이다.  2. 등불을 켜다. 3. 마음이 타다.
      발음 [ kaiō ]

      켜다(마 5:15, 요 5:35, 계 4:5), 뜨겁다(눅 24: 32), 사르다(요 15:6), 불사르다(고전 13:3), 불붙다(히 12:18), 타다(계 8:10, 21:8), 붙다(계19:20).

      열왕기하 6:8-17

      8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그가 신하들과 은밀하게 의논하며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자고 말하였다.
      9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시리아 사람들이 거기에 진을 칠 곳이 이러이러한 지역이니, 그 곳으로 지나가는 것은 삼가라고 말하였다.
      10 이러한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한 그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 곳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와 같이 경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1 이 일 때문에 시리아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모아 추궁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12 신하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서,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
      13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가서 찾아보아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붙잡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예언자가 도단에 있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14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17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문제와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들과 위기를 만나지만 그 문제들과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문제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영적인 눈이 열려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위기, 어려움을 보면 더 이상 두려움과 근심 걱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으로 감당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모습,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계략을 미리 알아 방어하게 하는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람(시리아)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기마와 병거로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 엘리사가 사는 성읍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14절입니다.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그 상황을 본 엘리사의 시종은 15절에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그 상황을 전합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본 엘리사는 16절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라고 시종을 안정시킵니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보인 이유는 엘리사의 사환은 육의 눈으로 앞에 보이는 위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람(시리아) 나라의 병거들과 창검들과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영의 눈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의 군대를 본 것입니다.
      17절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풍랑 속에서 담대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언제 이런 영적인 눈은 기도할 때 열립니다.
      17절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기도할 때 눈이 열렸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자 시종은 시리아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엘리사가 본 불 말과 불 병거를 거느린 하나님의 군대를 시종도 보았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시리아 군대를 보고 기겁하여 이제 죽었다고, 큰일이 났다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시종이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본 후에 시리아 군대가 눈앞에 있고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까?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하나님, 나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상황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능력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전능하심, 사랑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상속, 하늘의 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이 열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이 보이고 끔찍한 죄의 심판이 있는 지옥이 보일 때 복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때 인내함, 담대함, 순종함, 기뻐함, 희생함을 감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 근심, 분노와 짜증, 답답함이 내 안에 있습니까?
      영적인 눈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고 문제만 보일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처럼 신앙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시편 119:17-24)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성경을 수 백번 읽은 어느 권사님께서 성경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책을 그만큼 읽었으면 내용의 거의 암기할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광대한 진리요, 깊은 진리요, 놀라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크고 깊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할 수 있고 무식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요 6:60).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1, 63).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구원의 지식이요 신령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의 눈과 이성의 빛만으로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혀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읽기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없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신학자이며,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말씀을 열어 읽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통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단순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척척 알아지고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말씀에 감추인 모든 기이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마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얼마든지 읽기만 하고 깨닫지는 못한 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게 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시편 119편 설교 중에서). 약간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더욱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실 때에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에 걸맞은 영적 시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라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에 불과합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이 이토록 고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 이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정말 그 뜻을 하나하나 바로 알고 늘 우리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길을 늘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할 때에,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들으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여, 제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을 좀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저를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가능하면 한 절이나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기도했다. 