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작 자료


영작 자료

1. 잘 지내세요?

  How are you doing?
  How's it going?

2. 해변에 가는게 어때?

  How about going to the beach?

3. 나 좀 태워 줄래?

  Can you give me a ride?

* 나 좀 도와 줄래?
  Can you give me a hand?


4. 그는 웨이터로 일해.

  He works as a waiter


5. 조언 고마워.

  Thanks for the tip.

6. 병원에 가는게 좋겠어.

  I think you should see a doctor.

7. 발 밑 조심해요

  Watch your step.

  look - 의식적으로 보는 것 / look at
  see - 우연히 보는 것 /
  watch - 시간적 차이를 두고 보는 것 /

8.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He had a car accident.
  He had a traffic accident.

* hit and run accident /

9. 혹시 현찰 있어요?

  Do you happen to have cash?

 * Do you happen to know him?
 * Do you happen to be free?
 * Do you happen to need help?

10.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It's now or never?

 * Should I go (and) talk to her.

11. 한국 음식 먹어본적 있나요?

  Have you ever tried Korean food?

12. 일어날 시간이에요

  It's time to get up.

13. 아뇨 괜찮아요. 고마워요

  No, I'm good. Thanks

14. 그래서 여기를 좋아해요

  That's why I like this place.

15. 이 책 십불 주었어요.

  I paid $10 for this book.

16. 주소가 어떻게 돼요?

  What's your address?

17. 캠핑은 나랑 안 맞아요

  Camping is not my thing.

18. 피곤하겠어요

  You must be tired.

19. 2시간 걸려요.

  It takes 2 hours

20. 별거 아니예요

  It's no big deal

21. 뭐하러 가요?

  Why go?

22. 나는 다음주까지 이 책을 다 읽을거야

  I will finish this book by next week.

23. 난 뭣좀 하는 중이야

  I'm in the middle of something.

 바로 지금 / right now

24. 그가 거기 있어요

  He's right there.


25. 왜 그런지 알고 싶어

  I want to know why.

26. 뭐가 무서워요?

  What are you afraid of?

27. 그것 참 안됐다

  That's too bad.

28. 당신은 재능이 있어요.


  You have talent.

29. 창문을 열어도 괜찮을까요?

  Do you mind if I open the window?

30. 네 새 드레스 정말 예뻐보여요.

  Your new dress looks super pretty.

31.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거세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How do you feel about learning about new anguage.

32. 에어컨 켜 드릴까요?

  Would like me to turn on the air conditioner?

33. 오늘은 이만하죠

  Let's call it

34. 설거지를 하고 있어요

 I'm doing the dishes.

35. 근처에 공원이 있어요

 There's a park nearby. (around here)

36. 그럼요 하세요

 Sure, go ahead.

37. 힘내요. 할 수 있어요.

 Come on, You can do it.

38. 일기예보에서 눈이 올거래요.  

 The forecast falls to snow.

39. 제 잘못이예요
- 원래 마이 다음에는 명사가 와야 한다.
  그러나 회화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My bad. - My mistake. My fault

40.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your help(helping).

 Thank you for waiting.
 

41. 오해하지 마세요

 Don't get me wrong.
          이해하다- get


42. 호텔에 어떻게 가죠?

 How can I get to the hotel.
   - How can I lose(루즈) weight.

43. 알고보니 그가 거짓말을 했어요

 It turned out he lied.


44.

45.

46.

47.

48.

49.

50.

성찬예식(2022년)(2023년)(2024년)


2024. 12. 01 성찬예식주일

2024년을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하여 매월  첫주일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 기독교도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허벅지 살을 베었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파피 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한 말은 참으 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습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 주셨으니 너는 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떡에 대한 두 개의 본문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The blood will be a sign for you on the houses where you are; and when I see the blood, I will pass over you. No destructive plague will touch you when I strike Egypt.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히브리 민족은 오직 피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만났던 두 관원들 한 사람은 술맡은 관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으나 떡 맡은 관원은 사형을 당합니다.
술과 떡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그 떡과 그 잔을 분배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떤 술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나누신 후에 십자가 형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의 피와 떡이 없이는 우리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피(담. dâm) דָּם 스트롱번호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דָּמָם 스트롱번호 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2. 명사, 남성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3. 명사, 남성 포도즙, 창49:11, 신32:14.
  a. 명사, 남성 복수 דָּמִים
  b. 명사, 남성 피, 살해, 시5:7(6), 26:9, 55:24(23),사9:4(5)
  c. 명사, 남성 살해, 살인죄.

참고 정보

연관 단어
☞ 피(창 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 피는 생명이다(창 9:4).
 따라서 피흘림은 생명의 허비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죽음의 천사가 다시 죽음의 피가 발려 있는 집을 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속의 피이다.
즉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가죽을 만들기위해 잡은 짐승의 피로 예표되었듯이(창 3:21), 장차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건질 수 있음을 뚜렷이 계시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다(요 6:54. 엡 1:7. 벧전 1:1)

떡(레헴) לְחֶם 스트롱번호 3900

1. 음식.  2. 연회. 3. 떡.
발음 [ lechem ]
어원 /  남[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3898. 먹다. 싸우다. (라함)  לָחַם 스트롱번호 3898

1. 먹다.  2. 싸우다. 3. 니팔형 נִלְחַם
발음 [ lâcham ]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창세기 40:22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but he hanged the chief baker, just as Joseph had said to them in his interpretation.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떡굽는자()

אָפָה 스트롱번호644
1.

요리하다

2.

분사형 אֹפֶה로 쓰일 경우 ‘빵굽는 사람’의 뜻을 가짐

3.

완성되다

발음 [ ’âphâh ]
구약 성경
13회 사용

󰃨 바로의 탄일 - 이날은 하나님께서 꿈 해석의 성취를 위한 날로 이미 예비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거대한 잔치와 함께 각종 죄수들이 왕의 특별사면을 받기도 하고 처형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例)는 신약 시대 헤롯의 생일에 침례 요한이 처형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마 14:6-11).


지오바니 파피니 (희생적 사랑)

 
이탈리아의 작가로 유명한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요 반기독교도로서 교회를 몹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서 요리를  만들어 아들  파피니에게 먹였는데 어머니의 살을 먹은 아들  파피니는 그것을 알리 없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병은 날로 호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또 한번 허벅지 살을 베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들 파피니는 죽어 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쳐 울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피맺힌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 에미는 죄 많은 인간이다.
나는  죄인으로 죄인의 살을 아주 조금  네게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으니, 아들아, 너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이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후 지오바니 파피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고  회개한 뒤로 "막다른 골목의 사나이"  "그리스도전"  같은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오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
이탈리아의 소설가 및 평론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수다한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1903-1907), <보체>(1908-1914), <라첼바>(1913-1915)의 여러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 및 철학자)의 프래그머티즘이나 베르그송(프랑스의 철학자, 1859-1941)의 직관주의를 도입하여 금세기 전반(前半)에 있어서 문예사상계의 주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양의 철학자>(1906)나 <24의 뇌수(腦髓)>(1912) 등은 이 시기의 주저이다.

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1912)를 발표하고 난 후부터는 이상주의로 기울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상계의 퇴폐상을 목도하고는 거꾸로 유신론으로 쏠려, 청년시절에 그렇게 매도(罵倒)하던 (神)을 인정하고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전(傳)>(1921), <성 아우구스티누스>(1930)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감각 마비라는 기병(奇病)에 걸렸으면서도 두뇌만은 명석의 도를 더하여 <불행한 자의 행복>을 구술(口述)로 발표하였다.







06-02-2024
3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신약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그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왜 그 작은 떡을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주셨을까?
과연 작은 떡덩어리가 그렇게 많은 군중들을 위하여 배부르도록 먹을만큼 나눠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그 떡은 입으로 들어가서 굶주린 배를 배부르게 하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많은 무리들을 모두 구원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이 곧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나눠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오늘 성찬의 자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생명의 양식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음료

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까?
살과 피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살에 못을 박히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춤을 추며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후 고운가루로 만들어 물에 풀어서 백성들에게 그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왜 금송아지를 불에 태웠는가?
이 과정은 순금으로 제련하는 것으로 순금가루를 물에 풀었을 때 그 물이 금색이 아니라 붉은색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장차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죄 사함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맛ㄹ 물이 없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잔은 용서를
떡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2024년 상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함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떡을 함께 먹고 마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령한 에너지를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6:58b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만찬에 대하여 (I)

마태복음 26장 26-28절 26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2-25, 눅22:14-20, 요13:21-30)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르게 성만찬을 기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만찬의 "유례"는 출애굽기 12장 첫 유월절/무교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2장 8-11절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시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반드시 기념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마26:19-20)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하신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실 것과 피를 흘려주실 것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유월절 양은 먼 훗날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셨던 떡과 포도주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것을 미리 증거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먹는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니어야 하며, 마시는 포도주 또한 육신의 포도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먼저 "떡"에 관련된 말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5-12절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위의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셨을 때 그제야 제자들은 육신의 떡이 아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예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인지 우리는 꼭 그 뜻을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3-4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위의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리신 상태였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라는 것을 마귀는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떡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아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한 놀라운 기적입니다(요6:9-13).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는 이 큰 기적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25-27절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위의 말씀과 같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육신의 떡을 위해 찾는 것임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양식에는 "썩는 육신의 양식"과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있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이 썩어질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적을 통해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요6:35)을 먹고자 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그것에 만족되지 못했을 때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68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을 먹으라 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어처구니 없게도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자 중 여럿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떡(양식)을 먹여주실 때는 큰 무리가 따랐지만, 정작 영생하는 예수님의 살 곧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 할 때는 다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육신의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위해 오신 분이지 우리의 육신의 것 때문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눅12:13-14).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믿음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때문에, 그 말씀 먹기를 사모하여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을 때, 이는 육신의 떡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누룩이 섞이지 않는(출12:15)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7-8절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예수님의 말씀, 벧전2:1-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을 때에는 자신의 생각은 없어야 합니다(고후10:5). 예수님께서 자신의 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여 유월절 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것과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의 생각과 지혜, 세상의 이론적인 것들을 버리고, 순전한 어린 아이와 같이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아멘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덧붙여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 또한 성만찬 때에만 행할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날마다 행해야 할 일입니다.

성만찬에 대하여 (II)

"포도주(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피로 비유로 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는 우리로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시는 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유례가 되는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에서도 "피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넘어간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피에 죄사할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죄인이었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피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양의 피로 대신케 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출애굽기 24장 8절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서 9장 18-22절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위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흘려주신 피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피를 우리의 문설주에 발라야 하고, 다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자는 살 것이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가 죄를 속함 같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죄를 속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는 곧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행전 10장 43절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우리가 예수의 피가 예수의 이름임을 알게 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는 것과 예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기 위해, 예수의 피를 마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제 우리들도 예수님을 위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2:4). 죄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운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싸움입니다(눅9:23-24, 눅14:25-35, 빌3:7-8).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3:17)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14장 7-8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문설주에 피를 바름과 같이 우리의 전면에 예수의 이름을 내세울 때에, 그 이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요일2:12, 롬4:6-8), 그 예수의 이름 때문에 심판을 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겔20:8-9,13-14,21-22, 계14:1, 계20:4-6). 혹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삶은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삶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셨고, 앞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41절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후에 우리가 당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겠다고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피를 받아 마시는 자(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로마서 8장 17-18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결론의 글.

성만찬을 지키고자 할 때에 의식과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만찬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 때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으로 깨달음 받고 그것을 기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만찬에 대하여 성경으로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도 쉽게 의식과 형식에 치우쳐서 아래와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34)절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위의 말씀은 성만찬의 예식이 어떻게 빨리 변질되었는가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여주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단지 성만찬의 의식과 형식만이 남았을 뿐이고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모임은 유익이 되는 모임이 아니라 해로운 모임이라고 규정하셨고, 이처럼 유익이 되지 못하는 모임은 결국 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1:12-1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도 성만찬에는 참석하였지만 오히려 사단이 들어 곧 나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요13:21-3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구약의 율법을 따라 대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지키려고 하였지만, 정작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고, 누룩 섞이지 않고 순전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만찬의 형식과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 금은보다 승하게 여기며(시119:69-70),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약4:10, 골3:17)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서 성만찬은 반드시 대대로 기념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아멘!




어머니 뱃속에서 겪은 역경…“자라면서 정신 건강에 영향 미친다”


산모가 역경을 겪으면, 그 영향이 태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어머니가 역경을 겪으면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함께 역경을 겪은 태아는 태어난 뒤 인지장애나 우울증 등을 겪을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임상과학연구소(SICS)는 어머니가 임신 기간 중 생활이나 환경, 신체적 어려움을 겪으면 아이에게 장기적으로 인지와 정신 건강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최근 밝혔다.
아이들의 뇌가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 속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멘탈 헬스’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태아가 겪는 역경(ELA)’을 정량화하기 위해 항목별 ELA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채점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임신 중 산모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가족 구조와 재정 상황 등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팀은 아이들의 뇌 발달 속도를 모델링하기 위해 4.5세, 6세, 7.5세 아이들 549명을 대상으로 MRI 뇌 스캔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정신 건강장애가 아동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 궤적을 추적하는 연구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면 그 체험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11-05-2023
11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성찬예식은 언약의 완성을 위한 예식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특징을 행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신약의 언약의 특징은 믿음 언약이라고 합니다.

행위 언약에는 노아 언약(무지개), 아브라함 언약(할례), 모세 언약(십계명), 다윗 언약(영원한 왕위 계승)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행위 언약은 완전히 실패한 언약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로 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언약의 완성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내려 놓으신 사건입니다.
자기 몸을 내려놓기 전에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려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받는 떡과 잔은 언약의 완성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죄인이 언약의 완성된 예식에 따라 그 떡과 그 잔을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11월 한 달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몸길이는 대체로 50mm-60mm로 황강달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주로 물이 맑은 하천 중류 기수구역이나 2급수 또는 물풀이 많은 곳에서 살며 새우나 작은 수서생물,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국내에선 강원도경상북도의 일부 및 제천시의림지 등에 분포하며, 북한 중국 일본 등에도 존재한다.
먹을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식용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희박하다.

대부분의 다른 어류들과는 다르게 가시고기는 알을 보살핀다.
수컷이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수초로 둥지를 만들어 놓으면 암컷이 와서 교미한 후 알을 낳고 죽거나 떠나 버린다.
그리고 수컷은 알을 보호하다가 새끼가 부화하면 죽고, 태어난 새끼들은 죽은 수컷의 살을 뜯어먹는다.
수컷은 자기 몸까지도 새끼의 먹이로 내준다.
이 습성은 알을 낳은 이후로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 여타 어류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특이한 습성이며, 부성애를 강조할 때마다 인용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09-03-2023
9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Then he took the cup, gave thanks and offered it to them, saying, "Drink from it, all of you.

장로교회의 예전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교회 헌법으로 이렇게 규정하였지만 성경은 이런 규정보다 더 폭넓은 성찬의 참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예식의 자리에 가룟 유다가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유다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도 성찬의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All of you(너희 모두 다)

이것을 다(아우투 판테스) / αυτου παντες

846.
αὐτός, ἡ, ὁ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 12:36 /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 예수
발음 / 아우토스[ autŏs ]
어원 / [재귀] αὖ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로) 그(마 1:20).
신약 성경 / 5601회 사용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1. 매
2. 모든 종류의
3. 어떤 것이든지다
발음 / 파스[ pas ]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 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떡과 잔은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같은 죄인도 떡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문제는 그 떡과 잔이 정말 나의 죄를 용서하는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아 넘길 흑심을 품은 도둑같은 사람들이 먹고 마신 후에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참된 성찬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08-06-2023
8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1. 생각나는 것,  2. 기념,  3. 기억
발음 / 아남네시스[ anamnēsis ]
어원 / 3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눅 22:19, 고전 11:24, 25), 생각하게 하는 것(히 10:3).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63. 아나밈네스코(ἀναμιμνήσκω)
 
1. ~에게 ~을 기억나게 하다,  2. 기억하다
발음 / 아나밈네스코[ anamimnēskō ]
어원 / 미래 ἀναμνήσω,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μνήσθην, 303과 34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되다(막 14:72), 생각나다(막 11:21, 고전 4:17), 생각하다(고후 7:15, 히 10:32), 생각 나게 하다(고전 4:17).
신약 성경 / 6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창세기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의 젖과 어린 기름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가복음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축복하시고(율로게오) - 찬양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축원한다.

누가복음 22:17, 19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 εὐχαριστέω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15:36, 막8:6, 행27:35), 감사 기도하다(마26:27, 눅22:19), 감사하다(눅 18:11, 요11:41, 고전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07-02-2023
7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개역 개정 호세아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알지 못하도다 / 로 야드(לֹא יָדְעָה)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
빵은 생명을 상징

북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호세아(여호와는 구원)는 무너지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을 바알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주신 것인지도 알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성찬예식의 기쁨과 생명을 알지 못하고 참여하는 신앙의 형식만 남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도다" "로 야드" 라고 합니다.
'로'는 부정 접두사
'야드'는 '알다'는 동사
머리로 알고 마음과 감정으로 느끼는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생명과 기쁨이 흘러다니는 것을 체험해서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스라엘이 연애하는 자들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5절) 이 품목들은 백성들의 생필품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상이나 이방 국가들이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이다(신 7:13; 11:14).
이스라엘의 죄악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었다.
이처럼 축복의 근원자에 대한 무지는 결국 감사치 않는 죄와 은혜를 남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J.Given).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

-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풍성은 상업을 통하여 은과 금을 증대시켰다.
이 은과 금 역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축복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알을 위해 죄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바알을 위하여 쓴'(아스랍바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제출되었다.

1. 바알의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J.Phillips).
그러나 이것은 전치사 '레'(...을 위하여)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2. 바알에게 바쳤다는 견해(Gesenius, Leeser).

3. 바알을 꾸미거나 입히는 데 사용했다는 견해(사 30:22, Harper).

4. 바알을 경배하는 일에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견해(Given, Keil).

이 가운데 3. 4의 견해가 가장 적합하게 보인다.
즉 이스라엘은 은과 금을 신상을 장식하거나(렘 10:4), 우상을 숭배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한 것이다(13절, 겔 16:18,19).
대부분의 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지지한다(prepared for Baal, KJV;used for Baal, NIV, RSV;used in worshiping Baal, LB).
한편 본절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가나안 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모든 거짓 신들을 대표하고 있다(L.Wood, Keil).
사실 예후는 일찍이 바알을 따르는 제사장들과 그 우상들을 전멸시켰었다(왕하 10:19-28).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지속되었다(왕하 10:29).

더하여 준 것이어늘

- 더하여 준 것이라는 동사 '다가'는 '늘리다', '증가시키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을 나타내준다.






06-04-2023
6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Is not the cup of thanksgiving for which we give thanks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is not the bread that we break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Because there is one loaf,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for we all partake of the one loaf.

참에한다는 헬라 단어는 "코이노이아"라고 합니다.
'코이노이아'란 "교제" 라는 뜻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먼저 성도들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제란 내가 보여주기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보여주기 싫은 것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이혼한 교인이 이혼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때 주위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으로 거듭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매월 첫번째 주일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면서 아직도 성도의 교제가 진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축복하는 2127. 축복하는(유로게오. 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발음 / 유로게오[ ĕulŏgĕō ]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 (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축복의 2129. 축복의(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 ĕulŏgia ]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152 4952*,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 골 1:18).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클리브랜드 인디언스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은 한국의 추신수 선수가 한 때 있었던 팀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에 마이크 아빌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아드리아나마야라는 쌍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항상 아빠의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딸 중 하나인 아드리아나가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아빌스는 그 때부터 어린 딸 생각에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안 아빌스는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아빌스가 너무 부진하자 구단주와 면담을 하였는데, 이 때 아빌스는 자신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아빌스의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은 아빌스와 그의 딸 아드리아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2015년 5월 27일 아빌스가 소속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경기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올 때 모든 관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삭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소속의 구단 관계자들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모두가 삭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백혈병에 걸려서 치료 중에 모든 머리가 다 빠진 아드리아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삭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응원하는 의미로 아드리아나를 위하는 팀이라는 뜻의 ‘팀 아드리아나’라는 글자를 티셔츠에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원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병을 잘 이겨낼 수 있었고, 8월에는 경기 전에 아빠와 함께 모든 관중들 앞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구단 관계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팀이 하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하나 된 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를 또한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영적인 진리를 믿는 성도들이 야구 선수들과 구단의 관계자들보다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니까?




    04-02-2023
    4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개역 개정)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니라.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물이 저온의 물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

    죄가 없다는 사람과
    죄가 많다는 사람 중에 떡과 잔의 효과는 죄가 많다는 사람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음펨바 효과라는 현상 자체는 상당히 옛날부터 알려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상을 "어떤 극단적인 성질일수록 그 상반되는 성질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티페리스타시스(antiperistasis)라는 법칙의 예로 보았다.

    예를 들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 더 빨리 차분해지는 것.
    근대에 들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르네 데카르트 등이 이 현상을 기록한 바 있지만, 역시 적절한 설명은 내놓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 이론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역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설명이지만, 이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두자. 문헌을 접근할 때에는 항상 시대적 환경 또는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서양에서 후대에 그의 설명이 절대화된 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까이는 사례가 정말 많다.

    이렇게 잠깐잠깐 언급되다가 잊히기를 반복하던 현상을 현대 물리학의 난제로 되살려 놓은 사람이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Mpemba)[2]라는 학생이었다. 음펨바는 1963년 중학교 가정과 조리실습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덜 식은 채로 냉장고에 집어넣은 아이스크림이 식혀서 집어넣은 것보다 더 빨리 어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음펨바는 학교에 강연을 온 물리학자 데니스 오스본(Dr. Denis G. Osborne)[3]에게 이 현상에 대해 질문했는데, 교사와 친구들은 이에 대해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냐' 라면서 비웃었지만 오스본은 음펨바의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해 봤으며, 그 결과 실제로 뜨거운 물이 찬 물보다 빨리 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오스본은 1969년에 이 현상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며 이 현상을 '음펨바 효과' 라 명명하고,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음펨바의 이름을 올렸다. 한편 음펨바는 졸업 이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아프리카 삼림 및 야생동물위원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2023년 수능특강 영어에 장문독해 지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1학년의 영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개역 한글)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떡과 잔을 직접 나눠주신다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찢겨지신 몸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고난주간 한 주일 동안 나를 통하여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결단의 삶을 함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 49:11, 신 32:14)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3. 하이마(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 [ haima ]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02-05-2023
    2월 성찬예식 / 이승혁목사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 축복하시고(2127) 유로게오(ĕulŏgĕō)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사례하시고(2168)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의 자리를 향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사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떡과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제자들은 떡과 잔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떡을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몸을 던져 로마 권력과 싸워서 피를 흘려 반드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월절 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거리감과 더구나 영적인 거리감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 머리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과 감격의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 손에 있는 떡과 잔에 하늘로부터 주의 영이 임하여 거룩한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다함께 떡을 먹습니다.
    이어서 다함께 잔을 들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생명의 영이 저희들에게 임하여 주셔서
    떡과 잔이 저희들의 몸 안에 들어갈 때
    부활의 영이 함께 임하여
    새 생명의 삶을
    능력의 삶을
    회복하는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1-01-2023
    1월 성찬예식 / 이호승목사 

    누가복음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기념하라
    - 킹 제임스 성경 / 기억하라

    364. ἀνάμνησις, εως, ἡ 

    기념하라(364)
    아남네시스(anamnēsis) ἀνάμνησις 

    Noun 생각나는 것, 기념, 기억 / remembrance

    기념(紀念)하다 : (사람이나 집단이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기다.

    벼리기(
    ), 생각 념(염)()
    1. 뒤에 어떤 일을 상기(想起)할 근거(根據)로 삼음. 또는 그 물건(物件)
    2. 지난 일을 상기(想起)하여 기억(記憶)을 새롭게 함.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히브리서 10:3(생각하게 하는 것)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

      "기념하라"는 교훈은 잊지 않고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월 첫 주일 성찬예식에 참여하므로 1년 12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04-2022
      12월 성찬예식

      요한복음 6:53-55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성찬예식은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른 후에 장자의 죽음이란 재앙에서 자유를 얻은 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은 예수님의 몸이 되는 떡과 예수님의 피가 되는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022년 마지막 성찬주일을 지키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받는 떡과 잔에 의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이 온전히 회복되어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 재앙에서 모두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과 잔은 코비드와 독감의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실 주님의 몸과 피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06-2022
      11월 성찬예식


      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세계성찬주일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피지섬의 교회에서 시작해 24시간 동안 일출 시각을 기준으로 전 인류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마치 파도타기처럼 성찬상이 세계를 도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이며, 수십 억명의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성찬주일의 시작은 아픔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평화의 역사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인류가 슬픔과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례 없는 대공황이 몰아닥쳤고,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손잡고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소수 교회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평화와 풍요를 염원하며 세계성찬주일을 제안했습니다.
      1940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킬 것을 제안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이어지고 냉전이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는 이 시대, 다시금 성찬상의 세계 일주를 통한 평화의 실현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10-04-2022
      10월 성찬예식

      초대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는 교제의 의미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와 효율’을, 오프라인에서는 ‘의미와 경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브리드교회(Hybrid Church)
      - hy·brid  / 1. 잡종,  2. 혼성체



      2022. 07. 03 /마태복음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내 몸(소마) 4983 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소마(sōma)
      어원 / 4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 15:37, 38, 40), 종(계 18:13)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소조(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소조(sōzō)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피(하이마) αἷμα. 129

      αἷμα, ατος, τό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발음 / 하이마(haima)
      관련 성경 / 피(마 23:30, 히 9:7), 혈(육)(마 16:17, 요 1:13), 혈(루증)(막 5:25, 눅 8:43) 
      신약 성경 / 97회 사용


      cf. 육체(사르크스).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사르크스(sarx)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4563. 사로오오(σαρόω)

      1. 쓰다,  2. 개끗하게 쓰다,  3. 마태 12:44

      발음 / 사로오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오장육부(五臟六腑)란 한의학에서 인간의 내장 전체를 통틀어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가리킨다.


      오장에 심포(心包)를 더해 '육장'이라고도 한다.

      육부」는 대장, 소장, 위장, 담낭, 방광, 삼초를 가리킨다

      2022. 06. 05 /

      성찬예식에 대한 믿음은 형식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받아 먹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떡과 잔을 받아 먹을 때에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찬,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표징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백성이고, 새생명 얻은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의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있지만,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견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 떡과 그 잔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또한 영적인 양식


      성찬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아, 견고하고도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들을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성경 공부할 때 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시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성례”

      말씀은 우리가 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성찬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에 우리 지성과 마음이 성령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고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Institution 14. 8. p.345)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단순히 우리 지식만 동원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의 손과 눈과 미각만 동원된다면 우리에게 은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찬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추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면, 그 말씀과 성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 안토니오의 결단 / 수도사의 아버지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한 교훈과  "항상 기도하라" 고 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2. 05. 01 / 어린이주일

      2022냔 어린이주일을 맞아 파트리스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4명의 어린이들을 소개합니다.
      이현호, 은미 테일러, 유미 테일러, 김태오
      세상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공동체에 속한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20불 지폐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돈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돈에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선물을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 어린이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린 아이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그 공동체가 분명히 미세한 파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수부대 훈련병들이 공중 낙하 훈련을 위해 처음으로 타워에 올라갈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의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타워의 바닥은 10미터 그 위에 훈련병이 서게 되면 바로 그 높이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을 무려 300회 이상 반복하면 아무리 높은 고공에서 뛰어내릴지라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11미터의 높이와 1000미터 이상의 높이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라 이미 최고의 높이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십일조 훈련을 잘 하면 반드시 성인이 되어서도 물질 관리를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것
      둘째는 깨닫는 것
      셋째는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의 공통된 특징을 "자기 중심적" 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어른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빵은 왜 몸이고 포도주는 피인가…동전 양면같은 예수의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 18절)

      40)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걸까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 인물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가룟 유다 뿐만이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한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복음 26장 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 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시라고 했을까.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 ‘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 ‘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 뿌리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어느 신학도가 본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브랜트 피트리(Brant Pitre) 교수의 “Jesus and the Jewish Roots of the Eucharist: Unlocking the Secrets of the Last Supper” 라는 책이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2016년 7월 에클레이시아북스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만찬이 1세기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각 단락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 신학(history of redemption theology) 내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의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요구되지만, 저자는 그런 장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매력 발산으로 허물어뜨린다.



      제1장 마지막 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LAST SUPPER)

      저자는 예수는 역사적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1세기 유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유대교 율법을 위반하는 말 곧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충격 선언 또한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들이 1세기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속에 주어졌다는 해석의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시공간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해석학적 작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2장 유대민족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나?(WHAT WERE THE JEWISH PEOPLE WAITING FOR?)

      저자는 유대 성경과 고대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대다수 “1세기 유대민족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즉 새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대했다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새 모세로 인해(신 18:15-18; 참고. 3, 4세기 랍비 베레키아[Rabbi Berekiah, Ecclesiastes])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기를 소망했다(렘 31:31-33). 이 언약의 절정은 천상의 연회이며(출 24:11), 거기서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는 천상의 식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Babylonian Talmud, Berakoth 17a).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고(미 4:1-2; 사 56:6-7 ;60:1-7; 겔 37:24-28 ;학2:6-9, 참고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 하나님은 그 곳에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장차 올 세상”)의 일부일 약속된 미래의 땅(사 65:17-18; 66:18, 20, 22)으로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사 43:18-19; 계21:5). 그리고 저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 출애굽의 사상이 광범위 하게 펴져 있었고(드다, 이집트인 / Josephus, Antiquties 20:97-98; Josephus, Antiquties 20:169-170), 예수님은 “새 출애굽의 징조인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의 신호이며(사 35:5-10, 참고. 마 11:4-6; 눅 4:18-19), 구원을 전하는 메시아 전령”임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새 출애굽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분이다(눅 9:28-31).



      3장 새 유월절(THE NEW PASSOVER)

      저자는 위의 “새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새 유월절도 함께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열쇠이며 이를 위해 유월절의 성경적 뿌리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고대 유대교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 수컷”을 취해(출 12:1-6), “제물로” 드려(출 12:6), 그 “피를 이스라엘 각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으며(출 12:7), 그 후 “어린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출 12:8-12). 유월절은 매년 ‘기념일’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출 12:24-28).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 당시 유월절의 모습은 고대 유대교 유월절의 모습과의 차이점 네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전에 의해 드려졌다(신 16:5-7, 참고. Josephus, War 6:423-27). 둘째 1세기 유월절 어린 양은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것을 현재화했다(출13:8, 참고. Mishanah, Pesahim 10:5). 넷째,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메시아 시대 도래, 구원의 시대와 연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고, 그가 자기 백성을 속량할 것이다. 즉 메시아의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Jerome, Commentary on Matthew 4 on 25:6).

      유대교의 믿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밤에 시행했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했다(마 26:17-19; 막 14:12; 눅 22:14-15). 이 식사에서 떡의 의미를 설명하고(출 12:26-27, Mishnah, Pesahim 10:5), 마지막은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대할렐[Great Hallel], 시편 118편, 마 26:30, 막 14:26) 마무리했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달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집행자 역할을 하셨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바로 새 출애굽의 새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오늘이 메시아의 유월절이며 내가 새 제물”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의 완성은 첫 출애굽의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새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이다.



      4장 메시아의 만나(THE MANNA OF THE MESSIAH)

      저자는 성만찬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열쇠로 만나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다. 구약성경을 통해 만나의 다양한 의미를 언급하는데 만나는 “하늘에서 온 기적의 떡”(출 16:4-5, 11-15, 참고. 시 78:23-25, 29; 솔로몬의 지혜서 16:20-21)이며, 이중의 기적(하늘에서 온 떡과 하늘에서 온 고기, 출 16:12) 선물이었다. ‘거룩한 성막’에 두고 보존하며 그것을 ‘보게’ 하였고(출 16:32-34),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맛보기(출3 :8)였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새 출애굽을 개시할 메시아를 보낼 때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경 밖의 고대 유대교 문헌의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은 만나가 태초로부터 존재했다(만나의 선재,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4,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15). 하늘 성전안에 영원히 보관되어 있으며(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새 모세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 그쳤던 만나가 다시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2Baruch 29:3, 6-8).

      이러한 유대인의 소망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생명의 떡 담화(요 6:53-55)의 배경은 ‘새 모세의 도래’ 와 ‘하늘에서 온 만나의 재개’ 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된다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찬 전례에 자신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을 하늘에서 온 만나와 동일시한다고 한다. 출애굽의 옛 만나가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었다면 메시아의 만나 또한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즉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를 제시한다(요 6:61-64). 예수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의 형태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신적 정체성(막 2:5-10; 마 10:22-33)과 신적 권능이란 신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6:55).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날 그 분 몸의 부활과 승천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성찬 전례에서 먹으라고 한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생명의 영으로 ‘부활한 나의 육체’인 것이다(요 6:53-55). 저자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지닌 ‘생명’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분의 몸과 그 분의 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늘에서 온 새 만나와 예수님의 부활한 몸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예수께서 그 분의 피를 마시라는 놀라운 명령이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5장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

      저자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새 유월절’과 ‘하늘에서 온 새 만나’ 로 보셨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의 메시아적 성취로도 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진설병(“Showbread”)을 금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출 25:23-24, 29-30), 그 옆에 관제(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음료 제사)를 붓기 위한 ‘병과 잔’이 있었기에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부르며, 이것은 신성한 식사로서 붓는 것이 아니라 마셔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진설병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호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증표이고(레24:5-8), 성막에서 여호와 앞에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영구한’ 제사이다. 중요한 것은 진설병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제물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제물로써 안식일 마다 드려져야 했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진설병은 멜기세덱이 드렸던 ‘태고의 제물’이고(Genesis Rabbah 43:6), 예수님 당시에는 진설병이 제물로 ‘금상 위에 드려질 때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믿었다고 한다(Babylonian Talmud, Yoma 39a). 그리고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유대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있는 진설병을 외부로 가져 나와서 높이 쳐들고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외쳤다(Babylonia Talmud, Menahoth 29a).

      이것은 진설병이 영원한 언약의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였다.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누리게 된다(출 34:23; 23:17).

      이런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새 진설병을 연결시킨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 논쟁(마 12:1-6)에서 레위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아닌, 멜기세덱과 다윗(시 110: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또 다른 계보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새 성전이며 그 성전안에 현존하는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이해했고, 중요한 것은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 새 유월절을 넘어 - 예수님께서 새롭게 현존하는 떡과 포도주 즉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떡을 제정하는 행위이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현존의 신비는 그 분의 신적 권위와 신적 정체성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신적 아들이라면, 그 분이 제정하는 새 언약의 새 떡과 새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기적의 떡이 된다고 한다.



      6장 네번째 잔과 예수님의 죽음(THE FOURTH CUP AND THE DEATH OF JESUS)

      저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과 갈보리 십자가 처형 사건의 관계를 살핀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는 평범한 유대교 유월절 식사 형태와 유사하게,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루어졌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 직후 마셔야 할 네 번 째 잔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와 마태와 마가 모두 네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는 의식 언급이 부재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실제로는 마무리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는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잔을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다(마 26:36-46). 조금 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새 유월절의 제물로, 포도주 잔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성만찬 제정 말씀과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신 것이다. 식사가 종료되고 마지막 잔을 마시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끝내신 이유이다. 그 후 네번째 잔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직전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마실 음료를 직접 요청하셨고 건네 받은 신 포도주를 마셨고 후에 “다 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을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 마시기를 기다리심으로써 마지막 만찬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하나로 묶으셨다.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준 행위를 갈보리에서 자신을 드린 행위와 연결하신 것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유월절로 변화시켰고 십자가를 통해 마지막 만찬을 제사로 변화시켰다고 하며, 마지막 만찬과 십자가 처형 사건을 유대교 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 두 사건을 단일한 제사로 이해했음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7장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THE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

      저자는 예수님의 성만찬의 유대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재언급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유대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새 출애굽과 메시아의 새 유월절의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만찬은 그것들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어린 양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살 즉 성육신하신 신적인 말씀의 살을 먹으며 파스카 유월절을 지켰다.

      저자는 유대교 유월절과 기독교 성만찬 사이의 연관성은 『카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의 가르침에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성취될 새 유월절을 예상하셨고(CCC 1339-1340), 유대교 유월절의 세 번째 잔과 마지막 만찬의 잔, 겟세마네의 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신 잔 사이의 연관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CCC1334)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사도적 전통 그리고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새 만나’로 설명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를 넘어 ‘기적’ 또는 초자연적인 식사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요6; 고전 10:1-3, 16; 계 2:17)과 초기 교회의 교부의 글(Tyconius,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2:17, 어거스틴 요한복음 주석 “Tractate on John, 26:13) 역시 성만찬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는 고대의 기적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CCC1094)도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특정 내용 즉 새 출애굽, 새 유월절, 만나의 기적을 가리키는 신호만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신호로 보셨다고 한다. 실제 예수님은 그 떡을 자신의 개인적 현존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떡은 단순한 현존의 떡 정도가 아니라 얼굴의 떡 즉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얼굴’이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증표이다. 이러한 신비한 현존의 떡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마 12:1-8; 막 2:23-28, 눅 6:1-5; 히 9:1-3)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다(Origen, on Leviticus 13; Saint Cyril, Catechumens(그리스도인 세례 예비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성만찬의 신비를 예수님의 진정한 현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CCC1374-75). 예수님의 성만찬이(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만찬이) 단순한 증표가 아닌 기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카톨릭교회는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떡을 들어올림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메시야의 얼굴을 묵상하게 한다.

      출애굽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성막과 나중의 성전에 현존의 떡을 보관했듯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 떡을 보관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성만찬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던 내용을 다시 진술했을 뿐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와 함께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지 정수”(CCC1324)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8장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EMMAUS)

      저자는 성만찬과 육체적 부활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유대교 소망의 성취이며, 예수께서 성만찬을 - 십자가에서 죽을 그의 육체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몸과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만찬 때의 명령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눅24:13-24).

      또한 떡을 뗀 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들 곁에 현존하는 방식 즉 승귀 후 더 이상 인간의 외양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오직 성만찬의 떡의 모습으로만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원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귀하신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에서 세상의 제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부어주심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한다.



      글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마지막 만찬의 신비한 말씀이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 하며, 그것을 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적 계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어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저자는 메시아 예수께서 새 유월절의 어린 양,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만나, 성전안에 드려질 신비한 진설병 등유대인의 예배 신앙과 미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마지막 만찬의 신비를 심오하면서도 간명하게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고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세기 유대교와 예수의 부활 승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 –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자는 본문 뒤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습과 세계관을 드러내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적, 신학적 학습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 또한 배가시킨다.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제의적인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메시아적 사역 특히 영원한 언약의 피흘림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약속과 성취라는 성경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을 연속적으로 이어가지만, 종속되거나 제한받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고 확장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교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가 갈보리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유대교 유월절 제사의 완성이며 동시에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유대교 유월절을 회상하는데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출애굽의 시작을 보여주고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네번째 잔의 미완의 모습을 겟네마네 기도(마26:36-46) – 몰약의 포도주를 거부하신 예수님(마27:31-36; 막15:23) – 신포도주를 마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완성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에게 엄지척을 치켜 세우고 싶다.

      이러한 저자의 학자적 열정과 통찰력은 성만찬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를 캐내어 보여줌으로써 피상적이며 편협한 성만찬 이해를 성찰하게 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예전의식에 취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임재하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고 누리라며 초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13-22p), 자신은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찬 전례에 “예수의 실제적 현존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저자는 ‘화체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현존”, “기적”, “예수의 신적 정체성” 그리고 포도주 보다는 “떡”(몸)에 집중하여 설명함으로 ‘화체설’ 로 본서의 결론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성만찬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성만찬 제정 본문의 “이것은 내 몸이다(tou'tov ejstin to; sw'mav mou)” 에서 “…….이다(ejstin, is)”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1]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주석가들은 떡과 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또는 “이것은 내 몸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2] 그의 학문적 작업은 논리적이며 타당성 있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고수하고 있는 개혁적이며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적 입장과 필자 자신의 일천한 신학적 지식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본서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유대적 뿌리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기에 성만찬의 신학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성만찬을 통해 그의 한 몸에 참여하고 연합되는 사실(고전 6:12-17; 엡 1:22-23; 4:15-16; 5:23; 골 1:18; 빌 1:20), 두번째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함께 선교적 또는 복음전파적인 측면도 함께 언급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데 있다(고전 11:6).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 질 궁극적 승리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영생 향유를 확인시켜 주며, 더 이상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지 않고 안주하게 만드는 개인적 ‘정신 승리’의 방편이 아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은혜는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 사이의 긴장속에서 ‘많은 사람’을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

      <각주>

      [1] 놀랜드는 존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333에서 예수의 말씀들은 아람어로 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아람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성만찬 제정 본문에 대한 가장 원래적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330-40을 참고하라.

      [2] 크레이그 에반스, 『WBC성경주석: 마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1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Vincent Taylor, Jesus and His Sacrifice - A Study of the Passion Saying in the Gospels, (Oxford: Whitaker Press, 2007), 122을 참고하라.

      출처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http://www.woolrimstory.net)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2년 3월 6일 성찬예식

      매월 첫 주일은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2, 3, 4, 5주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합니다.

      온라인예배, 온라인 성찬의 의미가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정립 될 것을 기대합니다.

      3월의 성찬 주제는 신앙의 봄을 맞이하자!

      계절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누구가 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 옷을 벗어야 합니다.
      겨울 옷이란 두텁고 무겁고 둔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하여 함께 모이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겨울이 길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봄날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입고 있는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을까?
      바람과 햇빛이 서로 내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바람이 더 세게 강하게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외투속에서 움크리고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햇빛이 더 따뜻하고 강한 빛으로 나그네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길을 걷던 나그네는 외투의 단추를 풀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그려집니다.

      신앙의 봄을 맞이하려면 강한 햇빛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찬의 떡은 아주 따뜻한 예수님의 온기가 되어 내 안에서 다정하고 훈훈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의 잔은 몸속으로 흐르는 뜨거운 진한 피가 되어 내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성찬은 나로 하여금 훈훈한 생명의 언어를 회복하여 3월을 봄맞이 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람있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찬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가장 중요 한 핵심축이다.
      이 성찬을 비대면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 문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온라인 성찬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부분들을 살펴보고, 팬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 에서 온라인 성찬이 가능함을 밝힌다.

      첫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공동체성과 현장성에 관련된 문제

      공동체성과 현장성은 공간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데,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이해를 통해서 온라인 성찬의 가능 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에도 응급환자 또는 임종 환자들을 위하여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찬에식을 간략하게 실행하기도 한다.

      둘째, 회중의 수동적 참여

      온라인 성찬이라고 청중을 수동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온라인 성찬에서 다양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참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통해서 오히려 회중의 적극적 참여를 강화할 수 있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화상회의를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하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기에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넓게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셋째, 온라인 성찬에 대한 거부감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하여 온라인 성찬에 참여시키므로 신앙의 긍지를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성찬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초기 온전한 식사 형태를 가졌던 성찬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시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제들만의 예식으로 변질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성찬의 의미가 되살아나지만, 여전히 성찬은 개신교에서 중심위치를 설교에 내주었다.

      이렇듯 성찬 형식의 변화 가능성은 온라인 성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물론 중세와 같은 잘못된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올바른 성찬 신학이 요구된다.
      기술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변화의 시대에 변화를 올바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올바른 신학적 해답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적절한 방향 제시되어야 한 다.
      과거의 관점에 매여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핵심가 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주님이 명령하신 성찬을 계속해서 그리고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르토스(ἄρτος)는 유교병인가 무교병인가?

      며칠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사용된 떡/빵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떡/빵이라는 단어를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ἄζυμος) 를 사용하지 않고 “유교병”을 뜻하는 ‘아르토스’ (ἄρτος) 를 사용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글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거의 없지만, 이미 오래전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통해 신빙성이 없는 주장임이 이미 밝혀졌고, 고 하워드 마샬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아르토스’는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로서 “무교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편에 서 있다.

      1.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깨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이것은 그가 모세 오경에서 정한 명절들을 깨실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드셨다면, 그는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명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어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성향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 모세를 통해 정하신 명절을 지키셨다.

      2. 만약 주님이 마지막 만찬에 드신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 어디에도 빵에 대한 질문과 해명이 없다. 사도행전이나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서신에서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또한 어떤 분의 주장대로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새언약을 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이 고의적으로 유월절에 사용된 빵이 유교병이라고 적고 싶었다면, 그들은 ‘아르토스’ (ἄρτος)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교병”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를 사용했을 것이다.

      3. 공관복음을 보건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걸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혹시 율법을 어기는지 철저히 지켜보았고, 그가 조금이라도 어겼다고 생각했을 당시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죽이고자 작정까지 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고,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었다면, 과연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물론, 유월절 만찬과 그 만찬 중에 행하신 새언약을 뜻하는 주님의 만찬의식은 구분해야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한 유월절 만찬과 새언약의 의식에서 사용된 음식의 내용에 한해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동일한 것으로 봐야하는데, 이에 대해 아래에서 서서히 설명을 하기로 한다.

      4. 바벨론 탈무드에 기록된 미쉬나에 의하면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형벌의 대상에는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으며, “유월절에 유교병을 먹은 자”는 채찍의 형벌을 받게 되어있다 (마이클 L. 로드킨슨 번역, 9권, Tract Maccoth, ch. 3, p. 35). 따라서 3번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도들이 유월절에 무교병이 아닌 유교병을 먹었다면, 그 사건이 공관복음이 쓰여진 후에 밝혀졌더라도, 그들은 유대교의 법아래서 매우 엄한 형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어겨 형벌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5. 요세푸스와 필로

      5.1 어떤 분은 요세푸스와 필로를 근거로 한 ‘아르토스’에 대한 이해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쉽게 일축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1.1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 3) 에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열두 개의 누룩이 없는 빵” (αρτους τε δωδεκα αζυμους, 아르투스 테 도데카 아쥐무스) 이 어떻게 놓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142 단락). 그는 이 “빵들” (아르투스) 위에 향을 담은 두개의 컵이 놓여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 빵” 곧 ‘아르투스 아쥐무스’ (αρτους αζυμους) 라고 하지 않고, 다만 ‘아르토스’의 주격 복수형태인 ‘아르토이’ (αρτοι) 를 ‘아쥐모스’ 없이 홀로 사용하고 있다 (143 단락). 또한 이 “열두개의 빵” (레 24:5: δωδεκα αρτου, 도데카 아르투) 에 대해 “누룩이 없이 구운 곡물” (σιτος οπτος ζυμης αμοιρος, 씨토스 옵토스 쥐메스 아모이로스)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55 단락).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1.2 필로는 “특별법에 관하여” (De Specialibus Legibus 2.156-161) 에서 무교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158 단락에서 “그러나 발효되지 않은 빵은” (ο δ’ αρτος αζυμος)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빵”을 뜻하는 ‘호 아르토스’ (ο αρτος) 를 설명하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을 뜻하는 단어는 형용사 ‘아주모스’ (αζυμος) 이다.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문맥에 따라 혹은 형용사에 따라 “무교병” 또는 “유교병”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누룩이 들어간”을 뜻하는 ‘주메’가 함께 사용될 때에만 “유교병”을 의미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유월절이나 무교절 그리고 ‘아주모스’가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무교병”을 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로는 같은 158 단락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반죽 덩어리” (τα φυραματα του σταιτος αζυμα) 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반죽”을 뜻하는 ‘투 스타이토스’ (του σταιτος) 자체는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반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 ‘아쥐마’ (αζυμ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무교반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타이스’ (σταις) 나 ‘아르토스’는 꼭 누룩이 들어간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5.1.3 요세푸스와 필로의 ‘아르토스’에 대한 설명은 1세기 유대교에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6. 70인 역에서의 ‘아르토스’

      6.1 70인 역에서 ‘아르토스’는 유월절이나 무교병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 특히 ‘아쥐모스’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항상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를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할 때에는 ‘주미테스’/ ‘쥐미테스’ (ζυμιτης) 와 함께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례는 레위기 7:13 (αρτοις ζυμιταις, 아르토이스 쥐미타이스) 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υμη) 는 히브리 성경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서 홀로 사용되고 있는 ‘하메쯔’ (ץחמ) 를 번역한 것으로서, 이 역시 70인 역에서 “유교병”을 뜻하는 단어로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쥐메와 하메쯔: 출 12:15; 13:3; 13:7; 23:18; 34:25; 신 16:3).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꼭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형용사 ‘주메’와 함께 사용되거나 혹은 문맥에 따라 “유교병”이나 “무교병”을 뜻하며 또한 모든 빵을 의미하는 공통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7. 구약에서의 진설병과 무교병

      7.1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 (לחם) 은 70인 역에서 ‘아르토스’ (αρτος) 로 번역하고 있다.