말씀은 참으로 내 영혼에 고기요 음료였다. 매일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빛과 능력을 공급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이 복된 말씀이 우리에게도 복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와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스럽고 놀랍고 기이한 것을 좀 더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기이한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우리 죗값을 치르신 것과, 그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연합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눈이 열려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에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종인 저에게 주의 은혜를 거두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종이오니, 제 생명을 붙들어주셔서, 제가 사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 아래 거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고 잘 깨달아 알아서, 사는 동안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나는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아니, 저렇게 빛나는 태양을 어떻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있습니까?"
      이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의 만드신 저 태양도 쳐다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가?"
      랍비는 젊은이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면 하나님께 바쳐서 목회자로 세우라고 부모님들의 서원에 의해서 일찍부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때 문득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한 번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삼각산 승리기도원에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지막 삼일이 되던 날에 갑자기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이런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밤에 많이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일고 하겠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일생동안 아니 몇 대째 예수를 믿어도 그것은 종교생활에 익숙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영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의 눈을 열 수 있을까요?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일상생활에서 늘 부딪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딪침 때문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물질이 육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9~2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을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물질만 사랑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영안이 밝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나 교만, 증오심을 버려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선입견은 마치 색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다른 사상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철학 사상이 틀어 박혀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보고 영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교만과 증오심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결정된 후에는 우선순위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또다시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항상 회개하고 거듭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죄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일류 학교를 나왔어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게 될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바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데 올라가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시내를 멀리까지 다 볼 수 있는 것 같이, 심령이 맑고 죄악의 구름과 안개가 다 벗겨져 나가야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멀리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른 자리가 어디 일까요?
      산에 올라가야 합니까?
      높은 건물에 올라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넷째, 성령님의 도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안나타났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이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에베소서 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마음의 신령한 눈을 떠서 더 근본적이고 신비한 것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면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나를 왜 자녀 삼아 주셨나? 그리고 지금 내게 바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능력 안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근심과 염려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있는 큰 능력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영안이 열리어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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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열왕기하 6:14-19)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눈
      둘째, 지식의 눈
      셋째, 영적인 눈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나라는 강대국이 자주 이스라엘 지경을 침범해 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람의 침략은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편에서 벌써 침략할 루트를 알고 사전에 차단하고 있거나 군사를 매복하고 있음으로 번번이 패전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아람 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말하기를 ‘분명, 우리 편 중에 스파이가 있어서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장에 그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영적 레이더에 다 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왕은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결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줄 알고 왕은 우선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체포하리라고 결심을 하고 막강한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으로 보내서 한 밤 중에 감쪽같이 몇 겹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침이 훤히 밝았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품을 하며 무심코 성 아래를 보다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아람나라의 군대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한 채, 무시무시한 창검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종은 허겁지겁 주인 엘리사에게 쫓아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종의 눈에는 자기 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는 몇 백명의 중대 병력이나 있을까, 가장 막강한 아람 군대의 수만의 군대와는 감히 비교도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엘리사가 이제는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 때, 엘리사가 종의 이러한 의심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의 눈에서 의심의 비늘이 벗기어지더니 영안이 열리었습니다.
       