      7.2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무교병”을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마짜’ (מצּ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출 12:8, 15, 17, 18, 20, 39; 13:6, 7; 23:15; 29:23; 34:18; 레 8:2, 26; 23:6; 등…), ‘마짜’ (מצּה) 와 ‘레헴’ (לחם)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레헴’은 ‘마짜’와 달리 “유교병”만을 뜻한다는 주장이 틀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7.3 출애굽기 25:30에는 “진설병”을 ‘레헴’ (לחם) 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뜻하는 단어이며, 이것을 “상 위에…두어”라고 하는데, 이는 상위에 진열하는 빵을 뜻하는 것으로서 문맥에 의해 “진설병”을 뜻한다.

      7.4 출애굽기 29:2 에서는 “누룩이 없는 떡” 혹은 “무교병”을 ‘레헴 마쫏’ (לחם מצות; lxx: αρτους αζυμους, 아르투스 아쥐무스) 으로 표현하는데,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레헴’과 “누룩이 없음”을 뜻하는 ‘마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레헴’은 ‘마짜’ 와 함께 사용하거나 또는 문맥에 의해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5 출애굽기 29:23 (히브리어 성경) 에서는 “빵” (לחם, 레헴) 한 덩어리와 기름 바른 “과자/빵”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무교병 (המצות, 하+마쫏) 광주리에서(מסל, 미+쌀)” 나온 것이다. 70인 역은 조금 다른데, 기름 바른 혹은 기름 섞은 “빵” (αρτον, 아르톤) 하나와 “납작하고 넓은 빵” (λαγανον, 라가논) 하나를 “무교병(τον αζυμων, 톤 아주몬) 광주리에서 (απο του κανου, 아포 투 카누)…”라고 되어있다.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은 바로 “무교병”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짜’ 나 헬라어 ‘아쥐모스’를 히브리어 ‘레헴’과 헬라어 ‘아르토스’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둘은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레헴’이나 ‘아르토스’가 ‘마짜’나 ‘아주모스’와 다른 “유교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로 “빵”을 뜻하며, 또 다시 언급하지만, 문맥에 따라 “유교병”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본문에서의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무교병”이다. 왜냐하면, 무교병 광주리에는 유교병을 넣어 둘 수 없으며 오직 무교병만을 담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7.6 레위기 8:26 역시 출애굽기 29:23 과 같은 내용으로서, 여기서 “무교병 광주리에서”는 ‘마쌀 하마쫏’ (מסל המצות) 이며, 이 광주리에서 “무교병 (המצּ, 마짜) 한개”와 “기름 섞은 떡 (לחם, 레헴) 한개”와 “전병 (רקיק, 롸킥) 한개”를 꺼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레헴’과 ‘전병’을 뜻하는 ‘라킥’은 “무교병 광주리에서” 나온 “무교병”이다. 더 중요한것은 바로 70인 역에서는 “무교병”혹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을 ‘아르토스…아쥐모스’ (αρτος…αζυμος) 로 번역을 하고 있으며; “올리브기름과 섞은 빵” 을 ‘아르토스 에크 엘라이온’ (αρτος εκ ελαιον) 그리고 “진병”을 ‘라가논’ (λαγανον) 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아르토스’와 ‘라가논’에는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 역시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것으로서 “무교병”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스’는 문맥상 “유교병”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무교병”을 뜻한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7 레위기 7:12에서는 화목제물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기름과 섞은 구멍 난 무교병”은 ‘레헴’이 아닌 ‘할롯 마쫏’ (חלות מצות) 이며; 기름 바른 “무교전병” 혹은 “누룩 없는 전병”은 ‘롸키키 마쫏’ (רקיקי מצות) 이며;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 전병”은 “누룩 없는”이라는 단어 없이 홀로 사용된, “구멍 난 빵”을 뜻하는 ‘할롯’ (חלות) 인데,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만 섞은 것으로서 이 또한 “무교병”이다.

      70인 역을 보면 “고운 가루에 올리브기름을 섞어 만든 빵” (ἄρτους ἐκ σεμιδάλεως ἀναπεποιημένους ἐν ἐλαίῳ) 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빵” 곧 히브리어로 “무교병”을 뜻하는 ‘마쫏’ (מצות) 은 ‘아르토스’ (αρτος)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이는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또 70인 역의 내용상 누룩이 들어가지 않고 다만 “올리브기름”이 들어갔다는 것 역시 ‘아르토스’는 “무교병”임을 뜻한다. “올리브기름을 뿌린/바른 무교전병” (λάγανα ἄζυμα διακεχρισμένα ἐν ἐλαίῳ) 에서 “무교전병”은 “전병”을 뜻하는 ‘라가나’와 “누룩이 없는”을 뜻하는 ‘아쥐마’인데, 누룩이 없는 전병에 기름을 바른 것이며; “올리브기름을 섞어 반죽한 고운 밀가루” (σεμίδαλιν πεφυραμένην ἐν ἐλαίῳ) 역시 누룩을 섞지 않고 올리브기름만을 섞은 밀가루 반죽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이 모든 것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것들로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의미한다.

      7.8 신명기 16:3 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교병”은 ‘레헴’이 아니라 ‘하메츠’ (חמץ; lxx: ζύμην, 주멘/쥐멘) 이며;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먹으라”에서는 무교병은 ‘마쫏’ (מצות; lxx: αζυμα, 아주마/아쥐마) 이며, 고난의 떡은 “고난”을 뜻하는 ‘야니’ (עני; lxx: κακώσεως) 와 “빵”을 뜻하는 ‘레헴’ (לחם; lxx: ἄρτον) 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 ‘레헴’은 ‘아르토스’이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마짜’ 그리고 헬라어로는 ‘아주모스’로 불리는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아르토스’ = ‘아주모스’: ‘레헴’ = ‘마짜’.

      7.9 역대상 23:29 에서 사용된 “진설병”은 “진열된” (המערכת, 하마아레캇; lxx: τῆς προθέσεως, 테스 프로테세오스) “빵” (לחם, ‘레헴’; lxx: ἄρτους, 아르투스) 이다. 이 “진설병”은 “누룩이 없는” (המצות, 하마쫏; lxx: τὰ ἄζυμα, 타 아쥐마) “전병” (רקיק; 라킥; lxx: τὰ λάγανα, 타 라가나) 과 함께 진열되어있는데, “무교전병”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진설병” (레헴, 아르토스) 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 (아쥐모스) 임이 확실하다.

      8. 이제는 복음에서의 ‘아르토스’사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8.1 마태복음 12:4 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τοὺς ἄρτους τῆς προθέσεως, 투스 아르투스 테스 프로테세오스) 라고 부르고 있고, 히브리서 9:2에서는 진설병을 ‘아르토스’ (ἡ πρόθεσις τῶν ἄρτων, 헤 프로테시스 톤 아르톤) 라고 부르고 있는데, 진설병 (לחם) 은 무교병이다 (출 25:30; 29:2; 35: 13 (לחם הפנים); 레 24:5-9; 역하 2:4 (מערכת)). 따라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뜻하기도 한다.

      8.2 마태복음 26:17-26. 17절을 보면 무교절 (των αζυμων, 톤 아쥐몬) 첫날과 유월절 (το πασχα, 토 파스카) 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φαγειν το πασχα, 파게인 토 파스카) 위해서 이다. 이 유월절 음식은 율법에 의하면 “무교병”을 뜻하는 것이며, 절대로 “유교병”을 뜻하지 않는다. 18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을…지키겠다” (ποιω το πασχα, 포이오 토 파스카)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의식을 따라 행하시겠다는 것인데, 율법을 따르시겠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의 규율대로 유월절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깨는 행위이다. 따라서 만약에 26절에서 사용된 ‘아르토스’ (αρτον, 아르톤) 가 “유교병”이라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식을 먹은 것이며,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유월절 곧 율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새언약을 뜻하는 의식 곧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교병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교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8.3 마가복음 14:12-25 에서 마가는 유월절 저녁식사에 대하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유교절 식사는 무교절 첫날과 겹치고 있다. 12절에서 “무교절 첫날은” ‘테 프로테 헤메라 톤 아쥐몬’ (τῇ πρώτῃ ἡμέρᾳ τῶν ἀζύμων) 이다. 그러나 유교절 양과 유교절 식사는 모두 “유월절”을 뜻하는 ‘토 파스카’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양”과 “식사”로 번역이 가능한 이유는 ‘토 파스카’와 함께 사용한 동사 때문인데, 첫째는 “희생했다” 혹은 “제사했다”를 뜻하는 ‘에튀온’ (εθυον) 을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가 “유월절 양”임을 뜻하며, 둘째는 “먹을 수 있게” 를 뜻하는 ‘파게스’ (φάγῃς)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준비하기를’ 뜻하는 부정과거 분사인 ‘헤토이마소멘’ (ἑτοιμάσωμεν) 과 접속사 ‘히나’ (ἵνα)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그 준비의 목적과 결과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14절에서도 역시 ‘토 파스카’를 “내가 먹기 위해”를 뜻하는 ‘파고’ (φαγω)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식사이다. 따라서 22절에서 26절에 기록된 새언약 의식은 유월절 식사로 드시던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8.4 누가복음 22:7-29. 7절에서도 마가복음과 다르지 않게 “무교절 날”은 ‘헤 헤메라 톤 아쥐몬’ (ἡ ἡμέρα των αζυμων) 으로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다. 여기서 “유월절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단순히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 (τὸ πάσχα) 이다. 그러나 “잡는” 혹은 “죽이는”을 뜻하는 ‘투에스타이’ (θυεσθαι)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양”을 뜻한다. 8절에서는, 이날이 다가와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월절 음식” 이라는 단어 역시 “음식”을 뜻하는 단어가 없이 ‘토 파스카’ (τὸ πασχα) 를 홀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우리가 먹을 수 있게”를 뜻하는 ‘파고멘’ (φαγωμεν) 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음식” 혹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특히 ‘파고멘’은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 (ἵνα) 와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특히 앞에 “준비하라”를 뜻하는 부정과거 명령어인 ‘헤토이마사테’ (ἑτοιμασατε) 를 따름으로서 유월절 음식을 꼭 드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7절과 8절에서 사용된 “유월절”을 의미하는 ‘토 파스카’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르토스’ 역시 이러한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유월절” (τὸ πασχα, 토 파스카) 을 “준비하였다” (ἡτοιμασαν)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인데, 무교병을 구하지 않았거나 구하지 못했다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시는데, 여기서도 “유월절”은 ‘토 파스카’로서 “먹기를”을 뜻하는 ‘파게인’ (φαγειν) 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토 파스카’는 “유월절 음식” 곧 “유월절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문맥 속에서 (특히 구약에서의 ‘레헴’과 아르토스’의 사용과 이곳에서 ‘토 파스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둘 때), 19절에서 예수님이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빵” (αρτον, 아르톤) 은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으로 봐야한다. 또한, 만약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은 것이 유교병이라면,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의식을 깬 것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이 먹은 것은 유월절 음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셨다.

      8.5 마태복음 26:17-26과 누가복음 22:7-20에서의 유월절은 칠일동안 행해지는 “무교절”과 겹쳐졌는데, 무교절에 대해 출애굽기 12:15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명하고 있으며,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고 무서운 저주를 함께하고 있다. 출애굽기 12:19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시는데,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날을 지킬지니라”라고 명하신다. 출애굽기 13:7절에는 무교절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으며, 신명기 16:4에서는 유월절에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두 명절이 겹침으로서 이방인이 거하는 곳이 아니면 유교병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며, 오히려 무교병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러 오신 분으로서 무교절과 유월절에 대한 강령을 어기셨을 리가 없다. 따라서 눅 22:15에서의 ‘아르토스’가 “유교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8.6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음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유월절 의식에서 사용한 무교병이며, 무교절과 유월절이라는 두 중요한 명절이 겹친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모든 누룩을 제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그 규례를 범했을 때 따르는 심한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식은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으로 행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8.7 요한복음 6:31에서는 만나(מן) 를 ‘아르토스’로 부르고 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31에 의하면 “납작한 떡/과자 과/와 같다” (כצפיחת, 커짜피힛) 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아르토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특정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8.8 정리를 하자면, 유월절 식사에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를 드시면서 행하신 주님의 만찬의식은 유월절 빵 곧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 행하신 것이다.

      9. 이제는 바울 서신에서의 ‘아르토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9.1 고린도전서 5:7-8은 깨끗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하신 새 언약이라면서, 이것을 근거로 ‘아르토스’는 “유교병”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개역개정)

      9.1.1 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 언약이 아니다. 5:7에 “너희는 분명히 누룩이 없는 자들인데” 혹은 “너희가 누룩이 없는자들인것 처럼” (καθώς ἐστε ἄζυμοι, 카토스 에스테 아쥐모스) 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는 복수형이다. 그러나 그 후에 따르는 (원문에는 앞에 온)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ἵνα ἦτε νέον φύραμα) 에서 “새로운 덩어리” (νέον φύραμα, 네온 퓌라마) 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서 개개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빵 덩어리 전체 혹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예수님의 한 몸인 교회를 가르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를 뜻하는 ‘히나 에테’ (ἵνα ἦτε, ‘히나 에테’) 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 ‘에테’와 접속사 ‘히나’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목적과 결과를 뜻하는데, 그 목적과 결과는 바로 “새로운 덩어리” 곧 정결한 교회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개개인으로서 “누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인데, 교회가 하나의“오래된 (παλαιὰν, 팔라이온: 단수형) “누룩 (τὴν ζύμην, 텐 쥐멘: 단수형)” 곧 오랫동안 음행을 저지른 사람으로 용납함으로서 부정해졌다는 것인데, 그 오래된 누룩 곧 오랫동안 음행을 해온 자를 쫒아내어, 하나의 빵 덩어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전체가 누룩 곧 죄로 오염되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누룩”이 들어간 유교 병을 뜻하는가? 같지 않다.

      9.1.2 7절 하반 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비유하는데, 여기에 “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고, 다만 “희생 당하셨다”를 뜻하는 ‘에투테’ (ἐτύθη) 를 함께 사용함으로서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 (το πασχα) 가 “양”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르토스’에 대한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으로 ‘아쥐모스’를 함께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9.1.3 8절에서 “누룩”은 (ζύμῃ) 비유적으로 “악과 악의” (κακίας καὶ πονηρίας, 카키아스 카이 포네리아스) 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러한 “오래된 누룩” (ζύμῃ παλαιᾷ) 으로 명절을 지키지 말고 “순전함과 진실의 빵”으로 지키라는 것인데, “악과 악의”와 달리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지키라는 것 곧 교회로서 죄에 대해 순전하고 진실되라는 것이지, 어떤 이의 주장대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과 교체한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빵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 (ἀζύμοις, 아쥐모이스) 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보던지 아니면 만찬에 대한 설명으로 보던지 상관이 없다. 다만, 유월절에 사용해하고 있는 빵은 “무교병”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 그리고 만찬의식에서 사용하신 것이 “유교병”으로 가정한다면, 또 “유교병”이 ‘아르토스’라면, 바울은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가 아닌 ‘아르토스’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것은 ‘아르토스’가 아닌 ‘아쥐모스’ 곧 “무교병”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르토스’는 “무교병”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순전함과 진실”로 누룩의 교체를 선언했기에 ‘아르토스’가 “유교병”이라는 주장은 성립시키기에 매우 어렵게 보인다.

      9.1.4 마지막으로, 이 두 구절에서 보편적으로 “빵”을 뜻하는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누룩”을 뜻하는 ‘주메’/‘쥐메’ (ζύμῃ) 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아르토스’가 무조건 누룩이 들어간 빵 곧 “유교병”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아르토스’를 이방인과 유대 기독인들이 “유교병”으로 이해했다면, 특히 이미 누룩이 없는 빵 곧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주모스’/‘아쥐모이스’ (ἀζύμοις) 를 사용한 상태에서 구태여 “누룩”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아르토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유교병”을 드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단어는 “유교병”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아르토스’는 더 폭이 넓게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이 아니라 “무교병”과 모든 종류의 “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토스’가 “유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무교병”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초대교회는 “무교병”이나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는 오히려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이해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9.2 고린도전서 11:23-25 에서 구체적으로 “무교병”을 의미하는 ‘아쥐모스’나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을 뿐인데, 바울은 그 단어를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을 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이 “내가 주께로 부터 받은 것을”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ῦ Κυρίου, 에고 가르 파레라본 아포 투 키리우) 이라는 문구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주님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핍박하던 교회에서 혹은 다메섹 사건 후로 그 주위에 있는 교회에서 들은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 (παρέλαβον, 파레라본) 곧 그 전통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르토스’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이다. 어쨌건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한데로, 공관복음을 참조하자면, 바울이 사용한 ‘아르토스’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고전 5:7-8에서 유월절이라는 상황에서 ‘아르토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11:23 을 읽는 사람들이 ‘아르토스’를 유대교의 명절인 유월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교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 본문에서도 바울이 ‘아르토스’를 “무교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준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만찬이 유월절에 베푸신 만찬에 사용한 같은 음식으로서 ‘아르토스’는 “무교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교회가 무교병을 가지고 혹은 유교병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임하던,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무교병”을 뜻하는 ‘아쥐모스’나 “유교병”을 뜻하는 ‘쥐메’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그 둘을 포함한 또는 문맥에 따라 그 둘 중 하나를 의미하는 ‘아르토스’를 고의적으로 홀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는것 같다.

      10. 위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아르토스’는 유교병만을 뜻하지 않고, 만나, 그리고 무교병 등 여러 종류의 빵을 뜻하는,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 ‘아르토스’는 유월절, 무교절, 진설병,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문맥에서는, ‘쥐메’와 함께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무교병”을 뜻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떡에는 가래떡, 시루떡, 막걸리가 들어간 떡, 맥주가 들어간 떡, 찹쌀떡, 보리떡, 쑥떡,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모두를 “떡”으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새해에는 이 모든 떡 중 가래떡을 썬 떡으로 만든 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를 “썰은 가래떡국”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떡국”이라고 부름에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떡볶이”를 말하면, 그 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로 가느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것임을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경전체에서와 관련 있는 고대문서들을 분석해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몇 개의 본문에 매달려 사용된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것의 차이들을 극대화해서 해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늘의 교회는 고래의 의례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 반복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동시대 사회 문화적 상황 속의 상징체계의 이해와 발전된 소통 매체 및 수단의 활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최근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고민과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온라인 예배가 교회 공동체성을 지킬 수 있는가?

      현장에 ‘모인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여부가 예배의 정당성을 결정함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초연결 사회에서 교회들이 정보 기반 인터넷을 통해 말씀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일은 또 다른 탁월한 방식의 예배의 목적과 특성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예배자로 하여금 삶의 현장으로 깊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비대면 예배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성은 비슷한 삶의 환경을 공유하며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구역 및 소그룹 단위 안에서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오프라인 교회가 복음을 위해 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일은 중요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의 면모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 제도가 과거와 현저히 달라진 오늘날에는 교회의 공동체성 실현을 위한 방안의 양상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과 같은 급격하고 돌발적인 변화를 늘 예상되고 대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예배와 성찬 실행의, 뉴 노멀에 따른 복음 소통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다만 뉴 노멀 속에서도 예배와 성찬 본연의 의미들이 방해를 받거나 왜곡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배와 성찬 안에 담긴 구속사의 기억(아남네시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 본연의 정위(正位)를 잃지 않도록 가일 층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기독교 공동체는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목회데이타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응답한 개신교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성례전적 공동체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세례와 성찬을 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몸소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와서 세례를 행함으로 교회가 어떻게 이를 행해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기념하는 방식도 교회에 알려주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성례를 지키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적으로 성례를 행하며,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은총의 수단을 가르쳤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성례 공동체였다.
      철저한 세례 교육과 세례 예식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공고히 하였고, 연이은 성찬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됨을 말씀으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참여하여, 이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고백하도록 하였다.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성례전적 이해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설교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를 통해서 교회 존재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성례전적 이해 위에 교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코로나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는 성례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과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


      2022년 신년주일 성찬예식 / 1월 2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며 매월 첫째 주일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온라인 성찬예식보다는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복음적 신앙을 다짐하려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빵을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빵을 먹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낍니다.

      성찬예식을 통한 신앙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온라인 새벽기도회"라고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지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시간입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식사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세 끼 식사의 자리가 성찬을 위한 신앙을 다짐해야 합니다.
      음식이 내 속에서 영양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영양을 공급받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될 성찬은 "기도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911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루(1)에 한 번(1) 오전 9시와 오후 9시 어느 시간이든지 내게 가장 적합한 시간에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불낙지교회를 위하여
      둘째는 내가 만들어야 할 초장을 위하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1년 12월 5일 성찬예식 

      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관점(觀點)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비슷한 단어 "견지(見地)"

      관점은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기 때문에 관점이 참 중요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거침없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삐에로 신부"이다.
      그는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했다.

      그의 비망록 중에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는데 삐에로 신부는 거기에 이런 경험담을 적어 놓았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청년은 자살 직전에 있었다.
      청년은 나에게 자살하려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 파탄, 사회적 지위 등. 그러면서 결론을 맺었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대답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 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리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때부터 청년은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얼마 후 청년이 고백했다.
      “신부님이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풀었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2021년 마지막 성찬예식을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찬예식을 준비하며 성찬의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떡과 잔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저 교회는?
      그런데 이런 관점은 비판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면서 늘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들 중 하나가 "성찬예식" 이었다.
      오늘 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온라인 성찬예식을 갖고자 합니다.
      함께 읽을 말씀은 요한복음 6:53-58 입니다.

      53.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그나티우스는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 피(54절)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 성찬예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성기호목사 성결교 신학대학 교수)

      성만찬의 성서적 기원

      흔히 성찬(聖餐, The Lord's Supper 또는 The Eucharist)이라고 부르는 성만찬(聖晩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最後의 晩餐)를 하시며
      친히 제정하신 성례(聖禮)이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7~20).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명령으로 이 예식을 행하라는 기록은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나타난다.

      "또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므로 초대교회는 성만찬 예식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주의 만찬에 관한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고전 11:20~34) 떡을 나누고 잔을 마시는 것은 "이것을 행하라"(24, 25절)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주의 재림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4~26절).

      애찬(愛餐)과 성만찬(聖晩餐)

      성도의 수가 적었던 초대교회 초기에 행해지던 성만찬은 주로 저녁 때 행했다.
      애찬(愛餐, Agape, The Love Feast)이라고 부르는 친교 식사 형식으로 행해졌다.
      각자의 집에서 공동 식사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 오고 성도들이 사랑의 만찬(晩餐)을 함께 나누었다(고전 11:21).
      즉, 성만찬은 애찬의 형식으로 애찬에 포함되어 행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비해 온 음식의 수준이 달라 가난한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교회를 배부르게 먹고 취하는 곳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나타나자 사도 바울은 이를 경계하고 식사는 각자의 집에서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22절).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150년 경에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어 성찬은 아침에 행하고 애찬은 저녁에 나누었다.
      그러나 4세기 말경부터는 교회에서 성만찬만 행하고, 애찬은 각 가정에서 사사로이 행하다가 차츰 애찬의 풍습이 사라졌다.

      성만찬 논쟁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Sacramentum baptismatis et eucharistiae)에 관한 최초의 조직신학적 진술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 즉 떡과 잔의 성질 및 이 두 요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점차로 발전하여 뚜렷한 구분을 보이고 있다. 실재설,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등이 그것이다.

      1. 실재설(實在說)

      성만찬의 요소들인 떡과 잔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靈知主義, The Gnosticism)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The incarnation)을 부정하며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 뿐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는데
      성만찬의 떡과 잔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고 한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강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였다(요일 4:1~3).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떡과 잔의 요소에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디다케(Didache 또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 Teachings of Twelve Disciples), 이그나티우스(Ignatius),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칼빈(John Calvin) 등의 주장인데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간주하지만 화체설(化體說)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디다케'는 성만찬을 영생을 위한 영적 양식이라 하였다(고전 10:3).

      이그나티우스는 요한복음 6장 32~51절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54절)는 불멸의 약이며 사망의 해독제라고 하였다.

      저스틴은 성만찬의 떡과 잔은 인간이 되신 그리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말한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주의 살과 피로 양육된다"고 주장하며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에 로고스가 결합된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하는 화체설과는 구별되는 견해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2. 화체설(化體說)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예루살렘의 시릴은 성령께 부르짖음을 통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했고,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변화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가 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소화기관을 통해 흡수됨으로 우리를 사망의 독소로부터 해방한다고 했다.
      성상(聖像 Icon) 숭배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였던 754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거나 숭배하는 것을 배격한 결의 끝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인성의 상징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나타낸 다메섹의 요한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충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단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성체(聖體, The host, 라틴어로 hostia)"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요한의 주장은 니케아회의(787년)에서 채택되었다. 요한의 주장대로 사제의 기도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바꾼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속죄 희생의 제사(히 9:26)는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제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성별시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주 희생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화체설이 말하는 것처럼 성만찬의 두 요소 즉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면 그 변화의 기간은 얼마나 지속되는가 또 거룩한 떡을 어떻게 숭배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남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면 "피를 멀리하라"(행 15:29)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어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식인종적인 야만의 혐오감을 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악인도 성찬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그 안에 거하게 되어야 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하신 약속대로(요 6:55, 56)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악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약속이 실제로 악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보아 악인이 떡과 포도주를 성만찬에서 먹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 모실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전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가 되었다고 하거나, 떡과 포도주에 일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섞였다고 하는 이론대로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시게 된다는 주장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3. 공재설(共在說)

      종교개혁자들은 성만찬의 희생설이나 화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루터와 칼빈은 성만찬설에서 그 견해가 동일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실재설을 주장하는 데 비하여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루터는 개혁초기에 "믿음으로만(sola fidei)"을 강조함에 비해 성만찬의 교리에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끝난 뒤 교회의 정통적 교리에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표명하게 될 때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며 중도의 입장에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함에 있어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인 옥캄(Ockham)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옥캄은 물질의 존재 양식에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물질이 그 자체의 점유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榮化)된 그리스도의 몸은 또 다른 물질인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함께 존재(存在)한다고 한다. 이는 사제(司祭)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편재(遍在, 아니 계신 곳이 없다)하신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라 떡과 포도주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여전히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요소들 속에(in), 그 요소들 밑에(under), 그 요소들과 함께(with the elements) 임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떡을 그 손에 드셨을 때 그의 몸도 떡의 요소와 함께 임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재가 축복이 되는 고로 신자들은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며 떡과 포도주에 함께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살과 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으므로 주어진다고 한다. 떡과 포도주는 "이것이 내 살이니라" 또는 "이것이 내 피니라"하는 식사(式辭)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은 구원은 커녕 도리어 정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루터의 공재설이 갖는 문제점은 "하늘"이라고 하는 일정한 장소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인성(人性)을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모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어디나 계시다고 하는 공재설은 우리의 보통 음식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임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고 성만찬의 떡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가 구분하는 일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4. 기념설(記念說)

      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는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거나,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깊은 신앙에 임재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몸이 실제로 성찬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 몸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고 말하며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며 회상하는 기념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또한 성만찬 참여자는 신앙 고백의 행위로서 이 성례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즉,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하신 `이니라'라는 말이 "의미하다"의 뜻임을 밝히며 `이니라'의 라틴어인 est가 `표시하다' 또는 `상징하다'라는 뜻의 sihnificatio와 같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성만찬설을 기념설 또는 상징설(象徵說)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성만찬의 떡을 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잔을 나눌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을 기념한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의식이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육체적 임재 대신 영적 임재를 주장하나 성만찬의 교리로부터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떡과 포도주를 상징 또는 기념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는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영적으로 이루어지며 구속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 드려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또는 sacred fellowship)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긴밀한 교제뿐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연합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거룩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주심같이 구원받은 신자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하고 헌신하는 다짐을 하게 한다.

      성만찬의 참여자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더욱 왕성하게 하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헌신 봉사 충성케 하는 거룩한 예식인 성만찬(Holy Communion)은 이단자(딛 3:10~11, 요이 1:10~11)와 뛰어난 죄인의 참여를 배격한다(고전 5:11~13, 살후 3:14~15).

      중생한 증거가 있는 이에게 세례를 주기 때문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 즉 세례인으로 성만찬에 참여케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를 분변치 못한 채 또는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례 교인들에게 그것도 자기를 살피고 회개한 다음에 거룩함으로 이 성례에 참여케 해야 할 것이다(고전 11:27~29).

      *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영적 임재라는 분명한 신앙을 갖고 떡과 잔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인, 서평


      크리스찬북뉴스 정현욱 편집위원이 신간 『성찬으로 하나되는 교회성찬』 서평을 동홈페이지 서평란에 기고했다.
      정 위원은 저자 알렉산더 슈메만에 대해 "성공회 사제이지만 신학적 성향은 철저히 성경적 원리를 따른다.
      그의 온화한 예리함은 성공회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동시에 예전을 과도하게 무시하는 기존 개신교를 향한다. 그리고 진정한 성찬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다. 2020년 비아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우리 아버지>는 장엄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하게 기이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진중하면서도 풍성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교향악 같다"고 평가했다.

      정 위원은 이어 "예배학의 신학의 경지에 끌어올린 그는 목회 실천학적으로만 보았던 예배에 깊이를 더함으로 기독교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모두 12장으로 구분하여 성찬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고 있지만 1장에서 전반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슈메만은 성찬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성회'와 '성찬' 그리고 '교회'가 세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분리 또는 괴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예전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연합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는 것'(23쪽)이다. 슈메만은 바르지 못한 성찬 이해가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태동하였음을 환기시킨다. 스콜라주의 또는 스콜라적 신학은 '거룩한 모임과 성찬, 그리고 교회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철저히 무시'(23쪽)함으로 성찬의 교회론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다시 성찬이 교회론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성찬의 측면들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 성찬'으로 소개한다. 아마도 스콜라적 신학은 현재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병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과 예전을 중시하는 정교회 전통한 비교하면서 후자의 성찬 의식이 갖는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 위원은 "정교회 사제이기도하는 슈메만은 처음 성찬이 가진 연합의 의미에서 벗이나 참여자의 제한과 영역의 축소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비잔틴식 예전 의식이 점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했고, 섬기는 자와 기도하는 자를 분리'(32쪽)시킴으로 성찬의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슈메만은 이 부분을 3장 입당의 성례에서 좀 더 깊고 예리하게 다룬다. 정교회 예식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저자의 용어들이 낯설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특히 "4장 말씀의 성례는 현대 한국교회 개신교 설교자들의 신경을 곧두세우고 읽어야한다. 슈메만은 성례로서의 말씀 즉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의 무능이나 빈약함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무엇일까?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고도 지적했다.

      "진정한 설교는 해박하고 유능한 신학 지식을 정확히 전달하는 복음서 본문에 대한 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의 본질은 복음서에 대한, 다시 말해 복음서의 한 주제에 대해 설명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선포다. 설교의 위기는 무엇보다 말씀 선포가 일종의 설교자 개인의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126쪽)

      저자의 이 같은 주장에 힘입어 정 위원은 설교의 위기가 공공성을 상실하고 사사화 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 바, 설교의 사유화로 인해 교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설교가 '개인의 일'이 되자 교회는 급격하게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찬의 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교와 사제들이 받은 가르침의 은사는 개인의 은사가 아닌 '믿음과 사랑의 연합체인 교회의 것'(131쪽)이다. 슈메만은 7장 연합의 성례에서 교회 연합의 전제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삶의 근원이자 내용이며 목표'(218쪽)인 것이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연합하고 모인다. 연합과 모임은 분열과 분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627#shar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찬(Table) - 하나님의 뜻 이해하기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가진수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Th.M.)과 미국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박사과정(D.Min.)을 마치고,
      플로리다 주 ‘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IWS)’에서 예배학박사(D.W.S.)과정을 공부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예배의 갱신과 영적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그는 현재 <글로벌 예배 컨퍼런스> <글로벌 예배 심포지엄> 등의 국내외 예배관련 세미나와 집회를 주관하고, 예배 매거진, 큐티, 예배도서 등을 발행하는 예배전문사역기관 ‘글로벌워십미니스트리(Global Worship Ministry)’의 대표다.

      그동안 신학교와 신학대학원, 국내외 지역교회, 예배자 학교 등에서 예배의 중요성과 다음세대를 예배로 세우는 일에 열정을 다해왔으며, 현재 미국 LA에 위치한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 석사과정(M. A. in Worship Studies)의 학과장이자 교수로 ‘현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평상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생명의 양식인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예기치 않던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당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은 원인이 없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예배자들에게는 결국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창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굳건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이다. 주님의 피와 살과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은혜(恩惠) 예화(例話)


      은혜(恩惠)

      1. 히브리어

      헨 : 자비함, 즉 주관적으로 호의, 은혜, 또는 객관적으로(아름다운) 은총, 은혜(로운), 즐거운, 현숙 한, 사랑스러운.

      토브 : 넓은 의미에서 선하다(또는 잘되다, 타동사로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 더 낫다(더나은 일 을 행하다), 기쁘게 하다, 선하다(선을 행하다, 선히 여기다)

      라하밈 : 죄사함을 말하는데(출 34:6), 긍휼, 사랑, 호의 자비, 애정 등 표현.

      2. 헬라어

      카리토 :  은총을 베풀다, 크게 호의를 가지다, 축복을 하다.

      카리스 : 긍휼, 은혜로운 행위, 선물, 애정스러움, 기쁨을 주는 것

      * 기쁨(카라) - 은혜(카리스) - 은사(카리스마)

      3. 한자

      베풀어 주는 혜택, 고마움.

      은혜에 대한 성구

      1. 은혜란 무엇인가?

      삼하 15:25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
      시 5:12 - 호위하는 것
      행 20:24 - 복음
      갈 1:15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엡2:8 - 거저 받은 것이 은혜
      벧전 1:7-10 - 구원이
      벧전 3:7 - 생명의 은혜

      2. 은혜는 누가 주는가?

      왕상 3:6 - 주께서
      출 33:19 - 하나님께서
      요 1:17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후 1:2 -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살후 2:16)
      시 90:17 - 하나님께서
      롬 12:6 - 은사를 받게 됨

      3. 은혜의 가치 평가

      행 15:11 - 은혜로 구원얻음
      롬 3:24 - 의롭게 함
      롬 4:16 - 후사가 됨
      롬 5:17 - 생명의 왕 노릇함
      고전 15:10 -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고후 9:14 -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것

      4. 은혜를 받은 자세

      욥 33:26 -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시 31:19 - 주께 피하는 자
      잠 3:34 - 겸손한 자에게
      잠 14:9 - 정직한 자가
      롬 5:20 - 죄를 인식함으로
      히 4:16 - 보좌앞을 담대히 나아감으로
      벧전 1:13 - 은혜를 바라므로

      가장 큰 은혜는 "겸손(謙遜)"


      인도의 철학자 브하그완은 겸손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합니다. 

      겸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자가 가진 “Self-Control”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겸허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함으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즉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올바른 지성, 상대가 가진 장점을 장점으로 볼 줄 아는 안목과 인격적 여유, 상대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배우려는 자세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배움의 지경을 넓히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힘을 제공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환경을 바꾸며 나를 세우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강한 당신, 용기 있는 당신,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당신에게서 드러나는 당신의 겸손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성공 여정에 힘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


      겸손(Humility)

      -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 저. 번역 이득환.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9세에 영국의 아버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십대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후 네덜란드의 우크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세 되던 해에 남아프리카 부롬폰테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볼체스터,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도 다년간 목회를 하였고 그 밖에 선교, 교육 분야에 정통한 인재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 외에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남겼는데 심오함과 평이함, 실제성을 두루 갖춘 그의 책들을 읽고 영적인 도움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의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더라."(계 4:10,11)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영광과 완전함에 참여하는 존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고,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선(goodness)과 영광(glory)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선과 영광을 소유할 수 있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goodness)과 영광(glory)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진실하게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위하여 현재는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빈 그릇과 같이 비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신의 능력과 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그저 한 순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영역입니다. 본빌작인 면에서 볼 때 겸손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것과 더불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됩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이미 타락해 버린 천사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뱀이 교만-그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의 독을 우리의 최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내쉴 때, 그들 또한 그들의 높은 지위를 잃고 멸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교만과 자기를 높이는 것은 지옥의 저주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상실된 겸손을 회복시킬 만한 수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겸손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고,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겸손을 소유하셨고,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도 그분의 성품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은 가장 귀한 것이 되었고, 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단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토양과 뿌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의 구속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완전한 겸손의 삶으로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셨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이 곧 우리의 구원이고, 그의 구원이 곧 우리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악에서 옮기웠다는 증표를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원래의 상태(original sin)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는 겸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없이는 신앙이나 사랑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기쁨과 삶을 살아갈 힘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겸손이야말로 은혜가 뿌리내리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우리의 모든 흠과 부족함들은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근본된 뿌리가 됩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하나님을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reason)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이성으로 인해 우리가 실재의 본성과 하나님의 명령의 명백한 필요를 알아갈수록 우리가 더욱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겸손의 본질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취하여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뜻과 정성을 다해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그에게 역사하여 채워지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위치를 내어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뛰어난 신앙을 나타내 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겸손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모본에 있어 겸손에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 진리-겸손-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도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징표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축복을 받는 비결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망과 기도,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시면서 자주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겸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며, 교만만큼 더럽고 다루기 어려워서 우리의 통찰을 흐리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잠잠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겸손을 얻기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공부합시다. 우리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고 지쳐서 더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그 교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마가복음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도적질

      κλοπή, ῆς, ἡ 스트롱번호2829

      1.

      도둑질

      2.

      마15:19

      3.

      막7:21.

      발음 [ klŏpē ]
      어원
      281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도둑질, 마15:19, 막7:2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도둑질(마15:19, 막7:21).

      ὑπερηφα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5243

      1. 오만. 2. 거만. 3. 자랑
      발음 [ hüpĕrēpha- nia ]
      어원 / 5244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오만, 거만, 자랑, 막 7: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교만(막 7:22).

      간음
      μοιχ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3430
      1.

      간음

      2.

      마15:19

      3.

      막7: 21

      발음 [ mŏichĕia ]
      어원
      343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간음, 마15:19, 막7: 21, 요8: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간음(마15:19, 요8:3), 음란(막7:21), 음행(갈5:19).

      탐욕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124

      1.

      탐심

      2.

      탐욕

      3.

      눅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탐심, 탐욕, 눅12:15, 롬1:29, 고후9: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고르반(2878) [ kŏrban ]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고르반, 예물, 막 7: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코르반).

      -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 '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J.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에서는 '장로'를 1절에서 처럼 굳이 '직분자'로 해석하거나, '젊은 자'(*, 네오테로이)를 '성직자'나 '집사'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네오테로이'가 성경에서 직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 - 17)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 잠 3:34(LXX) 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탓세타이'(*)는 군대를 배치시킬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ὑψηλοφρονέω 스트롱번호5309

      1.

      교만하다

      2.

      거만하다

      3.

      딤전6:17.

      발음 [ hüpsēlŏphrŏ- nĕō ]
      어원
      5308과 5424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교만하다, 거만하다, 딤전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마음을 높이다(딤전6:17).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5012

      1.

      겸손

      2.

      겸양

      3.

      행20:19

      발음 [ tapĕi- nŏphrŏsünē ]
      어원
      5011과 5424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겸손, 겸양, 행20:19, 엡4:2, 빌2:3, 골3: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행20:19, 엡4:2, 벧전5:5, 빌2:3, 골2:18).


      ταπ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011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tapĕinŏs ]
      어원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뜻풀이부

      • 1.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1: 52, 롬12:16, 고후7:6, 약1:9.
      • 2.
        [감정의 상태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 a.
          [나쁜 의미] 비굴한, 비열한, 고후10:1.
        • b.
          [좋은 의미] 겸손한, 겸비한, 마11: 29, 약4:6, 벧전5: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한(마11:29, 약4:6, 벧전5:6), 비천한 (눅1:52, 고후7:6), 낮은(롬12:16, 약1:9), 유순 한(고후10:1).

      φρήν, φρενός, ἡ 스트롱번호5424

      1.

      생각

      2.

      이해

      3.

      고전14:20.

      발음 [ phrēn ]
      어원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생각, 이해, 고전14: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지혜(고전14:20).

      제 2 장

      구속의 비밀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어떤 나무든지 근본된 뿌리를 따라 자라게 마련입니다. 즉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모든 기간동안 나무의 씨가 처음 가졌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필요성과 본질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 뱀-그는 교만으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그의 본성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말을 속삭일 때, 그의 말들은 지옥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뱀의 말을 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욕심에 넘어 갔을 때 지옥의 독이 그녀의 영혼과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축복받은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dependence)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서 말미암을 모든 후손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고, 교만이라고 하는 사단의 독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끔찍한 죄와 저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은 우리 인간들 모두 안에 잠재해 있는 교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과 피흘림, 모든 이기주의와 고통, 모든 욕망과 시기, 그리고 모든 상한 마음과 아픔의 삶, 매일 겪는 불행들은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오 교만의 본성과 권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삶에 던져 놓은 교만의 권세는 원래는 지옥에 속해 있던 것이며, 모든 영역을 통하여 막강한 권세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권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며, 때로는 투쟁하기도 하며, 그것을 멀리 쫓아 내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의 권세가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기인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강한 영적인 권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을 고백해야 하고, 통회해야 하며 교만이 사단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극복하여 떨쳐 버리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영적 권세 아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한 부질없는 싸움은 교만의 뒤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권세와 생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그가 심어 놓은 교만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부으시는 하늘에 속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알기 위해 "첫째 아담"과 그의 타락을 보았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교만했던 자신을 극복하여, 또다시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겸손의 생명을 주시는 "둘째 아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7)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심"(골 2:19)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인간의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가 서고 자라야 할 뿌리입니다. 그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한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며,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소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그분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 또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은 오직 '겸손' 그 한가지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낯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 올리우심과 그 영광은 보좌 앞과 영광의 관을 쓰신 주님께 마땅히 올려져야 할 겸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신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어 보좌 위에 앉히신 모든 것이 그의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섬기기 위해 온유와 친절함으로 옷입으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케하심이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보혜사와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고 종이시며, 앞으로도 겸손의 표상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셔서까지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겸손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겸손의 본질이 모든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에서 나타아냐 할 것입니다. 겸손이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전부이고 가장 요한 것이며 속죄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 또한 우리 안에 그 겸손의 은혜를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며,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겸손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력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구하지 않을 때 구원의 기쁨이 식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보다도 겸손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을 환영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이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함과 자신을 낮추심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느낌, 연약함들에 대해 무관심한가를 생각해십시오. 또한 정직과 고결함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웃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마음에 쓴뿌리를 주며 이간질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단에게서 오는 교만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살며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성도인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겸손에 영원토록 입도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내 안에 예수님의 겸손이 가득차 있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겸손이 넘쳐 흐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보여졌던 그러한 겸손이 없음을 정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이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을 구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여!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십시오. 겸손이야말로 구속의 근저에 감춰진 비밀입니다. 날마다 더욱더 이 겸손에 깊이 잠기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겸손함을 배워 갖추도록 우리의 온 삶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다. 구원이 그러하듯이 겸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제 3 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내면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과 아버지(God the Father)와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근원과 행하는 권세에 대해 자신이 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주님의 겸손하심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이라고 하는 이 은혜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도록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에서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복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9)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자신을 가리켜 "아니요"(not, nothin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내가 아니요"(not I)라고 표현했던 바울의 표현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리켜 여러번 말씀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 5:19)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 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요 7: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요 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요 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요 14:24)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진정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하시는 구속의 본질과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아무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그의 모든 의지와 능력을 전부 아버지께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사역과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의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지만 결국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존귀하게 하사 그의 영광의 오른손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낯추셨고, 항상 하나님이 그 앞에 계셨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더욱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 영과 뜻과 성품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시도록 비워져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진정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욕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소욕을 버리고 예수님께 늘 순응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고 아무것도 행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뿌리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겸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요, 진정한 겸손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이 어디에서 나며, 또 그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 임의대로 행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나누어주신 그 생명은 우리의 죄와 우리 자아를 죽임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생명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생명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거룩한 지식의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이 비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지 빈 그릇으로, 통로로 내어드리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만물이 증인이며,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늬 모든 자녀들이 그 증인입니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그리고 모든 신앙과 진정한 예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경배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그의 전 삶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존귀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않으셨고, 그의 능력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은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당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친구들과 세상을 향해서도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겸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드리십시오. 이전까지 결코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겸손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제 4 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7-28)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의 마음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겸손이 나타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겸손한 자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인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그 말씀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겸손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 5)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처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마음이 온유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겸손은 이땅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축복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온유와 겸손 가운데서우리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중에 세워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라 칭함을 받는 자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천국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은혜 중에 가장 놀라운 은혜는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눅 9:48)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겸손의 세례를 받을 준비된 잔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표이며, 겸손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5.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리라."(마 23:11)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닥다리입니다.

      6.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상좌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4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전에서 예배할 때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깊고 진실한 겸손을 충만치 못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의 권위와 모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생각들과 순종하신 모습들을 볼 때 겸손은 제자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9. 최후 만찬 석상에서조차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투었습니다.(눅 22:26-27)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길은 겸손에 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도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겸손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을 삶으로 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의 기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겸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신실한 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번성함과 존귀, 행복을 즐거워 합니다. 언제나 그런 신실한 종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이름은 곧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다른 면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주님의 그 섬김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새롭고 완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한 자유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곧 피조물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정신이며,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조차 도 섬겨야 하는 섬김의 도를 전심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섬김의 도 위에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화(sanctification)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눈다면, 너무 낮은 자리라 하여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굽혀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여기 지극히 높은 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입니다. 높아지고자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 분이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흘려 보내 주셔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지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난님께서는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가 우리에게서 고상함과 대담함, 그리고 남자다운 용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가장 고상한 성품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겸손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하늘의 정신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겸손케 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것들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믿읍시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들어와 거하실 것입니다.

      제 5 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주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니라"

      (눅 22:26)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열두명의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본다면 겸손이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에게 있어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인간에게 불어 넣은 교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겸손에 우리도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제자들이 얼마나 겸손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또 한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 중 하나는 우편에, 나머지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들중 누가 과연 우두머리인가를 놓고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지는 겸손의 모습들이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들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이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에 관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겸손의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지만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모든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에도 그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는 구세주되신 예수님의 권능을 전파하기 위해 증인들이 되기 전에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많지만 정작 겸손의 은혜가 결핍된 교수와 목회자, 사역자, 그리고 선교사와 교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는 겸손의 은혜를 지키려는 노력이 미미해서 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은 가장 중요하고 높은 은혜 가운데 하나라는 교훈을 확인시켜 줍니다.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겸손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때에만 능력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외적인 가르침과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교만을 이길 수도 없으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겸손 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놀라운 겸손으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그들 중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그에 따라 일하는 사람에 의한 인간의 미덕입니다. 겸손은 자부심과 반대되는 가치입니다.

      겸손의 의미는 어원 적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이
      단어는 라틴어 humilĭtas 에서 유래하며 , 이는 '육지'를 의미 하는 근원 부식 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 감각이 나타납니다.

      가치로서의 겸손,
      사회 경제적 기원으로서의 겸손,
      복종으로서의 겸손.

      가치로서의 겸손

      가치로서 겸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사람의 질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각 사람이 "땅에서"올 때마다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의미는 겸손을 겸허 의 미덕과 관련된 태도로 만듭니다 .

      겸손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 한 인간의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구보다 위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존재가 같은 정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겸손의 가치는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우월한 복합물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업적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짓밟 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적습니다.

      겸손하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발육, 오만 및 자부심을 거부하고 겸허, 절제 및 구속과 같은 가치를 행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겸손의 특성

      미덕으로서 겸손은 행동에 명백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주제의 평등과 존엄성 이해; 일과 노력의 가치 평가;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면서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친밀감으로 표현하기; 겸손하고 단순하고 구속력있는 행동; 수평 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기; 듣기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고려하고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십시오.

      경제적 근원으로서의 겸손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입장은 종종 겸손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원이 거의없고 번영 할 기회가없는 가정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Juan은 겸손한 원산지"라는 표현은 경제적 자원이 거의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복종으로서의 겸손

      특정 상황에서 겸손은 더 높은 사례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항복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종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수장이나 경찰 당국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피하고 오히려 준수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겸손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우월과 완전성 앞에서, 그리고 존재의 은혜를 주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하는 선덕 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겸손은 인생의 신비에 앞서 자신의 작은 것을 인식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받아들이고, 선하고 유쾌하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 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에 저항하고 겸손에 은혜를 베푸시 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베푸십시오 ."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이 하느님의 눈에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양심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겸손의 가장 큰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신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이 느낌이 종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남자처럼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상태에있을 때, 그는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순종하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 빌립보서 2:5-8.






      겸손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능력으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 아는 체하는 회의론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하나님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겸손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시작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 .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진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논쟁을 좌지우지하거나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자아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섬김과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주장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예수]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 . .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 4:5)

      4. 겸손은 모든 지식과 믿음이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비판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념을 허용하셨고 때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원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6. 겸손은 우리 삶이 수증기와 같으며, 하나님이 우리 죽음의 때를 결정하고, 우리의 모든 업적을 주관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1908년에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그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미숙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천박한 상대주의"(마이클 노박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한 표징은 인간의 확신에 대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도하고 인간의 의심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겸손이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불행스러운 일이다.
      겸손은 더이상 야망 혹은 야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겸손은 확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전에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었다.
      하지만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확신하지 말하야 하는 부분 - 자기 자신- 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 - 하나님의 이성(신적 이성) 등 - 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오늘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회의론자들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조차 의심한다...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겸손이 있는데, 고행을 통해 덕을 쌓으려는 격렬한 노력보다 실제로 더 독성이 강한 겸손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일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겸손해서 구구단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길 위에 서 있다. (Orthodoxy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 1957], pp. 31-32)

      우리는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겸손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그러한 겸손의 실상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신에 대한 세상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대의 겸손은 절대로 "불이야!" 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기가 세탁 건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겸손이 미숙한 회의론의 상대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겸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 적어도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느낌으로 시작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바라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함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된 권리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논쟁을 주도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자아를 높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며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 [예수님]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4:5).

      4. 겸손은 모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위하여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in humility)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비판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허락해 주신 것과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포대 만드는 사람(희랍의 민화)
      그리스 민담

      1. “다리 위에 놓고 올 수가 없어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글쎄,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에 가까이 오더니 ‘지난 수년 동안은 눈을 뜬 채 이 다리를 건넜으니 오늘 한 번만은 눈을 감고 건너봐야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는 바람에 이 자루를 보지 못하고 건넜답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딜 뻔하기도 했답니다.”

        “아이고, 저 못난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정말로 들어오는 복도 제대로 못 받고 발로 걷어차는구먼!”

        다음 날이 되자 왕은 포대 만드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생각이 없느냐! 잘난 척하고 떡과 거위를 팔아먹었으니 너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주려고 그 속을 금화로 가득 채워놓았었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어제는 또 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서 내가 너를 위해 놓아둔 금화가 든 돈 자루도 못 보고 지나갔단 말이냐?”

        “임금님,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제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그 다음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음식점 주인을 불러오게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너는 어째서 이 사람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느냐? 떡과 거위에 금화가 든 것을 알았으면 적어도 그중 반은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더러운 음식과 마른 빵만 주어 보냈느냐? 당장 돌아가서 한 푼도 빠짐없이 금화를 전부 이리 가지고 오너라. 그 금화는 내가 저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음식점 주인은 집으로 가서 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그 금화를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 스스로가 네 운명의 샘을 막았고 나는 너 몰래 막힌 샘을 뚫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너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이 금화를 받아 가지고 편안하게 살면서 그 노래만은 더 이상 부르지 않도록 해라.”

        포대 만드는 사람은 왕에게서 금화를 받아 그 돈을 밑천으로 후에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648페이지 중 309–311페이지 309–311 / 648


      어느 마을에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가사는 아주 단순하여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님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묻기를 "왜 자네는 항상 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그러자 그 포대 만드는 사람은 "예, 그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인도하는 아주 넓은 광야로 나갔는데 그 광야에는 수 많은 샘물들이 솟아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샘물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샘물을 찾았는데 내 샘에서는 물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샘물의 구멍을 넓게 뚫어주면 샘물이 많이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에 긴 장대를 가져다가 샘물을 마구 쑤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샘물이 솟구치더니 그 다음에는 아예 물이 솟아오르지 않았지요. 천사가 말하기를 샘물이 솟아나는만큼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내 샘물을 막아버렸기에 내 신세 한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어진 임금님은 포대만드는 사람에게 신하를 시켜  그 날 저녁 빵 한 덩어리를 보냈습니다.
      궁궐에서 보낸 떡을 받은 포대만드는 사람은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인데 떡 한덩어리로는 끼니를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제과점을 찾아가서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낸 빵인데 이 빵을 받고 마른 빵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빵집 주인은 한 바구니의 빵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임금님이 그 가에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하구나!
      아직도 부족한가?

      그 다음에는 거위요리를 접시에 담아 보냈습니다.
      일을 마치고 좁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위에 금화를 담은 자루를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포대만드는 사람은 몇 십년을 건넜던 다리인데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며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금화를 담은 자루를 신하가 다시 궁궐로 가져왔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 1472-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못받으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다.

      어느날이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그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샇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떻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바 은헤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에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 반석평(潘碩枰, 1472년 ~ 1540년 6월 24일)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다.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가두리 꿩사냥 (은혜. 사랑)

      수꿩은 어느 한 산에 한 마리 밖에 살지 않는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유별하다 하여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던 것이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거나 하는 사생 결단이지, 약세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한다.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깃을 꽂고 다닌 이유는 바로 사생 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도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기도 하다.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 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그를 구하러 날아들어 타 죽거나 알을 품고 있는 중에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꿩의 습성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은혜를 입으면 보은한다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이란 산 이름과 상원사(上院寺)가 연기(緣起)되고 있다.
      그런 꿩을 가로 세로 겨우 7-8 미터 남짓한 방에 가두어놓고 석궁을 쏘아 살생하는 가두리 꿩사냥이 성행하고 있다 한다.
      장마가 지면 길에 나다니는 벌레를 밟더라도 죽이지 않게 하고자 오합혜(五合鞋)라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고 나들이했던 우리 선조요, 피를 빠는 이를 잡더라도 죽이지 않고 보살통(菩薩筒)이라는 대통에 담아 나뭇가지에 매어두었을 만큼 살생에서 초연한 조상들이었다. 그 후손들의 동물 학대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충격이 더 크다. 짐승을 가두어 놓고 쏘는 가두리 사냥을 한 사람은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연산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냥을 삼가하길 상소하는 소문에 보면, 짐승은 가두어 놓고 쏘지 않으며, 불을 지르거나 물을 등지게 하고서 몰지 않으며, 새끼와 더불어 있으면 쏘지 않으며, 쫓겨가다가 지쳐 도망치기를 멎고 돌아보고 서 있으면 쏘지 않으며, 떼지어 있으면 놀라게 하여 분산시킨 다음 한 마리만 쫓는 것이 엽도(獵道)라고 했으니 너무나 인간적인 사냥 정신이 우리에게 계승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데도 하필이면 온 세상이 자연 환경과 동식물 보호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이 시점에 그 못된 짓을 자행하다니 말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날씸한 몸매를 자랑하는 방아깨비는 유난히 벗겨져 있고 고지새라는 새는 별나게 심술 궂은 부리를 지니고 있다.한편 개미의 허리는 끊어질 듯이 잘록하지 않은가?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연관지어 엮어 낸 전래의 고담 하나가 있다.
      한 여름 내내 일만 하고 있는 개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동물이 있다. 방아깨비와 물가에서 물고기 잡아 먹고 사는 고지새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미를 꼬드겨 여름철의 낭만을 함께 즐겨보자고 유혹한다.
      남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개미가 흔쾌히 승락하고 함께 즐길 요량으로신나게 물가로 달려 갔다.
      경망스러운 방아깨비가 선뜻 나서며 자기가 우선 솜씨를 보여 고기 한마리를 멋있게 잡아ㅗ겠노라고 큰소리치더니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메기가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순간적으로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남아있는 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개미는 발만 구르고 안타까와 하는데 고지새는 메기를 찾아 천벙지축 날뛰더니 마침내 놈을 찾은 모양이다.
      잽사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건적으로 메기를 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지체하면 친구가 죽는다.
      고지새는 급히 그 예리한 부리로 메기의 배를 갈라 방아깨비를 구출한다. 여부없이 요나 신세가 된 방아깨비는 메기 뱃속에서 나오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 야, 내가 잡은 물고기 좀 좌 크지?이 녀석 잡느라고 놈의 뱃속에 들어가 땀을 꽤나 흘렸지"라고 말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지새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은혜를 베풀적엔 그 은혜를 구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아예 들어 본 적이 엇는 고지새가 아니던가? 메기를 제가 잡았노라고 기고 만장한 상대를 보고 어찌 그 입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터무니 없는 자랑을 계속하는 방아깨비의 엄행과 묘한 앙상불을 이루는 고지새의 입술이 어찌나 우스운지 개미는 웃고 또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울러 고지새의 튀어나온 부리는 그대로 귿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남의 공을 제것이라고 설치는 공짜 근성의 얌체 방아깨비가 하도 얄미워서 그 이마를 홀랑 벗겨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받은 은혜 때문에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대표할만한 영웅으로 오자서(俉子胥,B.C.? -48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충신으로 못난왕과 간신의 흉계에걸려 목숨을 잃은 오사(俉奢)의 둘째아들이다.
      이에 평왕은 자서마저 죽이기 위하여 그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5만석의 곳식을 주고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상대부 벼슬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오자서가 요행으로 소관이라는 국경 검문소를 벗어나려면 눈앞에 놓인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갈대밭이 숨어서 물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자서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차고 있던 전가의 보도를 그 노인에게 끌러 주었다.
      어부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면서 내 듣건데 당신을 잡아 바치면 초나라 임금이 5만석의 곡식과 상대부의 벼슬을 준다고 합디다.
      그 엄청난 상급도 초개같이 여기고 당신을 도망시켜 주었는데 어찌 이따의 칼을 받겠소라고 말한다.
      자서가 어옹을 떠나면서 만약 뒤쫓아 오는 군사가 있거들랑 이몸의 종적을 누설하지 말아주시오 한마디 당부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난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구했는데 그대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니 그대가 붙들리면 당장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의 의심을 풀어 주리다 하더니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뒷날의 일이다.
      자서는 오나라의 왕 함려에게 발탁되어 초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깨끗히 복수한다.
      이어서 그는 망명생활을 할 때 자기를 괴롭힌 정나라마저 징벌하기위하여 군대를 그리로 향했다.
      약소국 정나라로써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한것이다.
      이에 정나라 왕은 만알 오자서를 자기 나라에서 물러가게 한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사람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노라고 선언했다.

      어느 날이었다.
      정나라에 초라한 어부 한사람이 자기가 오자서의 군대를 돌아가게 하겠노라고 나섰다.
      예날 악저땅에서 오자서를 구출해 주고 죽은 그 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자서를 찾아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봐서라도 정나라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남다른 의리의 사나이 오자서는 즉각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에서 철수했고 그 노인의 아들은 사방 백리의 땅의 주인이되어 살았다고 하는 중국 고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죄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자기들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하지 않은가?

      성경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주인을 위해 은혜를 베푼 사나이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제나라 맹상군은 후세사람들로부터 멋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널리 공인받고 있다.

      이조시대의 고가사로 맹상군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  "천추전 존귀키야 맹상군만 하랴마는..." 이라는 구절이 등장할만큼 만복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맹상군도 자기가 거느린 3,000명의 식객을 치다꺼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 문제의 타개책으로 자기의 식량이 나오는 설(薛)지방 사람들로 부터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돈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일을 풍환이라는 종에게 맡겼다.

      맹상군의 명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풍환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올만한 것이 없는가를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집안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풍환이 주임에게 빚진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풍환은 맹상군의 이름으로 그들의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온 풍환을 보고 화가난 맹상군이 불쾌한 표정으로 힐책을 하는데 풍환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올까 궁리해 보니 이 집에 없는 것이라곤 오직 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구하다 보니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만금을 주고 정의를 사가지고 왔으니 주인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한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라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후 맹상군은제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정승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3천명의 식객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뿔뿔히 흩어졌고 그는 결국 자기 몸뚱아리 하나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풍환은 주인을 설지방으로 인도했다.
      맹상군은 거기서 의외의 환대를 받았고 아울러 설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다시 멋지게 기사회생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억지로 의를 사서 누렸던 맹상군의 복보다 더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슴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지름 길

      의학공부를 하는 한 미국의 여대생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곤할 때 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하면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약을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리자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날 저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나아갔다.
      뚝 위에 올라서서 여태껏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할려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깨끗이 마약을 끊어버렸고 지금은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옛것을 완전히 벗어 버리는 일은 내 의지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하다.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이다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 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보상

      초기 영국의 케스, 교단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들 중의 하나였던 웹피플이라는 성직자는 젊은이였을 때 해변에 갔다가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중의 하나를 갑자기 잃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이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이 슬픔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았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에게 아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벽난로 위에 길게 내려진 이 말씀을 맺힌 눈물을 통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단어를 주목하게 되었다.
      “족하다(is sufficient)"그는 성별된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외쳤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나는 족한 은혜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며 그것을 이제 1제 것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 유용하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은혜는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머물게 된다.
      이 언급이 얼마나 웅대하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실패한 결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무정한 가정,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선교 생활의 압박감, 압도해 오는 비애 중에도 은혜는 족하다.

      우리의 무능력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붙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이는 위장된 축복들인 것이다.

      손때 묻은 벽돌 한장

      레이몬드 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사는 거치장스럽고 꼴보기 싫은 존재이기에 목사를 때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벽돌을 한장 싸들고 교회에 들어갔다.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릴리 청년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고 들어간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치게 되었고 그 자리가 릴리 청년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발견한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되었다.

      수년 후에 세계의 최대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크 카운티병원에는 가난한 가운데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가는 수천의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목사가 한명 있게 되었다.

      이 흑인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목사'로 불리운 과거의 릴리 청년이었던 것이다.

      릴리 목사가 하늘 나라에 간 장례식의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벽돌 한장이 전시되어 보는 사람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괴롭건 즐겁건 어느 때나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구원하시고 은혜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레이몬드 릴리가 밤마다 어루만지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벽돌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안락의자에 앉아서 애독하는 잡지를 펼쳐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다고 가정합시다.
      한창 흥미가 절정에 달해 있는데, 그만 “다음 호에 계속”이란 문구가 나오면 얼마나 안타깝고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호에 계속”이란 말이 큰 기쁨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예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오랜 순례의 생활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이제 거의 다 쓰여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는 끝없이 엮어진 줄과 같고, 끝을 모르는 강물과 같고, 끝없이 돌아가는 바퀴와 같고, 영원한 별빛과 같다.
      옛날 베들레헴 아기 예수에게 비쳤던 별이 그때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미래에 언젠가는 우리를 주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책으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속편이 끝없이 나오는 만년 연재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크리스챤 생활이 재미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과거에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다음에 계속될 것입니다.

      또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심령에 고통을 주는 것들은 이번 호에서 끝나고, 다음 호에는 계속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찬송 시인이 쓴 대로 “점차로 영광만이”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광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영원이 있습니다.
      하늘의 광채들은 “다음 호에 계속”될 것입니다.

      값싼 은혜

      독일의 신학자인 본 훼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 교회의 능력과 사회를 향한 영향력의 상실 원인을 말하면서
      이는 교회가 .값싼 은혜, 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이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강조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고 그는 비판했습니다.

      “그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의 생활 속에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삼았다면 참으로 내 삶 속에 이러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누가 나에게 어떠한 신앙 사상을 가져와서 나를 미혹하거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번 걸프전쟁관련 사진 중에서 한 전투병 철모에 쓰인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의 분위기를 느끼게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임사호천(臨死呼天)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임사호천(臨死呼天) 이란 "죽음에 임하여 하나님(하늘)을 찾는다"는 뜻이다.                   

      臨  :  임할                      
      死  :  죽을
      呼  :  부를
      天  :  하늘 천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형편에 처한 사람은 바로 죽음 직전에 처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죽음 직전에 처한 이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좀 더 사는 일일 것이다.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그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람은 어머님을 찾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라는고백은 절대절명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비장한 고백이요, 절규다. 그야말로 생사문제가 아니고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앞에서 이제까지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죽음앞에서 그 신념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 
      민족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 민족을 멸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요." 라고 절규하던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바울의 위대한 민족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앞에서 충심을 변치 않고 더욱 강해지는 사육신들. 
      노량해전의 결전을 앞두고 "이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몸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다짐하든 충무공 이순신.

        "나는 내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라고 부르짖던 미국 독립운동의 젊은 투사.

        "예수께서는 내 한평생 84년 동안에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 데, 내가 어찌 그 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랴." 하며 순교의 제단에 몸을 던진,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 선생 등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을 고수한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참한 사형방법에 의해 죽음의  고통으로 다가가시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통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머리에 가시관, 양손과 양발에 못박힘이라는 육신적인 고통을 포함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는 영적, 정신적인 고통의 극치를 잘 보여주신다 하겠다.

       임사호천으로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함께 죽어가던 강도 일것이다.  
      고통속에 숨져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으로 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확답을 받았으니 말이다. 비록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죽음앞에 직면하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꼭 기억하시고 구원(救援)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찬송가 405장의 작사자 존 뉴톤도 임사호천의 대상자다.
      그는 아프리카노예상 이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큰 풍량을 만나 죽음을 느끼자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살아났다.
      이후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2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다윗도 찬양한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시103:4).



      잊어버린 만나

      한 100여 년 전에 영국의 한 청년이 속도가 매우 느린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닷새나 걸리는 여행 길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고 건빵이나 치즈를 먹으면서 고생을 했습니다. 미국 대륙에 가까이 오면서 식당 앞을 지날 때 맛있는 음식을 보자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식당
      에 들어가서 밥을 한 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돈이 없어 미안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식당 주인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며 이미 당신의 선표 가운데 식사 대금이 치뤄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표에 이미 닷새 동안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비가 포함이 되어 있는데도 그 청년은 무지해서 그냥 건빵만 먹고 고생을 하면서
      왔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풍성한 하늘의 만나를 날마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면서 건빵만 씹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한밤중에 일어난 화재

      헬름시에서 어느 날 큰 불이 일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랍비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불을 끄고 있었다. 그 불은 한 30채 가량의 가옥을 태우고는 가까스로 동네 사람들의 힘에 의하여 진화되었다.
      사람들이 겨우 숨을 돌리고 둘러앉아 쉬고 있자니 랍비가 말하였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총일 거요. 우리들은 행운이었소."
      동네 사람들은 놀랬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에 불이 안 났더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 깜깜한 한밤에 어떻게 불을끌 수가 있었단 말이오."


      *보호받는 작은 새

      마르틴 루터는 어느날 저녁 작은 새 한마리가 나무가지에서 자고 있는 것
      을 보고 "이 작은 새는 이미 저녁 먹이를 마치고 자려는 중인데 참으로 저
      의 잠자리는 안전하구나! 저는 내일 아침에 먹을 것에 대하여서도 걱정하는
      것이 없고 내일밤 잠자리에 대하여서도 아무 염려가 없구나! 저는 다윗처
      럼 전능하신 자의 보호 아래 그 몸을 맡기고 아무 염려없이 작은 가지에서
      자는 것으로 만족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모욕하는 작은새가 아닌
      가"고 하였다는 것이다.
      루터는 작은 새 한마리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새를 보호하
      시듯 자녀들을 또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고 한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보은(報恩) 하는 마음

      보스톤 해변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 아래 모여들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다.
      많은 이들이 분을 내며“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반응이 달라졌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 남게 되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갈매기였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이제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장군의 행동은 겸손하게 감사를 표현한 단순한 행동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새우 한 조각 조각마다 하나님과 갈매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 헤드 쉬링크(Headshrink)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은 능히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잘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면서 자기로부터 차 하나님을 축출해 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찾아온 불청객이 있다. 그것은 ㅂ로 고독과 번민, 절망과 무기력이 찾아와 그들의 하나님같은 머리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잘난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터질 것 같은 머리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신의학 용어로 말하면 쉬링크(Shrink)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오그라들다""줄이다" 또는 "비운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바로 정신과 병원을 찾는 이유는 머리를 좁히기 위해서,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남미 페루에 살고 있는 지바로라는 종족이 여러 가지 약품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의 두개골을 줄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헤드 쉬링크라고 했는데 그 말을 정신과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잘난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해 지고 고민거리로 비대해지면 터질 것 같은 그들의 머리를 비원주는데 그것을 줄여서 쉬링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영어로 "헤드 쉬링커(Headshrinker)"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골 비우는 사람", "골빈 사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골이 꽉찬 사람에게 가서 골을 비워달라고 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꽉찬 골을 비울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골빈 사람이 될려면 한 번에, 완벽하게 할 수 있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처방까지 내릴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예수를 믿어 그 분을 내 왕좌에 모시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밝고 명랑한 삶을 회복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예수

      남북 전쟁이 끝난 수년 후 일리노이주의 어떤 농부는 테네시주 내시빌에 있는 군인묘지를 가끔 방문하면서 일년에 한번씩 묘를 돌보고 꽃을 심는 등 헌신적 노력을다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묘인가?"고 물어 보았더니,
      "아닙니다. 그는 바로 우리 마을에 살았어요.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일곱명의 아이가 있었고 처는 허약했습니다. 나 없이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고 식구가굶주림에 허덕일 것이 두려워 징병을 기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때
      문에 공포에 싸였으며 내가 출두해야 할 바로 그날 이웃에 사는 소년이 찾아와서 나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겠다고 제의하면서 그는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으니 나를대신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기어이 그는 출전하여 치카만카에서 부상하여 이곳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묘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서
      는 묘석에다 그의 손가락을 잘라 쓴 거칠은 비명 "그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노라"를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엡 5:2)


      *자비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만 남북전쟁 중 링컨 대통령만큼 너그러움을 자주 베풀어 준통치자는 역사상 없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군기를 어긴 자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공소는 지난 2년 동안의 전투 결과로 링컨은 이 문제를 세심히 연구하였다. 이러한 공소 전문(전문)은 국방성에 수백통이나 서류로 철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 누구의 처형을 중지하라."
      이 모든 공소는 그의 부하 특히 국방부 장관이 도울 것을 거절한 후 마지막으로링컨에게 의뢰되어 오는 것이었다.
      링컨의 변명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전선에 있다면 총을 버리고 도망칠는지 모르지."
      "하루종일 어려운 일에 시달리다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든가 혹은 용서를 한다
      는 일을 발견하면 그것은 나에게 평안한 기분을 주는 것입니다."
      "펜을 약간 움직이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을 죽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러분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총살형을 선도당한 외아들의 늙은 아버지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찾아왔다.
      링컨 대통령은 늙은이에게 붓틀러 장군으로부터 온 전문을 보았다. 그 전문의 내용은,
      "군대의 규율을 완전히 파괴한 이자에 대한 군법회의의 판결에 간섭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 전문을 읽고 난 늙은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울었다. 갑자기 링컨은 펜을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붓틀러 사령관에게, 욥 스미스는 나로부터 명령이 있을 때까지 총살하지 마시오."
      그의 아버지는 안절부절하였다. 다음 명령이 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물었다. 링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과 나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은 나로부터 총살의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는 므두셀라(노아의 홍수이전 사람으로 969세까지 산 사람, 창세기 6장 25절 참조)보다 더 오래 살 것입니다."
      입초근무 중 졸았던 탓으로 수감된 윌리암 스캇트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순시를하는 도중 링컨 대통령은 그를 보자 인자한 태도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아, 너는 총살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일어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나는 믿는다. 그러나 너 때문에 나는 퍽 골머리를 앓았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네가 어떻게 하여 나의 빚을 갚을 것인가 하는 것일세."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젊은 병사는, "저당으로 666달러 정도면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병사로서 너의 임무를 완수하면 그 빚은 갚게 되는 거야."라고 링컨은 말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않는 성도는 주님이 주신일에 충성된자이다.
      (역대하 39:9, 시 78:38)


      하나님

      연소한 동방의 어떤 임금은 현명하고 선량한 왕이 되리라 마음먹고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려 하였다.
      그는 온 나라의 현인을 모아 "모든 지혜를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여 그것을 스스로 읽고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인가를 배우리라 생각하였다.
      현인들은 이 힘드는 사업에 착수하여 30년 후에 그 일을 끝내었다.
      5,000여권의 책을 실은 긴 낙타의 대열이 궁전에 도착하자 "임금님, 여기에 모든 지혜가 가득 차있습니다."라고 현인들은 그들의 힘들인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벌써 중년에이른 왕은 많은 직무와 계획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형편이었으며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바빠서 이 많은 책을 전부 읽을 수 없다. 도로가져가서 분량을 축소시켜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책의 분량을 줄이는데 1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현인들은 자랑스럽게 500권의 책을 왕에게 가져가니 왕은
      "아직도 많아. 50권이면 족하다."라고 말하였다.

      대부분의 현인들은 지루하고 힘드는 일에 지쳐 죽어갔고 그들의 계승자가 10년을더 소모하여 줄인 50권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지금에는 왕도 늙고 피로하였기에 "너희들은 그것을 한 권으로 요약하라."
      5년 후 고귀한 노력의 결정인 한 권의 책을 왕에게 진정하러 왔을 때 이미 때가늦어 왕은 죽음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드셨나를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한 지능과 학식을 갖출 만큼 시간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독생자(독생자)를 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가장 최선의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 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부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 십만 명의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생명을 지키시는 주님

      어느 날 영국 궁성 앞에 요란스러운 교통 정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장갑을 낀 교통 순경이 오는 차량을 전부 스톱시켰습니다. 통행인도 전부 스톱이 되었습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발을 내려놓고 어떤 행렬이 지나가는가를기다렸습니다. 틀림없이 영국 여왕의 행렬일 것이라며 여왕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윽고 그 행렬이 지나가는데 어미 오리가 열 마리의 새끼 오리를 데리고 아장아장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오리들이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왕의 행
      렬처럼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차가 스톱을해야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험한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이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은 자기 생애의 전기를 쓰면서 '천직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아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죽음 속에서 주님이저를 건져 주셨던가? 저는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천직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승부의 미학

      가을하늘이 높아지고 구름빛이 솜털처럼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계절을 가을이라고 부른다.
      가을에 생각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이다.
      서울이라고 하는 삭막한 공간에 살면서부터 그런 낭만적인 추억들이 사라진 지 오
      래됐다.
      문득 야구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나의 발길을 끌었다. 아직도 스포츠를 사랑하
      는 팬들은 여전했다. 전과는 달리 질서의식이 많이 발전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구경을 온 부부도 아이가 버리는 휴지에 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표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느긋한 행복감마
      저 엿보였다. 어렵사리 표를 사가지고 스탠드에 가서 앉았다.
      경기가 시작이 되면서부터 열기는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경기하는 팀은 모두 프로팀이었고 그 팀마다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지방명칭이
      붙어 있었다. 관중들은 제각기 자기 도에 소속된 팀을 응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작 운동하는 선수들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열기를 올렸다.
      어깨가 빠져라고 피칭한 공을 힘껏 타자가 쳤다.
      백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행히도 공은 파울이 되어
      홈런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상대편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나
      왔다.
      승부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이성이 접근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임을 다시 한번 확
      인할 수 있었다.
      다혈질 관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심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어떤 관중은 열광한 나머지 웃저고리를 훌덕 벗어버리고 관중의 앞에 나와 응원을
      지휘하기도 했다.
      땀을 흘리며 선전하는 선수들에게 격려 대신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쳐 힘내라. 베터푸어(타자 바보)다"
      흥분된 군중들은 모두얼굴에 핏대가 서 있었다.
      야구란 참으로 재미나는 운동임을 알았다. 마치 인생처럼 엎치락 뒤치락의 연속이
      었다.
      이사후에 점수를 내기도 하고 끝까지 추적을 하여 역전극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좋은 공을 골라서 치고자 하는 타자의 예리한 눈동자, 어찌하든 교묘한 방법으로
      공을 던져 타자를 무력하게 하고자 하는 투수의 몸부림, 그리고 한 발짝이라도 앞으
      로 나가보고자 애쓰는 주자의 안간힘, 도루를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아웃당하는 도루
      꾼들,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가슴
      이 뭉클해진다.
      지역감정으로 들끓던 야구경기가 끝났다.
      열을 올리던 관중들도 선수들도 모두 허탈함을 공감하는 순간이 왔다.
      열기오른 관중석에는 홈런의 아름다운 환상만이 바람에 날려 딩굴고 있었다.
      운동장 한모퉁이에서는 이긴 선수들이 진편의 감독과 코치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운동의 유종의 미가 저런 것이구나 하는 흐뭇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승부의 미학이여 모든 선수들에게 큰 축복 있을지어다"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마지막으로 터벅 터벅 걸어나왔다.
      내 머리속으로 다시 시골 학교 운동자에서 있었던 운동회의 모습이 아름답게 떠올
      랐다.

      *기독교 신자 증가*
      <1>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10년 후인 1895년에 전국의 신도 수는
      746명이었던 것이 1년 후인 1896년에 8,496명, 1900년에는 18,081명으로 급속도로
      증가되었으며 현재 한국교회의 신도 수는 약 960만명에 달하고 있어 기독교 전래
      근 100년 동안 무려 10,000배가 훨씬 넘는 세계적인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P.10)

      <2>
      1900년에 전 인구의 0.9%가 신자였으며 1910년에는 1.62%, 1920년에는 1.72%,
      1930년에는 1.93%, 1940년에는 2.13%, 1950년에는 4.1%, 1960년에는 6.4%, 1980년
      에는 22.6%로 나타났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 P.10)


      *사랑과 정성이 결여된 카드

      카드 동서 비교
      우리 한국의 연하장(年賀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된 글귀는 천편일률적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나 축성탄(祝聖誕), 그리고 그 말의 영어 표현인 뉴 해피 이어나 메리 크리스마스가 고작이다. 그러기에 자기 감각에 맞는 그림이나 디자인 위주로 카드를 고른다. 한데 미국 사람들 카드 고르는 걸 보면 카드에 적힌 글귀의 내용이 자기가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들어맞은 사연인가 여부로 선택을 한다. 그만큼 카드에 적힌 글귀가 다양하고 세분화돼 있으며 개성적이다. 우리 나라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롭지가 않다.
      병원에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외국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일선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선물이나 호의에 사의를 표하는 글귀 등 내용이 다양하게 유형화돼 있어 자기의 사연에 맞는 글귀를 고른다. 생일 축하 카드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딸에게, 할머니가 손자에게, 약혼자로부터 미래의 아내에게, 제자가 옛날 소학교 스승에게, 심지어는 '다섯 살 맞는 딸에게'라고 세분돼 있기도 하다.
      이런 우스갯 이야기를 외지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아가씨가 가게에 들어 '오로지 당신에게만(Only to you).....' 하는 글귀의 카드만을 수십 장 골라 사자, 가게 주인이 "얼마나 많은 오로지 당신입니까" 하고 감탄하는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그걸 받아든 놈팡이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하고 오금을 저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번져가는 복제문화(複製文化)의 희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단조로운 우리 한국의 카드보다는 편리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활자로 사연을 유형화시킨 데다가 자신의 사인 하나만으로 복제 사연을 사유화한 것에 불과하기에 인간미가 결여된다. 보내지 않고 또 받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나 이렇게 인간의 사연이나 인정이 복제화돼 나간다면 세상 살 맛이 자꾸 반감돼 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이렇게 사연이 세분화돼 나간다면 앞으로는 "당신과 만나게 되어 세상을 다시 사는 느낌입니다"느니, "다음 데이트가 기다려집니다", 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여, 당신의 사랑과 헌신을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쇄된 카드가 나오게 될 것이요, 이런 은밀한 사적인 사연을 복제화된 카드로 받아들었을 때 액면대로의 정감이 전달될 리도 만무하다. 아무나 사 입을 수 있는 기성복 사입듯 상품화된, 그래서 퇴색된 정감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올해 나온 연말연시 카드는 예년에 비겨 사연이 다소 다양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복제문화의 통폐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짤막한 사연일망정 친필로 쓰는 작은 정성을 잊지 말았으면 싶다.



      * 개국과 의료.교육사업의 윤허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
      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
      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
      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
      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면
      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고자 혼신
      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
      (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
      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
      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
      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
      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
      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
      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
      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
      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
      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
      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
      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
      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
      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
      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
      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
      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
      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
      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
      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
      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
      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
      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
      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
      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
      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

      이른 새벽에 인근 공원이나 약수터나 운동장에 나가보면 직립(直立)해서 걷는 사람 틈에 역립(逆立)해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걷는 사람 틈에 뒷걸음질로 걷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왜 사람은 역립해 걸어선 안 되며 뒷걸음질해서 안 될 게 뭐냐 하는 이 세상의 상식에 대한 반역의 성토장만 같다. 그러하듯이 시계바늘도 오른쪽으로만 돌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시계가 생긴 이래 수백 년 동안 오른쪽으로만 돌아 클라크와즈(clockwise:시계방향)란 말까지 생겨나기까지 했는데, 왼쪽으로 돌린대서 무슨 큰 이변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아프리카 대륙의 끝 케이프타운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 중앙공원에 구경갔을 때 훌륭하게 만들어놓은 석조(石造)태양시계를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것은 시계의 문자판에 3시가 왼쪽에 있고 9시가 오른쪽에 있었다. 곧 시계바늘이 왼쪽으로 돌게 돼 있는 거꾸로 가는 시계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최초의 시계는 해시계였을 것이다. 적도의 북쪽에 위치한 북반구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떠 남쪽으로 돌기에 가운데 꽂아 놓은 해시계의 막대그늘이 오른쪽으로 돌지만, 남반구에서는 북쪽으로 돌기에 그늘이 왼쪽으로 돈다고 한다. 나팔꽃 줄기도 북반구에서는 오른쪽으로 감아 도는데 남반구에서는 왼쪽으로 감아 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른쪽으로 도는 시계는 이 지구의 절반에 불과한 북반구문명의 소산일 뿐이다. 만약 거꾸로 도는 시계를 만들어 남반구에 팔아먹는다면 일확천금 할 것이 아닌가.
      역시계(逆時計)는 비단 남반구에 들어맞는 논리만은 아니다. 모든 육상경기, 빙상경기, 사이클, 모터 경기가 왼쪽으로 돌고 야구 베이스도 왼쪽으로 돌게 돼 있다. 사람이 맨 첫발을 디딜 때 본능적으로 왼발부터 나오며, 말이나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때도 왼쪽에서 탄다.
      자동차 운전석이 왼쪽인 것도 인간의 좌향(左向)능동성과 무관하지가 않다. 바구니를 짜거나 뜨개질을 할 때도 왼쪽으로 얽고 짜나가며 맷돌을 갈때도 왼쪽으로 돌린다.
      고스톱의 화투놀이도 짝을 왼쪽으로 돌린다. 시계도 왼팔에 차고 반지도 왼손가락에 끼지 않는가. 인간의 활력원인 심장이 왼쪽에 붙어 있어서인지 좌향이 우향보다 능동적이다. 시계만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그래서 불합리하다 할 수가 있다.
      또한 역시계의 심리적 효과도 대단하다. 늙은이에게는 젊음으로 역행하고 싶은 잠재의식을 충족시켜주고, 젊은이들에게는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체제에 대한 반항과 반골심리를 충족시켜준다. 여성에게는 남성우위 사회에 대한 반감을, 억눌린 사람은 억누르는 사람에 대한 배리감을 이 역시계가 대행, 위안시켜준다. 어린이들에게는 마냥 요정의 나라 시계만 같아 신나게 해주고.
      얼마 전 누군가가 거꾸로 가는 시계를 발명해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올림픽에 밀어닥칠 남반구 주민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고, 더우기 이 역시계의 논리와 심리학이 잘 먹혀 든다면 관광상품으로도 각광받을 받을 만하다.
      다만 역행은 시계 정도에서 그쳐야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도의나 양식 같은 것까지 역행해서는 물론 안될 일이지만.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랑 병

      다정(多情)도 병이라는데 하물며 지나친 너무 사랑이 병이 안 될 수 없다.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남주락적(南州樂籍)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첩(妓妾)과 이별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했던 터라 기첩은 오로지 임만을 사랑할 수 있게끔 아무 누구도 자신을 유혹할 수 없게 해놓고 떠나라고 안달을 했다.
      그리고 촛불을 건네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롯하여 유방이며 얼굴이며 온몸을 어느 한군데 남기지 않고 화상을 입힐 것을 애원했고 또 그렇게 상처를 입혔다.

      '너무 사랑'이 가공할 피학증(被虐症)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가극(歌劇)으로도 곧잘 상연되고 있은 12세기의 엘로이즈아벨라르의 너무 사랑도 병이 되고 있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것만으로 사랑을 충족 못 해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거세시켜가면서까지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그 후 수도승과 수도녀가 되어 사후 나란히 매장되고 있다.

      근년에 인상적이던 너무 사랑병으로 '인형의 집'의 주연으로 유명해진 여배우 리브 아르망과 명감독 잉그마 버그만의 격렬한 사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위치한 연중 겨울인 불모의 무인도에 단 둘이만을 위한 집을 짓고 도피,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사랑을 했다.

      "외계로부터 문을 닫고 친구도 친척도, 그리고 과거며 추억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별, 행복과 소유욕을 충족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각기 "고독을 슈트케이스에 담아 들고....."

      이별의 길을 떠나가고 있다.
      너무 사랑이 중증이 되면 별의별 변태로 다 나타난다.

      변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너무 사랑(too much loving)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성이 적지않다.
      지금 미국에서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라는 이 증후군을 다룬 책이 40주간 베스트 셀러로 2백만 부를 돌파하고 있다.

      알콜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환자수 이상으로 많은 여인이 이 너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 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한다.

      이 너무 사랑병의 원인은 결손가정-부모가 없거나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없이 자랐거나,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여인들일수록 이 증후군에 걸리기 쉽다 한다.
      너무 사랑병 환자는 버림받는다는 것이 최대의 불안이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피학으로 자신을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만들려 하기도 하고 지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상대를 그 결함을 미끼로 잡아두고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채우려 들기도 한다. 헌신적일수록 아름답다는 사랑도 한계가 있는 것이 되니 무상하다.

      한계애정량(限界愛情量)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도 없는 것일까.


      향기나는 미끼

      깊은 사색의 글을 많이 남긴 알랭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한 노파가 바람에 꺾여진 꽃가지를 세워 받침대를 대고서 실로 묶어주는 것을 창 너머로 본다.
      꺾어진 꽃가지를 묶어준다 해서 살아날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노파는 꽃의 생사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묶어주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알랭은 꽃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거기에 인간성을 투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오묘한 심성을 보아낸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植物)에 투사되는 이 같은 인간주의 플랜트와 휴머니즘을 합자(合字)하여 플랜튜머즘이라는 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인간주의가 벌레나 새나 짐승에 투사되었을 때는 애니멀류머니즘이 되고 물론 사전에는 없는, 자신의 사색을 위해 자신만이 쓰는 말이다.

      수년 전 미국 중부의 과수원업계에서 가지가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를 열리게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사과나무를 학대하는 일이라 하여 자숙하는 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플랜튜머니즘이라는 말을 찾아내어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지(大地)'의 작가 고(故)펄 벅 여사에게 한국 여행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물었을 때의 대답이 생각난다.
      소달구지에 짚단을 싣고 소를 모는 한 농부가 역시 짚단을 가득 지게에 지고 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라 했다.
      등짐을 소달구지에 얹고 갈 수도 있을 텐데, 소의 노력(勞力)을 감안하여 굳이 지고 가는 그 농부의 애니멀류머즘을 예리하게 보아낸 것이다. 그 등짐을 얹어서 소가 힘이 들지, 안 들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힘이 들 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아름답느냐는 것이다.

      황희(黃喜)정승이 길을 가다가 밭을 갈고 있는 두 마리의 소를 보고 농부를 불러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귀엣말로 대답했다는 고사(故事)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소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은 애니멀류머니즘의 아름다운 발로를 그에서 보는 것이다.
      근대화는 이 같은 아름다운 심성마저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플래스틱으로 꿈틀거리는 가짜 미끼를 만들고 고기에게까지 사기치는 것도 뭣한데, 이제 멀리까지 향기를 풍기게 하여 고기떼를 유인하는 가짜 미끼가 나왔다고 한다. 고기에게 사기를 치건 말건 낚아올리는 결과 측면에서 피장파장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기 입장에서 보면 죽고 사는 중대사인데 사기까지 당해가며 죽는다는 것이 너무너무 억울하여 얼마나 사람을 원망하겠는가.
      낚시는 본질적으로 사기이긴 하지만 유혹하는 먹이쯤은 실물이게 하는 것이 애니멀류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원격탐사(遠隔探査)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가시광선,적외선, 마이크로파에 의한 사진 촬영등에 의하여 원격 대상물의 정보를 수집하여 해석하고 거기 필요한 정보를 읽어 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이더와 같은 별도의 파장 영역을 사용하여 지하의 사물이나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는 다른 실물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는 기술로 까지 발전했다.

      1981년의 일이다.

      미국의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는 원격 탐사기구를 사용하여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옛날에 흘렀던 큰 강을 발견했다.
      이로써 그곳이 지금은 50년에 한번 비가 올까 말까하는 지역이지만 옛날에는 비가 많이 왔고 사람들이 모여 문화생활을 하던 곳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결론은 땅 밑에 감추어져 있던 하상을 실제로 발굴해 봄으로써 사실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히 증명이 되었다.
      발굴된 지하의 하상에서 달팽이 껍질이 발견되고 손도끼를 위시하여 석기시대의 유물이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기술이 얼마나 발달이 되어 있겠는가?

      오늘날의 고고학계는 이 원격탐사기라는 첨단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가 미처 상상할 수 없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여기 고대인의 무덤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구태여 삽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이 원격 탐사기술을 이용하여 고분속에 있는 물건들을 소상히 아는 것은 초보적인 기술에 속하고 그 고분벽화의 완전한 모습까지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물감의 재료가 무엇이라는 것도 확연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땅에 보물을 숨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적국의 땅속에 무기가 얼마나 어떻게 숨겨져 있으며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운일인 것이다.
      못난 인간들의 기술로도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게서 우리의 영적인 내면세계를 완벽하게 통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 세계를 완벽하게 보이고 있는 상대를 향하여 거짓을 늘어놓고 도는 겉다르고 속다른 짓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보시고 그렇게도 심한 반응을 보이신 이유를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살면서 원격탐사의 기술까지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중심을 환하게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앞에서 보다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세상을 사는 지혜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앟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않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유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고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고,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러운 세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가인의 마음

      내 인격속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우리는 가인을 악한 사람이고 아벨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산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아벨과 같이 선한 의로움만 갖고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희망일뿐 내면에 잠겨 있는 또 다른 내 속에는 추악한 가인의 속성을 갖고 살아간다.
      즉, 우리의 인격속에 아벨과 가인의 피가 공존하여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가인과 아벨의 두마음이 내 자아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다.
      아벨의 마음만 갖고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또 내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을 느낀다.
      얼마전 지존파라고 하는 악당들이 세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하여 침을 뱉고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고 흥분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들과 같은 적개심과 살의가 가득하다면 감히 누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인가?
      가인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앞에서 분노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도 간음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돌을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율법으로 잘 포장된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있었던 것을 그들은 순간 알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섰던 군중들의 마음에도 가인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인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도 그렇게 자신의 이중성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인하여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영혼이 건강한 자라 할 것이다.
      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에 이끌려 사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심각한 병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애통해 한다. 가인의 마음이 내 속에서 꿈틀대지 않도록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기를 힘스게 된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인을 이기기 위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의미있는 존재다.

      에베레스트 산은 해발 약 8,000미터라고 한다.그리고 필리핀 해구는 수심이 약 8,000미터정도이다,만일 잠수부가 지구상에서 가장 낯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몰 수 있다면 그 16키로에 달하는 관경은 사람이 정상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엄청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태양 위에서서 지구를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지구가 당구공처럼 표면이 밋밋할 것은 분명하다 그 위치에서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깊은 해구나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가 되는 그것들이 우주에서 볼때는 아무런 문제점이나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산처럼 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필리핀 해구와 같이 낮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차이점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무 차이점이 없이 다만 그저 인간일 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고자질하는 양심(죄책감)

      19세기 미국의 작가 애드가 엘렌 포우는 그의 작품 [고자질하는 양심]의 주인공을 통하여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양심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 자기 집 지하실에 묻었는데,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온몸은 식은 땀으로 촉촉히 젖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도 계속 들려오는 그 섬뜩한 고동치는 소리를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 소리가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인 것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다.

      양심은 헬라어로 인데, 이는 사람이 자기와 함께 나누는 지식, 즉 자아 의식 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람 모두를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 해결치 못한 죄책감은 병을 불러 온다.

      *양심

      한 여인이 빨간 차만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빨간 색의 차만 보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에 결국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신혼 초에 남편이 징집갔을 때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물론 관계는 그 한번으로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 그 일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그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일이 무마되고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빨간 차면 보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psycho- somatic- illness)나타난 것이다. 현대인의 앓고 있는 질병의 85%가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이라고 한다.

      *사(私:사사로이 할 사,간통할 사)와 사(邪:간사할 사,희롱할 야,)

      私는 곧 邪와 통한다.
      邪는 곧 악(惡)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대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우리의 마음에 사(私)라고하는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흐려지고 만다.
      독선,아집,자만,이기,독단등은 私에서 생기는 악한 종자들이다.

      *맑음의 상징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
      시냇물에 깨끗히 씨기운 하얀 조약돌,
      갓난아기의 티없이 영롱한 눈동자,
      깊은 산속의 하얀 눈,
      그리고 남의 고통을 보고 눈물 흘리는 깨끗한 눈이다.

      *용모의 美(외형)

      용모의 미는 품성의 미에 뒷받침되고, 외형의 아름다움은 정신의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올핸 생명과 향기를 발할 수 있다.