      열린 영안의 눈으로 성을 내려다보니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성과 엘리사의 집을 옹위하고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그러자 아람 군대들의 눈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엘리사는 군인들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곳은 길도 아니요. 성도 아니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오라’고 하자, 군대가 저를 따라 이스라엘의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근심에 빠졌던 이스라엘 왕은 신이 나서 당장에 그 모든 군대를 몰살을 시키려고 했지만 엘리사가 만류하고 오히려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혼줄이 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고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니 그 사랑 앞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너무나 멋지고 놀라워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큰 힘이요, 승리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 중에 영안이 닫히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시려 하시거나 경고를 하시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매를 들고 때리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매를 자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리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롯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안이 열리며 예수님을 보고 고꾸라지며 변화되었으나 사도행전 9:7절에 보면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유형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영안이 열리면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미래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었으나 많은 죄수들은 자기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만 보다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시는 데 세상의 욕심에 영안이 닫히어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여러분은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 중에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영안이 열린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눈, 영안이 열릴 수가 있을까?
       
      말씀의 눈을 열어라!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속인 말씀을 통해서 보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눈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우리는 영안이 확 열리어서 천사의 모습이나 마귀의 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고아 2,000명을 기적 가운데 먹여 살린 죠지물러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성경의 약속대로 믿은 데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졌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약속대로 이루어 주는 책입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의 눈을 열어라
       
      기도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와 뜻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반면, 기도는 그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청구요, 요청입니다.
      즉, 성경은 약속의 보물창고라면 그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쓰지 못하고 굶거나 물건을 못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히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깊은 기도생활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볼 수 있었고 가뭄 속에서도 미래의 큰비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기도에 게을리 하면 이상하지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약해지고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으로 바꾸는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저해요소인 죄책감이나 근심, 염려,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응답되어진 사실을 상상하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의 빛」의 저자 아그네스센포오드 여사에게 어느 부인이 상담하기를 ‘내 아이는 아주 삐뚤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여 점점 우울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감으로 점점 짜증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를 ‘이제부터 기도해 보세요. 기도를 하되 이렇게 해보세요. 밤에 그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앞으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너그러운 아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믿고 기도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방법대로 한 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오기를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어요.
      나는 한평생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명랑해졌고 자신감이 생기었고 내게도 대단히 다정하게 대합니다.’라고 기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기를 그 아이는 행복감에 젖어 있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되어진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함의 눈

      행함의 눈이란 말씀대로 믿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 위에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간악한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왕은 그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우상에게 절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하여 외치기를 ‘왕이 우리를 불 속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전혀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강대국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엘리사의 초라한 초막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특별안수를 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전혀 내다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서 명령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처방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화를 몹시 냈으나 나중에는 모든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무조건 물 속에 일곱번 들어갈 때에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신애성구공예사 대표 이희재 장로님의 간증에 의하면 4․19 혁명 이후에 사업이 크게 망해서 빚덤이 위에 앉게 됨으로 6남매가 굶기를 떡 먹듯이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인 이초운 권사님이 병들어 돌아가시는 큰 비극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삼각산에 올라가서 죽든 살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며칠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그런 음성을 세 번 듣고 힘을 얻은 다음에 다시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맡은 일에 충성 등, 몇 년 동안 여전히 빚덤이 위에서 아무 증거, 아무 환상, 아무 음성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는 데 놀라운 정도였고 나중에는 70평의 공장이 240평이 되고, 다시 700평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말씀의 눈, 기도의 눈, 행함의 눈에 의해 영안이 열리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 그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됨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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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 심청전의 이야기

      고전소설 심청전(沈淸傳)에 보면 심봉사가 등장합니다.
      심봉사의 본명은 ‘심학규’로 양반 집에 태어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나 곧 눈이 멀어 관직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비참한 양반 심학규를 본명 대신 심봉사라 부릅니다.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봉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천하의 효녀에요.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아비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청나라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인당수 바닷물에 풍덩 빠집니다.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복을 받아 왕비가 되고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게 됩니다.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하는