      *마음

      마음은 매우 깊은 우물과도 같다. 바닥에 있는 두터운 침전물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거기에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하지만 격렬한 감정이라는 바람에 의해 그 우물이 휘저어질 때, 너무나도 보기 흉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오물이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 올라 표면에 나타난다. 분노, 미움, 시기, 질투, 육욕,잔인함, 복수,등 심지어 살인까지 나타난다. 그러한 가장 민감한 순간들마다 악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 가능성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문

      유명한 예술가 홀맨 헌터라고 하는 분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성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 밖에서 한편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편 손으로는 계속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의 문밖에서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하여 어떤 때는 이성을 통하여서 때로는 경험을 통해서 슬픔, 기쁨 등, 때로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의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문 밖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어야 하며 다른 이가 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 문의 주인은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주님의 문 두드리시는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어서 주님께서 마음 속에 들어오시어 자신과 같이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쇠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나 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멸망의 책임도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계시는 에수님

      소련의 쟈부르스키라고 하는 청년은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깡패 출신의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자, 소련사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손해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한 번은 군대 상관이 그를 불러서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만 부인하면 계급도 올려주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쟈부르스키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상관이 쟈부르스키를 불러놓고 자기의 과거 경험담을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 부대에 너와 비슷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지. 그는 목에 십자가를 항상 걸고 다녔어. 내가 한번은 그를 불렀네. 그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오래 했다네. 이야기를 다 끝마치자 그 친구는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끌러 탁자 위에 놓더니 다시는 십자가를 목에 걸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공산당 입당원서를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쓰고 공산당에 입당했다네. 그 후로 아주 자랑스러운 공산당원이 되었다네 "
      상관의 설득은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쟈부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도 목에 건 십자가를 벗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제 마음에 계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저도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하면 제 생명에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목에 건 십자가는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어도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벌금

      어느 유대인 회사에서 유대인 사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원이 회사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다. 유대인 사장은 성을 내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그 회사의 간부가 유대인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상담을 청하였다.
      번호사는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쳤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오. 만일그가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하더라도 법망에 걸려서 그가 기소된다면 반드시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며 안되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다운 방식이 아니오."라
      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감방에 들어가 버리면 돈을 돌려 받을 수 없다. 유대의 법률로는어떤 사람이 돈을 훔쳤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고서 돈을 돌려주어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내서 감옥에 집어넣느니 보다는 먼저 돈을 돌려받고 거기에 벌금을 물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령 "어떤 사람이 백만원을 훔친 경우, 랍비의 재판에 걸려유죄가 되고 벌금을 가하여 백십만원을 갚아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백십만원을 돌린 후에는 그는 전혀 전과가 없고 결백한 사람과 같아진다.
      도난당한 쪽에서 저 놈은 돈을 훔쳤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 욕을 한쪽이 나빠진다.
      벌금은 대체로 20퍼센트 이상이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규칙이 있다. 이를테면 무엇을 훔쳤느냐 하는데 따르기도 하고, 그것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든가, 밤에훔쳤다든가, 낮에 훔쳤다든가, 아침에 훔쳤다든가 하는 갖가지 조건에 의하여 등급이 달라진다. 탈무드에서는 말을 훔쳤을 경우 벌금은 굉장히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말을 사용하여 돈을 벌 수가 있고 도난당한 쪽은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트럭이겠는데, 이경우는 4백 퍼센트 가량의 벌금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나귀쪽이 말보다 벌금이 싸다. 말 쪽은 순종을 잘해서 훔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훔친 사람의 입장도 참작된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20퍼센트 정도의 싼 벌금이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벌금이나 돈을 지불치 않는다든가 금리를 물지 않는다든가하면 노동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는 감옥에 집어넣게 되지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비밀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흔히 우리는 여러 사람이 알아서는 안될 이야기를 남의 귀에 가까이 대고,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한 것이 얼마 안 가서 여러
      사람이 다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서기 25년 경 중국의 후한시대에 양진이라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높은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태수라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관하의 어떤 관리가 찾아와서 전에 신세를 많이 입었으니 그 사례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뇌물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자 양진은 그 돈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완강히 사절했다. 뇌물을 가온 관리는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양진에게 돈을 받도록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했다.
      "지금 밤도 깊은데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어서 받아 두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양진은 조용하게 그러나 힘있게 저 유명한 양진의 사지, 즉 "하늘이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을 하고 끝내 그 뇌물을 받지 않고그대로 돌려보냈다.
      뇌물을 가지고 온 관리의 말과 같이 두 사람만이 아는 일이라고 좋지 않은 일을
      알면서 할 것이 아니다. 더우기 이 양진의 교훈에서 중요한 것은 "나도 안다"고 하는 말이다. 이 "나도 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양진의 건전한 자세를 이름이다.
      이러한 양심적인 양진은 점점 높은 벼슬자리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양진은 그 고결한 성품 때문에 환관들의 미움을 샀다. 환관들은 양진에게 뇌물을 주고 마음대로하려고 했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므로 결국은 모략으로써 그를 관직에서 추방하였
      다.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양진이 죽었을 때, 그의 청렴결백하고 덕이 높은 데 감탄하여 천하의 명사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를성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어디서인지 큰 새 한마리가 그의 무덤앞에날아와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사랑

      문학은 허구의 세계를 그리지만 그것이 인간현실의 재현일 수 있기 때문에 강한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속의 인물은 곧 현실의 우리의 분신이기도 한 것이다.
      첫째, 전당포이다. 이 할멈은 무고한 피해자지만 그 비정하고 다대한 착취를 통하여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보복을 단행하게 유도하므로 해서 피해자학 이론이나 사회윤리학으로 볼 때 "범죄유발범"이다. 흔히들 이 노파와 같은 인간을 수전노나 황금의 노예라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자"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다만 황금을 자기의 유일한 절대 주인 또는 절대 가치(목적)로서 경배하는 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라스꼴리니꼬바"라는 허무사상에 사로잡힌 청년 법학도이다. 그는 사회의 부정을 시정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허용된다는 허무주의적 초인사상을대표하는자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즉 평범한 인간과 천재적인 두 인간군으로 나누고 범인은 기존도덕과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나 비범인은 그러한 도
      덕과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확신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마땅히 허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범인 자신은 사회의 기생충과도 같은 노파를 살해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행사는정당하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실상 노파를 살해한 직후 그는 자기 철학과 행위간에
      극심한 갈등을 통감하게 된다. 그는 지나친 피해의식과 영웅주의에 사로 잡힌 돈키호테식 과대망상 주의자이며 그런 유형을 우리는 오늘날 소위 인질범들에게서 쉽게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이기적이고 현실적 향략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쇼냐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이다. 전자는 자기처를 독살시키고 하녀를 능욕하여 자살케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나 결국 자살로 막을 내리며 후자는 딸의 몸을 팔아서까지술을 마시는 비열한 위인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섹스와 알콜이 난무하는 소
      돔의 거리와 그것만을 탐닉하고 기생하는 지저분한 군상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있다.
      네번째는 크리스찬 "쇼냐"이다. 그녀야말고 작가가 창조한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며 구원의 여상이다. 빈곤과 불행한 가족에게는 희생의 제물이요 살인한 청년에게는사랑의 천사이다. 실로 이것은 허무주의와 무신적 철학에 대한 신앙의 승리이며 사랑의 쾌거이자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를 향하여 내가 뿌리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야말로 너 뿐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전체까지 포괄하여 전인적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묘약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15)


      * 성실

      무슨 일에나 진실성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비록 장난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일 때와 같은 성의로 해야 한다.
      일찌기 공자도 어린이들이 노는 자리를 지나다가 그 아이들의 진실된 놀이 모양에다소 무례한 짓이 있었으나 감탄했다고 하였거니와 이와 비슷한 어사 박문수에 관한이야기가 있다.
      박문수는 영조때의 이름난 암행어사로서 신분을 감추고 팔도를 두루 순회하면서군수와 그 밖의 지방관리들의 어질고 우둔함과 민정을 잘 살펴서 정치에 크게 공을끼친 사람이다.
      언젠가 박어사가 남도 지방을 암행할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닿아 서당을 찾아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수십명의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고 있었다. 박어사가 유심히 보니, 한 아이가 군수로 뽑혀서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자못 엄숙한 태도로 좌우에 두 아이를 관졸처럼 세워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 하나가 그 앞에 나와서 공손하게 절을 한 뒤 하소한다.
      "군수님, 저는 지금 제가 갖고 있던 새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대단히 흥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만약 저런 하소연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군수된 아이의 대답을기다렸다. 이윽고 이 하소연에 군수된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를 놓쳤다. 그 새는 산으로 도망갔을 것이 틀림없으니, 너는 지금 새를 감추고있는 산을 잡아오너라!" 하고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군수놀이 하는 그 아이 앞에 나아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색을 하면서 큰 소리로, "이 웬놈이 함부로 관청에 들어가서 군수를 모욕하느냐? 이놈들아! 이자를 포박해
      서 옥에 가두어라!" 하고 관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관졸이 된 아이들이 달려와서 박어사를 잡아 뜰 한 모퉁이에 있는 뒷간에가두었다. 박문수도 비록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그 하는 짓이 하도 진지해서 조금도나무랄 생각이 없어 몹쓸 냄새가 나는 뒷간에서 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아까 군수가 되었던 아이가 박문수를 찾아와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는 무례한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들이 원님놀이를 하였는데, 비록놀이 일지라도 태도를 진실하게 하는 버릇을 길러 뒷날 법을 그대로 엄수해야 하겠기에 존장을 이런 누추한 곳에 가두었던 것입니다."하고 빌었다.
      박어사는 그 모습이 또한 진지한데 더욱 감탄해서 그 아이를 자기 친자식처럼 기르기로 결심하고 교육시켰다. 박문수가 본 대로 그 아이는 뒷날 정승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박어사의 눈에 들었고, 그 뒤 더욱 노력해서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 술

      <탈무드>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 하는데(창 9:20-27)사탄이 찾아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지요"하고 대꾸했다. 사탄은 다시 "포도란 어떤 나무지요?"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오. 그리고 이것을 발효 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라는 것이 된다오."했다. 그러자 사탄은 "그렇게도좋은 것이라면 나도 거들기로 하지요."했다. 노아는 사탄을 고맙게 여겼다.
      사탄은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 흘려서 비료로했다. 그렇게 하여 자란 그 포도 열매로 술을 담갔다. 그리고 나서 노아가 술을 마셨더니 먼저 양처럼 약해지고, 좀더 마시니 사자처럼 강해지고, 좀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좀 더 마시자 원숭이처럼 떠들고 돌아다녔다.
      하나님께서 가장 의인이라고 하신 노아까지도 이와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만일 인간이 마시면 어떤 일이 되는지 알리라.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나간다."


      * 인간

      블란서 태생 과학자이며 소설가였던 야달베르트 폰 사밋소의 "페어테 슐레밀"이란소설이 있다.
      어느 항구에서 "슐레밀"은 회색 외투를 걸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얇은주머니에서 쌍안경도 꺼내고 양탄자도, 승마용 말도 꺼내는 것이었다. 사나이는 "슐레밀"에게 다가와서 "당신의 그림자와 이 마법의 주머니와 바꾸자"는 흥정을 제의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슐레밀은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 만다. 사나이는 "슐레밀"의 그
      림자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고 훌쩍 떠나 버린다. 정신을 차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슐레밀"의 그림자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노파나 여인네와 꼬마들의 의혹과 놀림 때문에 곤욕을 치르어야 한다. 그는 곧 그림자를 판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를 후회한다. 두문불출 방에 처박혀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촛불을 방 전체
      에 켜 놓고도 도무지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몇 번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림자의 비밀이 탄로되어 실연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그는 그림자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깨닫고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림자를 되찾으려 한다.
      허나 악마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이번에는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줄곧비웃고 유혹하는 악마의 간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마법 지갑을 던져버린다. 그리고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노동을 통하여 번민으로부터 해방받으려 한다. 우연히 그는마법의 장화를 사게 된다. 그는 거리를 단축하는 신비의 장화를 신고 이집트의 피라
      밋을 보고 구라파와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자연의 연구에 몰두하게된다. 그리고 끝에는 친구 "사밋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 나의 벗이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그다음에 돈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슐레밀"이 팔아버린 그림자, 그리고, 이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나 영원히 찾을 수 없었던 그림자, 그것이 없음으로 해서 인간 사회에서 백안시 당하고 사랑의 저버림을 당하는 그 그림자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는 것이나 우리 인간 본연의 소유물인 것이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무시하면 아쉽고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이 세상에는 흔히 있다. 그것은 조국일 수도 있으며 신앙이며 양심이며 눈물일 수도 있다.


      *인생

      어떤 배가 항해를 계속하고 있을 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지며 폭풍우가 일어나 배는 항로를 벗어나고 말았다.
      아침이 되니 바다도 고요해지고 어느 아름다운 섬이 곁에 있었다. 배의 닻을 내리고 잠깐 쉬기로 했다. 그 섬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흐느적거리고 맛있어 보이는열매가 달린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으며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다섯 명씩 일행이 되어 나뉘었다.
      첫째 일행은, 그들이 섬에 간 새에 순풍이 불어 배가 떠나 버릴지도 모르므로 섬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의 목적지로 빨리가고 싶다고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에 남았다.
      둘째 일행은, 서둘러 섬에 상륙하여 향기로운 꽃냄새를 맡고 녹색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고 원기를 회복하자 곧 배로 돌아왔다.
      셋째 일행도 상륙했으나 너무 지나치게 오래 섬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순풍이 일면 배가 출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헐레 벌떡 돌아왔으므로 소지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들이 애써 잡아 놓았던 배의 좋은 자리도 잃고 말았다.
      네째 일행은 순풍이 불어 선원들이 닻을 감아올리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돛이 달리지 아니했다는 둥 선장이 자기들을 남겨두고 출항할 까닭이 없다는 둥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계속 섬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정말로 배가 항구를 떠나 가려하는데 문득 정신이 들어 황급히 헤엄쳐 뱃전에 올랐기 때문에 바위나 배둘레 같은
      데서 몸을 다쳐 그 상처는 항해가 끝날 때까지 낫지 않았다.
      다섯째 일행은 너무 먹고 지나치게 들떠 출항할 때 배에서 울리는 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숲속에 있는 맹수에게 잡아 먹히고 더러는 독이 든 열매 따위로 병에 걸려서 전멸해 버렸다.
      독자라면 어느 일행에 속했을 것인지 잠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배는 인생에 있어서 선행을 상징하고 있다. 섬은 쾌락을상징하고 있다. 첫 일행은 살아가면서 조금도 쾌락을 맛보려 하지 않았다. 둘째 일행은 쾌락에 조금은 젖었지만 자기들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닿지 않으면 안된다는의무를 잊지 않았다. 세째 일행은 지나치게 쾌락에 젖지 않고 돌아오기는 했으나 역
      시 좀 애를 먹었고 네째 일행도 돌아오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것이 늦었으므로 목지에 오기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떨어지기 쉬운 것은 다섯째 일행이다. 평생 허영 뿐인 것만을 위해 산다든지 장래일을 잊어버린다든지, 달콤한 과일 속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먹기도 한다.


      *인형-마음속이 비어 있는 사람의 비유

      중국의 고전인 대학이라는 책 속에 있는 이야기이다.
      문장이 어려서 여러 어린이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할 때이다. 바로 어린이들이 가장 기뻐하는 정월 명절이 가까왔을 무렵이었다.
      문장은 명절 때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부 시간에도 글에는 마음이 쏠리지를 않았다. 그저 즐거운 놀이나 그밖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을 마음 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르치는글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선생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기가 가르친 글을 알고 있는 지를 묻는 일이 가끔있었다. 이 날도 전례에 따라 그렇게 하려고 우선 종이에다 큰 글자를 하나 써서 여러 어린이들에게 보였다. 그것은 바로 쉴 휴자였다.
      선생은 쉴 휴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쉰다는 뜻의 글자인데, 어째서 이 글자를 쉴 휴라고 하는지 알겠느냐! 왼쪽의 인변은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고, 그리고 바로 오른쪽의 글자는 나무라는 글자이다. 이두 글자를 합친 모양이 다름 아니라,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이 된다."
      선생이 "알겠느냐?"하고 되묻는 말에 모두 알아 들었노라는 표정이었으나 그중 문장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선생은 휴자를 크게 쓴 종이를 감추고 문장 앞에 가서방금 가르친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그러나 문장은 손에 붓을 든 채 움직일 줄을몰랐다. 선생은 문장을 보고 물었다.
      "왜 쓰지 않느냐?"하고 말하자, 문장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 지금 막 내가 큰 종이에다 써서 보여준 것을 보지 않았느냐?"하고 선생이묻자, 문장은,
      "아니올시다."하고 고개를 흔든다. 선생은 다시,
      "뭣이! 보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너는 보았으나 잊은 것이 아니냐?"
      하고 말했으나, 문장은 여전히 "아니 못 보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선생은 화를 내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 종이에 쓴 근자를 보일 때, 너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이쪽을 보았는데"하고 곧 말을 이어서 다른 어린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모두들 "네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선생은 다시 엄숙한 어조로, "얘, 문장아, 보았으나 잊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보고서도 안 보았다고 하면 거짓
      말을 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나쁜짓이 된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문장은 역시,
      "아니예요. 보지 않았어요."하면서 울고 있었다.
      문장이 억울하다는 듯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응, 알았다. 보기는 했는데 보이지를 않았구나.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너는 글자를 향해서 보고는 있었으나, 머리속에는 딴 생각을 했으니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모양이다."
      이 말을 듣자 문장은 울음을 그치고 선생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만 돌리고 마음을 딴데 파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이 없는 인형과 같으니라."
      문장은 이때부터 공부할 때, 정신을 다른데 파는 일이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

      옛날에 덕망이 높은 한 승려가 있었다.
      불량한 아들 때문에 속을 썩고 고생을 하던 어떤 아버지가 그 스님을 찾아가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그는 그 아들이 도무지 아비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매사에 어긋나기만 하니 자기로서는 도저히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침식을 같이 하며 그 아들로 하여금 듣고 보고 깨닫는 가운데 스님의 감화를 받아서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생각끝에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이제 그 고약한 소년과 같은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갔다.
      처음 하루 이틀은 제법 얌전하게 굴던 그 소년은 또 다시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스님은 그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않았다.

      두 달의 세월이 흘렀으나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고 스님은 그대로 침묵을 지켰을뿐이다.
      그 불량자의 아버지도 차차 스님의 무관심에 대해 의심 뿐 아니라 불만을품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기약한 3개월이 지났다.
      이제 이 스님은 그 집을 떠나 절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불량자 아들은 꾸중만 매일 들으리라 생각했다가 뜻밖에도 잔소리 한 마디 듣지 않은 사실을 한편 다행하게 생각하고 한편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날은 특별히 밖에도 나가지 않고 떠나가는 스님을 전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님은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게 되었는데, 그는 그 불량자 더러 신들매를 좀 매줄 수 없겠느냐고 하였다.
      그 소년은 작별하는 이 마당에 그만한 봉사야 못하랴 생각하고 허리를 구부려 스님의 신들매를 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등이점점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소년은 놀라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손등에 떨어진 것은 스님의 눈물이었다.
      석 달 동안 그 불량한 소년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않은 그였으나 얼마나 밤낮으로 그 어린 놈을 생각하였으면 이별의 자리에서 그처럼 눈물이 쏟아졌겠는가?

      손등에 쏟아진 그 눈물 때문에 이 불량자는 뉘우치고 삶의 바른 길을 걷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기는 하면서도 이 말의 진실함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든 일에 있어 훌륭한 방법이다.
      방책을 아무리 열심히 강구하여도 정성이 부족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믿는다.

      신변의 위험이 겁이 나서 예수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잡아뗀 베드로를 돌아다 보는예수를 한번 상상해 보라.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다. 돌아다
      보는 스승의 정성어린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눈초리에 베드로도 감격하였으리라. 술책이나 권모는 사람의 참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정성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어느 인간의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 감격하지 않을 것인가?

      처세(處世)

      "좋은 단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날 중에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

      "정직한 자는 자기 욕망을 지배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는 욕망에 지배당한다."

      "타인의 자비로 사느니 보다는 가난한 생활을 하는 편이 좋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과 자기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거리가 있다."

      "세상에는 도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이 있다. 여행, 여자 친구, 부, 일, 술,수면, 약, 그리고 향료이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 되는 것 셋이 있다. 빵의 누룩, 소금, 망설임이다."

      "단지 안에 들어간 한 개의 동전은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만 동전이 가득찬 단지는조용하다. "

      "전당포는 과부가 가진 물건을 저당 잡으면 안된다. 여자나 아이가 가진 물건을저당 잡아도 안된다."

      "명성을 구하여 달리는 자는 명성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렇지만 명성으로부터 피해 달리는 자는 명성에 붙잡히게 된다."

      "물건을 취하지 않은 도둑은 자기를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의 목적은 기쁨, 회장자의 목적은 침묵, 강의의 목적은 듣는 일, 사람을 방문할 때의 목적은 일찍 도착하는 일, 가르치는 일의 목적은 집중, 금식의 목적은 있는 돈으로 자선하는 일."

      "인간에게는 요긴한 부분 여섯이 있다. 그 중 셋은 자신이 지배할 수 없지만 셋은인간의 힘으로 아무렇게나 되는 부분이다. 눈, 귀, 코가 전자고 입, 손, 발이 후자다."

      "당신의 혀에게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하는 말을 힘을 다해 가르치라."

      "장미꽃은 가시틈에서 자란다."

      "공짜로 처방전을 쓰는 의사의 충고를 듣지 말라."

      "항아리를 보지 말고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라." (신 10:17, 욥 34:19)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고 사람은 일로 말미암아 평가된다."(마 7:15-20, 눅 6:43,44)

      "어린 오이를 보아도 그 오이가 장차 맛있게 될지 어떨지 모른다."

      "행동은 말보다도 소리가 크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게는 하여도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지는 말라."

      "위대한 사람이 손아래 사람의 말을 듣고, 노인이 젊은 사람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은 복될 것이다."

      "노화를 재촉하는 네 가지 원인 --- 두려움, 노여움, 아이, 그리고 악처."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세 가지 --- 명곡, 조용한 풍경, 향기"

      "사람에게 자신을 가지게 하는 세 가지 --- 좋은 가정, 좋은 아내, 좋은 의복"

      "자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인간은 아무리 굉장한 부자라도 맛있는 요리가 차려진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선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1.  자진해서 물건이나 돈을 사람에게 주지만 남이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
      2. 남이 자선을 행함을 바라지만 자기 자신은 자선 따위를 베풀려 하지않는다.
      3. 자기도 기꺼이 자선을 하고 남도 자선을 베풀 것을 바란다.
      4. 자기도자선을 좋아하지 않고 남이 자선을 베푸는 것도 싫어한다.

      첫째 유형은 질투가 깊고,
      둘째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고 있으며,
      셋째 사람은 선한 사람,
      넷째 유형은 완전한 악인이다."

      "한 자루의 양초로 많은 양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양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세 가지 일"
      1. 가난한 사람이 물건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 주는 일.
      2. 부자로서남몰래 자기의 수입의 10퍼센트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사람.
      3. 도시에 살고 있는독신자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

      "일생에 한번 오리와 닭을 한껏 먹고 다른 날은 굶주리는 것보다는 평생 파만 먹고 있는 편이 낫다."

      "자기 보존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온갖 것에 우선한다. 단, 다음 세 가지 경우에는 자기를 버리고 목숨을 버리는 편이 좋다."

      1. 남을 죽일 때,
      2. 불륜한 성관계로 들어갈 때,
      3. 근친상간을 할 때

      "상인이 해서는 안되는 일"
      1. 과대선전을 하는 일,
      2. 매점매석을 하는 일,
      3. 계량을 속이는 일.

      "단 과일에는 그만큼 벌레도 많이 먹고,"
      "재산이 많으면 근심도 많고, 여자가 많으면 그만큼 꾸지람도 많고, 하녀가 많으면 그만큼 풍기도 문란하고,"
      "사환이 많으면 집의 물건도 많이 도둑을 맞고,"
      "스승보다 깊이 배우면 일생은 보다 풍요해지고,"
      "명상에 더 오랜 시간을 내면 지혜도 보다 늘고,"
      "사람을 만나 유익한 말을 들으면 좋은 길이 열리고, 자선을 보다 많이 베풀면 평화가 찾아온다."
      "발가벗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다 입었을 때는,"
      "입지 말라, 남들이 다 발거벗을 때에는. 서지 말라, 남들이 다 앉아 있을 때에는앉지 말라, 남들이 다 서 있을 때에는. 웃지말라, 남들이 다 울고 있을 때에는 . 울지 말라, 남들이 다 웃고 있을 때에는."


      세계 3대 단편작가 하면 "안톤 체홉", "모파상", "에드가 알란 포우"를 손꼽는데"체홉"의 "카멜레온"이라는 작품은 "카멜레온"이라는 제목 그대로 주위상황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오츄멜로프" 서장의 무기력한 인간성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새 외투를 입은 경찰서장 "오츄멜로프"가 광장을 지나다가 마침 개에게 손을 물려서 피를 흘리며 개를 닥달하는 귀금속 상인 "흐류겐"을 만난다.
      진상을 알아 본 서장은 개주인을 찾아 손해 배상을 받음은 물론 개를 풀어 놓은과실을 엄중히 다스려야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모여든 군중들 틈에서 "저 개는 장군 댁의 것이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여 피해자를 향해 "자네가 못에 찔려 가지고 연극을 하는게 아니냐"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곁을 따르던 순경이 "저 개는 장군 댁의 개가 아닌것 같습니다."말하자 서장은 되받아 "글쎄 나도 알고 있어. 장군 댁의 개는 이보다 훨씬 큰 사냥개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아닙니다. 저 개는 틀림없이 장군 댁의 것입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서장은 순경에게 "자네 이 개를 장군 댁에 끌고
      가 보이게. 내가 발견하여 보낸거라고 말하게나. 잊지말고." 그런데 이 때 장군 댁의 요리사가 그 광경을 보고 "우리 집엔 이 따위 개는 없습니다."고 내뱉는다. 화가난 서장은 "이 따위 떠돌이 개를 당장 처치해 버려라."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그요리사는 "서장님, 그러나 이 개는 장군님의 동생이 데리고 온 개입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 지금까지 호통을 치던 서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럼 장군의동생께서 오셨단 말인가? 자네가 끌고 가게. 개에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그 요리사는 개를 데리고 가고 서장은 "흐류겐"을 혼내줘야 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을 물어뜯은 개 한 마리를 두고 소신껏 추궁하지 못하는 경찰서장 "오츄멜로프"의 서글픈 상황 --- 여기에 관료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있고 병폐가 매사에 직위와 권위를 민감하게 의식한 나머지 전전 긍긍하여 주변 정세부터 살펴야 하는 소시
      민적 서글픈 현상, 이것은 "오츄멜로프"서장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상전들아 저희에게 공갈을 그치라."(엡 6:9)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탐욕

      <아메리카의 비극>하면 아마 대부분 생소하겠지만 영화화된 <젊은이의 양지>하면누구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크리프트를 생각하며 기억을 새롭게 할 것이다.
      원래 <아메리카의 비극>은 신문기자 출신 작가 드라이저(Theodore Dreiser, 1871-1945)의 역작인데 그는 물질문명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하는 일단의 미국 현대사회와
      그 사회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저속한 인간생활 저변의 예리하게 파헤치므로 급속한산업 사회와 비인간화 현상이 심각해 가는 현대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문제작가인 것이다.
      주인공 "크라이드.그리피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호화로운 옷과 맛있는 음식과 멋있는 자동차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 약방점원을 거처 호텔급사가 된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유흥에써버렸다.
      어느 날 남의 자동차를 훔쳐 아가씨들과 드라이브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치어 죽이게 되고 멀리 부자인 친척을 찾아간다. 교양은 없으나 어엿한 청년인 그는친척의 배경을 이용 상류자제들과 어울리게 되고 부호의 딸을 유혹하여 결혼까지 약속받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거해 온 여공이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까지 했다.
      이 여공만 없어지면 하고 열망하던 그는 결국 그녀를 유인하여 죽게 만들었다. 행복은 이제 눈 앞에 왔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전기의자였던 것이다.
      첫째, 이기심의 문제이다. "너를 죽여서까지라도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이선이다."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소설속의 "크라이드.그리피스" 뿐이겠는가? 인간의 이기심은 그것이 현대에 와서만 특별히 문제시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어느시대보다도 가장 탁월하고 숭배 할 만한 기술 과학 시대를 창조한 현대인들이 왜 인
      간 내심에서 이기심만은 축출해 내지 못하느냐 이 말이다.
      때문에 치유가 요원한 이기심은 인간의 원죄와 숙명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둘째로 탐욕의 문제이다. 탐욕은 저급한 가치관을 낳게 된다. 지금 모든 사람의두뇌를 벅차게 점유하고 있는 사상은 황금만능과 물질지상주의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0
      *탐욕 (2)

      지금으로부터 수 백년 전 불란서에는 부유하고 욕심많은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재산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성의 구석진 곳 아무도 모르는 밀실에 숨겼다
      . 밀실에 이르는 통로는 깊숙하고 협소하였다. 그리고 입구에는 철문이 출입을 제한하고 이 문은 닫힐 때면 저절로 잠기었다.여기서 여러해 동안 이 수전노는 아무도모르게 돈을 만지작 거리며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었다.
      어느 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땅에 예속되어 억압과 착취에 허덕이는 농민들로부터징수한 소작료의 돈주머니를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밀실 금고로 가져가 언제나 하듯이돈을 만지작 거리며 돈더미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방을 나오려고 열쇠를찾으니 열쇠를 바깥에 두고 온 것을 알고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잠겼으
      니 그는 분명히 갇혀 있는 죄수와 같았다. 아무리 외치고 두드려도 그 방은 견고하여 소리나 빛이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갇힘을 알고 달려와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려 애썼으나 결국 그는 누군가에 유괴되어 살해당했
      다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수개월이 지난 뒤 먼 마을에 사는 자물쇠 만드는 어떤 노인이 백작의 실종을 듣고 30년 전에 그가 특수한 자물쇠를 고안하여 달아 준 희귀하게 만든 견고한 방을 회상하였다. 그 노인이 백작 친척의 안내로 간 그 밀실은 여전히 잠겨 있었으며 방안에는 백작의 부패한 사체가 돈더미 위에 발견되었으며 그 광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의 단말마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준다.



      * 허사가

      어렸을 적에 부흥회에 가보면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잔치라도 하는 기분인데, 풍채도 좋고 목청 한번 시원한 이성봉 목사님이 허사가를 한 바탕 불러 제끼면살맛이 저절로 솟아나는 느낌이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일생일귀 북망산 불귀객이 되니
      일배 황토 가련코 가이 없구나.
      솔로몬의 큰 영광 옛말이 되니
      부귀영화 어디가 자랑해 볼까?

      추조중의 만월대 영웅의 자취
      석양천에 지난 객 회고의 눈물
      반월산성 무너져 여우집 되고
      자고새가 울 줄을 뉘 알았으랴.

      일생 백 년 산대로 슬픈 탄식뿐
      우리 생명 무언가 운무로구나.
      그 헛된 그림자 지남 같으니
      부생낭사 헛되고 또 헛되구나.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 널 기다린다.

      한강수는 늘 흘러 쉬지 않건만
      무정하다 이 인생 가면 못오리.
      서시라도 고소대 한 번 간 후엔
      소식조차 막연해 연년 춘색 오건만
      어이타 인생 한 번 가면 못오니 한이로구나.
      금일 향원노던 객 내일 아침에
      청산 매골 마른 뼈 한심하고나.
      요단 강물 거스릴 용사 있으며
      서산낙일 지는 해 막을 자 있나.
      하루 가고 이틀 가 홍안이 늙어
      슬프도다 죽는 길 뉘 면할소냐.

      토지 많아 무엇해 죽은 후에
      삼척 광주 일장지 넉넉하오며
      의복 많아 무엇해 나 떠나갈 때
      수의 한 벌, 관 한 개 족치 않으랴,

      땀 흘리며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가나 지고 가나 헛 수고로다.
      빈 손 들고 왔으니 또한 그 같이
      빈 손 들고 갈 것이 명백치 않나.

      모든 육체 풀같이 썩어 버리고
      그의 영광 꽃같이 쇠잔하리라.
      학문도 지식도 그러 하리라.
      인간 일생 경영이 바람잡일 뿐
      우리 희망 무엔가 뜬 세상 영화
      분토 같이 버리고 주님 따라가
      천국낙원 영광 중 평화의 생애
      영원무궁하도록 누리로다.



      * 혀


      "유대인 둘이 모이면 세 사람 몫의 의견이 나온다."는 속담이 있다. 유대인에게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돌아온다고 할 만큼, 그들은 호기심이 강하다. 아뭏든 유대인만큼 매우 수다스러운 민족도 다시 없으리라. 이 경구는 <탈무드>에 나오는 말인데 주전(B.C.) 5백년부터 주후(A.D.) 5백년까지사이에 연 수만명의 랍비가 토의한 과정이나 결과가 수록된 이 성전은 혼자서는 한평생 걸려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이 돼버렸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탈무드>에는 입에 관한 경구가 많다.
      "부주의하게 이야기 하지 말아라."
      "비밀을 흘리고 다니지 말아라."
      "잘 들으라."따위들이다.
      유럽의 한 유대인 거리에 수다스런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청산유수처럼 잘하며 상대에게는 말 참견할 틈을 주지 아니했다.
      한번은, 이 남자가 이웃 도시의 유대인 거리에 와서 랍비를 찾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읍의 랍비님이 선생님의 욕을 했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랍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뇌까렸다.
      "아니죠. 나는 이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요."남자도 질세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자네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 랍비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을게 아니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담이다.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는 집과 같다."


      *능력본위


      생긴 대로 살아가고, 꾸밈새 없이 지낸다는 것은 한결 마음이 편한 일이다.
      누구나 생긴 것 이상을 드러내 보이려고 억지 춘향식으로 꾸미고자 하고, 때로는그로 말미암아 무리한 짓도 하게 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 소신대로 행하고,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고 꾸미려는 것보다 한결 훌륭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농사를 짓는 것이 제격에 맞는 사람이 장사를 하려다 실패하게 되고,또 그와 유사한 경우를 보게된다.
      옛부터 우리나라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는말이 있다.
      이 경우에 알맞는 고대 그리스의 예화가 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팁푸스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으나,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디오게네스는 세상 사람들이 거지라고까지 할 만큼 겉치레가 허술할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도 변변치 않은 반면에, 아리스팁푸스는 사치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 신분에 넘칠 정도로 매사에 호화스럽게 하느라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는 자기가 먹을 야채에 묻은 흙을 털고 있으려니까 때마침 아리스팁푸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빈둥빈둥 놀면서도 늘 사치를 좋아하는 아리스팁푸스를 충고하려고 생각했다.
      "자네도 나처럼 이런 야채를 먹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쓸데없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굽실거릴 필요가 없을 걸세." 하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 말에 아리스팁푸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네야 말로 나처럼 사람들과 잘 사귀는 기술을 배웠다면 시시하게 야채의 흙이나 털고 있지 않아도 됐을 걸세."



      *작별인사

      그는 굉장히 오랜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피로에 지치고 굶주리고 목이 바싹바싹말라 있었다. 사막을 오랫동안 걸어서 간신히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나왔다.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익은 과일로 굶주림을 채우고 그 곁의 물을 마시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여행하기 위하여 다시 출발해야만 했다.
      그는 이 나무에 크게 감사하여 "나무여, 굉장히 고맙다. 나는 어떻게 네게 보답하면 좋을까? 네 열매가 달도록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네 열매는 충분히 달다. 상쾌한나무 그늘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새삼 너를 자라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물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물의 혜택도 충분히 받고있다. 너를 위하여 내가 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는데로 많은 열매를 맺어열매가 많은 나무가 되어 너같이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가 자라도록 원할 수 밖에 없구나."했다.
      당신이 작별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원할 때 그 사람이 훨씬 슬기있게 되기를원해도 이미 충분히 풍부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도이미 충분히 선한 사람일 때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당신과 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자라기를!"하고 축원하는 것이 제일 슬기롭다.



      * 광고

      오늘의 사회에서는 광고를 할 때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맥주, 또는 담배 등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반드시 바른 정보만을 전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상품 측이 다른 상품보다 좋다고 일컫지만 반대로 또 다른 한 상품의 광고를보면 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품과는 관계없는 포장이나 도안도 퍽 많이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그같은 일은 예삿일처럼 되어 좋은 판매방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담배광고를 보면 아름다운 처녀가 자동차 안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실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그 처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탈무드에서는 이와같은 판매방법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을속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탈무드에서는 소를 팔 때에 실제 빛깔과 틀리게 색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또갖가지 도구류에 색칠하여 새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금하고 있다.
      말하자면 속일 목적으로 그것에 색칠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곳에 노예가 있는데 그 노예가 먼저 머리에 물을 들이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젊게 보이게 하고서 자기를 사가는 이를 속였다는 실예가 있다. 또 과일가게에서 신선한 과일을 묵은 과일 위에 얹어 놓고 파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또 탈무드에서는 건물의 안전 규명에 있어서 이를테면 처마의 길이를 제한하고,발코니 기둥의 굵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노동시간을 초과해서 사람을 부려서는 안된다고 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과일을 따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 그 노동자가 어느 정도 과일을 손에 쥐고 먹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고 하였
      다.
      또 탈무드에서는 상품을 팔 때 그 물건과 틀리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광고에서는 킹 사이즈라든가 풀야드라든가 하는 과대한 말이 사용되고 있다. 풀야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 야드밖에 안 되므로 그런 말은 일찍부터금지되어 있었다.


      * 꿈

      20C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5)의 <지평선 저 너머>는 꿈과 이상과 행복이 한데 어우러진 지평선 건너 편을 동경하면서 젊은 가슴에 꿈과 이상을 가지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라는 사실을 묘사해주고 있다.
      이 희곡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안드류와 로버트 형제,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애인루우스라는 여성이다. 로버트는 농가의 자식이면서도 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어릴적부터 병약한 몸으로 늘 저 산너머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많을까하고 미지의 나라를 동경하는 것이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늘 책을 벗삼으며 항상 꿈을 그
      리며 지냈다. 그러나 형 안드류는 그와 정 반대의 성격으로 건실한 인간이며 땅을사랑하는 선천적인 농부였다. 이렇게 두 형제는 성격이 달랐으나 어릴 때부터 다투거나 싸움을 모르고 지냈다.
      루우스는 가까운 농장의 딸로서 아름답고 건강하였으나 그저 교양이 없는 평범한처녀에 불과했다. 형 안드류는 일찍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앞으로 결혼할 심산이었고그녀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로버트와 루우스는 결합하게 된다. 로버트는 지평선 너머로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루우스를 만나 사실은 자기형 보다 더 그녀를 사랑해 왔다고고백하면서 형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의 시적인 말에감동된 루우스는 "내가 진정 사모해 온 분은 당신의 형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부디
      떠나지 말고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여기에서 로버트는 자기가 동경하던미와 행복이 멀리 가지 않아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구나 생각하면서 여행을 중단하고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일이 여기에 이른 사실을 알게 된 형 안드류는 깊은 절망에 빠져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로버트가 타려던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조그마한 운명의 장난으로 시인인 로버트가 농장을 맡게 되고 농부인 안드류가 선원이 되었으니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로버트는 농장경영에 완전히 실패하고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생 끝에 폐병을 앓게 된다. 고달픈 생활과 더불어루우스의 아름다움도 퇴색되었고 감정마저 말라버린 것 같았다. 형 안드류 또한 배
      에서 내린 후 사업에 실패하고 황금만을 추구해 온 지난 날의 생활이 무의미했음을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처절한 비극의 종장에 가서야 로버트는 병상을 뛰쳐나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제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다. 자유를 얻게 된다. 영원히 자유로워진다."외치면서 숨을 거둔다.
      꿈은 인생을 키우는 양식이다. 로버트의 실패와 폐병과 죽음의 비운 --- 그것은벌써 그가 꿈을 묻어버리는 순간부터 시작된 재앙이었다. 교양없고 경박스러운 루우스야말로 로버트의 꿈을 산산히 부셔버렸던 유혹자였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느니라."(잠 29:18)


      *남자

      유대인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등대립되는 것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언제나 대립하는 것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언제나 두 대립하는 것 사이에 살아가며, 두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 안에도 남자의 늠름함과 여자의 상냥함이 공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적인 남성이란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상냥함을 겸비하고 있는 자다."



      * 돈

      돈을 잘 쓴다는 것은 결코 낭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돈을 쓸 데에 인색해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돈을 쓸 때에 생각해야 할 기준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부잣집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돈을 탐낸 사람이 있었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돈을 잘 벌 수가 없는데, 주인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돈벌이가 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머슴은 주인에게, "주인님, 어찌하면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주인은 머슴에게 이렇게말했다.
      "그것을 말로 하기보다는 실제로 몸소 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머슴은 어떻게든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주인은 머슴을 뜰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로 올라가라고 했다. 머슴은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돈버는 방법을 알고 싶은 욕심으로 주인이 하라는 대로 그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달리라고 했다.
      머슴은 심신이 떨렸다. 그것은 그 바로 밑은 깊은 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가지를 잡고 떨어지지만 않으면 우물에 빠지지 안겠기에 역시 주인이 하라는 대로했다.
      두 손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꼭 잡고 늘어진 머슴에게 이번엔 버드나무 가지에서한 손을 떼라고 했다. 조금 있다가 주인은 나머지 한 손마저 놓으라고 했다. 머슴은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우물에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주인은 그제서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게 돈을 벌려거든 돈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돈을 쓸 때마다 지금 버드나무가지를 잡은 마지막 손을 뗄 때의 조심스러운 태도, 바로 그대로 해야 하네."


      * 돈 (2)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존경할 때에는 그 사람은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가 가진 권력이나 지위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마을에서 제일 가는 금력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뱅이였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부자 쪽이 조금 앞서 도착했으므로 랍비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한 시간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가난뱅이 남자가 그 뒤를 이어 들어갔다. 상담은 단 5
      분만에 끝났다.
      "랍비님! 부자의 경우는 선생님께서 한 시간이나 걸리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이 걸렸습니다. 이래도 공평하다고 하시겠습니까?" 가난한 남자는 항의했다.
      랍비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자자, 내 아들아, 그대의 경우는 가난한 걸 이내 알았네. 그러나 부자의 경우 마음이 가난한 것을 알기 전까지 한 시간이 걸린거라네." "돈있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칭찬하고있는 것이다."


      *돈 (3)


      유대인은 천주교도처럼 육체에 특별히 높은 지위를 주지 않는다. 천주교에서는 육체는 육욕의 원천이며 따라서 육체는 죄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육체를 정신을 담는 그릇이므로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육체, 그자체가 죄가 죄를 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돈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천주교도는 언제나 돈을 악이라고 생각하여 죄많은 것이라고해왔다.
      이런 견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자신없음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육체나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르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은 못된다.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을 가져온다."


      *돈 (4)

      매춘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을 읽어도 매춘부는 자주 등장하며 또 중세의 유대인 거리에는 매춘부가 많았었다. 하긴 오늘날에 와서 유대인은 애쓴 보람이 있어서 모두들 제법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유대인 매춘부를 만나는 일은 꽤 어려울른지도 모른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 때 그 여자가 "어머나,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는것은 무슨 뜻이냐면 매춘부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뜻이겠다. 비단매춘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한다고 하는 위인들이 있다.
      이것은 우회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예컨대 누군가에게 5백원을 주고 얼굴에 침을뱉아 놓고 "비가 뿌렸다."고 한다면 "그렇군, 비가 뿌렸군."할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이 5백원이 5십만원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매춘부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 여자는 비가 온다고 한다."

      *맛의 성격

      맛은 그 성격상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생리적인 조건에 의해 크게 죄우되는 생리적인 맛과, 생리적인 것과는 별반 관계가 없이 감정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정서적인 맛이 그것이다.
      맛을 짠맛, 단맛, 신맛, 쓴맛 네 가지로 나눈다면 짠맛과 단맛은 생리적인 맛이요, 신맛과 쓴맛은 정서적인 맛이다.
      생리적인 맛이란, 땀을 많이 흘리거나 핏속의 염분이 모자란 듯하면 염분이 많은 음식이 당기고, 또 노동을 많이 하고 나면 핏속의 당분이 감소 단 것이 먹고 싶고 당기는 것처럼 핏속의 염분이나 당분의 농도에 따라 그 기호가 크게 달라진다.


      *순결

      어떤 남자가 어떤 처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병이 들었다. 의사가 와서"이건 당신의 상사(상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이 든 것으로 그 여성과 성적인 교섭을 가지면 반드시 낫는다."고 했다.
      남자는 랍비한테 가서 의사로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상담을 했다. 랍비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가지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나체로 그의 앞에 서 있어 그가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걷어낼 수 있음으로 해서 병이 나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 역시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와 담 너머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면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도 안된다고 했다.
      물론 탈무드에서는 이 여성이 기혼자였는지 혹은 독신자였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남자와 다른 여러 사람이 랍비에게 어째서 당신은 그처럼 강경히 모든 일에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인간은 순결한 것이 아니면 안되고 만일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하여 금새성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사회의 질서는 지켜질 수 없다."고 랍비는 대답했다.



      *성결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 중에 "성모의 마술사"라는 작품이 있다. 어떤 보잘 것 없는 마술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바르나베>인데 여러가지 재주와 마술사로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유랑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수도승을 만나 자기도 날마다 성모를 찬양하며 순결하게 살고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성모를 섬기기위해 자기 재능과 기술과 지식을 다투어 뽐내고 있었다. 원장은 성모의 미덕을 다룬책을 편찬하고 어떤 수도사는 익숙한 솜씨로 그 논문을 송아지 가죽에 베끼고 또 다
      른 수도사는 거기에 섬세한 성화를 그리고, 또 어떤 수도사는 석상을 다듬고 있는것이었다.
      여기에서 <바르나베>는 자기의 무지함과 무력함에 서글픔을 느낀다.
      "모두들 성모님께 사랑을 바치고 있는데 나는 뭐람." 백방으로 자기 할 일거리를찾아 보았으나 매일 더욱 슬퍼질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뻐하며 예배당으로 뛰어갔다. 그때부터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예배당 안에서 보냈다. 그는 이제 슬퍼하거나 한탄하지도않았다. 다른 수도사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득찬 수도사들은 예배당 문틈으로 들여다 보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나베>가 성모의
      제단 앞에서 꺼꾸로 선 자세로 두발로 여섯 개의 공과 12자루 비수를 가지고 마술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를 위해 단지 자기가 가진 유일한 재주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참 수도사들은 그가 성모를 모독한다고 소리쳤다. 원장은 그가 순진하기는 하지만 아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우격다짐으로 <바르나베>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제단의 성모께서 내려와 푸른 만또 자락으로 마술사의
      이마에서 방울져 내리는 땀을 씻어 주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원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명예

      세상 살면서 이기고 또 이긴 사람이 있다. 조선왕조 말기 우리네 대부분이 깊은 역사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으로써 미국이 우리와 가까히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노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그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였다.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어찌 이기고 또 이기기만 계속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이 완용(1858-1926)이라는 사람의 얘기다
      그런데 신가한 것은 우리들 어느 누구도 그를 생의 승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요 생을 통틀어 결산할 때 결단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릴 수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슴 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사슴의 뿔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늘 그 뿔을 자랑했는데. 어느날 사자에게 쫓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만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지요.
      평소에는 아름다와 보이고 자랑거리가 되어도 정작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는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것,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한 것, 이런 것들에 일생을 걸려는 분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 진정한 만족

      <벤허>를 읽어 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를 했는데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끝까지, 세상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
      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썬다싱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구하면 의에 주리고목마르게 됩니다. 진실로 주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사모하면 배가 불러집니다.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의 홍수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
      는 것은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덕을 추구하고, 철학을 추구하고, 종교를 추구하고,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물으면 예수를 발견하게 되어 거기서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내가 주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 평안이 없었나이다'는
      말처럼 진정한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3-15)



      시기심에서 해방

      헬라의 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월계관을 차지한 일등선수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 라이벌 선수가 밤마다 몰래 가서 그 기념비를부수려고 끌로 그것을 쪼았습니다.
      며칠 밤을 몰래 가서 그것을 쪼았는데 마지막 밤에는 그 기초를 다 쪼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비가 넘어지는 바람에 자기가 죽었습니다.

      시기라는 것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0절에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시기는 가시와 같아서 뻗치는 곳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남을 상하게 하고 자기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가시가 뻗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해지는 것마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살아 갑니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기뻐하는사람은 기뻐할 조건이 많아지지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배가 아픈 사람은 잘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의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못된 짓을 했고, 하만이 모르드개를잡아 죽이려고 시기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장대에 매어달려 죽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여인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학생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사업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예술계. 정치계. 학계에 시기가 있습니다.

      종교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목사지만 종교계에 너무 시기가 많고 너무 질투가 많습니다.
      시기는 가장 원시적 감정이며 천한 감정입니다.
      이 시기에서 해방받기 위해 어떤 사람에 대한 시기가 생길 때, 시기 발언을 하고 싶을 때, 시기를 보복하는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주님께 그것을 가지고 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품성이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이기게 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0, 32)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구습을 벗자

      어느 마을 골목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구두를 수선하며 늘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구두를 수선하면서 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언제부터 구두 수선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일생 동안 다른 직업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구두 수선을 했으며 전쟁이 나자 그 할아버지는 구두 통을 들고 다니면서 만주까지 가서구두 수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8선을 넘어올 때에 다른 사람들은모두 고생을 했지만 그 할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기술 때문에 고생을 안했답니다.
      전쟁 중에도 구두를 닦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한번도 다른 일을 해 보려고생각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그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할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다른 일을 했더라면 훨씬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고향에서 같이 38선을 넘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처럼 무식하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서 처음에는 자기 밑에서 조수 노릇을 하다가 그것도 기술이 없어서 나가서 거리에서 치약도 팔고치솔도 팔고 수건도 팔고 하더니 구멍 가게를 빌리고 나중에는 도매 상점을 하고지금은 아주 부자가 되었답니다.
      한 사람은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이고 한 사람은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때 그 구두 통에다 마음을 두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보따리 장수가 되었더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할아버지는 구두 통 하나에 자기의 전생애를 다 걸었기 때문에 평생 구두 짓는 일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궤도가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그 아기는 '아! 여기는 따뜻하고 좋다.'고 이렇게 어머니의 배꼽에 탯줄을대고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것도 주고 아무런 노력을 안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아기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굉장한 고통이 있습니다.
      아기가 밖으로 나올 때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아기는 고통과 진통을 겪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0-24)




      무한대의 밀도

      우리의 최초의 힘은 인력(人力)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력(馬力)이라고 하는 가축의 힘을 빌려서 노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력(火力)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온천 지대에 가면 온천 물을 가지고 밥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합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밀도가 무한합니다.

      중성자 별에 갈 것 같으면 찻숟갈만한 물질이 10억 톤의 무게와농도를 가질 수 있고, 온도는 1억 도가 넘는 그런 물체가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블랙 홀이라는 별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처럼 전파나 광선이나 중력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아무 것도 통과가 안 되는 무한 밀도의 물질이 있다는 말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 속에 이렇게 무한한 밀도가 있다고 하면 정신계의 세계에는 더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활용을 못한 많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비상한 힘을 이 시대가 필요료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신념의 힘이나, 양심의 힘이나, 정신의 힘이나, 지식의 힘이나, 돈의 힘이나, 몸의힘은 너무나 작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마치 자기의 힘만으로 뛰어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다르듯이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사는 사람과 자기힘의 극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태평양을 뛰어가는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과의 차이만큼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굉장한 힘이 필요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이 기독교 학교로 변했던 때와 같은 특수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활용할수 있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성령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


      ♥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의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 준비된 사람
      성 구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요한 웨슬리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목사님인 뼈대있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사회에는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진리를 전파할 사람으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처음부터 뜨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때까지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숨이 막힐 정도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이 쇠약해지고 극심한 궁핍을 겪게되자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던 그의 어릴적 서원이 생각나서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성경공부 모임을 요한 웨슬리가 주관하게 되었고 모임은 날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대학교 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 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성된 것이 '감리교'입니다. 한국도 많은 사회혼란과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암울한 시대에 빛을 전하는 등불을 세우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복음의 주역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사람다운 사람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어느 사립학교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나는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문기술을 습득한' 공학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스실!
      '전문교육을 받은'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어 독살된 어린아이들!
      '전문훈련을 받은' 간호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유아들!
      '고등 교육과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총살당한 후 화장되는 여인들과 젖먹이들!

      "그래서 나는 교육에 대하여 큰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교육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아이들이 머리 좋은 괴물이나, 전문기술을 습득한 미치광이나, 아이히만과 같이 전문교육을 받은 살인마가 되어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읽기도 중요하고, 쓰기도 중요합니다. 계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 중심이 선 사람
      "중심이 딱 선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홀리지 않지만,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늘 망상 속에 있으니 걸리게 돼요.
      같은 꽃을 보고도 한숨 지으며 눈물 뿌리는 사람이 있고,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노래하는 꽃,
      눈물뿌리는 꽃이 따로 있나요?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 서화동의《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중에서 -
      * 중심이 선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갑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중심이 서 있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좋은 사건이다.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
      *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생 길을 걷는 행로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진심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 인생의 그릇을 풍요롭게 채워간다는 뜻도 됩니다.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 살아있는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를 보세요.-죽은새는 날지 못합니다.
      빨갛게 물들은 단풍을 보세요.-죽은 나무는 물들지 않습니다.
      어항속의 열대어를 보세요.-죽은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합니다.
      달리는 말의 힘찬 모습을 보세요.-죽은 말은 달리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건강한 웃음을 보세요-죽은 사람은 웃지 않습니다.
      저 노란 국화화분을 보세요 -죽은 국화는 꽃피지 않습니다.
      400개나 달린 배나무를 보세요-죽은 배나무는 열매맺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묵묵부동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체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으면 움직이고 꿈틀대며 활동을 하지만 죽어있다면 활동이 없는 시체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상(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일을 하지 않고, 의미없이 살며, 희망이 없으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돈 물질 마음 가난)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단히 가난한 사람이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만에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 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일세.` 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다.

      ♥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제일 잘 달리고 골프 잘 치고 사업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과로하지 말고 사업도 좀 쉬고 건강에 유의하시오`라고 말했다. 간염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5년간을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말하기를 `이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운동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시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된다.

      ♥ 무지한 사람의 근심
      어느 영국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서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식사 시간이 되면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슬그머니 갑판으로 나와서 싸가지고 온 비스켓과 치즈를 먹곤 하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허기진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 선장은 식사시간만 되면 혼자 갑판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왜 당신은 식사시간만 되면 여기서 비스켓만 잡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선장님, 저에겐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하였다.
      그 때에 선장이 하는 말이 `당신이 이 배를 탈 때 사둔 승선비 속에는 이미 식사대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놓고 가서 잡수십시요`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식당을 이용했고 겨우 한끼의 음식을 먹으니 미국에 도착하였다.


      ♥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
      겸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얼굴을 위로 향해 올려보지만 그러다가도 막상 꼭대기에 다 오르고 나면 단번에 사다리에 등을 돌려버리고 더 높은 구름을 쳐다보며


      ♥ 새벽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늘 새벽도 설레임을 안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한다. 늘 만나는 얼굴인데도 반가운 얼굴들이요 새벽마다 만나는 얼굴들 인데도 늘 신선하고 아름다운 얼굴들이다.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리는 성도의 모습에서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늘 보이는 얼굴 중에 안보이는 성도가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에서 새로운 얼굴을 대할 때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목회를 할수록 새벽기도회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벽기도회 예배를 마치고 성도의 가정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해 교 적부를 뒤적이는 기쁨 역시 너무도 크다. 사진이 없는 성도는 눈을 감 고 기도하고 사진이 있는 성도는 사진을 보면서 기도한다. 가끔 어려운 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성도의 얼굴을 보노라면 안타까운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파 온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 주실만 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혹시 주위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 에너지가 넘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가?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위에는 전부 재미있는 일로만 가득 차 있어 주위 사람들도 그런 열성스런 분위기에 동화된다. 자신의 가슴속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야, 즉 당신이 품고 있는 열정, 소망, 흥미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런 분야의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지는 다음에 생각하라.
      - 로빈 쉬어러의 《더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중에서 -
      * 살다보면 온갖 고통과 번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스리지 못해 자기도 남도 해치는 독(毒)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기 안에서 잘 다스리고 녹여 향기(香氣)로, 활력(活力)으로,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향기, 그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화요일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다 즐겁습니다.

      ♥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을까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고 돼지는 돼지만 낳을까.그 이유는 각 생물마다 자신의 독특한 정보를 DNA라는 물질에 갖고 있기때문이다.DNA는 뉴클레오티드란 구성단위가 길게 연결돼 있는 거대한 분자인데 여기에는 염기의 종류에 따라 ATCG라는 네가지가 있다.이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돼 생물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마치 자음과 모음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팩시밀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면 기계가 글씨를 전자파로 바꿔 상대편 팩시밀리에 전송한 후 정해진 코드대로 바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글로 인쇄한다.
      오직 정보만 전달될 뿐 실제로 아무런 물질을 받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DNA가 생명인줄 착각하고 있다.그러나 DNA는 글씨와 같이 정보만 갖고 있는 죽어 있는 화학물질에 불과하다.그러므로 DNA는 살아 있는 세포속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우연히 A­T­C­G뉴클레오티드가 합성,결합된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팩시밀리가 있고 편지를 쓸 사람이 있어야 「나는 너를 사랑해」란 문장이 의미가 있듯이 생명을 만드시고 모든 정보를 기록하신 하나님과 생물이 존재할 때 DNA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75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으며 한 개의 세포속에 저장된 정보를 인쇄하면 1천쪽짜리 1천권정도에 해당된다.그러나 이 정보가 2m정도밖에 안되는 DNA에 모두 저장돼 있으며 46개의 염색체로 나뉘어 실패처럼 감겨 작은 세포속에 저장돼 있다.
      만약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의 DNA를 한 줄로 연결하면 적어도 1천5백억㎞에 달하며 이는 지구를 3천5백만번 돌 수 있는 엄청난 길이인 것이다.이러한 엄청난 정보를 가진 인간이 우연히 진화됐다는 가설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DNA를 마음대로 조작,실험을 해 왔다.결국 양을 복제하는데 성공,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원숭이의 복제까지 성공했다.동일한 기술로 인간의 복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모든 정보를 기록해 놓은 유전자조작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죄악인 것이다.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든 생물의 복제는 궁극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복제는 인간의 윤리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마음대로 복제하고 이용한다면 미인을 다량 복제해 상품화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인간의 복제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것이다.
      남녀 관계없이 원하는 형질의 인간을,심지어 자기자신을 마음대로 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결혼의 존엄성및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기존의 사회를 받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본단위인 가정이 파괴되고 이는 결국 총체적인 사회의 파괴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 잘못한 사람을 칭찬하기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부족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니다.
      행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의식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계도한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르면 그 부족원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우고 모든 부족원이 모여듭니다.
      모여든 부족원들은 잘못한 그 부족원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세워진 부족원이 그동안 베풀었던 선행을 하나씩 말합니다. 그의 건설적인 능력과 선행, 친절한 행위 등이 빠짐없이 열거됩니다.
      반면 그에 대한 불만이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원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 그 부족원의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게 되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은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그로 하여금 부족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상대방의 약점에 대해 그것을 가만 두려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용서할 줄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빌면 그것을 받아주는 관용과 아량이 필요한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보니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려 하고 흠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사회는 위선과 거짓,독설과 정죄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길 원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5:8).
      손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시 24:3∼4).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심판해야 할 자리에서 행해진 예수님 말씀의 울림이 모인 사람들의 손에서 돌을 버리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내가 심판과 정죄의 자리가 아닌, 용서와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롬 12:21).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그는 이 세상에는 거
      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영적인 사람
      A.W. 토저; "영적인 사람"
      진정으로 영적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갈망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갈망은 생명을 주게 하며 또 절제하고자 하는 깊이 내재한 심오한 소원이다.
      영적인 사실에 있어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 순서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하기로 하자.
      1. 첫째의 갈망은 행복해지려는 것보다는 거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불명예나 손실이 올지라도 자기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기 원하는 사람이다.
      4. 또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견해대로 보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사람이다.
      5. 영적인 사람은 잘못 살아가기 보다는 바르게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6. 한편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큰 댓가를 치뤄도 다른
      사람이 성장하며 믿음에서 진보되기를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되어진다.
      아무도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자유롭게 움직이시어야 영적인 스리스도인을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선한 사람
      가브리엘 마즈세르의 희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누구의 눈에도 신통치 않은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멸시하는데 뭇 남자들의 우상같은 존재인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해 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 의식으로 인해 그 여자의 결혼의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든지 꼬집어 주고 싶다든지 하는 야릇하고 못된 심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아내는 그 열등 의식을 고쳐 주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 보려는 선의를 지닌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수모와 열등감과 불만을 남편에게 보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남편의 열등감을 고척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열등감이 있는 척하여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천사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을 학대하고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결국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내는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을 가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기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사람의 선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이란 때묻은 의복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제일 흉악한 사람은 자기를 악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악한 사람은 내가 별로 악하지는 않지만 별로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자들은 '아 ! 나는 죄인의 괴수다. 오 ! 괴로운 사람이다'라고 하며 참회록을 씁니다. 이 말만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착하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일수록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 13,14)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 : 15)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
      지친 자, 목마른 자, 상처 입은 자, 눈물 흘리는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이 나에게 와서 안식할 수 있도록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욕망으로 인하여 힘들고 지친 자가 되었으니 누가 우리에게 와서 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쉼을 얻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안식만을 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버리면 누구든 내게 와서 쉼을 얻고 내게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생수를 먹고 마시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참된 쉼을 가져 상처 입은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그늘이 되어 예수님의 나라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 향기나는 사람
      사모님이 치자향 가득한 화분 한 개를 사오셨습니다.
      차에 화분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특별히 깎아줘서 싸게 사셨다는데 과연 그향기가 진하고 다른 냄새들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쾌쾌한 꼬랑내만 나던 사무실이 일순간 항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하는 향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꽃의 향기는 있는듯 없는듯 은은합니다.
      그러나 그 꽃을 치우면 단번에 향기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꽃의 향기도 있습니다. 주로 동양란과 같은 기품 있는 꽃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치자향처럼 압도하는 향기로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명인이 되기를 원하고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남을 비방하지 않으면서 성실한 자세로 삶을 사는 그런 동양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책상에는 동양란 한 촉이 있습니다.
      언제 그 기품있는 향기를 줄 것이지 기약이 없지만
      이놈을 볼 때마다 오래 참고 때를 기다려 꽃 한송이 향기 한줄기 줄 그날을 기다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0)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토록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사는지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편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육신과 그럴 듯한 학력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면 그 피해는 더 큽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지금 내게서 나오는 향기는 어떤가요.

      ♥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본문:열왕기하 2:1∼14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내게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나이다”(열왕기하 2:9)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서점에서는 성공이란 주제의 다양한 책들이 팔리고 있으며 성공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흥미있는 이야깃거리이며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즐겨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 드라마를 통해 감동과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한동안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이 유행했었습니다. 지난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서재에서 꺼내 목차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7가지 습관이란 주도적이 되라,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시너지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 등입니다.
      ‘글로벌리더십센터’에서는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크게 6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특징 1,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징 2,적극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특징 3,항상 개방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특징 4,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특징 5,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특징 6,성공의 미래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엘리사의 예를 통해 성공자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그 첫번째 특징은 ‘더불어’입니다(1절).“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엘리사는 계속하여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이처럼 ‘더불어’의 습관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혼자서 승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함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특징은 끈기입니다. 엘리사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등을 쫓아다니며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 끈기와 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2절과 4절,6절에 계속하여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끈기있게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습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
      세번째 특징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하나이다”(9절).엘리사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상당수가 대화에서나 그 삶에,그 행동에 목표가 없는 것을 봅니다.“원하나이다” 내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네번째 특징은 과감한 결단입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 엘리사는 자기 옷을 잡아 둘로 찢었습니다. 옷은 신분의 상징입니다. 또 자신의 습관이며 살아온 방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웠습니다.그러므로 자신의 옷이 필요없었습니다.오늘도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사람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과감한 결단이 있습니까? 분명 성공자가 됩니다.
      기도: 세상에서 성공자 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우리들은 주 안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으로 터를 닦은 사람들
      빅톨 위고는 영국은 두 개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저서이고 하나는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책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대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6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찬란한 대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독일에서도 마틴 루티가 종교 개혁을 해서 성경을 서민들의 손에 나누어 준 후부터 독일국민들이 깨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도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학생 운동을 하면서도 느끼는 일입니다.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여자라도 성경의 교양이 몸에 배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무르익습니다. 지식만 백과 사전처럼 집어넣은 대학을 나온 사람과는 다릅니다. 성경만으로 기본 교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통계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으로 되를 닦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 섬을 사랑하는 사람
      섬을 사랑하는 사람 (The man who loved Island ) E.H. 로렌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아서 섬을 삽니다. 그 섬에 가서 사는데 그 섬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해서 그 섬을 팔고 다른 섬을 삽니다. 이섬, 저 섬, 옮겨 다니다가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 주님께 무관심한 사람
      *어느날 워싱톤에 있는 어느 교회 목사관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교회를 잘 출석하지 않던 교인의 전화였습니다.
      그는 0목사님,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사실입니
      까?0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0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예배에 참석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0라고 대답했습니다
      -전화를 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신을 만날 수있는 사람
      어떤 젊은이가 늙은 율법학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질문해도 좋겠습니까?`
      늙은 율법학자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뭐든 물어보게나.` `선생님, 옛날의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 만났으며 신은 땅위를 걸어다녔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으며 사람들은 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왜 신은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제 땅위를 걷지 않는가요? 왜 신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걸까요?` 늙은 율법학자가 대답했다.
      `이보게 젊은이! 신은 아직도 도처에 있다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어서 그렇다네.`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 그는 이 세상에는 거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 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
      나치 독일의 박해하에 놓였던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
      했던 플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
      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건
      강해져서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꿈을 품은 사람들
      윌리엄 페더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 짜리 지폐를 길어서 주웠습니다. 어릴 때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중독이 되어서 길바닥만 보고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데에 전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 핀이 54,172개나 되었고 수천 개의 동전도 길에서 주웠습니다.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이나 푸르름을,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과 아름다움을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생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곧 넝마주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넝마주이는 꿈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사회 구조 속에서 20프센트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토이든지 정신 세계이든지 간에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개척하는데 전생애를
      보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미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일생의 비젼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꿈은 온 세계가 질서를 지켜서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했지만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33살에 죽었지만 그는 거의 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징기스칸도 영토욕에 광분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가였습니다. 종교적 동기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말을 합니다만 그에게는 이글대는 꿈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에게 절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유럽의 통일이었습니다. 새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을 두고 싸우기만 하니까 유럽을 정복해서 질서를 확립하고 살기좋은 유럽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상계의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는 정치범이 되고 말았지만 철인 나폴레옹은 꿈의 사람,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 인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굉장히 큰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조그마한 힘들이 비슷비슷해지면 싸움이 되니까 훨씬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빠른 시일 안에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불모지에 가서 작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3만의 군대 앞에서 영광과 부가 있는 불모의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3만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생명을 걸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그는 거의 신과 같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유럽에 자유와 평등과 우애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비젼이 있고 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군인이 되든지 정치가가 되든지 이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 기도의 사람
      유다왕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혹독한 상황에 직명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펼펴 놓았읍니다(왕하19:14-). 열왕기하 18장 17절에서 우리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 휘하의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 대해 읽게 됩니다. 그들은 와서 히스기야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위협을 퍼부어댔읍니다. 그들은 많은 나라들이 앗수르를 대적하려 했으나, 모두
      멸절되었다고 했읍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그가 믿는 신을 의지하는 것보다 항복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읍니다(왕하18:17-35).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출된 것이 왕하19:35절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히스기야처럼 했읍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말했읍니다. "만일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높은 직책을 결코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일 것입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세계1차 대전 중에, 한 군사회의가 있었읍니다.
      총사령관인 프랑스의 군인 포쉬(Ferdnand Foch)원수는 그곳에 없었읍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말했읍니다. "나는 어디로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읍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들을 조그만 황폐된 예배당으로 인도했읍니다. 그곳에서 포쉬 장군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 아프리카 작전을 지도한 몽고메리 원수는, "매일 밤 나는, 내가 나의 장병들을 패배하지 않게 하기를 기도했읍니다"고 말했읍니다.
      우리가 삶에 있어서 그토록 자주 실패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일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듯 자주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해 줄 때, 그 찬송은 옳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과 권력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데도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그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같은 일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그날 그날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늙은 영국의 장군 애스틀리(Jacob Astley) 경이 전투에 앞서서 "주님은 제가 오늘 얼마나 분주할 것인지를 알고 계시나이다. 제가 만일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해도, 주님은 저를 잊지마옵소서"하고 기도드린 것처럼 그도드릴 시간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든가, 어떤 곤란한 과업에 직변한다든가, 어떤 특별히 강한 유혹을 극복해야 하는 곤경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관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 깊은 한 친구가 그에게 말해 주었읍니다. "잠시 앉아서 의자 하나를 자네 맞은 편에 가져다 놓고, 하나님께 그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말로 그분과 이야기해 보라." 그는 일생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침대 옆에 빈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있는 것을 밝견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히스기야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될 힘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 꿈꾸는 사람
      본문:창세기37:5∼8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세기 37:5)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 함께 바닷가의 쓰레기더미와 선창가의 고깃배 주위를 맴돌면서 먹다버린 빵조각을 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조나단은 먹기 위해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갈매기 조나단은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인내로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 리처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그리고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질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먼저는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고, 다음은 해와 달과 11개의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셉이 스스로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계시적인 꿈이요, 예언적인 성격의 꿈입니다. 그러나 이 꿈은 요셉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위대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찾아오고 준비된 사람은 그 기회를 움켜잡습니다. 요셉은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지만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활용함으로써 술을 맡은 관원장의 천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둘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거기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주인의 눈에 들고 그 집의 모든 재산과 하인을 관리하는 총무의 직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셋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험한 파도가 능숙한 어부를 만들어가듯이 꿈꾸는 사람은 오히려 실패와 시련을 인생의 좋은 연단의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루 아침에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히 그 종의 임무를 다하고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일가족과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구해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그 꿈을 이루어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런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테니까요...

      사랑을 할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무언가를 잃어버릴 때가 와도 잃어버린다는 것의 아픔을 알고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방황을 할때
      그저 이유없이 당신을 기다려줄테니까요... 슬픔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슬퍼질때 당신의 슬픔을 함깨 해줄수 있을테니까요...

      항상 가까이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어느때 갑자기 보고 싶어지더라도 뛰쳐나가 만날 수 있을테니까요...
      가슴이 따뜻한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가슴이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그대의 따뜻한 가슴에 몸을 녹일 수 있을테니까요...
      진실된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그대 나의 거짓된 모습을 보더라도 그대의 진실로 나를 감싸줄테니까요...

      진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이와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의 한 모습이 나빠보이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다른 모습을 보며 감싸안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와 사랑하세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 또한 사랑할 줄 안데요...


      ♥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
      '샘미 모리스'(Sammy Morris)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이었다. 그가 인디애나 업랜드에 있는 테일리 대학교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방을 배정 받기를 원하는가'라고 학장이 물었다. 그때 그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방을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후에 학장은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돌아서서 과연 나는 어느 누구도 하기 싫어했던 일을 기꺼이 했던 적이 있는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한다.

      ♥ 정말로 성숙한 사람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때마침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 일을 책임지는 하인이 대신해서 그를 맞아주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거라며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가 소파에 앉자 하인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내왔다. 하인이 건넨 쟁반에는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읽을 만한 책 한 권까지 곁들여 있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 하인은 하던 일을 끝마치려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쓱해진 셰익스피어는 차라도 한 잔 더 얻어마실 생각에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부엌문을 연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었다. 그곳은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억지로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셰익스피어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어냐는 질문과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 신들린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유대 종교층을 향해 '뱀의 자식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짓을 한다(요8:44)고 하셨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 인류를 두 가지 영족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녀와 사단의 영을 받고 그 권세와 지배하에 있는 사람이다(요일5:19). 과학 시대 사람들은 신들렸다는 사실을 싫어한다.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속에 사단의 영을 몰아내고 예수의 신 곧 성신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찬은 신들린 사람들이다. 도덕심, 종교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에 철저히 들려야 한다. 성령 충만이란 말은 공기나 물이 채워지는 것 같은 물리 개념이어서 그보다는 성신들렸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요새 신들린 현상이 도처에 나타나 문외한들이 유명한 음악가나 문인 화가들의 신이 들려서 갑자기 베에토벤을 치고 램브란트를 그리고 밀톤처럼 글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악령의 장난인 듯하다. 예수신이 들려야 예수처럼 생기고 예수처럼 살 수 있다.

      ♥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
      미국의 대중 연설가 나폴레옹 힐(Hill)은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을 말한 적이 있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7가지는
      첫째, 자기 확신, 신념이 있는 사람,
      둘째, 창의력이 있는 사람
      셋째, 위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
      넷째, 열심을 품고 사는 사람
      다섯째, 자기에게 주어진 연단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사람,
      여섯째,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
      일곱째,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이 중에 세 가지 정도 적어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주어진 능력을 성실하게 활동하지 못할 때 그는 실패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기도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겼던 마퀴스 디렌티가 한번은 사환 아이에게 “삼십 분이 지나면 나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사환 아이가 문틈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찌나 거룩하고 성스럽게 보였던지 그는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이를 알리기를 주저했다. 그의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시간 반이 지난 후에 시간이 다 되었다고 신호를 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소리가. “벌써 30분이 다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브레이너드 감독은 매일 5시간을 기도와 말씀을 묵상함으로 보냈다. 헨리 해블록경은 항상 매일 새벽의 두 시간을 하나님과 보냈다. 야영이 6에 시작되면 그는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했다. 얼 케언즈는 매일 6시에 일어나 성경공부와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8시 40분의 가정 예배에 임했다.

      ♥ 만나고 싶은 사람
      하루에 만나
      일상을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주에 한번 만나
      연극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한달에 한번을 만나
      음주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게절에 한번 만나
      여행을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년에 한번 만나
      가치관을 점검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십년에 한번 만나
      강산의 변화를 느끼고픈 사람이 있고...

      삼십년 후에 한번만 만나
      주름진 모습에서 살아온 발자취를 유추해 보고픈 사람이


      ♥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
      사람에 대한 겸손, 나눔과 깊은 사랑은 남을 위한 배려보다 먼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삶의 귀중함과 풍부함을 발견한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사람들의 됨됨이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라는 그들의 됨됨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들을 다른 사람으로 다시 만들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은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움이고 친절함이다. 무관심이나 잔인함을 없애는 것이다. 가혹과 증오가 제거된다. 대신 자비와 자선과 관용의 정신이 있다. 우리 주변이 우리의 배려 대상이다. 우선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고 그 다음 이성을 따르도록 하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머리를 주장하도록 하라. 사랑이 없는 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거기에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이성을 따르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머리가 마음을 주장하면 이성은 외롭다. 그러나 마음이 머리를 주장할 때, 삶은 풍성하고 값지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남을 위한 배려를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의 남을 위한 배려도 알게 된다. 우리의 남을 위한 배려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시는 방법이다.

      ♥ 사람다움을 지켜야
      본문 : 출애굽기 21;12∼17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마음은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서 몇 점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10점,30점,50점,70점,90점).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에는 죽어 마땅한 죄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사람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정당방위이거나 살해 동기가 없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으면 우선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실수로 살인이 일어난 경우에 개인적인 복수를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입니다.
      죽을 죄 두번째는 ‘짐짓 모살한 경우’입니다.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을 말합니다. 첫번째 경우가 순간적인 충동이나 격정에 휩싸여 저지른 열광적인 살인이라면 두번째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저지르는 냉정한 살인입니다. 계획적으로 살인했을 때는 도피성으로 도망했다고 해도 끌어내어 죽일 수 있습니다.
      세번째 죽을 죄는 부모공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것은 죽을 죄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공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주한다는 것은 저주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부정적인 말이 최악의 상황으로 강도높게 표현된 것을 저주라고 하지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저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을 죄 마지막은 사람을 ‘후리는’ 행동입니다. 요즈음 말로 유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도 같은 죄입니다. 유괴는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사람은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런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유괴나 인신매매 등은 이를 정면으로 대항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어린이 유괴는 더할 수 없이 악한 일입니다.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순진한 존재를 악용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을 배려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오늘 말씀에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 시험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속아서 시험에 빠진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되겠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약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그 말이다.
      시험에는 강한 사람이 없다.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정작 시험 장소에 갔을 때 베드로는 그만 약해졌다.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인생은 죄에 대하여, 시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약할 뿐더러 또한 사람은 그 육신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이는 특별히 폐가 약하고, 어떤 이는 심장이 약한 것 같이,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누구든지 약점 한 가지씩은 있는 것이다.
      에서 같은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점이 있었고, 노아 같은 사람은 술 같은 것을 마시는데 약점이 있었으며, 솔로몬 같은 사람은 특히 정욕 방면에 약점이 있었는가 보다.
      이와 같이 사람 사람마다 특별히 자기의 약점이 있다. 서양 속담에 "사람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각각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각각 어떤 점에서는 조금 잘못하면 지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다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내가 어떤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가 스스로 살피어 특별히 조심해서 유혹에 들지 않도록 힘을 써야 되겠다.


      ♥ 한 사람이 주신 선물
      본문: 롬 5:14-15
      지난 4월 5일 2001년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이번 개막경기에는 애덤 킹이라고 하는 9살 난 소년이 시구를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1995년 미국으로 입
      양되어 간 아이인데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이 붙어서 손가락을 펼 수 없었고, 다리가 썩고 뼈가 굳어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나라의 의학으
      로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몸부림치다가 혹시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거기서 어떤 의학적 혜택을 받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고아원에 버렸는데 로버트 킹이라고 하는 미국의 젊은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자기의 아이가 세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다 붙어있고 걷지도 못하고 너무 너무 불쌍한 이
      아이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양하고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손가락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했고 다리도 절단을 하고 더 이상 썩지 않게 하였
      으며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를 보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밝게 자라났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의족을 끼고 양아버지에게 코치를 받으면서 야구를 했습니다.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소망 없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밝고 건강하고 희망이 넘치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래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시편 51편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리가 태어나면 바로 물로 가듯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 바로 죄악으로 달려갑니다.
      이 죄악된 길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거룩한 길, 믿음의 길, 신령한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죄악의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 앞에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부귀가 아니라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생명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 나라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신이 가득하였고, 무지하였고 말할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살아가던 절망의 땅이었고 저주의 나라였습니다. 몇 천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 앞에 끊임없이 빌고 빌어 보았지만 이 나라는 병들었고 하나의 소망도 없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아침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주와 불행이 떠나갔습니다. 지하자원이나 많은 농토를 가지고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선물 받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샘물처럼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누가 훌륭한 사람인가?
      임금으로부터 거대한 자기의 석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석공이 있다. 그로서는 일생 일대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날부터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같은 대형 기중기가 없던 시절이다. 엄청난 크기의 입상을 세우려면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조립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고민하던 석공의 발길이 어느 날 바닷가를 찾았다. 적당한 자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무심한 어린이 몇이 자기 곁에서 모래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던 석공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혀 한달음에 석상을 세울 현장에다 세운 다음 석공은 그것을 완전히 흙으로 덮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마치 신라시대 왕릉과도 같이 둥글게 구릉을 이룬 곳 정상에서 또 다시 석상의 몸통 부분을 조각했고 그것을 파묻혀 있는 다리 윗 부분과 연결했다. 그리곤 다시 전과 같은 요령으로 흙으로 파묻어 버렸다. 다음, 같은 방식으로 석상의 두부를 조각하여 몸체 위에 조립한 그는 지금까지 덮어 두었던 흙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렇게 하니 거기 우람한 임금의 석상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석공은 해변가 코흘리개 어린이들에게서 배워 마침내 이 거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햇병아리 첼리스트 피아티로르스키가 첫 연주회를 가졌다. 바로 그날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인 카잘스가 청중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더 잘하려고 하면 동티 나기 쉬운 법이 아니던가. 그 날의연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연주회가 끝나자 카잘스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카잘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입어 마침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뒷날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가 된 피아티고르스키가 카잘스에게 그 옛날 자기에게 보내 준 까닭모를 박수의 이유를 물었다. 이에 카잘스는 그때 당신은 이렇게 첼로를 잡고 이렇게 활을 놀려 바로 이 음을 낸 적이 있소. 그런데 난 그때까지 바로 그 음을 내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오. 나는 당신의 연주를 통하여 그 음을 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거요.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내 스승으로 생각한다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내 스승같이 생각하고 도왔던 것이오라고 말했다.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라` (고전 14:31)


      ♥ 꿈 해몽한 사람
      *어느 책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해몽을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이 사실은 꿈을 꾸지도 않았으면서 찾아가 꿈을 꾼 것처럼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0간밤에 돼지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가0고 했더니 해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오늘 중으로 맛있는 음식을 선사 받아서 잘 먹을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생각치도 않았던 출가한 딸이 찾아오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 왔더라는 것입니다. 며칠후 다시 찾아갔습니다.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다시 돼지꿈을 꾸었노라고 했더니 이번엔 좋은 양복을 얻어 입겠다고 해몽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친척되는 사람이 양복을 한 벌해 주어서 잘 입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도 돼지 꿈을 꾸었노라니까 그는 머리를 흔들더니 이번엔 크게 다칠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두번씩이나 맞았던 점으로 미루어 조심하느라 외출도 삼가고 방에 누워만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선반위에 올려놓은 물체들이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해서 그를 찾아가 사연을 전부 이야기하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해몽자의 대답인즉 첫번째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은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니 밥을 얻어먹게 되고, 배가 부른 다음에도 꿀꿀거리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이니 잠자리를 마련해 주게 되고, 배부르고 잠자리 편한데도 꿀꿀거리게 되면 매밖에 맞을 게 있겠는가?하는 말이었습니다.
      = 세상 이치도 다 이와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싸고 입고 그리고 꿀꿀거리는 것으로 그 생애가 일관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기루를 잡는 것처럼 언젠가는 무슨 일이 되겠지 개천에 물이 흐르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어린이들이 하는 농담 중에 “죽을 뻔한 것이 좋으냐. 살 뻔한 것이 좋으냐.”고 묻는다.
      성급한 어린이는 생각도 없이 살 뻔한 것이 좋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살 뻔하였으나 아쉽게 죽은 사람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다고 했다. 이는 영적으로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믿을 뻔한 것은 소용이 없다. 못 믿을 뻔했어야 한다. 말구유의 아기를 못찾을 뻔했어야지 찾을 뻔했었다면 안 된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받을 뻔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은 목수들이다. 길이는 300규빗, 넓이는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3층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뿐인가.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한 때가 아니니 산에서 나무 를 찍어 내려와 다듬는 데서부터 운반하는 데까지, 또는 그것을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조립 하고 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런지는 모르나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다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뿐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건축에 참여하고 교회 강대상 밑에 까지 가 보았으나 구원과는 먼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으나 아그립바 왕처럼 거의 구원받을 뻔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해도 당선이 아니면 낙선이요. 될 뻔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가 구원받을 뻔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며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샬롬이다. 평강의 왕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인격자로 우리가 나라마다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개인 차원에서 평화란 성취를 의미한다. 평화롭게 죽는 것은 성취된 삶을 산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평화는 평안이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이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필요하다. 그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시며 또한 샬롬을 전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샬롬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돌보고 계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물려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 주심의 기도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 이 모든 것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룬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결국은 실패다.

      ♥ 빛의 사람으로
      40년 전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 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챠찍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빛,진리의 빛, 평화의 빛,생명의 빛을 나타낼 때 자랑스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이 땅에 천국을 건설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 본향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람 예수
      (딤전 2:5)
      조병수 교수
      손톱사이마다 까맣게 때 낀 어린아이들의 조막손을 매만지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곱게 빗겨주시며 쓰다듬던 예수는 사람이셨다.
      때 구정물에 찌든 꾀죄죄한 옷에서 비린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갈릴리 아이들을 그대로 덥석 안아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아이들, 이방 여자, 따돌림당하는 세리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문둥병자, 가난한 사람들, 바리새인, 어부들, 청년, 마음이 상한 사람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만나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을 물리칠 줄 몰랐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온 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고통스러운 상태에
      서도 강도에게 하늘의 소망을 말해주셨다. 사람 예수의 중심에는 연민과 동정이 있다.
      늦은 밤 대화를 신청한 바리새인을 앉혀놓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회당에 들어가면 회당에서, 바닷가에 서면 바닷가에서, 산에 올라가면 산에서, 집안에 앉으면 집안에서 어느 곳이든지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예수께는 말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닌 곳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잔치자리에서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예수는 사람이셨 다.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 들녘에 피는 꽃, 씨뿌리는 사람, 양치는 목자, 혼인잔치, 포도원, 맷돌질하는 것, 반죽덩어리, 하인들의 모습, 전쟁하러 나간 왕, 모래와 반석에 지은 집... 사람들 사이에는 일어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문을 두드리며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자기만을 위하여 창고를 짓고 모든 수확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흐뭇해하다가 하룻밤에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나오고, 일하러 간다 안 간다 하며 아버지의 속을 썩이던 아들들의 괘씸한 행동이 나온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들어있다. 예수는 인생사에 관하여 말하는 듯 싶더니 어느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웃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웃던 사람 예수. 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을 때 우르르 몰려나와 슬피 우는 그의 누이동생이며 이웃집 여자들 앞에서 그냥 눈물을 쏟으신 사람 예수. 태양 아래 걷고 걸어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음처럼 무거운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우물곁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 예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고난의 처절함을 영혼과 육체로 느끼며 잔이 옮겨지기를 피땀으로 기도하신 사람 예수. 예수는 사람이셨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이셨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셨다.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딤전 3:16). 예수는 참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희생물이며 인간을 위하여 완전한 대언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참 사람 이신 예수에게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희생물을 발견하시고, 사람들은 참 사람이신 예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표현하는 완전한 대언자를 발견한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돌짝길에 상하고 흙탕물에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그 귀하신 손을 아끼지 않고 내미신 예수, 베데스다 못에 반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누워 불신과 원망으로 얼룩진 영혼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 그 예수는 사람이셨다. 오늘도 부드러운 손과 자비로운 눈을 가지신 사람 예수께서 어루만지시도록 죄악으로 때묻은 육체와 영혼을 나는 내놓는다.

      ♥ 혼돈을 만든 사람
      의사와 건축가와 정치인이 누구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는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다. 의사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했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건축가는 하나님이 혼돈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치인이 질세라 말했다. '그렇다면, 혼돈은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주실 만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개만도 못한 사람~
      별로 쓸데(?)도 없는 개를 사람들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지요?
      특히 서양 사람들이 개를 좋아함은 유별납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전에 목사님이 애완견을 기른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개가 병이나서 동물병원
      에 데려갔더니 입원을 시키랍디다. 의료보험도 안되니 하루에 2만원씩이나
      드는데, 입원을 시키자니 지금도 돈이 없어서 입원을 못하는 교인들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결국은 개를 입원을 시키고 말았답니
      다.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평소에 반짝이던 눈이 게슴츠레해진채 죽어가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개를 길러본 사람이면 그 이유를 다알 수 있습니다.
      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개가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지요?
      아무데나 똥싸고 오줌싸고 아직 펴보지도 않은 신문 물어뜯어 놓고, 새 신발
      까지도 물고가 뜯어 놓는데 말입니다.
      직장에서 시달리다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제일 먼저 달려나와 반기나요?
      여우같은 마누라는 이웃집에 마실가서 코빼기도 안보이지요...
      토끼같던 애들은 컴퓨터 오락하느라고 정신없지요...
      그런데 개는 재빨리 쫓아나와 팔딱팔딱 뛰고 데구르르 구르고 뒷발로 벌떡
      일어서서 앞발을 번쩍쳐들고는 핵핵거리며 좋아합니다.
      주인이 즐거울때는 개의 발쳐든 모습이 "할렐루야~"로 보이지만,
      스트레스 팍 받아 우거지상일때는 아양을 떠는 개를 발길로 걷어 찹니다.
      깨갱거리며 물러섰던 개는 자존심도 없는지 잠시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슬며시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옆에와서 앉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늘 복종합니다. 병들었을때도 주인을 보면 축쳐진
      꼬리를 흔들지요. 힘없이...
      이것이 개가 사랑을 받은 비결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늘 보셨으니 목사님도
      개를 동물병원에 입원을 시킬 밖에요.
      우리는 개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개가 잘나서 주인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잘따르며 순종을 잘하
      며 잘 섬기기때문임을 요...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그런데 사람은 요...
      웬 자존심이 그리 강한지... 목에 기브스한 사람도 허다하고
      잘난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불복종하고 들여 받기를 잘합니다.
      그 상대가 비록 하나님일지라도...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 해서 진 사람~)
      개같은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해서 똑같이 꼴인한 사람~)
      개를 기르시는 분들이여...
      개가 사랑받는 비결을 배우십시요.
      개를 따라하십시요.
      하나님께 사랑받으실 것입니다.
      개따라 하기~
      시이~ 작
      멍멍~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 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하며 지내십니까 ?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증거입니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는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서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 별것 아닌 사람들
      링컨이 꿈속에서 겪은 일.그가 대집회 강연을 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링컨도 별것 아니군』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들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그런데 곧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그는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별것 아닌 사람들을 좋아한다.그래서 이렇게 별것 아닌 사람을 많이 만들지 않았겠니? 다만 별것 아닌 사람들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때 그 별것 아닌 사람에게 나머지 별것 아닌 사람들을 맡기게 된단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고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27).

      ♥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쉬운 방법
      사나운 산돼지로 인해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숙련된 사냥꾼을 동원해 산돼지를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산돼지를 잡으러 간다고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달 후 노인은 산돼지를 찾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떻게 산돼지를 잡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산돼지가 음식을 구하는 곳을 찾아서 곡식을 계속 뿌렸더니 산돼지들은 별 노력없이 공짜로 곡식을 먹게 된 것을 깨닫고
      날마다 그 곳으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옆에 함정을 파 놓아 잡았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 심리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땀을 흘려 얻은 대가야말로 참 기쁨의 소산이 아닐는지요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이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구 게리그병(Lou Gehrig, 근육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나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랄까. 죽음의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 세기이상을 더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다시 페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번 상상을 해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다. 어찌 색다르다 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그뿐만이 아니다.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감사가 넘치는 생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었겠는가. 호킹이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 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쉬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시공의 마술사`,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감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는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루 게리그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읫로부터 이 병에 걸렦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이 선고가 있은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데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1942 -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하에 기술하고 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ㅂ다 적극적이고 활방한 삶의 자세로 간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
      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호킹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원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쇠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공의 마술사""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운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구 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50:14-15)라고 말씀하고 아울러 범사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당부하고 있다.

      ♥ 게으른 사람에게는 후회가 따른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반드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다.먼저 황소가 나섰다.“나는 주인님이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다.
      “도둑을 누가 막는가.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나는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다.“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하다.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이다.



      ♥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머리칼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다른 사람은 메달을 달아주며 칭찬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그때 머리칼이 아파서 혼이 났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더랍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대로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Springfield에 있는 위튼벌그 대학에서는 34년 전에 200달러를 갚지 못했던 학생한테서 백만불을 기부받은 일이 있는데 그 분은 대 Power회사의 사장인 Dr.Stanley Hanley입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 감사를 잊지 않는 성품때문일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로새4:2)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는 서양격언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 소명받은 사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애굽기 3:12)
      기독교 신앙인은 두 번 태어납니다. 자연인으로서 몸으로 태어나는 것 한번,그리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두번째 태어납니다. 그런데 한번 더 태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고향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의 심부름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심부름을 왔는지조차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심부름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를 깨닫는 것은 인생의 최고 목표이겠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겐 걱정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실패도 없습니다.


      ♥ 세 종류의 사람
      현세에는 약 6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실상은 세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곧 없어야 할 사람과, 있으나 마나한 사람과, 있어야 할 사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보면 강도는 없어야 할 존재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요, 사마리아인은 꼭 있어야 할 존재이다.
      여기에 대한 기준은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때로는 사회적인 공헌도를 기준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이 결정할 것이다.


      ♥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영국왕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자였다.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다.그런데 한번은 암스트롱이라는 좀도둑이 양을 훔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렀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임금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제임스 1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답했다.“참 기특한 죄인이로군.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그리고 성경을 모두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 암스트롱은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그는 하루에 딱 한절씩만 성경을 묵상했다.성경의 절수가 무려 3만 1102절이니 그것을 모두 읽으려면 80년 이상이 필요했다.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다.“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라” 암스트롱은 그 후 새사람이 돼 봉사의 삶을 살았다.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 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지혜로운 사람
      성 구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미국 오클라호마 에이다의 제일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때 한 시각장애인 복음가수가 들려준 간증 한 토막이다. "열 살 때 아버지와 사냥을 가게 됐어요.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일 예배 드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주일 한 번 어긴다고 그리 걱정할 것은 없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사냥터에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아버지는 저를 남겨두고 급히 토끼를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한 물체를 발견하고 총의 방아치를 당겼어요. 제 머리카락을 토끼의 꼬리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저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일로 모두 구원을 받았어요. 제 눈을 잃고 그대신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탄은 항상 "딱 한 번인데 뭘 "이라는 말로 사람을 유혹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본문: 사도행전2:43-47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출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가 점차 성도수가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교회의 체제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질서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에 따라, 자발적이면서도 풍성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구심점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이루며 교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놀라운 이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미 앞의 42절의 "서로 교제하며" 부분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면서 어느 정도는 충분하게 전해드렸으므로, 앞부분은 대강 정리만하고 주로 47절 하반절에 중심을 두고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사람마다 두려워 하였습니다.(43절상)
      여기서의 "사람마다"는 뒤에 나오는 45절의 "각 사람"이나 47절의 "구원 받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무섭다는 의미의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그들이 보거나 듣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현상들로 인하여 생겨진 것입니다.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그 다음 구절들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능히 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2.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43절하).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은 그들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표증입니다. 이 표증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으로 세상의 그릇된 사단의 세력의 영에 사로잡혀 나타나는 그것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에게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곧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대의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말하기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이라."라고 했습니다.

      3. 그들은 주 안에서의 ‘한 몸 사상’을 가지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44-47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동안 충분히 앞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 이것은 초대교회의 하나됨, 곧 통일성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것입니다. 이들은 가정을 버리거나 만사를 제쳐두고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2)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 이 부분은 사도행전 4:34,35절을 보면 보충설명이 됩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 "각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는 그들의 영적 일체감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한 몸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영적인 깊은 이해와 자기 발전적 신앙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적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닫고 배워야 할 너무나 귀중한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인지라, 영적으로 하나면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기 위하여 주변의 성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는 가난한 성도를 찾아 섬기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이고 여력이 있는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와 관계없이 이웃의 작은 개척교회들을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 이들이 모임의 장소가 없어서 성전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에 모인 것도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모였지만,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감동되고 이끌리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5) 성찬과 애찬을 했습니다.
      - 이들은 어느 한 집을 선택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음식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으며, 이 애찬에는 주님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성찬이 따랐습니다.
      (6)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 하나님을 찬미함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오는 당연한 것입니다.
      (7)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 이 부분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성도가 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살라는 주님의 명령과 같은 분부는 도무지 우리의 가슴에서 흐려진지 오래고, 지금은 오히려 세상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저는 목사로서 저 자신부터 자성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잠시 살펴 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결코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목회자와 성도 간의 갈등으로 서로가 너무나 많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원인에 대하여 단적으로 이것이다 말하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의 바르지 못한 목회관과 그릇된 세속적인 욕심과 왜곡된 교회관 등으로 인하여 발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신실한 목회자들과 이제 막 개척을 하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는 초년 목회자들에게 힘을 잃게 만들고, 목회자를 존경하던 성도들의 가슴에 가시를 꽂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성토하며 교회 밖에까지 알리며 떠드는 일도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리를 높여 외치는 자들의 심정은 이해가 되나, 그들 또한 자칫 옳은 것을 주장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상대를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되며, 교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는 일에 참으로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자기 스스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그가 그렇게 자기 공로를 생각한다면 그는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며, 주께서 부흥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목사는 주님의 도구로 성도를 섬기도록 보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부흥되기까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성도들의 눈물과 피흘림이 있었음을 그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목사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하여 성토해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강단에서 수 십년 동안 외쳐대던 바로 그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엾은 그 목회자와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그저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들추어 용서를 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설교를 잘하고 심방을 잘하는 목회자보다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그런 목회자를 우리 주님과 성도들은 지금 필요로 여깁니다.

      ♥ 고독한 사람들
      고독은 대용품에 의존하여 사는 삶에서 오는 영혼의 영양 실조다.
      슬픈 일은 많은 사람들이 대용품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기쁨을 주실 때 저들은 여흥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평강을 주실 때 저들은 수면제를 먹으며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가치있는 것을 주실 때 저들은 가격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실 때 저들은 희롱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그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실 때 저들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
      본문: 고린도후서 12; 1∼10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여러 사람들이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짜증내거나 낙심하고 어려워지면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또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높이기보다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고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겸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소개합니다.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간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2절). 그러나 이 체험을 소개하면서 ‘무익하나마’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득불(하는 수 없이) 자랑한다고 합니다(2절). 매우 사려 깊은 태도이며 겸손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합니다. 6절에 “내가 참말을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부흥회 때 설교나 간증을 들어보면 진실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은혜가 될 텐데 왜 꾸며서 설교하고 간증할까? 안타깝습니다. 어느 분이 신문 칼럼에 그리스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이야기를 하면서 “신들이 보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가 피터 드래커의 책에 예화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진실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앞에 불렀던 찬송 518장에 5절 가사를 덧붙인다면 “진실하기 원합니다.진심으로”입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는 능력,외국어 구사 능력 혹은 사람 잘 사귀는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난의 가시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머무르게”(9절)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능력이 붙들어줍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월드컵 시즌의 유행어처럼 권면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어느 순간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10절). 은혜받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얼굴을 늘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은혜받으셨습니까? 기뻐하십시오.

      네 종류의 사람

      감사할 것이 100이고, 불평할 것이 200일 때 우리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1. 불평할 것 200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는 사람.
      아마 60% 이상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불평할 것 200에서 감사할 것 100을 제하고 100 전도만 불평하는 사람.
      이런 사람도 30%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조금 나은 분들입니다.