      눈은 사물을 보게 합니다. 또 어디로 가야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차를 탈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문화생활을 할 때도 눈이 있기에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눈은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개인적으로 눈을 통해 누린 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릴 적 2.0이나 되는 엄청난 시력으로 남들이 보기에 기이한 경험도 했습니다. 운동장 끝에 있는 글씨를 읽었을 정도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안경을 사용해야 앞에 있는 글씨도 정확하게 봅니다. 그래서 눈이 가져다 준 선물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고, 잘 관리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그리고 눈은 눈대로 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 역시 각자의 자리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발이 있기에 어느 곳이나 다닐 수 있습니다. 손이 있기에 식생활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위기를 분별하여 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눈은 창조의 영광을 가까이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볼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늘 넘쳐야 하고 보지 못하는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음이 중요한 것은 단지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볼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본다면 그것은 눈을 주신 이의 뜻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욱 부패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그 화려함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더구나 명품 코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더 아름답고 더 멋지게 그리고 더욱 폼 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게 하는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기에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합니다. 눈이 그 곳에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우리의 삶을 모두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눈을 잘 제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눈 때문에 패가망신에 이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신의 눈에 해당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한 엘리사와 게하시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육적인 눈과 영적인 눈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비서인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를 죽이려는 아람 왕의 군사 앞에 게하시는 두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았던 불레셋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절망적인 삶이 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영의 눈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믿음은 눈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주는 특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믿음의 눈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이 사라지고 이성의 눈만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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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대에 이렇게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간절한 딸의 소망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심봉사처럼 눈 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꼭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양미 300석을 교회에 바치라든지 인당수에 뛰어들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떠야 할 눈은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신의 눈을 뜨기 원하신다면 안과를 찾아가 개안수술(요즘 수술 참 쉽습니다)을 받든지, 공양미 300석을 바치든지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 즉 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아서 몸도 비틀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시를 써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육신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도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그가 진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적인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할 것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오늘부터 2013년 다섯 번째 시리즈 설교로 <열어주소서!>라는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안을 밝히 뜰 수 있는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안이 밝히 떠져 영적인 신비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제일 먼저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야 한다고 말씀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영안이 떠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되어서 성경에서 가장 절수가 긴 시편인데 이 176절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라서 사람들이 ‘말씀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시편인 119편 17~18절에서 시인은 무엇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습니까?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마도 시인은 지금 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모양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든지 가정이나 물질에 문제가 생겼든지 뭔가 어려움이 겪고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저를 후대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냥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세요. 
      그래서 주의 율법,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발음은 본토발음이 아니더라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영어성경인 NIV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제가 굳이 영어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어로 볼 때 좀 더 느낌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제 눈을 열어주세요! 
      제가 당신의 율법에서 원더풀 한 것, 놀라운 것,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느낌 알지요? 
      확 와 닿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꼭 떠야 하는 이유는 그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주변 사람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못 믿는 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눈은 멀쩡한데 아직 영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지식으로도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거든요. “하나님! 어리석은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저 영안이 가려진 제 남편, 자식, 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영안이 뜨여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야말로 원더풀한 것, 놀랍고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문제는 아직도 영안이 밝히 열리지 않아서 말씀을 보아도 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이 맹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십니다. 더럽게 웬 침이냐? 약이라고 발라주신 것이냐? 아마도 무슨 상징적인 행위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안수하신 후 그 맹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23절) 그랬더니 맹인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또렷하진 않고 희미하게 윤곽만 보여서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떠지지 않아서 그렇지요.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고 사람이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어서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영안이 환하게 열리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이기는 보여요.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는데 또렷하게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이거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확신도 적고 전도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씀을 보고 들으면 좀 알 것은 같은데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원더풀하다? 시편 19:10에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맛이 뭔지, 그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뭔지 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금 그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니 맹인이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히 열려서 말씀이 또렷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이, 그 놀라운 말이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곧 임직을 받을 피택자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요즘 제가 참 즐겁습니다. 피택자 교육을 ‘세게’ 받아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 정말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막 느낌이 오기 시작하네요.”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니 전에도 많이 읽고 들은 말씀이지만 그야말로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고, 느낌이 확 와 닿고, 정말 원더풀,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이 아직 원더풀 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다, 짜릿한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속히 우리의 영안이 떠지기 바랍니다. 크게 밝게 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내 속에서 막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고 말씀 때문에 놀랍고 짜릿하고 뜨겁고 이런 경험을 다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사명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참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또 한 가지의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율법에 미쳐서 예수장이들을 미워하고 다 박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아 기꺼이 증인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머나먼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는 예수장이들을 다 잡아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시는데 그 순간 사울은 눈이 멀게 됩니다. 

      사흘 동안 다메섹의 한 집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그 즉시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박해자 사울이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울이 다시 뜬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는 비늘이 껴있었습니다. 