      3. 불평할 것 200이 있어도 감사할 것 100은 아예 따로 떼어놓는 사람.
      이 사람은 기본적인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4. 불평할 것 200은 작게 생각하게 감사할 것 100은 크게 생각하는 사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모두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평할 것은 10분의 1로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10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불평할 것은 20이 되고, 감사할 것은 1000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살면 대략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창 45:3-11, 고전 15:35-38, 42-50, 눅 6:27-38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들을 위하여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위의 열번째까지 형들은 다른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이고, 자기와 동생 베냐민은 '라헬'이라고 하는 야곱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야곱은 이 두번째 부인을 사랑했고, 자연히 그 아들인 요셉을 다른 열 아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위의 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셉은, 이상한 꿈을 꾼 다음에 형들에게 들려주는데, 그 꿈 이야기가 형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게 됩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형들이, 요셉이 나타나자 그를 죽이기로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말리고 유다가 말리는 바람에 죽음은 면하고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몇 사람을 거쳐 요셉은 애굽 왕실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집 종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요셉은 죽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성실한 요셉이 보디발의 눈에 들어 그 집 총무가 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철창 신세를 지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때 중동 지방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가뭄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양식이 비축되어 있어서 염려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부모와 형제가 있는 유대 나라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갑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네 보통 사람 같으면,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요셉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수를 갚았더라면, 일순간은 승리의 쾌감을 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자기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 모두가 멸망하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 모두를 살리는 대승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여러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을 건져내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니요,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삶, 곧 화목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

      힘과 슬기,덕 이 세 가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소중한 보화이며 그 중에 가장 으뜸은 덕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덕장이 되려 하고 덕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덕스럽다는 평판은 듣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의 재주와 지혜,학식과 문무를 다 겸했지만 덕장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농민의 아들 유비 현덕은 배운 것도 많지 않고 힘도 남보다 세지 못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덕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덕스럽게 만들며 또 사람을 부덕하게도 만드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면 사람을 부덕하게 만드는 것 세 가지가 지적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가면
      둘째는 분노
      셋째는 더러운 말

      첫째 가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십시다.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언제 돈을 벌고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을 썩게 만들고 타락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는 결국 그 사람을 가면의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을 부덕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분노인 것입니다.

      성경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분을 안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시비로,사소한 이해타산으로,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과오 때문에 분을 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재빨리 풀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빠른 시간내에 분을 풀어버리지 아니하면 결국은 마귀가 틈을 타고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을 부덕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더러운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말이란 건전하지 못한 말을 두고 하는 동시에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해치는 말들을 남발함으로써 점점 부덕한 사람이 되고 기피의 인물로 전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진실입니다.
      이웃에게 진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에게 진실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고는 남에게 진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헌입니다.
      성경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이 땀흘려 가꾼 곡식을 순식간에 가로채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덕인이 되려면 우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스스로 자기 생활을 지탱해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남의 생활에 보탬을 주는 구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선한 말입니다. 사람이 선한 말을 아니하고 살면 마음에 녹이 슬고 입에 좀이 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을 꼬집는 말,해치는 말,할퀴는 말,짓밟는 말들을 골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례한 말,무익한 말,무가치한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복을 비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느 때든지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상한 자에게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에게 격려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특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덕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

      얼마 전에 바보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보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외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한참 후배들이 통일운동을 한다면서 북한을 제집처럼 마음껏 들락날락할 때도 그분은 "고향에 못간 많은 실향민을 두고 나만 어찌 고향에 가겠는가?"고 하며 바보처럼 그분은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천국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웅변도 몰랐고, 쇼맨십도 없었고, 그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바로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다시 한번 얼마 전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분이 가졌던 마음의 깊은 평화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내면의 깊은 평화를 가져야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년에는 엄청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전쟁이 있었습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긴 시신 사이에서 사단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겁니다 이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일까요?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 앞에 벌벌 떨면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벌에 신경 쓰고, 연줄에 신경 쓰고, 힘이 있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어둠의 힘은 커지고 영혼은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보다 힘이 없는 곳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힘을 얻으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서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칭송 받는 이유는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선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싸움은 내 욕망을 위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남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우리 속에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내 욕망을 조금 덜어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보는 삶을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 없는 세상이라고 느끼신다면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길을 걷기로 작정해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길이 없어 보여도 내가 평화의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은 생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그렇게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평화의 길을 걷기로 새롭게 작정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에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거듭난 사람의 증거
      - 바로 설수 있는 사람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5∼17.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어느날 어떤 목사가 한 탄광촌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귀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갱도 입구에 있는 시커먼 땅 위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흰 꽃이 피어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 동안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목사는 문득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이 꽃은 표면이 무척 매끄러워. 그래서 어떤 먼지도 앉을 수 없었던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석탄 가루가 날리는 탄광촌보다 더 시커먼 곳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깨끗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세상의 것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자신의 색깔로 당신을 시커멓게 물들일 것입니다.

      “주님, 세상은 저희에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때마다 진리의 말씀을 저희에게 먹이시사 저희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친구도 없고 남의 집에도 가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심하게 살면서 평생을 나약하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한 번뿐인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감하게 자신을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머금고 인사부터 하고는 상대편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멋있는 분이군요."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런 말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해했고, 좋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국의 달변가요, 시인이요, 극작가인 버나드 쇼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면 자신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약속...하나님의 약속

      어느 젊은이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해서 주일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교회로 찾아가 잠을 잤습니다.
      저녁이면 교회에서 자고 낮이면 구걸을 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별명은 성씨를 따서 "박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자연히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있었고 교회를 짓기 위하여 작정헌금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옆에 앉아 계신 장로님이 1,50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장로님은 교회에 일주일에 몇 번 나오시지도 않았으면서 1,500만원을 하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잠을 잤으니 2,000만원 정도는 해야겠다고 2,000만원을 별 의무 없이 적어냈습니다.
      적어내고서는 한동안 까맟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 개월이 흐른후 새벽기도 때 갑자기 마음속에 충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이 마음을 움직여 주신 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그 작정한 것을 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의 약속은 파기하거나 조정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 청년은 한참을 깊이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제가 고물을 주워 팔아 헌금을 하겟습니다.
      작정한 헌금액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이 청년은 그날부터 고물을 주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줍다보니 차츰 고물장사에 눈을 떠 1년 반만에 약속한 금액의 작정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장로님이 이 청년을 후원하여 공부를 시켜주었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의 20가지 특징

      1. 시험발표가 나야 공부한다.(보통때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2. 계획만 잘 세운다.(고치기도 여러번 고친다.)
      3. 공부하기전 할 일이 참 많다.(특히,책상정리)
      4. 처음에 책상에서 하다가 갑자기 상을 펴더니 침대에 눕고 그러다 잔다.
      5. 1시간 공부하고 3시간 쉰다.
      6. 시험발표나면 해야지 하고서 막상 발표나면 자포자기한다.
      7. 잘 세운 계획만으로 흡족해한다.
      8. 동태를 살피고 동지를 찾는다.(같이 포기하자는 속셈)
      9. 조금 자고나서 해야지 하고 막상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떠있다.
      10. 밤샘을 철썩같이 믿는다.
      11. "공부하고 자야지"가 아니라 "좀 자고나서 해야지"라고 다짐한다.
      12. 두꺼운 책은 베게하기에 좋다
      13. 오색찬란한 필기노트(보는 것만으로도 뿌듯)
      14.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 관심없던 국민좌담이나 시사프로그램 같은게 무지하게 재미있다.
      15. 책상에 필기 복사물만 그득히 쌓여있다.
      16. 기적을 믿는다.
      17. 머리는 좋지만 안해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18. 시험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19. 공부는 못해도 인간성은 캡이라고 생각한다.
      20. 시험성적 발표후 다음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 사람은 사람대로 맛과 멋을 지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으로 160㎞쯤 떨어진 산자락에 ‘엘불리’라는 식당이 있다.엘불리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군침을 삼키는 식당으로 명성이 나있다.4월부터 6개월 동안만 영업을 하는가 하면 규모는 50명 정도의 음식 준비만 가능할 만큼 작다.

      엘불리의 명성은 규모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방장인 페란 아드리아의 조리솜씨 때문이라고 한다.미식가들은 그가 만드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 2개월 전부터 예약을 하고 기다린다.페란 아드리아야말로 맛 하나로 엘불리를 세계의 명소로 만든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대로,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맛과 멋을 지닌다.맛잃은 소금은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식당도 음식맛이 떨어지면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지금 우리에겐 맛과 멋을 만드는 제2,제3의 페란 아드리아가 필요하다.서툰 요리사들이 요리를 망치기 전,그래서 식당이 문을 닫기 전에 주방장부터 바뀌어야 한다.

      ♥ 두 사람의 이웃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잔뜩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동네는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은 맣고,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해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 온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간 그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그리고 이사를 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될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오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힘자라는 데까지 그들을 도와 볼까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 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임을 이 이야기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잠언 21:1-6

      저자는 2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실망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장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행실의 특징을 대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혜자가 취해야 할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義와 信과 仁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겸손한 사람

      교만한 자는 그의 교만에 의하여 자신의 도덕적 눈멂을 선언합니다.
      그의 눈이 높은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졌다는 것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도 없습니다.

      3. 거짓없는 사람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으며, 작은 거짓의 성공은 또 다른 거짓을 연속적으로 낳게 되고, 더 큰 거짓으로 인도하여 물방울이 점점 커지나 막이 엷어져 터지듯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구합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은 보복을 합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당한것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만족을 모릅니다.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만들어 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 역전되어 속은 자가 속이고 속인 자는 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레미아 5:1)

      지금 정치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소리가 드높다.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민운동은 낡고 부패하고 줜워주의적인 정치를 타파하고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치,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요, 그것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국민의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정치권이요, 그 주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높건만 정작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대하 지도자들은 공감을 표가혹 취지 수용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그럼 말만 있을 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방안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자기들이 공천을 주고 감투를 씌원준 정치인들이 부패, 저질, 불성실 등을로 시민운동의 배척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하 보스들은 스스로 낯을 붉히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텐데, 이런 반성의 빛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하나의 위선이요, 이중적 형태이다. 지도자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완벽한 사람

      한 사역자가 한번은 누구를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간에 그것이 친절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기적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린도후서 5:17-18).

      나는 내게 문제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서만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의 위대한 가능들이 숨겨진 기회인 것이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당신은 새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소중한 한사람

      하나님은 한사람을 통해서도 세상을 움직이게 하신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설 때 세상은 환경이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

      1809년 2월 12일 켄터기의 산골에서 아브라함 링컨이 탄생하는 순간 미국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흑인이 해방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기운이 싹 텃던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방탕에서 회개하던 그 시간,바로 그 시간이 전유럽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때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기독교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요한 웨슬레가 은혜를 받던 그 순간, 그때 영국이 구원받는 순간이었다.한사람은 이렇게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매년 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틴 라이프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는 모습을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의 대답은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 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그것은 엎드리고 얻은 선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을 내세워 엎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고넬료보다 더 위대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

      15.어리석은 사람
      성경엔 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있다.
      복받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저주 받은 한 사람도 있다.
      구변 좋고, 논리 정연한 똑똑한 사람이지만 자기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상으로 값진 인생은 없는 것이다.
      우선 놀고나서 일하라고 하는 사람,
      쉬어가며 일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
      자기 맡은 일에 부지런히 할 필요없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일을 해봐야 별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
      주의 일 한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있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
      어뜻 보면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망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지런해도 자기가 해야할 일에 대하여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남의 일 비판하고, 남의 일 간섭하는 데 부지런한 사람도 그렇다.
      남의 다리 부지런히 긁어보았자 내 다리는 항상 가려운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값진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의 돌쩌귀

      자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돌쩌귀는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돌쩌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때 문제에 빠집니다.
      의기 소침, 편집증, 정신분열, 강간, 자살,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불안증세는 고립감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분 경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경영자들에게 매일 최소한 1분 동안 고용인들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매일 단지 1분 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면 많은 회사들에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고용인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며, 점차 자동화되어 가는 작업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쩌귀에 기름을 칩시다.
      매일 다른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두 가지 일을 시작합시다.
      그것이 음식이든, 전화든, 편지든, 카드든, 1분 간의 감사의 말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 당장 그 일을 합시다.
      누군가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거든, 그를 칭찬합시다.
      누군가 일을 철저히 하고 있거든, 그를 격려합시다.

      거듭난 사람

      미국에 있는 어떤 자매가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정을 살펴보니 남편은 여전히 세상의 쾌락을 좇고 있었다고 한다.
      TV프로도 세속적인 것만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자매도 전에는 그런 프로를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설교가 나오는 프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자매의 모습을 본 남편은 빈정거렸다.

      “당신, 완전히 돈 사람 같군. 술이나 담배도 안하고 바가지도 안 긁고 욕도 안하고 이젠 하루 종일 기도하고 성경만 읽네. 그러고도 얼굴엔 늘 기쁨이 가득하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그래.”

      주일이 되어 성경을 들고 집을 나서면 남편과 시누이들이 비웃었다.

      “아니, 성경은 왜 가지고 가?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읽어 주시는데 뭐하러 귀찮게 성경을 가지고 가?”

      미국의 교회 목사님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세상적인 말을 더 많이 하고, 또 성도들은 그런 말만 듣고 성찬만 행하면 다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답답한 일인가?

      거듭나기 전의 자매 모습도 물론 이들과 같았지만, 이제 은혜를 받고 나니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던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처럼, 그 자매님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증거인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사르크스, 푸쉬케, 조에) / 사람(영 혼 육) Spirit. Soul. Body


      생명(生命)

      1. 육체적 생명(사르크스)

      사르크스와 소마


      2. 정신적 생명(푸쉬케)



      3. 영원한 생명(조에)





      사람(영 혼 육)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는 이분법 설명과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삼분법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두가지 모두 맞는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적 설명은 존재론적 분류
      삼분법적 설명은 기능적 분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능적으로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동의할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육체는 분명히 육체로 드러납니다.
      반면에 사람이 죽었을 때는 영혼이 육체에서 떠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은 존재론적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나눔 및 분리를 뜻하는 11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몸에 대한 주석 링크는 여길 누르시고, 해당 설명만 발췌한 부분은 이 글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연히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의 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은 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금 분향단과 금향로 및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또한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라고 노래합니다.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육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하지만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희생 제물과 헌물에 차이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저의 생각을 도표로 만들어 정리한 것입니다.   

      다음은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이 책에서 네 가지의 부활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는 역사적 부활이다.

      그는 특유의 논리적 접근을 통해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증명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부활을 맹신할 수도 없는 것임을 성경적 증거에 따라 설명해간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과 증거와 믿음이 어우러진 결과임을 이야기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결코 이성과 상반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마틴 루터와 바울의 예를 통해, 부활의 역사성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입증한다.
      부활은 신자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제공해주고 그 힘은 어려운 순간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연약한 바울이지만,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능력의 바울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역사성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미래를 위한 소망(for the future)일 뿐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소망(from the future)임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조지 래드가 말한 '미래의 현존'이라는 개념을 통해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임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연방)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프란시스 쉐퍼 부부의 라브리 사역을 소개한다.
      죄악으로 깨어진 세상 속에서 라브리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성경적 가치를 충실히 고수하는 쉐퍼 부부였지만 그 집은 각종 미혼모들과 정신병자들 그리고 회의주의에 사로잡힌 청년들의 안식처였다.
      명확한 진리를 가졌지만, 풍성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쉐퍼 부부의 아들인 프랭크 쉐퍼는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조목조목 하나님을 논증했지만 ... 어떤 말보다도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은 두 분이 기꺼이 희생한 재물과 사생활과 시간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도 있었고, 이용당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늘 기본이었다."

      부활은 우리가 미래에 맞아야 할 기다리는 소망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시작된 소망이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연방)와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의 삶을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한다.

      셋째는 부활은 인격적 만남으로 확증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사실이지만, 이것을 아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그분과 연합된 것을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들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변화되기 시작한다.

      팀 켈러는 마리아, 도마, 베드로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예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격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 인격적 만남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천편일률적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는 마리아에게 맞는, 도마는 도마에게 맞는 가장 필요한 만남으로 부활을 경험시켜 주셨다.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경에는 도마가 손을 넣어보았다는 말이 없다.
      손을 넣어보지 않고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한다.
      도마의 의심을 무너뜨린 것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도마의 의심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려고 하신 마음 때문이다.
      예수님은 도마가 그런 증거를 원한다는 것을 아셨다.
      제자들 중에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냉소와 두려움 모두 안아주시고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도마가 느낀 것이다.

      또 배신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려주심으로 사랑을 확신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수학 공식처럼 증명해주시지 않고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인격적 만남이다.

      넷째는 부활은 삶의 각 영역의 문제들로 인한 두려움에 맞서게 한다.

      부활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직면하게 해주고, 두려움에 맞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준다. 팀 켈러는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 문제, 차별문제, 경제적 불균형, 성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바로 성경 안에 있음을 증명한다.

      팀 켈러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문화적인 대안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부활을 통해 회복하는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는 정의에 집중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집중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너무 큰 거대 담론보다는 오늘 내가 지역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을 권한다.

      참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거꾸로의 나라' 라고 할 수 있다.
      연약한 자와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는 나라이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들에게 부활은 기쁜 소식이 된다.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도 수많은 난관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면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것과 그 어떤 어둠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순히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삶으로 또 사회적으로 풍성하게 적용시켜 준다.
      두려움의 시간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일 뿐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현존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선포이다.

      03-07-2021(주일) 오전 6:50

      영혼(영혼)의 무게

      존 맥두걸(1947년 ~, John A. McDougall)은 아일랜드 혈통의 미국의 의사, 작가, 기업가이다.
      그는 퇴행성 질환은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기름을 멀리하고, 채식과 감자, 쌀, 옥수수와 같은 녹말음식 섭취를 통해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맥두걸은 식료품업체인 '맥두걸의 좋은 식품'의 공동 설립자이며 미국 책임있는의사회의 회원이다


      맥두걸 박사는 영혼이 어느 정도의 질량을 가진 물체이며 질량보존의 법칙이 사람이 사망할 때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만큼 무게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동의를 얻어 초대형 정밀 저울을 이용해 사망할 때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땀의 증발이나 체내 호흡으로 인한 수분 감소, 그 외 여러 가지 변수를 감안하여 진행된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약 21g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맥두걸 박사는 개 15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한 후 “사람과 달리 개는 죽을 때 몸무게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며 “개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2007년 스웨덴의 한 연구팀이 맥두걸 박사의 실험 진위 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시도했다.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를 이용해 임종 시 일어나는 체중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정확히 21.26214g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해부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의사 헤로필로스(Herophilos)는 영혼을 찾기 위해 죄수 수백 명을 산 채로 해부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합리주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도 영혼을 찾기 위해 죽은 사람을 해부한 적이 있다.
      그는 멜라토닌 생성을 조절하는 뇌의 송과선에 영혼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영혼의 존재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인류가 그토록 규명하고자 했던 영혼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생령, 즉 살아 있는 사람은 흙인 육체와 생기인 영혼의 결합체다.
      생명의 수한이 다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육체는 땅으로, 신적 존재인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전도서 12:7).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영혼은 또 다른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6) 

      욥이 말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는 존재가 무엇이겠는가?
      영혼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고 믿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 이후에 맞이할 영혼 세계의 삶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1~12)

      육신의 죽음 이후, 인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다.

      영혼의 세계를 준비하는 삶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행적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도들은 장차 가게 될 영혼 세계를 생각하며 진리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았다(베드로후서 1:13~14, 고린도후서 5:1~9).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분부하신 새 언약 유월절 규례를 가리킨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14-3:3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natural man)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men of flesh)
      영에 속한 사람(spiritual man)

      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1.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2. I gave you milk, not solid food, for you were not yet ready for it. Indeed, you are still not ready.
      3. You are still world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quarreling among you, are you not worldly? Are you not acting like mere men?



      육(肉)에 속한 사람(NATURAL MAN)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ψυχικος  ανθρωπος)

      성령의 인도보다 열정, 욕망, 욕구, 그리고 육의 감각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는 사람. 그
      러한 사람은 육체적인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때문에 육신에 속하며 필멸에 처해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이기를 그치기 위해서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거듭 나야 한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5591.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ψυχικός, ἡ, όν 

      1. 목숨에 관한.  2. 고린도전서 2:14.  3. 육체적인 것
      발음 / 프쉬키코스[ psüchikŏs ]
      어원/ 55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욕의(약3:15), 육에 속한(고전 2:14, 유 1:19), 육의(고전 15:44, 46).
      신약 성경 / 6회 사용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육신(肉身)에 속한(CARNAL) 사르키노스(σάρκινος)

      영적이지 않은 어떤 것, 특히 이 단어는 필멸의 것 또는 현세적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거나,
      또는 세상적이며 육체적이며 육욕적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4560. 육신에 속한 사람(사르키노스) σάρκινος, η, ον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사르키노스[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신약 성경 / 4회 사용


      4559. 육신에 속한 사람(사르키코스)  σαρκικός, ἡ, όν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발음 / 사르키코스[ sarkikŏs ]
      어원/ 45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신약 성경 / 7회 사용


      영(靈)에 속한(SPIRITUAL MAN)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4152. 영에 속한 사람(프뉴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 롬7:14
      발음 / 프뉴마티코스[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마티코스'는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1 수요성서학당 제1강 / 01-06-202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47)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Ⅰ. 첫째와 마지막의 의미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란 용어에서 과 마지막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첫 아담은 처음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마지막을 대표하는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은 서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 가운데서 성장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 아들과 딸이 공부할 때 1등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10등하는 것이 좋아요. 
      1등하는 것을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10등을 했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를 올려라!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1등을 한 번도 못했으면서 자식에게 1등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慾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배경을 정리하려고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이승혁(李勝赫)" 입니다.
      한문자의 의미는 이겨서 빛을 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 "이겨서 빛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받은 내용 중에 "목사님께서 이제까지 저희들에게 본이 되신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있으면서 매일 오늘의 묵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빛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번역합니다.
       즉 이겨서 빛을 낸다는 것을 물리적인 빛, 세상적인 빛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자서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반드시 무슨 경쟁 구도에서 1등을 하기 때문에 이겨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빛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람의 의미

      서양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물론 탈레스 이전에도 철학자가 있었지만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냐?
      만물의 근원을 아르케라고 합니다.

      철학의 주제가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헬라 철학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주된 관심이 자연계 즉 바람, 불,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철학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은 하였으나 아직도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안드로포스는 인간 즉 사람이란 뜻입니다(a man, human, mankind).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고 합니다.

      윌리암 피터(William Peter)라는 사람의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돈으로 유리구슬을 구입했고 먹고 싶었던 알사탕도 사서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길을 걸을 때마다 길바닥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길바닥만 걷다보니 결국에는 그가 얻었던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백 개, 반짝이는 유리구슬,  옷핀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만 보고 걷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굽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는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호모 프로스팩투스, Homo Prospectus)
      둘째는 희망하는 존재(호모 에스패란스, Homo Esperans)

      우리들은 한국적 인간이라고 합니다(Homo Coreanicus)

      * 참고 자료 : 인간에 대한 학명(學名)

      호모 쿨투라(homo cultura) : 문화적 인간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 교류하는 인간
      호모 알테르나투스(homo alternatus) : 대안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 학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 수중적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 원자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 소비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homo convergence) : 융합형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 창의적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하는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 윤리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하는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부커스(homo bookus) : 책 읽는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 매개체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 : 유목하는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 기호의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 우주적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포비아(homo phobia) : 동성애 공포증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 축구하는 인간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 기술적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 시적인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 사진 찍는 인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 출처 : https://leoedu.tistory.com/63 
      - 참고 자료 출처 : https://moviemaker.tistory.com/72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다 신앙안에서 죽는다면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장례문화를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동안 관습처럼 진행하던 입관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라는 순서에 대해서 성경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육체는 이미 흙과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떠나갔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앞에 놓고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신앙인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배를 하지 말고 가족끼리 묘지에 가서 시신을 안장하고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부탁합니다.
      죽은 시신을 앞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마음이란 신약의 언어 헬라어

      1. 카르디아 : 마음, 심장
      2. 프로네마 : 뜻, 의지, 생각, 목적

      바울은 빌립보교우들에게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인지 보겠습니다.

      5절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이 있게 하라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도 있는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KJV은 그 원문 대로 번역되었고,
      NIV는 너의 attitude가 그리스도 예수의 태도와 같아야 한다고 의역되어있습니다. 

      본문에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네마(φρονημα)입니다.
      프로네마 뜻, 생각, 의지, 목적이 강조되는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엔 마음이란 단어로 카르디아(καρδια)가 있습니다.
      카르디아는 단순히 마음, 심장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런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프로네마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본문에서 두 가지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낮추는 마음
      둘째는 순종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마음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 자체가 자신을 낮추고 종이 되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시는 동안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과 영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무시당하며 거의 밑바닥 험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헤롯이 죽이려고 해서 피신 다니셨고, 청소년 시절은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와 육체 노동을 하셨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 사역하신 후엔 온갖 비난과 모욕을 당하다가 결국엔 모함으로 십자형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에게도 힘든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이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시고, 그 사람 중에서도 왕이나 귀족이 아닌 목수의 아들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시다가 마침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종답게 살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인 된 속성 가운데 하나가 교만, 즉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살기를 힘씁시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순종하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수모와 고통을 받으며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한 특성을 갖게 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26:38).
      그 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마시지 않고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죽음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원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감정의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드신 하나님의 뜻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순종하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또한 나의 구원의 성취에서 한 걸음 더 나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전도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돕는 것도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자신을 낮추고 사람으로 태어나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인이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종의 마인드, 종의 에터튜드(attitude)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 나라에서 복 받은 자가 되기를 더 소망했습니다. .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단지 겸손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속마음은 어떠하든 겉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겸손하게 보입니다.
      인정받기 위한 전략으로 겸손한 척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종처럼 남을 섬기거나 죽는 자리까지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려면 먼저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교만한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아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항적이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 사람인 아담과 이브는 금지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은 죄악으로 차고 넘쳤다고 나옵니다.
      홍수 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대신 바벨탑을 지어 저항했습니다(창 11:4).
      가나안에 정착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백성들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갔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롬 1:28).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순종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사실입니다.

      히브리서11장엔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끝낸 게 아니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시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던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 백성들은 칠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궁휼히 여기는 마음 


      본문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하나를 더 말하면 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직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어머니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포도주가 떨어져 곤란하게 된 혼인 집을 도와주셨습니다(요 2장).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마 4:25).)
      남성편력이 있던 사마리아여인과(요 4:10)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요 8:11)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취급 당하던 세리, 거리의 여인도 친구처럼 대하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적용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생기겠습니까?

      그 출발은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 마음으로 교체되고 성령께서 새 마음에 거하시며 감동받게 해주시면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음이라는 단어에는 뜻, 생각, 의지, 목적이 담겨있다고 말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닮겠습니까?
      닮겠다는 의지와 실천이 없이 어떻게 태도가 바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어떻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상 유혹과 욕망을 이겨내겠습니까?

      마음은 행동을 지배하고 행동은 삶의 내용을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오늘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바울 사도께서 강조한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낮추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서로 서로 섬깁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줍시다.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참여합시다.
      이렇게 살면 여러분도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음이란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


      1. 레브 / לֵבָב

      2. 루아흐(영) 학개 1:14, 마음을 흥분시키다 즉 영을 각성시키다.

      레브(명남)는 레바브(לֵבָב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 레브와 3824 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לֵבָב  3824

      1. 마음,  2. 혼, 3. 기분

      발음 / 레바브(lêbâb) ]
      어원 /  연계형 לְכַב, 어미활용 לְבַבְכֶם ,לְבָבִי, 복수 לְבָבוֹת, 대상28:9, 382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마음(창 20:5, 느 9:8, 겔 3:10), 심중(신 7:17, 9:4, 대상 29:18), 전심(왕상 14:8, 왕하 20:3), 성심(대상 12:38), 한마음(대하31:21, 시 86:11), 총명(욥 12:3), 낙심(사 7:4), 용맹(단 11:25), 가슴(나 2:5).
      [동] 지혜있다(욥 34:34), 살피다(학 1:5), 알리다(창 31:26), 기억하다(학 2:18), 낙심하다(신 1:28), 명심하다(신 4:39), 깨닫다(대하 6:37), 결심하다(대하 30:19, 느 9:8), 위로하다(대하 32:6), 총명하다(욥 34:10).
      구약 성경 / 252회 사용

      3820 לֵב

      발음 / 레브(lêb)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 생각(삿 5:15, 시 33:11), 진심(삿 16:17), 기력(삿 19:5), 관념(삼상 4:20), 인심(삼하 15:13), 심장(삼하 18:14, 시 38:10), 염통(왕하 9:24, 시 45:5), 한마음(대상 12:38, 시 83:5), 성심(대상 29:9), 전심(대하 17:6, 시 119:10, 겔 44:5), 뜻(대하 24:4), 충심(시 34:18), 총명(욥 12:24), 지혜(욥 36:5, 잠 10:8, 전 1:17), 지식(잠 10:21), 의사(잠 18:2), 생각(잠 24:32), 명철(전 7:7), 지각(렘 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 42:28), 간곡하다(창 50:21), 낙심하다(민 32:7),염려하다(삼상 9:20), 개의하다(삼상 25:25), 낙담하다(삼상 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 7:27, 애 3:33), 상심하다(삼하 13:33), 깨닫다(왕상 8:47), 감동시키다(대하 30:12), 위로하다(대하 30:22), 주의하다(욥 1:8, 전 7:2), 담대하다(시 27:14), 살피다(시 48:13), 무지하다(잠 6:32), 간교하다(잠 7:10), 착심하다(잠 23:12), 진술하다(사 41:22), 기억하다(사 46:8), 낙심하다(렘 4:9).
      [부] 다정하게(삿 19:3), 뜻대로(삼하 7:21, 대상 17:19), 담대히(렘 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hear)t은 창세기 6:5에서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לֵב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23:34).

      레바브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30:14, 참조: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 참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23:7).

      레브는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35:5, 참조: 35:21,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4:14, 참조: 삼상 2:1).
      즐거운 마음(16:25),
      겁내는 마음(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20:5, 참조: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30:6).

      동의어 - (관련성구)

      (990, 베텐) בֶּטֶן

      몸, 배, 자궁
      베텐은 '몸 body, 배 belly, 자궁 womb'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2회 나온다.

      셈어 동족어에 의하면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내부' interior이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하복부'를 의미하며 아마르나 석판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여자의 자궁' woman's womb이나 '위' stomach를 가리키기도 하며,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때로 병행되어 나오는 레헴(자궁 womb)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에훗이 칼로 모압 왕 에글론의 베텐을 찔렀다는 언급은 시적인 정의(이야기 따위에서의 권선징악)의 특성을 암시해준다.
      왜냐하면 충분히 만족해 있는 이 통치자, 즉 '매우 뚱뚱한 이 사람'은 희생자들의 노획물로 삶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베텐(beten)을 땅에 댄다는 것은 굴욕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44:25, 애굽의 부조와 아마르나 석판).

      '모태에서부터'와 '베텐의 열매'라는 어구들은 관용어로서, 전자는 '나면서부터', 후자는 '몸에서 나온 것' 혹은 '자녀'를 나타낸다.

      베텐은 지혜 문학에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표현하거나 욕망의 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다(참조: 15:35, 20:20, 18:8, 18:20 등). 이 단어는 총체적인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 네페쉬(혼 soul)와 병행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언급들에서 '몸' body은 베텐의 내장(visceral) 성질을 나타내기에는 어감이 다소 흐릿한 번역이다(31:9, 44:25, 6:7).

      하나님을 베텐(beten)과 관련지어 언급함으로써, 그가 태아를 만들고 형성하는 분이며(3:1-11, 31:18, 139:13, 1:5, 참조: 51:15), 어린 아이를 자궁에서 나오게 하시며(22:9, 46:3) 첫 순간부터 그 생명을 감독하시는 분(71:6, 49:1)임을 시사해 준다. 자궁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127:3, 참조: 7:13, 28:4, 28:11, 30:9). 그렇지만 악인은 '모태에서부터(메라헴)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밉베텐) ...거짓을 말하는도다'(58:3). 그리고 하나님은 간음한 여자의 자궁을 저주하신다(5:21).

      아마도 신들이 모태에서부터 왕들을 불렀다고 하는 바벨론 사상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서, 이사야는 종을 만드시어 모태에서부터 그를 부르신 이가 바로 여호와였다고 선포한다(44:2, 44:24, 49:5).

       

      동의어] (관련성구)

      (2416, 하이) חַי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하이(형용사)는 하야(hy:j; , 2421: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living, aliv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이 형용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수식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으며(3:10, 2:1, 42:3, 등), 또한 죽었거나 말라버린 것에 대조되는 사람, 동물, 채소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복수어형은 흐르는 물 혹은 신선한 물을 묘사하고 있다(26:19, 14:5, 14:6, 19:17 등).

       

       

      [동의어] (관련성구)

      (3824, 레바브) לֵבָב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 3820 레브를 보라.

       

       

      [동의어] (관련성구)

      (3826, 립바) לִבָּה

      마음 heart

       

      립바(명여)는 레브(ble , 3820)의 여성형이며, '마음 hear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온다.

      립바는 마음이 정직한 것(125:4),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44:18), 마음이 악한 것(16:30)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마음을 연단하고(17:3), 마음을 감찰하신다(7:9, 21:2). 하나님 앞에는 인생의 마음이 완전히 드러난다(15:11).

       

       

      [동의어] (관련성구)

      (4578, 메에) מֵעֶה

      내부기관, 내장, 배, 창자

       

      메에(명남)는 '내부기관, 내부에 있는 부분들, 내장, 배, 창자'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셋 혹은 네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이 명사는 사람, 즉 남성 및 여성과 연관되어 있다. 2회에 걸쳐 이 단어는 바다의 큰 고기와 관련되어 사용되며 그 고기의 배가 요나의 일시적인 바다 밑의 거주지였으며 그곳에서 요나는 기도하였다(2:1-2).

      2회에 걸쳐 이 명사는 하나님의 감정과 연관된 구절에서 발견된다. "주의 열성(키나)과 주의 능하신 행동(게부라)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하몬 메에카)와 긍휼(라하밈)이 내게 그쳤나이다"(63:15, 참조: 31:20, H19).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며 성별을 교차하여 사용한다. 이 단어는 남자에 쓰일 수 있다. 30:27(욥), 삼하 16:11, 삼하 17:12(다윗), 대하 21:19(여호람), 대하 32:21(산헤립), 15:4(아브라함).

      다음의 구절에서 이 단어는 여자들을 언급한다. 71:6, 49:1(어미), 1:11(나오미), 25:23(리브가).

      종종 여성을 언급할 때, 메에는 '자궁'을 의미하는 베텐과 병행된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세 가지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첫째,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사용되어 사람의 내부기관, 창자, 위를 언급한다. 따라서 에스겔(3:3)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두루마리(메에는 베텐에 병행함)를 먹고 '배'와 '창자'에서 소화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참조: 7:19, 네페쉬에 병행함). 대하 21:15(2회), 대하 21:18-19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왕 여호람의 "창자"에 감염시키신 무서운 질병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질병은 어떤 종류의 복부질병으로, 아마 창자의 탈장 유무와 관련된 무서운 설사병이었음에 틀림없다.

       

      메에가 사용되는 둘째 측면은 남녀의 생식 기관을 언급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단순히 소화기관 이상의 것이 포함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남녀의 생식 기관, 즉 성 기관의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15:4, 25:23, 1:11, 삼하 16:11, 삼하 17:12, 대하 32:21, 48:19).

       

      메에가 사용되는 셋째 측면은 감정의 자리를 나타내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관련하여 언급하였다(63:15, 31:20).

      따라서 이사야는 모압에 대하여 온몸(메에)과 마음(키르비)으로 떨며 슬퍼하였다(16:11).

      예레미야는 소리쳐 "나의 고뇌여, 나의 고뇌여"라고 울부짖는다(4:19, "슬프고 아프다"). 예레미야 애가서의 기자는 유사한 감정을 표현한다(1:20, 2:11).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심중"에 숨긴다(40:8).

      이 단어는 신부가 자신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5:4).

      말의 이러한 비유는 신약성경에로 확대되어 다음과 같이 쓰인다. "자비의...창자(스플랑크나)를 입고"(3:12), "그리스도 안에...무슨 창자와 자비가 있거든"(2:1, 한글개역 "무슨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신체기관에 관한 은유적 용법은 고대에서 더욱 일반적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간장(카베드, 가끔 영광을 의미하는 카보드로 잘못 표기되기도 함)을, 애정에 대해서는 신장(켈라요트)을 애정과 심정에 대해서는 심장(레브)을, 자비에 대해서는 복부 기관(메임)을 사용한다(다양한 용어들을 참조). 영어에서 '심장'(heart)이란 단어는 이러한 표현의 대부분에 대해 사용되며 '심장'은 그러한 대부분의 말들에 대한 합당한 번역이 되고 있다. 물론 감정을 표현하는 신체 기관에 관한 히브리적 용법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현대인들이 자비가 가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도 역시 자비가 복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단순히 일반 언어 용법을 반영하고 있으며(유대인에 의하여 창안된 것이 아님), 따라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상태는 그 감정이 어떻게든 해서 영향을 미치는 기관에 의하며 묘사된다.

      (참조: V. P. HAMILTON; BDB).

      [동의어] (관련성구)

      (5315, 네페쉬) נֶפֶשׁ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9:4 이하, 17:11, 17:14,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동물에 대해,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63:1), 기쁨(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12:20, 12:21), 육체의 욕망(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119:28), 눈물을 흘리며(30:16), "오래" 참는다(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4:2, 5:1, 5:2, 5:4,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1:5,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6:6). (G. Harder)

       

       

      [동의어] (관련성구)

      (7307, 루아흐)  רוּחַ

      숨, 바람, 영

       

      루아흐(명여)는 루아흐(j'Wr , 7306: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나온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19:17 내 '숨'; 코의 숨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135:7, 51:17,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33:6, 참조: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6:26, 16:3,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15:8, 삼하 22:16, 4:9, 18:16, 30:28, 59:19. (2) 사람에 대하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6:17, 7:15, 7:22, "기식": 37:5, 37:6, 37:8, 37:9, 37:10,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8:1, 15:10, 11:31, 왕상 18:45, 10:13, 51:16, 135:7, 13:15, 40:7, 참조: 26:13. 동풍 10:13, 14:21, 48:8, 18:17, 17:10, 19:12, 27:26, 4:8. 북풍 25:23. 해풍(서풍), 10:19. 낮의 바람, 3:8. 사방 바람, 49:36, 37:9, 8:8, 11:4, 2:10, 6:5. 광풍, 107:25. 광풍 148:8, 1:4, 13:11, 13:13, 55:9. 뜨거운 바람,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18:11, 104:3, 참조: 4:19,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42:16 (동)편; 42:17 (북)편; 42:18 (남)편;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26:18,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1:14, 2:11, 2:17, 2:26, 4:4, 4:6,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1:7, 4:16,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45:27,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5:1,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19:3, 77:4, 142:4, 143:4, 2:11,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9:23, 8:3, 16:32, 참조: 25:28, 29:11, 15:13, 6:8, 7:9,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6:9. 참조: 2:7, 14:29, 32:18, 21:4,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41:8, 26:35, 54:6, 참조: 3:14, 6:4,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21:7, 참조: 61:3, 15:4, 15:13, 17:22, 18:14,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1:1, 1:5, 51:11, 1:14, 왕하 19:7 = 37:7, 14:24, 2:15, 2:16, 2:30, 5:14, 5:30(시기), 4:12, 5:4, 19:14, 28:6, 41:38, 17:27.

       

      (d) 예언의 영. 27:18, 왕하 2:15, 왕하 2:9, 29:10(참조: 2:21, 15:12,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2:11, 13:2, 참조: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12:1, 27:3, 참조: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10:12, 12:10, 16:22. 27:16,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78:39, 38:16(생명의 원리), 146:4, 104:29, 104:30, 17:1, 34:14(참조: 15절), 57:16, 8:8, 11:5, 3:21, 12:7,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의 유비(analagy)가 강하게 시사해준다(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1:2. 참조: 11:17,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51:11, 참조: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26:13)나 섭리에서(33:4,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11:9,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9:20,143:10, 2:5), 지도권(11:25, 6:34, 삼상 16:13), 섬김(11:17, 6:34, 삼상 16:13), 섬김(11:17, 3:8,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11:2, 42:1, 61:1)와 그의 백성들(2:28 [H 3:1],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104:4(참조: 왕상 19:11-12).

      (참조: BDB; TWOT).

       

      [참고 - 루아흐(j"Wr , 7307). 바람 wind, 호흡, 숨 breath, 마음 mind, 영 spirit. 이 명사는 구약성경에서 387회 나오는데, 대개 여성형이다. 비록 몇몇 학자들은 이 단어가 라와흐(jw"r; , 7304, 넓다, 광범하다 be spacious, 원기를 회복하다 be refreshed)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나(삼상 16:23, 32:20, 히필형 '헤리아흐': '기체를 호흡함으로써 지각하다', KB, p.877, 아래를 보라). 아인 모음(ayin-vowel) 어근 루흐(숨을 쉬다 to breathe)와 관계가 있는 어원 명사(primitive noun)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BDB, p.924), 참조, 레아흐(j'yre , 7381, 냄새, 향기 odor), 우가릿어 rh.

       

      '루아흐'(헬라어 프뉴마)의 기본적인 개념은 '움직이는 공기' air in motion이다. 여기서 공기란 악어의 비늘 사이로 나올 수 없는 공기(41:16 [H8])로부터 한 바탕의 폭풍(25:4, 1:11 ASV, RSV)에 이르기까지의 공기를 가리킨다. '네 바람', 루호트는 세상의 네 방위를 기술한다(49:36, 37:9). 동물이든(7:15, 104:25, 29), 사람이든(42:5, 37:5) 혹은 양자 모두이든지(7:22-23) 생물에게 있어서 루아흐는 호흡을 가리킨다. 여기서 호흡은 흡입한 것일 수도 있고(2:24) 입술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11:4, 9:18, 죽은 우상들과 대조, 10:14, 51:17). 하나님은 '루아흐'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영 spirit[S], 한글개역 "기운")가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27:3).

       

      호흡은 능력(왕상 10:5, 여기서 시바의 여왕은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 즉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당했다), 담력(2:11, 5:1, 이스라엘의 적들의 '영' spirit이 낙담했다), 가치(4:20, 여기에서 다윗 왕은 '우리 콧구멍의 호흡'[한글개역, "우리의 콧김"] 혹은 완전한 희망이었다고 언급한다-이 표현은 상용 애굽어 twn fnd.sn '그들의 코의 호흡'에서 차용한 것이다)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루아흐'(바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단순한 호흡'의 헛됨, 무익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7:7, 41:29). 공기의 돌진, 어떤 사람의 코를 통해 나오는 거센 콧바람처럼 '루아흐'는 호전적인 감정(25:4)이나 분노의 감정(8:3, 29:11, ASV, RSV)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호흡은 활동과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병들거나 쇠약할 때 그 '영'이 쇠한다(17:1). 그러나 그 영은 '두번째 바람'으로 되돌아 오며 그는 '소생한다'(15:19, 삼상 30:12, 참조, 45:27). 전 인류의 호흡(루아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12:10, 42:5). 따라서 6:3은 RSV처럼 '내 영(하나님으로부터의 생기)은 영원히 인간 안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70인역본을 따름). 왜냐하면 그는(필멸할)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날들(홍수까지)은 120년이 될 것이다'(참조, 34:14-15)라고 번역하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우에 그밖의 곳에서는 '루히'가 '나의 영' my spirit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거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스파이저(speiser)는 '인간에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인간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JBL 75:126-29).

       

      그러나 인생의 독특한 성질은 물질적(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에 있다. 인간의 '호흡', '숨'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2:7, 1:2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은 인간의 내적 존재-이것은 삼위일체('우리', 1:26)의 뜻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2:20)-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은 너의 마음, 즉 '루아흐'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5, 20:32). 다니엘의 아람어 성경도 완악해진 느부갓네살의 마음(ASV, spirit)에 대해 언급한다(5:20). 심지어 물리적인 경향을 지닌 동사 '리아흐'(냄새 맡다, 27:27)도 비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실은 불에 '닿을'(ASV, '냄새 맡을' smelleth, 16:9) 때 끊어진다. 이 단어는 또한 정신적인 자각(앎)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희생제사를 '받으실' 것이다(ASV 난외주는 smell[냄새맡다]이라고 표기함, 삼상 26:19). 사실상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의 목적은 '레아흐 한 니호아흐'(달콤한 향기 sweet savor), 즉 달래는 향기(8:21, NASB 'soothing aroma)를 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속죄 개념으로 상징적, 예표적으로 지적된다. 나아가 명사 '루아흐'는 마음의 성향 혹은 태도를 묘사한다. 갈렘의 마음은 그의 불신실한 동료들의 마음과 달랐다(14:24, 참조, 산헤립의 영, 즉 왕하 19:7에 나오는 결심). 사람의 '루아흐'는 슬플 수도 있고(왕상 21:5), 압도당할 수도 있으며(77:3[H4]), 회개할 수도 있다(57:12). 사람의 '루아흐'는 '차가울'(억제될) 수 있고(17:27), 질투할 수도 있으며(5:14), 인내하거나 교만할 수도 있다(7:8). 사람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34:9) 매춘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다(4:12).

       

      끝으로, '루아흐'는 인간의 완전한 영적인 의식을 나타낸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한글개역,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26:9),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리며'(16:32, 참조, 5:20). '마음에 간사가 없다'(32:2).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다루긴 하지만(참조, 네페쉬 '영혼', 종종 단순히 '자아' self라고 번역된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이원론을 인정한다(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 p.202). 영과 육이 결합하여 '자아' self를 이루며,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루아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은 '네페쉬'이다(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네페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떠난다고 한다). '루아흐'는 그 몸의 니드네(칼질 sheath) 속에 담겨 있다(7:15, 아람어, 참조, 12:1). 몸은 죽을 대 티끌로 되돌아 가지만 불멸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3:19, 12:7). 이와 관련하여 '루아흐'와 '네페쉬'는 여기서 분명히 '영혼' soul을 의미하며,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7:11, 26:9, 참조, 6:9, 21:4, RTWB,p.234). 이는 자유주의 신학과 다르다. 자유주의 신학은 '루아흐'를 '네페쉬' 안에서만 개별화되는 비인격적인 생명력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은 영혼이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루아흐' 혹은 '힘'(power)이 떠날 때(12:7) 사람은 존재하기를 그친다는 것이다(L. Kohler, old testament Theology, p.145, 이 주장은 Davidson, op. cit.,pp. 200-201에서 반박당한다). 그러나 '네페쉬'와 '루아흐' 양자 모두 죽을 때 몸을 떠날 것이며 몸에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35:18, 86:13, 영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드문 실례에 대해 왕상 17:22을 참조하라).

       

      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루아흐'는 초자연적인 존재, 천사같은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16:23, NASB). 이러한 초자연적 존재의 기능은 계시 기능일 것이다(4:16[?], 참조, 1:9, 19[H1:9, 2:2, mal'ak, q.v.]. 또는 적당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루호트'(바람 winds, 104:4, '영들'이 아님, 1:7) 나불(참조, 왕상 19:11-12)로 이용하기도 하셨다. 사탄은 '참소하는 큰 영'이다(왕상 22:21). 다른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영적인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시다(31:3). '루아흐'는 의미의 범위를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의 '호흡'(한글개역, "기운")은 강한 바람일 수도 있다(40:7, 59:19, 참조, 11:31). 주의 '영'은 단순히 활동적인 능력이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지도하였느냐", 혹은 '누가 여호와의 마음[의도]을 알았느냐', 70인역본과 고전 2:16도 마찬가지임). 하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루아흐 야훼'(YHWH, 여호와의 신)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다는 것을 문맥이 입증해주며 신약성경의 유비(analogy)가 강하게 시사해준다(A. F. Kirkpatrick, Cambridge Bible, Psalms, Ⅱ, p.293). 최초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처럼'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1:2)(H. Schultz, Old Testament, Ⅱ, p.184), 여호와 및 모세의 임재와는 구별되며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신' 그의 인도하시는 임재를 참조하라(11:17, 25).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51:11[H13], 참조, 63:10-11). 그리고 이사야는 그를 자신에게 영감을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speaker)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로 말한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26:13)나 섭리를 계속하심에 있어서(33:4, 104:30) 우주적이며, 중생(regeneration)에 있어서 구속적이다(11:19,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이해 내주하시며(9:20, 143:10, 2:5), 지도권(11:25, 6:34, 삼상 16:13), 섬김(11:17, 3:8,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11:2, 42:1, 61:1)와 그의 백성들(2:18[H3:1], 32:15)에게 장차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한다. - J. B. Payne.] (p.1322-1324*).

       

      ['루아흐'와 '네페쉬'의 차이점, '루아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며, 이성, 의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전해주며 고무적인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활력은 결국 개인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네페쉬'가 된다. 개개인에 독특한 인격은 인간의 정서와 욕구의 자리인 '네페쉬'에 원래부터 있다. '루아흐'는 그 자체내에 그 활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생명령이다. '네페쉬'는 보다 주관적이고 조건부적인 생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루아흐)와 '프쉬케'(네페쉬)를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 G. L. Archer.](p.1324*).

       

       

      [동의어] (관련성구)

      (7308, 루아흐) רוּחַ

      바람 wind,영 spirit

       

      루아흐(명여, 아람어)는 히브리어 루아흐(j"Wr , 7307)에 해당하며, '바람 wind, 영 spiri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회 나온다.

       

      (a) '바람'(2:35, 7:2).

      (b) '영'

      ① 사람의 영(5:20, 7:15, 지식의 자리로서, 5:12, 6:4).

      ② 신의 영(4:5, 4:6, 4:15, 5:11, 5:14).

      (참조: BDB; KB).

       

       

      [동의어] (관련성구)

      (7476, 라욘)  רַעְיוֹן

      생각, 사고

       

      라욘(명남, 아람어)은 히브리어 라욘(@/y[]r' , 7475)에 해당하며, '생각, 사고, 착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6회 나온다(2:29-30, 4:19, 5:6, 5:10, 7:28).

       

       

      [동의어] (관련성구)

      (7522, 라촌)  רָצוֹן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

       

      라촌(명남)은 라차(hx;r; , 7521)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회 나온다.

       

      라촌은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a) 첫번째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은총' 혹은 '호의'(33:16, 60:10, 5:12, 30:6, 30:8 등). 또한 왕들(잠언에만 나옴, 14:35, 16:13, 16:15) 및 모든 사람들(10:32, 11:27 등)의 호의나 은총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b) 둘째로 이 단어는 '기뻐함' 혹은 '받아들임'(28:38)이며, 항상 종교적혹은 제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라촌은 선물이나 희생 제물의 '허용할 수 있음' 혹은 '받아들임(열납)'을 묘사한다(1:3, 22:20, 56:7 등).

       

      (c) 세번째 이 단어는 하나님 '뜻'과 같이 '뜻'이라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소원' desire, '기쁨' pleasure이다(10:11, 40:9 등). 더 많은 본문들이 사람의 '소원' desire 혹은 '뜻' will을 묘사한다(대하 15:15, 8:4 등).

      야곱이 임종시에 한 축복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49:6에서 한가지 모호하고 난해한 용법이 나온다. 역본들은 독특한 독법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하였다. KJV는 "자기네들 뜻대로 그들은 성벽을 파내려 갔다" in their selfwill they digged down a wall, AV는 "그들은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they hocked an ox, RSV는 "그들은 제멋대로 소들의 오금을 잘라 절름발이를 만든다" in their wantonness they hamstring oxen, JPS는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소들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in their self will they houghed oxen이라고 번역한다(한글개역,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KJV가 히브리 논문을 가장 정확히 따르는 것 같다.(W. White)

       

       

      [동의어] (관련성구)

      (7907, 셰크위) שֶׂכְוִי

      하늘의 현상(모양), 총명, 깨달음

      셰크위(명남)는 '하늘의 현상이나 모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8:36에서 1회 나온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셰크위는 또 하나의 불가해한 단어 투호트와 함께 나란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포웁(M. Pope, Job, in AB, pp. 302-303)과 울브라이트(W. F. Albright, YGC, pp. 246-47)가 논한 바 있다.

      포웁(Pope)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 단어가 수성(水星)을 뜻하는 콥트어(Coptic) 명칭과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울브라이트(Albright)는 이러한 해석이 현대콥트어(Coptic) 학자들의 오류하고 선언한 다음 이 단어는 "선원" mariner, "어부" fisherman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병행한 이 두 단어를 투호트 항목에서도 논하였다. 투아흐를 보라. 한글개역은 본 단어를 "마음"으로, 투호트를 "가슴"으로 번역하였다(G. G. Cohen).

      (참조: BDB; HELOT)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04-20 오전 2:5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넣으신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걸어 다녔고 말도 했다.

      에스겔 37장

      뼈들에게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움직였고 살과 힘줄이 생겼으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다. 그리하여 생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이르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감으로 그들이 무덤에서 살아 나왔고, 하나님은 살아 나온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줌으로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살게 하셨다.

      영혼육 이란?

      사람의 육체(집) 안에는 생기와 신(영, 신령)이 있고, 또 혼(魂)이 있습니다.
      혼은 육체를 돕고, 영은 혼을 돕습니다.
      영(신령)은 떠날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곧, 영은 왕래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혼은 생기와 육체와 함께 있으며, 육체가 죽으면 혼은 떠나게 됩니다. 생기는 영과 혼이 아니며,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이고, 사는 힘입니다. 생기가 다 소모되어 육체 곧 집이 무너졌을 때는, 영과 혼이 사람에게서 살 수가 없으므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 영은 하늘로 가고 혼은 땅으로 갑니다.

      영과 혼은 썩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나, 육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영과 혼은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이는 두 가지 씨(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에 의해 달라지게 됩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기에 영의 집 즉 육체가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 계시록 성취 때에도 계시록 6장에서는 심판받아 멸망당하고, 8장, 9장, 12장에서 본바 사람이 1/3, 1/3, 1/3씩 다 죽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생령이 죽음으로 육신만 있는 자들이 되겠지요. 이들도 에스겔 37장과 요한복음 5장같이 생기가 들어감으로 다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신을 받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떠나가시고 생령이 죽음으로 결과는 흙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계시록 때에도 생령이 죽은 자들에게 계시 말씀인 생기와 하나님의 신이 들어감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이 생기는 계시록 2장에서 받은, 감추었던 만나 곧 계시록 10장의 생기 곧 계시 말씀으로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여 뼈 같은자가 아닌 하나님의 생기로 부활하는 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blog.daum.net/lixiao/59 


      영혼육(靈魂肉)
      - 영혼육에 대한 오늘의 묵상은 3월 2일(월) 함께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소 소개된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데살로니가전서 5:23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영적 존재에는 “하나님” “천사” “사탄”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천사와 사탄은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유일하게 육체를 갖는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로서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합니다.
      영과 혼과 육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람을 “육체”와 “영혼”을 갖는 존재로 “이분법(二分法)”으로 설명하는 이론과 “육”과 “혼”과 “영”으로 구분하는 “삼분법(三分法)”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소개됩니다.

      이분법으로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3:6에서 찾아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靈)

      이분법이 옳은가 아니면 삼분법이 옳은가 논쟁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분법과 삼분법은 논쟁하여 결정할 이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이란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존재론적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혼이란 영과 혼으로 영과 혼이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함께 붙어서 다닙니다. 그러나 육체는 죽음을 통해서 육체만으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은 존재론적인 주장입니다.

      삼분법이란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이 제각기 다르며 각기 고유의 기능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분법이란 기능적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기능은 감각적 기능입니다. 춥다 덥다 시원하다 이러한 느낌은 모두 감각적인 기능입니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갖습니다. 신앙이란 영역에서 살펴보면 사람만이 절대자와 소통하므로 사람은 종교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인 영으로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혼이란 생각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정의할 때에도 생각이란 기능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혼이 있기 때문에 동물들도 어느 정도 생각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참조,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영(靈, Spirit, πνεῦμα)
      혼(魂, Soul, ψυχὴ)
      육(肉, Body, σῶμα)

      ♦ 3월 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과 혼과 몸(23절)
      ♦ 성구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순절 제5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새 날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을 넘어갔습니다. 이런 와중(渦中)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합니까?

      건강(健康)이란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영(靈, Spirit, πνεῦμα)과 혼(魂, Soul, ψυχὴ)과 육(肉, Body, σῶμα)의 창조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적 조화란 최초의 사람 “아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적 조화는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갈림길에서 영생(永生)의 자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영생의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영과 혼과 육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의 훈련에 의해서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영(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값은 죽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소고기 한 근의 가격과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은 시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고기는 시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판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가치는 고기 값이 아닙니다. 그 가치는 “영(靈)”에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값진 것은 동물의 고기 값보다 사람의 영(靈)의 가치를 그만큼 귀하게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http://blog.daum.net/lixiao/59 


      성경에 인간은 영과 혼과 몸(관절과 골수)으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몸이란 육신(肉體)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영혼과 육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과 혼은 다릅니다. 그럼 인간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spirit

      루아흐

      프뉴마

      마음

      의지

      고집

      가슴

      진리 

      선장

      사장

      soul

      네페쉬

      프쉬케

      생각

      지성

      관념

      머리

      지식

      선원

      운전사

      body

      바사르

      사르크스

      감각

      감정

      욕심

      본능

      자동차


      Ⅰ. 영 (靈, Spirit)


      a) 영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시편 143/4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안에서 쇠잔하며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이 절망하나이다.


      잠언 17/22 즐거운 마음은 약과 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딤후 4/22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 계시고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내 안에 또 다른 나인 내 영이 존재합니다.

      영은 나의 가장 근원인 마음이자 의지입니다.

      영은 육과 같이 별도의 인격체이며,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의 영과 함께 하시며, 영이 살아난 사람은 자기 마음과 의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영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누구나 밤에 혼자 있으면 무서움을 느낍니다.

      또한 예민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는 우리 영이 다른 영(마귀, 악령)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이거나 귀로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전체 파장 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반사된 가시광선 영역으로 380~770nm(nanometers)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일반적으로 16Hz~20,000Hz 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밤에 고양이는 적외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초음파로 돌고래는 대화합니다.

      지금도 TV 전파가 공중에 떠 다니지만 TV가 없으면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라디오 방송 또한 라디오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보이고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진기에 영이 찍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필름의 감광물질이 우리가 볼 수 없는 파장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명 가수 녹음실에서 귀신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이 역시 현대의 첨단 녹음장비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를 녹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영을 보거나 영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영의 사진이 찍히는 것을 심령 사진이라고 하는데 조작됐거나, 현상 인화 때 잘못됐거나, 착시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사람 얼굴이나 옷 모양이 너무 또렷한 것은 가짜입니다.

      영은 주로 흐릿하며, 얼굴 윤곽이 분명치 않고, 팔 다리가 없거나, 머리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령 사진 중 확실해 보이는 것만 모아 봤습니다. (다름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심령 사진-1


      심령 사진-2


      누가 16/22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원래 사람이 죽고 영이 분리되면 초혼하는 영들(천사 또는 마귀)이 와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맺혀 죽은 영이나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영 중 일부는 이 세상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일부 영이 이 세상에 남겨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심판 때 불못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이들에게 심판이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20/13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이사야 11/9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해치거나 파괴시키지 않으리니 이는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주의 지식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박국 2/14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땅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차리라.


      마지막 때 사망과 지옥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죽은 자들을 내어 주는데, 성경에서 바다는 이 세상(땅)을 의미합니다.

      귀신이 이 세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성경적으로도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의 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귀신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영이지만, 개역한글 성경에서 귀신은 영문으로 마귀(devil) 또는 악령(evil spirit)

      또는 '더러운 영'(unclean spirit)을 의미합니다.



      마가 9/25 예수께서 무리가 함께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영'(foul spirit)을 꾸짖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아'(dumb and deaf spirit),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자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는데, '더러운 영'(foul spirit)을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dumb and deaf spirit)에게 명령하여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dumb and deaf spirit)은 마귀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영문 성경에서 마귀는 'devil'로 구분하고, 마귀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devil)는 타락한 천사로, 사탄의 수하에 있는 악령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따라서 귀신과 마귀는 다르며, 이들 모두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악령 또는 더러운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주로 안개 낀 밤에 잘 나타나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영적이기 때문에 잘 봅니다.

      그들이 보는 귀신은 주로 희미하고 손과 발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얼굴윤곽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가끔 꿈에서 악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가위 눌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귀신이나 마귀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귀신들림 현상'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영의 집과 같아서 자신의 몸이 없는 영은 남의 몸에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방탕하고 음란한 마귀가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술이나 도박에 빠지게 되고 음란한 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갑자기 난폭해지거나 술이나 도박에 빠진다던지 음란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 경우 의심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자신이 살았을 때 했던 것을 죽어서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어머니가 죽은 후 그 영이 며느리에게 들어 가서 동네 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액수까지 제시하며

      돈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특히 한 맺힌 귀신은 원인 모를 병을 주거나 정신병을 주기도 합니다.

      무당들은 자원해서 이러한 귀신에 들려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귀신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러한 '신접 행위'(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것, 강신술)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8/11 마술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박수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하라.


      사람들은 조상들을 위해서 매년 제사를 드리지만 향불을 켜고 기다리면 조상 영은 오지 않고 대신 마귀가 옵니다.

      왜냐하면 낙원에 있거나 지옥에 있는 영들은 함부로 이 세상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향 냄새를 맡고 찾아온 시커먼 마귀(타락한 천사)들이 와서 제사음식을 먹고 절을 하는 사람의 몸을 들락거립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나면 몸이 축난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전 10/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귀신이나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늘 말씀과 찬송과 기도의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빛이 비추면 결코 어두움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많은 귀신과 마귀들을 내 쫓았습니다.


      누가 10/17 칠십 명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더이다, 하니


      마가 9/29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으로도 내보낼 수 없느니라."


      야고보서 4/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


      만약 악령이 괴롭힌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쫓아 내시기 바랍니다.




      b) 영이 가진 속성



      1. 영은 선하고 의로운 마음인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하철에서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앞에 서면 영과 육의 마음이 싸웁니다.

      육은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른 채 하고 자는 척 하려고 하지면 결국 양심에 찔려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남을 돕거나 선한 일을 하면 마음에 뿌듯한 기쁨이 몰려옵니다.


      로마서 2/15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거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에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새겨져 생각의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양심이라 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의로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하게 되면 양심에 가책이 되고 심장이 뛰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악을 행하다 보면 양심히 무뎌져서 담대히 악을 자행하게 됩니다.


      디도서 1/15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딤전 4/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2.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장합니다.


      마태 4/4 그러나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음식)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내 영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듣지 못한 영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고 팔 다리가 없는 악령이 되곤 합니다.

      육신은 나이가 먹으면 DNA 정보에 의해서 저절로 성장하지만, 영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육신은 할아버지더라도

      영은 어린아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c) 영의 죽음



      창세기 2/17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하나님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뱀(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죽는다고 했는데 아담은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그 때 죽은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었습니다.



      인간은 영이 떠나면 육신이 죽듯이 하나님이 떠난 우리 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내 영은 성장과 활동을 멈추고 잠자는 것 같은 상태로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영이 있는 지조차 모르고 육신의 삶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영의 양심보다 육신의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영의 선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육신의 본능대로 살게 됩니다.


      마태 8/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시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진 사람은 살았다 해도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영이 죽은 자)로 그들의 '죽은 자'(육신이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범죄로 죽었던 내 영을 다시 살리는 것이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으면 성령이 오셔서

      죽었던 내 영을 살려 주시면서 이루어게 됩니다.



      영이 죽은 상태에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짖고 외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마치 선장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목표를 잃고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암초에 부딪쳐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영이 살아나면 더 이상 육신에 매이는 삶을 살지 않고, 육신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d) 자발적 영적 체험의 위험성



      사람은 누구나 미약하나마 예감이나 텔레파시, 초능력 등의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 뉴에이지 열풍이 불어서인지 명상, 요가, 기수련, 단전호흡, 마인드콘트롤, 최면 등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비주의에 속하는 마법에서는 마귀를 불러내 마귀의 힘을 빌어 마법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집중을 통해 영적능력을 배양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8/9~12 네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거든 너는 그들 민족들의 가증함을 따라

      행하는 것을 배우지 말 것이요, 자기 아들이나 자기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치는 자나 때를 살피는

      자나 마법사나 무당이나 마술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마법사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할지니라.

      이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 주께 가증함이 되나니, 이러한 가증한 것들 때문에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서부터 그들을 쫓아내시느니라.


      이러한 뉴에이지와 신비주의와 관련된 영화와 게임과 서적이 청소년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서 점 보는 것, 마법이나 마술, 무당행위, 강신술 등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귀신 쫓음이나 병 고침, 예언, 방언 같은 영적 능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문이자 길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함부로 영계에 접근했다가는 영계에 드글거리는 마귀나 귀신의 주관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실제로 단전호흡이나 기수련을 하다가 악령에 들려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종종 나옵니다.


      딤전 4/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기독교와 사탄(마귀)이 만든 종교로 구분됩니다.

      사탄 종교의 원류는 이집트와 바빌론으로 이곳에서 각종 신비주의와 사탄숭배와 여신숭배 등이 나왔습니다.

      사탄 종교는 동양으로는 힌두교와 불교에 영향을 끼쳤고, 서양으로는 카톨릭과 프리메이슨(사탄숭배집단), 신비주의,

      뉴에이지에 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지만 기본원리는 부처가 말한 것처럼 "누구나 성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입니다.

      누구나 노력해서 도를 깨달으면 자기 힘으로 신(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탄이 품었던 교만한 마음이며 이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났고,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땅(세상)의 왕인 사탄은 지금은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만 결국 영원한 지옥불(불못)에 들어가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6/6 주의 목전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히실 것이라.


      이에 반해서 기독교는 자신이 죄인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하고, 애통해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고집과 자만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깊히 사랑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능력을 주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Ⅱ. 혼(魂, soul)


      시편 94:17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다면 내 '혼'은 거의 적막 중에 거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46~47
      그때 마리아가 말하기를 "내 '혼'이 주를 드높이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 안에서 기뻐하였노라.


      요한복음 12:27
      이제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시여,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왔사옵니다.


      혼은 나의 자아로, 영과 육의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성적 논리적으로 사고(思考)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곳입니다.

      혼은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양심의 소리를 듣지만 이를 수용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과 욕망은 육신에서 올라오며, 혼은 이를 받아들이지만 통제할 수 있습니다.

      혼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나의 생각이자 의식이자 기억이며, 학문을 탐구하게 하고, 문화와 예술을 지향합니다.


      누가복음 16:27~28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증거 하게 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말게 하소서, 하거늘


      인간은 혼이 있기에 본능에 따라만 사는 동물과 달리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본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영은 영적인 진리를 원하는데 반해 혼은 세상학문 즉 지식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거나 책을 읽음으로써 혼의 지적 욕구을 충족시켜 줍니다.

      육신이 죽더라도 천국 또는 지옥에서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의식 또는 기억은 유지되므로 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9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마태복음 10:28
      또 너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라리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사도행전 2:31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문제는 영이 살아나기 전까지 우리는 혼으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기 힘든 것은 혼이 세상에 적합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점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성경구절이 이해가 안가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비유나 상징으로 풀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비유라고 명시되지 않은 한 대부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손가락을 주의 못 자국에 대어보고, 손으로 주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손의 못 자국을 보이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혼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순수히 영(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Ⅲ. 몸(육신, 肉身, body)


      육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가깝고 실제적인 나입니다.

      육신은 영과 혼의 통제를 받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결국 늙고 병들어 죽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은 종족보존과 삶을 위해 다음 세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a) 생존본능


      생존본능은 살아 있는 동물이 죽지 않고 살려고 하는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린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사고 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운전합니다.

      생존본능은 모든 동물들 속에 내재된 가장 큰 본능으로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운동하고 보약을 먹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들은 언제 사자가 나타날 지 모르므로 불안한 마음에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수 없이 실패하는 이유는 마지막 순간에 생존본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생존본능 때문에 우리에겐 항상 걱정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해고 당하지 않을 지, 교통사고 나지 않을 지, 도둑 맞이 않을 지, 큰 병 걸려서 죽지 않을 지 늘 불안합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근심 걱정 때문에 영적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마태 6/31~34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러한 인간의 사정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고 하십니다.

      삶이란 건 어차피 고통인데 내일 일까지 불안해 하고 걱정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속 시원한 말씀입니까?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도 모든 인간은 결국 늙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데만 연연하다 허무하게 살다 간 인생은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존본능에 얽매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을 아는 일입니다.




      b) 생식본능


      모든 동물은 결국 죽기 때문에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번식시켜서 종족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식본능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힘들게 태평양을 가로 질러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허망한 생각이 들지만, 연어가 알을 낳고 죽는 이유는 이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포유류가 새끼를 낳고도 오래 사는 이유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50대가 되어서 폐경기가 되면 골다공증, 성인병, 각종 암 발병 확률이 몇 배나 높아지며, 노화도 촉진됩니다.

      이는 생식을 위한 역할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우리 육신으로서의 인간은 정해진 본능대로 살다 가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보람을 느끼며 삽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환갑잔치에 가득 모인 아들 딸 손자 며느리 사위를 보면서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며 흐뭇해 합니다.

      종죽보존을 위한 생식본능 때문에 남자는 성욕이 강하고, 여자는 모성애가 강합니다.

      그런데 건전하게 사용되야할 성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잘못 사용돼 성매매, 원조교제, 강간 같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마태 5/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는니라.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남자의 본능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 영의 눈으로 보면 예쁜 여자도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보입니다.

      여성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체로 보기 때문에 성희롱이나 성매매 같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c) 쾌락추구본능 (쾌락을 추구함)



      감정이란 육신이 외부의 자극이나 호르몬 분비에 대응해 표출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육신은 기쁨, 슬픔, 미움, 욕심, 의심, 시기, 질투, 불안, 두려움, 좋아함, 싫어함, 부끄러움 등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욕심이 나고,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고(시기),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감정은 자극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자극받기 위해 코미디나 각종 쇼 프로그램를 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싫어하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받기 위해 공포영화를 봅니다.

      청소년들은 노여움과 파괴욕구를 자극시킬 수 있는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이나 전자 오락에 열중합니다.

      젊은이들은 감정적으로 흥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비트가 강한 댄스음악이나 롹음악을 귀청이 떠나가도록 듣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자극 받기를 원하는 것은 뇌신경을 자극해 도파민을 분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파민은 신경전달 물질로 뇌 활동을 활발하게 해주고, 기분을 좋게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인위적으로 도파민을 분비시킬 수도 있는데 달고 기름진 음식, 커피, 술, 담배, 마약 등을 섭취하면 됩니다.

      피곤할 때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많이 마시면 중독되거나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통해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기분을 좋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물은 건강에 해로울 뿐 아니라 도파민 분비가 약물에 의존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양이 필요해져서

      각종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따라서 술, 담배, 마약 등에 중독되면 건강을 크게 상하면서도 내 힘으로 끊기 힘든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도 도파민이 작용합니다.

      이성에 매력을 느끼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이는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성행위 시에도 도파민과 아드레날린과 성 호르몬 등이 분비돼 황홀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2~3년 이상 만나게 되면 권태기에 빠지는데 이는 서로의 자극에 익숙하고 무뎌져서

      더 이상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건전하게 도파민을 분비하는 방법은 운동을 통해서입니다.

      걷기나 달리기, 자전거 타기 등의 운동을 하면 상쾌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일 중독에 빠진 사람은 일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일을 할 때 도파민이 분비돼 의욕과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휴일에 일을 쉬면 오히려 마음이 불안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되므로 자진해서 직장에 나가게 됩니다.



      도파민은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도파민이 부족하면 무력증이나 파키슨병을 앓게되고, 너무 많으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앓게됩니다.

      그러나 육신은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쥐의 뇌에 전기장치를 해놓고 스위치를 누르게 하니까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자극으로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뇌에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쥐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인간도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는데, 며칠동안 PC방에서 게임만 하다 죽은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뇌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파민을 분비하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은 감정이나 감각이나 약물로 뇌신경이 자극돼 도파민이 분비되어 짜릿하고 황홀하고 기분 좋기를 원하는데,

      이를 '쾌락을 추구함'이라고 합니다.


      도박(복권, 경마)이 중독성이 강한 이유는 육신의 거의 모든 감정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도박을 하면 불안, 두려움, 기쁨, 희열, 슬픔, 노여움, 욕심 등의 감정이 작용하며, 뇌가 짜릿한 자극을 받습니다.

      컴퓨터 게임도 박진감과 폭력성이 강하고,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높습니다.

      마약이나 담배, 술의 중독성은 말 할 필요도 없고, 이들은 특히 건강까지 크게 해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왜 담배를 못 끊냐고 물어 보면 담배를 안 피우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는 도파민 분비가 이미 니코틴에 의지해 담배를 안 피우면 두뇌 회전이 안되고, 의욕이 안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취미가 다른 것은 뇌가 특정한 행위나 약물에 반응해 도파민을 분비하기 때문입니다.

      도파민 분비가 성행위에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음란물을 즐겨 보거나 결혼하고 나서도 바람을 피게 됩니다.


      육신의 쾌락은 통제되지 못할 때 각종 집착과 중독에 빠지게 되고,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악이 욕심과 쾌락이 통제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최근 금융 연체자가 많아진 이유 중 하나는 여자는 사치와 허영에, 남자는 술 값과 유흥비에 지출하는 등 욕망과 쾌락을

      향한 육체적인 욕구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키기 위해 쥐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내게 진정한 기쁨과 유익이 되지 못하고, 허무하고 허탈한 마음만 남을 뿐입니다.

      이 세상도, 육신의 정욕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남게 됩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역사적으로 제국이 멸망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이 성적타락이나 음주, 폭력 등의 쾌락에 빠져 기강이 해이해지고,

      근면 성실히 일하기 보다 한탕주의나 불로소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하였습니다.

      쾌락을 원하는 육신이 스스로 쾌락을 절제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 말씀으로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서 쾌락을 원하는 육신을 절제시키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영혼의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육신도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Ⅳ. 결론(結論)


      전도서 12:8,
      헛되고 헛되도다. 전도자가 말하노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최고 전성기 때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였으나 오히려 근심이 많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쾌락을 위하여 웃음과 희락의 나날을 보냈고, 사업을 크게 하여 엄청난 재물을 모았고, 술로써 방탕한 삶을 살아보았고, 수많은 궁녀와 성적 유희를 누려 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24,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


      하지만 욕심과 쾌락은 언제나 만족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면서 본능에만 얽매어 살다 가는 지독한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것입니다.

      욕심과 쾌락을 추구할수록 몸과 마음은 황폐해지고, 결국 얻는 것은 병들고 죄악에 물든 육신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재앙이 다가오거나 아무 즐거움이 없다고 하기 전에 젊은 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시편 144:3~4,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나이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존중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나이다.


      사람은 20세를 넘으면 성장이 멈추고, 생성되는 세포보다 죽는 세포가 많아짐으로써 노화가 진행됩니다.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늘어나고, 흰 머리가 나며, 병에 시달리고, 기력이 쇠약해지면서 처량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고, 머리를 염색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감퇴되며, 이가 빠지고,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

      남성은 중년이 되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건강을 잃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여성은 집안 식구로부터 소외되거나 폐경기가 찾아오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이 늙고 병들어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 속사람인 영이 진리 말씀으로 날로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영원하며 기쁨이 넘치는 세계인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2:1,
      너는 이제 젊은 날, 곧 재앙의 날이 이르기 않고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해가 가까워 오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 70~80년은 아이를 잉태한 산모의 10개월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영양을 잘 섭취한다면 건강한 아이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매일 담배 피고, 술 먹고, 스트레스 받고, 화를 내면 기형아나 미숙아가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같이 내 인생 동안에 소중한 내 영을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영을 위해 산다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육신은 잘 먹고, 잘 살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내 혼은 지식을 구하고 예술을 추구하며,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나인 내 영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니라.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잠깐 동안 존재할 뿐이지만, 우리가 믿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살아도 내 영이 사(死) 후 심판을 받아 고통스러운 지옥에 거한다면 영원히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고귀한 인간이 본능에 따라 동물처럼 살다가 가는 것은 너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오른편(영적)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왼편(육적)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14:11,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시편 49:20,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

      전도서 10:2,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그의 오른편에 있으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그의 왼편에 있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上)


      한글성경을 읽다보면 영, 심령, 혼, 영혼, 마음 등의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 5가지 단어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인간의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의 구조에 대한 견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영+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요3:6)

      둘째는 인간을 "영+혼+몸"으로 보는 견해이지요. (살전5:23)

      A. 육으로 난 것은 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B. 너희 온 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요한복음 3:6, ⓑ 데살로니가전서 5:23

      첫째는 인간을 둘로 나눈다고 해서 "이분론",

      둘째는 인간을 셋으로 나눈다고 해서 "삼분론"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분론이 맞다, 삼분론이 맞다 하며 싸우지만

      사실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두 가지 모두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실이니까요.

      둘 다 맞습니다.

      크게 나누면 "영+육"으로 나눌 수 있고,

      좀더 자세히 나누면 "영+혼+몸"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영, 심령, 혼, 영혼, 마음은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일단 한글성경과 원어성경(헬라어, 히브리어)을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 = 심령

      혼 = 영혼

      원어성경에서는 동일한 하나의 단어를

      한글성경에서는 때에 따라 두 가지 단어로 번역한 것이지요.

      영어성경까지 포함해서 표로 만들어보자면...

      한글 성경

      (개역)

      영어 성경

      (KJV)

      헬라어 성경

      (신약)

      히브리어 성경

      (구약)

      영 (=심령)

      spirit

      프뉴마 (πνεῦμα)

      루아흐 (ר֫וּחַ)

      혼 (=영혼)

      soul

      프쉬케 (ψυχή)

      네페쉬 (נֶ֫פֶשׁ)

      표1_ 원어성경과 영어성경에서 영과 혼의 명칭

      이번에는 "마음"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음 = 혼(영혼)"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마음은 혼(영혼)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다보면

      문맥상 영혼(혼)을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중국어성경이지요.

      중국어성경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화합본(和合本)을 보면

      영혼(혼)이 "마음(心)"으로 번역된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영 = 심령

      혼 = 영혼 = 마음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오직 이분론만 맞고 삼분론은 틀렸다고 믿는 분들은

      영과 혼이 서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영 (심령) = 혼(영혼) = 마음"이라는 거지요.

      영과 혼이 다르다고 한다면 이분론이 깨진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영과 혼이 같은 것이라면

      굳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영과 혼을 나누어 열거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A. 너희 온 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B. 하나님의 말씀은...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C. 나의 지은 그 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23, ⓑ 히브리서 4:12, ⓒ 이사야 57:16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14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은 기도하지만

      자신의 마음(혼)은 기도를 이해할 수 없어

      영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경은 영과 마음(혼)을 서로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 ≠ 혼

      영 = 심령

      혼 = 영혼 = 마음


      그렇다면 인간의 영과 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 첫번째 차이점은 지음받은 재료입니다.

      사람의 은 흙으로 지음받은 에서 나왔고,

      사람의 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먼저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다음 말씀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A. 육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이니

      B.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 요한복음 3:6, ⓑ 히브리서 12:9

      * 위 성구들은 한글성경의 애매한 번역과 오역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혼이 흙으로 지음받은 육에서 나왔다는 것은

      좀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혼을 '비물질적인 정신'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적인 근거 >

      그러나 사람의 혼이 흙으로 지음받은 육에 속한다는 사실은

      다음 성구에 잘 나와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먼저는...혼적인 사람(아담)이요, 그 다음에 영적인 사람(예수님)이니라.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45-47

      * 위 성구들은 한글성경의 오역과 의역 부분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위 성구는 혼의 사람 아담과 영의 사람 예수님을 비교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혼적인 사람흙에 속한 자이고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서 난 자라 했습니다.

      따라서 혼은 땅 곧 흙에서 나온 것이요,

      영은 하늘로부터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이 땅의 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혼도 몸(body)처럼 흙으로 지음받은 육의 일부라는 의미입니다.

      < 자연적인 근거 >

      따라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는 요3:6 말씀처럼

      사람의 몸과 얼굴이 육신의 부모를 닮듯이

      사람의 마음(혼)도 육신의 부모를 닮습니다.

      후천적인 영향을 배제하고도

      사람의 타고난 성격, 지능, 예술적 감각 같은 혼(마음)의 특성이

      자기 육신의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혼이 육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혼이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것이지요.

      < 과학적인 근거 >

      이번에는 좀더 과학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위에서 말한 성경적인 근거와 자연적인 근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한다는 의미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뇌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뇌와 마음(혼)과의 연관성이 많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이 분야에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지만

      대략적인 뇌지도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림1_ 정신활동과 뇌지도

      실제로는 [그림1]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혼)이 정신적인 활동을 할 때

      반드시 뇌에서 그에 따른 물질적인 활동이 동반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정신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각각의 뇌 부위에서

      뇌세포의 전기신호와 시냅스간의 네트워크 형성,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와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각각의 정신활동과 관련 뇌 부위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검사가 있습니다.

      functional MRI라는 검사인데 약칭으로 fMRI라고 합니다.

      몇가지 fMRI의 실제 사용 예를 들자면...

      그림2_ 왼쪽은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 오른쪽은 공감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

      그림3_ 지능을 관장하는 뇌 영역

      그림4_ 기쁨, 행복, 사랑, 슬픔, 분노 등의 감정에 관여하는 뇌신경섬유들

      이처럼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와

      공부를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

      어떠한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 뇌 부위가 손상되게 되면

      그 뇌 부위가 담당하는 정신활동이 고장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뇌경색으로 베르니케 영역(그림1)이 손상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잘 하는데

      상대방의 말은 들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브로카 영역(그림1)이 손상되면

      상대방의 말은 잘 듣고 이해해도

      거기에 따른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전에는 점잖고 예의발랐던 사람이 사고로 인해

      이성과 절제, 분별, 양심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손상되자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욕설을 내뱉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에서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세로토닌이 매우 감소해 있는데

      이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주는 약(SSRI)을 복용하면

      우울증 증상이 호전되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마음(혼)의 정신적인 활동이

      뇌의 물질적인 활동에 기반을 두고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영이나 성령님,

      천사, 사단과 같은 영들의 정신활동은

      뇌와 같은 물질(육체)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을 정리하면

      사람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5_ 인간의 구조

      이러한 구조를 이해한다면

      사람을 "영+육"으로 나누는 이분론이나

      "영+혼+몸"으로 나누는 삼분론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잠깐 육(flesh)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육"은 문맥에 따라 다음 3가지 의미 중 하나로 사용되는데

      이 글에서는 주로 ②번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① 인간의 죄성 (롬8:6~7)

      ② 영과 대비되는, 물질로 지음받은 몸과 혼(마음)을 포함하는 개념 (창6:3, 고후3:3, 골2:18)

      ③ 정신을 제외한, 순수한 몸만을 가리키는 개념 (시84:2, 엡2:11)

      ※ 육 = 육신 = 육체 = 삵스(σάρξ, 헬) = 바사르(בָּשָׂר, 히)

      (2) 영과 혼의 두번째 차이점은 지음받은 시기입니다.

      사람의 은 각자 출생 시에 태중에서 지음받지만,

      사람의 은 모두 태초에 이미 지음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혼(마음)의 정신적인 활동은

      뇌의 물질적인 활동에 기반을 두고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혼은 하나님께서 태중에 우리의 뇌를 지으시면서 같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영은 우리 몸이 어머니 뱃속에 형성되기 전,

      더 나아가 태초에 이미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B.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말라기 2:15, ⓑ 욥기 38:4-7

      위의 말라기 말씀(A)은

      자기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거나 새 장가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꾸짖으면서

      첫 사람 아담에게 오직 하나의 아내만 주신 이유

      (경건한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구에는 영의 창조시기에 대한 단서도 들어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대목인데요,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여호와)에게는 영이 남아있었지만 하나만 짓지 아니하셨느냐"

      (וְלֹא־אֶחָד עָשָׂה וּשְׁאָר רוּחַ לֹו)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남녀를 지으실 때,

      아담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지어주기에 충분한 인간의 영들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단 한 명의 아내, 하와만을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기 전에

      이미 모든 인류의 영들을 창조해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 아니라 위의 욥기 말씀(B)을 통해서도

      인간들의 영이 창조된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욥38:4~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땅의 기초를 놓은 시점은 창조 첫째날 또는 그 전입니다.

      그리고 이때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 별들은 넷째 날 지음을 받았고,

      사람의 육신은 여섯째 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첫째 날, 땅의 기초를 놓을 때

      기뻐 찬양했던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새벽 별들"은 천사들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미리 지음을 받은 인간의 영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기 전에

      인간의 영들을 미리 창조해 놓으신 것이지요.

      <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이유 >

      그런데 가끔 이 욥기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을 의미한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비성경적인 이유는

      히1:5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천사들에게 아들이라 부른 적이 없다고 명백하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1:14에 천사들의 위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며 부림을 당하는 종이라고

      확실하게 천사들의 지위에 대해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유1:6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종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비기리라(사14:14)"했던 타락한 천사들의 욕망은

      지금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어리석은 신자들을 미혹하여

      천사의 지위를 하나님 자리까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아들 자리까지 높이도록 하는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세대주의자들이나 일부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이

      이런 사단의 속임수에 미혹되어

      욥기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בְנֵי־ הָֽאֱלֹהִים֙)"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한번도 "하나님의 아들들(베네 하엘로힘)"을 천사로 번역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분들이 변개된 성경이요 사탄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NIV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번역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들은

      창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말씀을

      천사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하여 낳은 자식이 네피림이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다신교인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영웅을 낳는다는

      비성경적이고 이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인간들처럼 육체를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지도 못하는

      사탄의 로망이 담긴 꿈같은 이야기이지요.

      이런 모든 거짓 교리의 뿌리는 에녹서라는 위경(거짓 성경)입니다.

      이 에녹서에는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내용들이 가득해서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에녹이 쓴 책이 아니라

      사탄에 의해 쓰여진 책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에녹서의 많은 반성경적인 내용들 중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실 때 하늘을 일곱 층으로 만드셨는데

      그 중 둘째 층에 아프로디테, 다섯째 층에 제우스, 여섯째 층에 헤르메스를 두었다고 합니다.

      희한하지요.

      에녹서가 에녹이 쓴 책이 맞다면 노아 홍수 이전에 쓰여진 책인데

      그리스 신화의 신들 이름이 나오다니요.

      아니, 그 이전에 그리스 신화가 짬뽕되어 있는 책을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즉 에녹서는 그리스 신화가 광범위하게 퍼지던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책으로

      유다서에도 인용되었던 에녹의 전승을 살짝 끼워넣어

      마치 에녹이 쓴 것처럼 조작된 책입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도 성경에 무지하고

      여전히 그리스 신화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어중간한 신자들에게 에녹서의 내용이 잘 먹혔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영웅을 낳는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체를 가진 천사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네피림을 낳는다는 에녹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천사들을

      인간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들로 숭배하는 천사숭배 이단이

      골2:18 말씀처럼 초대교회에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박살내기 위해

      천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히1:5)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는 종일 뿐이며

      육체가 아닌 영(히1:14)이라고 못을 박은 것입니다.

      (물론 가끔 천사가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육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시 그런 모습을 가졌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천사나 사단은 영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욥38: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창조하신 인간의 영들이며,

      "새벽 별들"이 천사를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계시록 12:3-4를 보면 천사들을 "하늘의 별들"로 비유했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 별들"이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시 직접 창조를 행하시는 주체였지,

      옆에서 구경하며 찬양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요1:1-18).

      또한 "새벽 별"이라는 단수가 아니라

      "새벽 별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했으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들을 말한다고 봐야합니다.

      (3) 세번째로 인간의 영과 혼은 본성이 다릅니다.

      사람의 에는 죄성있지만,

      사람의 에는 죄성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영과 혼 모두 선하게 지음을 받았고 죄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입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인간의 영은 성령에게서 나온 존재라

      성령께서 죄를 지으실 수 없듯이

      하나님을 거스려 선악과 따먹기를 원치 않았으나,

      인간의 혼은 육체에 속하여 육체의 영향을 받는지라

      먹음직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만큼(이생의 자랑) 탐스러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영과 육의 상반된 본성의 충돌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기도하지 않고 쿨쿨 자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도 잘 나타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은 원하나 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41

      * 위 성구는 한글성경의 오역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영은 선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길 원했으나

      혼이 육적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처럼,

      아담 하와의 영도 하나님 뜻대로 살길 원했으나

      혼이 육적인 유혹에 굴복하여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 하와의 영은 선악과 먹기를 원치 않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바로 사망하게 되었고,

      아담, 하와의 육(혼과 몸)은 바로 죽진 않았지만

      결국 사망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영은 본성의 변화 없이

      죽어서 모든 기능이 정지되버리는 걸로 끝났지만,

      육(혼과 몸)에는 선악과로 인해 죄성이 생겨나고

      대대손손 전인류의 혼과 몸에는 죄성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 영과 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듯이

      먼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요3:3~7).

      은 위의 마26:41 말씀처럼

      죄성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만을 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에는

      보혈와 진리로 거룩해진 새사람(엡4:24)의 인격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존에 인간의 혼에 박혀있던 죄성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며

      이를 성경에서는 옛사람(엡4:22)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혼에는

      새사람의 인격과 옛사람의 인격(죄성)이 공존하게 되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생 새사람과 옛사람의 싸움이 있게 됩니다.

      A.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B.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 딤모데전서 6:12 ⓑ 에베소서 4:22-24

      (4) 영과 혼의 네번째 차이점은 사역성입니다.

      사람의 은 오직 성령님에게만 사용되지만,

      사람의 성령님에게도, 악령에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역성이란

      "어떤 존재가 인간의 영이나 혼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의미이며,

      "어떤 존재"란 성령님과 악령(마귀) 둘 중 하나를 말합니다.

      < 인간의 영의 사역성 >

      인간의 영은 오직 성령님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사단은 절대 인간의 영을 이용할 수도 건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영은 온전히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존재라

      본질과 본성 자체가 선하고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은 죽었으면 죽었지,

      살아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천사의 영이나 인간의 육처럼

      하나님께서 별도로 지으신 피조물은

      선하게 지음받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가치중립적이라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범죄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인간의 영을 건드리거나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음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5:18

      위의 말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거듭난 자의 속에 있는 새사람,

      또는 새사람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또한 우리 영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단이 만지지도 못한다 하셨으니

      "성령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우리의 영"은

      더더욱 사단이 건드리지도 이용할 수도 없는 게 당연하지요.

      이렇듯 거듭난 사람의 영은

      철저히 성령님과 연합되어,

      오직 성령님만 사용하시며,

      언제나 성령님과 함께 움직입니다.

      < 인간의 혼의 사역성 >

      반면에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혼(마음)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조차 그 혼(마음)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죽지 마시라고 간청했다가

      "사단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꾸지람을 듣습니다(마16:23).

      베드로의 혼이 사단(악령)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베드로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이 고백은 혈육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하셨으니(마16:17)

      방금 전까지 베드로의 혼(마음)은 성령에 감동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혼성령님께 사용될 수도 있고 악령에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 올바른 사역성의 관계 >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역성의 관계는

      성령께서 인간의 영을 다스리시고,

      인간의 영은 혼을 다스리고, 혼은 몸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간의 영을 통해

      인간의 육(혼과 몸)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4,16

      위의 로마서 말씀을 정리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며,

      자녀됨의 증거인 성령의 인도는

      반드시 우리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요3:3~7).

      (5) 다섯번째로 영과 혼의 차이점은 인식의 방법입니다.

      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만,

      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인식합니다.

      요즘 들어 점점 영,혼,몸의 삼분설을 깨닫고 전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어

      참으로 반가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대부분

      영과 혼이 서로 별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보통 영과 혼을 별개의 자아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자아 안에서 영과 혼이 각각 맡고 있는 기능이 다른 것으로 봅니다.

      예를 들면 혼은 지성(知)과 감정(情)과 의지(意) 등의 기능을

      영은 양심과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는 식입니다.

      일부 맞는 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립니다.

      우리 영과 혼은 각각 별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혼도 지(知), 정(情), 의(意)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영도 혼과는 별개의 지, 정,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혼의 자아만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영의 자아와 혼의 자아,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건 옛사람, 새사람의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한 자아 안에서 영과 혼이 기능을 나눠가진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이라는 두 개의 개별적인 자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존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차원의 자아가 한 존재를 이루는 인간의 특성은

      오직 영만을 가지고 있는 천사나

      육(혼+몸)만을 가진 짐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 중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별개의 자아를 가지면서

      동시에 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특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온 세상의 피조물 중 인간만 유일하게

      영계에 속한 영과 물질계에 속한 육이 결합되어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의 자아와

      물질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혼(육)의 자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영과 혼이 한 자아 안에서의 기능적 구분이 아니라

      각각의 자아, 각각의 지정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증거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이 지,정,의를 가지고 있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영이 혼과는 별개의 자아, 별개의 지,정,의를 가지고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A. 내가 만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B.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천사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인간의 영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고린도전서 14:14 ⓑ 욥기 38:4-7

      A는 영의 "기도"에 대한 성구이고,

      B는 영의 "찬양"에 대한 성구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인격(자아)의 필수 요소인

      지,정,의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영이 혼(마음)과는 상관없이 별개로 기도하는 경우와(A)

      영이 아직 혼이 지음받기도 전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며 기뻐 찬양하는 모습은(B)

      인간의 영이 혼과는 별도의 자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내(바울)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3~5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고린도 교회에

      계모인지 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어머니랑 간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죄에 무디어졌는지

      이런 자를 쫓아내지 않고 방치했습니다(고전5:1~2).

      사도 바울이 이런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이때 영의 세계에서 벌어진 조치들을 알려준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의 몸은

      지금의 튀르키에(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습니다.

      고린도가 있는 그리스 땅과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먼 지역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으로는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영으로는 이들이 함께 만나 모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영들의 모임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어머니와 간음한 자를 재판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추방하여 사탄에게 내어주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너무 대조적이지요.

      고린도 교인들의 육(몸+혼)은 간음한 자를 싸고 돌았지만

      그들의 영은 반대로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던져줬으니 말입니다.

      이를 통해 영의 자아와 혼의 자아는 서로 별개로서

      정반대의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의 영들이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준 과정을 잘 살펴보면

      바울의 영과 함께 모여 영들끼리 회의와 의논을 거쳐 이런 결론을 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영의 독자적인 기도와 찬양만으로는

      영과 혼이 서로 별개의 자아를 가진다는 근거로 충분치 않다 생각하는 분들도

      이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의 영들이 자신의 혼과는 별개로 함께 모여 대화도 하고 의논을 하며

      회의를 통해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온전한 지,정,의를 갖춘 독립된 자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영의 자아가 혼의 자아와 별개로 활동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혼(마음)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해주기 전까지

      자신의 영들이 바울의 영과 함께 모여 서로 의논하고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줬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성구들(고전14:14,욥38:4~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과 별개로 영이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혼(마음)이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직접 목격했던 영의 기억을 우리 혼(마음)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영이 다시 살아난 신자라 하더라도

      우리 인식의 주체, 인식의 창구는 영이 아니라 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혼을 인식하는 방법과 영을 인식하는 방법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앞에서 혼은 직접적으로, 영은 간접적으로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아는 영의 자아혼의 자아, 이렇게 두 개인데

      인식의 창구는 혼의 인식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혼의 자아는 혼의 인식과 본체가 같아서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영의 자아는 혼의 인식과 본체가 다르기 때문에

      유일한 인식의 창구인 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영의 인식이 직접 열리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특수한 경우에 한정됩니다.

      이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혼으로 영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믿고 거듭난 사람의 혼 속에는

      영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우리가 믿고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옛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새 마음)을 줄 것이며

      내 영(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에스겔 36:26~27

      그 선물들은 바로 ① 새 영② 새 마음, ③ 성령님입니다.

      여기서 새 영은 믿는 자의 거듭난 영이며

      새 마음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 혼 가운데 생겨난 새 사람의 인격으로서​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새 영, 새 마음, 이 셋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이므로

      우리가 영을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우리 혼 속의 새 마음을 통해 성령님과 영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달이 떠서 잔잔한 호수에 비치면

      직접 하늘을 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호수에 비친 달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영을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영의 마음이 혼에 비춰진 새 마음을 통해 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새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좀더 단순하게 말한다면

      새 마음곧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37~39

      위 성구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것으로 성령만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위의 겔36:26~27 말씀처럼

      성령님과 ② 거듭난 새 영, ③ 새 마음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마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생겨난 마음이기 때문에

      새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존재하는 마음입니다.

      즉, 새 마음은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며 믿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영을 인식하는 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소수의 사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면 누구나 영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면 자기 속에 생겨난 믿음의 마음, 곧 새 마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 마음은 영의 자아가 혼에 반영된 마음이기 때문에

      새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 곧 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인식은 새 마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 마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은 우리 혼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우리 영은 혼의 모든 생각과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인식합니다.

      다음 성구들이 이것을 잘 증거해줍니다.