      율법과 유대교라는 비늘이 껴있으니 영안이 닫혀서 예수님을 못 보다가 이제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영안이 뜨이니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 사명인 줄 알았는데 영안이 열리니 내 진짜 사명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혹시 어떤 비늘이 껴있는지요? 
      먹고 사는 것 걱정, 내 삶, 내 가정, 내 가족만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늘이 되어 우리 눈에 끼어서 영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명은 안 보이고 나만 보이고, 내 생각과 내 고집만 보이게 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뭐’에 해당되는 말이 뭔지 아시지요? 
      동물 이름입니다. 
      이 말이 강단에서 쓰기 힘든 속된 말이라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래도 꼭 맞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히면 꼭 그 수준밖에는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가 건축을 잘 하고 나서 본당에 뭘 들여놓을 것인지 의논하다가 싸움이 났답니다. 
      싸우는 이유는 이겁니다. 
      본당에 오르간을 들여놔야 하느냐, 피아노를 들여놔야 하느냐? 
      우리 교회처럼 오르간 피아노도 다 들여놓으면 안 싸웠을 텐데 아마 좀 작은 교회였나 봐요. 
      그 교회에 음악을 좀 아는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회는 오르간이다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좋은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 고집하니 싸움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들으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음악수준이 높네 낮네 싸우다가 교회 전체가 오르간 파와 피아노 파로 나누어 지금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눈 때문입니다. 
      시야입니다. 
      시야가 좁아져요. 
      육신적인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못 뜬 게지요. 
      이 경우는 내 음악지식이 육신의 눈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누가 보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부터 보이고 예수님부터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주님은 뭘 원하실까? 
      이것부터 봐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오르간이냐 피아노냐 그것이 뭐 그리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데 오르간으로 찬양 드리든, 피아노라 드리든 하나님이 그걸 따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안 열리니 알량한 작은 음악지식 가지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교회는 작게 보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축원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게 된 3중장애를 가졌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도운 설리반 선생님도 유명하지요.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도 못 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얼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신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눈은 그 누구보다 환히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헬렌 켈러와 달리 너무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만 봅니까? 
      나만 보입니까? 
      지금까지 받은 은혜 못 보고 없는 것, 부족한 것, 원망 불평거리만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고, 말씀이 놀랍게 보이고, 내게 주신 사명이 확실하게 보이십니까? 
      불평 원망보다 감사의 제목이 보이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그 환한 눈으로 주님을 확실히 보고 주의 일을 확실히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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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 블레포, 호라오, 데오레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블레포

      호라오

      데오레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헬라어의 "보다"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옵타노마이//내 마음대로, 내 시각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본다. 옵타노마이 중심은 사람이다. 안목의 정욕, 인간의 성정으로 보는

      2. 에이돈// 우리게 보여주어서 보게 되는 것, 누가보여주시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게 있다. 그게성전이다. 그게 시청각교재다. 이역사에서 하나님이 "에이돈"해주신교보재이다. 문자가 보편화되기전 즉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성전을 주셨다. 사람은 그 성전을 "옵타노마이"로 본다. 이걸 즉 성전을 자기식으로보니 그게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옵타노마이"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이단계의 사람들중에는 대표적인 사람이 종교적 수준의 사람이다..

      3. 브레포//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보는 훈련을 시키는 일을 한다. 이게 "브레포"다. "옵타노마이"로 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보는 것을가르치는 단계 즉 "호라오"의 중간단계다. 먹어봐야 맛을 알고, 만져봐야뜨거운줄을 안다. 이럴때 "브레포"라 사용한다. 내가 경험해서아는 것, 즉 경험해서 보게 되는 것, 이걸 "프레포"라고 한다. 즉 훈련의 단계다. 그 모든 경험은 예수를 통해 하게 되는 경험으로보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의 시각이 아닌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을 통해 본다. 

      4. 호라오// 마지막 단계의 봄. "호라오"는사람의 마음으로 눈으로 귀로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한다.라고 한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호라오"라고 한다.
















      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5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의 수의를 보았다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블레포’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로 밑의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는 ‘데오레오’입니다. 그 말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오레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오라오’입니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 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확인 도장을 찍고 가지요.

      (요11:40)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성경의 중요 용어 정리(고르반) (교만, 겸손)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정보)
      - 지혜는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11-22-2022, 추수감사절. 출애굽기 31장 브살렐과 오홀리압)  참조

          지혜(知慧) :
      발명과 창조의 능력
                           - 행하는 능력

          총명(聰明) :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 분별하는 능력(명철)

          지식(知識) :
      경험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능력
                            - 아는 능력

          재조(才操) :
      모든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하는 기술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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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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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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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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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
      비나”와 “테부나”는 “”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동사 “”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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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믿고 전도하라.”
      “신구약 성서 가운데 여러 말씀을 지키는 자가 어찌 나의 유언은 지키지 않겠는가.”
      “이잣돈 욕심 말라. 금전은 1원이라도 저금하라.”
      “교육을 양성하는 일만 경영하라.”