      A.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spirit)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B. 사람의 영(spirit)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 고린도전서 2:11, ⓑ 잠언 20:27 (개역성경의 영혼은 오역이므로 영으로 수정)

      우리 혼이 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성령에 감동된 새 마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영이 자신의 혼을 거의 직접적으로 인식하듯이 파악할 수 있음'을 알려주지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게 가능한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영의 자아가 혼의 자아보다 존재의 격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시로서 조금 적절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정신 질환 중에 해리성 정체 장애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다중 인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인데

      이 인격들이 다 동등한 것이 아니라 상위 인격과 하위 인격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상위 인격은 하위 인격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을 다 인식하고 파악하지만

      하위 인격은 상위 인격의 말과 행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병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영과 혼의 인식과 격의 차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합니다.


      (6) 영과 혼의 여섯번째 차이점은 구원의 보장성입니다.

      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지만,

      의 구원은 구원 상실이 가능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시는 분들은

      아마 다들 한번쯤 구원의 보장성에 대해 고민해보셨을 것입니다.

      (구원의 보장성이란

      한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쪽을 읽어보면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 맞는 것 같고

      다른 쪽을 읽어보면 구원 상실이 맞는 것 같고...

      지금까지 위에서 설명한 영과 혼의 차이점 5가지를 몰랐을 때는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과 혼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구원의 보장성에 대해 헷갈리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으로 읽다보면 다소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영"과 "혼"을 원어성경대로 일관성 있게 번역하지 않았고

      영혼, 혼, 영, 심령 등의 여러 용어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원어성경에 "영"이라고 되어있는데 혼(영혼)으로 번역하거나

      원어성경의 "혼"을 영으로 번역한 오류들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성구들은 원어성경에 맞게

      "영" 또는 "혼"으로 바르게 교정하여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글성경의 심각한 번역 오류 하나를

      바로 잡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건 번역 오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성경을 뜯어고쳤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정도로

      심각한 오류입니다.

      원어성경의 구절을 아예 삭제하고

      번역자가 새롭게 창작한 엉뚱한 내용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역(개정)한글성경을 사랑하고

      굉장히 우수하면서도 아름답게 번역된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성구들도 모두 개역성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심각한 번역 오류는

      개역(개정)성경을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구원혼의 구원을 바로 구별하려면

      먼저 거의 창작 수준으로 대체된 개역성경의 이 성구가

      바르게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문제의 성구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주인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지 않고

      술친구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악한 종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자였고,

      주인(예수님)이 다시 올 것도 믿었기 때문입니다(마24:48).

      다만 조금 늦게 오실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 악한 종이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지 마24:51에 나옵니다.

      한글성경과 영어성경 2가지(KJV, NASB), 원어성경을 차례대로 비교해보겠습니다.

      A.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B. And shall cut him asunder, and appoint him his portion with the hypocrites...

      C. And will cut him in pieces and assign him a place with the hypocrites...

      D. καὶ διχοτομήσει αὐτὸν, καὶ τὸ μέρος αὐτοῦ μετὰ τῶν ὑποκριτῶν θήσει...

      ⓐ 개역한글성경, ⓑ KJV, ⓒ NASB, ⓓ 헬라어성경

      일단 한글성경(A)과 영어성경(B,C)만 비교해봐도 꽤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한글성경에서는 악한 종을 엄히 때린다는 정도로만 번역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악한 종을 토막토막 잘라버린다고(cut asunder / cut in pieces)

      무시무시한 번역을 했습니다.

      단순히 두들겨 맞는 것과 토막살인 당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어떤 번역이 맞을까요?

      어느 번역이 헬라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일까요?

      영어번역도 사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글성경보다는 원문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헬라어 원문을 한번 번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문법 구조를 가진 문장도 아니고

      쉽게 단어 하나하나 해석해갈테니

      혹시 헬라어를 모른다고 긴장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καὶ(그리고) διχοτομήσει(둘로 쪼개어 자를 것이다) αὐτὸν(그를),

      καὶ(그리고) τὸ(the) μέρος(한 부분을) αὐτοῦ(그의)

      μετὰ(with, ~과 함께) τῶν(the) ὑποκριτῶν(외식자들) θήσει(둘 것이다)

      자, 그럼 위의 해석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바로 앞뒤의 내용을 붙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그를 둘로 쪼개어 자르고,

      그의 한 부분을 외식자들과 함께 둘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악한 종을 두 토막으로 쪼개서

      그 중에 한 부분을 외식자들이 가는 곳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식자들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앞장인 23장에 예수님께서 그곳이 어디인지 말씀해 두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29~33

      외식자들이 가는 곳, 그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주인이라 고백했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믿었지만

      정작 믿음의 길을 걷지 않았던 악한 종,

      그는 결국 주인에 의해 두 토막으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운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말씀이 눅12:46에도 나오는데

      이걸 보면 악한 종의 한 부분이 던져지는 곳은 지옥임이 더 확실해집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그를 둘로 쪼개어 자르고 그의 한 부분을 불신자들과 함께 두리니

      누가복음 12:46

      * 이 성구는 개역한글성경의 오역을 원어성경대로 바르게 수정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가는 곳은 당연히 지옥이니까요(계21:8).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도무지 이 성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온전한 채로 다 가는 거 아냐?

      둘로 쪼개서 그 중 하나만 지옥에 보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이처럼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 속에 마치 상식처럼 깔려있는 한 선입관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 혼, 몸(또는 영과 육)은 절대 나누어질 수 없다'는 선입관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 혼, 몸으로 지으셨으니

      당연히 우리가 영, 혼, 몸 전체의 온전한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의 모든 부분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 이 성구는 개역한글성경의 애매한 번역을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수정한 것입니다.

      자, 이 성구는 불신자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지요.

      이들에게 바울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너의 영, 혼, 몸 모든 부분이 흠없게 보전되리라"인가요?

      아니면 "영, 혼, 몸 모든 부분이 흠없게 보전되길 원하노라"입니까?

      이 두 문장은 상당히 비슷해보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전자라면 모든 믿는 자는 무조건

      영, 혼, 몸 전부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후자에는 믿는 자라고 해서 무조건

      영, 혼, 몸 전부의 구원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후자를 말합니다. 이게 성경의 진리입니다.

      예수 믿는 자라고 해서

      영, 혼, 몸 전체의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한다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던 악한 종,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던 악한 종이 두 토막이 나서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운다는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인용한 성구들이 적어서

      납득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저 성경의 극히 일부 한두 성구를 꿰어맞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경 곳곳에서

      어떻게 이 사실을 증거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B.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마태복음3:10, 누가복음3:9 ⓑ 마태복음7:19

      여기서 나무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다고 해서 다 좋은(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신자는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느냐?

      도끼로 둘로 쪼개어 뿌리는 남겨두고

      뿌리 위쪽의 둥치, 가지 등은 모두 지옥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사실이 중요했으면

      복음서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을 둘로 쪼개어 그 중 한 부분을 지옥에 던진다는 말씀 또한

      복음서에서 2번이나 반복됩니다(마24:51, 눅12:46).

      즉 믿는 자라도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편 50:22

      이 말씀 역시 믿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지만

      삶으로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하신 경고입니다(시50:16~21).

      "만약 네가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내가 너를 (둘로) 찢어버리겠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뜻은 통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이 경고의 의미를 담은 언약의 예식이 나옵니다.

      바로 짐승들을 둘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걸어서 통과하며

      하나님과 언약하는 예식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언약의 예식을 했고(창15:9~17),

      예레미야서에도 이 언약의 예식이 나옵니다(렘34:18).

      이 언약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언약을 어긴다면

      나도 이 짐승들처럼 둘로 쪼개어지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믿음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

      믿음에서 떠날 경우 받게 될 최후의 심판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둘로 쪼개어질 것이란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결정타입니다.

      이 성구 역시 앞서 인용한 마24:51의 번역 오류와 같은 케이스입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원어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쏙 빼고 번역해버린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21장 8절 말씀입니다.

      한글성경을 보면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않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숭배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

      불지옥에 던지운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보면

      한글성경에는 빠져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누락된 부분을 포함시켜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그들의 한 부분(μέρος)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여기 나오는 8종류의 지옥가는 사람들을 보통 불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자입니다.

      불신자라면 존재 전체가 지옥에 들어가지

      한 부분만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예수님을 믿었지만 믿음의 길에서 떠나 살다가

      마지막 심판 때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우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보십시오.

      마24:51의 악한 종 비유에서 지옥에 던지우는 한 부분도 μέρος(메로스),

      계21:8에 나오는 8종류 사람들의 지옥가는 한 부분도 μέρος(메로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계21:8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악한 종의 마지막(마24:51, 눅12:46)을

      한 번 더 확증해주는 성구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무조건

      영, 혼, 몸 전체의 온전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선입견을 버리지 않으면

      도무지 이 성경말씀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글성경의 경우처럼

      아예 성경을 뜯어고쳐 번역하는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너무 다른 자들,

      이들의 마지막 심판 때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운다는 한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 말씀들에 잘 나와 있습니다.

      A.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B.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으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고린도전서 5:5 ⓑ 베드로전서 4:6

      * 개역성경의 육신, 육체 등의 단어들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육"으로 통일했습니다.

      위의 A 성구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

      자신의 어머니와 음행했던 자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죄악 가운데 계속 머무르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육을 사단에게 내어주어 멸하지만

      영은 구원을 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육을 멸한다는 것은 육을 지옥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해 육이 병들어 죽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냐?

      물론 성경에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의 경우처럼 징계를 받고 회개하여

      더 이상 주의 일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사단에게 내어주는 경우입니다(딤전1:20).

      그러나 위의 A 성구는 이 경우와 다릅니다.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날에 "​​영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라고요.

      만약 이 근친상간한 자의 육을 멸하는 것이

      단지 회개시키기 위한 징계의 목적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육을 멸하여 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 함이라"

      징계의 목적은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육을 멸한다는 것은

      단순히 징계 차원이 아니라

      육을 영원히 지옥에 던진다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이번에는 B 성구를 보겠습니다.

      B 성구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는데

      이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좀 논란이 있습니다.

      바로 앞장인 벧전 3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 때 끝까지 불순종하다가 죽은 신자들의 영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인지...

      둘 중 뭐가 맞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B 성구의 "죽은 자들"이란

      마24장의 악한 종처럼 실패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영은 하나님처럼 영생하면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육은 일반적인 사람처럼 심판과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B 성구의 내용입니다.

      A와 B, 두 성구를 정리해보면

      아무리 타락한 신자라 해도

      영만큼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자라 할지라도

      육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던져 멸해질 수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24장의 악한 종이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울 때

      지옥에 던져지는 부분이 무엇이고,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지

      이제 우리는 말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우는 부분은 (혼 + 몸)이고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부분은 입니다.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과 육(혼+몸)의 온전한 구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이

      주 예수의 날에 영과 육(혼+몸)의 온전한 구원 받으시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영지주의처럼 육은 무조건 악하니

      무조건 멸해진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분명히 우리에게

      주 예수의 날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 받길 원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5:23).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믿는 자라 할지라도

      죽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

      믿음에서 떠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영은 구원받지만 육은 지옥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은 [몸 + 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믿는 자의 육이 지옥에 던지울 수 있다는 말은

      믿는 자의 몸과 혼이 지옥에 던지울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12제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은 죽여도

      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 개역(개정)성경의 "영혼"이라는 표현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혼"으로 통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뽑은 12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권세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라."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근거로

      "하나님은 능히 너희 몸과 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즉, 믿는 자라도

      만약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버리고 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과 혼을 지옥에 멸하시리라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영과 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신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세상 권세자를 두려워하여 믿음을 떠난 자조차도

      지옥에 멸해지는 대상에 "영"은 빠져 있습니다.

      [혼과 몸]만 지옥에 멸해집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어떻게 타락했다 할지라도

      그가 과거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이 있었다면

      영만큼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혼과 몸은 지옥에 멸해지겠지만요.

      이 글의 주제가 영과 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의

      "보장성" 차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영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고

      육의 구원은 구원상실이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본 글의 주제에 맞게 표현하자면

      [영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고

      [혼의 구원]은 구원상실이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혼은 육에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혼의 구원상실에 대한 성구를

      몇 개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로마서 2:9~10

      * 개역(개정)성경의 오역(영)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혼"으로 수정하였습니다(9절).

      여기서 선을 행한 자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며,

      악을 행한 자는 믿음을 버리고 떠난 자를 말합니다.

      세상 윤리나 도덕적인 삶, 또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각자에게 어떻게 보응하시느냐?

      악을 행한 자는 "그의 "에게 환난과 곤고로 갚으시고

      선을 행한 자는 "그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로 갚습니다.

      갚아주는 대상에 차이가 있지요?

      후자는 "사람"인데 전자는 ""입니다.

      이는 악을 행한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이 있었던 자라면

      영만큼은 확실하게 구원받기 때문에

      ""만을 심판의 대상으로 콕 집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A.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 너희의 인내로 너희 을 얻으리라

      ⓐ 마태복음 24:13, ⓑ 누가복음 21:19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위의 두 성구는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실은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A 성구와 B 성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며칠 전

      이 세상의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해 말씀하신

      동일한 설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설교를

      마태와 누가라는 각기 다른 저자가 쓰다보니

      내용은 같은데 구성이나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 두 성구의 바로 앞에는

      마지막 때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미움을 받고

      서로 잡아 고발하고

      부모 형제가 핍박에 넘겨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위 성구들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조금씩 다른 이 표현을 하나로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 많은 신앙 핍박과 환난을 당할텐데

      이 핍박을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자라야

      ""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무섭습니다.

      핍박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고 떠나면

      ""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혼이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혼의 구원상실에 대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하는 그 이 죽으리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이) 죽으리라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을 보전하리라.

      에스겔 18:4,24,27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에스겔 18장은 도입 부분부터

      대전제를 하나 깔고 시작합니다.

      바로 모든 혼이 하나님께 속했으니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는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대전제 아래, 에스겔 18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① 의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길에서 떠나 죄의 길로 가면

      죽을 것이요,

      ② 반대로 악인이라 할지라도

      악을 버리고 의의 길에 서면

      그 혼은 구원받는다.

      사실 ②번이야 너무 당연한 말이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①번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의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길, 곧 믿음의 길을 떠나면

      "죽으리라"하신 말씀.

      무엇이 죽는다는 말씀일까요?

      단순히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것이니까요.

      에스겔 18장의 대전제가 범죄자의 ""이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②번에서 회개한 악인의 ""이 보전되리라 하신 것을

      종합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던 의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길을 버리고

      죄의 길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의 ""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그의 혼이 구원을 잃고 지옥간다는 말씀입니다.

      영과 혼의 여섯번째 차이점, 결론입니다.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이지만,

      구원 상실가능합니다.

      따라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과

      영만 천국에 오고, 혼과 몸은 지옥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들로요.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은 지옥불 속에 있는 자들의

      자아 인식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인식하게 되는 걸까요?

      온탕과 열탕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 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영과 혼의 다섯번째 차이점인

      인식 방법의 차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인식은 곧 혼의 인식이기 때문에

      혼은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만

      영은 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은 지옥에 간 사람은

      따로 천국에 있는 영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영과 분리가 되었으니까요.

      오직 혼으로 지옥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다만 살아 생전 한때나마

      영을 간접적으로 인식했던 기억들,

      예를 들자면 기도하고 찬양하며 은혜받았던 기억들,

      말씀 들으며 감동하고 도전받았던 기억들,

      전도하며 기뻐했던 기억들 정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이 지옥가는 사람들은

      그냥 이 땅에서의 내 인식, 내 기억 그대로 지옥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땅에서 살 동안에는 가끔씩이나마

      영을 간접적이라도 인식했지만

      죽어서 지옥에 가면 이제 그나마도 전혀 없습니다.

      오직 지옥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한 때 내 영이었던 존재가 거하는 천국은

      전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혼과 몸은 지옥에 던지우고 홀로 천국에 온 영들은 마냥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영과 혼의 일곱번째 차이점 끝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여담이지만,

      가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 몰라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는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인 부분과

      구원상실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구원불변인 부분과 구원상실 가능한 부분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 찾아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성경과 동떨어진 주관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결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혼몸의 본체는 천국가고

      범죄한 행위(또는 기능)만 지옥간다라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펴는 이유는

      영과 육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이유로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입니다.

      첫째, 성경은 앞에서 인용된 여러 성구들을 통해

      영과 육(혼, 몸)이 분리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경 어디에도

      영과 육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죽을 때에 우리 몸과 혼이 분리되는 자연계시만 봐도

      영혼몸의 분리가 절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몸의 전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지만

      예전에 거듭남의 체험이 한번 있었다고

      영혼몸의 전인적인 구원을 무조건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울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고합니다.

      둘째로 다음 성경말씀이

      인간의 본체는 무조건 천국가고

      행위(기능)만 분리되어 지옥간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너희 중에) 강한 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야 1:31

      이사야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위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며 각종 성회에 참석하며

      무수한 송아지, 염소, 양으로 제사를 드렸던 자들입니다(사1:11~1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철저히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며

      온갖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강한 라 할지라도 지옥불에 탈 것이요,

      그의 행위도 영원히 같이 타리라."

      참된 믿음을 버리고 패역한 길로 간 자들은

      행위만 분리해서 지옥불에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체(혼과 몸)도 행위와 함께 영영히

      지옥에서 불타며 고통당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본체는 무조건 천국가고 행위(기능)만 따로 분리해서 지옥 보낸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下)


      (7) 영과 혼의 일곱번째 차이점은 구원의 여정입니다.

      의 구원은 믿음의 시작이지만,

      의 구원에는 믿음의 시작 믿음의 결국(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시작」과 「결국」에 대해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우리 믿음의 「시작」과 「결국」이

      우리 영과 혼의 구원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설명해주는 대표적 성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B. 믿음의 결국(끝)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요한복음 3:5~7, ⓑ 베드로전서 1:9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거듭남입니다.

      위의 A 성구는 우리 믿음의 시작인 거듭남(다시 태어남)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영의 구원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러한 거듭남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거듭남에 대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걸 말합니까?"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체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이 성령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의 시작영의 구원이 핵심이며,

      이 영의 구원은 불변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믿음이 시작되는 시점에​

      우리 혼과 몸의 구원도 함께 시작됩니다.

      겔36:26을 보면 우리 속에 새(거듭난) 영을 주실 때

      새 마음(혼)도 같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시작될 때

      영의 구원과 동시에 혼의 구원도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전6:19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거듭난 자들은 영과 혼뿐 아니라

      몸도 구원받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의 구원과 함께 시작된

      혼과 몸의 구원이 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때는

      우리 믿음의 결국(τέλος, 끝) 시점입니다.

      위의 B성구에서 말하는 믿음의 「결국(끝)」이란 시점은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이 마무리 되는 때,

      곧 이생의 삶이 끝나는 시점을 말하며

      이때 우리 혼의 구원최종적으로 확정됩니다.


      정리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믿음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고

      믿음의 시작에 우리의 영, 혼, 몸이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 시점에

      영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었고

      혼과 몸은 구원을 받았지만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혼과 몸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때

      바로 믿음의 결국(끝) 시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끝)은 곧 혼의 구원이라 말씀하셨고(B)

      온갖 환난 중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24:13, 눅21:19).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

      "구원을 받았다, 얻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구원을 이루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이미 받은 구원받을 구원,

      이렇게 두 종류의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A.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B.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C.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엡2:8, ⓑ 빌2:12, ⓒ 벧전2:2

      이제까지 설명한 영, 혼, 몸의 구원의 여정을 잘 이해했다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받을 구원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받은 구원이란

      믿음의 시작 시점에 우리 영, 혼, 몸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고

      받을 구원이란

      믿음의 결국(끝) 시점에 혼과 몸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믿음의 결국(끝) 시점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자와

      영은 구원받았지만 혼과 몸의 구원을 잃어버린 자가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이르기까지

      영, 혼, 몸 각각이

      어떠한 여정을 거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금 돌아가는 것 같지만)

      영계(영적인 세계)의 구조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은 영계의 구조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림5_ 영계와 물질계의 구조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계는 크게 하늘과 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그런데 여기서 하늘과 땅을 좁게 보면

      지구(땅)와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우주(하늘)로 볼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물질계(우주) 전부를,

      하늘영계(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굳이 창조된 순서를 따지자면

      영계가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에 물질계가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 욥기서 말씀에 잘 나와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천사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인간의 영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욥기 38:4,7

      하나님께서 우주(물질계)를 창조하시던 첫날에

      이미 영적인 존재들인 천사와 인간의 영들이 있어

      물질계의 창조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을 보면

      물질계가 창조되기 전에 영계가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영계)과 땅(물질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얼마 후에 영계(하늘)에 큰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 중에

      상당한 지위와 실력을 가진 한 천사가 있었는데

      이 천사는 아침의 아들 "헬렐"이라 불리는 천사였습니다(사14:12).

      헬렐은 '빛나는 자'라는 뜻으로

      한글성경에서는 이 헬렐을 '계명성'으로 번역했습니다.

      라틴어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루시퍼'로 번역되었지요.

      (어떤 이들은 루시퍼의 타락 전 이름이 루시엘이고 타락해서 루시퍼가 되었다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고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전 이름이 라틴어식으로 루시퍼이고 타락 후 이름이 사탄입니다.)

      성경에는 특정 천사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며

      오직 가브리엘, 미가엘, 헬렐, 이 셋의 이름만 나옵니다.

      (그룹 천사나 스랍 천사는 천사의 종류이지 천사 개인의 이름은 아닙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천사로서

      다니엘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이며

      미가엘은 천사들의 군대장관을 맡고 있는 천사입니다.

      헬렐은 이들과 함께 성경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상당한 급이 있는 네임드 천사였던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데(요일1:5, 계22:5)

      헬렐이라는 이름의 뜻이 '빛나는 자'이니

      얼마나 이 헬렐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운 천사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헬렐은 '하나님과 비기리라'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결국 자신을 따르던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해 반역을 일으키고 타락해버렸습니다.

      A. 너 아침의 아들 헬렐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무저갱)에 빠치우리로다.

      B. 한 큰 붉은 이 있어, 머리가 7이요 뿔이 10이라...

      그 꼬리가 하늘 별 1/3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 이사야 14:12~15, ⓑ 요한계시록 12:3~4

      * 개역한글성경에 '계명성'으로 번역된 것은 원어성경대로 '헬렐'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위의 A성구는 헬렐이 하나님을 반역했던 사건에 대한 말씀이며

      B성구는 헬렐(큰 붉은 용)이 혼자서만 하나님을 대적한 게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별) 중 자신을 따르던 천사들을 규합해서

      단체로 반역을 일으켰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늘에 있던 수많은 천사들 중

      헬렐을 따르던 천사가 3분의 1이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했던 헬렐은

      타락 이후 더 이상 '헬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그 이름,

      바로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탄과 그 졸개들은 자신들의 반역으로 그치지 않고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켜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가운데 빠뜨리게 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는 새로운 공간이 창조될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을 징벌할 공간,

      또 범죄한 인간들의 사망 이후

      그들의 영혼을 징벌할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

      나를 떠나 마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영계의 영역은

      바로 "음부"라고 불리는 공간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음부를 기존의 하늘(영계)과 땅(물질계)과 구별하기 위해

      "땅 아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음 성구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A. 하늘에 있는 자들과 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B. 하늘 위에나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 빌립보서 2:10, ⓑ 요한계시록 5:3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크게 로 나누면 영계물질계(우주)로 나눌 수 있고

      으로 나누면 하늘(영계1)과 (물질계)과 땅 아래(영계2)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림6_ 영계와 물질계의 간략한 구조

      그렇다면 영계는 "하늘"과 "땅 아래(음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 구역에 대한 세부구조를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성경을 보면 여러 종류의 하늘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B.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 왕상8:27, 대하2:6, 6:18 ⓑ 느혜미야 9:6

      그러면 하늘에는 총 몇 종류의 하늘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다음 체험담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 12:2,4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14년 전에

      셋째 하늘, 곧 낙원을 다녀온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 낙원은 어떤 곳인지,

      셋째 하늘 위에 혹시 그 이상의 하늘이 또 있진 않은지,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좌우편에 못박혔던 강도들 중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따라서 이 낙원, 곧 셋째 하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승리하시고 올리우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바로 그 하늘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마가복음 16:19

      즉 셋째 하늘인 낙원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이요

      그 우편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하늘입니다.

      천군천사들이 그 앞에 모여 시립하며

      하늘의 어전회의가 열리는 곳입니다.

      욥기 1장,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전회의가 열리는 곳,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가 있는 하늘도

      바로 이곳, 셋째 하늘(낙원)입니다.

      이처럼 지존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 셋째 하늘(낙원)이니

      당연히 이 이상의 하늘이 없음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에는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무엇일까요?

      일단 셋째 하늘이 가장 높은 차원의 하늘이니까

      첫째 하늘은 가장 낮은 차원의 하늘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바로 우리가 늘 접하고 보는 물질계의 하늘,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과 우주 공간을 첫째 하늘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하늘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상당히 흥미로운 공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A.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B.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C. 그 때에 너희가... 공중 군대의 지배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엡6:12, ⓑ 계12:9, ⓒ 엡2:2

      * C 성구는 원어성경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살리기 위해 개역한글성경과 조금 다른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이 공간은 때로는 하늘(A)이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땅(B)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표현으로

      때로는 공중(C)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둘째 하늘이

      물질계(땅)와 겹쳐있는 영계(하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둘째 하늘의 명칭은 하늘, 땅, 공중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지만

      위의 3성구를 종합해보면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근거지로 삼고 상주하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에 사탄과 그 군대들만 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들의 적극적인 활동 무대이기도 한 공간입니다.

      이러한 둘째 하늘의 모습은 다음 말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A. 바사(페르시아) 왕국의 군주가 21일 동안 나(가브리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마귀)군대장관들과 함께 (대치하며)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천사)군대장관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왔노라

      B.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단10:13~14, ⓑ 왕하6:17

      * A 성구는 좀더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자 개역개정판의 "왕들, 군주"를 "군대장관"으로 번역했습니다.

      위의 A 성구는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시작한 첫날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응답을 주시고자 가브리엘을 보냈지만

      가브리엘이 바사(페르시아) 지역을 담당하던 사탄 군대들의 저항에 막혀

      21일 동안이나 다니엘에게 가지 못하고 지체하게 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미가엘과 그 군대를 원군으로 보내 도우신 덕분에

      가브리엘은 21일만에 사탄 군대의 저지선을 뚫고

      다니엘에게 와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마귀군대가 가브리엘 천사와 싸웠던 21일간의 전투도

      지원군으로 미가엘 천사군대가 도착해서 악령들의 군대를 제압한 전투도

      모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이러한 전투들이 벌어진 영적 세계가 바로 "공중"이라 불리는 둘째 하늘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탄의 군대들이 근거지로 삼고 상주하는 곳이

      이 둘째 하늘(공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A 성구를 통해서 둘째 하늘의 특징을 한 가지 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둘째 하늘이란 영적 공간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물질계와 겹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둘째 하늘(공중)에 상주하는 사탄의 군대들이

      지구(물질계)의 지역별로 담당 구역이 나뉘어 있다는 걸 통해 알 수 있습니다.

      A 성구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만 나오지만

      몇 절 뒤(단10:20)를 보면 헬라 제국을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들도 등장합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지구(물질계)의 지역별로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들이 있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은 오래 전 제국들이라 실감이 잘 안날지도 모르니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현재도 사탄의 군대들이 한국 주둔군, 일본 주둔군, 미국 주둔군, 독일 주둔군...

      이런 식으로 체계를 갖추어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여러분 주위의 공간에는

      한국 사탄군에 소속된 악령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혹시 그 중 몇마리가 오늘 여러분 속에 이미 들락날락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둘째 하늘(공중)이란 공간은 물질계와 동떨어져서 멀리 있는 영계가 아니라

      물질계와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겹쳐있는 공간입니다.

      다만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물질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겹쳐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B성구는 둘째 하늘(공중)이 단순히 사탄과 그 군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천군천사들의 적극적인 활동 무대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엘리사 선지자 당시 아람 나라의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하였는데

      그때마다 엘리사가 적절히 조언을 한 덕분에 아람 나라는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아람 나라가 엘리사를 잡고자

      엘리사가 머물던 성에 군대를 보내어 포위하니

      엘리사의 사환이 이를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듣고 사환의 눈을 열어

      물질계와 겹쳐있지만 평소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둘째 하늘을 보여줍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탄 천사들이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둘째 하늘(공중)이라는 공간은

      물질계인 땅과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에

      땅으로 불리기도 하며(계12:9),

      사탄과 그 군대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천사들이 활발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둘째 하늘에서는 A성구에 나타난 것처럼

      사탄과 악령들, 천사들과 인간의 영들 사이에

      매일 치열한 영적 전투와 성령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다음 그림이 왜 이렇게 구성되는지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땅과 파란 점선으로 표시된 하늘이

      왜 둘째 하늘(공중) 부분에서 겹치는지요.

      그림5_ 영계와 물질계의 구조

      그럼 이제 성경에서 종종 "땅 아래"로 표현되는

      음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부는 다음 3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옥 / 불못 / 무저갱

      먼저 각각의 영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옥]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영"이

      이생의 삶이 끝날 때 들어가는 곳입니다.

      [불못]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혼"과

      불신자의 "혼"이 가는 곳입니다.

      [무저갱]은 인간이 가는 곳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악령들이 갇히는 곳입니다.

      모든 악령들이 다 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에게조차 하나님께서 넘으면 안되는 선을 정해주셨는데

      그 선을 넘어버린 악령들을 가두고 처벌하는 곳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성경 근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A. 저(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B.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C.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 벧전3:19~20, ⓑ 눅16:22~24, ⓒ 눅8:30~31

      [옥]

      앞에서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자라도

      영만큼은 구원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신자가 죽을 때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성도의 영이

      낙원이 아닌 음부에 들어간다는 점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간통했던 고린도 교인에 대해

      "육신은 멸하고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

      하신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실패한 신자의 영은 육신의 죽음 이후 곧바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실패한 신자의 영이 대기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그 곳이 음부 중에 이라는 구역입니다.

      위의 A 성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영으로 음부의 구역 중 하나인 "옥"에 내려가셔서

      실패한 신자들의 영에게 복음 전하셨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옥"은 비록 실패한 신자라 하더라도

      그 영이 불못에서 고통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느껴지는공간입니다.

      실패한 신자들의 영은 죽음 이후 음부의 옥에 머무르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옥에서 나와 천국(새 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신자

      육신의 죽음 이후 영과 혼이 바로 낙원(셋째 하늘)으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을 입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게 됩니다.

      [불못]

      B 성구는 거지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죽은 이후 음부로 끌려가

      불꽃 중에 고통을 당합니다.

      이곳은 실패한 신자들의 혼과 불신자들의 혼이

      마지막 심판 전까지 함께 고통당하는 공간으로서 바로 불못입니다.

      이 불못은 다른 말로 "사망"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에는 사망을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나누는데

      첫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 전까지

      실패한 신자와 불신자의 임시로 고통당하는 불못이며

      둘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 이후

      이들의 부활한 영원히 고통당하는 불못입니다.

      (계20:13~14)

      이 불못들이 바로 지옥입니다.

      [무저갱]

      이번에는 음부의 마지막 구역, 무저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무저갱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악령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것들이 갇혀 징계를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위의 C 성구에서 귀신들린 자 속에 들어있던 악령들이

      벌벌 떨면서 예수님께 제발 무저갱만은 들어가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군대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돼지떼 속에 들어가기를 택합니다.

      귀신(악령)들에게는 무저갱에 떨어져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가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저갱에는

      음부의 다른 구역인 옥이나 불못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옥이나 불못은 한번 들어가면

      마지막 심판인 백(white)보좌 심판 때까지 절대 나올 수 없지요.

      그러나 무저갱은 중간에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무저갱에 갇힌 악령들이 제멋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니고

      가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무저갱을 열어

      그 안에 갇힌 악령들이나 사탄을 꺼내어 세상에 풀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경우가 2번 나옵니다.

      i) 다섯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계9:1~11)

      무저갱을 열어 황충으로 비유되는 탐욕의 영들을 꺼내 온 세상에 풀어놓습니다.

      ii) 예수님이 재림하여 지상강림하실 때

      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가두어 놓셨다가

      천년왕국 끝에 사탄을 다시 꺼내어 세상에 풀어놓으십니다.

      정리하자면, 무저갱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악령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악령들을 가두는 곳이며,

      하나님께서는 가끔 필요에 의해

      무저갱에 가둬둔 악령을 꺼내어 지상에 풀어놓기도 하십니다.

      이제 영계의 구조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마쳤으니

      지금부터는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신자와 받지 못한 신자가

      각각 천국과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영,혼,몸온전한 구원을 받는 신자 여정입니다.

      그림7_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신자의 여정

      이들은 이생의 삶을 마칠 때

      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낙원(셋째 하늘)으로 들어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후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이들의 혼과 영은 신령한 몸을 입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게 됩니다.

      이를 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칭합니다(계20:4~6).

      이들 중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에는

      위 그림에서 몸의 죽음과 분리 과정이 생략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바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받고 재림하신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A.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순식간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B.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고전 15:51~52, ⓑ 살전 4:13~17

      이후 이들은

      신자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마25:31~46)

      양으로 분류되고

      예수님의 재림 이후 이 땅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하게 됩니다. (계20:4)

      이 천년왕국이 끝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불에 풀어져 사라지고

      성도들은 주와 함께 영원한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각자 기업을 받아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죽음이나 질병, 아픔, 눈물, 미움이 없는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랑과 감사와 찬송으로 살게 됩니다.

      ◆ 다음으로 영혼몸 온전한 구원 실패한 신자 여정을 보겠습니다.

      그림8_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여정

      이들은 이생의 삶을 마칠 때 영, 혼, 몸이 각기 분리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음부 불못으로,

      음부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염소로 판정되어

      이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 재림 이후 지상에 이루어지는 천년왕국 기간 동안

      이들의 혼과 영은 계속 음부의 불못과 옥에 머무릅니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불에 풀어져 사라지고

      "흰 보좌 심판"이 벌어지는데

      이들은 이때가 되서야 영원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계20:11~15)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재림 때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었다면

      천년왕국 이후에 있는 "흰 보좌 심판"은 불신자들과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들이 대상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심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먼저이고

      불신자낙오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흰 보좌 심판"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베드로전서 4:17~18

      심판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님의 집, 곧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 먼저이고

      복음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 나중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자가 바로 신자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심판"이고,

      후자가 바로 "흰 보좌 심판"입니다.

      이 "흰 보좌 심판"에 참예하는 자들의 부활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 받은 자들의 첫째 부활 이후 천년 뒤에 이루어지므로

      둘째 부활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하여 입은 몸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수 있는 내구도를 갖춘 몸이지만

      첫째 부활한 성도들의 몸처럼 영광스러운 생명의 몸은 아닙니다.

      지옥의 불못, 즉 둘째 사망 아래 영원히 고통받을 몸과 혼이기 때문에

      이 흰 보좌 심판에 참예하는 자들은

      비록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이라고 불립니다(계20:12).

      이 둘째 부활의 모습이 계20:13에 디테일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다음 3군데에서 각각 죽은 자를 내어놓습니다.

      [ 바다사망음부 ]

      ① 여기서 바다는 지구의 물로 된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심판의 불에 완전히 녹아지고 풀어져 생긴(벧후3:10~12, 계20:11)

      원소의 바다입니다.

      즉 "물질계"라 할 수 있지요.

      이 원소의 바다에서 죽은 자을 구성하여 내놓습니다.

      ② 그리고 사망이란 음부의 불못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절(계20:14)을 보면 사망은 불못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음부의 불못에서 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죽은 자들의을 내어놓습니다.

      ③ 마지막으로 죽은 자를 내어놓는 음부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음부의 불못은 이미 나왔고

      음부의 무저갱은 악령들만 있는 곳이니

      당연히 음부의 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예, 마지막으로 음부의 옥에서 죽은 자들의을 내어놓습니다.

      이렇게 이들의 영, 혼, 몸은 각각 음부, 사망, 바다에서 나와

      다시금 하나가 되어 "흰 보좌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이게 바로 둘째 부활입니다.

      흰 보좌 심판에서는 두 종류의 책이 이용됩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한 종류는 행위책들입니다. (계20:12)

      생명책은 한 권으로서

      이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자들은 다 지옥불에 던지웁니다. (계20:15)

      그리고 흰 보좌 심판에 선 자들 중 이 생명책에 기록된 영들은

      이 때 구원을 얻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만

      이들의 몸과 혼은 분리되어 지옥불에 던지우게 됩니다.

      행위책은 여러 권입니다.

      여러 권인 이유는 지옥불에 던지우는 모든 사람마다

      각자에게 해당하는 행위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마다 당할 지옥불 고통의 강도는

      이 행위책에 기록되어 있는 죄들의 양과 죄질에 따라 결정됩니다. (계20:12)

      그렇다면 영만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

      그 영이 천국(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후의 삶은 어떨까요?

      계시록 21~22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예루살렘 성이 있는데

      천국은 크게 이 새 예루살렘 성 안과 성 바깥으로 나누어집니다.

      성 안에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곧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21:25~27)

      그리고 계22:15에 '개, 술객, 행음자, 살인자, 우상숭배자, 거짓말쟁이'로 표현된

      영만 구원받은 자들은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바깥에 거주하게 됩니다.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성안과 성밖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계21:25~27)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고 성 안에 거주하는 이들은

      크든 작든 다 상급을 받습니다.

      심지어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 하셨으니 (마10:42)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마 상급을 받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영만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없습니다.

      가끔 혼동하는 분들이 많은데

      구원과 상급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상급은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얻을 기업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똑같이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각자가 받는 상급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급을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서로 차이 나듯이,

      그리고 별들도 서로 그 영광의 차이가 있듯이

      부활한 자의 영광도 서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벧전1:7, 고전15:40~41)

      따라서 천국에서 어떤 이는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가진 자가 있는 반면

      어떤 이는 반딧불이와 같이 미미한 별빛과 같은 영광을 가진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만 간신히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온 자들은

      아예 그 어떠한 영광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설명하듯이

      상급으로서의 영광은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영만 구원얻은 자들의 부활한 몸은 지옥에서 불타고 있으니

      이들에겐 어떠한 영광도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몸과 혼도 없이 영만 달랑 있으니

      영광은 커녕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은 부끄러움과 후회만 있을 뿐입니다.

      (계3:18, 계16:15, 고전3:15)

      또한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에서는

      상급을 "다스리는 권세"로 표현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주인이 종 열을 불러 한 사람 당 한 므나씩 나눠줍니다.

      주인은 먼 나라에 가서 왕위를 받아온 뒤에

      종들을 불러 각자 장사하여 남긴 므나를 계산합니다.

      이 때 다음 세 종류의 종이 있었습니다.

      ① 한 므나로 10 므나를 남긴 종

      ② 한 므나로 5 므나를 남긴 종

      ③ 한 므나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종

      여기에서 ①, ②번 종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성도이고

      ③번 종은 영만 간신히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판결은

      영만 간신히 구원받은 자 ③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주지 않고

      오히려 있는 것마저 빼앗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 ①, ②에게는 상급을 주되

      차등을 두어 지급합니다.

      10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10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똑같은 자본을 가지고 5 므나 남긴 종에게는 5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 첫째, 온전한 구원을 얻은 성도가 천국에서 받는 상급(기업)에는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며

      이 왕의 권세는 사람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다.

      ▶ 두번째, 영만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없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다 상급이 있다고 하셨는데 (마10:42)

      영만 구원 받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한때 믿음으로 살며 주님 나라 위해 헌신했던 자들이 받을 상은 어떻게 되는지?

      실제로 사울 왕 같은 경우 나중에 타락하긴 했지만

      초반에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헌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 같은 경우도 성경을 3권이나 기록했으며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으나

      후에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져 배도의 길로 간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현재 우리 시대를 둘러봐도

      초창기에는 성령의 사람으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며 주를 위해 뜨겁게 충성했지만

      후에 타락하여 음행과 물욕, 권력욕에 빠지거나 배도의 길로 간

      무수한 신앙선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훗날에 타락했을지라도

      한때 주님 나라와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공로에 대한 상급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에스겔서에 나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24

      예, 그렇습니다.

      훗날에 타락하여 믿음의 길에서 떠난다면

      이전에 그가 주를 위해 했던 어떠한 헌신도 기억되지 못합니다.

      영만 간신히 구원받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과거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어떠한 상급도 없습니다.

      그건 그냥 모두 잊혀지고 그에게는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혼과 몸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지요.

      이건 솔로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을 3권이나 썼다고 해서 봐주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면

      솔로몬은 그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정상참작 없이

      그의 혼과 몸은 영원히 지옥불 가운데 고통당할 뿐입니다.

      따라서 냉수 한잔의 수고에도 상급이 있다는 마태복음 말씀은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 믿음 가운데 거하여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의 지극히 작은 수고까지도

      절대 잊지 않으시고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위의 에스겔 18:24 말씀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지만

      반대로 이 성구의 바로 앞에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에스겔 18:21~22

      내가 과거에 어떤 더러운 죄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 가운데 들어온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면

      과거의 모든 추악하고 더러운 죄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인생의 흑역사들,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그 나라에서 하나도 기억되지 않으며

      나를 조금도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A.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B.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 히브리서 8:12, ⓑ 시편 103:12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에 놓인 길은 "All or None"입니다.

      모든 것을 얻든지, 모든 것을 잃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혼과 몸도 지옥가고 어떠한 상급이나 정상참작도 없이 영원히 고통 당하든지,

      아니면 모든 죄와 허물이 주의 피로 씻은 바 되어 기억되지 않고

      영원히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과 상급을 누리며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칭찬은 단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만 당하는 부활을 하든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오직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부활을 하든지 (벧후3:14)

      둘 중 하나입니다.

      계시록의 여러 교회들처럼 칭찬과 책망을 겸하여 받는 것은

      이 땅에서 아직 이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직 돌이킬 수 있는 희망이 있고,

      또 믿음을 잃고 타락할 가능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칭찬과 책망을 겸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생의 삶이 끝나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후에는

      오직 칭찬만 받느냐, 오직 책망만 받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의 인생은 다음 둘 중 하나로만 결론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안에서 발견되느냐?

      예수님의 피 밖에서 발견되느냐?"


      이제 결론입니다.

      구원을 잃어버림, 즉 구원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이나 오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반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미 지금까지 이 글에서 제시한 여러 성경 근거들이 있고

      이 외에도 구원상실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도 여러 성경 근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령 구원상실영원구원, 이 두 가지가 모순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일단은 둘 다 맞다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야 이게 왜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닌지

      성경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지요.

      여기에 영과 혼의 차이점에 대한 이해가 더해진다면

      자연스럽게 구원상실과 영원구원 사이의 모순은 해결됩니다.

      이미 성경은 뚜렷하게 영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육, 곧 몸과 혼의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러한 성경구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구원상실과 영원구원, 둘 중에 하나만 맞다는 프레임에 빠져있었고

      또 영과 혼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들 중에는

      '한번 구원 영원구원'만을 강조하는 장로교의 비중이 높습니다.

      심지어 원래 교리 상으로는 구원 상실을 강조해야 하는 감리교나 순복음교회들조차도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한번 구원 영원구원'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에게 '구원 상실'이란 개념이 익숙치 않은지라

      뒤늦게 성경을 통해 구원 상실을 깨닫고 나서도

      이를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구원 상실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교파에서는

      영원한 구원을 부정하기 위해

      은혜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택하심조차 부정하다보니

      '구원 상실' 교리까지 왜곡된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이번 결론 부분에서는

      먼저 구원상실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고

      그 후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길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구원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장 처음 나오는 반응들 중 하나가

      "그거 행위구원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는 분도 있겠지만

      혹시 이게 무슨 소리냐 싶은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행위구원'이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타종교의 구원관인데

      기독교의 구원관은 철저히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엡2:8~9).

      혹시 '믿음 반 + 행위 반'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것도 행위구원의 한 종류로서 명백한 이단입니다.

      따라서 구원상실을 행위구원으로 몰아간다는 것은

      구원상실이 잘못된 이단적 주장이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구원상실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할까요?

      바로 구원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잘못된 행위 때문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행위 때문에 구원을 잃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행위가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니 이는 행위구원이고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달리

      실제로 구원을 잃는 이유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듯이 믿음을 떠났으니 구원을 잃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상실이 행위구원이라는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착각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받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믿음을 떠나 구원을 잃는 과정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 상실 자체가 은혜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구원을 잃는다는 건 정말 최악의 일이지요.

      다만 행위로 따지자면 진작에 구원 잃고 지옥에 떨어짐이 마땅한 자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오래 참으심 가운데

      기다려 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니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 또 구원 상실에 대한 흔한 착각 중의 하나가

      구원 상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택하심도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버리심 또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성경에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다고 한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 하는 많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택하심의 주권만 인정하고 버리심의 주권은 철저히 부정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인간의 얄팍한 논리를 따라

      체리 피킹하듯이, 부페에서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쏙쏙 골라오듯이

      버리심의 주권에 대한 말씀에는 눈을 흐리게 뜨고

      택하심의 주권만 인정하는 반쪽짜리 주권을 붙들고 있으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니

      정말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버리심조차 우리의 행위로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버리심에 대해 착각하기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고 의를 행하면 다시 구원을 회복했다가

      또 죄 지으면 구원을 잃었다가 의롭게 살면 회복했다가

      또 구원을 잃었다가 회복했다가... 함이 평생 반복되는 것이냐?' 묻습니다.

      이는 버리심의 기준과 시기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그때 그때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벌어진 오해입니다.

      또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잘 몰라서 하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단번에 구원받았듯이 이후의 버리심도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버렸다 건졌다 버렸다 건졌다...'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 하지 않습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계속해서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브리서 10:26~27

      * 원어 성경의 현재분사 시제의 의미가 보다 잘 반영되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이는 버리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번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다시 돌이킬 길이 없고

      오직 심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버리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베드로후서 3:15

      하나님의 버리심은 결코 가볍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단번의 버리심이기 때문에

      정말로 오랜 기다림과 참으심 뒤에 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사랑과 긍휼로 때론 꾸짖으시고 때로는 달래주시며

      때로는 징계하시고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주심 가운데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버리심이 우리 행위에 달려있다면

      끝까지 버림받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행위를 보면 버림받아도 진작에 수도 없이 버림받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오래 참으시며 버리지 않고 붙잡아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로 정하신 때까지 끝내 돌이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버리시고 이를 다시 뒤집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버리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혼과 몸의 구원을 잃지 않고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원상실을 깨달은 분들 중에 자신은 행위구원이 아니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위구원자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구원의 은혜와 감격은 다 메말라버리고

      자기 힘과 노력으로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치다 점점 지쳐갑니다.

      이들은 보통 이렇게 믿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믿음은 행위로써 증명되어진다."

      이 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입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처럼

      믿음행위로써 보여질 수는 있지만

      행위로써 증명되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게 그거 아니냐? 말장난 하는 거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믿음은 행위로써) '보여진다'와 '증명된다'의 차이가

      결국 추구하는 방향을 다르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위로써 증명될 수 없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입니다.

      이들은 평생 수많은 종교적 행위들을 했고

      심지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너희는 왜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행위 없음을 비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믿음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인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들이 자기 의와 자기 열심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정말 믿음으로 주님 은혜에 감격되어 나오는 행위인지

      그 행위들만으로는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이걸 이해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행위보다는

      그 행위를 하게 만드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행위로써 믿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처럼 믿음은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땅속에서 씨앗이 밑으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줄기를 뻗는 모습이

      땅밖으로 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듯

      때로는 내면에서 싹트고 성장하는 믿음이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도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행위는 어디까지나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해야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말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하려 애쓰며

      행위에 집착하는 자가 됩니다.

      ​그 결과 은혜에서 떨어져 점점 메말라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행위를 자신의 믿음과 동일시 하다보니

      자신이 구원을 잃을지 얻을지 여부를 따질 때에

      늘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 경우 보통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① 자신의 열심과 행위에 만족하며 이 정도면 구원 얻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하거나

      ② 구원을 얻기에 자신의 행위가 부족하지 않나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이 두 가지 상태를 냉탕과 온탕 오가듯 오락가락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여기에 은혜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종교적 열심과 행위가 많아도 은혜가 사라져버린 그에게

      과연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이 있을까요?

      믿음이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자에게 생기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7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계속 '네 행위를 안다' 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시는데

      결국 믿음은 행위로 따지는 것이 맞지 않냐?"

      그러나 계시록의 7교회 부분을 제대로 읽는다면

      오히려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나오는 에베소 교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행위들을 많이 했습니다.

      수고하며 인내하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거짓 선지자를 밝혀내고

      주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계2:2~3).

      ​*자료 출처 /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下)


       




       




























      암송 성구 자료(2024-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