      1930년 경남 함안 조씨의 한 가문이 작성한 ‘교육조합(敎育組合)’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교육조합은 함안 군북면 사촌리에 거주하던 조좌규(1854~1936)씨가 다섯 아들과 함께 결성한 조합이다.
      집안의 경제적 부침과 상관없이 문중의 인재를 끝까지 교육하기 위해 다섯 섬 두 마지기의 땅을 내놓아 여기서 나오는 산출로 후손을 교육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핵심은 기독교 인재 양성이다.

      함안 조씨는 영남의 명문가다.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이 문중의 일가이고 인근 지수초등학교는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 회장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역시 함안 조씨다.

      구한말 외세에 의해 국권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조동규 조좌규 형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봉건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문중에서는 족보를 퇴출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들은 굳건하게 믿음을 이어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함안 사촌교회는 1897년 설립돼 125년 역사를 이어왔는데 호주 선교사 앤드루 애덤슨(손안로)이 조동규씨에게 전도하면서 설립됐다.

      당시 조동규씨는 애덤슨 선교사에게 “우리가 개종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는지” 물었고, 애덤슨 선교사는 “조선 사람 100만명이 예수를 믿으면 독립이 가능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조씨는 즉각 조카 조용관과 함께 논 1980㎡를 헌납해 사촌리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웠다. 조동규의 아들 조용석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의 서울 경신학교에 다니며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가 투옥됐고, 훗날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대표 목회자로는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지금의 사장 직위)를 네 번 연임한 조선출 목사가 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서문.

      교육조합 문서는 1부 서문, 2부 규칙, 3부 유서로 작성돼 있다.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영특한 자손을 교육하는 기금을 내고 이를 운용하는 규칙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라는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허경진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한문 번역을 도왔다. 허 교수는 “동서고금 유언은 생전엔 효력이 없고 죽은 뒤에 효력이 있다는 히브리서 9장 16~17절 말씀으로 유언이 시작된다”면서 “전도를 당부하고 금전 대부를 금지하며 정의와 가규(家規)를 강조하는 등 기독교 신앙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엔 사촌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문중의 산에서 교육조합비 제막식이 열렸다. 교육조합 문서를 한글로 번역해 후손들이 쉽게 읽도록 돕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어 박병연 사촌교회 목사의 인도로 기념 예배가 드려졌다. 문중을 대표해 조종석(78) 안수집사가 인사말을 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규칙.

      “당시 문중의 어른들은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길이 새 세계의 조류에 합류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교육조합을 창설해 ‘주 안에서 교육에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런 뜻을 받들어 가풍으로 삼고자 이 기념비를 봉헌합니다.”

      사촌교회 앞마당에는 1928년 조동규씨의 교회와 관련한 헌신을 기록한 비석도 남아 있다. 비석의 글은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하고 투옥 후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던 함태영 목사가 썼다.
      법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후 목사에서 정치가로 계속 거듭난 함 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 연동교회와 인연이 있고 한국신학대 학장을 역임하다 이승만정부에서 부통령까지 지냈다.

      사촌교회 박 목사는 “함안 출신 산돌 손양원 기념관과 세브란스 출신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태석 기념관, 그리고 사촌교회와 교육조합 비석까지 함께 기독교 역사 순례지로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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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반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 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 7133 קָרְבָּן 스트롱번호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발음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구약 성경 / 8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 2:1, 4,12,13, 7:13, 9:7, 15.
      • 관련 성경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 7126. 카라브 [ qârab ] קָרַב 스트롱번호7126

      1. 접근하다.  2. 시 69:19.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발음 [ qârab ]
      구약 성경 / 29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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